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 속에 있는 나
휘문과 수연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공원에는 목련과 개나리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고 모처럼 날씨가 맑아서 놀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전날 밤 수연은 고민이 많아서 잠을 잘 이루질 못한 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결론을 두고 지우지 못해 안달하다가 지쳐버린 거였다.
수연이 눈을 떴을 땐 태양이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로 해놓고선 공원까지 오는 동안 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수연은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 안에는 혼자뿐이었다. 의자가 잠자기 편하도록 뒤로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햇볕이 내리쬐었던 쪽의 창에는 셔츠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다. 휘문의 셔츠였다.
수연이 차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휘문이 다가왔다. 발에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서 손에는 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잘 잤어? 내 차 편하지?"
"응. 고마워. 이 셔츠 휘문 씨가 놔둔 거지?"
"내가 우리 공주님 얼굴 탈까 봐 신경 좀 썼지."
수연은 환하게 웃는 휘문을 따라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휘문의 밝은 표정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고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휘문과 같이 있는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지환의 생각뿐이라, 그것이 또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수연은 반팔 폴로셔츠를 입고 있는 휘문에게 셔츠를 입혀주었다. 속죄하는 기분이 되어서 더욱 상냥하게 굴었다.
"안 추웠어? 그러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몇 바퀴 돌았더니 땀이 다 났어. 저기에 라일락이 벌써 예쁘게 피었더라. 가자. 내가 사진 찍어줄게."
수연은 천성의 명랑함에 단순함으로 무장하고 휘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밝은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드라이브를 했다.
쇼핑을 하고 강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칵테일을 마셨다.
"예전엔 아버지 사업이 잘 안 되셔서 엄마가 여러 가지를 하느라 바쁘셨지. 그래서 엄만 나 태어나고는 죽 집에 계시질 못했어.
엄만 식당을 하시다가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문 닫은 뒤에는 나 업고 포장마차를 하셨어.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야쿠르트 배달을 하셨고, 돌아가실 즈음에는 보험설계사를 하셨고.
그러다 내가 열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열여섯 살 때 지금 어머니가 오셨어. 큰누나는 출가하고 형이랑 둘째누나랑 나 이렇게 남았지."
"어머닌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뇌종양. 너무 늦게 발견이 돼서 병원에 두 달 있다가 수술도 못 받으시고 돌아가셨어."
칵테일 때문인지, 몽롱한 야경 때문인지, 휘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서 감상적이었다.
수연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측은한 기분에 빠져 휘문의 슬픈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이처럼 눈물이 글썽해진 휘문은 멀리 보이는 타워에 눈을 싣고는 낮게 쉰 목소리로 회상했다.
"나한테 제일 미안해하셨어.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주고 공부도 못 봐주고 같이 놀아주지도 못했다고.
그래도 형이랑 누나들은 조금이라도 여유 있을 때 태어나서 돌잔치라도 시끌벅적하게 해줬는데 난 사진만 찍고 말았다고.
그것도 동네 허름한 사진관에서 흑백으로……."
"휘문 씨……."
"새엄마 들어오실 때 형이랑 누나들 반대가 많았지. 엄마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일으켜 놓은 살림을 웬 낯선 여자가 와서
난딱 차지하고 앉는 게 말이 되냔 말이지. 근데 내가 찬성했어. 새엄마가 좋아보이더라구. 난 자기 연민이 많아.
매일 바빠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엄마가 아니라 새엄마처럼 날 귀하게 여겨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필요했어. 그런 엄마를 가져보고 싶었어."
휘문은 좀 울었다. 수연은 그런 휘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휘문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 미안함까지 더해져 슬프고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라도 괜찮다고, 어머니도 이해하실 것이라는 위로를 듣고 싶은 것이다.
사람에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는 것이다. 절대로 회복되지 않는 상처가…….
"괜찮아. 어머니도 휘문 씨가 잘했다고 하실 거야."
"누, 누나들은 아직도 조금 그렇지만…… 그, 그래도 다들 행복했어. 아버지도 좋으셨고, 가끔씩 그리워하시면서 그렇게……."
"어머니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틀림없어. 돌아가신 분들은 이기적이지 않거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기를 바라거든."
수연은 멋쩍어하며 눈물을 훔치는 휘문을 달랬다. 휘문을 도와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잘생긴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주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러는데 마음이 짠하게 울려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엄마 노릇하려고?"
