4. 흰 장미의 성(1)
그날, 보리스는 여느 날과는 아주 많이 달라 보였다.
“리비, 내가 만약 멀리 떠나면 어떻게 할 거야?”
“멀리?”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보리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응, 마을을 떠나게 된다면.”
“떠나? 어디로……?”
그녀에게는 한없이 낯선 말이었다. 마을의 사람들은 이곳을 잘 떠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곳도 이곳, 죽는 곳도 이곳. 태어난 마을을 벗어나는 일은 딱 하나뿐이다.
전쟁을 위한 징집.
“전쟁에 나가는 거야?”
“…….”
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언의 긍정을 품고 있었다.
“싫어, 가지 마. 위험하잖아.”
리비는 재빨리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보리스는 아직도 이렇게나 약해 보이는데, 툭하면 눈물을 흘려 대는 바보 멍청이인데.
그런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니, 다치는 것까지도 아무 일이 아닐 수 있었다.
“죽을지도 몰라.”
전쟁에 나가 살지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장담할 수 없다. 리비는 그것이 두려웠다.
“리비, 나는 돌아올 거야.”
얼굴을 스치는 손가락은 차가웠다.
“꼭, 돌아올 거야.”
“…….”
“내가 공작이 되어 돌아오면, 그때는 나와 결혼하자.”
***
“괜찮아?”
깜빡깜빡.
“리비, 나야. 내 목소리 들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소리는 멀리서 울려 퍼졌다.
누구지, 누가 날 부르는 거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리비는 귀를 기울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 그 주인은…….
그녀는 누운 채로 부엉이처럼 눈만 굴렸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사람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무척 익숙해진 얼굴, 그의 소개대로라면 칼리니 기사단장이자 이제 막 공작이 된 보리스였다.
꿈이지, 다 꿈일 거야.
간절한 생각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과 점점 더 선명해지는 시야 때문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현실이구나.’
왕명에 따라 레제트 공작의 신부가 됐어야 할 리비 하이든은 어딘지 모를, 이곳에 있게 되었다.
“…….”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쩍, 갈라지는 소리만 들렸다. 바짝 말라 버린 입술과 입안 때문이었다.
“잠깐 기다려.”
그는 위에서 내려오더니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쪼르륵, 뭔가를 따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질감이 입술에 닿았다.
침대에 붙어 버릴 듯 늘어진 몸을 들어 올리는 손길도 느껴졌다.
금속 잔을 기울이자 물이 흘러들어 와 입안을 적셨다. 꼴깍꼴깍 받아마시던 리비의 눈에 차차 초점이 돌아왔다.
팍.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리비는 세차게 물잔을 쳐냈다. 흩뿌려진 물이 옷깃과 침대 시트를 적셨다. 뒤이어 금속 잔이 떨어져 텅, 울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오, 오지 마.”
리비는 상냥하게 물을 먹여 주던 손길을 피해 침대 끝까지 물러났다. 그녀는 발끝을 오므리고 손으로 자신의 몸을 꽉 감싸 안았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다.
“…….”
보리스는 잔을 쥐고 있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리비를 바라보았다.
제 품에서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벗어난 그녀를 보며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뚝뚝.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기이한 침묵을 깨뜨리려 그녀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려 말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무릎을 끌어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손만 떨리는 게 아니라 떨림은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왜, 왜?”
리비의 물음에도 보리스는 답이 없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에도 물이 튀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살짝 흔들어 물기를 털어 낸 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굴러간 물잔을 집어 들 뿐이었다.
“왜냐니, 리비?”
그의 목소리도 잔뜩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로 몰라?”
저벅저벅.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리비는 몸을 더욱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끼익.
보리스가 한쪽 무릎을 올리자 침대 한쪽이 꺼지며 리비의 몸도 기울어졌다. 다시 중심을 고쳐 앉은 리비가 바르작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말라니까.”
그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한 채 더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리비는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었다. 등에 닿은 침대 머리맡의 장식이 아프도록 등을 찔러 댔다.
“왜 피해?”
또다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왜, 피하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너는 내 신부가 되는 거야, 리비. 그러기로 했잖아?”
잔뜩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속삭이자 리비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까부터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리스, 내 말 들어 봐, 응?”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자그마한 그녀의 몸을 덮어 버리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리비는 그 그림자 안에 갇히다시피 한 상태로 잔뜩 숨을 죽이며 말했다.
“나, 나는 순결을 지켜야 돼.”
헐떡이는 숨 사이로 쏟아 내는 말은 절박했다.
자신을 향해 번득이는 미친놈의 눈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애원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자.”
힘겹게 새어 나온 목소리로, 그녀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제발.”
눈물이 속절없이 솟아올랐다. 방금 마신 물이 죄다 눈물샘으로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겨우 축인 입안이 다시 말라 갔다.
“…….”
온통 눈물로 범벅된 그녀와는 달리, 보리스는 오래된 유적에서 발굴된 석상처럼 메말라 보였다.
“응?”
울음 섞인 물음에도 남자는 답이 없었다.
“보리스…….”
“…….”
“나 좀 보내 줘.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돼.”
“왜?”
지그시 내려다보며 묻는 질문에 리비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버지. 아버지가 기사들에게 잡혀 있어.”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잡힌 이후,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혹시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납치되어서 혹시 홧김에라도…….
“기사들은 내가 모조리 잡아 왔어. 아버님은 안전하셔.”
“…….”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리비는 순간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안전……하시다고?”
“응. 티소 마을에 남아 있는 내 기사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백작님은 안전하셔. 리오, 에드나까지.”
쌍둥이들의 이름까지 입에 오르자 리비는 생경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로지 탈출만을 생각했는데, 보리스는 지금 그녀가 걱정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안심하라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안심해, 리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지금 안전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수행 기사들을 모조리 잡아 왔으니 지금 당장은 소식이 알려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레제트 공작은 언젠가는 리비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
레제트 공작은 흉포한 성정을 지녔다고 했다. 그가 협정의 대가로 얻어 낸 신부가 다른 남자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게, 보리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내가 제때 레제트 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그들이 쳐들어올 테고…….”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칼리니 기사단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그들이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단과 겨룰 경우의 승패는 정확히 예견할 수 없었다.
성난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게 되면…….
그처럼 작은 마을 따위,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만들어 놓을 수 있겠지.
“안 돼, 보리스.”
눈앞에 그린 듯 펼쳐지는 상상에 리비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나, 나를 돌려보내 줘. 나를 공작에게 보내.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애원이 이어졌으나 야속하게도 그에게선 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공작에게 가고 싶어해?”
그는 진심으로 의아한 눈빛이었다.
“설마 공작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의아한 기운을 품고 있던 눈은 어느새 살짝 맛이 간 듯, 정체 모를 열기를 품고 있었다. 내면을 뚫어볼 듯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주시하고 있었다.
“사랑……하다니.”
리비는 순간 숨이 콱 막혔다. 사랑? 그런 감정은 자신에게 사치나 마찬가지였다.
“보리스, 귀족의 결혼에는 그런 감정 따위 들어가 있지 않아. 서로 주고받을 것을 확실히 한 관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지.”
목소리는 놀랍도록 냉정했다.
“네가 아무리 공훈을 세웠대도, 왕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
결국 리비는 애원 대신 협박조로 돌아섰다.
“내 순결은, 혼수품이야.”
잔뜩 표정을 굳힌 채 말했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그러니 나는 순결을 유지해야 해. 그런데 네가 날 납치했다는 걸 알면…… 의심받을 거야. 나 죽어. 나 죽는 거 싫지, 그렇지, 보리스?”
마법에 걸려 그대로 석상이 된 것 같던 보리스가 그 소리에 반응한 듯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네 혼수품?”
가늘게 떠진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다시 말해 봐.”
“내 순결은 내 남편이 가져야 할 혼수품이라고. 네가 지금 이러는 건 내 순결을 의심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밖에 안 돼. 그러니까 더, 더 늦기 전에…….”
리비는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레제트 공작은 그녀의 육체적 순결에 미치도록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늦기 전에?”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귀에 꿀처럼 스며들었다. 리비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응, 나, 나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 돼. 반드시 순결한 상태로, 혼인 서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끼이,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그 섬뜩한 느낌에 리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에 심상치 않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보리스는 네 발로 기듯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사냥감을 놀리는 맹수처럼. 그리고 리비는 커다란 몸이 다가올수록 거의 쪼그라들다시피 몸을 웅크렸다.
그래 봤자 그의 그림자 안에 먹히듯 잠겨 버렸지만.
“뭐라고 적혀 있는데?”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고.”
