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5)

 12년 후

수연은 멋이고 뭐고 다 뿌리치고 아이보리 캐시미어 롱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가죽 장갑까지 끼고서는 목을 한껏 움츠려 걸었다. 

심한 독감으로 이틀 결근을 하고 출근하는 금요일이었다. 어머니의 국화차 덕분에 잔병치레 없이 스물여섯 해를 보냈는데, 

스물일곱 해에 접어들자마자 지독한 독감을 앓았다는 건 뭔가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확 늙어버린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어, 언니!"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하루가 뛰어와 인사를 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쯧쯧, 며칠 새에 얼굴이 아주 홀쭉해졌네요."

 "홀쭉해진데다가 피부도 퍼석퍼석해졌어. 이 화장 뜨는 것 좀 봐."

 "화장하지 말지 그랬어요. 백만 불짜리 피부에 화장은 뭐 하러 해요."

 "코를 하도 풀어서 코가 새빨개졌단 말야. 화장 안 하면 낮술이라도 한 잔 걸친 줄 알 거야."

그리고 수연은 훌쩍 코를 마시고 종종 걸음으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갔다. 금세 훈훈한 공기가 밀려와 언 뺨을 살살 녹여 주었다.

 "언니 없으니까 사무실이 아주 썰렁했어요. 다들 언니만 찾고 삐짐이야.

 언니 커피 맛없다고 하면서도 왜 다들 언니한테 커피 타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글쎄 말이야. 나도 아주 귀찮아 죽겠는데."

 "그럼 각자 좀 타먹으라고 해요. 언니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타주니까 자꾸 더 그러는 거예요.

 언니 때문에 우리 사무실 남자들 버릇이 아주 나빠졌어요. 근데 차는 어쩌고 걸어와요?"

 "어, 저 그게……."

 "또 박았어요?"

수연은 장갑을 벗고 목도리를 풀며 멋쩍게 대답했다.

 "살짝 긁혔어. 우리 동네 들어가는 데가 좀 좁거든."

 "그럼 또 수리 맡긴 거예요?"

 "응. 나 쉬는 김에 좀 쉬라고. 내 차,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 심하잖아."

 "그 딱정벌레 고치려면 수리비 또 엄청 깨지겠네요. 하긴 언니는 뭐 돈 걱정은 없으니까. 그래서 택시 타고 왔어요?"

 "아니. 우리 아저씨가 요 앞까지 태워줬어."

 "맞아. 언니네 운전기사 있댔죠."

수연은 핸드백과 목도리와 장갑을 한 손에 쥐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연은 놀자판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4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 학교 앞에 옷가게를 차렸었다. 

처음에는 의욕도 넘치고 재미있었는데 차츰 신경 쓸 것들도 많고 장사도 잘 안 돼서 관두고 말았다. 

졸업 후에는 커피숍도 해보고 액세서리 가게도 했었는데 별 재미를 못 붙였다. 

아버지로부터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녀석이라는 판명을 받고서 억지로 취직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의 친구 소개로 입사를 하게 된 회사여서 입사한 그날부터 낙하산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처음엔 불쾌하고 화도 났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1년이 넘게 버티고 있으니까 직장 생활이 그나마 맞는 건지도 몰랐다.

 "운전 경력 3년찬데도 아직 그러면 언닌 아무래도 운전 체질 아닌가 봐요. 팔자 좋게 뒷자리에 타는 체질인가 보네요."

 "팔자만 좋으면 뭐하냐, 능력이 없는데."

 "무슨 능력요?"

 "사람들이랑 노는 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게 없잖아. 좋아하는 게 없으니까 잘하는 게 없고,

 잘하는 게 없으니까 뭘 해도 재미가 없고. 그렇다고 이 청춘에 밤낮 빈둥빈둥 놀자니 면구스럽고."

 "참 복에 겨운 고민이네요. 나 같으면 회사 안 다녀도 된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하고 여행이나 실컷 다니겠다.

 아버지 부자겠다, 매인 곳 없겠다, 뭐가 걱정이에요."

 "흠, 정말 여행이나 다녀볼까. 나갔다온 지도 벌써 꽤 됐네."

