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까마귀의 숲
헤센숲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금지된 숲, 마녀의 숲. 그중 가장 유명한 건 ‘까마귀의 숲’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사람만 한 까마귀’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아이들을 채가서 잡아먹곤 한단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던 그때 그 기억에 리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보리스는 어깨에서 망토를 끌러 리비에게 둘둘 감아 주며 물었다. 서늘하기야 했지만 이 떨림은 단순히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을 무렵부터 그런 괴담 같은 건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공포는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란 이토록 강렬한 것이다. 다 잊은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고개를 쳐들고 자신을 주시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런 괴담이나 어릴 적 다른 기억들은 잘만 생각나는데 단 하나, 보리스에 대한 기억만큼은 마치 새카만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둡기만 했다.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들로는 부족했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고작 그런 기억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막기라도 한 것처럼. 심지어 그를 다시 만나기 이전까지 잊고 있었을 정도니까.
“보리스.”
리비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유독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빛의 단단한 금속 갑옷과 명백히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이런 얼굴을 하고서 적을 싹 쓸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더 오싹했다.
“응.”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비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기에 나올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리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긴…… 여긴 금지된 숲이야.”
말을 내뱉기 무섭게 멀리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망토 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서워?”
보리스는 팔로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한없이 강하고, 따스한 팔. 그 안에 있으면 어떤 위협도 피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친 생각이야.’
뻔뻔한 납치범을 두고서 이게 무슨 생각이지?
그녀는 든든하게 자신의 몸을 감싼 체온에 안심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응, 무서워. 여긴 왜 왔어?”
리비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물으려 애썼다. 실은 발가락이 다 곱아 버릴 정도로 무서웠음에도.
“여길 지나야만 하거든.”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나야만 하다니?”
“우리가 가는 곳.”
어딘지 정확히 말해 주지도 않으면서 보리스는 잔뜩 기대하란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주 웃을 것 같은 기분에 리비는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곧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숲에 닿았다는 건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왔다는 의미였다. 리비는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북쪽.
보리스는 레제트 공작령이 있는 남쪽이 아닌 북쪽,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내 달려온 것이었다.
“사실 더 빠르고 편하게 가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더 빠르고 안전하게?”
이런 숲길을 빠르고 안전하게 가는 방법이라니. 빼곡히 들어찬 이 나무를 뚫고 가려면 그저 말을 타거나 걸어서 지나는 수밖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 마을은 폐쇄적인 공간으로 머물러 왔다. 이 숲을 지나려면 보통 용기와 시간,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런데 더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니. 그런 게 있다면 진작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있어, 그런 게. 나중에 알려 줄게.”
보리스의 보랏빛 눈이 수상쩍게 빛났다. 낮에 본 눈과 같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눈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원체 신비로운 색에 밤하늘 빛까지 머금자 그는 정말로 인간이 아닌 사특한 마물처럼 보였다.
금지된 숲에서 나타나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 속 마물. 그 눈빛과 아름다운 외형에 홀렸다가는 그대로 영혼까지 꼭꼭 집어삼켜질 것 같은 그런 기분.
“지금은 짐들이 있으니 좀 참아 줘, 리비.”
그가 말하는 ‘짐’이란 게 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포박된 레제트 가문의 기사들은 굴욕적이게도 정말 짐짝처럼 수레에 실린 채 끌려가고 있었다.
아마 기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수치이자 굴욕일 것이었다.
아까 그녀의 앞에 칼을 겨눈 기사가 보였다. 아까의 거만한 눈빛이 떠오르자 그녀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기사가 고개를 들자 리비와 대번에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기사가 잔뜩 독기 오른 눈으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독이 바싹 오를 만도 했다. 저들은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며, 전장에서 최전방에 서서 전쟁을 이끌던 자들이다. 왕국군이 저들에게 밀려 고전할 정도로 막강한 무력을 자랑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보다 숫자도 적은 보리스의 기사들에게 끽소리도 못 하고 당했다.
직접 그 광경을 본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멀쩡한 칼리니 기사들에 비해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은 여기저기 찢기고 너덜거리는 상처들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가장 아프다 여기는 것은 신체적 고통이 아닌, 상처받은 자존심일 것이다.
모름지기 기사란 자존심과 명예로 똘똘 뭉친 존재들이 아닌가. 행여 그 명예에 상처 입을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목숨까지 내버릴 정도였다.
그런 자존심을 건드려 놨으니 벌써부터 후환이 걱정되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까마귀 떼나, 정말 있을지도 모를 사람 크기만 한 새 괴물이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을 레제트 공작이 알게 된다면.
리비의 머릿속은 온통 그 걱정으로 가득했다. 혼자서 열심히 걱정하는 리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보리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리비, 무서워? 눈깔을 파버릴까?”
“……뭐?”
뭘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그를 돌아보자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널 노려봤잖아. 리비, 무서워할 거 없어. 눈을 파버리거나 아니면 이대로 죽여 버려도…….”
“그만.”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살 떨리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게 더 무서웠다.
“그런 무서운 소리는 좀 하지 마.”
