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정략결혼 (2/20)

1. 정략결혼

세셔 왕국, 에드라크 영주령(領) 티소 마을.

“리비, 수도에서 손님이 왔대.”

“응?”

리비는 모여든 양들에게 건초를 던져 주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금발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며 부드럽게 흔들렸다.

“손님? 수도?”

그녀는 잔디밭을 닮은 연초록빛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친구가 전해 준 소식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응, 사람들이…… 왔어. 엄청 많이. 모두 좋은 옷을 입고 있어. 으리으리한 마차에, 기사들도 있어.”

앙느는 양팔을 크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기사? 마차?”

친구인 앙느의 설명에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 꾼 꿈 같은, 혹은 어느 동화책 한 구절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이 마을에?”

티소 마을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다. 대체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그것도 수도에서.

리비는 태어나 지금까지 수도의 땅이라고는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가 수도에 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도에서 사람들이 오다니. 그것도 으리으리한 마차를 타고서……?

“좀 과장된 거겠지.”

리비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정말 컸다니까? 그래서 백작님이 어서 널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티소 마을에서 말하는 ‘백작’이란 그저 동네의 ‘아저씨’를 부르는 호칭과 동급으로 여겨질 만큼 하찮았다.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무슨 일로?”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널 찾는다고, 네가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앙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래?”

리비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에서 손님이, 아니 손님들이 온 데다가 그들이 자길 찾기까지 하다니.

“알았어.”

리비는 앞치마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냈다. 얼마나 대단한 손님인지 구경이나 가봐야지, 라고 생각하며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제가 누구랑 결혼을 한다고요?”

리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를 듯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요? 저 맞아요? 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이었고, 그때마다 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그녀는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막, 평생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됐단다.”

리비의 아버지, 하이든 백작은 고개를 모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니콜라스의 얼굴은 허옇다 못해 거의 퍼런빛이 돌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다니요?”

명확한 답을 해줘야 할 아버지란 사람이 매우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평소에도 말수라고는 극히 적은 아버지였다. 자신의 친모가 누구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입 한번 떼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어머니는 말하기도 끔찍한 죄를 저지른 여자일 것이라고.

그런 아버지와 사는 동안 리비는 그의 미간에 잡히는 주름 하나, 깊이 내쉬는 한숨 등으로 아버지의 생각을 꿰뚫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도가 텄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게 안 됐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도에 제대로 표시돼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시골 마을에 갑자기 들이닥친 왕국군도 비현실적이지만 그 왕국군이 마을의 유일한 귀족, 하이든 백작의 집에 찾아온 건 더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가지고 온 왕의 칙서에 담긴 내용은 그녀를 더욱 기함하게 만들었다.

「하이든 백작가의 장녀, 리비 하이든을 왕실의 딸로서 페이든 레제트 공작과 혼인시킨다.」

칙령을 가져온 왕의 사자는 근엄한 얼굴로 칙령서를 읽었다. 그가 양손으로 받쳐 든 두루마리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흰 용과 흰 장미가 찍혀 있었다. 명실상부한 왕실의 상징이다. 시골에 박혀 내내 살아왔던 그녀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왕명을 받드십시오.”

왕의 사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콜램 백작이 두루마리를 내밀며 말했다. 그는 간신히 말을 높이고는 있으나 눈에서는 리비와 아버지 모두 벌레만도 못하게 본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리비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두루마리를 손을 내밀어 받는 대신 빤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꿈같겠지만, 왕의 명으로 승인된 결혼입니다. 거부는 곧 폐하에 대한 항명이지요.”

콜램 백작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리고 어서 받으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리비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런 촌구석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공작 부인이 되다니, 놀랄 만도 하지요.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이제는 회유 정책으로 바꾼 듯 콜램 백작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리비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부인이라니.

“말도 안 돼.”

좀 전까지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왔다. 양들이 머리를 비벼 대며 묻은 흙 자국들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공작 부인이 되라니. 이건 너무 급격한 신분 상승이 아닌가. 너무 과분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더러 공작이랑 결혼을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이쯤 되면 현실이 맞다.

