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폴카의 최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본 순간 수연은 이거야! 하고 눈을 반짝했다.
파스텔블루의 드레스는 슬립형의 어깨에 아랫단이 비대칭 컷으로 마무리된 디자인이었다.
수연은 하얗게 드러난 자신의 어깨와 풍만한 가슴선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는 수연의 몸에 맞춘 듯 딱 맞아서 가슴선에서 허리 엉덩이로 이어지는 수연의 몸을 더욱 섹시하게 보이도록 했다.
치마는 허벅지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퍼지는 디자인으로 걸을 때마다 오른쪽 허벅지가 드러나는 옆트임이었다.
옆으로 지브라 프린트가 되어 있는 오간자 소재의 드레스는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 상큼한 블루 빛이 유난히 더운
이 5월에 시원함을 더해 주었다.
아쿠아블루의 앙증맞은 비즈백을 들고, 아찔하게 높고 가는 굽과 핑크 밴드가 인상적인 샌들을 갖춰 신고 피팅룸을 나왔다.
부띠끄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던 지환이 머리를 들었다.
수연은 은밀한 유혹이 담긴 미소를 띠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지환은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보면서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마치 모델을 심사하는 디자이너처럼 발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괜찮군."
그 무뚝뚝한 평에 수연이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틀며 눈을 흘기자 지환이 다가왔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육식동물처럼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모습에 수연은 기대와 흥분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는 수연의 옆으로 다가온 지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는 종업원을 의식하며 낮게 속삭였다.
"너무 예뻐서 먹어버리고 싶다."
수연은 얼굴을 붉히며 지환을 밀어내고는 종업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입고 갈게요."
수연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날리며 지환의 팔짱을 끼고 매장을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씬한 수연의 몸매와 모델 같은 체격에 이지적인 마스크를 지닌 지환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 속에서 화장품을 몇 개 샀다.
입술이 지워진 것이 걱정되어서였지만 사실은 지환과의 키스로 입술이 자연스러운 생기를 띠고 있었다.
모임의 장소는 워커힐호텔 내부 조금 언덕에 위치한 에스톤하우스였다. 1층의 창으로 넓고 쾌적한 정원이 보이고 멀리 한강도 보였다.
부담스럽게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로 들어서자 경쾌한 현악중주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좀 늦은 것 같은데?"
"그렇게 딱딱한 자리는 아니니까 상관없어."
수연은 조금 긴장된 걸음으로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벽면은 특이하게도 팔각형으로 디자인 되어 있고 창틀은 격자무늬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음, 맛있는 냄새."
수연은 코를 킁킁거리다가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달래듯 통통 쳤다. 실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급스런 정장 차림의 남자고
여성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연처럼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한 여성은 더더욱 보기 드물었다.
흠, 이러면 내가 너무 돋보이잖아.
수연은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런 모임에 드나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어이, 석 이사! 이쪽이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젊은 남자가 부인인 듯한 예쁜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수연은 지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어갔다. 지환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던 남자가 수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여긴 내 약혼녀 오수연."
"약혼녀? 아니, 소리 소문도 없이 언제 약혼을 했어? 아, 아무튼 반갑습니다. 구본우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집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고 지환이 빼준 의자에 앉은 수연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지환이 자신을 약혼녀라고 소개한 때문이었다.
약혼녀라는 건 좀더 분명하고 현실적인 관계를 의미했다. 이제 정말 남매는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새삼스레 부끄러움이 일었고
지환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근데 정말 약혼녀십니까? 오해는 마시구요. 이 친구가 워낙 여자엔 관심이 없었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이 친구가 여자랑 있는 건 처음이에요.
우린 다 이 친구가 고자 아니면 게이일 거라고……. 아하하, 농담입니다. 하여간 이거 참 빅뉴슨걸."
"해피한 뉴스네요. 이제야 인연을 만나셨나 봐요. 인연을 위해서 기다려오신 거군요."
"기다린 게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아가씨가 묶어버렸거든요."
"묶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미국 갈 때 바람피우지 말라고 그걸……."
"뭐? 어허허허, 이 친구가……."
수연은 얼굴이 빨개져서 지환을 쏘아보며 잡힌 손을 확 뺐다. 웃고 있는 부부 앞에서 낯을 들 수가 없었다.
"다들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순정을 묶었단 뜻이었는데."
