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반사
"수연 씨, 수연 씨!"
호들갑스런 남자의 등장에 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루 씨, 물! 빨리!"
지환은 남자가 의식 없는 수연의 얼굴에 물을 뿌리려는 것을 제지했다.
"내 방에 간이침대가 있으니까 잠시 거기 눕혀두죠. 정신을 차리면 보내겠습니다."
하고 지환은 스스럼없이 수연을 안아 올렸다.
"아니, 잠깐만요, 이사님.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게……."
"그럴 필요 없어요. 잠깐 두면 깨어날 겁니다."
"하지만……."
"걱정 말아요. 수연인 내가 잘 아니까."
지환은 경고하듯 딱 잘라 밀쳐냈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눌린 휘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수연을 안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지환의 등 뒤로 아연실색한 직원들의 시선이 꽂혔다. 휘문이 쫓아가려는 걸 동료들이 막았다.
"잘 안다잖아."
지나가던 사원들이 수연을 안고 가는 지환을 보고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뭐야, 뭐야? 오수연 씨 왜 저래?"
"저 사람 이번에 새로 온 리서치부장 아냐? 저 사람이 왜 수연 씨를 안고 가?"
"우리도 몰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까 봤어? 수연인 내가 잘 아니까 할 때 말야, 눈 엄청 살벌했지?"
"몰라. 난 목소리밖에 안 들었어. 목소리 정말 죽이더라. 성우 같아."
웅성웅성 모여 떠드는 직원들 때문에 소문은 또 삽시간에 회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지환은 놀란 비서를 시켜 간이침대를 펴게 했다.
수연에 대한 직원들의 관심에 짜증이 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아이들이 수연에 대해 관심을 보일 때마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예전엔 그 감정을 참고 억눌렀지만 지금은 참을 이유가 없었다.
잔뜩 겁먹은 표정의 비서가 후닥닥 침대를 펴자 지환은 보지도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됐으니까 그만 나가 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네, 이사님."
수연을 눕히고 비서를 내쫓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지환은 블라인드를 향해 선 채로 뒤에 있는 수연의 존재를 아프도록 느꼈다.
적요한 공간에 흐르는 수연의 뜨거운 살 냄새가 전신을 마비시켰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
가슴 뻐근한 흥분이 지환을 떨게 만들었다. 그때, 호흡 속으로 밀려온 은은한 국화 향이 지환을 일깨웠다.
수연에게서 풍기는 또 다른 향이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던 그 독특한 향이 지환에게는 각성제와 같았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린 지환은 떨리는 걸음을 떼었다. 침대 옆에 서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충격으로 하얗게 질린 수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떠날 땐 짧았었는데, 머리가 어느새 이렇게 길었구나. 몇 번이나 길고 몇 번이나 잘랐겠지.
나 없는 동안 넌 또 뭐가 변했을까. 여전히 나의 수연일까.
지난 세월의 외로움과 고통이 지환의 몸을 휘돌았다. 굳게 쥔 주먹으로부터 극심한 경련이 일어 전신으로 퍼졌다.
지환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진정하고 눈을 떠 수연의 머리 밑으로 손을 넣었다. 핀을 뽑아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구두를 벗겼다.
그리고 다시 수연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목이 메도록 그리워했던 그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귀엽고 예뻤던 소녀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숙해서 자신의 눈앞에 제물처럼 놓여져 있었다.
마약 같은 수연의 미모 때문에 환각에 빠져버렸다.
치마 아래로 뻗은 희고 가는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는 상상에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눈앞에 있는 미끈한 다리가 허리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거세게 박동치는 심장의 소요에 갈비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수연아……."
부르는 지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뺨에 닿는 손가락이 두려운 듯 떨렸고 바라보는 눈길은 데일 듯이 타올랐다.
믿어지지 않는 기쁨에 지환의 눈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수연아……."
"으, 으음……."
부름에 대답하려는 것처럼 수연의 입술이 달싹 움직였다. 미간을 찡그리더니 속눈썹을 떨며 깜박거렸다.
지환은 한 걸음 떼어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수연이 눈을 떠 자신을 보면 어떻게 나올까 기대감에 부풀었다.
예전의 수연이라면 반가워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안길 것이었다.
수연이 눈을 떴다.
"괜찮니?"
