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11/12)

Chapter 8.

“호외요! 호외!”

제국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새벽녘 동이 트자마자 신문팔이 소년들은 발 빠르게 새로운 소식을 전달했다.

황궁 직속 신문국에서 발행되는 어용신문이 저자에 재빠르게 깔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황제가 코마 상태에 빠졌다. 마법진이 작동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사멸한 것으로 알려진 역적, 뷔에트리 가문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즉, 뷔에트리 가문의 일당이 살아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로 인해 황태자가 검은 제복을 입고 황제 대신 전면에 나섰다. 황태자가 황제를 대리하고, 황후와 황녀가 제 궁에서 유폐에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동시에 황제를 사랑하는 무수히 많은 평민들이 광장에 시위를 하러 나섰다.

“뷔에트리 가문을 처단하라!”

“피의 카니발을 다시 개최하라!”

“죽여라!”

“황족 시해범을 잡아서 참수하라!”

그들로 인해 제국 수도에서도 가장 번화한 아르벤트 광장에는 온갖 고성과 노성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광장을 맴돌던 시정잡배들도 싹 사라지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분노한 시위꾼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카시언 그레이와 아나이스 공작 역시 교묘하게 숨어들었다. 광장에 모인 몇백여 명의 시위꾼들을 노려보던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뷔에트리 가문 놈들이 아직 살아 있답니다!”

“제국 귀족으로 변장해 살아간다지요?”

“당장 처단해야 합니다, 이 녀석들을……!”

은근히 사람들을 꾀어내 시위를 주동하고 헛소문을 퍼트리는 주동 인물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 쪽에 짧게 눈짓한 뒤, 주동 인물로 추정되는 시위꾼의 몸에 간단한 마법을 걸어 그가 시위대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

힘차고 씩씩하게 목청을 돋우던 그는 마법에 걸리자마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앞질러 가는 무리에 개의치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시작하지.”

아나이스 공작의 말을 듣자마자, 카시언은 기사답게 날렵한 몸동작으로 무리에서 뒤처진 시위꾼의 뒷덜미를 덥썩 잡아챘다. 금방이라도 해칠 것 같은 표정을 한 그가 흉흉하게 중얼거렸다.

“이리 와, 해치지 않아.”

그렇게 그는 생선 대가리 잡듯 시위꾼의 목을 잡아챈 뒤 낮임에도 캄캄한 뒷골목, 아나이스 공작이 서 있는 곳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데려왔습니다.”

카시언이 데려온 시위꾼을 보자마자 아나이스 공작의 표정에 한결 더 날이 섰다.

“저는 정신을 잃는 마법 따위는 안 걸었습니다.”

카시언이 아나이스 공작을 보다 시위꾼을 차분히 응시했다.

“당연히 걸었을 줄 알았는데요. 정신 빠졌잖아요, 지금.”

텅 빈 눈동자, 껍데기만 쓴 듯한 회색빛의 두 눈알.

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흑마법에 이미 걸려 있군요. 계속 잡고 있으십시오.”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시키는 대로 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카시언 그레이가 뒷덜미를 잡고 있는 사내의 심장 어귀를 움켜쥐었다가 떼어 냈다.

그 순간, 사내의 몸이 검은 모래가 되어 허물어졌다.

“……뭐야.”

카시언이 허무하다는 듯,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보며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십시오.”

공작은 제 손에 있는 흑요석만큼이나 새카만 마정석을 들어 보여 주며 중얼거렸다.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먼저 입을 뗀 건 아나이스 공작 쪽이었다.

“검은 마정석은 흑마법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황태자와 콘윌 공작이 시위를 주동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아나이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란 시위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자들이 상황을 조작하고 있다.

이 상황이 뜻하는 바는 생각보다 명백했다.

본디 숨기는 것이 많은 자들이 요란스레 선동을 하는 법이니까.

* * *

그날 밤, 공작 저택 내 저녁 식사 테이블.

황제가 코마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귀족 대부분이 금식에 들어갔다.

아나이스 공작가의 경우는 의례적으로 분위기를 맞추는 정도였다.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식사 자리, 간단한 해산물 퓌레를 넣은 수프인 비스크 세 그릇이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맞춰 공작님과 카시언, 나까지 총 셋이 마주 앉았다.

“이야기는 전부 들었어요. 황제가 뷔에트리 역도에게 당해 코마 상태라고.”

뷔에트리 가문에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건 상당히 영리한 해결책이었다. 제국민들은 뷔에트리 가문을 싫어했고, 그 증오를 이용하면 모든 게 손쉽게 풀릴 테니까.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이 그 생존자라는 것만 연결 지으면 그만이었다.

콘윌 공작은 뷔에트리 백작가의 잔당인 나를 잡아내어 죽일 수 있을 것이고…….

황태자는 나를 후견한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의심을 부풀려 그를 믿지 못하는 무리를 만들어 내려 했을 것이다.

민심을 잃은 그를 마물 전쟁으로 내몰아, 은밀히 죽일 생각이지 않을까.

녹스는 내 싸늘한 표정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실상은 황태자가 죽인 것입니다, 아스텔.”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군요.”

“일단은 황태자 궁에 첩자를 숨겨 두었습니다.”

황태자가 황제의 권한을 손에 쥐었으니 잠입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확실히 수인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으나, 녹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직접 잠입하는 것 외에는 확실한 정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걸러 들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녹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저도 첩자를 심어 뒀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둘을 바라보며 테이블 아래로 발을 콩콩, 굴렀다.

“누굽니까?”

숨겨 온 이야기를 하려니 살짝 떨렸다.

“콘윌 공작이에요.”

내 답에 둘 다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콘윌 공작은 의도치 않게 우리의 스파이가 되어 주고 있었다.

콘윌 공작이 부두술을 이용해 도망치던 그날, 미미의 힘을 빌려 콘윌 공작의 심장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두었다.

미미의 마법은 단순히 그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었다. 콘윌 공작과 동일한 시야각을 공유하게 되는 마법이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과 저무는 밤, 하루에 딱 두 번.

미미가 건네준 자그마한 나비 브로치에 손을 올리면 지금 콘윌의 시야를 오 분가량 공유할 수 있었다.

‘단순히 콘윌만이 아니라 그 뒤의 흑막까지 처리할 생각이었거든.’

바퀴벌레를 죽일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

그들은 음식을 제 가족들과 나누는 습성이 있으니, 미리 달콤한 약을 친 음식을 뿌려 두는 것이다.

바퀴벌레 한 마리만 미끼를 물면, 모든 바퀴벌레가 다 같이 죽는다.

콘윌 공작과 황태자 역시도 바퀴벌레 가족과 비슷한 관계일 터.

그러니 콘윌 공작의 동태를 파악하면 그 뒤의 흑막까지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상당히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고.’

나는 나를 응시하는 사내 둘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콘윌 공작이 죽을 때 마법을 걸어 두었거든요. 우리는 그의 시야를 동시에 공유할 수 있어요. 하루에 딱 두 번뿐이지만요. 그리고…….”

나는 침음을 삼켰다. 두 남자는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내 콘윌 공작의 시야를 확인해 보았는데, 황태자 궁에는 두 개의 밀실이 있어요. 하나는 콘윌 공작도 드나들 수 없는, 독을 배양하는 곳. 다른 하나는 마정석이 가득한 방이에요.”

카시언이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마정석?”

“응.”

“오늘 황태자의 끄나풀을 하나 죽였더니 심장에서 까만 마정석이 나왔어.”

그의 말을 듣던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짚일 듯, 짚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흑색 마정석을 이용한 흑마법이군요.”

“황태자는, 흑마법으로 정확히 뭘 하려는 걸까요?”

“우리 둘 다 첩자를 심어 두었으니, 곧 알게 될 겁니다.”

녹스는 카시언 따위 이 자리에 없다는 것처럼, 나만 보며 다정하게 웃으며 강조했다.

“우리 둘, 말입니다. 아스텔.”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수프에만 해산물 건더기가 없이 멀건 것도 같고.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사 줘야지…….’

이 와중에도 발생한 차별에 오빠의 처지가 안쓰러워졌다. 그때 녹스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는.”

테이블 위로 새하얀 종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저를 빨리 죽이고 싶은 모양입니다.”

나는 팔랑거리며 떨어진 고급지를 내려다보았다.

마물 전쟁의 빠른 재개를 명하는 황태자의 칙서였다.

발송일은 오늘, 북부로의 진군을 명한 날짜는 내일.

놀랍게도 칙서에는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나는 종이를 내려다보다 낮게 말했다.

“죽이고 싶은 건…….”

오늘, 나도 잠깐 공작 저택 바깥으로 나갔었다.

아직도 뷔에트리 가문을 역겨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더러운 역도들을 처단하라!’

‘뷔에트리의 역당을 죽여 매달아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나도, 오빠도, 우리 부모님도…….

그런 더러운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쪽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싸늘한 내 목소리에 두 쌍의 눈동자가 꽂혔다.

* * *

같은 날, 으슥한 밤.

콘윌은 은밀하게 황제궁의 문을 닫았다.

황태자의 명을 받아 황제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반역자 신분이었기에 검은 로브를 코끝까지 눌러쓰고 귀신처럼 걸어야만 했다.

‘이 짓도 슬슬 이골이 나는군.’

하지만 뷔에트리 가문의 계집애와 아나이스 공작, 둘을 엮어 없앨 수만 있다면 쓸개즙을 씹는 심정으로 버텨 낼 수 있었다.

황제궁 바로 앞까지 다가선 콘윌의 귓가에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열어다오.”

“불가합니다. 어서 궁으로 들어가시지요.”

황후가 폐문이 된 황제궁의 문 앞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안 됩니다, 황후 폐하.”

황녀는 황후의 곁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서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 왜 저리 애원하는지.’

콘윌은 낮게 비웃음을 지은 채 황제궁의 샛길 쪽으로 빠진 다음, 비밀 통로를 통해 빠르게 황제의 침실에 도달했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는 휘장이 쳐진 침대와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는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휘장을 걷어 낸 뒤 침대 위에 누운 사내를 응시하며 킬킬댔다.

“얼마 남지 않았군. 죽을 날까지.”

콘윌은 코를 찌르는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에 닿은 황제는 무사히 죽어 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낯빛, 뒤로 까뒤집힌 눈, 황달이 온 것처럼 노르스름한 흰자. 분명 숨은 쉬고 있었으나, 코끝으로 파르스름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역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독된 모양새. 장갑을 낀 손으로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은 그가 킬킬거리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콘윌이 나온 이후로는 그 누구도 황제궁에 발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은밀한 반역 행위를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목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것도 황궁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인, 아나이스 공작 저택 안, 아이리스 룸 내부의 소파에 편안히 몸을 기댄 여자.

바로 나, 아스텔이다.

미미가 걸어 둔 추적 마법 덕택에 콘윌과 공동 시야를 공유했지만, 콘윌이 꾸벅꾸벅 졸 때라든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순간에만 시야가 공유됐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허탕을 친 끝에, 마침내 대어를 낚고야 말았다.

“황제의 증상도, 황궁이 돌아가는 상황도.”

흡족한 마음을 안고 스르르 눈을 뜬 나는 손에 잡고 있던 나비 브로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전부 다……. 그렇게 된 거구나?”

‘콘윌이 알아서 스파이짓을 해 주니, 난 너무 편안하네.’

다리를 쭉 뻗은 채로 편안한 소파에 기대 앉아, 달콤한 애플 민트차를 마시고 사과 잼을 겹겹이 바른 쿠키를 먹으며 콘윌의 동태를 눈으로만 따라가면 된다니.

나는 콘윌이 알아서 개고생을 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확실히 죽지는 않았네.’

당장 황제가 서거할 경우 의심을 살 부분도 많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이양 받아야 할 작위나 영토 등도 상당했다.

그러니 황태자는 당분간은 코마 상태에 빠진 황제를 대리해 통치하는 쪽이 이득이라고 판단했으리라.

황제는 아직 죽지 않았고, 내게는 황제를 살릴 방법이 있었다. 원작 속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했으니까.

‘잘 살펴보자면 황제의 증상은, 원작 속 마물 전쟁에서 죽어 가던 자들과 동일해.’

얼굴이 새파랗게 뜨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흰자가 보이도록 두 눈이 까뒤집어지는 전형적인 환자의 증상.

심지어 눈의 흰자에는 황달이 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푸르스름한 공기가 보이며, 타인에게도 병증이 전염되는 현상이었다.

원작 속에서는 저 중독 현상을 전염병으로 오인해 골든타임을 놓쳤다. 내부에서 발생한 괴질 탓에 마물은 제대로 상대해 보지도 못하고 숱한 병력을 잃은 뒤, 묘령의 독약학자들이 나타나 치료제를 만들어 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전력을 다수 상실했을 때였다.

‘그러니까 증상을 잘 생각하고, 치료제를 떠올려 봐야 해.’

나는 소파 옆에 브로치와 함께 가지런히 놓아둔 다이어리와 깃펜을 양손으로 들고 선언했다.

그때 당시에 해독을 도왔던 사람들. 정확한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독약학자들이라는 정보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독약학자들을 찾아야 해.”

독약학자를 최대한 은밀하게 찾아내야 했다. 나는 필기체로 하나둘 글씨를 적어 나갔다.

[독약학 천재들을 은밀하게 찾아 두]

……여기까지 적었을 때,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곧장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당황했다. 녹스가 옆에 있었던 것이다.

“왔으면 말을 하지!”

“집중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곧바로 내 옆에 앉은 녹스의 손이 내 볼을 감싸 쥐었다.

“얼굴이 빨갛습니다.”

나는 내 양 볼을 감싼 커다란 손의 체온을 느끼고 귓불을 붉혔다.

“아스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움…….”

커다란 손이 얼굴을 반 이상 덮은 탓에 발음이 자꾸만 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이어리와 펜을 내려놓고, 작고 하얀 손을 녹스의 커다란 손 위로 겹치며 헤헤, 웃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귓불이 더 빨개질 때까지. 몇 분간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손을 잡자마자 묘하게 어색해졌다.

그는 내 뺨의 홍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낮게 속삭였다.

“고민이 있는 얼굴입니다.”

“……음, 고민은 아니지만, 그. 부탁이 있는데…….”

그가 작은 부리로 가볍게 톡톡 쪼아 대는 새처럼 내 콧잔등 위에 입 맞추며 낮게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 독약을 잘 다루는 사람이 필요해요.”

……독약이라니, 지금처럼 로맨틱한 무드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녹스는 그저 내 귓불에 달콤하게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걱정은 저에게 모두 버려두세요.”

……독약에 관한 고민에도 로맨틱하게 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녹스는 내 예상보다도 나를 더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싫어. 우리 같이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요.”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은 다른 곳에 버릴래!”

예를 들면, 황태자나 콘윌에게 내 산더미 같은 걱정거리를 몰아주는 것 정도.

나는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녹스의 손을 재차 꼭 부여잡았다.

내 손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도록!

* * *

다음 날 아침, 황태자가 명한 전쟁 출발일이 되었다.

저택을 관리할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인원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의장을 챙겨 입고 황궁의 외곽에 위치한 장원으로 들어섰다.

장원 안, 커다란 단상 바로 뒤에 공작가의 정예 기사단 일부와 황궁에서 내어 준 일대 기사단, 후방에서 치료를 도울 치료사들이 나란히 도열했다.

물론 가장 높은 단상에는 전쟁의 선봉으로 나설 아나이스 공작인 녹스가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단상보다 더 뒤에 있는 황좌를 응시했다. 마치 황좌가 자신의 것인 양 거만하게 걸터앉은 황태자가 보였다.

‘저게 그 나쁜 놈이구나.’

찬란하게 비치는 햇살 아래 어떻게 보면 잘생겼다고 보일 수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에는 숨길 수 없는 비겁함이 어려 있었다. 황태자는 맨 앞 단상에 선 녹스가 출병 의식의 예를 읊을 때까지 황좌에 앉아 있었다. 출병 의식 조례가 끝나자마자, 황태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녹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네.”

스피커 마법에 걸린 건지, 황태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황궁의 장원에 울려 퍼졌다. 귀가 쨍할 정도로 아픈 목소리였으나, 녹스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새하얀 손을 잡아챘다.

“반드시.”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황태자의 낯이 불그스름해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던 그가 조용히 화답했다.

“승리해 돌아오겠습니다.”

무뚝뚝하고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힘이 있었다. 기사들 역시 녹스의 목소리에 감동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 탓일까.

황태자는 씨근덕거리는 표정으로 눈살을 좁혔다.

“그대가 다시 돌아오면…….”

황태자는 뻣뻣한 시선을 녹스 쪽으로 또렷이 고정하며 치하를 건넸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겠군 그래.”

녹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예.”

그의 단답에 둘의 시선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황태자는 일견 불편한 낯으로 녹스를 응시하더니, 입매를 일자로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기선 제압에 실패한 꼴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기사들은 우리 황가에 충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명백히 공작령을 겨냥한 대사.

그러나 녹스는 건조한 낯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황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연히 공작령도 그러할 테니, 모든 영광은 황족에게 바치겠지.”

내가 서 있는 후방에서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흉계를 숨기고 있는 사람답게 비열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황태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저, 나쁜 놈. 녹스한테서 더러운 눈 떼.’

나는 주먹을 안주머니에 넣고 슬쩍 엿 모양의 욕설을 날렸다. 커다란 복수를 앞두고 할 수 있는 소소한 복수였다.

그때, 녹스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영광을 바칠 대상은, 전쟁에 승리해 돌아온 뒤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황태자의 얼굴에 어린 불만과 불안을 읽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녹스가 영광을 바칠 대상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은 아닐걸!

* * *

아나이스 공작은 황궁의 짐마차와 지원 병력과 함께 수도에서 출발했다.

전쟁에 대비하는 인력은 부당하게도 대부분 공작령에서 감당해 왔으나, 이번 전쟁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황궁에서는 마물 전쟁을 위해 일대 기사단을 편성하고 물자 및 수송용 마차 백여 대까지 지원했다.

그러나 전쟁은 짧아도 한 달 이상 걸릴 예정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황궁에서 지원하는 물자로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략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공작성에 도착해서 물자 배급로를 만들어야 했다. 워낙 전쟁을 자주 치른 터라, 물자 배급로를 만드는 일도 순조롭기는 했다. 그러나 황태자라는 복병이 있으니, 혹시 도사리고 있을 음모에 대비해 최종적으로 검토를 마쳐야 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다시 아나이스 공작성에 잠깐 돌아왔다는 뜻!

‘룬을 공작성에 맡겨야 하기도 하고…….’

나는 시녀의 품에 동그랗고 조그마한 눈사람처럼 꼭 안긴 룬을 힐끔거리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시녀장 루델을 포함해 공작성 식구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공작성의 문 안으로 마차를 타고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두방망이질했다.

시녀장님은 어떻게 바뀌었으며, 치료소는 또 어떤 분위기일까. 내가 머물던 델피니움 룸은 또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서 들어가시죠!”

등 뒤에 선 제니와 샐리가 입을 모아 속삭이는 것을 들으며, 나는 공작성 본채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우뚝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녀장, 루델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릴 뿐…….

‘혹시 이제 내가 어색한가?’

조금 못 보기는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조금 머쓱하고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 가까이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여전히 완벽한 시녀장, 루델은 그때까지도 멍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녀장님이 왜 저러시지?”

등 뒤에 선 제니가 놀라 혼잣말할 정도로, 루델의 상태는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나 역시도 조금 긴장할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저 나만을 빤히 바라보던 루델이 이내 차갑고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님을 뵙습니다.”

뭐야, 나 싫어하는 표정…… 이 아니라.

“……네?”

그녀는 단호하고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마님.”

뭐야, 나 왜 갑자기 마님 됐지?

당황한 나와 달리 루델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듣고 난방 마법도 따뜻하게 가동하였고, 방도 매일 청소하여 깨끗합니다. 아주 먼지 한 톨 없습니다.”

‘루델이 먼지 한 톨 없다고 하면 정말 먼지 한 톨 없는 건데…….’

나는 루델의 등 뒤에 있는 파리한 안색의 시녀들을 힐끔 보았다. 어쩐지 등 뒤의 시녀들 입술이 황제의 푸르스름한 입술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죽어 가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는 소리다. 나는 속으로 그녀들을 향해 작게 애도를 표했다.

“……네, 루델. 안 그래도 되었는데.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루델의 손끝이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더니 이내 몸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엄마처럼 다정한 손길에 조금 감동해서 코끝이 찡해졌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조심히 손을 뗀 그녀는 한 올도 풀리지 않게 잘 묶은 머리칼을 공연히 매만지며 나를 향해 속삭였다.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루델이 몸을 옆으로 돌리자, 표면이 반짝반짝한 본채 외벽이 보였다. 여기 바깥에 있는 돌들은 분명 몇백 년 된 돌이라고 들었는데, 분명 이끼도 끼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방만 치운 게 아닌 모양이다…….

* * *

반짝반짝 깨끗해진 델피니움 룸 안.

여독을 풀기 위해 룬과 함께 단잠을 푹 잔 나는 눈을 반짝 떴다. 잠결에 루델이 룬을 데려가 꼼꼼히 씻긴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콘윌의 행보를 확인하는 거지.’

날이 저물어 가는 순간, 나는 습관처럼 브로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루에 딱 두 번밖에 볼 수 없으니 최대한 신중해야 했다.

‘보통 흑막이나 악역들은 해가 질 때나 새벽쯤 은밀히 회동을 하거든.’

그러니 시각을 보아, 지금이 적기일 것이다. 나는 브로치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내 예상대로 황태자와 콘윌, 그리고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여성과 남성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 네 명 중 유일한 여자가 말을 이었다.

“독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그녀의 손에 검은 보석처럼 보이는 물질이 담긴 투명한 약병이 보였다. 콘윌이 손을 뻗어 약병의 주둥이를 막은 코르크 마개를 매만졌다.

“이것이 바로, 그 불온한 계집을 죽일…….”

황태자가 감격한 콘윌의 말을 끊으며 성마르게 물었다.

“해독제는?”

“준비했습니다. 극히 소량입니다. 폐하께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기사단에 스파이는.”

“이미 여럿 넣어 두었습니다.”

“역병인 것처럼 병을 퍼트릴 거다. 독은 얼마든지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저 독으로 나나 녹스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걸까.

병사들 내에 이미 스파이가 존재한다고 하니, 이 정도면 출발 당시부터 독을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불운한 소식은 또 있었다. 여자 흑마법사가 비소를 지었다.

“아, 그거 말인데. 기사단에 숨겨 둔 첩자 중 시엘라가 이미 약한 독부터 퍼트려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

“예, 미약한 독에 감염되면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는 않으니 아직 아무도 모를 겁니다. 전쟁터에 도착해서야 전력이 픽픽 쓰러지는 걸 보겠죠. 손쓸 새도 없이, 마수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독 때문에 죄다 죽을 겁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적으로는 공작과 그 피후견인 계집까지 죽게 되겠지. 아, 그리고.”

“……예?”

“카시언 그레이, 그자가 공작과 인연이 닿은 모양이던데.”

“……수도의 꽃 말입니까. 시들기에는 아까운 미모인데.”

“그자도 같이 죽이는 게 좋겠어.”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남성 흑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나이스 공작님과 오빠,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나란히 몰살 리스트에 올랐다.

“비밀은 반드시 엄수하도록.”

“물론입니다.”

그들의 상황을 관람하던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장소가 황태자 궁에 위치한 밀실인 데다 믿음직하다 판단한 사람만 모여 있고, 원탁 가운데에 마법석이 놓여 있는 걸 보면 그들도 비밀 유지를 위한 최선의 노력은 다한 모양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숨긴 비밀, 나한테 술술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요?’

이것 참, 아주 화질 좋은 씨씨티비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너.”

황태자가 급작스럽게 콘윌 앞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의 기이한 시선이 콘윌의 낯을 샅샅이 훑듯이 움직였다.

콘윌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나조차 숨을 참게 만들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이상하군.”

“예?”

아무렇지 않게 반문한 콘윌과 달리,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황태자의 탁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대에게……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같은데 말이야. 내 착각인가? 뭔가 흰 빛무리가 보였는데.”

긴장해서 몸을 움츠린 나와 달리 콘윌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부두술은 모든 마법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렇다면.”

황태자는 탐탁잖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참고 있던 나는 겨우 조금씩 숨을 내뱉었다.

‘아직이야. 아직 안 들켰어.’

슬슬 눈앞이 흐려졌다.

추적 마법의 오늘치 유효 기간이 전부 다 끝난 것이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푸하, 하고 내뱉으면서 나비 브로치에서 손을 떼어 냈다.

“나빠!”