 "아, 약 오르니까 팔자 좋은 소리 그만해요."

 "휴가 때 다녀오면 되잖아."

 "매년 계획은 휘황찬란하게 짜는데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더라구요. 이게 월급쟁이의 비애라는 거예요."

 "다른 직원들은 휴가 때 잘만 다녀오던걸 뭐. 월급쟁이의 비애가 아니라 하루의 비애네."

수연은 키득키득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후배 하루가 눈을 흘겨도 이제는 농담으로 '반사'할 수 있었다. 

하루가 시샘을 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수연을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수연이 소란스럽게 돈을 과시하는 타입이 아닌데다가 시원시원히 밥도 잘 사기 때문이다. 

덜렁거려서 상사한테 야단을 맞기도 하고 회식 때는 망가져가면서 분위기를 살리는 수연은 동료들과 무리 없이 잘 섞였다. 

그런 자연스럽고 솔직한 수연의 모습에 주는 것 없이 밉다하던 하루도 차츰 마음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자, 수연 씨도 나왔으니까 신입사원 환영회 오늘 할까?"

감기약에 취해 몽롱한 채로 흐물흐물 앉았는데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팀장의 말에 사원들은 모두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수연 씨, 어때? 갈 수 있지?"

 "수연 씨 꼭 가야 돼. 수연 씨가 안 나와서 우리 계속 미뤘잖아. 우리 팀 분위기 메이커 오수연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회식을 해."

 "언니, 몸이 아직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아, 좀……."

 "오 선배님 가요. 저 오 선배님의 그 유명한 '의자쇼' 보고 싶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같이 가요."

 '아, 그대한테 그런 걸 보이고 싶진 않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수연은 생각과 달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았어요. 갈게요."

휘문이 활짝 웃으며 가는 걸 보며 수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휘문을 볼 때마다 참 시원시원하게 잘 생겼다 생각하며 감탄했다. 성

격이 서글서글하고 패기가 넘쳐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박휘문, 그는 이번에 새로 입사한 사원으로 수연보다 한 살이 많았다. 

명문대 졸업을 앞둔, 그러니까 아직 대학 4학년의 풋풋함을 가지고 있고 키도 큰데다가 마스크까지 

수려해서 입사한 그날부터 여사원들이 술렁거렸었다. 탈의실에 향수 냄새가 진동을 했고 옷차림에도 부쩍 신경을 썼다. 

그 파동에 절대 동참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수연은 내심 휘문의 눈길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는 박휘문을 사이에 두고 하루와 수연이 앉았다. 

술을 마시겠다고 회사에 차를 두고 나오는 사람이 많아서 차 한 대당 5명씩 꽉꽉 차 앉게 된 것이다.

 "박 주임, 안 불편하냐? 하필이면 사내놈이 중간에 앉았어? 양쪽 여자들 엉덩이 때문에 엄청 조이겠는걸."

운전을 하는 김 과장의 위험한 농담에 휘문은 얼굴을 붉혔다. 하루가,

 "어머, 과장님. 제 엉덩이가 얼마나 작은데요."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걸 들으며 수연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수증기 낀 유리에 대었다. 

보통 때 같으면 김 과장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주도했겠지만 오늘의 수연은 갈대처럼 흐느적흐느적했다. 

근데 멀쩡히 재잘거리던 하루가 갑자기 기운 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아움, 졸리다."

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루를 보았다. 하루는 스스럼없이 휘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수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 저래도 되는 거였나? 옆에 든든하고 따뜻한 어깨를 두고서 난 왜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지? 바보.

수연은 경쟁하듯 휘문의 어깨를 빌리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더 갖다 붙이고서 끙끙댔다.

 "아, 어지러워."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머리가 좀……."

그러자 휘문이 손을 뻗어 수연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순간 수연은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혀 씨익 웃었다. 

휘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스쳐간 관자놀이 부근이 온기에 젖어 따스해졌다. 

다른 쪽 어깨를 하루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가 않았다. 

휘문의 손이 자신을 끌어당겼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휘문에게서 풍기는 미세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수연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모처럼의 회식이어서 그런지 다들 흥이 올라 술잔이 많이 돌았다.

