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족異族 결혼
8월이 되면 뒤뜰은 대형 발로 뒤덮이는 날이 많았다. 폭염 때문이다. 빗물을 흠뻑 먹은 국화는 강한 햇빛을 받으면 마르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큰비를 맞아 거름이 많이 유출되면 어머니는 양질의 배양토를 만들어 다시 화분에 채워 넣는 작업을 했다.
수연은 농부처럼 일하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환이 집으로 들어온 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고 한동안 깨어나지 못하셨다. 병원 침실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누운 어머니를 보고
수연은 오열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아버지의 죽음과 뒤이은 경제적 압박에 수연은 현실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엄마, 제발 이러지 마. 나도 정말 힘들어. 우린 같이 도와야 해. 엄마가 정말 오빠랑 살기 싫다면 집에서 나오면 되잖아. 나한테……,
나한테 돈 조금 있으니까 엄마랑 나 살 집은 구할 수 있을 거야."
"안 돼, 그 집만은 안 돼! 다 뺏겨도 그 집만은 안 돼!"
어머니는 원수같이 증오하는 지환에게 딸은 내주어도 집은 내주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소중한 집이라는 건 알지만,
집이 딸보다 우선인 것 같은 어머니의 반응은 당황스럽고 씁쓸했다. 하지만 집을 나간다는 건 수연에게도 끔찍하게 막막한 일이었다.
이제 수연은 지환을 믿고 의지하는 일 이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연은 2층 창가에서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간밤을 떠올렸다. 간밤엔 비가 왔었다. 무언가 번쩍하는 느낌에 눈을 떴다. 깜깜한 방에
창으로 들어온 날카로운 빛이 한순간 천장을 후려치고 사라지곤 했다. 훅 끼치는 더위에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금세 몸이 끈적끈적했다.
수연은 침대에서 나와 속옷에 실크 로브만을 걸친 채 방을 나왔다. 로브의 허리끈을 묶으며 지환의 방 앞에 섰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렸다가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살짝 밀어 방 안을 엿보았다. 지환은 자고 있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있던 지환이 몸을 돌려 수연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수연은 성큼 방으로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지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수연은 얇은 로브를 벗었다. 지환의 눈이 관능적인 여체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수연은 욕정이
차올라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지환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고 몸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폭발할 것만 같았다.
"오빠……."
갈망으로 떨리는 부름에 지환이 다가왔다. 수연은 굶주린 짐승처럼 지환의 머리를 허겁지겁 잡아끌었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얽히는 순간
통증과도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너무 들떠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수연은 미친 듯이 지환의 입술을 핥으며 손을 뻗어 바지를
벗겨 내렸다. 지환의 물건이 이미 발기해 있는 걸 보고는 환희의 신음을 흘리며 지환의 목에 매달렸다.
"오빠, 빨리…… 아아……."
지환의 두 팔이 수연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올렸다. 수연은 긴 다리로 지환의 허리를 휘감아 매달려서는 자신의 몸을 열었다.
그런데 막 서로의 몸이 결합되려는 순간 지환이 수연을 밀어냈다.
"너 이러면 후회할 거야."
수연은 쾌락에 잠긴 멍한 눈길로 지환을 보았다. 지환 역시 열정으로 들뜬 눈인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 힘들어서 너 제정신이 아냐. 이렇게 풀면 너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오빠……."
"그래. 네 옆에 있어."
"뭐에 홀린 것만 같아."
수연은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지환의 맨살을 적셨다. 수연은 떨면서 지환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게 벌일까? 우리 또 잘못하고 있는 걸까?"
지환이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수연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물로 적셔 있는 수연의 뺨과 입술에 안타까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연을 달랬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사랑이 잘못된 거라면 다시 만나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그만해. 응?"
"용서 빌고 싶어.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지환은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수연을 꽉 안았다. 아무리 안아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으스러지도록 수연을 안으며 요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곁에 있는다고 약속해."
"……응."
"나한테서 달아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약속해."
밤은 깊었지만 지환과 수연은 서로의 품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내내 침묵한 밤이었다. 새벽녘 샤워를 하고
수연은 자신의 방으로 가 잠을 청했다. 걱정된 지환이 억지로 신경안정제를 먹인 탓이었다.
생각하면 자신이 소름끼쳤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아직도 가슴에 멍울져 있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걱정으로 가득한데,
그런데도 지환의 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지환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엄청 혐오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깨어났을 때 지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은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자신 안에 지환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걸 깨달았다.
이제 오수연 속에 자신은 없고 석지환만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조금도 불편하지도 않고 걱정되지도 않으니까 더 겁이 나는 거였다. 이
두려움마저도 지환을 생각하면 티끌처럼 사라져버리니, 곧 자신은 두려움조차 못 느끼게 될 것이다.