리비는 손으로 얼른 보리스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말캉한 입술의 감촉에 놀란 그녀가 손을 다시 떼려 했을 때였다.
보리스는 떼어 내려는 손을 잡더니 입술에 꾹 눌러 댔다.
“보, 보리스.”
리비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여 누가 보지는 않을까. 다행히 기사들은 앞만 주시할 뿐이었다.
“이거 놔.”
손을 잡아당겼지만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되레 더 강한 힘으로 눌러 놓는 통에 리비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를 보았다.
보리스는 곱게 눈을 접으며 웃더니 리비의 손바닥 안을 핥듯이 입술로 훑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섬세하게 지나치는 느낌에 리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맛있어.”
잠시 후, 보리스의 입술이 천천히 손바닥에서 떨어져 나갔다.
“맛……있어?”
리비는 그의 말을 멍하니 따라 했다.
“응, 달아. 리비는 사탕 같아.”
“…….”
“다른 데도 이렇게 달콤할까?”
다른 데? 다른 데 어디? 리비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난 사람이야, 보리스. 사탕이라니. 농담이 지나쳐.”
꼭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은 눈빛을 발산해 대는 보리스를 피해 애써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또다시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기, 보리스.”
“응?”
“저들은…… 놔주면 안 될까.”
그는 리비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식칼로 당근을 텅, 내리치는 것처럼 단호한 말투였다.
“공작가의 기사들을 억류하다니, 보리스, 이건 전쟁의 빌미야.”
리비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랐다.
“레제트 공작은 왕을 배출한 적 있는 가문이고, 아직도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언제든 다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고 있고, 그럴 만한 전력도 갖고 있…….”
리비는 차분하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손가락을 쫙 펼쳐서 하나씩 접으며 그가 이래서는 안 될 이유에 대해 늘어놓았다.
문득 그의 눈빛이 진지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 리비는 처음으로 희망을 걸었다.
“……리비.”
“응, 보리스.”
리비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쩌면 나긋나긋하게 타이르면 듣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소리부터 질렀으니 엇나간 것이었다. 그래, 그게 분명했다.
“정말 귀여워.”
“……응?”
리비의 커다란 연초록색 눈이 깜박이는 걸 보는 보리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사랑스러워.”
리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대체 뭔 사랑스럽고 귀여운 짓을 또 했던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리스가 속삭였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보리스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슬쩍 미간을 좁혔다.
“안다고……?”
그녀는 또다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안다니 대체 뭘? 아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는 걸까?
숱한 의문은 그의 말 한마디에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리비, 나도 공작이야.”
“…….”
“내가 이겨.”
그와 비슷한 말을 리비는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에, 그러니까 마을 친구들이 모두 모여 땅따먹기를 하던 그때 그 시절에.
“걱정 마, 리비. 내가 이겨.”
그리고 정말로 이겼다.
덩치는 큰 편이 아니었으나 남자아이들끼리 싸움이 붙었을 때도 진 적이 없었다. 희한하게 남자아이들은 자기보다 덩치도 작은 보리스에게 쪽도 못 쓴 채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마.”
보리스는 또다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그래.”
리비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채 입을 닫았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보리스, 저기…… 나.”
“응?”
점점 사그라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보리스는 그녀의 키에 맞춰 고개를 꺾었다.
“……가고 싶어.”
“어디?”
“……가고 싶다고.”
그녀는 잔뜩 붉힌 얼굴을 더욱 깊게 수그렸다. 그리고 그 얼굴을 따라 보리스는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리비, 뭐라고?”
그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리비는 고개를 쳐든 채 꽥 소리를 내질렀다.
“힘들어, 쉬고 싶어! 이 짐승 같은…….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
리비는 갑자기 복받친 설움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말하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익숙지 않은 말을 타고 이런저런 일을 겪은 데다가, 잔뜩 긴장한 바람에 허리와 엉덩이를 비롯해 온 삭신이 쑤셔 왔다.
“미안. 많이 아파?”
그는 금세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장갑을 벗고 리비의 허리를 손으로 쓱쓱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지날 때마다 리비는 윽윽, 하는 신음을 뱉었다.
아무리 들판을 쏘다니는 망아지처럼 자랐대도 오늘 겪은 일은 이미 그녀의 체력적 한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리고.”
리비는 얼굴이 빨개진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화장실도 가고 싶단 말이야.”
보리스는 새의 숨소리처럼 작은 속삭임을 용케 알아들었다. 고삐를 잡아당기자 빠른 속도로 달려가던 말은 순식간에 멈춰 섰다.
“윽.”
갑자기 서버린 말 때문에 리비는 그 반동으로 몸이 휙 보리스 쪽으로 쏠려 버렸다.
“아야.”
강철같은 몸에 부딪히는 바람에 리비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미안, 리비.”
보리스는 서둘러 그녀의 뺨을 문지르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난 괜찮아.”
리비가 고개를 내젓자 그는 안심한 듯 웃음 지었다.
“여기서 쉬어 간다. 캠프를 준비해.”
