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잃은 뻐꾸기
"지환 오빠 유학 며칠 남았어?"
"일주일."
"너 되게 꿀꿀하겠다."
"응.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우리 오빠 공부 잘하잖아. 한국 땅에서 썩히기는 아깝다고 하시는데 그건 나도 동감이거든."
"쯔쯔, 오수연 일생일대의 비극이구나. 이제 너 지환 오빠 없이 어떻게 살래?
책가방도 네가 들어야지, 준비물도 알아서 챙겨야 되지, 도시락 같이 먹을 수도 없지. 그리구 오빠 용돈도 거의 너한테 다 썼었잖아."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냐. 책가방 같은 거 내 손으로 들 수 있어. 내 용돈 오빠한테 다 써도 아깝지 않아. 슬픈 건 그따위 것들 때문이 아냐."
"그럼 왜? 숙제해 줄 사람 없어서?"
"야!"
"농담이야, 농담. 알지, 내가 왜 모르겠냐. 너 지환 오빠 하루라도 안 보면 눈에 가시가 돋는 애잖아.
작년엔 수업 땡땡이 치고 지환 오빠 수학여행까지 따라갔었지. 아무튼 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남매야."
"우리 집에서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 아빤 항상 바쁘고 엄마랑은 얘기해도 재미가 없고."
"알 만하다. 지환 오빠가 너한테 좀 잘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매가 아니라 애인 사이인 줄 알 걸."
"자꾸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따라가고 싶어 미치겠단 말야. 오빠 가방 속에라도 들어가서 따라가고 싶어."
"따라가지 그래? 가서 밥하고 빨래해 주면 되잖아. 그거라고 네가 제대로 하겠냐만 오빠 심심하지 않게 재롱은 떨 수 있잖겠니."
"네가 우리 엄말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런 얘기했다간 우리 엄마한테 아마 맞아죽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오빠랑 너무 붙어 다닌다고……."
수연은 자신의 말에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더 엄해진 것이 별장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황홀한 벚꽃의 로맨틱한 정취와 충동과 호기심에 이끌린 입맞춤을 들킨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들킨 거라면 보다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깔끔한 엄마의 성미로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오빠와 함께 엄청나게 혼이 났을 게 틀림없다.
남매끼리 뽀뽀 좀 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야단맞을 일인가?
사이좋은 남매끼리 손잡고 껴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아, 하지만 뽀뽀는 안 되는 걸지도 몰라. 역시 내가 이상한 걸까.
수연은 불안한 얼굴로 심각하게 입을 뗐다.
"있잖아 상희야."
"응?"
"그, 그게 저기 있잖아……."
"왜? 뭔데?"
"너, 그러니까 네 오빠랑 말야, 손잡고 다니니?"
"뭐? 우엑! 미쳤니? 그 밥맛이랑 손을 잡게!"
"왜? 너 오빠 안 좋아해?"
"야, 그놈은 오빠가 아니라 웬수야 웬수. 날 얼마나 구박하는데. 만날 쥐어박고 심심하면 내 주머니 뒤져서 돈 훔쳐가고,
엄마 몰래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고 이상한 잡지나 보고. 으이구! 더럽긴 또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
지지리 게을러서 씻는 거 되게 싫어하고 밥 먹고 양치질도 잘 안 해. 걘 완전 인간 말종이라니깐."
"와, 진짜? 그래도 그렇지, 너 말 좀 심하게 한다."
"야, 지환 오빠 같은 오빠가 잘 있는 줄 알아? 넌 진짜 복 받은 줄 알아야 해. 너랑 지환 오빠 같은 남매는 박물관에도 없을 거다."
"아, 그러지 마. 그러니까 또 눈물나려고 하잖아."
수연은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교실 벽에 달린 선풍기가 뜨뜻미지근한 바람을 일으키며 털털털 돌았다.
그때 상희가 호들갑을 떨며 팔을 잡아당겼다.
"야, 야, 쟤야, 쟤."
수연은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가?"
"쟤 말야, 쟤. 쟤 언니가 학교 화장실에서 애 낳았다잖아."
"뭐?"
수연은 놀란 눈으로 상희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린 뒷문으로 복도에 선 한 여학생이 보였다. 날씬한 체구에 얌전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언니가 쟤 언니랑 같은 고등학교 다니거든.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쟤 언니 며칠 전에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화장실 바닥이 아주 피바다였다는 거야.
