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도식
상처 입은 자의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히며 번식한다.
그래서 결국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며 서로의 상처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상처의 기억은 사랑의 기억보다 더 단단한 결속력을 갖는다.
때문에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은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지환이 자살하려고 했었다는 고백은 수연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끔찍한 공포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었다.
결국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지만 죽음만은 선택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어도 분명히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지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언젠가가 12년이나 지난 뒤라는 걸 알았으면 아마 그때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 볼 수 없다는 건 영원을 의미하는 거다. 영영 못 본다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환이 자살 기도를 했었다니,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지환과 다시 떨어지는 건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수연은 해체된 사람처럼 허물어져 지환의 가슴에 기대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밤을 보냈다.
감정 없는 봉제인형처럼 지환의 가슴에 안긴 수연은 비 내리는 정원을 보다가 잠깐씩 졸다가 했다.
그러나 지환은 아마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어슴푸레한 새벽 미명에 눈을 떴을 때 지환의 속삭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좀더 자. 아직 밤이야."
수연은 그 말에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았었다. 이렇게 쉽게 잠이 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광폭했던 빗줄기가 아기 옹알이처럼 귀여워졌다. 보슬보슬 흩날리는 빗방울에 산자락이 맑아 보이는 아침이었다.
깨끗이 세탁해 말려온 옷을 입고 전복죽과 나물무침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온천장 뒤쪽의 대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섰다.
종업원이 우산 두 개를 준비해 줬다.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와."
수연은 기다리는 지환을 잠깐 보다가 들고 있던 우산을 접어 입구에 세워두고는 지환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지환의 팔이 어깨를 감싸 안아갔다.
"추워?"
"아니."
"추우면 말해."
"응."
그리고 한동안은 말없이 걸었다. 곧게 뻗은 대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무성한 초록 잎 사이로 흩날리는 빗방울은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공중제비를 돌았다. 촉촉하고, 푸르고, 맑고, 죽 향 그윽한 길이었다.
어린 죽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향에 머리가 맑아지고 신선한 공기에 호흡이 깨끗해졌다. 어깨가 따스했다.
자신의 샌들과 맞추어 나란히 앞으로 나오는 지환의 스니커즈를 보던 수연이 가만히 물었다.
"키가 얼마나 자랐어?"
잠깐의 틈 뒤 지환이 대답했다.
"186.5."
"몸무게는?"
"글쎄……, 최근엔 재보지 않았는데, 77kg쯤."
"발사이즈는?"
"285."
"허리는?"
앞을 보고 걷던 지환이 수연을 돌아보았다. 수연은 길 양쪽 성큼성큼 큰 대나무 사이사이 뾰족하게 돋은 죽순들을 구경하며 다시 물었다.
"허리 사이즈는 얼마냐구."
"……31."
"혈액형은 A형이지? ……별자리는 염소자리, 합기도는 2단까지 땄었던가? 수영은……."
지환이 걸음을 멈췄다. 한 발 우산 밖으로 나가게 된 수연은 멈춰 서서 돌아봤다.
"왜?"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환이 한 발 다가와 수연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수연은 찡그리며 보는 지환의 얼굴을 다정하게 올려다보았다.
"내가 오빠에 대해서 너무 모르잖아.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하다못해 셔츠 같은 걸 사려 해도 사이즈도 모르고. 참, 와이셔츠는 몇 호 입어?
비즈니스셔츠를 즐겨 입는 거 같던데……."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잊었어? 12년 전 그날 밤부터 나한테 동생은 없어."
지환은 화가 난 것 같았다. 눈이 어두워지고 어금니 쪽 볼 근육이 꿈틀꿈틀했다. 수연은 상처받은 눈으로 지환을 보았다.
싸우지 않으려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매였을 땐 행복했는데……, 우리 욕심이 모든 걸 망쳐버렸어. 지난 12년은 그날 밤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내린 벌이었을지도 몰라.
계속 남매로 있었다면 12년 동안이나 떨어뜨려 놓지 않았을 거야.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오빠와 나만 잊으면 되지 않을까?"
"오수연!"
"모든 게 뒤죽박죽이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오빨 좋아했던 것만큼 미워했었어.
절대 용서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너무 많아. 진실을 알았다면 지금쯤은 조금 편안해졌을 텐데.
