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코브라 VS 몽구스
지환의 품에 안겨 차로 옮겨지는 것이 왜 이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지……. 수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걸 인정한다는 건 지환을 다시 믿고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수연은 아직 배신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회복된다고 해도 지환을 다시 받아들일 용기는 없었다. 지환의 빈 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환을 잊고 무시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는 건 힘들었다.
더 무서운 건 오빠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제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두려운 것이다.
오빠를 그리워하는 내 안의 내가, 오빠가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내 안의 내가 석지환이라는 남자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대리운전 기사가 지환의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수연은 지환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한 사람분의 공간을 두고 앉아도 소용이 없었다.
지환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탁 막혔다. 힘주어 경직되어 있지 않으면 그대로 끌려가버릴 것만 같았다.
"예전보다 회복이 빠르구나."
"……자랐으니까."
"아스피린 먹고 핫팩으로 찜질하는 거 알지?"
"알아."
수연은 아직도 그런 걸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지환의 마음이 기쁘면서도 받아들이기는 무서웠다.
또다시 완전히 자신을 내어줄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송두리째 자신을 던져 믿고 따르고 좋아했던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지환은 추방당했다고 말했다. 열아홉에,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다.
어렸을 때 이미 한 번 버림 받은 것도 부족해서 양부모까지 그를 버린 것이다. 생각하면 측은함이 일어 가슴이 아프다 못해 화가 났다.
추방이라니, 그것도 지환에게만 해당되는 일방적인 처벌이라니, 너무 가혹했다.
열아홉에 홀로 이국땅으로 쫓겨난 것이 자신이었다면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왔다. 왈칵 슬픔이 치밀어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아줌마 아직 계시니?"
"응."
"다행이구나. 아줌마한테 건포 마사지 해달라고 해. 예전엔 너, 내가 해주는 거 좋아했는데…… 기억나지?"
"……."
"나 봐."
수연은 오른쪽 문에 바짝 붙어 젖은 눈을 감추려 고집스럽게 창밖만 쳐다보았다.
"수연아."
"……졸려."
"졸아도 좋으니까 얼굴 보여줘."
지환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그랬다.
다른 사람에겐 냉담하거나 철저히 무시하면서 여동생에게는 유치하도록 상냥하고 다정한 오빠였다. 아아, 그립다.
그 오빠가 미치도록 그립다.
"졸면 내 눈 빼가려구? 오늘 내 눈 가진다며."
"안 그럴게."
"노, 농담한 건데 그렇게 대답하니? 그냥 웃어. 이 분위기 어색해서 미치겠으니까 제발 웃어 주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훌쩍거릴 수도 없었다.
수연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더욱 몸을 옹송그렸다. 그리고 창에 이마를 대는데 지환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니?"
"내가 왜 울어."
수연은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무시하려고 더욱 몸을 굳혔다.
"수연아……."
"전부 바보 같아. 왜 말 안 했어? 그렇게 혼자 떠나서 어떻게 살려고……. 안 간다고 말하지.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어. 날 완전히 바보 만들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하게 만들고……. 그, 그래도 용케 살아 돌아왔네.
나 없이도 잘 살았나 보지? 뭐, 나도 잘 지냈으니까 상관없어."
마음은 이렇게 짠하게 울리는데 왜 이렇게 원망하는 말만 나오는지 몰랐다.
사실은 안아주고 싶은데,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해 주고 싶은데……, 그래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심술궂게 굴었다.
침묵이 신경이 쓰여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질식할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지환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유리보단 내 어깨가 더 편해."
"괜찮아."
"그럼 무릎에 눕힐까?"
"뭐?"
당혹스런 말에 자신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려봤다. 울었던 흔적을 지환이 놓칠 리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지환의 손에 잡혀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사람의 공백이 메워져버렸다.
"잘 지냈어. 네가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지냈으니까 울지 마."
수연은 한동안 지환의 얼굴을 파고들 듯이 살펴보았다.
남자다운 선을 그리고 있는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홀쭉한 뺨과 단단한 턱선의 윤곽을 훑었다.
