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둘 사이의 묘한 수직적 관계와 대치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비장의 수를 펼쳤다.
“룬이 이 방 안에 있다고?”
“응!”
바로 오빠에게 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방에 올 때까지도 꽤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공작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 알고 식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멀쩡히 깨어 있는 걸 보자마자 ‘분명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부활을……!’ 이라며 혼비백산한 시녀 몇을 겨우 얼렀다. 그들을 달래며 수소문한 결과 룬은 저택의 자그마한 방 안에서 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녀들이 작은 방을 개조해 놀이방을 만들어 주었다나.
룬의 행적을 알게 된 우리 셋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저택 지리를 가장 잘 아는 녹스를 앞세워, 우리는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아기 여우 그림이 그려진 놀이방 문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방문을 바로 힘껏 열지는 못했다. 오빠가 손에 땀이 나는 듯 손바닥을 바짓단에 문지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정신없게 굴고 있었으니까.
보석 장난감도 가져왔어야 했다며 머리를 쥐어뜯는데 무슨 지킬 앤 하이드를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제 아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아빠라고 밝히는 날이 아닌가.
나는 오빠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뭘 주든 다 좋아할 거야, 이제 진짜로 문 열게.”
“자자잠깐!”
하지만 나는 조금 매정한 구석이 있어서, 오빠의 만류 따위는 듣지 못한 척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아…….”
오빠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온종일 이 방문 앞만 서성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놀이방 문 안에서 나를 반긴 건 룬이 아니었다.
서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방이 하나만 있을 거라 상상했지만…….
여긴 투 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방이 하나, 그리고 아치로 된 내부 문을 열면 나오는 방이 하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방 안에는 벨이 시종도 없이 혼자 책을 움켜쥐고 굳어 있었다.
“벨?”
커다란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 콧물을 훌쩍거리던 벨이 나를 응시하더니 눈을 치켜떴다.
“아스텔!”
책을 바닥으로 내버리고 깡충깡충 뛰어온 벨이 내 몸을 꼭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역시 살아 있었어!”
너무 세게 끌어안아서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벨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사실 유령이야.”
처음 나를 보고 ‘유령’이라고 칭했던 게 찔린 듯 곁에 있던 오빠가 몸을 움찔했다.
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치맛단에 얼굴을 묻었다.
하얀 치맛단에 눈물이 점점이 묻어 투명해질 때까지 얼굴을 묻던 벨이 조심조심 말했다.
“유령 절대 아니야! 주, 죽었는데 다시 살아 돌아왔어! 부, 부활한 거니까아…… 아스텔은…….”
“응?”
“햄스터 신인 게 틀림없어! 돌아올 줄 알았어!”
“……갑자기, 햄스터?”
벨이 부끄럽다는 듯이 양손에 얼굴을 포갰다.
그리고 쪼르르 책을 가져왔다.
어리둥절한 나는 녹스와 오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벨의 심리를 모르는 듯했다.
“햄스터 신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거든!”
벨의 품에 있었던 건 수인 신화 전집이었다.
벨이 신이 난 표정으로 신화 전집에 책갈피를 해 놓은 구간을 쫘악 펼쳐 보여 주었다.
“이거 봐! 집사장이 가져다준 책이야!”
[거대 햄스터 수인의 죽음!
몸집이 아주아주 작은 꼬마 햄스터 열 마리가 모여 신에게 부활 제례를 올렸다.
그러자 죽은 줄 알았던 거대 햄스터 수인이 부활했다!]
그 문장이 적혀 있는 종잇장이 꾸깃꾸깃한 데다, ‘부활’이라는 단어에 빨간펜에 별표까지 쳐 있었다.
벨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거 보고 기도했더니 아스텔이 부활한 거야!”
마음이 찡해진 나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벨의 의견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 그렇구나! 그래, 응…….”
나는 햄스터 신 부활 신화를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생각했다.
‘기왕 신일 거 호랑이 신, 뭐 이런 거면 어디가 덧나?’
내 마음은 전혀 모르는 벨이 눈을 반짝거리며 책의 끄트머리를 꾸깃꾸깃 접었다.
“정말로 부활했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보니, 내가 신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내밀며 벨을 끌어안았다.
“알겠어, 나 살아났으니까 울면 안 돼?”
“안 울었어! 수컷 수인은 땅에 묻혀도 우는 거 아니랬어!”
하나도 안 울었다기에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적당히 관대하게 보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네? 벨, 너 엄청나게 멋있는 어른 같아!”
벨이 뿌듯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맞아, 나는 어른답게 아기랑 놀아 주고 있었어! 아스텔, 벨이랑 아기 보러 온 거지?”
“응.”
그러고 보니 아기 여우 벨과 감동의 조우를 하느라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무언가 중얼거리는 오빠를 신경 쓰지 못했다.
‘이제 슬슬 오빠를 룬에게 보내 줄 시점이지.’
나는 벙찐 오빠를 힐끗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아저씨가 룬이 보고 싶다고 해서.”
“아저씨, 룬은 저기 방에 있어요! 잠깐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요!”
세 살배기가 혼자 있고 싶다니…….
‘역시 벨이랑 룬은 천재가 맞는 것 같아…….’
나는 오빠를 향해 눈짓했다.
벨의 말에 따르면 아치문 너머, 룬이 있을 것이다.
의젓하게 고개를 치켜든 벨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오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얼른 들어가 봐. 나는 벨이랑 있을게.”
부자 상봉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발을 옮기기를 주저하는 오빠의 등을 밀며 경쾌하게 말했다.
“얼른.”
“알겠어.”
한참을 심호흡하던 오빠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룬과 오빠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쥔 그때.
아치문으로 가기 전, 오빠의 서늘한 시선이 비석처럼 잠자코 서 있던 녹스에게 가닿았다.
“잠깐 다녀올 때까지, 일단 둘은 좀 떨어져 있어.”
“……어?”
“그럼 다녀올게, 아스텔.”
언제 서늘한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활짝 웃어 보인 오빠가 룬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녹스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녹스의 어깨가 조금, 처져 있는 것 같기도…….
아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재차 밀려왔다. 오빠와 녹스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것 같다는 것 말이다. 나는 녹스를 향해 입 모양으로 소곤소곤 말을 꺼냈다.
“저러다 말 거예요.”
오빠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는 게 못내 불안한지, 녹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습니다, 아스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제 원죄니까요.”
녹스의 눈동자가 떨렸다.
분명 불안해하는 것이리라.
“……형님께서 저를 싫어하셔서 아스텔과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할지 고민입니다.”
잠깐, 벌써 호칭 형님으로 정리된 거야?
“어……. 그래도 내가 만나러 오면 되죠!”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오빠가 고집이 좀……. 센 편이기는 한데.”
사실 뒷골목에서는 황소고집 카시언으로 유명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날 이긴 적은 없거든.”
나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 멍멍이 표정을 한 녹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토닥거렸다.
“내가 녹스랑 꼭, 붙어 있고 싶으니까.”
녹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텔의 선택을 받아 기쁩니다.”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을 때였다.
“허, 허억……!”
양 볼이 빨개진 벨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여기 벨이 있었지, 참!’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리를 보는 벨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나는 급하게 녹스와 붙어 있던 몸을 떼어 냈다.
벨을 보던 녹스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손만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거린 찰나에 그가 내 손을 잡아챘다.
녹스의 따뜻한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단단한 손으로 깍지를 꼈다.
손가락이 빈틈 하나 없이 맞닿는 게 느껴졌다.
오빠는 떨어져 있으라고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더 붙어 있고 싶었다.
그가 이 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 * *
카시언은 아스텔을 뒤로한 채 아치문을 넘었다. 이내 질 좋은 가죽 소파 위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룬이었다.
헝겊 인형을 꼬옥 품에 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서 예전에 봤을 때보다는 조금 더 깨끗하고 따뜻해 보였지만, 달달 떠는 모습이 어딘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주거써…….”
혼잣말로 작게 웅얼거리기까지 하는 게 어찌나 안쓰러운지.
벅차오르는 심경을 가라앉힌 카시언은 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룬이 카시언을 힐끗 보더니 다시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모야, 저리 가아.”
하지만 카시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대신 머뭇거리며 허공을 배회하던 손을 아기의 어깨에 올렸다.
“안 죽었어.”
용기를 주듯 단언하는 어조도 함께였다. 그 말에 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카시언을 바라봤다.
“아스테, 안 주거써……?”
“응, 내가 살려 왔어.”
살렸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시언의 소맷귀를 꾸욱 잡았다.
“모야, 모야? 구럼 아스테 어디 이써?”
카시언의 시야에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한 룬이 담겼다.
카시언이 아이의 뺨을 엄지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문밖에.”
그 즉시 룬이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지만, 카시언이 먼저였다.
“그 전에 할 말이 있어.”
“웅?”
룬은 조금 조급해 보였다.
“아스테 보러 가!”
카시언은 섣불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공작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머리로 끝없이 시뮬레이션했지만 실전은 또 달랐다.
막상 룬을 앞에 두자, 자신이 아빠라는 말이 입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원망하겠지.
슬퍼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가슴 근처에서 일렁였다.
고개를 갸웃한 룬이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후움, 머리 이산해!”
아무래도 머리 색이 금빛으로 바뀐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카시언은 아이의 기억력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기억…… 해?”
인형을 바닥에 톡 떨어트린 룬이 카시언의 머리카락에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웅! 나무색 머리연는데!”
나무색 머리라니, 독창적이기도 하지.
제 아빠 없이도 씩씩하게 잘 자란 걸 보니 역시 룬은 천재가 확실했다.
“구럼 이제 아스테 보러 가!”
룬이 폴짝 뛰어올라 문으로 향했다.
오도도 달아나는 룬의 조그만 뒷모습을 보던 카시언이 엉겁결에 큰 소리를 냈다.
“가지 마!”
“아냐, 가!”
“내가 네 아빠니까, 가지 마.”
……이렇게나 멋없이 고백하게 되다니.
그러나 룬을 잡는 데는 성공했다. 아빠라는 말에 룬이 느리게 등을 돌렸다.
“웅? 압빠?”
카시언은 룬이 다섯 발자국 넘게 걸어간 자리를 성큼 따랐다.
룬의 자그마한 손을 잡은 카시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룬, 내가 네 아빠야.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못 찾아왔어. 미안해.”
아이는 속사포처럼 하는 말을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입술은 부르튼 데다, 코는 다 빨개져서는.
하나도 멋없는 고백이었지만, 한마디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룬은 그저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압빠…… 라구?”
룬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오므렸다가 다시 떼어 냈다.
마치 무언가를 읊어 보는 듯한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응.”
룬이 눈을 끔뻑거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압빠 아니야!”
카시언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렇게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룬은 단호했다.
카시언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의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을 무렵, 룬이 거듭 쫑알거렸다.
“아기 아플 때도 안 와써. 울 때도. 그러니까, 압빠 아니야!”
부정하는 말에 카시언이 절절하게 매달렸다.
“열심히 할게. 아빠랑 살자, 응?”
“…….”
“아빠랑 아스텔이랑 살자.”
“아스테?”
“응.”
룬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거렸다.
“구러엄, 아스테는 모야? 정말로 엄마?”
기대감에 찬 물음에 카시언의 안색이 조금 새하얘졌다.
아이의 희망을 꺾기 미안했지만,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카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아니야.”
순식간에 룬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카시언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대신 고모라고 불러, 고모. 우리는 가족이야.”
“가족…….”
룬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조그만 턱을 매만지다가, 이내 싱그럽게 웃었다.
“가족, 곰!”
“고모…….”
“알아써, 곰!”
그래, 곰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다.
카시언은 곰이 되어 버린 아스텔을 속으로 애도하며 다음 말을 꺼냈다.
“이제 아빠랑 아스텔 고모랑 셋이 살까?”
“움, 압빠 아니지만…….”
룬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카시언을 살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스테 곰 조아!”
고모라는 말을 가르쳐야겠지만, 오늘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카시언이 애틋하게 룬을 응시하는 사이 룬은 조그만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구런데, 움, 하나, 두, 세…….”
“……응?”
카시언은 룬의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 명?”
“응, 세 명이지. 세 명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지.”
카시언이 활짝 웃었지만, 룬의 표정은 미묘했다.
룬이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구럼, 공잔님은?”
……여기도 공작님, 저기도 공작님이다.
‘아무래도 공작가에 오래 살았더니 정이 들었나, 뿌리가 깊군.’
그 뿌리, 잔혹하게 뽑아 주겠어.
카시언이 악당다운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룬을 응시했다.
“우리의 미래에 공작님은 없단다, 아들아.”
룬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시언은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주의를 돌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저택으로 빠르게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 썩은 뿌리는 한시라도 빨리 뽑아야 한다.
“이제 나가자꾸나.”
“웅! 곰 보러 가!”
그는 룬의 손을 잡은 뒤 아치문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선 그의 시야에 아스텔과 손을 잡은 아나이스 공작이 예리하게 포착되었다.
카시언은 룬을 영차, 끌어안고 아나이스 공작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모든 편의를 봐 드릴 테니 공작저에 있어 주십시오.”
“아뇨, 이제 저희 가족, 셋이 잘살아 보렵니다.”
카시언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 없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카시언의 마음속에 그간 차곡차곡 쌓였던 설움이 스쳐 지나갔다.
꺼져라, 못생겼다, 문란하다 같은, 공작이 내뱉었던 견제의 말들까지도…….
카시언은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아스텔을 향해 말했다.
“가자, 아스텔.”
“어? 어디로?”
“우리 집.”
“우리 집, 있나……?”
“우리 셋 같이 살 집은 당연히 있지. 오빠 능력 있거든? 그레이 저택에서 당분간 살면 돼.”
카시언의 말에 아스텔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일단 그럼 공작님께 인사라도…….”
그의 등 뒤에서 아나이스 공작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텔, 그리고 카시언 경.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라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아스텔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잡고 저택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 저택 따위는 다시는 올 일 없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소금도 뿌렸다.
위험한 맹수 공작, 아나이스.
당신은 우리 가족 반경 백 미터 내 접근 금지야.
* * *
카시언과 아스텔이, 그레이 저택으로 돌아가고 며칠이 흘렀다.
아스텔 카시언 남매를 둘러싼 은신 마법이 깨진 탓일까.
아직 그들이 뷔에트리 가문의 생존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뷔에트리 백작가 사람들의 생사에 관해 떠들어 댔다.
‘뷔에트리 백작가 사람들,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무슨 근거로?’
‘그게 말이야, 황궁에서 나온 소문이라나. 살아남은 자가 있다며 뷔에트리 가문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있다나 봐.’
‘……아니, 그런데 살아 있다면 왜 안 나타나지?’
‘그건 나도 모르지.’
‘하여튼, 살아 있으면 좋겠네. 갖은 영광은 다 누릴 텐데 말이지.’
‘조만간 각 가문의 복위식을 화려하게 진행해 준다잖아. 뷔에트리 백작가도…….’
마법에 예민하고 촉이 빠른 사람들 위주로 묘한 음모론이 조성되었다.
그 이야기는 카시언 그레이에게도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뷔에트리 가문의 이름을 밝히며 가장 화려하게 귀환해야 할 텐데, 언제가 좋을까.’
저자에 떠도는 풍문은 사실에 가까웠다.
얼마 전 은신 마법이 풀렸으니 황궁에서도 뷔에트리 가문의 남매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직 그 남매가 자신들이라는 것까지는 모를 테지만 은밀히 사람을 풀어 추적 중이겠지.
그 추적이 카시언과 아스텔에게 와 닿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카시언은 미간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정체를 밝히는 데에,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정체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밝혀질 테니, 황궁으로 입궁할 시기를 정해야 해.’
제국 건국에 일조한 늙은 드래곤이 고안해 낸 신분 등록 의식 때문이었다. 아스텔과 카시언을 포함해 귀족 집안의 모든 아기는 기어 다니기 시작한 직후, 황궁 안에 설치된 고대 마법석 위에 놓여 신분 등록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마법석은 아이들의 손목에 작은 감별 마법진을 새겼다. 그 마법진을 토대로 황궁에서는 아기가 어느 귀족 가문의 자녀인지, 신상 명세를 확보했다.
그리고 황궁 입구의 고대 결계석에 그 정보를 등록했다. 그러니 아스텔과 카시언이 황궁의 고대 마법 결계를 통과한다면, 그 즉시 그들이 뷔에트리 가문의 남매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은신 마법이 깨진 뒤부터 카시언 그레이는 황궁에 한 번도 들어서지 않았다.
황제의 약은 기사를 통해 은밀히 보내고 있었다.
‘황궁 무도회가 열릴 때를 노려야 하나.’
카시언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도 조만간 황궁 무도회가 열릴 테니, 곧 뷔에트리 가문의 귀환을 알릴 수 있을 터.
그보다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일이 있었다. 폐태자의 수하였던 오스카 가문의 잔당이 도망친 탓에 교외에 있는 회의장에 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 막 아스텔과 룬이 먹을 따뜻한 포리지를 만들어 놓고 회의장에 도달한 참이었다.
카시언이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이미 대여섯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로파 쉘린드부터 해서, 마탑의 마법사 등이 자리를 빛냈다.
카시언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한 뒤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어어, 어서 와! 우리 수도의 꽃!”
“오늘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그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은 카시언은 원탁의 빈자리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의 앞에는 처리할 서류가 수북했다. 그는 인상을 대놓고 찡그리며 서류를 손에 쥐었다.
“폐태자 잔당 처리 문제죠?”
“응, 그렇지.”
“하여튼 오스카 놈, 도망쳐서 사람을 귀찮고 열 받게 한단 말이지…….”
“그러게 말일세.”
“하여튼 폐태자는 도움이 안 되는구먼!”
로파가 껄껄 웃으며 제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래도 한 두어 달 정도면 소탕할 수 있을 거야. 계획은 다 세워 뒀거든! 그리고 저가 날뛰어 봐야 벼룩이지!”
카시언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파의 말마따나 폐태자의 잔당 처리는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폐태자파였던 오스카 가문의 몇몇 네크로맨서는 황제의 기사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몇 명일 뿐이다. 서류에 적힌 오스카 일당의 출몰 지역을 점검하고 소탕 작전을 떠올려 보는데, 다소 거슬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오늘은 공작 각하께서도 오신다네!”
“잔당 소탕 작전의 전술을 도와주시러 오는 거겠지요?”
“아암, 전술의 천재시니!”
“크으으, 오스카 놈 따위는 바로 죽게 되겠군요!”
기사단이란 대체로 아나이스 공작을 선망하는 치들의 모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이니, 자연스러운 환대였다.
이 자리에 모인 기사 몇이 공작의 방문에 축배를 들 기세로 환호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카시언만이 건조한 표정으로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 자식이 여길 왜 와. 우리 아스텔 탐내는 놈이.’
