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1)
그 후, 며칠이 꼬박 흘렀다.
콘윌 공작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온 위대한 명성과 공작가에서 양성한 이들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공작 저택을 들여다보면 그 위세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음산했다.
세간에서 콘윌 공작의 저택은 종종 미친 공작의 저택이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저택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 같았다. 저택의 주인인 콘윌 공작의 심기에 따라 폐쇄와 개방, 파괴와 재생을 오갔다. 실로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저택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했고, 그가 불안을 느낄 때면 외벽이 손상되었다.
물론 그런 흉흉한 저택 내에서도 잘 관리되고 아름다운 공간은 존재했다. 총천연색의 앵무새가 울고, 사시사철 푸른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공작저의 정원 말이다. 정원 중간에 무덤 두 개가 스산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콘윌 공작은 늘 그랬듯이 무덤가를 바라보며 꼿꼿이 서 있었다.
“공작 각하.”
그가 고개를 휙 돌리며 자신을 부른 측근을 응시했다.
“아스텔이라는 여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 왔나.”
“예, 일전에 보고 드렸던 바와 동일합니다.”
“동일하다면 왜 굳이 보고를 하는 게지?”
탐탁잖은 콘윌 공작의 표정에 몸을 사린 측근이 급히 부연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제네트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고아원을 더 파 보았는데, 친한 친구는 없고 카시언 그레이라는 기사와 잠시 연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내내 평범하게 살았다는데, 이상한 점은, 무엇보다…….”
“무엇보다?”
우물쭈물하던 가신이 목소리를 한 톤 더 낮추어 속삭였다.
“아나이스 공작성에 들어간 이후로의 행적입니다. 탐색해 보니 그 여자가 샘에 관해 지속적으로 알아본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샘과 이보르가 공작성에서 죽은 게 모두 그 여자와 관련되어 있는데, 모두 작정하고 벌인 짓이 아닐지……. 그게 수상하여 더 뒤져 보니 제네트 고아원에 들어오기 전에 뷔에트리 백작령에서 살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뷔에트리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라……. 그 역적들의 이름은 오랜만에 듣는군. 다 뒈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는 낄낄거리며 음산한 웃음을 재차 터트렸다.
“만일 뷔에트리가에 보냈던 첩자들인 걸 알고 움직인 것이라면 상당히 흥미로워지겠군, 그래.”
무언가 퍼즐이 짜 맞춰질 듯 맞춰지지 않는 기분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아스텔의 행태가 상당히 수상하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어쩌면 뷔에트리 백작가와 긴밀하게 연관된 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멍청한 역적의 잔당이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콘윌 공작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로 광인처럼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한데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뷔에트리라는 성을 단 것들은 방계를 포함해 삼족이 다 죽었고, 내 이 눈으로 시체도 죄다 보았는데…….”
그는 봉분에 난 풀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잇새로 광기 어린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선 사내는 약간 질린 낯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그분’께 따로 연락을 드릴까요, 각하?”
콘윌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새로 떠올라 있었다.
“아니, 이건 그분께 연락드릴 일도 못 된다.”
“그렇다 하심은…….”
콘윌 공작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위협감을 느낀 측근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뻣뻣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콘윌 공작은 급격하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속살거렸다.
“그냥 죽이면 그만이지.”
“하지만……. 각하, 아나이스 공작이 그 여자를 상당히 신경 쓰는 눈치였습니다.”
그의 말에 콘윌 공작이 눈을 잠시 까뒤집었다 바로 했다.
언제나 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 아나이스 공작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그들은 단순한 후견 관계가 아니라, 연인이 아닌가 싶은…….”
“그 맹수가, 이 계집애와?”
측근이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자그마한 영상구를 꺼내 허겁지겁 건넸다.
“예, 예! 지금까지만으로도 둘 사이가 상당히 예사롭지 않았는데, 오늘은 둘이 슬럼가에 간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하.”
콘윌 공작은 슬럼가에서 찍혔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영상구를 거칠게 받아 들었다.
화질이 몹시 나빴으나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이 슬럼화된 거리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아스텔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아나이스 공작의 다정한 눈빛이 보였다.
전에 마주쳤을 때와 달리, 아나이스 공작은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는 이를 으득 갈며 중얼거렸다.
“두 연놈이 왜 슬럼가에 갔지?”
콘윌 공작이 측근의 턱을 무자비하게 잡더니 눈을 부릅떴다.
“뻔뻔한 짐승 새끼가 꼭 사람처럼 굴고 말이야…….”
행복한 연인 행세를 하는 둘을 보니 상당히 심기가 거슬렸다.
“……더 이상은 결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것.”
사내는 콘윌 공작의 희번덕거리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당장 더 알아 오거라, 알겠느냐?”
말을 마친 그가 손에 악력을 담아 쥐고 있던 측근의 얼굴을 패대기쳤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뻔한 하찮은 심복에게 그 이상으로 관심조차 주지 않은 그가 다시 무덤가로 형형한 시선을 돌렸다.
“기다려.”
광인처럼 날뛰던 아까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달큼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곧 당신이 원하는 제물을 바칠 테니…….”
콘윌 공작은 뻥 뚫린 한쪽 눈에 든 의안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아스텔이 뷔에트리 가문과 관계가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제 반대편에 선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평소처럼 죽여 없애면 그만이었다.
* * *
은여우 가문의 가주와 협력하기로 한 나는 수도에서 제법 유망했던 상업 거리인 에틸트 거리에 도착했다.
유난히 호구처럼 생긴 내 얼굴 때문에 혹시 사기를 당할까 염려스러워 공작님과 동행하기로 했다.
‘감히 공작님을 등 처먹을 사악한 놈은 없겠지!’
……하지만 에틸트 거리를 둘러 본 결과, 늘어선 건물 안은 죄다 텅텅 비어 있었다. 건물뿐이 아니라 사람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공작님과 함께, 유령도시처럼 변한 에틸트 거리를 걸으며 정확히 어떤 위치에 상점을 세우는 게 좋을지를 가늠했다.
“어떻게 여기……. 부동산 중개인조차 없을 수가 있죠?”
“상당히 음산하고 황량하군요. 아무래도 다른 곳이 좋겠습니다. 위험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이곳이 어느 정도 슬럼가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 거리에서 창업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음……. 그렇지만 에틸트 거리가 상징성이 있는걸요.”
“상징성, 말입니까?”
“네, 저는 사실 평범한 디저트 카페를 열 생각인데요…….”
물론, 절대로 ‘평범한’ 디저트가 될 수는 없었다. 공작님이 고용한 최고의 파티시에와 함께할 예정인 데다, 나의 특별한 비법과 은여우 가문의 마도구를 이용할 생각이니까.
나는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실은 여기가 수도 내 디저트 거리로 원래 유명한 곳이었거든요, 지난 백여 년간.”
공작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그게…….”
다소 망설이는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듯 공작님이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잠시 느려진 내 발걸음에 발을 맞춰 주는 건 덤이었다. 그의 배려에 용기를 얻은 나는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공작님이 저번에 저를 위해 쇼콜라티에와 디저트 장인들을 모조리 고용해 주신 덕분에…….”