근데 자기는 임신한 줄도 몰랐대. 더 기가 막힌 건 뭔 줄 알아? 애 아빠가 쟤 삼촌이래."
"서, 설마! 말도 안 돼. 삼촌이 어떻게……."
"완전 당한 거지. 그러니까 쟤 지금 전학 간다잖아."
"전학까지 가야 돼? 너무 안됐다."
"쟤 전학 가는 게 문제냐. 쟤 언니는 얼마나 끔찍했겠어."
"맞아. 불쌍하다……."
수연은 와 닿지 않는 막연한 감정으로 중얼거리며 꾸벅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았다.
그때 돌아서 가려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고 수연과 정면으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순간 수연은 움찔 놀라서 얼른 머리를 돌렸다.
"어떡해, 어떡해. 나 봤어. 우리 얘기 들었나봐."
"그럴 리가 없어. 안 들릴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희도 놀랐는지 덩달아 어깨 안으로 머리를 푹 넣었다.
잠시 후 힐끔 복도를 본 수연은 아이가 없는 걸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도 아이가 차갑고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보충수업을 마친 수연은 지환이 떠난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열 받은 선풍기처럼 툴툴툴 걸어 집으로 갔다.
집 앞마당에는 수연이 좋아하는 소국이 만개해 있었다.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소국의 이름은 '귀부인'. 고결한 자태의 대국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달리,
수연은 새침 떠는 귀부인 같은 모습의 소국을 귀여워했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그 귀여움도 수연의 눈에 들지 못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오니? 아줌마, 수연이 빙수 만들어주세요."
"네, 사모……."
"안 먹어요."
수연은 '툴툴툴'의 표정을 유지한 채 2층 계단을 걸었다.
수반에 국화를 꽂던 어머니는 손길을 멈추고 힘없이 계단을 오르는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터덜터덜 힘겨운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슬리퍼 안 신니?"
"귀찮아."
"오수연."
"당분간 나 좀 놔둬."
수연은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잠시 후 들어온 어머니가 딱딱한 목소리로 수연을 꾸짖었다.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 좀 내버려 두라니까. 기운이 하나도 없단 말야."
수연은 문 앞에 장승처럼 선 어머니에게서 머리를 돌려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똑바로 일어나 앉지 못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수연은 거칠게 일어나 앉으며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엄만 나나 오빠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잖아.
천녀지곡인지 천녀유혼인지 사람 머리통만 한 국화만 중요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래? 귀찮단 말야. 엄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나 좀 내버려둬."
수연은 숨 가쁘게 말하고는 울먹이는 눈으로 어머니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수연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제거리는 수연의 수다를 들어주기는 해도 먼저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국화 향이 났고 국화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등이 익숙했다.
어머니의 국화 사랑은 가족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지환과 수연 사이에 연결된 끈을 이해할 수도 자를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교복 구겨진다. 벗어서 걸어둬."
수연은 꼼짝도 않고 앉아 어머니를 보다가 반항심 가득한 동작으로 교복을 벗었다.
팬티와 브래지어차림으로 일어나 옷걸이에 교복을 걸었다.
"됐지?"
"샤워하고 내려와라."
"왜? 피곤한데……."
수연은 경고하는 어머니의 눈빛을 읽고는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
어머니가 나가고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털썩 내려앉았다.
어머니와 무언가를 공감하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어머닌 평소에도 기쁘거나 슬프거나 표정의 변화가 없는 분이셔서 어떤 심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진 일로 바쁘신데다가 가정적이거나 어머니에게 충실한 분이 못 되었다.
이따금씩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는 어색함 없이 즐거운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버지였지만,
그 순간은 너무도 짧고 횟수도 뜸했다. 그래서 대부분 집안엔 수연과 지환의 속닥임뿐이었다.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서 남매는 서로에게 더욱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믿고 의지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서로뿐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찬물로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내려갔다.
"아줌마, 주스 한 잔 주세요."
"네, 사모님."
"아줌마, 주스 싫어요. 콜라로 주세요."
"그래, 알았다."
수연은 아직 심통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줌마가 콜라를 가져왔다. 수연이 한 모금 마시기를 기다린 어머니가 타이르듯 말했다.
"지환이 보내는 거 나도 마음이 안 좋다. 좋을 리가 없지 않니."
뜻밖에 나온 어머니의 진지한 말에 수연은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엄마가 슬픔을 인정하니까 이 현실이 정말로 실감이 나서 더 슬퍼지고 무서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거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지환이 곁에 있을 순 없지 않니. 지환이에게는 지환이의 길이 있어.