까칠한 지환의 목소리에 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풀어진 긴 머리가 물결을 치며 흐트러졌다.
수연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잡으며 두리번거렸다. 지환이 쥐고 있던 머리핀을 내밀자 다급한 손길로 머리를 묶었다.
수연은 재빨리 구두를 찾아 신고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은 뒤에야 지환과 마주했다.
흔들리는 수연의 눈동자를 본 지환은 치미는 감정에 명치가 욱신거렸다.
목젖까지 끓어오른 애정을 토해 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수연아, 수연아!
"드디어……."
그러나 지환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수연을 보는 표정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딱
딱하게 포장된 피부 아래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있다는 걸 수연이 짐작할 수 없게 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오, 오빠……."
수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환의 이목구비를 뜯어보았다.
지환은 물기가 차오르는 수연의 눈동자와 가늘게 떨고 있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 아래에는 기억에 새겨진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반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질투했던 그 소녀의 얼굴이 수연의 얼굴에 겹쳐졌다.
초롱초롱 동글동글했던 눈매가 길어지고 깊어져 섹시해 보였다.
포동포동했던 살이 빠져 고운 턱선이 드러나고 도톰한 입술이 윤기를 띠며 빛났다.
이젠 정말 풋풋한 소녀는 없고 사내의 욕정을 자극하는 여인의 얼굴이 돼버렸다.
"어, 어떻게 왔어?"
지환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비행기 타고."
"어, 언제?"
"1월 24일, 6시 30분."
"어, 엄마도 아셔? 오빠 온 거 엄마도 알아?"
지환의 얼굴에 미소가 걷히고 싸늘하게 굳어졌다.
"연락했어야 했나?"
"정말, 정말 뜻밖이다. 오빠라니…… 정말 지환 오빠 맞아?"
"수연아."
지환이 한 걸음 다가서자 수연이 펄쩍 뛰며 뒷걸음을 쳤다.
"안 돼!"
순간, 지환의 가슴에 싸늘한 냉기가 휘돌았다.
"안…… 돼?"
"미, 미안. 나, 난 그냥 너무 놀라서. 오, 오빠라니, 오빠가 우리 회사에 오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서……."
"왜? 내가 돌아오겠다는 말 믿지 않았어? 안 믿어졌니?"
"그, 그게 아니라……."
"난 네가 날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섭섭한걸."
지환의 풀죽은 말투에 수연은 당황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환이 미소 짓자 수연은 익숙한 그 표정에 새삼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수연의 눈동자에 성분을 알 수 없는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오, 오빠구나. 정말 지환 오빠 맞구나. 오빠……."
지환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떠는 수연을 보고선 참지 못하고 거세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수연의 몸을 가슴에 품었다. 부드러운 몸을 안은 순간 지환은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거친 신음을 토해 냈다.
"수연아……."
"오빠……."
지환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수연을 있는 힘껏 안았다.
수연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온힘을 다해 안고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높게 뛰어올랐다. 아무리 보듬어 안아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를 안고서,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미친 듯이 안고 또 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너무…… 정말 보고 싶었어. 오빠……."
사무치게 그리웠던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을 떼어 젖어 있는 뺨을 닦아주고 한 가닥 삐져나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일렁이는 입술에 떨리는 손가락을 대었다. 그 작은 접촉에 놀란 수연이 숨을 들이켜며 지환을 올려다보았다.
"오, 오빠……."
"보고 싶었다."
지환의 탁하게 쉰 목소리는 격정에 북받쳐 들썽거렸다.
"그리고 궁금했다. 네가 우리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지."
순간 지환의 입술이 내려왔고 흠칫 놀란 수연은 뒷걸음질을 치며 지환의 가슴을 밀쳤다.
"이, 이러지 마, 오빠."
지환은 차가운 겨울 강물처럼 잔잔한 얼굴을 하고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혼란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저었다.
"난 다 잊었어. 다 지웠어."
"다 지워?"
"오빠도 알잖아."
두려워하는 수연의 표정을 본 지환의 눈빛에 섬광이 일었다. 지환은 화산이라도 얼게 할 듯한 표정으로 수연에게 다가들었다.
"내가 뭘? 내가 뭘 알아?"
"우, 우리가 친남매가 아니란 거."