"이 친구가 몇 달 못 본 사이에 변했네, 변했어. 실없는 농담을 다하고, 어쨌든 보기 좋군. 그 어깨에 힘만 빼면 더 좋겠는데 말야."
"어렸을 때부터 이랬거든요. 어깨에 힘주는 게 버릇이에요."
수연은 부끄러움을 지우기 위해서 장난치듯 지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자자, 어깨에 힘 빼세요."
"그 친구 어깨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석지환 어깨에 손 올려도 되는 거구나. 거 참, 새롭네."
"어, 왜요?"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환을 보며 물었다.
"손 올리는 거 싫어?"
"그게 아니라 감히 못 올리는 거죠. 교수들도 그 친구 눈매 보고 움찔하곤 했었어요.
별로 나무랄 일도 없었지만 뭘 조언하려고 해도 눈매가 워낙 예리하니까 근접하기 무섭거든요.
그쪽 사람들 동양인 눈에 이상한 동경 같은 게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 녀석 눈초리에 금발머리 여학생들 여럿 쓰러졌었죠."
"이이는, 그런 얘긴 뭐 하러 해요. 괜히 사랑싸움 일으키려고."
부인이 옆구리를 찌르자 남자는 뭐 괜찮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남자를 향해 생글 웃어보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은 지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전 별로 안 무서운데요. 제 눈엔 심통 난 고양이 같은데요, 뭘."
수연은 손가락으로 지환의 눈초리를 쓰윽 끌어내리며 장난꾸러기처럼 킬킬킬 웃었다.
"이러니까 엽기토끼 같네. 아이, 귀여워라."
앞에서 보고 있던 두 사람도 키득키득 웃었다. 졸지에 웃음거리가 되었는데도 지환은 그다지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수연의 장난기는 지환의 입맞춤으로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수연의 손을 거둬간 지환이 그 손가락에 키스를 한 것이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서 지환의 손에 꼭 잡히자 수연은 금세 조신한 여자가 돼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셨다. 지환은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과 인사를 하러 가고 수연은 혼자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걷다보면 지환과 비슷한 연배 혹은 중년의 신사들이 말을 걸어왔다.
사교성이 좋은 수연은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밝은 미소와 쾌활한 웃음소리로 남자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래서 파티가 무르익을 즈음 수연은 남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고 이따금씩 부딪치는 지환의 눈총이 곱지 않은 걸 느꼈다.
수연은 그 질투 어린 시선을 즐기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화염방사기가 따로 없군."
옆에서 수연과 같은 쪽을 보고 있던 어떤 중년의 신사가 놀라워했다. 남자의 표현대로였다.
수연은 기분 좋은 흥분이 전신을 감도는 걸 느꼈다. 지환을 자신의 뜻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쾌감이었다.
남자들에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지환과 시선이 마주치는 횟수가 잦았다. 깔깔깔 소리 높여 웃을 때마다 지환의 눈이 가늘어지며 번들거렸다.
수연은 지환의 눈을 의식하며 옆의 남자가 권하는 딸기를 맛보았다. 수연은 맛있게 먹으며 남자에게 미소를 보냈고
기어이 지환 쪽으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수연은
"잠시 실례할게요."
하며 남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조금 전부터 2층이 궁금했던 참이어서 나선형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보았다.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올라간 2층의 입구는 긴 복도로 시작되었다. 복도 끝에는 넓은 리셉션 라운지가 있었다.
몇몇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수연은 복도 옆으로 줄지어 있는 방의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드레싱룸이었다.
화이트 체리목으로 된 옷장과 서랍장이 벽의 3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 면에는 전신 콘솔이 있고 중앙엔 흰 가죽 소재의 덱체어가 놓여 있었다. 문이 없는 옷장에는 비닐이 씌워진 새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손님들을 위해 서비스되는 것인 것 같았다. 어슬렁어슬렁 방을 휘둘러보던 수연은 기온 차가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반짝거리는 검은 구두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였다. 수연은 미소를 띤 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넓은 어깨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선 재빨리 문을 닫았다. 휙 몸을 돌려보는 지환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갔다.
"왜 따라 온 건데? 나 혼내려고? 아니면 보고 싶어서?"
"둘 다."
수연은 웃으며 지환의 목에 팔을 둘렀다. 매달려서는 턱을 올리며 그윽하게 보며 교태를 부렸다.