나는 오른쪽 팔을 쭉 뻗어 황량하고 썰렁해진 카페 거리를 가리켰다.
“이 거리가 텅 빈 거거든요. 완전 망했어요!”
공작님이 말문이 막힌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제가 다시, 살려 보려고요!”
내게는 이미 수많은 파티시에들과 쇼콜라티에들이 있으니 그들의 인력 유출로 망한 거리를 다시 살린다면 화제성 면에서도 확실히 좋을 것이다.
‘대동강 물을 판 봉이 김선달 같은 전법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는가!
나는 돈 벌어서 좋고, 수도 사람들은 다시 맛있는 디저트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에틸트 거리는 다시 부흥해서 좋고!
그리 생각한 나는 그와 잡은 손을 살짝 흔들며 눈매를 휘어 웃었다.
“그럼 이제 제대로 목 좋은 자리를 골라 볼까요, 우리?”
사람이 텅텅 비어 버린 거리에 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멀리서 내가 미리 부탁해 놓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바쁜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저…… 아스텔 님, 마, 맞으신가요? 저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톨트입니다.”
“안녕하세요, 톨트.”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공작님의 살기에 압도된 표정의 톨트가 앞니를 딱딱 부딪쳤다. 나는 공작님을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웃어 주세요.’ 하고. 그러자 공작님의 표정이 조금 더 나른하고 달큼하게 풀렸다.
“반갑습니다.”
다행히 공작님은 무척 반가운 표정이었다.
이제 이런 표정을 짓는 것도 전보다 자연스러워지신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톨트는 겁에 질린 채로 말을 더 더듬기 시작했다.
“송구합니다. 호, 혹시 제가 잘못했다면 사, 사죄를…….”
왜 이 부동산 중개인은, 공작님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노려볼 때보다 더 공포에 질린 느낌인 걸까…….
곧바로 이 자리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기세에 나는 급하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에틸트 거리에서 상점을 하나 열까 하는데요. 매물을 한번 보고 싶어서요.”
“네, 네. 그러니까 목 조조조, 좋은 장소라면…….”
말을 더듬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 좋은 장소는 필요 없어요. 오히려…….”
“……네?”
내가 은근하게 말꼬리를 끌자 톨트의 안색에 궁금증이 어렸다.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왜 여기에 건물이 있지? 싶을 정도로 목 나쁜 곳이 필요해요.”
이런 의뢰는 처음이라는 듯 톨트의 표정에 황당함까지 깃들었지만, 더 이상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재차 강조했다.
“아주아주 나쁜, 일부러 찾지 않으면 방문하지 못할 정도로 숨겨진 장소여야 해요. 최대한 빨리 준공될 수 있는 곳으로요.”
내 음산한 목소리에 톨트와 공작님의 표정이 동시에 의문에 잠겼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건물 매매와 리모델링이 끝나고 나면 다들 곧 내 의도를 알게 될 테니까.
* * *
일주일 뒤.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어린 영애 삼인방이 다 망해 가는 에틸트 거리에 도착했다.
그들은 데뷔탕트를 치른 백작 영애 이상만이 가입할 수 있는 사교계의 유명 사모임인 첼리 서클의 회원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며칠 전부터 사교계에 퍼지기 시작해 아직 누구도 방문한 적 없는 디저트 카페를 제일 먼저 찾는 것.
야심 차게 도착한 세 영애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에틸트 거리를 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케이크를 판다더니, 이 텅텅 빈 거리에서 무얼 해?”
영애 하나가 호기심이 팍 사그라든 눈으로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맥빠진 표정의 키 작은 영애 역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 꼴을 보니 알겠어. 카페란 것도 홍보만 양껏 하고 별것도 아닐 거란 생각도 든다고.”
그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개중 가장 씩씩한 표정을 한 영애가 주먹을 움켜쥐고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티시에들이 죄다 그 기상천외한 카페에 모여 있다며!”
“그래, 북부 공작령으로 끌려간 자들 말이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아스텔이라는 여자의 카페 말이야!”
하지만 십여 분을 넘게 둘러봐도 에틸트 거리는 완전히 망한 상태였다.
“우리가 들은 거, 혹시 헛소문 아닐까?”
세 영애의 의욕은 상당히 저하되었다.
그냥 다시 마차를 타고 돌아갈까, 생각하던 와중에 그들은 뜻밖에 귀여운 아기 여우와 조우했다.
아기 은여우는 거리를 폴짝 뛰며 멋진 은색 털을 뽐냈다.
그들은 홀린 듯이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우가 눈웃음을 치며 그들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다.
“이리 오세요!”
“어? 우리?”
수인이었나, 싶은 마음에 놀란 그들이 눈만 깜빡일 때였다.
아기 은여우가 용감하게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디저트 카페를 보러 오신 손님들!”
영애들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자 왜 망설이냐는 듯 가까이 다가온 여우가 낑낑대며 그들의 치맛단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새하얀 은빛 여우를 보던 영애들이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야……. 정말 보기 드문 은여우 수인이라고!”
잔뜩 흥분한 귀족 영애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수줍음이 적은 한 영애가 조심스럽게 귀를 매만지자 여우가 쫑알거렸다.
“당신들은 선택받으셨습니다! 멋진 디저트 카페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기 은여우가 직접 카페까지 데려다준다니!
마치 동화 같지 않은가.
게다가 선택받았다니…….
도도한 수도의 귀족들이라고는 하지만 귀여운 아기 여우의 애교에는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사실 많은 자들이 은연중에 수인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녀를 대동하고, 드레스를 입은 채 계단을 오르는 게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여우의 재롱 덕분에 분노할 틈이 없었다.
그들의 눈빛은 은근한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길이 잘 닦여 있기는 했지만 올라온 길은 전부 계단이었다.
이제까지 힘든 길을 걸어왔는데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친한 영애들에게 이 카페를 둘러보고 오겠노라고 자랑까지 단단히 해 두었으니까!
비장한 각오를 품고 마침내 도착한 멋진 카페 앞.
“저게 대체…….”
그들의 몸이 놀람으로 바짝 굳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고용한 최상위 파티시에들, 은여우 가문에서 제작된 마도구들로 일주일 만에 꾸려진 카페라고 하더니.
“……대체 저게 다 뭐야?”
가장 먼저 그들의 눈앞에 커다란 유리창이 보였다.
보통 케이크 가게의 전면이 유리 통창인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유리창 앞에 있는 진열대에는 케이크로 추정되는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있지, 저거…… 케이크 맞지?”
“……맞는 거 같기는 한데…….”
영애들은 눈앞에 놓인 케이크들을 보며 주춤거렸다. 그들의 눈빛이 신기한 것을 봤다는 양 반짝였다. 케이크 가판대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케이크가 아니었다.
“대체…….”
아니, 애초에 케이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저건 그러니까…….