 "오늘은 안 돼요. 술 안 마셔도 감기약 때문에 몽롱하단 말이에요."

 "몽롱하다니, 유부남한테 그런 유혹적인 발언을 하냐. 아, 가슴 뛰네."

 "과장님 심장은 치마 입은 여자만 보면 뛰잖아요."

 "무슨 말씀을, 이래봬도 어린이와 노인네는 가린다구."

 김 과장에 이어 윤 대리까지 거들고 나섰다.

 "농담 그만하고 이거나 마셔. 한 잔 마시면 감기가 똑 떨어진다니까. 수연 씨는 술이 들어가야 잘 놀잖아. 그러니까 빨랑 마셔."

 "야, 오수연. 벌주 안 마시면 일 년 내내 재수 없다, 너."

수연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건 순전히 감기 탓만은 아니었다. 

맛있는 생선회를 먹고 매운탕까지 먹고 나니까 기분이 훨씬 나아진데다가 옆자리에 앉은 

휘문이 생선의 맛있는 부위를 챙겨주고 신경 써주는 바람에 어리광까지 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 놓고 편안히 기대었던 휘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마시면 안 됩니까, 윤 대리님."

 "어, 흑기사다!"

 "오, 되지, 돼."

 "그럼 제가 마시겠습니다."

용기 있게 나선 휘문이 폭탄주를 마시는 동안 여사원들의 깔깔한 눈초리가 수연에게로 날아들었다. 

수연은 기분이 좋은 티를 숨기지 않고서 뿌듯한 표정으로 휘문을 응원했다.

 "와, 잘 마시네. 고마워요, 흑기사님. 자, 안주."

하고서 휘문의 입에 파인애플을 넣어주었다. 이를 본 남자들의 입에서 부러움의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아 씨, 내가 흑기사할걸. 자식, 좋겠다."

 "오, 심상찮은데. 둘이 벌써 눈 맞은 거 아냐?"

그 추측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수연은 휘문과 사랑의 듀엣곡을 불렀다. 

감미로운 선율에 무르익은 분위기는 수연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다. 

수연은 장난기 어린 휘문의 미소와 부딪칠 때마다 상큼한 과일을 문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회식이 있은 다음날부터 수연은 휘문과 부쩍 친해졌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해졌다. 

비록 수연이 입사 선배이고 나이는 휘문이 한 살 많았지만 쿨한 성격의 젊은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말을 놓기로 했다.

 "이번에 뉴욕에서 온다는 그 애널리스트 말야."

 "3년 계약에 연봉 35억 받는다는 사람? 그 사람 왜?"

 "총각이래."

 "어머, 정말?"

 "아이구, 좋아한다. 여자들은 하여간 돈 많은 남자라면 눈이 벌개져서 덤벼들지."

 "남자들은 뭐 돈 많은 여자 안 좋아해요? 수연 언니 처음 들어왔을 때 남사원들이 얼마나 껄떡댔게요.

 지금도 몇몇 분은 미련을 못 버리고 있잖아요. 총무부 유 대리님, 정보시스템팀 황 대리님, 영업부 지 과장님……."

 "어허, 껄떡대다니. 그리고 수연 씬 워낙 미모가 출중하니까 그런 거지. 우리 회사 바비인형 아냐.

 그 정돈 돼야지 남자들도 껄떡댈 투지가 생기는 거 아니겠어. 수연 씨 같이 쭉쭉빵빵에 얼굴까지 예쁘기가 쉽지 않잖아. 안 그러냐, 오수연?"

 "네?"

수연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지금 바쁘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나스닥 지수 차트 이제 도착했단 말이에요. 흑흑, 어떡해요, 윤 대리님. 어떻게 좀 해줘 봐요."

 "헉! 그걸 아직 안 올렸어? 하여간 숫자만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요즘엔 얼굴 예쁜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는데……."

 "윤 대리님!"

 "아, 알았어. 왜 화는 내냐, 간 떨리게. 어이, 휘문 씨가 좀 도와줘. 저러다가 또 팀장님한테 한소리 듣겠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덧 사무실에는 휘문과 수연만이 남아 있었다. 

수연은 기지개를 켜다가 휘문의 눈과 마주치고는 움찔 놀랐다.

