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싫은 점에도
가슴이 쿵쿵 뛰는 이유
일요일 오전, 걷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수연은 아버지와 함께 골프를 치러 필드로 나갔다.
18홀은 아버지에게 무리일 것 같아 9홀로 단축해서 게임을 했다. 그런데도 아버진 마지막에는 거의 땀을 많이 흘리며 힘들어했다.
수연은 아버지의 땀을 닦아주고 음료수를 드시게 했다.
"쯔쯔, 아주 약골이 다 되셨어. 담배 끊으시고 일도 좀 줄이세요, 제발."
"무슨 소리냐. 아직 팔팔해. 나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줄 알아.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아주 엉망진창이 될 게다."
"그럼 나 결혼할까? 아빠 일 도와줄 남자랑."
"어, 있냐? 있으면 당장 데려와, 임마."
"아빠가 급하다면 지금부터 구해 봐야지 뭐."
수연은 생각하고 있는 걸 얘기해도 좋을까 망설이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한결 기운 차리는 걸 보고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아빠."
"응?"
"오빠 돌아온 거 아세요?"
아버지의 눈이 번쩍하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지환이 놈 말이냐! 그놈이 왔어!"
수연은 또 혈압이 오르실까 놀라서 얼른 일어나 뒷목을 막 주물러드렸다.
"이놈이 왔으면 키워준 제 어미애비한테 와서 무릎부터 꿇을 것이지! 언제 왔어!"
"아빠, 놀라면 안 좋으시다니까요. 제발 릴랙스하세요. 자, 릴랙스."
수연은 걱정하며 아버지의 뒷목을 열심히 주물렀다. 역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히 무시가 되는 어머니가 참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나쁜 자식같으니라구! 키워준 공도 모르고 가족 다 내팽개치고 간 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내 이놈 코빼기만 보여 봐라, 아주 요절을 낼 테다! 에잇, 후레놈의 자식! 너는 어떻게 알았어? 전화라도 왔더냐?"
"그냥……."
지환과 같이 근무한다고 하면 분명히 아버진 길길이 화를 내시면서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실 거였다.
매사에 냉정하고 무심한 어머니는 그저 한마디 하신 걸로 그쳤지만 아버진 말보다 행동이 앞서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아마 강제로 사표를 내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스스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회사를 그만둔다면 지환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사태는 더 악화될 게 뻔했다.
"건너 건너 우연히 알게 됐어."
"행여 연락와도 절대 상종 마라. 그 자식은 내 아들놈도 아니다. 근데 너희 엄마도 그놈 온 거 아냐?"
"네. 말했는데 엄만 깨끗이 무시야."
"그럼, 무시하고 말고지!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요놈!"
"아빠, 오빠 써볼 생각 없어? 회사에서도 알아주게 능력 있대. 아빠도 알잖아. 어렸을 때부터 오빠 무지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았던 거. 아빠만 오케이하면 내가 오빠 연락처 한번 알아볼게. 얘기하면 오빤 거절 안 할 거야."
"미쳤냐! 그놈은 절대 안 돼!"
수연은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놓고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애원했다.
"그러지 말고 아빠, 잘 좀 생각해 봐. 아빠 요즘 부쩍 힘들어하시는 거 죄송해서 못 보겠어요. 남남보다는 오빠가 낫잖아.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은 무슨 아들이야! 그놈은 절대 안 돼!"
"그냥 전문 경영인 한 사람 쓴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아주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들겠지! 그리고 네 엄마가 끔찍이 싫어하는 거 모르니? 그놈한테 회사 맡겼다간 네 엄마
혀 깨물고 죽으려고 할 거다."
"도대체 엄마는 오빠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오빠한테 따뜻한 눈길 한 번 주는 걸 못 봤어.
그런 오빠가 너무 불쌍해서 오빠한테 더 잘해 주고 싶었어."
붉으락푸르락 화난 얼굴을 하시던 아버지가 새삼스런 눈길로 수연을 보았다.
"그랬어? 그래서 네가 고놈을 그렇게 잘 따랐구나. 네 엄마는 네가 그러는 걸 또 끔찍이 싫어했는데……. 사필귀정이다."
"말해 줘, 아빠. 오빠가 엄마한테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거야?"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야. 지환이 놈은 네 엄마한테 미움 받으려고 우리 집에 온 게다.
어떤 놈은 사랑 받으려고 태어나고 어떤 놈은 미움 받으려고 태어나지."
"말도 안 돼!"