완고하고도 강인한 의지가 엿보이던 얼굴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곳곳에 배여 있는 슬픔과 고독이 보여 마음이 울적했다.
피부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았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굶은 것처럼 보여?"
"빨래는? 청소는? 잠은 잘 잤어?"
"부족한 거 없었어. 너 말고는……."
지환이 손을 뻗어 수연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숙이 바라보는 지환의 눈길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끌어당기는 팔에 이끌려 단단히 안겼다. 한숨을 내쉬며 지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차 안은 엔진의 작은 소음과 떨리는 공기뿐이었다.
집 앞에는 수연의 노란색 폭스바겐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지환이 먼저 내려 차를 가져온 대리운전 기사에게 수고비를 지급하고 열쇠를 받았다.
지켜보던 수연은 차문을 열고 내려섰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차 안에서 지펴진 열기가 잔향처럼 몸 안에 남아 파닥파닥 뛰놀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비틀하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수연은 차문에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아, 시끄러. 다리 좀 저리 치워 봐요."
옆에서 하루의 짜증난 목소리도 들려왔다.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뚝 뛰어넘어 후렴구가 불쑥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쪽쪽 입맞춤하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음, 쪽! 쪽! 오수연,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휘문의 어리광부리는 목소리에 수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굉장히 취한 것 같지만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아 걱정되지는 않았다.
옆에서 하루가 닭살이라며 투덜거리고 있고 말이다.
"야, 오수연! 오수연!"
"왜."
"오수연, 사랑한다아! 사랑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오수연! 수연아!"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언니, 그만 끊어요."
그리고 전화가 툭 끊겼다. 수연은 쿡 웃으며 휴대폰을 핸드백 속에 챙겨 넣었다.
애인이 아니라 마음 좋은 누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썽꾸러기 남동생의 투정을 잘 받아주는 누나가…….
지환은 집을 향해 서 있었다. 원한 맺힌 무덤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서서는 꼼짝하지 않았다.
수연은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며 불안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만 가."
돌아보는 지환의 눈은 너무 어두워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 하나 없이 깜깜한 밤하늘처럼 깊은 어둠을 발산하는 눈이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어둠에 꼭꼭 갇힌 기분이 들었다.
사방 어디에도 빛은 없고 오로지 그 어둠을 발산하는 눈에 의지해야 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지환의 손이 다가왔다. 수연은 움찔 놀라 자신의 목덜미 쪽으로 오는 손을 잡아 제지했다.
"하지 마."
"발진이 시작됐어."
"괜찮아. 한두 개 생기다 말 거야."
손을 잡은 건 실수였다.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한 번 잡은 건 놓치지 않는다는 듯이 지환은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환은 뿌리치려는 수연의 손을 꼭 잡고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수연은 불안한 얼굴로 지환을 따라 걸었다.
"네 방까지 데려다 주고 싶……."
"안 돼!"
깜짝 놀라 지환의 앞을 막았다. 지환이 집으로 들어간다면 어머니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한 번도 아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지환이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것보다 지환이 문전박대 당하는 걸 보는 게 더 싫을 것 같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앞을 막아선 수연에게 닿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성분이 불분명한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얽혔다.
수연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하고 안락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빨려들어 갔다.
깊은 눈으로,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어가 거기에 있는 뜨거운 욕정을 느끼고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환이 성큼 다가오는 바람에 수연은 뒤로 밀려났다. 한걸음, 또 한걸음 밀려나 벽과 그윽한 눈빛 사이에 갇혀버렸다
. 곧게 뻗은 팔이 벽을 짚으며 창살처럼 수연을 가두었다. 키가 큰 수연인데도 지환의 눈은 높이 있어 머리를 뒤로 젖혀야 볼 수 있었다.
"어머니께 말 안 했니?"
"무, 무슨 말?"
"내가 왔다는 말."