그의 눈에 일순 광휘가 돌았다.
“그렇지 않으면?”
“죽, 죽음으로 갚아야…….”
순간 축축하고 물컹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리비는 그대로 숨을 멈춘 채 굳어 버렸다.
“흐읍.”
축축하고 두꺼운 혀가 달달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맹수가 이제 막 잡은 짐승을 먹기 직전 맛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혹은 사탕을 빠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리비는 선뜻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어느 쪽이든 맹목적인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 달라는 듯 슬쩍슬쩍 건드리는 몸짓에 리비는 더욱 꽉 입술을 오므렸다.
“…….”
그걸 본 보리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꼭 다문 채 있던 리비는 슬슬 숨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탓이었다.
보리스는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리비는 결국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읏!”
때를 놓치지 않고 리비를 낚아챈 보리스는 잠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안을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아…… 으, 읏.”
도리질을 해보았지만 커다란 손에 얼굴이 잡혀 움직이지 않았다. 목 뒤를 콱 움켜쥔 손은 흡사 맹수에 물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으……으.”
리비는 신음을 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그럴수록 그녀를 잡아챈 손길도, 따라붙는 입술의 집요함도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애초에 그 힘은 자신이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비는 닥치는 대로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를, 가슴팍을 마구 때렸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샅샅이 훑고, 빨아들이는 혀 놀림에 점차 지쳐 갈 즈음이었다.
보리스는 서서히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잘근거리다가 놔주었다.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 리비.”
그녀는 코앞에서 속삭이는 남자의 보랏빛 눈을 보며 움찔거렸다. 어깨를 그러쥔 그는 그대로 그것을 내리눌렀다. 부드럽지만 강한 악력에 리비는 스르르, 도로 눕혀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는 두지 않아, 절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에는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분명히 미친 자의 눈이었다.
“그런 미친 조건을 내건 놈에게 널 보낼 생각은 없어.”
“나는 가야 돼, 보리스.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된다고.”
통하지 않는 말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계속 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여기서 나와 살면 되잖아, 너는 내 신부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응? 나는 결혼한 몸이야, 봐. 이 반지도…….”
리비는 반지 낀 손가락을 들어 보여 주었다. 끼워 주는 사람 없이 혼자 약지에 끼워 넣은 반지는 꽤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거의 손가락 한 마디에 이를 정도로 폭이 넓은 순금 링 위에 생선 눈알만 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혼인의 증표야. 이걸 낀 이상, 나는 그분의 아내야.”
“아내?”
그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그러더니 자신에게로 뻗은 손을 잡고서.
“악!”
주저 없이 손가락을 삼켜 버렸다.
“이, 아, 윽!”
물컹거리는 혀의 감촉에 리비는 기를 쓰고 손을 빼내려 했지만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어림도 없었다. 그러다 손을 놔주었을 때,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반지…….”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우물거리는 입술이 반지를 토해 냈다.
“이거 찾아?”
들어 올린 반지를 향해 리비가 손을 뻗자 그는 휙 반지 쥔 손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그대로 열린 창문을 향해 내던졌다.
“안 돼!”
쨍, 창틀에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남긴 반지는 그대로 창문을 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일어나려는 몸을 그가 콱, 눌러 놓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녀는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왕국 내의 모든 상인들을 불러다가, 가장 솜씨 좋은 세공사를 불러다가, 네 반지를 만들게 할게.”
이제는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가락을 그는 다시 한번 길게 훑어 내렸다.
“그러니 어디 간다는 말은 하지 마.”
위험스레 반짝이는 눈을 보며 그녀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응?”
“……알았어.”
재차 묻는 말에 그녀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몸에 잔뜩 주고 있던 힘도 풀었다.
유순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보리스.”
“응?”
“무거워.”
“아…….”
이제야 깨달은 듯 그는 순순히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주었다.
“침대가 너무 좁아. 넌 내려가 있어.”
“알았어.”
그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바닥으로 내려가 앉았다. 그리고 오래된 충견처럼 턱을 걸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하고 맑아진 눈빛에 하마터면 손을 뻗어 쓱쓱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그리고 그걸 보던 그녀는 그대로 우다다 창가로 달려가더니 턱,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가오지 마.”
단호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두 번째로 놓쳐 버린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럼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창틀에 걸쳐 놓은 발이 덜덜 떨렸다. 그 떨림은 곧 전신으로 번져 갔다. 그 떨림은 보리스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리비, 그러지 마.”
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너야말로 이러지 마.”
휘잉, 불어온 바람에 몸이 와들와들 떨리면서도 그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건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창밖을 내다볼 용기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의 힘으로 유추해 볼 때 라푼젤을 가둬도 될 만큼 높은 곳인 건 알겠다.
“무섭잖아, 내려와.”
“네가 더 무서워.”
“…….”
또, 상처 입은 얼굴이다.
“내려와. 내려와서 얘기해. 그러다가 떨어지면 아플 거야.”
“…….”
리비는 슬그머니 눈을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유해를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잠깐 내려다보았음에도 현기증이 일어 리비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보내 준다고 약속해.”
“……먼저 내려오면.”
“진짜?”
끄덕끄덕, 말없이 그는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음울한 보라색 눈동자가 창틀에 걸친 다리를 훑었다.
치마 아래로 하얗게 드러난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 가냘팠다. 잠시 그를 살피던 리비는 다시 다리를 거두어 올렸다.
“못 믿어.”
“떨어지면 아프잖아. 아픈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면서.”
그 말에 리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너야.”
거의 속삭이듯 말했지만 그에게는 똑똑히 들린 듯했다.
“내가…… 싫어?”
그는 크게 눈을 깜빡거렸다.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다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럼 좋겠니?”
톡 쏘아붙이자 이번에는 슬그머니 입술 안쪽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익히 알고 있던 소심한 소년의 버릇과 정확히 일치해 그녀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그랬다. 그는 보리스였다. 저렇게 몸이 커다래졌어도 그는 순간순간 그녀가 알고 있던 소년의 눈으로 그녀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남의 결혼식에 멋대로 나타나 신부를 납치했어.”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미안해.”
그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멋대로 옷을 찢어 버렸고.”
“그것도 미안해.”
“그리고 이런…… 곳엘 데려오고.”
여기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녀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대충 주변을 훑으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방 안이 눈에 들어오자 속으로 흡, 숨을 들이켰다.
화려하다. 너무도 화려하다. 이런 호화로운 방은 처음이다.
둥글게 솟아오른 천장에는 연회장에서나 볼 법한 샹들리에가 번쩍거렸고, 벽에 걸린 정교한 태피스트리와 바닥의 양탄자 등은 대충 보기에도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티가 났다.
저 비슷한 것을 행상이 들고 와서 근방에서 유일한 백작가인 자신의 집에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갔던 게 생각났다.
그 행상이 불렀던 값을 생각해 내자 지금 방 안을 꾸민 것들의 가격이 대충 매겨졌다. 순간 그녀는 ‘정말로 이게 네 거냐’고 물을 뻔한 걸 참아 냈다.
“그래, 그것도 미안…….”
“미안하면 보내 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여기가 싫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런 게 아니…… 응, 마음에 안 들어. 너도 싫고 이 방도 싫어. 다 싫어. 무조건 싫어.”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싫어’만을 반복했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그가 알아들을 것 같아서였다.
예배당에서 그를 만나 이곳으로 오기까지 시도했던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추론해 보건대, 그와는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알았어, 그러니 내려와.”
그의 눈은 달달 떨리는 리비의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 짓 안 해. 내려와. 제발.”
제발, 그는 당장 눈물을 떨굴 듯한 눈으로 애원했다. 그 모습이 또다시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내가 잘못했어, 리비.”
그녀는 급하게 눈을 깜빡거려 잔상을 지워 냈다. 갑작스러운 기억의 호출에 머리가 다 띵해졌다.
“……어?”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까마득한 바닥이 내려다보이면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힘이 풀린 몸이 중심을 잃고 창밖으로 절반쯤 넘어갔나 싶을 때였다.
휙, 쓰러지던 몸이 순식간에 안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쿵쿵.
멍한 정신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만이 가득히 울렸다.
“거봐, 위험하잖아.”
그의 목소리도 함께.
분명히 꽤 거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달려온 건지 리비는 미처 보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품속이었다. 단단히 끌어안긴 몸으로 그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쿵쿵.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그녀는 차차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짓 하지 마, 응?”
한없이 달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잔잔히 귓가를 울렸다. 그녀를 잡아당겨 안으면서 자세를 바꾼 건지 리비는 안쪽에, 그는 창가에 바짝 붙어선 채였다.
