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5)

 야다

 "여기서 뭐해?"

 "아, 안녕?"

 "왜 안 타고 있어? 누구 기다려?"

 "아, 아니."

수연은 휘문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보고서야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수연은 혼자만의 공간에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발을 갈아 신듯 남자친구를 구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남겨진 것을 견딜 수 없게 된 건 12년 전부터였다. 

지환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집 2층의 공간에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내려앉는 환상에 휩싸였다. 공포에 목이 졸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수연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와 지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참을 울었다. 

집의 2층을 극복하게 된 건 곳곳에 묻어 있는 좋았던 추억을 후광처럼 짊어지게 되고서였다. 

그래서 이제는 2층의 계단을 오르는 그 순간이면 지환을 추억하며 느끼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은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잠 잘 못 잤어? 눈이 좀 충혈된 것 같은데?"

 "그러는 자긴. 얼굴이 뭐 그러냐? 윽! 술 냄새. 아직도 진동을 하네."

 "완전 절었었나봐. 필름도 끊겼어."

 "아, 나도 속 쓰려 죽겠어. 이런 땐 뜨끈뜨끈한 복지리 한 그릇 먹으면 확 풀리는데."

 "캬, 뭘 좀 아네. 그럼 우리 점심시간에 복지리 먹으러 갈까?"

 "응. 경비 아저씨가 요 뒤에 있는 허름한 집 있잖아, 그 집이 제일 잘한대."

 "그런 건 또 언제 알아뒀어? 참 신기하단 말야. 경비 아저씨부터 그룹 회장까지 안 친한 사람이 없네.

 어떻게 하면 사람이 그렇게 될 수가 있냐?"

 "나 회장님이랑은 별로 안 친한데?"

 "어려워하지도 않잖아."

 "그 머리 쉰 할아버지가 뭐가 어려워."

 "잘 보여야 되니까 어렵지. 찍히면 모가지잖아."

 "쯔쯔, 그러니까 나처럼 평소에 잘해야지. 땡땡이 안 치고, 일 열심히 하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잘하니까 난 잘릴 걱정 안 하잖아."

 "졌다, 졌어."

 "히힛."

역시 휘문과는 죽이 잘 맞았다. 뒤끝 없이 시원시원한 성격도 비슷했고 놀기 좋아하고 심각한 거 싫어하는 것도 비슷했다. 

둘 다 막내이고 혈액형도 같은데다 몬순기후의 미남 미녀형으로 외향도 비슷한 분위기.

 그러니까 휘문과 있으면 부담 없고 즐겁고 편했다. 둘 다 다른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을 받는 것에도 별 부끄러움이 없었고 

오히려 화제의 중심에 있는 걸 즐기는 쪽이었다.

 "니들이 무슨 중역이냐! 지금이 몇 시야!"

확실히 지각인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소리를 지를 것까지는 없지 않나.

 수연은 심드렁한 얼굴로 구두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과장님, 회식 있은 다음날은 좀 봐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다 아는 처지에 너무하시는 거……."

 "이 자식이! 너만 회식했냐! 다른 사람들은 회식 안 하고 일했어?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답이야! 여기가 학굔 줄 알아!

 이제 입사한 지 몇 달도 안 된 놈이 어디서 말대꾸야, 말대꾸가!"

휘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책상이라도 엎을 듯이 눈에 힘이 들어갔다. 

놔뒀다간 정말 무슨 일이라도 치를 것 같았다.

 "과장님."

 "왜, 너도 할말 있어?"

 "어젯밤에 그거 못하셨어요?"

 "뭐!"

"아무래도 욕구 불만인 같아 보이는데요. 제가 기억하기론 중간에 일찍 나가신 것 같은데 해결 안 하고 뭐하셨어요?"

 "야, 오수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된 김 과장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찰나 지환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환은 서 있는 김 과장과 그 앞에 벌 서는 학생처럼 선 수연과 휘문을 힐끗 보고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수연은 지환이 보는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한 게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방치되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오수연, 너 말조심해. 여긴 직장이고 난 네 상사야."