바로 그때였다. 내 손끝에 섬뜩한 털 뭉치가 닿아 왔다.

유령이냐 귀신이냐, 하며 몸을 경직시키는데.

“야옹.”

손끝에서 고양이인 척하는 음험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미!”

미미가 내 손등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 대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렸다.

‘어라, 이 고양이 분명히 두고 왔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미미가 먼저였다.

“너 이 녀석, 수도에 감히 날 버려두고 떠나?”

“아니…… 어떻게 왔어? 혼자?”

“이 몸을 뭐로 보고! 아무튼, 난 전쟁을 보고 싶단 말이다! 마수의 고통! 피!”

이럴 줄 알고 안 데려온 건데!

“너…… 신수 맞아?”

나는 미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미가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아무튼 나 덕분에 잘 보이지? 응? 아주 그놈들이 무슨 흉계를 벌이는지?”

“응, 이미 독이 퍼졌다던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미미는 발을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 정보를 알게 되었으니, 기사단에 소속된 오빠에게는 당장 말을 꺼내야겠다!

나는 미미의 털을 잽싸게 쓰다듬어 준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 * *

오빠에게 ‘시엘라’라는 스파이에 대해 조사하라고 고자질해 두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길.

‘걱정하지 마, 아스텔. 오빠가 다 죽일게.’

‘다 죽인다고?’

‘응. 후환 없이 깔끔하게.’

……바보, 허풍은.

영웅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오빠는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했다.

내 앞에서 죽이기에는 마음이 아프다나, 뭐라나.

순진하고 연약한 오빠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단단히 당부를 해 두었으니, 분명 어떻게든 시엘라라는 첩자를 처리해 줄 것이다.

오빠는 한다면 하는 존재니까.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내 방에 먼저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아스텔 님, 오셨습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주치의가 몸을 용수철 튕기듯 튕기며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건강하셨지요?”

유독 과하게 내 건강을 걱정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던 탓에, 나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건강했어요. 주치의 선생님은요?”

“저야 뭐. 조금 늙고 병든 거 빼고는 괜찮았습니다, 예.”

늙고 병든 건 안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도 나는 내 손을 덥석 잡은 주치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가 나를 향해 음모를 꾸미듯 사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 각하께 들었습니다. 독약학의 귀재를 찾고 계시다지요.”

“……네?”

그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춰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주 죽여 버리고 싶은 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주 흉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뭔가 심히 와전된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독약학의 귀재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는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놈이 있는 것도 맞았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어요?”

내 말에 주치의가 양손을 위로 들어 누군가를 부르듯 짝짝, 손뼉을 커다랗게 쳤다. 그러자 델피니움 룸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니…….”

그러더니 비슷하게 생긴 세 명의 등이 굽은 노인들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하나같이 머리는 하얗게 센 데다, 입은 옷에 눈까지도 백색이라 색을 모두 잃은 사람처럼 서늘하고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저렇게 생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치료사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독약학 천재 삼 형제입니다.”

“독약학 천재 삼 형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독약학의 귀재를 찾아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델랑 루치아 마을에 숨어 산다는 독약학의 귀재들을 데려올 줄이야!

주치의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전 별로 한 게 없습니다. 자아, 어서 보시죠.”

그는 우리가 앉은 소파 앞으로 나란히 선 노인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첫째, 독으로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악당 중의 악당, 베놈 원!”

맨 왼쪽의, 키가 가장 작은 노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썹 쪽의 흉터가 돋보이는 낯이었다.

“둘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을 알고 있다는 악랄한 자, 베놈 투!”

중앙에 선 중절모를 쓴 노인이 한 손을 흔들었고.

“셋째, 세상의 모든 독을 제조한다는 베놈 쓰리!”

마지막에 선 노인은 선량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고 입을 살짝 벌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바로…….”

“아, 이 사람들은 아나이스 공작 각하와 본디 아는 사이였습니다.”

새삼 녹스가 원작 속에서 온갖 ‘나쁜 짓을 자행해 온 미지의 존재’라고 묘사됐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순진한 녹스의 눈동자를 떠올리면 곧장 그 묘사가 헛소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차올랐지만.

“아…….”

“그래서, 저희가 할 일에 대해 이제 말씀해 주시죠.”

“공작 각하께 입은 은혜가 있으니, 뭐든 하겠습니다.”

나는 삼 형제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어떤 은혜를 입으셨는데요?”

베놈 원, 이라고 지칭된 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수의 시체를 보내 주셨죠.”

“마수 껍질도요.”

“마수의 심장과 쫄깃한 힘줄…… 아니, 왜 그렇게 파리하게 질리셨습니까?”

……그야, 무서우니까!

* * *

‘잘 부탁한 건가.’

나는 조금 공포스러운 독약학 천재 삼 형제들에게 간략한 부탁을 한 뒤, 공작성의 저녁 식사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나름대로 잘 끝났던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증상은 모두 메모했습니다.’

‘이 독이 무엇인지 정체를 알아낸 다음엔, 치료제가 필요해요. 제가 대략적으로 아는데…….’

꽃인 아이리스와 델피니움, 푸른 장미의 가시를 섞으면 임시방편 치료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완벽한 치료제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네, 그다음은 치료제부터 만든 다음에 이야기하지요.’

‘이미 감염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임시 치료제를 쓸까요?’

‘일단은요. 하지만, 완벽한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험체가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험체라고 하니까 오싹하네.’

나는 포크를 손에 쥐고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빈 테이블에 앉은 채로 치료제에 관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어느새 녹스가 내 곁에 와 있었다.

내 앞에선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장착한 그를 마주하며 급하게 포크를 내려놓은 나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 아니, 어서 와!”

발랄하게 손을 흔든 나는, 상석이 아니라 내 맞은편에 앉은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는 오늘 안 오는 건가? 안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스파이 처리가 늦나…….’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걱정하는 기색을 최대한 죽인 채로 말을 이었다.

“카시언 그레이 경은요?”

“기사단의 스파이 몇을 색출해 취조하러 갔습니다”

“아. 걱정이네요…….”

“네?”

“그분도 워낙 성품이 상냥하시고 순진하셔서. 그러니까 걱정이 좀…….”

녹스가 의아하다는 낯을 한 채로 물었다.

“……상당히 악랄한 성품인 것 같던데.”

“……?”

“지금, 기사단에서 잡힌 스파이의 비명으로 심문실 주변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럴 리가…….”

아무리 녹스가 오빠를 싫어한다지만, 우리 오빠는 악랄하다는 소리를 듣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성품이 선량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여려서 매번 눈물짓느라 바쁘면 바빴지.

‘아무튼, 녹스도 편견이 좀 있다니까. 둘 사이가 여전히 안 좋은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끝없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나쁜 놈들이 오빠를 괴롭히면 어쩌지. 오빠 말고 내가 스파이를 처리했어야 했나.’

어느새 전채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지만 오빠 걱정에 영 입맛이 없었다.

한참을 애피타이저를 포크로 깨작거리는데, 가만히 나를 보던 녹스가 조심스럽게 나를 호명했다.

“아스텔.”

“네?”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주어는 없지만 맥락상 카시언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저로는 부족하십니까?”

……이건 분명히 질투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는 내 묘해진 표정을 보더니 곧장 눈매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니까…….”

내가 눈을 깜빡이며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자리로 곧장 다가왔다.

“저는 무능한 누군가와는 달리, 가문에 시종으로 숨어든 스파이는 일찍이 다 처리했습니다.”

“어…….”

“독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독약학자들도 초빙했습니다. 그러니까…….”

타닥. 그가 은식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제일 잘했습니다, 해 주십시오.”

그가 금세 내 얼굴 바로 앞으로 제 머리칼을 가져다 댔다.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내 손은 자연스럽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칼을 만져 주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내가 살짝 손을 높이 든 덕분에 그의 머리칼이 내 손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으음, 참 잘했습니다아……?”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독을 찾아내면, 이제 아스텔, 당신이 제 목숨을 또 구해 주는 거겠지요.”

‘그렇지만…… 원작 속에서도 죽진 않았는데, 녹스는.’

나는 녹스를 응시했다.

한때, 그에게는 누가 죽이더라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보면 여리다는 걸 아주 잘 알지.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가 원작 속에서 조금 아팠다는 묘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기억 조작인 것 같기도 했지만, 눈앞의 그를 보면 그에 관한 모든 음험한 묘사들이 왜곡과 과장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부드러운 머리칼에, 이렇게 따뜻한 눈망울인데. 어떻게 나쁘게 대답하겠어!

“응, 꼭 구해 줄게!”

나는 그를 향해 힘차게 말했다. 마치 히어로처럼.

“……요.”

그와 나의 덩치나 무력 차이가 떠올라 말하다 조금 멈칫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정말 그를 구해 주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녹스……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네.”

그는 내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나는 조잘조잘, 오늘 콘윌의 시야를 공유하며 보았던 것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녹스가 가볍게 상황을 일축해 주었다.

“멍청하군요.”

“응! 그러니까 우리는 독에 당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고쳐 주면 돼…… 요.”

황태자는 원래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한 가지 감정에 매몰되면 인간은 멍청해지는 법이다.

황태자나 콘윌 역시 악역의 말로를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맞지 않는 권력이나 열등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눈이 멀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 * *

며칠 뒤. 공작성과 베이스 캠프를 연결하는 물자 보급로로 점검이 끝났다.

물자 보급로를 점검하던 녹스는 아스텔의 코치에 따라 제법 많은 스파이를 잡아냈다.

물론 모든 스파이가 전부 다 색출이 된 건 아니었지만,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그사이 전군은 출병 준비를 모두 마쳤다.

가장 먼저, 아나이스 공작과 함께 선발 기사단과 치료사들이 먼저 출병했다.

선발대에는 아나이스 공작 외에도 그간 제대로 본 적 없던 늑대 가문의 가주를 포함해 아스텔을 호위하는 마이어 경까지 합류했다.

후발대로는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로파 쉘린드 경과 리트로 경이 든든하게 뒤를 받치는 형국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그들의 목표는 제법 단순했다.

북부의 최극단, 해양 마수가 출몰하기로 유명한 드플라이 영해를 끝장낸 뒤, 마수굴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하츠펠트 절벽까지 토벌하는 것.

평소 하던 방식과 유사해서인지, 아나이스 가문의 맹수 기사들은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달렸다.

문제는 선발대에 포함된 장미 기사단 기사들의 분위기가 다소 침잠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기사들 중 하나인 브룬힐트는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리며 눈을 비볐다.

그는 열 살 때부터 기사의 종자 일을 하며 말을 타 왔다.

그러나 이렇게 축축 처지고, 말을 타는 게 불편한 감각은 꽤 오랜만이었다.

‘요즘 정신적으로도 이상하게 피로하고 묘하게 못생겨진 느낌이군.’

말을 타는 와중에도 오심이 울컥 밀려들 지경이었다.

그는 주변을 힐끗 보았다.

놀랍게도 브룬힐트 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가장 친밀한 가르텐 역시도 만성 피로를 호소했다. 그 모습에 브룬힐트는 생각했다.

‘베이스캠프에 짐을 풀고 한숨 잔 다음, 선발대에 포함된 치료사를 찾아가 봐야겠어.’

그럼 약이라도 줄 것이다. 그는 제 옆얼굴을 찌를 듯 바라보는 어떤 여자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한 채 뒤처져 말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1차 베이스캠프가 나타났다. 숲 사이에 조성된 거대한 벌판을 보던 그가 말에서 내려 제 몫으로 배당된 위치에 행장을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찾아온 어둡고 캄캄한 밤. 마저 의장을 푼 그는 문득 어떤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금발에 녹안을 한, 순하게 생긴 데다 새하얀 치료사복을 입은 여자.

‘혹시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다가오려다 자꾸만 멈칫했다. 그가 워낙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여자의 마음을 헤아려 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여독을 풀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비척거리던 그가 침낭을 풀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 잠들어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던 중, 그는 누군가 제 침낭 근처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찌익,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얼기설기 꿰맨 침낭이 뜯겼다.

“어라, 실수.”

그 여자가 그의 목덜미를 턱, 하고 눌렀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얼이 빠진 그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귓가에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헤…….”

……아니, 낄낄이 아니라 해맑은 미소에 가까웠다.

저 여자는 마녀인가?

불쑥 위협감이 들었으나 이미 그는 움직일 수 없었고, 그의 침낭은 이 여자의 손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브룬힐트는 키는 작았으나 잔근육이 발달한 몸을 지녔다. 그런데 저 작고 마른 여자가 어떻게 자신을 질질 끌고 간단 말인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그는 이미 누구도 모르는 새 깊고 깊은 숲 언저리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그는 여자가 자기의 귀에 대고 달콤하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많이 아프죠?”

나오지 않는 쉰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브룬힐트가 꺽꺽거리며 중얼거렸다.

“목…… 덜미를 무…… 식하게 쳤으니 당, 연히…….”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여자는 씩씩한 태도로 그의 침낭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그 여자가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주 칠흑같이 어두운 와중, 브룬힐트의 침낭이 젖혀졌다.

야외, 별빛이 가득한 공간.

그의 시야에 금발에 녹안을 한, 작달막한 여자가 상처 하나 없이 새하얀 손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며 호호, 웃었다.

“최대한 조심했는데!”

웃는 그녀를 보며, 침낭째로 굳어 버린 브룬힐트는 잔혹한 공포에 질렸다.

사람을 죽일 때 웃는 마수도 있나? 아무튼, 그런 게 틀림없어.

“기다려요.”

브룬힐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를 숭배하는 듯한 세 명의 허리 굽은 노인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음침한 시선을 그에게 두고 있었다. 그가 주변 분위기를 확인하는 사이 여자는 주머니를 뒤적이다 원하는 것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아, 이거 찾았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일단 입을 찢는 거.”

여자가 어느새 손에 쥔 나이프를 바투 움켜쥐었다. 그는 기사였기에 칼은 숱하게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순진한 표정으로 칼을 다루는 사람은 그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결박당한 그의 입가로 곧장 칼날을 들이밀었다.

“대체, 무슨…… 짓을…….”

그는 말끝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이 상황이 공포스러워 당장 실금할 뻔했기에, 방광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 입을 찢는 게 아니라 아주 약간 생채기를 내는 거예요.”

순진한 척하는 목소리였지만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무시무시한 납치범이다.

‘분명 잔혹한 흑마법사이거나, 인간으로 분장한 마수일 거다. 동료 기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그가 혼탁하게 풀린 동공을 하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형형한 시선의 브룬힐트를 보던 여자가 별생각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금발에 녹안.

금발에 녹안,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외모의 여자…….

이 모습은 분명히 어디서 본 바가 있었다.

누구지, 이 여자?

“저기, 저 나쁜 짓 하는 사람 아닌…….”

그 순간, 브룬힐트가 쿨럭거렸다. 이내 나이프가 닿은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어, 잘못됐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하게 중얼거렸다. 목면 장갑을 낀 손이 브룬힐트의 입가를 닦아 냈다. 브룬힐트는 끝없이 피를 토해 내면서도 저 여자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애써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세 노인에게서 자그마한 보석을 받아 들고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 하세요.”

입 안으로 꿀꺽, 고체 보석이 삼켜져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머릿속에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다, 당신…… 아, 스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저 여자의 이름이 아스텔이며, 공작 각하의 피후견인이라는 사실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 넣으면서!

* * *

“납치 성공!”

나는 기쁜 마음에 박수를 몇 번 쳤다. 베놈 삼 형제 중 첫째가 헤벌쭉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납치라니, 무슨 악당 같잖습니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나는 조심스럽게 브룬힐트의 이마에 난 땀을 꾹 눌러 닦아 주었다.

그사이, 베놈 삼 형제 중 둘째가 조심스럽게 나이프를 받아 들었다.

그는 브룬힐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 자체 개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약 감별용 시트지에 흡수시켰다.

“확실히 마물의 독이군요. 해양 생물 크라켄의 독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크라켄은 거대한 문어 괴물이자, 뿜어내는 먹물에 강력한 독이 들어 있기로 유명했다.

“상당히 위험한 독이네요.”

“일단은 단순히 크라켄의 독만은 아니고 이것저것 섞은 악질인데……. 임시 치료제 효과는 좀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을 종용했다.

그에게 실험적으로 만들어 낸 약물을 먼저 투여해 볼 생각이었다.

무언의 지시를 눈치챈 베놈 삼 형제가 그의 입 안에 시약을 줄줄 흘려 넣었다.

결과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입술에서 파르스름한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움켜 쥐었다 폈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몇 가지 없어요. 하지만…….”

나는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황태자는 인내심이 쉽게 바닥날 법한 다혈질에 열등감 덩어리였다.

“최대한 빨리, 확실한 치료제를 개발해 주세요. 그리고, 첫째분은 해슘의 새싹을 최대한 많이 채집해 주세요. 비밀리에.”

“해슘의 새싹이요?”

“네!”

“그건 치료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만.”

“네, 그렇죠.”

“치료제를 개발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언제 저들이 독을 변형해서 사용할지도 알 수 없으니, 변종 독에도 대처해야 하고요.”

나는 원작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치료제보다 시급한 문제예요. 절 믿고 따라 주세요.”

혹시나 나를 못 미더워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딱 펼치고 소리쳤다.

“저, 제가 여기 대장이니까요!”

아무래도 장년층에, 할아버지에 가까운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 그런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대장님의 명을 따라야지요.”

셋은 나란히 심각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 조금 놀림당한 것 같기도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골똘한 표정으로 있던 첫째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첫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첫째 베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나를 바라보며 씩 웃을 뿐이었다.

“해슘의 새싹부터 채집해 오겠습니다.”

‘제대로 통했어!’

내가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앞으로 모으자, 그들이 귀엽다는 듯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 * *

그 후로, 일주일이 꼬박 흘렀다.

선발대는 마침내, 실제 마물 전쟁이 벌어질 장소인 드플라이 영해에 다다랐다.

북부의 최극단인 데다 바닷가여서인지 몹시 쌀쌀했다. 날씨가 이러하니 빨리 해치우는 게 좋을 테지만, 바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수들이 얼어붙은 바닷속에 숨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쟁에 들어가기 전, 치료제를 개발하고 독에 당한 환자들을 선별해 투여하는 일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브룬힐트를 포함해 매일 밤마다 기사들을 납치해서 치료하는 게 내 일과가 되었다.

다행히 대부분 중독 초기라 그런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만성 피로도, 파르스름한 입술 색도 빠르게 개선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깊고도 깊은 밤, 독약학 삼 형제는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첫째는 내 명령대로 해슘 새싹을 채집하러 갔고, 다른 이들은 치료제를 순조롭게 개발해 나갔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이제 슬슬 콘윌과 황태자에게 떡밥을 뿌릴 때가 됐지.’

첩자들도 하나둘 처리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은 지금쯤 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터였다.

‘이제 슬슬 사지로 몰 때가 왔어.’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 수도에서 가장 번화한 아르벤트 광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티팩트 감정사인 월렛과 녹스가 협업해서 만들어 준 이동용 마도구 덕분에 막사를 빠져나온 지 몇 초 만에 수도로 향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거지 같은 곳에 떨어지다니!”

……정확한 좌표를 찍지 못해서 광장 옆 수풀에 와당탕,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나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로브를 깊게 눌러쓴 뒤 광장 안쪽으로 몰래 들어섰다.

이내 낮 동안의 활기가 모두 사라진 어두컴컴한 광장이 보였다.

대리석이 잘 깔린 아르벤트 광장은 산 하나를 깎고 그 위에 만든 공간이라 그런지 주변에 숲을 하나 끼고 있었다.

숲과의 경계선에 벽돌담을 둥글게 두르고, 담장 주변으로 상인들의 가판대가 줄줄이 늘어서 다소 갑갑한 감이 있었다.

나는 광장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꽤…… 전단지가 많네.”

시계탑 외벽과 벽돌담에는 광장 내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붙인 홍보용 전단지가 잔뜩이었다.

‘이거 다 떼어 내고, 내 걸로 다시 붙여야지.’

오늘의 임무는 하나.

광장을 순찰하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품에 꼭 껴안은 이 전단지 수백 장을 꼼꼼히 붙이는 것!

물론, 혼자서 하기는 힘드니 월렛이 준 마도구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나는 한 손에는 접착용 마도구를, 다른 한 손에는 전단지를 움켜쥐었다.

엄지로 마도구의 표면에 위치한 스위치를 꾹 누른 다음, 전단지를 표창 날리듯 하늘로 휙휙 날린다.

그러면 전단지가 알아서 외벽에 착착 붙어 주었다.

“이래서 인간은 도구를 쓰는 동물이라는 거야!”

마도구를 사용했을 뿐인데 불과 오 분 만에 전단지가 벽면에 꼼꼼하게 잘 붙었다.

‘미션 컴플리트.’

나는 몹시도 흡족하게 웃으며 몸을 휙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이, 거기.”

눈앞에 희뿌연 빛이 번졌다.

손에 등잔을 든 경비대가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쳐야 하나?’

당장 이동용 마도구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도망친다면 의심을 받을 게 뻔하니까.

‘적어도 내일까지는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돼.’

그렇다면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무척이나 긴장되는 순간. 나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목소리 변조용 마도구를 꾹 눌렀다.

목소리 변조용 마도구에는 다양한 목소리 버전이 있었다.

“넵. 무슨 일이시죠?”

……이 익숙한 목소리는!

‘황태자 목소리잖아!’

순간 뇌리에 이 마도구를 건네주던 월렛이 후후, 웃었던 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건 활용할 수 있도록 뭔가 다양한 장치를 해 놨다더니……!

“뭐야? 신문팔이인가? 목소리가 왜 그따구야?”

한낱 경비대가 어떻게 황태자의 목소리를 알겠는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제 목소리가 조금 비열하기는 하죠.”

“비열하다 뿐이야? 완전 맛 갔는데.”

이 목소리가 황태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만, 속이 제법 시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비병을 향해 굽실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요, 경비병 나리.”

황태자 자식, 목소리가 간신배에 딱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경비병이 턱을 치켜들며 일갈했다.

“네 꼴이 수상하잖아. 그 품에 안은 건 뭐야?”

경비대의 눈에도, 조심스럽게 홍보물을 꼭 끌어안은 내 동태가 퍽 수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그 품에 안은 게 뭐지? 봐 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민했다.

그러자 그가 무언가 촉이 왔다는 표정으로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 내!”

강압적인 표정을 한 경비병이 내 품 안의 전단지를 강탈하듯 빼앗아 갔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이건…….”

전단지를 들고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경비병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네, 맞아요. 그냥 평범한 과일 가게 홍보 전단지예요.”

내 말에 경비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쩍은 점이 하등 보이지 않는 평범한 과일 가게 홍보물이 맞았으니까.

게다가 하단에는 확실히 관청의 허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실제 전단지를 붙이는 꼬맹이들은 인적 드문 야심한 새벽에 움직이곤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경비병이 턱짓했다.

“그래, 빨리 붙이고 가라.”

“네, 다 붙였어요! 얼른 갈게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급하게 광장의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경비병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을 죽였다.

‘혹시 모르니 일단 빨리 떠나야 해.’

새벽 세 시쯤 되어서인지, 취객들도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

긴 한숨을 내쉬던 나는 로브를 다시 깊이 눌러썼다.

‘우선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이동하면 돼.’

나는 아르벤트 광장 뒤편, 을씨년스럽고 더러운 뒷골목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이어서 내가 이동용 마도구를 다시 움켜잡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누군가의 손이 마도구를 잡은 내 손을 가볍게 감쌌다.

“찾았다.”

나는 급하게 마도구를 흔들었지만, 이미 그가 무력화시킨 뒤였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가, 갑자기 누구지?’

인기척을 죽이고 곁에 다가올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다.

당황한 내가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곧 두툼한 손이 등 뒤에서 나를 가볍게 받듯이 안았다.

정체 모를 자의 판판한 몸에 등을 기대자마자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맴돌았다.

“왜 여기 계십니까.”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익숙했다.

한 번 듣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저음은…….

“녹스?”

부르자마자 그가 내 몸을 빙글 돌렸다.

내 얼굴을 마주한 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잡동사니를 훔치다 걸린 좀도둑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위급할 때 도망치라 만들어 드린 것인데, 다르게 사용하셨군요.”

‘그냥, 빨리 처리할 일이라 잠깐 나왔던 건데!’

조금 머쓱해진 나는 그의 미간을 꾹 눌러 주며 말했다.

“저, 위험한 일은 안 했어요.”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수도는 위험합니다.”

“음…….”

“공기도 질적으로 떨어지고, 어둠을 틈타 습격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닥에는 쥐새끼가 기어 다닐 수도 있습니다.”

