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색
"야, 오수연이다, 오수연!"
호들갑스런 목소리에 지환은 미간을 찡그렸다.
우르르 복도로 나가는 반 녀석들의 아우성이 듣기 싫어서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동생이 다른 녀석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미치도록 싫었다.
"아, 천사가 따로 없다."
"갈수록 예뻐지네. 야, 웃는다, 웃는다."
지환은 요란 떠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친하기는커녕 잘 알지도 못하는 반 친구 녀석들이 수연에게 침을 흘리는 게 정말 짜증스러웠다.
뒷덜미를 낚아채 하나씩 창밖으로 내던지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비켜."
웅성웅성하던 녀석들이 길을 만들며 야유 섞인 부러움을 쏟아냈다.
"야, 누군 좋겠다. 예쁜 여동생이 간식까지 챙겨주고. 웬만하면 오늘은 소개 좀 시켜주라. 안면 튼다고 어디가 닳냐?"
지환은 깨끗이 무시하고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다른 반의 녀석들까지 나와서 수연에게 갖은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이 학교에 오는 게 싫었지만 막상 수연을 보면 그런 생각들이 쏙 달아나고 오로지 행복감만 차올랐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수연이었다.
수연이 다니는 중학교와 지환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원래는 남자 중학교였던 것이 수연이 입학하는 해부터 남녀공학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때 지환은 내색은 않았지만 수연과 같이 등하교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기뻤었다.
예쁘고 쾌활한 수연의 인기가 담을 넘어 지환의 고등학교까지 들썩거리게 만들 줄은 모르고 말이다.
"오빠!"
손 흔들며 콩콩콩 뛰어오는 수연의 단발머리가 눈이 부셨다.
싱그럽게 웃으며 달려와 바짝 앞에 서서는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연신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마쳤어?"
"응. 이거 간식. 오늘은 오빠 좋아하는 참치 샌드위치랑 바나나 우유. 맛있게 먹어."
지환에 대한 수연의 애정은 특별하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같이 하교하겠다고 두세 시간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이처럼 지환의 교실까지 찾아와 간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어떨 땐 점심시간에 밥 같이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도시락 들고 담을 넘어오기도 했다.
선생님께 혼이 나고도 오빠 찾아 월담을 서슴지 않는 수연은 금세 양쪽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야, 맛있겠다. 우리 건 없냐?"
"나도 참치 샌드위치 좋아하는데 같이 좀 먹자."
"오빠들 뺏어먹지 마요. 우리 오빠 살쪄야 돼요."
"어? 어. ……야, 방금 나한테 말하는 거 봤어!"
지환은 뒤에서 끼어드는 녀석들이 방해가 되자 수연의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끌었다.
성장이 빠른 수연은 또래에 비하여 확실히 성숙한 여자의 티가 났다.
하루가 다르게 여성스러워지는 수연을 보면 지환조차도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더 문제인 것은 그런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수연의 태도에 있었다.
수연은 누구한테나 함부로 잘 웃는데다가 날씬한 허벅지가 다 드러나도록 뛰어다니기 일쑤였으며
가슴이 부풀도록 기지개를 켜서 한창 발정기에 접어든 남학생들의 심신을 어지럽혔다.
거기에다 남녀를 불문하고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굴며 장난을 치는가하면 깜찍한 애교까지 부렸다.
그래놓고서 본인은 그저 해맑게 웃으니 두근거리는 쪽이 엉큼하달 수밖에 없었다.
"야, 여기서 얘기하지. 아 씨, 저 자식 진짜 밥맛없네."
"어떻게 저렇게 재수 없는 자식이 수연이 오빠냐."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한 반 녀석들의 더러운 눈들이 수연을 보고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는 수연에 대해서 생각도 못하고 입에도 올릴 수 없도록 박살을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다면서 뭐 하러 와."
"오빠 보고 가려고 왔지. 오빠도 같이 가면 안 돼? 오빠랑 가고 싶은데, 같이 가자. 응?"
"보충수업 있는데 어떻게 그래. 친구들이랑 보고 와. 어머니한테는 내가 잘 말해 둘게."
"엄만 내가 전화해서 잘 말하면 되지만……, 혼자 가기 싫어."
"친구들이랑 간다면서?"