그러니까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내줘. 이게 다 지환일 위해서 보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머니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또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어머니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지금 수연은 처음으로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연은 마법 같은 국화 향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가 아니겠니.
언젠간 너도 엄마 품을 떠나서 훨훨 날아가겠지. 엄마는 너희들한테 좋은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그러니까 너도 오빠가 잘 날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줘."
어머니의 '날개' 이야기는 수연에게는 결국 슬퍼도 참으라는 것으로 들렸다.
참는 게 익숙지 않은 수연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하지만 수연은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은 일주일 동안 애써보기로 했다. 지환이 잘 날아갈 수 있도록.
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연중 최고 기온을 기록하며 아스팔트를 녹이던 한낮의 열기만큼 거센 빗줄기가 무섭게 땅을 패고 있었다.
"도시락이 쏟아져 가지고, 밥이랑 김치랑 버스 바닥에 막 나뒹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걔는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한테까지 튕겨가서는 돈 통에 팍 고꾸라진 거야. 이렇게."
수연이 거실 소파에 엎드려 사지를 버둥거리며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젖이 드러나도록 껄껄껄 웃었고 어머니마저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오직 지환만이 싸늘한 눈길로 수연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는 멀쩡하게 수업 잘했었는데 오늘 애가 목에 깁스를 하고 왔지 뭐야.
원래는 수업시간에 엄청 조는 앤데 목이 뻣뻣해서 이렇게 있으니까 졸지도 못하고 땀은 뻘뻘 나고 죽으려고 하더라구.
나한테 노트 빌려달라고 하는데 목에 깁스를 했으니까 이렇게 뻣뻣하게 몸을 다 돌려야 목이 돌아가잖아.
'수연아, 노트 좀 빌려줘.' 이러는 거야."
"으하하하하하! 어허허, 고 녀석 참!"
내일이 지환이 출국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너무 화기애애해서 생뚱맞을 정도였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웃음과 유쾌함이 넘치고 있었다. 보통 때보다 더 명랑하고 애교스럽게 구는 수연의 탓이었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지환은 살의마저 느꼈다. 못 보낸다고, 따라가겠다고 조르며 훌쩍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환이 내일 출국한다는 것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지환은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 같고 수연에게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운하다 못해 슬펐고 침울함을 넘어서 분노가 일었다.
어머니에게서 유학 선고를 받은 그날보다 더 화가 났다.
"널 더 이상 수연이 곁에 둘 수가 없다. 이제 그만 우리에게서 떠나."
"어머니!"
지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공포에 떨며 빌었었다.
하지만 지환을 내보내겠다는 어머니의 의지는 단호했다.
"어머니!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제발!"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지환에게 어머니의 냉랭한 목소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두 번째잖니."
그 낮고 단조로운 어투에 담긴 싸늘함과 매정함에 지환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환이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지환이 수연을 데리고 동네 놀이터에 나갔다가 수연을 잃어버리고 혼자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지환을 매섭게 몰아붙였고 그럴수록 지환은 입을 열지 못했다.
수연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말해! 수연이 어디 있어! 어서 말 못하겠니!"
아무도 지환이 일부러 수연을 두고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외는.
"난 너한테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수연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너 때문에 수연이까지 망칠 수는 없다."
지환의 유학은 수연에게 키스한 장면을 어머니에게 들킨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 이전에도 수연에 대한 지환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물증을 잡히고 만 것이다.
열아홉의 피 끓는 정염을 참아내지 못했던 지환은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어머니에게 반발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지 마라. 다시는 널 이 집안에 들여놓지 않을 테니까."
돌아서는 어머니의 냉혹한 말에 지환은 눈물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불가항력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받을 수 없다면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각오가 수연을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수연이 밝게 웃으면 웃을수록 참을 수 없는 진한 고통이 폭우처럼 지환을 뒤흔들었다.
"당연히 그 버스 회사에서 병원비 다 물어줬지."
"더 버티라고 하지. 이왕 그렇게 된 거 아예 정밀진단 받고 입원실 잡아서 한 며칠 누워 있으라고 해."
"에이, 아빠는. 어떻게 그래."
"어허, 교통사고 후유증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애 부모님은 뭐하신다니? 윤 비서 보내줄까?"
"아, 됐어. 아빤 하여간 남 일에 참견하는 거 되게 좋아해."
