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팔려 가기 좋은 날 (3/20)

2. 팔려 가기 좋은 날

휘영청 뜬 달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밤이었다. 신부들이 으레 느낀다는 결혼 전날 밤의 설렘 따윈 느낄 겨를도 없었다.

리비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꿈으로만 느껴질 뿐.

결혼식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리비는 한쪽 벽에 걸어 놓은 신부의 의상으로 다가갔다.

섬세하게 짠 하얀 레이스와 비단으로 만든 의상은 만지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수에 쓰인 실은 모두 진짜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넓게 펼쳐 놓은 드레스 자락을 따라 리비의 시선이 이동했다.

입으면 아름답게 보일 테지만 풍성한 드레스 자락 때문에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어 보였다.

이걸 입고서, 내일 홀로 버진 로드를 걸을 생각을 하니 또다시 앞이 막막해졌다.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 타지에 사는 남자의 부인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시골 귀족의 딸이 하루아침에 왕녀의 딸로 둔갑해 공작 부인이 되다니.

언뜻 듣기엔 대단한 신분 상승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듣는 귀가 있었다. 외부와의 소통이 그다지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으나 리비의 신랑이 될 남자에 대한 소문은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갔다.

“이미 정부만 여럿이래.”

“자식들도 있다지?”

“아들, 딸 모두 합쳐 일곱이래.”

“어머, 그럼 리비가 시집가면 뒷방 신세가 되는 건가?”

소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변태라던데. 여자를 매질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런 것에서 쾌락……을 느낀다나?”

마을 사람들이 자기 몰래 떠들던 소리를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왕국군의 방문 이후,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은 조금 달라졌다. 전과 다름없이 대해 달란 말에 그러는 척은 했으나 이제는 완벽한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휙.

달빛이 드리운 방 안에 무언가 검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

뒤를 돌아보자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뭐지?”

무언가 검고 커다란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아주 커다란 새의 그림자 같은.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물론 덩치가 사람만 한 독수리 같은 새가 실제로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깊은 숲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까마귀의 숲’이라든가.

“춥네.”

밤바람을 맞아서인지 몸이 으슬으슬하다.

휙.

등 뒤로 또 무언가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비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만 보일 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

리비는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리고 닫힌 창문 위로 커튼을 드리운 뒤,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은 그녀를 어느덧 깊은 잠으로 끌고 들어갔다.

***

“음…….”

쏟아지는 햇살에 리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란 바로 그날.

리비는 팔을 뻗어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깜박였다.

“깃털……?”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침대 베갯잇에 떨어진 건 커다랗고, 검은빛을 띤 깃털이었다.

푸른 빛을 띨 정도로 새카만 윤기가 도는 날개깃은 양손을 모아도 한 번에 다 담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새의 깃털이기에 이렇게 큰 것일까. 색을 봐서는 까마귀 같은데 이런 크기의 까마귀가 있을 수가 없잖아.

“뭐 이렇게 커?”

기이할 정도로 큰 깃털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리비는 간밤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아주 커다랗고 푹신한, 그러면서 따뜻한 무언가에 몸을 맡겼던 꿈을. 아주 커다랗고 부드러운 날개에 푹 파묻힌 것만 같았다.

“……이상한 꿈이야.”

온몸을 감쌌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기가 아직도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휘잉.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리비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은 또 왜 열려 있어?”

분명히 닫아 두고 잤다. 커튼까지 쳤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어째서.

커튼도 활짝, 창문도 활짝. 자는 동안 잠금쇠가 풀리기라도 한 걸까. 그리고 저 창문을 타고…….

“새가 들어왔었나?”

손에 든 검은 깃털을 멍하니 보던 리비는 창문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정신 차려.”

리비는 탁탁 뺨을 내리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리비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기지개를 쭉 켰다. 간밤의 꿈 같은 건 잊기로 했다. 그저 결혼하기 싫은 마음에 꾼 이상한 꿈일 따름이니까.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나무 잎사귀에 찬란하게 부서졌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반짝거리는 것들투성이였다.

“날씨 한번 좋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 새빨간 버진 로드를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오늘은 팔려 가기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

“리비, 이 마을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결혼식 들러리를 서기 위해 몰려든 친구들은 아침나절부터 그녀의 곁에서 끝없이 칭찬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거울 속 리비 하이든은 자신이 보기에도 이제껏 보아 왔던 어느 날보다 아름다웠으므로.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대부분 그녀가 입고 걸친 것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아주 값비싼 것들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흰색 드레스는 소매와 치맛단에 빼곡히 금실이 수놓여 있었다. 거기에 들어간 금값만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옷은 바닥에 질질 끌릴 만큼 길었고, 소매는 크게 부풀려 옷감을 최대한 많이 낭비하도록 만들어진 드레스였다.

이렇게 크게 부푼 퍼프 소매를 입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옷감도 모두 외국에서 수입된 최고급 천이고, 신발에도 작은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이 정도로 만들려면 솜씨 좋은 장인들이 몇 날 며칠 꼬박 밤을 지새워야 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물건들은 흔하디흔한 귀족이나 부자들이 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의상과 신발뿐만이 아니었다. 목에도, 귀에도, 모두 호화찬란한 장신구들로 빼곡했다. 모두 신랑이 보낸 예물들이다.

“자, 다 됐습니다.”

정성껏 말아 올려 몇 가닥 흩어지게 한 머리 모양은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흘렀다.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의 아내가 될 신부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리비가 몸을 일으키자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옆에 쌓인 보석함 중 하나를 꺼내 열었다.

기다란 함에 담긴 것은 진주를 엮어 만든 목걸이였다. 백 개는 족히 넘는 개수라서 온몸을 칭칭 감고도 남을 길이였다.

“와.”

친구들은 그 안을 들여다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빛냈다. 그만큼 진주가 뿜어내는 광택은 온 방을 환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아름다워. 이걸 두르면 진주의 여신 같을 거야. 몸 전체를 휘감을 수도 있겠어.”

친구 하나가 한 말에 리비는 픽 웃어 버렸다.

“그래, 사슬 같네. 죄수한테 묶기 딱 좋아.”

그 말에 방의 분위기는 싸해졌다. 리비는 손을 뻗어 진주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차르르,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진주알들을 보자 한숨이 더욱 크게 새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사슬.

리비의 눈에는 진주목걸이가 그렇게 보였다.

“아니야, 아주 아름다운걸.”

앙느는 서둘러 말했다.

“네 뽀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려. 봐, 진주색과 네 피부가 똑같아.”

앙느는 진주를 리비의 얼굴 옆에 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

리비는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고, 앙느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걸어 드릴게요.”

리비는 영혼이라곤 다 빠져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목걸이는 목에서 두 번을 감고도 넉넉한 길이였다. 어깨와 가슴까지 사선으로 늘어뜨려 몸을 장식한 뒤 분장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뗐다.

“무거워요.”

드레스에도 이미 보석이 가득 박혀 있었는데, 수백 개의 진주로 만들어진 목걸이까지 거니 몸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곧 적응되실 거예요. 봐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

리비는 거울 속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진주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이 자신이 보기엔 한없이 바보처럼 보였다.

“참, 붉은 장미를 꽂아야죠.”

분장사는 손바닥을 딱 치더니 화장대 위에 올려진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피처럼 붉은 빛깔이 아름다운, 싱싱한 생화였다.

“신랑 가문의 상징이니까요.”

분장사는 꽃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며 장식하기 가장 좋은 곳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붉은 장미.

그녀가 오늘 시집갈 레제트 가문의 상징인 꽃이다.

리비의 가슴에도 이미 붉은 장미꽃으로 만든 장식이 붙어 있었다. 신부가 어느 가문에 속하는지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식이었다.

리비는 크고 붉은 장미 꽃잎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난 흰색이 더 좋은데.”

그 말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맴돌았다.

“흰색은 이미 많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드레스도 그렇고. 흰 장미는 그대로 묻혀 버릴 거예요.”

“그렇겠지.”