게다가 몸은 거의 반쯤 창밖으로 내밀어진 상태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급하게 속삭였다.
“위험해.”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잡아끌었다. 고작 옷깃을 잡아당긴 게 할 수 있는 전부라 큰 힘은 되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리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그렇게 순순히 몸을 일으키면서도 품에 안은 여자를 놓지는 않았다. 되레 힘을 꽉 주어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 ‘우리’ 모두 안전해, 그렇지?”
보리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리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리비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렇게 숨 막히게 안기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쫙 풀려 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저릿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굳은 다리에 쥐가 돌아서 얼얼한 느낌이 돌기 시작했다.
몸은 아직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좀 전에 창밖으로 떨어질 뻔한 걸 자각하고 나자 뒤늦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얼어붙은 강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 나온 것처럼.
그의 몸은 자신과 달리 절절 끓는 용암 같았다. 그 온기를 찾아서 리비는 본능적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따뜻해.
강인한 팔뚝이 달달 떠는 몸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 팔 안에서 리비는 차차 안정을 찾아 갔다.
“쉿, 괜찮아, 리비. 이제 괜찮아.”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빨라진 심장 박동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을 안아 올렸다. 마치 새털을 들어 올리듯 가벼운 몸짓이었다.
“내, 내려 줘.”
다급하게 말했지만 당연히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깨와 무릎 뒤를 움켜쥔 손이 더욱 리비의 몸을 강하게 움켜쥘 뿐이었다.
리비는 그 힘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안도감이라니.
퍼뜩 떠오른 불쾌함에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다시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불안함의 원흉은 다름 아닌 바로 그였기에.
그런데 정작 그의 품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꼴이 우스울 뿐이다.
“…….”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가 내려다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쳐다보지 마.”
올려다보지도 않고 한 말에 한참이나 조용한 것이 이상해 쳐다보니 그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눈을 감으란 건 아니었어.”
그 소리에 슬그머니 실눈이 떠지더니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응.”
“웃지는 마.”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그녀는 덧붙이려다 관뒀다.
그의 얼굴에서 즉시 안개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이미 남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어른임에도, 그가 웃을 때마다 이상하게 어린 시절의 그가 겹쳐 보여 기분이 묘해졌다.
“아?”
그는 미소를 지운 대신 리비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발을 제대로 버둥대기도 전에 순식간에 침대 위로 뉘여졌다.
다리로 손을 가져가더니 대담하게 움켜쥐었다. 리비는 기겁하며 치맛자락을 끌어 내렸다.
“뭐, 뭐 하는…….”
“다리 힘, 풀렸잖아.”
커다란 손이 종아리를 느긋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단단히 뭉쳐 있던 근육이 적당한 손의 압박에 차차 풀리는 게 느껴졌다.
“으, 응…….”
쥐가 올라 얼얼한 발을 꽉 움켜쥐자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발을 주무르는 데에만 열중할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제 좀 괜찮아?”
“……좀.”
커다란 손이 적당한 압박을 가하며 발바닥과 발가락, 발목 뒤 근육을 차례대로 꾹꾹 눌러 댔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잘해?”
전문적으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길은 능숙했다.
“전투를 하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날 때가 종종 있거든.”
갑옷과 단단한 신발 안에서 내내 혹사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럴 땐 스스로 풀어야지.”
변변하지 않은 천막 안에서 쥐가 난 발을 붙들고 주무르는 보리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넌 기사단장이라며.”
“기사들에게 발을 주무르라고 시킬 순 없잖아.”
그는 웃으며 말하는데 리비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을 뿐이다.
조용해진 리비를 향해 보리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의 시선에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여긴 어디야?”
리비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내 성.”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그는 계속 다리를 주무르는 데에만 골몰했다. 마치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이.
“네 성?”
“응.”
또다시 돌아온 건 허탈하게도 짧은 대답뿐이었다. 제대로 된 답을 듣길 기다리느니 혼자서 열심히 추리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공작이 됐다고 했지.’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칼리니 기사단의 미친 까마귀가 바로 그였다.
그간 들린 소문에 눈물 많고, 말귀를 못 알아먹으며,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다는 전제가 생략된 게 맞다면.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눈동자는 항상 눈물 마를 날 없던 기억 속 그대로의 눈이었다.
까맣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머리칼도, 손가락에 휘감길 때의 감촉까지 생생히 되살아났다.
굳어 있던 다리에 차차 감각이 돌아오자 비로소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긴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너, 나를 일부러 여기에 데려온 거야?”
아까 내려다본 바깥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방에 둔 건…….
“일부러라니?”
빤히 올려다보는 눈길은 순진무구해 보였다. 하지만 속지 않는다, 절대로.
“내가 뛰어내리지 못하게, 일부러 높은 곳에 가둔 거잖아.”
“아니야, 여기가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라…….”
그가 대답하는 사이 리비는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 와서 퍽이나 경치 감상할 정신이 있겠다그래.”
“말했잖아, 너는 내 신부고, 여기는 너의…….”
우물우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의 말에 리비는 가슴을 팡, 쳤다.
“그만, 그만해. 네가 왜 네 신부라는 거야? 나는 결혼할 사람이 있어. 여기 있으면 안 돼. 지금쯤, 아니 한참 전에 난리가 났을 거야.”
결혼식 날 신부가 사라졌다. 왕이 명령한 결혼이자 전쟁을 종식시킬 평화의 상징이 될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미친 까마귀에게 납치됐다.
신부의 명예와 가문의 명예, 더 나아가 나라의 평화와 미래까지.
모든 게 위태로웠다. 그런데도 눈앞의 미친놈은 앵무새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야, 분명히 약속했어, 리비. 잘 생각해 봐.”
그는 간절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약속은 무슨 약속. 자꾸 헛소리만 할 거야?”
“잘 생각해 보면 기억이 날 거야.”
“글쎄, 난 그런 적 없대도.”
“리비…….”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또, 또!”
리비는 질색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보리스 역시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 침대 위로 올라와서는 무릎으로 기어 그녀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싫어, 오, 오지 마, 너.”
가까이 다가온 보리스는 지나치게 크고, 위협적이었다.
“날 피하지 마.”
턱.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가려 한 순간, 굵은 팔뚝이 꽂히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다 다른 편 팔이 내리꽂혔다. 양팔 사이, 그녀는 완벽하게 감금된 채였다.
“뭐, 뭐 하는 거야.”
반쯤 눕혀진 채 올려다본 보리스의 기세에 눌려 말이 어눌하게 튀어나왔다. 게다가 이 자세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저리 가, 가란 말…….”
“리비.”
“내 이름 부르지 마. 이 나쁜 놈, 납치범, 흉악한…….”
한창 울분에 찬 말을 쏟아붓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거 뭐야?”
목 근처와 팔꿈치 근처에서 펄럭대는 옷자락은 조금은 낯선 감각이었다.
“응?”
“내 옷, 옷이…….”
리비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충격에 빠져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다른 옷이잖아.”
홑겹에,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드레스는, 몸을 죄는 코르셋이나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는, 한마디로 잠들기 좋은 잠옷이었다.
“응, 다른 옷. 왜?”
대체 그게 왜 문제냐는 듯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옷은 너무 무겁고, 불편하잖아. 그래서 갈아입힌 거야.”
“……누가?”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다시 한번 ‘설마’라는 단어에 의존해서.
“내가.”
그는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뭐, 뭐뭐…… 뭐……?”
허공에 뜬 손가락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와 함께 동공도 마구 떨렸다.
“어디 아파?”
그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어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했다고?”
“응, 내가 직접 했어, 리비.”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른 사람 손에 널 맡길 수는 없잖아.”
툭, 손이 떨어졌다.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쳐다보는 그를 보며 리비는 그 어떤 반박의 말도 찾지 못했다.
“리비? 왜 그래?”
순식간에 멍해진 얼굴을 보며 보리스가 리비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영혼이라고는 한 줌도 남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너 봤, 다 봤…… 응?”
이번에는 그녀가 보리스를 잡아 흔들었다. 일부러 힘을 빼준 건지 연약한 손길에도 잘만 휘청거렸다. 리비가 던진 질문의 뜻을 알아챈 보리스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답했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어릴 적 호수에서 같이 멱도 감은 사이인데…….”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 다르다고!”
리비는 꽥 소리를 지르며 등 뒤에 받치고 있던 베개를 들어 냅다 얼굴에 던졌다.
퍽.
얼굴 중앙부를 강타한 베개가 툭 떨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듯 멍한 얼굴과 다시 마주하자 리비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러 댔다.
