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5)

사랑이 전쟁을 낳는다

 수연의 집 정원엔 황금물결이 굽이치고 있었다. 대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계단을 제외한 양쪽 화단에 심은 국화가 개화를 했기 때문이다. 

짙은 황금색의 금계국이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피었다. 부지런한 일벌들이 도시에선 보기 드문 황금벌판의 달콤한 꽃향기에 

만취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짙은 노랑의 화단 뒤에는 수연이 좋아하는 핑크빛의 귀부인이 만개해 있었고 

계단을 따라서는 화분에 심긴 새하얀 춘광이 개화를 앞두고 단장이 한창이었다. 새하얀 춘광이 개화를 하면 뒤이어 

본격적인 국화의 계절이 오는 것이다.

 수연은 암흑 같은 집안 분위기를 비웃듯이 눈부시게 광란하는 황금물결을 보았다. 미쳐버릴 것같이 화려한 그 빛 사이로 난 좁은 

자갈길을 걸어 집의 뒤쪽으로 갔다. 거기엔 어머니가 손수 가꾸시는 화분이 있었다. 모두 국화가 심긴 화분이었고 그 수는 오백여 개에 달했다.

 그 화분들 사이에 농부처럼 밀짚모자를 쓰고 쪼그리고 앉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핀셋이 들려져 있고 옆에는 

잘라놓은 순이 쌓여 있었다. 순치기를 해야 할 시기였다. 순치기는 묘목의 끝눈을 잘라주는 일로, 제때에 해주지 않으면 잎이 

자라는 속도가 느려지고 꽃도 늦게 피게 되는 것이다.

 수연은 아무 말 없이 어머니의 옆에 앉아 손톱으로 끝눈을 똑똑 잘라냈다.

 "손톱에 물든다."

 "괜찮아. 어차피 회사도 안 나가는데 뭘."

 지환이 인사를 드리러 온 그날 이후 수연은 일종의 감금 상태였다. 회사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사표를 제출해 버렸고, 자동차 열쇠, 

지갑, 휴대폰은 압수당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방 앞에서 보초를 섰다. 오늘로 보름째였다.

 답답한 걸 참지 못하는 수연이 보름간이나 집에 갇혀 있는 건 지옥과 같았다. 뛰쳐나가려면 못할 것도 없는 수연이 이 지옥에서 버티고 

있는 건 지환의 위로 때문이었다. 지환은 '곧'이라고 말하며 수연의 다급한 성질을 자제시켰다.

 갇혀 있는 수연을 불쌍하게 여긴 아줌마가 지환에게 걸려온 전화를 몰래 건네준 건 수연이 사흘째 단식 투쟁을 하던 날이었다.

 "죽이라도 좀 먹어야지 그러다간 몸 상해 못 써. 어렸을 때부터 둘이 정이 너무 깊더라니, 쯔쯔. 남자 여자 정분나는 거야 누가 막겠냐만, 

그래도 안 되는 거지. 아무리 핏줄이 다르다고 해도 온 세상천지가 남맨 줄 다 아는데, 그럼 안 되는 거야. 마음 고쳐먹어, 응? 

나 같아도 절대 허락 못하지, 못하고말고. 그냥 의좋게 지내고 말어. 에고, 딱해라. 정 떼는 게 쉽지가 않을 거구만."

 가끔 올라와 그렇게 혀를 차고 나가던 아줌마가 전화기를 몰래 가져다준 그날은 참다못한 수연이 2층 자신의 방에서 뛰어내리다가 

발목을 삔 날이기도 했다. 비참하고 분한 기분으로 찜질을 하고 있는데 아줌마가 쉬쉬하며 들어오셨다.

 "이거 받고 밥 먹어. 응? 밥 먹는다고 약속하면 주고, 안 하면 안 줄 테니까."

 수연은 건성으로 약속을 하고는 다급히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오빠?"

 "발목은 괜찮니?"

 수연은 그때 목이 멘다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감정이 북받쳐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주질 않았다.

 "……보고 싶어, 오빠."

 "나 보려면 밥 먹고 기운 차려. 그리고 부모님이랑 싸우지 마. 휴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고 있어."

 "하지만 오빠……."

 "말 들어.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또 다쳤단 소리 들리면 그 집에 불이라도 질러버릴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가만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넌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내가 간다. 내가 갈 테니까……."