넋이 나간 듯이 리비의 얼굴을 보던 백작이 다시 한번 이 결혼의 의미에 대해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 결혼은 흰 장미와 붉은 장미의 결합입니다.”

“무슨 결합이요?”

“왕실과 오랜 시간 척을 져온 레제트 공작가와의 결합. 내전을 종결시키는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죠.”

레제트 공작은 세셔 왕국 남부의 실세, 아니 실질적인 왕이라 해도 좋을 남자였다. 그 명성만으로는 부족하여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자이기도 했다. 지난 7년 전쟁의 원인이 된 사람이기도 했고.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공작은 50살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기억이 정확한가. 아니, 그 나이를 들었던 게 벌써 몇 년 전이니 지금은 더 나이를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확히 51세이십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콜램 백작이 깔끔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십……일 세요?”

그녀는 자신과의 나이 차이를 계산해 보려다가 관두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가씨께서는 아주 귀한 임무를 맡게 되신 겁니다. 결혼을 함으로써 이 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아십시오.”

“……영광?”

그녀는 머리를 흔들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내가 왜 이 결혼을 해야 하죠? 나는…… 이런 어마어마한 결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요.”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안을 꽉 채운 인원에 놀란 게 처음, 그다음은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서 왕의 사자가 읽는 칙령서를 들어야만 했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레 이뤄진 일이었다.

“내가 왜, 얼굴도 못 본 공작의 신부가 되어야 하죠?”

이것은 이른바 정략결혼이다. 정략결혼이란 무엇인가.

귀족들, 그리고 왕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결혼의 방식이다.

물론 그녀는 귀족이다. 하지만 귀족에도 급이 있다. 수도에 살며 왕궁에 출입하는 선택받은 자이거나, 드넓은 영지와 재산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면 귀족의 직함은 그저 허울 좋은 장식이었다.

제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왕이 그들의 재산까지 모두 책임져 주지는 않으니까.

왕가의 피가 흐르는 공작가라거나, 왕궁의 요직을 차지한 다른 귀족들이라면 모를까. 혹은 왕이 특별히 총애해서 하사품을 잔뜩 내리는 경우라든가.

하이든 백작가는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정략결혼은 아무나 하나. 특히 왕명으로 행해지는 결혼이라면 더욱더. 자신은 ‘고귀한 피’가 흐르는 가문의 여식도 아닌데.

그저 아버지가 기사 시절 얻은 이름뿐인 작위 때문에 백작의 딸로 불릴 뿐, 실상은 양에게 먹이나 주는 것이 일과인 시골 처녀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것은 리비 하이든 양이 왕가의 피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뭘 이었다고요?”

리비는 또 이해 못 할 소리를 듣고 말았다. 지금 이 작자가 대체 뭐라고 하는 건가.

그녀는 멀뚱히 왕의 사자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콜램 백작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사색이 된 하이든 백작을 돌아보았다.

“말해 준 적이 없는 겁니까?”

“……그렇소.”

니콜라스는 짧게 대답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주 짙고 괴로운 고뇌가 느껴졌다. 대체 왜.

“아빠……?”

대체 뭘 숨기는 거냐고 짤짤 흔들어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비통하여 그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왕의 사자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리비는 정확한 설명을 바라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 시선에 부응하듯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꺼냈다.

“왕실과 레제트 가문의 결합을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현재 왕실에는 딸이 없습니다.”

“…….”

“아니, 정확히는 ‘왕궁에’ 없습니다.”

그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리비는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어보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여기 한 분 계시지요.”

“……뭐라고요?”

리비가 충격을 받았거나 말거나 콜램 백작은 제 소임을 다한다는 듯 줄줄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정리해 보자면 대충 이러했다.

나라는 둘로 나뉘어 싸웠다. 정확히는 왕가의 피를 나누어 가진 두 가문 사이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어느 날은 현(現) 왕이 속한 가문인 체스트레 가문이 우세했고, 또 어느 날은 전(前) 왕의 가문인 레제트 가문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서로 뒤집었다 뒤집히기를 반복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의 늪으로 빠졌다.