본래 ‘케이크’란 동그란 원형의 시트 위에 간단한 과일 등을 올리는 간단한 디저트였다.
보통은 시트의 폭신함과 크림의 달콤함을 어떻게 살리는지가 관건이었다. 귀한 재료를 얼마나 아낌없이 사용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깊은 풍미를 내게 하는지 역시 중요했다.
하지만 아스텔이 만들어 낸 케이크는 외형적인 측면에서부터 그들이 생각한 케이크와는 전혀 달랐다. 예를 들면 그들의 눈앞에 전시되어 있는 케이크만 해도 무려…….
“이건, 토끼 아니야?”
“토끼 맞아!”
“눈에는 초콜릿이고, 코에는 당근이 꽂혀 있어!”
“귀도 있다니…….”
은여우를 따라 오랜 걸은 끝에 마침내 화사한 동화 속 세상에 온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시녀에게 눈짓해 문을 열게끔 시켰다. 문이 스르륵 열리자 영애들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드, 들어갈까?”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뜻 발을 안쪽으로 내딛지 못했다. 이 디저트 카페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아스텔이 중앙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자그마한 뱁새들이 날아다녔고, 조금 커다란 토끼가 곁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재규어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모든 게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눈을 커다랗게 뜬 영애들은 홀리듯 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환하게 웃는 아스텔과 그녀의 주변으로 넘치는 것 같은 후광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을 이 장소로 이끈 아기 여우가 아스텔의 근처에 가서 폴짝 뛰어 안겼다.
“세상에.”
“안녕하세요, 첫 손님이시네요.”
아스텔은 그들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세 명의 영애들은 아스텔에 관해 무성하게 퍼진 소문을 떠올리며 입술만 달싹였다.
분명 소문에 따르면 사악하다는 아나이스 공작에게 마약을 팔아 피후견인 자리에 앉았다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는데……? 저렇게 선량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외모에 사랑스러운 여자일 거라는 상상은 전혀 못 했다.
“혹시, 디저트를 드시러 오셨나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들은 아스텔 뒤편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굳어졌다. 얼굴이 익숙하기에 자세히 보니 모두 수도에서 사라졌다던 파티시에와 쇼콜라티에들이었다. 그들은 마도구를 손에 쥐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영애들이 넋 나간 채 카페 구경에 한참 말이 없자, 아스텔은 주의를 끌려는 듯 손뼉을 크게 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케이크 좋아하세요? 아까 토끼 모양 케이크, 열심히 보시던데.”
“그건…….”
“여기 창가에 앉으세요, 내어 드릴게요!”
영애들이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본래 화술이 떨어지는 타입들이 아니었음에도, 아스텔 앞에서 그녀들은 버벅거릴 뿐이었다. 카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침하게 무시하고 마음껏 놀려 주려 했던 영애 셋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별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창가의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토끼 케이크를 기다렸다.
* * *
‘수인과 함께하는 동물 컨셉의 디저트 카페인데, 꽤 괜찮겠지!’
나는 토끼 모양을 낸 수제 홀 케이크를 가판대에서 빼내면서 아주아주 음흉하게 웃었다. 폭신한 시트에 생크림을 듬뿍 얹고, 토끼 수인들의 도움을 받아 디자인한 회심의 케이크였다. 저 영애들도 이 케이크를 보고 반한 게 틀림없었다.
‘토끼 수인들이 경악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멋지잖아!’
나는 머리를 맞대고 쑥덕대는 영애 셋을 힐끗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히든 플레이스 마케팅이지.’
힘들여 어렵게 올라온 장소, 신비로워 보이는 분위기에서는 없던 맛도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한 손에는 토끼 모양의 케이크를, 다른 한 손에는 메뉴판을 들고 그들을 향해 다가가며 상냥한 눈웃음을 쳤다,
“우선 드셔 보세요.”
그들은 척 보기에도 사교계에서 가장 모험심이 강한, 일종의 선발대였다. 그러니 이 케이크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먹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이 귀여운 토끼를 먹을 수 있지?”
“당신 옆에도 토끼 수인이 있는 것 같은데!”
“아…….”
급기야 어린 영애 하나가 가슴팍에서 수건을 꺼내더니 콧물을 팽 풀며 자그맣게 소리쳤다.
“잔인해!”
나는 급하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사교계 영애들의 여리디여린 감수성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내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여기까지 그들을 데려왔던 벨이 탁자에 머리를 빼꼼히 내밀면서 여우 귀를 쫑긋거렸다.
“토끼들은 이거 좋아해! 귀부터 냠냠 먹어 봐!”
여전히 여우 모습인 벨은 콩알만 한 눈을 끔뻑거리며 자그마한 발을 톡톡, 탁자에 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벨의 반말에도 귀여움에 취한 영애들은 입을 헤 벌리더니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거렸다.
“먹어요!”
“누나가 먹을게, 아가!”
‘역시 벨의 귀여움은 치트키…….’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영애들의 포크에 실려 거침없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토끼 케이크를 보며 짧게 애도를 건넸다.
일단 한 입 먹고 나자, 영애들의 포크질이 빨라졌다. 먹으면 먹을수록 케이크의 매력에 도취되는 모양새였다.
“역시 수도 최고의 파티시에들을 모았다는 게 과언이 아니구나.”
“최고야! 비엔하임이 북부령으로 차출된 이후, 이런 케이크는 못 먹어 볼 줄 알았는데!”
칭찬 일색의 상황에서, 어떤 영애가 갑자기 포크를 딱 내려놓았다. 혹시 문제가 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녀의 얼굴에 뜬 찬란한 미소를 보며 속으로 확신했다.
걸려들었다고.
“나 너무 걸어서인지 조금 전까지 발이 아팠는데…… 이상하네?”
“왜 그래?”
“발이 안 아파.”
“어?”
다른 영애 둘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실 일부러 발이 뻐근해지도록 계단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았지. 근육통에 작용할 만한 좋은 약제를 먹이면 이 자리에서 바로 확연한 효과가 있을 거거든.’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한결 더 흡족해진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왜냐면 말이에요. 이 케이크에는 달콤한 치료약도 들어 있어서 그래요.”
때마침 케이크 장식장 근처에서 가만히 졸던 재규어가 꼬리를 살랑 흔들어 보이자,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했다. 나는 그들의 주의를 다시 돌리며 미소 지었다.
“하트 모양을 한 케이크에는 삼 분짜리 사랑의 묘약도 담겨 있답니다. 아주 강하지는 않지만…….”
“세상에…….”
나는 수도에 퍼진 소문을 정정하듯 가볍게 말했다.
“이 케이크에 든 것들은 치유 약이에요. 저는 치료사거든요. 실제로 여기 있는 건 모두 황궁의 허가를 받아 제작되는 멋진 케이크들이랍니다.”
“어머나…….”
“그럼 이 황홀한 케이크의 이름은 뭔가요? 토끼 케이크? 치료 케이크?”
나는 양 옆구리에 팔을 대고 당당하게 화답했다.
“이 케이크 이름은 바로……!”