"했어. 어, 엄만……, 엄마 입장에선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을 거야. 엄마 기분이 어떠셨을지, 뭘 두려워하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해."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아니. 사실은 화가 나 미치겠어. 엄마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한테도 화가 나고, 오빠도 이해할 수가 없어.
떠날 때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왜 12년 동안이나 가슴 졸이게 만들어?"
"나도 힘겨운 그 처벌, 너한테까지 짐 지우기 싫었다."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어. 12년 만에 돌아와서 다 잊고 받아들이라구? 가슴엔 상처뿐인데, 원망만 남았는데 어떻게 그래."
"남은 게 원망만은 아닐 거다."
수연은 눈앞에 흔들거리고 있는 자동차 키를 매단 열쇠고리를 보았다.
"아……. 이, 이게 뭐."
손을 뻗어 지환의 손에서 열쇠고리를 낚아챘다. 그때 지환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더니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금세 흐트러진 모습이 돼서 하얀 와이셔츠 안으로 손을 넣더니 가죽 줄을 끌어냈다.
"아!"
그 목걸이 끝에 달린 상아 펜던트를 보았다. 그건 12년 전에 자신이 준 열쇠고리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움에 놀람에 휘둥그레 떠진 수연의 눈앞에서 펜던트의 뚜껑이 열렸다.
지환은 익숙한 손길로 펜던트 안에 있는 수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간직하고 있었구나."
수연은 떨리는 손을 뻗어 펜던트를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매끄러운 상아의 감촉을 느끼며 소녀시절의 자신을 감격스럽게 보았다.
"이땐 머리가 짧았어."
좋았던 시절이 물밀 듯이 밀려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육지와 섬을 떼어놓고 있던 바닷물이 모두 빠져나가면 바다에 잠겨 있던 길이 떠올라 육지와 섬은 하나가 된다.
그처럼 수연과 지환을 갈라놓았던 12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빠져나가 한달음에 뛰어가 닿을 수 있는 섬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12년의 시간이 이렇게 쉽게 메워질 수 있다는 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어. 다시 이때로……."
거칠게 닫히는 펜던트가 감상에 젖은 수연을 깨웠다. 빼앗듯 목걸이를 집어넣는 지환의 표정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우리한테는 추억이 있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 있어. 뼈저리게 아픈 고통들도 그 기억을 지울 순 없지."
"그 추억들 때문에 더 아팠어."
"그래서 지워버리고 싶어? 넌 지울 수 있었니?"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야? 추억 속으로 돌아가기라도 하겠단 거야? 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면 해봐! 12년을 되돌릴 수 있으면 해보란 말야!"
"돌아가진 않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거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억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난 싫어. 이대로 살 거야. 날 힘들게 하지 마. 꿈꾸게 하지 마!"
"꿈 아냐. 내가 이뤄줄 테니까……."
"싫어!"
"수연아……."
"다시 떠나.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게 차라리 더 마음 편하겠어. 내 마음 속에 오빠는 이미 죽었어. 너무 아프게 해서 내가 죽여 버렸어."
"죽여?"
"죽였어!"
"그렇다면 그냥 죽은 채로 둬! 12년 동안 방황하다가 외로움에 지쳐 뒈져버렸다고 생각해! 그런 자식 살릴 생각 없어!"
"오, 오빠……."
"똑똑히 봐. 날 봐! 내가 죽은 놈이니? 난 살아있어! 좋아. 추억 같은 거 매립해 버리자. 여자 대 남자로 시작해.
고개 젓지 마. 피하지 마! 넌 이미 날 남자로 보고 있잖아!"
"듣기 싫어! 비켜! 저리 가!"
수연은 흥분해서 주먹으로 지환의 가슴을 퍽 때렸다. 벗어나려고 밀쳤지만 지환의 감옥은 꿈쩍도 않고 수연을 더욱더 옥죄었다.
오히려 지환은 얼굴을 핥을 듯이 가깝게 다가와 색스러운 목소리로 자극했다.
"달아나 봐. 할 수 있으면 해봐."
"비켜! 비키란 말야!"