 "어, 언제?"

 "곧."

 "곧?"

 "그래, 곧."

 "하지만 어떻게? 아빤 내 얼굴만 보면 화를 내시고, 엄만 날 더러운 벌레 보듯 해. 가망이 안 보여. 이러다간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아. 

그렇게 안 되는 일일까? 정말 우리가 그렇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순순히 허락하실 거라는 생각 안 했잖아.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허락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들 거다."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돼."

 "알았어. 오빠가 그러라면 그럴게. 말 들을게."

 "힘내자, 응?"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오빠."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지만 지환은 오지 않았다. 지환의 말대로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책도 보았다. 그리고 어제는 

아줌마와 함께 잡채를 만들어 먹었고 침대 시트와 커튼을 빨았으며 만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다.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다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는 아버지께 실망시켜 드려서 정말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하지만 아빠, 제발 허락해 줘요. 난 오빠 없인 안 돼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내가 남자친구 많이 사귄 거. 근데 그 누구도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어. 오빠만큼 날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그래."

 "미친 것! 너 제정신이냐? 그놈은 네 오빠야!"

 "아니잖아요. 더 이상 아니잖아. 아들로 받아들여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망할 놈의 새끼! 어디 감히 제 동생을…… 파렴치한 놈!"

 "잘 살게요. 오빠랑 같이 엄마 아빠 잘 모실게요. 제발, 아빠……."

 "시끄러! 그놈 모가지를 확 비틀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아빠……."

 "이 맹한 것아, 그놈이 내 집에 들어오려고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 그 비열한 놈이 네 유산이 탐이 나서 그러는 거지 진짜 네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어! 그리고 길을 막고 물어봐! 남매간에 결혼하겠다는데 어느 부모가 눈이 안 뒤집혀! 추잡스런 놈! 어디 여동생을 넘봐!

 근본도 모르는 놈을 데려다 키웠더니 망조가 드는구나, 망조가 들어! 배은망덕한 놈! 은혜도 모르고 어디……."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내가 오빠가 좋다구! 엄마 아빠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너, 너 설마……."

 "이미 우린 하나야! 오빠와 난 하나라구!"

 "이, 이……."

 그 순간 수연의 뺨에 번쩍하고 불이 일었다.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불같은 성미의 아버지지만 가족에겐 한 번도 폭력을 휘두르신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분노로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연의 뺨을 때린 것이다. 수연은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졌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왔다.

 "때려도 소용없어. 죽인다고 해도 오빠한테 갈 거야! 다시 또 오빠랑 헤어지게 하면 죽어버릴 거야! 안 살아!"

 파란, 분노, 충돌은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절망적인 결론으로 기울어갔다. 부모님의 허락은 절대 받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설득하면 할수록 부모님의 분노는 더해만 갔고, 부모님과 부딪칠수록 수연의 마음도 차츰 얼어붙어 버렸다. 애초에 불가능한 도전이었다는 

절망감에 무력감이 더해져 방법은 도망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최초로 뺨을 맞은 그날 밤, 수연은 흥분해 아버지께 대든 것을 후회하며 울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속상해 울었고, 지환을 볼 수 없는 이 밤이 애달파 밤새 한참을 울었었다.

 볕이 따가웠다. 수연은 모처럼 어머니를 도와 묘목에 손을 대고 있었다.

 "춘광이 내일쯤이면 필 거 같아."

 "한 해, 한 해 조금씩 빨리 피는 것 같구나."

 "올해도 벌이 집 지으면 우리 이 동네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꿀은 먹으면서 벌은 내쫓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들인지……."

 수연은 잠시 어머니와 함께 순치기에 열중했다.

 전쟁 같은 보름을 보냈고 아직도 초긴장 상태의 냉전 중인데도 어머니는 매일 국화에 정성을 쏟았다. 그런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던 

수연은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놀리는 동안 이 무사태평한 정적이 어머니의 도피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가로운 벌과, 나른한 햇살과, 

손길 가는 대로 자라주는 이 고귀한 식물들이 어머니의 피난처이자 위로인 것이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이 피난처에서 나오신 

적이 없었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약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운 일이 닥치면 도망가 버리는 버릇은 어머니를 닮은 것일까. 그렇다면 최초의 그 무엇이 어머니를 이 피난처로 숨게 한 것일까.