우리 운명 측은해하며, 그냥 한탄하면서, 잊으려고 노력했을 텐데……. 그런데, 그런데……."
수연은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돌아오지도 않고, 오빠처럼 지독한 사람은 다시없을 거야.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가고 말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12년이나 참을 수 없었을 거야.
근데 오빠는 결국 견뎠어. 죽으려고 할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견뎠어. 난 오빠가 참으면 참아지는 사람인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대로 끝내. 오빤 다시 할 수 있을 테니까……."
"더는 못해. 아니, 안 해!"
"해!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더 끔찍한 벌이 내릴지 몰라."
"아니. 이제 그 누구도 우릴 떨어뜨려 놓지는 못해."
"엄마 아빠를 잊었어? 난 엄마 아빠 버리고 오빠에게 갈 순 없어. 내가 그렇게 하길 바래? 그게 오빠가 원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네 마음이야.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해."
지환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수연의 머리를 감아쥐고는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뒤로 젖혔다.
수연은 반사적으로 지환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잃어버렸으면 좋겠어. 다시 예전처럼, 정말 가족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 부리지 마."
"제발 오빠…… 이러지 마. 다시 그 구렁텅이로 빠지고 싶지 않아."
"그렇게 괴롭니?"
"괴로워. 예전의 오빠가 너무 그리워서 괴로워.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 수 없어서 괴로워."
지환이 우산을 떨어뜨렸다. 차가운 이슬방울이 수연의 이마와 뺨을 적시고 속눈썹에 맺혔다.
"너야말로 나한테 이러지 마, 오수연. 돌아갈 수 없는 거 너도 알잖아.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거 알잖아. 돌아갈 수 없어. 절대로!"
수연은 그대로 안겼다. 안겼다고 생각한 순간 정수리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미미한 저항일 뿐이었다. 마음은 지환을 뿌리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연인이면 왜 안 된다는 거야. 이렇게 애타게 원하고 있는데 왜 안 된다는 거야."
서로의 눈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을 뗀 지환이 최면을 걸 듯 속삭여 왔다.
"그냥 네 눈앞에 있는 날 봐. 오빠도 남자도 아닌 석지환을 봐."
지환의 눈은 깊었다. 깊은 눈가에 빗방울이 떨어져 반짝거렸다.
회사에서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에도 이슬이 반짝반짝했다. 잘생긴 얼굴에 잔뜩 그늘이 져서 거칠어 보였다.
거친 눈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원하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수연은 날카로운 핀에 꽂힌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파닥거려도 그 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지?"
수연은 또 주술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놓여나지 못한다.
"대답해. 나 사랑하지?"
수연은 말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서워. 우리 사랑이 무서워……."
키스를 당했다. 이쪽의 감정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욕구에 찬 키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응하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고 온몸으로 전기가 흘렀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기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환이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그리워했고 사랑했던 오빠였기에, 눈앞의 그가 너무도 멋지고 달콤하며 사랑스러운 남자이기에…….
간단히 항복당하고 입술을 열어주었다. 입술이 얼얼하도록 빨려도 부족했다.
격렬하게 파고드는 혀의 공격에 영혼이라도 내어줘 버릴 것 같았다. 수연은 두 팔을 올려 지환의 단단한 어깨에 매달렸다.
탐욕 가득한 깊은 키스에 수연의 몸은 작은 빗방울처럼 녹아내렸다. 그대로 지환의 몸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음탕하게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가쁜 호흡을 내쉬는 그 순간에도 지환의 혀는 쉬지 않고 수연의 입술을 핥았다.
빗물이 상기된 수연의 뺨으로 떨어지자 그것도 핥았다. 코끝으로 옮겨갔다가 눈두덩에도 혀를 대고 빨아들였다.
수연의 얼굴은 빗방울과 지환의 타액으로 젖어갔다.
푸른 대나무 숲이 보고 있었다. 수연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환이 너무도 소중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애틋한 감각이 전신을 에워쌌다.
열다섯 살 첫경험에도 혐오감은 일지 않았었다. 제일 좋아하고 동경하고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혐오감이 일겠는가.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다시 벌 받을 거야."
수연의 두려움에 찬 목소리에도 지환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다 받을게."
"난…… 자신 없어."
