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5)

  브루스효과

오전에는 증권연수원에서 실시하는 기업분석 전문가 교육에 참가할 명단을 작성하고, 입맛이 없어 점심을 굶으려다 휘문이 

바람같이 달려가 사갖고 온 초밥을 회사 정원에서 먹고, 그리고 오후에는 다음주부터 케이블 TV 경제뉴스채널에 나가 

아침 시황 방송을 하게 된 김 과장-새벽에 일어나야 된 김 과장은 화류계 생활 청산이라며 짐짓 애통해했지만-을 축하했다.

두 시간 간격으로 병원에 전화해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한결 좋아지신 목소리에 안심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윤 대리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냈지만 윤 대리는 계속 피하기만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기어이 윤 대리를 붙잡은 수연은 얘기를 더 해달라고 졸랐다.

 "윤 대리님 얘기 좀 해보세요. 네?"

 "이젠 당신 차례잖아. 골치 아픈 게 뭔데?"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어떡하실 작정이세요? 계속 바람피우실 거예요?"

 "그 해답이 나왔으면 내가 고민을 하고 있겠냐. 아, 내가 어쩌다가 너한테 그런 얘길 했지? 수연 씬 무거운 걸 가볍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선 것 같았는데 갑자기 코믹물이 돼버렸잖아."

 "죽느냐 사느냐라뇨? 그럼 진지하단 거잖아요. 어머, 큰일이네."

 "어허, 남의 얘기라고 너무 가볍게 듣는군. 아무래도 내가 뭔가에 씌웠었어. 널 뭘 믿고 얘기했을까."

 "저 입 무거우니까 걱정 마세요."

 "하여간 눈 똥그랗게 뜨고 물어오면 대답 안 할 수가 없다니까."

 "두 분이서 뭘 그렇게 속닥이시는 거예요?"

하루가 끼어드는 바람에 얘기는 또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수연은 복잡한 자신의 일들은 잊고서 윤 대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스스로가 참 어처구니없어서 손으로 머리를 콩콩 때렸다.

 지금 남의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의도적으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해.

 하지만 여행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머릿속에서는 지환의 손목 상처만 계속해서 떠오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지환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퇴근 시간이 다 돼서야 들어오는 거였다. 

팀장의 말로는 지환은 아침에 모였던 그 애널리스트들과 자영미디어를 방문하러 갔다고 했다. 

그 집단 방문은 자영미디어가 자본 잠식에 빠진 자회사에 거액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는 발표에 대해 항의를 하기 위한 거였다.

얼마 전 지환을 비롯한 각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자영미디어의 수출 호조와 매출 상승을 전망하면서 주식 매수를 부추기는 보고서를 

내놓았었다. 그로 인해 자영미디어 주식은 급등을 했었는데 갑자기 부실 자회사에 대한 투자 결정을 하면서 애널리스트들의 

신용을 떨어뜨린 것이다. 이에 애널리스트들은 자영미디어에 투자 결정을 철회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로 했고 그걸 주도하는 것이 

지환이라는 얘기였다.

직원들이 일어서 인사를 하는 걸 보고 수연은 뒤늦게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그러다가 지환이 멈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는 것 같아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방문 앞까지 간 지환이 다시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수연은 눈이 마주쳐 움찔 놀랐지만 직원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느끼고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가만히 일어섰다.

 "어제 차에 두고 갔더군."

수연은 멍한 시선으로 책상에 놓여진 자신의 선글라스를 보았다. 

지환은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없는데도 수연은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굳은 얼굴로 뜨거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랐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지? 미쳤어. 하필이면 사람들 다 보는데 줄 게 뭐냐구! 일부러 이러는 거야. 분명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당황하게 하고 난처한 지경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화가 난 건 수연뿐만이 아니었다.

 "나 좀 봐."

수연은 거칠게 낚아채는 휘문의 손에 잡혀 끌려갔다. 손목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지만 수연은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그것도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쾅!