영애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보며 나는 뻔뻔하게 웃었다.
“라비린토스예요.”
다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당연히 귀여운 토끼 모양 케이크의 이름이 ‘라비린토스’ 같은 이름이라면 누구든 다 의아하기는 할 터였다.
“토끼 얼굴 케이크라서 당근 케이크일 줄 알았는데?”
“그냥 멋져서 그런 이름으로 지어 봤어요.”
물론 그렇지 않다. 사실, 라비린토스는 최종 흑막이 우리 부모님을 죽이려 들었을 때 사용했던 주문의 이름이었다. 그때 최종 흑막은 목격자로 인해 우리 부모님을 죽이지 못했다. 끝내 역모 혐의를 덧씌워 공권력을 빌려 부모님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전에 그 주문을 사용했다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만약 콘윌이 최종 흑막이라면 이 케이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마자 날 찾아올 거야. 그리고…… 부모님이 살해당할 뻔한 걸 목격한 사람 역시도, 살아만 있다면 나타나겠지.’
그러니까 라비린토스라는 메뉴명은 콘윌을 잡기 위한 의뭉스럽고 촘촘한 덫인 셈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그들을 향해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저희 디저트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제 주인으로서는 슬슬 빠져 드릴 차례였다. 나는 가게 안 화초를 다듬는 척하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처음에는 몇 가지 신변잡기적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케이크가 신기한지, 다시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 케이크는 황후 폐하께서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테이블에 자리 잡은 영애들이 신기하다는 듯 카페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쫑알거렸다.
“그렇지. 몸이 안 좋으시니 단것만 찾으시잖아.”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내 쪽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와병 중인 황후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이 조심스러운 듯했다. 그녀들에 대한 배려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테이블 위의 화분을 정리하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병이 든 황후, 내가 일부러 귀족 영애들을 상대로 홍보 마케팅을 한 이유다.
‘지금 내게는 일단 황후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하거든.’
내가 직접 황후에게 ‘병을 고쳐 드리겠다’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황후가 먼저, 자연스럽게 내 명성을 듣고 나를 찾아와야만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녀의 병을 고칠 자신은 있었으나, 빠른 시일 내로 그녀의 측근으로 자리 잡으려면 한 치의 의심조차 받아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다행히 저 영애들의 말을 듣자 하니, 황후와의 대면이 머지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모든 일은 아스텔의 예상 그대로 흘러갔다.
카페에 방문했던 영애들은 아스텔의 예상 범위를 넘어설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고객이었다. 그들은 제 어머니나 후견인과 함께 황후와의 다과회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신분을 지녔던 것이다.
이튿날, 자그마한 황후궁 내의 유리 정원.
황후와 황녀, 귀부인 셋 그리고 영애 넷까지 단출하게나마 정기적인 다과회가 열렸다. 다과회가 한참 진행되던 도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는 영애가 깊이 감명을 받은 낯으로 쫑알거렸다.
“황후 폐하, 지난주에 신기한 일들이 있었사와요!”
“무슨 일이더냐?”
“수인들이 무척 많은 디저트 카페에 다녀왔어요!”
찻잔을 내려놓은 황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디저트 카페라, 요즘은 그런 것이 없지 않니? 모두 북부로 몰려갔잖아.”
“아나이스 공작 각하의 피후견인이라는 여자가 만들어 낸 카페인데……. 꽤 제법이었어요, 후후.”
어린 영애는 귀족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몸을 단단히 곧추세우고 있었으나, 얼굴 표정만큼은 몹시 활발해 보였다.
황후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도자로서 이해타산적인 황제나 황태자와는 달리 평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생각하면서 선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자애로운 이였다.
“즐거운 이야기구나. 수인들이 많은 디저트 카페라니. 동화 속 이야기를 듣는 듯해.”
“폐하와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요! 심지어 치료약까지도 함께 팔던데, 생각보다 실력이 좋았어요!”
얼마 전 데뷔를 마친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 하나가 입을 삐쭉이며 철없이 조잘거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귀부인이 경을 치려 했지만 황후가 손사래를 치며 낮게 웃었다.
“무안 주지 말려무나. 귀여운 레이디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 왜.”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는 저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영애를 말리려던 귀부인이 속상한 듯 어깨를 떨구자 황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디저트 이야기를 더 해 보자꾸나. 본 황후는 어린 영애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거든.”
핀잔을 들을 뻔한 영애가 잠시 시무룩해져 있더니 곧 드레스의 안주머니에서 팸플릿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 팸플릿을 챙겨 주더라고요, 글쎄. 사교계에 널리 퍼트려도 된다면서요. 여기 옆에 판매하는 메뉴의 그림도 있어요! 폐하께 드리려, 가져왔지요!”
“나를 위해 가져왔다니, 상냥하기도 하지.”
이내 가벼운 마음으로 팸플릿을 받아 본 황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메뉴판의 최상단에 있는 케이크의 이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비린토스.”
라비린토스라는 단어를 본 황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누가 봐도 눈치를 챌 정도로 초조한 낯빛이었다. 그녀는 팸플릿을 다시 돌려주면서 반쯤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쯤 당장 가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느냐?”
다들 놀란 눈초리로 서로만 바라보았다. 워낙 몸이 약한 탓에 황후는 웬만해선 외출을 결심하지 않았다.
“그 카페라는 곳에 직접 가 보고 싶구나.”
그리 말하며 황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았다.
찻잔의 물이 일렁거렸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찻잔 속의 태풍을 보면서, 황후는 홀로 어떤 파란의 전조를 느꼈다.
“그 가게 주인의 이름이, 아스텔이라고 했던가?”
“네, 폐하. 성은 없다 합니다.”
황후는 제 입 속으로 소녀의 이름을 몇 번 곱씹어 보았다.
아스텔, 아스텔…… 하고.
분명 그녀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라비린토스’라는 말 역시도 아무렇게나 쓴 말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가 되는구나.”
가까스로 평정을 찾은 황후가 제 앞의 귀부인과 영애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평소처럼 미소 지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같이 가 드릴게요.”
“……네가?”
“네, 공작 각하의 후견을 받는다는 여자가, 궁금해서요.”
황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스텔에 관한 소문은 황후 쪽에만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이었던 콘윌 공작 역시 아스텔이 오픈한 디저트 카페에 대한 풍문을 입수했다.
“미친 계집이구나.”
콘윌 공작은 아랫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그의 심기에 맞추어, 저택은 급격히 어두워지며 벼락이라도 맞은 양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은 어디에서 온 건지 모를 진흙으로 진득하게 질퍽거렸고 샹들리에는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불쾌한 낯을 한 콘윌 공작은 보고서를 내려다보고 선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월계를 장식한 케이크에…….”
월계수 잎을 화관처럼 만들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가 처음 뷔에트리 백작 부부를 죽이려 했을 때, 월계수 잎을 덮어 주었다.
그때 그는…….
“이름은 라비린토스라.”
……그래, 그들을 죽이려 했을 때 라비린토스라는 시전어를 사용했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일 텐데…….’