 "아직 퇴근 안 했어?"

 "수연 씨 되게 열심히 한다."

 "원래 그래. 히힛, 솔직히 말하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속도가 더뎌서 그래.

 남들 한 시간이면 끝날 걸 서너 시간 붙들고 있어야 되거든. 그것도 꼭 하나씩은 틀리고.

 근데 휘문 씬 여태 뭐하고 있었어? 설마 나 기다린 거야?"

 "아니, 나도 보고할 게 좀 있어서. 다 끝났어?"

 "아니. 재무제표 분석 리포트 아직 못 썼어. 그래도 그만 할래. 지쳤어 정말. 아, 피곤해."

 "그럼 가자. 배고프다."

 "그래, 밥 먹자. 내가 쏠게. 뭐 먹을까?"

수연은 보고할 게 있다는 휘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팀장으로부터 꽤 인정받을 만큼 일을 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연은 자신을 사무실에 혼자 남겨둘 수가 없어서 휘문이 남아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거리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차들은 쌩쌩 지나는데 인적은 거의 없었다. 꽃샘추위에 귀가 얼얼 시린 밤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군데군데 불빛이 남은 빌딩을 뒤로 하고 걸었다. 

휘문이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의 감자탕을 먹고 싶다고 해서 가는 중이었다.

 빠, 빠앙?

갑작스런 날카로운 경적에 수연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휘문이 팔을 뻗어 수연을 자신의 품에 끌어당긴 것과 동시에 수연의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쌩 지나쳐갔다.

 "엄마앗!"

 "야, 인마!"

휘문은 흥분하며 오토바이 뒤에 대고 분노를 터트렸다.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수연은 휘문의 강한 팔 힘에 허리가 묶여서 숨이 가빴다. 

바로 눈앞에 휘문의 하얀 와이셔츠 깃이 보였고 그의 향기가 민감하게 코를 자극했다. 

그때 수연의 눈에 화가 난 휘문의 눈이 들어왔다. 수연은 불이 뿜어지는 것같이 강렬하고 매서운 눈빛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휘문의 쏘는 눈빛이 수연의 가슴에 와 콕 박혔다. 그 눈빛을 품은 수연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아, 저 눈! 저 눈……

"괜찮아?"

 "응, 괜찮아."

 "수연 씨가 안쪽에서 걸어."

화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말투였지만 수연은 오히려 은밀히 기뻤다. 

휘문이 신경을 쓰고 화를 내는 것이 모두 자신을 배려해서라고 생각하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손을 뻗치기도 전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던 그 편안하고도 익숙한 느낌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수연의 손을 잡아당겨 자리를 바꾼 뒤에도 휘문은 손을 놓지 않았다. 

수연은 찬바람에 손등이 차가워지는데도 손바닥에는 땀이 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꼭 쥔 휘문의 손이 너무도 편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온기가 수연을 흔들어 놓았다.

 두 사람은 감자탕을 먹고 나와 차를 마셨다. 창밖의 바람 부는 거리를 보다가 수연이 가볍게 입을 뗐다.

 "휘문 씨."

 "응?"

 "나 휘문 씨 좋아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수연은 반은 농담인 것처럼 싱긋 웃으며 고백했다. 그러자 휘문도 장난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아직도 날 안 좋아한단 말야?"

 "심각하게 좋아해도 될지 고민 중인데, 휘문 씨 협조가 필요해. 혼자 설레발치기는 싫으니까."

 "혹시 지금 나한테 사귀자고 말하는 거야?"

 "응."

수연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히죽히죽 웃으며 농담처럼 얘기하던 휘문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수연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보자 헛기침을 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당황스런 얼굴로 말했다.

 "내, 내가 여자들한테 오해하는 행동 많이 하나보지? 난 그냥 친절하게 하는 것 뿐인데, 그게 참, 여러 가지로 곤란하게 하는 것 같다."

 "무, 무슨 뜻이야?"

 "수연 씨니까 솔직히 말할게. 사실 입사한 날 이후부터 오늘까지 사귀자고 청한 여사원이 일곱 명이야. 수연 씨가 여덟 번째."

 "뭐!"