지환은 싸늘하게 웃었다. 수연이 처음부터 '오빠!'하고 달려와 안기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환은 자신이 떠난 후 어머니가 얼마나 철저히 수연의 마음에 경계를 쳐놓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흥, 그 고고하신 양반이 너한테 그 말을 했단 말이지."
"오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처, 처음부터?"
"네 살 때 입양됐으니까. 훗, 근데 생각할수록 네 어머니는 참 알쏭달쏭한 분이다.
그 말을 너한테 왜 했을까? 내가 정말로 아주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으셨을까? 그래서 네가 나한테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셨을까?"
지환은 토끼몰이를 하듯 수연을 바짝 몰아세웠다.
코너에 몰린 수연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지환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을 때까지 압박해 갔다.
"내가 너희 가족과는 아주 상관없는 사람이란 걸 너한테 알리고 싶으셨겠지
. 그래서? 그래서 넌 뭘 잊었는데? 뭘 지웠어? 그날 밤도 잊었어?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남남인 우리가 서로를 원했던……."
"그, 그만해! 그날 밤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나, 난 후회하고 있어. 그날 밤, 오빠 말리지 못한 거 후회해!"
"그래? 그래도 그날 밤 기억은 하는구나. 하지만 네가 날 말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지환은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는 수연의 손을 잡아 입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떠는 수연의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손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혀끝을 대고서는 부드럽고 달콤하게 낙인을 찍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태워버릴 듯 격렬한 정염의 눈을 하고서…….
"지금도 넌, 날 말릴 수 없어."
"이, 이러지 마, 오빠."
"그때나 지금이나 너도 날 원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12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나,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 걸 아는 덴 한순간이면 되지. 네 눈 본 순간 알았어."
"아니야! 이, 일하러 가야 해. 놔줘, 놔줘!"
지환은 숨결이 가빠왔다. 바르작바르작 떠는 수연의 몸짓이 가슴을 울렸다.
피하려는 수연의 눈동자가 심장을 파고들어와 미칠 것 같았다. 그 밤이 떠올랐다.
어두운 방, 눈꽃처럼 새하얀 팬티를 입고 누워 있던 수연이 생각났다.
꽃잎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던 피부의 감촉과 닿을 때마다 파르르 떨면서도 호기심에 눈망울을 굴리던 소녀…….
지환은 뜨거운 입김으로 그리듯 속삭였다.
"다시 말해 줘. 그날 밤처럼…… 넌 내 거라고……."
"오빠!"
"그럼 놓아줄 테니까."
지환의 두툼한 몸이 수연의 가는 몸을 서서히 짓눌렀다.
수연이 아무리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써도 지환의 몸은 점점 더 수연에게로 기울었다.
지환의 뜨거운 입술이 달아나는 수연의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그러기만 해! 다신 안 볼 거야!"
수연이 외쳤다. 부릅뜬 두 눈으로 바로 코앞까지 닿은 지환을 노려보면서 씩씩거렸다.
"정말이야?"
"그래!"
"……휴."
지환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할 수 없지. 오수연이 똥고집 부리면 나만 골치 아프니까."
지환은 순순히 수연을 놓아주었다. 열이 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수연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지환의 사무실을 나갔다.
지환은 나가는 수연의 등 뒤에 대고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알렸다.
"퇴근 때 보자. 전화할게."
수연은 예전에 같은 동네 살았던 오빠를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었었다는 신빙성 없는 변명으로 하루를 보냈다.
새로 온 젊은 애널리스트와 사내 퀸 오수연이 아는 사이라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달려온 타부서 직원들을 대할 때마다
똑같은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냥 좀 아는 사이일 뿐이야."
"많이 친했어요?"
"으, 응. 좀."
"와, 역시 그쪽 계급들은 그 계급들끼리 다 통하는구나."
"그렇겠죠.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모여 사니까요. 아, 근데 아직도 심장이 막 떨려요.
어깨 떡 벌어진 거 봤어요? 얼굴은 되게 지적으로 생겼는데 눈빛은 왜 그렇게 야성적인지, 묘하게 섹시하지 않아요?"
"그거다, 야성적!"
"에휴, 또 폐인 여럿 나겠군."
수연은 얘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지환의 사무실을 나온 이후로 몸이 더 떨렸다.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믿어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른 남자가 된 지환의 얼굴은 화강암처럼 묵직하고 단단해 보였다.