수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화가 났다. 자신이 사랑 받고 자라는 동안 지환은 내내 미움 받으며 컸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자기가 보지 않는 사이에 조금은 귀여워도 해주고, 또 조금은 보살펴주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처음부터 엄마의 미움만 받았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누가 미움 받으려고 태어나. 모두 사랑 받으려고 태어나는 거야. 그럴 거 왜 데려다 키웠어!"
"행여 네 엄마한테는 그런 소리 마라. 이 아빠는 아버지보다 남자라서 딸보다 마누라 편이다."
억울하다! 소리치고 싶었다. 지환이 너무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녹슨 로봇처럼 삐거덕삐거덕 걷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서는 도저히 소리칠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수연의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월요일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정확히 3시 30분에 침대에서 나온 지환은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뛰고 들어와
문 앞에 쌓인 각종 경제신문들과 우유를 챙겼다. 전날 사들고 온 샌드위치와 함께 우유를 마시며 5개사의 신문을 읽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텔레비전을 켜 뉴스를 들으며 옷을 입었다.
진한 커피를 마시며 남은 신문을 모두 읽은 뒤 읽다 만 경제잡지를 들고서 집을 나왔다. 정확히 5시였다.
지환이 집에서부터 들고 나온 잡지 속에는 어제 오후 받은 우편물이 끼어있었다. 지환은 조수석에 던져놓은 그 우편물을 꽤 의식하고 있었다.
그 봉투 속에 든 사진을 휘문에게 보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고 휘문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 것인가 때문은 아니었다. 철딱서니 없는 애송이 하나 떼어내는데 이런 방법까지 동원해야 하는가.
이것은 확실히 자존심 문제였다.
휘문이 보기 좋게 걸려든 것에 대해 조소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그로 인해 수연이 동정심이라도 갖게 되는
역효과를 일으킨다면 재미없게 된다. 박휘문의 입을 과연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믿을 수가 없다.
사내답게 물러서지 못하고 치졸하게 수연에게 매달릴 확률이 높다. 석지환이 자신을 협박했노라고.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입사 이후 항상 제일 먼저 출근했던 지환은 인사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침 방송을 하게 된 김 과장이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게 보였다.
"일찍 나왔군요. 방송국으로 바로 가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네, 그래야 되는데 방송 원고를 놔두고 가서……."
"아, 그럼 수고하세요."
지환은 끄덕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출근길에 사온 보리빵을 책상 위에 놓았다.
컴퓨터가 부팅을 하는 동안 포트의 전원을 켜고 커피를 만들었다.
7시쯤 비서가 출근하면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직원들의 모습이 비쳤다.
지환은 이미 업종별, 종목별 리포트 몇 개를 쓰고 30분 뒤 있을 미팅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타 증권사의 시황 분석 자료를 읽으며 블라인드 사이로 출근하는 면면을 훑었다.
15분 후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오늘 수연은 소매 끝에 작은 프릴이 달린 소라색 시폰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가 잘렸다. 머리카락이…….
"아!"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격한 소리를 내뱉었다.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팽개치듯 놓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놀란 직원들이 수연의 주위로 몰려드는 게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수연의 머리를 두고 소란스러운 게 느껴졌다.
추억이 밀려왔다. 귀 끝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의 수연은 12년 전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수연은 눈이 부시게 맑았고 풋풋하고 순수했다.
손을 대면 통통 튀어오를 만큼 싱그러웠고 까르르르 웃고 소리 내어 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고, 눈에 넣고 내어주지 않고 싶을 만큼 소중했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무슨 의미일까. 내게 돌아온다는 의미일까. 그런 거냐, 오수연.
"이사님, 회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아……."
지환은 넋을 잃고 수연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에서 떨어져 수첩과 파일을 챙겼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예상대로 시끄러운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가 아니라 유혹이라니까. 나 좀 봐달라는 거지.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온적 대시라고……."
"아휴, 장 대리님은 제 2의 김 과장님이라니까. 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좀 해요."
"쉿! 회의 시간이야."
"아, 벌써?"
지환을 본 직원들은 후닥닥 자료들을 챙기며 회의실로 뛰었다. 회의실에 제일 늦게 입장하는 건 지환이어야 했다.
"박 주임은 아직 출근 전입니까?"
"아, 네."
휘문의 소속 팀장이 난처한 얼굴을 하며 무언가 변명을 덧붙이려는데 휘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휘문은 '지금 출근입니다.'는 표시로 서류 가방을 그대로 든 채였다. 지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회의를 시작했다.