한동안은 자책감으로 미칠 듯 괴로웠다. 아버지가 자금난으로 고생한 지 오래되셨고 몇 차례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고혈압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시고 힘든 걸 술로 달래셔야 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다. 게다가 지환과 결혼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노엽게 한 걸 생각하면 죄책감으로 자신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딸이 아니라 짊어지고 나가야 할 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자책감도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옅어지고 잊혀져갔다. 순간순간 웃는 일도 생기고, 맛있는 게 입으로 들어가고, 귀에 익은 멜로디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도 되었다. 특히 퇴근해 돌아오는 지환을 보면 금세 기쁨이 번져 행복한 기분마저 들었다. 가끔은 그 행복
속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며 가슴 아프고 괴롭고 슬펐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만개한 국화가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국향이 집을
태우는 동안 세 사람의 동거 생활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네, 천안지점 윤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윤 대리님?"
"아, 네. 안녕하세요."
"어머, 누군지 아시고 인사하시는 거예요? 제 목소리 벌써 잊으셨어요? 에이, 너무한다."
"어! 오수연? 야, 너……."
"호호호,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정말 오랜만이죠?"
"야, 이 자식 너, 살아있었냐? 아, 너 진짜……."
"반가워해 주시니까 고맙네요. 잘 살고 있어요. 윤 대리님은 어떠세요? 지점은 좋아요?"
"그냥 그렇지 뭐. 여긴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재미있어. 본사보단 활기 있고 좋아. 그만큼 귀찮은 일도 많지만."
"다행이네요. 윤 대리님은 성격 좋으셔서 어디 가서도 잘 적응하실 것 같았어요."
"참, 아버님 소식 들었다. 다들 뒤늦게 알아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지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구. 내가 안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
이것저것 신경 쓸 일 많을 거 같아서 말야."
"잘하셨어요. 근데 이번에는 꼭 와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저 결혼해요."
"뭐? 정말이야? 누구랑? 석 이사랑? 언제?"
"크리스마스이브에 해요. 청첩장 따로 보내드릴게요."
"야, 축하한다. 잘됐구나. 정말 잘됐어."
"윤 대리님은 특별히 초대하고 싶었어요. 저 많이 후원해 주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되게 기쁜 거 보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드디어 오수연이 아줌마가 되는구나. 아줌마 되면 이제 철 좀 들어라, 응?"
"잘 나가시다가 또 왜 그러세요. 윤 대리님은 어떠신데요? 첫사랑 어떻게 됐어요?"
"아, 같이 산다."
"어머, 정말요? 재혼하셨어요?"
"아니, 그냥 같이 살아. 작년에 결혼식 했는데 올해 또 결혼식 하기도 그렇고, 1년 안에 마누라 이름이 바뀌는 것도 좀 낯 뜨겁고 해서 그냥
같이 살아. 언제 한번 놀러와. 음식 솜씨는 형편없는데 밥은 곧잘 하니까 한 끼 정도는 먹여줄게."
"아, 그럴게요. 어떤 분이신지 정말 보고 싶어요. 결혼식 때 같이 오세요."
"야야, 누구 기죽이려고. 오수연이 결혼식인데 오죽 휘황찬란하겠어. 됐다. 나 혼자 갈란다."
수연은 어머니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하는 결혼이지만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마음도 녹아 두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실 거라는 희망으로 차곡차곡 마음을 다졌고 결혼식을 준비했다.
결혼식 날은 눈이 왔다. 하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수연은 비가 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 지환의 것이 되었으니
공식적으로 지환의 것이 되는 날 비가 오는 건 운명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이니 눈이라도 내리는 건 운명을 거슬리는 게 아닐
것이다.
눈처럼 흰 웨딩드레스에 흰 장미 부케를 손에 들고 하얀 베일에 얼굴을 가린 신부는 블랙홀처럼 깊은 신랑의 눈에 빠져 식장으로 들어갔다.
고아인 신랑의 하객은 학교의 동문들과 회사 사람들로 인해 북적북적한 반면에, 3대 독자였던 아버지를 여읜 신부의 하객은 눈에 띄게 작고
초라했다. 그것에 관해 하객들은 조금씩 쑥덕거리고 있었지만 신랑 신부의 행복감을 손상시키지는 못했다.
신부의 왼손 약지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끼워지고 성혼의 키스를 하고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축포가 터졌다. 수연은 부모님의
빈 자리를 보고 마음 울적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신혼여행을 위해 준비했다. 식장을 나올 때 하루와 같이 온 휘문의 축하를 받았다.
뜻밖의 만남에 반가웠고 과연 쿨한 남자구나 다시 한번 느꼈고 두 사람이 잘되길 진심으로 빌었다. 역시 축하하러 온 윤 대리를 비롯한
회사 사람들과 바쁘게 인사를 주고받고 차에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 아는 체를 해왔다.
"아, 강 부장님?"