차갑고 반듯한 인상은 여전했지만 어렸을 때보다 한층 더 남성다운 힘이 느껴졌다. 무서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수연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날 밤 일만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환이 떠난 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면 반사적으로 가슴이 뛰고 몸이 흥분되었다.
몸이 그날 밤의 느낌을, 지환의 손길을 기억해 내고선 수치스러울 정도로 달뜨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반응하는 그 떨림의 숙주가 지환이었다. 그런 지환이 나타났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알고 기쁘게 들뜨는 몸의 반응이 당혹스럽고 무서웠다.
1초 1초가 흐를수록 수연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저 복도 끝에 지환이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이제 언제든 지환을 만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숨이 탁 막혔다.
자신을 보던 지환의 강렬한 눈빛이 되살아났다. 짙은 눈썹 아래 가슴 깊은 곳까지 꿰뚫을 것같이 강렬하고 거침없는 눈빛이 있었다.
고독감이 깃든 눈빛이 발산하는 짙은 어둠이 색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눈빛을 받은 순간, 마치 뜨거운 불덩이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열정적인 눈빛에 휘말려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근두근 뛰는 심장과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환은 더 이상 오빠가 아니었다. 너무도 남자다워서 남자가 아닌 무엇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여자임을 너무나 짙게 각성하게 만드는 진짜 남자였다.
'아냐!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수연은 가슴속에 이는 맹렬한 불길을 세차게 부정했다. 인정하기엔 너무나 두려운 감정이었다. 기분이 끔찍해졌다.
충격이 좀 가시자 그동안 쌓였던 분노와 원망이 수연을 찾아왔다.
무엇이라도 아깝지 않게 내주던 지환이 떠난 후 수연은 배신감과 절망에 빠져 허덕거렸었다.
지환이 떠난 순간 15년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행복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다시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지환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갖고 달아나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지환을 의지하고 지환과 함께 나누었었는지 더 생생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뼈아픈 후회와 살을 에는 슬픔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으로 멍울질 뿐이었다.
'안 돼. 다신 안 돼! 받아들여선 안 돼. 아팠잖아. 정말 힘들었잖아. 또 가버릴지도 몰라. 그래, 또 그럴 거야.
얼마나 미웠었는지 기억해. 얼마나 화났었는지 기억해. 그렇게 애타게 불렀는데도 와주지 않았어.
죽을 것처럼 무서웠는데도 와주지 않았어. 오빠 같은 건 필요 없어. 날 버리고 떠났던 오빠 따위는 정말 필요 없어.
오빠가 아니라 남자라면 더더욱 필요 없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마.'
자기 최면에 열을 올린 수연은 타는 듯한 분노와 소름끼치는 무서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느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어져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머리칼이 쭈뼛 서고 등줄기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오수연."
"헉!"
"야, 왜 그렇게 놀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 잠깐 딴 생각하다가, 미안. 근데 왜?"
"이번 주말 교육에 남녀사원 각 1명씩이라는데 우리가 가자. 교육 장소가 온양에 있는 연수원이래. 간 김에 온천도 좀 하고, 어때?"
"온천? 온천은 나 안 되는데……."
"왜 안 돼? 알레르기 있어?"
"에이, 그게 아니고 마법의 기간이란 거죠. 내 말이 맞죠, 언니?"
"아하, 그런 거야?"
수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휘문에게 눈을 흘겼다. 더 얄미운 건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하루였다.
"박 주임님, 저랑 가요. 수연 언니는 작년에도 갔다 왔단 말이에요. 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저랑 가요, 네?"
"어, 나도 처음인데. 그럼 처음인 사람끼리 갔다 올까?"
"야, 무슨 사원 교육을 니들 맘대로 정하냐? 팀장님이 교육이 필요한 사원을 뽑아서 보내는 거지. 아주 이것들이 상사를 핫바지로 아네."
"아, 그런 거였어요? 에이, 몰랐잖아요."
"그리고 너 박휘문."
"네?"
"너 온천 갈 돈이나 있냐? 너 이번 달 카드대금이 2백만 원이 넘는다면서…… 흡!"
날아오른 휘문이 윤 대리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수연의 뇌에 경계경보가 울리고 난 뒤였다.