그가 한 장씩 넘겨 보던 서류의 끄트머리를 꾸깃, 구겼을 때였다.
혀를 내두르는 아첨 실력을 지닌 기사 하나가 카시언을 보며 즐겁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레이 경.”
“네.”
“신수가 더 훤해지셨습니다.”
입이 트인 듯 사람들 역시 하나둘 말을 얹었다.
“금발로 염색하신 것 맞죠? 뭔가 이목구비가 더…….”
“더 잘생겨졌지. 정말로 자랑스럽다, 우리 장미 기사단의 수호자!”
“……내가 잘생겼는데 왜 단장님이 자랑스럽죠?”
“대리만족 몰라, 대리만족?”
로파가 호쾌하게 웃으며 카시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농담 따먹기를 몇 번 나누던 바로 그때였다.
회의장의 문이 스산하게 열렸다.
아나이스 공작이 문을 열고 도착한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바로 왔잖아. 진짜 호랑이 수인인가.’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던 카시언이 한껏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기사들 역시 다른 의미로 침묵했다.
폐태자의 잔당을 잡아 처리해야 하는 이 시국에, 아나이스 공작에게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니.
기사로서 치욕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사단의 기강과 전술을 중시하는 아나이스 공작이라면, 당장 불호령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고, 공작 각하. 오셨습니까.”
“예.”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따스하게 웃는 표정을 하고, 손에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들고 원탁까지 걸어왔다.
기사 몇이 복화술을 하는 수준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왜 웃고 계시지?”
“저, 저거 뭐야? 폭탄 아니야?”
수군거림을 가볍게 무시한 아나이스 공작이 꼿꼿한 표정을 고수하며 카시언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카시언은 그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따스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드십시오. 제 과거 행적에 관한 사죄의 의미로 약소한 음료부터 준비했습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공작이 무얼 준다는 것도 놀라울 마당에,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에볼카산 원두를 쓴, 산미 그득한 커피였다.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것이 마법이라도 건 듯싶었다.
카시언은 커피를 보다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내 뒷조사라도 한 모양이지. 커피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코끝에 감도는 향긋한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카시언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고수하려 했다.
“전 커피 안 좋아합니다.”
둘의 대치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상황을 수습한 것은 로파 쉘린드 경이었다.
“카시언 경, 왜 이래! 트, 특별 대우인가 봅니다! 허허! 카시언 경 정도 되면 공작 각하께 이리 인정을 받는군요! 부럽습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앞에 놓인 커피처럼 점점 식어 갔다.
카시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과거 찬 빵 신세였던 게 떠오르는군.’
그에게 얼마나 심한 무시와 멸시를 당해 왔던가.
그 생각을 하니 무덤 속에서도 이가 갈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과거 따위는 빠르고 깔끔하게 잊은 표정으로, 카시언에게만 들리게 낮게 속삭였다.
“당연히 특별 대우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매제를 원하십니까.”
매제라니. 카시언의 잇새로 절로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매제는 자고로 일단 사람이어야 합니다만.”
고로 수인인 너는 탈락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뻔뻔하게 양쪽 입꼬리를 다 올렸다.
“다행이군요. 저도 반은 사람입니다.”
카시언은 상대의 뻔뻔함에 당황해 눈을 흘겼다.
‘확실히 싹을 잘라 둬야겠군.’
그는 재차 강조하듯 말을 이었다.
“어두컴컴하지 않고 밝으며, 신성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검 안 쓰고 신성력을 잘 쓰는. 예를 들면 교황 성하라든가.”
이 세상에서 신성함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나이스 공작일 것이다.
다시 말해, 카시언은 ‘너는 매제 후보에서 탈락’이라는 소리를 두 번 돌려 말한 셈이었다.
이를 곰곰이 새겨듣던 아나이스 공작이 진지하게 답했다.
“오늘부로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교황이 되겠습니다.”
끝도 없이 커진 장래 희망의 규모에 놀란 카시언이 입을 떡 벌리고 그를 응시했다.
‘아니, 교황이 되는 게 쉬워? 정말 돌아 버린 놈…….’
역시 이런 돌아 버린 놈에게는 순진한 아스텔이 어울리지 않는다. 확고하게 판단한 카시언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생각해 보니 교황도 별로입니다.”
“그러십니까?”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당혹한 카시언을 응시하다 눈매를 접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아스텔에게 보이는 다정한 미소의 딱 삼분지 일 정도 되는 부드러움이었다.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해사한 미소에 다정한 말투.
그에게 잘 보이겠다는 의도가 투명하게 보였지만 그보다…….
뭐라고 했어, 방금?
……형님?
카시언이 입을 쩍 벌렸다.
‘진짜 제대로 미친놈…….’
그는 급하게 입을 닫고 상황을 수습했다.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이 작게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틈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와 닿았다.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카시언은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며 무안을 주었다.
“이제 저리 가십시오. 공작 각하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으니까요.”
상당히 방자한 말이었다.
비록 공을 세웠다지만, 아직 공훈이 완벽하게 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지위부터 남다른 아나이스 공작이다.
자리에 앉은 자들 모두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지었다.
눈치 없기로는 단연 제국 1등인 로파조차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다.
“카, 카시언 경! 무엄하, 한데. 감히 고, 공작 각하께.”
차가워진 공기 속, 회의장에 자리한 사람들은 카시언 그레이의 목이 언제쯤 떨어질까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카시언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습니다. 감히 그레이 경의 기분을 불쾌하게 한 제 불찰입니다.”
마치 약점이라도 그득그득 잡힌 사람처럼 저자세였다.
아니, 그들 모르게 카시언이 공작의 비밀이라도 잡았나?
동시에 한때 암암리에 돌았던 둘 사이의 소문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두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였다.
로파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몸을 오징어처럼 비비 꼬며 상황을 환기했다.
“허, 허어. 가, 각하? 그게 무슨.”
아나이스 공작은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로파를 만류한 뒤, 다시 카시언을 응시했다.
“그레이 경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저기서 침을 요란하게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아나이스 공작은 온화하게, 무려 햇볕처럼 따뜻하게 대답했다.
“메나 섬이라도 드려야 할까요?”
메나 섬.
아나이스 공작령 중에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이자 산호초 섬이었다.
섬을 둘러싼 물은 크리스털처럼 투명하게 빛났고, 별장은 화려하기가 황제궁에 비할 바 없을 정도라던데.
무려 황제가 탐냈을 정도로 아름다운 섬인데, 그걸 카시언에게 주겠다고?
이 자리의 모두가 망연해졌다.
카시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치밀하게 미친놈, 나 설득 좀 하겠다고 그 귀한 섬을…….’
그러나 기절초풍할 일은 더 있었다.
“그 외에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
“전부.”
그 말을 끝으로, 아나이스 공작은 귀족답게 세련된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로파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괴이쩍…… 아, 아닙니다. 계속 일 보십시오.”
카시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뒤적거리며 대꾸했다.
“그보다 우선 폐태자의 잔당부터 처리하지요.”
“카시언 그레이 경이 원하신다면 폐태자 잔당 정도는 싹 다 쓸겠습니다.”
[오스카 가문]이라고 적혀 있는 서류철을 확인하던 카시언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진짜로 다 쓸어 올 것 같기는 했지만…….
역시 공격성이 너무 짙다.
십 점 만점에 백만 점 감점.
모두가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오직 카시언만이 담담했다.
‘정말로 아스텔을 신경 쓰는지 아닌지는 서서히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물론 카시언이 보기에도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이 서로 사랑에 빠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 지점이 더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사랑은 변하는 감정이었다.
기본적인 인성이 안 된 녀석의 사랑이 식는다면 아스텔은 어떻게 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카시언이 파악한 아나이스 공작의 성격은 단순히 기본적인 인성이 안 된 수준이 아니었다.
여지없는 개차반이지.
그러니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저 가식적인 태도 뒤에 어떤 본성이 숨어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슬슬 도발하다 보면 원래 성격이 나오겠지. 아주 공격적이고 까탈스러운 성격 말이야.’
카시언의 턱선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회의장 내부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턱을 괸 채 카시언을 응시하며 나른한 침묵을 유지하는 공작과 뜻밖의 촌극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 덕분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침묵을 다시 깬 건 카시언이었다.
그가 서류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황궁 무도회 날짜가 잡혔습니까?”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된 것을 기념해서, 조만간 황궁에서 무도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이 시국에 무도회? 이거 완전 전시 행정 아냐?”
기사들 사이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나이스 공작이 가볍게 수습했다.
“아닙니다. 공과를 나누고, 누명을 쓴 가문들에게 제대로 된 저택과 귀물을 내려 줄 차례니까요. 무도회를 하면서 팍팍해진 민심도 좀 잡아야 할 테니 합리적인 선택일 겁니다.”
전시 행정 아니냐, 고 큰소리를 쳤던 기사가 쭈그러지며 한발 물러섰다.
“그나저나 폐태자의 잔당을 처리해야 하는데, 우리가 무도회에 참가할 시간이 있을까요?”
“무려 폐하께서 초청하셨는데, 당연히 가야지!”
로파가 환희하는 고릴라처럼 우우, 하는 소리를 냈다.
카시언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와 아스텔이 황궁의 결계를 통과하면, 그들의 신분이 자연스럽게 증명될 것이다.
황궁 무도회에서 뷔에트리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한다, 라.
카시언이 바라 왔던 꽤 멋진 그림이었다.
‘이번 무도회에서 화려하게 정체를 밝히는 게 좋겠지. 나를 위해서도, 아스텔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도.’
말이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시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궁 무도회는 정확히 언제랍니까?”
“아아, 그레이 경! 무도회는 당장 일주일 뒤라네.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한데, 황궁에서도 민심을 잡아야 하니까 말이야.”
카시언은 혀를 쯧 차며 무도회 관련 서류를 넘겼다.
“가족들도 함께 참여해도 된다고 적혀 있군요.”
“응, 그렇지! 엥, 자네, 가족이 있었어?”
“네.”
로파 쉘린드를 포함해 카시언이 고아라고 생각했던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시언은 능글맞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곧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유일하게 아나이스 공작만이 알고 있는, 아스텔과 카시언의 관계.
아나이스 공작의 간절한 시선이 그의 두 뺨을 간지럽혔다.
카시언은 가볍게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무도회가 아스텔을 만날 기회라고 여기는 듯한 저 더럽고 질척한 시선에 더불어…….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순진무구한 척하는 표정이라니.
내가 저놈 성격 더러운 걸 아주 잘 아는데 말이지…….
‘순진무구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자 1위면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을 수가…….’
발 빠른 태세 전환조차 가증스럽다.
카시언은 다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나이스 공작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카시언의 경멸 어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한껏 선량한 척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공작이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을…….
필사의 노력이 담겨 있는 아부성 미소였다.
물론 카시언은 고개를 홱 돌림으로써 그의 미소를 완벽하게 무시하고 말았다.
* * *
“황궁 무도회 초대장이 왔어, 아스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룬과 놀아 주던 때에, 오빠가 갑자기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왔다.
나는 오빠를 바라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응? 황궁 무도회 초대장?”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되었다.
오빠는 제대로 신분을 밝히기 전까지 자신의 금발을 공개할 수 없다면서, 밀짚 같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해서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니까.
그래도 잘생긴 얼굴 어디 가겠느냐마는…….
얼굴을 하나씩 찬찬히 살피는데, 오빠가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 지르듯 포효했다.
“어때, 응? 너무 기쁘지!”
“어차피 황궁에선 무도회, 자주 열잖…….”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오빠가 올 게 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표정을 직시한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황궁 무도회에서 우리 가문에 대해서 밝힐 생각인 거지.”
“응.”
오빠의 심리가 훤히 보였다.
모두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자리에서 우리 정체를 공개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 의견에 나도 동의했다. 우리 가문의 화려한 귀환을 위해서라면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장소에서 밝히는 편이 좋으니까.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는 언제야?”
“일주일 뒤.”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나는 오빠를 향해 눈을 찡긋한 뒤 입을 열려 했다.
드레스도 준비하고, 무도회를 위해 춤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오빠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말인데, 아스텔. 부티크를 통째로 옮겨 왔어.”
“어어?”
얼빠진 나를 지나쳐 간 그가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창가 쪽을 응시했다.
오빠의 손가락이 창밖에 주르륵 선 마차를 가리켰다.
“저기 바깥에 양장사들 데려왔어. 아는 레이디들한테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최고의 양장사들만 골랐지. 그 덕에 두 달 치 월급 털기는 했지만, 후…….”
“……이런 건 언제 다 했대. 그리고 하여튼, 엄살은.”
나는 환히 웃었다.
그러자 오빠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톡, 두드리며 말했다.
“여느 공작 가문 영애보다도 더 귀하게 입힐 거야. 기대해도 좋아.”
지금까지 못 해 준 거 다 해 줄 테니까, 라고 혼잣말로 속삭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어느덧 무도회의 드레스를 넘어 다른 쪽으로 흘러 있었다.
‘녹스도 오겠지? 황궁 무도회니까.’
그가 올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싶어졌다.
지금까지는 거의 치료사 옷만 보여 줬으니까.
어쩌면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많이 놀랄지도 모르지.
‘꼭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왜 지난 며칠간 편지도 보내지 않고, 나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던 걸까?
설마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오빠 때문인 거겠지?
묘한 초조함에 시야가 옅게 흐려졌다.
“아스텔, 무슨 생각해?”
오빠가 잠시 손을 멈춘 나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아니, 어떤 드레스가 유행일까, 라는 생각.”
“그건 이 오빠가 아주 잘 알지.”
“역시 수도의 꽃다운데?”
오빠가 그 별명이 싫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건 그냥 연막이라니까……. 오빠가 얼마나 순진한데.”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오빠와 말장난을 치면서, 나는 마음속에 먼지처럼 남은 불안감을 쳐내려 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녹스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녹스와는 곧 만나게 될 테니까.
너무 바빠서 나를 잠깐 잊었다면, 다시 만나서 멋지게 기억하게 해 주면 되지!
* * *
물론 녹스는 아스텔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않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매분 매초 아스텔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언이라는 거대 장벽에 가로막혀, 그는 아스텔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날 정무 회의가 파한 뒤, 카시언은 찬바람만 쌩하니 일으킨 채로 떠났다.
그 후로 그는 어느 회의에서든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폐태자의 잔당을 처리한다는 명목하에 교외로만 돌다 보니, 도무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상당한 고의로 느껴졌지만, 녹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묘한 탈력감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생각보다 나에 대한 분노가 깊군.’
지난날 자신이 했던 짓을 떠올린 녹스의 안색이 조금 더 새하얘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카시언의 멱살을 잡기 전,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최대한 잘해 줬어야 했는데…….
‘당장 꺼지십시오.’
그의 주먹이 전율했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형님, 아스텔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지난 며칠간, 녹스는 황태자의 그 회귀 토템을 파괴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기상천외한 망상에 시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토템을 남겨 두고 과거로 돌렸어야 했다. 다시 돌아가면 정말 잘해 줄 텐데…….’
하지만 이미 과거는 돌이킬 수 없어졌다.
사실 그동안 그가 아스텔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무 회의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도, 그는 몇 번이고 아스텔이 머무르고 있는 저택을 찾아가 근처를 빙빙 돌았다.
그러나 그럴 때면 카시언이 심어 놓은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앞길을 막았다.
물론 힘이나 권력으로 밀고 들어가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더 미움받아서는 안 되니까.
그는 기품 있는 태도로, 그에 비해 신분이 상당히 하등한 저택의 문지기에게조차 간청했다.
‘아스텔 님과의 독대를 청합니다.
‘그게…… 그레이 경께서,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실 때는 꼭 이 쪽지를 건네라고 하셨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을 보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불허]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쪽지의 내용을 떠올린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묘하게 기시감이 든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텔을 보고 싶어 하던 카시언 그레이가 북부 공작성에 방문을 요청했을 때, 그는 불허라는 짤막한 말로 그를 무시했다.
‘이렇게 내 과거와 마주하게 될 줄이야.’
입맛이 매우 썼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스텔에 한해서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니까.
몇 번이고 접근한 끝에 그는 불허 쪽지 대신 조금 더 긴 쪽지를 받았다.
[아스텔에게 100m 이내 접근 금지.]
그는 자신이 받은 유치찬란한 경고 문구를 떠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문제는 이 쪽지를 무시할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지금 카시언 그레이는 절대 갑이었으니까.
건조한 낯을 한 채로, 녹스는 자신의 수도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저택의 정문을 지나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시야 안에 평소와 다름없는 공작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백색 대리석이 깔린 복도도,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도, 의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시종과 시녀들도 모두 같은데…….
이상하게도 아스텔이 없는 공작 저택은 황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 특유의 따사로운 목소리가 맴돌지 않아서일까.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거칠게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복도를 걸어 층계참을 올라갈 때까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던 탓에, 뒤꽁무니를 쫄쫄 따라다니던 조그만 여우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가 공작저 2층으로 올라서고, 문득 제 곁에 있는 인기척을 느꼈을 때쯤에 아기 여우, 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아스텔 오늘은 안 온대요?”
벨뿐만이 아니라 복도 층간에 서 있던 시종들까지도 이어질 답에 모두 귀를 쫑긋했다.
아스텔을 아끼고 사랑했던 그들이 희망을 담은 시선으로 공작을 응시했다.
공작은 제 소맷귀를 잡은 벨의 무람없는 손을 가볍게 떼어 내며 속삭였다.
“……네, 오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다’라는 말을 내뱉는 공작의 표정이 잠깐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벨과 근처 시종들이 주인의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건 아나이스 공작, 자신이었다.
아스텔이 깨어나면 정식으로 청혼을 하려 했다.
하지만 카시언의 방해로 이제 그 일은 상당히 요원해졌다.
아니, 지금 상황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벨이 볼을 커다랗게 부풀렸다.
“왜 안 올까요? 프러포즈해야 하는데……. 비누 꽃도 접어 두었는데에.”
벨이 조잘거렸다. 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말이었으나, 순간적으로 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스텔에게 프로포즈를 하려 했다니.
벨 같은 어린아이들이 무슨 꿈을 꾸든 그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스텔이 영원히 혼자일 리는 없다.
카시언이 아스텔을 영원히 끼고 살 리도 없고, 정식으로 데뷔탕트 무대를 치르고 나면 결혼 시장에 들어오겠지…….
그가 카시언의 견제로 아스텔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에게 날파리들이 붙을 수도 있단 소리다.
급격한 위기감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서자 벨이 의아한 낯으로 칭얼거렸다.
“네? 공작님!”
그가 스산한 표정으로 벨을 내려다보았다.
이 꼬마 녀석은 아스텔이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대는 어려서 안 됩니다.”
벨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어, 키 크는 물약도 먹어서 벌써 삼 센티나 커졌어요!”
“아직 부족합니다.”
단호한 말에 보이지 않는 여우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간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었다.