 이십여 분이 흐른 뒤 수연이 잠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엄마."

 "……."

 "나…… 지환 오빠 많이 사랑해."

 "……."

 "펠리컨은 엄마, 목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 새 말야. 그 펠리컨은 새끼가 죽으면 자기 심장을 쪼아서 그 피를 새끼에게 먹인대. 그렇게 해서

 새끼를 다시 살려낸다는 거야. 엄마 난 말야, 만약 지환 오빠가 죽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머니의 핀셋이 멈췄다. 수연은 손을 털고 조용히 어머니를 보고서 물었다.

 "엄만 내가 죽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

 "미안해, 엄마."

 어머니의 핀셋이 다시 움직였다. 수연은 창백하게 굳은 어머니를 두고서 조용히 일어섰다. 어머니는 어미 펠리컨처럼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도 어머니에겐 어미 펠리컨처럼 할 자신이 없다. 수연은 이렇게 되어 있는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슬프고 눈물나고 가슴 아팠다. 

속상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연은 퉁퉁 부은 눈으로 저녁 식탁에 앉았다. 하루 종일 울어서 갈증은 났지만 식욕은 없었다. 그래도 식탁에 앉아 깨작깨작 먹고 있었다. 

어머니와 단둘뿐인 식탁을 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식사 속도에 맞춰 조금씩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에서 아줌마가

 받는 소리가 들렸다.

 "네! 아, 아이구! 아이구, 사모님!"

 어머니가 경색된 표정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수연은 엄습하는 불길한 기운에 휘감겨 빳빳하게 굳은 채 앉아 있었다. 뒤늦게 떨리는 

걸음을 옮겼을 때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디라구요? 마, 말도 안 돼……. 그, 그럴 리가……."

 쓰러지는 어머니를 아줌마가 흐느끼며 받쳐 들었다.

 "아이고, 아이고, 사모님……. 정신 차리세요, 사모님……."

 수연은 떨어진 전화기를 보고선 기계적으로 귀에 댔다.

 "여보세요?"

 다른 사람의 것 같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초점 없는 눈을 보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사장님께서…… 바,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수연은 그렇게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들었다. 사랑 때문에 아버지에게 대들며 가슴을 할퀸 지 5일째 되는 날, 낮엔 어머니의 가슴을 할퀴고서 

식탁에 앉은 저녁, 그렇게 사무치도록 허망하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무 손쓸 틈도 없이, 임종도 보지 못하고 유언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아, 안 돼…… 아빠! 아, 아아아아아악! 아, 아빠…… 안 돼요!"

 수연은 오열했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후로 이틀 동안 병실에 누워 계셨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수연은 목이 쉬도록 통곡했다.

 "으윽…… 으윽…… 으, 아아아아아! 크흑…… 아빠, 아빠, 아빠! 눈떠요! 안 돼, 안 돼요! 아빠, 아빠…… 제발…… 어어어어엉! ……내,

 내가 잘못했어…… 아빠!"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울부짖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머릿속은 하얗게 표백되어 갔고 세상은 암흑 같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환의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는 

일조차 지환에게 맡겨버리고 수연은 백지 상태로 있었다.

 신문에 부고를 내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장례식을 준비한 건 지환이었다. 대부분의 조문객들은 지환을 장손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사위로 알고 있고, 또 어떤 이는 먼 친척쯤으로 알았다. 수연은 처음 보는 많은 얼굴들이 영전에 절을 올리고 지환과 인사를 하

는 걸 보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보았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흰 국화에 둘러싸인 채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어느 쪽을 더 싫어하실까. 아내를 빼앗아간 국화에 둘러싸여 계신 걸 더 싫어하실까, 아니면 지환이 조문객을 맞는 걸 더 싫어하실까.

 수연은 멍한 눈으로 생각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지환을 눈으로 쫓았다.

 장례식 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통곡하지 않았다.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표정 없이 싸늘하게 굳어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수연은 그런 어머니의 몫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울고 또 울었다. 결국 탈진해 쓰러진 수연은 걱정하는 지환의 품에 안긴 채 아버지를 

배웅했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곡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줄기 눈물만 뚝뚝 흘리며 가슴에 맺힌 말을 토해냈다.

 "죄송해요, 아빠. 정말…… 미안해……."