높이 손을 들어 올린 채 말하는 보리스를 보며 리비는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순식간에 장작이 모이고 불이 지펴지는 과정, 천막이 쳐지는 광경을 보며 리비는 부지런히 눈을 굴렸다.
볼일을 본 뒤 모닥불 근처에 앉아 볕을 쬐고 있자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보리스가 캠프장 한편에 마련해 준 그녀의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아늑했다. 부드러운 풀더미 위에 깔린 모포는 푹신푹신해서 딱딱한 안장에서 시달린 엉덩이를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꼴은 형편없었다.
아침만 해도 곱게 땋아 틀어 올렸던 연한 크림색의 머리칼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었다. 머리를 고정한 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풀어 헤쳐진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상태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바람을 맞은 데다가 보리스와 이런저런 것을 하느라 그랬다.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려 해보았으나 중간쯤에 걸린 손가락은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 역시 엉망일 게 분명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0년쯤은 폭삭 늙은 기분이니까.
얼굴 아래쪽도 상황이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
보리스가 둘러 준 망토에 가려진 아래에 입고 있는 드레스는 그가 뜯어 버리는 바람에 풍성함을 잃어버렸지만 본래의 화려함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가슴과 소맷단이 화려한 자수와 보석으로 장식된 결혼 예복은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 보이기까지 했다. 까치집 같은 머리와 어우러지자 정말 미친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리비는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소매를 걷어 올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입고 있는 옷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별로 능률 좋은 옷은 아니었다. 행여 도망을 치더라도 이 드레스를 입고선 불가능하다.
신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에는 벗겨진 구두 대신 커다란 가죽 신발을 신은 상태였지만 턱없이 컸다.
리비는 발에 비해 한참이나 큰 신발 아래 숨겨진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이걸 신고 뛰어갔다가는 몇 걸음 못 가서 나자빠지고 말겠지. 이 치렁치렁한 옷과 함께.
리비는 손을 뻗어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어루만졌다. 이미 보리스가 거추장스럽다며 거의 반절은 뜯어냈음에도 드레스에는 여전히 불필요한 장식들이 많았다. 이걸 입고 숲속을 뛰어다니라고 만든 옷은 아니니 그것은 당연했다.
레이스와 프릴, 금실로 크고 자잘하게 놓인 수들. 예식용 의상이라 옷감 자체도 무겁고, 여러 겹 겹쳐 입는 바람에 그 무게 또한 상당했다. 입고 다니는 자신도 그러한데 번쩍 들어 올린 사람은 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그는 한 팔로 자신을 들어 올렸다. 온몸의 힘을 쏟아부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책의 종이를 넘기듯이 가뿐하고 쉬운 손짓이었다. 어깨에 자신을 올린 채 척척 걸어가던 보리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리비는 다시 한번 눈앞이 아득해졌다.
만에 하나, 그가 도망친 자신을 붙잡으러 온다면.
‘그대로 구겨지는 거 아닐까?’
왠지 그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이대로 끌려가는 거야?’
이곳에서 제 발로 도망가기엔 모든 상황이 열악했다.
아까 볼일을 보겠다며 숲속으로 들어갈 때 주변 지리를 훑어보았지만 이 어두운 숲속을, 그것도 이 옷과 신발을 걸친 채 걸어서 도망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리비는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모은 다리 위로 얼굴을 쿵쿵 찧어 댔다.
“…….”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리비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휙휙 돌아가는 여러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이 하나둘 시커먼 투구를 벗자 그 아래 숨겨진 얼굴이 드러났다.
모두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거라고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앳되고 곱상한 얼굴들도 뒤섞여 있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기사들 같았다.
기사들은 앞을 지나다니면서 흘금흘금 그녀를 지켜보았다. 리비는 그들의 눈에 서린 짙은 호기심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보리스의 지시 탓인지 말을 걸거나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호기심만은 완전히 감출 수 없는 듯했다.
그들 눈에 자기가 어떻게 비칠지 리비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혼식 날 자신들의 기사단장에게 납치당한 신부. 사실상 그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니.
그래서 명백히 조롱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슬쩍 마주친 기사들의 눈빛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정말로 신기한 동물 보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자기 꼴이 그렇게 웃긴가, 싶어 리비는 길게 늘어진 소매를 들어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시간이 흐르자 꼬챙이에 꿰어진 고기가 기름을 뚝뚝 흘리며 익어 가는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냄새를 맡고 덤벼드는 짐승들이 있을지 몰라 기사들은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리비는 기사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곱상하게 생긴 기사들도 있었지만 사연 많은 상흔을 고스란히 지닌 이들도 보였다.
개중 눈가에서부터 입술까지 죽 찢어진 흉터를 가진 기사는 보리스의 측근인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살벌한 기운을 띠고 있었지만 보리스에겐 한없이 정중했다.
나이도 보리스보다 많아 보이는데 그는 꼬박꼬박 말을 높이며 ‘단장님’이라고 불렀다.