"거짓말. 오빠 눈이, 원하는 건 다른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지환의 팔에 허리가 당겨지고 상체가 뒤로 젖혀져 부푼 가슴이 지환의 가슴과 맞닿았다. 수연은 다가오는 지환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부드러운 표정과는 달리 지환의 키스는 난폭했다. 입술이 거칠게 빨리고 무법자처럼 막무가내로 침입한 혀에 입 안이 희롱 당했다.
가슴을 애무하는 지환의 강인하고 거친 손길에서 남자의 질투와 육욕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앗……."
수연은 헐떡거리면서도 미친 듯이 지환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 순간 지환이 거칠게 수연을 돌려세웠다.
어느새 드레스의 지퍼가 반쯤 내려가 한쪽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수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환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내 눈이…… 뭐라고 한다고?"
"흐읏……."
수연은 푸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귓불이 물리는가 싶더니 축축한 혀가 쓰윽 핥아왔다. 귓바퀴를 따라 뜨거운 기운이
감돌아 온몸으로 전율이 일었다.
"말해 봐. 내 눈이…… 뭐라고 하는지……."
"……날 ……날 원한다고……, 아……."
목덜미가 깊게 빨렸다. 수연은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려 지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뒤에서 안겨서 꼼짝 못하는 상황은 불리했다.
지환에게 매달릴 수도 없고 키스를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양쪽 가슴이 지환의 손에 점령당해 있으니 완전히 노예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다운 손가락에 주물러지고 있는 자신의 가슴이 너무도 야하게 보였다.
부드러운 가슴이 강하게 쥐어졌을 때는 통증마저 느꼈지만 곧이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쾌감이 밀려와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읏…… 오, 오빠…… 오빠……."
수연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지환의 손길에 응했다. 지환의 키스를 받기 위해서 머리를 젖히고 가슴을 더욱 내밀었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지환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에서 지환의 손이 빠져 나갔다.
수연은 멀리서 느껴지는 것 같은 움직임에 눈을 들었다. 지퍼가 올라가고 흘러내렸던 어깨 끈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었다.
"집에 가자."
"지금?"
수연은 자신의 매무새를 점검할 새도 없이 지환의 팔에 붙들려 방을 나왔다.
문밖에 서 있던 종업원이 놀란 눈으로 보았지만 둘러댈 짬도 없었다.
그대로 끌려 사람들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상태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아직도 숨결이 거칠었다.
하지만 화장은 어떻게 망가져 있을지, 드레스는 어딘가 구겨져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정신없이 끌려나와 지환의 차에 탔다. 호텔을 빠져나올 쯤에야 수연은 옆자리에 앉은 지환을 보게 되었다.
"뭐야. 순 자기 멋대로야."
수연은 투덜거리며 핸드백을 열어 콤팩트를 꺼냈다. 얼굴을 점검했다.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아주 꼴불견은 아니었다.
다만 창피하게도 팬티가 젖어있는 것이 느껴져 자존심이 상했다. 지환이 너무 멀쩡한 얼굴로 앉아 운전을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흥분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덤덤한 표정일 수 있단 말인가.
수연은 심술궂은 눈으로 지환을 보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그렇게 도망쳐 나올 것까진 없잖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 말야. 오히려 오빠가 너무 급하게 나가니까
그걸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수연은 혼자 말하고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방해가 없었다면 자신은 거의 허물어져 내렸을 것이었다.
지환이 멈추지 않았다면 더 창피한 꼴을 들켰을지도 몰랐다. 그때 자신은 장소도 시간도 잊고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얼굴을 붉히던 수연은 문득 핸들을 잡은 지환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튀어 올라온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입매도 꼭 다물어진 것이 흡사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수연은 사실은 지환이 매우 흥분한 상태란 걸 깨달았다.
자신을 보고 2층으로 쫓아왔을 때 이미 지환은 이성을 잃은 눈이었다. 키스가 거칠었던 것도 난폭하게 안은 것도 질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삐 집으로 가는 건 지환이 욕정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인 게 아닐까.
뭐야, 그럼 저 얼굴은 가면인 거야? 맞아, 어렸을 때부터 저 참을성은 정말 지긋지긋했어. 우왓, 속도 좀 줄여!
흠, 이렇게 마음이 급하면서 얼굴은 돌 씹은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이지. 사실은 지금 날 안고 싶어 미치겠으면서…….