지환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다시 수연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수연은 한기를 느끼고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지환이 떠는 어깨를 감싸며 손바닥으로 수연의 팔을 쓸어주었다.
"넌 그냥 내 옆에 있어주면 돼. 그거면 난 천하무적이니까."
"오빨 많이 좋아해. 다시는 오빠랑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아해. 하지만 오빠가 다시 내 인생으로 들어오는 건 싫어.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오빠 삶으로 돌아가. 자꾸 이러면 언젠간 엄마랑 부딪치게 될 거야.
오빠가 엄마랑 싸우면 우리 또 다같이 상처받을 거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다시는."
"다시 원점이냐."
"원점은 아냐. 12년 동안 고통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너무 분하고 미워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간단히 용서해 버렸어. 피 끓게 분하고, 슬프고, 미워서 괴로웠는데,
이제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실은 지금 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이 쓸쓸하고 슬퍼.
이렇게 그냥 쓸쓸하고, 어지럽고, 망연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싶어. 몇 달이 되거나, 몇 년이 되더라도 이렇게 비어 있는 채로 있다보면
언젠가 우연히 오빠를 만나 이 쓸쓸함도 잊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정말 편안해질 것 같아.
그땐 각자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도 이웃에 살면서 왕래하고……."
"집어치워!"
지환이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수연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오, 오빠……."
"다른 여자한테 나 내줄 수 있어? 너 그럴 수 있어?"
"……."
"대답해!"
수연은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왈칵 치민 슬픔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성적인 대답을 메이게 했다.
목이 메는 걸 감추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말 그렇게 되면…… 안 보겠지. 안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으면……."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겠지! 내 옆에 딴 여자 있는 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현실은 안 그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일어날 수 있어. 12년 전처럼,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정말로 일어나서
다시 우릴 떼어놓는다면, 그게 우리 운명이라면……."
"입 다물어! 한마디만 더해! 아주 꽁꽁 묶어서 지구 끝으로 데려가 버릴 테니까! 운명을 어디다 갖다 붙이는 거야!
우리 운명은 내가 만들어! 그렇게 네 마음대로 움직여줄 것 같아!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여잘 두 번씩이나 놓칠 그런 등신으로 보여!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으르렁거리며 소리친 지환은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지환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겁을 먹은 수연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우산을 주워 들고 서 있었다.
저만치 앞서가는 지환의 등을 보는데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보기와 달리 섬세하고 여린 수연이었다.
겉으론 명랑하고 쾌활해 보여도, 상처가 깊고 모질지 못한, 속은 무화과 속처럼 무르기만 한, 그것이 수연 본연의 얼굴이었다.
딱딱한 얼음 가면을 쓴 지환의 눈치를 보는 것에 지친 수연은 곧 포기하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결혼이라도 했으면 지환은 어떻게 나왔을까. 아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조금 전의 기세로는 정말 지구 반대편으로 납치라도 할 것 같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자신이 아직도 혼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더라면
지환과 화해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되지가 않았다.
수연의 마음속으로 한 발자국 들어온 남자들은 거대하게 닫힌 성문을 발견하고 짜증을 냈다. 길이 더 보이는데 들여보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 문이 그렇게나 꼭꼭 닫힌 것에 대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수연조차도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건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인내심과 이해력을 가진 너그러운 남자는 없었다. 어쩌면 그 문은 닫은 사람만이 열 수 있는 문인지도 몰랐다.
캐러밴이 수연의 집 근처 피자집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여전히 폭우의 하늘 같은 지환의 얼굴을 제외하고 보면 도시는 휴일의 화창하고 생동감 넘치는 오후였다.
"그만 갈게."
"기다려.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아냐, 혼자 갈래."
수연은 내리려는 지환을 제지했다.
"피곤해 보여. 나 때문에 잠 못 잤지? 운전하느라 더 힘들었을 거야. 1종 면허를 땄어야 했는데……."
"괜찮아."
"……미안해."
수연은 속을 캐려는 듯 말끄러미 보는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문득 차문 앞에 멈추어 선 지환의 손을 보았다.
차문의 봉을 잡고 있는 손의 손목 안쪽 상처를 봤다. 다시 가슴이 욱신욱신 저려왔다.
어쩌면 지환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플 것 같다. 지환이 아무리 행복하게 웃어도 믿지 못할 것 같다. 죽으려고 하다니, 죽으려고 하다니…….