비상구의 문이 닫혔다. 어두웠던 계단에 불이 켜지고 손이 놓여났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휘문이 소리쳤다. 너무 화가 나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이토록 무섭게 일그러진 휘문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수연은 두렵고 당혹스러워 차라리 다 말해 버릴까 싶기도 했다. 

반지를 잃어버린 것도 이해를 해준 휘문이니까 사정을 다 얘기하고 용서를 빌면 납득해 줄 것 같기도 했다.

 "직원들 보는 앞에서 어떻게 날 이렇게 망신시킬 수가 있어!"

 "내, 내 말 좀 들어봐."

 "바른 대로 말해! 어제 같이 있었지! 여행, 석 이사랑 같지!"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말해!"

 "사, 사실이긴 한데, 그게……."

 짝!

수연은 뺨을 치는 충격에 밀려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귀가 멍멍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퍼뜩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휘문에게 맞았다는 걸 깨달은 건 뺨이 얼얼하고 화끈하게 아파오는 걸 느끼게 된 뒤였다. 

수연은 욱신욱신 통증이 이는 뺨을 손으로 감싸며 휘문을 보았다.

 "휘, 휘문 씨……."

휘문은 이성을 잃고 벽에 붙어 으르렁거렸다. 주먹으로 벽을 치며 먹이를 빼앗긴 짐승처럼 포효했다.

 "윽! 윽! 윽! 으악!"

 "그만해. 그런 게 아냐. 제발, 내 말 좀……."

 "닥쳐! 한마디도 하지 마! 질문은 내가 해!"

휘문의 기세에 수연은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허물어지듯 벽에 기대었다. 휘문이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진지하지 못하게 남자들과 사귀어왔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어떤 부분이라도 좋아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거침없이 사귐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헤어지게 되면 빈 자리가 아플 사이도 없이 곧 새 남자친구를 사귀곤 했다.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사귀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벽에 머리를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휘문이 성마른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시 한번 묻겠어. 석지환과 어떤 관계야?"

 "……복잡해. 하지만 휘문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넌 분명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다 끝난 관계라고 했어!"

휙 돌아선 휘문은 수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서는 마구 흔들어댔다. 수연의 긴 머리가 미친 듯이 출렁이며 헝클어졌다. 

수연은 현기증이 나서 휘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말해 봐. 여행 가서 뭐했어? 둘이 무슨 짓 했어!"

 "아파! 그만해!"

 "내 등 뒤에서 날 비웃었겠지. 반지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숫제 바다에 집어던졌겠지! 나쁜 년! 개자식!"

 "제발, 그만……."

 "말해 봐. 너 날 사랑하긴 했니?"

빨갛게 충혈 된 휘문의 눈이 흔들렸다. 수연은 애처로운 느낌에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랑이 뭔데?"

수연은 안타까운 눈으로 휘문을 올려다보고선 진심으로 알고 싶어서 휘문에게 매달려 물었다.

 "정말 그게 뭔데? 난 휘문 씨 좋아해. 휘문 씨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 편안하고 따뜻하고 즐겁고, 휘문 씨한테 잘해 주고 싶어.

 이걸로는 시작하면 안 되는 거야? 이렇게는 유지될 수 없는 거야?"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면 아니지."

휘문은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떨어져나갔다. 허탈함에 더 이상 화를 낼 기력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아, 정말 황당한 여자다.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자기 감정도 제대로 모르고 사냐. 이 한심한 여자야."

 "미안해."

 "석지환은 어때? 그 감정은 뭔지 알고 있냐?"

다소 진정한 휘문이니까 성실하게 대답해 주려고 했지만 떠오른 감정들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순 없었다. 

그건 휘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연과 지환 사이에 있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휘문에게 아무리 말해도 이해시킬 자신이 없는 거였다. 

천국과 지옥처럼 멀고 복잡한, 아무리 휘문을 좋아해도 결코 그 마음에까지 전달시킬 수 없는 것, 전할 수도 없고, 전해지지도 않고, 

표현할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고, 발신조차 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거라고, 휘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나 너 포기 못해."

 "휘문 씨,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들어봐."