라비린토스는 ‘미궁’이라는 이름의 주문이었다.
영원히 끝도 없는 무저갱의 지옥을 겪다 죽게 만드는 지독한 흑마법.
“라비린토스를 아는 계집이라면……. 그 가문과 확실히 관계가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누굴까?”
당장 대놓고 죽일 수는 없을 거였다.
그는 약도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비죽비죽 웃어 보였다.
뷔에트리 가문과 명백히 관련이 있는 계집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가 피가 몰린 눈동자를 비비며 문을 거칠게 열었다.
“오랜만에 쓰레기를 청소할 계획이다.”
“네, 각하. 한데…….”
“한데?”
“황후 폐하께서 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후가? 귀찮게 왜.”
“그 디저트 카페에 관심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런 사소한 일 따윈 보고하지 마라.”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시면, 각하.”
콘윌 공작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병에 걸린 황후 따위는 공작에게 큰 관심 상대가 되지 못했다.
콘윌 공작을 향해 무언가 더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측근 귀족이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저 정도로 저기압인 공작에게 감히 무엇인가를 발언할 용기도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근래 저택 내에서 자그마한 식기를 하나 도둑맞은 건이나, 저택 근처에 쳐 둔 울타리 근방에 기사복을 입은 놈이 얼쩡거리다 사라졌다는 사소한 건 따위는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급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질퍽거리는 바닥을 힘차게 벗어났다.
제발 가문을 위해서 콘윌 공작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그의 재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 * *
밤에는 룬을 보살피고, 낮에는 많은 영애들을 만나 그들의 특성에 맞는 치유용 케이크를 선물하면서 즐겁게 카페를 운영하는 나날.
퇴근 후 오랜만에 공작님과의 행복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만찬장에서 일어나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공작님이 손을 들어 일어서려는 나를 저지했다.
“아스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앉으며 맞은편의 그에게 반문했다.
“네?”
은촛대의 불이 일렁거린 탓에 느껴지는 착시 현상인지, 공작님은 수심이 깊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무척 슬픕니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공작님이 느끼는 감정은 내게도 전달되었다. 게다가 감정이 증폭되었다면 그의 볼이 각인열로 달아올라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거짓으로 슬픔을 연기한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길 텐데, 공작님이 연기한다고 하니까 마음 한편이 찌르르했다.
‘이상하게 귀여워.’
슬픔을 연기하는 공작님이라니, 이유가 무엇이건 귀엽다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나는 공작님을 바라보면서 장단을 맞추어 보았다.
“왜 슬프세요?”
“내일 황후가 그대의 카페에 방문하겠다고, 후견인인 내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네? 황후 폐하께서 벌써요?”
“……짐작하고 있었습니까?”
“아, 아뇨. 말이 헛나왔어요! 황후 폐하께서 제 카페에 방문하시겠다니……. 저를 부르신 것도 아니고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내 감정을 차마 갈무리할 새도 없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황후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몹시 좋은 일이니, 입가의 미소를 애써 숨기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좋은 소식이네요! 황후 폐하께서 정확히 무어라 하시던가요?”
“방문하겠다며 요청 편지를 한 통 썼더군요.”
공작님이 내게 고급지에 겉면이 금박으로 장식된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뻣뻣한 초대장 용지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편지에는 그의 말대로 간단한 방문 예고가 담겨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공작님을 바라보다 멈칫했다. 그의 낯이 아까보다 더 슬퍼 보였던 것이다…….
“황녀까지도 오는 데다, 황후가 카시언 그레이를 대동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스텔 당신이 견디기에는 최악의 조합이지요.”
……딱히 최악의 조합은 아니었지만, 공작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여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하지만 황후에게는 호위기사가 있을 텐데, 왜 오빠를 굳이 대동하냐는 의문이 짙게 남았다.
‘오빠는 지금 마물 전쟁 준비에, 콘윌 저택을 염탐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나만 그런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공작님이 조용하고도 스산하게 속삭였다.
“황후가 왜 아스텔을 만나고자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행히 카시언 그레이, 그자와 친우가 되기로 했으니 친목을 다질 겸 저도 그날 그 카페에 방문해야겠습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뜻밖에 사자 대면이 되게 생겼다. 아니, 어쩌면 황녀까지 오자 대면…….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려 보았지만 공작님을 못 오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의 방문을 막는다면, 솔직히 무척 티가 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내 공식적인 후견인이 아닌가.
‘진정해, 아스텔! 내일 당장 나쁜 짓 할 것도 아닌데, 뭐.’
나쁜 짓은 조만간 할 거지만, 내일은 아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하게 수긍했다.
“그럼, 좋아요! 내일 제 활약상을 보러 카페에 오세요.”
“……네, 아스텔?”
내가 허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듯, 가만히 내 표정을 살피던 공작님이 내 말을 놓친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야망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놓아두었던 스푼을 꽉 움켜쥐었다.
“내일, 제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할 거니까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아직 남아 있던, 달콤한 바닐라 빈 아이스크림에 해바라기 씨가 뿌려진 디저트를 한 스푼 크게 떠 입에 쏙 넣었다.
그만큼 디저트 접대에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었는데, 그는 그저 픽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정확히 무슨 의도인지 몰라 그의 손을 톡톡 두드리다가, 아차 하고 쪽, 입술을 맞춰 주었다.
맞잡은 손이 뜨겁기에 각인열인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릴 때가 되어서야, 그가 우리의 시야를 얕게나마 가리고 있는 촛불을 치우려던 것임을 알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낯을 들고 그의 손을 잡았던 손을 떼려는데, 그가 갈급하게 다시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이미 다른 일은 전부 잊은 것 같습니다.”
무심한 듯 내뱉는 진심 어린 속삭임에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거짓으로 위장한 신분을 가진 내가, 당장 내 마음만 믿고 그의 진심에 화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내일은 제 멋진 활약상 덕분에 모든 근심까지 다 잊으실 겁니다!”
나는 비장하고 야심 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스푼을 쥔 주먹까지도 불끈 쥐었다.
* * *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이 밀담을 나눈 그날 밤, 카시언은 황후궁에 초대받았다.
평소 평민 출신의 영웅 기사를 마음에 들어 하던 황후궁의 시녀장, 멜라니아 후작 부인에게 넌지시 귀뜸을 받은 상태였다.
황후의 측근 기사가 팔을 다쳐 카시언 그레이를 내일 임시 의전 기사로 임명하려 하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 그대를 내일 의전 기사로 지명했네. 이유를 아는가?”
제국민들에게는 언제나 자애로운 황후의 낯빛이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이 차린 디저트 카페에 가 볼 생각이네.”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이라면 아스텔이다. 그제야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아스텔의 초상화와 그녀의 카페 팸플릿을 본 카시언이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상당히 뜻밖인 상대의 입에서 아스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은신 마법이 요즘 들어 시큰거리지만, 잘 작동하고 있어.’
속으로 불안을 잠재운 그가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예, 과거 저와 약간 친분이 있기도 했고, 공작가의 의전 기사가 되어 몇 번 만나 뵈었죠.”