"응."
수연은 손을 모으고 장난스럽게 하늘가를 보며 약속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머님 막내아들은 제가 잘 보살필게요."
"누가 누굴 보살핀다는 거야. 내가 널 보살피는 거지."
"어허, 누나가 보살펴준다는데도."
"풋,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건방진 소리해도 귀엽다."
보는 휘문의 눈길이 따뜻했다. 테이블 위로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보면서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연은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그렇게 손쉽게 지나가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연은 내내 지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휘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휘문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지환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시각에 오빠는 뭘 하고 있을까. 어디서 살며, 밥은 누가 해주고, 빨래는 어떻게 하며, 누구랑 지내고 있는지…….
자각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환은 늘 수연의 생각 밑바닥, 가슴속에 흐르고 있었다.
지환과 부딪치는 것이 두려운데도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휘문에게 느끼는 연민과는 달랐다.
지환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 울릴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밀어내려고 해도 생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거 여기다 붙여줘."
휘문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며 공원에서 충동적으로 찍은 스티커 사진을 붙여달라고 했다. 휘문이 수연의 뺨에 키스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보이는 데 붙이면 내가 불리한데."
"뭐가 불리해. 벌써 소문 다 났는데. 넌 이제 나한테 완전히 찍혀서 아무 데도 못 가."
"뭐? 내가 왜……."
수연은 정색을 하고 반발하려다가 그냥 웃어주었다. 가슴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였다.
휘문의 말투에 지환을 떠올리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것이라고 말하라고 강요하던 지환의 집요하고도 절박한 목소리가…….
수연은 벌주듯 자신의 핸드폰에도 스티커 사진을 붙였다. 수첩에도 붙이고 지갑에도 붙였다.
지갑의 바깥쪽에 사진을 붙이고 있는 수연을 보고 휘문이 말렸다.
"안쪽에 붙여. 가죽에 자국 남잖아."
"무슨 자국?"
"나중에 혹시라도 뗄 일이 있으면……."
"우리가 헤어지면? 그땐 지갑 통째로 버리지 뭐."
"야, 그렇다고 말을 그렇게 모질게 하냐. 넌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어떨 땐 정말 엄청 무서운 여자란 생각이 든다니까."
"내가?"
"그래. 그런 여자들 있지. 귀신 보면 꼭 까무러칠 것 같이 생겼는데 정작 뭐라도 나타나면 귀청 찢어지게 비명 지르면서
마구 패는 여자들 있잖아. 너도 꼭 그럴 것 같아."
"여자에 대해서 참 잘도 아시네. 흥! 잘 가셔, 바람둥이."
수연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차에서 내렸다. 당황한 휘문은 부리나케 뒤따라 내리며 수연을 붙잡았다.
"수연 씨! 화났어?"
"그렇다면 어쩔 건데?"
수연의 눈에 장난기가 어린 것을 본 휘문은 안도하고서 곧 장난을 쳤다.
"그럼 키스를 해주지. 앞니가 쏙 빠지도록."
하고 다가든 휘문은 웃음기가 남은 수연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수연은 강압하지 않으려는 듯 곧 물러서는 휘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 유혹의 동작에 휘문의 가슴은 뜨겁게 고동쳤다.
수연은 피하지 않고 휘문의 부드러운 키스를 받았다. 수연이 차문에 기대며 더욱 깊이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자 휘문은 몹시 흥분했다.
칵테일의 달콤쌉싸름한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머리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깊이 얽혀드는 순간 갑자기 수연이 폭발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꺅! 하, 하, 하지 마."
휘문은 깜짝 놀라 물러섰고 수연은 허리를 움켜쥐며 웃었다.
"미, 미안해. 나, 간지럼 엄청 탄단 말야."
"아, 그래?"
휘문은 안도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수연은 자신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 그만 들어갈게."
"응. 그래."
키스는 엉망이 돼버렸고 분위기마저 썰렁해진 가운데 수연은 애써 웃으며 휘문을 보냈다.
"자, 잘 가. 내일 회사에서 봐."
"집에 가서 전화할게."
"어? 아, 응. 그래. 전화해."
어둠과 바람과 정적 속에 혼자 남은 수연은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휘문의 손이 닿았을 때처럼 간지럽지가 않았다. 지환의 손이 닿았을 때처럼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투자전략팀에 있던 리서치부장실이 투자분석팀으로 이사했다. 이유도 불분명한 갑작스런 이사에 각 팀원들은 어리둥절했다.