"오빠 없으면 혼자나 마찬가지야. 같이 가지?"
조르며 교복 옷자락을 붙들어 당기는 수연이 귀여웠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수업종이 울렸다.
"이제 그만 가. 친구들 기다리잖아."
"치, 알았어. 샌드위치 남기지 말고 깨끗이 다 먹어야 돼. 영화 보고 와서 내가 줄거리 다 얘기해 줄게. 나, 간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
"알았어."
지환은 계단을 내려가는 수연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배웅했다. 나풀거리는 단발머리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다녀왔습니다."
"이제 오니? 아줌마, 간식 좀 챙겨요."
"네, 사모님."
지환은 15년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진한 국화 향기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힘겨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현관에 벗은 운동화를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았다.
신발장을 닫기 전에 탈취제를 뿌리고 아침에 벗어둔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슬리퍼를 신었다.
"씻고 내려오렴."
"네, 어머니."
지환은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가면서 말린 국화를 다듬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보았다.
매년 이맘때면 어머니는 작년 가을에 거두어 말린 국화를 모아 베개를 만들었다.
가족들의 베개를 만들고 남으면 선물을 하기도 하고 바자회에 내놓기도 했다.
하루도 국화에서 손을 떼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국화의 고결한 자태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국화처럼 보였다.
2층 지환의 방 창에서는 넓은 뒤뜰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머니로 인하여 이 집에서는 거의 사시사철 국화꽃이 피었다.
그 덕분에 지환은 보통의 고등학생들이 알고 있는 범위 이상으로 국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국화는 용도에 따라 관상국, 식용국으로 구분하고,
계절에 따라 춘국, 하국, 추국, 동국으로 구분하고, 꽃의 크기에 따라 대국, 중국, 소국으로 구분한다.
춘국이라고 하면 어렵겠지만 쑥갓이라고 하면 모두들 안다.
지금 뒤뜰에 핀 노란 꽃이 쌈 싸먹는 쑥갓의 꽃, 춘국이다.
지환은 교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었다.
팬티를 갈아입고 서랍에 개켜둔 면바지와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욕실에 들어가 벗은 팬티와 양말을 빨고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다시 방에 돌아와 책상 위에 둔 책가방을 의자에 올려 책상 안으로 밀어 넣고 방 안의 깨끗한 상태를 점검한 뒤 방을 나왔다.
"수연이가 늦는다더구나. 방송부 모임이 있다는데, 너무 잦은 거 아니냐."
"그 학교 다음달에 축제 있거든요. 그거 준비하느라 바쁜가 봐요."
지환은 능숙한 태도로 미리 준비한 변명을 보태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석간신문을 펼쳐드는데 아줌마가 샌드위치와 우유를 가져와 지환의 앞에 놓았다.
"방송부 활동 그만두게 해야겠구나. 특별활동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하잖니.
금세 고등학생 될 텐데 성적이 그래서 대학 문턱이나 밟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환은 베어 먹던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우유를 마셨다.
입 안의 음식을 깨끗이 삼키고 휴지를 한 장 빼 입가를 닦은 뒤 어머니의 등을 향해 예의바르게 말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 제가 틈틈이 공부 봐줄게요."
"됐다. 네 공부하기도 바쁘잖니."
"전 괜찮아요. 지금까지 상위 1퍼센트에서 밀려난 적 없잖아요."
지환은 자신 있게 말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 움찔했다.
어머니는 무표정한 눈으로 지환을 말끄러미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네."
지환은 굳은 얼굴로 대답하고는 빈 접시가 담긴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아이고, 그냥 두지. 내가 치울 텐데."
"올라가는 길에 가져온 건데요, 뭘. 제가 씻을게요."
소매를 걷는 지환을 보고 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말렸다.
"아이, 됐어. 내가 후딱 해치우면 돼.
아유, 내가 진짜 장담하는데 지환 학생은 나중에 예쁜 여자들이 서로 시집오려고 안달을 할 거야.
인물 훤하지, 공부 착실하게 잘하지, 심성 곱지. 어디 나무랄 데가 있어야지.
내가 지금이라도 딸 하나 낳아서 사위 삼았으면 딱 좋겠다니까."
"아줌마."
딱딱한 부름에 아줌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 나갔다.