 "부하 직원도 인격체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야단맞으면 기분 좋겠어요?"

 "야, 상사가 부하 직원 잘못한 거 갖고 야단도 못 치냐? 사무실에서 야단 안 치면 둘이 화장실로 불러내리?

 오수연, 넌 어째 신입사원이랑 똑같이 엉기냐. 도대체 기본이 안 돼 있잖아, 기본이!"

 "기본이 안 돼 있다뇨! 그거 진짜 인격 모독 아닙니까, 과장님! 수연 씨가 뭐 틀린 말했습니까!"

휘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 눈이 뒤집혔는지 주먹질이라도 할 태세였다.

 "이 자식이 어디서 소리를 질러! 눈 안 깔아!"

 "상사라고 상사다워야 대우를 하지! 여직원들 성희롱이나 하는 주제에!"

 "뭐! 이 새끼가!"

 "이 새끼라니! 상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붙어! 씨팔! 이까짓 거 다 때려치우면 될 거 아냐!"

 "박 주임! 미쳤어! 왜 이래!"

결국 다혈질의 기질이 폭발해 난동까지 피운 휘문은 윤 대리에 의해 끌려 나갔다. 

사무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고 김 과장은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다 넥타이를 풀고 털썩 앉았다.

 "욕구 불만은 내가 아니고 저 자식이잖아. 줄 거 안 줬어? 왜 저래? 미친 새끼."

 "줄 거라뇨?"

수연은 묻다가 깨닫고 비난의 눈초리로 과장을 째려보았다.

 "하여간 과장님 입 걸쭉한 건 하느님도 못 고칠 거예요."

 "오수연 안 성실한 건 어떻고. 오늘따라 왜 말대꾸하면서 엉겨. 둘이 같이 붙어 다니다가 저 자식도 물든 거 아냐? 시건방진 자식."

 "젊은 혈기 감당 못하실 거 같은데 웬만하면 그냥 좀 넘어가 주시죠."

 "으이구, 이걸 그냥! 확 잘라버린다?"

 "낙하산 자르면 추락이에요, 과장님."

 "커피나 줘."

 "침 뱉어 드릴게요."

1년여 동안의 직장 생활에서 얻은 건 사람이라고 할까. 뻔뻔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은 둘째이고 사람들과 이렇게 부대끼며 지내는 게 좋았다. 

김 과장 하나 구슬리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는데 휘문이 말려드는 바람에 괜히 이상하게 돼버렸다. 

그렇게까지 흥분을 하다니 역시 그는 너무 순진하다. 그런 점이 좋긴 하지만…….

 "천생연분인지 끓는 기름에 불 붓는 건지 모르겠네."

탕비실로 뒤따라 들어온 하루가 쯧쯧 혀를 차며 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춤추고 노래 부를 때는 무슨 듀엣 가수처럼 환상의 커플 같은데 위기가 닥치면 상호 보완이 안 되잖아요.

 언니도 한 성질 하는데 박 주임님까지 완전 휘발유 성질인 것 같으니까 말이에요.

 한쪽이 싸우면 다른 쪽이 좀 말려주고, 한쪽이 화르르 일면 다른 쪽이 찬물을 확 끼얹어줘야 일이 되는 게 아니겠어요?

 둘 다 양철 냄비 같이 팔팔 끓었다가 식었다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둘이 붙으면 엄청 볼만은 하겠어요."

 "붙게 되면 연락할게. 구경 와."

수연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따랐다. 하루가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폭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피곤해서 그렇죠 뭐."

 "그 일 아직 안 끝났어? 그러다 사람 잡겠다."

 "이번 주만 하면 끝이에요. 근데 언니 얼굴이 왜 그래요? 부었네?"

 "어디?"

 "오른쪽 뺨이 부었어요. 사랑니 아직 안 뺐어요?"

 "안 빼고 약으로 치료하는 방법 없을까?"

 "되게 아플 텐데 참 어지간하네요. 병원 가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언닌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렇게 보여?"

