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흐트러진 벚꽃을 보는데 왜 이가 아픈 건지 모르겠다. 벚꽃은 필 시기가 되었으니까 핀 거고 이는 사랑니 때문에 아픈 거지만
그걸 수연은 따로따로가 아닌 연쇄 반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벚꽃을 보면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 떠오르고 그 속에 있던 한 사람 때문에
안 아픈 구석이 없다. 그러니까 사랑니가 아픈 건 모두 벚꽃 탓이 분명한 것이다.
벚꽃을 노려보다가 사랑니가 아파서 접촉 사고를 냈다.
명함 주고 보험회사에 연락하는 걸로 끝냈지만 두 달 꼴로 사고를 내는 자신이 한심해서 기분이 영 꽝이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사고는 거의 매일 있었다. 그저께는 회사에 지갑을 두고서 퇴근을 하는 바람에 쇼핑한 물건을 물러야 했다.
휘문이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가까스로 구두 하나를 사긴 했지만 휘문에겐 거금의 지출이어서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휘문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젠 공원엘 갔다가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트럭에 치일 뻔했다.
휘문이 사색이 되어서 구해 내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결국 딴 생각의 끝은 오늘의 접촉 사고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얼이 빠져 있는 게 모두 한 사람 탓이란 걸 절대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늙느라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나으니까.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 지루해서 계단으로 1층 로비까지 갔다.
그런데 회전문 밖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윤 대리님, 아침부터 여기서 뭐하세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윤 대리는 출근길인지 퇴근길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초췌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발아래는 담배꽁초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냐, 먼저 들어가. 이것만 피우고 들어갈게."
"그냥 끄고 들어오세요. 몸에 좋지도 않은 걸 뭐 하러 알뜰히 피워요."
윤 대리는 말이 없었다. 얼마 전엔 영업부 차 차장이랑 싱글벙글하며 붙어 다니더니 투자한 게 잘 안 된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지환과 딱 맞닥뜨렸다.
"아!"
수연은 엉거주춤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에 지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인사도 받지 않고 벌써 저만치나 걸어가고 있었다. 나흘째 유령 취급이었다.
수연은 화가 팍 치밀었다. 달려가 왜 무시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런 지각없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모른 척하자고 먼저 말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더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화가 나고 속이 상하고 서럽고 분한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언니!"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하루가 뛰어와 붙잡았다.
"왜? 어디 불이라도 났어?"
"오늘 아침 신문 못 봤어요?"
"아니. 왜, 무슨 일인데?"
하루는 다짜고짜 붙들어 당기더니 탈의실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신문을 내밀어 보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아니겠죠?"
신문의 타이틀이 꽤 컸다. '증권사 여직원 유흥업소 나가'
"유흥업소? 거긴 유흥업소 아니잖아. 아니다, 술 팔면 유흥업손가?"
"지금 그렇게 태연할 때가 아니에요. 여기 봐요. S사 여직원이라잖아요."
"S사가 우리 뿐은 아니잖아. 선영증권도 있고, SD증권도 있고……."
"아무래도 불안해요."
"괜찮아. 그리고 알면 또 어때? 뭐 큰 죄 지은 건가? 요즘 투잡스족이 얼마나 유행인데."
불안해하는 하루를 진정시키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휘문이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헤이 걸! 오빠랑 뽀뽀나 함 하까?"
"뭐야, 아침부터 징그럽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냐. 위험해서 밖에 못 내놓겠는걸."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야? 돈 주웠어?"
휘문은 능청스런 표정으로 낄낄 웃다가 얼굴을 내밀고서 소곤거렸다.
"비밀."
"어어, 나 따라하는 거야? 유치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오늘 저녁에 오빠가 근사하게 한턱 쏜다. 기대하고 있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쏜다는 거 말리지는 않겠어. 근데 윤 대리님 무슨 일 있어? 밖에서 담배를 몇 개비나 피우고 있더라."
"아, 리포트 때문에 그러지 뭐. 며칠 전부터 하나도 안 맞잖아. 상승 추세라고 하면 루머 터져서 빠지고,
손절매하라고 쓰면 호재 터져서 급등하고. 요 며칠 계속 그랬어. 분석이 잘못 된 건 아니고 운이 안 좋았던 것 뿐인데,
원래 이 바닥이 한번 찍히면 완전 매장이잖아. 조만간 대박 하나 터트리지 않으면 윤 대리님 좀 힘들걸."