리비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흰 장미가 어울리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한 문제조차 되지 않으니까.

오늘부터 자신은 자신이 자란 하이든 백작가의 상징인 흰 장미를 쓸 수 없다. 자신을 장식하는 꽃의 색마저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가 좋겠어요.”

왼쪽 귀 바로 옆에 꽂은 붉은 장미를 끝으로 모든 머리 손질이 끝났다. 분장사는 한쪽에 놓아둔 벨벳 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드디어.”

함의 뚜껑이 열리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여자들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정말 아름다워.”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힌 관(冠)은 꺼내자마자 영롱한 무지갯빛을 내기 시작했다.

짝짝짝.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친구들은 손뼉을 부딪쳤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신부의 표정은 영 밝아지지 않았다.

잘 손질된 리비의 머리 위에 번쩍이는 티아라가 놓였다. 그 위에는 거미줄처럼 고운 실로 짠 하얗고 투명한 베일을 덮어씌웠다.

“이렇게나 얇고 고운 천이라니. 아마 엄청 비쌀 거야, 그렇지?”

아리사의 말에 다들 일제히 응, 하며 대답했다.

베일을 뒤집어쓰자 시야는 부옇게 흐려졌다. 친구들의 이목구비가 뭉개져 잘 보이지 않았다. 흐려진 시야에 적응하려 리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아주 아름다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친구들은 박수를 쳤다.

들러리를 맡은 친구들의 손에는 붉은 장미로 만든 작은 부케가 들려 있었고, 같은 꽃으로 만들어진 화관도 쓰고 있었다. 주인공인 신부만큼이나 정성 들여 꾸민 차림새였다.

“그러게, 팔려 가는 신부치고는 아주 때깔이 괜찮아.”

그녀는 거울 속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말에 빙 둘러서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팔려…… 가다니. 신성한 결혼식에.”

절친한 친구인 아리사가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밑까지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린 아리사를 따라 나머지 친구들도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앙느는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럼, 신성하지. 신성한 돈이 오갔는데.”

돈만 오간 건 아니었다. 무려 이 왕국의 평화가 오고 갔으니까.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친구들은 다시 굳은 얼굴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는 레제트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리비.”

아리사가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버지한테 교육이라도 받은 거야, 다들?”

리비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친구들마다 고개를 떨구거나 천장을 쳐다보는 등,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끼리 굳이 연극 안 해도 돼, 괜찮아.”

리비는 아리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내가 얼마짜리 신부인데. 지참금을 주는 게 아니라 받는 신부는 아마 이 나라를 통틀어 나밖에 없을 거라고.”

리비는 픽 웃은 뒤 일어났다.

“신랑 없이 결혼하는 것도 처음일 거고…… 아, 이건 아닌가?”

결혼을 앞두고 전장으로 떠난 연인을 위해 여자가 홀로 신부가 되어 결혼식을 치른 사례는 종종 들어 본 일이 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결혼식도 사흘마다 열리겠군.”

마을에 단 한 명뿐인 주교는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결혼식마다 불려 다니느라 바쁠 게 분명하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또 다른 친구인 루사가 말했다.

“칼리니 기사단 덕분이지.”

양국의 길고 긴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순전히 칼리니 기사단의 공이었다.

원체 외진 곳에 있어서 웬만한 규모의 전쟁은 일어나도 모르는 마을이었지만 7년 전쟁은 그만큼 길고도 길었으며,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모조리 전장으로 끌고 나갈 만큼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제는 제발 그만 좀, 이라는 탄식이 모두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전쟁을 끝내 주었으니 칼리니 기사단은 당연히 모두의 추앙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아아, 그 미친 까마귀?”

리비는 문득 떠오른 듯 대답했다. 칼리니 기사단의 수장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불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게 무장한 기사들이 난입한 전투는 마치 까마귀 떼들이 시체를 쪼아 먹는 것처럼 보였다고.

특히 그 선봉에 섰던 기사단장은 작위도, 이름도 아닌 통칭 ‘미친 까마귀’로 불리고 있었다.

“그 공으로 이번에 공작이 되었대.”

“대단하네.”

리비는 건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굽의 구두가 발을 조여 와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공작? 작위명은 뭔데?”

“모르지, 나야.”

원래부터 귀족이 아니라 왕이 새로이 귀족 신분을 주고 영토를 하사할 경우, 대개 작위명과 다스리는 지역의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다스릴 지역의 이름이 곧 작위명이 되는 경우였다.

“곧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공을 치하받는대.”

“영토도 하사받겠지?”

“물론이지.”

“어느 곳을 다스리게 되실까?”

“글쎄. 엄청 좋은 곳 아닐까?”

“다른 데는 몰라도 이렇게 시골 구석은 아닐 거야.”

아아, 그렇구나. 리비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옆에서 부케를 들고 서 있는 아리사를 보았다.

“아리사, 너도 곧이지? 결혼 말이야.”

“나? 응…….”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떨구는 친구를 보며 그녀는 아리사의 손을 맞잡았다.

“축하해. 네 들러리는 못 서겠지만.”

아리사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이 맺혔다.

“자, 여기.”

거울을 통해 마지막 옷매무새를 점검한 그녀는 아리사가 건네준 부케를 집어 들었다.

그것 역시 온통 붉은 장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리비는 부케를 들어 올려 꽃 속에 잠시 얼굴을 파묻었다. 향기가 퍼져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만큼 짙은 향기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방에 있는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언니.”

“누나.”

열린 문틈으로 작은 머리 두 개가 빼꼼히 들어왔다.

“에드나, 리오.”

리비는 쌍둥이 동생들을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진짜 예쁘다.”

쌍둥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름답게 꾸민 리비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와다다 뛰어와 리비에게 안겼다.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들은 니콜라스가 고향으로 돌아와 맞은 아내, 즉 리비의 계모가 낳은 아이들이었다. 몸이 약했던 계모가 먼저 세상을 뜬 뒤 리비는 쌍둥이를 거의 키우다시피 해왔다. 피는 반만 섞였지만 한 번도 의붓동생들이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정말 가?”

에드나가 리비의 드레스 자락에 푹 파묻었던 얼굴을 들며 물었다.

“싫어, 싫어.”

리오도 길게 늘어진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제 못 봐?”

“…….”

말갛게 올려다보는 눈에 리비는 그만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버지를, 동생들을.

“……당연히 볼 수 있지.”

“리오, 누나가 결혼하면 공작 부인이 되는데, 공작님께서 성으로 초대해 주실 거야.”

아리사가 쌍둥이들을 달랬지만 리비는 그것이 턱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티소 마을이 속한 에드라크 지역은 세셔 왕국의 북부에 해당하고, 레제트 공작령은 왕국의 남쪽이다.

빨리 가봐야 마차로도 한 달 가까이 가야 하는 거리였다. 중간에 험난한 산이나 늪지대가 가로막고 있는 곳도 있어 멀리 돌아가느라 시간은 더더욱 지체될 게 뻔했다.

그런 거리를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이 쉽게 오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오늘이 마지막,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었다.

“당연히 만날 수 있지.”

리비는 몸을 낮춰 쌍둥이를 끌어안았다. 조그맣고 따뜻한 몸이 폭 안겨 왔다. 순간 눈이 시큰해져서 리비는 급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시간이 됐어.”

친구의 말에 리비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나가자.”

***

리비를 예식을 치를 예배당까지 데려다줄 마차는 저택 중앙에 서 있었다. 리비는 차분히 돌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양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는 손길이 바빴다.

까아아악.

별안간 들려온 소음에 리비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지붕 위로 옹기종기 붙어 있는 새 발바닥이 보였다.

“요새 부쩍 까마귀가 늘어났네.”

리비는 미간을 좁히며 까마귀들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르게 까마귀는 점차 그 수를 늘려 갔다.

한두 마리쯤이야 숲에서 길을 잃은 덜떨어진 까마귀들이 날아든 것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저렇게 떼 지어 나타나는 건 분명히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들 중 하나이려나…….”

자는 동안 날아든 검은 깃털의 주인이.