 머릿속으로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신을 닮아 놀기만 좋아한다고 혼내면서도 껄껄 웃으시던 모습, 엄마 몰래 

용돈을 챙겨주시던 모습, 약주를 하시면 수염이 난 뺨으로 볼을 부비시던 모습, 그리고 고혈압으로 쓰러지셨을 때 병원에 누워 계시던 모습…….

 장례식이 끝나고 결국 혼절한 수연은 지환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지환을 내쫓았다는 건 알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수연은 더욱 괴괴해진 집에 어머니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름끼치는 적막감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안방에서 꼼짝도 안 하셔. 아줌마가 죽을 끓여드렸는데 손도 안 대신대. 이러다 엄마까지 어떻게 될까 봐 정말 불안해."

 아버지는 위대한 존재였다. 계실 땐 모르게 했다가 떠나신 뒤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는지 알게 했다. 아버지의 자리엔 커다란 

분화구가 생겼다. 집은 철골만 남은 것처럼 휑했고, 수연은 우주 미아가 돼버린 기분이었으며, 어머니는 반 실성한 사람같이 멍하고 

무기력하고 깜깜했다.

 한 줄기 국화처럼 고고하고 올곧아 보이던 어머니가 휘청하며 넋을 잃은 모습은 대단히 충격이었다. 한겨울 처마 밑 고드름처럼 차고 

날카롭기만 하던 어머니도 그 든든한 처마가 없으니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속은 사실 박속처럼 무르고 허했던 것이다. 

모녀는 가장의 그늘 아래서 따가운 뙤약볕도 칼날같은 비바람도 모르고 마냥 훈훈한 봄이었다. 그늘이 없어진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한 

철없는 모녀는…….

 "병원에 전화했으니까 곧 왕진 갈 거야."

 "주사도 안 맞으시려고 할 텐데……."

 "맞으시게 해야지. 넌 뭐 좀 먹었어? 몸은 괜찮아?"

 "괜찮아."

 "잠은 아직 잘 못 자니?"

 "천벌 받을 거 같아. 아빠…… 가정적인 분은 아니셨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정말 잘해 주셨는데……."

 수연은 전화기를 꼭 붙잡고 울먹였다. 감당할 수 없는 회한이 가슴을 파고들어 온몸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근데도…… 흑! 지금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나 미친 걸까? 아아, 나 정말 어떻게 된 걸까, 오빠?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오빠한테 이렇게 칭얼대지 말자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 안 돼. 오빠도 힘들 텐데……."

 수화기 너머에선 흐트러진 숨소리만 들려왔다. 어쩌면 지환도 울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의 생각만 하고 있던 수연은 처음으로 지환에게도 

아버지였다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지환의 심정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장례식 내내 굳은 표정으로 있던 지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수연은 알 수 없었다.

 말없는 전화기를 들고 한바탕 운 수연은 휴지로 눈물을 닦고 훌쩍이며 물었다.

 "저녁에 와줄 수 있어?"

 "장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수연은 화들짝 놀라서 방 앞에 선 낯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수연은 보지 않고서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와 

옷장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뭐, 뭐예요?"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수연은 놀라서 방에서 후닥닥 뛰어나왔다. 아래층에서 아줌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쿠, 왜 이래요!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아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우리 사모님 또 까무러치시겠네! 아이구, 사모님!"

 집 안엔 온통 빨간딱지투성이었다. 시커먼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빨간딱지를 마구 붙여댔다. 안방에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수연은 구르듯 달려 내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어머니의 국화 화분에 손을 댄 것이다.

 "안 돼! 이것만은 안 돼!"

 "그만둬요! 당신들 뭐예요!"

 그러나 남자는 어머니도 뿌리치고 수연도 내동댕이치고는 기어이 국화 화분에도 빨간딱지를 붙여놓았다. 충격에 아연실색한 수연은 

무의식중에 방 한쪽에 있는 아버지의 골프 클럽을 보았다. 남자가 그쪽으로 다가가는 걸 보고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가슴에 안고서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며 거실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수연은 이 세상에는 자신이 아무리 울고 사정해도 

조금도 봐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집달리가 한바탕 쓸고 간 집안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넋을 잃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수연은 거실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버선발로 정원으로 뛰쳐나간 어머니는 자신의 화분에 붙은 빨간딱지를 떼려고 안달이었다.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수연은 무의식 속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연이니? 어떻게 된 거야?"

 다급한 지환의 목소리에 수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오빠……."