하지만 아나이스 공작은 벨의 쫑알거림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스텔에게 접근한 놈들의 목을 치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아스텔이 눈치채면 안 되는데.’
일단, 그 사태까지 가기 전에 카시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필수일 것 같았다.
적어도 아스텔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자존심을 세울 이유가 없다.
무릎쯤이야 쉽다.
무릎 꿇을 기회가 없어서 문제지.
그렇게 무릎 꿇을 기회조차 오지 않은 채, 황궁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황제는 자신의 핏줄인 폐태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생각으로 무도회를 더욱 크게 열었다.
이번 무도회를 계기로 흔들리는 황권도 챙길 겸, 누명을 쓴 가문의 심기도 달래 줄 겸 특별한 날이 아니면 열지 않는 유리 정원까지 개방했다.
사교계는 오 년에 한 번 열까 말까 하는 유리 정원을 개방한다는 소식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십지는 연일 유리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황제의 처사가 얼마나 따스한지를 떠들어 댔다.
그사이 폐태자에 대한 이야기는 오스카 잔당의 게릴라전 정도로 짤막하게 단신 기사만 날 뿐이었다.
그만큼이나 모든 사교계 인사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무도회이기는 했지만…….
그 누구보다 금일의 무도회를 기다린 사람들은 단연 셋이었다.
아스텔을 볼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 아나이스 공작, 녹스.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카시언.
두 가지 생각을 다 하는 중이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아스텔.
이 셋 말이다.
* * *
아침부터 꽃단장을 열심히 한 나는 오빠와 함께 공용 마차를 탔다.
마차는 수월하게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우리 둘의 이름 뒤에 ‘뷔에트리’란 네 글자가 붙는 날이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실수하지 않겠지, 긴장하지 말자.’
지난 십여 년간 내내 마음 졸이며 간절히 기다려 온 날인데, 실수는 있을 수 없는 법.
나는 손거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내 얼굴과 옷차림을 느긋하게 관찰했다.
동그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뒤 머리를 깔끔하게 위로 올려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블론드 업 헤어와 잘 어울리는 청색 공단 드레스는 네크라인이 스퀘어 타입으로 깨끗하게 파여 있었는데, 가냘픈 목선이 드러난 덕분에 숙녀다운 우아한 기품을 풍겼다.
허전하지 않도록 목에는 깨끗한 자수정 목걸이를 착용했고…….
새하얀 레이스 장갑은 귀족가의 유행에 어울리도록 반 정도는 투명하게 살갗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느낌인데…….’
나는 연한 녹빛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맞은편에 앉은 오빠를 향해 물었다.
“오빠, 나 어때?”
그는 눈을 끔뻑거리다 가볍게 말했다.
“예뻐, 아스텔. 그런데 내가 세 봤는데 너 벌써 백여든여덟 번째로 물어보는 거야…….”
“긴장되니까 그렇지!”
오빠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금 입 모양으로 ‘예뻐’라고 말했다.
“으응……. 다들 놀랄 얼굴이 벌써 눈에 선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몇 번이고 키득거렸다.
긴장을 풀기 위한 수다 끝에,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차 바깥에서 마부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레이 경, 레이디 아스텔.”
“아, 네.”
“그레이 경, 오랜만입니다.”
“아, 이셀 경! 오랜만이네.”
누군가 했더니 장미 기사단 소속 기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흑발의 잘생긴 기사님을 보며 오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나를 소개해 줄 생각이 난 듯 오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여기는 내 여동생, 아스텔.”
“안녕하세요.”
내 얼굴을 응시한 이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동생이 있으셨습니까? 상당한 미인이시네요! 역시 카시언 경의 남매시군요.”
가볍게 칭찬의 말을 마친 이셀이 쾌활하게 웃으며 손에 든 결계석을 흔들었다.
“황궁을 지나가려면 결계를 통해야 하는 건 아시죠?”
내가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오빠가 가볍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레이 경의 신분이야 명확하지만 꼼꼼히 확인은 해야 해서요.”
“꼼꼼히 확인? 결계는 그냥 지나치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아뇨. 폐태자와 폐공작이 황궁 내부에서 벌인 작당 때문에, 결계 확인 절차가 더욱 정교하게 바뀌었습니다.”
그가 손에 쥔 돌을 우리 눈앞에 빼꼼히 들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계의 힘을 흡수한 이 마력석을 손목에 대시면, 조금 더 확실하게 신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요. 아, 레이디.”
그는 순진한 듯 눈을 빛내는 나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걸 결계석이라고 부른답니다, 레이디. 문제 될 것은 없어요.”
나는 빼꼼 고개를 내밀어 이셀의 손에 들린 결계석을 보았다.
감탄하는 표정을 애써 지우며 나는 결계석에 대해 떠올렸다.
이셀의 말마따나, 결계석은 결계의 힘 일부를 마력석에 집어넣은 것이다.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단순히 결계를 지나치는 의식보다는 결계석으로 사람을 하나하나 검사하는 편이 더욱 정확하기는 했다.
확실히 폐태자 사건이 황궁에 미친 파란이 어마어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물고 오빠를 응시했다.
그 순간 오빠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아……. 기억나네, 그러기로 했었지. 보고가 올라온 걸 본 것 같아.”
나직한 답에 기사는 결계석을 들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카시언이 자신의 신분을 의심당해 불쾌해하는 것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그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 그레이 경의 신분을 알기는 하지만, 이건 일종의 의례니까요. 결계석을 통한 신분 확인 절차를 먼저 거쳐 주십시오.”
나와 오빠는 시선을 마주쳤다. 창가에 조금 더 가깝게 앉아 있던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먼저 할게요.”
“아, 네. 레이디! 황궁 출입은 처음이신가요?”
한결 안도한 표정의 사내가 나를 보며 싱글벙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초연한 어조로 깔끔하게 답했다.
“아니요, 온 적이 있어요.”
“그러시다면……. 신분 등록이 되어 있겠군요. 손목을 이리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깍듯한 이셀 경을 보며 나는 가볍게 눈짓했다.
“네, 어서 해 주세요.”
이셀이 별 기대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손목에 결계석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화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셀이 잇새로 탄식을 내뱉었다.
“어…….”
“왜요?”
“결계석이 고장이 난 것 같아서요. 교체해 올 때까지 대기하시거나, 일단 들어가신 다음 무도회장 앞에서 제대로 신분 확인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 이셀을 가만히 보던 카시언이 손목을 내밀며 속삭였다.
“그럼 일단 나도 확인해 봐.”
이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카시언의 손목 위에 결계석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몇 초 뒤, 이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의 전신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체 왜…….”
“왜?”
“아니……. 그레이 경, 뭔가 이상합니다.”
당황한 이셀의 덜덜 떨리는 손이 결계석의 표면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가벼운 고대어로 뷔에트리 백작가 남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이건 아닌데요. 왜 죽은 사람의 이름이 두 분의 것으로…….”
오빠가 냉소적으로 반문했다.
“죽은 사람이라고?”
“예, 예.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카시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땀이 나는 손을 드레스 자락 위에 쓱 닦으며 긴장한 상태로 그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빠가 대화의 방점을 찍듯 선언했다.
“이제 그레이 경이 아니라, 뷔에트리 영식이라고 불러 줬으면 하는데.”
장난스러운 미소를 곁들였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사였다.
“예?”
이셀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죽었던 뷔에트리 영식이 바로 나니까.”
그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순간.
카시언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연스레 속삭였다.
“일단 들여보내 줘.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나?”
* * *
몇 번의 설왕설래 끝에 이셀 경은 울상을 짓고 우리를 들여보내 주기는 했다.
그 직후, 그는 허겁지겁 상부에 보고를 올리러 갔다.
하지만 우리가 탄 마차가 황궁의 무도회장에 도착한 게 먼저였다.
“그레이 경!”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문지기 기사들이 활짝 웃으며 문 앞에 선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신분 검사부터 바로 하고 입장시켜 드리겠습니다. 곁의 레이디는?”
“내 여동생이야.”
“아아, 네. 얼른 검사해. 뒤에 순서가 밀려 있어서, 일단 문부터 열겠습니다.”
왼쪽의 문지기 기사가 허허롭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오빠는 손목을 내밀었다.
그러나 오른쪽에서 오빠의 신분을 검사하기 위해 결계석을 들이민 기사가 당혹스러운 낯으로 한참을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 그게…….”
“뭐야, 얼른 호명하지 그래!”
그러나 입장을 알려야 할 목소리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무도회장 문은 이미 활짝 열린 채였는데 정작 입장 시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의아한 표정이 된 귀족들이 문가를 응시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카시언과 아스텔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시언 경 아니야?”
“호명 소리가 안 들리는데, 뭐지?”
귀족들의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듯, 연회장의 가장 안쪽 황좌에 앉아 병약하게 쿨럭거리던 황제가 입을 뗐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폐하……. 겨, 결계석이…….”
황제의 노호가 허공을 갈랐다.
“결계석이 왜. 호명 절차에 문제가 있는 게냐? 카시언 그레이 경이 아니냐.”
“그, 그것이…….”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어서 들여보내지, 뭐 하는 일이람.”
우리 뒤로 입장을 하려는 귀족들이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나도, 오빠도, 문지기 기사도 묵묵부답인 상태였다.
그리고 오빠와 나는 먼저 입을 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화려한 귀환을 위해서는 지금 샴페인을 터뜨려서는 안 되니까.
우리 둘이 문지기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곧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죄 없는 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 이분은 카시언 그레이 경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자그마한 소란이 일어났다.
이제 귀족들의 주목을 넘어, 무도회장 안에 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상태였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 아니라고?”
“누가 봐도 잘생긴 카시언 그레이 경인데! 그 옆의 레이디는 누군지 몰라도…….”
우리의 귓가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이목이 우리 남매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샴페인을 딸 때가 왔다고 판단한 듯, 오빠가 나직하게 웃어 보였다.
“이 기사가 저희의 이름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제 입으로 직접 말해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덜덜 떠는 문지기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레이 경이 말하게.”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카시언이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둘의 정체가 만천하에 공개될, 무척이나 긴장되는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오빠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뷔에트리 가문의 카시언 뷔에트리와 아스텔 뷔에트리,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빠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무도회장 내는 파문이 일다 못해 폭풍우가 휩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내내 연습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마지막 말을 꺼냈다.
“멸문했던 뷔에트리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였던 루카스 뷔에트리와 헤이젤 뷔에트리, 무도회에 초대받았으니, 입장하겠습니다.”
오빠와 나의 아명(兒名)이 아닌 공식적인 이름, ‘루카스’와 ‘헤이젤’이 공식 석상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아스텔이라는 이름과 카시언이라는 이름에 훨씬 익숙해졌지만.’
나는 오빠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소개는 모두 끝났고, 나는 오빠의 손을 잡은 채로 에스코트를 받아 입장했다.
우리가 무도회장으로 입장하는 가운데, 황제는 채신머리도 잊은 낯을 하고 입을 쩍 벌렸다.
‘입에 파리 들어가시겠네요, 폐하.’
물론 황좌에 앉아 있던 황제는 그나마 양반인 축에 속했다.
파티 테이블 근처에서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서서 하하 호호 웃고 있던 귀족들은 유령이라도 본 듯 난리를 쳤다.
엉덩방아를 찧는 이도, 글라스를 떨어트리고도 눈치 못 채는 이도 있었다.
쨍그랑 소리가 몇 초에 한 번씩 났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우리에게 붙박여 있었다.
뷔에트리 백작가의 귀환은, 말 그대로 몰아치는 해일과도 같았다.
뒤늦게 충격받은 황제의 중얼거림이 침묵 어린 장내를 갈랐다.
“그대가 뷔에트리의 장자…… 였다고.”
“예, 루카스 뷔에트리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차가운 정적 속, 그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누명을 쓰고 멸족당했던 뷔에트리 백작가의 직계 혈족이 살아 있었다.
그것도 은밀히 신분을 숨긴 채 제국을 지키고, 폐태자의 음모까지 밝혀낸 영웅이 되어 돌아오다니.
황제는 아직 당황을 숨기지 못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황제는 마지막 보루를 대하는 듯한 시선으로 문지기 기사를 바라보았다.
졸지에 쏠린 시선들에 이름 모를 문지기 기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상황을 여유롭게 관조하던 카시언이 입을 열어 화답했다.
“폐하, 저희는 황궁의 결계를 통과해 인증했습니다. 저희 남매의 신분은 이미 등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다시, 모두의 시선이 카시언의 등 뒤에서 결계석을 손에 쥐고 있는 문지기 기사에게 가닿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채로 제 손의 결계석을 들어 보였다.
“마…….”
“…….”
“맞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내리꽂혔다.
사람들의 안색이 저마다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그러나 아스텔과 카시언만큼은 담담하게 문지기 기사를 응시했다.
“이분이, 아니 카시언 그레이 경이……. 뷔에트리의 백작 영식이십니다. 곁에 계시는 분은 헤이젤 뷔에트리 백작 영애, 이시고요.”
황제는 허망한 낯으로 건조한 낯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하얗게 질린 안색과 달리 카시언은 자못 당당했다.
“폐하의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아스텔과 카시언은 예의를 지키는 상태로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황제의 치하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황제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때, 황제의 곁에서 고요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황후가 먼저 툭 말을 내뱉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황후가 카시언과 아스텔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황후가 정말로 짐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제 곁의 근위병에게 눈짓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뷔에트리 영식과 영애가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요.”
황후가 먼저 그들을 ‘뷔에트리’라 칭하며 공인했다. 그 호명이 끼친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제안에 황제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귀족들은 입방아를 찧기 시작한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말이 되나요, 이게?”
“하지만 결계를 통과했고, 신분을 증명받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카시언 그레이 경이, 뷔에트리의…….”
황제가 야심 차게 개최한 무도회.
그 무도회는 화려하게 귀환한 뷔에트리 남매의 사교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작금의 황제에게는 그 어떤 힘도 없었다.
그는 입술만 달싹이다 말았다.
지난날 폐태자가 쓴 독은 황제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남겼다.
그나마 지팡이를 짚고 무도회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카시언이 건넨 약 덕분이었다.
그는 맥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우선 연회를 즐기시게.”
황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황후 역시 이내 고개를 까딱했다.
그렇게 아스텔과 카시언은 제국 사교계의 중앙에 화려하게 귀환했다.
* * *
“뷔에트리 저택에서 사냥 대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제일 처음, 우리 주변을 둘러싼 건 기사들이었다.
귀족들은 아직 상황을 관전하는 듯했다.
그들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눌 뿐,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빠는 제법 능숙하게 주변에 다가온 기사들부터 사로잡아 나갔다.
“사냥 대회라니, 뭘 좀 아시는군요! 카시언 경, 아니, 뷔에트리 공자라고 해야 하나요?”
“그리 불러 주십시오. 이쪽은 제 여동생, 레이디 아스텔입니다.”
카시언은 이전과 같이 나를 아명으로 소개했다.
헤이젤보단 아스텔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이쪽이 더 익숙했다.
느끼한 인상의 사내가 아아, 하는 목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굽혀 내 손등을 잡았다.
“저는 볼튼 경이라 합니다. 아름다우십니다, 레이디 아스텔.”
그가 내 손등 위에 입 맞추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들어 무릎을 까딱했다.
“반가워요, 볼튼 경.”
“내 여동생에 대한 느끼한 시선은 거기까지, 볼튼 경. 우리는 사냥 대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나.”
“아아, 네. 그렇죠.”
나는 웃음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이후 볼튼 경만이 아니라 시어튼 경, 펠로스 경 등 다양한 기사들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오빠에게서 기사들을 소개받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황제가 오빠를 따로 불러낼 생각인 모양이었으니까.
황제의 근위병이 오빠에게 다가와 그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오빠는 내 손을 한 번 잡더니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입 모양으로 ‘어서 가 봐.’라고 속삭였다.
그는 못내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별수 없다는 듯 근위병의 뒤를 따랐다.
황제의 단상으로 올라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훑어보던 나는 속으로 낮게 웃었다.
이제 녹스를 찾아낼 시간이었다.
‘녹스는 어디에 있지? 발코니에 있으려나.’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레이디 아스텔.”
“처음 뵈어요. 저는 브라이어튼 자작가의 쉘리 브라이어튼이에요.”
“저는 피글렛 가문의 차녀, 카들리에예요.”
아까는 다가온 적도 없었던 레이디들이 한 무더기로 몰려 나를 둘러쌌다.
근처의 기사들은 죄다 레이디들의 공세에 한 발 밀려나 버렸다.
나는 한결 어리둥절해졌다.
왜지? 왜 내게 갑자기……. 이게 바로 사교계의 따돌림 비슷한 걸까?
나는 전신의 솜털을 삐죽 세우듯 긴장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만약에 사교계 화법으로 나를 괴롭힌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하지만 레이디들은 내 짐작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디 뷔에트리가 부러워요.”
“그분의 남매라니…….”
레이디들의 얼굴에 황홀해하는 듯한 표정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오빠에게 한정된 대화 주제.
그들의 상기된 양 볼.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사랑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는 서서히 상황을 짐작해 나갔다.
“그런데, 카시언 그레이 경, 아니지, 뷔에트리 영식께서는…….”
“……정말 멋지시죠, 호인이시고.”
“네?”
내가 그들의 의도를 모른 척 곁눈질만 하자, 레이디 하나가 직구를 날렸다.
“……그게, 뷔에트리 영식께서는 전과 다르게, 요즘 누구와도 염문설이 돌지 않으시던걸요. 혹여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러게요, 궁금하네요.”
나는 그들이 내게 친절한 이유를 완벽히 깨닫고야 말았다.
‘……다들 우리 오빠 좋아하는구나?’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레이디들의 번쩍거리는 눈빛을 느끼고 굳었다. 마치 군침 도는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과도 같은 눈빛이 일렁였다.
“혹시 저택에서 열릴 티 파티에 일 순위로 초대될 레이디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아아, 그러게요.”
확실히 알겠다.
티 파티보다는 ‘지금 카시언이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는지’가 궁금하겠지?
그럴 만도 했다.
카시언 그레이는 지금까지 한낱 평민 기사에 불과했다.
여기 있는 귀족 레이디들과 그는 결혼으로 맺어질 수 없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뷔에트리 백작가를 물려받게 될 루카스 뷔에트리는 다르다.
여기 있는 모든 귀족 영애들이 탐낼 만한 신랑감이 된 셈이니…….
나는 난처한 듯 웃으며 대화를 한 발 물렸다.
“요즘은 바쁘셔서요. 일 순위 레이디는 아마 없을 거예요.”
오빠한테 연인이 없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밝혔다.
하지만 아기는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해도 좋아하려나?
“아아…….”
“다행이네요…….”
그러나 내가 입 바깥으로 룬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모든 레이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있던 분위기가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식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내 근처에서 자잘한 대화를 나누던 레이디들이 순간적으로 모두 굳었다.