생각하던 수연은 눈앞에서 번쩍하는 걸 느꼈다. 과속 단속 카메라에 찍힌 거였다. 이러다간 집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단속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연은 얼굴을 붉히며 흘러나오는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온통 무지갯빛으로 보이고 살인자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환이 자신으로 인해 안달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의 행복감, 이게 사랑인 거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너무 행복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연은 평소 빈틈없이 운전하는 지환이 이렇게 나온다면 자신이 좀더 대담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섭게 스쳐가는
가로수를 보며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옆트임의 드레스 사이로 허벅지가 드러났다. 아직까지 지환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연은 아슬아슬한 부위까지 드러나도록 다리를 벌리고선 핸들을 잡고 있는 지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끌어당겨 자신의 드러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지환의 몸이 흠칫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반응으로 수연은 흥분이 고조되어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수연은 자신의 허벅지 안쪽 매끄러운 피부 위로 지환의 손을 미끄러뜨리고는 조금씩 더 끌어들였다. 기대와 흥분 때문에 수연은 거의
헐떡거리고 있었다. 차의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갔다. 더 깊숙한 곳으로 지환의 손을 잡아넣은 수연은 열에 들뜬 눈으로 지환을 보며
은근히 속삭였다.
"만져줘."
그때까지만 해도 수연이 이끄는 대로 가만있던 지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는 손길에 수연은 피가 들끓는 희열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안쪽 깊숙이 파고든 손이 젖어있는 팬티에
닿은 순간 수연은 허벅지를 오므렸다. 지환의 손가락을 머금은 채로 쾌감의 신음을 토했다.
"아…… 오빠……."
차가 급정거했다. 불빛 하나 없는 깊은 어둠과 짙은 수풀에 둘러싸인 도로변이었다. 욕망의 불길에 사로잡힌 수연은 지환이
운전석의 공간을 확보하자마자 지환의 넓적한 허벅지에 올라탔다. 허겁지겁 지환의 입술을 탐하며 물컹한 혀를 빨아들여 유혹했다.
지환의 혀가 더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더욱 입을 크게 벌렸다. 목젖까지 파고든 지환의 혀에 정신이 흐려졌다.
그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팬티가 찢겨져나갔다.
수연은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같이 헐떡이며 허겁지겁 지환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 사이 지환의 입술이 굶주린 듯이 수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미 욕망에 부푼 가슴이 거칠게 빨렸다. 꼿꼿하게 솟은 유두에 촉촉하고 뜨거운 혀가 닿았다.
터트릴 듯이 맹렬하게 빨아대는 기세에 수연은 미칠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수연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지환의 어깨에 매달린 채 어서 빨리 지환의 것이 자신 안으로 들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지환의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며 들어올리는 순간 수연은 올 것이 왔다는 걸 느꼈다. 너무 커져서 자신의 몸으로는 도저히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지환의 페니스를 붙잡고서 깊게 내려앉았다. 빈틈없이 꽉 채워져서도 팽창하고 있는 그것의 느낌에 수연은 쾌락의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깊이 젖혔다. 새까만 어둠 속에 새하얀 가슴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수연은 땀이 밴 손으로 지환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손톱자국이 나도록 매달리자 지환이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수연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움직여 봐…… 천천히……."
수연은 아랫배에 느껴지는 이물의 뜨거운 존재감을 느끼며 서서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수연은 지환의 것을 게걸스럽게 품고서
음란한 소리를 내며 쾌감을 향해 질주했다. 질척한 애액 위에서 춤을 추듯 리듬을 타며 원초적 본능에 따라 엉덩이를 움직였다.
아랫도리에서부터 울렁울렁 이는 느낌이 머리까지 치솟아 현기증이 일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오, 오빠…… 아아……."
"좀더…… 좀더 깊이……."
"아…… 못하겠어. ……갈 것 같아."
수연은 전신으로 퍼지는 거대한 쾌락에 몸을 내맡겼다. 한없이 뜨거워져 붕 떠오른 몸이 산산이 부서져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넌…… 너무 민감해."
어느새 지환의 몸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수연은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지환을 보았다.
거의 완벽한 모습인 지환의 상체를 보고 수연은 나른한 손을 뻗었다. 윗도리를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내고 와이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옆으로 헤드라이트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와이셔츠를 벗어던졌다.