“달라, 다르단 말이야아!”
그녀는 주먹으로 침대 위를 팡팡 내리쳤다.
“진정해, 리비. 목이 다 쉬잖아.”
진심으로 걱정하는 소리에 그녀는 더 기가 막혔다.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눈도 싫었다.
다 꼴 보기 싫었다. 마구잡이로 내뻗은 손으로 그의 가슴이며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그는 벽처럼 버티고 앉아서 묵묵히 그 주먹을 다 받아 냈다.
“너, 너, 다 큰 여자의 몸을, 그것도 신부의 몸을…… 남편도 아닌 네가.”
“그래?”
보리스가 그녀의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위험하게 내려앉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리비에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골렘을 깨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그럼 네 신랑이 되면 되는 거야?”
보랏빛 눈이 짙게 물들었다.
“그거 알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어떻게 결혼하는지.”
“…….”
그는 몸을 더 가까이 붙여 왔다. 침대 끝까지 몰린 리비가 흡,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얼굴로 올라온 손이 부드럽게 떨리는 입가를 쓸었다.
“무조건 데려와. 보통은 말에서 그대로 낚아채지.”
“…….”
“그러고 와서 하룻밤을 보내.”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그러면 다음 날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거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결혼하는 곳은 많아. 마음에 드는 여자가 결혼을 한단 소식을 듣고서 결혼 바로 전날 납치해 오는 일도 아주 흔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어딘가를 쿡쿡 쑤셔 댔다. 그녀도 아는 이야기였다.
태초에 이 나라를 세운 이들은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자들이었고, 초원의 법이 짙게 남아 있었다. 점점 국가 형태를 갖춰 갈수록 금지했지만 여전히 그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건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야. 수도에서는 안 그래.”
“응, 수도에서는 안 그래.”
빤히 쳐다보는 눈을 그녀는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수도가 아니잖아?”
그의 눈은 살짝 맛이 가 있었다. 어딘가 어긋나도 단단히 어긋났다. 리비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안의 또 다른, 진정으로 미친놈과 마주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 싫어.”
리비는 진저리를 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 그런 짓 하면, 죽어 버릴 거야, 진짜로.”
꾸물꾸물 움직이던 몸은 그에 의해 간단히 제압당했다.
“그건 안 돼, 리비.”
가까이 다가온 보라색 눈동자가 리비를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리비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너무 슬플 거야.”
“…….”
“누가 뭐래도 넌 내 신부야. 내 땅에 발을 디딘 바로 그 순간부터.”
“무슨 소리야?”
그 순간부터라니. 그의 말에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심감이 묻어 있었다. ‘약탈’이 아닌, 응당 자신의 것을 되찾아 왔을 뿐이라니 자연스러운 패기가 느껴졌다.
“왕이 허락하지 않아서 걱정이 돼? 남의 신부가 될 널 빼앗은 게?”
“다, 당연하지. 이걸 왕이 알게 되면…….”
“왕이 허락한 일이야.”
“……뭐?”
“왕도 허락한 일이라고. 그거면 됐어?”
배시시 웃는 얼굴에 리비는 그만 넋이 나가 버렸다.
“왕이 허락한 일이라고?”
리비는 급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신을 레제트 공작과 결혼하라고 친히 명령을 내린 건 왕이 아니었나. 그런데 자신이 명한 결혼식에서 신부를 납치해도 된다고 허락했다고……? 심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보리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왕이 허락했어. 널 가져도 된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대도.”
왕이 치매에라도 걸리지 않은 이상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중혼을 허하다니, 이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리비, 날 못 믿는 거야?”
그의 눈은 진실한 빛을 띠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리비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리비의 솟아올랐다. 저토록 자신만만한 보리스를 보고 있자니 왕이 치매에 걸렸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점점 사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보리스, 거짓말하면 못써.”
그녀는 다시 한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밑도 끝도 없는 보리스의 확신과 왕의 명령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명확하다. 잠시 혼란이 올 뻔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난 네 신부가 될 수 없어. 분명히 폐하께선 내게 레제트 공작과의 결혼을 명하셨어. 네가 그걸 뒤집을 순 없을 거야.”
“말했잖아, ‘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너는 내 것이라고.”
또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리비는 갑갑함에 가슴을 팡팡, 내리쳐야만 했다.
“글쎄, 그럴 리 없…….”
리비는 하던 말을 끊었다. 보리스가 한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보리스, 방금 뭐라고 했어?”
“넌 내 거라고.”
그는 고저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거 말고.”
“…….”
“그 앞에.”
“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보리스는 순순히 반복해 주었다. 그리고 리비는 제 귀를 후벼 파고 싶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꽥 내지른 소리에 보리스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리비가 바로 되물었다.
“‘내’ 땅이라니?”
“그게 왜?”
이번에는 보리스가 물었다.
“왜냐니. 그 ‘내 땅’이라는 게 설마, 설마, 티소 마을…… 우리 마을을 말하는 건 아니지?”
“그 말 그대로야.”
그는 제대로 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을이…… 네 땅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왜, 어째서? 어떻게?”
“내가 달라고 했으니까.”
뒤죽박죽인 리비의 질문과 달리 그의 답은 지나치게 평온하기만 했다.
“……누구한테?”
“당연히 왕이지.”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그런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여기는 에드라크성이야.”
“이 성이 에드라크성……?”
“응.”
보리스는 또다시 태평스레 대답했다.
‘잠깐만.’
칼리니 기사단의 주인이 에드라크성에 살고 있다. 그는 손님으로 이곳에 머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성을 자신의 손아귀에 두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에드라크성의 주인이…… 너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제야 그것을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곳의 영주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 후로 내내…….”
“공석이었지. 그래서 내가 달라고 했어. 내 영지로 삼겠다고. 에드라크 영지 내에 속한 모든 마을을 포함해서.”
“…….”
“전쟁의 승리, 그에 대한 포상. 내가 요구한 건 세 가지야, 리비.”
보리스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나는 공작위, 다른 하나는 영지에 대한 지배권, 그리고 그 영지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
“…….”
보리스의 말에 리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소유권이라고 했어, 지금?”
보리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지 안에 속한 모든 것들. 곡식 한 톨, 풀 한 포기까지도 전부 내 것임을, 왕이 인정했어. 사람 역시 마찬가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보리스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사람?”
“그 조건이 발동되는 건 내가 그 영지에 발을 디딘 바로 그 순간부터야.”
“…….”
“그러니 넌 내 신부가 맞아, 리비. 넌 어디도 갈 수 없어. 다른 남자에게는 더더욱.”
“아, 아무리 너라 해도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 왕이 명한 결혼을 막아? 그건 반역이야, 보리스.”
리비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내어 그를 설득하려 했다.
“네게 마을에 대한 지배권을 줬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열심히 주장하는 리비를 보는 그의 얼굴이 점차 음산한 빛으로 물들었다.
“마을을 소유한 영주에게는 여러 권리가 있잖아?”
“그런데?”
리비는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가 가지게 됐다는 권리 중에 신부를 납치하는 것도 포함이 되던가.
“혹시 들어 봤어? 아니, 알고 있겠지.”
“뭘?”
불길한 생각이 퐁퐁 솟아오르는 걸 내리누르며 그녀가 되물었다.
“초야권.”
보리스는 해맑은 얼굴로 속삭였다.
“초야…… 뭐?”
오래전에 사문화된 법. 그러나 아예 없어진 것 또한 아니다. 여전히 어느 마을에선가는 영지에 속한, 갓 결혼하는 처녀의 초야를 영주가 대신 치른다는 악습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든의 영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고, 당연히 없을 예정이었다.
“무슨 그런…….”
손발이 차갑게 굳는 기분이었다.
“네 초야는 내 거야. 물론 초야만 갖지는 않을 거야. 넌 내 거니까. 나의 신부, 리비.”
그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왕은 허락했어. 내게 그 칙서가 있는걸.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그…… 왕이 허락한 게 언제였는데?”
“사흘 전.”
“사흘…… 사흘.”
리비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너, 수도에서 여기까지 사흘 만에 달려온 거야?”
“……딱히 달리진 않았어.”
그는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달리지 않았다니. 수도에서 여기까지 말을 달려 오려면 그 시간으론 어림도 없어.”
수도에 직접 가본 건 아니지만 먹고 자는 시간을 포함해 보름, 아무리 빠른 말을 잡아 탄다 해도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그 거리를 고작 사흘 만에?
“다 방법이 있어, 리비. 무엇보다…….”
“무엇보다?”