“그, 그게…….”
“저희는 잠시 자리를 비워 볼게요!”
“거기 보, 볼튼 경? 저리로 가 봐요.”
내 주변에 있던 모든 레이디들과 영식들이 갑자기 흩어지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금세 그 이유를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녹스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애틋하게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공작 각하?”
나와는 대략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서, 그는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그의 상태를 차분히 살폈다.
오빠가 떠나는 걸 보고 찾아온 걸까.
목에 맨 크라바트도, 살짝 얼굴께로 튀어나온 머리칼도 묘하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못 본 새, 조금 마른 건지 턱선이 더 예리해져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언가를 결심한 듯, 가까이 다가오며 사르르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살인 미소였다.
나는 그를 향해 활짝 마주 웃어 주다가, 문득 주변의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공포에 질린 듯한 안색, 겁먹은 듯한 두 눈동자까지.
……저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 녹스, 나쁜 짐승 아닌데!
* * *
녹스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카시언의 명인 ‘100m 이내 접근 금지’에 따라 발코니에 몸을 잠시 숨겼던 그는 아스텔이 뷔에트리 백작 영애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뷔에트리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스텔의 이름 뒤에 무언가가 더 붙든, 그건 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녹스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황제가 부른 듯 단상으로 향했던 카시언이 무도회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던 황제는 카시언을 데리고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아마도 뷔에트리 백작가의 작위 계승에 관해 의논하려는 눈치였다.
물론 그 역시 지금 녹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카시언의 방해 없이 아스텔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게 단 몇 분일지언정.
그는 성큼 걸어 아스텔의 근처로 다가갔다.
물론 그녀의 레이디다운 평판을 위해서, 춤을 신청하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아스텔에게 말 한마디라도 걸어 보기 위해, 레이디들 주변을 얼쩡거리는 저 머저리들과 함께.
그는 아스텔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머저리들을 가볍게 흘겼다.
곧 그 시선을 받은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명백한 그의 고의였다.
그는 건조한 안색에 화색을 띤 채 아스텔을 향해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텔.”
다섯 걸음에서 네 걸음, 네 걸음에서 세 걸음…….
성큼성큼 나아가자 금세 그들의 사이가 좁아졌다.
그를 발견한 아스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의문을 담아 중얼거렸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도 그럴 게,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거의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그녀가 당황한 틈에, 녹스는 나직하게 그녀의 손등을 잡아 입술을 맞췄다.
“보고 싶었습니다.”
분명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그의 입술과 직접 맞닿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스텔은 입술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자꾸만 뛰어서였지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보던 레이디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레이디 아스텔, 구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레이디 아스텔 뷔에트리가 한때 공작 각하의 피후견인이었다고 듣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아나이스 공작님의 눈빛을 봐. 왠지, 잡아먹힐 거 같은데…….”
아스텔에게 그들의 볼륨 조절이 안 된, 지나치게 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녹스에 대한 오해들에 괜히 마음이 쓰렸다.
모두의 불신을 꺾기 위해서, 그녀는 환히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아스텔 뷔에트리가 아나이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뵈어요.”
“정말…… 아스텔이군요. 꿈이 아니라.”
그가 느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아스텔의 귓가에 가볍게 속삭였다.
“꿈같습니다.”
“그러니까요! 우리, 너무 오래 안 본 것 같아서…….”
아스텔 역시 그에게만 들리도록 자그맣게 속닥거렸다.
남성 귀족이 연회에서 영애에게 귀엣말을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관심의 표현이라 여겨질 법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녹스의 악명도 악명일뿐더러, 그가 아스텔을 거의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들이 서로 호감을 나누는 사이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스텔을 사자 앞의 사슴 보듯 안쓰럽게 응시할 따름이었다.
한편, 아스텔은 모두가 위험한 자라 칭하는 녹스를 빤히 바라보며 풀 죽은 대형견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위로하듯 톡, 말을 내던졌다.
“왜 그동안 나 보러 안 왔어요?”
“그건…….”
녹스가 드물게 머뭇거리자, 아스텔은 선수를 치듯 낮게 속삭였다.
“진짜로, 보고 싶었는데…….”
아스텔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것을 가졌다는 듯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맺혔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끈덕지게 수군거리는 소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스텔은 녹스의 다정한 표정을 보며 느슨해진 입꼬리를 거듭 올렸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당신이 허락한다면,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다시 제 저택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
그는 진심을 담은 절절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한 번, 만이라도.”
우리는 이제 연인인데, 왜 그렇게 애달픈 표정을 짓는 거야…….
아스텔은 그의 애절한 표정을 가만히 보다가 단단히 결심했다.
‘아무래도 오빠를 조금 설득해 봐야겠다.’
카시언이 녹스를 진정 혐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스텔에게만큼은 여름철 복숭아처럼 물렀다.
그러니 잘만 말하면 녹스와 만나는 것을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녹스가 괴롭혀 온 전적이 있으니 조금, 약간, 시일이 소요되기는 하겠지만…….
“어떻습니까.”
그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스텔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에.”
순간 녹스의 표정이 더욱더 환해졌다.
광대가 부풀고 입꼬리가 확연히 올라간 완벽한 미소였다.
보통 미소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전염시키는 법인데, 녹스의 미소는 순식간에 무도회장을 싸늘하게 식혔다.
수군거림도 잦아든 상황 속, 조금 당황한 아스텔이 급히 좋아요, 라고 부연하려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안 됩니다.”
……녹스의 것보다도 싸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아스텔과 녹스는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곳을 응시했다.
녹스의 달콤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건조해졌다. 그것도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파사삭, 하고.
행복한 조우를 방해한 자를 박살 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채로, 녹스의 표정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사라지고, 둘의 시야에 카시언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낯은 차가웠던 음성 이상으로 대단히 스산했다. 바로 그때, 카시언이 녹스를 보며 물었다.
“왜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녹스가 애써 입가에 호선을 그려 내며 웃었다.
“아뇨. 없, 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따사로운 분위기를 개박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카시언 뷔에트리, 다시 말해 아스텔의 오빠였으니까.
그를 힐끗 본 카시언이, 언젠가 녹스가 그랬듯 승리자의 미소를 뻔뻔하게 지었다. 그리고는 아스텔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이제 가자, 아스텔.”
카시언은 턱을 추어올리며 스타카토를 찍듯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우리 집으로.”
‘좋아, 일단은 이 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하자.’
심통이 난 오빠부터 달래자는 생각에, 아스텔은 어깨를 잡은 카시언에게 눈을 찡긋했다.
카시언은 얄미운 표정을 하다 불쑥 입을 열었다.
“아스텔.”
“쉿.”
아스텔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카시언을 엄하게 제지하며 세모눈을 뜨자, 카시언은 급격히 쭈글쭈글해졌다.
그 틈에 아스텔은 녹스를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조만간 다시 만나…… 요!”
“……네, 꼭.”
어쩐지 이 자리의 서열 관계가 정해진 것도 같지만…….
아스텔은 낮게 웃으며 오빠의 손을 잡았다.
틈이 나면 아나이스 공작저에 가야겠다, 라고 다짐한 아스텔.
그러니까, 그녀는 분명 녹스와의 이별이 짧을 것으로 생각했다.
* * *
……무도회 이후, 무려 보름이 넘게 흘렀다.
수많은 사람이 내게 러브 콜을 보냈다.
정찬이나 티 파티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장부터 로맨틱한 연애담을 담은 시까지 온갖 방식으로 연락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녹스를 만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폐태자 잔당을 처리하러 갔으니까.
북부를 지키는 아나이스 공작이 뜬금없이 폐태자 잔당을 처리하러 직접 출정하다니!
사교계 신문에도 꽤 이슈가 될 만큼 화제였다.
사실 황태자의 여남은 세력 정도는 하급 기사들이 처리하러 가도 되는 일이니까.
그래서일까.
사교계에서는 ‘폐태자에 대한 아나이스 공작의 분노가 깊었기에, 폐태자의 세력 중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으려 출정한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아무래도 오빠가 개입한 것 같은데.’
나한테는 온풍처럼 따뜻하고, 내가 조금만 세모꼴 눈을 떠도 당황해 눈만 데굴거리는 바보 오빠지만…….
녹스에게는 늘 매서운 시선을 날리고, 차가운 전쟁터로 내몰 정도로 매정하니까.
왠지 마음이 아파져서 입술을 삐죽거리던 나는 가십지를 손에 들었다.
적당한 소일거리나 하면서 녹스에 관한 생각을 잊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가십지에도 녹스의 이름이 실려 있었다.
보통은 뻔하디뻔한 내용이었으나, 오늘 실린 내용은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나이스 공작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오다?]
대충 훑어본 바, 상대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는 두루뭉술한 내용이었으나 확실히 나는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누구야, 대체!’
녹스에게도 슬쩍 물어야지.
나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 있었냐고.
나는 기사를 각 잡고 읽어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뭐 해, 아스텔?”
깜짝 놀란 나는 기사에서 눈을 돌렸다.
마치 신생아를 안듯 룬을 안고 어르던 오빠가 내가 앉은 소파로 소리 없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소파에 룬을 내려놓더니 대중없이 놓인 가십지를 훑어보았다.
“이게 뭐야?”
염문설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오빠가 인상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하여튼, 공작은 너무 유명해. 가십지에도 허구한 날 이름이 올라가고 말이야……. 그런 자와 함께 지내면 귀찮기만 하지. 안 그래?”
오빠가 녹스를 헐뜯는 것을 들으며 나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유명 인사인 건 오빠도 마찬가지잖아…….”
“…….”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오빠를 구슬리듯 속삭였다.
“저건 그냥 가십지니까. 신경 끄면 그만이구.”
오빠 역시 가십지에 퍼진 온갖 루머에 당해 본 피해자여서일까.
아까 분노를 불태운 것치고는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가십지에 적힌 녹스의 이름을 노려보고 있기는 했다.
나는 동공을 떨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음, 음. 오빠는 공작님이 왜 싫어? 가십지에 이름 오르내리는 거 빼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책자로 나열할 수도 있어.”
……큰일이다.
오빠가 은혜도 원수도 두 배로 갚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녹스에게 우리 둘 다 제법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그래도……. 음, 신분도 높고, 나한테도 잘해 주잖아.”
“아직 네게 못 해 준 게 많아. 그리고…… 사랑은 변하는 법이야, 아스텔.”
녹스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오빠의 녹색 눈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 계속 반대하는 거구나?”
오빠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진지하게 단언했다.
“당연하지!”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훑어보았다.
흔들렸던 오빠의 표정이 서서히 확고하게 제 자리를 찾았다.
‘아무리 봐도, 쉽게 넘어가 줄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조만간 삼자대면을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자리에서 과거 녹스가 나를 위해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하나둘, 털어놓는다면…….
오빠 역시 녹스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고.
“아무튼, 너한테 상처 주면 죽일 거다.”
잠깐만.
녹스의 초상화가 게재된 가십지를 흰자가 충혈된 눈으로 무시무시하게 보는 오빠를 보면.
……영원히 두 사람의 관계는 평행선을 그릴 것 같기도 하고.
불안감이 가득 차오르던 차, 오빠가 밝게 말했다.
“아스텔, 우리가 이런 음침한 얘기를 할 때가 아냐.”
그는 그동안 보여 준 적 없는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우리 귀환 파티 준비해야지! 뷔에트리 저택이 수리되면, 사냥 대회랑, 티 파티를 동시에 벌여야 하잖아.”
오빠는 뷔에트리 백작 저택으로 귀환하면서 사람들을 초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응, 그랬지. 준비해야지.”
그가 전달해 준 온갖 티 파티 초대장들을 몇 번 뒤적거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녹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오빠의 장단을 맞춰 주자.
그나저나 지금쯤 녹스는 폐태자 잔당을 처리하고 있을까?
……건강할까, 몸은 좀 무사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우려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 * *
“이곳까지 이 노인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랍니까, 각하.”
폐태자의 잔당이 웅크리고 있다는 푸룬 산맥 근방, 음산하고 어두운 막사 안.
푸룬 산맥은 젊은이조차 꼼짝하기 어려울뿐더러, 제아무리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노파라 할지언정 오가기 힘든 곳이었다.
‘도대체 내가 여기 왜 온 거야.’
입술을 질끈 깨문 노파는 애써 표정을 굳히며 자신과 마주 앉은 아나이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추운지 앞니가 딱딱 부딪치는데도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음침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이 흉포한 사내가 만들어 낸 것이리라, 생각하는데 공작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노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시겠다고요……?”
“예.”
진중한 공작의 표정을 보니 한결 더 아리송해졌다.
그녀는 평범한 거리의 점성술사였다.
별도 좀 보기는 했으나 인간의 운명까지 점칠 능력은 못 되어, 겨우 연애 점이나 대충 봐 주는 신세였다.
그게 기가 막히게 잘 맞아서 무척 많은 커플을 성사시켰을 뿐.
정확히 말하자면 노파는 점성술사보다는 거리의 연애 전문가로 유명한 몸이었다.
그런 노파에게, 냉혈한 아나이스 공작 같은 자는 신문에서나 볼 법한 귀족 인사에 불과했는데…….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그대를 부르셨다.’
‘아, 아니. 길에서 빌어먹고 사는 저를 고, 공작 각하께서요? 이거 순 사기꾼 아녀?’
‘됐고, 순순히 따라와. 일이 잘되면 금괴를 약속하셨다.’
‘그으, 금괴…….’
……금괴에 혹해 얼떨결에 푸룬 산맥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는데 말이지.
아나이스 공작과 독대를 하고 나니 상당히 후회막심했다.
‘괜히 왔어……. 대체 날 왜 부르신 건지 오기 전에 이유라도 캐물을 것을. 당황해서, 원!’
공작을 흘깃흘깃 응시하다 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겨우 짐작해 냈다.
어디 보자, 아나이스 공작이라면 분명 어두컴컴한 뒷골목 일에 자신을 쓰려 하겠지.
그렇다면…….
‘호오라, 내가 젊을 적 저주술을 썼던 것을 들킨 게 분명해. 이를 어쩐다.’
과거 몇몇 불륜남을 처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점성술사로서 별의 기운을 읽고 저주를 건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저주가 훌륭하게 먹혀들어 정의 구현을 했다고 좋아했는데!
음습한 저주 행위를 들켜 공작 앞에 끌려올 줄 알았으면 절대로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파의 머릿속이 한껏 복잡해졌을 무렵 공작이 사형 선고를 내리듯 차갑게 말했다.
“그대는 점성술사라고 들었습니다.”
“예, 예. 비천하기 짝이 없는 몸을 그리 칭하는 자들도 있더이다.”
냉기 어린 공작을 힐끗 본 노파가 배냇적 시절의 용기까지도 죄다 박박 긁어 덧붙였다.
“하나 그저 이 노파의 잡스러운 재주일 뿐인 것을요. 별것 아닙니다.”
“잡스러운 재주라고 했습니까.”
그 잡스러운 재주를 발휘하지 않으면 죽일 거다, 같은 눈빛이었다.
노파는 입 속의 군침을 꿀꺽 삼킨 뒤 답했다.
“예. 저주를 조금 할 줄은 알지만, 주술 실력이 그리 대단치는 않습니다.”
“저주…….”
공작이 침음을 삼키듯 느릿하게 중얼거리자, 노파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예. 그, 그것이. 어떤 자를 저주하시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제 삿된 재주가 공작 각하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사옵, 습니다.”
말을 마친 노파가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맞잡고 애써 그를 응시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눈매를 가늘게 뜬 채로 탐탁잖다는 낯을 했다. 저것은 분명 차오르는 짜증을 숨기는 표정이렷다.
아무래도 끝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노파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을 때였다.
“누군가를 저주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
“그저 연애 상담을 하려 할 뿐입니다.”
노파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반문했다.
“예에? 사망 상담, 아니, 연애 상담 말씀입니까요?”
공작이 제대로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한결 아연한 낯이 된 노파가 눈썹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연애 상담이라니, 이것은 말도 안 되지. 잠깐, 잠깐. 보자…….’
그러고 보니 제국의 모든 가십지를 구독하는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음, 혹시 공작 각하를 짝사랑하는 귀족 여인을 죽이고 싶으신 거라면……. 저보다는 다른 술사를 찾는 것이…….”
……아나이스 공작이 자신에게 구애하는 귀족가의 레이디를 불결한 날파리 보듯 보았다지.
확실히 이런 살기를 풍기는 자라면 귀찮게 구는 이들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별 재주도 없는 자신 같은 술사를, 이런 산맥 깊숙한 곳까지 불러서 한다는 게 고작 레이디에게 저주는 거는 일일 줄이야.
누군지 모를 그 레이디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에 그녀가 코를 훌쩍였을 때였다.
공작의 얼굴에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죽이지 않습니다.”
싸늘한 태도의 공작을 보던 노파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야말로 어이가 없어진 탓이다.
그럼 도대체 뭔데?
“……어떤 연유로 저를 부르셨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공작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덩달아 노파의 낯에도 당혹감이 어렸다.
“연애 상담이라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해야 연인의 가족에게 교제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률이 궁금합니다.”
그 순간, 노파는 공작의 입가에 피어난 잔잔한 미소를 보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한 연애 상담을 위함이었다고? 전장의 악귀라 불리는 이 남자, 아나이스 공작이 연애 상담을 한다고?
‘아니, 아니지.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아나이스 공작이 아닌가?’
노파는 상대의 외양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검은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
의심하려 해 봐도, 외모도 그렇고 푸룬 산맥에 막사를 친 것도 그렇고, 막사 주변에 진을 친 공작가의 기사들도 그렇고…….
정황상 아나이스 공작이 확실한데.
“그, 그것은……. 교, 교제 허락은……. 그러니까…….”
‘연인의 가족에게 교제 허락을 받는 방법’은 노파의 전문 분야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그 아나이스 공작이 하찮은 자신의 의뢰인이 될 줄이야…….
절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만 노파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때였다. 공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옅어지다 마침내 사라졌다.
“연인의 가족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음산한 침묵이 감돌았다.
당연하지, 무섭잖아.
……라고 말하려던 노파가 급하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을 무심히 응시하던 공작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참회는 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를 죽이신 것은, 무슨 잘못을…….”
“죽인 적 없습니다.”
다행히 죽인 것은 아닌 듯싶었다.
조금 안심한 노파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 겠는데 말입니다.”
노파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연인의 가족을 설득하는 데에는 좋은 방법이 몇 가지 있지요. 우선 이렇게 해 보시면은 어떨지…….”
아나이스 공작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턱을 괸 채 진지하게 들었다.
노파는 침을 튀겨 가며 일장 연설했다.
그렇게 십여 분간, 공작은 그녀의 말을 머릿속 깊숙이 새겨들었다.