세상에! 수연은 엄청 놀라고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끄덕끄덕했다.

 "뭐, 그럴 수 있지. 나도 프러포즈라면 스물 몇 번쯤인가 받았으니까."

 "에이, 설마."

 "그래도 내가 프러포즈하는 건 첨이야. 내 나이 스물일곱이잖아. 지난 것까지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아. 상

관없어. 중요한 건 휘문 씨 마음이니까."

 "지금 대답해야 해? 나한테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

그 말에 수연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수연은 휘문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확인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휘문이 마음이 있다면 수연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퍽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을 달라니, 그 대답은 수연의 짐작이 착각이라는 결론이었다. 

깨달은 수연은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자존심상 절대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 됐어. 그렇게 시간 끌면서 고민하고 싶지는 않아. 지금처럼 그냥 회사 동료로 지내."

 "그게 아니라……,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 나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 24시간만이라도 줘."

24시간이 아니라 24초를 달라고 해도 다친 수연의 자존심에는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수연은 휘문이 감격해 마지않으며 축복이라도 받은 듯 흔쾌히 응하리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자존심이 무참히 상해서 잠시도 휘문을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참고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는 오그라든 자신감을 한껏 부풀려야 했다.

 "됐다니까. 그냥 없던 걸로 해. 내일까지 기다리면서 고민하는 것도 귀찮단 말야. 그만 가자. 피곤하다."

 "어, 수연 씨! 오수연!"

수연은 벗어놓았던 코트를 들고 후닥닥 커피숍을 나와버렸다.

 바보, 바보! 나쁜 자식. 그럼 손은 왜 잡았냔 말야. 뭐 하러 여태까지 남아 있었냐구. 어깨는 왜 빌려주고…….

수연은 스스로를 질책하다가 친절을 남발한 휘문을 원망했다. 그래도 상처받은 가슴에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결국 어리석은 건 자신이었다. 외롭게 남은 건 자신의 공허한 마음이었다.

 "아직까지 복사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몇 장이나 하는 건데?"

 "말 시키지 마세요. 열 받아서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에요."

 "왜 또?"

수연은 쌓아둔 종이를 한 장 집어 윤 대리에게 내밀어 보였다.

 "뭐야? 또 앞면만 복사한 거야? 으이구, 도대체 언제쯤이면 제대로 복사할래? 어째 신입들보다 더 못하냐?"

 "이 복사기가 저랑 안 친하단 말이에요. 입사한 그날부터 절 거부하는 게 아직까지 절 깔본다고요."

 "복사기랑 안 친한 게 아니라 건망증이 심한 거겠지. 한 번 해보면 딱 익히는 걸 넌 어떻게 매번 까먹어.

 병원에 가봐. 아마 의사가 다발성 인지장애라고 할 거다."

 "그게 뭔데요?"

 "치매."

 "어머, 그런 것도 아세요? 치매가 그런 거였구나. 그거 의학 용어죠? 윤 대리님은 정말 모르시는 게 없네요.

 흠, 확실히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나 보다. 난 박식한 사람들 보면 진짜 존경스럽던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는지 진짜 신기해요. 그런 거 다 기억하면 머리가 터지지 않나."

수연의 천진하리만치 진심 어린 감탄에 부끄러워진 윤 대리는 칭찬받은 기쁨을 감추려고 일부러 야박한 소리를 했다.

 "A4 용지 한 박스 사서 버린 거 다 채워놔. 알았어?"

 "어, 그냥 가시게요? 좀 도와주지."

 "뭐가 이쁘다고 도와주냐?"

 "어, 어. 그러면 지난주에 룸살롱 가서 쓴 접대비 내용에 대해서 말해도 돼요? 직원들이랑 마신 거라고 팀장님한테 확 불어버릴 건데."

 "야!"

 "히히히."

 "으이구, 내가 어쩌다 이 여우한테 걸려서는. 저리 비켜봐."

 "고맙습니다."

수연은 등 뒤로 휘문이 지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

수연이 휘문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생각한 다음날부터 휘문의 눈길은 예전보다 더 수연을 향했다. 

수연이 구내식당에서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밥을 먹을 때도 휘문은 보고 있었다. 

