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
수연은 공격할 적의 성벽을 노려보는 장군처럼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한턱 쏘겠다던 휘문은 부탁을 할 틈도 주지 않고서
"미안. 내일 살게.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라고 말하고는 영업부의 차 차장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바람꾼에 대해서 경고해 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곧 사랑니가
아파와 딴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회사 맞은편 상가 빌딩에 치과병원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할머니 때부터 다니는 집안의 단골 치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병원에는 가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치과를 가야 한다면 '그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을상을 하고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문득 건너편 치과병원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병원 창으로 불빛이 보였다. 수연은 망연히 서서 올려다보며 시간을 죽였다.
곧 있으면 그 불빛이 꺼지고 그러면 치과는 가지 않아도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고 사랑니는 점점 더 욱신거렸다.
수연은 가로수 옆에 서서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건물의 입구를 쏘아보았다.
"여기서 뭐해?"
지환이었다. 중역 회의실에 불려가 싫은 소리를 듣고 나올 때 힐끔 눈이 마주쳤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회의는 길어졌고 수연은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지환이 해결한다고 했으니까 잘 처리할 거라고 믿었다.
지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수연은 이미 자신이 여러 번 믿음을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지환이 내렸다.
"회의 끝났어?"
"응."
"어떻게 됐는데?"
"2호봉 감봉에 근신."
"뭐야, 근신이라니. 학교도 아니고. 부서장들 정말 웃긴다."
"일종의 집행유예라고 생각해."
"쳇. 거래한 거니까 고마워할 것도 없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천만에."
수연의 옆으로 나란히 선 지환은 수연이 보고 있던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일렬로 매달린 간판에서 치과병원의 간판을 찾아내고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지환은 확인하려는 눈으로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확인해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집에 가야겠다."
지환은 돌아서가려는 수연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수연의 한 손은 여전히 뺨을 감싸고 있었다.
금방 상황을 알아차린 지환은 심각한 눈으로 보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뿌리치려는 수연의 팔을 꼭 움켜잡고서는 한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강 박사님 좀 부탁합니다."
수연은 지환이 집안의 단골 치과병원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자신은 위치조차도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하덕건설 오명곤 사장님 댁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밝힌 지환은 한 번도 전화통화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 의사와 어른으로서 얘기하고 있었다.
어린시절 이를 맡겼던 아이가 아니라 어른 대 어른으로 얘기하는 지환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기억 속의 오빠가 눈앞의 남자가 맞는 건지, 눈앞의 남자가 정말 한때 자신의 오빠였던 건지 의심스러웠다.
"네, 지금 곧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환은 수연의 손목을 잡고 끌어 자신의 차에 태웠다. 열린 차 문을 보며 그 잠깐 동안 수연은 이대로 돌아서 가버릴까 갈등했다.
지환이 옆에 있다면 한결 안심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치과는 싫었고, 지환이 있어 안심이 되는 자신의 의지도 싫었다.
지환이 모든 걸 깨끗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확신하고 있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아픈 건 절대 대신해 줄 수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수연은 지환의 손이 이끄는 대로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강 박사님은 세미나가 있어서 지금 바로 제주도로 가셔야 된다는군. 작은아들이 봐줄 거야."
"차라리 아들이 나아. 그 할아버진 싫어."
"얼마나 참은 거야?"
"몰라. 일주일쯤 됐나."
지환은 미련하다거나 바보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연은 다소 놀란 눈으로 앞 도로를 주시하고 있는 지환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치과에 가지 못하는 걸 지환은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린애 같은 두려움을 말이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수연의 시선에 대한 지환의 응답이었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절대 위안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듣고 싶지도 않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잠깐 시계를 본 지환은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번호를 눌렀다.
"상무님, 저 석지환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약속 시간을 좀 미뤘으면 하는데요. ……두 시간 후쯤이 좋겠습니다.
……네,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약속이 있었던 건가? 하긴 비서인 양희는 지환이 회사로 들어온 후로 거의 매일 기업 쪽 사람들과 저녁 식사 약속이 있다고 했다.
스케줄이 굉장히 빡빡해서 철인이 아니고선 이겨내지 못할 정도라고.
"그냥 여기서 내려줘. 택시 타고 갈게."
"잔인하게 그러지 마라."
"뭐가?"
"나더러 너 아픈 거 상상하면서 더 괴로워하란 얘기잖아."
