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7. (2)
정신을 차렸다지만 건강을 완전히 다 회복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녹스가 우는 걸 보고 왜 우냐면서 타박하다가 나 역시도 한참 울었다.
그 결과는 탈진!
결국 녹스는 내 몸을 김밥처럼 이불로 둘둘 감싼 뒤, 따뜻한 우유를 한 잔 건네주었다.
한참 울고 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계속 내 옆을 지키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위험한 흑막, 아나이스 공작님과 나의 귀여운 멍멍이, 녹스 사이에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너무 신기해…… 요.”
이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가 퉁퉁 부은 내 눈가를 매만져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작았던 소년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강해지기까지 어떤 시련들이 있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담겨 있는 삶의 무게는 절절했다.
나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고, 그는 조심스럽게 내 눈가를 만져 주었다.
“당신이 키우던 고양이 말입니다.”
“네.”
“그 고양이가 어떻게 다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달콤한 재회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추궁의 시간이 온 걸까.
“콘윌 저택으로 이동할 때, 그 고양이는 당신의 명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미, 이 고양이가!
그새를 못 참고 콘윌 공작에게 일부러 납치당하려던 내 계획을 다 불어 버린 건가……!
나는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으나, 다행히도 미미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에 내가 일부러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녹스가 이렇게 평온하지는 않겠지?’
아직 그가 아는 건 고양이가 나를 따르고 있다는 것 정도일 터.
그는 그저, 내 말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녹스는 감각이 좋으니까, 내가 일부러 모든 일을 꾸몄다는 걸 조만간 눈치챌 수도 있어.’
납치극을 두고 내가 판 함정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비약이었다.
하지만 녹스라면 어느 정도 연결 고리를 파악할 수도 있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변명을 짜내려 했다. 그러나 당황한 나와 달리 그는 여상한 태도였다.
“만약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리고 제가 도울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당연히 무엇이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는 안 물어봐…… 요?”
그의 눈동자는 올곧게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나이스 공작님’이 내 복수를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 혼자서만 움직였었다.
그러나 만약 녹스가 나를 도와준다면, 강력한 아군이 되어 준다면, 복수에 분명 거대한 전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녹스는 나를 위해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해 왔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과 달리, 녹스는 단호했다.
“아스텔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옳으니까.”
“…….”
“위험한 일은 당신에게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스텔.”
내 망설임을 무마하려는 듯, 그는 조금씩 떨리는 내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내 이마에 배어난 땀까지 가볍게 닦아 준 그는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듯 고요히 침묵했다.
도리어 그 분위기에 당황한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미미는 만난 것 같은데, 혹시 우리 오빠도 만났을까?
“그 자리에 다른 사, 사람은 없었어…… 요?”
그는 내게 협탁에 놓아두었던 우유 잔을 건네며 무심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 카시언 그레이가 저택 앞에서 행패를 부리더군요.”
그가 건네준 우유를 마시려던 순간, 바로 뿜을 뻔했다.
“컥.”
“저에게 꺼지라고도 했습니다.”
“그, 그렇…….”
“상처받았습니다, 아스텔. 친분을 다지기에 역시 그자는 질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녹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눈빛이었으니, 아무리 봐도 연기인 모양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녹스는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았던 전적이 있다.
게다가 각인 마법으로 이어져 있으니 완전히 내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콘윌 공작이 완벽히 잡히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오빠와 나의 관계를 그에게조차 완벽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은신 마법이 풀려 버리니까.
‘어서 오빠를 만나서 치부책을 획득했는지 알아봐야 해. 슬슬 은신 마법이 풀릴 때도 다 됐으니까 최대한 빨리…….’
어떻게 해야 당분간, 은신 마법이 풀리지 않게끔 녹스와 오빠 간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을까.
만약 녹스가 우리 남매의 복수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면 둘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야만 했다.
내 머리는 콘윌 공작을 처치할 때만큼이나 빠르고 맹렬히 돌아갔다.
몇 분 뒤, 마침내 괜찮은 묘수가 떠올랐다.
* * *
한편, 아나이스 공작 저택 바로 앞에는 카시언 그레이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콘윌 공작저에서 빼내 온 기록물, 속칭 ‘치부책’을 확인한 카시언은 뷔에트리 백작가 멸문 사건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윗선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뷔에트리 백작가를 멸문시킨 주도자는 콘윌 공작이지만, 그는 추후 자신의 악행이 밝혀질 뻔했을 때 황태자와 손을 잡아 사태를 무마시켰다.
그리고 황태자는 콘윌 공작과 함께 아나이스 공작령의 수인들을 모두 쓸어 버릴 계책을 짜고 있었다.
‘황태자는 수인들을 증오해.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무언가 당한 게 있는 거겠지.’
아나이스 공작령의 병력 조사, 아나이스 공작의 종족에 대한 각종 추측, 맹수에게 독약을 투여하는 방법.
그리고…… 마물 전쟁에서 공작을 포함한 맹수 수인들을 처리할 계책 몇 가지도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이번 마물 전쟁에서 아나이스 공작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적어 둔 지점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공작이 죽으면 북부령은 붕괴되고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대체 황태자는 왜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아나이스 공작을 죽이려 드는 거지?’
이 모든 사건을 확인한 그의 근심이 더욱 깊어졌다.
‘아나이스 공작은 나와 만나 줄 생각도 없을 것 같고.’
그렇게 카시언에게는 피를 말리는 듯한 며칠이 흘러갔다.
‘건강한 건지, 괜찮은 건지, 보고 싶어 죽겠다고.’
어떻게든 아스텔과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아나이스 공작 저택의 문을 두드렸으나, 문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굳건히 닫혀 있었다.
기대를 반쯤 버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망부석처럼 저택 앞에 서 있던 그때, 아나이스 공작 저택의 문이 열렸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십니까.”
“……네.”
가시를 세운 카시언을 보던 집사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주인의 명이십니다. 저택으로 들어오시지요.”
곧바로 집사를 따라 저택의 정문을 지나 복도를 거닐면서도 그는 갑작스레 저택에 들어서게 된 이 상황이 상당히 얼떨떨했다.
‘도대체 이 새끼가 무슨 꿍꿍이로 나를 저택에 초대했지.’
칼침이라도 놓지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아스텔을 걱정하느라 피가 마르는 줄 알았던 나날을 거친 카시언은 마침내 당당히 아나이스 공작 가문의 저택에 입성했다.
그는 핏발 선 시선으로 응접실에 들어섰고…….
“아스텔.”
“네, 공작님!”