수연은 다시 휘문에게 붙잡혔다. 분노 대신 격정이 어린 휘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하나뿐인 게 사랑이야.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거. 그 사람 이외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 말야, 이 여자야.

 내가 너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네 눈에 나밖에 보이지 않도록 만들겠어."

휘문은 새삼 투지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눈빛이 야릇하게 번득이더니 느닷없이 키스를 해왔다. 

수연은 이 극과 극의 상황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안겨 키스를 받고 더 깊게 접근해 오는 휘문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랬더니 휘문의 손길이 다급하게 블라우스 위를 더듬으며 

가슴을 만지려했다. 파고드는 휘문의 손길에 수연은 화들짝 놀라 밀어내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을 다해 거칠게 밀쳐내고 말았다. 

마치 치한을 퇴치하듯이.

 "윽!"

벽에 부딪친 휘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수연도 스스로의 행동이 충격이었다.

 "미, 미안해."

수연은 한심하고 황당하고 치 떨리게 싫은 이 느낌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당혹스럽고 민망한 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휘문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비상구 문을 열고 뛰쳐나온 수연은 그대로 딱 멈춰서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지환이 비상구 앞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연의 뒤로 비상구 문이 쾅하고 닫혔다.

 수연은 갑자기 마주친 지환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환이 미간을 모으며 다가왔다.

 "왜 거기서 나와?"

 "아, 아무것도……."

순간 지환의 짙은 눈썹이 날카롭게 꿈틀하더니 손이 수연의 뺨으로 올라왔다. 수연은 다급히 몸을 빼며 달아나려했다. 

하지만 잽싼 지환의 손에 팔을 붙들리고 말았다. 수연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보려했지만 지환의 날카로운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지환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눈에 잔혹한 빛이 일었다.

 "이 자식 어디 있어!"

하지만 수연의 대답은 필요가 없었다. 지환의 눈은 이미 확신하고 분노에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 수연이 휘문에게 추궁 받을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놓고선 뻔뻔스럽게 화를 내다니!

 수연은 새삼 화가 치밀어 지환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환은 비상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연은 눈앞에서 거칠게 닫힌 문을 다시 열고 다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사태는 이미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앉아 있던 휘문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지환은 수연이 말릴 사이도 없이 휘문의 멱살을 쥐고는 주먹을 날렸다. 

휘문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몸을 부딪쳤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맞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소리치며 달려드는 휘문의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머리를 내밀며 돌진해 오는 휘문을 지환의 무릎이 걷어 올렸다.

 "크윽!"

토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구는 휘문을 보고 수연은 비명을 질렀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하지만 지환은 조금도 분이 삭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더 살벌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휘문을 끌어올렸다. 

체격으로 보면 엇비슷한 두 사람이었지만 지환의 맹렬한 분노 앞에 휘문은 맥을 추지 못했다.

 "그만해! 그만해, 오빠!"

 "넌 저리 가 있어."

끼어드는 수연을 밀쳐내는 지환의 목소리는 차라리 유유하게 들렸다. 분노가 극에 달할수록 오히려 차분해지는 지환이었다.

 "네까짓 게 감히, 감히……."

한 손으로 휘문의 목을 잡은 지환은 그대로 벽에 밀어붙여서는 헐떡거리는 목을 조였다. 

잔인할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지환의 표정을 본 수연은 공포에 휩싸여 벌벌 떨었다. 지환은 완전히 돌아버린 것 같았다. 

그대로 놔뒀다간 정말 살인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수연은 막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오빠, 오빠, 그 손 놔!"

수연은 휘문의 목을 죄고 있는 지환의 손가락을 풀려고 매달렸다. 지환의 손가락을 잡고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애원했다.

 "제발, 오빠……."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 감히 수연이한테 손을 대!"

수연이 아무리 낑낑거리며 매달려도 지환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환의 경직된 몸에서 퍼져 나오는 분노의 기가 무섭게 느껴졌다. 

폭풍을 머금은 바다처럼 위험스런 지환의 표정이 수연을 극도의 공포로 몰고 갔다.

 "오빠! 그러다 사람 죽이겠어!"