“응? 무슨 소리야?”

친구의 물음에 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뒤에서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던 친구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리비, 공작님께선 널 아껴 주실 거야.”

아리사가 말했다.

“맞아. 그 성의 여자들 중 아마도 네가 제일 어리고 예쁠…… 아야.”

주절주절 떠들어 대던 리타는 옆에서 꼬집는 손길에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공작 부인이니까. 부러워, 리비. 역시 귀족은 다르구나.”

친구의 말을 리비는 한쪽 귀로 흘려 버렸다. 친구가 자신을 정말로 부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놀리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오늘 결혼을 하는 새신부니까. 오늘로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먼저 출발할게.”

리비는 마차 안에 드레스를 넓게 펼친 채 앉았다. 레제트 공작이 신부를 위해 보냈다는 마차는 푹신한 의자와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를 자랑했다. 이런 마차를 본 적은 처음이라 리비도 절로 입이 벌어졌다.

마차가 부드럽게 흔들리더니 곧장 출발했다. 닫힌 창 너머로 친구들이 흔드는 손을 보다가 리비는 다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앉았다.

리비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이 길을 다니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녀가 정성껏 가꾸어 놓은 흰 장미가 피어난 길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특별할 것 없었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리비는 점점 더 심란해졌다. 이 마을의 모든 것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리비는 가만히 풍경을 눈에 담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마부를 소리쳐 불렀다.

“어딜 가는 거예요? 이쪽은 예배당 가는 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티소 마을을 빠져나가는 외곽 쪽 길이었다.

“저기요, 저기…….”

마부석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를 부르던 리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버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고삐를 쥐고 있는 사내는 바로 하이든 백작, 니콜라스였다.

“어떻게 여기 계세요? 우리 어디로…….”

“리비, 미안하다.”

하이든 백작은 쥐고 있는 고삐를 더욱 바투 쥐었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마을의 중심부에서 더 멀어져 갔다.

“아비 노릇을 잘한 건 아니다만 그래도 네게 이런 결혼을 시킬 수는 없다.”

니콜라스는 의지로 가득 찬 눈을 빛냈다. 그러나 리비는 지금 이 순간, 감동보다는 공포가 먼저 밀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는 딸을 납치해 원치 않는 결혼으로부터 도망시키는 중이었다.

“아버지, 미쳤어요? 이걸 왕이 알면, 아니 그 전에 공작이 우릴 죽이려 할 거란 말이에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모해도 이보다 더 무모할 수는 없었다.

왕이 명한 결혼이었다.

자신의 신랑 될 사람은 왕조차 함부로 못하는, 왕국의 거의 3분의 1에 가까운 땅을 지배하는 공작령의 주인이었다. 어느 쪽에 들키든 자신과 아버지는 물론, 쌍둥이 동생들까지도 무사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마차 세워요. 당장이요. 안 그러면 큰일 나요.”

리비는 니콜라스의 옷깃을 붙들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차 탓에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관이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 꼴이 마치 값싼 모조품처럼 느껴졌다.

“널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낼 순 없다, 여자도 자식도 주렁주렁 딸린 놈에게 내 딸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니콜라스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났다. 진실로 한이 맺힌 목소리였다. 딸의 결혼이 결정된 뒤로 내내 술만 마시던 아버지였다. 마을의 관리 일에도 소홀한 채 집에 틀어박혔었다.

“그 마음은 알겠어요, 그런데 이러면 진짜 우리 다 죽을 수도 있어요.”

리비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자신의 도망으로 말미암아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마을을 초토화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아버지, 제발…… 꺄악!”

난데없이 날아 들어와 꽂힌 화살에 리비는 비명을 내질렀다.

두두두.

마차를 끄는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히이잉.

말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몸이 앞으로 쏠린 리비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밖으로, 마차를 에워싼 열댓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기사들에게 붙들린 니콜라스가 보였다.

“아버지!”

손을 내뻗는 리비의 팔을 다른 기사가 잡아 일으켰다. 정중함을 가장한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꽉 붙들린 몸 탓에 니콜라스에게 가지도 못했다. 이미 몇 대 얻어맞은 듯, 니콜라스의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보는 리비의 얼굴에도 핏기가 싹 사라졌다.

“가시지요.”

을러대는 목소리에 리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버지를 놔줘요, 이게 뭐 하는 짓이죠?”

리비는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신부를 빼돌리려 했으니 중죄입니다.”

기사는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도주의 우려가 있으므로, 하이든 백작은 저희 쪽에 구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놔!”

리비는 다시 마차로 끌려들어 갔다. 손속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내 딸에게 손대지 마!”

니콜라스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그의 얼굴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큭, 크윽…….”

애써 참는 괴로운 신음이 리비의 가슴을 후벼팠다. 흙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니콜라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코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짓이겨진 눈꺼풀 새로 간신히 눈을 뜨고 리비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버지!”

리비는 발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건 기사의 검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기사가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건달보다 더한 얼굴이었다.

“백작을 저대로 둘까요?”

“…….”

리비는 기사를 한 번, 그리고 다시 자신을 가로막은 검을 한 번씩 본 뒤에 마침내 입을 뗐다.

“도망가지 않아요. 약속한 대로 결혼……할 테니까.”

리비는 건너편의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말라는 듯 달싹거리는 입술이 애처로웠다.

“아버지를 놔줘요.”

***

예배당 밖의 분위기는 상당히 흉흉하게 변해 있었다. 무장을 한 기사들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일렬로 늘어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곁눈질로 험악한 분위기를 헤아렸다. 리비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차에서 내려섰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걸어갔다.

니콜라스가 붙잡혔다. 이 결혼에 강제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아버지가 붙들린 모습을 보니 그것이 더 처참하게만 느껴졌다.

리비는 열린 예배당 문으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랑 입장은 생략, 리비는 홀로 그 길을 걸었다.

하객석을 지나는 동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 결혼이 어떻게 성사되었는지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랜 전쟁을 지속해 온 왕실과 레제트 가문의 종전 협약. 그 대가로 바쳐진 게 리비였다.

명예로운 결혼으로 치켜세웠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불쌍한 리비.’

물론 그중에서도 자그마치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는 여론은 있었지만, 거의 인질과 다름없이 끌려가는 상황임을 고려해 보면 그건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그냥 얌전히 레제트 영지로 갈 걸 그랬나.’

그러나 이미 시작된 결혼식이다. 여기서 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비는 더욱 당당하게 걸었다.

베일에 가려져 결혼식장 안은 엷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버진 로드의 양쪽에서 입장한 친구들은 손에 든 꽃바구니에서 꽃잎을 한 움큼 쥐어 허공에 날렸다. 오로지 홀로 입장하는 새신부를 위해서였다.

리비는 성큼성큼 걸어 단상 앞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발걸음에 미처 바구니 속 꽃을 다 뿌리지 못한 친구들이 뒤까지 쫓아와서 꽃잎을 뿌려 댔다.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꽃잎들이 길게 늘어진 베일 위로 내려앉았다.

홀로 입장한 신부는 주교의 주례를 기다렸다. 단상에 선 채로 반쯤 졸고 있던 주교는 그녀가 앞에서 빤히 올려다본 지 5분쯤 되어서야 푸드덕, 몸을 털며 일어났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성혼 선언문 낭독이 끝났다.

리비는 혼인의 증거로 제 앞에 내밀어진 반지를 뽑아 들고는 마치 소에 코뚜레를 끼워 넣는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신부는 결혼 서약서에 서명을 하십시오.”

주교의 명에 따라 리비는 깃펜에 잉크를 묻힌 뒤 자신의 결혼 서약서를 내려다보았다.

결혼 서약서에는 이미 남편이 된 레제트 공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쓰기 귀찮았던 것인지, 아니면 요새 귀족들에게 유행하는 필체가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명은 상당히 흘려 쓴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비어 있는 자리가 바로 리비가 서명할 곳이었다.

‘여기에 서명을 하면.’

정말로 레제트 공작 부인이 된다.