"글쎄,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빠가 나서서……."
"늦었다. 그만 올라가서 자렴. 지환이도 내일 장시간 비행기 타려면 피곤할 테니까 일찍 자거라."
"아……."
"네, 안녕히 주무세요."
조촐한 송별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환은 앞서 올라가는 수연을 고통에 찬 눈으로 보고 있었다.
수연마저 자신에게 등 돌리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수연에게서는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비가 아직도 많이 오네. 비행기 뜰 수 있으려나……. 그럼, 오빠…… 잘 자."
"수연아."
"응?"
수연은 방문 앞에서 머뭇머뭇 돌아봤다. 지환은 수연이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다.
"나랑 얘기 좀 하고 잘래?"
"아, 아니."
지환은 수연의 거절에 움찔 놀라서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수연은 짐짓 밝은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굴었다.
"그냥 잘래. 일찍 자둬야 내일 배웅가지. 내일 공항에서 얘기하자."
그리고 수연은 지환이 붙잡을 새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지환은 전신을 옥죄어오는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복도 끝 창으로 악마 같은 어둠과 비명 같은 빗소리가 사납게 휘몰아치며 지환을 위협했다.
지환은 죽일 것같이 덤벼드는 위험에 휘말리고 싶은 유혹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번개가 어둠을 가르며 지환의 얼굴을 할퀴고는 비웃듯 유유히 사라졌다. 지환의 표정은 지옥의 사자처럼 싸늘했다.
"으, 음……."
수연이 간지러운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도 창밖의 빗소리는 여전히 무서웠다.
수연은 하얀 레이스 캐노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쉿."
"오, 오빠?"
얇은 이불 안의 수연이 입고 있는 건 속옷 한 장뿐이었다. 수연은 가슴 위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찌푸렸다.
"벌써 아침이야?"
수연은 다른 한 팔을 빼 눈을 비볐다. 벽에 걸린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를 들어 창밖을 보려던 수연은 문득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지환의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지환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수연은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지환을 보았다.
"무, 무슨 일 있어?"
지환이 고개를 저었다. 수연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야수의 눈처럼 점점 빛을 발하는 지환의 눈빛에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수연은 꼼짝도 없이 누운 채 지환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지환의 손이 이제 이마를 거쳐 뺨으로 내려왔다.
수연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대로 있어."
지환이 막았다. 드러난 수연의 어깨를 잡고는 침대에 꼭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드러난 수연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넌 가만히 있으면 돼. 이대로 가만히……."
수연은 얼어붙은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지환의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와 꿰뚫어볼 듯 날카로운 눈빛이 수연을 꽁꽁 묶어버렸다.
수연은 몸에 닿는 지환의 뜨거운 손길에 숨을 멈췄다. 이런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두려운 눈으로 지환을 보며 물었다.
"오, 오빠 왜 그래?"
그때 수연은 지환의 손이 자신의 가슴 위로 다가오는 걸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 오빠!"
"쉬."
수연은 놀라서 자신의 가슴 위에 얹힌 지환의 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붙잡았다.
지환의 얼굴이 수연의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지환이 숨을 쉴 때마다 수연은 입술 부위에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밖의 빗소리가 묻힐 정도로 심장 박동이 크게 들렸다. 수연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지환이 키스했다. 수연이 밀어내기도 전에 떨어져 나간 짧은 키스였다.
수연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지환을 보았다. 그때 지환의 손이 다시 움직이려 했다.
"오, 오빠……."
"응?"
"오빠……."
"수연아……."
수연은 손을 놓고 말았다. 지난 15년간의 추억과 애정으로 지환을 믿었다.
지환이 자신에게 나쁜 일을 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어도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가 않았다.
자유로워진 지환의 손이 수연의 가슴을 만졌다. 봉긋하게 오른 부드러운 피부와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만졌다.
수연은 수치심에 떨면서도 지환의 눈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지환 역시 숨결이 거칠어지고 눈자위에 열꽃이 올라도 수연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점 아래로 내려가는 지환의 손길에 수연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지환의 손길을 피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여성이 된 이후 처음으로 닿는 타인의 손길이 낯설고 부끄러워서였다.
지환의 손이 배꼽 언저리에 닿았을 때 수연은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지환의 손이 팬티 속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수연은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 어머니 깨실라."
지환의 그 말이 너무도 무서워 수연은 그대로 눕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끔찍하게 두려웠다.