"그 일이야 나도 알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캬, 죽인다."
갑자기 휘문이 호들갑스럽게 탄성을 질렀다.
"뭔데?"
일어서 휘문의 책상 위를 본 수연은 신문에 난 여자 연예인 사진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뭐라고. 꼭 메주 눌러 놓은 것같이 생겼는데 죽이긴 뭐가 죽여."
"왜, 난 요렇게 오목조목하게 생긴 애들이 귀엽더라. 아이고, 얼굴은 여고생 같은 게 가슴이 G컵이라네. 우리나라에 G컵이 생산되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렇게 궁금하면 비비안에 전화해 보시지 왜?"
"요즘 애들 성장 속도로 봐서 G컵 정도는 이제 만들어줘야 된다니까."
"어휴, 저질!"
"어, 수연 씨 질투해?"
"무슨 소릴 하셔. 실리콘 넣은 인조인간한테 무슨 질투를 해. 흥!"
"아님 말고."
그러고 휘문은 키득키득 웃었다. 수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느끼며 숨을 쌕쌕 내쉬었다.
휘문의 시선이 아직도 G컵의 여자에게 닿아 있는 것을 보니까 속에서 심통이 보글보글 끓었다.
심술에 파르르 떠는 수연의 눈에 문득 하루의 컴퓨터에 뜬 배경화면 사진이 들어왔다. 수연은 눈을 반짝이며 확 달뜬 목소리로 감탄했다.
"어머! 죽인다! 하루 씨, 이 남자 누구야?"
"권상우잖아요. 권상우 몰라요?"
"아, 그러고 보니까 정말 권상우네. 어쩌면 배근육이 저렇게 정확하게 여섯 조각으로 쫙 갈라져 있을까.
남자지만 정말 아름답다, 뷰티풀! 입술은 또 왜 저렇게 섹시해? 무슨 남자 입술이 저렇게 앵두같이 생겼냐.
키스하면 느낌이 어떨까? 죽이겠지?"
"쳇!"
신문 구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휘문이 냅다 달려왔다. 하루의 컴퓨터 화면을 보더니 인상을 팍 쓰면서 애꿎은 하루를 야단쳤다.
"자알 한다. 누가 회사 컴퓨터에 이런 걸 깔래! 글구, 저 입술이 뭐가 섹시해? 꼭 여자 입술 같이 생겼구만."
"남자들 눈에야 안 섹시하겠지. 남자들 눈에도 섹시하게 보이면 큰일이지 않나? 안 그래, 하루 씨?"
"아, 몰라요. 두 사람 사랑 싸움에 끼어들기 싫으니까 두 사람이 알아서 해요. 난 회의 준비나 하러 갈래요."
하루가 가고 난 뒤에도 수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으로 보다가 급기야 손가락으로 만지며 해롱거렸다.
"진짜 만져보면 기분이 어떨까? 어머, 전기가 팍팍 오네."
"야, 모니터 정전기 때문이잖아."
휘문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모니터를 만지고 있는 수연의 손을 확 잡아뗐다. 수연이 킥킥 웃자 뒤에서 김 과장이 호통을 쳤다.
"거기 아침부터 붙어서 뭐하는 거야! 회의 준비 안 해!"
"네, 해요. 해."
자리로 돌아가 앉은 두 사람은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가 조금씩 속삭이기 시작했다.
휘문이 먼저 꼭 선생님 몰래 장난치는 아이처럼 잔뜩 목소리를 깔고서
"울퉁불퉁한 남자가 좋다는 거야?"
하고 물었다. 수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푸훗! 웃었다.
"나쁠 건 없지."
"알았어. 오늘부터 헬스다."
"기대해도 될까?"
하고 눈을 치켜뜨며 웃고 있던 수연은 엉겁결에 입맞춤을 당하고 말았다.
"야! 사무실에선 애정 행각 벌이지 말라니까 저것들이……."
"아, 전 회의실 갑니다."
휘문은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수연만 남겨두고 달아나버렸다. 좀처럼 쑥스러워하지 않는 수연이었지만 아침에,
그것도 사무실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당한 기습 뽀뽀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 생각하고 허겁지겁 서류를 챙기는데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들어보다가 부장실 앞에 선 지환과 눈이 딱 마주쳤다.