타칭 연애 전문가라더니 듣다 보니 제법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카시언 뷔에트리가 그의 무례했던 과거의 언행과, 공포스러운 악명 등을 이해하고 넘어가 줄지도…….
아니, 용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백 미터 접근 금지 해제 정도.
노파의 조언을 듣는 그의 표정에 묘한 희망이 어렸다.
* * *
바로 그때, 카시언은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장원 앞에 서 있었다.
아스텔과 나란히 선 그의 표정에 행복함이 만연했다.
그도 그럴 게…….
“이 널따란 장원이 전부 폐하께서 하사한 것이랍니다.”
카시언의 눈앞에는 오늘부로 그의 소유가 된 풀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날이 조금 추워, 찬 바람이 그의 뺨에 와 닿기는 했다.
그러나 바람 따위가 대수일까.
이토록 따사로운 햇볕이 그를 비추고 있는데.
비로소 지난했던 복수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쁘군요.”
“축하드립니다, 뷔에트리 백작.”
그리 말하며 황제의 사절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카시언이 보내는 약으로 겨우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탓일까.
황제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뷔에트리 백작가의 오명을 씻어 주겠다 대대적인 역사 편찬을 거행했을뿐더러, 공식적으로 카시언의 백작 작위를 인정해 주었다.
백작에게 수여되기엔 분에 넘치는 저택에 장원까지 내리기도 했다.
황제가 하사한 장원에는 종종 외유를 나올 수 있는 별장도 달려 있었다.
제게 주어진 것들을 보고 제법 뿌듯해진 카시언이 그의 옆에 선 아스텔을 응시했다.
바람결에 머리에 쓴 보라색 보닛이 삐뚜름하게 휘날려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보닛을 바로 해 준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어때, 아스텔?”
“어, 어어……?”
허공을 멍하게 보던 아스텔이 카시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표정을 보아 하니 보닛이 날아가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양떼 목장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고……. 좋네.”
뒤늦은 아스텔의 대답에도 카시언은 싱글벙글했다.
“그렇지? 저기엔 커다란 마구간도 하나 세워 두려고. 별장도 손 보면 쓸 만할 것 같아.”
두 귀족의 담화를 잠자코 듣던 황제의 사절이 잽싸게 말허리를 가로챘다.
“암, 그렇고 말고요. 아, 그리고 말입니다.”
아스텔과 카시언의 시선을 받은 그가 중요한 것을 밝힌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황후 폐하께서는 황궁의 귀물을 하나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번에 날아간 것만큼이나 귀한 토템으로 말이죠.”
지난 죄를 씻고자 하는 건지 황제의 아낌 없는 총애 덕분에 뷔에트리 백작가의 창고에는 온갖 장중 보옥이 쌓였다.
하지만 이번에 날아간 회귀 토템만큼 귀한 재물까지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황후가 선뜻 귀한 황궁의 토템을 준다고 제안하다니.
카시언은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대답했다.
“대단히 기대되는데. 그치?”
“응, 그러게.”
아스텔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의 중심이 아스텔 쪽으로 옮겨 간 셈이었다.
아스텔의 환한 미소를 멍하게 보던 사절이 웬걸 갑자기 호들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야 생각이 났군요!”
“네?”
“황후 폐하께서 레이디 뷔에트리의 카페 운영은 어찌 되는 것이냐, 그리 질문도 하셨습니다! 카페의 문은 닫혀 있던 것을요.”
아스텔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음, 카페는 다시 오픈할 예정이에요. 지금은 조금 바빠서요.”
사절의 표정 위로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귀족 영애의 단독적인 사업 운영은 다소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귀족들의 예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경멸하는 시선쯤이야 오래전부터 지겹도록 겪어 왔으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재오픈 날에 황후 폐하를 초대할게요, 꼭.”
그녀는 황제의 사절을 보면서 재차 익살스럽게 키득거렸다.
카시언이 아스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뭐든 하고 싶은 거 다 해.”
공작놈 만나는 것만 빼고.
* * *
황제가 내린 장원을 찬찬히 둘러보듯 산책한 뒤, 카시언과 아스텔은 그레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카시언은 뷔에트리 백작 저택의 수리 현황을 직접 점검한 뒤 사냥 대회를 준비해야 해서 바빴다.
아스텔 역시 분주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냥 대회와 함께 마련될 레이디들의 티 파티를 손수 준비하는 중이었다.
아스텔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다과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턱을 괴고 있었다.
한참 사냥 대회에 필요한 금액을 정리하던 카시언이 지친 듯 등받이에 허리를 단단히 기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준비를 했으니, 슬슬 다과도 먹으면서 휴식을 할 때가 왔다.
카시언은 아스텔을 보았다.
그녀는 한 시간 전과 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요즘따라 저런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럴까.
카시언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티 파티 끝나면 사업 준비 할 거지, 아스텔?”
그러나 아스텔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아스텔의 눈 가까이에 검지를 대고 휙휙 흔들어 보였다.
“아스텔?”
“어어, 어? 어? 왜?”
시선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나, 목울대가 일렁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아스텔은 그녀의 양심에 뭔가 켕기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심문하듯, 그러나 반쯤 장난스레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아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세차게 여러 번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 아니야. 별생각 아냐.”
누가 봐도 과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화제를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카시언은 미심쩍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별일도 아닌데 평소와 다름없는 척하는 태도가 몹시 수상했다.
“그, 그보다 사람들 신기해.”
“왜?”
아스텔은 찻잔 옆에 올려놓은 가십지를 가볍게 흘겼다.
지면 위에는 카시언의 아들인 룬에 관한 이야기가 그득했다.
“아, 저거. 저게 왜?”
카시언은 얼마 전, 룬에 대한 이야기를 사교계 전반에 가감 없이 밝혔다.
그는 룬을 사생아처럼 숨겨 두고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아기가 있으니 결혼 시장에서 몸값이야 좀 떨어지겠지.
그러나 룬을 뷔에트리 백작가의 후계로 키울 생각이니, 구태여 결혼에 얽매일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한결 홀가분했다.
수도의 꽃이라는 귀찮은 멍에 따위는 쉽게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오빠한테 아들이 있다는 게 알려졌는데도, 오히려 인기는 더 늘었잖아.”
아스텔이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시언은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최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카시언의 인생사가 어느새 멋지게 포장되어 있었다.
룬을 지키기 위해 기울인 노력들이 미담으로 포장되어 가십지에 진열되었다.
덕분에 레이디들은 그의 짠한 삶을 연민했고, 힘겹게 살아온 카시언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수도의 꽃 노릇을 더 해야 하게 생겼다는 소리다.
‘대체 어떤 놈이 미담처럼 포장하기 시작한 건지.’
귀찮다는 듯 미간을 문지른 카시언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무튼,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해. 그것보다 너, 왜 다른 소리 해?”
“응? 다른 소리?”
카시언은 매의 눈으로 아스텔을 응시했다.
기사의 직감은 예리한 법.
그는 아스텔이 꽤 중요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아스텔?”
아스텔이 눈썹을 긁적이며 시선을 옆으로 두었다.
그녀의 입 밖으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난 그냥…… 공작님이랑 카페 온 적 있거든. 그때 생각나서…….”
살짝 눈치를 보는 듯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음, 이런 찻주전자도 공작님이 좋아하시겠다, 싶어서.”
……제법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도 아직도 공작 놈을 생각하는 걸까.
카시언의 미간에 대놓고 움푹 고랑이 패었다.
분하지만 아스텔이 그놈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 같다.
아스텔이 좋아한다면 솔직히 그가 지난 시간 동안 당해 온 모욕 따위야 상관없지만…….
……아직 고작 스무 살인데.
또래 친구도 안 사귀어 봤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을 텐데.
든든한 가족이자 오빠로서 해 주고 싶은 것도, 경험시켜 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평민으로만 살아온 아스텔이 벌써 악명 높은 공작과 교제나, 약혼 같은 걸 하게 되면…….
아스텔의 세상이 너무 좁아질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 되었다.
카시언은 공연히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뭐든 좋아해야지.”
“응?”
아스텔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면서, 카시언이 불퉁하게 마저 말했다.
“너처럼 귀한 애가 만들어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아스텔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지만 어릴 땐 다들 나를 거지라고 조롱하고 싫어했는걸. 오빠랑 녹스 빼고.”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게 당연했다는 듯이 천진한 목소리.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그는 습관적으로 아스텔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보다…….
“녹스?”
낯선 이름인데.
그는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리며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어?”
아스텔이 아차, 실수했다는 듯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카시언은 그녀의 당황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태도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까지. 보아하니 녹스라는 놈은 분명 아스텔과 무언가 관계가 있다. 그에게는 숨기고 싶은 관계일지언정……. 카시언은 아스텔의 턱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춘 뒤, 직설적으로 물었다.
“녹스는 또 누구야?”
평정을 찾은 아스텔이 싱그럽게 웃었다.
“날 구해 준 사람이야. 나중에 알려 줄게.”
“친해?”
그녀는 카시언의 빗금 같은 미간 주름을 콕 짚어 누르며 강조했다.
“응. 조만간 소개할게. 녹스랑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알려 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된다는 표정 그만 짓고 웃어.”
그러나 카시언은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과보호하는 오빠로 여기는 듯한 아스텔을 보니 더더욱 웃음이 안 나왔다. 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아나이스 공작을 막는 것도 벅찬데 녹스란 놈은 또 누구야?
괜찮은 놈인가?
혹시 순진한 아스텔을 등쳐 먹으려 드는 사기꾼은 아니겠지?
코흘리개 시절부터 남달랐던 아스텔의 호구력을 떠올리니 영 안심이 되지 않았다.
녹스, 녹스라.
뭔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한 이름인데 말이지…….
* * *
부산하게 찻잔에 입혀진 금박을 매만지는 아스텔을 보면서, 카시언이 미미한 패배감을 곱씹고 있던 바로 그 시점.
얼떨결에 카시언의 골칫덩이가 되어 버린 녹스이자 아나이스 공작.
그는 푸룬 산맥에 숨어든 오스카의 잔당들을 훌륭하게 처리한 뒤였다.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끝난 전투.
그는 풀숲 사이로 나동그라져 기절한 다섯 명의 흑마법사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전투가……. 벌써 마무리되었군요.”
“경하드립니다, 각하!”
기사들은 폐태자 일당을 손쉽게 해치웠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공작은 불쾌한 낯이었다.
이래서야 노파와 설계한 계획대로 진행될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셔야 합니다. 사람은 약한 것을 연민하게 되어 있거든요.’
‘연민이라고 했습니까.’
‘예, 각하께서 워낙 피도 눈물도 없는 맹수 수인이라, 연인분의 가족께서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그러니 피도 좀 내고, 눈물도 좀 흘리고. 전투에서 약간, 아주 약간 다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의외의 느낌을 주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거죠.’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오스카의 잔당을 처치하면서 부상을 입고 피를 적당히 흘리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오스카 측의 전투력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바로 픽, 쓰러져 버렸으니까.
그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물었다.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을 대신해,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잔당을 묶었다.
죄지은 자들은 끌려가고, 공작을 포함한 기사들은 우뚝 서 있던 그때.
아나이스 공작은 기절 상태로 끌려가는, 흑마법사 한 놈을 발견했다. 그가 입은 로브의 가슴께가 유달리 두툼했다.
그는 곧장 수상쩍은 자에게 다가가 로브 안쪽을 헤집고 쪽지를 확인했다.
[뷔에트리 백작 저택의 사냥터에서 최종 접선]
그 쪽지를 적은 것은 바로 폐태자 오스카였고,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쪽지를 손안에 가두어 구겼다.
다정함이 담긴 시선이 흑마법사 쪽을 응시했다.
뷔에트리 백작가에 합법적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되다니.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웃었다.
“수도로 즉시 귀환하겠습니다.”
이제 완벽한 해후가 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노파가 건넨 마지막 조언을 떠올렸다.
상대의 평판에 도움이 되어 주고, 한껏 불쌍한 척해 동정을 사는 것.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드는 것까지.
* * *
황제가 황궁 마법사들을 내려 준 덕분에 황폐했던 뷔에트리 백작 저택은 훌륭하게 복원되었다.
티 파티와 사냥 대회도 조만간 열릴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아스텔과 카시언은 그레이 저택에서 뷔에트리 저택으로 거취를 옮겼다.
아스텔이 티 파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덕에, 카시언은 룬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벽난로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따뜻하게 불타오르는 자그마한 서재 안.
몇 날 며칠 함께 잠들었다고 그새 조금 마음의 문을 연 룬이 카시언이 앉은 흔들의자 바로 앞까지 엉금엉금 다가왔다.
“왜 그래, 룬?”
감격한 카시언이 묻자, 룬이 그의 시야 바로 앞에 책을 들이밀었다.
“롬이랑 줄리.”
“롬과 줄리?”
“웅! 일거 조!”
무려 책을 읽어 달라고 하다니.
카시언은 감격에 찬 채로 책을 받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 달라는 건 분명 엄청난 친밀감의 표시야.’
한껏 들뜬 그의 입가에 볼우물이 팼다.
“그럼, 읽어 줄게.”
“웅!”
“자, 소설을 읽기 전에…….”
그는 흔들의자 아래 카펫에 몸을 비비는 룬을 한 손으로 안아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한 아기는 무릎 위에서 책을 읽는 거란다.”
“웅!”
순진한 룬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시언은 만족스러운 태도로 소설책의 첫 장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 롬과 줄리.”
제목은 사실 ‘롬과 줄리’가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롬과 줄리’라고 했으니까, 그게 맞는 거지.
“옛날 옛적에, 몬태규 가문의 로미오와 캐플릿 가문의 줄리엣이 살고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줄리엣의 오빠는 로미오를 반대했…….”
룬이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카시언은 당황했다.
줄거리를 읽던 그의 뇌리에 무언가 기시감이 일었으니까.
‘이거 뭔가 아스텔이랑 나, 그리고 공작 얘기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이 관계에서는 자신이 악당이었다.
카시언은 빠르게 소설책의 표지를 접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룬이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만해써? 일거 조!”
‘롬과 줄리’라는 소설책은 룬 같은 어린이가 읽기에 지나치게 통속적이었다.
뭔가 찔려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고.
“룬, 아들. 이거 어디서 났어?”
“옌날 집!”
해맑은 룬의 말에 카시언이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랬었지…….”
기사 시절, 종종 저택에 방문한 사람들이 시간을 죽일 수 있도록 서재에 가십지나 소설책을 구비해 두기도 했었다.
아마 그중 하나를 룬이 발견하고 이사 올 때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카시언의 시선이 룬에게서 미끄러져서, 책 쪽으로 향했다.
집안의 반대로 인해 불타오르는 금단의 사랑, 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괜히 불안감이 일었다.
‘이거 혹시……. 아스텔이랑 공작도, 내가 갈라 놔서 더 불타오르는 거 아니야?’
카시언의 손에서 소설책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던 룬이 책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허업, 꾸겨져써!”
“……아, 아니야. 아빠가 실수했어.”
놀란 룬의 표정에 카시언이 멈칫했다.
혹시 아빠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카시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소설을 착착 펼친 뒤, 룬을 향해 과하게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룬은 카시언의 녹빛 눈동자를 마주 보더니 쭈뼛쭈뼛 말했다.
“흠…….”
“응?”
무언가 탐탁잖은 듯한 표정의 룬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할 마리 이쏘.”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룬의 안색을 살폈다.
진지하지만 수줍게 귀밑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 진지한 말을 하려는 모양인데…….
“뭔데?”
제 아들의 첫 부탁, 같은 거였다.
조금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
카시언은 룬의 입술이 우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아기, 공잔님 보고 시퍼! 언제 와?”
룬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사삭, 카시언의 인상이 구겨졌다.
“왜?”
“공잔님은 채기두 첨부터 끄까지 다 일거 조써. 보고 시포.”
……그 공작이 아이에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줬다는 뜻일까, 혹시?
“제법……. 잘해 준 모양이구나.”
“웅! 잘해 조! 공잔님 마니 보고 시포!”
솔직히 말해서 북부 공작성에 아이를 두고 왔을 적, 아나이스 공작이 룬을 패대기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수한 룬이 이렇게까지 공작을 따르는 걸 보면…….
아나이스 공작이 확실히 룬에게 제법 잘해 주기는 한 모양이었다.
제 아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던 카시언의 마음이 물에 넌 골판지처럼 흐물거리려 했다.
하지만 카시언은 애써 입가에 힘을 꾹 주며 마음을 다잡았다.
공작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과 아스텔과의 교제를 허락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아스텔에게는 아직 해 주고 싶은 게 많아. 제 것을 누리기도 전에, 다른 가문으로 보낼 수는 없어. 속이 여린 아이인데 상처받으면…….’
카시언은 동생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스텔은 아직 고작 스물이고 가문의 복수 때문에 숨죽이고 사느라 못 해 본 게 많은 아이였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보고, 친구도 사귀어 보고, 그들 사이에서 따뜻한 행복을 느꼈으면 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만큼 앞으로의 인생을 마음껏 즐겼으면, 힘든 건 다 자신이 할 테니 행복만 누렸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물렁물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딱딱하게 바꾸며 속삭였다.
“네 아빠는 나야, 룬. 아빠가 앞으로 그런 거 다 해 줄게.”
잠시 못마땅한 눈빛을 한 룬이 어색하게 카시언의 몸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공잔님이는, 붕붕이도 해 조써. 압빠도 해 조.”
“붕붕이?”
“웅! 몸을 이러케 들고, 흔들흔들! 낮부터 밤까지 맨날 해 조써!”
카시언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나이스 공작.
본성이 흉포한 악귀 같은 놈이라 생각했다.
잠시 아스텔을 좋아하는 마음에 본성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카시언은 마치 모략을 꾸미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열린 문을 응시했다.
“오빠!”
아스텔이었다.
당황한 카시언을 본 아스텔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카시언이 한껏 경직된 표정을 급히 수습하며 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왜?”
다시 보니 아스텔의 차림이 조금 의아했다.
손님을 만나고 온 것인지 병아리처럼 화사하고 노란 드레스에 예쁘게 땋은 머리에는 화관까지 썼다.
“어디 다녀온 거야?”
“응, 손님이 와서! 파티에 꼭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웅! 곰!”
카시언이 입을 열려던 찰나, 아스텔을 발견한 룬이 조그마한 손을 꼬물거리며 눈을 반짝 빛냈다.
아스텔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곰 아니라니까아…….”
아스텔을 곰으로 만든 장본인인 카시언이 살짝 찔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아스텔, 초대하고 싶은 분이 누군데?”
“으응, 누구냐면. 오빠도 알 거야.”
아스텔은 별말 없이 살랑거리며,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카시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벌써 여기 와 있는데 대화부터 좀 나눌까?”
그녀는 문을 더욱 활짝 열어젖히고 복도 쪽을 향해 큰소리를 냈다.
“여기, 안으로 들어오세요!”