 "일 실수해도 뭐 그냥 그런가 보다. 과장님한테 야단맞아도 될 대로 돼라.

 식당에서 명품 구두 잃어버리고도 별로 아까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박 주임님 그렇게 화내고 끌려 나갔는데도 별 걱정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악착같이 뭐 하는 것도 없고 맺히는 것도 없고, 머리 싸매고 할 고민도 없고 세상에 별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잖아요?"

 "악착 떨며 매달려봤자 남는 게 그다지 없잖아. 잃어버리면 허망하고 속상하기만 한데 뭐 하러 집착해. 그런 거 난 재미없더라.

 하루 씬 안 그래?"

하루는 손바닥으로 턱을 받히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살짝 찡그려 보다가 결론을 내린 듯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과거에 엄청 가슴 쓰린 일 있었구나 했을 거예요.

 맞아, 인생무상, 공수래공수거지 했을 텐데 언니가 말하니까 우리 할머니 말씀처럼 요강에 똥 싸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네요.

 호강에 받치면 그런 소리가 나온다잖아요."

 "훗, 마음대로 생각해. 과장님 커피 갖다드리고 이 아저씨나 찾아봐야겠다. 어디서 담배나 피우고 있겠지 뭐."

탕비실을 나오는 수연의 얼굴에 띄워진 미소는 가짜였다. 

수연의 얼굴에 진짜 미소가 피어오른 건 복도 창으로 회사 앞 정원의 벚꽃을 보았을 때였다.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연분홍 꽃잎의 수줍은 미소를 보았을 때 수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봄이구나."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벚꽃이 피지 않았더라면 마음 편히 이 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라고.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을…….

씁쓸함을 지우고 사무실로 들어간 수연은 누군가의 책상에 있는 장미 꽃잎 하나를 톡 떼어 커피 잔 속에 넣었다. 

김 과장의 책상에 그 커피 잔을 놓으며 삐죽거렸다.

 "후후 불어 천천히 드세요. 체하지 마시고요."

 "병 주고 약 주냐?"

수연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 돌아왔다. 자리에 앉기 전 꼭꼭 닫힌 지환의 방문을 살짝 보았다. 

무겁게 내린 블라인드가 마치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답답했다.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지환이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지환이 할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은 보란 듯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신경은 그렇게 둔해질 수가 없었다. 

머리칼이 더듬이처럼 지환의 방을 향해 곤두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휘문은 하루를 보는 게 편치가 않았다. 어제 혹시 무슨 민폐라도 끼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무슨 일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 했다. 하지만 분명 와이셔츠엔 토사물의 흔적이 있고 또 그걸 빤 흔적까지 있었다. 

집에선 어머니가 웬 처녀가 회사 동료라면서 데리고 왔더라고 하고, 양복 깃에는 분가루가 살짝 묻어 있었다.

 모두 취해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윤 대리가

 "하루 씨가 좀 데려다줘. 같은 방향이잖아."

 "집도 모르는데 저 혼자 어떻게 해요?"

 "비상연락망 주소 있잖아. 택시 기사한테 보여주고 데려다달라고 해. 난 여직원들 데려다 줘야 되잖아."

라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어머니가 말하는 웬 처녀가 하루라면 토했던 것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얘기할 법도 한데 하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더 켕기는 것이다. 

자꾸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되는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분명 있었다.

 생각의 실마리를 잡아당기려고 골몰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네, 투자분석팀 박휘문입니다."

 "뭐해? 퇴근 안 해?"

 "아, 가야지."

수연이었다. 지각한 일로 김 과장과 껄끄러운 상황에 있는 자신과는 달리 수연은 어느새 풀었는지 김 과장에게 샐샐거렸다. 

아무튼 태어나 이렇게 화통한 여자는 처음 봤다. 삐치는 일도 없고 꽁해 있는 경우도 절대 없었다. 

다만 때때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수연의 사랑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50퍼센트 정도는 알고 있지만, 80퍼센트 정도는 알 것도 같은데, 나머지 20퍼센트는 도무지 모르겠다.