"그럼 어제 시황 분석부터 해볼까요? 윤 대리?"
윤 대리가 준비한 자료를 읽는 동안 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수연의 표정을 살폈다. 수연의 시선은 휘문에게 가 있었다.
한 손으로는 땀을 훔치며 다른 손으로는 불안스레 서류 가방을 여는 걸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지환은 질투심에 악마가 되어갔다.
"자, 다음은 박 주임."
"네? 아, 네."
허둥지둥 서두르던 휘문은 서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켜보던 수연이 도와주려고 일어서다가 한 발 앞선 하루를 보고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지환은 연민 가득한 수연의 표정을 보고서 거칠게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지환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뭐야? 왜 저래?"
"냅둬.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지 뭐."
"박 주임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던데? 야, 박휘문. 넌 월요일부터 왜 또 지각을 해가지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어? 너 정신 안 차릴래?"
"도고에서 어제 올라왔잖아요. 주말 교육이 너무 빡빡해서 그래요. 교육 다음날은 쉬게 해줘야 된다구요."
"뭐야, 하루 씨가 박휘문 대변인이야? 교육은 하루 너도 갔다 왔잖아."
"어, 그러고 보니 둘이 수상한데……."
말하던 누군가의 옆구리를 윤 대리가 찔렀다. 수연은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회의실을 뛰쳐나왔다.
머리를 자른 건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 휘문에게 사과를 하고 지환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준비의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휘문을 보니 입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휘문은 벌써 저렇게 힘들어하며 우왕좌왕하는데 거기에 더 상처를 얹어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인 것 같았다.
역시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휘문을 찡그리며 대할 순 없을 것 같다.
휘문을 보면 우선 미소부터 짓게 되고 농담을 하고 싶고 장난을 걸고 싶은데 어떻게 서먹서먹하게 못 본 척 지낼까.
휘문을 좋아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가 전부인 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즐겁긴 하지만 설레지는 않는다.
키스는 기분 좋았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같이 마시자."
수연은 커피 두 잔을 타 윤 대리와 휴게실에서 마셨다. 타부서 직원 몇 명이 나와 소파를 점령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창가에 붙어 서서 마셨다.
"나 이혼해."
"네?!"
"수연 씨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우리 부모님도 아직 몰라."
"왜, 왜요? 들켰어요?"
"내가 이실직고했어. 못 헤어질 것 같아서."
"누구랑요? 그, 다른 여자랑요?"
"그래. 근데 참 이상하지. 이런 얘기를 요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한테 뭐 하러 시시콜콜하고 있는 걸까.
더 이상한 건 네가 왠지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천방지축에 철은 좀 없어도 내 기분 이해해 줄 것 같단 말이지."
"그거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내가 왜 천방지축이에요? 치!"
"칭찬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불륜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손가락질해도 수연 씬 안 그럴 것 같았어. 사랑이 뭔지 아는 눈이어서 말야."
"제, 제가요? 제 눈이 사랑을 안다구요?"
그렇다면 눈에게 묻고 싶다. 사랑이 뭐냐고.
수연은 황당한 표정으로 윤 대리를 보았다. 자신의 눈 어디가 그런 것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석지환 이사 사랑하지?"
"네, 네?"
"처음부터 박휘문은 아닌 거 같았어. 수연 씨 입사하던 첫날부터 난 좀 느꼈는데 말야, 눈이 무지 슬퍼 보였어.
누군가한테 엄청 데인 것 같더란 말이지. 그건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들만이 아는 거거든. 근데 요즘 살살 빛이 나기 시작해.
저 밑에 감춰두고 있던 뭔가가 끓어오르는 게 보인다구. 내 말이 맞지?"
수연은 대답을 피하고 자신의 컵과 윤 대리의 컵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잔 누구예요? 윤 대리님 가정 파탄시킨."
"첫사랑."
"어머, 세상에! 그럼 계속 만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여자 고아거든. 우리 모친이 죽어도 안 된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나니까 내가 죽겠더라구."
"그럼 부인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지."
"불행한 결혼보다는 행복한 이혼이 낫지 않을까?"
"자기 합리화하지 마세요. 아무튼 윤 대리님 천당은 못 갈 거예요."
"불행한 천당보다는 행복한 지옥이 낫지."
"천당이 왜 불행해요? 말도 안 돼. 순 궤변."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지면 그게 불행인 거야. 너도 잘 알 텐데."
수연이 입을 다물자 윤 대리가 피식 웃었다.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박 주임이 걱정이야. 수연 씨 신경 쓰라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번에 주식 투자해서 꽤 날렸나 봐.