순간 수연은 움찔했지만 고집스럽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이제와 새삼스레 또 비난하는 어조가 되지 않도록 애쓰며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거짓말 마. 보는 것보다 상상하는 게 더 괴롭다면,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을 수 있어. 새빨간 거짓말."
하지만 역시 원망하는 투가 돼버렸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냉정해질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말문이 막혔겠지 생각했다. 차의 앞 유리로 붉은 노을이 번지는 걸 보았다.
저렇게 번져 엷어지고 결국에는 어둠에 잡아먹히는 노을처럼 지환에 대한 애정도 믿음도 죽어갔다.
"그래서 잠자는 게 힘들었어."
문득 지환이 중얼거렸다. 수연은 노을에 젖은 붉은 눈으로 지환을 보았다.
"눈 감으면 네가 보이고 그러면 괴로우니까 눈을 감을 수가 없었지."
지환은 증명이라도 하듯 두 눈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수연은 시선을 내려 핸들을 잡은 지환의 손을 보았다.
뼈마디가 굵어서 오므리면 주먹이 참 컸었다. 그래도 거칠어 보이지 않고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건 긴 손가락과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는 예쁜 모양의 손톱 탓이었다. 그 손을 참 좋아했었다.
그 손가락에 손가락을 감는 게 좋았고 그 손에 머리가 쓰다듬어지고 귀 뒤로 머리칼이 넘겨지는 걸…….
수연은 눈을 돌리고 말았다. 죽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정도 믿음도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었던 것이다.
치과는 매우 밝은 느낌을 주었지만 특유의 냄새와 고문대를 연상시키는 진료실의 의자는 수연의 공포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잔뜩 긴장한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지환의 손을 꼭 잡았다.
마주잡아 오는 지환의 손힘에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지만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는 순간 또다시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우선 당장 수술이 가능한지 사진부터 찍어보죠. 다른 약물 복용하시는 거 있습니까?"
"야, 약물요?"
"혹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알레르기란 말에 수연은 움찔했다. 차트를 보고 있는 의사는 수연의 반응을 보지 못했지만 테이블 밑으로 수연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지환은 수연의 긴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생리 기간은 아니시죠?"
아버지를 닮은 젊은 의사는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보다 여유는 없는 것 같았다.
수연의 대답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이어지는 질문에 수연은 짧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소기가스를 사용해 주십시오."
지환의 말에 의사가 눈을 들었다. 지환을 보다가 긴장과 불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8살 때 여기서 충치 치료를 했는데 그때 진통소염제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나흘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4일 동안 해독용 링거를 맞고서야 살아났습니다.
거의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신중하게 해주십시오."
"발치한 후에 통증이 그다지 없으면 진통소염제는 처방하지 않아도……."
"수술하는 동안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그리고 마취 주사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소기가스로 해주세요. 되겠죠?"
저렇게 딱딱한 얼굴로 명령하듯 말하는데 '안 됩니다.' 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웃지 않는 지환의 눈빛은 살벌할 정도로 날카로우니까 말이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빈틈없는 눈빛에 의사는 조금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반듯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던 지환이 방약무인한 표정으로 위압감을 풍기자 실내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연은 딱딱하게 뭉쳐 있던 어깨의 근육이 사르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는 눈으로 지환을 곁눈질했다.
지환이 예전의 일을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놀랍고도 기뻤다.
병원 가기 싫어서 아픈 걸 참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뻤다.
무섭고 부끄러워 자신의 입으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얘기를 당당하게 말하고 요구해 주는 지환이 있어 안심이 됐다.
지환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따뜻함에 가슴이 젖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에 있는 듯한 자세로 리드하려던 의사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성의 없어 보이던 얼굴에 상냥함이 떠올랐다.
지환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궁금한 눈이었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물론입니다. 요즘엔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한테도 종종 사용을 하고 있죠."
그리고 의사는 수연에게로 눈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언제 수술이 끝났나 싶게 금방 끝나니까. 끝난 뒤에는 기분이 아주 좋아질 겁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아무리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치과용 진료 의자에 눕는 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아나서 될 일이 아니었다.
수연은 떨리는 다리를 들어 진료 의자에 올랐다. 상체가 뒤로 젖혀질수록 공포감이 점점 더 심해졌다. 무서워 눈물이 핑 돌았다.
머리가 표백돼 버릴 것 같은 밝은 불이 눈을 아리게 했다.