녹스가 이렇게 생각이 많았나.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게 되면서, 걱정거리가 많아진 모양이다.

나는 그의 근심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두른 그의 손을 콕, 눌렀다.

“다 했으니까, 이제 가도 돼요!”

바로 그때였다.

“거기.”

낮은 목소리와 함께, 캄캄한 어둠 속에 여린 빛이 비쳤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희붐한 빛을 마주 보았다.

“뭐야, 이 야밤에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풍기 문란 행위를 벌이면…….”

등잔을 한 손에 든 경비병 둘이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 색을 슬쩍 보니, 아까 보았던 경비병과는 또 다른 자들이었다.

본디 광장의 경비병들은 근무 태만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깊숙한 뒷골목까지 살피다니…….

최근 들어 황제가 피습당하면서 제도 내 치안을 염려해 경비가 강화된 모양이었다.

‘녹스의 얼굴은 기사에도 제법 실렸는데, 지금 맨얼굴이야. 얼굴을 들키면 안 돼!’

몹시 당황한 나는 한 손으로 녹스의 얼굴을 급히 가렸다.

그러나 녹스의 태도는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그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나를 품에 더욱 깊숙이,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러니까…….”

“쉿.”

그는 내 손을 다정하게 떼어 내면서, 내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녹스가 경비대 따위에게 들킬 정도로 안일하게 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와 나는 여전히 끌어안은 채로 조금 더 짙은 어둠이 녹아내린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어이. 거기! 풍기문란이냐 물었잖아!”

“아아, 좀 내버려 둬.”

열정적인 단속반처럼 구는 경비병과 달리, 곁에 선 경비병은 심드렁했다.

“원래 밤의 골목은 연인들이 숨어드는 법이잖나.”

“아니! 연인인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감시를 극대화하라 하였어요.”

“가까이 가 보든가.”

“네, 연인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굳은 나를 보던 녹스가 다정함을 듬뿍 담아 물었다.

“그럼 이제, 저들의 말대로 할까요?”

“그게 무슨…….”

“조금 더, 연인답게 굴어 보자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온 녹스의 말은,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눈빛은…….

내가 눈을 질끈 감게 만들 정도로 농밀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만약 연인인 척 굴 거라면.

아니, 우리는 연인이 맞으니까.

“있잖아.”

나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어정쩡하게 멈춰 있던 손을 그의 목에 감으며 반쯤은 도발적으로 물었다.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해도 돼?”

물론, 살짝 까치발을 들며 소심하게 다음 말을 덧붙였지만.

“……요?”

……키스 직전에, 어쨌거나 정중한 존댓말은 필수다.

상대방의 의사를 최우선적으로 존중해 주는 거지!

다행히 녹스는 가만히 멈춘 채 눈을 내리감았다.

“물론.”

그늘을 드리우는 그의 촘촘한 속눈썹을 보면서, 나는 그의 목을 두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야심차게 용기를 낸 거였는데, 막상 그의 입가가 올라간 걸 보자 왠지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뭐야.”

내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입술이 맞부딪치기 몇 초 전.

“감히 우리 말을 무시하고 앞에서 키, 키스를……?”

경비병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그가 허리에 찬 칼이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났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경비병들의 대화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입맞춤을 시작한 건 나였지만 상황을 주도하는 건 녹스였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별수 없이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가 입천장을 두드리듯 닿아 왔다.

서로의 타액을 섞고, 입속을 부드럽게 훑는 느낌.

발끝이 곱아들고 감은 눈에 더 힘이 들어갔다.

왜 처음 키스를 시작했는지도, 주변의 소음조차도 모두 잊은 채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될 때까지, 우리는 이 행위에만 몰두했다.

“저 눈먼 연인들 때문에 이 얼빠진 신입 친구가 충격받았군, 그래.”

“참, 나. 아니…….”

“연인들은 원래 광장에 잘 숨어들어 애정 행각을 벌이지. 설마 별일이나 있겠나. 아무것도 없었잖아?”

“뭐, 그럼.”

“빨리 들어가서 포커 내기나 하자고.”

한참 떠들던 그들이 다른 쪽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거리는 발걸음이 멀어지고 얼마 후, 나는 그에게서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질척한 시선이 느껴져서, 급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실책이었다.

내 이에 깨물린 그의 입술이 부푼 게 보였으니까.

“입술이 부었군요.”

녹스는 내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엄지로 덧그리듯 매만졌다.

살갗과 살갗이 닿는 느낌이 아슬아슬했다.

나는 숨을 얕게 토해 내며 가만히 그의 접촉을 받았다.

“그런…….”

그의 손가락 끝에 내 숨결이 닿을 때마다 아찔한 이유는, 그의 시선에 명백한 성애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녹스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의 눈빛이 순간 무서울 정도로 침잠했다.

“어떤 건데?”

녹스가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비밀입니다.”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녹스 역시 나를 따라 눈매를 부드럽게 접어 웃었다.

“할 말은 끝났습니다.”

“할 말은?”

그렇다면 뭔가 남았다는 건가. 나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녹스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내게 입을 맞췄다.

두 번째 키스는 좀 더 깊고 숨이 차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길었다.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허리와 어깨를 움켜쥔 손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해도 반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연인’ 같은 키스였으니까.

그의 눈을 마주 보면서, 어쩌면, 오늘 밤은 조금 길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르벤트 광장에는 평소처럼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온갖 물건들이 널려 있는 가판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이어지는 시끄러운 호객 행위.

그 뒤쪽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각종 홍보물들까지.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벽에 붙은 평범한 전단지 따위에는 관심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 흐르고, 정오가 되었다.

시계탑의 종소리가 뎅, 뎅 소리를 내며 울리자마자 상황은 급변했다.

툭.

광장 한쪽의 가판대에서 과일을 팔던 여자 하나가 의아한 낯으로 분수대와 시계탑을 둘러싼 견고한 벽을, 정확히 말하자면 벽에 붙은 전단지 쪽을 가리켰다.

“저, 저게 뭐지?”

놀란 여자 곁에서 심드렁한 얼굴로 광주리에 과일을 담던 다른 여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뭔데? 왜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

검지 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가 사과를 툭 떨어트렸다.

분명 저 벽면에는 본디 잡다한 홍보물들이 붙어 있었다.

잡화 상점 홍보, 건어물 가게 홍보, 하다못해 신문이나 잃어버린 물건 홍보 등…….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전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천하의 패륜아인 황태자가 황제를 죽이려 한다!]

밤하늘보다도 더 새까만 배경에 빨간색 글씨로 커다랗게 쓰여 있는 전단, 수백여 장이었다.

“이게 무슨……!”

광주리를 든 여인만이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을 떴다.

잠깐의 침묵 끝에, 모두가 입을 열었다.

“저게 뭐야?”

“패륜아인 황태자가 황제를 죽이려 한다고?”

“이게, 무슨…….”

“설마, 황제 폐하 피습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가?”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풍경만 펼쳐지던 광장에 새로운 가십거리가 던져졌다.

광장 안은 기묘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 전단지를 만져 보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소란을 감지하고 뒤늦게 뛰쳐나온 광장의 경비병들이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이보시오들, 다들 불경한 것에서 손 떼시오!”

경비병들이 학을 떼고 벽면에 부착된 전단지를 떨어뜨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어떤 접착 마법을 쓴 건지, 인간의 손으로는 떨어지지를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이게,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모든 광경을, 아르벤트 광장에 있던 모든 평민들이, 그리고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귀족들까지 똑똑히 목격했다.

물론 ‘황태자가 황제를 죽이려 한다’라는 것은, 전혀 근거 따위는 없는 망상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패륜아인지 아닌지 모를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라니, 진위를 따지는 자체로 몹시 자극적인 이슈였다.

대중들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일에 반응하는 법이니까.

바로 그 시각부터, 황태자에 대한 의심과 의문이 평민들을 중심으로 은밀히 퍼져 나갔다.

* * *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어떤 얘기요?”

“글쎄, 사실은 황태자 전하가 패륜아라는 소문이 났대요!”

정오에 있었던 일이 오후 여섯 시에, 마물 전쟁터 속 치료 막사 안까지 소문이 퍼지다니.

나는 흡족한 웃음을 애써 삼키며 아쉬운 낯을 해 보였다.

“어머, 설마요.”

‘역시 효과적인 광고 전략이야. 한꺼번에 전단지가 휙, 하고 바뀌는 마법이라니.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걸!’

나는 속으로 픽 웃음을 머금었다.

마물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인 이곳에서조차 저런 소문이 퍼지고 있을 정도면, 수도에 파란은 어마어마하리라.

‘황태자 궁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한데.’

궁금하면 엿보면 그만이다.

나는 베드에 누운 환자의 생채기 위에 거즈를 꼼꼼히 붙여 준 뒤, 막사 안쪽에 마련된 방에 들어섰다.

‘좋아, 여긴 아무도 없고.’

곧바로 주머니 안쪽에 넣어 둔 나비 브로치를 손에 꾹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슬슬, 그들의 형체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를 죽인 범인이 황태자라는 내용의 투서가 붙자, 황태자 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태자는 제 측근들을 원탁으로 소환했다.

“내가 폐하를 죽였다, 그리 괴소문이 났다고?”

“예.”

“무시하면 그만 아닌가?”

“제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콘윌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가 뷔에트리 가문을 멸문시킨 것 역시 풍문의 힘이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내가 그 역적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하고 있단 건가?”

자존심 강한 황태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자마자, 원탁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황태자와 함께 모여 앉은 흑마법사까지 쓱 둘러본 콘윌이 대꾸했다.

“어차피 엮어서 죽이면 그만인 놈들입니다.”

“그렇지, 문젠 따로 있잖나.”

황태자가 흑마법사 쪽을 향해 턱짓했다.

여자 흑마법사는 고개를 까딱한 뒤 정갈한 어조로 말했다.

“마물 토벌대에 심어 둔 첩자들이 하나둘 처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소식이 닿질 않아요.”

황태자가 시가를 태우며 거듭 인상을 썼다.

“되는 일이 없군, 제기랄!”

하지만 초조한 황태자와는 달리 콘윌 공작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돕는 모양입니다.”

콘윌이 몸을 일으켜 밀실의 문을 열었다.

그 문 사이로 얼굴 한쪽이 반쯤 무너져 내린 채,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작달막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제가 그 짐승 새끼에게 당한 그날, 이놈이 저의 저택에서 카시언 그레이를 목격했다는군요. 기억을 읽어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콘윌의 표정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시야에 들어온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분명 분노한 것이다.

“그 계집애와 카시언 그레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는 겁니다.”

황태자가 턱을 괸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놈도 뷔에트리 백작가인가?”

콘윌이 광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정답!”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마구 헤집은 콘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카시언 그레이와 그 계집애를 엮어 처리한 다음, 공작을 죽이면 될 것 같습니다.”

……오, 우리 셋을 일망타진하겠다고?

나는 흥미진진한 마음을 안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슬슬, 계획을 들어 보지.”

중요한 계획이 유출되고 있었다. 마침내, 손에 땀이 쥐어졌다.

“제일 먼저, 토벌대에 숨어든 첩자들을 이용해 카시언 그레이를 죽일 겁니다.”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점에, 슬슬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제한 시간, 오 분이 끝나 가는 걸까.

긴장감에 가슴 한편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나는 서서히 흐려져 가는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며, 최대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희뿌예지는 시선 속,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죽일 생각이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어지럽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내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저…….”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 * *

같은 날 해가 저무는 시각.

콘윌의 명을 받아 마물 토벌대에 첩자로 들어온 흑마법사 둘이 인적이 드문 후방의 치료 막사 근처에 모였다.

그들은 콘윌이 제작한 결계용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게끔 주변에 간편한 결계가 쳐졌다.

치료사복을 입은 여자, 줄리가 입을 열었다.

“불호령이 떨어졌어. 일단, 주요 인물부터 죽이라고 하더군.”

기사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직설적으로 대꾸했다.

“우리 둘이 할 수 있겠어? 다른 녀석들도 하나하나 죽어 나가고 있는 판에!”

손톱을 질겅질겅 깨물던 줄리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스텔, 그 여자 짓이야.”

토벌대에 숨어든 첩자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고, 기사단의 전력은 독에 의해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래, 맞아.”

그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서로를 응시했다. 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 치명독은 준비됐어. 마수를 자극할 만한 미끼는?”

“이미 준비했다.”

“위험한 중요 인물부터 먼저 제거하지. 그다음, 마수를 예상보다 빨리 깨우는 거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친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 영상구를 통해 전해져 온 콘윌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 일단 죽이기부터 하지.’

‘알겠습니다.’

‘지금 마법으로 보내는 치명독은 극독 중의 극독이다.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고, 곧장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야.’

‘예.’

‘설령 독약을 천재적으로 다루는 자라 할지언정 이 극독의 치료제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신이 온다 한들, 못 만듭니까?’

‘신이 온다 한들. 내가 보증하지. 치료제는 없어. 일단 독을 먹고 나면, 끝장이야. 신의 애비가 와도 뒈질 거다.’

콘윌이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 그런 것이다.

“위험인물은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 치료사 아스텔, 기사 카시언 그레이, 아나이스 공작. 이렇게 넷 정도로 추리지. 마이어 경과 리트로 경도 포함하고.”

“마수를 깨우는 방법은 알겠어. 하지만, 극독은 어떻게 먹이지?”

하급 기사와 치료사들은 공작과는 마주칠 일도 없었다.

마이어나 리트로는 무서울 정도로 경계심이 높았으며, 아스텔 역시 상당히 겁이 많고 꼼꼼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극독을 직접적으로 먹일 방법을 물색하려던 도중이었다.

“뭐야, 거기서 뭐 하지?”

언제 결계 마법의 효력이 다한 건지 그들 앞에 ‘수도의 꽃’이라는 명성으로 이름난 카시언 그레이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별일 아니에요. 기사님이 아프다고 하셔서요.”

줄리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치료사와 기사가 막사 근처에서 만나는 건 그리 의뭉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입 닥치고 일하지, 그래.”

그러나 카시언 그레이의 저 겁박하는 듯한 표정이 몹시 소슬했다.

그와 같은 막사를 쓰는 탓에 그의 지랄 맞은 성격을 익히 아는 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인 채로 먼저 도망쳤다.

“아, 예. 그럼 전 이만. 줄리, 안녕!”

“잘 가.”

반면, 줄리는 카시언의 얼굴을 보고 그의 평판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여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꾸며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시언 그레이 경.”

“……뭐지?”

다소 뻣뻣한 태도에 건조한 표정이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무척 많은 남자 정도라면 충분히 유혹해 낼 자신이 있었다.

줄리는 요염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도발적으로 물었다.

“내일 있을 드플라이 영해전 직전에, 잠시 만나 주실래요?”

내일, 드플라이 바다의 얼음을 깨고 마수를 깨워 내기 전에 만나자는 의미였다. 카시언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픽, 웃었다.

“뭐야, 그건. 데이트 신청?”

‘바로 데이트 신청이란 걸 확신하는군. 역시나.’

수도의 꽃이지만, 심히 경박하다더니.

아무래도 치마만 두르면 죄다 여자로 본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제법 외모에 자신이 있는 그녀는 눈을 휘어 웃었다.

“네, 맞아요. 데이트 신청.”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 한쪽을 붉히며 그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에스코트 해 달라는 의미였다.

“별론데.”

카시언이 상큼하게 웃었다. 예의 ‘수도의 꽃’다운 미소인 데다 껄렁거리는 말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미인계에 전혀 넘어가지 않은 것처럼 그 어투만큼은 단호했다. 줄리는 얼떨떨하게 굳은 채 내밀었던 손을 바로 하고 반문했다.

“뭐라고요?”

“그쪽, 내 취향 아니라고.”

카시언이 얼빠진 표정을 한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갯짓했다.

“내가 묻지.”

“뭘…….”

“마물 전쟁에 나선 치료사로서 사명감 따윈 없는 건가?”

치료사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단단히 꼈다. 미인계가 텄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쁜 것도 사실이니까. 카시언의 녹안을 응시하는 여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레이디에게 무슨 모독입니까? 그레이 경.”

“레이디라. 그래, 그쪽은 레이디지. 하지만 말이야.”

카시언이 픽 웃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 그대는 설마…….”

내내 능글거리며 웃던 카시언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그가 그녀의 턱 끝을 잡아채며 싸늘하게 물었다.

“전쟁이 아니라, 다른 데에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숨이 턱 막혔다. 그녀 역시 첩자로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카시언은 제국에 이름을 널리 알린 기사였다.

대놓고 뿌린 검사의 살기에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살기에 몸을 파들파들 떤 그녀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건…….”

카시언은 그녀의 표정을 응시하며 다시금 분위기를 바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왜 허를 찔린 사람처럼 굴어?”

살기에 압도되었던 여자가 애써 침착하게 말을 갈무리했다. 일단 자신은 카시언을 마음에 들어 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그러니까…….

“……예, 허를 찔렸군요. 수도의 꽃이라는 명성에 홀렸습니다. 공사 구분을 못 해 미안하군요.”

“오, 정말 나한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는 건가.”

카시언이 조롱하듯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절대 그럴 리 없는데, 그녀의 심중을 간파한 듯한,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닥치고 일이나 하지.”

그때 치료사, 아스텔이 멀리서 끙끙거리며 우물의 물을 길어 오는 게 보였다. 카시언은 그녀의 턱 끝을 허공에 버리듯 던졌다.

“네가 일을 안 하니까 한 명이 다 하는 것 같잖아?”

분명 그건 아스텔을 말하는 것일 테다. 여자의 표정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저 여자, 아스텔은 가만히만 있어도 모두의 관심을 받는다. 윗선의 명령이 없었다 한들 따로 손을 쓰고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얄미운 존재였다.

‘일단, 카시언 그레이부터 죽여야 돼.’

오늘의 일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카시언 그레이에게 극독을 어떻게 투여할지를 강구하면서, 그녀는 이를 으득 갈았다.

* * *

줄리가 카시언에게 복수할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마수의 분노를 유발하는 약을 해변에 뿌렸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다.

그 뒤로 오래 지나지 않은 오후 한낮, 기사들이 오수를 즐길 때쯤이 되었다.

거대한 마수, 그리핀이 언 바다 위를 핑글거리며 끊임없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핀은 마치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끼이이익!”

“까르르! 깔!”

그리핀의 출몰!

심지어 바다 중간의 얼음 섬에 잠든 척 숨어 있던 인어, 세이렌도 시끄럽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캬아아!”

세이렌의 비명에 가까운 노래는 모든 기사들의 사기와 의욕을 꺾는 주범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간 준비했던 대로, 모두 잘 훈련된 말 위에 올라타 진군 명령에 대기했다.

마침내 공작의 우측에 있던 리트로 경이 목청을 크게 높여 소리쳤다.

“전군, 진군하라!”

그 말을 받은 기사들이 커다란 함성과 함께, 칼을 뽑아 들었다.

“와아아아-!”

선발 기사들이 마수들이 숨은 얼음 바다 바로 앞까지 달려갔다.

그들은 그리핀과 세이렌, 촉수처럼 생긴 새끼 크라켄을 거침없이 베어 냈다.

물론 흥분한 그리핀에게 투구를 빼앗기는 등 온갖 악재가 이어졌으나…….

“잡아!”

챙! 채챙!

카시언과 리트로는 공작의 양옆에 서서, 그들의 발톱을 발 빠르게 쳐내고 그리핀의 날개까지 꺾어 냈다.

그리고 아나이스 공작이 가장 커다란 그리핀을 여유롭게 상대했다.

마치 가지고 노는 듯한 기세였다.

대장 그리핀을 수세로 몰아내는, 마치 검무를 추는 것 같은 유려한 검선!

잠깐 홀린 듯 공작을 보던 리트로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진군하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온갖 마물들과 싸워 온 보람이 넘치게도 기사단 측은 순조롭게 승기를 잡아 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기사들이 전쟁하는 장소에서 불과 십여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장소.

기사들을 따라 도착한 치료사들은 임시 막사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중무장한 후발 기사들이 가득한 임시 막사 근처에 선 줄리는 상황을 관찰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젠장! 이기고 있다니…… 마물을 다시 흥분시켜야 하나?’

불안정한 태도로 몸을 움직이던 그녀의 귓가에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 불안해 보이네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스텔이었다.

찔리는 것이 많은 줄리는 흠칫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막사 옆에 있는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앉으며 웅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직접적인 전투를 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아하, 수도에서 차출된 치료사라고 하셨죠?”

아스텔이 그녀의 곁에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지금 이 여자에게 주머니 속 독약을 묻히거나 먹인다면 어떨까.

순진해 빠진 저 얼굴이 나자빠지겠지.

줄리는 제법 고민했으나 그 곁에 곰 같은 기사로 유명한 마이어 경을 포함해 수많은 기사들이 존재했다.

‘지금 여기서 죽일 수는 없겠지. 게다가 이 여자는 콘윌 님이 직접 죽인다고 하셨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줄리는 어쩔 수 없이 아스텔에게 장단을 맞췄다.

“……네, 수도에서 차출된 치료사예요.”

아스텔은 활짝 웃으며 해안가를 검지 끝으로 가리켰다.

“너무 불안해하진 마세요. 저희 기사단이 승리했으니까!”

아스텔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그리핀과 세이렌, 새끼 크라켄 등은 모두 후퇴했다.

기사들의 환호 소리가 귓가에 커다랗게 메아리쳤다.

“와아아아!”

줄리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기쁘네요.”

아스텔은 손뼉을 치며 맑게 웃었다.

“그렇죠? 저기 기사님들이 오고 계세요!”

아스텔의 말이 맞았다.

찰나의 값진 승리를 얻은 기사들 중 일부가 막사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나이스 공작과 리트로 경, 카시언 경의 말이 가장 빨랐다.

아스텔은 줄리에게 가볍게 고갯짓한 뒤 팔랑거리며 막사 앞으로 향했다.

모두 앞으로도 마물 따위는 금세 찢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듯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번 작전으로도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이지 못하면, 그때 널 폐기 처분할 거다.’

서늘한 콘윌의 경고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카시언 그레이를 먼저 죽이는 수밖에.’

입술을 꾹 깨문 줄리는 전투를 일단락시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카시언을 결연하게 응시했다.

카시언은 곧바로 아스텔에게 달라붙은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스텔 님, 괜찮으십니까!”

“아스텔.”

“……왜 여기까지 나와 계셨습니까!”

카시언은 아스텔에게 더 접근하지 못한 채 그녀를 오매불망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야.’

이를 악문 줄리는 흡수력이 없는 특수 소재의 장갑을 손에 가볍게 꼈다.

그리고 주머니 안에서 자그마한 독약을 꺼내 든 뒤, 장갑에 덜어 냈다.

‘이렇게 된 이상, 카시언 그레이라도 빠르게 처리해야 해.’

주변을 슬쩍 둘러본 그녀는 나무 둥치에서 몸을 일으켜 카시언 쪽으로 다가갔다.

“카시언 경.”

그는 아스텔을 보던 애틋한 눈빛을 단번에 바꾼 뒤 고개를 까딱했다.

“무슨.”

불량한 태도에 껄렁거리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줄리는 자연스러워 보이려 노력하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니라고 거듭, 말씀드렸을 텐데.”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게 해 주세요.”

장갑을 낀 줄리의 손이 카시언의 맨 살갗에 빠르게 맞닿았다.

카시언의 손을 잡은 그녀가 수줍은 척 눈을 내리깔았다.

“어이가 없군.”

그가 곧바로 거칠게 손을 밀쳐 냈다. 그러나 그 냉랭한 태도는 당장 알 바가 아니었다.

독이 묻은 장갑과, 카시언의 맨손이 스치고 말았으니까!

‘이렇게 쉽게 닿게 될 줄이야!’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 앞니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가 수상하긴 하지만.’

분명, 카시언의 맨손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0.1g만 들어가도 죽는다는 극독이 카시언 그레이의 왼손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보랏빛 반점을 만들어 냈다.

‘콘윌 님의 말씀대로, 딱 극독에 중독된 자의 증상이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이미 저 몸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카시언은 제 몸에 독이 흡수된 것도 모르고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기분 더럽군.”

평소의 능글거림 따윈 전혀 없는 무뚝뚝한 표정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됐어, 오 분 안에 약효가 돌 거야.’

입 안 같은 점막 접촉은 아니지만, 살갗 접촉만으로도 충분히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양 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몸이 흔들거리고, 곧 시야가 흐트러질 것이다.

하지만 카시언 그레이는 빳빳한 태도를 고수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볼일 다 봤으면 꺼져.”

일그러진 카시언의 표정을 보자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통쾌했다. 저 가시 돋친 기사의 기세가 곧 꺾일 테니까.