그 옆에 선 보리스를 리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보리스는 캠프장을 오가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리비는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보며 내내 울거나 활짝 웃기를 반복하던 얼굴과 달리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 가장 낯설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촉촉하게 젖어 있던 눈은 무감하게 변했고, 웃음기가 지워진 얼굴은 딱딱했다.
좀 전까지 그와 말 위에 있을 때만 해도 덩치만 커졌지 어렸을 때와는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리비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보리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
리비는 제풀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웠다. 보리스는 이제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리비?”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보리스는 성큼성큼 걸어와 리비 앞에 섰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꽤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곳에서 금세 거리를 좁혀 왔다.
리비는 그조차도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보다 키 작은 아이였는데.
지금은 자기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남자였다.
어릴 때와 그나마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곱상한 얼굴 정도일까.
그가 가까이 다가서자 새카만 그림자가 온통 그녀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내내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리비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기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리스의 표정은 어느덧 익히 그녀가 알던, 소년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가히 극단적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개중 어떤 얼굴이 진짜일까.
리비는 무심코 앉은 자리에서 몸을 물렸다. 그걸 보는 보리스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배고프지?”
나직한 물음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릎만 끌어당겨 안았다.
“먹어.”
보리스는 리비의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모닥불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짐승의 다리를 뜯어 내밀었다. 모양으로 보아 토끼인 것 같았지만 리비는 지금 그것을 들고 신나게 뜯을 기분이 아니었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육포와 말린 과일 등도 꺼내 놓았다. 리비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이런 상황에 저런 것을 받아서 와구와구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명색이 납치된 신부인데.
“배고프잖아, 먹어.”
“안 고파. 괜찮아.”
리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다 먹어.”
“그러지 말고 먹어. 아직 한참 더 가야 해.”
보리스는 다시 그녀를 향해 음식을 내밀었다.
“괜찮다니까?”
리비는 그가 내민 손을 탁 쳐냈다. 그 바람에 그가 건넨 음식들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
바닥에 떨어진 육포를 보는 리비의 시선에 순간 당황함이 어렸다. 크게 뜨인 보리스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보리스가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주워 올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리비.”
그는 다시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못 들었어? 배 안 고프다고……!”
꾸루룩.
그리고 동시에 배 속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만 좀 멈춰 주었으면 좋으련만, 배에서 울리는 소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깊고 길게 울려 퍼졌다. 배를 부여잡아 봤지만 소용없었다.
보리스는 거보라는 듯 음식을 향해 눈짓했고, 리비는 창피해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상황의 긴박함과 위태로움과는 상관없이, 배는 맹렬하게 먹을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단장을 하기에 바빠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도 떠올랐다.
“배고프잖아.”
이어진 권유에 리비는 하는 수 없이 그가 내민 것을 받아서 조금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짭짤한 육포의 맛과 말린 과일의 달콤한 향이 스며들자 어쩐지 잔뜩 날이 서 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온화해지는 기분이었다. 분하게도 그러했다.
“먹을 만해?”
보리스는 리비가 먹을 것을 입에 밀어 넣자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다.
“콜록.”
보리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리비는 목이 막혀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보리스가 그걸 두고 볼 리 없었고, 미리 준비해 온 듯 금방 물통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물.”
그가 준 물통을 들고 물을 삼키자 차차 기침이 멎었다.
“나 때문에 여기 머무는 거야?”
리비는 기름진 살점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모두 쌩쌩해 보였다. 힘들고 지친 것은 오직 하나, 자신뿐.
다른 기사들은 숲을 그대로 통과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전설 속 마물이든 사람만 한 까마귀든 무엇이든, 이렇게 시커먼 기사들이 있다면 무섭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짐들이 좀 있어서. 속도가 좀 느리기도 하고. 쉬어 가도 나쁠 건 없어. 어차피 해는 졌으니까.”
“날 어디로…….”
리비는 묻다가 가만히 입을 닫았다. 묻는다고 제대로 대답해 줄 녀석도 아닌 것 같은데 더 말해 뭐 하겠냐는 생각만 들었다.
대신 배나 채워 두자며 열심히 고기만 뜯어 먹었다.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리스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까 기사들을 대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리비는 이제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또 사랑스러운 짓을 해버렸구나.
“묻었어.”
보리스가 손을 내밀어 리비의 입가에 묻은 음식물을 엄지로 쓱 훑어 냈다.
그리고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거 먹지 마.”
리비의 말에 보리스는 왜?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손가락을 빨아 먹었다. 그것도 아주 쪽쪽.
“…….”
리비는 보리스의 손가락을 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또 손가락을 보았다가를 반복했다.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라 지금 막 포식을 끝낸 맹수처럼 보였다. 살점뿐만 아니라 뼈까지 모두 발라 으적으적 씹어 먹은 뒤의 포만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리비는 말없이 그가 하는 것만 지켜보았다.
“더 먹어, 맛이 없어?”
“아니.”
리비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배……불러, 이제.”
보리스는 물끄러미 리비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를 먹고 배가 부르냐는 듯한 물음이 담겨 있었다.
“정말이야. 입맛이…… 없어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냐니……?”