"네, 사모님!"
"내일 가져갈 도시락 다 준비했어요?"
"아직 안 했는데요. 저녁 드시고 나면 하려고……."
"20인분을 싸야 하는데 언제 다하려구요. 내일 일찍 출발할 거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둬요."
"네, 사모님."
지환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짓을 하는 아줌마를 지나쳐 어머니의 등 뒤에 몇 발짝 떨어져 섰다.
"내일 봉사활동 가시는 날이시죠?"
"그래. 애들이랑 소풍 가기로 했다."
"네……. 그럼 저 올라가서 공부할게요."
"그래라."
지환은 방으로 올라와 책상에 앉았다.
책을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 틈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국화 향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환은 일어서 방문을 잠그고 책장에 꽂힌 <동물백과사전>의 9권을 꺼냈다.
그 속은 네모로 파여져 있고 네모 안에는 숨겨둔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다.
뒷주머니에 챙겨 넣고 백과사전을 제자리에 놓은 다음 욕실로 갔다.
욕실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을 빤 뒤 욕실 벽에 붙은 국화 포푸리에 대고 연기를 내뿜었다.
달고 긴 흡연을 끝내고 손에 담은 재와 꽁초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티끌만 한 재도 보이지 않게 세 번 물을 내린 뒤 양치질을 하고 손을 씻고 욕실을 나왔다.
방으로 가서 담배와 라이터를 제자리에 숨긴 뒤 다시 욕실로 들어가 냄새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창문을 닫았다.
밤 10시를 넘길 즈음 수연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활기찬 목소리에 지환은 휙 고개를 들었다.
벌떡 일어나 내려가고 싶은 걸 한 호흡 참았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굴이 상기된 수연이 소파 뒤에서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으며 뺨을 비벼대고 있었다.
"아잉, 아빠."
"빨리 앞에 앉지 못해! 지금이 몇 시냐. 뭐하느라고 이제야 기어들어와!"
"아빠앙~."
아버지의 무서운 소리에도 수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샐샐거렸다.
"그놈의 방송분지 뭔지 당장 때려치워!"
아버지의 호통에도 수연은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렸다.
지환은 손을 뻗어 수연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아빠, 나 아나운서 할까봐. 방송부 선생님이 그러는데 내 목소리가 9시 뉴스데스크하는 아나운서보다 훨씬 낫대.
어떻게 생각해? 근데 아나운서로 눌러앉기에는 이 미모가 좀 아깝지 않아? 미스코리아부터 나가고 그 담에 아나운서를 해야겠지?"
"이놈이 때려치우라니까 엉뚱한 소릴 하고 있어. 애한테 괜히 헛바람이나 넣고 그 선생 이름이 뭐냐?"
"아빤 참. 지금 그게 문제냐? 미스코리아를 할지 아나운서를 할지 고민이라니깐."
수연은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서 두 다리를 탁자 위에 턱 걸쳤다.
그리고는 지환을 향해 눈을 찡긋하다가 찻잔을 들고 오는 어머니를 보고서는 후닥닥 발을 내렸다.
"지환이, 올라갈 때 베게 갖고 가거라."
"네, 어머니."
"벌써 다 만들었어? 오늘밤에 잠 잘 오겠다. 근데 엄마, 내 성적이 안 오르는 거 말야. 아무래도 베개 때문인 거 같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신경 안정 되고 집중도 더 잘되게 해주는데 무슨 베개 탓이야."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 저 베개에만 누우면 잠이 너무 잘 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밤에 공부 좀 하려고 해도 베개가 '수연아, 자러 오렴, 어서 자러 와' 이렇게 막 유혹을 한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올라가서 씻기나 해."
"아, 귀찮아. 그냥 자면 안 될까."
수연은 게으름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기지개를 켜고는 얼렁뚱땅 일어섰다.
"아, 피곤해. 가서 자야겠다.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지환은 인사를 하고 수연의 책가방을 들고서 수연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앞서 올라가는 수연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잠깐만, 오수연!"
"네, 네?"
올라가던 수연이 놀라서 아버지를 돌아봤다.
"주말에 별장 갈까?"
"낚시하러?"
"그래."
수연은 눈으로 지환의 의사를 물었다.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뭐 좀 바쁘긴 한데, 좋아."