하지만 그에 앞서 너무도 침착한 지환의 목소리와 표정이 수연을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수연은 두려운 눈으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수연을 보는 지환은 완전 딴사람 같았다.
지환은 침대에 앉아서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내려다보듯이 수연을 보고 있었다. 지환은 더 이상 떨고 있지도 않았다.
"오, 오빠…… 무서워."
수연의 호소에도 지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환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엇엔가 쫓기듯 수연의 몸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 감각을 곤두세우고 수연의 팬티 속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음모를 만지고 움찔움찔 떠는 수연의 눈을 보며 수연조차도 한 번도 만지지 못했던 그곳을 더듬더듬 찾았다.
이윽고 지환의 손가락이 그 부위에 닿았다.
"으, 음……."
"흣!"
두 사람은 동시에 느끼고서 충격의 신음을 내뱉었다.
그대로 수연의 몸 위로 올라온 지환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연은 아랫도리에 닿은 지환의 손길이 거북하고 두렵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환의 거친 숨소리에 묶여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말해 줘 수연아."
지환의 목소리는 뜨겁게 쉬어져 있었다. 지환은 수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격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넌 내 거라고 말해 줘."
수연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쿵쾅쿵쾅 뛰어올랐다. 수연은 떨리는 팔을 들어 지환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지환의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짧은 머리칼은 땀에 젖어 반짝였고 열기 번진 피부는 뜨겁게 미끈거렸다.
수연은 지환의 얼굴을 붙잡고서 열에 들떠 있는 눈에 촉촉이 어린 물기를 보았다.
지환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격한 감정을 읽은 순간 온몸이 감전당한 것 마냥 찌릿찌릿했다.
수연이 충격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보고 있자 수연의 다리 사이에 놓인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수연이 흠칫 놀라 다리를 오므렸지만 지환의 손은 더욱 집요하게 수연을 만졌다.
"아, 아, 싫어. 싫어…… 오빠."
"안 된다고 하지 마."
"하, 하지만 오빠……."
"넌 내 거라고, 영원히 내 거라고 말해."
"으, 응……."
"어서, 수연아. 제발……."
지환이 빌었다. 그러니까 수연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불결한 느낌과 수치스러움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환이 부탁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끔찍한 무게로 짓누르는 어둠과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폭우 소리,
그리고 질식할 것 같은 지환의 뜨거운 눈빛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연은 얼어붙은 듯이 누워 떨리는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지환이 몸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넌…… 아니니?"
지환이 뭘 묻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연이 대답을 못하고 꽁꽁 얼어 있자 지환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수연은 두려움과 불안에 찬 눈으로 멀어지는 지환을 보았다.
아, 오빠……. 가지 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돌아서 가는 지환의 등을 본 순간 한기와 함께 외로움이 엄습했다. 이대로 지환이 나가버리면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얼굴 보면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날이 까마득히 멀리 있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내일도 모레도 보지 못한다. 이대로 가버리면……, 이대로 가버리면…….
불안과 공포가 포탄 같은 빗소리에 섞여 가슴을 때렸다. 초조감에 다급해진 수연은 벌떡 일어나 지환을 불렀다.
"오, 오빠……."
문 앞에 멈춰선 지환이 몸을 돌렸다. 수연은 가슴 앞에서 이불을 꼭 움켜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 나…… 오빠 거야."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가지 마, 오빠……."
빠르게 지환이 다가왔다. 수연은 망설임 없이 지환의 품에 안겼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감정이 지환을 붙들라고 외쳐댔다.
수연은 울면서 지환을 꼭 부둥켜안았다.
"울지 마. 울지 마, 수연아."
지환의 입술이 눈물에 닿았다. 한 번, 두 번, 뺨을 스치던 입술이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수연의 입술에 키스했다.
수연은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지환이 하는 대로 입술을 열었다.
뜨겁게 다가오는 지환의 몸짓, 서툴지만 그래서 더 열정적인 몸짓에 눌려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순간 무섭고 두려워서 지환에게 꼭 매달렸다. 지환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미지의 어떤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끌렸으며, 끌리는데도 두려웠다.
무섭도록 분명한 꿈처럼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넌 달아날 수 없어. 네 기억이 날 잊어버려도 네 몸은 날 기억할 거야. 네 몸에 날 새겨 넣을 거니까."
그 말을 들은 수연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마치 그 말로써 끊어지지 않는 질기고 긴 끈으로 지환과 연결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