지환은 하찮은 벌레라도 죽이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죽어."

손을 놓지 않고 분노가 얽은 냉혹한 표정으로 휘문의 목을 옥죄었다. 휘문의 표정이 붉다 못해 검게 변해 가는 걸 보고 수연은 울며 애원했다.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팍을 때리다가 지환의 허리를 안고서 매달려 흐느꼈다.

 "오빠, 제발, 제발……."

애원이 먹힌 것인지, 휘문을 죽일 수는 없다는 자각이 든 건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지환이 손을 풀어주었다. 

지환이 거칠게 손을 떼고는 뒤로 물러서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휘문은 기침을 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괜찮아, 휘문 씨? 휘문 씨?"

휘문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목덜미에는 지환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수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그런 수연을 보고 있자니 지환은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당황한 수연의 눈과 부어오른 뺨을 본 순간 분노 때문에 피가 혈관을 뚫고 머리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부모님도 매 한 번 들지 않은 수연에게 휘문이 손을 댔다는 걸 생각하면 휘문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또 살인적인 분노가 치밀어 오른 지환은 앉아 있는 수연의 팔을 잡고 끌어올렸다.

 "떨어져."

 "오빤 정말……. 왜 이렇게 변했어!"

눈물을 글썽이며 화를 내는 수연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책임 전가할 생각은 없다. 

수연을 사랑하는 것도, 수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니까. 왜라는 물음은 통하지 않는다. 

그건 왜 당신이 내 어머니냐고 묻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질문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불만이어도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수연이 내게 그런 존재다. 그리고 난 불만하지 않는다.

 "말해 두겠는데, 박휘문. 수연이한테서 떨어져. 오수연은 내 여자다."

진리라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지환의 자신감에 수연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분노와 배신감에 떠는 휘문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연은 그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어서 그 눈을 피하고 말았다. 자신의 눈이 제멋대로 지환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수연은 지환의 팔에 끌려 비상구를 나왔다. 복도에서 지환의 가슴에 안겼다. 누가 지나가다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아니, 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지환에게 모두 맡긴 채 그냥 이대로 지환의 가슴에 숨어 있고만 있었다.

 "그 자식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황당한 소리에 몸을 떼려 했지만 지환이 놓아주지 않았다. 수연은 한숨을 쉬며 편안한 지환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지환이 손을 올려 수연의 뺨을 안쓰럽게 어루만졌다. 

아직도 화기가 남아 있는 걸 느낀 지환은 거칠게 숨을 들이키더니 수연을 홱 밀쳤다. 

수연은 다시 비상구 쪽으로 움직이려는 지환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붙들었다.

 "이제 그만 좀 해. 손등이 빨갛잖아."

수연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지환의 손을 보고 있었다. 얼음찜질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일, 지환의 일, 거기에 휘문까지 보태어 낙천적이며 명랑 쾌활한 수연의 진을 완전히 다 빼놓은 것이다.

 "가방 가지고 나와. 데려다 줄게."

 하루는 처음부터 휘문에게 호감이 있었다. 많은 여직원들이 휘문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회를 노리고 있긴 했지만 최초의 시작이라면 하루였다. 

대학에 원서를 갖고 취업설명회를 하다가 거기에서 대학생인 휘문을 처음 보았고 훤칠한 키의 미남자인 휘문에게 끌리게 된 것이었다. 

호쾌한 웃음소리와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을 보면 절로 미소가 감돌고 그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하루가 휘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건 수연이 휘문과 사귀게 된 후였다.

하루는 마음이 아프고 아깝고 후회되었지만 곧 마음을 정리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미련을 두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수연을 좋아했고 휘문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깊도록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두 사람 사이에 확실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루는 두 사람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면서도 묘한 기대에 사로잡히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휘문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자신을 본다면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지게 할 자신이 있었다.

 "오수연, 확실히 석 이사한테 넘어간 거 같지?"

 "주임이랑 이산데 잽이 되겠어요? 나 같아도 벌써 넘어갔을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석 이사 카리스마는 알아줘야 돼. 이번 일 추진하는 것 봐. 자영미디어 대표이사가 완전 몸이 달았다잖아."