마차로도 꽤 오래 걸리는, 생전 가보지도 않은 왕국의 남부 지역으로 가서, 그곳을 통치하는 왕이나 다름없는 공작의 아내가 된다.

그것이 리비가 머리로 인식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는 조금 달랐다.

‘누가 좀 납치해 주면 좋을 텐데.’

불현듯 든 생각에 리비는 몸을 움찔 떨었다.

납치라니.

스스로 납치되길 바라는 신부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리비는 서둘러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으려 애썼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도 명색이 공작 부인인데. 밑질 것 없잖아.

리비는 결혼을 준비하는 내내 되뇌었던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펜촉 끝에 묻은 잉크는 바싹 말라 버렸다.

“신부는 결혼 서약서에 서명을 하십시오.”

깃펜을 든 채 굳어 버린 리비를 보다 못한 주교가 흠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깃펜에 잉크를 듬뿍 묻혀 마침내 서명하려는 찰나였다.

똑.

잉크는 종이에 떨어지기 직전 불어온 바람에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기고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식장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서로 바쁘게 굴리는 눈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자명했다.

이건, 명백히 불길한 징조였기에.

“…….”

리비는 잠시 멈췄다가 펜을 다시 잉크병에 담갔다. 그리고 꺼내기를 반복했으나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허망하게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신성한 결혼 서약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쓰이다 만 채 어정쩡한 얼룩만 남겨지게 되었다.

“불길하다, 불길해.”

하객석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리비의 귀에 들리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리비는 마지막으로 잉크병에 깃펜을 담갔다. 식장 안 모든 사람의 눈이 일제히 그녀의 손으로 쏠렸다.

휘잉.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꼿꼿이 서 있던 잔디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몸을 휘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해졌다. 날아가는 모자를 붙잡고, 휘날리는 치마를 부여잡는 등 정신이 없었다.

“꺄아아악!”

여기저기서 내지르는 비명으로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신부만큼 바쁘지는 않았다.

훌러덩 뒤집힌 드레스를 끌어 내려 부여잡고, 날아가기 직전인 관을 움켜쥔 채, 리비는 바람이 속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붉은색 버진 로드 끝에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남자를.

마치 자기 신부를 데리러 왔다는 듯이 거침없는 발걸음의 흑기사를.

“누구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휘감은 남자는 손에 긴 낫만 들려 주면 영락없이 사신처럼 보였다.

시골 마을 야외 예배당에, 그것도 결혼식을 위해 온통 흰 천과 꽃으로 꾸며 놓은 공간에 걸어 들어온 암흑의 기사는 이질적이다 못해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결혼식장에 난데없이 난입한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미안, 자기야, 내가 늦었지?’

리비의 귀에는 환청이 들렸다. 남자는 금세라도 입을 열어 사과할 것 같았다.

입고 있는 갑옷만 아니라면 정말로 결혼식에 늦은 신랑이겠거니 짐작할 만한 여유작작한 태도였다.

그 당당함에 들러리를 섰던 그녀의 친구들도 쫙 갈라져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

리비는 바로 자신 앞에서 멈춰 선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개를 꺾어야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남자는 큰 키에,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서 있는 모습만 보자면, 걸어오는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누가 장식을 들어다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히익.”

별안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는 통에 리비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흑기사’는 눈 부분만 간신히 노출된 상태였는데,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반짝?’

그녀는 베일을 써서 뿌옇게 가려진 시야로 애써 앞에 선 남자를 자세히 보려 애썼다.

‘보라색, 보라색?’

언뜻 스친 보랏빛에 그녀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흔치 않은 눈 색이었다. 보라색 눈동자는 마족의 눈이니, 마귀의 새끼니 하는 놀림을 받는 색이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신비롭지만 불길하게 여겨지는 눈동자 색.

오래전 누군가, 바로 그 눈 색 때문에 놀림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

그게 누구였더라?

희미하게 겹쳐지는 형체에 리비는 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가 손을 슥, 들어 올리자 하객석에서 어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대 맞았다가는 그대로 골로 갈 법한, 쇠로 만든 장갑을 낀 손이 머리에 쓰인 투구로 향했다.

정수리 부분을 잡아 벗자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칼이 후드득 흩어져 내렸다. 그 사이로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리비의 연녹색 눈동자와 정확히 맞춰졌다.

예배당에 아까와는 다른 정적이 흘렀다.

정확히는 그가 투구를 벗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이마를 덮을 듯 말 듯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반짝이는 눈이 얼핏 보였을 때.

예배당 안의 여자들은 어떤 숭고함을 느끼고 모두 가만히 두 손을 모아쥐었다.

오로지 리비만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비, 데리러 왔어.”

그녀는 꽤 익숙한 눈빛과 맞닥뜨렸다.

그녀를 볼 때면 항상 초승달처럼 휘어지던 눈, 눈을 살짝 덮을 정도로 내려온 검은색 머리칼.

그 모든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

그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되물었다.

“데리러 왔다고.”

멍한 그녀에게 남자는 재차 손을 내밀었다.

“데리러 왔어, 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가 기대한 것처럼 그 위에 신부의 하얀 손이 얹어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녹은 양초처럼 허옇게 질린 신부가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배당 안에 있던 하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싸하게 얼어붙었던 사람들은 차차 마법에서 풀려나듯 한마디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몰라.”

“누군데?”

“모른다니까.”

“리비 신랑이야?”

“아닐걸.”

“리비 신랑은 늙은이거든.”

“부인도 여럿이지.”

“그사이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었나?”

“말이 되는 소릴 해.”

누군가 타박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 글쎄, 그럼 누구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바보 같은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 와중에 하객석 앞쪽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투구를 벗어 던진 남자의 얼굴에 한층 더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남자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잘생겼네.”

“잘 안 보이는데.”

“옆 선이 남달라.”

“넌 수탉도 얼굴로 차별하잖아.”

“아무튼 잘생겼대도. 그런데 뭔가 좀…….”

“좀?”

“미친 거 같아.”

그들의 대화가 리비에게는 고스란히 다 들렸다. 그리고 입만 열지 않았다뿐이지 그 의견에 그녀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데리러 왔대도, 리비.”

이름 모를 남자는 다시 부드럽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려다보는 눈은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비록 베일에 가려져 부옇게 흐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이상스러우리만치 다정한 눈빛을.

다정……?

리비는 그제야 이 미남자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의 근거를 깨달았다. 밑도 끝도 없는 다정한 말투. 그건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대하듯 애달팠다.

‘날 언제 봤다고 다정해? 아니, 이름은 어떻게 알고?’

남자는 한 걸음 더 다가섰고, 그녀는 그만큼 더 물러났다. 하지만 내뻗은 손에 쉽게 베일을 잡히고 말았다.

“이런 건 벗어 버려.”

순식간에 베일이 벗겨지고 그 위에 고이 얹어져 있던 왕관 역시 바닥을 굴러 통통 튀어 갔다.

“이런 건 네게 어울리지 않아.”

피할 새도 없이 남자는 이번에는 머리에 장식된 붉은 장미꽃을 떼어 냈다.

“네겐 흰 장미가 어울려, 리비.”

바닥으로 떨어진 붉은 장미꽃은 그의 발에 사정없이 짓뭉개졌다. 가슴에 장식돼 있던 장미도 뜯겨 나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장미 부케까지 빼앗아 손으로 마구 뭉개기 시작했다.

붉은 꽃잎이 뭉텅뭉텅 떨어지는 것을 리비는 그저 멍한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침내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진 꽃다발을 저 멀리 던져 버린 남자는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넌 흰 장미 아가씨니까.”

발로 우악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뭉개면서 하는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문제는 그런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었다.

대체 어디서?

베일도, 신부의 상징인 관도 쓰지 않은 리비는 그저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헝클어진 머리를 붙잡고 물었다. 화를 낼 여지도, 개연성도 모두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문이었다. 잠시 무덤 같은 정적이 흘렀다.

우악스러운 손짓 발짓과는 달리 남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아주 작은 충격에도 깨져 버릴 유리그릇처럼.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를…… 몰라?”