응접실의 커다란 소파에서, 사랑하는 여동생과 파렴치한이 붙어 있는 끔찍한 모습을 목도하기에 이르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스텔은 오빠의 눈치를 보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시언은 보았다.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이 맞잡고 있는 두 손을.
콘윌 공작가에서의 일로 공작이 아스텔에게 한결 더 미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품 안에 넣어 둔 치부책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둘의 독대를 허용한다는 말을 하러 왔을 뿐.”
예상외로 아나이스 공작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맹수가 소유권을 주장하듯, 그의 눈앞에서 아스텔의 머리칼에 대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저 미친 새끼가 누구 여동생한테 지금.’
카시언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게 승리자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공작은 어딘가 미친 듯했지만 조금 더 온순한 분위기가 되었고, 그를 경계하는 듯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찜찜해 보이기도 했다.
카시언은 묘한 시선을 그의 뒷모습에 던졌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아나이스 공작은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물론 카시언 역시 그에게 욕설을 던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사이 공작과 아스텔이 무슨 말을 나눴길래…….
저거 대체 왜 저래, 갑자기?
* * *
아나이스 공작이 그래도 빠르게 자리를 비켜 준 덕분에, 아스텔과 단둘이 독대할 수 있었다.
그는 치부책을 찾았다는 말을 하기 전 아스텔의 건강부터 챙겼다.
“몸은 좀 괜찮아?”
“응! 다들 엄청 잘해 줘. 공작님도!”
혹시,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뜬 카시언은 진지한 얼굴로 손을 뻗어 아스텔의 이마를 짚어 보려 했다.
그러나 아스텔은 그의 팔을 꾸욱 잡아 치우며 발랄하게 말했다.
“나 안 아파.”
“이제 스무 살 됐다고 오빠 손을 쳐내고…….”
카시언은 조금 상처받았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일단 그 공작이 착하다는 근거를 대 봐. 그럼 오빠도 할 말을 할게.”
“음…….”
그는 삐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기껏해야 사랑인 척 속살대며 순진한 내 여동생을 괴롭혀 왔겠지.
안 봐도 뻔했지만, 여동생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외면할 자신이 없었던 카시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공작님이 아니었어! 아니, 아니지. 음, 공작님이 공작님인 건 맞는데……. 내가 알던 공작님이 아니었던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카시언은 아스텔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힘든 일을 겪고 온 여동생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아스텔. 천천히 말해 봐.”
“응!”
말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달래자, 이내 아스텔이 조잘조잘 말을 꺼냈다.
어린 시절 실종되었을 때 벌어졌던 일부터, 아나이스 공작이 사실 자신이 어린 시절 구해 주었던 어린 맹수였다는 이야기까지…….
카시언은 심드렁하게 들으려다 몇 번이고 당황해서 귀를 후볐다.
아스텔의 말 속에는 그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들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나이스 공작이 어린 시절의 너를 구했고, 믿을 만한 자라는 거지.”
아스텔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며 카시언은 ‘무장 해제’가 되었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고 생각했다.
“……일단은, 믿기 어렵지만, 알겠어. 그보다 네가 말한 치부책은 찾았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셔츠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 안에 [뷔에트리 백작가] 사건과 [아나이스 공작]이라고 쓰여 있는 리스트 등이 적혀 있었다.
‘아스텔이 기억 조작을 당했을 확률은 희박한데, 쉽게 믿기도 어렵고.’
착잡한 마음을 안고 종이 뭉치를 꺼내 가문 복수극의 진척도에 대해 알리려던 때였다.
아스텔이 카시언을 향해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응! 그리고 이제 연애하는 것 같아, 우리.”
“……뭐?”
“그러니까 일심동체라는 거지.”
해괴망측한 소리에 카시언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종이 뭉치가 대리석 바닥에 토독, 하고 떨어졌다.
“듣고 있어?”
“어?”
얼빠진 카시언과 달리 아스텔은 명랑했다.
“내 근황은 이게 끝이야! 그러니까 오빠, 이제 치부책 얘기를 하자. 치부책은 어떻게 됐어? 그 품 안에 있는 종이뭉치인 거지? 얼른 줘 봐.”
그러나 치부책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한 혼이 나간 표정으로 카시언이 손에서 힘을 완전히 풀어 버렸다.
“어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아무렇지 않게 주워 든 아스텔이 하나둘 넘겨 보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난 뒤, 카시언이 어느 정도 혼미했던 정신을 되찾았을 때였다.
아스텔의 표정은 어느새 싸해져 있었다.
“최종 배후는 황태자구나.”
나직하게 혼잣말한 채, 무언가 알 것만 같다는 묘한 표정의 아스텔.
어린 시절부터 아스텔은 종종 저런 낯을 해 왔다. 사뭇 진중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면 카시언은 절로 걱정이 되었다.
“콘윌 공작이 우리 가문을 망친 거였고, 황태자가 아나이스 공작을 마물 전쟁에서 처리할 계획을 짜고 있었어. 그 둘은 이종족을 혐오해서 손을 잡았던 거야.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정해졌네.”
아스텔의 말은 곧 황태자를 처리해야 한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내내 복수를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스케일이 컸다.
황족을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심장을 죄어 왔다.
그러나 빠르게 침착을 되찾은 카시언은 그동안 알아 온 황태자의 정보를 읊조렸다.
“아스텔, 황태자에게도 일종의 수집벽이 있어.”
“응.”
“그러니까 황태자 궁을 수색하면 콘윌과 합작했다는 증거가 나올 거야. 하지만 황태자 궁을 수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어떤 고위 마법을 써도, 황궁에는…….”
“황태자 궁을 샅샅이 수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직접 수색 명령을 내리는 것뿐이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아스텔이 낯빛을 묘하게 바꾸어 냈다.
“일단 공작님과 협력하자. 셋이 머리를 맞대면 황태자의 꼬리를 잡을, 자세한 방법이 나올 것 같은데.”
카시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자가 널 위해 희생한 거야 알겠는데, 아스텔.”
“응!”
공작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도로 밝아졌다. 한층 더 발랄해진 아스텔을 본 카시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우리 상대는 황태자야.”
“……응.”
“아나이스 공작이 아무리 과거에 네게 은혜를 입었고, 지금 네게 연애…….”
모든 일을 다 들었다 한들 순진한 여동생을 꾀어낸 그 맹수 놈을 떠올리니 으득, 절로 이가 갈리고 혀가 깨물렸다.
하지만 카시언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윽하게 물었다.