 "아, 진짜 멋지지 않아요? 소액주주를 보호하지 않는 기업 이기주의는 절대 못 봐준다, 이거잖아요.

 이사님이 어제 쓴 리포터는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오늘 팀의 화제는 자영미디어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환의 맹렬한 투지였다.

애널리스트들의 집단 방문 항의에도 불구하고 자영미디어는 자회사의 투자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지환의 응징이 시작되었다. 자영미디어에 대한 부정적인 리포트를 계속해서 써냈으며 오너십이 강한 기업들이 회사의 

경영 정보를 알리지 않는 폐쇄적인 행태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투자자들의 선택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환의 리포트는 그대로 시장에 반영되어 자영미디어 주식은 빠르게 하락하고 있었다.

 "방금 다음달 추천 종목 올라온 거 봤어?"

 "아니. 왜?"

 "자영미디어를 뺐어. 증권사마다 다 뺐어."

 "정말이야? 오, 돌격 앞으로!"

 "이야, 정말 흥미진진한걸. 이제 저쪽에서 항복하는 것만 남았지?"

 "글쎄,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할까. 거기 대표이사가 워낙 보수 성향이 짙어서 말야. 자기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투자를 하겠다는데

 누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냐 이거 아냐. 불합리한 투자니 계열사 지원이니 쫑알대지 말라 이거지."

 "야, 벌써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오늘도 하한가 가겠는걸."

 "몇 주 사둘까?"맞다, 사자. 항복은 시간문제 아니겠어. 하한가에 찔러보자구."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자영미디어 주식을 사지 못했다. 하한가에 가기도 전에 자영미디어에서 자회사 투자 계획을 철회한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주가는 무서운 기세로 반등했고 결국 지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루가 보기에도 석지환이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려 보이던 수연과 휘문 커플을 단숨에 떼어놓았으니 

말이다.

 "언니, 어디 아파요? 얼굴이 왜 그렇게 푸석푸석해?"

 "우울해서 그래. 난 우울하면 몸이 아프거든."

하루가 왜 우울하냐고 물으려던 찰나 수연의 앞 책상에 앉아 있던 휘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수연의 얼굴이 더 우울해졌다.

 "이번 주말에 교육 가는 거 있잖아요. 박 주임님과 나랑 한 존데, 언니 바꿔줄까요?"

 "아, 아니, 괜찮아. 주말에 약속 있어."

 "무슨 약속인데요? 웬만하면 취소하지."

허나 그건 하루의 진심이 아니었다. 수연과 휘문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떠보려는 것이었고 목적은 달성되었다. 

수연을 좋아하고 두 사람이 잘 어울려 보이긴 하지만 휘문은 볼수록 괜찮은 남자이고 두 사람이 잘 되지 않는 건 신이 주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휘문에게 마지막 여자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회식하던 날 술에 취한 휘문을 집까지 데려다주었을 때, 그가 옷에 토를 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처럼 횡설수설하며 치대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워 보였고 보살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휘문이 고맙다며 뺨에 뽀뽀를 했을 때 하루는 감전당하는 걸 느꼈다. 

다른 여자의 냄새가 밴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파고들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취하지 않았으면 휘문도 분명 그 떨림을 느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날 하루는 수연의 냄새를 없애고 자신의 냄새로 가득 차게 만들고 싶어서 몇 번이나 휘문을 의식적으로 꼭 안았었다. 부축한다는 핑계로.

 "김하루, 퇴근하기 전에 서고 정리 좀 해라. 파일이 완전 뒤죽박죽이더라."

 "아이 씨, 저 인간은 왜 만날 나만 시켜."

 "김하루, 들었어?"

 "네, 네 알았어요."

하루는 짜증스럽게 투덜대던 기색을 감추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곧 기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신상품 모니터한 거 정리도 해야 되는데…… 아, 머리 아파."

 "뭐가 1등이야?"

 "태평양이 1등이죠 뭐. 차트 정리해서 그래프 그려야 하는데……, 언니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아, 그래프라면 나도 머리 아프고, 차라리 서고 정리를 내가 할게."