수연이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자 휘문은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글쎄 이번에 친구 놈들이 대거 취직을 하는 바람에 축하 술 사느라고……. 곧 회수할 거야. 첫 월급 타면 다들 쏜다고 했거든."
"쏘면, 빵꾸 난 휘문 씨 카드 대금이 메워지는 거야?"
"에이, 또 왜 화를 내고 그러냐. 형한테 어떻게 해서 메워볼 테니까 걱정 마."
"쯧쯧."
수연은 혀를 차면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수연 언니 의외로 되게 짜다니까.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화장실로 들어간 수연은 멍하니 거울을 보았다. 휘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수연의 머릿속에는 지환의 얼굴만 떠올랐다.
조각상처럼 날렵한 턱선과 대단히 감각적인 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미소는 여유롭다 못해 위압적이었다.
무엇보다 지환에게서 풍기는 체취는 수연의 정신을 아릿아릿하게 만들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사람의 체취를 이토록 강하게 의식하기는 처음이었다.
학창 시절 수연은 용돈에 냉혹한 어머니 때문에 월말이 되면 늘 쪼들리곤 했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면 간단히 해결되긴 했지만 어머니에게 들키면 다음달 용돈이 깎이는 위험이 있었다.
그 일로 수연이 고민하는 기색이 있으면 지환은 용케 알아차리고 자신의 용돈을 수연에게 주곤 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수연의 계획성 없는 지출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초반에 길을 잘 들여야 하는데……."
수연은 중얼거리며 손을 씻었다. 수연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휘문이 옆에 붙었다.
귀에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꽂고서는 수연의 주위를 맴돌며 긴장한 연기를 했다.
"자, 비켜요. 비켜. 신화증권의 퀸 나가십니다. 다 비키세요."
"뭐하는 거야?"
"경호."
"뭐?"
"사무실까지 경호하는 거라구. 비켜요, 김 대리님. 우리 여왕님 납십니다."
"아주 생쇼를 해라."
복도를 걸어오던 김 대리가 기막혀하며 핀잔을 줬다. 그래도 휘문은 진지한 얼굴로 보디가드 흉내를 냈다.
손가락을 귀에 대었다가 팔을 벌려 수연을 에워싸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만해."
"그러지 말고 화 풀어라, 오수연. 앞으론 내가 정말 친구들한테 술 안 산다."
"그러면 친구들한테 왕따당할걸. 문제는 2백만 원 받으면서 3백만 원 쓴다는 거야. 조절이 안 되는 거지."
"와, 그렇게 말하니까 귀에 쏙쏙 들어오네. 맞아, 그게 문제야."
"어떻게 하면 월급 초과하지 않고 술 살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 2백만 원이라…… 아, 숫자 생각하면 머리부터 아파. 휴우."
수연이 한숨을 쉬며 사무실로 들어가려 하자 휘문이 붙들어 세웠다.
안쪽의 눈치를 살피다가 수연을 벽에 세워놓고는 모공이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들이댔다.
"왜 이래?"
"수연 씨가 내 월급 맡아줘."
"뭐?"
"그럼 빵꾸 나지 않을 거 아냐. 수연 씨한테 월급 맡겨두고 용돈 타 쓸게. 어떻게 생각해?"
"그 방법은 별로야. 내 코가 석 자야. 휘문 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도 돈 개념이 별로 없어. 알잖아. 나 숫자에 엄청 약한 거."
"으응, 맡아줘. 안 맡아주면 나 하루에 담배 한 갑 피워버린다."
"뭐야, 조를 걸 졸라야지."
"으응, 응. 수연 씨."
"나 원 참."
수연은 짜증이 났다. 편안하게 느껴졌던 휘문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아이의 생떼처럼 철없이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눈빛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 눈빛보다 더 강렬하고 날카로운 빛을 내뿜는 눈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수연은 자신의 생각에 놀라 흠칫했다. 지난 12년 동안 자신이 애타게 찾으며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첫키스의 눈이었다. 연분홍 꽃비 속에서 밤하늘처럼 까맣게 빛나던 눈동자,
힘과 고독과 정열이 뜨겁게 작열하던 지환의 눈빛.
"해줄 거지? 응? 해줘."
"아, 알았어. 급여 통장 새로 만들어서 줘."
"오케이! 그렇게 하면 우리 정말 부부 같겠다. 그지?"