“……감정을 가지고 있다지만, 황태자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말을 큰 증거도 없이 믿고, 우리를 도와줄까?”
“…….”
“게다가 우리는 당장 신분을 밝힐 수도 없어. 그저 평민과 평민 출신 기사일 뿐이지.”
“응.”
“그래도 그가 우리를 도와줄 것 같아?”
[아나이스 공작]이라고 적혀 있는 파일철 따위로 누군가를 끌어들이기에는 상당히 허술했다.
황태자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계획 몇 개가 적혀 있는 글씨 따위.
직접 이 서류를 획득한 카시언 역시도 황태자가 콘윌 공작과 작당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나이스 공작은 경계심이 많고 예민해 최측근까지도 드물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런 허접한 실마리만 믿고, 황족을 상대로 한 싸움에 뛰어들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응, 공작님은 도와줄 거야.”
아스텔의 확신 어린 말투에 카시언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 * *
아스텔과 카시언이 마주한 장소 옆의 응접실.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과의 대화를 연신 복기하고 있었다.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그는 몸을 일으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느릿하게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차가우면서도 우아한, 지극히 귀족적인 모습이었으나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조금 전 카시언 그레이와 독대를 하겠다고 자리를 비켜 달라던 아스텔의 모습이 가득했다.
‘내 첫 키스의 상대가 녹스잖아. 그러니까 너는 내 멍멍이, 히끅, 고…….’
귀엽게 딸꾹질하는 아스텔을 떠올린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찻잔을 부술 것처럼 세게 손에 쥐었다.
주춤거리듯 눈치를 보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아스텔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카시언하고는 죽어도 키스할 일 없어! 아니, 뽀뽀도 할 일 없어! 진짜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오…… 아니 카시언은 신경 쓰지 마. 나 믿고! 잠깐 다녀올게!’
가만히 있던 그의 입술에 먼저 다가와 다정하게 입맞춤 한 아스텔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녹스, 공작님! 여기서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어…… 요!’
‘그럼, 카시언 그레이가 들어오는 것만 보고 떠나겠습니다.’
‘응, 나쁜 짓 하면 안 돼……, 요!’
그 순간의 모습과 기다려, 라고 말하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아스텔은 부쩍 자란 그를 대하는 게 조금 어색한 듯했지만, 어쨌거나 그를 기억해 냈다.
그 사실을 곱씹던 그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칫하다 부술 것 같았기 때문에.
그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창 바깥의 햇살마저도 평소보다 더 밝아 보였다.
카시언 그레이가 아무리 날뛴다 한들, 아스텔과 모종의 음모를 꾸미며 은밀히 가까워졌다 한들, 그녀의 것이자 첫 키스의 상대가 된 건 오직 녹스, 그뿐이었다.
행복함과 자긍심이 가슴 한편을 뿌듯하게 채웠다.
‘콘윌 공작 저택에서 그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고.’
그가 감정을 갈무리할 때쯤 문이 빼꼼히 열렸다.
문틈으로 내내 상상해 온 발랄한 그 모습 그대로, 아스텔이 보였다.
“들어와, 카시언.”
아스텔의 등 뒤로 카시언 그레이가 당당하게 따라 들어오는 것과, 둘의 사이가 지나치게 발랄하고 경쾌해 보인다는 것 빼고는.
완벽히 행복한 하루였다.
“할 말이 있어요, 공작님.”
그의 바로 옆에 앉은 아스텔은 맞은편 소파에 앉은 카시언 쪽에 눈짓했다.
카시언이 조용히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각하.”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는 카시언과 손이 닿지 않게 무심히 책을 건네받았다.
그 책 속에는 황태자가 마물 전쟁을 기해 그를 죽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확한 계획이나 방법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필체에 악의가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도, 맹수도 너무 많이 만나 왔다.
그게 그간 황족은 아니었을 뿐이지만.
무덤덤한 얼굴을 한 그는 자신에게 서류를 건넨 카시언 대신 아스텔 쪽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공작 각하를 마물 전쟁에서 죽이려고 해요.”
“이 말을 믿으십니까?”
아스텔이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작은 냉소적인 표정을 한 채 카시언 그레이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아스텔이 그렇다고 한다면, 믿습니다.”
순간, 카시언이 입을 달싹였다.
소리를 뱉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쉽게?’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의 시선이 거세게 맞부딪혔다.
그들의 기 싸움을 막기 위해서인지 아스텔이 급히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우리 셋이 같이 황태자를 상대하는 건 어때요? 도와줄게요! 특히 카시언은 내내 녹…… 아니, 공작님의 무력을 동경해 왔는데, 표현이 서툴러서 말을 못 했대요.”
“…….”
아무리 아스텔의 말이라지만 신뢰에도 한계가 있는 법.
카시언은 불과 며칠 전 만남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다. 그 살의를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믿는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이번에, 공작님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는 꼭 협조하고 싶대요!”
카시언은 정말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리고 한때 그에게 꺼지라고 말한 입으로 재차 중얼거렸다.
“아스텔의 말이 맞습니다. 앞으로는 공작 각하께 충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우리 셋이 머리를 맞대고 황태자를 처리해요.”
“알겠습니다, 아스텔.”
경계심 반, 승리감 반이 뒤섞인 공작의 눈빛을 본 카시언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확실히 아스텔의 말대로 저 공작은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믿는 것 같았다.
그렇게 셋은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우방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뭉치게 되었다.
아나이스 공작령을 노리고, 콘윌 공작을 비호할 황태자를 처리하는 것.
이어 아스텔과 카시언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다시금 서로의 목표를 되새김질했다.
최종 목표는 바로, 은신술이 풀리기 전까지 황태자를 처리한 뒤 뷔에트리 백작가의 누명을 벗기는 일이었다.
한편 공작에게는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제 곁에 있는 아스텔의 귓가에만 들리게끔 낮게 속삭였다.
“황태자를 죽이고 나면.”
“……네?”
“당신이 숨긴 비밀도 알 수 있겠지요.”
콘윌 공작 저택에서 카시언의 기행을 본 그는, 짐승다운 직감을 발휘했다.
아스텔과 카시언, 그 둘의 관계가 묘하게 수상쩍다는 것 정도는 진즉에 눈치챘다.
그저 아스텔이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조급해졌습니다, 아스텔.”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
숨이 거칠어진 카시언 그레이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였다.
* * *
카시언이 공작 저택으로 합류한 뒤 이튿날 밤, 아나이스 공작의 명령을 받은 맹수 수인들이 한창 수색 중인 콘윌 저택 근처.