 "삼청동 가서 칼국수 먹을까?"

 "김 과장님이랑 가는 건 어때?"

 "뭐?"

 "회사 뒤쪽 왕갈비 집 예약해 놨어. 둘이 가서 풀어. 과장님한테는 이미 오케이 받아놨으니까 먼저 가서 기다려. 잘해. 알았지?"

 "어…… 너, 넌?"

 "난 일이 좀 있어."

휘문은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살짝 웃으며 윙크를 보냈다.

 "무슨 일인데? 약속 있어?"

 "글쎄, 비밀."

휘문은 저절로 시선이 부장의 방으로 향했다. 

'먼저 퇴근들 하십시오.' 하고 들어간 뒤로 문은 꼭 닫혀 있었다. 

비서가 퇴근한 뒤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석지환 이사는 이미 지독한 일벌레로 사내 소문이 자자했다.

 휘문은 의심이 담긴 눈을 숨기고 책상을 정리하는 척하며 짐짓 무서운 투로 협박했다.

"남자 만나는 거면 죽어."

 "어머, 신경 쓰여?"

 "당연하지. 내 여자가 나한테 비밀을 만든다는데 신경 안 쓰여? 이실직고해 봐. 누구야?"

 "미안하지만 정말 비밀이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근데 휘문 씨가 질투하니까 되게 재밌네. 기분 좋은걸."

 "질투는 무슨. 내가 그런 일로 질투할 것 같아? 이래봬도 나 선수였어."

 "선수가 선수한테 걸려들면 한순간에 주전자로 전락하는 거 몰라?"

 "그래, 네가 재미있으면 질투로 하자. 그런데 너, 나 버리면 천벌 받는다.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알지?"

 "……."

휘문은 챙기던 가방을 놓고 앞을 보았다. 굳은 얼굴로 마주보고 있는 수연의 표정이 어쩐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속마음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그 순간 휘문은 멋진 남자로 보이는 건 그만 다 때려치우고 속 시원하도록 추궁하고 싶었다. 

따지고 싶은 걸 참고 있었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라이벌로 두고 싶지 않은 잘난 녀석이 어떠한 모습으로든 수연의 곁에 존재한다는 것, 

그걸 입에 올리는 그 순간 이 불안은 현실로 떠올라 하늘이 노래질 것이다. 

초조해지고 화가 나 쌓아놓은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의심만 쌓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한 번 싹튼 의심은 자꾸만 쑥쑥 자라나 은근히 자꾸만 떠보게만 되었다.

 휘문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찔러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오수연 씨? 천벌이 그렇게 무서우면 바람 안 피우면 되잖아."

 "난 안 버려. 난 절대 안 버려."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그런 말에 안심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수연의 표정이 너무 비장한 것은 마음에 걸렸다. 흔들릴 것이 두려워 더 강하게 다짐하는 것같이 보였다. 

또 휘문은 묻고 싶었다.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리며 쑤군덕거리는 그 일이 도대체 뭐냐고,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석지환이랑은 정말 무슨 관계냐고. 그런데도 멋있고 싶어서 남자다운 척했다.

 "그래. 믿는다."

사실은 멋있는 남자이고 싶은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과거가 가진 추억으로 이미 한 수 밀린다. 이사와 말단 사원이 잽이나 될까. 

그의 몸을 휘두르고 있는 명품들, 회사에서 단연 인정받고 있는 그의 능력.

 그런 생각들로 휘문은 이미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연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과장님 마음 안 상하게 잘해. 정보 좀 줄까? 과장님, 단란주점 가서 아가씨 허벅지 붙들고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나머진 자기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란 건 무슨 소리야? 가란 말이야, 가면 죽는단 말이야?"

 "그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라구. 끊어."