"뭐가 부부 같다는 거예요? 둘이 동거라도?"
"야, 김하루! 처녀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머, 처녀는 동거라는 말 입에 올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이제 보니까 박 주임님 되게 보수적이다."
"보수적인 게 아니라 점잖은 거지."
"점잖은 사람은 동거 안 하는 줄 알아요?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고,
참하게 생긴 여자가 뒤로 호박씨 까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박 주임님도 뒤로 호박씨 까는 타입인 거 같은데요. 엉큼하고 음흉하고."
"하루 넌 어 어떻게 된 여자가 생긴 건 귀엽게 생겨가지고 말은 그렇게 되바라지게 하냐."
수연은 티격태격하는 휘문과 하루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본능적으로 지환의 전화임을 느낀 수연은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투자분석팀 오수연입니다."
"7시에 볼까?"
예감은 적중하여 지환의 굵은 저음이 들려왔다. 수연은 마음먹은 대로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늘은 싫어."
"아레나빌딩 12층에 아르마니라는 카페가 있어.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 잘하는 집이야. 거기서 보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부터 두 시간 줄 테니까 생각하고 와. 그럼 끊는다."
"오……."
일방적으로 끊긴 수화기를 노려보는데 김 과장이 다가왔다.
"수연 씨, 오늘 공시 정리했어?"
"어머!"
"뭐가 또 어머야! 하여간 제 때에 제대로 넘기는 꼴을 못 봐."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빨리 정리해서 줘! 그래야 리포트를 쓰든가 말든가 할 거 아니야!"
"네, 네, 알겠습니다."
"석유화학업종 재무제표 정리한 거랑 타사 시황 올라온 거랑 갖고 와."
"네."
"대답은 잘한다. 에휴, 오늘 또 밤새야겠는걸.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 할까."
수연은 화를 내는 김 과장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과장님, 제가 타드릴게요."
"그러든지."
수연은 재빨리 다방 커피를 타 김 과장의 책상 위에 놓았다. 김 과장은 눈도 돌리지 않고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땡큐."
"근데요, 과장님. 혹시 아르마니라는 카페 아세요?"
어느새 수연의 페이스에 말려든 김 과장은 화를 냈던 것은 까맣게 잊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마니? 처음 듣는데, 어디 있는 건데?"
"아레나빌딩요."
"아, 거기. 작년 결혼기념일 날 갔던 것 같다. 거기 이탈리아 요리집 아냐?"
"그건 모르겠어요. 거기 해산물 요리 드셔 보셨어요? 맛있어요? 별로죠."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요만큼 주는데 맛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난 민숭민숭한 게 영 입에 안 맞던데 와이프는 잘 먹더라구. 근데 거긴 왜? 박 주임이랑 데이트하게?"
"아뇨, 그냥요."
"거 너무 티내면서 연애하지 마. 수연 씨가 박 주임이랑 사귀고부터 총각 사원들 일 능률이 팍 떨어지는 거 같어.
그리고 걸을 때 엉덩이 좀 살랑거리면서 걷지 마라. 남의 여자가 왜 그렇게 요사스럽게 걷고 다녀서 총각 사원들 생앓이를 하게 만드냐."
"어머머, 제가 살랑거리면서 걸었다구요? 그건 완전 모함이에요. 전 살랑거리면서 걷는 게 어떤 건지도 몰라요."
"하여간 조심해."
수연은 서류를 뒤적거리는 김 과장을 의심스럽게 흘겨보며 따졌다.
"살랑거리면서 걷는다는 거 그거 과장님이 지어내신 말 아니에요? 과장님 원래 여자 엉덩이만 보시잖아요."
"어, 어떻게 알았냐?"
"아, 내가 못살아, 과장님 때문에!"
낄낄낄 음흉스럽게 웃는 김 과장을 보면서 수연도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일부러 보란 듯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언니, 왜 그렇게 걸어요?"
"김 과장님 보시라고."
"어머! 과장님이 또 이상한 농담했죠. 언니, 과장님 농담 받아주지 말라니까요.
언니가 자꾸 받아주니까 더 하잖아요. 어유, 변태. 생긴 건 꼭 피조개같이 생겨 가지고는. 성희롱으로 확 고소해 버릴까 보다."
"괜찮아. 나도 과장님 엉덩이 잘 보는데 뭘."