그곳에는 한쪽 팔이 기괴하게 비틀린 데다 다리는 절뚝거리는 채로 걷는 수상쩍은 노인이 있었다.
‘일단 몸은 제대로 훔쳐 왔군.’
부두술을 이용해 자신이 죽였었던 가난한 노인의 육신을 빼앗았다.
파르라니 빛나는 눈동자와 새하얗게 센 머리, 그리고 굽은 어깨를 얻기 위해 자신이 지녔던 모든 힘을 잃기는 했으나, 어쨌거나 다시 살아났다.
짙디짙은 어둠 속, 제 저택이 맹수들에게 수색당하는 모습을 보며 잘게 기침하는 노인의 정체는 바로 콘윌 공작이었다.
“쿠, 쿨럭.”
그는 잘게 기침을 하며 저택을 노려보았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그 망할 계집이 진짜로 뷔에트리 가문 출신이었을 줄이야.’
아스텔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정신계 흑마법을 걸었을 때, 그는 그녀의 목표가 뷔에트리 가문의 누명을 벗기는 것임을 눈치챘다.
그 뒤로는 아나이스 공작 때문에 결국 이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불이 번진 사 층 창가를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콘윌 공작으로서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다행히 저택에 이방인이 침투하면 나의 기록물은 전부 불에 탄다. 나머지 기록물들은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으니, 안심해도 무방하겠지.’
그는 창문 너머로 서재가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완전 범죄 행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낄낄대며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따갑게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죽은 콘윌 공작, 흑마법사였다지?”
“아나이스 공작 각하를 죽이려 했다지 않는가. 게다가 마계와도 이어져 있다면서?”
“세상에, 콘윌 가문이 이대로 망하려나 봐!”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킬킬댔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테니, 복권이야, 추후를 도모하면 되는 것이지.’
그의 부두술은 실로 완벽했다.
그러니 아나이스 공작의 기괴하고 삿된 행위에도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다.
‘심장이 자꾸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 수상하긴 하지만, 별일 아닐 테지.’
콘윌은 이상하게 지끈거리는 심장 어귀를 짚은 채로 비척대며 걸어갔다.
반드시 황태자를 만나야만 했다.
황태자에게 뷔에트리 백작가의 계집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뷔에트리 백작가의 잔당이든, 아나이스 공작이든 간에.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눈가가 시뻘게진 콘윌 공작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로브 속을 타고 흘렀다.
그는 황태자 궁으로 곧장 향할 수 있게 만들어 둔 텔레포트용 마석을 거친 손으로 움켜쥐었다.
저택 내의 기록물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 슬슬 장소를 이동할 때였다.
* * *
잘생긴 인간 기사, 카시언 그레이가 아나이스 저택에 여장을 풀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마물 전쟁에 차출될 정예 기사들이 공작가에 들어가며 함께 움직였다는 후문이었다.
게다가 카시언은 화려한 공적에 어울리게끔, 마물 전쟁의 협상 테이블에서 기사단장의 대리 역할까지 자임했다.
뜻밖의 부상으로 회의에 불참하게 된 기사단장 로파를 대신한 것이었다.
‘수도 내 사교클럽에서 오빠와 녹스 사이를 수상쩍게 보는 모양이지만, 다행히 뜬소문이고.’
그래도 상황은 차근차근 진척되어 갔다.
그녀의 아군이 된 녹스가 생각보다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었으니까.
그는 특유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황태자의 의심스러운 정황 정보 등을 빠르게 수색해 왔다.
“황태자 궁에 수상한 자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황태자의 끄나풀이 아나이스 공작령에 여럿 잠입했다는 소식입니다.”
카시언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을 받았다.
“장미 기사단 중에서도 황태자를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이번 마물 전쟁에도 참가할 책략을 짜고 있고요.”
“황태자파 기사들이 이번 마물 전쟁에 참여하나요?”
내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듣고 입가를 느슨하게 푼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럼, 기사단 내 황태자파 리스트를 적어 주십시오.”
마주 본 두 사내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빠와 녹스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원작 속 내용을 복기해 나갔다.
‘원작 내용에 따르면, 마물 전쟁에서는 아나이스 공작이 먹는 음식에 치사량 이상의 독이 발견됐었어. 만약 그때도 황태자가 녹스에게 독을 사용하려 했던 거라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일단은 황태자의 계책을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그들의 주의를 내 쪽으로 돌렸다.
“황태자는 분명, 마물 전쟁 중에 공작님을 노릴 거예요.”
둘의 시선이 단번에 내 쪽으로 꽂혔다. 나는 긴장하지 않고 똑 부러지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방책을 세워 봤어요.”
이 자리는 참 편했다.
내 의견을 요점만 말하기만 하면 될 뿐, 구태여 이것저것 부연하면서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오빠도 녹스도 내 의견이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용기를 얻은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공작님은 황제를 만나 주세요. 별말 안 하셔도 돼요. 그냥 매일 매일 독대를 해 주세요. 모두가, 황제와 공작님의 만남을 알 수 있게끔요.”
“알겠습니다.”
“카시언 그레이 경은 공작령의 마물과 각 마물들이 지닌 독에 관해 조사해 주세요.”
“……마물의 독, 알겠습니다.”
오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공교롭게도 은촛대의 촛불이 훅 꺼지고 말았다.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어둠 속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걱정 마세요. 우리는 꼭 살아남을 거예요.”
마법으로 촛불을 재점화한 녹스가 화사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 아스텔. 우리 둘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겁니다.”
“…….”
“신에게서도 빠져나왔지 않습니까.”
원작 내용과 신수라는,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는 나는 양 입매를 앙다물고 근엄하게 대꾸했다.
“네, 당연하죠! 제 계획만 착착 따라 주세요!”
“알겠습니다.”
원탁의 맞은편에 앉은 그가 내 머리칼을 다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그의 말과 손길에 긴장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매우 삐딱한 음성이 우리 둘의 귓가에 와 닿았다.
“어라.”
나는 급하게 내 맞은편에 앉은 오빠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애정 행각 금지.”
“…….”
“솔로, 서운하니까 말입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과 달리 서운하다기보다는 열받은 표정이었다.
이러다가 싸움판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활기차게 손뼉을 쳤다.
“맞다, 카시언 경 지금 솔로니까. 다른 얘기로 넘어갈까요?”
“알겠습니다, 아스텔.”
녹스는 단정하게 내 손을 잡으며 카시언을 향해 도발하듯 웃었다.
“참 안타깝군요.”
“…….”
“솔로라니.”