그나마 최근에는 체스트레 가문이 연승을 거두며 패권을 다시 잡아 오는가 싶은 찰나였다.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분명히 칼리니 기사단이었고, 그 기사단을 이끈 기사단장은 두고두고 칭송을 받았다.

그럼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겨우 잠시 찾아든 태풍의 눈 같은 평화 상태에서, 왕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또다시 피로 얼룩진 내란이 벌어지는 것만은 막아야겠다고. 레제트 공작 가문은 여전히 우세했고, 다음번 전쟁에서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문의 수장들은 회의를 개최했고, 그 평화조약의 대가로 레제트 공작이 내건 것은 하나였다.

“세셔 왕실의 피를 이은 여성을 아내로 보낼 것, 그리고 나와 내 부인이 낳은 아이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할 것.”

두 가문의 화합의 상징으로 체스트레 가문의 딸을 레제트 공작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여기서 생긴 문제는.

“왕실에는 딸이 없습니다.”

콜램 백작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정확히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은 딸이 없었다.

왕실인 체스트레 가문에는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병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은 여자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탑에 감금된 왕녀나 왕의 배다른 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배를 빌려 태어나든 그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어려서 원인 모를 병에 걸린 후 죽거나, 미치거나.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든 평화 조약의 상징인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긴, 그런 여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나라니.

리비는 왕의 사자가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왕실의 딸…… 자격으로요? 아버지, 아버지?”

리비는 소리쳐 아버지를 불렀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미안하다.”

하이든 백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리비는 더욱더 미칠 것만 같았다.

“우리 가문은 백작 가문이잖니, 다들 잊고 지냈지만.”

하이든 백작의 말대로, 하이든 가문은 티소 마을을 대표하는 관리인 정도의 가문이었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그가 백작위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든 백작 니콜라스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고, 장성하여 수도로 간 뒤 왕궁을 지키는 기사가 되었다.

크고 작은 공훈을 인정받아 하이든 백작 작위를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지위일 뿐이었다.

아주 약간의 재산만 있었을 뿐, 하사된 봉토도 없었다. 왕이 니콜라스에게 베푼 것은 그가 나고 자란 마을에 돌아가 그 마을을 통솔할 자격을 준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왜 이 결혼의 대상이 되나요? 아버지가 받으신 건 그냥…… 돈 대신 주어진 허울 좋은 작위일 뿐이잖아요?”

크흠, 하는 기침 소리가 크게 들려왔지만 리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그게…….”

니콜라스는 말을 쉽게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지금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버지,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대체?”

리비는 혼란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스에게선 아직도 명확한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 말 안 통하는 외국인들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던 왕의 사자가 흠흠, 헛기침을 냈다. 그제야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녀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다시 용건을 꺼냈다.

“그야, 리비 양이 왕녀의 딸이시니까요.”

“……네?”

리비는 멍하니 되물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에.

“제가 누구의 딸이요?”

“엘가 왕녀님의 딸이시라, 이 말입니다.”

“…….”

엘가 왕녀.

왕궁의 서쪽 탑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는 왕의 여동생이었다. 탑에 갇힌 이유는 왕녀가 미쳤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엘가 왕녀님이 어떻게 제 어머니가 되시죠?”

“그건 하이든 백작이 설명할 겁니다.”

왕의 사자는 곤란하고 귀찮다는 듯, 니콜라스에게 설명을 넘겨 버렸다. 리비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하이든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왕녀님께서 낳은 딸이 맞다, 리비.”

“…….”

“내가 왕궁에서 기사로 있을 적에 왕녀님과…….”

“그만요.”

리비는 재빨리 아버지의 입을 막았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자신에게 어머니가 있었다. 그것도 상상도 못 할 신분의 고귀한 왕녀님이 어머니라니.

그 모든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의문은 하나였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이 모든 상황이 진실이라면 니콜라스는 왕녀의 배우자가 된다.

“나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니까. 그나마 엘가 왕녀님의 요청으로 백작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거란다. 왕께서는 정식 혼인을 승낙하지 않으셨지.”