“네가 다른 놈과 결혼을 한다잖아.”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그러니 불가능한 건 없었어. 널 데리러 오는 데에 그런 것쯤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어.”
“보리스.”
“내 손엔 영주 임명장이 들려 있어. 그 땅의 모든 것은 내 거야. 그러니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은 왕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던가.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왕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게 그런 권한을 준 게 아니라는 걸. 그가 사흘 만에 티소 마을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라는 걸.
그리고 이 상황을 왕이 알게 된다면 대체…….
여러 생각이 뒤엉켜서 혼란했다. 문득 턱을 단단히 틀어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비의 얼굴을 들어 올린 보리스는 깊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비,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
“…….”
그의 질문에 리비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그것이야말로 리비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었다.
저 강렬한 눈동자를, 목소리를, 제게 다정히 구는 몸짓까지 이토록 생생한 그가, 거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마치 누가 일부러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보리스, 나는…… 우리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
리비는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폐하는 네가 이렇게 빨리 내게 도착할 줄 모르고, 그러고…….”
이 바보 왕 같으니.
그는 자신이 허락한 일이 이처럼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줄 미처 몰랐으리라. 평화를 위한 정략혼을 명했으면서 그 결혼을 깨뜨리는 짓을 했을 줄은.
그런데 그 감당을 온통 리비가 하게 생긴 게 문제다. 레제트 공작은 필히 복수를 하려 할 것이다. 당장 그가 한 말만 보더라도.
“너, 나에게 초야권을 행사할 거야?”
“…….”
대답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리비는 한층 더 짙은 공포를 마주해야만 했다. 침묵은 곧 긍정의 표시가 아니었던가.
“내가, 싫어?”
그는 즉시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 왔다.
“네 처음을 나와 함께하는 게 싫은 거야?”
“그, 그건 나쁜 거야. 초야권이라니. 그런 몹쓸…….”
리비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사실 ‘몹쓸’이라고 칭할 것도 없는 게, 아직 그런 풍습이 성행하는 마을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의 재량일 뿐이다.
“리비…….”
서늘하고 애달픈, 온갖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 말을 듣고, 리비는 그제야 깨달았다.
꼼짝없이 붙들렸다.
갇혀 버렸다.
빠져나갈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어……허어, 어흐흑…….”
“리비?”
“무서우…… 워억.”
“응?”
“너 무서워어어…….”
이번에는 진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툭툭, 안에 있던 눈물주머니들이 몽땅 터져 버린 듯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처음에는 ‘흑흑’에 가깝던 소리가 꺽꺽거리는 소리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는 서둘러 사과했다.
“용서해 줘, 리비.”
급기야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 몸집의 배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리비에게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순하고 커다란 개가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꼴 같았다.
“더 쳐도 돼, 풀릴 때까지. 그러니까 울지 마, 응?”
그럼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리비의 표정을 살피다가 서둘러 베개를 주워 올려 내밀었다. 그리고 처벌을 기다리는 듯 눈을 꼭 감았다. 그가 내민 베개를 식식거리며 받아 든 리비가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렸다.
“…….”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모습에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베개를 한껏 높이 치켜든 채로.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오로지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무릎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 채 격하게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그녀와 달리, 보리스는 마치 화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끔 굳게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게 전부였다.
‘설마.’
그 모습을 보며 리비는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무서워하고 있어?’
함께 뒹굴며 놀던 시절에 달리기든, 팔씨름이든 하게 되면 두 사람은 진 쪽에게 눈을 감고 딱밤을 주고는 했다. 그때마다 파르르 떨리던 보리스의 속눈썹이 귀엽고 예뻐서 그녀는 쉬이 딱밤을 때리는 대신 때릴 듯 말 듯 시간을 끌고는 했다.
둘이 했던 놀이의 대부분은 그녀가 이겼기에 당연히 보리스는 리비가 주는 벌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
리비는 슬그머니 발 한쪽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때린다? 진짜로 때린다아?”
부러 큰 소리를 내며 그녀는 다른 발 한쪽도 마저 바닥을 디뎠다. 엉덩이를 천천히 들어 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그는 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언제 때릴까아?”
고개를 돌려 재빨리 문을 확인했다. 걸쇠가 풀려 있는 걸 확인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가 차올랐다.
“때릴 때까지 눈 뜨면 안 되는 거 알지? 그건 반칙이야.”
베개를 휘둘러 붕붕, 소리를 내며 그녀는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이게 명백히 미친 짓이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자신이 서글펐다.
하지만 좀 전에 맛이 완전히 가버린 눈을 보고 난 뒤라 우선은 달아나고 보자는 생각이 두려움을 밀어냈다.
막 몸을 튼 순간이었다.
턱.
허리를 휘감은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각할 새도 없이 속절없이 끌려간 몸은 도로 그의 품에 꼼짝없이 갇혔다. 어둠으로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가 음울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
“…….”
“벌준다며. 난 기다리고 있었는데.”
꼴깍, 마른 목에 침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허리를 감은 손을 풀어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흘렀을까.
“꺄악!”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리비는 묵직한 몸에 내리눌린 채 구덩이에 빠진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이거 놔. 안 놔? 어?”
“놔주면 또 창가로 달려갈 거잖아. 뛰어내린다고 할 거면서.”
그는 달래는 어투로 대답하며 그녀의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달라도 너무 다른 행동이었다.
“창가는 위험해, 리비.”
‘네가 더 위험해.’
그녀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입에 담은 채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보리스는 손을 뻗어 기다란 끈을 꺼내 들었다. 마치 준비된 듯이, 원래부터 있었던 듯이.
“그런 게 왜…… 거기서 나와?”
리비는 멍하니 그의 손에 들린 끈을 쳐다보았다. 저걸로 뭘,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보, 보리스?”
설마, 싶은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몸을 이리저리 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눈 깜짝할 새 제 품에서 달아난 걸 목격한지라 그녀가 아무리 낑낑거려도 그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 리비. 다치잖아.”
그는 사냥에서 다 죽은 짐승을 갈무리하듯 힘이라곤 하나도 들이지 않고 손목을 결박했다.
어느새 손목을 묶은 끈이 침대 기둥에 묶이고, 그녀는 이제 완전히 몸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 안 그러면 되잖아!”
경악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처연한 눈동자로 자신을 볼 뿐이었다. 혹시 몰라 잡아당겨 봤지만 소용없었다.
손은 묶였고, 지금 위에는 야수 같은 남자가 몸을 드리우고 있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 야수는 지금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풀어, 보리스.”
그녀는 표정을 잔뜩 굳힌 채 이야기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응?”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래서 그를 만난 이래, 아니 납치당한 이래 계속 실패해 왔지만 마지막 대화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고 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해 오셨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몰라,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그러니까 풀어 줘.”
애원을 했다가 협박을 했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손목부터 풀어 놓고 봐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안 돼.’일 뿐. 그렇게 묶인 채로 그녀는 보리스와 한참 동안 실랑이를 이어 갔다.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안 돼’라는 대답에 질릴 무렵이었다.
“보리스, 풀어 줘. 이러지 마. 이거 풀고 얘기해, 우리. 응?”
“……우리?”
내내 절망에 물들어 있던 표정이 아주 잠깐 풀리는 걸,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응, 나, 아파, 보리스. 이것 봐, 빨개졌잖아?”
“아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응, 아파. 아야야.”
그의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게 보였다.
“리비, 아파. 보리스 때문에…….”
그래, 이거야. 그녀는 섬광 같은 깨달음에 무릎을 치고 싶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그를 설득할 구멍이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기왕이면 효과를 더 넣으면 좋겠다 싶어 눈가에 힘을 잔뜩 주었으나 좀 전에 다 뽑아낸 건지 수분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라 버린 눈물을 쥐어짜 내려 안간힘을 쓰자 몇 방울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마침내 그에게서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손목을 묶은 끈으로 손을 가져간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비친 빛 한 줄기에 희미한 미소가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안 돼, 리비. 보낼 수 없어.”
그와 함께 모든 이성이 날아갔다.
“풀어, 풀라고! 이 미친 새끼야! 풀라니까아아!!! 이 또라이야아아아!”
마지막 희망이 꺾이고 나자 남은 건 발악뿐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러지 마, 리비. 아프잖아.”
그는 리비의 몸을 꾹 내리눌렀다.
“이거 놔!”
강하게 속박당한 몸을 뒤틀며 재차 소리쳐 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속했잖아, 나랑. 나와 결혼하기로.”
“나, 난 그런 적 없어.”
“약속했어, 분명히, 리비.”