 "정말요? 고마워요, 언니. 내가 나중에 밥 쏠게요."

하루는 금세 생기를 띠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바쁘게 손을 놀렸다. 사실 수연에게 말한 것처럼 일이 밀려있는 건 아니었다. 

일이 많은 척 부산을 떨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사에게 게으름 피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모션일 뿐이었다. 

하루는 귀찮은 일은 적당히 피하면서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는 말려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1시간 쯤 뒤 수연이 서고로 가는 걸 보고서 하루는 핸드백을 챙겼다. 사무실에는 거의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 윤 대리만 남아 있었다.

 "아, 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 들고 가서 해야겠어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내가 도와줄까?"

 "아, 아니에요. 내일 교육 받으러 가려면 짐도 싸야 되고…… 먼저 갈게요."

 "그래. 수연 씬 서고에 있지?"

 "네, 도와주시려면 수연 언니나 좀 도와주시든지요. 그럼 다음 주에 봬요."

하루가 바쁘게 나온 건 물론 집으로 가기 위한 건 아니었다. 휘문이 영업부에 있는 입사 동기와 통화를 하며 술 약속을 하는 걸 엿들었고, 

지금 하루가 가려는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단골로 가는 술집이어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을 거였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빗고 치마허리를 한 단 접어 올렸다. 회사에선 너무 짧은 건 안 되지만 술집에서라면 얼마든지 허용이었다. 

화장지에 붉은 립스틱을 살짝 찍어내고는 슬리브리스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상체를 조금 깊이 숙이면 가슴의 깊은 골이 들여다보이는 걸 확인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어머, 박 주임님 여기 계셨어요?"

 "아, 하루 씨. 여긴 웬일이야? 약속 있어?"

 "네. 그래서 왔는데 친구가 갑자기 못 나온다고 해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잘됐네요. 합석을 하시죠. 사내놈 둘이 멋없이 마시던 참이었거든요."

휘문의 입사 동기가 도움을 줬다. 하루는 마지못해 앉는 것처럼 합석을 하며 휘문의 눈치를 살폈다. 

휘문은 하루의 합석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곧 하루의 존재를 잊은 듯 두 사람만의 얘기를 시작했다. 

하루는 인내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무릎에 사서 어깨에서 팔아라. 그 말이 딱 정답이라니까."

 "주식이 정석대로 되는 거 봤냐. 프로그램 매도가 그렇게 들어올 줄 누가 알았어."

 "차 차장이 정보를 줬다면서? 팔라고 할 때 팔지."

 "누가 그렇게 한꺼번에 들어올 줄 알았냐. 빠져도 팔 타임은 줄 줄 알았지, 저렇게 곤두박질칠 줄 누가 알았냐구."

 "야야, 지금이라도 팔았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행? 대출금에 아버지 퇴직금까지 다 날렸어. 그런데 지금 나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구!"

휘문이 분통을 터트리는 바람에 하루는 깜짝 놀랐다. 대화 내용을 미루어보아 사태가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런데 요 며칠 휘문이 침통한 얼굴로 있은 게 수연 때문이 아니라 주식 투자한 돈을 날리게 된 이유 때문이라는 부분에서 

어쩐지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야, 진정 좀 해. 하루 씨 놀라잖아."

휘문은 힐끗 하루를 보더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분을 술로써 해소하려는 것 같았다. 

외모는 비록 듬직해 보이지만 하루가 보기엔 휘문은 막내의 기질이 매우 많았다. 아기같이 어리광부리려는 어른스럽지 

못한 것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추겨주면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낼 것 같은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기질도 있었다. 

하루는 이미 휘문에 대해 간파했고 자신이 그를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집에 얘기 못했군요?"

은근히 무시하는 하루의 말에 휘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 말이 맞죠? 물 먹은 거 아버님께 말씀 못 드렸죠?"

 "참견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버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재도전하는 게 어때요?"

 "쓸데없는 소리 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배짱이 없네요. 주식을 하려면 배짱이 좀 있어야 되는데."