"수연아."
걸어가던 수연은 부르는 소리에 멈추어 섰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일 회사에서 보자."
수연은 다시 걸었다. 친근한 목소리였다.
'수업 마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릴게.'
그때의 목소리였다. 아, 놓치고 싶지 않다.
수연은 지환을 원하게 될까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뒤에 찾아올 파란이 두려운 거였다.
부모님의 분노, 자신을 아는 주위사람들의 시선, 휘문의 반응, 무엇보다 열다섯의 상처가 되풀이될까 봐 무서웠다.
1년 같은 하루를 보낸 수연은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휴대폰은 왜 두고 갔어?"
현관에서 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가끔 외박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무언가 직감하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 깜빡 잊고 두고 간 거야. 왜, 무슨 일 있었어?"
"누구랑 어디에 갔었어?"
"엄마."
"왜 대답을 못해."
"왜 그래. 나 피곤하단 말야."
수연은 짜증을 내며 2층 계단으로 도망을 쳤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을 보고선 도저히 거짓말이 매끄럽게 나와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리 내려와."
"씻고, 씻고 내려와서 다 얘기할게."
"지환이랑 있었어?"
수연은 흠칫 놀랐지만 얼른 표정을 추스르고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말도 안 돼. 얘기했잖아. 은아랑 채희랑……."
"채희한테 전화 왔었다. 일 때문에 도쿄 간다더라."
"아……."
"너 똑바로 말해. 그 녀석이랑 있었지?"
"아, 아냐. 그, 그러니까 휘문 씨랑, 지난번에 집에 데려온 남자 있잖아. 그 사람이랑……."
"그럼, 그 사람이랑 둘이 여행을 갔었단 말이니?"
"응."
"이리 내려오랬잖아."
수연은 쭈뼛쭈뼛 계단을 내려와 어머니 앞에 섰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을 대하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내가 널 잘못 키운 것 같구나. 남자랑 단둘이 여행을 가다니!"
"어, 엄마,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한 건 잘못인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나, 한두 살 먹은 어린애 아냐.
27살이나 먹어서 처신 제대로 못할까 봐 그래?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 아냐."
"그 녀석 당장 불러들여. 배워먹지 못한 녀석이구나. 어디 감히……."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부엌에서 종종 뛰어나오는 아줌마에 앞서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원 실장이 웬일이에요?"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 동안 수연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뭐, 뭐라구요!"
수연은 휘청하고 쓰러지려는 어머니를 보고 후닥닥 다가갔다.
"엄마, 왜 그래?"
"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하얗게 질린 어머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수연은 놀라서 아줌마를 불렀고 달려온 아줌마가 어머니를 부축했다.
수연은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를 들었다.
"여, 여보세요? 저, 저 수연이에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단……."
수화기 저편의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가셨단 얘기를 전했다. 수연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위윙 울리더니 눈앞이 어둑어둑해졌다.
"사모님! 사모님! 아이구, 왜 이러실까. 눈 좀 떠보세요, 사모님!"
아줌마의 놀란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사장님이 왜?"
"아, 아버지가 쓰러지셨대요."
수연은 충격에 질린 눈으로 아줌마를 보았다.
"아이구, 아이구, 이를 어째. 가만, 가만, 우선 사모님 찬물부터 좀 드리고, 수연인 어서 하 기사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
어느 병원이래?"
"어느 병원?"
멍하니 앉아 있던 수연은 바쁘게 움직이는 아줌마를 보고서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추상같던 어머니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누워 계신 게 더 충격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하 기사한테 전화해 봐. 청심환이 어디 있더라……."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잡고는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 부탁했다.
안방에서 나온 아줌마를 도와 어머니에게 청심환을 먹이고는 어머니의 팔다리를 미친 듯이 열심히 주물렀다.
지금 수연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 붙들고 열심히 할 게 필요했다.
어머니는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수연의 손을 아프게 잡고 매달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벼, 병원에 계시대."
"세상에, 세상에…… 안 돼, 안 돼!"
"엄마……."
수연은 실성한 사람처럼 버둥거리는 어머니를 안고서 병원으로 갔다. 병
원에는 회사 사람들이 나와 있어서 끈 떨어진 연처럼 우왕좌왕하던 수연을 조금은 안심시켰다.
