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1권
0. 프롤로그
아무리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보리스, 풀어 줘.”
이번이 몇 번째더라, 리비는 속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 보려다 말았다.
그래 봐야 그의 대답은 한결같을 테니까.
“안 돼.”
그의 그린 듯 아름다운 입가가 슬쩍 풀어졌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의미 없는 반항에 손목을 묶은 줄의 힘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이러지 마. 이거 풀고 얘기해, 우리. 응?”
“……우리?”
그는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단어를 들은 듯, 해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을 보는 리비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대화의 끝에 그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참이었다. 이걸 놓칠 수는 없었다.
리비는 자신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 내려 노력했다.
“응, 나, 아파, 보리스. 이것 봐, 빨개졌잖아?”
아닌 게 아니라 침대 머리맡 기둥에 묶인 손목은 가느다란 줄에 쓸려 살갗이 벗겨지고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리비는 그에게 잘 보이도록 한껏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는 바람에 바짝 당겨진 줄이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리스는 재빨리 리비의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아파……?”
보리스는 그녀의 손목을 쓸어 보았다. 좀 전까지 해맑게 웃던 얼굴에 급격히 그늘이 드리워졌다.
“응, 아파. 아야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짙은 자괴감이 몰려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어릴 적 기억을 총동원해 그를 설득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아파하는 걸 못 견뎠다. 언제였던가, 그녀가 열병을 앓던 날에도 차라리 자기가 아프고 말겠다며 아픈 그녀의 옆에서 꼴딱 밤을 지새운 그였다.
“리비, 아파. 보리스 때문에…….”
쥐어짜 내려 노력하자 정말로 눈꼬리에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최대한 모아야 해, 최대한…… 영혼까지…….’
억지로 하품을 일으켜 속으로 삼키자 눈꼬리 쪽으로 확 눈물이 더 몰렸고, 리비는 이내 그것을 또르르 떨구는 데 성공했다.
“흑…….”
눈물과 울먹이는 소리가 합쳐져 낸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손목을 묶은 밧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드디어.’
리비는 기쁨의 미소가 번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꾹 눌렀다. 애써 그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려 눈을 굴리던 때였다.
“…….”
보리스는 침대 위에서 다리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앉아 있었다.
그 때문에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서로 몸이 밀착되었고, 그 낯 뜨거운 자세는 자꾸만 다른 것을 보게 만들었다.
느슨히 풀어 내린 상의 때문에 몸을 숙일 때마다 탄탄한 가슴팍이 들여다보였고, 그때마다 리비는 잠시 숨을 멈춰야만 했다.
‘저런 근육은 언제 키웠데.’
새삼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자기가 못 보는 동안 이렇게 커다래진 몸으로, 자신의 위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그녀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릴 적 기억 속, 눈물 많던 미소년은 이제 자신의 몸쯤은 모두 덮어 버리고 남을 만큼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그와 재회하자마자 홀랑 납치되어 끌려왔다는 사실.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리비?”
“응?”
손목을 묶은 힘이 느슨해진 게 느껴지자 그녀는 순간 안심하고 말았다. 휙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미처 붙잡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본 보리스의 눈빛이 다시 위험하게 내려앉았다.
“안 돼, 리비. 보낼 수 없어.”
그는 음울한 얼굴로 속삭였다.
“왜?”
그녀는 멍한 얼굴로 물었다. 사람을 묶어 놓고는, 그것도 오늘 새신부가 됐어야 할 여자를 외간 남자인 자기 아래 깔아 두고서는, 그는 되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 딱 그런 표정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네가 왜?
“풀어, 풀라고! 이 미친 새끼야!”
마침내 오랜 설득을 거치는 동안 가까스로 유지하던 인내심이 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리비는 마구 발을 구르며 악을 썼다.
“풀라니까아아!! 이 또라이야아아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마구 잡아당기자 손목을 묶은 밧줄이 죄어들었다.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했다.
“그러지 마, 리비. 아프잖아.”
그는 안타깝다는 듯 말하더니 커다란 몸을 숙여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녀의 몸을 꾹 눌러 덮쳤다.
“이거 놔!”
내리눌린 채로 그녀는 계속해서 악을 써댔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깊게 몸을 내리눌렀다.
마침내 용을 쓰다가 힘이 다 빠져 버린 그녀가 사지를 축 늘어뜨렸을 때였다.
“약속했잖아, 나랑.”
내가? 뭘?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리비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잔뜩 우울한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나와 결혼하기로.”
마침내 그의 입에서 떨어진 소리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나, 난 그런 적 없어.”
없다, 분명히. 머리를 통째로 뒤집어 탈탈 털어 봐도 그런 기억 따위 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한 적이 없는 약속이니까. 하지만,
“약속했어, 분명히, 리비.”
그가 들춰낸 건 먼 과거의 기억이었다.
***
수도에서 멀고 먼, 시골에 손바닥만 한 영지를 가진 백작가의 딸이 영위하는 삶이란, 흔하디흔한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인 니콜라스 하이든 백작은 오래전 성에서 기사로 일했을 때 공로를 세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고향을 떠났던 기사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채 돌아왔다. 그 아이가 바로 리비였다.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인 하이든 백작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리비의 생모를 두고서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맺어질 수 없는 귀족 아가씨라는 설과, 길에서 만난 여자라는 설까지 다양했지만 그중 어느 것도 사실로 확인된 바 없었다.