오빠는 한결 더 열받은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중간에 껴 있지 않았다면 분명 기 싸움을 넘어 진짜 치고받는 싸움이 났어도 크게 났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이 성향이 지독하게 안 맞다 한들, 황태자를 처리하자는 목표를 앞두고선 손발이 착착 맞는다는 것 정도였다.
* * *
며칠 뒤, 황태자 궁 안.
콘윌 공작은 공작의 작위를 잃고 겨우 목숨을 구명했다.
그러나 이미 세간에는 콘윌 공작이 벌여 온 음습한 행위가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황태자는 평소 친분이 있는 콘윌 공작을 대놓고 비호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콘윌 공작을 필두로 콘윌가에서 저지른 악행은 속속들이 밝혀져 나갔다.
그 와중에 콘윌 공작은 황태자의 개를 자청하며 황태자의 궁전에 음습하게 숨어들었다.
‘뷔에트리의 일족을 모두 죽여야 해.’
오직 그들을 죽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나 그림자에 숨어든 채로 가만히 있다 한들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
마치 역모 혐의를 쓴 대역죄인, 뷔에트리 혈족들을 대하는 것처럼…….
“황태자 전하께서 저 더러운 것을 왜 두고 보실까요?”
“천박하고, 냄새나는데 말이지요.”
“왜 저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할까요?”
그는 그저 로브를 쓴 수상한 괴인일 뿐인데, 모든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그를 헐뜯었다.
애써 분노를 속으로 삭인 콘윌이 황태자의 침실로 들어섰다. 곧장 샴페인 글라스를 든 채로 서서 창가를 바라보는 황태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
황태자조차 그를 보고 더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바닥을 봐, 콘윌.”
요란한 무늬가 없는, 구렁이만 한 흰색 뱀이 스멀스멀 기어갔다.
황태자는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대리석 위를 기는 백사를 응시했다.
“이게 바로 콰르트 지역에서만 사는 뱀이야.”
콘윌 공작은 콰르트 지역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그곳은 분명 북부의, 마물이 살고 있는 위험한 빙결 지대였으니까.
“인간이든 맹수 새끼든, 송곳니에 물리면 단번에 죽는 독사지. 대신, 이놈의 피는 제법 특이한 독인데 말이야. 써먹고 싶은 곳이 생겼어.”
황태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안에서는 뼛속 깊은 열등감이 선득하게 느껴졌다.
“아나이스 공작 말이지.”
황태자의 시선이 돌연 샴페인 글라스 쪽을 향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시선이었다.
그의 부친,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아나이스 공작을 혐오하면서도 제 자식이 그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 그는 귀에 인이 박히도록 아나이스 공작과 비교당해 왔다.
특히 매번 비슷한 국지전에 참가할 때마다 지긋지긋한 비교는 더욱 심화되었다.
어떤 전투에서든 공작은 대승을 거두었고, 황태자인 그는 주로 대패해 측근을 잃고 목숨만 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던 탓이었다.
‘이번 전투에서도 대패했다지. 그 짐승만큼은 왜 못 하는 것이냐?’
‘하지만 그자는 맹수라 야만적인 전술로-’
‘닥쳐라. 내 귀족들을 볼 낯이 없군. 한심한 놈.’
물론 나이가 차면서 황제의 막말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며 스스로를 우월하다 자부했던 황태자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지독한 열등감이 그의 뇌리에 가득 들어찼다.
수도의 귀족들도 또래인 그와 아나이스 공작을 은연중에 비교하고는 했다.
‘공작 각하께서 더욱 귀족적이시지요.’
‘외모부터가…….’
‘……사실 황태자 전하와 쌍두마차라기에는, 공작께서 워낙 빼어나셔서…….’
쨍그랑!
대리석 바닥 위에 내던져진 샴페인 글라스가 산산조각 났다. 콘윌 공작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거센 파열음이었다.
“아.”
콘윌이 뷔에트리 가문을 혐오하는 것처럼, 황태자는 아나이스 가문과 수인들을 혐오했다.
근본부터 자신보다 하찮다고 여겼다.
‘하찮은 것이 나의 위에 군림할 수는 없지.’
아나이스 공작의 오만한 눈빛을 떠올린 황태자는 증오에 찬 시선을 던지며 읊조렸다.
“요즘 아나이스 공작이 폐하를 매일같이 알현하고 있다.”
“…….”
“그자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그 뒤부터 폐하께서는 나의 알현 요청을 받아 주지 않으신다.”
아나이스 공작을 생각하면 절로 이가 바드득 갈렸다.
“그러니, 당장 우리의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있겠어.”
황태자의 흰자에 핏발이 섰다.
‘우리의 계획’이라는 말에 콘윌의 얼굴에 찬연한 미소가 어렸다. 황태자는 콘윌 공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의 발에 유리가 밟혔다.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콘윌 공작의 로브를 벗겨 낸 황태자가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대가 말한 여자, 아스텔이 정말 뷔에트리 백작가의 사람이라 했나?”
“확실합니다.”
“한데 말이지, 참으로 이상해. 그대의 말은 단 하나도 믿어지지를 않는군. 전혀 신뢰가 안 생겨. 왜일까.”
“…….”
“수상쩍은 마법에라도 걸려 왔나, 공작?”
콘윌 공작의 시선과 황태자의 비릿한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 적어도 이번 일만큼은 내 수족처럼 삼아야 하니…… 수락하지.”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할 기회였다.
“일단은 계획을 앞당길 것이다. 그것이 뷔에트리든 아니든 우리의 제물이 되어 줄 계집 하나가 나타났으니 일을 진행하기 더욱 좋겠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콘윌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계집이 뷔에트리 가문의 직계 혈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헛소리.”
“……하지만.”
“그 계집은 황궁에 보란 듯 드나들었다. 만일 그것이 뷔에트리 가문의 직계 혈족이라면 황궁에 드나들 수가 없어. 황궁의 보안이 그리 허술한 줄 아나?”
콘윌의 말을 간단하게 일축한 황태자는 다시 창 바깥을 응시했다. 교만한 수인 따위는 없는 인간들만의 세상에서, 그는 가장 드높은 황좌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비틀렸던 세계의 모든 게 제자리를 찾게 될 터였다.
* * *
“아!”
갑작스럽게 손목에서 날 선 통증이 느껴졌다.
손목을 가시로 후벼 찌르는 듯한 통증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바닥으로 놓쳐 버렸다.
나는 급하게 손목 안쪽의 은신술을 확인했다.