보랏빛 눈이 잔뜩 흐려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가에 고이기 시작한 그것을 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고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 그것을.

그것은 눈물이었다.

하객석 앞쪽에서 여자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한층 커졌다.

“세상에, 울어.”

먼 곳에서도 남자의 눈물은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가까이서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리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커먼 갑옷을 입고, 그녀를 덮어 버릴 정도로 장신의 남자가, 뚝뚝 떨구는 눈물을 보던 리비는 기이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저 쓸데없이 해맑은 웃음과 보라색 눈동자, 까마귀 날개깃처럼 새카만 머리. 툭하면 우는 버릇.

아주 멀고 먼 기억 속 흐려졌던 조각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마치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걷히듯 스르르, 한 사람의 이름이 생각났다.

“보리스……?”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던 남자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몹시 기쁜 듯 그는 벅차오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기억나지? 날 잊을 리 없지, 리비?”

그는 성큼 다가섰다.

“정말, 그 보리스?”

손을 잡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그녀는 되풀이했다.

“응, 나야. 약속대로 돌아왔어.”

리비는 확 다가서는 그를 피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보리스가 더 빨랐다.

그는 물러나려는 리비의 몸을 콱 움켜쥐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작이 되어서.”

낮게 속삭인 말에 그녀는 잠시 굳어 버렸다.

“뭐……?”

“나, 공작이 되었다고. 그러니 나와 결혼하면 돼.”

“…….”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더라?

“보리스, 반가워. 반가운데, 있지…….”

그녀의 다음 말을 조금이라도 놓칠세라 보리스는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그러자 리비의 얼굴이 더욱 큰 각도로 뒤로 꺾였다. 그래야만 그의 턱끝이나마 쳐다볼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고맙게도 그는 얼굴을 한껏 숙여 리비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말해.”

가까이서 속삭이는 말에는 묘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지금 결혼하는 중이거든.’

그 위압감 때문에 이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피하다 보니 저 멀리 굴러간 왕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보리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워서 그래? 저런 건 집어치워, 내가 새로 사줄 테니.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걸로.”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척척 걸어가더니 부츠 신은 발로 신나게 왕관을 깔아뭉갰다.

“몇 개라도 만들어 줄 수 있어.”

팅팅, 소리를 내며 박혀 있던 보석들이 튕겨 나갔다.

그러자 쥐 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던 마을 사람들이 저주에 걸린 무덤 속 시체들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앞으로 튀어나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개중 가장 큰 보석을 움켜쥔 남자의 손을 다른 여자가 물어뜯고, 또 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보석을 낚아채 갔다. 어느덧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같이 가, 리비.”

보리스는 다시 돌아와서 그녀의 앞에 섰다.

찬찬히 그를 올려다보던 리비는 온몸을 휘감은 불길한 징조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고장 난 태엽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남자의 널찍한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젯밤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둘만 따로 다른 시공간에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응?”

재촉하듯 내려다보는 시선에 리비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 그, 난 결혼을 해야 해서.”

“그래, 하면 되지.”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하면 돼.”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보석들과 그 보석을 줍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의 고함 때문에 보리스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혹여 들었대도 잘못 들은 것이겠지,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물었다.

“너랑…… 뭘 해?”

“결혼.”

그의 음성은 해맑았다. 표정도 해맑았다. 세상 온갖 밝음은 자기 혼자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밝고 환하게 웃었다.

리비는 문득 그의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좀 남다르게 박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 내가 입은 건…… 결혼 예복이야. 봐, 하얗잖아. 그렇지?”

리비는 팔을 들어 올려 금실로 자수가 놓인 호화로운 소매 장식을 보여 주었다.

“이거 다 남편이 될 공작이 보내온 실과 옷감으로 만든 옷이야.”

리비는 길게 늘어진 옷소매를 펄럭펄럭 흔들어 보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보리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저 리비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전에 얘기해 줬지?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이런 드레스를 입고, 신성한 결혼 맹세를 하는 거야.”

“나도 알아.”

보리스는 그제서야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한껏 촉촉해진 눈동자에 리비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아주 예뻐, 리비. 천사 같아. 하얀 나비 같기도 하고.”

그는 황홀한 얼굴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리비의 몸에 감긴 진주 목걸이를 향해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쩐지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다.

“그런데 리비, 안 답답해? 몸을 옥죄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줄까?”

“응, 물론…… 아, 아니.”

무심코 본심대로 대답하다가 리비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지체 없이 길게 늘어진 진주 목걸이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끊어 버렸다.

투둑.

순식간에 끊어진 목걸이 줄에서 진주가 알알이 떨어져 바닥을 굴러다녔다. 한번 끊긴 줄에서는 진주가 쉴 새 없이 빠져나왔다.

“어, 어어…….”

줄줄 빠져나가는 진주를 보며 당황할 새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닥에 굴러가는 진주알에 다시 달려들어 줍기에 바빴다.

몇몇은 진주를 줍다가 잘못 밟아 그대로 미끄러지는 일도 있었다.

“어머나.”

리비의 친구들도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진주알을 보며 하나둘 주워 소매에 숨기기에 여념 없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리비가 보리스가 서 있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훨씬 낫지?”

그는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진주가 다 풀려 나가자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리비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려 애썼다.

“낫긴 뭐가 나아, 이 바보야. 이건 예물이라고. 이걸 손상시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리비는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멱살을 어찌어찌 잡는다 해도 그를 흔드는 게 아니라 자기가 고목에 매달린 매미 신세가 될 테니까.

“더 좋은 걸로 사줄게.”

그는 다시 해맑게 대답했다.

“…….”

이쯤 되면 뭔가 어긋나도 단단히 어긋났다. 리비는 싸해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한 단어씩 힘주어 말했다.

“보리스, 난 오늘, 결혼식을 하는 거야, 여기서.”

“응.”

“그런데 너 때문에 결혼식이 중단된 거고.”

“응.”

“예배당 밖에는 레제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날 기다리고 있어. 결혼식을 끝내는 대로 날 호위해서 레제트 공작의 성으로 가게 될 거야.”

그녀는 조목조목 설명했고, 그는 외양간의 소처럼 유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어, 리비.”

그러면서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손길에 흠칫 몸을 떨자 보리스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 간 실망을 리비는 애써 외면했다.

비 오는 날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내버려 둔 것처럼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 난 마저 예식을 치를게.”

리비는 일부러 더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아, 드디어 말이 통했구나.

의외로 간단하게 떨어진 대답에 그녀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만큼 미친놈은 아니야, 그래. ‘그’ 보리스인걸.

내 말이라면 껌뻑 죽던, 내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던 보리스.

리비는 어쩐지 코끝이 찡해 왔다.

“그렇게 원한다면.”

보리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는 리비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바로 앞, 단상에 서 있는 주교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교는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저기서는 보석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몸싸움이, 바로 코앞에서는 둘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듯한 남녀의 조합과 어우러져 이제껏 본 중 가장 기괴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숱한 결혼식을 맡아 진행해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주례를 해주십시오.”

보리스는 주교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리비의 팔을 척하니 자기 팔에 껴놓았다.

“어서.”

보라색 눈이 기이한 빛을 냈다. 좀 전에 앞에 있는 여자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에 주교는 찔끔했다.

“보리스? 주례를 왜…….”

리비는 선뜻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결혼하자며.”

“……뭐?”

순간 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 눈알만 한 보석 하나가 툭 날아들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재빨리 잡아챈 뒤 소원을 비는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듯 도로 뒤로 던졌다.

그것을 쫓는 사람들은 자아를 잃은 좀비들처럼 우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뒤엉켰다.

보리스는 그 기괴한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리비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리비는 오늘 꼭 결혼해야 한다며.”

“그랬……지.”

“그러니 지금 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주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 눈길에 찔끔한 주교는 아까 내려놓았던 주례문을 들고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이 신성한 결혼식을 신의 대리인으로서 축복하노니…….”