카시언이 눈매를 좁히고 아스텔의 등 뒤에서 걸어오는 인영을 집중해서 응시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이전에 말했던 녹스라는 자인가?
“녹스?”
카시언의 질문에 아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응? 녹스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은발에 장신의 남자였다.
‘묘하게 낯이 익은데…….’
카시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탐색했다. 상대는 그 시선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누구시죠?”
안면이 상당히 낯익은 자인데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카시언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자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아나이스 공작가의 가신이자 은여우 가문의 가주인 시테르라 합니다.”
곁에 선 아스텔이 활기차게 말을 거들었다.
“마도구 사업을 하고 계시고, 내 사업 파트너야. 카페 오픈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티 파티에 이분을 초대하고 싶다, 이거구나.”
“응.”
“일단 앉으시죠.”
카시언의 의심 섞인 시선을 받은 사내가 고개를 까딱하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시테르는 차를 내오겠다는 아스텔의 말을 사양하고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티 파티의 흥행에도, 아스텔 님의 사업에도 제가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카시언은 곰곰이 생각하는 낯을 했다. 아나이스 공작가의 가신이라 꺼려지기는 했다. 그러나 마도구를 잘 아는 데다 아스텔의 사업 파트너라니. 그렇다면 자주 마주쳐야 할 게 분명했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그가 꼬리 열 개 달린 구미호처럼 사람을 매혹하듯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요. 저희 가문이 아스텔 님을 공식적으로 지지할 테니까요.”
“공식적 지지라…….”
이미 아스텔에게서 카시언이 공작을 꺼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 시테르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번에 저희가 도와 드리는 건, 아나이스 공작 각하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희 가문과 재규어 가문이, 아스텔 님에게 진 빚이 있어, 그것을 갚으려는 것뿐이니까요.”
“……그렇다는 건.”
“아스텔 님의 사교계 입지와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저희 가문이 도와드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는 자신들이 아스텔에게 입은 은원에 대해 몇 번이고 말했다. 수인 가문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했다.
티 파티에 참여함으로써 아스텔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널리 공표해 그녀의 지지 기반이 되어 주겠다는 말에는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귀빈 초대는 이미 마치셨겠지만, 더욱 성대한 행사가 될 수 있게끔 맡겨 주시죠.”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실 생각이죠?”
반쯤 추궁이 섞인 질문임에도 시테르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사교계에 나가야죠.”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곁에 가만히 있던 룬에게도 작게 웃어 보였다.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것쯤이야 사람을 매혹하는 이능이 있는 여우들에게는 지나치게 쉬운 일이었으니까.
* * *
이튿날 아침, 뮬리아나 후작 가문의 티 룸은 작은 다과회에 참여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뷔에트리 백작가에서 사냥 대회를 개최한다면서요?”
“세상에……. 하기는, 그 가문의 사냥술이 제법 유명했지요?”
“어디 사냥술뿐이래요? 마법 능력이 압권이지요!”
귀족들의 대화로 요란한 와중에도 찻잔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가만히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미려한 외모나 아름다운 분위기까지, 모두 좌중을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자리에 모인 신사 숙녀들도 모두 아닌 척 그를 힐끔거리며 입을 모아 떠드는 중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이 어깨 근처에서 찰랑대는 사내는, 은여우 가문의 가주인 시테르였다.
평소 다과회 따위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던 가문의 수장이 홀연 나타났으니, 모두가 집중하는 것은 당연할 터.
슬쩍 그를 보고 입맛을 다시던 뮬리아나 영애가 다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도 오시겠지요?”
“그 가문과 유력한 관계가 있다면서요.”
“헤이젤 뷔에트리 백작 영애 말이에요.”
아스텔의 이야기였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있던 시테르가 등받이에 기대었던 등을 뗐다.
이제 슬슬 대화를 제 쪽으로 돌릴 시간이었다.
이후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고작 몸짓 한 번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훅 가닿았으니까.
다과회를 주최한 뮬리아나 영애가 흥분을 감추고 물었다.
“시테르 가주님, 무슨 일이신가요?”
“레이디 헤이젤 뷔에트리의 티 파티에는 저도 참여할 예정이라.”
그의 말에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그러나 제법 거대한 규모로 열리는, 백작가의 첫 파티이니만큼 그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대단히 예상외의 일은 아니었다.
당장 뮬리아나 영애의 파티에도 참여하지 않았는가.
주변 반응을 읽은 그가 분위기를 달굴 화제를 내뱉었다.
“단순히 초대를 받아 참석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 가문이 레이디 뷔에트리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이죠.”
문자 그대로의 말일 뿐인데, 그 말이 주는 파란은 컸다.
카시언 그레이는 제국에 끼친 공적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아스텔은 단순히 평민 출신 치료사였다가 겨우 누명을 벗고 벼락출세를 한 것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는 은여우나 재규어 가문과 친하다느니, 공작의 피후견인 출신이라느니 하는 소문들이 다하기는 했지만.
모두 공식적인 석상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스텔이 은여우 가문의 은인이라는 공식 선언이 가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모두가 시테르 가주의 입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떨림도 없이 담담하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이신 리카르도 님께서도 레이디 뷔에트리에게 목숨을 빚지셨죠. 아, 이건 어느 정도 알려진 얘기이려나.”
모두 손에 든 찻잔에 힘을 꾹 주었다.
그의 말이, 그들의 귀에는 ‘아스텔이 제국의 실세다’라는 말로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그 지점을 의도한 시테르 가주가 가볍게 웃으며 어느새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뮬리아나 후작 영애의 티 룸은 입이 가벼운 자들이 드나들기로 유명하니, 내일쯤 되면 사교계에 아스텔과 은여우 가문의 인연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목표를 달성한 그는 흐뭇하게 웃다가, 대화의 초점을 다시 뷔에트리 가문의 파티로 돌렸다.
“그러니, 뷔에트리 가문의 티 파티에는 리카르도 님과 제가 함께 참여해 자리를 빛낼 겁니다. 반드시 그래야죠.”
그의 말이 끝나자 자리한 영식과 영애들이 겨우 하나둘 입을 열었다.
“기대돼요……!”
“하긴, 리카르도 님은 아스텔 님과 친하다는 풍문이 있었죠.”
“혹시 그럼……. 사냥 대회 날, 재규어와 여우의 신형(身形)을 보여 주시나요?”
인간이 아닌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느냐는 질문에 그가 여우처럼 눈매를 휘어 웃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거 없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는 상황 속, 그가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티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부채를 들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모두의 얼굴에 흥미가 가득한 것을 보고 이 정도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적절했다, 고 판단했다.
호기심을 티 파티 날까지 유지하려면, 슬슬 치고 빠져야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화의 방점을 찍듯 나직하게 덧붙였다.
“이 자리의 모든 레이디를 그곳에서도 뵐 수 있겠지요?”
“그, 그럼요!”
“가주님과 벨 님을 뵙기 위해서라도, 꼭 찾아갈게요! 레이디 아스텔도 궁금하고요.”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레이디 뷔에트리는 좋은 분이니까요.”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런데 그때, 철없는 레이디 하나가 그를 향해 돌연 묻는 게 아닌가.
“그럼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도 이번 뷔에트리 가문의 티 파티에 참여하실까요?”
뜻밖의 질문에 그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건 그 역시도 궁금해지는 문제였다.
“공작 각하께서는, 글쎄요.”
그는 여우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제 입으로 말할 사안은 아닌 것 같군요.”
물론 상황으로 봐선 공작은 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폐태자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푸룬 산맥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파티 당일까지 그들의 호기심을 꺼트려서는 안 될 테니 적당히 돌려 말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시테르가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뜻밖에 아나이스 공작으로부터 은밀한 파발을 받았다.
푸룬 산맥에서 폐태자의 잔당을 모두 몰살했으며, 비밀리에 수도로 곧장 귀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 *
며칠이 꼬박 흘렀다.
마침내 뷔에트리 백작가의 사교계 귀환을 알리는 화려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뷔에트리 저택에 귀족들을 모아 성대한 티 파티를 열고, 같은 날 사냥 대회까지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의복에도 제법 신경을 썼다.
룬에게는 꼬마 신사처럼 하얀 맞춤 연미복을 입히고 나비넥타이를 달아 주었다.
오빠는 정갈한 코트 복장에 신사다운 중절모를 썼다.
“우리 오빠, 평소보다 더 잘생겼는데?”
장난스럽게 뱉은 말에 오빠는 진지하게 호응했다.
“넌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음……. 작고 귀여운 병아리 같아.”
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치마 밑단에 프릴이 달린 샛노란 시폰 드레스에 둥근 코의 메리 제인 슈즈를 착용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상황이라 일부러 어리고 귀여운 모습을 연출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병아리는 심한데?”
“귀엽단 소리야. 티 파티장은 확인했어?”
“아직. 사냥 대회장은?”
“모두 준비됐어.”
오빠는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같이 파티장 분위기를 점검해 볼까?”
가벼운 티 파티를 즐긴 다음 사냥 대회를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티 파티는 내가, 사냥 대회는 오빠가 호스트였다.
나는 오빠의 손을 잡고 티 파티가 열릴 뷔에트리 백작 저택의 야외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황궁 마법사들의 손길을 거친 탓인지, 오랜 시간 관리되지 않았던 티는 나지 않았다.
꽃 아치로 예쁘게 장식된 정원의 문을 지나면, 파티 테이블이 깔려 있었는데 둥근 테이블 위에 미색의 테이블보를 깔고, 중앙에는 다이아로 조각한 인공 꽃을 꽂은 화병을 올려놓아 차분하면서도 깔끔한 풍취를 더했다.
“포인세티아 묘목으로 꾸몄고, 안에는 보다시피 장미목이 있어서 화사해.”
“푸른 장미야? 신기하네.”
“응! 노란 장미도 섞어 두었어.”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잡담을 나누며 티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빠는 혹시 모를 흑마법의 흔적을 탐지했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와 오늘을 위해 초대한 오케스트라 악사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저기 네 첫 번째 손님이 생각보다 빠르게 왔는데?”
“어?”
아직 파티가 시작될, 열두 시 정각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릴 정도로 빠르게 정원의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주님!”
가까이 다가가던 중, 나는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를 맡았다. 가주에게서 처음 보는, 상당히 경직된 표정이었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표정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에 흠칫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뭐지? 왜 저런 표정을…….
평소 여유롭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짝 당황해서 발걸음을 늦춘 나는 그를 향해 조심조심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아…… 닙니다. 아, 리카르도 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세상에!”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등 뒤를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멋진 중절모를 쓰고 회색 연미복을 입은, 신사답게 걸어오는 리카르도가 보였다.
“할아버지!”
“아가!”
그가 입에 함박웃음을 매단 채 빠르게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아기가,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구나!”
나는 그의 악수를 받아 주며 쾌활하게 대꾸했다.
“원래도 아가씨였어요!”
내 손을 꼭 잡은 그가 염려와 걱정, 호기심이 뒤섞인 말들을 양껏 쏟아 냈다.
“난 아가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 갑자기 또 살아나더니, 이게 또 무슨 일이냐!”
리카르도는 열심히 자신의 심경을 설파했다. 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하하, 웃을 뿐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에, 반가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그와 대화를 나누던 차.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나와 리카르도 사이로 조심스레 손 하나가 끼어들었다. 은여우 가문 가주의 것이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건 루델 시녀장이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나무늘보의 발 도장이 찍힌 서신의 봉투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시녀장님이 아직 나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에 코가 찡해졌다.
“그리고, 벨도 왔습니다.”
“아, 벨도요?”
“네, 아기 여우 모습으로. 벌써 저기 있네요.”
그제야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대체 언제 정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인지, 새하얀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풀숲을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신이 나서 쏜살같이 돌아다니는 벨의 옆에는 나비넥타이를 예쁘게 맨 룬이 있었다.
둘은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어린아이들을 보며 웃다가, 다시 가주를 응시했다.
“또,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도로 새하얘졌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시테르를 보던 나는, 뒤늦게 그의 옆에 딱 붙어 선 위화감 넘치는 거대한 털 뭉치를 발견하고 말았다.
뭐야?
이 털 뭉치는 언제 온 거지?
의문 섞인 시선이 그 털 뭉치 쪽에 닿은 걸 눈치챈 것일까. 가주가 조용히 입을 열어 답했다.
“……그리고, 또 이쪽에는 늑대…… 님께서 계십니다. 방금 오셨, 습니다.”
늑대님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무 놀라서였다.
바람에 살랑이며 나부끼는 윤기 나는 은빛 털, 반질반질한 코에, 용맹한 눈빛, 날렵하고 고고한 턱선까지.
고개를 아래로 깔고 있을 때는 단순한 은빛 털 뭉치처럼 보였는데…….
언뜻 개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래도 확실히 늑대의 형상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고고한 신형을 지닌 늑대 말이다.
“정말, 정말 늑대…… 인가요?”
위압감이 넘치는 몸체에 새삼 늑대가 상위 포식자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수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늑대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나는 놀란 눈을 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늑대와 눈을 마주했다.
푸르스름한 눈이 나를 응시해 왔다.
“잠깐만, 늑대가 아닌가?”
가까이서 보니 다시 늑대인지 아닌지 묘하게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곁에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음……. 늑대 비슷한, 비슷한 종이란다. 아가.”
“우와아…….”
짧게 감탄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이분만 동물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인간화가 자유롭지 못한 수인인 건가…….
“……아, 그건. 그것은.”
리카르도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늑대 가문의 가주이신 건가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던데…….”
“어, 음. 그럴 수도…….”
모호한 답변에 의아해진 것도 잠시.
‘정체를 밝히면 안 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의 반대 손을 내밀어 보았다.
늑대는 온순하게 내 손 가까이 제 뺨을 가져다 대고, 느른한 움직임으로 비볐다.
어느새 손 전체를 감싼 털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나이는 어떻게 되어요? 아가인가?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리카르도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아기는 아, 아니고. 나이는 그래도 조금 드셨다…….”
아기가 아니라면 한 열 살 정도인 걸까?
늑대 성체 같기도 한데, 완전히 늑대의 모습은 아니라서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이렇게 귀엽고 순한데.
분명히 인간화를 하면 나만큼이나 작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만져도 돼요?”
“그……. 아, 아마도, 아가 너라면.”
나는 설렘을 감추지 않으며, 늑대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늑대가 제 머리를 내 손에 콩, 하고 부딪치며 애교를 부렸다.
마치 나를 제 주인으로 간택했다는 것처럼.
나는 조금 흥분해서 옅은 한숨을 흘리며 늑대의 주둥이를 매만졌다.
“정말, 정말로 너무 사랑스러워요…….”
내 손에 얼굴을 비비던 늑대가 돌연 나를 응시했다.
깊고 검푸른 눈동자 속, 서늘한 안광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내 성격상 쫄아야 정상인데…….
“…….”
이상하게도, 포식자의 시선이 내 쪽에 닿아 왔는데도 무섭지가 않았다.
어쩐지 이 늑대가 나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늑대를 가만가만 마주 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를 보는 늑대의 꼬리가 솟더니 귀가 쫑긋하고 섰다. 복종의 의미인지, 혹은 단순한 반응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늑대도 처음 보는 나를 엄청 많이 좋아한다는 것!
“저건…….”
내가 늑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곁에서도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치켜들고 바로 옆을 보았다.
“늑대야? 진짜 멋있는데? 아니, 늑대가 아닌가? 뭔가 섞인 것 같기도 한데…….”
오빠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감탄 중이었다.
늑대는 오빠를 향해서도 온순하게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나를 향하던 것처럼 다정한 눈빛은 아니었지만,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부하처럼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내 착각이겠지?
……무슨 늑대 수인이 처음 보는 오빠를 상대로 상사를 대한다는 듯한 생각을 하겠어.
그러나 보면 볼수록 역시 이상했다.
오빠를 처음 본 늑대가 온순하게도 양발을 아래로 내리고 몸을 굽히는 복종의 자세를 취했으니까.
늑대를 홀린 듯 보던 오빠가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와, 진짜 멋진데. 늑대는 진짜, 위대한 기사의 상징이거든. 아스텔. 넌 알지 모르겠지만, 초대 황제 폐하께서도 늑대를 근위대의 인장으로 삼으셨고, 그리고 또…….”
흥분한 건지, 오빠의 흉곽이 거칠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그는 두 뺨까지 발그레하게 붉힌 채로 연신 캐물었다.
“원래 이렇게 순한 아이인가요? 와……. 제국 기사단에도 이렇게 대단한 늑대는 없는데. 어디서 왔죠? 수인입니까?”
가볍게 물었을 뿐인데 침묵이 일었다.
나는 의아한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커, 커컥, 컥!”
그러자 리카르도 할아버지가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요란하게 헛기침을 하다 시선을 빠르게 피했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시테르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그…… 예, 수인, 맞습니다. 순한 건, 저도 잘…….”
그들의 떨떠름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도 처음 보는 늑대에게 친근함이 느껴져 더욱 좋았다.
그래서 우리 남매는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늑대의 미간을 가볍게 문질러 주었다.
바짝 치켜 올라간 늑대 꼬리를 보던 오빠가 호감을 감추지 못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수인이라면 다음에 인간 모습으로도 꼭 만나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도, 궁금해!”
오빠가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정말 이런 멋진 늑대라니…….”
늑대가 하울링 하는 듯이 작게 그르렁댔다.
송곳니가 드러나지 않은 채로 꼬리를 끊임없이 흔드는 걸 보면 분명 좋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오빠를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오빠를 정말 좋아하나 봐!”
나는 활짝 웃으며 늑대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를 맞이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슬슬 파티 준비를 마무리할 참이었다.
“그럼, 이분은 자리를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내 말에 리카르도가 드물게 말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러니까, 아가 네 옆자리에 두는 건 어떻겠니?”
그 말에 일순 걱정이 되었다. 처음 보는 늑대를 내 옆자리에 둬도 되는 걸까?
“네, 좋아요!”
그러나 이상하게 온갖 상념보다도 먼저 그러겠다고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조차 놀랄 만큼 빠른 결단력이었다.
그렇지만 내 말에 늑대의 귀가 쫑긋 선 걸 보니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북부에 있을 때 마주친 적이 있었나.
이상하게 자꾸 기시감이 들었다.
* * *
몇 시간 뒤, 파티의 손님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나는 오빠와 함께 문객 맞이를 마치고 각자의 테이블로 흩어졌다.
오빠는 작위가 있는 남성 귀족들이 앉은 테이블 쪽에, 나는 부인과 영애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 쪽에 앉았다.
원형 테이블의 자리에 앉은 나는 함께 자리한 영애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뷔에트리 가문의 헤이젤 뷔에트리예요.”
간단한 내 인사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헐뜯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공작가와 긴밀한 연이 있군요……!”
그들은 내게 인사치레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감동한 상태였으니까.