했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지환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너 때문에 간 다 졸아들었다. 지금까지 뭐한 거야?"
"미안, 둘러대느라 힘들었지? 영화 보고 그냥 오려고 했는데 애들이 자꾸 쇼핑하자고 그러잖아. 참, 이거 볼래?"
수연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책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
"짜잔!"
상자를 본 순간 지환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거!"
"생일선물이야. 너무 늦었지?"
"생일선물? 초콜릿 만들어줬잖아."
"사실 초콜릿은 용돈이 바닥나서 부랴부랴 만든 거였어.
진짜 내가 선물하고 싶은 건 이거였는데 이제야 그 돈이 다 모였지 뭐야. 빨리 열어봐."
지환은 기대에 차 상자를 열어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상자 안에는 표면에 그려져 있는 모형 범선의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조립하는 방법이 적힌 설명서와 함께 선체와 돛을 만들 수 있는 부품들이 가득 있었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호였다.
"마음에 들어?"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오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해?
백화점 다녀와서 며칠 동안 내내 메이플라워 호 얘기만 했잖아.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 갈 때 쓰였던 배라며."
"수연아……."
우연히 백화점에서 전시하는 범선의 모형을 보고 내내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까지 감격하면 내가 미안한데. 이건 백화점에 있던 것보다 작은 거거든. 그건 1미터짜리였는데 이건 겨우 25센티미터밖에 안 돼."
"됐어. 이걸로도 너무 좋아. 정말 멋있다."
"오빠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이거 비쌀 텐데……. 너 용돈 다 떨어진 거 아냐?"
"선물하는데 뭘 그런 걸 물어. 백화점에 있는 것처럼 멋있게 조립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고마워."
"그럼 나중에 오빠 진짜 범선 타고 세계일주할 때 나도 꼭 끼워주는 거다?"
"당연하지.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가겠어."
"아차, 하나 더 있다."
수연은 가방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다. 요즘 여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책가방에 다는 열쇠고리였다.
"한 면은 거울이고 이쪽은 사진 같은 거 넣는 거야. 특이하게 생겼지?
보자마자 오빠 사진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되겠다 싶더라구. 자, 이건 오빠 거."
수연은 상아로 된 동그란 열쇠고리 하나를 지환에게 내밀었다.
지환은 받은 열쇠고리를 보다가 수연이 교복을 벗는 걸 보고는 서랍에서 잠옷을 꺼내주었다.
"와, 너무 늦을까봐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뛰었더니 땀난다. 샤워하기 귀찮은데……. 나한테 땀 냄새 나지?"
"아니."
"아냐, 이쪽에서 나는 거 같아. 맡아봐."
수연은 교복 치마에 러닝셔츠만 입은 차림으로 팔을 들어보였다.
그러고서는 지환에게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라는 거였다.
지환은 러닝셔츠 밑으로 삐어져 나온 하얀 브래지어 끈을 보았다.
수연의 겨드랑이에는 검은 털이 간간히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팔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이는 부드러운 피부가
언덕을 향해 봉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어지러운 국화 향과 수연의 매끄러운 속살이 지환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지환은 수연의 가슴 언저리를 빨려들 듯이 보다가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냄새 나?"
"아, 아니."
"그렇게 있으니까 안 나지. 가까이서 맡아보라니까. 어, 냄새 나는구나? 그래서 도망가는 거지? 어어, 어딜!"
수연은 뒷걸음치는 지환의 목을 한 팔로 휘감아 당겼다.
"하지 마."
"뭘 하지 마. 야앗, 최루탄이닷! 발사!"
수연은 지환의 머리를 자신의 겨드랑이에 끼고는 인디언처럼 소리를 지르며 맴을 돌았다.
지환은 목이 졸려 캑캑거리다가 수연의 옆구리를 간질여 간신히 빠져나왔다.
"꺄앗! 오빠 반칙이야!"
"반칙은 네가 먼저 했잖아."
"내가 언제!"
수연은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를 껑충 넘어갔다.
"난 정당한 기술을 썼단 말야. 반칙은 오빠가 했어."