“그럼, 이만. 나중에 오늘 일을 후회하지 마세요?”

잘생기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소리 질러 힘껏 웃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채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그날 오후 기사들이 다시 해안가로 달려나가는 모양인지,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줄리는 멋진 이벤트를 지켜보기 위해,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가 기다리던 소식이 빠르게 도착했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 위중하다!”

리트로 경의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머지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던 줄리는 급히 막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막사 주변은 벌써 발을 동동 구르는 기사들,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는 치료사들로 반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줄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며 안타까워하는 치료사 무리에 합류했다. 이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카시언을 받아 안는 리트로 경의 모습이 보였다. 카시언의 새하얘진 낯빛을 보아하니, 예상이 제대로 적중한 것 같았다.

‘계획대로군.’

살짝 떨어진 곳에서는 그리핀 몇 마리의 목을 그은 아나이스 공작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로 쓰러지는 카시언을 응시했다.

‘카시언 그레이가 다쳤으니, 퇴각 명령을 내리겠지!’

줄리는 손에 땀을 쥔 채로 망원경을 응시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거듭 무어라고 속삭였다. 곧이어 뿔피리 부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전군, 퇴각하라!”

하긴, 카시언의 신병 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줄리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카시언이 의식을 잃은 채 온몸을 쭉 늘어뜨리고 있었다.

최초로 전군이 퇴각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이끄는 마물 전쟁.

그 첫 번째 패배였다.

* * *

[황제 폐하 피습 사건 이후 뒤이은 비보……. 수도의 꽃, 저물다.]

[마물 전쟁, 최초의 패배가 점쳐지다.]

마물 전쟁의 패배와 카시언 그레이가 위중하다는 소식은 수도까지 전달되었다. 그날 오후, 모든 수도 거리는 자발적인 추도의 물결로 일렁였다.

물론 카시언이 죽지는 않았기에 ‘추도’라는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기는 하나, 수도의 분위기만큼은 거대한 추도회를 방불케 했다. 귀족가의 레이디들은 어깨 앞쪽에 희고 검은 꽃 모양의 코르사주를 달고 상복을 입은 채로 가두 행렬에 가담했다.

한편 그런 광경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 카시언 그레이를 고까워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까만 옷을 입고 애도 행렬에 참여한 여자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무슨, 여편네들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리고 그들은 말 그대로 온갖 혐오가 담긴 시선과…….

“닥쳐!”

“당장 꺼지지 않으면 짓밟아 주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때때로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다 한들, 평소 카시언을 흠모했던 레이디들과 그의 미담을 들어 온 평민 여성들은 꿋꿋했다. 그들은 그저 카시언이 깨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기도했다. 평범한 가정집의 저녁 기도 시간에조차 말이다.

“수도의 꽃이 저물지 않도록, 모두 기도합시다.”

“아니, 황제 폐하의 비보에도 눈 깜빡하지 않던 여편네가!”

“카시언 경은 잘생겼어! 당신처럼 배불뚝이도 아니구먼!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잡놈이나 잡아가시지 않고!”

그렇게 카시언의 위기 상황은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수도의 부인 있는 사내들이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으로, 나서 봤자 바가지나 긁히는 형국이었다.

여성들은 모이기만 하면 카시언의 이야기를 했다.

특히 설득력 있는 음모론이 수도 없이 많이 제기되었다.

“카시언 경의 잘생긴 얼굴을 시기 질투한 인간형 마수의 짓은 아닐까?”

“그 마수놈이 여편네든 남편네든, 죄다 찢어서 마물의 배 속에다가 콱! 집어넣어 줄 겁니다.”

삽시간에 분노가 일렁였다.

황제의 시해 사건 때 흑주술로 인해 영혼 없이 움직이던 사람들과는 다른, 엄청난 힘이 있는 분노였다.

그날, 선술집은 여성들로 장사를 이뤘다.

그들은 잘생긴 데다 몸까지 좋은, 심지어 매너도 좋아 미담이 넘치는 기사를 앗아 간 이 더럽고 쌍스러운 세상을 참을 수 없다 하소연했다.

그날 이후 어린 아카데미 학생들조차도 기사단에 자원하기로 마음먹는, 파란이 일어났다.

물론 애도의 물결이 일어난 만큼, 한편으로 카시언의 상황을 고소해하는 자들도 많았다.

특히 아나이스 공작을 도외시하는 황태자 쪽이 그러했다.

카시언의 중태와 더불어 마물 전쟁에서 퇴각하기까지 했다는 소식까지!

황태자 일행은 간만의 단비 같은 희소식에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하늘이 나를 돕는 듯싶군.”

“예, 그렇습니다. 최초로 드플라이 영해에서 퇴각했답니다!”

황태자는 샴페인 글라스에 흰 거품이 일게끔 가볍게 흔들었다.

한결 더 흡족해 보이는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그 짐승 새끼에게, 패퇴는 최초 아닌가.”

곁에 있던 흑마법사가 황태자의 비위를 맞추듯 얍살스럽게 말했다.

“예, 그 짐승 새끼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답니다. 원래도 카시언 그레이와 절친했으니,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의 관계는 숱한 오해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 지금은 서로 집 숟가락 개수까지도 아는 절친한 사이로 와전된 상태였다.

“측근도 없는 놈이, 몇 안 되는 측근 중 하날 잃었으니 제법 고통스럽겠지.”

그 말에 한결 더 기분이 좋아진 황태자는 입가가 찢어져라 크게 미소 지었다.

“그리 힘을 빼 두었으니, 슬슬 그 짐승 새끼도 죽여 놓지.”

이때다 싶었는지 콘윌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동시에 아스텔, 그 계집애도 같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아, 그 계집애가 있었지?”

별 관심도 감흥도 없는 낯으로, 황태자가 가볍게 턱짓했다.

“어떻게?”

“지금 아나이스 공작은 처음 맛보는 패배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서?”

콘윌이 황태자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간신배처럼 얇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나이스 공작을 죽이고, 아스텔을 생포해서 모든 일을 뒤집어씌우시지요.”

콘윌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주목하게끔 혀로 딱 소리를 냈다.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인 아스텔. 알고 보니 북부에 숨어든 역적 가문의 딸이었으며, 공작을 암살했다…… 라는 아름다운 시나리오가 나오게끔.”

“오…….”

상당히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황태자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를 보던 콘윌이 황태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계집애를 고문해서 증언을 하게 하시죠. 뷔에트리 백작가의 잔당이고, 같은 역적인 카시언 그레이와 함께 공작을 죽이려 들었다는 식으로요.”

“나쁘지 않군.”

“카시언 그레이, 그 새끼도 같이 엮어 버리면 재미있겠습니다.”

황태자가 샴페인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짝, 짝, 짝.

느릿한 박수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죄다 없앤 다음……. 구심점을 잃은 수인들까지 흡수해서 노예로 만들면 되겠군.”

뷔에트리 가문의 완벽한 멸문도, 아나이스 공작의 죽음도 모두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서로의 계획에 취한 채로 낄낄대며 웃었다.

“공작의 죽음을 단순히 첩자놈들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제가 드플라이 영해로 출발하지요.”

마물 전쟁에 패배한 데다 측근인 카시언을 잃고 칩거 중이라지만, 아나이스 공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도 꼼꼼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콘윌이 흡족하게 웃으며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렸다.

곧 몰살할 수 있다.

그 뷔에트리의 찌꺼기들을.

* * *

“쿠, 쿨럭!”

일인용 치료 막사 안. 베드에 힘없이 누운 카시언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복근이 탄탄했던 배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팔뚝 여기저기엔 멍이 든 것처럼 보랏빛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떼를 써서 겨우 막사 안에 들어온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고오…….”

그는 도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야생 국화를 카시언이 덮은 이불 위에 올려놓았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카시언이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이건 뭐, 죽으라는 겁…… 니까.”

“잘생긴 얼굴도 다 상했어, 아이고. 아이고.”

“쿠, 쿨럭!”

피를 울컥 토해 내는 카시언을 보고 로파는 엉엉 눈물을 흩뿌리고 떠났다.

쉬고 싶은 카시언의 마음과는 달리 면회자는 또 있었다.

막사의 천막 문을 걷어 내듯 연 사람은 치료사, 아스텔이었다.

“아스…… 텔, 쿠, 쿨럭.”

문을 열고 들어온 아스텔을 보면서, 카시언이 재차 입가에서 피를 쏟았다.

아스텔이 씨익 웃으며 손을 살랑 흔들었다.

“안녕, 카시언?”

죽음의 위기에 놓인 오빠를 대한다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태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카시언의 태도 역시 묘하게 수상한 감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가벼운 인사에 이윽고 그는 피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쓱, 여유롭게 닦아 냈다.

세간에 알려진 ‘카시언 그레이 경이 곧 죽는다’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 * *

나는 오빠의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는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얼굴이 잔뜩 상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찌르르 아파 왔다. 하지만 그의 말투만큼은 제법 경쾌해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네가 미리 말 안 해 줬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는 오랜만에 사람을 보고 입이 트인 듯, 나를 향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희미한 미소를 보니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 공연히 마음을 숨기듯, 나는 오빠에게 가볍게 면박을 주었다.

“응, 일단 조용히 해. 지금 피나!”

동시에 오빠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걸 닦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오빠는 신기한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뭐……. 네가 준 물약 잘 써먹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지난 일을 떠올렸다. 사실 콘윌 공작의 시선을 훔쳐보았을 때, 나는 그들의 계략을 완전히 엿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극독, ‘천사의 눈물’을 사용할 거라는 이야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들을 수 있었다.

‘원작 속에서 사용한 극독이지.’

천사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극독은 원작 속에서도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무기였다. 피부나 점막에 닿기만 해도 절로 스며들어, 죽는 게 더 나을 지경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사망에 이르는 독.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천사의 눈물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꾀병 물약’을 독약학 천재 삼 형제들과 함께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제일 처음, 출병하는 카시언의 손과 발, 목에까지 투명한 천을 덧대어 주었다.

‘독에 당하지 않으려면 온몸을 이걸로 감싸야 해.’

‘얼굴은?’

‘얼굴에는 파우더 처리를 할게.’

‘뭐, 독 먹기 전에 목 졸려서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절대로 벗으면 안 돼.’

‘넵. 명하신 대로.’

나는 고분고분한 카시언에게 열심히 만든 꾀병용 물약을 건네주었다.

‘내가 말할 때 이걸 먹어.’

그리 말해 두었다가, 스파이로 추정되는 줄리가 접근하자마자 그에게 눈을 찡긋했지.

그 뒤로 상황은 순조롭게 풀렸다. 카시언은 줄리와 접촉한 뒤 마물과 싸우러 나가기 전 몰래 내가 준 물약을 마셨다.

이어서 카시언이 쓰러지고, 마물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들은 모든 것이 자기들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터였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오빠의 손수건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있잖아.”

“응.”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한껏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으니 절망에 관한 이야기도 말할 때라고 생각하면서.

병색이 완연한 낯으로 나를 보던 그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오빠와 나는 그런 관계였다.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사이.

“일단, 내가 죽어도 절대 죽지 말고 기다려야 해. 잘 살고.”

“뭐 죽을 사람처럼 말해. 우리 같이 살…… 쿠, 쿨럭.”

카시언이 손등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잔기침을 했다.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서 가짜 피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의 입가를 흰 천으로 닦아 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카시언은 몸을 일으키려다 에고고, 신음을 내더니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가 내 말을 곱씹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위험한 짓 하지 마. 그건 다 내가 해.”

나는 카시언을 향해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오늘도 카시언이 좋은 미끼가 되어 줬잖아.”

“불안하네…….”

영 입맛이 찝찝해 보이는 그를 안심시키려 나는 눈을 휘며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의 예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세우고 있는 계획을 전부 공유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이곳이 책 속 세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건 복수의 여부를 떠나서, 카시언의 삶 자체를 뒤흔드는 것인데.

평생에 걸쳐 겪은 온갖 고난과 비참함, 고통이 그저 누군가의 펜촉에 의해 휘갈겨진 역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애초에 말해 봤자 믿어 줄지도 모를 일이고,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오빠에게 흉금을 터놓고 말한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오빠는 이미 내 계획을 온전히 잘 따라 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계획을 따르는 것과 나에 대한 걱정은 또 별개의 감정이었다. 그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너, 위험한 짓 하지 마.”

“안 해. 걱정하지 마!”

밝게 웃은 나는 오빠의 이불을 목 끝까지 잘 덮어 주었다.

“좋은 생각만 해. 환자잖아.”

목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오빠가 한껏 툴툴거렸다. 하지만 물약 탓에 목소리가 하도 갈라져서인지,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나는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좀 쉬다 보면 적당히 끝나 있을 거야.”

나는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오빠가 눈을 나른하게 감으며 내 손길을 받아 냈다. 이미 꾀병인 걸 알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졌다.

한참을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호명했다.

“아스텔.”

녹스였다.

나는 막사의 천막 문 쪽과 녹스의 옆얼굴을 번갈아 보며 놀란 눈을 떴다.

누구에게든 카시언과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면 안 되는데!

나는 급히 손을 떼어 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어? 언제 왔어요?”

“아스텔의 귀한 손이 땀에 물들었을 때 도착했습니다.”

땀에 물들었다면 아마 조금 전 오빠의 땀을 닦아 준 것을 의미하는 건가.

녹스가 내 손을 카시언의 이마에서 확실히 멀어지게끔 떼어 낸 뒤, 어디선가 가져온 손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주며 낮게 말했다.

“깨끗하게 닦아 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을 흘기고 잔뜩 인상을 찡그린 오빠가 그를 향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두고 보자.”

……물론, 딱 걸렸지만.

녹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오빠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뭘 두고 보자는 겁니까.”

오빠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심술궂게 대답했다.

“일단은 병자로서 지금은 묵비권을 행사…… 쿠, 쿨럭. 하겠습니다.”

저 둘의 대치 관계를 보니, 복수가 성공하더라도…….

녹스와의 미래가 가시밭길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같은 시각, 황궁 안은 평화로웠다.

정황상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판단한 황태자는 황제를 밀어 두고 집권할 준비를 대체로 끝내 둔 터였다.

꺼림칙한 짐승인 데다 자신의 승계 작업을 방해할 것 같은 아나이스 공작.

그자를 마물 전쟁터로 쫓아내듯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의회를 거행하지.”

황태자는 황제의 대리자로서 황좌에 앉아 의회 내부를 굽어살폈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풀리니 자애로운 표정이 절로 나왔다.

“아쉽게도 우리의 마물 전쟁은 패배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더군.”

아나이스 공작의 눈치를 보는 중립파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귀족가가 황태자의 손에 들어왔다.

그 짐승은 모르겠지만, 수도 정계는 무력이 다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예와 명분이 중요한 곳이지.

그리고 마물 전쟁에서 패배한 데다 주요 기사 인력까지 죽어간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드높던 명예조차 산산조각이 난 마당이니 이제 공격할 만한 명분도 훌륭하질 않은가.

황태자의 명을 받은 꼭두각시 귀족들이 운을 뗐다.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전하. 마물 전쟁의 패배 시 아나이스 공작령에도 일종의 과세를 부과해야 합니다.”

“이번 전쟁의 물자 공급으로 인해 황궁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손해액을 그자들에게도 일부 부담시켜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제언이었으나, 백관들은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입을 조가비처럼 꾹 다물었다.

“일단 추후 논의하지. 완벽히 패배했을 때 말이야. 혹시 모르지 않나? 제국의 영웅들이 그리 모였는데.”

물론 승리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지만.

“역전승을 거두어 올 수도 있지 않겠나.”

패배는 물론이고, 아나이스 공작에게도 치명적인 고통을 안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속내를 내비치는 것은 멍청한 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황태자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그 말에 귀족들은 각자 앞에 놓인 안건 서류철을 넘겼다. 종이가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서류에 쓰인 내용을 본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안건은 황태자의 작위 계승과 관련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황제가 깨어나지 못하면서, 지존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는 여론이 스물스물 형성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작위 계승에 대한 안건이 올라올 줄이야.

게다가 안건을 올린 게 황태자 측의 측근이라 불리는 알비노 후작이었다. 모두가 숙연해진 가운데, 중립파 귀족인 파친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의 안위는…….”

황태자는 구겨질 뻔한 인상을 온화하게 펴 내며 고개를 까딱했다.

“아. 그 부분 말인데.”

슬슬, 아슬아슬한 줄타기 따위는 필요 없어지는 시점이었다.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그가 패륜아라는 말이 돌고 있으나, 황제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 말도 물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황태자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꾸며 내며 그들을 향해 속삭였다.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차가운 말투가 허공을 갈랐다.

“어쩌면 우리는 폐하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백관들이 얼어붙은 채로 충격적인 말을 뱉은 황태자의 입을 바라보았다.

* * *

회의가 끝난 뒤, 황태자는 곧장 자신의 궁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처럼 검은 로브를 입은 콘윌이 부복한 채로 그의 응접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카시언 그레이를 필두로 호흡독을 퍼트려 두었습니다.”

“마물 전쟁의 패배는 확실시되겠군.”

“예. 그 짐승이 괴물이라 한들 기사 하나 없이 싸울 수는 없겠지요.”

지금, 전쟁터의 기사들은 대체로 설사 증상과 복통, 오심과 구토 등을 호소하고 있었다.

사기가 꺾인 것은 물론이고, 당장 내일의 전투 승리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흡족한 황태자의 낯을 힐끔 바라보던 콘윌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짐승이고 뭐고, 그의 관심사는 오직 아스텔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하면 그 계집은…….”

조만간 작위를 계승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감각이 고양된 황태자가 오만하게 답했다.

“그보다, 그 짐승 새끼에게 치명상을 입히도록 하지. 딱 그레이 정도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콘윌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계집은 저의 손에 넘겨주시지요.”

콘윌의 미쳐 돈 것 같은 눈동자를 보던 황태자가 고개를 까딱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 짐승을 잡고 나면 수도에 계엄령을 내리지.”

“그, 그 뒤에는.”

“그 계집애를 납치해 오든가, 죽이든가. 공의 마음대로 해. 공작이 죽은 것도, 마물 전쟁이 그리된 것도 그 계집애를 포함한 뷔에트리 백작가의 소행으로 몰고 가면 될 터.”

황태자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윽하게 웃었다.

아나이스 공작과 긴밀한 관계로 유명해진 카시언 그레이도 끝장냈고, 공작에게도 쓰디쓴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사건이 끝날 때쯤, 모두 죽이는 거다.”

전장에서 먼저 우위를 점했으니, 패자가 정신 차릴 틈 없이 밀어붙이는 것이 상책이다.

“존명.”

그의 눈앞에서 콘윌이 엎드려 절을 했다.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조만간 눈앞의 이 세계 전부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임을 직감했다.

* * *

마물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다.

전쟁을 재개하려던 때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탓이었다.

카시언 그레이뿐만 아니라 명망 높은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치료 막사 신세를 졌다.

전투 중에 다친 것도 아닌데, 건장한 기사들이 뜬금없이 쓰러져 막사가 미어터질 정도로 실려 들어오다니.

처음 있는 일에 치료사들도, 기사들도 당황 일색이었다.

그 탓에 현재 치료용 막사 안은 아비규환까지는 아니고, 아비규환의 축소판 정도.

나는 토악질을 해 대는 기사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난 죽을 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혹시 저주 마수가 있었나?”

기사들의 사기는 반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도 그럴 게, 승승장구만 하던 과거 마물 전쟁 때의 양상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줄 아나이스 공작조차 두문불출한 상태였다.

“믿을 수 없어.”

기사들이 넋두리를 내뱉으며 구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치료용 물약만 느긋하게 만지작거렸다.

기사 중 하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뭔가 더 건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건강? 이게 건강이야? 시체지?”

나는 잠깐 경직되었다.

그러자 ‘건강해지는 것 같다’라고 말한 기사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께서 맛있는 약을 하나 해 주셨는데 말이지…….”

“해 주셨는데?”

“그때도 막 이렇게 발진이 났거든? 난 막 울었는데,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느긋함을 유지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급하게 그가 있는 베드 쪽으로 걸어갔다.

“그게, 아픈 게 아니라 명현 현-”

‘맞는데, 명현 현상인 걸 벌써 들킬 순 없지!’

나는 실수인 척 그의 목뒤를 슬쩍 쳤다.

빡!

……아니, 세게 쳤다.

“으악!”

안 그래도 허약해져 있던 기사의 몸이 푸스스하고 무너졌다.

“왜, 왜!”

저질러 놓고 막상 왜 때렸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게 말이죠.”

나는 기사를 향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큰일이네요. 당신은 빠른 속도로 죽어 가고 있어요!”

졸지에 시한부 선고를 들은 기사의 안색이 더욱 허옇게 질렸다.

……이런. 너무 발랄하게 시한부 선고를 내렸나?

나는 시한부 선고를 듣고 좌절한 기사를 보며 속으로 파이팅을 다졌다.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내 흉계를 들켜서는 안 되니까!

“저 이제 그러면…… 아직 릴리에에게 고백도 못 했는데…….”

좌절에 빠진 그를 보던 나는 적당히 상황을 수습하려 앞니만 톡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최, 최대한 빨리 살릴 방도를 마련해 볼게요.”

“아아, 내가…… 시한부…….”

물론, 그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숨기며 녹스가 머무르고 있는 막사를 떠올렸다.

일단 기사단 내에 독은 다 퍼진 것 같고.

슬슬 그들이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오늘 밤부터는 녹스와 함께 있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절대 불순한 의도는 아니다.

나는 졸지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사의 입에 기계적으로 수면약을 넣어 주면서, 조금쯤은 상기된 얼굴로 생각했다.

* * *

그날 밤, 황태자 궁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 황태자 궁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하나가 잠입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

“……예.”

“네게 금족령을 내렸을 텐데.”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탔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태자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스산한 낯을 했다.

황녀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퍽 귀찮게 된 일이었다.

“다시 돌아가라.”

“……황후 폐하께서 몹시 걱정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만두어 달라, 하셨습니다.”

기계적이고 무뚝뚝한 어조.

그러나 착실히 고개를 조아리는, 언제나처럼 심기를 거스르는 저 얼굴.

“조만간 폐하께서 서거하시거든, 그때 모후의 금족령도 풀어 드릴 생각이라 전하라.”

황녀가 약간의 추궁을 담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서거하실 것을 바로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예리한 지적에 황태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래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그 말과 함께 건방진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에게 다가선 황태자가 검지로 황녀의 턱을 치켜들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하찮은 지방 귀족의 딸을 황녀 삼아 주었더니 뵈는 게 없나 보구나.”

“…….”

“가만히 있어.”

턱을 잡힌 채로, 황녀는 황태자의 눈을 똑똑히 마주 보았다.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대신 황후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황제가 쓰러진 직후부터 황후는 황태자 궁에 몇 번이고 찾아가 황제를 직접 간병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나 황태자 궁에서 무언가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황후는 어느 날부터인가 칩거하기 시작했다. 이를 걱정한 황녀가 황후를 찾아갔을 때, 황후는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표정이었다.

‘딱 한 번, 네가 내 아드님을 설득해다오. 지금 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명을 받듭니다.’

‘만일 설득해도 안 되거든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두어라.’

황후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녀는 손에 성물인 로사리오를 쥐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 따위 없이, 회한으로 가득한 낯이었다.

‘나는 황태자의 모후이기도 하지만, 제국의 모후다. 이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막아야 해.’

‘…….’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둘 시간이, 세간에 치부를 알릴 날이 온 게야.’

정확히 황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자, 황태자는 영 밥맛이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무슨 건방진 생각을 하기에, 그딴 입맛 떨어지는 표정이지?”

저자의 불량배도 이런 말투는 아닐 것이다. 고결한 황태자라는 자의 민낯이 저러했다. 황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황태자의 손을 급히 떼어 냈다. 황태자는 입꼬리 한쪽만을 말아 올리며 비죽이 웃어 보였다.

황녀가 감히 자신에게 대들 수도, 함부로 말도 얹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무뢰한의 표정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지금 당장은, 황후도 황녀도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작의 딸이라. 제법 선하게 생겼구나. 앞으로 아버지라 부르거라.’

황제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 죽는 것은 너무 석연찮았다. 게다가…….

‘너는 죽은 내 딸을 닮은 것 같구나, 아가. 앞으로 잘해 주마.’

‘저는 그저 정략혼을 위해 입양된 것으로…….’

‘정식 절차를 거쳤으니 내 딸이지.’

자신을 안아 준 황후까지.

깨물린 입술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호위하듯 감싼 기사들 사이에서도 몸을 꼿꼿이 폈다. 황태자의 권력 앞에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황후가 안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녀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깊은 밤이 되었다.