쳇, 가란 소리보다 더 무섭네. 하지만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면 좋아는 하는 거다. 아직은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하긴 예쁘고 섹시하고 귀여운 여자를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거기다가 수연인 성격까지 시원시원해서 여러모로 나와 잘 맞는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재미있고 부담이 없다. 근데 뭐 하나가 빠진 것 같다. 그게 뭘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말하고 나오는데 뒷덜미가 따끔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하루가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후닥닥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의외로 고집 센 하루 때문에 수연은 하루의 아르바이트 대타로 나섰다. 

하루 빠트린다고 설마 월급을 안 주랴만 하루는 기어코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었고 피곤해서 목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말이다. 

남 도우는 데는 별 의식도 없고 소질도 없는 수연이지만 하루의 책임감에는 감동해 버렸다.

 그래서 말해 버렸다.

 "내가 하루 뛰어줄게."

 재즈바 <야다>. 

'야다YADA는 히브리어로 섹스를 의미합니다'라고 적힌 질척거리는 느낌의 간판 밑을 지나 

들어간 내부는 이름처럼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습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해서 마치 남국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바닥과 벽, 천장은 모두 검정 일색이었고 몇 개 되지 않는 조명은 오렌지 빛, 가구는 검정 철제와 흰 쿠션으로 조화로웠다.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분위기에 어딘가에서 반라의 무희가 흐느적거리며 나와 섹시한 춤을 춰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장은 파리지엔의 냄새를 풍기는 중년의 남자였다. 

머리칼과 텁수룩한 수염은 켜켜이 회색이고 검정진에 노티카의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차림은 세련되면서도 예술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흠……."

그림을 고르는 화랑 쪽 사람처럼 턱에 손을 대고 한참 수연을 본 사장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그 진달래가 이제 빛을 좀 발하겠는걸."

하더니 종업원 하나를 불렀다. 불려온 여자는 모델처럼 늘씬한 몸에 지방시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 같은 심플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정색 실크 드레스가 여자의 굴곡 있는 몸을 부드럽게 타고 흘렀다. 

여자가 걸을 때마다 치마의 트임 사이로 긴 다리가 훤히 드러나서 무척이나 섹시하게 보였다.

사장이 말한 진달래는 여자가 입은 것과 같은 디자인의 이브닝드레스를 말한 거였다. 다만 색깔이 진달래색.

 "하루가 이걸 입고 일했어요?"

 "아뇨. 이런 걸 소화할 만한 사람이 잘 있겠어요? 하루가 입은 건 저기 제비꽃이에요."

여자가 탈의실에 걸린 또 하나의 청보라빛 이브닝드레스를 가리켰다. 

제복 같은 걸 입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하루가 입었다면 못 입을 것도 없지.

 투덜거리며 드레스를 입긴 했지만 거울을 보고서 수연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보기에도 드레스가 훌륭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얇은 실크가 몸을 휘감는 느낌에 자신이 매우 육감적인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실버 샌들의 높은 굽으로 인해 몸매가 훨씬 돋보이고 다리도 길어보였다. 

브래지어 대신 착용한 스펀지 때문에 가슴이 너무 커 보이는 게 걸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흡족했다.

머리를 묶어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허벅지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대담해져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아가씬 서빙하지 말고 바 지켜."

하루는 분명 서빙이라고 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처분인가? 내가 못미덥다는 건가?

 "저 서빙도 잘하는데요. 예전에 카페도 운영했었고……."

 "칵테일 만들 줄 알아?"

 "기본적인 건 대충……."

 "그럼 바에 우아하게 앉아 있어 봐. 그림 되나 보자."

그래서 바에 앉게 되었고 30분 후에는 처음으로 손님도 맞았다. 다행히 이곳의 단골손님이라 처음인 수연을 이끌어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2시간쯤 지나자 바에는 손님이 가득했고 맹렬히 일하는 환풍기에도 불구하고 오렌지 빛 담배 연기가 둥둥 떠다녔다.

검정 일색의 바에 대부분의 여종원들이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화려한 진달래 드레스를 입은 수연이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선지 수연의 앞으로 끊임없이 손님이 몰려들었다. 