원수를 대하듯 매섭게 노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지환은 더 바짝 다가와 한 손으로 수연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차라리 날 달래는 게 좋을 거다. 난 예전의 그 좀팽이 같은 비실이의 좀비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지 마! 내 오빤 그런 사람 아니었어!"
"그 자식은 잊어! 난 죽은 몸으론 돌아가지 않아!"
지환이 소리쳤다. 폭발하는 지환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수연이 충격에 떨고 있자 지환이 힘을 풀었다.
스러지듯 수연의 이마에 뺨을 대고서 지친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소리쳐서 미안하다."
"추억은 끔찍하기도 해. 12년 전의 일, 그날 밤, 끔찍해. 아무것도 몰라서, 너무 어려서, 그래서 무모했어. 무책임했어.
뭐가 닥칠지도 모르고, 뒷감당은 조금도 할 수 없으면서……. 내게는 오빠였는데, 진짜 오빠였는데…… 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수연은 떨면서 말했다. 처음으로 자신 속에 있는 후회와 죄책감을 인정하며 털어놓는 거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외면했던 그 끔찍한 고통은 빙의된 혼령처럼 언제나 수연과 함께였다.
"엄마가 오빠를 보낸 건, 어쩌면 잘하신 판단이었는지도 몰라. 안 그랬으면 우린 더 엄청난 죄를 저질렀을……."
"우린 남매가 아니야."
"남매였잖아. 난 오빠를 정말 내 오빠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면서도 난, 난……."
"내가 처음부터 동생이라고 생각 안 했다면 어쩔래? 널 처음부터 여자로 사랑했다면?"
"처, 처음부터 동생이 아니었다구?"
수연은 충격에 파르르 떨었다.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덮쳐오는 장신의 지환이 악마처럼 보였다.
"오, 오빠조차 그러지마."
"누가 또 그래? 어머니가 그랬겠군. 처음부터 아들은 아니었다던?"
"그럼 우리 가족은 뭐가 돼. 우린 껍데기로 살아온 거였어? 엄마 사랑하지 않았어? 우리 가족 행복한 때도 있었잖아."
수연은 충격에 휩싸인 목소리로 말하며 파르르 떨었다. 몸이 점점 차가워져 오한이 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사랑하려고 노력했어. 늘 밀어내기만 하셨지만……. 이제 와 투정부리고 싶지 않다.
껍데기뿐이건 어쨌건 난 가족의 울타리가 필요했으니까."
"적어도 가족이라고는 생각하는 거지?"
"어머니 원망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널 가질 수 있잖아."
"오빤 날 가질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오빠를 가지지 않을 거니까. 석지환이란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니까."
다시는 마음에 담지 않을 것이다. 들어와 마음대로 휘젓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들여놓아서 상처 내도록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순간, 확인하는 지환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득였다. 수연은 그 저돌적인 눈빛에 놀라서 움찔했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몸은 이미 벽으로 막혀 있는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쓰러뜨릴 것 같은 눈에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오, 오지 마. 소리 지를 거야."
"질러. 어머니한테 들리도록 질러 봐."
12년 전과 같았다. 폭우가 치던 그날 밤에도 '어머니 깨실라'한마디에 묶여 옴짝달싹 못했었다.
그건 수연을 불가항력으로 만드는 협박인 동시에 지환에게만 집중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수연은 무른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강압적인 얼굴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빠……."
"아니. 이건 석지환이다."
지환의 얼굴이 내려왔다. 수연은 피하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지환의 입술을 보았다.
건조해 보이는 입술이 살짝 벌어져 유혹하듯 천천히 내려왔다. 홀린 듯 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얼굴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수연의 입가에 지환의 입술이 닿았다. 달아나는 수연의 턱을 움켜쥐고 입술을 빼앗았다.
"싫…… 엇!"
지환의 억센 손이 반항하는 수연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키스하기 좋게 얼굴을 틀고는 깊숙이 키스했다.
도톰한 아랫입술만 잡혀 몇 번이나 빨렸다. 아프고 숨 막히고 괴로웠다. 그러나 한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지잉, 울렸다.