 "그건 하루 씨가 모르는 말씀이에요. 돈이 있어야 배짱도 생기는 거라구요. 허 참, 누군 백억 대 재산을 굴린다는데 세상 참 불공평해.

 너네 부장 말야, 석지환 이사, 소문 듣자하니까 메릴린치에 자기 이름으로 된 펀드를 하나 굴리고 있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한 백억 된다더라구. 근데 그게 투자액이 아니고 모두 본인 자산이라는 거지. 기가 막히지?"

 "시끄러!"

 "듣기 싫기도 할 것이다. 나도 그 소리 듣는데 욕이 팍 튀어나오더라구."

 "그만하라니까!"

휘문은 무섭게 화를 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후 휘문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걸 보고 하루는 안주 접시 위에 있는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집었다.

 "우리 내기해요."

오징어 다리 한쪽을 물고선 휘문을 향해 내밀며 장난쳤다.

 "먼저 입 떼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지는 사람이 오늘 술값 다 계산하기."

 "와, 그거 재미있겠다. 박휘문, 아무래도 오늘 너 강적 만난 거 같은데? 배짱 있으면 한 번 해봐. 네가 질 것 같긴 하지만."

짜증을 내며 싫다던 휘문은 취중인데다 하도 두 사람이 재촉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게임에 응하고 말았다. 

하루는 회심의 미소를 감췄다. 구경꾼이 된 입사 동기생의 구호에 맞추어 야릇하고 스릴 넘치는 게임은 시작되었다. 

하루가 한입 다가가면 휘문도 지지 않고 간격을 좁혀왔다.

 "야, 박휘문, 위험해. 그만 가, 자식아."

옆에서 낄낄거렸지만 당사자인 휘문은 알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혔고 하루는 말려든 휘문을 보고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하루는 자신의 계획대로 게임에서 물러섰다.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맞닿을 찰나 하루는 갑자기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홱 

입술을 떼버렸다.

 "어, 박휘문 승! 야, 승리해도 약 오르겠다."

하루는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계획적이었다고 하지만 휘문과 거의 키스할 뻔한 상황에서 태연할 수만은 없었다.

한편 그런 하루를 보는 휘문의 눈에는 당혹스러움과 긴장과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뜻밖의 전율을 느낀 자신에 대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저 귀여운 여동생같이 여겼던 하루에게서 여인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상기된 뺨에 깊게 들어가는 보조개가 너무 앙증맞게 보여서 깨물고 싶어졌다. 

휘문은 스스로의 기분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하루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나 곧 휘문은 애초에 이런 일이 어떻게 발생하게 된 건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루는 자신이 쏘겠다고 큰 소리치고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버렸다. 

그래서 술값은 동기생인 친구가 냈고 휘문은 웃음보가 터져 깔깔깔 킬킬킬 숨넘어가는 하루를 안고서 택시를 탔다.

 "하루 씨, 김하루! 집이 정확히 어디야?"

그러나 하루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하루의 핸드백을 뒤진 휘문은 그 속에서 지갑을 찾았다. 

그런데 지갑은 보이지 않고 파스텔톤의 화장품 케이스라든지 낱개 포장된 초콜릿, 깃털 달린 볼펜, 

눈 한쪽 보여줄까 말까 한 작은 키티 거울 같은 것만 나왔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스물다섯의 여자가 핸드백 속에 이렇게 앙증맞은 물건들을 넣고 다닌다는 게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 

원래 애교스런 얼굴이고 또 마음만 먹음 자유자재로 애교를 부릴 수 있는 하루라는 걸 알지만 취한 모습을 보니 보호해 

주고픈 마음이 부쩍 일었다.

그때 문득 휴대폰에 달린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건 자신의 이력서 사진이었다. 

휘문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증명사진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 으음……."

하루가 몸을 뒤척이다가 가슴에 안겨왔다. 휘문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안고 싶어졌다. 

자신이 안아주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작고 연약하며 가엾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생각대로 하루는 매우 작았다. 한 팔에 폭 안겨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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