"우엑!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요."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봐. 의외로 귀엽다."
"하여간 남자들 눈에 뭐가 씌었다니까. 언니가 착하고 예쁜 줄로만 아는 남자들한테 언니의 이런 엉큼한 속을 꼭 보여줘야 될 텐데."
"와서 보라고 해. 난 보여줘도 상관없어."
"에휴, 이렇게 잘난 척하는 것도 꼭 보여줘야 될 텐데."
수연은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는 하루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하루는 귀여운 타입이었다.
왜소한 몸집에 화장하는 것과 쇼핑하는 걸 좋아하는 스물다섯의 아가씨였다.
학교 다닐 때 공부하는 거 싫어했던 것처럼 회사에선 일하는 걸 싫어해서 요리조리 피해갈 궁리만 하는 얌체이기도 했다.
촉새처럼 떠들길 좋아해서 이리저리 말 전하다가 곤욕을 치른 경력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또 귀여운 면이 있기 때문에 남사원들에게 인기가 꽤 높았다.
"언니, 나 먼저 퇴근 좀 할게요."
"왜? 약속 있어?"
"사실은…… 언니만 알고 있어요. 나 요즘 아르바이트해요."
"아르바이트?"
"쉬!"
하루는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재즈바에서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요."
"갑자기 왜?"
"돈이 좀 필요해서요."
"얼마나? 많이? 내가 빌려줄까?"
"아뇨. 딱 한 달만 할 거예요. 팀장님이 나 찾으면 잘 좀 둘러쳐주세요. 부탁해요, 언니."
"알았어. 내일 봐."
하루가 간 뒤 수연은 태어나 책상에 앉은 이후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래서인지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던 일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수연은 정리한 자료를 김 과장에게 넘기며 물었다.
"과장님 또 시키실 일 없으세요?"
"왜? 퇴근하게?"
"아뇨. 정말로 묻는 거예요. 일거리 좀 주세요."
"갑자기 왜 그래? 수연 씨가 일 달라니까 간이 확 엉겨 붙잖아."
"복사할 거 없으세요? 이거 지점에 팩스 돌려야 되는 거죠. 제가 할게요."
"놔둬. 내일 아침에 보내도 돼."
"아니에요. 지금 할게요."
수연은 머릿속에 가득한 지환과의 약속을 잊을 만한 것들이 필요했다. 지환에게 말한 대로 자신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깨비처럼 나타나서는 12년의 공백을 한번에 무시하고 파고드는 지환의 저돌성이 무서웠다.
느닷없이 나타나 당황스럽게 만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은 지환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마음도 컸지만 12년 동안 돌아오지 않은 지환에 대한 분노도 그에 못지않았다.
한마디로 수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게 결정되기 전에 지환을 만나면 그대로 휘둘려버릴 것 같다.
그렇게 저돌적인 모습은 처음 봐. 예전엔 나 하자는 대로 잘해 주기만 했는데…….
일방적인 약속 같은 건 무시하자고 결심했지만 지환이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혼잡한 생각에 잠겨 팩스를 보내고 있는데 휘문이 등 뒤로 와 섰다. 휘문은 다소 화가 난 표정으로 수연에게 따지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무슨 소리야?"
수연이 돌아보자 휘문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수연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비상계단까지 끌려나온 수연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도대체 왜 이래?"
"수연 씨야말로 왜 이러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통장까지 넘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꽁해 있는 건 뭐야."
"내가 언제?"
"그럼 퇴근시간이 넘었는데 과장님한테 일 달라고 조르는 건 뭐야? 이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돼?"
"아, 그건……."
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휘문에게 지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구는 수연을 보고 휘문은 더욱더 불안감에 쫓겼다. 휘문에게 수연은 놓치기 싫은 완벽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 대하고 있는데 어쩐지 수연은 그저 동료일 때와 같은 거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연애에 꽤 능숙한 휘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불안하고 답답했다.
그 때문에 수연에게 더 끌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 봐.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휘문의 진지한 말에 수연은 가슴이 찔려 뜨끔했다. 아무리 냉정하게 마음을 먹는대도 차마 휘문에게 진심을 알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네 눈빛 때문에 너를 원했던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수연은 마음을 다지고 미소를 지으며 청했다.
"우리 집에 갈래? 가서 저녁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