니콜라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주옥같았다. 그래서 리비는 점점 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출생의 비밀이 아닌가.

“……그럼 지금은요?”

멍하니 되묻는 리비에게 왕의 사자가 대신 나서서 답했다.

“그래서 영광되게도, 폐하께서 리비 하이든 양의 출신을 복위시켜 주셨습니다. 엘가 왕녀님의 딸로 인정해 주시고, 이런 귀중한 결혼도 성사시킨 것이지요.”

“이용해 먹기 딱 좋다는 얘기로군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시골 한구석에 처박아 놓고는 이제 와서 정략결혼의 상대로 잘만 써먹겠다는 소리였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혼인입니다. 레이디 하이든.”

엄숙하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에서는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혼인이면 당신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려다가 리비는 간신히 참았다.

“……그렇다고 하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꿈보다 더 꿈같은 상황이었다.

“흠, 그런데 따님의…… 처녀성은 보장할 수 있는 거겠지요? 하이든 백작. 왕실을 대표하는 결혼입니다.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왕의 사자는 다시 한번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내 딸을 모욕하는 건가?”

“모든 건 정확해야 하니까요. 레제트 공작이 순결을 혼인의 조건으로 내건 이상…… 물건에 하자가 있는 거래를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이든 백작은 벌겋게 달궈진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걸 날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의 사자인데 그럴 수는…….

리비가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실내의 공기가 험악해졌다.

아버지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다. 양측의 시선이 침묵 속에 첨예하게 대립했다. 여기서 하이든 백작이 정말로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누구 하나 곱게 살아나기는 어려웠다.

그래, 이게 현실이다.

왕은 정략결혼의 대상자로 리비를 택했고, 그 결정에 이의 제기란 있을 수 없다. 만약 한다면 목이 내걸릴 각오를 하고 해야 하는 것이겠지.

“그만하세요.”

리비는 앞으로 나아가 하이든 백작을 가로막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리비는 한껏 날카로운 시선으로 왕의 사자를 노려보았다.

“흠흠.”

그는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하더니 품에서 기다란 줄에 달린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펜던트에는 자그마한 타원형의 보석이 물려 있었다.

“이게 뭐죠?”

리비는 자신의 앞에서 흔들리는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옅은 회색빛과 무지갯빛이 뒤섞인 오묘한 빛깔의 보석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유니콘의 뿔 조각입니다.”

“……유니콘의 뿔?”

말로만 듣던 전설의 동물의 뿔이라니. 리비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돌덩이를 주워 와서 사기 치는 거 아니야?’

그 표정을 그대로 읽었는지 콜램 백작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이 펜던트는 왕가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단 두 개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는 레제트 공작이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요?”

설마하니 혼수품으로 이걸 준다는 소리는 아닐 테고. 왜 갑자기 이걸 들이미는 걸까.

“여기에 ‘피의 서약’을 하는 겁니다.”

“피의 서약?”

리비는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 펜던트 한가운데에 피를 흘려 넣고, 기다리면 됩니다. 간단하죠?”

콜램 백작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어찌나 징그러운지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흘려 넣으면요?”

“순결한 처녀라면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않다면?”

자신을 쓰윽 훑어보는 시선이 재수 없어서 리비는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색이 검게 변합니다.”

“거짓말.”

리비는 속에 든 생각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해보시면 알겠지요.”

고작 이런 돌덩어리에 그런 힘이 숨어 있다니. 하지만 백작의 표정은 진지했다.

“……좋아요.”

리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지를 입속에 집어넣어 그대로 물어뜯었다.

“리비?!”

하이든 백작의 놀란 목소리가 쩌렁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걸 듣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뚝뚝.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선혈을 들어 보이며 리비는 또박또박 말했다.

“됐나요?”

뚝뚝.

새빨간 선혈이 뽀얀 빛깔의 펜던트 위로 떨어졌다. 순간 피가 닿은 보석의 색이 잠시나마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보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됐죠?”