그들에게는 티 파티 이후 진행될 사냥 대회에 황후와 황녀가 참여한다는 소식조차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반짝이는 눈빛을 담아 풀숲을 뛰노는 은여우와 새끼 재규어를 경탄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눈길을 끈 건, 단연 내 발치에 있는 은빛 늑대였지만.
“늑대인가요? 수인이겠죠?”
“늑대 가문의 가주님이 저렇게 생겼을까요?”
“진귀한 수인을 이렇게나 많이 볼 수 있다니요!”
옆에서 열심히 입방아를 찧는 귀족들을 보면서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내게 접근하는 이들을 푸른 눈망울로 샅샅이 훑는 이 늑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분명 처음 보는데.’
파티의 호스트인 내가 내 옆을 지키고 선 늑대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니, 다른 귀족들의 시선도 이쪽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영애 하나가 감격에 찬 한숨을 쌕쌕 내뱉으며 작게 소리쳤다.
“늑대님, 털이 정말 멋져요!”
“네에, 그렇죠?”
“네! 만져 보고 싶어요!”
그 말에 내 바로 옆에 앉은, 용감한 작은 영애가 빠르게 늑대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내내 온순하게 있던 늑대의 서늘한 눈이 영애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무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절대 만지는 것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크르릉 소리까지 내면서.
내가 당황한 사이 영애는 손을 물리기라도 한 양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무, 무섭…….”
나는 다급히 늑대의 상태를 살폈다. 늑대는 언제 공격 성향을 띄었냐는 양, 다시 온순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는 중이었다. 동그란 눈동자는 그저 따뜻하기만 했다.
“뭔가 불편한 일이 있었나 봐요. 원래 순한데.”
내 말에 늑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제야 나는 내 마음에 들어차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녹스였다. 묘하게 분위기가 녹스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내 속으로 도리질 쳤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녹스는 지금 푸룬 산맥에 있는걸.
게다가 우리는 각인이 되어 있는 사이였다.
만약 이 늑대가 녹스라면, 그를 쓰다듬을 때 본능적으로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동안 녹스와 끌어안을 때면, 살짝 뜨거운 호흡이 차갑게 진정되고는 했으니까.
‘요즘은 각인이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설마…….’
나는 늑대의 등을 가만가만 매만져 보았다.
털 때문에 따뜻하기는 했지만, 녹스와 껴안았을 때처럼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지는 않았다. 열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도 없었다. 나는 늑대의 보송보송한 미간까지 다정하게 문질러 주면서 생각했다.
이 늑대가 녹스일 리가 없다고.
아쉬움에 짧게 입맛을 다신 다음, 나는 티스푼을 들어 찻물을 휘저었다. 찻잔 속에서 자그마한 회오리가 일었다.
그런 내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걸까?
테이블 위의 화제가 아나이스 공작 쪽으로 향했다.
“수인이라 하니……. 공작 각하께서는 이번 티 파티에 참가하지 않으셨지요?”
나는 파동이 잠잠해진 찻물을 멀거니 보다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 네.”
녹스의 악명을 잘 아는 나이 든 부인들은 침묵했으나, 어린 영애들은 달랐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재잘거렸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요.”
“그러게요.”
“그분의 명성이 벌써 수도까지 닿았는데, 수도에서는 뵐 수가 없다니요. 궁금한데. 언제쯤 혼약을 맺으실…….”
“조용히 해라, 릴리아나.”
보다 못한 부인이 손을 들어 제 딸을 제지했다.
“……공작 각하께서 안 계신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다가는 크게 혼쭐이 날 수가 있단다.”
제 딸을 진정시키려 한 말이겠지만, 분위기가 워낙 조용해진 탓에 나한테까지 다 들렸다.
아니 무슨 우리 녹스가 호랑이도 아니고…….
차가워진 분위기도 살릴 겸, 나는 녹스의 편을 들기로 했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는 좋은 분이셨어요. 제 재능을 알아보시고 저를 후원해 주셨거든요. 관대하신 분이니 영애들의 말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실력이 있는 나도 높이고, 나를 알아봐 준 녹스도 높이는 화법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영애들이 기민하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요! 나중에 그분을 수도에서 또 뵐 수 있을까요?”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들을 훑어본 나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푸룬 산맥에서 귀환하시면 수도에 머무르시지 않을까, 싶어요. 감히 제가 그분의 뜻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요.”
“하긴……. 그 폐태자의 세력들은 전부 몰살당했겠죠?”
“아마도, 지금쯤이면요.”
더는 이 화제로 대화를 이어 갈 필요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귀족 부인과 영애들이 폐태자의 세력에 대해 한참 열을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어떻게 우리 가문에 누명을 씌울 수 있냐며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그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떠들었다. 황태자가 폐해지면서 사라진 가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짓찧는 말이 주를 이뤘다.
대체로 원만하게 티 타임이 이어졌지만, 조금 이상한 일도 있었다.
대화 중간마다 ‘폐태자’니 ‘누명’이니, ‘오스카’라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내 발치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늑대가 약하게 하울링 하는 듯 그르렁대는 소리를 냈으니까.
나는 습관처럼 손을 아래로 내려 늑대의 등을 쓰다듬었다.
등 쪽의, 은사 같은 털을 다정하게 매만져 줬을 뿐인데, 늑대는 곧장 온순해졌다.
* * *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천운으로 살아남은 폐태자의 마지막 수하, 오스카는 지나치게 쉽게 수도에 잠입했다.
그나마 남은 수하들조차 모두 잃고,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다.
오스카의 뇌리에는 오직 콘윌의 세뇌 같은 한마디만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모두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줄 방법은 아스텔, 그 계집애를 죽이는 것입니다.’
콘윌은 원래의 육체를 잃고 황궁에 숨어 살던 때, 그를 세뇌했다.
자신은 패배할 일이 없다고 굳게 믿었으면서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오스카를 통해 아스텔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한 계획은 그가 죽은 뒤에도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폐태자의 끄나풀로 지목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 와중에도, 오스카의 머릿속에는 ‘아스텔을 죽이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으니까.
콘윌, 그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물건.
‘혼란의 마도구’를 수트 안주머니에 쑤셔 박은 오스카가 뷔에트리 백작가 앞에 도착했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을 보며 그가 음침하게 드리운 눈 밑의 검은 그림자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매끈했던 원래 피부와는 결이 다른 우둘투둘함이,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얼굴 변형 마법을 사용해 남의 거죽을 뒤집어쓰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작용이었다.
이번 일을 위해 죽은 펠른 자작가의 영식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아스텔을 죽여야 할 대업이 있었으니까.
그는 뷔에트리 백작가의 정문 앞에 우뚝 서서, 문을 지키고 선 기사를 똑바로 보았다.
“펠른 자작가의 둘째 영식, 호베른 펠른이오.”
“예? 펠른 자작가의 영식이시라고요?”
그는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음침하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보던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 중 하나가 눈앞의 사내를 향해 비난이 일부 담긴 말을 쏟아 냈다.
“파티장에 왔다기에는 연미복도 좀 허름하고, 펠른 자작가의 둘째 영식은 초대 명단에 없…….”
의심을 가득 섞은 시선들이 오스카를 응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초대장은 어디에 있죠?”
그 질문에 오스카는 픽 웃었다.
그리고 초대장을 보여 주려는 것처럼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곧장 세뇌술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초대장, 방금 받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그들은 자신이 ‘파티에 초대받은 펠른 자작가의 호베른 펠른’이며, 조금 전 초대장까지 확인한 상황으로 인식할 것이다.
대단히 조악한 마도구이기에 딱 한 시간 뒤면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지만…….
“아, 그랬지 참?”
“들어가십시오. 2층 발코니 근처의 정원입니다.”
드디어 뷔에트리 백작가의 문이 그를 향해 열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추스르며 저택 안의 정원으로 걸어 올라갔다.
티 파티가 열리는 정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물론 정원으로 들어가기 전 두 번째 통과 관문이 있었다.
“어느 가문의 영식이신지요?”
새로운 등장한 기사의 깐깐한 질문에 그는 아까와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펠른.”
“펠른……?”
의문이 섞인 말씨였다.
이번에도 그는 세뇌 마도구를 재차 작동시켰다.
제 암시가 먹힌 듯 기사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흐려졌다.
이윽고 그는 몸을 비키며 중얼거렸다.
“……들어가시죠.”
그는 잰걸음으로 기사를 지나쳐 티 파티가 열리는 플라워 아치 안까지 들어섰다.
‘이런 마도구 따위로 모두의 심리를 조작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해.’
이 자리에는 마법에 능통한 자들도 몇 참석했다고 했고, 뷔에트리 가문 특유의 보호용 결계가 지금도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오스카는 숨을 쌕쌕 쉬며 급히 정원 안쪽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게 핀 꽃 사이로 삼삼오오 모여 앉은 귀족들이 보였다.
하인과 하녀들이 트롤리에 찻잔과 티 푸드를 가득 담아 운반하는 모습까지도.
그의 눈동자에 시린 증오가 어렸다.
자신의 수족은 다 죽었거늘.
이자들은 이다지도 행복하다니.
죽은 콘윌의 복수를 하는 동시에 이자들에게도 잊지 못할 악몽을 선물해 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아스텔을 찾아야 했다.
그는 아스텔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작고 여린 여자.
잔뜩 핏발이 서 발개진 눈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중앙에서 물을 뿜어내는 화려한 크리스털 분수대.
귀족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분주히 오가는 하인과 하녀들,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까지…….
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선 유일한 이방인, 초라한 자신.
그는 제 비루한 처지에 격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의 시야 안에 아스텔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눈매를 휘어, 천진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소녀.
그의 뇌리에 콘윌의 말이 둥둥 떠올랐다.
‘죽여야 한다’라는 바로 그 말 말이다.
음침한 시선에 살기가 켜켜이 더해질 무렵이었다.
곁에 있던 하인 하나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눈썹을 치뜨며 물었다.
“영식? 왜 가만히 서 계시는 건가요?”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싸늘한 음성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내 자리를 찾아가지.”
물론 그의 자리는 아스텔의 바로 앞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던 하인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그가 목표를 찾은 듯 비척거리며 걸어갔으니까.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아스텔을 향해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텔 바로 앞까지 세 발자국쯤 남았을 무렵.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일까, 아스텔이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며 지적했다.
“무슨 일이시죠? 영식들이 모이는 자리는 이 테이블이 아닌데요.”
“…….”
그는 대답 없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도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영식?”
“무슨…….”
“펠른 자작가의 영식인가요? 왜 갑자기 레이디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온 거죠?”
다른 사람보다 감이 재빠른 모양이지.
제 서늘한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직감한 사람처럼 입매를 굳게 다물다니 말이야.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아스텔의 떨리는 눈동자가 그에게 못 박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성큼성큼 더 가까이 다가선 그는 제 가슴 안쪽에 손을 집어넣어 독을 바른 칼을 쥐었다.
이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쾌감이 차올랐다.
“이제 그-”
그러나 잠깐 멈칫하고야 말았다.
아스텔의 발아래 납작 엎드려 있던 늑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으니까.
분명 이빨 하나 드러내지 않고 있는, 순한 모습이었으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묘하게 압도당하는 듯한 기분에 그는 숨을 짧게 내쉬었지만, 여기서 더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재빠르게 독을 바른 칼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아스텔을 향해 뛰어들었다. 벼린 칼날이 호선을 그리며 아스텔의 심장께로 날아갔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끌어모은 일격이었다.
멀리서 누군가 아스텔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미 늦었다. 오스카는 제 손이 정확히 아스텔의 심장께를 가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가만히 몸을 낮추고 있던 늑대가 일어나 앞발로 잽싸게 오스카의 명치를 내질렀다.
치명타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쥔 칼의 방향이 완벽히 엇나가고 몸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정도는 되었다.
“끄, 끄억!”
멍청한 신음과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스카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사지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 그의 무릎이 아래로 비틀려 꺾일 때쯤이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려 칼이 빠져나가기 직전, 오스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집념을 다해 손에 든 칼로 늑대의 앞발을 베어 냈다. 대책 없이 휘두른 것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늑대는 오스카의 칼을 피하지 않았다.
투둑, 툭.
제법 깊게 베인 듯, 핏방울이 뚝, 뚝. 풀숲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늑대가 칼에 베이는 것을 의도한 양 보였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지.
피를 본 늑대는 오스카의 명치를 내리누르고 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그러자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버둥거리는 오스카의 주변에서 검은 회오리가 짧게 일었다.
그리고, 회오리가 걷혔을 때…….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입을 틀어막고 있던 사람들이 경악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세, 세상에!”
“저놈, 오스카잖아!”
오스카는 벌레처럼 버둥거리던 몸을 딱 굳혔다.
늑대가 마법을 쓴 게 틀림없다.
뒤집어썼던 펠른의 껍데기를 없앤 것을 보면.
정체가 탄로 났다는 생각에 오스카는 킬킬대려다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은빛 늑대가 길게 하울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평범한 늑대의 울음소리였지만, 오스카에게 기이한 공포감을 주었다.
사람들이 당황하고, 아스텔조차 놀라 테이블보를 꼭 움켜잡았을 때였다.
새하얀 빛이 늑대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아스텔을 포함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눈을 떴을 때.
그 빛 너머로 그림자 같은 인영이 나타났다.
“…….”
소리 없는 조용한 등장이었다.
그러나 살기 어린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사람들은 숨을 참으며 빛 사이로 나타난 인영을 응시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흑발과 늑대의 것과 닮은 푸른 눈, 단단한 어깨와 무심한 듯한 낯까지.
아나이스 공작이었다.
푸룬 산맥에 있는 줄 알았던 공작이 나타나다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티 파티의 상황에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공작은 바닥에 경직된 상태로 붙어 있는 오스카에게서 냉담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정하게 낯을 바꾸어 아스텔을 보았다.
“구하러 왔습니다, 아스텔.”
“……공작님?”
아스텔이 눈을 깜빡이며 대꾸하자,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아스텔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손을 다, 다치셨어요.”
늑대개일 때 당했던 탓일까, 아나이스 공작의 손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내렸다.
“아픕니다.”
물론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가 난 줄도 몰랐다.
하지만 불쌍하게 보이라고 했으니까…….
그는 카시언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와 아스텔 곁에 서 있던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작은 무뚝뚝한 표정을 약하게 일그러트리며, 강조하듯이 힘주어 말했다.
“많이.”
“…….”
카시언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숨만 들이켰다.
그러나 비교적 무심한 카시언과는 달리, ‘아프다’라는 그의 말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단숨에 안색이 파리해진 아스텔이 단호하게 주먹을 움켜쥐었으니까.
“저 사람 죽일 거예요.”
저를 위해 화를 내주는 그 모습이 도토리 빼앗긴 다람쥐처럼 귀여워서,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가 잠깐 끊기자 오스카의 힘겨운 신음만이 공백을 메웠다.
“제가 죽이겠습니다.”
잊고 있었다는 듯, 공작은 느슨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카를 내려다보았다.
풀숲에 떨어진 칼을 보던 오스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곧 너도 죽을 게다. 칼에는 도, 독이 발렸……. 쿠, 쿨럭.”
마치 대단한 비밀을 말한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비웃던 오스카가 피를 토해 냈다.
아나이스 공작에게 독에 내성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작은 오스카를 벌레 보듯이 감흥 없게 응시하다 고개를 까딱했다.
“네.”
그는 독이 묻은 칼에 당한 피가 묻은 손으로 오스카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은 꽤 도움이 되었으니,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 드리죠.”
이미 죽은 자보다 뻣뻣하게 굳은 그는 몸부림조차 치지 못했지만…….
순간 아나이스 공작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너무 흉측한데.
아스텔이 눈에 담기에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전에.”
그래서 그는 다시 오스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죽기 일보 직전의 오스카가 끅끅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다지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공작은 제 목에 매여 있던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스텔의 눈을 가려 주었다.
“나쁜 건 보면 안 됩니다.”
“……네.”
아스텔은 고개를 있는 힘껏 끄덕였다.
공작이 낮게 웃으며 다시 바닥에 엎어진 오스카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 역시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을 꼭 감았다.
그다음 순간은 뻔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경직된 오스카의 목을 비틀어 꺾었다.
그것이 비루한 반역자, 오스카의 마지막이었다.
* * *
카시언 덕분에 상황은 신속 정확하게 모두 수습되었다.
오스카의 시체에는 새하얀 천을 덮어 둔 다음 처분을 위해 황궁으로 보냈다.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오스카의 시신을 함께 운반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오스카가 벌인 게릴라전은 허망하게도, 몇 분 만에 빠르게 수습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수많은 귀족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겨우 정신 줄을 붙잡고 있던 영애와 영식들은 퇴장하지 않고 수런거렸다.
“세상에.”
“내가, 내가 반역자를 처단하는 사건의 현장에 있었어.”
온실 속 화초같이 자라 온 영애들이 연신 입을 놀려 댔다.
그러나 제 딸을 감독해야 할 부모들 역시도 지금은 입단속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도 아나이스 공작이 새로 얻은 공적에 관해 열심히 재잘거리는 중이었으니까.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들으셨죠? 구, 구하러 왔다고.”
“아까 그 느, 늑대가 공작님…… 이었다고요, 그렇죠?”
“어떻게 이런 일이!”
카시언은 각 테이블을 돌며, 한참 가십에 열 올리는 사람들과,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에게 조금 전 사고에 대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사냥 대회는 추후 다시 일정을 잡을 테니 다시 방문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재방문을 요청하는 카시언의 말에 모든 귀족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들에겐 아쉬울 게 없었다.
결코 잊지 못할 티 파티가 된 것에 더해, 뷔에트리 가문과 아나이스 공작가의 끈끈한 유대감까지 확인했으니 말이다.
공작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낀 채로, 귀족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점점 정원이 조용해졌다. 상황을 살피던 리카르도와 시테르는 룬과 벨, 새끼 재규어들을 데리고 저택의 놀이방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자리에는 아스텔과 카시언, 그리고 녹스만이 남았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나야 멀쩡하지.”
크라바트로 눈을 가리고 있어 오스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게 함정이지만.
오빠는 한참 내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더니 이내 침묵했다.
그 침묵의 틈 사이로 녹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제 인간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건.”
카시언의 귓불이 붉어졌다.
강함을 숭상하는 기사로서 늑대를 보고 즐거워했을 뿐인데, 그게 아나이스 공작일 줄이야.
“뭐……. 늑대 모습은 멋지긴 했습니다.”
마지못해 인정한 오빠를 보며 녹스의 눈빛이 즐겁게 일렁거렸다.
조금쯤 누그러진 둘의 분위기를 보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작님, 상처부터 치료해 줄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녹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는 생채기가 나서 까진 손이 너무나도 아프고 힘들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려뜨렸다.
“네, 쓰라립니다, 아스텔.”
“세상에…….”