특히 투자전략팀장은 부장에게 무언가 섭섭하게 한 것이 있는가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투자분석팀에선 자유는 끝났다는 듯 침통한 분위기였다.
"그냥 거기 있지 뭐 하러 옮긴다니, 귀찮게."
"글쎄 말이에요. 방도 그쪽이 훨씬 넓고 좋은데 뭐 하러 콧구멍만 한 사무실로 온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이제 죽었다."
"왜요? 뭐 잔심부름 많이 시킨대요?"
"그게 아니라 출근을 5시 30분에 한단다."
"네? 5시 30분요? 그때 와서 뭐하는데요?"
"모닝미팅 시간 전까지 업종별 예측 시황 리포트 쓰신단다. 잘하면 우리한테도 제출하랄지도 모르지."
지환은 장이 끝나고 담당 애널리스트와 함께 기업 탐방에 나섰다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시한 대로 지환의 방은 이미 투자분석팀으로 옮겨져 있었다.
지환이 투자분석팀으로 들어서자 사원들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며 인사를 했다. 지환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전화 온 데는?"
"없습니다."
"각 팀장들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커피 한 잔 주고."
"네, 이사님."
지환은 가방을 놓고 컴퓨터를 켰다. 재킷을 벗으며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옷걸이 쪽으로 가는데 블라인드 사이로 움직임이 보였다.
재킷을 걸어두고 블라인드 틈을 벌여 밖을 엿보았다. 거기엔 수연이 있었다. 수연은 앉아 있고 그 앞에 박휘문과 김하루가 서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얼굴들이 모두 밝았다. 수연은 손뼉을 치며 웃기까지 했다.
눈과 입이 초승달을 그리며 하얀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시원스레 웃었다. 마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 지었다.
예전의 수연은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했던 건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이유가 더 컸다.
그런데 지금의 수연에게선 통제 불가한 강도의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수연의 작은 손짓 하나, 눈짓 한 번에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여성스런 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관능미에 완전히 매혹돼 버린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오수연 때문이 아니었다.
요염한 몸매와 환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눈앞의 여자 때문에 아랫도리에서 긴장이 빠지질 않는 거였다.
그러한 긴장은 지환의 투지에 엄청난 에너지가 되었다.
지환은 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그 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렀다. 그때 팀장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네, 앉으세요."
팀장들이 앉는 걸 보며 수화기를 귀에 댔다. 신호가 두 번 울리자 수연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 투자분석팀 오수연입니다."
"할 얘기가 있어."
"……."
"만나자."
"싫어."
"1시간이면 돼."
"약속 있어."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지환은 끊어진 수화기를 든 채로 블라인드 사이로 창밖을 보았다. 수연의 얼굴에선 웃음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박휘문이 수연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는 수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본 순간 지환은 머릿속이 지잉 울리면서 눈에 불이 번득했다.
턱이 단단히 굳어지고 볼 근육이 경련하듯 실룩거렸다. 잠시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지환은 그렇게 선 채로 물었다.
"오늘 선약들 있으십니까?"
"네?"
소파에 앉아 있던 팀장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환을 쳐다봤다.
"제가 업무 파악을 하느라 바빠서 아직 신고식을 못했네요. 괜찮으면 오늘 했으면 하는데요. 경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으면 좋겠군요."
일사분란하게 퍼진 회식 소식에 사무실이 들썩거렸다. 투자분석팀, 투자전략팀이 총동원되어 모두 서른두 명의 저녁 식사가 되었다.
지환이 계산을 하기로 했다는 건 불문에 부친 채 모처럼 생색을 내려는 양 팀장은 시내에서 좀 벗어난 외곽의 최고급 식당을 예약했다.
서른두 명이 진을 치고 앉아도 자리가 남는 엄청난 크기의 방에 방석을 깔고 둘러앉았다.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갈비를 굽고 반주를 마시고 환영 인사를 주고받았다. 거기에서도 지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수연이었다.
"이사니임~."