 "왜? 무슨 일이야?"

 "지, 집에 남자들이…… 남자들이……."

 "뭐라구!"

 "어, 엄마가 아끼는 처, 천녀지곡에…… 빠, 빨간딱지를……."

 충격에 감정이 격해진 수연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슬픈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울 기력이 남아서 

슬픈 건지도 모른다. 수연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지환이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정원에 있었다. 지환은 그 넓은 정원에, 그 수많은 화분에 악착같이 빨간딱지를 붙여놓은 사람들에게 불같은 

화가 일었다. 그 사람들은 값나가는 화분에 붙인 것이겠지만, 거기에서 자라고 있는 국화는 어머니에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지환은 구둣발에 짓밟혀 꺾인 묘목을 세우며 어금니를 물었다. 분노가 일어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건 확실히 심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 소파에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수연을 발견했다. 흐트러진 거실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아줌마가 

지환을 보고서 반가워했다.

 "아이구, 어서 오게, 어서 와. 그 빌어먹을 놈들이 집을 이 꼴로 만들었네. 내가 살다 살다 별 험한 꼴을 다 보겠구먼. 어찌나 득달같이

 달려드는지 원, 막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미웁네 고우네 해도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돼. 에잇, 후레아들 같은 놈들!"

 지환은 아줌마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눈물로 짓무른 수연의 눈에 다시금 이슬이 차오르는 걸 보았다. 지환이 다가가자 

수연은 두 팔을 벌려 안겨들었다. 지환은 가슴이 에이는 아픔에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위어서 더 가늘어진 수연의 몸을 꼭 안고서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떨고 있는 수연을 달래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수연이 너무 애처로워서 가슴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내가 좀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 아냐. 나, 난…… 괜찮아. 난 괜찮은데 엄마 때문에, 엄마 화분 때문에…… 무, 무서워."

 지환은 파르르 떠는 수연의 몸을 자신의 가슴 깊이 안고서는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무서워 안 해도 돼. 내가 다 해결할게."

 "회사가 부도래. 원 실장한테 전화 왔는데…… 최종 부도라고……."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마. 회산 힘들지 모르겠지만, 이 집만은 지켜줄 테니까."

 "국화도 오빠. 화분 하나도 못 건드리게 해줘. 국화도 지켜줘, 오빠. 나…… 엄마까지 어떻게 되면……, 그러면 정말……."

 "걱정 마. 약속해."

 지환은 우는 수연을 안아들었다. 안은 채 2층 계단을 올라갔다. 12년 만에 오르는 계단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마루바닥과 복도 벽에 

걸린 낯익은 그림들을 본 지환은 가슴이 조금씩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세월에 조금 더 묵었을 뿐, 그것들은 기억속의 그것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건 수연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가구는 모두 새 것 같았지만 놓여진 그 위치는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수연을 침대에 눕히고 햇빛이 드는 창에 커튼을 쳤다.

 "오빠, 안 갈 거지?"

 "그래."

 지환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연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 입 맞추고 수연의 뺨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눈 감아."

 "도와줘 오빠. 지금 나한텐 오빠밖에 없어."

 "걱정하지 말고 자. 내가 다 알아서 해놓을게."

 "고마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계속 못 잤어."

 그러던 수연은 10분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환은 푸석푸석해진 수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처로운 마음을 달랬다. 

생각 같아서는 이 집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지환에게 이 집은 고통이고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거기에 못지않은 오기와 애착도 있었다. 아버지를 동경하고, 어머니를 흠모하고, 수연을 사랑한 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애정과 증오 사이에서 지환은 전쟁을 선택했다. 오수연이라는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 돌아가 싸우겠다고 말이다.

 지환은 꼭 잡고 있는 수연의 손에서 빠져나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오려던 지환은 책상 위 책꽂이에서 낯익은 백과사전을 

발견했다. 그건 낡아서 종이가 일어나고 손때가 묻어 거뭇거뭇했지만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백과사전이었다. 익숙한 감촉에 가슴이 

뛰고 손끝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백과사전을 펼친 지환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속에는 12년 전 자신이 숨겨놓은 담뱃갑과 라이터가 

그대로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정체 모를 감정이 끓어올라 심장이 욱신거렸다. 반가움, 기쁨, 놀람, 감동이 뒤섞여 가슴이 뜨거웠다. 부모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몰래 담배를 피웠던 사춘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비웃음이 일었고 한편으론 연민했다. 그 위에 향수가 덧그려져 마음이 짠했다.