몸이 격랑에 내던져진 것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키스가 격렬해지자 두 사람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뜨거운 지환의 정열에 휘말린 수연은 머릿속이 익을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지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에 단단한 어깨 근육이 만져졌다.
그 강인함과 두툼한 느낌에 사로잡힌 수연은 애무하듯 어루만지며 대담하게 손을 움직였다.
와이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불룩한 가슴 근육을 어루만지다 손끝에 닿는 작은 돌기를 발견했다.
"으음……."
자극 당한 지환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격한 지환의 반응에 놀라 손을 빼려는데 지환의 손이 제지했다.
그대로 지환의 손에 끌려 다시 탄탄한 가슴을 애무했다. 그러자 부드럽던 키스가 거칠어졌다.
수연은 파고들어오는 지환의 무게에 눌려 입술을 크게 벌렸다.
허리가 꺾일 듯 젖혀지고 목젖까지 들어온 지환의 혀에 부드러운 입 안이 거칠게 유린당했다. 얽힌 타액이 수연의 턱을 타고 흘렀다.
"흐읏……."
터질 듯 풍만한 수연의 가슴에 지환의 손이 닿았다. 정신이 몽롱해진 수연은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사타구니를 뜨겁게 태우는 감각에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가슴을 침입한 지환의 손은 사뭇 거칠었다. 수연은 둥근 가슴이 이형으로 이지러질 때마다 쾌감의 탄성을 토해 냈다.
소유를 주장하는 단호한 손길에 가슴이 주물러지고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난폭한 키스를 당해도 욕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옆집 담 너머 보이는 라일락꽃이 문드러지고 흐려져 연보랏빛 구름 같이 보였다. 정신이 아득했다.
"오빠……."
"사랑해."
"오빠……."
"널 가질 거야. 가지고 말겠어."
지환은 입술을 떼고 수연의 귀에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었다. 축축한 혀가 귀에 닿자 수연은 파르르 떨며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흐으……."
"사랑하게 해줘, 수연아."
데일 듯 뜨거워진 피부 위로 달콤한 키스가 퍼부어졌다. 섬세한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지환의 키스가 가슴 언덕에 내리기 시작했다.
촉촉한 혀가 민감한 가슴에 닿자 수연은 신음하며 지환의 머리를 잡았다. 짧고 검은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급하게 브래지어를 밀어올린 지환은 눈앞에 드러난 새하얀 젖가슴에 탐욕적인 시선을 보냈다.
욕정으로 꼿꼿이 솟은 유두가 지환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입 안의 뜨거움과 부드러움, 촉촉함과 성급함이 유두를 감쌌다.
혓바닥의 작은 돌기가 비비며 빠는 느낌에 수연은 거의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흣…… 하아……."
젖을 빠는 아기처럼 매달린 지환의 머리를 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지환의 검은 머리가 너무도 고독해 보여 애처롭고 마음이 아팠다.
색정적이고도 애틋한 느낌에 휩싸인 수연은 집착하며 빨고 있는 지환의 머리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넌 내 거야."
몇 번이나 빨고서도 미련을 못 버린 듯 가슴에는 지환의 손이 떠나질 않았다.
탄력적인 가슴을 주무르며 손가락 끝으로 촉촉해진 유두를 쓰다듬었다.
못 참겠다는 듯이 다시 머리를 숙여 솟아오른 유두를 혀끝으로 핥고는 다시 올라와 입술을 탐했다.
욕망의 수렁에 빠진 수연은 헐떡이며 키스에 응했다.
뜨겁게 키스하는 사이사이 지환이 맹세하듯,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없어. ……난 네 거니까. 네가……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진 거니까. ……죽을 때까지."
지환의 손이 치마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수연은 열정적인 키스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강력한 말에 짓눌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눈도 귀도 지환에게 압수당하고 자신 안에 살아있는 지환만 느꼈다. 자신의 일부처럼…….
허벅지 사이로 지환의 손이 닿았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거였다. 그 순간, 12년 전의 일이 다시 플래시백 되었다.