감탄에 유혹을 띤 남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수연이었지만 피부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번들거리는 눈빛에는 

불쾌감이 일었다.

 "아가씬 몇 살이야?"

 "그런 건 실례잖아요?"

 "어디 살아?"

 "대답하기 곤란한 것만 물어보시네요."

아무리 점잖은 손님만 출입하는 고급스런 장소라고 하더라도 일단 술과 여자가 끼면 남자들은 돌변하기 마련이다. 

카페를 경영할 때도 종종 험악한 일이 생기곤 했었다. 이성을 상실한 손님들과 종업원들이 다투면 종업원들만 나무랐었는데, 

그게 참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을 것 같았다.

 10분 전부터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연의 가슴을 힐끔거리는 중년의 남자가 기름 바른 번지르르한 머리를 내밀며 치근덕거렸다.

 "남자랑 자봤어?"

 "네."

 "그래, 그래. 그렇게 말해야 사내들이 동하지. 아가씨 맘에 쏙 드네. 내숭 떤답시고 숫처녀니 뭐니 하는데 지랄 떨지 말라고 해. 

이런 데 나오면 다 뻔하지, 지가 숫처녀는 무슨 숫처녀야. 요즘엔 초등학생도 돈만 주면 따먹을 수 있다는데."

생각 같아선 번들거리는 머리 위로 얼음통을 확 비워버리고 싶은데 어디까지나 하루의 대타라는 것 때문에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브래지어 안 했지?"

 "했어요."

 "에이, 고 어깨에 낚싯줄 같은 거 하나 달랑 있는데 뭘. 안 했잖아."

 "끈 없는 브래지어라고 못 들어 보셨어요?"

 "아 참, 그런 게 있었지. 할 일 없는 새끼들. 그런 건 뭐 하러 만드나 몰라. 

여자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밤낮 그 탱탱한 고무줄에 짓눌려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해.

 어릴 때부터 하도 졸라매니까 이 젖가슴이 더 클 애들도 통 안 큰다구.

 여성 해방이니 뭐니 떠들어댈 게 아니라 가슴부터 해방시켜 줘야 된다구. 안 그래?"

 "사장님은 어디 사장님이세요? 제가 맞춰볼까요?"

 "어? 어, 그래 맞춰봐."

수연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고는 짐짓 심각한 척 중년 남자를 훑어보았다.

 "금융계는 아닌 것 같고, 건설도 아니고, 무역 쪽이시죠?"

 "캬, 그 아가씨 족집게네. 어떻게 알았어? 내 이마에 쓰였나?"

자신이 일하는 금융 쪽 사람들은 속은 시궁창이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신사처럼 굴었고, 

아버지가 일하는 건설 쪽 사람들은 입이 걸하고 우선은 접대가 아니고선 이런 곳에 드나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맞힌 거였지만 수연은 뭔가 아는 것처럼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조르던 중년 남자는 전화를 받더니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니, 김 부장! 매너가 이게 뭔가! 바쁜 사람 불러내 기다리게 해놓고 못 나온다고! ……죄송하다면 다야!"

약속한 상대가 못 나오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러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도 모자라 거친 욕설까지 해댔다.

 "이 새끼, 너 몇 살이야! 누가 누구더러 말조심하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인마 너 거기 어디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조용히 술이나 쳐먹어, 새끼야!"

테이블에 앉은 취객이 중년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푸르르 화를 내던 중년 남자는 좋은 분풀이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욕을 하며 맞대응을 했다. 

급기야 멱살잡이가 되고 남자 종업원들이 양쪽에서 붙들어 떼느라 곤욕을 치렀다. 

말릴수록 더 기승을 부리며 난동을 부리던 중년 남자는 억지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곧 뛰어 들어와 손님을 쫓아냈다고 사장을 붙들고 또 시비를 걸었다.

수연은 짜증스럽고 화가 나 뾰족한 하이힐을 벗어 남자의 이마빡을 향해 집어던지고 싶었다. 절대적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 손님이라면 가게의 입장에서도 사절하는 게 바른 물 관리일 것이다.