“그래, 어떻던가?”
카시언은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능글맞게 말했다.
“외모만큼이나 선량했던 것도 같군요. 사실, 세상에 나쁜 레이디는 없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시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에 이어 이젠 벨레타 황후까지?
도대체 아스텔이 무얼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그들이 관심 두는 것인지 확실하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군.”
황후의 짧은 수긍에 카시언은 한결 정중하게 되물었다.
“당장 아는 것은 이뿐인데, 혹여 더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폐하?”
카시언이 단정한 시선으로 황후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초연한 표정의 카시언과는 다르게 황후의 얼굴은 새파랬다.
“그래, 잠시…… 으윽…….”
안색이 새하얘진 황후는 이미 카시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왼손으로 내리누른 그녀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을 새도 없이 심장을 움켜잡았다.
황후의 곁에 시립해 있던 후작 부인이 다급하게 황후에게 물과 약을 건넸다.
“황후 폐하!”
“이리 다오.”
후작 부인이 건넨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 황후가 여전히 찌푸린 낯으로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발작한 황후를 대신해 후작 부인이 급히 축객령을 내렸다.
“경, 당장 나가 보게. 내일 이른 아침 황후궁으로 오게나.”
그리하여 카시언은 더 이상 황후의 건강 상태를 살필 수는 없었다. 걱정 반 의심 반이 섞인 시선을 던진 카시언이 짧게 묵례한 뒤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황후궁의 복도를 걷는 길, 그는 근본적인 의문점에 부딪혔다.
‘황후의 건강 상태가 예상보다 나빠. 한데 저렇게까지 건강이 안 좋은데, 굳이 아스텔을 만나러 가겠다고?’
깊이 심호흡한 카시언은 버릇처럼 주머니 안의 은식기를 뒤적거렸다.
‘일단……. 아스텔의 말대로 콘윌 공작부터 처리해야 해.’
그는 아스텔이 명한 대로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갖은 고초 끝에 콘윌 저택 내부로 들어서는 통로를 찾아낸 뒤, 레이첼이 고용한 마법사를 통해 은식기를 성공적으로 훔쳐 냈다. 고작 좀도둑질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콘윌가 저택은 콘윌 공작의 모든 뜻을 따르는 곳.
콘윌 공작이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스텔이 무엇을 기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람쥐처럼 작은 제 여동생이 그려 놓은 큰 그림을 곧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시언은 황후궁 밖으로 빠져나오며 우선은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합법적인 루트로 아스텔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나이스 공작의 방해 없이 여동생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심장 한편이 뻐근해졌다.
* * *
두근두근한 마음을 안고 잠든 다음 날, 나는 공작님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일찍 카페에 출근했다.
황후의 방문을 대비해 카페 내부를 깔끔하게 꾸미고 디저트를 미리 만들어 두는 과정이 이어졌다.
오늘이야말로 몹시 중요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에 기합이 팍 들어간 나는 수많은 파티시에를 향해 말했다.
“저기, 혹시 케이크의 표면에 백합 모양의 데코레이션을 해 주실 수 있나요?”
디테일한 요구에 쇼콜라티에와 파티시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가능은 합니다만…….”
“……조금 감이 안 잡혀 어려운데, 어떻게 조각하면 좋을까요?”
대부분이 난색을 표하는 것 같기에 나는 넌지시 다른 방법도 제시했다.
“어려우면 생화를 꽂는 방법도 있기는 해요.”
그러나 파티시에들은 결연한 낯으로 주먹을 움켜쥐어 보였다.
“아닙니다!”
“상세히 알려 주세요. 저희가 돈 받은 만큼 해야죠!”
공작님이 상당히 큰 비용을 투자한 덕분에 그들은 내 의견에 절대적으로 따르며 적극 협조해 주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정리하고 나니 반나절이 지났다.
바삐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 황궁의 인장이 찍힌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황후와 시녀장으로 추정되는 귀부인, 황녀 전하, 우리 오빠, 그리고…….
“아스텔.”
비슷하게 도착한 건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공작님까지 보였다.
나는 공작님에게 바삐 달려가 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 공작 각하, 귀부인과 기사님을 뵙습니다. 아스텔이라 합니다.”
“아스텔, 두 번째로 보는군요.”
황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후가 묘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중앙 테이블 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네, 황녀 전하. 이렇게 귀하신 분들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여기로 앉아 주셔요.”
황후와 황녀, 오빠와 공작님 그리고 시녀장인 멜리니아 후작 부인이 테이블에 앉았다.
황후가 와병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병색이 완연할 줄은 몰랐다.
‘정말로 많이 아파 보이시네.’
파리한 뺨을 한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외모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인사를 하는 게 순서였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양쪽으로 들고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재차 인사를 건넸다.
황후가 자애로운 인상을 한 채로, 그러나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속삭였다.
“반갑구나.”
“네, 폐하.”
황후의 곁에 자리 잡고 앉은 후작 부인이 감히 황후를 여기까지 행차하게 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활짝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도착하자, 자그마한 카페 하나가 통으로 꽉 찼다.
나는 유리문 바깥에 서 있는 오빠를 미련 섞인 눈으로 응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빠랑도 말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의전 기사이다 보니 겸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걸까. 나는 오빠 쪽으로 티 나지 않게 시선을 틀었다.
‘힘내.’
오빠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걸 보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시선을 돌리다 문득 내 뺨에 닿은 시선을 보고 멈칫했다.
……공작님이었다.
‘떨려요.’
그를 향해 소곤소곤 입 모양으로 말하자 공작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는 순간.
“황녀 전하와 공작 각하,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요란법석을 떨자 공작님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그가 확실히 강조하듯 나직하게 단언했다.
“전혀, 단 하나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칼에 의견을 부정당해 무안해진 후작 부인이 공연히 씨근덕댔다.
“흐음……. 이 자리도 딱히 별거 없군요. 안 그렇습니까?”
무안해지니 만만한 나를 공격 상대로 삼은 모양이었다.
나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귓등으로 넘기면서 테이블 위에 준비한 케이크를 세팅했다.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탐탁잖은 낯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튼 요즘 영애들이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더니……. 저는 불량식품들은 영.”
그녀는 다정하고 조곤조곤한, 그러나 은연중에 멸시가 실린 어투로 말을 이었다.
“평민들의 상점에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보았어요, 글쎄.”
그녀가 모두의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쫑알거렸다.
“이 장소도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어요. 멀기도 하고 ……. 어휴,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나는 급하게 테이블 쪽을 응시했다.
저 테이블에는 공작님이 동석해 계신데, 저렇게 도발하듯이 말하면……!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고 있는 건지 공작님의 턱에 힘줄이 보였다. 나는 공작님 쪽으로 급히 눈짓을 했다.
‘지금 당장은 화내시면 안 돼요!’ 하는 느낌으로 강력하게 참기를 종용했다. 다행히 공작님은 멜라니아 후작 부인을 죽일 듯 노려보기는 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행히 조련의 성과가 있어!’