수연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근육질의 가슴을 애무했다. 자신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작은 유두에 혀를 댔다.
지환이 하듯이 그곳을 핥으며 세게 빨자 끙,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 안에서 지환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느끼며 수연이 물었다.
"아파?"
"아니…… 느껴질 줄 몰랐어."
"그, 그럼…… 아……, 여, 여긴…… 헉……, 내가 처음인…… 거야?"
수연은 헐떡이며 질문을 마쳤지만 대답은 듣질 못했다. 더 깊숙이 파고드는 지환에게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것만 같았다.
그때 수연의 날씬하고 긴 다리가 지환의 어깨로 올라갔다. 수연의 몸은 거의 반으로 접힌 채 지환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환은 어제보다 더 깊숙이 들어왔고 더 거칠게 밀어붙여 왔다.
"아…… 흑, 오빠…… 오빠!"
"응?"
수연은 지환을 향해 욕망에 젖은 눈을 뜨고서 야릇하게 쉰 목소리로 유혹했다.
"더…… 더 세게……."
"지금도…… 지금도 무리야. ……넌 정말…… 날…… 미치게 해."
수연은 자신의 어디가 지환을 미치도록 좋게 하는지 묻고 싶었다. 알게 되면 그게 무엇이라도 지환에게 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화는커녕 숨쉬기도 곤란한 지경이었다.
격한 신음소리가 차 안을 후덥지근하게 만들었다. 수연은 아랫도리에 쾌감 어린 통증을 느끼며 절정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는 지환도 함께였다. 한데 어울려 있는 그들의 몸은 너트와 볼트처럼 한 치의 빈틈없이 딱 맞물려 있었다.
한 몸인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면서도 서로의 몸에 엄청난 자극과 환희를 선사하는 두 사람, 지환과 수연은 서로를 위해 태어난 반쪽의
사람인 것이다.
집 앞에는 공장에 들어가 있었던 자신의 '딱정벌레'가 도착해 있었다. 수연은 지환의 집에서 샤워를 하다가 다시 또 불이 붙어 뜨거운 정사를
나누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서 지환과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깊게 하고선 어둠에 잠긴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불이 켜지자 어머니가 나왔다. 수연은 시선을 피하며
"다녀왔습니다. 늦었는데 그만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국향이 아닌 다른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한약 달였어?"
"아버지 거다."
"그래도 요즘 누가 집에서 한약을 달여. 한의원에서 먹기 쉽게 포장해 주잖아."
"약은 정성이랬다."
그 말은 아마도 어머니의 어머니가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자연스런 기품이라든지 예의범절 같은 건 대부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가르침이라고 들었다.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를 보면 외할머니는 아마도 대단히 완고하고 고지식한 어른이셨을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로 음식이며 약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못한 것에 대해 만회를 하시려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쓰러지신 건 수연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전화를 받고 어머니마저 쓰러지셨을 때 수연은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었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어머니의 두려움도 그에 못지않았던 게 분명했다.
"몇 군데 들어온 자리가 있는데……."
"응?"
"네 혼처 말이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얘기하자. 그만 쉬어라."
수연은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는 어머니를 보고 다급하게 둘러댔다.
"아! 내, 내일은 안 돼. 나, 내일 출장 가. 1박 2일이니까 못 들어올 거야. 가, 갑자기 일이 생겼어."
"알았다."
수연은 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부모님과 맞닥뜨릴 일을 생각하며 너무 무서워서 달아나고만 싶었다.
그런 일을 자신이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지환이 없었다면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2층 계단을 오르는 동안 기운 빠진 어깨를 추슬렀다. 그래도 내일은 지환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밝아진 것이다.
금세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해진 수연은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는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오빠?"
"가는 중이야. 잘 들어갔니?"
"응. 엄마한테 내일 1박 2일로 출장 간다고 말했어."
"……뭐라고 하셔?"
"알았다."
"여전하시구나."
"오빠."
"응?"
"나 잠들 때까지 얘기해 줘."
"그래."
"오빠."
"응?"
"오빠."
"응?"
"오빠, 오빠, 오빠……."
"응."
그날 밤 수연은 잠들 때까지 그렇게 지환을 불러댔고 지환은 고른 숨소리만 들릴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아침 회의 중에 수연은 몇 번인가 볼펜을 떨어뜨렸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는 계속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똑딱이는 소리를 냈다.