한껏 속상해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나 때문에 또 희생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시언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또 희생은 무슨 이야기야? 아무튼, 공작 각하. 모두를 구해 주심에 재차 감사드리며, 우선 치료부터…… 하십시오.”
나는 멀거니 선 오빠를 향해 부탁을 건넸다.
“그럼 오빠, 약이랑 거즈 가져다줄래?”
단호한 내 표정을 보던 오빠가 다시금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일단……. 다녀올게.”
그는 겅중겅중 걸어 멀어졌다.
이번 일이 충격이라 저렇게 비틀거리며 걷나, 싶었는데…….
‘그 멋있는 늑대가…… 어떻게…….’ 하는 자그마한 혼잣말을 듣고 말았다.
‘……충격받았구나, 오빠. 하긴,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만지려 애썼었지.’
다른 것보다도 자기가 어화둥둥 예뻐하던 늑대가 녹스라는 사실에 상당히 충격받은 눈치였다.
물론 나도 충격이었다.
어떻게 내가 녹스를 몰라볼 수 있지?
기시감 정도야 들었다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연인인데!
운명처럼 알아봤어야 했던 거 아닌가? 괜스레 그에게 미안해졌다.
* * *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사냥 대회를 다음 기회로 미룬 덕분에 한결 여유로워진 우리는 정원 옆에 달린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오빠는 거즈를 가져다준 뒤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발코니의 창을 바라보며 우리를 등지고 섰다.
나와 녹스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치료를 진행 중이었다.
나는 녹스의 생채기를 거즈로 묶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내가 공작님을 못 알아볼 수 있지…….”
백 번 정도 말한 것 같은데, 그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성체 모습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이것도 백 번째 대답이다.
나는 다시 거즈에 배어 나오는 피를 응시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제 손의 생채기를 보고 이상하게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많이 불쌍해 보일 것 같습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딱히 불쌍해 보이지는 않는데.
어깨도 이렇게 떡 벌어졌고, 얼굴도 싱글벙글하니까.
하지만 나는 애써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화제를 살짝 비틀었다.
“……음, 일단. 아직도 피 나요. 이렇게 둘둘 묶었는데도……. 정말, 정말로 속상해 죽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속상하지만…….
나는 결연한 눈동자를 빛냈다.
우당탕 대소동쯤이야 있었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녹스와 오빠, 이렇게 셋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 둬야겠어.’
나는 녹스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있잖아, 말해도 돼요?”
“……네?”
“공작님이 나 구해 준 거.”
그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오늘 구해 드린 거라면 이미 카시언 경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 말고.”
내 목울대를 가만히 보던 그가 멀쩡한 손을 내밀었다가 멈칫했다.
“그럼…….”
나는 그를 응시하며 입을 뗐다.
“옛날에 네가 나 구해 줬던 거. 오래전에. 그리고 우리한테 있었던 일들, 전부 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그거 다 말하고 우리 관계, 정식으로 허락받고 싶어요.”
녹스의 얼굴에 감격 어린 파문이 퍼져 나가고, 그가 마침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창가를 담담히 보는 오빠 쪽으로 시선의 방향을 틀었다.
“오빠, 이리 와서 앉아.”
조금 고압적일 수도 있는 목소리에 오빠는 의아한 듯했다. 하지만 언제나 내 말에는 절대복종 모드라는 평소의 신념답게, 그는 내 옆에 가까이 와 앉았다.
“무슨 일인데?”
나는 녹스의 거즈를 확인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오빠.”
“응.”
“십 년 전인가, 나 실종됐을 때 기억나?”
“……응.”
대답하면서도,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럼, 녹스라는 이름은 기억나?”
그는 도대체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내 오빠답게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응. 네 친구 아니야? 얼마 전에 말했었잖아, 녹스라는 친구가 있었다고.”
그 말에 녹스가 뿌듯한 미소를 잠깐 지었다.
나는 오빠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친구야.”
나는 나의 것과 닮은 투명한 녹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부터 하는 내 말을 오빠가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녹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까 해.”
나는 의문이 도사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동안 녹스와 있었던 일을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실종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있었던 일을…….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환생이라는 비밀만 빼고 전부 다.
녹스가 나를 구했다는 대목에서 오빠의 안색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녹스와 원인 모를 각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그가 룬에게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 주었는지도.
전부 다.
이야기 듣는 내내 오빠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종국에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만 남았다.
오빠가 마른세수를 하다가 처음으로 말문을 뗐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긴장했다.
오빠가 과연 내 말을 믿을까, 혹시 지어냈다고 여기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믿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믿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니, 믿어.”
내 말이라서 믿어 주는 걸까, 하는 생각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냐면…….”
오빠는 나를 보다가 시선을 비틀어 녹스 쪽을 바라보았다.
녹스는 장인으로부터 문전 박대를 당한 사위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몸을 더욱 바로 했다.
차가운 공작님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빠는 다시 시선을 비틀어 나를 빤히 보았다.
“네 얘기를 듣다 보니까 나도 기억났어. 녹스라는 이름.”
“응?”
내 말이니 이유 없이 믿어 준다고 할 줄 알았던 오빠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당황한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실종되고 나서, 잘 때마다 외우듯이 했던 이름이거든.”
녹스와 나는 동시에 당황한 낯으로 바뀌었다.
오빠는 지금까지 내내 기억 속에 묻혀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더듬더듬해 나갔다.
나에게 들려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과거를 반추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가 어렸을 때 잠꼬대 하면서 그 이름을 불렀어. 녹스가 너를 구해 줬다고.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랬었는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내가 녹스가 누구냐고 물었는데도 모르겠다고 일관하기에, 그냥 말하기 부끄러운 첫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오빠의 흔들리는 시선이 녹스를 응시했다.
“……너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을 줄은 몰랐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교제를 허락받으려면, 오빠의 마음이 혼란으로 점철된 이때 틈새를 공략해야 했다.
나는 오빠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응, 날 정말 아껴 줬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눈을 흐리게 뜨며 대꾸했다.
“그래, 네가 왜 옛날 얘길 하는지 알겠어. 이제 둘을 갈라놓진 않을게. 됐지?”
눈치 빠른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내가 없을 때 너를 구해 준 자와의 인연을 어떻게 대놓고 반대할 수 있겠어.”
‘대놓고’ 반대라.
나는 오빠의 안색을 재차 살폈다.
내가 그간 오빠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저 얼굴에 여전히 거리낌이 묻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몇 분간 허탈한 듯 보였던 오빠의 눈동자에 다시 총기가 돌며 눈매가 새삼 뾰족하게 바뀌었다.
“물론 쌍수 들어 찬성하는 건 아니고.”
나는 오빠를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녹스를 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차가워 보일 뿐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껏 주눅 든 상태였던 녹스의 안색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저를 좋아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형님.”
“아, 네.”
오빠는 녹스를 가늘게 뜬 눈으로 흘기더니 조금 새침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너, 일단 사람도 많이 만나 봐. 혹시 다른 사람이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교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결혼은 반드시 신중해야 하는 거 알지?”
뭐야, 도대체 혼자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녹스 쪽을 힐긋 응시했다.
……귓가에 대고 말했다 해도 청각이 좋은 녹스에겐 다 들린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른 게 똑똑히 보였으니까.
나는 빨개진 얼굴로 급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이, 무슨 결혼 한다고도 안 했는데 왜 벌써…….”
“아, 그래. 그래. 그렇지. 결혼한다고 안 했지, 참? 그럼 알겠어. 일단 대화 나누고 와.”
오빠가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으로 입매를 쓱 올렸다.
그러다가 몸을 일으키면서, 한껏 오만한 표정을 하고 녹스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마치…….
탐탁잖은 사위를 테스트해 보는 장인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저는 저택 정리를 좀 해야겠군요. 대화 나누십시오. 아스텔의……. 교제 상대 님.”
오빠는 녹스를 단순한 교제 상대 정도로 정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녹스는 그 말조차도 기쁜 듯했다.
‘아스텔의 교제 상대’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뻣뻣했던 안색이 약소하게나마 펴졌으니까.
나는 오빠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태자의 잔당을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 사냥 대회를 재개하는 등 밀린 일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나는 여남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오빠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어 주었다.
“응, 이따 봐!”
오빠가 떠나고 발코니의 문이 닫혔다.
마침내 나와 녹스, 단둘만의 시간이었다.
* * *
어느덧 저녁이 된 건지, 살짝 열린 창가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상투적인 인사를 하면서도 그의 낯을 자꾸만 보게 되었다.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그의 팔을 매만지다가 툭, 운을 뗐다.
“이제 우리 얘기할 수 있어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칭찬했다.
“늑대 모습 되게 멋있었는데, 나중에 또 보여 줄 수 있어요?”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한참 한 걸까?
그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네.”
그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녹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그가 몸을 움찔했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할 말부터 꺼내기로 했다.
“죽다 살아난 다음 생각해 봤는데, 우리 각인 말이에요.”
나는 그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지금 거의 느껴지지를 않아요. 그건 왜 생겼던 걸까요? 그리고 지금은 왜, 거의 사라진 걸까요?”
나는 맞은편에 앉은 채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의 손을 힐끔 응시했다.
아까 치료할 때도 느꼈던 건데, 그의 손을 잡아도 더는 시원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열이 오르지도 않았고…….
녹스는 내 의문에 명쾌하게 답해 주었다.
“그날, 우리를 살린 신이 저를 가엾게 여겨 우리의 운명을 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이렇게…… 연결될 수 있도록.”
그건 우리가 운명이 아니었는데 운명이 되었다는 의미인 걸까.
내가 마법진에 꽁꽁 묶여 있던 녹스를 구하기로 선택하고, 녹스가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만약 그렇다면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손 끄트머리를 매만지다가 낮게 웃었다.
“그럼 우리 마음이 더 가까워질수록 각인은 희미해지는 것일까요? 각인이 없어도 떨어질 일 없는 운명이 되었으니까?”
그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남자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운명이라는 말을 곱씹고 있는데, 녹스가 잠깐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럼, 아스텔.”
“네?”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표정.
나른한 눈매도,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모습조차도 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나는 의문을 담아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녹스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계속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아서 추운가, 혹시 창문을 닫으려나 했는데…….
뜻밖에 그는 내가 앉은 의자 바로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 둘의 눈높이가 얼추 맞아서, 나는 섬세하게 깎은 조각상과도 같은 얼굴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녹스, 왜 갑자기 그래요?”
그 순간이었다.
녹스가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아스텔,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전, 괜찮습니다. 아스텔이 저를 연인으로만 가지고 놀아도…….”
나는 당혹스럽게 반문했다.
“갑자기요……?”
뭐야, 갑자기 왜 나를 결혼 생각 없는 바람둥이로 만드는 거야?
나 결혼 생각 많은데!
순정파인데!
그러나 내가 반박할 시간도 없었다. 녹스가 감았던 눈꺼풀을 나른하게 뜨며 속삭였다.
“평생 연애만 해도, 아스텔의 연인으로 산다면…… 괜찮습니다.”
제 마음을 정했다는 제법 다부진 태도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아니, 난 연애만 하자고 안 했는데.
듣다 못한 내가 반박하려고 입술을 떼려던 그때였다. 그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큼 작은 검은 벨벳 상자를 꺼내 들었다. 순간 의문에 빠진 나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나 내 의문이 해소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정표로 받아 주십시오.”
……반지가 들어 있었다.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투명한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은빛 반지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
“……반지를 애정의 정표로 주는 거예요?”
“네. 매일 반지를 보면서 아스텔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제 마음을 생각해 주세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이 제국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반지를 바치는 행동에는 딱 하나의 의미밖에 없었다.
청혼.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맹랑하게 물었다.
“그럼, 청혼하는 게 아니라면 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도 돼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그가 짙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다른 놈은 안 됩니다.”
“그럼 왜 안 해요?”
“사실은 청혼하고 싶습니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계속.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하나도 안 싫은데!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건 애초부터 내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제 마음이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이 남자의 마음을 나는 기꺼이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확답을 받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의 손 위에 올려진 프러포즈 링을 보던 나는 애써 냉담한 척 표정을 싸늘하게 가장했다. 내 차가워진 표정에 그의 낯이 시시각각 고통에 저며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반드시 확답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그의 손 쪽으로 거만한 척 턱짓하며 물었다.
“……그 전에, 손. 일부러 다친 거죠.”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스친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
그는 건강해야 했다.
이렇게 갑자기 일부러 다치는 게 아니라.
“치료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난 녹스가 오스카 같은 바보한테는 다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있던 녹스의 몸이 아까 바닥을 구르던 오스카보다 더 심각하게 경직되었다.
“그건…….”
분명 찔리는 것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거듭 강조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일부러 다치지 말아요. 그리고 나보다 자기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말해요. 약속해 줘요.”
내 말을 끝으로 한동안 고요가 일었다. 나는 그의 침묵 속에서 내가 다칠 것 같으면 제 몸을 아끼지 않을 거라는 행간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는 만약, 아스텔이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짐작대로 그가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최후의 협박 수단을 쓰기로 했다. 이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턱을 확 치켜들었다. 동시에 거만한 낯을 꾸며 내며 무정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그럼 결혼 안 해 줄 거야.”
나를 올려다보면서 조금쯤은 나른하게 풀려 있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큰 충격을 받아 손에서 힘이 풀렸는지, 손바닥에서 프러포즈 링이 떨어질 뻔했다. 그는 프러포즈 링을 똑바로 움켜잡으며 나를 응시했다.
“아스텔, 그건…….”
거절당해도 계속 청혼하겠다더니.
충격받은 듯한 표정과 곤혹스럽다는 듯한 기색이 고스란히 보이는 태도는…….
조금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나는 웃지 않으려 애써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귀여운 녹스의 침울해진 낯을 보니 마음이 쓰라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위해 또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부분은 확실히 약조해 두어야 하니까.
나는 투정 부리듯 조용히 속삭였다.
“나중에 나 과부 되면 어떡해. 과부 돼서 맨날 녹스 무덤에나 가서 시들시들하게 몇십 년 혼자 살다 죽고…….”
그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가 잠시 비틀거리다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스텔이 시들시들하게 살다가 죽을 일은 없습니다.”
“녹스는 자기 몸 막 혹사하다 빨리 죽고, 나는 혼자 남아서 맨날 까만 옷만 입고 살다가…….”
점점 시무룩해지는 내 음성에 녹스가 재빠르게 반박했다.
“절대로, 절대 그렇게 안 만들겠습니다. 매일 원하는 옷을 입게…….”
“녹스가 죽으면 맨날 울어서 눈 퉁퉁 붓고, 그러다 별명 붕어 되고.”
“당신은 붕어가 절대로 아닙니다, 아스텔.”
그의 반박을 듣던 나는 낮게 웃으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몸 아껴야 해요, 꼭. 이제 남은 수명도 나랑 똑같으면서…….”
나는 이제 다시 그의 손을 뚫어지라 보았다. 프러포즈 링을 내민 손을 둘둘 감싼 거즈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기도 하면서.
내 걱정 어린 한숨 소리를 들은 녹스가 고개를 들더니 다치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뺨을 매만졌다.
“제 몸은 꼭 아끼겠습니다, 아스텔. 그러니까……. 과부든 무덤이든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그런데 그때였다.
순간 그의 말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녹스를 응시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마치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스텔, 그런, 그런데.”
나는 시선을 그의 입술에서 눈동자로 옮겼다. 그의 푸른 눈에 어떠한 기대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과부…… 라는 말은, 그러니까.”
그가 더듬더듬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반달로 휘었다.
눈치챘구나, 내 말의 뜻을.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내 마음을.
나는 봄바람처럼 가볍고 따스하게 대답했다.
“네.”
그는 마치 세상이라도 무너진 듯 슬프게 얼굴을 구겼다가, 이내 세상을 다 얻은 자처럼 환히 미소 지었다. 무슨 감정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으리만큼, 안색이 시시각각 바뀌는 녹스의 모습이 내 시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면…….”
차마 제 입으로 그 소중하고 중차대한 말을 내뱉을 수 없다는 듯, 그가 입술을 떼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 태산처럼 커다란 남자가, 방금 막 나를 위해서 오스카를 처리하고 온 이 남자가, 목숨을 바칠 때조차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용감했던 그가…….
이 제국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떨고 있었다. 이다음에 할 말이, 그리고 나의 대답이 두렵고, 무섭고, 설렌다는 듯이.
녹스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새하얘진 안색을 한 채로 물었다.
“저와 결혼을 해 주시겠다는, 그런…….”
나는 녹스가 내민 반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을 잘게 흔들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우리 미래를 약속해요. 난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까, 언제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급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언제여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그럼…….”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려 했다. 순간 반지를 다시 놓칠 뻔하고, 몇 번 헛돌기도 했지만, 숨마저도 참은 채로 경건한 태도였다. 아마도 녹스에게는 영겁같이 느껴졌을 시간 끝에 마침내 내 약지에 반지가 끼워졌다. 내 손에 딱 맞는 반지를 가만히 매만지면서, 그가 감격 어린 어조로 속삭였다.
“……맹세할게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상기된 얼굴을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지만, 그 말만큼은 진심처럼 보였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 말에, 문득 성인이 된 우리의 첫 만남이 겹쳐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그날의 나는 아나이스 공작을 두려워했다. 무슨 기다렸다는 말을 살인 예고하듯이 하는 거야,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상황은 완벽하게 반전되었다.
나는 녹스와의 기억을 되찾았고, 그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날, 나를 마주한 녹스가 했던 기다렸다는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 말을 돌려줄 차례였다. 나는 내 모든 감정을 담아 그를 향해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단언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말.”
그 역시도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걸까.
내 말이 울려 퍼진 순간.
아까보다도 더 환한 웃음이 그의 아름다운 낯을 장식했다. 세상을 다 가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제 맹세의 키스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갈급하게 달려든 것과 달리 내 입안을 유영하는 그의 숨결은 무척 부드러웠다. 오랜 키스 끝에 호흡이 부족해 밭게 숨을 내쉬자, 그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이번의 호흡 곤란은 각인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녹스와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 박동도, 이제는 각인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나의 운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를 떨리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녹스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코끝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면서 상냥하게 속삭였다.
“아직, 언약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말의 내용은 전혀 상냥하지 않았지만.
“……네?”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짓궂게 웃으며 내 턱을 잡았다.
“다시 키스해요, 우리.”
그 말을 이해할 틈도 없이, 그는 다시 거칠게 입술 위에 입을 포개어 왔다. 입술 위에 포개지는 감촉을 느끼면서 나는 동그랗게 떴던 눈을 다시 한번 꼭 감았다.
꿈결 같은 청혼과 아름다운 키스까지. 온 마음이 따스한 행복감으로 충만해졌다.
마침내 우리는 각인 없이도 서로의 운명이 되는 것을, 함께 영원히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했다.
-<그 남자는 제 친오빠인데요, 공작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