그의 눈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저 하루이틀 사이에 생겨난 게 아닌, 그저 그런 투정이나 아집이 아닌, 오랜 시간 쌓이고 뭉쳐서 만들어진 단단한 믿음이었다. 아니, 저 눈에 비친 건 분명히.
신앙이었다.
저 맹목적인 믿음을 신앙이 아니면 대체 뭐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 강력한 믿음은 결국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럴 리 없어’에서 ‘그럴 수도 있을까?’로. 그리고 끝내는 멀고 먼 과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마침내.
“네가 공작이 된다면 모를까.”
고얀 입방정을 떨었던 자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맞네, 내가 했네.’
갑작스레 몰려온 기억에 리비는 그만 아찔해졌다.
입술이 바짝 말라서 리비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
문득 느낌이 이상해 올려다보니 보리스가 그런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비는 혀를 내민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눈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마침내 깨달은 과거의 기억이 남겨 준 충격은 상당했다. 온몸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어서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리비.”
“…….”
“……기억나는 거야?”
“…….”
“다 기억한 거야, 그렇지?”
“아니.”
답은 너무 빨리 튀어나왔다. 냉정한 대답에 보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 저, 그러니까.”
“……기억나는 거야?”
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아니.”
리비는 재빨리 대답했다. 단호한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급속도로 좁아졌다.
“난 기억 안 나. 그러니.”
리비는 잠시 말을 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런 적 없는 거야.”
“거짓말.”
옆으로 돌렸던 얼굴이 휙 잡혀서 되돌아왔다.
“거짓말…… 아니야.”
볼을 잡혀서 어눌해진 발음으로 웅얼웅얼 답하자 보리스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 눈을 보고 있기가 버거워서 리비는 열심히 눈만 굴려 댔다.
“그런데 왜 내 눈 피해?”
“내가 어, 언제.”
“옛날에도 그랬잖아. 거짓말하면 다 티 나, 리비.”
“옛날?”
내가 또 언제 무슨 얘길 했기에 저러나 싶어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랬다. 아니,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건 보리스, 저놈이다.
“거짓말하면 발가락이 오그라들잖아.”
보리스가 손을 쑥 뻗어 작은 발을 꽉 움켜쥐었다.
“히익.”
커다란 손에 날름 발을 잡혀 어쩔 줄 모르고 몸을 틀어 댔다. 간지럽고, 부끄럽고, 또, 또…….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다만 내가 아는 건 네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야.”
“…….”
그의 얼굴은 세상의 먹구름을 모두 모아 놓은 것처럼 어두침침했고, 곧 비를 흩뿌릴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말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에 깔려 있는 그녀로서는 난데없는 소나기를 맞는 기분이었다.
톡톡.
“…….”
믿을 수가 없어서, 얼굴 위로 톡톡 떨구어지는 그 비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보리스, 저…….”
비는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자르르 고여 있던 빗방울이 후드득, 얼굴 위로 쏟아질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울어?”
입을 벌린 채,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기억 속의 소년이, ‘그’ 보리스가 이 남자가 맞는다면, 이 눈물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는 툭하면 울었으니까.
길가에 죽은 참새의 시체가 놓여 있었을 때도, 계집애 같다며 남자애들이 놀렸을 때도, 그 어느 해엔가 열병에 걸린 그녀가 밤 내내 끙끙 앓았을 때도 내내 옆에 앉아 물수건을 갈아 주며 울었다.
‘진짜 보리스구나.’
새삼 깨달은 사실에 그녀는 멍해졌다. 사실 오늘 그를 본 후, 그리고 이 성에 끌려온 후, 과연 이놈이 내가 알던 그놈이 맞는 건가 하는 혼란에 빠졌었기 때문이었다.
머리 색과 눈 색, 저 툭툭 떨구는 눈물마저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찬란한 이목구비는 ‘과거’의 보리스가 맞았지만 그 외의 것.
그녀의 몸을 다 덮을 정도로 크고 다부진 몸집이라든가, 거센 팔 힘, 위압적인 목소리는 과거와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기억이…… 정말 안 나?”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그녀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 눈꼬리에 맺힌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굵고, 많은 눈물이 쏟아지며 자신의 눈물과 합쳐졌다.
톡.
눈물 한 방울이 입술로 떨어지자 그녀는 푸푸 소리를 내며 그것을 뱉어 냈다.
“어푸…… 푸…… 짜잖아.”
그 소리에 소나기는 폭우로 바뀌었다.
“저기, 보리스? 날 익사시키려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서 리비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억이, 안 난다고?”
크게 열린 동공이, 충격으로 물든 목소리가 그가 겪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그녀의 어깨를 틀어쥔 채로 그는 끝없는 눈물을 흘려 댔다. 그리고 아래서 그 응축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여자는,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몹시 황당했다.
‘왜 먼저 선방을 날리는데?’
입술에서 짠 기가 가실 새 없이 무자비하게 눈물 공격을 쏟아 내는 남자는, 그러니까, 그녀의 결혼식에 나타나서 새신부를 납치한 극악무도한 놈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사슴 같은 눈으로 울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억울한 건 나라고, 나.’
어째서인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자꾸 입안에 맴돌았다.
눈물에 잔뜩 흐려진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리비는 그가 저렇게 울 때마다 어떻게든 달래 놓았던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착한 보리스, 나의 보리스.”
어린 소녀였던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옆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소년도 보였다. 설마, 그게 아직도 효과가 있을까.
“착한 보리스, 나의 보리스.”
마녀의 주문처럼, 리비는 간절히 그를 불렀다.
“진정해, 제발.”
놀랍게도 떨어지는 눈물의 양이 차차 줄기 시작했다.
“리비……? 기억하는 거야?”
“그래, 이건 기억나. 그러니 풀어 줘. 눈물 닦아 줄게. 그건 내 일이었잖아.”
혼란스러운 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약속해 주면.”
“무슨 약속?”
“나는 공작이 되겠다는 약속, 지켰어.”
좀 전까지 눈물을 떨구던 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 위에 덧붙인 말은 더욱더.
“널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줄게.”
묶어 놓은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등 위로 깊게 입술을 눌렀다. 뜨거운 입김이 닿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나, 이제 공작이야. 정식으로 인정받은. 이제 너보다 신분도 높아, 그러니.”
“……늦었어, 이미.”
리비는 잔뜩 격앙된 말을 잘라 냈다. 뭔가 콱 막힌 듯해서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 내야만 했다.
“그리고 네가 아니라도 나는 공작 부인이 될 거란 말이야.”
보리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해 줄까, 보리스? 나는 겨우 공훈 따위로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한 가문도 뭣도 없는 공작이 아니라 명문 중의 명문, 레제트 공작에게 시집가. 너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은 순조로웠을 거라고. 게다가.”
“…….”
“이 결혼은, 폐하께서 명하신 거야.”
다다다 쏟아 낸 뒤 그녀는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한 약속을 들고 와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에게 과연 이 말이 통할까 싶었다. 그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도 알아.”
순간 짧은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러면 이 결혼이 꼭 성사되어야 하는 이유도 알겠네?”
“…….”
그는 아무 대답이 없는 대신 한층 더 음울해진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대답 없는 그를 향해 리비는 재차 확인 질문을 던졌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이유도 알 거고?”
그의 눈은 또다시 깊게 내려앉았다. 주인의 눈을 피해 한바탕 사고를 친 후의 강아지 같은 눈이랄까.
“보리스, 대답해.”
“너는 내 신부야, 아무 데도 못 가.”
잠시나마 정상적인 대화가 되는가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한 번, 두 번, 연달아 심호흡을 한 뒤에야 그녀는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지 마. 다 알고 있었다면서.”
“그러니까 널 데리러 간 거잖아.”
“날 ‘데리러’ 왔다고?”
“응, 데리러.”
보리스는 손을 뻗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뺨에 와 닿는 손가락의 감촉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손가락은 그대로 멎었다.
“널 데리러 가기 위해.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또다시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는 것만 같아 리비는 휘휘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어머, 그것 참 낭만적이네. 여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정의의 기사!”
격앙된 목소리가 공중을 갈랐다. 입꼬리도 한껏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난 여기서 울면 되는 거니?”
리비의 미소는 단박에 사라졌다.
“리비, 난…….”
말을 꺼내려는 걸 리비는 다시 단박에 잘라 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이건 납치라고 부르는 거야, 보리스. 데리러 왔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모르는 줄 알았다. 몰랐기에 이럴 수 있는 거겠지, 싶었던 안일한 생각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의 입으로 전부 ‘알고 있다’라고 들은 이상은, 그의 기이할 정도로 강한 확신의 근원을 알게 된 이상은. 더 이상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전쟁을 완벽하게 끝내려면 나는 ‘가야만’ 해.”