"자, 아 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다가온 의사의 손에 들린 기구를 본 순간 수연의 눈가로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는 걸 알지만 제어되지가 않았다. 창피한 것도 잊을 정도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옆방에서 들리는 드릴 소리에 어렸을 때의 끔찍했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세포 하나하나에 뿌리 깊이 박힌 그 두려움은 성장이나 교육에도 전혀 수그러들지가 않고 고통을 되돌려 놓았다.
"오빠……."
수연은 눈으로 지환을 찾았다. 지환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가지 마."
"그래."
수연은 눈물이 그렁한 눈을 지환에게서 떼지 않았다. 간호사가 다가와 아로마오일이라며 수연의 관자놀이에 묻혀주었다.
지환이 고맙다고 인사하자 간호사는 눈을 반짝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사진을 찍는 일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연은 아파서 소리를 질렀고 눈물도 흘렸다. 점
심을 언제 먹었냐는 의사의 질문에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그 말을 할 때조차도 수연은 지환의 눈만 보았다.
놓치면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보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네요. 염증이 심합니다. 빨리 뽑아줘야 되겠어요."
수연은 웃음가스란 걸 마셨다. 지환이 훨씬 편할 거라고, 이산화질소와 산소가 결합된 것인데 몸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니 참 신기하지 않느냐며, 그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하며 안심시키려 애썼다.
수연은 절대 기분이 좋아지게는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수긍의 표시로 눈을 깜박깜박했다.
"우선 잇몸 절개부터 하고 드릴로 머리 부분을 제거한 다음에 뿌리를 뽑아낼 겁니다. 그 다음엔 봉합만 하면 끝이에요.
간단한 거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자, 시작합니다."
그런 건 말로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데 의사는 친절하게도 수술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입을 벌리고 반항 같은 건 전혀 할 수 없는 상태로 의사의 손에 처분되어지길 기다리는 건 정말 공포스러운 일이다.
차라리 의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너 11살 때 기억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드릴 소리가 파리의 날갯짓 소리처럼 귀찮게 섞여들었다.
"나 수영장 다닐 때 너도 배우겠다고 기어코 따라왔었잖아."
물론 수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내자식이라면 운동 한두 개는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셔서 지환은 어렸을 때 합기도를 배웠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방학 때마다 수영을 했다. 보충 수업이 있긴 했지만 학기 중일 때만큼 일찍 등교하지 않아도 되어서
아침 시간에 수영을 했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보충 수업이 끝나면 여러 가지 학원을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아침잠이 많아서 힘들어하면서도 꼬박꼬박 따라왔었어. 내가 수영장 갔다가 바로 등교하면 같이 학교에 못 가니까 싫다고 말야.
나랑 같이 등교하겠다고, 그것 때문에 부득부득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쯤 감긴 눈으로 수영장엘 갔었지.
그런 네가 나…… 참 귀여웠다. 졸린 눈을 부비면서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졸졸 따라 나오는 네가…… 정말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여웠어."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지환은 진지하게도 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듣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수연은 대답도 할 수 없고 머리도 끄덕일 수 없는 상황인데 지환은 혼자서 고백하듯 잘도 말하고 있었다.
수연이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아는 듯이.
"그러다가 사고가 났지."
지환의 눈빛이 흐려졌지만 수연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충분히 그 기분이 전달되어 수연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너
무 졸려서 방심하는 바람에 수영장 벽에 머리를 부딪쳤었다. 그래서 익사할 뻔했지만 다행히 지환이 구해 주어 살았다.
엄청나게 물을 마셔서 괴로웠고 며칠 동안 병원을 다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일로 지환이 지금까지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죽을 것처럼 무서워서 머릿속이 하얀데, 그때 네가 눈을 뜨고 날 봐줬어.
빨갛게 핏발 선 눈에 눈물이 맺혀서는…… 너무 아파 보였다. 그런데도 넌 날 보고서 안심한 것처럼 웃었지.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몰랐는데……."
오빠 때문이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건데 그런 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니, 바보같이…….
"그때 깨달았다. 난 네 눈 없이 살 수 없다는 거, 네 눈이 날 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거라는 거……."
거짓말…… 거짓말!
"오지환이 아니면, 네 오빠가 아니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넌 내가 가야할 길이었지만 오빠인 난 네 길이 될 수 없었어.
그래서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빠로 만족할 수 없는 건 나였으니까. 돌아오지 않은 건 내 의지였어.