흠칫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냉담하게 쳐다보는 눈이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만스런 흉포함이 이글거리는 두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발산하는 짙은 색의 존재감이 심장 깊숙이 파고들어왔다.
혈관의 압력이 수직 상승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연은 억지로 눈을 떼고 호들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수연 씨."
일순 사무실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회식 이후로 리서치부장과 오수연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뒤로 쑥덕쑥덕 말이 많던 터였다.
"네?"
"잠깐 내 방으로 와요."
"회의 들어가야 되는데요."
그러나 지환은 차가운 눈으로 일별하고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잔말 말고 들어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빨리 들어가 봐. 오늘은 꽤 차갑네."
"오늘만인가요 뭐. 늘 차갑잖아요."
"쉽게 범접할 수 있는 타입은 아니지. 그래도 수연 씨한테는 부드럽던데 뭘. 곧잘 웃기도 하고."
"네?"
김 과장의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며칠 동안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고 얘기도 나눈 적이 없는데 뭐가 부드럽고 어떻게 웃는단 말인가.
수연은 엉터리라고 생각하며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지환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서인 양희가 웃으며 맞아주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여자였다. 결벽증에 가까운 지환의 비위를 잘 맞추어줄 것 같은.
"들어가 보세요."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감과 그 기대감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좁은 방에 둘만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앉아."
커다란 책상에 앉은 지환이 고개도 들지 않고 명령했다. 그래서 수연은 조금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지환에게서 시선을 돌려 새삼스런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 들어오는 거지만 찬찬히 살펴보기는 처음이었다.
방은 책상과 의자, 책장, 테이블에 2인용 소파 둘로 단출했고 모두 칙칙하고 무거워보였다.
가구뿐만 아니라 테이블로 쓰인 두꺼운 유리조차 블랙이었다. 광택조차 없는 새까만 가구에 메탈 스탠드와 벽시계, 컴퓨터가 장식의 전부였다.
오죽하면 바닥에 깔린 페르시안 블루의 카펫이 화려해 보일 정도일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어둡고 차가운 실내 분위기라니,
그 주인의 그 방이었다.
수연은 가죽 소파에 앉아 지환을 보았다. 예전엔 날카로운 모범생 같은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 지성적인 느낌에
남성적인 자신감이 뚝뚝 묻어났다. 섣불리 근접할 수 없이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야성적인 매력이 풍겨서 상당히 위험스러워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뭐, 뭐가?"
수연은 갑작스럽게 떨어진 질문에 반말로 대답하고 말았다. 곧 침착해야 된다고 마음을 다잡고 뻣뻣한 자세로 고쳐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지환이 고개를 들었다. 엄청 화난 얼굴이었다. 상대를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빠였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분노 어린 눈빛에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서류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저 화를 삭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널 꽁꽁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고 싶어. 그래도 성이 안 찰 거다."
"도,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수연도 슬슬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휘문이 키스하는 걸 봤다고 해서 지환이 이렇게 화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그침을 허용하면 마치 지환에게 그럴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수연은 더 당당하고 매정하게 대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러자 지환은 서류 위에서 무언가를 잡더니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수연이 앉은 테이블 위로 사진이 프린트된 종이를 떨어뜨렸다.
"어젯밤에 신문사로 들어간 제보다. 사진 뒷면에 신화증권 본사 여직원이라고 적혀 있다는데, 사진을 봐
. 본사 직원이라면, 오수연을 아는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리가 없을 정도로 선명히 찍혔으니까."
사진은 어두운 바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수연의 모습이었다.
화려하고 섹시한 진달래빛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묘한 미소를 띠며 양주병을 들고 있었다.
검은 배경에 유난히 부각된 오렌지빛 조명이 선정적인 느낌을 자아내서 자신이 보기에도 대단히 퇴폐적으로 보였다.
"세, 세상에! 도대체 누가, 어떻게……."
더 입이 떡 벌어지는 사진은 뒤의 것이었다. 깊이 팬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 부위만을 확대해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상체를 구부린 자세를 어찌나 교묘하게 찍었는지 가슴이 거의 반이나 드러나 보였다. 굉장히 야하고 관능적인 느낌.
"누가,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아!"
사진을 뺏어간 지환은 분노에 찬 손길로 갈기갈기 찢었다. 수연은 벌떡 일어나 흥분한 지환의 앞에 서서는 따졌다.