자기 돈도 아니고 아버지 돈인 거 같은데, 집에는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것 같더라구."
"돈은 윤 대리님이 잃었다고 들었는데요?"
"나도 좀 잃긴 했지. 우리 할아버지 돈인데 그 정도 잃어서는 끄떡 안 하실 양반이니까 다행이지 뭐. 우리 할아버지 나보다 통이 더 크시거든."
"휘문 씬 얼마나 잃었는데요?"
"박 주임 쪽에서 보면 거금이지. 아버지 돈인데다가 형들 누나들 몰래 끌어 썼다니까 알게 되면 문제가 좀 있을 거야.
차 차장 말로는 정보는 정확했다는데 말야. 석지환 이사가 물어다 줬다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차 차장은 벌었다고 싱글벙글이던데 그 자식은 어쩌다 그랬는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석지환 이사가 물어 줬다니……."
"차 차장이 그러던데? 무슨 큰 봉이라도 잡은 것처럼 석지환 이사가 정보를 줬다고. 재원 경영진에 석지환 이사랑 동문이 있는 거 같더라구.
거기서 정보 빼줬겠지 뭐."
그럼 차 차장 라인에 붙었다는 바람꾼이란 건 뭐였을까. 정보 믿지 말라고 한 건…….
수연은 흠칫 놀라 사무실 쪽을 보았다. 설마 지환이 그런 일까지 벌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새록새록 솟았다.
휘문을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 정도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수연은 몇 번이나 의심의 탑을 쌓았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좀더 신중하고 의젓해져 보자고 생각했지만 한 번 골몰하기 시작하자 도저히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환에게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야 해결이 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지환의 방을 노려보던 수연은 장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수연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지환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지환은 눈을 들고 보지 않았는데도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았다. 수연은 호흡이 편하지 않은 걸 느끼며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문만 열면 직원들이 많이 있는데도 밀폐된 공간에 지환과 단둘이 있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떨렸다.
이 시각의 지환은 출근할 때의 깔끔한 모습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지고 넥타이가 좀 느슨해져 있어도 더할 나위 없이 긴장되어 보이고 힘이 넘쳐 보였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맹렬히 일에 몰입해 있는 모습, 일의 결계에 묶여 있는 그 모습은 훔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나한테 오기로 했다는 얘기면 좋겠군."
지환은 여전히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연은 진지한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지환의 마음을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을 쫓고 있는 지환의 눈을 보면 자신을 의식하고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머릿속에는 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건성으로 대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일보다 뒷전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커피 좀 그만 마셔. 위벽 다 헐겠어."
커피 잔으로 손을 뻗던 지환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본심이 뭔지 꿰뚫어 보려는 듯이 쳐다보는 지환의 시선에 아차! 했다.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수연은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확인할 게 있어서 왔어."
"결혼하자."
"휘문 씨 주식……,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가을에 하자. 최고로 하려면 준비할 게 많을 테니까, 가을쯤이 좋겠다."
수연은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눈만 껌벅거렸다. 그때 프린터에서 차트가 인쇄된 종이들이 위윙 하는 기계음과 함께 쑥쑥 빠져나왔다.
차트를 인쇄하면서 시선은 다시 모니터에 둔 채 프러포즈를 하는 건 뭐란 말인가. 상대를 무시하고 있거나 아주 야무진 농담이라는 뜻일 거다.
수연은 분통이 터지려는 걸 꾹 참으며 재빨리 용건을 얘기했다.
"오빠가 영업부 차 차장님한테 정보 줬다는 거 맞아? 휘문 씨 매매에 끼어든 바람꾼이 오빠였어?"
"정보는 정확했어."
"저, 정말 오빠가 맞단 말야? 왜? 왜 그랬어?"
막상 확인을 하니 머리가 띵했다. 지환이 이렇게까지 나쁠 줄은 몰랐다.
아무리 휘문이 보기 싫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괴롭힐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내 경고 얘기 안 했어? 내가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하,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매도 시점이라고 분명히 얘기해 줬는데 그 자식이 욕심을 부린 거야.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은 화를 부르게 돼 있지.
알겠어? 몇 푼 욕심에 냉정을 잃는 그런 한심한 놈이야."
"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야비해질 수가 있어? 감자라고 확실히 말했으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반드시 떨어진다고 말해 줬어야지!"
"내가 왜?"
지환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수연은 그 눈의 차가움에 숨을 들이켰다. 냉랭할 뿐만 아니라 잔인함까지 느껴져 등골이 오싹했다.