리비는 기가 막힌 듯 그를 쏘아보았다. 더 따져도 또 똑같은 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자 리비는 그냥 입을 닫는 쪽을 선택했다.
“춥지?”
보리스가 모포로 리비의 몸을 꽁꽁 싸맸다.
이미 그의 망토를 덮고 있어서 그다지 춥지는 않았으나 리비는 얌전히 그가 하는 대로 앉아 있었다.
“누구 때문인데.”
“이 숲만 지나면 금방이야. 새벽에는 아마 닿을 수 있을 거야. 고생시켜서 미안해.”
“고생?”
리비는 기가 찬 웃음을 터뜨렸다.
“보리스, 네가 미안해야 할 건 이게 아니야. 너는 지금 아주 큰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해봤자 소용없을 말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비는 다시 한번 그에게 차근차근,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를 일깨워 주려 했다.
보리스는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귀 기울여 들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한 채로. 다만 제대로 그 뜻이 전해지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계속해, 리비.”
보리스는 턱에 손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머리에 살짝 가려진 보랏빛 눈은 촉촉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왕의 명령으로 진행된 결혼에서 신부를 납치했고, 공작가 기사들을 구류하고…….”
리비는 손가락은 하나씩 접으며 그가 저지른 만행을 하나씩 입에 올리다가 문득 캠프장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갇힌 수레가 세워져 있었다.
안에 갇힌 기사들은 팔다리가 모두 포박된 채 좁은 수레에 앉아 옹기종기 몸을 붙인 채 졸고 있었다.
그렇게 한데 웅크려 있으니 긍지 높은 기사의 모습은 간데없이 그저 처량 맞아 보이기만 했다. 척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으나 당연히 풀어 줄 리는 없었다.
“저들은 다 공작가의 기사들이야. 저런 모욕을 당했다는 걸 알면…….”
“괜찮아.”
그는 리비를 안심시키며 모닥불에서 뜯어낸 짐승의 앞다리를 리비에게 내밀었다.
기름이 뚝뚝 흐르는 그것은 맛있어 보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식욕이 돌지 않았다. 아까는 본능에 져버렸다면 조금 배를 채운 지금은 걱정이 식욕마저 앗아가 버린 탓이었다.
리비는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안장도, 고삐도 모두 채워진 상태였다.
“저렇게 놔둬도 돼?”
리비는 조심스레 물었다.
“먹을 만큼 먹고 알아서 돌아와.”
보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까와는 달리 밖에 나와 있는 기사들의 수가 반쯤으로 줄어 있었다.
“졸리지? 그만 자자.”
“응? 어? 아?”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그를 보며 리비는 저도 모르게 앉은 그대로 몸을 물렸다.
“자자고.”
다시 반복된 답에 리비는 더 몸을 물렸다. 그러다가 모포와 망토로 꽁꽁 싸인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리비?”
“아읏…….”
그가 내민 손을 리비는 죽어라 피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꺄……!”
하지만 보리스는 리비의 몸을 냅다 안아 일으켰다.
“자자니까.”
“자자고?”
순간 든 생각에 자신이 불순한 걸까 싶어 보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맑디맑은 얼굴로 리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휴, 아니구나.’
한시름 놓은 리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만, 짐승들이 올 수도 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아우우,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히익.”
리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그러느라 그의 품에 꼭 안긴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거봐.”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리비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도감, 안도감이라니. 뻔뻔하게 결혼식 날 신부를 납치한 놈의 품에 안겨서 안도감을 느끼다니.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보다.
길고 단단한 팔이 어깨를 감싸 왔다. 자신의 몸을 전부 다 감싸 안을 정도로 커다래진 보리스에게선 남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체취는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왜 그래?”
“나, 냄새나?”
보리스는 심각해진 얼굴로 팔을 들더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쏴아아.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닥불이 타닥타닥 튀며 불꽃을 만들어 냈다. 불씨가 오지 못하도록 보리스가 막는 사이, 리비는 보고 말았다.
퍼드덕.
건너편 숲의 나뭇가지들이 강한 바람에 이리저리 휘자 무언가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어두운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저 뻥 뚫린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스멀스멀 움직이는 걸 보며 리비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리스.”
“응?”
“저, 저게 뭐야?”
리비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들을 가리켰다.
“아아.”
따라서 고개를 돌렸던 보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까마귀들이야.”
“까, 까마귀?”
아침에 보았던 까마귀 무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밝은 낮에 보는 까마귀들과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에서 보는 까마귀들은 전혀 다른 존재 같았다.
“여긴 까마귀의 숲이잖아.”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리비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눈이 기이할 정도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저 기분 탓인 걸까.
“글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까마귀들을 응시하다가, 다시 리비를 바라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저것들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이상하리만치 확신을 가진 목소리였다. 그저 추측이 아닌,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단정이었다.
“정말로?”
“응.”
보리스는 싱긋 웃으며 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고기는 먹지 않아.”
“…….”
“그러니 안심해.”