분노한 지환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수연뿐이었다.
"근데 이게 어떻게 오빠 손에 있는 거야?"
"할말이 그것밖에 없어?"
지환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수연은 화가 난 눈으로 마주보다가 거만한 투로 대들었다.
"뭐가 어떻다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바라는 거야? 내 입으로 확인이라도 해주기를 바래? 합성한 거 아냐. 내 사진 맞아. 이거면 됐어?"
지환이 확 무서워진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수연은 방어하듯 팔짱을 끼고선 슬쩍 한 걸음 물러서며 변명했다.
"거기에서 일했어. 하지만 하루뿐이었어."
"왜?"
"왜?"
수연은 당황해 되풀이해 말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렸다.
"뭐, 그냥……, 심심해서. 오빠도 알잖아, 나 심심하면 못 참는 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읍!"
거친 입술이 덮쳐왔다. 충격에 수연의 가는 몸이 휘청했다. 강한 팔이 잘록한 허리를 확 휘어잡고서 빈틈없이 끌어당겼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긴 수연은 숨이 막혀 헐떡거렸다. 압박당한 갈비뼈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질식할 것 같은 키스에 폐혈관이 터질지도 몰랐다.
"으윽…… 시, 싫…… 어. 읏!"
수연은 두 손을 올려 딱딱한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무자비한 손에 포획당해 뒤로 묶여버렸다. 입술이 난폭하게 빨렸다.
입술을 빠는 젖은 소리가 굉장히 음란하게 들렸다. 그대로 있다간 또다시 휘말려버릴 것 같았다.
공포에 휩싸인 수연은 간신히 머리를 돌려 입술을 뺐다.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된 수연은 가슴으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렸다.
"그, 그만해. 헉, 헉! 소리 지를 거……."
"마음대로 해."
수연은 다시 키스 당했다. 짙은 커피 향을 풍기며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혀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유린당했다.
수연은 피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지환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
"읏!"
지환은 잠깐 움찔하며 경직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더 깊이 격렬한 키스를 해왔다. 수연은 타액에서 찝찔한 피 맛을 느꼈다.
피가 나도록 깨물었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파고들어오는 지환의 갈망에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지환을 거부하는 건 강을 거슬러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아……."
수연은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지환의 혀에 자신의 혀를 내주고 말았다. 혀가 닿는 순간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신의 몸은 지환이 만지면 호응할 수밖에 없도록 장치된 기계가 돼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몸 어디에 그런 센서가 있는 모양이다.
지환의 눈, 지환의 지문, 지환의 체취만 인식하고 반응하는…….
"으음……."
수연은 지환이 더 깊이 키스할 수 있도록 머리를 젖혔다. 혀가 뽑힐 듯 단단히 빨아올려져 정신이 아릿아릿했다.
몸을 휘감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몸이 스르르 녹아 흐르는 것 같았다. 수연은 압박해 오는 지환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소파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지환의 손에 묶여 있었던 두 손이 풀려났다.
하지만 뒤이어 덮쳐오는 지환의 몸에 깔려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지환의 손이 흥분한 젖가슴에 닿았다.
"그, 그만해. 여긴 회사야."
수연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환의 손목을 꼭 움켜잡았다. 거칠게 뛰는 지환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알고 있어."
지환의 뜨거운 입김이 수연의 턱을 간질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지환의 손은 수연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얇은 셔츠를 밀고 올라온 풍만한 가슴을 붙잡고는 가만히 주물렀다.
강하게 움켜쥘 때마다 수연의 눈에는 뜨거운 열기가 불꽃처럼 파닥파닥 튀었다.
"아…… 오, 오빠…… 하아, 그만……."
수연의 섹시한 목소리에 지환의 눈에도 욕정이 번졌다. 두 눈동자가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수연은 지환의 손에 의해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빠르게 떨어져나간 지환 때문에 수연은 또 방치된 듯한 이상한 기분에 당황스러웠다. 춥고 허전하고 기운이 없었다.
인상을 쓰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지환이 설명했다.
"신문사에선 개인 프라이버시니까 사진은 낼 수 없었지만 인사과는 달라. 너 때문에 부서장회의 소집됐어. 오늘 오후 4시에 결정 날 거다."
지환은 말짱했다.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지 않다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가할 정도였다.