리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어떤 표정을 짓든, 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말거나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야. 그 누구도 어길 수는 없어. 그 공작은 ‘리비 하이든’을 원하는 게 아니야. 왕위 계승권을 가진 여자를 원하는 거지. 내가 낳은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 필요한 거야.”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리비는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마침내 크게 숨을 들이켠 뒤에야 말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가야만 돼.”
마을 예배당에서의 소소한 결혼식은 그곳과의 완벽한 작별을 의미하는 의식이었다. 진짜 결혼식은 그녀가 레제트 공작의 영지로 간 후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한 길고 긴 여행도 준비되어 있었다.
레제트 영지에 발을 디딘 후 며칠간 여독을 풀고 결혼식과 함께 3일간의 축제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나는 이 결혼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래야만.”
사막에 누워 있는 것처럼 목이 탔다. 입을 벌리기조차 괴로웠다.
바싹바싹 말라 가는 입을 축이기 위해 그녀는 재빨리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래 봐야 혀도 말라 있어서 뻑뻑하게 긁히는 살의 촉감만 고스란히 느껴질 뿐이었다.
그 혀를 따라 보랏빛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보리스는 옆에 놓인 물병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 물 나도 좀, 이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웁!”
갑작스레 축축한 것이 입술 위로 겹쳐졌다. 무엇인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물의 온도에 맞춰 차갑게 식은 입술이 닿아 둘만의 통로를 만들었고, 그 사이로 조금씩 물이 흘러들어 와 입술과 혀를, 뒤이어 목을 차례대로 적셔 주었다.
부릅뜬 눈에 눈을 감은 채 파르르 떨리는 까만 속눈썹이 보였다. 아까 흘린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는 그 끝에 간신히 붙어 대롱거리는 눈물 한 방울도.
“으응, 우…….”
밀어낼 손이 없어 리비는 몸만 비틀어 댔다. 그나마도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넘치도록 들어온 물이 둘의 입술 사이로 주륵 흘러내리자 보리스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이며 남은 물을 삼키는 걸, 리비는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괜찮아?”
걱정스러운 듯 그는 손을 뻗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쓸어내렸다.
“목말라 보이기에.”
“나, 나도 물 마실 줄 알아.”
“하지만 손이…….”
그는 자기가 묶어 놓은 끈을 쳐다보았다.
“네가 묶은 거잖아! 풀어 주면 되는데! 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는 그녀를 보리스는 잠잠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전에도 이렇게 먹여 줬었는데.”
“뭐가! 언제!”
“내가 쓰러졌을 때.”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가 불러낸 또 다른 기억에 그녀는 또다시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 그런 적 없어.”
“또 눈 피하면서.”
슬그머니 돌아가는 얼굴을 잡아 돌린 보리스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물 먹여 줬잖아. 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받다가 뒤로 넘어지면서 돌에 머리를 박았어, 나. 그러고 정신을 잃었는데. 네가 막 죽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내 입에…….”
“그만! 그마안! 그만해!”
바로 코앞에서 낯부끄러운 과거를 조목조목 말하는 걸 듣자니 내장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리비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정신 잃었다면서?”
“응.”
“그런데 어떻게 기억해?”
잠시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응?”
리비는 그의 광대뼈 부근이 언뜻 붉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보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돌리즈므.”
잇새로 새어 나온 협박에 보리스는 다시 찬찬히 얼굴을 돌렸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쩐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백주대낮에 신부를 납치해 오고도 태연한 놈이 겨우 이따위에 얼굴을 붉히다니, 그건 또 새로운 일이었다. 슬그머니 쾌감이 솟을 만큼.
“그러니까 그때, 정신을 잃은 게 아닌 거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는데 이만한 일로 저리 당황하는 걸 보니 어쩌면 그의 약점을 파고들 기회라 생각했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리비는 또박또박 사실을 확인했다.
“…….”
그녀의 추궁에 보리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떨궜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축축 처져 흔들렸다.
푹 수그린 머리가 어쩐지 처량 맞아서 마구 흐트러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날, 자신은 까맣게 몰랐던 소년의 생각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어서, 말해 봐.”
기억 속의 그는 시체처럼 새하얀 얼굴로 누워 있었다. 뒤통수에서는 진득하니 피가 흘렀고, 주변의 잔디는 금세 붉게 물들었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 거의 투명에 가까워졌음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정신을 잃은 게 아니었단 말이지.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 대며 죽지 말라고 몇 번이나 외쳤는데. 그걸 다 알고도 그랬단 말이지, 괘씸한 생각이 뭉글뭉글 머릿속을 지배해 갔다.
“날 속였어, 보리스. 넌, 내가 그러는 걸 다 듣고도 숨기고서 연극을……. 음흉해. 뻔뻔해. 그때, 깬 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잖아.”
근처에서 샘물을 떠다가 그의 입에 흘려 넣어 주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열심히 팔다리를 주물러 봐도 그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간신히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대로 목 놓아 펑펑 울어 버렸다.
살아서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보리스의 목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그건 널 달래느라…….”
그는 다시 얼굴이 발개져 우물거렸다.
“다 핑계야.”
분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보리스는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눈에는 또 눈물이 가득했다.
“아니야, 나 그때, 피도 났잖아. 정말 아팠어. 머리가 울렸다고. 꼼짝할 수가 없어서 누워 있었던 건데 네가 울고 그러다가 네가 입으로 물을 먹여 주는데…….”
“아아악! 또, 또! 그렇게 어제 일처럼 말하지 말라고!”
리비는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만 들어도 자신이 그날 어떠했는지 돌이켜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풀밭 위에 누워 있는 미소년에게 다가간 소녀가 물을 먹이겠다며 스스로 입을 들이미는 꼴이라니. 그것을 떠올리자 내려진 결론은 하나였다.
덮쳤구나, 내가.
손이 자유로웠다면 아마 멍이 들 정도로 가슴을 팡팡 치고도 남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내겐 어제 일 같아. 아니, 언제라도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보리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리비를 쳐다보았다.
“네 키스를 받던 그 시절로…….”
문득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뜨겁다고 깨달은 건 그 순간이었다. 설마, 설마. 이번엔 물을 먹인다는 구실도 없는데.
“이…… 읍.”
물을 먹이던 때와 마찬가지로 입술이 겹쳐졌다. 아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부드럽게 빨아들인 입술 새로 재빠르게 무언가 밀려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뭐라 대차게 쏘아붙이려던 혀가 급작스러운 이웃의 방문 탓에 뻣뻣이 굳었다. 얼어붙은 리비를 야릇하게 휘감고 훑던 열기가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떨어진 순간.
“어땠어? 나, 잘하지?”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고 남은 여운에 헐떡이던 그녀는 마침내 남은 힘을 그러모아 소리쳤다.
“이…… 이…… 시커먼 까마귀 같은 놈아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아아…… 아…… 까악.
메아리가 널리 퍼질 만큼 힘껏 발을 구르며 꽥꽥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마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가 창가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울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들으라는 듯 우짖는 소리 같아 리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울음을 멈춘 까마귀는 한쪽 다리를 들어 머리통을 긁어 댔다. 그러자 검은 깃털 두어 개가 빠져 방으로 너울너울 날아들었다.
“저리 가.”
가악, 하는 소리가 어째 불만에 찬 듯 들린 건 착각일까. 까마귀는 날개를 펼쳐 몇 번 퍼덕이다가 휙 몸을 돌려 날아가 버렸다.
“쟤 설마 알아듣는 거야?”
설마, 하며 혼잣말로 물었다.
“응.”
그런데 그 말에 당연하단 듯 돌아온 대답에 리비는 침을 꼴깍 삼켰다.
보리스가 아무렇지 않게 까마귀에게 ‘명령’이란 걸 했다. 이 시커먼 남자가, 사람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데 날짐승하고는 잘만 소통했다.
‘뭐 이런 경우가……?’
곰곰이 되짚어 보던 그녀는 문득 화내야 할 지점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불만스레 입을 꾸욱 다물었다.
“보리스, 이것만 안 묶어 놨어도, 벌써 뺨을 쳤을 거야. 다른 놈들은…….”
기습적으로 당했던 키스‘들’을 떠올리자 새록새록 약이 올랐다. 둘 다 자기가 제정신이 아닐 때 벌어진 일이었다. 아까 말에서도, 좀 전에 물을 준다는 핑계도, 그리고 방금 전…….