그리고 팀장에게 야단을 맞아 화장실에서 짜증을 내고 있는 수연을 윤 대리가 달래고 있을 때도 휘문이 지켜보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밝고 쾌활하게 자신을 대하는 수연을 보며 휘문은 점점 미묘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설마 장난삼아 그냥 말해 본 건 아니겠지?

태연해 보이는 수연 앞에서 휘문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초조한 자신이 이상하고 찜찜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수연 씨,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응? 왜?"

수연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휘문을 보았다.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긴데? 지금 하면 안 돼? 나 저녁에 친구들이랑 영화보기로……."

 "우리 사귀자."

헉! 수연은 그대로 굳어서 휘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가 휘문의 뒤로 역시나 굳어 있는 직원들의 표정을 보게 됐다. 

전화를 받던 윤 대리도 정지했고 일어서려던 하루도 멈춰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나, 나가서 얘기하자."

 "예슨지 논지만 대답해 줘."

 "나가서 얘기하자니까."

 "지금 들어야겠어."

 "여기서 어떻게 얘기해. 나가."

수연은 허둥지둥 휘문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휘문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전혀 창피한 얼굴도 아니고 오히려 이 관중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대답해. 예스야 노야."

 "나,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줘야지."

 "수연 씨도 나한테 시간 안 줬었어."

아, 그런 것까지 밝히다니. 이제 오수연이 박휘문에게 프러포즈했다가 퇴짜 맞았었다는 소문이 회사 전체로 퍼질 게 분명했다. 

수연은 곤혹스런 눈으로 호기심에 찬 직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 상황이 어디론가 생중계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긴장감이 돌았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나만 보고 대답해."

휘문은 수연의 어깨를 붙잡고는 두 눈을 마주치게 했다. 수연은 몸속으로 찌릿찌릿한 느낌이 흐르는 걸 느꼈다. 

진지하고도 확신에 차 있는 휘문의 눈빛에 수연은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자존심 상했던 것, 창피했던 게 다 날아가 버렸다.

 "알았어."

 "예스?"

 "그래."

 "야호!"

휘문의 환호성 뒤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연은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축하 인사를 받았다. 

정신이 없어서 누구와 악수를 하고 누구와 포옹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두 사람의 연애 선언이 올라온 것은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두 사람이 회사 앞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휴대폰 카메라로 찍혀서 '범죄 현장'처럼 나돌았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한 2세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두 사람을 따라다니던 호기심의 시선들이 조금씩 시들해져간 건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미안, 오늘 동기생들이랑 모임 있는데 깜빡했어."

 "그럼 진작 얘기했어야지. 40분이나 기다렸단 말야."

수연은 회사 옆 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전화를 받았다. 

다른 사원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붙어 다니는 것도 보기 흉할 것 같아서 가끔씩은 이렇게 007작전을 썼다.

 "미안, 미안. 끝나면 전화할게."

 "전화한대 놓고 또 게임하려고?"

 "아냐. 게임은 주말에만 한다니까."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실망을 시켰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 때문에 토라져 화를 내면 휘문이 싫어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수연은 짜증이 났다. 천하의 오수연이 어째서 박휘문에게 잡혀 이렇게나 휘둘리고 있는지 한심했다. 

박휘문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맥없이 만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에 씐 거라니까."

수연은 투덜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휘문과 사귀고부터 집에서 저녁을 먹은 게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처럼 일찍 들어가 어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겠노라고 생각하며 어머니가 좋아하는 화과자를 샀다.

 "다녀왔습니다."

 다정하게 맞아주는 건 오늘도 아줌마가 먼저였다.

 "오늘은 일찍 오네. 저녁 먹어야지."

 "네. 엄마는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에서 저녁 먹을 생각을 다했니? 오늘 아침 해가 서쪽에서 떴나보다."

방에서 나오는 어머니를 보고 수연은 들고 있던 화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자, 엄마 거야. 근데 아빠는 아직 안 들어오셨어? 요즘 계속 늦으시네. 술도 부쩍 많이 드시고. 엄마, 바가지 좀 그만 긁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손이나 씻고 와."

 "혈압도 안 좋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야?"