뭘 근거로 안심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자. 날이 밝으면 다시 말을 타야 해.”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는 리비를 망토와 모포에 돌돌 만 채로 안아 들었다.
공중에 몸이 들린 리비가 발을 허공에 대고 굴렀지만 그의 손힘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결국 리비는 포기한 채 그가 하는 대로 놔두는 수밖엔 없었다.
그는 리비를 안은 채 아까 쳐놓은 천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나 깃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가뿐한 몸짓이었다.
간이 천막은 두 사람이 바짝 몸을 붙여야 하는 크기였다. 보리스는 그 안에 리비를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다시 한번 모포를 더욱 단단히 덮어 주었다. 그러더니 바로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다, 답답해.”
리비는 둘둘 말아 놓은 모포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추울 텐데.”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빛내는 두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어렸다.
“전혀.”
춥기는커녕 온몸에 열이 올랐다. 그건 다 보리스 때문이었다.
리비는 힘껏 그의 몸을 밀어냈다. 꿈쩍도 안 할 거란 생각과 달리, 몸은 의외로 순순히 밀려났다. 얼마간 거리를 떨어뜨리자 그의 얼굴이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짙은 음영이 진 얼굴은 확연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년 시절의 앳된 느낌이 언뜻언뜻 보여서, 리비는 혼란스러워졌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보리스는 거의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다시피 했었다.
다시 만난 지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모든 기억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관 속에 누워 있다가 주술사의 주문으로 관을 깨부수고 나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순서대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보리스.”
“…….”
보리스는 빤히 눈을 뜬 채 리비를 돌아보았다.
“있지…… 나, 기억이 잘 안 나.”
“어떤 게?”
“그냥. 우리가…… 마을에서 같이 지냈던 거라든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이라든가……. 분명히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
보리스는 리비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마치 본래 하나였던 천이 갈가리 찢겼다가, 하나씩 짜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뚜렷이 기억나는 게 있는가 하면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사특한 주술에 당해 일부러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기억은 차차 돌아올 거야, 리비. 우리는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
보리스는 타이르듯 말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눈은 마치 보석을 박아 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전, 둘은 이렇게 어둠 속에서 마주 본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어쩌면 매일. 자주자주, 이렇게 마주 보고 누워 밤새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었다.
이토록 선명한데. 어째서.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보지 못할 수 있었을까. 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눈에 선연했다.
“느리지만 천천히, 결국 모든 것은 돌아오게 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날 믿어 줘.”
또 이상한 소리였다. 하나도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듣다 보면 이상하게 믿게 되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 때마다 리비는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네가 제일 무섭거든?”
리비는 뾰족한 목소리로 톡 쏘았다.
“…….”
상처받은 듯 흔들리는 눈을 보자 리비는 마음 한구석이 고장 난 의자처럼 덜컹거렸다.
“뭐, 왜.”
그가 저런 눈으로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지금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아님에도.
“그만 자, 나는 밖에 있을게.”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 천막을 나갔다. 문득 리비는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덜렁 혼자 있으려니 두려운 마음이 마구 밀려들었다.
눈을 꼭 감자 스산한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마구 스치는 소리,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깐 눈을 붙였다가 떴을 때는, 바깥에서 비쳐드는 모닥불 빛도 거의 흐려졌을 때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리비는 천막 입구를 가려 놓은 천을 걷어 올렸다. 캠프장 가운데의 모닥불을 제외하고는 새카만 어둠에 더럭 겁이 났지만 도망칠 거면 차라리 완전히 어두운 것이 낫다.
“리비.”
불쑥 앞으로 들이밀어진 얼굴에 리비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꺄…… 엄마야.”
보리스가 다가오더니 양팔을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시선에 리비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왜 일어났어? 목말라? 배고파?”
그의 질문에 리비는 연달아 고개를 흔들었다.
“어, 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자 보리스는 이제는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나는 그럼 보, 볼일이 있어서.”
리비는 살짝 몸을 꼬며 말했다.
“이리 와.”
그가 내민 손을 리비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같이 가자고?”
보리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천진난만한 웃음도 함께였다.
“싫어.”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보리스는 금세 상처받은 듯 눈꼬리를 내렸다.
“혼자 있고 싶어.”
보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는 같이 갔잖아.”
“아까는, 아, 아까였고.”
그런데 지금은 뭐가 문제냐는 듯, 돌아오는 시선에 리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 바보 멍청이.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야?”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눈에 잔뜩 힘을 줘 부라리기도 했다. 그래 봐야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너무 예쁘잖아, 리비.”
그렇게 리비는 또다시 의도치 않은 자신의 귀여움을 탓해야만 했다.
“누,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 거라고 그랬지, 보리스?”
“응.”
“지금이 바로 그때야, 난. 네가 따라오면 무지무지하게 미울 거라고.”
“미워……?”
“응, 미워할 거야, 아주 많이.”
그녀의 선언에 보리스는 잠시 눈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비가 원한다면. 잠시 혼자 있어. 그 대신 일이 다 끝나면…….”
“그만 말해, 그마안!”