네 길이 되기 위해선, 네 남자가 되기 위해선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엔 당장에라도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돌아오면, 잠깐이라도 네 목소리 들으면 다 포기하고 네 곁에 있고 싶어질 것 같았어. 그래서 버텼다.
한순간을 위해서 영원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거짓말 같은 얘기는 들어줘서도 이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귀도 막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 한 귀퉁이 어딘가 구멍이 난 건지 자꾸만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아귀 맞지 않는 문처럼 덜컹거리는 가슴 안으로 지환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새겨졌다.
수술은 30분 만에 끝이 났다. 의사의 말대로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게 금방이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드디어 사랑니를 뽑았다는 성취감에 어딘가 모르는 허전함, 그리고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붕 떠 있는 듯한 나른한 이 기분은 소기가스의 후유증이 아니라 수술 내내 들은 지환의 고백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고 있는 솜을 놓치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문 채 진료실을 나왔다.
간호사가 뽑은 사랑니를 지환이 챙겨갔다는 걸 감동에 겨운 눈망울로 귀띔해 줬다.
그런 걸 챙겨서 뭘 하려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입에 문 솜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수연은 병원을 나설 때까지 불만을 담은 눈으로 지환을 쏘아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도 지환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솜은 2시간 뒤에 빼면 돼. 당분간은 피가 나올 텐데 뱉지 말고 삼켜.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러운 걸 먹고 뽑은 쪽으로는 씹지 마.
입맛이 없으면 음료수 같은 걸 계속 마셔 줘. 찬물로 찜질해 주고……."
의사에게서 들은 말을 지환은 또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수연은 별로 기억되지 않는 주의사항을 들으며 병원을 나왔다.
차에 앉자마자 지환은 또 물어왔다.
"어때? 괜찮아? 아파?"
수연은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구나.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푹 쉬어. 당분간은 운동은 삼가고 많이 움직이지 않도록……."
"잔소리 좀 그만해."
수연은 어금니를 문 채 입술만 움직여 그렇게 짜증을 부렸다.
웅얼거리는 소리로 나왔지만 의미는 전달되었는지 지환이 말을 멈추고 돌아봤다. 보는 눈에 대고 인상을 쓰며 쏘아보았다.
그런데도 지환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오히려 싱긋 웃었다. 심통 난 아이를 보듯 귀여워하는 게 표정으로 역력히 드러났다.
"착해. 잘 참은 상이다."
수연이 상황을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지환이 키스했다. 힘주어 꼭 닫고 있는 입술 위를 스치듯 부드럽게 핥고는 곧 떨어졌다.
망연한 표정으로 보는 수연을 두고 지환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유유히 차를 몰았다.
누가 이런 상 달래! 소리치고 싶은 걸 수연은 간신히 참았다. 무사히 사랑니를 정복했으니까 이 정도는 참아줘야겠지.
사랑니를 뽑고, 죽을 먹고, 감봉을 당하고, 이틀째 신경안정제 없이 잠을 자는 쾌거를 이루고,
삽목한 국화 묘목에 물을 뿌리고, 그리고 근사하게 쏘겠다는 휘문의 저녁 식사를 드디어 먹게 된 금요일 저녁,
그런데 하필이면 휘문이 안내한 곳은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긴 이탈리안 식당 <아르마니>였다.
4월의 끝인데도 한여름처럼 올라간 수은주 때문에 실내는 벌써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래도 밖의 더운 기운이 남아서 수연은 자리에 앉기 전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때 휘문의 손이 자연스레 뻗어와 재킷을 받았다.
순간 수연은 익숙하고도 저릿한 날카로움에 심장이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수연은 멈칫하고 굳어버렸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밟아 묻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지환의 생각이 또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교복을 받아 챙겨주던 그때의 손길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휘문이 해주어서 지환이 떠올라버렸다.
그 익숙하고 편안하고 상냥했던 손길…….
떨쳐내고 식사를 했다. 집에선 언제나 소리 없이 식사를 했고 대화도 많지 않은데 휘문의 식사는 다소 시끄러웠다.
아무리 많은 양을 먹어도 언제나 깔끔하고 조용하게 먹는 지환에 비해 휘문은 게걸스럽달 정도로 복스럽게 먹는 쪽이었다.
아, 비교는 그만. 수연은 생각을 털고 휘문에 집중하도록 자신을 단속했다.