수연은 카운터로 가 전화기를 들었다. 112를 꾹꾹 누르는데 사장이 남자를 바 쪽으로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자못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사장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종업원에게 칵테일 한 잔을 서브하라고 지시했다.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는 한 사람의 고객에게라도 나쁜 이미지를 갖게 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가만 보고 있으려니 열이 팍 났다.

 "뭐 할 거예요?"

 "맨해튼."

 "내가 할게요."

수연은 칵테일을 준비하는 여종업원에게 믹싱글라스를 건네받았다. 

맨해튼의 주재료로 담긴 위스키를 개수대에 붓고 대신 오이 피클의 국물을 따랐다. 보고 있던 여종원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키득 웃었다. 

수연은 찡긋 윙크를 해보이고 핫소스 서너 방울에 독한 럼을 조금 부었다.

 "스페셜로 만들어 드릴게요."

좋아라하는 중년 남자에게 한껏 웃어 보이며 바 스푼으로 대충 저었다. 

그리고 잔에 '스페셜 맨해튼'을 적당히 붓고 마지막으로 꽂이에 다른 손님이 먹다 남긴 방울토마토를 꽂아 잔에 담갔다. 

방울토마토의 무게에 술이 찰랑찰랑했다.

 "맨해튼이라구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대단히 즐겨 마셨다고 하더라구요. 한번 드셔보세요. 맛이 아주 독특할 거예요."

 "색깔이 아주 좋네. 어디 맛 좀 볼까."

수연은 살짝 긴장해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종원도 곁눈질로 남자가 '스페셜 맨해튼'을 음미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세요?"

 "으음, 글쎄. 톡 쏘는 게 독특하긴 독특하네."

 "그게 아주 고급스러운 칵테일이거든요. 영국의 처칠 수상 아시죠? 그 분 어머니가 파티 때 최초로 만드셨다는 유래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역사도 깊고 기품이 있는 칵테일이에요."

 "이게 이름이 뭐라고?"

 "맨해튼요. 왜 입에 안 맞으세요? 저희 손님들이 최고로 꼽는 칵테일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여종업원이 쿡쿡 웃다가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눈치를 채지 못한 남자는 찡그리면서도 홀짝홀짝 마시더니 좋다고 호평을 했다.

 "그럼, 한 잔 더 만들어 드릴까요?"

 "아, 아니. 일이 있어서. 내 다음에 또 오지."

그리고 남자는 폼을 재며 팁이라며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수연에게 내밀었다. 수연은 매우 기쁜 듯이 크게 웃으며 수표를 받았다. 

멀리서 보고 있던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사양하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수연은 꿋꿋이 챙겨 넣었다.

 나중에 사장은 손님한테 팁 받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괜찮아요. 그 손님은 다시 안 올 거니까 이미지 망치는 일 없을 거예요."

수연은 능글맞게 말하고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 일을 마치고 나갈 때에는 사장으로부터 명함까지 받았다.

 "계속할 생각 있으면 연락해."

 "그럴게요."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40분이었다. 엄청 피곤했다. 계속 서 있었더니 종아리도 퉁퉁 부었다.

 아, 하루는 이런 생활을 한 달씩이나 어떻게 했을까. 얌체 같이 요리조리 제 몫만 챙기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강단이 있다니까.

수연은 화장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누운 채 더듬어 핸드백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여섯 개, 수신된 메시지가 하나.

 "왜 전화 안 받아? 궁금해할 것 같아서 보고하는 거야. 잘 됐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고마워. 

사실 수연 씨한테 묻고 싶은 게 좀 있었는데……. 이걸로 믿기로 했어. 그런 의미에서, 쪽! 잘 자."

상기된 휘문의 음성 메시지뿐이었다. 오늘 지환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 아는 체도 안 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이제는 포기한 걸까? 

항복할 때까지 끈덕지게 괴롭힐 것 같더니…….

 수연은 생각하며 뒤척이다 잠으로 곯아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