나와 녹스는 때아닌 야밤의 피크닉을 즐기기로 했다. 우리는 기사들의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피크닉 매트에 함께 나란히 누워 별 구경을 하던 참이었다.

북부 최극단에서도 별은 뜨는 모양인지 별사탕 같은 새하얀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오늘처럼 별이 많이 뜨는 날은 소원을 빌어야 해요.”

물론 신빙성 따위 하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세상에 더 없는 진리인 것처럼 귀 기울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그럼, 아스텔의 소원은…….”

나는 당연히 복수 성공이지만!

“……계획 성공? 음, 녹스는?”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소원이 없나?’

기나긴 침묵 속에 몸을 꼬물거리면서 막 누우려던 그때, 녹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팔베개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레 내뱉은 소망이었다.

그 말투에 오래전의 잔상이 문득 떠오르고 말았다.

‘너는 팔이 짧으니까, 내가 팔베개해 줄게!’

새삼 신기했다. 그때 또래보다 작았던 소년이 지금은 팔이 짧다는 농담조차 할 수 없게끔 자라다니. 나는 감탄을 속으로 숨기며 그의 팔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동그란 머리 뒤로 딱딱한 팔이 느껴지고, 그의 경직된 옆얼굴이 보여서 웃음이 샜다.

“이제는 진짜 나를 지켜 주는 것 같네…… 요.”

녹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킵니다.”

나는 엷게 웃고는, 옆을 보던 얼굴을 틀어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옆얼굴에 닿는 녹스의 시선을 간질간질하게 느끼면서.

“소원이 하나 더 있다면.”

그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이라…….”

나는 영원이라는 녹스의 말을 곱씹으면서, 저녁이 되기 전 오빠의 막사를 잠깐 방문했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카시언, 이 쪽지 확인해.’

‘어?’

‘그리고, 새벽달이 구름에서 벗어나는 시간에 이 모래시계를 흔들어야 해.’

‘이 모래시계는 뭐야. 이동용…… 마도구?’

‘응. 오늘 밤엔 깨어 있어야 해.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 말 명심해.’

‘쪽지대로 행동하고, 모래시계를 흔들면 되는 거지. 잘 알겠어.’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뒤 회상에서 깨어났다. 내 일에 있어서는 눈치가 빠른 녹스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관심 가지실 만한 소식이 있습니다. 수도에 곧 현상 수배지가 뿌려질 거라고 합니다. 당신을 역적으로 몰겠다는 함의겠지요.”

“그럼 곧 나를 잡으러 오겠네요.”

“네, 그 전에…….”

“……응, 그 전에. 내 계획을 실현시키는 걸로 해요.”

내 말에 녹스는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상당히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습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일 확실한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나는 다음 말을 치고 나왔다.

“뭐, 만약에 오늘이 우리 둘이 함께할 마지막 날이라면…….”

“불길한 말은 하는 거 아닙니다.”

그는 검지를 들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말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입을 벌리고 있었던 덕분에 의도치 않게 점막이 닿았다.

나는 그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살짝 깨물었다가 떼어 냈다.

“그냥, 만약 그렇다면…… 오늘 밤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

나는 녹스가 한쪽 눈을 가볍게 감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 입가에도 자그마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나는 정말 녹스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녹스가 입술을 달싹이려 하는 순간, 나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정말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잽싸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의 반응을 더 살피기도 전, 달콤한 꿈은 끝이 났다.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일반인인 나조차 알아차릴 만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들이 왔군요.”

아마도 우리 주변에 흑마법사들이 결계나 마법이라도 걸어 둔 듯한 낌새였다.

나는 녹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따뜻하고 안락했던, 야밤의 피크닉 같은 분위기는 더 이상 없었다. 풀숲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가볍게 나른해졌다. 아마도 누군가가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또 다른 흑마법을 걸어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녹스의 눈을 내리감아 주면서 그에게 상기시켰다.

‘만약 콘윌이나 황태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반항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줘. 부탁이야.’

‘그건 싫습니다.’

드물게도 그는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참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녹스는 절대로 내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계획의 일부라는 말을 듣고 한풀 꺾이긴 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녹스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네 수명을 꺾어서 나를 살렸잖아.

오늘은, 우리가 약속했던 대로…….

“내 부탁대로 할 거지, 녹스?”

“……그 부탁은.”

그의 낯에 드물게 곤란하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약속해.”

나는 그가 했던 대로 그의 입술 위에 내 검지를 꾹 눌렀다.

“그게 최선이니까.”

단호한 내 말에 녹스의 입매가 단단히 경직되었다. 그 순간, 검은 실을 촘촘히 엮어 만든 듯 내부가 하나도 비치지 않는 답답한 로브를 두른 자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피크닉 매트를 에워쌌다.

어림잡아 스물도 넘어 보이는 그들에 비해 우리는 단둘뿐.

약간 긴장한 나는 녹스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재미 좀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가장 앞에 있는 자가 로브를 벗었다. 그는 흡족해하는 듯했으나, 비틀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 드디어 포위당했구나, 그래.”

부두술을 써서 몸을 바꿔치기한 듯, 분명 처음 보는 노인의 얼굴이었지만, 그자가 콘윌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콘윌의 것이었으니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죽이러 온 거, 맞지?”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까지 내내 세어 오던 디데이가 찾아왔다.

황태자와 콘윌, 그리고 녹스와 나. 두 진영 중 하나는 완벽하게 끝장이 나는 날 말이다.

* * *

콘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갔다.

제일 먼저 그는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 촘촘한 결계를 만들어 그들을 가두었다. 그 결계 속에 갇히면 모든 마법은 무력화되는 법.

그는 아나이스 공작이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만든 뒤, 곧바로 가장 강력한 마비 독을 퍼트렸다.

그때까지도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은 단둘의 밀월을 즐기는 중이었고.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친 콘윌이 마침내 아스텔의 눈앞에 섰을 때, 아스텔의 시선은 분명 흔들렸다. 당황한 것이다. 그는 행복함에 속으로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드디어 맛있는 먹잇감, 특히나 뷔에트리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계집애의 목을 꺾을 시간이 도래했다.

“그 아나이스 공작이 저리 구는 것은 아무리 봐도 조금 수상하니, 조심을…….”

황태자의 흑마법사가 그의 옆에서 제동을 거는 것 따위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닥쳐라.”

콘윌은 장갑을 낀 주먹을 옹송그리며 아스텔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직 아나이스 공작의 힘이 빠지지 않았어.’

이왕 마주친 이상, 저 계집애를 아나이스 공작의 보호로부터 빼돌려야 했다. 그는 어떻게 아스텔만을 빼내어 죽일지를 궁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계집애가 먼저 피크닉 매트의 바깥으로 혼자 발을 내디뎠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스텔의 팔을 잡아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을 떼어 내기까지 했다.

콘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스텔을 노려보았다.

“뭐야, 무슨 속셈이지?”

그의 시선이 아스텔와 아나이스 공작을 쭉 훑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무언가에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 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맹수라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마비 독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콘윌이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한결 더 가까워진 아스텔이 선언했다.

“나는, 당신이 내 앞에 당당하게 나타난 이유를 알고 있어.”

콘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스텔은 평온한 낯으로 그를 향해 속삭였다.

“비겁한 사람이니까, 뭔가 술수를 썼겠지. 독인가? 벌써 코끝이 찡하네?”

“감은 썩 좋구나.”

그는 한 걸음 바깥으로 나온 아스텔을 노리고 마법 주문을 주절주절 읊은 다음 답했다.

“그래, 맞다. 너도, 저 짐승도 죽어 가고 있지.”

아스텔은 아찔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죽어 가는 게 끝이야?”

“……뭐?”

습격당한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태도에 콘윌이 드물게 격분했다.

“그럼 당장 죽여 봐. 내가 널 죽였던 것처럼.”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스텔의 입매가 팽팽히 다물어졌다. 콘윌의 비열한 눈이 아나이스 공작 쪽에 다시금 짧게 닿았다. 그가 아스텔의 뒷모습을 애가 탄다는 듯이 응시했다.

“안 됩니다, 아스텔.”

역시 방해꾼이 될 속셈이겠지.

콘윌의 입매가 다물어졌을 때쯤, 아스텔은 아나이스 공작을 바라보면서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이 살아남으셔야죠.”

아나이스 공작은 애가 닳는다는 듯한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아스텔은 한 번 더 고개를 가로저은 뒤, 다시 콘윌을 바라보았다. 다소 애달프기까지 한 모습을 보던 콘윌의 얼굴에 조롱조의 미소가 일렁였다.

‘내 몸이 죽었던 그날과는 달리, 아나이스 공작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듯싶군.’

아스텔을 지켜 주지도 못하겠다, 심지어는 정신이 점점 혼탁해지는 듯, 공작은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였다.

음흉한 놈이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눈매가 나른해진 걸 보아 하니…….

‘분명 두 놈 다 마비 독에 당한 것이렷다.’

용조차도 쓰러뜨릴 법한 극독이니, 미리 면역약을 먹지 않았을 짐승에게는 더더욱 강력하게 작용했을 터.

그 와중에도 아스텔이 한 걸음 더 걸어, 콘윌의 앞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죽여. 대신 나를 죽이고, 공작 각하는 살려 줬으면 해.”

“네가 희생하겠다, 이 뜻이냐?”

“그래. 나를 죽이고, 공작님께 해독제를 줘.”

해독제를 원하는 말에 콘윌은 환희에 찬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입매가 헤벌쭉 벌어졌다. 그러나 황태자가 그의 곁에 붙여 준, 신중한 성정의 흑마법사가 급히 만류했다.

“저 여자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콘윌 님. 덫일 수도 있습니다. 수상하고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나 콘윌에게 아스텔은 지나치게 탐나는 먹이였다. 자신을 한 번 죽인 자인 데다, 저 계집애만 죽이면 뷔에트리의 끄나풀이 전부 사라지는 것일진대.

어찌 이 지점에서 침착할 수가 있을까.

눈을 가늘게 뜨고 환희로 몸을 바들바들 떠는 콘윌을 향해, 아스텔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뷔에트리 백작가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던 것처럼.”

“아스텔.”

아스텔을 만류하는, 아나이스 공작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콘윌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그를 파멸로 이끄는 세이렌의 노래와도 같았다.

“당장, 나를 죽일 수 있잖아? 뭘 망설이는 거야?”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을 만류하는 흑마법사들을 밀쳐 냈다. 그는 칼을 완벽히 쓸 줄 몰랐고, 써 봤자 쳐내질 것임을 알았다.

대신 그에겐 독이 있었다. 콘윌은 제 앞으로 다가선 그녀의 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입 안으로 독을 털어 넣었다. 바로 절명하도록.

놀랍게도 숨을 멎게 하는 데 단 일 초면 충분했다. 그가 먹인 푸르스름한 독이 아스텔이 입술 안으로 번져 나갔다.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선 아나이스 공작이 콘윌의 손을 재빨리 쳐냈지만, 아스텔의 입 안으로는 독약이 찔끔거리며 넘어간 뒤였다. 아스텔의 입 안으로 독약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꺼져.”

검버섯이 핀 콘윌의 손을 간단히 꺾은 채, 아나이스 공작이 쓰러지려는 아스텔의 몸을 단단히 받아 냈다.

* * *

녹스는 제 품에 안긴 아스텔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바랜 얼굴이…… 꼭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스텔.”

“……응.”

그의 눈앞에서, 아스텔이 죽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피를 뚝뚝 흘리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는 아스텔의 지나치게 가벼운 몸을 단단히 받쳐 안은 뒤 그녀의 속눈썹을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맥없이 달싹거리는 입술, 홍조 없이 그저 파랗게 들뜬 두 뺨.

“그러니까…….”

그는 죽어 가는 아스텔보다도 더 급하게 숨을 헐떡거렸다.

“네, 아스텔.”

아스텔의 입술에는 핏기 없이 잘게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내…… 말, 기억해 줘.”

아스텔의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앉으며, 가만히 떨렸다. 겨우 손을 든 그녀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로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때까지도 녹스는 얼어붙어 있었다.

“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스텔의 눈이 평온하게 감겼다.

호흡까지도 전부 다, 멎었다.

녹스는 반쯤 떨리는 손을 아스텔의 심장 위로 가져다 대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그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가 끌어안을 때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뛰던, 매 순간 콩닥거리던 심장이.

조금도 뛰지 않았다.

녹스는 아스텔의 차가워진 손을, 그녀의 부서질 듯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차가운 몸에서, 손목에서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몸이 식어 가는 것이 이상해서…….

녹스는 가만히 제 품에 안긴 아스텔을 내려다보았다.

애달프고 사나운 시선으로, 제법 오래.

세상이 멈춘 듯, 그 누구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어찌 보면 빈틈으로 보일 수 있는 제법 긴 몇 분의 애도 기간.

아직 공작의 주변에는 적들이 포진해 있었으나 흑마법사들은 감히 공작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분명 결계 마법과 독을 사용해 공작을 빈틈없이 묶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신중한 계산에서였다.

그들은 콘윌처럼 미치지 않았으니까.

공기 중에 독을 더 풀고, 고요하게 빈틈을 노리려 한 순간.

슬슬 아나이스 공작을 끝장낼 때가 왔다고 판단한, 가장 왼쪽에 있던 까만 머리의 마법사가 먼저 날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공작의 손이 더 빨랐다.

아스텔을 껴안고 있었던 그는 한 손으로만 흑마법사의 공격을 막아 냈다.

도리어 공작을 건드리려던 자의 몸뚱이가 진흙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이를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가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의 몸을 피크닉 매트에 소중히 놓아둔 후에 다시 말했다.

“독을 풀었다고 했습니까.”

흑마법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딜 보나, 공작은 극독에 당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저 공작 놈은 완벽히 독에 당하지는 않은 건가.’

콘윌 역시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당장 아나이스 공작에게 목이 꺾여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저 계집애를 죽이고 말았으니까.

어차피 콘윌 자신의 목숨은 부인과 자식이 죽은 뒤 이미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숨이 더 소중한 몇몇 멍청한 치들은 스멀스멀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그중에서도 충심이 깊은 자는 있었다.

흑마법사 하나가 콘윌을 향해 조심스럽게 귀띔했다.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

콘윌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흡족한 현장을 조금 더 눈에 담고자 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이를 악무는 모습, 턱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분노한 듯한 면모까지.

그의 살기나 분노를 느끼자, 콘윌의 입가에서는 미친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하하하하!”

저 반응을 보라. 정말로 그 계집애가 죽은 것이다!

제 편인 흑마법사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그에게서 멀어진 순간, 아나이스 공작이 콘윌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런데도 광기에 찬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 뭐든 상관없었다. 제 목표는 다 이루었다.

“결국, 죽였어. 죽였다고.”

이제 와서 그가 자신을 죽인다 한들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환희에 찬 콘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뷔에트리 계집을, 이 손으로 죽였다고.”

아직 아스텔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그의 곁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묘한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아스텔 쪽을 응시했다.

“저 계집애가 정말 뷔에트리라면, 마법을 쓸 줄 알 겁니다. 확실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

“당연히, 확인할 거다.”

애송이 흑마법사를 냉랭하게 내려다본 그가 아스텔 쪽을 응시했다.

더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스텔을 소중하게 제 곁에 내려 둔 채로, 단검을 빼내 들었으니까.

콘윌은 아나이스 공작의 눈빛이 일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공작의 모습을 응시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아직 모르겠지만, 맹수 수인을 죽이는 데 특효가 있는 호흡독을 추가로 흩뿌렸다.

맹수 종족 대부분이 저 독 앞에 무릎을 꿇고 사지를 발작하듯 경련했다.

반응을 기다리자, 역시나 아나이스 공작은 잠시 다리를 비틀거렸다.

저 맹수가 저 자리에서 곧 죽지는 않겠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 정도는 입힐 수 있지 않을까.

긴박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지닌 채로, 콘윌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다. 어쩌면 악신이 콘윌, 자신을 돕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의 몸이 흔들린 것도 같군.’

아나이스 공작의 몸체를 응시하던 콘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땀이 흐르는 손으로 마도구를 거세게 움켜잡았다.

‘역시 호흡독이야!’

호흡독이 무엇인가, 0.1g만 투여해도, 그 강인하다는 맹수들조차 몇 초 안에 쓰러지는 것이다. 제아무리 아나이스 공작일지언정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었다. 공작 또한 이제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독을 뿌려 두셨군요.”

“……눈치챘나?”

“하지만 독에는 해독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나른한 듯했던 눈빛이 분노를 담아 잔혹하게 일렁였다.

혹시 해독제를 먼저 먹어 두었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왜 독에 당한 척 연기를 했던 거지?

공작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콘윌의 미소는 산산조각이 났다. 독이 통하지 않았다면 퇴각 혹은 공격뿐이었다. 콘윌은 제 곁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멍청하시군요.”

아나이스 공작은 단검을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흑마법사 여럿을 단번에 처리했다. 지금까지 왜 그들을 막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크윽……!”

콘윌을 보호하듯 감쌌던 흑마법사들이 모두 아나이스 공작의 검신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한 명 한 명 처리해 나갈 때마다 검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는 더러운 것을 보듯 미간을 좁힌 채 다음 흑마법사들을 노렸다.

몇몇은 간단하게 목을 꺾어 부러트렸고, 다른 자들은 급소를 가격해 단숨에 처리했다.

많은 흑마법사가 체스의 병정이 죽듯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말 그대로 폭주하는 듯한 기세에 마법도, 결계도 죄다 속수무책이었다.

살아남은 몇은 고작 결계 마법이나 독 따위로 그를 제압하려는 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콘윌 역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아스텔뿐이었다.

‘저 맹수 놈이야 상관없어. 계집애가 죽은 것만 확실히 확인하자. 그것이 중요하다.’

콘윌의 시선이 아스텔 쪽을 집요하게 훑었다. 부두술을 쓰는 자에게는 타인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살아 있는 자는 얕게나마 숨을 내쉬는 법.

정신을 집중하면 입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숨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서 응시해도, 아스텔에게서는 호흡 따위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이 멎었어, 완벽히.’

그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찼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흑마법사 하나를 죽이지 않고 결박한 아나이스 공작이 다시금 콘윌을 향해 다가왔다.

전투를 치른 자답지 않게 평온한 얼굴로, 아나이스 공작이 그의 멱살을 가볍게 쥐었다.

“콘윌 공, 그대의 부두술 능력도 모두 끝난 것으로 압니다. 이게 마지막 목숨이겠죠.”

아나이스 공작은 그의 귓가에 대고 살기등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 줬으면 합니다.”

매서운 시선을 받은 콘윌이 아나이스 공작을 조롱하듯 응시했다.

“내 목적은 다 이루었으니 되었다.”

콘윌은 유언을 남기듯 삐딱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 계집은 죽었으니, 넌 패배했다.”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에 게거품을 문 채로, 콘윌이 말을 거듭 이어 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느끼니 어떻더냐? 딱 죽을 것 같지? 이 멍청한-”

콘윌의 말을 들으며 그의 몸을 속박했던 공작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리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과 같은 패배자가 아닙니다.”

공작은 그의 심장에 칼을 겨누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나도 따라 죽으면 그만입니다. 구차한 생을 연명할 게 아니라.”

콘윌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떨리더니, 그의 전신이 오한으로 전율했다.

“구차한 생?”

“예.”

“……난, 구차하지 않았어! 내 아내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개자식들에게 복수를 한 거야. 난 정당해. 그자들이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미친 듯이 뇌까리는 콘윌을 보던 공작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당신의 삶은 구질구질하고 멍청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 생각은 없습니다.”

콘윌이 현실을 부정하는 말투로 웅얼거렸다.

“무슨 상관이지? 그래, 어차피 그 계집은 죽었다. 구질구질한 생을 지속할 생각이 없다면, 너도 따라 죽어야지? 안 그러냐?”

악다구니를 쓴 콘윌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침착하게 콘윌의 생명을 앗아 갈 준비를 했다.

공작의 칼끝이 그의 심장을 파고든 순간.

죽음을 목전에 둔 콘윌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나를 죽이려는군. 그렇다면 결국 너도 나와 똑같이, 여자를 잃고 구차한 복수를 하려는 거 아니냐?”

콘윌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찬, 바로 그 시점에.

아나이스 공작은 그의 행복을 단숨에 깨트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다릅니다.”

“뭐?”

“난 당신과 달리 아스텔을 잃지 않았으니까.”

콘윌이 그의 말을 신랄하게 비웃으려 할 때, 공작이 등줄기가 찌릿할 정도로 섬뜩하게 웃으며 선수를 쳤다.

“왜 아스텔이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수를 온당히 마무리하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려던 콘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뭐?”

그의 표정에 의혹이 서렸다.

“순진한 구석이 있군요.”

“무슨 소리냐, 그게! 그 계집애가 죽, 지 않았다는 게! 다, 당장 해명해!”

아나이스 공작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지?”

곧이어, 공작은 성호를 긋듯 콘윌의 심장 어귀를 내리그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피를 양껏 토해 낸 것처럼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서서히, 콘윌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부두술을 쓴 몸이라서인지 생명을 빼앗기자마자 몸이 빠르게 부패되어 갔다.

“끝났군요.”

오래된 나뭇가지처럼 바닥에 쓰러진 콘윌을 감흥 없이 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그의 시체를 간단히 지르밟았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콘윌이 죽었으니, 결박된 흑마법사 하나를 죽이면 끝이 난다.

흑마법사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작게 웃었다.

“고, 공작 각하.”

“내가 왜 그대를 살려 두었는지 아십니까.”

“그, 그건…….”

“당신의 품에 황태자가 보낸 전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흉포한 맹수 그 자체의 태도로, 멱을 잡은 채 다정하지 않게 속삭였다.

“마물 전쟁이든 뭐든, 제법 피곤했는데 잘됐습니다.”

콘윌은 끝장냈으니, 황태자를 처리할 차례였다.

아스텔의 죽음.

황태자의 전서.

그리고 피트닉 매트 주변에 설치해 두었던 영상 마도구까지.

황태자를 처리할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 * *

이 모든 게 아스텔의 뜻이었다. 그녀의 뜻대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막상 죽음을 맞이한 걸 보니 …….’

아스텔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 호흡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몸이 차가워졌다는 것이, 조금…….

진한 충격에 잇새가 다물렸다.

‘스스로, 죽겠다고 했었지.’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녹스는 그녀가 왜 죽음을 택한 건지에 대한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것과, 그 사실을 직면한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꼭…… 이 방법이어야만 했습니까.’

녹스는 아스텔의 차가워진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드러난 등에, 무릎 아래, 살짝 접힌 곳에 각각 손을 단단히 받쳤다.

“아스텔.”

몇 번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대답이 들리지 않으면 눈물이 나던 어린 소년 시절처럼,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아스텔의 몸이 편안한지를 습관적으로 확인했다.

드레스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자그마한 발이 드러났다.

가만히 파르스름한 발을 손끝으로 잠깐 매만졌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녹스는 눈을 감았다 뜬 뒤, 그가 잇새로 가벼운 시전어를 읊었다.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아스텔이 말한 대로 해야 했다.

그녀가 부탁했으니, 가장 이른 시일 내로 수도로 가야 했다.

‘내가 죽어도 놀라지 말고, 바로 황궁으로 가.’

‘죽는다는 말은…….’

‘쉿.’

시전어가 끝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수도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숨이 멎은 아스텔을 그의 저택 내부, 방의 침대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숨이 멎었는데도, 그녀는 그저 자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은 경건하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다녀오겠습니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스텔의 밀랍처럼 새하얀 피부와 창백한 입술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 방을 폐쇄한 뒤, 황궁으로 가야 했다. 더 이상의 감상에 빠질 틈은 없었다.

마침내, 아스텔의 뜻대로 그는 황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발길이 닿은 곳에, 카시언 그레이 역시 나타났다. 팔에는 가짜 환자답게 붕대를 대충 감고, 웬 모래시계를 든 채 상당히 어리둥절한 낯으로.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아스텔은…….”

카시언은 이 와중에도 눈엣가시 같았지만, 그는 인내했다. 카시언을 향해 가볍게 눈짓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아스텔에게 하달받은 일이 있을 겁니다.”

카시언은 찜찜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네, 뭐……. 일단은요.”

“그 일부터 진행하고, 황태자 궁으로 오십시오.”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히 부딪혔다.

“명을 받듭니다.”

카시언은 고개를 휙 돌렸다.

공작이 그를 싫어하듯, 카시언 역시도 아나이스 공작이 여전히 눈꼴셨다.

‘게다가 다 죽일 것 같은 표정이라 찜찜한데.’