하고 콧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여사원의 술잔을 받고서도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연의 시선과 부딪치는 것은 교묘히 피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수연이 불편하게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젊은 이사, 거액의 연봉을 받는 애널리스트, 어디 한번 당해봐라! 벼르는 수작이 역력한 술잔이 계속해서 지환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지환은 낯붉히지 않고 덤덤히 받아마셨다. 꼿꼿이 앉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수십 잔의 술을 받아 마시는 지환의 태도에
직원들은 점점 질려했다. 밑 빠진 독종이라고 판명을 내린 뒤에도 미련을 못 버린 몇몇 질투의 화신들이 또 술잔을 권해 바쳤다.
"영업부에 차차웅 차장이라고 이사님께 아주 반한 사람이 있는데요,
이사님이 며칠 전에 쓰신 삼원컴퓨터 예상가 보고 흥분을 좀 하더니 이번에 아주 난리가 났답니다.
사흘 만에 주당 7,500원씩 먹고 나왔대요."
"우와! 차 차장님 대박나셨네요. 근데 몇 주나 샀대요?"
"쉬쉬하는데 1만 2,000주 정도 산 거 같아. 거의 9천만 원 벌었지.
약정은 약정대로 올리고 돈은 돈대로 벌고, 아주 입이 귀에 걸렸더라. 이제 그 양반 이사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겁니다."
"아, 저도 오늘 하루 종일 그 종목만 봤다니까요. 이사님이 말씀하신 예상가 찍고 바로 빠지는데 아주 기가 막히더라구요.
어떻게 단가까지 딱 맞추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이사님,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부성 짙은 술잔도 받고 애교 섞인 술잔도 받았다. 그래서 평소 주량을 초과하게 되었지만 지환은 취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취한 것인지도 몰랐다. 수연 이외 다른 사람 말은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까.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자리를 옮긴 곳은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아담한 클럽.
누군가의 단골 가게인 그곳에는 이미 일행이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앞 다투어 술과 안주를 시키며 본격적으로 마시자 놀자 판을 만들어갔다.
지환은 몇 테이블이나 떨어져 앉아 있는 수연을 보았다. 수연의 옆에는 윤 대리가 앉고 하루가 앉고 앞에는 박휘문이 앉았다.
다같이 건배를 한 뒤 윤 대리가 원샷을 하라고 수연을 부추겼다. 싫은 듯 고개를 젓던 수연이 까르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거품 묻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이쪽을 흘끔 보았다. 지환은 피하지 않았다.
순간 무엇엔가 놀란 듯 커진 수연의 눈동자가 반짝했다. 그러나 곧 괴로운 듯 피해 버렸다. 그래도 지환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뗄 수가 없었다. 빠른 음악 소리, 시끄런 말소리, 무지개 색으로 터지는 플래시도 방해되지 않았다.
지환의 눈에 비친 수연의 모습은 그림같이 고요하고 아늑했다.
가늘고 긴 머리칼, 섬세하게 이어지는 옆얼굴의 곡선, 하얀 블라우스 위로 드러난 고운 가슴선,
수연은 끈적임 없이 부드럽고 상쾌한 실크의 느낌이었다. 지환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수연이 있는 그림 속으로.
본디 지위가 높아질수록 직원들이 잘 모여들지 않아 외로운 법이지만 지환은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혼자서 느긋이 술잔을 비우고 가끔씩 물어오는 질문에 단답형의 대답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반 이상이 춤을 추러 나간 뒤에 지환의 테이블에는 지환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수연의 테이블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나더니 휘문이 벌떡 일어났다.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보고 있는 지환의 눈과 마주쳤다.
지환은 눈으로 말했다.
'하지 마.'
그러자 수연의 눈이 대답했다.
'참견 마.'
'그 녀석은 놔줘.'
'오빠가 상관할 일이 아냐.'
'넌 내 거다. 감정 소비하지 마.'
'내 감정이야.'
'허락 못한다.'
'오빠 허락 따위 필요 없어.'
'한눈팔지 마. 나만 봐, 오수연.'
그러나 수연은 보란 듯이 눈을 돌렸다. 지환은 얼음송곳 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수연이 휘문의 목을 안고 휘문의 입에 든 술을 받아먹고 있었다.
"우와, 정말 했다!"
"야, 야, 풍기문란이야!"
"이건 풍기문란이 아니라 엽기추태예요. 아, 눈꼴 시려. 뭐냐, 도대체!"
"야, 둘이 완전히 맛 간 거 아냐. 박 주임 얼굴이 아주 불바다가 됐어."
휘문이 입으로 전해 준 건 폭탄주였다. 벌칙에 걸렸던 것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을 한 휘문은 얼근하게 취해서 비틀거렸다.