당장 어제도 그에게 진지하게 말해 두었으니까.
‘내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자들은 무도합니다, 아스텔.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황후 폐하께 잘 보이고 싶고, 그리고 저도 나쁜 사람들한테 잘 대응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스텔.’
‘자, 약속.’
‘잘했어요, 공작님!’
어제처럼,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요즘 나는 슬슬 공작님을 조련하는 법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그가 내 새끼손가락에 자잘하게 입 맞추던 게 떠올라서 귓불이 붉어졌지만, 지금은 나른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가판대에서 여러 케이크를 꺼내고, 준비된 음료를 분주하게 세팅하기 시작했다.
* * *
황후는 테이블에 앉은 채로 가만히 아스텔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묘한 표정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던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낯이 익어. 내 착각인 것도 같은데…….’
토끼처럼 바삐 움직이며, 생글생글 웃는 아스텔의 얼굴 위로 그녀가 아는 얼굴이 겹쳐졌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황녀가 신중하게 물었다.
그제야 타인의 자태를 맹렬히 좇는 자신의 시선이 무례하다는 것을 눈치챈 황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괜찮다.”
마른세수를 한 황후가 아스텔을 향해 넌지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대가 만들었다던 케이크가 궁금한데, 맛볼 수 있겠느냐.”
사교계의 어법과는 다소 어긋나는 구석이 있었으나 황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외부 출입을 오래 하지 못했다.
바깥 공기만 마시면 금세 두통이 이는 탓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짚은 채로 숨을 쌕쌕거리며 말을 이었다.
“궁금하여서 말이다.”
“물론이지요, 가져올게요!”
두통 때문인지 내내 이마를 짚고 있던 황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스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날쌘 토끼처럼 움직였다.
황후의 시선이 가판대에서 해맑게 웃는 아스텔의 뒷모습을 좇았다.
저 걸음걸이, 저 말투, 저 표정까지…….
‘그럴 리가 없는데……. 닮았어.’
아스텔의 부재로 테이블에 찬물 같은 정적이 끼얹어진 순간, 황후의 곁에 있던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귀엣말로 쫑알거렸다.
“폐하, 안 그래도 건강이 안 좋으신데……. 이런 평민의 상점에 들르시다니요.”
“멜라니아.”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어찌 이 상점까지 발걸음하신 것이어요?”
“그것은…….”
“별거 없으면 제가 아주 저 평민, 혼쭐을 내겠어요. 감히 황후 폐하의 눈을 현혹시키다니요.”
멜라니아 후작 부인에게 눈짓해 그녀를 진정시켰으나, 사실 황후 역시도 속으로는 그다지 기대하고는 있지 않았다.
‘평민이 라비린토스에 대해 알 리가 없지. 내가 실수를 했어.’
제 판단 실수를 자책한 그녀는 한결 더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평범하게 요기만 하고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다.
* * *
나는 테이블 위에 다양한 케이크를 꼼꼼히 세팅했다.
앞치마 위에 공수 자세로 가지런히 손을 얹은 나는 상냥하게 케이크와 음료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황후 폐하께는 민트 티를 준비하였어요. 부인께는 쌉싸름한 홍차를, 공작 각하와 황녀 전하께는 커피를 준비하였고요. 바깥에 계신 기사님께도 카라멜을 듬뿍 넣은 단 음료를 드렸답니다.”
“상냥하군요, 아스텔. 민트 티에 홍차, 커피라니.”
그는 카시언 그레이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황녀가 카시언과 공작님을 묘한 낯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한몫하는 듯했다.
“여기 케이크와 함께 드시면 더욱 맛있어요! 케이크도 하나씩 소개해 드릴게요.”
후작 부인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탐탁지 않은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작은 홀 케이크를 네 개 준비했는데, 황후 폐하께는 바닐라 빈과 백합을 넣은 케이크여요.”
“그래.”
황후가 조급한 낯으로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귀여운 모양의 케이크를 가리켰다.
“여기,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라비린토스 케이크에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셀라토 잎을 조금 썰어 넣었어요.”
“방금, 재료가 셀라토라고 했나?”
“네, 어떠셔요?”
“감히 평민들이나 먹는 풀뿌리를 이 안에 넣었다고?”
확실히 셀라토 뿌리는 평민들이 주로 일용하는 양식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너는 여기 계신 분이 누구이신지 모르나?”
연이어 나를 질타하는 말에 마침내 인내심이 반쯤 끊어진 듯한 공작님이 이를 으득, 악물고 중얼거렸다.
“여기 표현이 자유분방한 자가 있군요.”
그러나 공작님의 발언이나 살기에도 불구하고, 멜라니아 후작 부인은 생각보다 눈치가 없고 철면피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공작님이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듯 앞으로 팔짱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공작 각하의 면이 서도록 황후 폐하를 잘 모시도록 하세요.”
“저의 면이라.”
공작님은 나의 만류 때문에 부인을 직접적으로 신랄하게 공격하지 못하자, 보다 세련된 공격 방식으로 우회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를 빤히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기다려요!’ 하는 느낌으로.
그가 운만 떼어 둔 뒤 한동안 정적이 일자 황녀가 공작을 응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 각하?”
의아한 낯의 황녀가 넌지시 공작님을 호명했다.
그러자 귀찮다는 듯한 공작님의 시선이 황녀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몇 초 이상 시선이 마주치자 황녀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요.”
황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공작님이 빠르게 시선을 부인 쪽으로 돌렸다.
“부인의 모습이 마치 어떤 불운한 기사를 연상케 해서 말입니다.”
“예? 무엇을 연상케 한다는……?”
안타깝게도, 후작 부인은 공작님의 공격을 아직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한결 살벌해진 분위기를 파악한 황후가 먼저였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의 피후견인입니다, 멜라니아.”
“……폐하.”
섭섭하다는 듯한 후작 부인을 뒤로한 황후가 선뜻 케이크를 먹어 주었다.
“한 번 먹어 보지요. 괜찮을 것 같은데, 무엇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후는 별달리 기대를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해맑게 빙글빙글 웃으며 황후를 향해 권했다.
“네에, 드셔 보셔요!”
내 말에 황후가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드디어!’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황후의 표정을 관찰했다.
머리에 이는 두통 탓일까, 나른하고도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로 권태롭게 케이크를 삼킨 그녀가 곧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되었다.
‘바로 저거거든!’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황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황후 역시도 눈을 커다랗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후작 부인뿐이었다.
“황후 폐하……?”
“…….”
“다시 두통이 이십니까? 약을 준비할까요?”
“…….”
황후가 갑자기 말이 없자 후작 부인이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평민, 감히 황후 폐하께서 드실 음식에 이상한 재료를 넣은 것은 아니겠지?”
그 말에 공작님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후작 부인이 질겁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낯으로, 그가 낮게 일갈했다.
“감히.”
슬슬 조련의 효과가 풀려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공작님의 말을 가로막으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바로 보여 드릴게요.”
나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재료들을 꺼내 들었다.