 지환은 자고 있는 수연을 애정 넘치는 시선으로 보며 감사했다. 수연이 이런 걸 간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수연도 자신을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증거를 보게 되어 진심으로 기뻤다. 지난 12년의 고통이 일시에 씻기는 기분이었다.

 지환이 2층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현관에서 어머니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지환은 흙 묻은 

치마와 삐어져 나온 앞머리를 보았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지환의 마음을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통쾌한 기분과 분노였다. 이제 당신도 고통이 뭔지 아실 때가 되었습니다와 누가 감히 내 도도한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기분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환이 거실을 가로질러 가자 어머니가 쌀쌀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나가는 길이겠지?"

 "네."

 지환은 그대로 현관 쪽으로 걸었고 어머니는 안방으로 몸을 틀었다.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기 전 지환이 몸을 돌렸다.

 "내일 짐 갖고 다시 오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여기로 다시 들어올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내가 절대 용납 못해!"

 "이번엔 쫓아내실 수 없을 겁니다. 이 집, 제가 인수했으니까요."

 "뭐, 뭐라……."

 어머니는 쓰러질 듯 휘청했지만 문손잡이를 잡고 간신히 버텼다. 지환에게 그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을 터였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사채업자한테 넘어갔더군요. 제가 인수했습니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길거리로 나앉으시겠습니까? 빚더미 떠안지 않으시려면 상속 포기부터 하셔야 할 겁니다."

 "이, 이 나쁜 놈! 당장 나가!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더 이상 어머니 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와 살기 싫으시면 어머니께서 나가십시오."

 "뭐, 뭐……."

 지환은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역시 감정은 두 갈래였다. 드디어 '입성! '이라는 성취감과 상대도 

안 되는 적을 피폐화시킨 '무력 입성'이라는 씁쓸함이 있었다. 지환은 이 집에 다시 들어오려고 이를 악물었었다. 무슨 짓이든 해서 다시 

들어가리라 마음먹었었다. 지환에게 이 집은 그냥 집이 아니었다. 사랑과 고통의 근원이자 자신의 뿌리였다. 뿌리를 잃고선 꽃도 열매도 

없는 것이다.

 지환은 폭스바겐에 붙은 빨간딱지를 떼며 휴대폰을 꺼내 사채업자에게 전화를 했다.

 "석지환입니다."

 "아, 네. 일은 잘 처리가 되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각에 그 사람들 다시 보내주십시오. 제가 집 인수한 것 얘기하고 딱지 떼 가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그건 뭐 애초 계약하실 때부터 말씀하신 거니까 그대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지환은 전화를 끊고는 손가락으로 폭스바겐의 지붕을 두드리며 집의 정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드디어 들어가는 것인가.

 아버지의 집을 자신이 지킨 것에 대해 가슴 뻐근한 만족감이 있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냉혹한 어머니의 눈이 있어 긴장되기도 했다. 12년 전 쫓겨날 때 어머니를 이기는 힘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결심했었지만 자신이 그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부딪쳐 볼 생각이다.

 아버지 회사의 재정 상태가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나쁜 줄은 몰랐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구해 보려고 했지만 집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40년 가까이나 된 집이지만 워낙 잘 지은 집인데다 덩치가 꽤 크고 경관 좋기로 소문이 나 있어 알게 모르게 눈독 

들이는 자들이 많았다. 덕분에 예상 밖의 거금이 들어가 회사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느낀 것은 아홉 살 때 딱 한 번이었다. 학교에서 누군가와 싸워 얼굴에 상처를 입고 들어온 날이었다. 그때 아버진 

처음으로 똑바로 두 눈을 마주치며 사내자식이 패기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얻어맞고 들어오려면 아예 집에 들어올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을 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무엇이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록 만들었었다.

 지환은 정면을 응시한 채 한참동안 자신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때 이외는 지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대한 적이 없는 아버지는 아마도 

다시 당신의 눈에 무엇인가를 담게 될까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에도 스스로의 반응에 당혹해하셨으니까 말이다.

 지환은 붉게 젖은 눈으로 노을을 보았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아버지의 그 눈을 보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그 눈에 담긴 건 도대체 뭐였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