하다못해 화가 났었다는 기색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질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동요했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수연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으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 애쓰며 일부러 더 냉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이,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퇴근 후에 내가 뭘 하든 회사가 무슨 상관이야?"
"이미지 문제다."
"웃겨. 내가 회사 이미지에 먹칠이라도 했단 말이야? 아, 다 귀찮어. 자르라고 해. 상관없어."
"잘됐군. 나도 네가 이 회사 다니는 거 싫었으니까."
"피차일반이네. 나도 오빠 보기 싫었거든."
수연은 매몰차게 말하고는 홱 등을 돌렸다. 문 손잡이를 잡고 당기려는데 뒤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주임 조심하라고 해."
수연은 몸을 약간 돌려 지환을 보았다. 이미 책상에 앉은 지환은 다시 냉철한 판단력으로 소문이 난 리서치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휘문 씨?"
"영업부 차 차장 라인에 붙은 모양인데, 요즘 그 라인에 바람꾼이 붙었다는 정보가 있어."
"바람꾼? 루머 퍼트리는 사람들?"
"그래. 엉뚱한 정보 갖고 투자 유치하는 사람들이니까 조심하라고 해."
수연은 살짝 끄덕하고 부장실을 나왔다.
오늘 기분 좋았던 건 그 일 때문이었나 보네. 근사하게 쏜다고 한 걸 보니까 주식 산 게 잘된 모양이구나.
주식 연구원이 그깟 바람꾼에게 휘둘릴 리가 없지.
사랑니 때문에 점심을 굶었다. 이젠 욱신욱신 아린 걸 넘어서 두통이 올 정도였다. 사실 두통의 이유는 사랑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히, 그것도 오전 7시 30분에, 더군다나 회사 사무실에서, 지환의 키스에 응해 버린 것에 대해 자신을 해명하고 자책하는 데
지쳐 드디어는 두통까지 생긴 거였다.
"언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제 치과에 가서 사랑니를 뽑느냐 아픔을 견디며 쫄쫄 굶느냐의 기로였다.
"응?"
"언니가 잘린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아, 그거?"
수연은 싸매고 있던 머리를 들어 하루를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하루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누가 그래?"
"인력관리부 최 과장님이요."
수연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4시 안 됐는데 벌써 결정이 난 건가.
"아침에 신문에 난 거 때문이라면서요? 당장 가서 말해야겠어요."
"아, 잠깐만 하루 씨!"
수연은 휙 돌아나가는 하루를 붙잡았다. 하루는 울려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리 와봐."
수연은 격앙되어 있는 하루를 붙들고 탈의실로 갔다. 그러나 막상 하루를 앉혀놓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자신만 조용히 나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왜 말 안 했어요?"
다행히 하루가 먼저 물어와 할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그게, 사진이 찍혔더라구.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얼굴이 찍혔으니까 하루 씨와는 상관없잖아.
또, 어차피 난 직장 생활이 잘 맞지도 않고, 이쯤해서 관둘까 하던 참이었어. 하루 씨도 알다시피 별로 궁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해서 둘 다 잘릴 필요 없잖아?"
"그럴 수 없어요."
"뭐?"
"어쨌든 나 때문이잖아요. 내가 언니한테 부탁한 거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언닌 안 잘릴지도 몰라요."
"아, 아니,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난 잘려도 상관없다니까. 난, 잘리고 싶어.
아빠가 집어넣어 주신 회사여서 어쩔 수 없이 다닌 거야. 양심상 1년은 넘겨야 할 것 같아서 다닌 거지 좋아서 다닌 게 아냐.
이쯤이면 오래 다녔는걸 뭐."
"그건 언니 문제고 이건 내 문제예요. 다니기 싫으면 언니가 따로 사표를 내든가 해요.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이런 걸로 양심에 가책 받고 싶지 않아요."
"양심에 가책 받을 거 없어. 내가 자초한 일이고 또……."
"정말 언닌 못 말리게 낙천적이네요."
"맞아. 난 우울하면 몸이 막 아프더라."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언니 대신 내가 잘려도 아무렇지 않겠어요?"
"그, 그건 아니지만……."
조그만 게 고집이 셌다. 울려고 하면서 의지는 강했고 이기적일 것 같은데 의외로 책임감까지 있었다.
과로해서까지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수연은 하는 수 없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안 잘리도록 해볼게."
"어떻게요?"