손목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은신술이 가파른 속도로 깨져 가고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콘윌과의 맞대결로 한껏 자극받은 데다, 황태자든, 콘윌이든지 간에 나와 오빠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눈을 아래로 깊이 내리감았다.
‘그럼 이제 슬슬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착수해야지.’
단순히 복수극을 준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빠와 룬을 만나게 해 주는 일부터 해야 해.’
만일의 경우 룬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되더라도, 오빠와의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다가올 마물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룬과 오빠의 안면을 익히게 도와야 했다.
나는 설렁줄을 당겨 미미와 함께 놀고 있는 룬을 불러냈다.
“아스테!”
룬은 귀여운 찹쌀떡처럼 내 품에 쏙 안겨들어 왔다.
“우리 같이 놀까?”
“웅!”
아침부터 점심까지, 나는 룬과 함께 정원에서 일광욕도 하고, 찬란한 햇빛 아래 마주 앉아 낱말 카드 맞추기 놀이도 했다.
하지만 은밀히 불러내려던 오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저물기 시작한 저녁나절쯤 되어서야, 나는 정원의 산책로에 들어선 카시언을 볼 수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바빴나 봐.’
내 부탁을 받아서 마물에 관해 상세하게 조사하느라 밤낮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있는 정원수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카시언 쪽을 바라보다가 내 품에 안긴 룬을 얼렀다.
“오늘 처음으로 하루 종일 룬이랑 바깥에서 같이 놀았네, 그치?”
“웅? 하루 종일?”
“응, 일광욕도 많이 했다. 그렇지?”
“으응…….”
룬의 얼굴이 해맑게 변하더니, 이내 시무룩해졌다.
나는 룬이 왜 시무룩해하는지를 알지 못해 고민했지만, 아이의 말에 관해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카시언이 지척까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품에 안긴 우윳빛 피부의 아기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녕?”
룬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해맑게 미소 지으며 제 아빠를 향해 손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공손하게 인사해야지, 기사 아저씨한테.”
“웅? 기사 아더씨……?”
통통하게 살이 오른 뺨에 홍조가 어렸다.
“안녕하세요, 하자.”
“웅!”
나는 룬을 꼭 끌어안고 오빠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룬과 오빠를 친밀하게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얘 이름은 룬이야.”
“룬이구나.”
“웅! 나는 룬이에요!”
룬은 발랄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갸웃갸웃했다.
그러더니 카시언의 어깨에 달린 금장 수술을 매만지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옷…….”
“응, 옷이 멋지지?”
“카드에 이써! 기사님…… 압빠?”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룬의 말이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아기는 압빠가…….”
룬이 나보다 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두리야……?”
“……어?”
“기사님 옷 입으면…… 압빠랬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룬은 녹스가 자기 아빠인 줄 알고 있지, 참!’
……그나저나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을까?
“그, 그렇지 않아. 룬! 아빠는 하, 한 명이지! 기사복 입는다고 다 아빠는 아니야.”
나는 급하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바로 카시언이었다.
그는 조금 충격을 받은 낯으로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렸다.
“아빠가 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아! 공잔님 아빠야!”
‘진짜 아빠 앞에서 이게 무슨!’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니, 이 자리에서 불쑥 룬한테 카시언이 네 아빠라고 말할 수도 없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룬의 귓가에 대고 급히 소곤거렸다.
“음…… 이 아저씨가 더 아빠 같지 않아? 안 그래?”
“웅?”
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영민한 눈을 반짝 빛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룬이랑 엄청 닮았잖아.”
룬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양손을 제 가슴 앞으로 포갰다.
“그치만 공잔님이 더 잘생겨써.”
“…….”
“뭐?”
카시언이 충격받은 얼굴로 제 아들을 응시했다.
나는 배신 당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오빠의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지금 십년지기 친구의 정체가 부모의 원수였다는 말을 막 전해 들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룬의 충격 발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구! 압빠는 잘 노라 주는 사라미야. 조 아더씨는 처음 바.”
“봐, 봤을 텐데?”
“안니!”
일전에 카시언과 잠깐 마주 본 적이 있지만, 기억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룬이 또랑또랑하게 말을 잇는 사이, 카시언은 급히 이성을 차렸다.
그는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내게서 룬을 받아 들었다.
“미안, 앞으로 자주 만나서 재밌게 놀아 줄게. 아빠 후보에 껴 줘.”
이마에 맺힌 구슬땀이나 어설프게 안는 모양새가 전형적인 초보 아빠 같았다.
룬은 카시언의 어깨에 달린 금장 수술을 매만지며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미내 보께! 옷 머디쓰니까!”
찬란한 봄의 햇살이 그들 사이를 비췄다.
어쩌면 둘이 조금 친밀해진 걸까 싶어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룬이 카시언을 빤히 바라보다가, 멋진 저녁노을을 가리키더니 급하게 눈을 가렸다.
“허억, 안 대…….”
룬이 제 눈앞을 빼꼼히 가리며 침울하게 칭얼거렸다.
“오느른 바께 너무 오래 이써따. 이제 크닐나써.”
“무슨 소리야, 바깥에 너무 오래 있었다니?”
그동안 바깥에 종종 마실을 나올 때도 있었으나, 룬이 저런 식으로 눈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오빠와 시선을 교환하는데 룬이 눈에서 손을 떼지 않고 조심조심 말했다.
“나눈 빛 마니 보면 안 대거둔.”
아기들 특유의 고집인가, 싶어 나는 가볍게 물었다.
“응? 왜?”
룬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나느 약해서 곧 주거야 해.”
“그게 무슨…….”
“선새미가, 나는 금방 주그니까, 따뜨한 거 마니 보면 안댄대써! 아야하니까, 어두운 데에 이써야 댄다, 해써.”
룬은 지금까지 바깥에서 재미있게 놀다가도 몇 시간 안 되어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그냥 단순히 안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순진한 목소리에 나는 얼빠지게 반문했다.
“……어?”
지금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크닐이다. 그동안 빛 너무 마니 바서…….”
룬이 손 틈새로 들어오는 빛마저 차단하려는 듯 카시언의 가슴팍에 얼굴을 쏙 묻었다.
“이제 주거.”
아무리 들어도 시무룩한 말투였다.
나는 당황해서 숨조차 못 쉬고 있는 오빠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 보육원에서 나쁜 말을 많이 들었나 봐…….”
룬이 앓고 있는 병증을 알고 있던 보육원 사람들은 룬이 금세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바깥에서 죽으면 시체 찾기가 곤란하니, 안에 있게만 했다지, 내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필이면 오빠를 처음 만나는 날인데. 아이의 상처부터 드러나 버렸다.