다만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는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차차 리비의 모친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리비를 ‘아가씨’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행동은 여느 마을 여자애들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릎까지 오는 짤따란 치마를 입고 온 들판을 마구잡이로 쏘다녀도 딱히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비는 마을 아이들과 진흙탕에서 뒹굴기도 하고, 온갖 거친 놀이들을 거침없이 하며 자랐다. 매일 밤 수도에서 벌어진다는 무도회며 파티며 하는 것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니, 그 비슷한 것들이 열리기는 했다. 이곳에서도.
포도 수확철이 되면 작은 축제를 열곤 했는데, 마을 회관에 모여 다 같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춤을 추고 갓 담근 포도주를 마시곤 했다.
다만 그 규모나 사람이나 입고 오는 드레스, 그 밖에 걸친 모든 것들은 수도의 그것들과는 아주 멀었다.
수도와의 거리만큼이나.
그래도 뭐, 나름대로 괜찮았다. 애초에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 딱히 부럽거나 동경을 하지는 않았다.
그날도 그런 많고 많은 날 중 하루였다.
리비는 잔디 위에 덜렁 드러누워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장미로 만든 화관을 쓴 채였다.
동그란 사탕을 입에 물고 굴리느라 양 볼이 번갈아 가며 울룩불룩 솟아났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 옆에 앉아 그 귀여운 볼이 실룩이는 걸 보는 소년은 보리스였다.
마른 몸, 이마 위로 흩어진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칼과 신비로운 빛을 내는 보라색 눈동자는 얼핏 보면 근방에서 제일가는 미소녀가 아닌가 싶게 어여뻤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양새까지 완벽했다.
그 소년은 아까부터 리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내가 만들어 준 화관을 썼으니까, 넌 이제 내 신부야.”
소년은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아니지.”
리비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왜 나랑 결혼은 안 되는 건데?”
그는 지금 막 오랜 시간 준비해 온, 난생처음 한 청혼을 입 밖으로 꺼내 놓자마자 대차게 거절당한 참이었다.
“리비, 왜? 어째서?”
소년은 선뜻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되물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랑 난 어울리지 않거든.”
울상인 소년과 달리 잔디밭에 덜렁 드러누운 소녀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우중충한 비구름을 잔뜩 드리운 것 같은 소년의 얼굴과 달리 리비의 얼굴은 더없이 해맑았다.
“…….”
리비의 대답에 소년의 보랏빛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 애달픈 눈동자였다.
“왜? 리비, 나 좋아하잖아. 내가 좋다고 했었잖아.”
보리스의 눈에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렁그렁했다. 그것을 흘긋 본 리비는 또 울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귀찮은 듯 대꾸했다.
“넌 나보다 신분이 낮으니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리비는 오른쪽 볼에 있던 사탕을 왼쪽으로 옮겨 물며 대답했다.
그녀는 귀에 들리는 말보다는 자기 혀에서 놀아나는 사탕의 감촉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대충, 뒷전이 되고야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리고 소년은 진지했다. 사탕의 달콤함을 음미하느라 리비는 눈을 감은 채 혀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느라 보리스가 세상 끝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글쎄, 네가 공작이 된다면 또 모를까.”
불룩, 소녀는 다시 사탕의 위치를 바꿔 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나랑 결혼해 주는 거야? 정말로?”
소년의 눈은 순식간에 은하수를 쏟아부은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비는 그것 또한 보지 못했다.
“물론이지.”
그 진지한 물음에 리비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입방정은 떠는 게 아니었다.
***
“…….”
강렬하게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간 기억에 리비는 소스라치고 말았다.
“리비, 괜찮아?”
몸을 부르르 떠는 리비를 보던 보리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충격에 빠진 리비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리비, 리비?”
이 모든 게 다, 자기 입이 불러온 재앙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리비는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리비…….”
문득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련하게 떨려 왔다. 리비의 귓가에 입을 바싹 가져다 댄 보리스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뜨겁고 간지러운 감각에 리비는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거렸다.
“응? 으응?”
리비는 그제서야 보리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물 가득하던 보랏빛 눈에 또 다른 빛이 떠올라 있었다.
‘위험하다.’
명백히 위험한 신호였다, 그것은. 눈물 젖은 눈가에는 어느덧 정체 모를 광채가 맴돌았고, 그것이 광기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리비는 저 똘끼 충만한 눈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몸을 움직여 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이미 보리스에게 내리눌린 상태였으니까.
어딘가로 도망가는 것도,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도 모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표정을 숨기는 일에 그렇게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리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아주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다 기억난 거지?”
“…….”
리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석고상이 된 듯 그를 바라보며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보리스, 그게…….”
“리비.”
문득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리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나, 나는…….”
뜻과 다르게 몸은 자꾸만 떨려 왔다. 기이하게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이 마치 주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건…… 장난…….”
장난이고, 농담이었다. 왜, 어릴 때 그런 놀이 많이 하지 않는가. 나중에 크면 나와 결혼해 줘, 같은 거.
겨우 어릴 때 장난처럼 한 약속 따위로 왜 지금 발목을 잡혀야 하는가. 그녀는 새삼 억울한 마음에 항의하고자 그를 휙 노려봤다.
“장난?”
눈을 희번덕이며 되묻는 통에 리비는 차마 모든 건 장난이었노라고, 그저 농담일 뿐인데 왜 이리 진지하게 구느냐고 대꾸할 수 없었다.
“…….”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거야, 그렇지?”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 보는 리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망했다.’
결혼 약속 따윈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