 "알아서 챙기시는 분이니까 걱정 마라."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가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수연은 2층 계단을 올랐다. 

거기서부터는 공기가 달랐다. 그 공기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수연의 표정은 흐릿하게 굳어져 갔다. 

그곳은 그리움의 고통과 슬픔이 떠도는 공간이었다.

지환이 떠나고부터 수연은 매일 이 계단을 오르며 과거에 젖어들었다. 

어린 시절 수연은 멀쩡한 미끄럼틀 놔두고 계단 난간을 타고 놀던 개구쟁이였다. 

그런 수연을 다치지 않게 받치느라 지환은 땀을 뻘뻘 흘렸었다. 

반질반질 닦은 마루 위에서 지환이 미는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놀기도 했다. 

아빠가 아끼시는 도자기를 깨뜨려 꿇어앉아 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수연은 예전의 모습들을 회상하며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가 꼭꼭 닫혀 있는 지환의 방문을 보며 지환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리움에 쓸쓸했다. 

망설이다가 지환의 방문을 열었다. 지환이 떠나고 며칠 후 지환의 물건은 깨끗이 치워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알게 된 수연은 울고 발버둥치며 지환의 영역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단호한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무기력하게 처분당한 지환의 방은 손님용 방으로 개조되었다. 

수연은 중후한 카키색 침대 시트와 마호가니 탁자, 의자와 조명 세트를 싫은 눈으로 보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곤 창가에 걸린 국화 포푸리뿐이었다.

수연이 잠을 깬 것은 새벽녘이었다. 창밖에는 이른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밤이면 수연은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용케 잠이 들었다가도 어김없이 꿈을 꾸고는 벌떡 일어나 앉고는 했다.

 꿈에선 언제나 지환의 모습이 나타나 떠나기 전날 밤의 공포와 흥분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그때의 두려움과 수치심에 휩싸이게 되면 미칠 듯한 그리움과 미움에 짓눌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 4시. 수연은 술렁이는 느낌이 들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2층 난간에 기대어 아래층을 보니 아버지가 술에 취해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아직도 실내복 차림인 어머니가 꿀물 같은 걸 들고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개새끼들! 어디 니들 마음대로 해봐! 나쁜 새끼! 에잇, 더러운 놈들!"

수연은 욕설을 퍼붓는 아버지를 보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근 한 달 가까이 밤마다 아버지의 주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회사 일이 뭔가 대단히 꼬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알아서 잘하실 것이라 믿었다. 

자라서면서 두세 번 경제적으로 위태로웠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잘 헤쳐 나오셨으니까 말이다.

어두운 방, 침대에 홀로 앉은 수연은 깊이 스며 있는 고독감을 불러냈다. 

빗소리와 어둠과 추억, 그 익숙한 벗을 붙들고서 그렇게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게 뭐야?"

수연은 전화하기로 한 약속을 어긴 휘문에게 이틀간 침묵의 벌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휘문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은 것이다.

 "집에 가서 들어봐. 어제 밤새도록 녹음한 거야. 내가 이거 녹음하느라고 식구들이랑 동네 어른들한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그 서러움은 필설로 다 못할 거다."

 "뭔데요? 뭘 녹음한 건데요?"

엿듣던 하루가 다가와 냉큼 CD를 집어 들었다. 수연은 못 본 척하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우리 수연 씨가 좋아하는 노래. 밤새도록 불렀더니 목이 다 쉬었네. 내가 마음을 다해서 멘트까지 넣었으니까 잘 들어봐."

 "어머, 박 주임님이 직접 부르셨단 말이에요? 정성이 장난 아니네요. 수연 언니 감동 먹겠다."

 "듣고 화 풀어. 알았지?"

 "언니, 지금 들어보면 안 돼요? 지금 들어봐요, 네?"

 "아, 안 돼!"

수연은 놀라서 하루의 손에서 CD를 뺏었다. 하루가 키득키득 웃고 휘문도 만족한 듯 싱긋 웃었다. 

수연은 양쪽으로 눈을 흘기며 CD를 핸드백 안에 챙겨 넣었다.

 "근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나타나는 거야?"

 "누구요, 김 대리님?"