내가 그동안 아이의 마음을 잘 살피지 못해서일까.
먼 미래에 오빠와 아이가 내내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걸 잘 티 내지 않아서, 많이 신경 써 주지를 못했다.
마음이 찡해졌지만, 나는 애써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안 죽어.”
“아냐! 주거!”
룬을 품에 안은 채로 토닥거리던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오빠가 성큼 다가와 말했다.
“많이 봐도 돼. 내가 놀아 주면.”
“웅?”
빛을 피하려는 듯 양손을 빼꼼히 가린 룬이 조심조심 조그만 손을 펼쳤다가 급하게 다시 닫았다.
“무서어…….”
자그마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카시언이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사답게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카시언의 손과 룬의 새하얀 고사리손이 대비되어 마음이 아팠다.
“기사…… 아저씨가.”
“……웅?”
“아스텔이랑, 룬 같이 지켜 줄게.”
오빠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용히 숨을 참았다.
“왜 빛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빛 많이 봐도 돼.”
그는 스스로에게 강조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기사 아저씨가 지켜 줄 테니까.”
룬이 만두처럼 하얀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 카시언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사 아더씨.”
“응.”
“고마어.”
룬이 제 체구만큼이나 작은 미소를 띤 채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콩, 찧었다. 자그마한 룬의 손을 꼭 부여잡은 카시언이 조용히 속삭였다.
“날개 있는 장난감으로 놀아 줄게, 매일 매일.”
룬이 고사리손을 꼼지락대면서 중얼거렸다.
“……날개?”
“응, 하늘을 막 날아다녀.”
“우아아…….”
룬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조금쯤은 착잡한 마음으로 저 둘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라도 두 사람이 조금씩 친해질 수 있을까.
카시언이 룬의 마음에 앙금처럼 남았을, 그래서 종종 튀어나오는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보육원 놈들은…….’
모든 사건이 끝나고 나면, 보육원 사람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정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저택의 앞뜰을 내려다보던 중, 문득 황궁에 간 녹스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는, 무언가 상당히 의미심장했던 것도 같았다.
‘아스텔, 황제를 잘 설득하고 오겠습니다.’
‘네?’
그가 은밀하게 속삭인 순간, 협탁에 놓여 있던 은촛대가 꺼졌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악당이 음모를 꾸밀 때처럼 음산해지고 말았다. 나는 당혹스러운 낯으로 어둠 속에 잠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우리의 편으로 만들어 둘 테니, 걱정 말고 좋은 꿈 꾸십시오.’
잠결에 황제를 알아서 설득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나는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룬과 오빠를 바라보았다가, 조심스럽게 정원 바깥으로 향했다. 다행히 정원 바깥에는 모르는 기사가 아닌, 지난날 내 호위 기사를 자청했던 리트로 경이 서 있었다. 오늘은 정원 관리 업무를 맡은 건지, 아니면 경비 업무를 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만난 건 꽤 좋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만큼 모르는 걸 마음껏 물어볼 수 있으니까.
나는 그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리트로 경!”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내가 낯설고 어색한 건지, 가까이 가자마자 흠칫 놀라며 말을 우물거렸다.
“하문하십시오.”
……몸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너무 놀라게 했나?’
역시 리트로 경은 곰만큼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유약하고 겁이 많은 편인 모양이었다. 그를 잠시 안쓰럽게 여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그게, 공작 각하께서는 아직 황궁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지요?”
“네, 아직이십니다. 폐하를 알현하시느라 늦어지시는 모양입니다.”
“아…….”
나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나의 옷자락 끝만 거듭 움켜쥐었다. 녹스는 분명 황제를 잘 설득하겠다고 했고 나도 그를 믿지만, 상대는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였다. 내 의뭉스러운 말만 듣고 매일같이 황제를 독대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 싶어 자꾸만 걱정되었다.
‘게다가 귀가 시간도 약속한 것보다 늦어서 더 걱정돼…….’
리트로 경은 내 마음도 모르는 듯, 겨우 몸의 떨림을 중단하고 애써 유쾌하게 말했다.
“아! 역시, 황제 폐하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하긴,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독대하고, 심지어 매일같이 공작 각하와 독대할 예정이라던데, 얼마나 기가 쪽쪽 빨리고 살기에 살이 빠지실…… 지?”
“……?”
“아차, 아스텔 님은 마물이나 황제 폐하가 아니라 그, 그, 공작각하를 걱정하시…… 죠?”
자기가 먼저 입 바깥으로 말을 내뱉고도 확신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리트로 경이 볼을 긁적였다. 나는 입매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우울하게 답했다.
“네, 공작 각하께서는 안 그래 보여도 마음이 많이 여리시니까요.”
“아, 여리신, 아, 예…….”
리트로 경은 검집 옆의 수통을 빼내 물만 거듭 마셨다. 이상하게도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 * *
그때, 아스텔 기준으로 ‘마음이 많이 여린’ 아나이스 공작은 황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황제를 굽어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의 건조한 인상과 달리, 황제는 슬슬 불쾌하다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알현을 청한 이들의 리스트를 확인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해지는군.”
“…….”
“그리도 날 꺼리던 공작이 매일같이 나를 독대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눈앞의 차가 식어 갈 때까지, 아나이스 공작은 별말 없이 차를 내려다보거나, 황제의 용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황제는 몹시 껄끄럽다는 낯으로 공작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물 전쟁 때문인가. 물자는 전부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문제가 있었나?”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영웅인 공작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어야만 하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여간 불편하고 황당한 게 아니었다.
“우선은…… 폐하와의 친분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아스텔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는 꽤 많은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그는 아직까지 아스텔이 정확히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 숨긴 비밀이 뭔지는 몰라도…….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묵묵히 그녀의 말을 따르다 보면 손톱 밑 가시처럼 거슬리는 카시언 그레이와의 수상쩍은 관계까지도 전부 다 알아낼 날이 올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황제와의 독대를 최대한 유리한 선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황제를 삐뚜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일단은, 콘윌 공작 저택을 전부 수색하였습니다.”
“수색이라.”
“예. 한데 수상쩍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에게는 아직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몇 가지 패가 있었다.
그리고 그 패는 저밖에 모르는 황제의 미간을 꿈틀거리게 할 만큼은 되었다.
“황제 폐하를 상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돌고 있습니다만.”
“……뭣이?”
“알고 계셨습니까?”
“…….”
“콘윌 공작과 같은 흑마법사들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계획한 모양이더군요. 한데 황제 폐하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듯싶어.”