"저 여자 알아?"
"응? 아, 아니."
"근데 계속 보네. 변태 아냐?"
"뭐?"
"너한테 반한 거 아니냐고."
"그런 거에는 뭐 익숙하니까."
키득키득 웃는데 보던 여자가 다가와 둘은 뜨끔하고 눈짓을 교환했다.
"식사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네, 아주 잘 먹었습니다."
휘문이 대답했다. 수연은 와인셔벗을 먹다가
"콜라를 한 잔 드릴까요?"
하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검은 롱드레스 차림으로 굉장히 도회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풍겼다.
어깨에 늘어뜨린 파마머리가 칠흑같이 새까매서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미인이라기보다는 도드라져 보이는 개성미와 지적인 성숙미에 한 번은 뒤돌아보게 될 것 같은 여자였다.
"아뇨, 괜찮아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그리고 여자는 멀어졌다. 그녀에게선 관능적인 무스크 향이 풍겼다.
굳이 다가와 알고 있다는 듯한 눈으로 콜라를 주문하겠냐고 묻는 건 역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난번 일을 상기시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지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게 분명했다.
늦은 시각에 와 난동을 부린 손님 정도로 기억하는 눈이 아니었다. 뭔가를 좀더 캐내고 싶어 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에 떠보는 듯한 말투.
"발 좀 내밀어 봐."
"뭐?"
"신발 벗고 발 올려봐. 뒤꿈치 까졌잖아. 반창고 붙여줄게."
"어머, 어떻게 알았어?"
"내가 사준 새 구두 신고 있는 거 봤으니까. 들어올 때 살짝 절뚝거리는 것도 같고."
"선수는 다르구나. 선수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반창고까지 준비해 두나 보지?"
수연은 챙겨주는 휘문이 기뻤지만 은근히 비꼬듯 말했다. 절대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고 정말로 궁금했을 뿐이었지만
기분 좋은 내색을 솔직히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소한 것에 감동을 드러내어 쉬운 여자로 보이는 건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섭하다. 아까 화장실 갈 때 사갖고 온 거야."
수연은 신발을 벗고 천천히 발을 올렸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고 있던 휘문이 발목을 붙잡더니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보면서 수연은 짓궂은 미소를 흘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내 발 만지고 싶어서 생각해 낸 거 아냐?"
"냄새나는 발을 뭐 하러 사서 만져."
"뭐? 말 다했어?"
수연이 토라지며 발을 빼려 하자 휘문이 재빨리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더듬으며 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저쪽 발."
수연은 발을 바꿔 올렸다. 테이블 밑으로 뻗은 발과 그 발을 잡고 있는 손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두 사람은 의식하지 않았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웃었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아, 그리고 갈 때 화과자 달라고 말해. 잊어버리고 그냥 가버리면 안 되니까."
"화과자라니?"
"어머님 좋아하신댔잖아. 차에 뒀거든. 있다 갈 때 잊어버리지 말고 말해."
순간 수연은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껏 어머니를 챙겨주는 남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까지 초대를 했던 남자도 없었지만 자신 이외 어머니에게 화과자를 사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휘문의 세심함에 놀란 것도 있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어머니를 챙겨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오늘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네. 어떻게 우리 엄마한테 선물할 생각을 다했어?"
"당연히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지. 사위 사랑은 장모 아니냐."
"우리 엄마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을 텐데?"
"그러니까 더 잘해야지. 그런 분이 또 정 한번 주시면 팍팍 주시는 거거든. 기필코 이쁨 받고 말 테다."
수연은 피식 웃었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이 따뜻했다. 어쩌면 휘문이라면 어머니와 그럭저럭 잘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구두를 신고 훨씬 편안해진 걸 느끼고 휘문을 향해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휘문은 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근데 회사 이미지를 손상시켜서 감봉한다는 건 도대체 뭐야?"
"얘기했잖아. 술집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소란 좀 피웠는데 하필이면 그걸 우리 회사 이사 중 한 사람이 본 거야."
"얼마나 소란을 피웠기에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걸 가지고 감봉까지 시키다니 너무한 거 아냐."
"원래 윗사람들은 보수적이잖아. 감봉 정도야 뭐, 괜찮아."
수연은 자신의 거짓말 솜씨가 아주 뻔뻔스런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공지에 상세한 내용까지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저 말야, 이건 묻지 말자고 생각했던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묻는 건데 말야."