지나치게 자세하게 이어지는 말에 리비는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녀올게. 여기 꼼짝 말고 있어야 해, 알았지?”
리비는 커다란 나무 둥치 앞에 서 있는 보리스에게 거듭 당부했다. 그리고 찢긴 드레스를 주섬주섬 모아 쥐고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보리스가 제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놀이라고 생각해. 알았지? 여기서 천천히 오백까지 세어 줘. 그 전까진 절대, 절대 오면 안 돼. 내 말, 잘 듣잖아, 보리스는.”
“응.”
유순하고도 순순한 대답에 리비는 활짝 웃어 보였다.
“얌전히 기다려, 알았지?”
“응. 하지만 큰 바위 너머로는 가지 마, 위험하니까.”
몇 번이나 다짐받고서야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옷자락이 덤불에 부딪혀 나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여기 있었구나.”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한 리비가 기쁨에 가득 차 말했다. 행여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그녀는 조심조심 말을 향해 다가갔다.
붉은 갈색 털을 가진 말은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 중 한 명이 몰던 말이었다.
풀을 뜯으러 간 말 중에 캠프에서 떨어져 숲으로 들어가는 말 한 마리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리비는 말의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보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비교적 온순해 보이는 말은 그녀가 다가오자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제 하던 일에 열중했다. 별로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해서인지 풀을 뜯는 모습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부탁할게.”
리비는 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알아들은 것인지 뭔지 말은 푸르르 고개를 털어 댔다.
“좀 도와줘, 응?”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속삭였다. 말을 타는 것이라면 그녀도 자신 있다. 마을의 온갖 말들은 다 한 번씩은 그녀를 태운 적이 있을 정도다.
“잘 부탁해.”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말의 잔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말은 큰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착하지. 이리 온.”
고삐를 살살 잡아당기자 말은 처음에는 좀 버티다가 이내 그녀를 따라왔다.
마침내 안장 위로 올라앉은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기쁨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자.”
말발굽은 축축한 땅 위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낙엽이 없는 계절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낮춘 채 말을 몰기 시작했다. 벌써 캠프에서 꽤 먼 거리까지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들이라지만 이처럼 어둡고 미로처럼 얽힌 숲속에서 그녀를 찾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지 않는 한은.
“천천히 오백까지 세어 줘.”
보리스는 지금쯤 어디까지 숫자를 세었을까.
말을 몰아서 점점 더 거리를 벌려 갈수록 심장도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은 이 숲을 벗어나야 해.’
길을 알려면 물이 흘러가는 소리에 집중해야만 한다.
“근처에 계곡이 있을 텐데…….”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폭포나 계곡이 있다는 뜻이다.
리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 채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사백구십팔, 사백구십구…….”
졸졸거리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든 건 순간이었다.
리비는 뭔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좀 더 또렷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오백.”
누군가의 속삭임에 말이 멈춰 섰다. 그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 보라색 눈과 마주치고야 말았다.
“나 왔어, 리비.”
순간 서늘한 바람이 리비를 스치고 지나갔다. 리비는 몸을 돌린 자세 그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너, 너.”
당황한 나머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거기에.”
보리스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온통 새카만 갑옷 탓에 어둠과 뒤섞여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며 그는 리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없이 해맑은 얼굴로 웃으면서.
“리비가 숫자를 세라고 했잖아.”
보리스의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 그건 그동안 계속 봐온,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리비는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응? 그래서 숫자를 셌어.”
휙, 그 높은 나뭇가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린 보리스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랑 놀자는 거잖아, 그렇지?”
“어? 아…….”
보리스는 말의 바로 앞에 서서 리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위치였다.
“그래서 가만히 숫자를 셌어. 그리고 찾았어, 리비를.”
강아지처럼 올려다보는 시선은 흡사 주인이 던진 공을 물고 돌아온 강아지 같았다.
어서 칭찬해 줘, 예뻐해 줘. 그리고 다시 놀아 줘.
정작 그 모습을 보는 리비는 모래라도 한 움큼 퍼먹은 것처럼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런데 어디 가게, 리비?”
“…….”
신비롭게 빛나는 보라색 눈은 그녀를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비는 열심히 할 말을 찾았다. 찾고 또 찾았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솔직해지는 건 별로 바람직한 결정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졌네, 보리스. 이렇게 잘 찾아내다니, 굉장해.”
리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 주저하는 손을 본 보리스가 활짝 웃더니 당연하다는 듯 그 손에 얼굴을 묻어 왔다.
매끄러운 피부와 까슬한 속눈썹, 말캉한 입술이 손바닥을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난 리비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리비는 어쩐지 그다음 말이 들린 것만 같았다.
“내가 찾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위험했을 거야. 이 숲엔 위험한 것들이 많이 살거든. 리비도 들어 봤잖아.”
대체 그 위험이라는 게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숲에서 현재 가장 위험한 건 다른 뭣도 아닌 바로 너라고.’
리비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았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으응.”
리비는 대답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고삐를 잔뜩 틀어쥔 손바닥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다행히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있으니 괜찮아, 리비.”