지환의 손이 팬티에 닿은 순간 수연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오므리며 지환의 손목을 잡았다.
"안 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을 얼마나 후회했었는데…….
차가운 밤바람이 드러난 가슴을 할퀴었다. 수연은 후닥닥 지환을 밀치고 올라간 브래지어를 잡아당겼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을 이러한 지경까지 빠뜨린 지환에게 화가 나서 숨결이 거칠어졌다.
"저,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지환과 자신에게 동시에 하는 말이었다.
"미쳤어!"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손이 덜덜 떨렸다. 단추 하나는 떨어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지환이 바닥에서 진주 단추를 주워 올렸다.
빈틈없이 깔끔하고 정갈한 지환이 다른 사람의 단추를 잡아뗐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친 일이었다.
"이건 아냐. 전부 잘못됐어. 이건 아냐……."
충격과 초조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 지환의 손길만 닿으면 이성은 한여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고
이렇게 불가항력으로 이끌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두렵고 한심할 뿐이었다.
"네가 지독하게 그리웠다."
굵은 저음이 밤바람을 타고 흘렀다. 순간 수연은 휘청했다. 그 말에 담긴 슬픔과 고통을 가슴 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눈이 슬퍼졌다.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수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야속하게 지환을 보았다.
"그래서 싫은 거야.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겠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오빠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아냐.
오빠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믿을 수가 없어?"
지환은 충격을 받은 듯 움찔했다. 주춤 물러서더니 수연을 낯선 사람 보듯 보았다.
"어째서?"
"다신 믿고 싶지 않아. 날 버리고 갔잖아. 그렇게 버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오빠잖아. 12년간이나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잖아.
그렇게 긴 시간이 될 줄도 모르고 기다렸어. 목이 쉴 때까지 오빠 부르면서 울고, 또 울었어. 다신 그렇게 아프고 싶지 않아.
이제 겨우 잊었어. 겨우 잊을 수 있었으니까 제발 나 좀 그만 내버려 둬."
침묵이 흘렀다. 수연은 지환의 검은 두 눈이 더 깊숙이 들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새까맣게 되는 걸 보았다.
지환은 그렇게 격렬한 키스를 하고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환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지환의 곁으로 어둠이 몰려와 두꺼운 장벽을 치고 깊은 고독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보고서 수연은 속으로 허물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의 저 모습에는 도저히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악마다.
"그만 가."
두려워 몸을 돌렸다. 다가가 안기고 싶었다. 실오라기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꽉 안겨 중력까지 흔들릴 정도로 뜨겁고
강한 키스를 받고 싶었다. 정말 그럴까봐 마음을 꼭꼭 닫았다.
"그 자식은 믿어?"
"뭐?"
몸을 돌려 지환을 보았다. 어둠과 구별되지 않는 지환의 눈에 난폭함이 스쳤다.
"박휘문."
"아……."
느닷없이 그의 이름이 나와서 수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그가 바로 공식적인 자신의 애인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고려하고 있지도, 꿈꾸고 있지도 않는 자신을 깨닫고 말았다.
"그 사람에겐 두려움 같은 건 없어."
사실이었다. 휘문에겐 어떤 두려움도 불안도 없었다. 왜일까.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지환이 또 비아냥거렸다.
"그만 놔줘. 방패막이로 쓰기엔 너무 허약한 놈이다."
"무슨 소리야?"
"방패막이가 아니면 내 대타인가? 어쨌든 내 걸 넘보는 놈은 가만 안 둬. 괜한 사람 폐인되게 하지 마.
그렇게 날 상대하기 두려우면 네 마음을 인정하도록 해. 그럼 너한테 맛 간 날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지환은 떠났다. '대타' 그 말은 수연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휘문을 보고서 지환을 떠올린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환과 있으면 휘문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휘문이 싫은 건 아니었다.
휘문과 있으면 복잡한 생각 따위는 말끔히 지워져버리고 편안해지는데, 그런 관계는 지속해선 안 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