휘문이 화장실을 간 사이 윤 대리가 수연에게 복숭아를 집어주며 말했다.
"자, 안주. 애인이 뭐 저러냐. 지만 안주 먹고 쏙 빠져나가…… 엇!"
어느새 나타난 지환이 윤 대리의 포크 쥔 손을 잡았다.
"아, 이, 이사님. 이사님도 드릴까요? 복숭아 되게 좋아하시나 보네. 여기까지 뛰어와서……."
"수연인 안 됩니다."
"네?"
"복숭아에 알레르기가 있어요."
"아……."
윤 대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수연을 보고 복숭아를 보았다. 그때 갑자기 수연이 포크를 홱 낚아챘다.
취기로 촉촉이 젖은 눈이 빨갛게 타올랐다.
"괜찮아요!"
"어……."
윤 대리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포크는 수연의 손으로 넘어갔고 지환의 손이 그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이거 놔요. 이사님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만해."
"상관없잖아요?"
"하지 마."
"지금껏 상관없었으면서 왜 그러시죠?"
수연은 기어코 복숭아를 입에 넣어버렸다. 지환은 힘으로 제압한다면 못 막을 것도 없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연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연은 외로웠었다고 얘기하는 거였다.
과일빙수를 먹을 때 복숭아를 골라내 먹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지환의 부재를 원망하고 탓하며 얼마나 그리웠는지 필요했었는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연은 지환을 노려보면서 복숭아를 먹었다. 지환은 보란 듯이 복숭아를 꼭꼭 씹어 꿀꺽 삼키는 수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눈을 뭉클하게 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휘문이 꼬인 발음으로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 씨,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술이나 마시자."
수연은 옆에 선 지환을 무시하고 휘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빠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 춤추자."
수연은 경망스럽도록 활짝 미소를 지으며 휘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다 힐끗 뒤를 보았지만 지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환이 없는 걸 안 순간 수연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거두어졌다.
수연은 지환을 의식하는 자신에게 뜨끔하여 눈앞에 있는 휘문에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잠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춤을 추었다.
오기 부려 먹은 복숭아의 기운이 퍼지는 걸 두렵게 느끼며 몸을 흔들었다.
수연이 무대에 올라가 허벅지가 다 드러나도록 춤을 추자 춤추고 있던 남자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성욕이 번들거리는 눈을 반짝이며 수연의 육감적인 몸을 핥듯이 쳐다보았다.
긴 머리채를 휘날리며 역동적으로 머리를 흔드는 수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휘문은 많이 취해서 다리가 꼬였고 가끔씩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무대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자 테이블은 목마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수연은 몇 잔이나 연거푸 술잔을 비웠고 휘문은 아예 소파에 널브러져 누웠다.
"쯧쯧, 제일 어린놈이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네."
"술도 별로 안 세면서 너무 급하게 마시더라구요. 근데 과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까부터 안 보이시네."
"벌써 샜겠지. 과장님 술버릇이잖아. 어허, 이쪽도 상태가 별로 안 좋네. 부창부수라더니. 어이, 수연 씨, 괜찮아?"
"아, 네. 괘, 괜찮아요."
머리를 들자마자 수연은 또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수연은 토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지환을 거역하기 위해서 복숭아를 먹었던 것인데, 지환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면 괜히 추한 꼴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토하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연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온몸을 쥐어짜듯이 격렬한 기침을 했다.
"언니, 수연 언니!"
"수연 씨, 수연 씨, 왜 그래? 괜찮아?"
윤 대리는 당황하며 지환을 찾았다. 지환이 말한 대로 수연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사님 어디 가셨어? 빨리 이사님 좀 찾아봐. 이사님이 아실 거야."
수연은 기침을 하면서 속으로 조소했다. 알긴 알죠. 하지만 없을 거예요. 나 버리고 도망가는 게 특기니까.
그런데 누군가 수연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단호한 손길에 이끌린 수연의 상체가 일으켜지고 이어서 몸이 들어올려졌다.
수연은 숨통이 조이는 괴로움에 헐떡거리면서 눈을 떴다. 지환이 있었다.
지환은 가슴을 울리며 무섭게 기침을 하고 있는 수연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미리 말해 둔 클럽 뒤쪽의 조용한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하루에게 주방에 부탁해 놓은 것을 받아오라고 말하고는 떨기 시작하는 수연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고통스러워하는 수연을 방바닥에 눕히고 목 뒤로 손을 넣어 기도를 확보했다.