"금연하셔야 합니다. 술도 될 수 있는 한 줄이세요. 과로, 스트레스, 흥분은 절대 금물이에요. 고혈압은 무엇보다 식이요법이 중요해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지혈증까지 계셔서 뇌졸중 같은 합병증이 생길 수가 있으니까 아주 조심하셔야 돼요.
며칠 입원하셔서 푹 쉬세요. 당분간 일을 좀 줄이시고 운동을 체계적으로 해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이 이렇게 많았던가. 어느새 흰 머리가 저렇게 많아지셨을까.
또 피부는 왜 저렇게 검붉고 눈동자에는 생기마저 없어 보인다.
수연은 괜찮다고만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그런 아버지 곁에서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운 얼굴로 꼭 붙어 앉은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 건재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청천벽력같이 지환을 순식간에 잃었듯이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집의 기둥,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아버지가 흔들릴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자신을 잃고 불안해하며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아버지에게 다정하거나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던 어머니였기에 휘청하는 어머니의 반응은 정말 뜻밖이었다.
가족을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의무적이라고밖에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냉정하고 절제된 모습만 보이던 어머니 속에 아버지의 존재가 이렇게 크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정말 알지 못했었다.
수연은 새삼 자신과 어머니가 얼마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몸 관리 좀 해, 아빠. 이게 뭐야. 사람 놀라게 하고."
수연은 애써 웃으며 평소의 투정부리는 외동딸처럼 굴었다.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었는지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 딸 얼굴 오랜만에 보는구나. 오랜만에 보는데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하냐."
"인사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어."
수연은 눈을 흘기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는 아버지를 껴안고는 뺨에 입을 맞췄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유일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건 아버지와 딸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어머니와 지환은 늘 부러운 듯 보다가 어색하게 눈을 돌리곤 했었다.
아버지 나이 서른여덟에 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딸은 더 사랑스럽게도 성격이며 하는 행동이 아버지를 쏙 빼닮아
사랑을 독차지했다. 사랑을 담아 쓰다듬으며 안고 입맞춤하는 애정 표현이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딸이었다.
"내일 골프나 하러 갈까?"
"안 돼. 아빤 병원에서 좀더 고생을 해야지 정신을 차리셔."
"아이쿠, 우리 딸 화가 단단히 났구나. 좀 봐주시지, 공주님."
"무시무시한 검사들이 엄청 남아 있으니까 각오하셔야 될 겁니다, 아바마마."
농담을 주고받던 아버지는 곧 피곤하다며 잠에 빠지셨다. 아버지의 안색이 차차 나아지는 동안 어머니는 점점 초췌해져 수연을 우울하게 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면 집은 정말 유령의 집 같을 것이다. 그런 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수연은 지환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환이 옆에 있으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먹어야지, 엄마. 내가 나가서 뭐 좀 사올게."
"난 생각 없다. 너나 먹고 와."
수연 역시 입맛이 없었다. 수연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회사 사람들에게 식사하고 오라고 내보낸 다음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그 사람이랑은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 거냐?"
갑작스런 어머니의 질문에 수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누구? 휘문 씨?"
"그래.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라고 했지?"
"그건 왜?"
"이제 너도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 아들도 없는데 사위라도 빨리 봤어야 했다. 아버지 일을 좀 덜어드려야 했어. 혼자서 얼마나……."
말끝이 흐려지는 어머니를 보고서 수연은 죄책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번도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계신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딸이었던 것이다.
"당분간 강 전무님께 맡으라고 하면 안 될까? 아빤 별장이나 이모할머님 댁에서 휴양하시게 하고."
"아버지가 그러려고 하시겠니. 강 전무가 아무리 잘해도 가족만 못한 거다."
가족? 엄마에게도 가족이 있었던가. 엄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을까. 수연은 잠깐 반발심이 생기는 걸 억누르고는 무심코 물었다.
"그래서 나 정략결혼이라도 시킬 생각이야?"
"상대가 변변치 않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의외네. 엄만 그런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춘기 시절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어떻게 결혼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부모님이 정해 주신 결혼이라고 했다.
그럼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수연의 얼굴을 빤히 보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수연은 어머니가 웃지 않는 이유를,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하고 이해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던 거라고.