일단은 아나이스 공작의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가문의 누명을 거둘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카시언은 고개를 치켜들고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지금부터는 필히 집중해야 했다. 병사들 틈에 몰래 숨어 황제궁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그와 같은 실력자에게도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까.

아나이스 공작은 황태자 궁으로, 카시언은 황궁으로. 각자 아스텔에게 하달받은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 * *

카시언 그레이는 은밀히 몸을 숨겨 황제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스텔이 물약과 함께 건네준 쪽지의 내용을 복기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쪽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오빠. 이 쪽지를 확인했을 때쯤이면 이미 황궁으로 텔레포트 되었을 시점일 거야.

당장 황제를 찾아가서 내가 준 물약을 먹여.]

카시언은 황제궁의 중앙까지는 비교적 원활하게 숨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궁은 온갖 고대 마법과 기사들이 산적한 장소였다.

그는 숨을 들이마신 뒤 복도 끝에 몸을 숨겼다.

복도의 중앙에 저 멀리 황제의 침실로 추정되는 방의 문이 보였다.

하지만 허가받지 못한 자가 감히 황제의 침전에 들어선다면, 온몸이 불타오를 것이다.

황제궁에 걸려 있는 고대의 마법만 몇 개인가.

지금까지는 겨우 피해 왔다지만, 침전에 걸린 마법은 더욱 강력할 터였다.

카시언은 그림의 떡을 보듯 침전의 문만 노려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복도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는 분명 일정하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발소리를 들어 보니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젠장, 순찰이잖아.’

복도의 중앙, 몸을 숨길 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카시언의 뇌리에 번개처럼, 레이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궁의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어.’

‘그거 꼭 필요한 얘기야?’

‘그래도, 어렵게 입수한 정보거든.’

순찰을 도는 경비병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또각.

카시언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복도의 끝 편 층계참 쪽으로 몸을 숨겼다.

환한 불이 켜져 있는 복도, 경비병의 발걸음이 서서히 그가 서 있는 복도의 귀퉁이까지 왔다.

이대로 경비병이 그를 찾아낸다면 잡혀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다.

황제궁의 경비병을 죽이거나 속박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황제궁을 둘러싼 고대 마법의 보호를 받을뿐더러, 죄 없는 이들이니까.

‘복도에 몸을 대고, 레스노 피아, 라고 말하면 비밀 통로로 들어설 수 있대.’

‘비밀 통로로 들어선다 해도, 나갈 방법이 없는 거 아냐? 그럼 무슨 소용이야?’

‘뭐, 그걸 알면 신이겠지, 황족이거나.’

카시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밀 통로의 유령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발각되는 것보다는 낫다.

모든 것은 모 아니면 도였다.

복도의 구석 귀퉁이에 선 카시언은 경비병의 발이 제 발에 겹쳐지기 직전에서야, 시전어를 잇새로 중얼거렸다.

* * *

카시언은 황제의 구슬 주렴을 걷어 올렸다.

그는 생각보다 더 쉽게 비밀 통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비밀 통로에 이정표를 짚어 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얼마 전 만들어진 듯한 이정표를 믿고 따라가 보니, 황제의 침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카시언은 안색이 푸르스름한 황제의 입 안으로 아스텔이 건네준 물약을 제법 거칠게 집어넣었다.

[이 물약을 먹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거야. 그 뒤는 오빠에게 맡길게.]

카시언은 황제의 감긴 눈꺼풀을 냉엄하게 보았다.

그렇게 일 년 같은 수십 초가 흐른 뒤.

물약을 먹은 황제가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카시언은 단조롭게 예비해 두었던 말을 읊조렸다.

“폐하를 구하기 위해, 평민 기사 카시언 그레이가 왔습니다.”

“오오…….”

황제는 아직 몽롱한 듯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눈을 뜰 줄은 알았다. 그의 손끝이 경련하듯 파들거렸다.

“아직 건강을 회복하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제가 살려 드리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번들거리는 눈매가 가늘게 떠졌다. 당연히, 카시언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의 용감한 기사가 왔구나…….”

“폐하를 구하러 왔습니다.”

단조로운 카시언의 말에 황제가 오싹한 낯을 했다.

“그대가 어찌 내 곤경을 알고.”

“황제 폐하의 이야기가 저잣거리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제가 독에 해박한 덕에, 폐하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약을 제조하여 당도했습니다.”

“과연…….”

황제는 잠시 말을 잇지 않은 채로 카시언을 응시했다. 정말로 상대가 충심 하나만으로 이 황제궁에 도착했는지, 아닌지를 떠보는 듯 음흉한 눈빛이었다.

‘내게 충심 따위는 없거든.’

카시언은 표정을 꾸밀 생각도 없이 담담하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다만, 폐하. 물약은 제 손에 있으며, 제조 방법은 저밖에 모릅니다.”

황제에게도 익숙한 거래 방식이었다.

“……충성스럽지 못하구나. 대가를 내놓으라 이것이냐?”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카시언이, 아스텔이 건네주었던 쪽지 내용을 재차 떠올리며 그대로 읊어 내렸다.

“예, 하지만 폐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황제의 눈에 의문이 도사렸다.

“신, 카시언 그레이. 폐하의 충신으로서 직접, 주청 드립니다.”

다음 내뱉을 말도 아스텔의 쪽지에 친절히 쓰여 있었다.

[황제는 물약을 여러 번 투여 받아야 해. 어쩌면 평생을 재활 물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물약을 만들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몇뿐이니, 황제가 살고자 한다면 오빠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줘야만 할 거야.

황태자의 행동이 이상하니, 진상 규명을 하고 싶다고 말해.]

“황태자와 콘윌 공작이 벌인 행적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황제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그대는 내가 황태자에게 패륜적인……. 행동을 당한 것까지도, 알고 있군?”

“그렇습니다.”

“하면.”

황제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진상을 규명해 와, 당장.”

“충신으로서 명을 받듭니다.”

황제의 의도대로 패륜아인 황태자를 처단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황태자와 콘윌의 작당으로 인해 역모죄를 뒤집어쓴 가문들에 대해 언급하고, 진상 규명에 대한 권한을 얻을 계획이었다.

그중에, 뷔에트리 가문도 있으니까.

‘아스텔, 넌 이걸로 끝을 내려 했지.’

[두 번째 쪽지는 그다음에 열어 봐, 알겠지? 급한 건 아니니까,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아스텔의 쪽지는 그게 끝이었다.

오직 법대로, 그들의 가문을 해친 자들을 처단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지나치게 선량한 그의 여동생을 떠올리니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는 제 동생과 달랐다.

자신은 제법 불량하고 건들거리며, 때로는 깡패처럼 굴어 제 이득을 취하려 했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자에게는 두 배로 보복한다.

아스텔이 아닌,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카시언은 아스텔이 준비한 이 큰 그림을 더 빠르게 완성할 방법을 떠올려 냈다.

“더불어, 폐하. 신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청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황제의 시선을 받은 카시언이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파삭.

그 순간, 구슬 주렴 밖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카시언이 황제에게 집중한 사이, 누군가가 침궁 안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무슨…….”

황제가 입을 열자, 카시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긴장한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퍼진 곳으로 향했다.

만약 이 궁으로 들어온 것이 황태자의 끄나풀이라면 당장에라도 죽여야 하니까.

* * *

같은 시각, 황태자는 자신의 궁에 머물렀다. 방금 막 흑마법사들의 연락이 십여 분 전 끊기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러니 아마 콘윌이 독단으로 연락을 차단한 것일 확률이 높겠지만, 상대는 아나이스 공작이었다.

마음 한편이 불안함으로 일렁거렸다. 황태자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거만하게 턱짓했다.

“콘윌에게, 연락은?”

“아직 없습니다만…….”

계획에 따르면 독을 사용해 아나이스 공작을 죽인 뒤, 군사를 회군시킬 생각이었다.

그 직후 의회를 소집해서 졸속으로 행정 처리를 한 뒤 아나이스 공작령을 무단 점거할 요량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쩐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일이 쉽게 돌아가지는 않더라도, 그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었다.

‘오직 황족들에게만 안배되는 최후의 무기가 있으니.’

지금 그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소중한 무기 말이다.

황태자는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여유로운 척 입매를 올렸다.

만일 콘윌의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최종적인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꽤 인력이 낭비는 되겠으나, 만일 수가 틀린다면…….’

그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황태자 궁의 문이 열렸다. 안색이 새하얘진 시종장이 피를 토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화, 황태자 전하, 그 지, 짐승이!”

단말마 같은 비명.

그러나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등 뒤에서 나타난 아나이스 공작 때문이었다. 시종장은 공작의 거친 손에 목덜미를 잡힌 채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황태자가 앉은 원탁 주위로 희미한 경악이 쏟아졌다. 오직 아나이스 공작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간단한 예법을 취하며 시종장의 발을 지르밟았다. 우아한 데다 귀족적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지 않는, 무뢰배에 가까운 등장이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황태자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혀졌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공작?”

황태자는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 콘윌의 손에 죽어 없어져야 했을 존재가, 살아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황태자의 마음에 노화가 일었다.

그린 듯한 눈매에 깎아지른 듯한 턱선. 선이 굵다, 싶은 얼굴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다소 야윈 듯 보이기도 했다.

‘콘윌이 실패한 모양이지.’

상황을 살펴보니, 콘윌이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콘윌의 배후를 캐내려다 저를 죽이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시간에 내 궁에 쳐들어온 거지?”

황태자가 나직하게 놀라움의 말을 표현하자 공작이 건조하게 지적했다.

“마치 제가 전장에서 죽을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구십니다.”

“……그럴 리가.”

나직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 공작은 황태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태자의 주변에 진을 친 측근들조차 쉽게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황태자는 애써 위엄을 세우려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닌가?”

“맞습니다.”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급박한 전쟁 중에 왜 황궁에 나타난 것이냐는 질책에도 아나이스 공작은 시큰둥했다. 황태자는 여세를 몰아 훈계했다.

“게다가, 허가받지 않은 자는 황태자 궁에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무례하구나.”

황태자의 신랄한 어조에도 공작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황태자가 앉은 원탁의 바로 앞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공, 내 감히 다가오라고 말한 바 없거늘-”

“릴케스.”

릴케스는 황태자의 아명이었다. 상대의 아명을 부르는 것은 명백히 낮잡아보는 행위였다. 이 와중에도 고귀한 귀족다운 태도에 황태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황제 폐하의 대리인 나의 허락 없이 감히 황태자 궁에 발을 들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나.”

황태자는 상대의 조롱에 대항하는 자신의 말이 제법 우아했다고 착각했다.

“그대는 황제의 대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근처로 다가온 아나이스 공작이 거침없이 손을 뻗어 황태자의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떻게 목을 비틀어야 할지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최후의 무기가 남아 있다.’

황태자는 애써 초연한 체 제복 안주머니에 있는 ‘최후의 무기’를 떠올리며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 두어야 했다.

“그, 대는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

주변의 측근들은 모두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제법 실력이 좋은 놈들은 죄다 아나이스 공작을 처리하라, 전방에 보내 두었더니 멍청한 것들만 남았다.

황태자의 이가 부러질 듯 맞물렸다.

“역모라.”

아나이스 공작은 차분하면서도 싸늘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궁지에 몰린 쥐를 보는 듯한 표정에 자존심이 상한 황태자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멍청하시군요.”

아나이스 공작이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이 들어온 문 쪽으로 가볍게 눈짓했다.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황태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문가를 응시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번에는 카시언 그레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독에 당해 병색이 완연하다더니, 아주 건강해 보이는 낯이었다. 게다가 건들거리는 표정이기까지.

‘다쳤다더니, 속았군!’

황태자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하지만 그는 애써 침착하게 입가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기사, 카시언 그레이.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카시언 그레이는 한쪽 입꼬리를 선뜩하게 올렸다. 그의 손에는 황제의 비밀 인장이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를 음해하고, 역모를 꾸민 죄인을 포박하라 명하셨습니다만.”

그제야 모든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황태자가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황제가 깨어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경로인지는 몰라도, 해독제를 구한 것이겠지.

황태자는 거칠어지려는 숨을 고르며, 품 안의 무기를 되새겼다.

황제의 대리자로서 황궁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폭발물이자, 황족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오직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신이 세계수로 조각한 뒤, 제국의 황제에게 선물로 내렸다 일컬어지는 새 모양의 자그마한, 회귀 토템.

황궁을 비롯해 제국 전역을 날릴지언정 토템을 사용한 황족의 목숨만은 보호해 주는 물건이었다.

부작용이 있다고 들었기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일이 틀어진 이상 토템을 사용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그래, 모든 것이 밝혀졌군.”

뜻 모를 황태자의 말에 아나이스 공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난 언제나 너 같은 짐승 새끼를 혐오해 왔다.”

마치 죽을 자리라도 봐 둔 것 같은 태도에, 카시언의 표정 역시 일그러졌다. 이런 반응은 아스텔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황태자는 씩, 웃으며 아나이스 공작의 손을 잡아챘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 같이 뒈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던 황태자는 제복의 안주머니에 담긴 토템을 떠올리며 속으로 시전어를 읊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든 것이 끝나는, 갑작스러운 결말을 뜻하는 주문. 이제 토템은 이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토템의 주인만을 보호한 채.

쾅! 콰광!

두 눈을 감은 그의 귓가에 터질 듯한 굉음이 들렸다. 그의 입가에 환희의 미소가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을 터트리고 난 뒤 폐허가 된 장소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전해 들었다.

황태자 궁의 내부가 불로 타오른 뒤, 목조 새는 진짜 새가 되어 그의 품에서 날아오를 것이다.

콰과광-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연달아 쏟아지던 큰 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황태자는 희열에 찬 감각을 애써 내리누른 채 눈을 떴다.

“드디어.”

그의 예감이 옳았다. 주변은 눈 감고 있는 동안 상상한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웠던 황태자 궁의 대리석 바닥과 기둥들이 모두 파괴되어 흙먼지만이 일렁였다.

카시언 그레이도, 아나이스 공작도, 그의 신하들도 없었다.

말 그대로 먼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러나…….

“황태자.”

이 폐허에 있어선 안 될, 살아 있는 여성의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갈랐다.

이 중후한 목소리는 분명 황후의 것이었다. 황태자는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했다.

그에게서 대략 이 미터가량 떨어진 곳. 먼지가 풀풀 흩날리는 기둥 옆에 황후가 서 있었다. 황후가 어떻게 이 공간에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토템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황태자는 급히 제 제복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멈칫했다.

‘토템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새가 주변으로 날아 갔다는 뜻일진대. 그의 시선이 급하게 폐허가 된 주변을 훑었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황후가 냉엄하게 속삭였다.

“이 새를 찾습니까?”

황후의 손에 토템이 들려 있었다. 목조일 때는 몰랐으나, 흰 털이 보송보송한 새였다. 황태자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황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그 토템을 이리 주십시오.”

[모든 것이 파괴된 다음, 목조 새는 진짜 새가 될 수 있다.

진짜가 된 새를 날려 보내며 잘못을 바로잡을 시기를 말하라.

그 시간대로 회귀할 수 있느니.]

황태자가 애타는 낯으로 황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이 필요하십니까, 아드님.”

“물론이지요!”

황후는 제 아들을 무감정한 낯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싫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싫다니, 그게 무슨 뜻…….”

황태자가 평상심을 가장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토템으로 인해 모든 게 파괴된 지금, 황후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지, 토템이 왜 저기 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상관없었다.

토템을 발동시킨 것이 자신인 만큼 이 상황에 대한 주도권도 자신에게 있었다.

최악의 경우, 황후를 죽여야만 토템을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들, 어차피 회귀하면 그만이다. 그는 제 모후의 연약한 몸체를 응시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완력 하나 없는 장년 여성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거든.’

다만 토템 사용의 부작용인지 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는 우선 토템이 완벽하게 작동했는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황태자의 눈동자가 뒤룩뒤룩 굴러갔다. 폐허가 되어 터만 남은 황태자 궁을 둘러보던 그는 이내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 인간이라고는 황후와 자신, 둘밖에 없었다.

‘그 짐승 새끼가 어디에 숨은 것이 아니라면, 뼈도 못 추리고 이미 죽은 것이겠지……!’

황후는 가만히 서서 황태자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나이스 공작을 찾는군요.”

열패감에 찌들었던 눈동자가 휙, 황후 쪽을 향했다.

“그놈의 생사를 알고 계십니까?”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은 채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건 본 황후도 모릅니다.”

불길함이 황태자의 뱃속을 스멀스멀 기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항상 차고 다니는 검은 미스릴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미스릴은 어떤 폭발에서건 버티는, 모든 게 잿가루가 되어도 남는다는 강력한 물질이었다.

‘만약 육신 자체가 사라진 거라면 근처에 미스릴이 떨어져 있을 텐데……. 아니, 이 토템이 미스릴마저도 없앤 것일 수도 있지.’

황태자는 어금니가 나갈 것처럼 턱에 힘을 주었다.

“그렇군요.”

이제 그놈이 어디서 살아 있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빨리 회귀만 하면 그만이었다. 곧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그는 반미치광이처럼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십 년 전으로 돌아가……. 그 짐승을 먼저 찾아내어……. 죽일 겁니다. 제국에 해악만 되는 자이니까요.”

황후는 인간의 흔적 따위는 사라지고, 건물의 잔해만이 남아 말 그대로 폐허가 된 공간을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오래전 과거 이민족들의 침략에도, 그 어떤 전쟁이 벌어질 때도 고고히 자리를 지키던 황태자 궁이 무너졌다. 황궁과 그 반경 몇 킬로 이내 역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나, 정작 제국에 해가 되는 자는 황태자였다.

“본후가 생각건대, 제국에 해악만 되는 자는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아, 그 건방진 기사도 있었지요. 그놈, 카시언 그레이도 죽일 겁니다.”

그 대답에 황후는 쓰게 웃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황궁을 초토화하고 사람들을 죽게 해 놓고도 제 아들은 결국 저 모양이었다.

황후는 조금 전까지 황태자 궁이었으나 황량해진 터를 마지막으로 응시했다. 당장 황태자 궁과 인접한 모든 궁의 시종들은 죄다 죽어 사라졌다. 시일이 흘러 죽은 자들의 가족들이 황궁에 찾아온다 한들, 어디에 제 자식의 시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시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조각났을 테니까.

장송곡조차도 부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주제에, 그 와중에도 자신의 열패감을 고스란히 드러낼 줄이야.

제 아들은 이미 괴물이었다. 오랜 시간 부인해 왔으나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황후가 회한을 곱씹던 차, 황태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냈던 입가의 미소를 싹 거두며 냉정하게 속삭였다.

“모후, 어찌 이 자리에 살아 계시는지 석연치는 않으나……. 황족에게는 무언가 방어력이 있다 생각하겠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이제 그만 손에 있는 그 새를 주십시오.”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저의 것입니다. 분명 제가 토템을 발동시키는 주문을 외웠으니까요.”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황태자를 장엄하게 훑어 내렸다. 물론 이 토템을 발동시킨 것은 황태자가 맞다. 황후는 그저 황태자가 토템을 발동시킬 것을 미리 알았을 뿐이다.

‘황태자의 음모를 눈치챈 건 우연이었지.’

그녀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황태자를 냉정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아스텔이 마물 전쟁터로 떠나기 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짧게 떠올렸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만약 두통이 심해지신다면 황태자 궁을 찾아가 보심이 어떨까요?’

‘아드님의 궁에?’

‘네, 그곳에는 마법사가 많다는 풍문을 들었어요. 저보다 더 식견이 대단한 치료사도 많다고요. 그분들께 증상을 알리고 고견을 청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하마. 필요하다면은.’

순진한 아스텔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가 보내 준 약이 일찍 떨어졌다.

인편으로 약을 요청했지만 마물 전쟁으로 일손이 바빠 약물을 제조하는 데에 사흘 정도 걸릴 것 같다는 사과의 편지를 받았다.

잘 생각해 보라며, 황궁에는 명석한 치료사가 있을 거라는 말을 추신으로 덧붙이기도 했다.

그 추신을 읽자마자 아스텔이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태자 궁에 빼어난 치료사가 있을 거라는 말.

황제의 안위를 확인케 해 달라 요청할 겸, 금족령을 피해 황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서 황태자 궁으로 향했다. 비밀 통로를 통해 황태자 궁에 잠입한 그녀는 치료약은 얻지 못했다. 대신 경박한 마법사들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입수했다.

황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귀한 토템 하나가 황태자 궁의 비밀 창고로 옮겨졌다며, 황태자가 진짜로 집권을 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그녀는 은밀히 기사들을 보내 황태자의 의도를 물색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음모를 얼추 눈치챘다. 황궁의 보물 창고에서 사라진 것은 단 하나, 회귀용 토템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여차하면 회귀용 토템으로 모두를 죽인 뒤, 다시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유해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최대한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대처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후 물밑에서 황태자를 저지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던 차에, 그녀는 황후궁에 내방한 황녀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텔을 잠시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 이야기?’

‘네, 황궁의 보물 창고에는 방어용 마도구도ㄴ 많을 텐데, 부럽다고 말이어요. 자기도 마물 전쟁에 가는데 그런 방어 마도구가 있으면 안전할 테니, 정말 좋겠다고…….’

황녀의 말을 듣자마자 황후는 회귀용 토템을 막아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용 마도구의 존재를 떠올려 냈다.

그 방어용 마도구를 쓰면 설령 회귀 토템이 작동되더라도 살아남아 반격을 도모할 수 있을 터.

그래서 황후는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에 의해 궁지에 몰린 황태자가 눈을 감은 순간, 황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용 마도구를 사용했다.

‘……마도구 덕분에 깨어 있을 수 있었어.’

황후는 토템 사용의 부작용으로 쓰러진 황태자의 주변을 뒤져 새를 찾아내고,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는 지금 이 대치 상태였다.

“모후,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황후는 파드득 짧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얄팍한 회한에 잠겨 있는 사이 황태자는 힘이 풀린 몸을 겨우 일으킨 상태였다.

부작용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벌써 일어난…….”

당황한 황후가 굳어지자 황태자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모후, 사람의 힘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방심했다.

황후의 시선이 황태자를 좇았다. 그의 몸은 허청거렸지만 결코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금세 토템을 빼앗길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황후는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모후.”

황후를 보는 황태자의 입가에는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 것을 들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면서도 황후에게로 다가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저 토템만 있으면, 아나이스 공작 따위는 금세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제 어떻게…….’

그 모습을 보던 황후는 토템을 다시 작동시켜 회귀하는 방법을 떠올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 과거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속으로 복잡한 마법진을 그린 다음에 돌아갈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회상해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일 분 이상.

‘……시간이 부족해.’

그녀는 잠시 갈팡질팡했다.

‘정확히 어느 구간으로 시간을 돌려야, 황태자를 완벽하게 저지할 수 있지.’

게다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 자체도 힘에 부쳤다. 황태자보다 먼저 깨어나 토템을 손에 쥐기는 했지만, 황후는 마법을 그리 잘 알지는 못했다. 머릿속으로 마법진을 그리려다 몇 번이고 실패를 한 그녀는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사이에도 황태자와의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조금 더 거리를 넓혀야 해.’

황태자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걸어올 때마다, 황후 역시 한 걸음씩 물러서며 속으로 마법진의 형태를 떠올렸다.

가장 커다란 원을 그리고, 가운데에는 세모를 그린 뒤, 중앙에 다시 원을……. 그렇게 마법진을 반 이상 그렸을 때였다.

툭.

그녀의 등이, 그리고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황후는 창백해진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의 잔해가 그녀의 등을 막고 있었다.

“이게 무슨…….”

어느덧 다섯 걸음 앞으로 다가온 황태자가 여유를 되찾고 중얼거렸다.

“도망칠 생각은 마십시오. 그 뒤는 벽입니다, 모후.”

황후는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뼘 두 뼘 착실하게 가까워진 황태자의 손이 마침내 황후에게로, 그녀의 손에 있는 새하얀 새에게로 뻗어진 바로 그 시점.

황태자도 황후도 서로를 치열하게 응시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누군가가 황태자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모자간의 눈물겨운 해후는 모두 끝난 것 같군요.”

괴한은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황후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너, 이!”

당황한 황태자는 급히 조그마한 새를 향해 손을 더 내리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새털에 닿을락 말락 한 바로 그때.

“말을 안 듣는군요.”

무표정한 괴한이 황태자의 손을 간단하게 잡은 후 꺾어 냈다.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쉽게 부러졌다.

“으윽!”

황태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괴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왼손을 뻗었다.

“왼쪽 손목도 부러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짐승 새끼가…….”