쇳소리를 내며 거칠게 호흡하는 수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지환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가슴을 저미는 안쓰러움에 짓눌린 지환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굳어갔다
"헉, 헉, 가……."
"힘드니까 말하지 마."
지환은 방구석에 있는 이불을 말아 수연의 발을 올려놓고 베개를 목 뒤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치마에서 블라우스를 빼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브래지어 버클을 풀어주자 수연은 조금 편안해진 듯했다.
"이사님, 여기!"
하루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지환은 물수건을 받아 수연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수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숨소리는 아직도 뻑뻑했다.
침을 흘리고 있는데다가 목이 조금 부었고 전신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병원에 연락할까요?"
"아니.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그만 나가 봐."
"제가 옆에 있을게요. 이사님이 나가 보세요. 그래도 이사님 환영식인데……."
"난 괜찮으니까 나가 봐요."
지환의 단호한 말에 하루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수연은 침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호흡이 가빴다.
수연이 침을 흘릴 때마다 지환은 물수건을 들고 익숙하고 조심스런 손길로 닦아주었다.
그런 지환을 보는 수연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격한 기침에 붉게 충혈된 눈은 마치 붉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지환은 가슴이 먹먹했다. 지난날의 고통과 눈앞의 욕망이 뒤섞여 심장이 광란의 춤을 추었다.
지환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폭파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수연을 보았다. 붉게 젖은 눈이 파르르 흔들리며 마주쳐왔다.
"가라고 하지 마."
"가……."
"널 잊어본 적이 없어."
지환은 고개를 내저으며 듣기를 거부하는 수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댔다.
"여기에서."
그리고 또 손을 가슴에 대고,
"여기에서."
새기듯,
"잠시도,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너 없이는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어. 널 떠올리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았어.
넌 그냥…… 내 심장이었다. 내 왼쪽 가슴속,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는……."
거칠게 부정하는 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지환은 두 손으로 수연의 손을 꼭 쥐고 고백했다.
"너 때문에 가야 했지만 너 때문에 돌아왔어."
순간, 수연의 눈이 커졌다.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피를 토할 것처럼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지환은 헐떡거리는 수연의 가슴을 부드럽게 누르며 마시지해 주었다.
사나운 기침은 곧 잦아들었지만 수연의 눈에 떠오른 의혹의 빛은 가시질 않았다.
지환은 꼭 잡아당기는 수연의 손을 가만히 쥐고는 잠시 흥분을 억눌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지환의 내부에서도 핏덩어리 같은 격정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지환은 애써 자제하느라 억눌린 목소리로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가 아셨었다. 이미 그때에…… 내가 널 동생으로만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 난 ……추방당한 거였다."
수연은 끄억끄억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믿지 못하겠다는 수연의 눈을 향해 마음을 전했다.
"너 때문에 돌아온 거다. 그러니까 달아날 생각 마. 그래봤자 넌 언제나 내 손바닥 안에 있을 테니까.
내 안에 있는 한 넌 안전해. 알겠니? 달아나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내 안에선 얼마든지 자유롭게 해줄 테니까, 내 안에 있어."
지환은 공포스런 말을 부드럽게 내뱉고는 손을 뻗어 잠잠해져가는 수연의 뺨을 어루만졌다.
만지는 지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수연의 볼을 건드렸다. 지환은 마치 비누방울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을 미끄러뜨렸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욕망이 폭발해 맑은 비누방울을 터트려버릴 것만 같았다.
"널 가지고 싶다."
지환은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자극을 받아 숨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오늘은 네 두 눈만 가지는 걸로 하지. 네 두 눈…… 내게 줘. 지금부터 내가 보내줄 때까지 나만 보는 거다."
수연은 화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홱 고개를 돌려 지환의 눈길을 피했다.
아직도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지만 호흡은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지환은 지금 수연의 상태가 그리 쾌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이 따갑고 미열이 날 것이며 기운이 빠져 머리를 들 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수연은 고집스럽게 머리를 돌려 지환의 요청에 거절의 표시를 한 것이다.
지환은 잠시 보다가 수연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화난 눈으로 쏘아보는 수연의 눈을 보며 음미하듯 천천히 속삭였다.
"오랜만에 본다. 네 눈 속에 있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