"애초에 그 주식을 권한 것도 오빠였을 테니까."
"몇 푼 벌었다고 방방 뜨더군."
수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휘문이 방방 뜬 건 자신에게 커플링을 사줄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이 계획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진행되어져 온 것이란 말인가. 섬뜩한 기운이 수연의 뒷머리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오빠, 미쳤어?"
지환이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왔다. 수연은 건장한 몸집에 압도되어 꼼짝도 못하고 올려다보았다. 지환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굵은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그 일로 나한테 따지러 온 거냐?"
"나,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 그건, 그건 오빠 변명일 뿐이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군. 그까짓 놈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추궁당하고. 차라리 죽여주라."
수연은 갑작스럽게 손이 끌어당겨져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환은 느긋한 태도로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더니 잡은 수연의 손을 자신의 목으로 끌어갔다.
수연이 잡아 빼려고 버둥거렸지만 지환은 더 완고하게 수연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목을 죄게 했다.
수연은 울상을 지으며 손을 빼려고 안달했다. 하지만 지환의 강한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손바닥에 지환의 목이 닿았다.
"네 손에 죽으면 적어도 네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는 않겠지? 살아있는 동안 날 기억하고 마음 아파하겠지?"
지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은 조금도 힘을 주거나 조르고 있지 않은데 지환의 목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지환의 손이 죄고 있는 거였다.
수연은 점점 붉어지는 지환의 얼굴을 보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냈다.
"뭐, 뭐하는 거야! 하, 하지 마!"
"왜? ……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아냐. 아냐! 그만해! ……아프잖아. 오빠, 아프잖아!"
순간 지환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수연은 자신의 손을 거두어 아픈 부위를 만지며 지환의 목을 보았다.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야속한 눈으로 쏘아보는데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오빠 왜 그래? 나 괴롭히는 게 좋아? 도대체 왜 그래!"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져 입술로 스며들었다.
"미안하다. 네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거……."
순간 수연은 흠칫 놀랐다. 지환이 무언가를 알고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일을 알고 있는 건 상희뿐인데…….
"그 집에 너 혼자 있게 한 거 미안해."
"누, 누가 지금 그런 얘기 듣고 싶대? 자기 몸을 뭘로 아는 거냐구. 그렇게 마구 다루지 말란 말야. 왜 죄 없는 몸을 괴롭혀. 정말 속상하게……."
"용서해 줘. 그래줘야 해. 너 다시 찾지 못하면 내가 숨 쉬는 이유가 사라지는 거니까……."
"끔찍한 얘기 좀 그만해! 날 아주 피 말려 죽일 작정이야? 차라리 내가 죽을까? 그러길 바래!"
"내 피 말리고 있는 건 너잖아. 왜 끝내자고만 해. 너 놓아버리고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유치한 협박하지 마. 그땐 어렸지만 이제 서른이 넘었잖아. 실연했다고 죽진 않을 거야."
"실연? 그런 걸로 돼? 우리가 겨우 실연?"
"그래, 겨우 실연이야. 오빠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어. 그런데 끄떡도 않더라."
수연은 젖은 속눈썹 사이로 지환의 목을 살폈다. 흥분이 가라앉자 걱정이 밀려왔다.
"턱 좀 들어봐. ……더, ……오른쪽으로 돌려봐."
이리저리 살핀 수연은 손가락 끝으로 붉은 자국이 남은 목 부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때? 아파?"
"아프다고 하면 속상한 건가?"
되묻는 어투에 담긴 그윽함에 찡그리고 있던 눈을 들었다. 그 순간 지환의 진지한 눈빛과 맞닥뜨린 수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눈보다 강하고 고독해 보이는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쭈뼛 설만큼 화가 나는데도 이 눈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무리 싫은 일을 해도 저 깊은 눈이 지긋이 보아주면 이 가슴은 바보같이 설레고, 숨 막히는 체취에 머리가 어질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홀리는 건 정말 싫다고 생각하는데도 이토록 가슴이 쿵쿵 뛰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잠시 홀려 있던 수연은 얼른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 속상하긴, 고소하지. 인과응보야. 안 괜찮으면 참아. 아무리 아파도 내색 않고 참고 견디는 거, 그거 어렸을 때부터 오빠 장기잖아."
수연은 다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듯 방을 나와버렸다. 바위같이 앉은 지환이 느긋이 웃는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눈길을 의식하느라 등이 따끔따끔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삼스레 지환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날 저녁, 수연은 퇴근하는 휘문을 붙들어 카페로 들어갔다. 며칠 사이 두 사람 간에는 어색함이 짙어졌다.