보리스는 안장을 잡은 채 단숨에 말 위로 뛰어올랐다.
순간 갑작스레 쏠린 무게 중심에 리비는 잠시 몸을 휘청였다. 그러나 곧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 팔에 몸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털썩.
리비의 뒤에 앉은 보리스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비는 영문을 몰라 그를 쳐다보다가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리비는 꽉 움켜쥐고 있던 고삐를 천천히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보리스는 웃으며 고삐를 감아쥔 채 한번 발을 굴렀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캠프 쪽으로 지체 없이 말을 몰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순간이었다.
“있지, 보리스.”
“응?”
“네 말은?”
갑작스레 솟아난 한 가닥 의문에 리비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처음에는 그가 말을 타고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가 타고 온 말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발이 빠르다 해도 뛰어서 그녀를 쫓아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쫓아오는데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건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궁금해?”
커다랗게 떠오른 달 아래, 보리스의 눈은 한층 더 신비롭게 빛났다. 리비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리비.”
리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고개를 들어 보리스의 날카롭게 빠진 턱선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 시선을 눈치챈 보리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어쩐지 서늘한 기운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야.”
달 아래 더욱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눈동자에 리비는 옴짝달싹 못 했다.
고개를 저은 뒤 시선을 떨어뜨리자 그의 팔이 더욱 단단히 허리를 감아 왔다. 그 손길대로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리비는 캠프장으로 돌아와 다시 천막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좀 더 쉬어. 동이 트면 출발할 거야.”
리비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천막의 입구를 가리는 천이 길게 늘어졌다. 마치 감옥문이 닫히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했다.
이제는 정말로 갇혔다.
그의 싸늘한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봐준 것이다. 순하고 말귀 못 알아먹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으나 그 실상은 예리했다. 마치 야생의 짐승 같은 촉을 가지고 있었다.
보리스는 쉬라고 했지만 리비는 쉴 수 없었다. 잠들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두 다리를 꼭 모은 채 앉아 무릎 위로 얼굴을 푹 파묻을 뿐이었다.
***
캠프로 돌아오고 얼마 후, 보리스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이 묶인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은 수레에 실린 채 다시 굴욕적인 여정을 계속해야 했고, 리비는 여전히 보리스에게 안긴 채 말을 타고 달려갔다.
말을 타고 오래 달린 탓에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쉬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겪은 오싹한 일이 자꾸만 맘에 걸려서였다.
‘나중에 알려 준다니.’
그가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을 쫓아온 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말은 계속해서 달려갔다. 중간중간 피로함에 설핏 잠이 들다 깨다를 반복할 때마다 보리스의 눈이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은 진한 보랏빛으로 바뀌었고, 차차 엷은 색으로 변하더니 희뿌연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리스를 포함해 온통 새카만 갑주로 몸을 감싼 기사들은 그 밝음과 확연히 대비되었다.
“다 왔어, 리비.”
그의 속삭임에 리비는 눈을 떴다. 잠을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그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어딜……?”
리비는 눈을 비비며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저 너머, 온통 흰 빛으로 이뤄진 성이 높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성의 외벽은 어디서 구했는지 온통 흰색 돌을 깎아 만든 벽돌로 쌓아 올려졌고, 아침 햇살을 받아 청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죽어서 천국에 온 걸까.’
이제 그녀는 헛것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 난 죽은 거야. 죽어서 이 시커먼 사신들이 날…….’
웅얼웅얼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데 별안간 몸이 공중으로 들리는 게 느껴졌다.
“내려 줄게.”
보리스는 이번에는 어깨에 짐짝처럼 걸치는 대신에 어깨와 무릎 아래로 각각 손을 집어넣어 안아 올렸다. 드레스를 찢어 부피가 줄어든 덕분이었다.
같이 멈춰 선 기사들도 하나둘 말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여긴 어디야?”
리비는 곧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고 싶었다.
“에드라크성.”
“에드라크…….”
조용히 되뇌던 리비는 그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티소 마을이 속한 곳이 바로 에드라크령이니까.
에드라크성.
에드라크령의 대영주가 기거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자리는 오랜 기간 비워져 있었고, 에드라크령에 속한 크고 작은 영지들은 각각 분할되어 자치적으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성은 가시덤불에 뒤덮여 유령들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여긴…… 왜 온 거야?”
에드라크성과 보리스. 둘의 상관관계가 언뜻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왜 자신을 이 성에 데려왔으며, 버려진 지 오래된 성은 왜 저렇게 멀끔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인지. 혼란한 생각에 답하듯 보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이 성의 주인이니까.”
보리스의 대답에도 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 잘 해석이 되지 않았다. 일시에 모든 피로가 밀려와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의 품에 기댄 채로 그녀는 보리스가 그들에게 뭐라 뭐라 지시하는 것을 보고 들었으나 그 풍경과 소리는 모두 까무룩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리비?”
그가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눈꺼풀은 묵직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시야는 뭉개지고 사람은 둘로 나뉘어 보였다. 그가 리비, 라고 부르는 소리조차 먼 산의 메아리처럼 귓가에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