수연은 지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또 후회했다. 12년 전 그날 밤, 이성을 차리고 끝까지 가는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아버지에게 지환이 천군만마가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빼앗은 건 자신이었다.
그렇게 후회하고 자책했는데도 부족한 걸까. 오빠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랑의 질량만큼 미워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미워할수록 사랑은 깊어만 갔기 때문이다.
우울하면 몸이 아팠다. 수연은 택시에 내리면서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찡그리며 들어선 회사 로비에 일련의 신사들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 지환의 모습도 보였다.
텔레비전 광고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검은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저 사람들 지금 뭐하는 거야? 아침부터 무슨 잔혹사라도 벌일 것 같은 분위긴데?"
하고 지나가는 영업부 여직원을 붙들고 물었더니
"자영미디어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이지는 잘 모르겠어. 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다 모인 거 같아.
근데 다들 왜 저렇게 훤칠하게 잘생겼다니. 애널리스트들은 인물 보고 뽑나 봐."
했다. 그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뒤에서 윤 대리가 인사를 해왔다.
"굿모닝."
"오늘은 굿모닝이에요? 지난주에는 왜 그렇게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아,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이요?"
"내 여자도 아니면서 꼬치꼬치 묻지 마."
"치, 관둬요. 나도 골치 아픈 일투성이에요."
"왜?"
"내 남자도 아니면서……."
"아, 알았어. 기브 앤 테이크 하자. 수연 씨 먼저."
"윤 대리님 먼저."
"으이구, 이 여우. 좋아. ……나 바람났다."
"네에?"
수연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갑자기 뒤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했다.
수연은 커진 눈으로 윤 대리의 눈을 보았지만 윤 대리는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도 꾹꾹 참은 수연은 내리자마자 윤 대리를 붙들었다.
"누군데요? 어떤 여잔데요? 집에서 알아요?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어떡하실 건데요?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윤 대리님. 그 여자 사랑해요? 아, 그래도……. 정리하세요, 네?"
"뭘 정리해?"
갑자기 사무실에서 휘문이 튀어나오며 물었다.
"아, 일찍 왔네."
윤 대리는 얼버무리며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고 수연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휘문에게 인사했다.
"주말 잘 보냈어?"
"나야 뭐 애인한테 버림받고 하루 종일 방에서 빈둥빈둥했지. 여행은 좋았어? 근데 핸드폰은 왜 꺼놨어?"
"아, 잊어버리고 두고 갔었어. 전화했었어?"
"당연하지. 굿나이트 키스 받으려고. 다음엔 우리 둘이 가자."
"으, 응. 근데 못 보던 넥타이네. 샀어?"
"응. 어때? 근사하지?"
"괜찮네. 근데 어떻게 샀어? 나한테 가져간 용돈으로는 한 달 먹고살기도 빠듯할 텐데. 설마 새로 카드 만든 건 아니겠지?"
"어허, 바가지 긁는다."
"뭐냐니까?"
"이 오빠가 돈 좀 벌었지. 조금만 기다려 봐. 곧 대박 터지면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쫙 입혀줄 테니까."
"아!"
그제야 수연은 지난번 지환이 경고한 것이 떠올랐다.
들떠있는 휘문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 전문가인 지환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주식이 잘되는 거지? 근데 저기, 영업부 차 차장님 쪽에 바람꾼 붙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알아?"
"바람꾼? 누가 그래?"
"그냥 떠도는 얘기가 그렇더라구. 차 차장님 정보 너무 믿지 마."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 잠깐만."
사무실로 들어가 들어가던 중 휘문이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반지 어쨌어?"
"아……."
수연은 당황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입원으로 정신이 없어서 반지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찡그리는 휘문의 눈을 보자 거짓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결국 수연은 솔직히 털어놓고 말았다.
"사, 사실은 잃어버렸어. 미안해."
"뭐? 어쩌다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바, 반지가 좀 컸던가봐. 바다에 빠뜨렸는데 못 찾았어. 같은 걸로 살 테니까 화내지 마. 정말, 진짜 미안."
"어휴, 칠칠맞지 못하게 어떻게 그걸 잊어버려. 성의 부족 아냐?"
그러나 휘문은 의외로 크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똑같은 걸로 사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위로까지 해주었다.
수연은 죄책감에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착한 남자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배신감을 맛보았으니까 더더욱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