지환은 베개를 집어 들고 공격해 오는 수연을 피해 방 안을 뛰어다녔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둘의 높은 웃음소리가 방문을 넘어 아래층까지 다다랐다. 급기야,
"지금 뭣들 하는 거냐!"
어머니의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환은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수연의 방을 나왔다.
문 앞에 선 어머니의 엄한 얼굴을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지환은 아무 말도 않고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문을 닫기 직전 욕실로 들어가는 수연의 능청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땀나. 샤워나 해야겠네."
작은 산과 호수를 끼고 있는 별장엔 연분홍 꽃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지환은 어머니와 함께 바비큐를 준비했고 수연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했다.
수연은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낚시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아주 드문 이 가족 모임은 매우 형식적이어서 가족들이 다 모여도 그다지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지환과 수연이 눈으로 서로를 찾으며 장난스런 미소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은 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수연과 지환은 산책에 나섰다.
"아, 함박눈 같다. 너무 예쁘다. 그지?"
수연은 두 팔을 펴고 원을 그리며 춤추듯 걸었다.
지환은 꿈꾸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연의 경쾌한 단발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반짝 윤기를 띠었다.
아기같이 통통한 뺨에 목은 섬세하게 가늘고 치마 아래 종아리는 보기 두려울 만큼 예뻤다.
수연은 예쁘다는 말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름다워지는 수연이나 그것을 보고 설레게 되는 지환이나 하루가 다르게 성숙하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오빠, 내 머리에 쌓이게 흔들어봐."
"가만있어도 떨어지는데 뭘."
"으응, 많이 쌓이게 흔들어줘 봐."
수연이 조르면 지환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지환은 커다란 벚나무 하나를 잡아 몸을 실어 흔들었다.
분홍꽃잎이 시린 함박눈처럼 후둑후둑 떨어져 내렸다.
그럴 때마다 지윤은 나래를 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정말 예쁘다! 와아!"
수연은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먹지 마. 더러워."
"먹을래. 맛있을 거 같아."
지환은 나무 흔들기를 멈추고 수연에게로 다가갔다.
"먹지 말라니까."
지환은 수연의 머리를 잡고 얼굴을 바로 세웠다. 키득키득 웃는 수연의 입술에 꽃잎이 걸려 있었다.
지환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수연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가로등은 멀었으며 바람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환의 표정을 본 수연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오, 오빠……."
수연은 강렬한 지환의 눈빛에 놀라 주춤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수연의 머리를 잡고 있던 지환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지환은 피하려는 수연의 머리를 꼭 잡고는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것에서 한 뼘은 아래에 있는 수연의 입술을 향해.
수연은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지환이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지만 밀어내지 않았다.
잠깐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이 더 크게 밀려왔다.
무엇보다 수연에겐 너무나 좋아하는 오빠 지환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지환은 수연의 떨리는 입술이 부딪친 순간 눈을 감았다.
수연의 숨결이 느껴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짜릿하고 아찔한 느낌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빠르게 뛰고 있는 수연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살짝 입술을 움직여 입술을 비벼보았다.
지환의 움직임에 따라 수연의 입술도 꿈틀 움직이며 지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벼왔다.
마찰에 전기가 오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펄쩍 뛰며 입술을 뗐다.
지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연을 보았다. 그
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연도 두 사람을 스쳐간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다는 걸 알았다.
또한 아직도 서로의 몸속에 짜릿한 여운이 파문처럼 일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꼬, 꽃잎이 오빠한테 갔네."
수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올렸다. 지환의 입술로 옮겨간 꽃잎을 떼기 위해서였다.
그때,"거기서 뭐하는 거니?"
"어, 엄마!"
수연이 화들짝 놀라며 변명했다.
"오, 오빠 입술에 꽃잎이 묻어서 떼, 떼 주려고 했던 거야. 아빠랑 데이트 잘했어? 두 분이 오붓하게 있은 거 오랜만이지?"
수연은 떨림을 감추며 웃었지만 지환은 공포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조르르 달려가 엄마의 팔짱을 끼며 걸어가는 수연을 보고서도 지환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연에 이끌려 돌아서기 직전 어머니에게서 날아든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지환이 뒤늦게 불렀을 때는 어머니와 수연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환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환이 본 어머니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보았으며 지환의 속마음까지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눈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눈빛에는 어떠한 변명도 용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무자비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