황태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짐승 새끼라 칭해진 괴한, 아나이스 공작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황태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방심하셨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한 저 고아한 태도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은 방어용 마도구를 사용했다지만 공작은 아닐 텐데,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의문을 품을 틈 따위는 없었다. 황태자가 너덜거리는 오른쪽 손목을 반대 손으로 움켜잡은 뒤 악을 질렀다.

“이 짐승 새끼가, 감히, 주제를 모르고!”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나이스 공작은 황후의 앞에서 황태자의 뒷덜미를 잡은 채로 그를 질질 끌고 갔다. 그 덕분에 황태자는 황후에게서 벌써 열 걸음보다도 더 멀어졌다.

그를 개돼지 대하듯 아무렇게나 질질 끌던 아나이스 공작이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어서 토템을 발동시켜 과거로 가십시오, 황후. 황태자를 처리하기 직전이 좋겠군요.”

사지를 비틀며 반항하던 황태자가 눈을 홉뜨고 거세게 소리를 질렀다.

“모후! 안 됩니다. 이리, 이리 주십시오!”

“입 닥치십시오.”

둘의 상반되는 목소리를 듣던 황후는 제 손등을 가볍게 쪼는 새의 부리를 느꼈다. 새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돌리고 싶어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 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태자, 십 년 전, 아나이스 공작이 세를 불리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질문하자, 황태자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태도였다. 황후가 피식 웃었다. 황태자로서도 처음 보는 냉정한 조소였다.

“아니, 아드님은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한들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모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반성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 한들 인간이 되지 못한 자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는 없었다.

황후는 황태자의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전 제국민의 모후이기도 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생각에 황후의 손끝이 약하게 떨렸다.

“우리는 이제 과거로 돌아갈 겁니다, 아드님. 황가를 위해서.”

“그렇지요, 모후께서 저에게 토템을 주시면!”

탐욕스러운 눈빛이 이글거렸다. 황태자는 허청거리는 몸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짐승 새끼가 왜 갑자기 조용히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제 목에 칼날을 겨누든 말든 상관없었다. 황후가 토템을 발동시켜 과거로 가게 된다면……!

아나이스 공작이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개를 다루듯 뒷덜미를 움켜쥐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의 기대를 배반하듯, 새하얀 새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며 눈을 감았다.

“아니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새가 나풀나풀 날아갔다.

“나는 내 아드님이, 죗값을 치르는 과거로 가야겠습니다.”

새하얀 새의 날갯짓을 보던 황태자가 경악스럽다는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모후!”

황태자가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으나, 새는 이미 날아간 뒤였다.

새는 몇 번이고 날갯짓했다.

하얀 새의 기민한 날갯짓이 거듭되더니, 이내 허공에 폭풍우가 일었다.

폐허가 된 땅이 뒤틀리고,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진 지붕과 기둥들이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황태자와 황후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멀쩡한 것은 오직 아나이스 공작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암전이었다.

* * *

마침내 황태자가 눈을 떴을 때.

황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그의 귓전을 갈랐다.

“황태자의 모후가 아닌 제국의 황후로서, 황제 폐하의 대리자로서 명합니다.”

그 순간,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 그레이가 동시에 그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황태자는 욱신거리는 몸으로 황후를 노려보았다. 황후는 온몸이 흙투성이였음에도 장엄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카시언이 냉소적인 낯으로 황태자를 조롱했다.

“글쎄요. 계획 실패, 라고 하면 되려나.”

황태자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그의 원탁에 함께 앉아 있던 가신 몇은 이미 사슬에 온몸이 감겨 무릎을 꿇었다.

게다가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은 자신의 목을 칼로 겨누고 있었다.

제기랄, 토템을 사용하기 전과 완벽히 같은 시점이었다. 아니, 목에 벼린 칼날이 들어와 금방이라도 베일 듯하니 오히려 더 나빴다.

“모후, 이 무슨! 그 귀한 기회를 감히…….”

황태자는 아직은 자유로운 손을 써 제복 안주머니를 급히 뒤적거렸다.

‘토템이 없어, 없다고!’

그러나 품에 있던 토템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미 황후가 한 번 사용했으니,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진짜로 재기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는 불타는 시선으로 황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황후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당장 죄인을 포박하십시오.”

그녀의 무감한 시선이 자신이 낳은 아들 쪽으로 향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간에 서 있던 제 측근을 향해 눈짓했다.

“명하신 대로.”

빠르게 다가온 공작의 측근이 황태자의 몸을 결박했다.

마법에 걸린 듯, 포승줄이 묶이자마자 그의 몸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황태자가 핏발 선 눈으로 황후를 노려보고 있을 때, 아나이스 공작이 명했다.

“이제 나머지도 좀 치우지.”

그 말 한마디에 가신들이 끌려 나갔다.

황태자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고 있는 처지였다.

속에서부터 울분이 차올랐으나 그는 온몸이 묶인 탓에 무력했다.

“감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황후는 단 한 번도, 마음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냉정한 표정을 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필요하다면 고문도 서슴지 말고 여죄를 밝혀내지요, 황후 폐하.”

“그리…… 하십시오.”

황후의 허락이 떨어졌다.

카시언이 여전히 황태자의 목에 칼을 겨눈 채 그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비참한 낯을 한 황태자의 무릎이 꿇렸다.

“모후께서는.”

삽시간에 비참한 상황이 된 황태자는 몸을 비틀지도 못한 채로 원망스럽게 말했다.

“어찌 제 배로 낳은 자식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거친 손길에 끌려 나가는 황태자의 어깨에서 금장 수술이 파들거리며 흔들렸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바짓단이며, 회귀의 흔적인지 모를 찢어진 눈가의 상처 같은 것들이 그의 비참함을 더욱 가중했다.

“…….”

황후는 그 모든 상황을 눈에 담은 채로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나이스 공작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더는 말을 들을 가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끌어내.”

카시언 그레이가 황태자의 목에 겨눈 칼날을 회수한 뒤 답했다.

“황후 폐하와 공작 각하의 명을 받듭니다.”

황후는 카시언 그레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황제궁에서 카시언과 만났던 때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황태자를 통해 황제를 알현하는 일에 실패한 그녀는 황궁의 비밀 통로로 황제궁에 종종 방문하는 중이었다.

그날도 사정은 비슷했다.

평소 비밀 통로에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이정표를 몇 개 세워 둔 덕분에, 황제궁에 드나드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 덕에 그녀는 병상에 누운 황제의 침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제 부처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가 있어서 다행이야.’

황제궁에 도착한 그녀는 기사가 병상에 누워 있는 황제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황태자 전하의 생사 여탈권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황제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들어서는 소리를 자그맣게 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목할 수 있도록.

황후의 예상대로 카시언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황후 폐하께서 여기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충성스러운 척 말하면서도 카시언은 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필요하다면 자신을 죽일 듯한, 형형한 낯을 한 기사. 그를 향해 황후는 조용히 입을 열어 답했다.

‘황태자의 생사 여탈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본 황후가 하겠습니다.’

‘예.’

‘황태자는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습니다. 이 제국에 말입니다.’

‘…….’

‘황족의 이름으로, 본 황후가 직접 허락하지요. 황태자를 유폐하고, 여죄가 드러날 시 처형도 고려하십시오.’

‘황후! 새, 생사 여탈권이라니, 짐은 조금 더 생각을…….’

‘아뢰옵기 황송하나 황후 폐하, 그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황후는 카시언의 불신하는 눈빛이 경악으로 번져 나갈 때까지, 자신이 준비해 두었던 계획에 관해 차분히 설명했다.

황태자가 제국의 귀물인 토템을 훔쳐 갔고, 여차하면 그것을 쓸 게 분명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이 방어구를 작동시킬 계획이다.

황태자 궁에 범죄 기록물이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여죄를 확인하면 될 것 같다.

……같은, 내용을 전부 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의 계획은 완벽히 이행되었다.

황후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계획을 마무리 지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카시언에게 끌려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황태자 전하를 지하 감옥에 유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황후의 단단한 표정을 지켜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몸을 돌렸다. 이제, 아스텔의 유언과도 같았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니까.

“황태자 궁에 남아 있을 기록물을 수색하고자 합니다.”

통보하듯 말을 던진 아나이스 공작이 문간으로 다가갔다.

“그리하십시오.”

황후의 허락은 뒤늦게 떨어졌다.

“으아아아!”

저 멀리서 황태자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의 비명 따위는 듣지 않았다. 그의 비참한 열패감만큼이나 초라한 최후였다.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이 건넨 말을 곱씹으며 황태자 궁의 기록실로 향했다.

‘기록물을 수색하고 황태자가 멸족시킨 억울한 가문들의 누명을 풀어 달라고 했지.’

자신의 임무를 상기하며 복도를 걷던 그는 아스텔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연히 한 쪽 눈가가 가볍게 찡그려졌다.

그녀가 죽기 전 그와 나누었던 밀담이 떠올라서였다.

‘책에서 봤어요. 황태자 같은 최종 흑막에게는 시공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종 무기가 있다고.’

‘그렇군요.’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고, 신변이 위험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네.’

‘……제 말, 정말 믿어요?’

‘네. 믿습니다.’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한들 아스텔의 말이니까 믿었다.

그 무한한 신뢰가 낯 뜨겁다는 듯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급히 가렸다.

‘바보 같아…….’

‘네.’

‘……취소, 취소예요. 정말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그리고, 또.

‘황태자의 무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없애려면 최대한 그자를 코너로 몰아가야 해요. 그래야 그 최종 무기를 사용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황후께서 나서 줄 거예요.’

‘황태자는 황후의 친자입니다. 순순히 협조할까요?’

그의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던 아스텔이 통통 튀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네. 그분은 황태자와 달리 모든 제국민들을 사랑하시니까. 그리고 황녀 전하께도 언질을 드렸어요. 명석한 분이시니까 분명 도움을 줄 거예요.’

‘……잘될 겁니다.’

‘네에, 잘될 거예요, 우리.’

아스텔은 그에게 자그마한 방어용 마도구를 건넸다.

‘그 무기에 다칠까 걱정돼서요. 혹시 모르니까…….’

선대 아나이스 공작이 했던 말이 있다.

황가에는 보물을 모아 둔 창고가 하나 있으며, 개중 가장 귀한 것은 시간선을 뒤틀어 회귀를 일으키는 토템이라고.

‘제가 짐작하는 무기가 맞다면 전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네? 왜요?’

‘저는 시간 마법에 구애받지 않으니까요.’

이미 신에게 수명을,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긴 존재.

고로 회귀와 같은 시간 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속삭이자 아스텔의 눈가가 뜨끈해졌다.

그녀는 슬픔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코를 훔쳤다.

‘이젠 내가 지켜 줄게, 녹스!’

당시 그녀는 조그마한 어깨를 멋지게 펴고 당당하게 소리쳤었지.

하지만 이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던 아스텔은 그의 저택에서 숨이 멎은 채였다.

그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그러나 임무는 착실하게 수행해야 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기록실의 문을 열었다.

아스텔의 충실한 번견으로서, 그녀가 숨이 멎기 전에 했던 마지막 부탁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니까.

* * *

“그 소식 들었어?”

“황태자 전하의 소식? 들었고말고!”

가판대에 늘어선 상인도, 손님도 물건을 사고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제각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황태자의 패륜적 행위에 대해 떠들어 댔다.

“벌써 황태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시위까지 하고 있는데!”

머리에 쪽을 찐 아낙네가 황태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가판대의 늙은 상인이 가두 행렬을 보더니 혀를 쯧 찼다.

“……아무렴,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니, 말 그대로 역적인데. 극형만으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가두 시위대는 열을 맞춰 행진하며 황태자의 패륜 및 부정행위를 전파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황태자를 지하의 가장 아래 감옥에 가뒀다며, 글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더라.”

“재판은 언제야?”

“그 무리들도 싹 다 잡혀가서, 지금 황태자와 연이 닿았던 귀족 나으리들이 몸을 잔뜩 사리느라 거북목이 되었다잖여!”

근래 황궁에서 일어난 일 덕분에 상점이 늘어선 아르벤트 광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여자들은 이제 슬슬 다른 이야기를 물색하려는 듯했다.

“단순히 폐하만 시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면서?”

“……그래, 폐하뿐 아니라 귀족들까지 건드렸다 들었네.”

“칸트 가문이나 아샨 가문은 이미 복위가 끝났대.”

“그런데 말이지…….”

“응, 그런데?”

여자들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이제 뷔에트리 백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콘윌 공작, 아니. 이제 공작이 아니지. 그 괴상한 놈 때문에 누명을 쓴 거라며!”

“엄청난 역적이라 하여, 피의 카니발까지 벌였는데, 알고 보니 억울한 피해자라니.”

“그들도 작위가 복원되는 중이라대.”

“하면 무얼 해. 방계까지도 죄다 처형당했으니.”

“안 됐어……. 살아만 있었어도, 보상으로 찬란한 영광을 누릴 것을.”

한참 시끄럽던 와중에 다들 갑작스럽게 침묵했다.

뷔에트리 가문은 뼈도 못 추리고 색출 당해, 이제는 가문에 관련된 자가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비극이었다.

“다시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한들 모조리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겠나…….”

“애도나 하지.”

그들은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침묵했다.

제일 먼저 뷔에트리 가문에 관한 화제를 꺼낸 상인이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시야에 화제를 쉽게 전환할 만한 상황이 나타났다.

감색과 회색이 섞인 기사복을 입은 사내가 가판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감고 있는 걸 보아 하니 제법 오래 서 있었던 듯했다.

“어어, 거기 기사님. 왜 가만히 있었어? 물건 사러 온 거 아냐?”

기사라 칭해진 사내가 눈을 반짝 뜨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 네. 여기 목걸이 하나 주세요.”

그의 멋들어진 목소리에 애도하던 사람들조차 눈을 번뜩 떴다.

자리한 모든 사람들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침묵했다.

곱슬곱슬한 데다 윤이 나는 갈색 머리에 청명한 녹음을 닮은 눈동자, 짙게 들어간 아이홀까지.

눈앞의 사내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상인이 그를 보며 물었다.

“……크흠, 부인에게 줄 건가?”

투박한 튜닉을 입은 여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연인이려나? 아아, 훤칠하니 잘생겼네. 이리 잘생긴 얼굴을 내 처음 보는 게 아닌 듯싶은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가판대의 늙은 상인이 슬금슬금 기사의 어깨에 닿으려는 여자의 손을 ‘탁’ 쳐냈다.

“예끼! 어디서 수작질인가! 이백 센트일세.”

“아아, 괜찮습니다. 여기 값입니다.”

마지막까지 예의 바르게 웃은 사내는 호박색 목걸이를 손에 들고는 흔쾌히 값을 치르고 떠났다.

자리에 모인 여자들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도, 여전히 거리를 메우는 시위대의 소음도 잊고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더라. 저리 잘생긴 얼굴을 모를 리 없는데……. 허, 참.”

“어찌 저리 잘생겼을꼬?”

기사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쯤에야,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여자 상인이 손뼉을 딱 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저, 저이 말이다. 그분 아니냐?”

그녀의 말에 모두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지! 맞아, 맞죠?”

카시언 그레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가판대의 모든 여자들이 애달픈 침음을 삼켰다.

“그, 그렇지. 저리 훤칠한 데다 잘생긴 남자는 그이밖에 없잖어!”

가판대에서 자수정을 가지고 놀던 어린 여자아이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싸인 받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카시언 경이 목걸이를 사 간 상점이라고 간판을 새로 달아야 쓰겠네.”

그들은 아쉽다는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카시언은 이미 떠난 뒤였다.

자신이 어떤 파란을 일으켰는지 모르는 카시언은 광장을 떠났다.

그리곤 서늘한 기운까지 감도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황궁으로 가는 공용 마차의 삯을 지불하고 올라탄 그는 마차 차창의 속 커튼까지 전부 걷었다.

창밖에서 시위대가 황태자를 규탄하고, 뷔에트리 백작가를 애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또렷이 바라보면서 지난 며칠 간의 고군분투를 회상했다.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 그리고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이 황태자 궁의 기록물 보관소를 열었을 때.

‘여기가 바로 황태자의 부정을 입증할 수 있을, 황태자 궁의 은밀한 기록실입니다.’

‘……여기군요.’

‘오……. 여기서 적대하는 가문들에 대한 평판을 관리한 모양이군요.’

기록물 보관소의 맨 끝, 커다란 서랍장에는 흑요석처럼 보이는 까만 마정석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흑마법 주술이 걸린 것처럼 보이는 마정석들을 응시했다.

‘저 마정석을 통해 제국민들을 세뇌한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자, 보십시오.’

마법사가 표면에 ‘칸트 가문’이라고 적혀 있는 마정석을 꺼내 들더니 톡톡 건드려 깨트렸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깨진 마정석 조각이 슬금슬금 증발하듯 사라졌다.

카시언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묘한 기분이 드는데?’

‘보자……. 이 마정석에 걸려 있는 건 칸트 가문이 폭도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마정석에 세뇌용 흑마법을 걸어, 수도 사람들 전체의 무의식을 조종한 것이지요.’

사건 수습을 위해 기록실에 함께 와 있던 중급 마법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지금까지 칸트 가문이 폭도라고 생각했었지?’

‘세뇌 마법에 당한 거지.’

카시언이 한참 말이 없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연했다.

‘뭐, 상대가 광범위한 탓에, 개개인의 불쾌함도 얕은 수준이기는 할 겁니다. 어쨌든, 피의 카니발 때에 사람들이 왜 미쳐 있었는지는 알겠군요.’

씁쓸함을 뒤로한 채, 마정석은 빠르게 깨져 나갔다.

사람들의 무의식에 걸려 있던 세뇌 마법을 없앤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황태자와 콘윌이 여러 귀족 가문에 누명을 씌워 조작했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밝혀졌다.

그로써 뷔에트리 가문을 포함한 여러 가문의 누명이 벗겨졌다.

그간 모진 핍박을 당한 뷔에트리 가문은 다시 귀족 가문에 정식으로 명패를 올렸다.

자신이 뷔에트리 가문의 후계자이며, 아스텔은 제 동생이라는 사실을 제국에 알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화려한 귀환 직전.

카시언은 눈을 느릿하게 내리 감았다 떴다.

모든 게 잘 풀린 상황이었으나 가슴 한편에 미묘한 위기감이 치받았다.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황태자를 처리할 때도, 진상을 규명해 나갈 때도, 하다못해 지금조차도…….

이 모든 판을 짠, 아스텔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스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왜 아스텔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

벌써 가문을 둘러싼 오욕이 사라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스텔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황제의 앞에서 그들 남매가 뷔에트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되는데…….

그렇게만 한다면, 뷔에트리 가문은 더욱 찬란한 영예로 빛나리라. 오명을 딛고 황제를 구한 가문이 되었으니까. 조만간 아스텔과 함께 부모님의 넋도 기릴 수 있을 것이고, 룬도 만날 수 있겠지…….

그의 양 뺨이 뿌듯함으로 달아올랐다.

‘아마도, 공작 저택에서 쉬고 있으려나, 그러면 만나러 가면 되겠지.’

곧바로 아스텔을 만나러 가려던 카시언은 잠시 발을 멈추었다.

분위기가 다소 미묘하기는 했다. 기록실에서 만났던 아나이스 공작은 여전히 그를 차갑고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그 모습이 매우 대단히 재수 없었다. 아마 그 재수 없는 자가 아스텔을 보호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아나이스 공작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몹시 바쁩니다.’

기록실에서 일을 마친 공작은, 무려 카시언을 귀찮다는 듯 응시한 뒤 저벅저벅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자신과 아스텔의 관계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조만간 두고 보자.’

섬뜩한 미소를 지은 카시언은 몸을 휙 돌렸다. 물론 카시언은 그 후로도 아스텔과 접촉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도의 아나이스 공작 저택 쪽에 은근히 서신을 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서신이 전달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스텔의 답장은 돌아오지도 않았다.

아스텔과 룬이 수도 아나이스 저택이 아니라 북부 공작성에 머무르는 중인가, 싶어서 레이첼을 통해 북부 공작성의 분위기를 염탐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하지만 레이첼도 아스텔이 당최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사흘 만에 백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첼로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첼로는 그저 구슬프게 까악거리며 그의 곁을 맴돌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카시언은 며칠째 아스텔과 연락하지 못했다. 하도 연락이 안 되니 초조해서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아스텔, 무슨 일 있나? 많이 피곤한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드디어 우리가 원하고 또 원하던 복수극이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인데. 이렇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수가 있는 건가, 싶어서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그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피곤하니 쉴 수도 있겠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황태자는 감옥에 갇혔고, 웬만한 황태자파 귀족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나이스 공작 역시 어제부터는 저택에서 조용히 칩거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참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나이스 공작 저택으로 향하면 그만이었다.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 저택에서 자신을 기다릴 두 피붙이들을 떠올리며 낮게 웃었다.

아스텔, 그리고 룬.

그러고 보니 룬에게도 이제 자신의 뿌리를 알려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난 아저씨가 아니라 네 진짜 아빠라고 말이다. 아저씨, 라고 말하던, 뺨이 포동포동한 룬을 떠올리면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쩐지 비밀 통로에 갇혔을 때보다 더 떨렸다. 그는 민망한 듯 목을 움츠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네 아빠, 아니야. 너무 멋대가리 없는데.”

그는 아무도 없는 마차 맞은편 소파만 노려보면서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큼, 큼. 아빠는 널 버린 게 아니었단다.”

평소 수도의 꽃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떨림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 옆에 있는 분은 고모야. 고모, 알지?”

마치 제 눈앞에 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시언이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아빠가 매일매일 사랑한다, 우리 아들.”

입매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고 가슴 깊은 곳에서 행복감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둘을 아나이스 공작 저택에서 정식으로 데려오면, 다시 가문을 일으키고 가장 귀한 것들만 주어야지.

카시언은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며 입술을 감쳐 물었다. 먼저 황가에 귀속되어 있던 가문의 대지와 저택을 돌려받을 것이다.

황궁 측에서 누명을 쓴 가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도 했으니 재정적으로는 모자람이 없을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셋이 오순도순 도란도란 함께 사는 미래가 그려졌다.

아나이스 공작 같은 불순물은 치워 버리면 그만이겠지…….

장밋빛 미몽에 잠긴 카시언의 뺨이 붉어졌다.

그들 남매의 앞에는 정말로 행복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창을 열고 마차 뒤에 선 마부 조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나이스 공작 저택으로 가지.”

“예?”

“수도의 아나이스 공작 저택 말이야!”

활짝 웃는 그를 보며 어린 조수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무리한 부탁마저도 들어주고 싶어졌다.

말 머리를 돌리는 건 충분히 괜찮은 일 아닐까?

비록 그들의 마차가 황궁에 거의 다 도착했을지라도!

* * *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카시언 그레이의 알현은 자못 당당한 구석이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건조한 표정에 눈매를 약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군요.”

카시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철벽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드디어 복수에 성공해서 아스텔을 만날 수 있으니까.

카시언은 입술을 달싹이려다 멈칫했다.

사실 묘하게 신경 쓰이는 게 있기는 했다.

‘공작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했지, 무슨 상중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명 아나이스 공작가라면 고용인들을 최고로만 구성했을 텐데.

문을 열 때도 거듭 실수를 하지를 않나,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질 않나.

하나같이 안색도 새하얗기 짝이 없었다.

카시언은 응접실 쪽 복도를 걸어오면서, 새끼 은여우가 눈물을 펑펑 쏟는 진귀한 장면도 보았다.

‘힝, 히잉…….’

‘왜 우니?’

‘허어엉…….’

동글동글한 꼬리와 뾰족한 귀가 동시에 아래로 축 처진 여우에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펑펑 울던 아기 여우는 깜짝 놀란 듯 쪼르르 복도를 뛰쳐나갔다.

여우가 머물렀던 복도의 바닥은 온통 눈물범벅이었고…….

“왜 말이 없습니까.”

“아.”

잠깐 아나이스 공작저의 묘한 상황에 대해 떠올린다는 것이 그만 오래 침묵한 모양이다.

카시언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아스텔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그를 탐색하듯 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분명 평소처럼 쌩한 태도에 오만한 귀족적인 모습 그대로인데, 이상하게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내처럼 보였다.

“……공작 각하?”

카시언이 그를 호명하자 아나이스 공작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지금 공작저에 계시는 건 맞습니다.”

“만나게 해 주시죠!”

아나이스 공작은 쾌활한 그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낯이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카시언이 그의 태도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때였다.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아스텔의 호위 기사로 발탁되었던 마이어 경이 들어왔다.

공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카시언은 미묘한 시선으로 마이어 경의 잘 깎은 밤톨 같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눈치였다. 마이어 경이 아스텔의 호위 기사가 된 만큼, 카시언은 마이어에 대해서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마이어는 우직한 곰 같은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얼핏 본 그의 안색은 시퍼렇고, 불그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마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처럼.