리비는 아직 감촉이 남아 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한껏 부은 입술에 자극이 가해지자 이상한 기분만 더해질 뿐이었다. 보리스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풀어내며 물었다.
“다른 놈이랑 이렇게 안고 있었던 적 있어?”
눈물로 촉촉하던 눈에 일순 다른 빛이 섞여들었다.
“뭐, 왜, 뭐. 그러든가 말든가.”
떠는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리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요란하게 짖어 대면서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말아 넣고 뒤로 물러나는 강아지와 자기가 다를 게 뭔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너야말로, 할 거 다 했을 거잖아.”
듣기로는 군대를 따라 이동하는 여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 여자들마저 없을 때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했고. 어찌 되었든 혈기왕성한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그가 정말로 아무 경험도 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그는 절대 아니라고 할 테지만.
“그런 적 없다고 했잖아. 나는 너랑만…….”
“내가 언제! 너랑 언제! 아니야!”
“했어. 꿈속에서.”
그가 급작스레 몸을 숙여 오는 바람에 리비는 흡, 숨을 들이켰다.
“매일매일. 내가 먼저 널 끌어안을 때도 있고 네가 먼저 안겨 올 때도…….”
“입! 입! 좀 다물어!”
“한 번, 두 번…… 끝도 없이 너를 마주 안았어. 낮이나 밤이나 내 품속에 안고 계속 그리워했어…… 나는 수도 없이 네 안에 들어갔다 나왔지.”
귀로 흘러드는 소리가 그렇게 야할 수 없었다. 눈가만 촉촉한 게 아니라 목소리조차도 습했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꽃처럼 농염했다.
그는 전혀 그걸 의도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는 원래 그렇게 야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 시절에도 그를 본 소녀들이 단박에 눈이 멀어 버릴 만큼.
“매일 너랑 그렇게 입 맞췄어.”
“…….”
도리도리 젓던 고개가 일순간에 멎었다. 갈 길을 잃고 헤매던 눈길이 대뜸 그와 마주치자 보랏빛 눈이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 그래. 그, 그렇다고 치자…….”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왜?”
보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가 왜야.”
“빨개졌잖아.”
커다란 손이 조심조심 볼 언저리를 어루만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온 감각이 바짝 곤두선 기분이었다.
“아아, 부끄럽구나, 리비.”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물론 다른 것도 했어. 말했잖아, 나, 잘한다고.”
그리고 이어진 말에 리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원한다면 증명해 보일게.”
“무, 무슨 증명?”
“우린 대화가 부족하잖아.”
“응, 그래. 많이 부족하지.”
웬일로 말이 통하나 싶어 그녀는 잠시 마음을 놓았다.
“그럼 이제, 몸의 대화를 해볼까.”
그의 눈에 짙은 빛이 서렸다. 잠깐만, 또 왜 저래? 뭔가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온몸을 지배해 왔다. 리비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사리며 말했다.
“모, 몸의 대화?”
“언제든지, 할 준비는 되어 있어.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켜 상의를 풀어 헤쳤다. 거의 뜯듯이 벗어 낸 상의가 공중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리비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탄탄한 가슴팍과 촘촘한 근육으로 이뤄진 팔뚝과 어깨. 깎아서 조각한 듯, 지방이라고는 조금도 끼지 않은 것 같은 복부와 그 아래…… 슬쩍 내려간 하의 위로 보이는 얕게 팬 근육…….
“오, 오옷은 왜 벗어, 왜!”
“네가 못 믿는 것 같아서.”
보리스는 우울한 기운이 잔뜩 서린 눈으로 말했다. 축 처진 눈꼬리가 마치 혼나는 강아지 같았다.
“뭐, 뭘! 믿을게, 너는, 어, 그, 다른 여자들이랑 안 놀아났다고, 믿어, 믿는다고. 우리 보리스는 순결해, 나는 그걸 믿고, 됐지?”
리비는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입가가 분장한 광대처럼 늘어나 기괴하게 뒤틀려 보였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여력 같은 건 없었다.
뭔지 모르지만 저놈의 머릿속에는 길게 늘어진 도화선이 몇 개쯤은 엉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중 하나에 불씨를 튀어 버렸다는, 안 좋은 예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거 말고. 걱정하는 것 같아서.”
“무슨 걱정……?”
자신의 반응 중 또 무엇이 그를 ‘걱정’한다고 착각하게끔 했나, 리비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대답에 다시 한번 기함하고 말았다.
“내가 경험이 없으니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못 치를 것 같아서, 걱정하는 거잖아.”
보리스는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러니 증명할게, 남편으로서 내가 얼마나…….”
“아니야아아아!”
리비는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몸이 튕겨 오르면서 손목을 단단히 결박한 끈이 더 세게 죄어들었지만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안 해도 돼, 증명이니 뭐니, 괜찮아, 아니야, 안 해도 돼. 그러니까 보리스, 제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흐린 눈 너머로 보이는 건 보리스의 살짝 맛이 간 눈과 더없이 진지한 얼굴뿐.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 난 처녀여야 한다고 했잖아. 보리스, 날 납치한 것까진, 그래, 다시 놔주면 되니까 괜찮아. 하지만 그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해야 한다고, 그렇게 약속했어.”
“……얼굴도 못 본 남자에게 팔려 가면서 그런 걸 지키려는 거야?”
그는 색다른 충격에 휩싸인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리비는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이건 혼인 서약서에 쓰여 있는 거야. 이걸 어기면.”
“서약서? 내가 찢어 버린 그거? 아직도 그걸 신경 써? 내 아래 깔려서, 손까지 묶인 채로 한다는 얘기가 겨우 서약서? 처녀? 지켜야 돼?”
말끝에 울음기에 묻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돌아본 그의 얼굴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하지 마, 울지 마.”
손이 묶여 있어서 다행이야, 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안 그랬다면 손을 들어 저 아름다운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와락 두려운 마음이 덮쳐들었다.
그래, 그거야. 단지 그것뿐이야.
손을 들어 저 눈물을 훔쳐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운 이 마음은 그저 커다란 동물이 낑낑대는 것을 애처로이 바라보는 것과 다를 게 없으리라.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건 중요한 문제야, 보리스. 내, 내가 그걸 지켜야만, 내 가족이 무사할 수 있어.”
“…….”
그의 보랏빛 눈이 가늘어졌다.
“날 보내 줘. 이러지 마, 응?”
애원과도 같은 속삭임에 보리스의 얼굴은 점점 더 흐려지기만 했다. 한바탕 비를 쏟기 전의 하늘 같은 얼굴. 또, 또, 우는 걸까, 설마.
이내 떨어질 물방울을 예상하고 리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뜻밖에 뒤에 이어진 것은 눈물이 아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왕과 약속을 했어. 전쟁을 끝내면, 내게 공작위를 주겠다고.”
그것은 리비도 아는 이야기였다. 왕은 왕족도 아닌, 하물며 원래 귀족도 아니었던 자에게 공작위를 내걸었다. 그것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했던 왕으로서는 그저 없는 작위 하나 만들어 던지면 되는, 그저 품질 좋고 커다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누구든, 혼인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
기다란 손가락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섬세한 손길이었다. 닿을 듯 말 듯 한 접촉에 리비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게 결혼을 앞둔 여자를 포함한 건 아닐 거야.”
“아니, 왕의 맹세는 신성한 거지, 리비.”
손가락이 느릿하게 입술을 쓸어내렸다. 달달 떨리는 붉은 살점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꾹 내리눌러 더 이상의 항의를 막았다.
“나는 모두 이행했고, 그리고 너를 신부로 맞으러 온 거야. 왕은 약속을 지켜야 돼. 그렇게 만들 거야.”
“하지만 보리스, 이건…… ‘완벽하게’ 전쟁을 끝내기 위한 의식이야. 폐하도 서, 설마 네가 요구할 신부가 나인 줄은 몰랐을 거야. 이미 혼담이 진행된 후였는데 어떻게 알았겠어.”
전쟁을 끝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회생 불가능하게 밟아서 완벽하게 뭉개 버리거나, 강력한 적에게 그가 수긍할 만한 명분을 제시하여 전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 등이다.
물리적 전투에서의 불리함은 보리스가 해결했으나 그것으로 모든 평화를 지킬 수는 없었다. 이번 전쟁은 현 왕가의 핏줄을 자신의 혈통에 합치면서 왕위 계승권을 공평하게 나눠 가짐으로써 완벽하게 정리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물로 선택된 게 리비였다.
“그럼, 왕의 명령이 아니라면, 나와 결혼할 거야?”
“…….”
꾹,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누르는 힘이 조금 강해졌다.
“응? 리비.”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