"아이구, 맞네요. 멀리서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수연은 아버지 회사의 경리부장으로 있었던 중년의 남자를 보고서 금세 얼굴이 굳어져버렸다. 아버지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슬퍼지고 불안해진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지환의 모습을 찾았다. 호텔의 회전문 앞에 서 있는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지환은 남성복 모델처럼
차려입은 멋진 신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몇몇은 낯이 익었다. 지난번 워커힐호텔에서 보았던 그 사람들인 것 같았다.
"여, 여긴 어떻게 아시고……."
"알고 온 게 아니고 여기서 약속이 있어서……. 연락을 좀 해주시지 않구요. 사장님 그렇게 되시고, 회사도 또 그렇게 돼서 참 마음이 착
잡했습니다. 그나저나 사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인사라도 드려야할 텐데……."
"머, 먼저 들어가셨어요.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아, 그러시기도 하실 겁니다. 혼자 딸 혼사 치르시는 마음이 오죽하시겠습니까.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멀쩡히 잘 계셨으니……."
수연은 행복한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이 남자를 어서 보내고 싶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웠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을 이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버지를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애써 참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쯔쯔……. 좋은 날에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아, 아니에요. 오랫동안 아버지 곁에서 도와주셨는데……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내가 오히려 죄송하죠. 제가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아참, 이거 정신이 없었네요. 인사부터 드렸어야 하는데,
축하합니다. 행복하게 잘 사세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신랑은 어디에……."
"저쪽에 있는 사람이에요. 가운데 키 큰 남자……."
"아…… 훤칠하게 잘 생기셨군요. 뭐하시는 분입니까?"
"증권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요."
"아, 네…… 근데 낯이 좀 익네요. ……아!"
수연은 핸드백 속에서 손수건을 찾아 눈물 자국을 닦다가 놀라는 강 부장을 보았다. 지환을 보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수연과
지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수연을 붙잡고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저 사람이 신랑이란 말입니까?"
"왜, 왜 그러세요?"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하시는 결혼입니까! 저 사람은……, 저 사람은 사장님 돌아가시게 한 놈입니다! 사장님이 누구 때문에 충격을
받으셨는데…… 이 결혼은 절대 안 돼요!"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장님 쓰러지신 건 저 사람 때문이에요! 저 사람이 어음을 들고 와서 부도를 내겠다고 사장님께 협박을 했단 말입니다! 그 충격으로
사장님이 쓰러지셨어요! 저 사람은 절대 안 됩니다, 아가씨!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하얀 눈이 퐁퐁 떨어져 수연의 이마를 적셨다. 수연은 푸르르 떨며 두꺼운 코트를 여미고서 비실 웃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부장님. 그럴 리가 없어요."
"농담이 아니에요! 이거 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건 음모예요! 안 되겠어요. 내가 가서 저놈 멱살을 잡고 실토를 시키겠습니다."
"아, 아, 아니…… 자, 잠깐……."
수연은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도 지환에게 가려는 강 부장의 팔을 꼭 붙들었다. 손톱이 양복을 뚫고 남자의 팔에 자국을 남기도록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저, 정말 저 사람이……."
"틀림없다니까요! 저 사람 때문에 사장님께서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몰라요."
"서, 설마……."
"저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아가씨한테 접근한 게 틀림없어요! 내 당장 끌고 와서……."
"자, 잠깐만요."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내, 내, 내가 물어볼게요."
겨우 그 한마디 내뱉은 수연은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에게 좀더 강한
어조로 부탁했다.
"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아무 말씀 마세요. 부탁할게요."
"이 결혼은 절대 안 됩니다, 아가씨! 저놈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예요!"
수연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떨리는 손으로 차문을 닫았다.
어두운 차 안에 혼자 남은 순간 수연은 떨리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지환을 붙들고
패악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자신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말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땅바닥에 머리를 짓찧고 싶었다.
하지만 손바닥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달아나면 끝이야. 더 이상 달아날 데가 없어. 아버진 나와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 돌아가신 거야. 이제 내가 해야 해.
내가 엄마를 지켜야 해.
하지만 아직은 숨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지환의 품에 있으면 편하고 안전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괴롭고 불행하기만 한 진실은 행복한 거짓보다 못하지 않은가.
그때 차문이 열리고 장신의 지환이 들어와 옆에 앉았다. 수연은 꼼짝도 않은 채 주먹 쥔 자신의 손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환의 손이
뻗어와 그 주먹을 감쌌다. 손이 따스했다. 수연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차에 탄 순간부터 수연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지환은 아무 말 없이 수연의 어깨를 끌어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수연은 따스한 품에 꼭 매달려 조용히 흐느꼈다.
"이제 시작인데, 첫날부터 울게 만드는구나. 미안하다."
지환의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노력하면 어머니도 언젠간 알아주시겠지."
지환은 수연이 꼭 움켜쥐고 있는 손수건을 빼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수연의 눈에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지환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흐느끼는 수연의 몸을 더욱 꼭 안아주었다.
신혼여행,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짜릿해야 할 그 출발이 수연에겐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고통 속에서 시작되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