"또 뭔데 서론을 그렇게 어지럽게 빼?"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 어차피 현재가 중요한 거니까."
수연은 휘문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짐작이 갔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느긋한 척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콜라가 필요했다.
"대답해 줄래?"
"뭘?"
"석지환 이사. ……누구야?"
"……."
수연은 표정을 굳힌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웨이터에게 얼음 뺀 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좋아. 과거에 어떤 관계였건 상관없어. 좀스럽게 그런 걸 따지려는 게 아니니까. 단지 이것만 확인해 줘. 아직도야?"
"……."
콜라가 왔다. 수연은 꿀꺽꿀꺽 반 컵을 비우고 냅킨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걸 지켜보는 휘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그런 휘문을 앞에 둔 수연은 곤혹스러워 점점 움츠러들었다.
수연이 대답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예전 그들의 관계뿐이었다.
하지만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가정사를 얘기한다는 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환과 얽힌 부분에서는 말이다.
그러니 수연은 입을 열기가 힘겨운 것이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무슨 소문?"
묻는 수연을 보는 휘문의 눈길에 분노가 일었다. 수연은 죄지은 것 마냥 뜨끔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휘문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깊게 빨면서 한숨과 같이 연기를 내뿜었다.
"뭔지 똑바로 말해. 나 양다리는 못 참아."
"그런 거 아냐."
"그럼 장난이냐!"
휘문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필이면 내일 지환과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마당에 이런 시련이 닥칠 게 뭔가.
수연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그래서 완곡하게 대답할 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휘문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런 관계는 안 돼."
"그리고?"
"그리고라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그러면 저쪽에서 질척대는 건가?"
수연은 화가 나 차갑게 잘라 부정했다.
"아냐."
지환의 모습이 실제로 질척대는 것이라 할지라도 휘문의 입에서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건 듣기가 싫었다.
질척대다니! 그 단어 하나에 머리가 뜨끈해질 정도로 화가 났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지환을 욕하는 건 정말 용납할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절대 질척대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못 박아 두고 싶었다.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하고 반듯한 사람인지 말해 주고 싶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절대 그런 사람 아냐."
"감싸는 거야?"
"비꼬지 마.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 과거가 상관없는 게 아니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경 엄청 쓰이는 거지? 박휘문, 그래서 어떡할래?
내가 만난 남자가 스무 명이 넘는데 그 남자들 나타날 때마다 이럴 거야? 자긴 없어?
자기도 꽤 있었다면서 왜 이렇게 사람을 들볶아? 이러면 나 피곤해, 정말."
"정말 끝난 관계란 말이지?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하면 믿을래?"
"아니."
휘문은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며 잠시 수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면 진실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깊게 보더니 담배를 끄고는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손 줘봐."
수연은 교묘하게 휘문을 몰아붙여놓고선 지레 긴장을 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반지 끼면 믿어준다."
수연의 약지에 커플링이 끼워졌다. 백금의 링 위에 청명한 가을하늘 같이 깊고 푸른 터키석이 박혀 있었다.
"사보 인터뷰 보니까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 이거라고 했던데 맞아?"
"응. 근데 그 기사를 어떻게 찾았어? 1년도 넘은 건데."
"우연히. 근데 취향이 의외로 소박하네. 당연히 다이아몬드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여자들 다이아몬드에 미치는 거 아니었어?"
"색깔이 예쁘잖아. 보면 기분이 좋아져."
"이 반지 끼고 매일 나한테 모닝콜 해줘. 헤어질 때마다 굿나이트 키스도 해줘. 그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흠, 까짓 거 해준다."
반지를 끼겠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순순히 키스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건 불길했다.
휘문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자신의 반지와 손가락을 내밀었다. 수연이 상기된 얼굴로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남은 콜라를 말끔히 비웠다.
수연의 태도에는 평소의 여유와 자신감이 비어 있었다. 그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기 없고 보잘 것 없게 보였다.
오수연은 정말 거짓말은 못하는 얼굴이다.
휘문은 마음속에 인 질투와 초조감을 드러내며 빈정거렸다.
"야, 석지환 이사, 그 사람 너무 괴팍한 거 아냐? 성격이 영 꽝인 거 같더라구. 글구, 왜 그렇게 손을 자주 씻냐?
혹시 결벽증 환자 아냐? 어제, 하루 씨가 그러는데 오타 하나에 목 잘리는 줄 알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