지환이 눈길을 주어도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수연은 자신이 칭얼거리며 보채는 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환을 보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만지고 싶어서, 안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연은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환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났다. 지환이 바라보는 모든 것에 질투가 일었다. 비서인 최양희가 무슨 말을 하자 지환이 미소를 지었다.
입술 끝만 살짝 올리는 미소라도 자신에게가 아니면 절대 싫었다.
"석 이사랑 잘 되어 가나 보지?"
윤 대리가 서류철을 넘기며 은근슬쩍 물어왔다. 수연은 찡그린 채로 서류철을 받으며 되물었다.
"왜요?"
"석 이사, 요즘 표정이 좋잖아. 저 봐, 오늘은 웃기까지 하네. 오수연 덕분에 근무 환경 좋아지겠군."
윤 대리는 웃음 섞인 목소리를 던지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수연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하더라도 지환이 누구에게나 친절한 남자가 되는 건 싫었다. 좋아 보이는 것도 싫었다.
심술궂은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용납되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엄청 북적거리는 구내식당에서 지환과 점심을 먹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부서 사람들과 섞여서 말이다.
그 뒤 복도에서 부딪쳤는데 지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환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 모퉁이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우연인 것처럼 걸으며 일부러 손등이 스치도록 부딪쳤다. 그런데도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차 안에서 그렇게 굶주린 듯이 자신을 탐했던 지환과 사무실에 앉은 지환은 너무도 달랐다.
사무실이니까, 일을 해야 하니까 다른 게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감정은 옳고 그른 것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신을 보고서도 지환이 태연한 게 정말 싫었다. 자신만 몸이 달은 것 같은 생각에 수연은 점점 화가 났다.
한편으론 지환처럼 철저하게 이성적이지 못한 자신이 정말 실망스러웠다.
하루 종일 화난 얼굴로 있던 수연은 바쁘게 퇴근을 서둘렀다. 너무 화가 나서 지환은 다시 보기도 싫었다. 지환과 같이 있겠다고
가짜 출장 가방을 싸들고 나온 자신이 한심하고 비참하고 억울했다.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을 무시한 지환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생각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사내 전화였다.
수연은 한참동안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휘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몇 번이나 휘문의 시선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었다. 지환에게 신경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 안 받아?"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귀찮은 전화야."
"하긴 그렇지. 내가 대신 받아줄까?"
"아니 됐어. 지치면 끊겠지."
수연은 힐끗 시선을 들어 지환의 방을 보았다. 블라인드가 쳐져 있지만 어쩌면 그 사이로 지환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문 씬 퇴근 안 해?"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일찍 들어가 봐야 돼. 할아버지 제사거든."
"하루 씨도 오늘 누구 제사라던데?"
"그쪽은 할머니 제사."
"우연이네."
잠깐 뜸을 들이던 수연은 양복 윗도리를 입는 휘문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랑 다시는 상대 안 할 줄 알았어. 이제 화 풀린 거야?"
"모르겠어. 화가 나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고. 원수가 있어도 몇 십 년씩 칼은 못 갈아. 원래 내 성격이 그래."
"그건 나랑 다르네. 난 원수는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면서 복수해야 직성이 풀릴 거야. 아직 그런 원수는 없지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인사하는 휘문을 따라 수연도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하루 씨완 잘 돼가?"
수연의 질문에 올라오는 숫자를 보고 있던 휘문이 놀란 눈으로 수연을 보았다.
"비난하는 거 아냐. 내가 그럴 자격은 없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 하루가 말했어?"
"아니, 어쩌다가 알게 됐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차라도 마시러 갈래? 요 앞에 새로 생긴 커피숍……."
수연은 말을 멈추고 움찔하는 휘문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 위쪽으로 향해 있는 걸 느꼈다. 보지 않아도 거기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수연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보지 않고서 막 열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엘리베이터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흠칫 떨고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때 지환에게 팔을 붙들렸다. 수연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지환을 노려보았다.
"놔."
지환은 노려보는 수연을 두고선 휘문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박 주임 먼저 가지."
"이거 놔!"
휘문이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동시에 수연의 손이 지환의 뺨을 향해 날아올랐다. 짝! 소리와 함께 지환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정말로 때릴 생각은 없었던 수연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놀라서 움찔했다.
"성질머리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