 "새로 온다는 리서치부장 말야. 온다면 제시간에 재깍재깍 와야 될 거 아냐."

 "어머, 그 이사 대우 받고 온다는 애널리스트 말이에요? 근데 왜 말투가 그래요? 이 자식, 막 그렇게 불러도 돼요?"

 "야, 나랏님도 뒤에선 욕하는 법인데 뭐 어때. 나이도 나보다 어리다더만. 이제 겨우 서른하나란다. 

누군 아등바등 일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갖고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등이 휘는데,

 자식이 이제 서른 갓 넘어가지고 십억 연봉에 보너스까지 받는다잖아.

 거기다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다는데 내가 밸이 안 꼬이게 생겼냐. 에잇, 밥맛없는 자식."

 "소문에 듣자하니까 엄청 건방지다고 하더라구요. 비서실 양희 씨가 그러는데 자기 볼일 있다고 사장님이랑 약속도 취소했대요.

 배짱이 장난 아니죠?"

 "그게 배짱이냐, 어린놈이 시건방진 거지."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게 먹히죠. 아무나 그런 게 먹히겠어요."

 "야, 미국에서 박사 학위 받았다고 다 실력이 있는 거냐? 학위도 경상 계열이 아니고 공학 쪽이라며?"

 "둘 다 있다던데요."

휘문이 끼어들며 열을 올렸다.

 "그 사람 본토 메릴린치 수익률 최강전에서 1등해서 데뷔했잖아요. 그때 기록이 역대 최연소 우승자에 최고 수익률이었대요.

 그 사람 리포트 하나에 기업 하나가 울고 웃고, 어쩔 땐 나스닥 전체가 들썩들썩 한답니다.

 재작년에 나스닥 반도체 관련주 급등한 거 있잖습니까. 그 사람이 쓴 두 장짜리 리포트 때문이래요."

 "우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우리 회사에 오는 거예요? 회사에서 돈 들일 만하네요."

 "같은 회사에 근무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얼굴이 붉어지도록 흥분해서 신이 나 말하는 휘문의 주위로 사원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모두 새로 온다는 젊은 이사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남사원들은 부러움 반, 시기 반으로 관심이 많았고, 

여사원들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참 내, 그렇게 대단한 자식이 뭐 하러 우리나라에는 온대? 미국에서 잘 나가면 계속 거기 있지. 

안 그래도 좁은 땅덩어리에서 박 터지겠구만, 누구 기 죽이려고……."

 "왔어요!"

 "응?"

 "지금 팀장님이랑 오고 있어요! 아, 가슴 떨려!"

 "가슴은 왜 떨려? 선이라도 보냐?"

 "꼭 연예인 같다니까요. 상체가 각이 딱 잡힌 게 완전 롱다리에 얼굴은 엄청 샤프하고……."

 "샤프는 무슨 얼어 죽을 샤프야. 눈 삐었냐? 그저 남자만 보면 애가 정신을 못 차리고, 쯧쯧."

김 대리의 타박에도 하루의 흥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말소리와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새로운 이사와의 대면을 기다렸다.

수연은 책상 위에 있는 거울로 살짝 얼굴을 보다가 머리카락이 삐어져 나온 걸 보고 핀을 뽑았다. 

재빨리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고 다시 핀을 꽂으려는데 입구에 장신의 남자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여기가 투자분석팀입니다."

느긋하게 앉아서 핀을 고정시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천천히 일어서는데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보았지만 앞에 선 휘문의 머리 때문에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았다. 포기하고 그냥 소리만 듣기로 했다.

 "이번에 리서치부장으로 발령받은 석지환입니다."

석, 지환?!

순간 깜짝 놀란 수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수연의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에서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다. 

수연은 놀라고 당황해서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팀장의 날카로운 질책의 눈초리가 닿고 주위에서도 빨리 끄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수연은 전화기의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그때 굵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받아요, 오수연 씨."

수연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알아 본 순간 수연은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비틀거렸다. 순간 지환이 재빨리 손을 뻗쳐 쓰러지려는 수연의 허리를 잡아 부축했다.

 "헉, 헉, 헉……."

수연은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눈앞이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지환의 품으로 쓰러지기 직전 수연의 마른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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