황제는 평온한 표정을 한 아나이스 공작을 진노한 눈으로 응시하며 일갈했다.
“그걸 어찌 짐은 몰랐단 말이냐?”
“아직까지는 무해한 움직임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요.”
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다음 알현 때에도 몇 가지 증좌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핏발 선 시선으로 공작을 응시하며 뇌까렸다.
“아니, 다 말하고 가거라.”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칼같이 한 거절과는 달리,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스텔에게만 보여 줄 법한 미소였다.
“아직 제 가장 귀한 분도 모르는 일이라.”
아나이스 공작은 몸을 일으켰다.
기왕 황제의 신경줄을 적당히 긁어 놓았으니, 황궁을 수색하며 더 괜찮은 정보 정도는 확인해 둘 생각이었다.
* * *
공작과의 찜찜한 독대를 마무리한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근심의 결론은 사실상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수상쩍다고 했나. 황위를 찬탈할 계략을 짜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풍문이었다.
황제가 죽고 나면 황태자가 곧장 즉위하지 않는가.
그러나 최근 황궁의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아직 정정했고, 근 삼십여 년 이상을 더 살 수 있노라 했다.
그는 월례 건강 보고회 때, 황제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선득하게 구겨졌던 제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예 말이 안 되는 풍문은 아닌가.’
아나이스 공작의 보고는 간결했다.
황태자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 전달.
하지만 그까짓 맹수의 말을 듣고 제 아들을 쳐낼 정도로, 황제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폐하, 본 황후 간곡히 청하나이다. 태자를 폐해 주소서.’
문제는 황후의 간언이었다. 황제는 황후를 제 몸만큼 아끼고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곁에서 자리를 지켜 준 부인에 대한 존중 정도는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부터 계속, 황태자에 대해 간언을 해 왔다. 황태자를 폐하자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처음에는 헛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두시오.’
‘하나 폐하, 매번 콘윌 공작을 포함해 기이한 흑마법사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저자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은밀히 확인해 보니…….’
‘……콘윌 가문과 내통한 바 있다는 추문은 들었소. 흑마법사와 어울린다니, 황가의 귀한 혈통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대체 어찌 훈육한게요?’
‘……그러니 부디 간언드립니다, 폐하. 폐태자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부디 그 아이를 만류해 주소서. 태자를 바꿀 수 있는 건 폐하뿐입니다.’
황제가 지끈거리는 눈 주변을 짚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황태자 궁에 괴인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받았다.
모두가 돌을 던지는 노인을 궁에 버젓이 들인 기행.
게다가 황태자는 제 궁에 황제나 황후가 드나드는 것을 결벽적으로 혐오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겨 둔 사람처럼.
그는 점점 더 황태자로서의 자격을 잃어만 가는 아들을 훈계해 둘 생각이었다.
* * *
황제는 진상 조사 끝에 황태자의 행동이 기이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황태자 궁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자들, 콘윌 공작과 결탁했던 정황, 황제를 상황으로 올리고 자신이 직접 통치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전적까지 전부 다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는 타고나길 다소 비열한 성정이었음에도 제 자식에게는 어느 정도 관대한 편이었다.
그랬기에 황태자를 불러내 몇 번이고 훈육을 해 보려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자신이 잘못한 바가 없다는 식으로 강건하게 나왔다.
그래서였다. 황제는 제 궁의 거대한 정문 앞에 황태자를 몇 날 며칠 무릎을 꿇려 두었다.
모든 시종과 시녀들이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제국의 지존이 될 사내에게 어린 황손에게나 시키는 형벌을 내린 것은 지극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너는 아직 내 후계일 뿐이니, 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야심을 꺾으라는 의미였다.
황태자는 황제궁의 정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입 안쪽 살을 거듭 씹었다.
씹힌 생살에서 피 맛이 났지만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났다.
황태자의 마음도, 황제의 마음도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을 때쯤.
황제가 궁의 밀실로 제 아들을 불러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느냐?”
“…….”
“황태자 궁을 수색할 것이니라.”
“……폐하.”
황제 앞에 부복한 황태자는, 황제를 도발하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고압적인 훈육은 황태자와 감정의 골만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꼴이었다.
“아니, 아버지.”
그럼에도 아버지라고 불린 순간, 황제의 표정은 조금 따사로워졌다.
물론 황태자의 태도는 달랐다.
그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쥔 채로, 소매 안에 넣어 두었던 무언가를 거듭 만지작거렸다.
“그래, 아들아. 일어나거라.”
황제는 서서히 일어서는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반성은 하였느냐.”
이윽고 황제에게 다가선 황태자는 조용히 제 아비를 끌어안았다. 어린 시절 이후로는 처음 있는 포옹이었다. 자신보다 훌쩍 자란, 제 아들의 온기를 느낀 황제는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나이스 공작의 이간질 따위는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사했습니다.”
뒷덜미 언저리에 차가운 감각이 감돌더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졌다. 제 아들을 토닥이며 눈을 감고 있던 황제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황제는 본디 의심이 많은 자였으나 제 아들에게 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혀뿌리까지 말려드는 것이 느껴진 순간, 그는 직감했다.
“너…….”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가 자신을 해쳤다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황제의 표정은 지독한 당혹감에 잠겨 있었다.
“이…… 무슨.”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황제와 달리 황태자는 느른하게 웃으며 제 입가를 쓱 문질러 닦았다.
“그러니,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너…….”
황제는 무어라 경고의 말을 하려 했으나, 슬슬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밀실 바깥에 있을 제 호위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들어서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호위의 접근을 철저히 막기라도 한 것처럼.
“폐하께서는, 너무 오래 해 먹지 않으셨습니까.”
경박한 어조에 황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너, 이, 돼먹지 못한……!”
제 아버지의 노성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비죽이 웃음을 흘렸다.
“폐하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패륜아가 아니니까요.”
황제의 눈이 뒤로 돌아간 순간, 황태자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잠시 쉬고 계십시오, 아버지.”
쿵.
황태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으로 황제의 몸이 추락하듯 허물어졌다.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변해 무너져 내린 제 아버지를 감흥 없이 내려다보던 황태자가 밀실의 문을 열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는 것뿐이다. 제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여러 번 합리화하고 나니 정말로 그런 것도 같았다.
그는 아버지의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때 언제 황제궁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것인지, 그의 곁에 선 콘윌 공작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전하, 슬슬 계획대로 처리하시죠.”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가 문을 나서는 순간, 황제궁의 문은 싸늘하게 닫혔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폐문(廢門)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