좀 전에 혼자 서서 들었던 주례문을 이제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다시 듣고 있다.

꿈도 아니며 환상도 아니다. 물론 회상도 아니었다. 이 모든 건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었다.

리비는 환각 상태에서 깨어나듯 푸드덕, 몸을 떨었다.

“보리스, 이거 아냐.”

단단히 감겼던 팔을 풀어 내며 리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좀 전까지 제 옆구리를 채우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자 그는 금세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결혼하고 싶다며.”

보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비는 다시 속이 갑갑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남자와, 오늘, 결혼해야 돼. 보리스, 네가 아냐.”

“…….”

이번에는 알아들은 건가 싶어 리비는 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내가, 아냐?”

그의 고개가 의아한 듯 기울어졌다.

“나는 남편이 있어, 생겼어, 오늘.”

그렇게 말하면서 리비는 살짝 자신도 돈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결혼 예복까지 차려입은 신부가 오늘 남편이 생겼음을 다른 남자에게 설명하고 서 있는 꼴이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만 했다.

“생기다니, 리비.”

그의 목소리가 일순 싸늘하게 내려앉는다 싶은 건 착각일까. 리비는 문득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보며 기분 탓일 거라고 여겼다.

보리스는 손을 쑥 뻗어 단상 위에 놓여 있던 혼인 서약서를 들어 올렸다.

이미 쓰여 있는 남편의 서명 아래, 리비가 서명해야 할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검은 잉크만 몇 방울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기엔 아무것도 안 쓰여 있잖아.”

보리스는 확인시켜 주듯 서약서를 그녀의 앞에서 흔들어 댔다.

텅 빈 서명란이 그녀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아직 성립되지 않은 결혼을 일깨워 주었다.

“그게, 그걸 쓰려는 순간 바람이 불었어. 그리고 네가 왔지. 나는 원래 여기에 서명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네가 방해한 거야.”

바람이 불었다. 그러더니 네가 오더라.

음유시인의 노랫가락처럼 달콤한 말이었다.

“방해했어?”

충격을 받아 잔뜩 굳어진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결혼 서약은 신성한 거야, 보리스. 너는 지금 신을 모독한 거라고.”

리비는 ‘신’과 ‘모독’이라는 단어에 한껏 힘을 주어 말했다.

“어서 나가. 나는 마저 의식을 치르고 내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해. 그거 이리 줘.”

눈앞에서 펄럭이는 서약서를 집으려 손을 뻗자 그는 더 높은 곳으로 손을 들어 버렸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는 곳에 걸린 서약서를 보며 리비는 제자리 뛰기를 반복했다.

식식거리며 노려보는 리비를 보며 보리스는 마침내 서약서를 들고 있는 손을 내려 주었다.

“…….”

그리고 찢어 버렸다.

“아, 안 돼.”

쫙쫙,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찢어지는 서약서를 보며 리비는 안 돼,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리스는 이미 손을 쓸 수도 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을 휘, 공중으로 흩날렸다.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종이 속에서, 보리스가 다시 해맑게 웃는 게 보였다.

찰나였지만 그 순간은 아주 느릿하게 흘러갔다. 과거 언덕에서 같이 첫눈을 맞았던 그 어느 날처럼, 보리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이러면 됐지, 응?”

“응? 으응?”

그의 말을 해괴한 웅얼거림으로 대꾸하고 있는데 순간 세상이 뒤집히고 말았다.

“꺄아아악!”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시야를 덮고, 그의 어깨에 엎어진 자세로 얹혔다는 사실은 조금 후에야 깨달았다.

“보리스! 미쳤어! 내려 줘!”

발버둥을 치느라 신고 있던 구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보석을 가지고 싸움판을 벌이던 사람들의 눈에 또 다른 사냥감이 들어온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매끄러운 공단 위에 장식된 보석들을 향해 그들은 또다시 두 패로 나뉘어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버진 로드를 빠르게 걸어가는 결혼식의 불청객이나, 그 불청객이 짐짝처럼 짊어진 신부 따위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겁잖아! 내려 줘!”

지나치게 풍성한 드레스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거추장스러울 게 분명했다. 이걸 입고 걷는 것도 힘들었는데 들고 있는 그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찌익.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괜찮아, 나 무거운 거 잘 들어.”

또다시 찌익.

“그런데 이건 좀 거추장스럽네.”

리비는 이상할 정도로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에 한껏 불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몇 겹이나 겹친 드레스 자락이, 쇠장갑을 낀 손아귀에 우악스럽게 찢겨 나가는 중이었다.

“안 돼애애!!!”

꽃잎처럼 뜯긴 드레스 자락이 너풀너풀 바닥에 늘어졌다.

리비는 그것을 허무한 눈길로 쳐다봤다.

‘찢었어……?’

정말, 진짜, 완벽하게 찢긴 드레스 자락이 흩뿌려진 바닥을 보며 리비는 입만 뻐금거렸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덜’ 거추장스러워진 드레스 덕에 리비는 조금 더 움직이기 편해졌다.

그래서 사지를 마음껏 움직여 보리스의 등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미친놈! 또라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아아아!”

그녀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보리스는 척척 걸어가 야외 예배당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열린 순간 리비의 비명도 뚝 그치고 말았다.

‘이건 뭐지?’

바깥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까맣고, 까맣고, 또 까만 세상. 조용하다 못해 따분하고 지루한 이 마을에서는 상당히 생경한 풍경이었다.

검은 말들, 그리고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

“…….”

그 압도적인 풍경에 리비는 꽥꽥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고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단체로 어둠의 기운을 팍팍 풍기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이래서 그런 바람이 분 건가.’

야외 예배당은 천장이 뻥 뚫린 구조에 잔디밭 위로 단상과 하객들의 의자가 놓이게 된다. 이런 자들이 한꺼번에 말을 몰고 왔으니 그런 바람이 분 것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들은 단체로 망자를 영접하러 나온 사신들 같았다. 그중 가장 악질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기를 짐짝처럼 들고 있는 이놈이었다.

더 살벌한 풍경은 따로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리비는 급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옥에서 올라온 것처럼 살벌함을 풍기는 기사들의 손아귀에는, 붉은 망토를 걸친 또 다른 기사들이 잡혀 있었다.

그 기사들은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들, 즉 레제트 공작이 보낸 호위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리비를 레제트 공작령까지 호위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얼굴로, 서로 불안한 눈짓만 교환하고 있었다.

레제트 공작의 기사들이라면 검술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붙들려 있는 모양새에 리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리스, 보리스?”

“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했는지 그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왜, 리비?”

되묻는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저, 저들, 뭐야? 왜 저러고 있어?”

“아아.”

그녀의 물음에 보리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널 데려간다지 뭐야.”

리비는 그의 어깨에 엎어진 채로 주고받는 이 문답이 상당히 바보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멍청한 질문을 계속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당장 풀어 줘, 뭐 하는 거야.”

“싫어.”

그는 다시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풀어 주면 골치 아파.”

그 말에 하마터면 리비는 이렇게 대꾸할 뻔했다.

‘나는 네가 골치 아파.’

그러나 어디선가 솟아난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 말을 쑥 눌러 버렸다.

보리스는 투레질을 하며 땅을 박차고 있는 덩치 큰 군마로 곧장 다가갔다. 그리고 리비를 안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드레스를 거침없이 찢은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 손길은 부드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을 대하듯이, 꽉 쥐면 바스러질 나비를 대하듯이.

유달리 덩치가 큰 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했다. 두려움에 몸을 움찔거리자 보리스는 옅게 미소 지었다.

“무서워하지 마, 레너드는 여자를 다치게 하지 않거든.”

그는 리비가 안장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 준 뒤 뒤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팔로 리비의 허리를 단단히 감더니 제게로 바싹 끌어당겼다.

“저기, 보리스, 보리스?”

리비는 거듭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불렀느냐며 해사한 웃음을 짓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한 움큼 뜯어내고도 드레스는 여전히 치렁거렸다. 발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인 채로 안장 아래에서 달랑거렸다.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됐다.