“공작 각하, 객이 계신데…….”

……실제 목소리도 다 죽어 가는 자의 것이었다.

공작저 전체가 이런 것으로 봐선 개인적인 사유는 아닐 터였다.

아나이스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마이어 경을 향해 속삭였다.

“이자는 알아도 상관없다.”

순식간에 ‘이자’로 격하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카시언이 불꽃 튀는 시선을 마이어 경 쪽에 던졌다.

마이어 경이 절망 가득한 침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아스텔 님의 관을 준비해, 자그마하신 몸을……. 꽃과 함께 넣어 드렸습니다.”

내내 태연자약하던 아나이스 공작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꽃은 내가 고른 것으로 해 두었습니까.”

“예, 히아신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직접, 가서 보시겠습니까?”

그 순간, 카시언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시언이 한기가 쌩쌩 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리고 다시 멈칫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단어의 조합인지.

아스텔의 관이라니, 꽃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

순간 텅 빈 마이어 경의 동공이 카시언을 직시했다.

유리알보다도 공허한 눈동자를 보니 불길한 예감에 목뒤부터 뻣뻣해졌다.

그는 마이어를 노려보다가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공작 각하. 내게 제대로 설명해.”

“뭘 말입니까.”

아나이스 공작은 이 와중에도 상당히 침착했다. 자못 뻔뻔해 보일 정도로.

그 사실을 참을 수 없던 카시언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아스텔의 관이라니. 아무래도 개잡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카시언이 불량하게 속삭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래도 내 귀가 먹은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재미도 없는 헛소리를 구구절절하냐는 듯한 태도였다.

“일어나십시오.”

“그게 무슨 개소리냐니까.”

카시언의 말끝이 짧아졌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카시언의 어투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느른하게 제 미간을 문지르다 입을 열었다.

“일어나야 아스텔을 보러 갈 수 있을 겁니다.”

“아, 네. 확실히 내 눈으로 봐야겠, 습니다. 각하.”

아스텔이 관짝에 들어가 있다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카시언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아나이스 공작이 응접실의 문을 손수 열었다. 문이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의 아가리만큼이나 시커멓게 벌어졌다. 카시언은 분개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으득 깨물며 문간으로 걸어 나갔다.

* * *

카시언이 떨리는 시선을 새카만 관 안으로 내리꽂았다.

새하얀 얼굴, 창백한 입술, 감은 두 눈까지.

“아스텔이 왜…….”

아스텔이 관 속에 있다니.

우리가 원했던 복수를 다 이룬 이 시점에, 이 아이가 왜…….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는 손을 겨우 더듬더듬 뻗어 아스텔의 코 아래에, 살짝 벌어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마지막으로 심장 언저리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댄 카시언은 무너뜨리듯 관 근처에서 몸을 허물어뜨렸다.

심장조차 뛰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잇새로 초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아스텔은 시체처럼 차갑고 뻣뻣했으며, 눈조차 뜨지 않았으니까.

눈에 보이는 모습을, 아스텔이 떠난 현실을 믿어야 할까.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아스텔을 응시하다가,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서 있던 아나이스 공작이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우는, 겁니까. 공작, 각하.”

카시언의 말 따위에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그는 눈가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떼어 냈다.

공작의 눈시울도 카시언의 것과 마찬가지로 붉어져 있었다. 심지어 뚝, 하고 물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시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흡 들이켰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법한 맹수가 애달픈 표정으로 아스텔을 응시했다. 바짝 마른 입술과 슬픔이 절절하게 어린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왔다.

그 순간, 카시언의 무의식은 아스텔이 진짜로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말았다.

“아아…….”

카시언의 무릎이 덜덜 떨리더니, 이내 힘이 풀렸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기울어졌다.

“우, 우으윽…….”

이제야 우리 겨우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카시언은 비척거리며 다시 일어나, 급히 제 곁에 서 있는 아나이스 공작의 멱살을 단번에 잡아 쥐었다.

“왜, 왜 말 안 했어. 이 개새끼야! 미리, 미리 말했어야지.”

공작의 잘못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정황상 황태자가 손을 쓴 거겠지.

아나이스 공작도 아스텔을 아끼는 만큼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갈 곳 잃은 분노는 곁에 있는 상대를 향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멱살을 풀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건조하게 대꾸했다.

“상당히 건방지고 갑작스럽게 하극상을 벌이는군요.”

“왜 말 안 했냐고, 이 개자식아!”

울었던 인간치고는 제법 평온한 낯을 한 공작이 카시언의 손을 떼어 냈다. 카시언의 뒤틀린 심사가 두 배로 더 뒤틀렸다. 눈에 핏줄이 터진 듯 아려 왔지만, 눈을 몇 번 비비고 공작을 향해 사납게 일갈했다.

“아스텔이 죽었어. 그런데 넌 매우 평온해 보이는군.”

카시언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아나이스 공작은 평온한 낯으로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눈물을 줄줄 흘린 것 같은데, 금세 다 훔쳐 낸 모양이었다.

재수가 없게도.

카시언은 이를 바득 갈며 그를 매섭게 응시했다.

“죽어서도 따라갈 기세더니.”

“물론 죽으면 따라갈……. 아니.”

아나이스 공작이 드물게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진짜로 아스텔한테 아무 말도 못 들은 겁니까?”

카시언이 냉랭하게 반문했다.

“무슨 말?”

공작의 혼잣말이 짧게 이어졌다.

“듣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아스텔이 죽…… 아니, 이렇게 됐는데?”

“못 들었군요.”

아나이스 공작의 뻔뻔스러운 낯짝에서 묘한 우월감이 엿보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나.”

카시언은 속으로 울컥 치받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며 그를 향해 짓씹듯 말했다.

“정확히 뭘 들었다는 거지, 그딴 더러운 표정은 또 뭐냐?”

공작에게 무어라 더 대거리하고 싶은데, 관 속에 갇힌 그녀를 보니 심장이 뛰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아스텔이 왜 죽어 있는 건데…….’

카시언은 몸에 힘을 풀고 훌쩍거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까만 관의 뚜껑을 차마 덮지도 못한 채로 하염없이 아스텔의 뺨을 매만졌다.

“넌 왜…….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아나이스 공작이 마이어 경을 내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스텔의 시신 앞에서 무섭도록 침착했다.

하긴, 그래서 저런 새끼와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아스텔에게 누누이 말했던 거였다.

아스텔이 죽었는데 고작 눈물 좀 흘리고 말다니.

“……공작, 아니. 짐승 새끼야.”

아나이스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나 지금 카시언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분노로 주먹을 파들파들 떨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넌 왜 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거지? 아스텔의 곁에 있었으면서, 그 애를 지켜 주지도 못한 주제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죄책감은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차분해 보이냐고.”

분명 울기는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초연한 태도였다.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아스텔이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침묵을 고수하기로 한 낯짝을 보고 나니 분노가 폭발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어도, 그 애를 지켜 주지 못한 게 죄였다.

아스텔을 지켜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기혐오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바라 왔던 대로, 모든 것이 밝혀졌다.

황제가 곧 뷔에트리 가문의 복원을 선언할 것이다.

그러니, 카시언 그레이도 아스텔도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뷔에트리 가문을 둘러싼 모종의 음해는 어제 전부 풀어 두었으니까.

내일이 된다면 이 세상에, 그가 뷔에트리의 진정한 후계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아스텔 역시도.

조만간 아스텔과 함께, 나란히 황제의 앞에 가서 천명하려 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카시언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카시언을 오만하게 깔아 보고 있었다.

“내 소중한 아스텔이 이렇게 되었는데, 뭘 말할 수 없다는 거냐고. 대체.”

“뭐가, 소중하다는 겁니까?”

“아스텔이 내게 소중하다고.”

“아스텔이 당신에게 소중하다니.”

아스텔이 죽어 버린 마당에 소중하다는 수식어 따위가 불쾌하다는 표정이라니.

카시언은 저치를 더욱더 용서할 수 없어졌다. 그의 입에서 조용히 분노의 속삭임이 튀어나왔다.

“지금 아스텔이 죽었는데, 그깟 말 가지고.”

아나이스 공작이 드물게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시언은 이를 으득,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래, 너 같은 냉혈한 짐승 새끼는 아스텔을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겠지.”

“그럴 리가.”

하지만 카시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속공했다.

“하지만 난 너와는 달라.”

아나이스 공작은 귀찮다는 듯, 냉소적으로 지적했다.

“이제 그냥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실제 카시언의 귀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목을 망연히 바라볼 뿐.

그는 그동안 그들 남매를 보호해 온, 손목의 흰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잇새에서 반쯤은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너와는 다르다고. 아스텔은 내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그 말과 함께 시선을 꼿꼿하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공작을 향해 선언하듯 소리쳤다.

“소중한 내 여동생이니까.”

그를 보던 공작의 눈이 흔들렸다.

“방금 뭐라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저 단단했던 눈동자가 ‘아스텔은 내 여동생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흔들릴 줄이야.

뭐, 놀라운 일이긴 할 터였다.

아스텔이 죽은 것보다는 덜 놀라운 사실이지만…….

카시언은 그를 향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대로 들었어.”

허망하게 조소한 카시언의 손목에서 새하얀 빛이 번지더니, 그곳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흩어지고, 번지고, 깨져 나갔다.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면서 차갑게 일갈했다.

“죽은 아스텔은, 내 소중한 친동생이라고.”

카시언의 묵직한 목소리가 아스텔의 관이 있는 공간 전체를 메웠다.

그 말을 증명하듯 카시언의 갈색 머리칼이 서서히 아스텔의 것과 닮은 금발로 변했다.

그의 녹빛 눈동자 역시 조금 더 짙은 색으로 변하며, 이목구비가 조금 더 또렷하게 바뀌었다.

원래도 비슷한 인상이었지만, 단숨에 변한 카시언의 얼굴은 아스텔과 똑 닮아 있었다.

카시언이 허탈한 투로 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하,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아나이스 공작의 표정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단히 잘못된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안색이 파르스름하게 질리고, 카시언이 밭은 한숨을 몰아쉬며 대치하는 사이.

아스텔이 안치된 관 안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났다.

토독, 하고.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바스락, 바스락.

눈에 실핏줄이 터진 카시언의 눈동자가 관 안쪽으로 가닿았다. 카시언의 시선이 사락거리는 꽃 쪽을 향했다.

‘아스텔의 관을 대체 어떻게 관리했기에 저딴 소리가 나지.’

“비켜.”

카시언은 얼음이 된 것처럼 굳어 버린 아나이스 공작을 두고 관 앞으로 급히 다가갔다.

아스텔이 관 안에 있었다. 히아신스 꽃과 튤립을 포근한 베개처럼 받치고,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곤히 자는 모양새였다.

그가 아스텔의 몸이 놓인 관의 꽃을 연신 헤쳐 보았다. 그러나 바스락대는 소리는 사라진 뒤였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그저 고요히 잠든 아스텔의 모습뿐이었다.

카시언은 애절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스텔의 얼굴을 손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려 보였다.

“눈 떠, 아스텔.”

“…….”

“제발…….”

그는 관 앞에서 간절하고 애타게 호소했다. 손을 가슴 앞으로 세운 채로 기도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카시언의 애절한 호소가 신께 닿은 모양이었다.

아스텔이 눈을…….

……눈을, 떴다?

카시언은 떨리는 아스텔의 눈꺼풀을 보다가 멈칫했다. 눈꺼풀이 조심스럽게 떠지고, 싱그러운 풀잎을 닮은 영민한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잠시 초점을 찾는 듯 눈을 깜빡거리던 아스텔이 얼빠진 표정의 카시언을 직시했다. 카시언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반문했다.

“……유, 유령?”

아스텔의 얼굴에 묘한 의문이 어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였다. 그녀는 삐거덕거리는 어깨를 손으로 뚝, 뚝 맞춰 가면서 풀었다.

“웬 유령? 아이고, 어깨 아파…….”

그때까지도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은 각자 놀라움 속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아스텔만이 생동감 넘치는 태도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근육을 움직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 걸 보니 모든 게 잘된 건가, 그치?”

아스텔이 신기한 듯 쫑알거리자 새하얀 입술 색이 분홍빛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며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시언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아스텔을 보았다.

“누구야, 너.”

아스텔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살랑살랑 웃으며 카시언의 어깨를 톡 쳤다. 그때까지도 카시언은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숨만 급하게 들이켜고 있었다. 그제야 의아함을 느낀 아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냐니……? 그 표정은 뭐야?”

아스텔의 시선 속에 담긴 카시언은 마치 영혼을 누군가에게 빨린 것처럼 혼비백산한 낯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시언을 응시하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죽은 사람 보는 표정이야?”

“죽은 사람이니까……. 부, 분명 심장이 안 뛰었는데…….”

“……아무 쪽지 못 받았어?”

아스텔이 더욱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시언은 의문이 도사린 눈으로 물었다.

“무슨 쪽, 지……?”

“쪽지 두 개 줬는데, 기억 안 나?”

그제야 아스텔이 지난날 자신에게 쪽지를 두 개 남겼었다는 게 떠올랐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기는 했지만…….

카시언은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급하게 닦으며 중얼거렸다.

“……응, 두 개 줬었는데. 혹시 거기에 적혀 있기라도 했-”

그의 혼비백산한 표정을 보던 아스텔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으응, 나 죽은 척하는 약 잠깐 먹어 두겠다고 적어 놨는데! 왜 못 보고 그래!”

해사한 아스텔의 미소를 마주하며, 한결 머쓱한 표정이 된 카시언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만 달싹였다.

“나 죽은 줄 알고 울었구나?”

아스텔은 그의 눈가를 닦아 주며 친밀하게 속삭였다.

“울보네, 완전.”

“아니야, 나 안 울었다.”

“……거짓말.”

카시언은 가슴을 탕탕 치더니 억울하다는 듯 눈을 세모꼴로 떴다.

하지만 죽다 살아난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어떻게 제 화를 풀어낸단 말인가.

그의 범처럼 매서운 시선이 아스텔 주변을 휘돌았다. 그리고 카시언은 마침내 희생양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알고 계셨습니까, 공작 각하?”

그들 사이에서 몇 발자국 멀어진 상태로, 아나이스 공작은 묘하게 공손해진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진중하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예.”

카시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보다도 깨어난 아스텔 쪽에 더욱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가 손을 움찔거리며, 금방이라도 아스텔을 에스코트하고 싶다는 태도로 중얼거렸다.

“일단 아스텔을 먼저 관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눈을 굴리며 둘의 대치를 관전하던 아스텔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 혼자 나올게, 몸이 좀 뻣뻣하긴 한데 괜찮아!”

카시언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위험해.”

그는 아스텔의 손을 잡아 그녀가 관에서 빠져나가게 도왔다.

아나이스 공작의 손이 아스텔을 에스코트하고 싶어 움찔하는 것을 선연히 본 뒤였다.

아스텔이 관에서 몸을 일으켜 나오는 사이,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을 겨냥해 물었다.

“됐고, 그럼 당신 왜 울었어?”

그러자 아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어어? 울었어?”

그러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나이스 공작이 쭈뼛쭈뼛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생명이 다한 것처럼 누운 것을 보니 슬펐을 뿐입니다.”

상당히 로맨틱한 대답이었다. 아스텔의 두 귀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카시언은 갑작스럽게 이 자리에서 소외되는 기분에 열불 터지는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아, 그랬구나…….”

아스텔의 뺨까지 상기되는 것을 보던 카시언이 원독에 찬 눈빛으로 손을 바르르 떨었다.

‘하필 우리 남매가 해후한 이 시점에, 아스텔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다니.’

유치하게도 아스텔의 주의와 관심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더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하여튼 두 배로 마음에 안 드는데.’

한편, 얼떨떨한 감정을 느낀 것도 잠시였던 걸까.

이미 카시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눈 녹듯 사라진 것처럼, 180도 태세 전환을 마친 공작이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어 보였다.

분명 호감을 사기 위한 행동이리라.

그러나 카시언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부루퉁한 표정을 한참 고수하던 그는 고개를 팩 돌리며 자신의 소중한 동생인 아스텔을 향해 사근사근하게 웃어 보였다.

* * *

다행히 관 근처에 원탁이 하나 있어 나와 오빠, 그리고 녹스 셋이 함께 앉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사정을 오빠의 입으로 전해 들은 내가 보인 반응은…….

“아, 진짜로? 그 장면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아쉬움이었다.

나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을 한 채 통통한 볼을 왼손으로 꾸욱 괴었다.

그러자 오빠가 어깨를 치켜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황태자를 처리할 때 얼마나 멋있었는지, 네가 봤어야 했는데!”

오빠의 광대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광대를 꾸욱, 누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으응, 그치.”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죽어 있던 건데!”

“황태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눈을 속이려면, 다른 방법도 있잖아. 굳이 죽었어야만 했어?”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이는 오빠를 응시하며 말했다.

“황태자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오만하지. 자기가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하면 쉽게 방심하는, 그런 타입이더라.”

황궁 기사로 봉작하며 황태자에 대해 익히 느낀 바가 있었던 듯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꿈꾸는 모든 것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어. 그래야 더 콧대가 높아지고 시야가 좁아져서, 내가 세운 계획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나는 사뭇 진지한 오빠를 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나 오빠는 내 장난기 어린 웃음에도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난. 꼭 그게 네 죽음이었어야 할 필요가…….”

“뭐 어때, 진짜로 죽은 것도 아닌데. 내 죽음으로 날 혐오하는 콘윌도 잡을 수 있으니,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어휴, 넌 간도 크다.”

내 말에 오빠는 머쓱한 듯 뒷덜미만 긁적거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음, 그러니까. 황태자가 내 죽음을 알고 방심한 사이, 공작님과 오빠가 찾아가서 처단하는 계획이었어. 그래야 황태자가 도망칠 생각 못 하고 가지고 있는 최종 무기를 사용할 테니까.”

최종 무기.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찜찜한 지점이었다.

최종 흑막이 지닌 비장의 무기에 대해서는 원작에 언급되어 있었다.

‘흑막의 손에 비장의 무기가 있다’ 정도였을 뿐, 사용된 바는 없었기에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위험한 무기라는 서술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최종 무기를 무효로 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는데…….

‘정확히 어떤 건지 묘사되지 않아서 골치가 아팠어. 하지만 황태자가 콘윌과 손을 잡은 만큼, 황궁에서 모셔 둔 귀물이 아닐까 했지.’

나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녹스 쪽을 잠깐 응시하며 침을 삼켰다.

“사용…… 했어?”

“네, 최종 무기는 없앴습니다.”

건조했던 그의 낯이 안온하게 풀린 걸 보니 한결 안심되었다.

“뭐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묻는데, 오빠가 득달같이 우리 둘의 시선 교환을 끊어 냈다.

“최종 무기는 또 뭐야?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회귀용 토템을 반출했다고 들었어. 그 이야기야?”

녹스에게서 급히 시선을 거둘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네, 회귀용 토템이 맞습니다.”

오빠와 녹스의 말에 나는 눈썹 끝을 치켜떴다.

회귀용 토템이라니, 황태자가 비장의 무기를 발동시켰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당할 뻔했다.

“어떻게 없앴어?”

“황후 폐하께서 행차해서 시간을 돌리셨다고만 들었어.”

오빠가 활짝 웃으며 한결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 황후 폐하를 도왔겠지. 그렇죠?”

녹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시공 마법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까.’

안쓰러운 마음을 딛고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셨구나.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희생이 클 뻔했는데.”

내 혼잣말을 듣던 오빠의 눈이 커졌다.

“네가 전부 다 의도한 거였다고, 황후 폐하의 개입조차도?”

“응. 황궁의 귀물을 다룰 수 있는 건 황제와 황후, 황태자. 이 셋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황후 쪽에 여러 가지 힌트를 남겼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 궁에 치료사가 많다는 말을 남기고, 황후에게 보내는 약을 끊어 황후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금족령으로 인해 유폐되어 있으니 치료사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을 터.

그런 그녀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태자 궁에 들어갈 것이 자명했다.

황태자의 꿍꿍이에 대해서 눈치채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였을 것이다.

그 음험한 속내만 알면 황후의 성정상 황태자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겠지.

‘최종 무기가 황궁의 귀물이라는 것밖에는 몰랐으니까, 황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

어떻게 보면 황후와 황태자의 심성과 심리 상태를 믿고 도박 수를 던진 셈이었는데, 훌륭하게 성공했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우쭐하게 덧붙였다.

“좋아, 나 되게 멋있는 것 같아!”

오빠는 내 손을 덥석 잡고 연신 흔들어 댔다.

“역시 똑똑해, 천재야.”

그러더니 급기야 머리칼을 매만져 주는 게 아닌가.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에 나는 배시시 웃으며 생각했다.

오빠의 궁금증도, 우리 사이의 회포도 풀었겠다.

이쯤 되면 제법 성공적인 재회가 아닌가, 하고.

‘그러고 보니 뭔가 위화감이 드는데.’

나는 오빠의 손을 떼어 내다가, 문득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빠랑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 게다가 오빠가 내 손까지 잡았는데 녹스가 아무 말도 없는 게 이상해.’

그뿐이랴. 지금 녹스는 묘할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나는 급히 녹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빠가 뚱한 어조로 지적했다.

“우리 대화에 집중해.”

녹스는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려다 오빠의 말에 멈칫했다.

평소처럼, ‘카시언 경은 닥치십시오.’라고 하며 서릿발 쌩쌩 날리는 태도를 보여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정말로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둘이 분위기가 좀, 음…….”

묘한데, 라고 말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는데, 지금 오빠 머리카락이 금발이잖아?’

꼭 은신 마법이 풀린 것처럼…….

나는 다급하게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손목에 새겨져 있어야 할 마법진이 사라졌다.

손목을 이리저리 살펴도 흔적조차 없었다.

그제야 나는 눈치챘다. 녹스가 알아 버리고 말았다. 나와 카시언 그레이 경이 친남매라는 걸!

“혹시 우리 관계, 말했어……?”

주춤주춤 건넨 말에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내 예상대로 놀란 토끼 눈을 한 오빠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응, 내가 말했어. 너 주, 죽은 줄 알고…….”

“……진짜 바보 같아!”

오빠는 가벼운 힐난에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뒷덜미를 긁적였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다시 녹스를 응시했다. 비록 마법 때문이었다지만 녹스에게 내 행동은 기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 지금까지 말 못 해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나와 녹스가 가만히 서로를 보며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듯 웃었다.

그러나 그때 오빠가 분위기를 깨며 투덜거렸다.

“당연히 괜찮아야지, 은신 마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 못 한 건데.”

오빠의 눈에 약간의 분노가 일렁였다. 나는 다시 급하게 파국이 되려 하는 상황을 수습했다.

“은신술엔, 우리가 남매란 걸 말하면 안 된다는 제약이 있었어요. 그래서, 미리 말 못 한 거…… 였구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슬슬 우리 남매가 뷔에트리 가문 출신이었다고도 말하려 했는데,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오빠가 칼같이 쳐냈다.

“거기까지 해. 다른 비밀은 나중에 얘기하는 거로 해.”

“왜?”

“그 비밀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터트릴 거니까.”

“하지만 공작님은 알아도…….”

“쉿, 일단은 우리만의 비밀로 남겨 두자구.”

오빠는 녹스를 견제하듯 다소 심술궂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녹스는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한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스텔. 은신술 때문에 말 못 한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역시 배려심도 깊고…….

……라고 생각했으나, 오빠의 태도는 달랐다.

오빠는 녹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대놓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냥 이해하는 척하는 건 아닙니까?”

나는 혹시 다툼이 시작될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녹스의 태도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레이 경. 제 진심을 어떻게 보증하면 되겠습니까.”

오빠를 향해 환히 웃기까지 했다. 상대를 의식한 듯한 미소였다. 슬슬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생각에 나도 마주 웃으려 했지만 오빠가 선수를 쳤다.

“필요 없습니다.”

‘오빠 혹시 단호박이야?’

오빠가 잊는 게 있는 듯한데, 녹스가 조금 말랑해졌다지만 무려 이 제국의 공작 각하였다.

공작님에게 무례한 건 즉결 처형감인데 상당히 시건방지게 고개를 휙 돌린 데다 단답까지.

녹스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하지만 그는 사뭇 다정하게 속삭였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진심을 증명할 테니, 말만 하십시오.”

“하하……. 못생기고 문란한 제게 그런 기횔 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이군요.”

……오빠는 삐쳤다, 삐친 거다.

그 순간 나는 완벽하게 느끼고야 말았다.

저 둘 사이의 갑을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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