수연은 눈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고 손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자연스러울지 몰라 쭈뼛쭈뼛했다.
"돌려줄 반지도 없을 텐데 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휘문의 말에 수연은 움찔하고 굳어버렸다.
얼마나 좋아했는가에 관계없이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그 나름대로 고통이었다.
지환에게 받은 배신과 아픔, 외로움을 되새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연은 지난 12년간 이러한 자학을 자처해서 반복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유는 단 하나, 배신하고 떠난 지환을 증오하는 것만큼 그리워하는 자신이 싫기 때문이다.
미칠 듯 괴로워하면서도 그 지독한 애증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싫은 것이다.
"목은 괜찮아?"
"왜, 내가 석 이사를 살인미수로 신고라도 할까봐?"
비뚤어진 휘문의 마음은 어떻게 해도 달래질 것 같지가 않았다.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백 속에서 통장을 꺼내 휘문에게 내밀었다.
"휘문 씨 급여 통장이야."
통장을 보는 휘문의 눈이 흔들렸다. 통장을 잡는 손가락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걸 가지고 둘이 얼마나 알콩달콩 재미있어 했던가.
휘문은 미래까지 꿈꾸고 수연에게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기뻐서 잠을 설칠 정도였었다. 수연이 미운 건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밉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지워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석지환이 '오수연은 내 여자다.'고 했을 때 수연은 분명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의 충격은 수연에 대한 믿음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휘문은 자신이 수연의 빈껍데기만을 붙들고 있었다는 걸 아프게 인정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휘문은 통장 안의 숫자를 보고서 수연을 노려보았다.
"주식 얘기 들었어. 대출금이라도 갚을 수 있으면……."
"위자료냐!"
"휘문 씨……."
"하! 정말 기가 막히네. 돈 많은 여자랑 사귀면 이런 게 있다더니, 하! 정말 참 좋은 세상이다. 좋은 세상이야!"
"부탁이야, 받아줘.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
"오수연, 너 정말 끝까지 이렇게 날 망신시킬래! 너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네 맘만 편하면 그만이야?
너 두 다리 뻗고 자려고 내 자존심에 대못질을 해! 하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에 하나는……."
"살인마라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뭐야? 너 지금 내 앞에서 그 자식 편드는 거야!"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란 얘기야."
"너희 둘 뭐야! 처음부터 수상했어. 그런데도 넌 끝까지 아니라더니, 이렇게 사람 뒤통수 치고, 너희 둘 도대체 뭐야!
내가 아니고 그 자식인 이유가 뭐냐구!"
"우린…… 같이 살았었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뭐, 뭐?"
"한 집에서 남매처럼 15년을 살았었어. 휘문 씨가 아니고 왜 그 사람이냐. 그건…… 말로 할 수가 없어.
말로 할 수도 없고 말해도 이해 못할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완전히 돌았구나!"
"진실을 말하는 거야.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들어주면 안 돼? 지환 오빤, 오빠한텐 나 말고 아무도 없어. 그래서 그런 거야.
생각해 봐. 정말 아끼고 잘 보살폈던 동생이 어떤 남자에게 뺨을 맞은 거야. 그래서 화가 난 거라구.
보통 땐 얼마나 과묵하고 점잖은 사람인지 휘문 씨도 잘 알잖아."
"닥쳐! 그래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고! 뺨 한 대 맞았다고 사람을 죽여! 둘 다 완전히 맛이 갔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 망할 위자료나 갖고 가!"
"왜 그렇게 받아들여? 난 그냥 친구로서……."
순간 휘문이 물잔을 들어 수연의 얼굴에 끼얹었다. 수연은 경악하여 눈도 뜨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친구? 친구!"
휘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연은 따가운 눈을 뜨고서 멍한 눈으로 휘문을 보았다.
휘문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느린 화면처럼 멀고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너, 너 정말! 사람을 갖고 놀아도 정도껏 해! 석지환, 오수연, 너희 둘, 내가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겠어!"
파르르 화를 내고 문을 부서지도록 밀치고 나가는 휘문을 보았다.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환에 대한 얘기를 좀더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들어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이었다.
수연은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얼굴에는 계속 물기가 흘렀다.
아무리 그래도 지환 오빠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못 들어주겠어. 자긴 뭐 그렇게 잘했단 거야.
욕을 하려면 나한테나 하지,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