리비는 다시 손을 가져가 입에 넣은 뒤 남은 피를 쪽 빨아 먹었다. 씁쓸한 쇠 맛이 입안에 퍼질 무렵, 콜램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펜던트의 피를 닦은 뒤 집어넣었다.

“아주 순결한 몸을 지녔군요. 이런 구석진 시골이라 걱정을 좀 했습니다만.”

콜램 백작은 아마 정성스레 길렀을 게 분명한, 길기만 길고 숱 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기쁜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결혼만 하면 되나요? 준비 절차는요?”

“모든 준비는 왕실에서 할 겁니다. 이건 왕실의 혼사니까요. 리비 양은 아무런 준비도 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이곳에서 레제트 공작의 영지까지는 꽤나 먼 관계로, 한 가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배려? 오십도 더 넘은 인간이 자기 딸뻘인 여자와 결혼할 맘을 먹었으면서 한다는 배려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이제 고향을 떠나 다시 못 돌아올 레이디 하이든을 위해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

리비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운 이야기였다.

“공작께서 이곳으로 오시나요?”

“하이든 양께서 이곳에서 홀로 결혼식을 치르실 겁니다. 아, 물론 예물과 드레스 등은 모두 최고급으로 준비할 겁니다. 공작은 신부에게 돈을 아끼지 않으니까요.”

“참으로 감사하네요.”

“그러니 영광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콜램 백작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좋아요. 내가 자란 이곳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누죠. 허락해 주신다 하니.”

이 땅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죽어서 백골 가루가 되어 날아서 돌아온다면 또 모를까. 그 사실을 떠올리자 리비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것으로 다 됐다고 치고.”

리비는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서자 짤따란 키의 콜램 백작을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저는 왕녀의 딸이자, 왕실의 일원이자, 남부의 지배자인 레제트 공작의 부인이 된다는 소리인데.”

“……그렇습니다.”

또박또박 이어지는 말에 콜램 백작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미간을 좁혔다. 리비는 그런 그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내게 예를 갖추는 게 어떨까요?”

“무, 무엇을.”

“무릎 꿇고 예를 갖춰야죠. 감히 왕실의 핏줄인 나에게 예도 갖추지 않았잖아요? 이용해 먹을 때만 왕녀의 딸이니 뭐니 떠들고, 대우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건가요?”

옆에 있던 니콜라스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그리고 콜램 백작을 비롯해 집 안에 들이닥친 기사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내게 예를 갖춰요. 콜램 백작.”

팔려 가는 결혼을 하기 위해 신분 복원까지 시킨 마당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는 누려야겠다. 리비의 머릿속에 스쳐 간 한 줄기 생각이었다.

“…….”

백작의 시선이 흙이 묻은 리비의 앞치마를 보았다가, 손에 묻은 흙과 활동성 좋게 짧게 입은 치마까지 차례로 훑어 댔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래서 리비는 한층 더 속이 꼬였다.

어차피 이 시골구석까지 기어들어 와 기어코 자신을 결혼시켜야겠다고 하는 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 아닌가.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설설 길 필요도 없다. 자신은 왕녀의 딸이자 평화의 상징이 아닌가.

“뭐 해요? 꿇어요. 그쪽들도 전부 다.”

“…….”

기사들을 포함해 콜램 백작까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해했다.

“싫어요? 공작 부인이 될 왕녀의 딸에게 예도 갖추지 않다니. 폐하께서 아신다면…….”

순간 콜램 백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가장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취했고, 뒤를 이어 험악한 얼굴의 기사들도 하나둘 무너지듯 예를 표했다.

억지로 받아 낸 예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아빠, 일어나요.”

리비는 꿇어앉아 있던 하이든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아빠도 왕실의 일원이잖아요. 일개 백작 따위가 무례한 걸 용서할 수는 없죠. 백작이라고 다 같은 백작은 아니잖아요?”

“…….”

콜램 백작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무릎 꿇고 있던 콜램 백작의 입가에 대놓고 비웃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위세를 부려 봐야 팔려 가는 처지임을 잊지 말라는 듯한 미소였다.

리비는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웃어 보였다. 하지만 꽉 움켜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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