“어, 어딜 가는 거야?”

딱딱한 갑옷의 느낌이 전해지자 비로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보리스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규칙적인 말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몸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뒤에서 꽉 잡고 있는 손 덕분에 굴러떨어지거나 균형을 잃는 일은 없었다.

“가보면 알아.”

대수롭잖게 대답하며 그는 말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가뜩이나 높은 자리에서 속도까지 빨라지자 두려움이 와락 몰려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보리스의 팔을 꽉 쥐었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 자기를 가두듯 끌어안은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보지 못한 채.

“아니, 굳이 안 가봐도 되는데……”

덜덜 떠는 리비가 귀여운 듯 그는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켁.”

순간 내장을 쏟을 것 같은 압박감에 그녀는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 미안.”

보리스는 즉각 파랗게 질려서 팔의 힘을 풀었다.

“그, 그렇다고 너무 풀어 버리며언!!”

순간 헐렁해진 팔 때문에 살짝 안장에서 미끄러진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괜찮아, 리비. 괜찮아.”

큰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럼에도 목에 휘감긴 팔은 그의 목을 조를 듯 힘이 들어갔다.

졸지에 그는 그녀를 마주 안은 채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시커먼 갑옷의 기사와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조합.

약탈혼이 따로 없었다.

“우웁-.”

이젠 헛구역질까지 몰려왔다. 죽자 살자 매달려서 꺽꺽거리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말을 몰랴, 한 손으로는 그녀를 달래랴 정신이 없었다.

“미안해, 리비. 나는 네가 숨을 못 쉴까 봐 그런 건데.”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랬다. 진심이었다, 모든 것이.

“네가 미안해할 건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해쓱해진 얼굴을 바짝 쳐든 리비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두 사람의 주변에서 일정한 속도로 말을 달리는 검은 갑옷의 기사들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 까만 사람들…….”

분명히 그들은 보리스가 말을 달리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따라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대형은 분명히…….

“내 기사들.”

“네 기사들?”

“응.”

“정말 네 기사들이라고?”

기사를 거느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사의 주군이 되는 사람은 신분, 권력, 기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과 무예까지 모두 갖추어야만 한다.

“왜, 안 믿겨?”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쓸쓸하게 들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마터면 허둥지둥 사과할 뻔한 리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과? 사과라니? 그건 내가 받아야 하는데!

“전부 내 기사들이야.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흘 내리 달려왔다고. 난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기어이 따라왔지.”

“전쟁?”

최근에 끝난 전쟁이라면 피 터지는 왕위 찬탈 싸움이었던 7년 전쟁밖에 없었다.

그러자 리비는 그가 공작이 되어서 어쩌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7년 전쟁을 종결지은 영웅, 그 대가로 받은 공작위…….

“칼리니 기사단?”

“응, 내 기사단이야.”

“그 미친 까마귀가 너라고?”

리비는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응, 공작이 됐다고 말했잖아.”

분명히 그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말이기에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칼리니 기사단이라니.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에는 하얀 장미를 품에 안은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장미와 까마귀,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보며 리비는 지금 자기가 꿈과 환상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잠겼다.

“그래서 널 데리러 온 거야.”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몹시 상냥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너는 내 신부니까.”

그는 리비의 풍성한 머리칼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흐읍, 들이켜는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렸고,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목덜미에 닿았다.

“아……니야, 나는.”

“너는?”

간신히 뱉어 낸 부정의 말에 보리스는 파묻었던 얼굴을 다시 치켜들며 반문했다.

“나……는 그러니까…….”

내려다보는 눈이 무시무시했다. 정말로 맛이 가기 일보 직전의 눈빛이 어떤 건지 그녀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저기,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가까스로 말을 돌렸다.

“지금 하고 있잖아?”

“이런 거 말고.”

“말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마를 가리던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서 그의 표정이 좀 더 명확하게 보였다.

“제대로 된 대화 말이야.”

“아아.”

그는 드디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대화가 부족하긴 했지.”

“그렇지? 네가 생각하기에도 많이 그렇지? 뭐가 좀 이상하고 막 그렇지?”

리비는 반색하며 되물었다.

“응. 우리 성에 가면 실컷 대화하도록 하자.”

그의 보랏빛 눈이 웃음으로 가늘어졌다.

그녀는 순간 응, 그래, 라고 답할 뻔하다가 뭔가 묘하게 어긋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기, 그 대화라는 게……?”

그는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몸의 대화.”

순간 리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

밀랍 인형처럼 굳어 버린 리비를 보며 그가 다정스레 불렀다.

“리비?”

다그닥다그닥.

“리비?”

다그닥다그닥.

몇 번의 반복된 부름에도 리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주변에 진동할 뿐이었다. 휙휙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 리비는 홀로 멈춰 있었다.

“…….”

“왜 그래? 어지러워? 잠깐 쉬다 갈까?”

창백해진 리비의 얼굴을 보며 그는 조급하게 물었다.

“너, 너…… 몸으로 대화……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거야, 묻기도 전에 보리스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이런 대화는 싫다며.”

“내가 언제!”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리스의 눈은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난 새처럼 순진무구했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너, 나를 겁탈하려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고 온…… 너…… 이 개…… 나쁜…… 너어…….”

충격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이 더듬더듬 쏟아졌다.

“겁탈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냐는 듯,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졌다.

“그게 아니면!”

성난 뱀처럼 쉭쉭거리는 리비를 보며 보리스는 이내 이해한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더니 정말로 새끼 새를 다독이는 어미 새처럼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리비. 이제 우리 성인이 되었잖아. 그래도 될 나이는 지났어. 결혼해도 될 나이 역시 한참 지났다고. 내겐 솔직해져도 돼.”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쟁 때문에 다들 떨어져 지냈잖아. 금욕의 시기는 지났어. 억지로 참지 않아도 돼.”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며 리비는 생각했다.

‘미친놈이 맞는 소리도 하네.’

핀트가 아주 많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상 왕위를 두고 다투는 전쟁이 길어지고 국경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터지면서 젊은 남자들은 전장으로 끌려갔고, 남은 여자들은 그대로 혼기를 넘겼다.

혹은 홀아비에게 재취로 시집가거나,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은 귀족들의 애첩이 되기도 했다.

혹여 전쟁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몸이 성히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장에서 죽느냐 집에서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도 죽은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얼마 안 가 그를 잊었고 리비 역시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와 그녀를 납치했다.

다른 날도 아닌 ‘신성한’ 결혼식에서.

그것도 자그마치 국왕이 직접 맺어 준 결혼이었다.

얼굴 한번 못 본 국왕은 지금 자신이 뚜쟁이로 나서 짝지어 준 신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어딘가로 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까. 안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 죽고 말 거야.’

국왕이든, 아니면 자신의 남편, 아니 남편이 될 예정이었던 레제트 공작에 의해서.

순간 리비는 아득해지는 정신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리비. 내 처음은 네 거야.”

그의 눈빛은 한층 촉촉해지고 짙어졌다. 제아무리 최상급의 자수정이라 해도 저런 색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보랏빛 눈은 마족의 것이니 뭐니 하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었기에 나온 소리임이 분명했다.

처음 보리스를 만났던 어린 시절의 그날에도 그랬다. 한참을 홀린 듯이 저 눈을 들여다봤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그 눈빛에 홀려 넋을 놓고 있다가 그가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 뭐뭐?”

“소중히 지켜 왔어, 널 위해서.”

그는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다.

“뭘?”

그리고 리비는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두 사람은 이렇듯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좀 곤란한 순간들이 찾아와. 남자들끼리 풀 때도 있고, 뭐 그래.”

리비는 그의 광대뼈 부근이 쑥스러운 듯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보았다.

“남자들끼리?”

리비는 소스라쳤다. 전쟁 중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은 노인들이 술을 거나하게 걸친 날이면 빠짐없이 나누는 대화 주제이기도 했다.

하루에 몇 명의 목을 땄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오가다 보면 자연스레 음담패설로까지 이야기가 번졌다.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모인 집단에 여자라고는 없는 상황.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욕구와 싸워야만 했다.