"어떻게 해서든지 안 잘리도록 해볼 테니까…… 아!"
"왜 그래요?"
수연은 손가락으로 뺨을 감싸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욱신거렸다.
"사랑니 아직 안 뽑았어요? 언니도 참 어지간하네. 치과에 가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오늘 갈 거야."
"제발 좀 가요. 박 주임님이랑 같이 가요. 옆에 있으면 덜 무서울지도 모르니까."
"아, 그래야겠어. 근데 지금 몇 시니?"
"3시 42분요."
"벌써? 에이 씨."
"왜요?"
"아무것도 아냐. 하루 씬 그냥 얌전히 일하고 있어. 해결하고 올 테니까."
수연은 아픈 뺨을 감싸며 탈의실을 나왔다. 그리곤 적지로 향하는 병사처럼 비장한 눈으로 지환의 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두려움과 흥분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이번에는 절대 휘말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결심하고 맹세했다.
"안에 계시지?"
"네."
비서 앞을 통과해 지환의 방문을 홱 열었다.
"언니, 잠깐만……."
"괜찮아."
수연은 놀란 비서를 무시하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뒤로 문을 닫는데 손끝이 달달 떨렸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방문인데 긴장은 오전보다 더했다. 젠장!
수연은 심통이 나 미치겠다는 얼굴로 지환의 책상 앞에 섰다. 컴퓨터를 보고 있던 지환이 등을 의자에 기대며 수연을 보았다.
지환과 눈을 마주친 순간, 분하게도 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째서 저 얼음보다 차디찬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호흡이
가빠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연은 긴장을 늦추려고 헛기침을 했다.
수연은 지환이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대고 양손을 깍지 낄 동안 계속 할 말을 떠올렸다.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해야지. 침착하고 조리 있게…….
"무슨 일이야?"
"나 안 잘리게 해줘."
말했다.
"뭐?"
"들었잖아. 오빠가 나 안 잘리게 해달라구."
수연은 좀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자 지환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흰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 지환의 모습은 오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고 있는데다가 수염이 돋아 턱 밑이 살짝 파르스름해서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이보그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보는 눈빛은 여전히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어서 수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라니? 그걸 꼭 말해야 해? 그냥 그렇게 해주면 안 돼?"
이건 조리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 거다.
"훗."
"뭐야, 그 웃음은?"
"넌 부탁할 때도 언제나 당당했지.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 당당하고 도도하고 거침없고……."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부탁을 하려면 좀더 정중하게 해봐. 애교를 좀 떨든가."
"뭐!"
수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급변했다. 이제는 정말 침착도 잃고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포기해 버렸다.
"내가 부탁하는데 이런 것도 하나 못해 줘? 나한테 잘못한 게 산더미 같이 많으면서……. 해줘, 부탁할게."
수연은 화를 내려다가 꼬리를 내리고 순하게 말했다.
"이거 지금 중요한 일 돼버렸으니까, 도와줘."
"부탁 들어주면 뭐해 줄 건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던 수연은 시선을 들어 지환을 흘겨보았다.
"꼭 그렇게 토를 달아야 돼?"
"여행 가자."
"장난하지 말구."
"1박 2일로."
"진심이야?"
"우린 긴 얘기가 필요해."
"나, 난 할 얘기 없을 거 같은데……."
"네가 원하지 않으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게."
수연은 의심스런 눈으로 지환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그거지? 약속한다. 안 건드려. 도장 찍을까?"
지환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평소 냉소적인 모습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 태도에 웃음이 나려 했다.
수연은 입안의 속살을 잘근 깨물다 새침하게 굴었다.
"도장은 무슨, 유치하게."
"회의 들어가야 돼. 잘리는 건 면해도 다른 징계 조치는 있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지환은 일어서 양복저고리를 입고선 수첩을 챙겨 들고 다가왔다.
"토요일 아침에 전화할게."
말하고 돌아서 나가는 지환을 보다가 수연은 점점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서 지환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는 망연자실한 채로 남았다.
아, 내가 도대체 뭘 약속한 거야. 돌았어, 돌았어. 또 휘말려 버렸잖아. 어쩌자고 자꾸만 홀리냔 말야. 내가 정말 미쳐!
수연은 벽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자학했다. 쿵쿵 벽 치는 소리에 비서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언니, 왜 그래요?"
"아, 아니, 그냥…… 사랑니가 아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