“사실 나도…….”

‘나도?’

얘기하지 마, 그다음은 얘기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리비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보리스의 고백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내 스스로 한 거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그는 진지하고 애달픈 얼굴로 말했다.

“뭐, 스스로? 뭐?”

리비는 지금 자기가 듣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말발굽 소리가 커서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때마다 널 생각했어.”

꿀 같은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난 너랑 같이 있었던 거야.”

뿌듯하기까지 한 그의 미소를 리비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잘못되었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리비는 차마 말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자신을 안고 달리고 있는 남자는 아주 굳건히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너는 내 처음이고, 마지막이야.”

속삭이는 소리에 리비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날 믿어. 잘할 수 있어. 상상 속에서 수없이 연습…….”

“그만! 그마안!”

리비는 참다못해 귀를 막고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왜 너랑…… 그, 그. 믿을 수 없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건 내가 아니야.”

그녀의 외침에 보리스는 한층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너만 생각했어. 너밖에 없었어. 날 믿어 줘. 앞으로 증명할게.”

“뭘 증명해, 뭘! 어떻게 증명해!”

“어떻게 해야 믿어 줄 거야?”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잔뜩 흐려진 얼굴로 말했다. 그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잘못 말하면 큰일 난다.’

이미 앞선 대화를 통해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뜻의 대화가 이어진다는 걸 그녀는 뼛속 깊이 체험했다.

“아니, 아니, 필요 없어. 증명할 필요 없어. 나는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정말, 정말로. 리비는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했다.

“정말로? 날 믿어 주는 거야?”

그의 얼굴이 환희에 차오르는 걸 보며 그녀는 또다시 자기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기뻐, 리비.”

활짝 웃는 모습은 이제 막 사랑을 고백한 수줍은 소년 같았다.

“아, 아악! 악!”

그녀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리비, 괜찮아?”

“아아아악!”

리비는 다시 한번 그를 보며 온갖 감정을 담은 비명을 내질렀다. 너른 들판에 말발굽 소리 중간중간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기괴하게 얽혀들었다.

그 소리를 낸 주인의 몰골은 더더욱 기괴했다.

불어오는 바람 탓에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얼굴을 뒤덮었고, 그중 한 뭉치가 입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했다.

“으악!”

머리카락을 뱉어 내려 푸푸 하던 리비는 빨라진 말의 속도를 감당 못 하고 혀를 깨물어 버렸다.

얼얼해진 살점을 타고 짭짤한 피의 맛이 번졌다. 입가에 얼핏 비친 피를 본 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리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허리를 감아쥔 손은 더욱 단단히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껏 진지해진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바람에 리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입안에 고여 있던 피가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씁쓸한 피의 맛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표정을 보던 보리스의 얼굴도 같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 얼굴을 잡힌 채로 리비는 문득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깐만, 하나는 얼굴, 하나는 허리……?’

다그닥다그닥.

리비는 불길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고삐가 말 등 위에서 제멋대로 출렁이는 모습을.

“고삐, 고삐 잡아, 고삐!”

“응?”

보리스는 리비의 외침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괜찮아, 리비. 안 죽어.”

양손 모두 자유로워진 그를 보며 리비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난 죽어, 난!”

“그럴 리가.”

순간 스친 그의 미소에서 리비는 어쩐지 서늘함을 느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보리스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뭐…… 읍!”

축축한 살덩어리가 입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웁! 우웁!”

리비는 뭐라 항의할 새도 없이 꽉 붙들린 채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한 손으로도 어찌나 꽉 고정시키고 있는지 흡사 쇠사슬에 묶인 것만 같았다.

“으! 으으!”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죽어라 내리쳤으나 갑옷에 부딪힌 손만 더 아플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두툼한 혀는 피가 난 부분을 집중적으로 핥고 빨아들였다.

“읍! 으음, 응!”

말을 하려 입을 벌릴수록 난폭한 혀는 더욱 집요하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거렸다.

“상처는 제때 치료해야 돼.”

퍼덕거리는 게 멈출 때쯤이 되어서야 그는 느릿하게 리비의 입속에서 빠져나갔다.

“안 그러면 덧나.”

입가에 번졌던 피를 느릿하게 핥아 올리며 그가 덧붙였다.

“…….”

리비는 입을 헤 벌린 채 보리스가 자신에게서 빨아 먹은 피를 손으로 무덤덤하게 훑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기 입에서 난 피가 단맛으로 변했을 리도 없는데 그는 입가에 일부 묻어난 그것을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게 빨아 먹었다.

이질적인 보랏빛 눈과 새빨간 입술의 조화는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많이, 아주 많이 야성적인 모습이었다.

흡사 흡혈귀가 포식 후 사냥감의 맛을 즐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아파?”

그는 다시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리비는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금세 다시 그의 굵직한 팔에 허리가 잡혀 끌려오고 말았다.

“그러면 떨어져.”

그의 가슴에, 정확히는 넓은 가슴팍을 감싼 방어구에 찰싹 붙어 버리다시피 한 몸은 아무리 힘을 줘도 도로 떼어 낼 수 없었다.

용을 쓰며 한껏 낑낑거리다가 제풀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이제는 그나마 있던 힘마저 다 사라진 느낌이었다.

방금 전의 접촉으로 보리스는 그녀의 힘과 기운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 것 같았다.

리비는 이제 항의고 뭐고 할 기운마저 몽땅 빠져서 그의 품에 축 늘어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차라리 몸은 편했다.

쿵쿵.

갑옷 너머로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빠른 듯 뛰는 심장 박동은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리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이렇게 되는구나.

이제 더는 소리칠 기운도, 저항할 힘도 없는 가운데 그녀는 그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게 얌전해진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리비의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좀 전에 그렇게 멋대로 입술이며 입 안쪽을 샅샅이 훑던 놈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 또 조심스러웠다. 마치 꽃 한 송이를 잘못 쥐어 망가뜨릴까 걱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면 뭐 하나.

이놈은 결혼식에서 신부를 납치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리비는 자신의 허리에 굳게 감긴 팔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것을 풀어내고 도망갈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스스로 풀어내지 않는 한은.

“보리스.”

결국 리비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더 힘을 빼느니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으리란 결론을 내렸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체념한 듯 묻는 목소리에 보리스는 대답했다.

“너도 보면 좋아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만 참아.”

보리스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며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갑옷과 드레스를 사이에 두고도 그의 열기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겠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서로 보석을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을까.

레제트 공작령에 누군가 알렸을까. 국왕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얼빠진 얼굴로 자기를 보던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좀 빠르게 달릴 거야. 리비는 그만 쉬어. 피곤하잖아?”

“쉬다니?”

“응, 그만 쉬어.”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리비는 정말로 급격한 피로가 쏟아지는 걸 느꼈다.

지잉-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아파 왔다. 리비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리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 어둑어둑했다.

얼만큼이나 달린 걸까.

까무룩 정신을 잃은 동안 꽤 멀리 온 것 같기도, 의외로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여길 지나면 거의 반은 온 셈이야.”

리비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숲으로 바뀌었고, 삐죽삐죽 솟은 나무들이 음침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리비는 생경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이런 규모의 숲이라면 하나밖에는 없었다.

“헤센숲?”

마을 북쪽의 숲.

마을 사람들에겐 온갖 괴담의 배경으로 쓰이는 장소였다. 그 숲에 산다는 마물, 위험한 산짐승들, 독약을 끓이는 마녀…….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불길한 존재는 모두 그곳에 모여 있다고 믿으며 자라 왔다.

사실 커서도 그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마을의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심어진 숲에 대한 공포는 커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워낙 숲에 대해 흉흉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서였다.

어른들은 저마다 누가 더 아이들을 놀라 자지러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골몰한 듯 매번 새로운 괴담을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이상스러운 호기심에 그 이야기를 듣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면 각 집마다 이불을 빨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숲에는 사람만 한 크기의 까마귀가 살고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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