파티시에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는 주방에서 박하 잎과 리센타 뿌리를 꺼내고 달콤한 바닐라 빈에 로즈마리 허브까지 꺼내고 나니 이마가 땀으로 젖을 뻔…….
“이리 주세요, 저희가 같이 옮기겠습니다.”
“맞아요, 아스텔 님.”
“속상해하지 마셔요!”
……했지만, 그 전에 자신의 정성이 무시당했다고 여긴 파티시에들이 먼저였다.
삼삼오오 내 근처로 모인 그들이 잽싸게 황후가 앉은 테이블로 재료를 배달했다.
“모든 케이크를 전부 기미하셨잖아요. 드시기에 언짢은 것은 넣지 않았어요.”
확실히 시녀장인 그녀에게는 전혀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낀 듯 후작 부인이 씨근덕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척을 했다.
“물론 케이크 안에는 특제 약물이 들어 있기는 해요.”
“뭐?”
“이상한 약은 아니에요. 제가 홍보용으로 작성한 팸플릿에 작게 명시되어 있는데, 못 보셨어요?”
당연히 못 봤을 것이다.
원래 사람들은 팸플릿에 깨알같이 써 있는 사용 설명서는 절대 유심히 보지 않거든.
“그딴 걸 누가 본다고!”
후작 부인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씨근덕댔다.
“그대가 황후 폐하께서 드실 케이크에, 이름 모를 약물을 넣었다는 소리인가요, 지금?”
내내 우아한 품위를 유지하던 황녀조차도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의 적의 넘치는 시선을 받을 때쯤.
“다들 너무 섣부르군요.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서는 오직 공작님만이 나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이 자리를 엎어 버리고 싶다는 듯이, 컵을 움켜쥔 손에는 힘줄이 꼿꼿이 서 있었다.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그를 향해 짧게 눈짓했다. 잘 길들여진 공작님이 눈매를 유순하게 내려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작님이 나를 도와줘서는 안 되었다. 내 활약상이 돋보이려면 황녀와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장작을 붙여 주는 편이 도움이 된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황후의 몸에 약효가 반쯤은 돌 때가 되었는데. 나는 후작 부인에게서 시선을 틀어 케이크를 먹은 이후 지금까지 한마디도 얹지 않은 황후 쪽을 빤히 응시했다.
마침내, 나는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황후 폐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한 치의 떨림 없이 나온 목소리에 황후는 별 반응이 없었으나, 곧 곁에서 벼락같은 노성이 터졌다.
“감히 어느 안전에 대고!”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제지하려 했지만 나는 황후만을 꼿꼿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공략해야 하는 상대는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아니라 눈앞의 여자, 벨로타 황후이니까.
“황후 폐하, 케이크가 입에 맞으세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부인이 부채를 들어 올려 재차 호령하려는 순간, 마침내 황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두거라.”
황후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제 편이 생겼다 판단한 후작 부인이 더 크게 불호령을 터트렸다.
“그래, 너. 황후 폐하께서 그만하라 하셨으니 이제 주제를 알고-”
“멜라니아.”
황후가 후작 부인을 호명해 주의를 환기하자, 분통을 터트리던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예? 황후 폐하.”
“그대에게 말한 게다. 이제 그만 하라고.”
그리 말하며 놀랍게도 황후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웃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볼우물이 활짝 패도록 미소 짓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모양인지, 후작 부인이 입을 우물거렸다.
“예, 폐하……? 그게 무슨…….”
오늘은 다소 눈치 없는 행동을 했다지만, 후작 부인은 지난 십여 년간 황후의 곁에서 그녀의 손발이 되기를 자처하며 수발을 들어 온 인물이었다. 제 생각과 달리 지금 황후의 심기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눈치가 있었다.
“이 케이크가 입에 맞냐, 그리 물었지.”
황후는 여태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요했던 시선에 파란이 일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맛본 케이크 중 단연…….”
차분한 음성 사이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긍정의 대답을 내릴 것이다.
“……최고의 맛이었다.”
후작 부인의 얼굴에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묵례했다.
“최고의 칭찬이시어요, 폐하.”
“하면……. 이 케이크의 성분이 무어라 하였지?”
“백합과 바닐라 빈, 셀라토 잎사귀 등을 넣었어요. 전부 다 치료제로도 사용되는 무해한 성분이에요.”
“약이 아니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어깨를 으쓱했다.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해요. 디저트를 사랑하는 분들은 다들 아실 법한 간단한 재료로 특제 약물을 만들었지요.”
슬슬 황후가 넘어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약을 먹은 것과 달라. 머리가 상쾌하고 두통이 없거든. 이런 적은…….”
황후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지난 십여 년간, 처음이야.”
그녀의 말에 자리에서 순간 정적이 일었다.
카페 안쪽 주방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소란스러운 홀을 내다보던 파티시에들까지 전부 다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황후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귀엣말했다.
“사실은 제가 치료사거든요.”
“치료사?”
“네. 세간에 저주에 걸렸다고 알려진 재규어 수인 가문의 리카르도 님의 병증을 고친 것도 저예요.”
내 당당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가 아닌 아나이스 공작님 쪽으로 쏠렸다. 평민일 뿐인 내 말은 믿지 못해도 후견인인 공작님의 의견은 믿을 테니, 그에게 시선이 쏠린 건 나에게도 퍽 좋은 상황이었다.
공작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증명이 필요하십니까?”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께서 아나이스 가문의 이름으로 이 평민의 말을 증명해 주신다면야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하찮은 평민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는 픽 웃었으나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를 정교하게 고르는 눈치였다.
공작님이라면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실 거라 은연중에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확답이 늦는 터라 조마조마해져 혼자 양손을 맞잡아 보았다.
“아나이스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기엔 너무 하잘것없습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굳어졌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낯으로, 공작님이 한마디 더 툭 내뱉었다.
“북부 전체를 걸고 증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순간 내 잇새로 놀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너무 과한데요, 공작님!’
놀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지, 후작 부인은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벌렸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뒷받침해 주리라는 시원시원한 공작님의 태도에 후작 부인이 잠시 몸을 옹송그렸다. 이의 제기를 짧게 일축한 공작님이 나를 향해 눈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한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은 채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능력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씨근덕거렸다.
“황후 폐하, 혹시 모릅니다. 이 케이크는 꼭, 황궁의에게 한 번 보이셔야 합니다. 이자도 데려가시지요.”
……그 말만을 기다렸다!
나는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는 후작 부인을 향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네, 꼭 황궁의님을 뵙고 싶어요!”
그 순간이었다. 창문 바깥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들여다보고 있던 오빠가 나를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분명 바깥에서는 내부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텐데…….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심부터 시켜 주려는 모습에 마음이 찡해졌다.
나는 오빠의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질 수 있게 환한 웃음을 유지하며 황후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공작님이 힘주어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황후가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 * *
마침내 나는 황후궁의 응접실로 위풍당당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화려한 복도를 지나 자그마한 밀실로 안내받은 나는 내 케이크와 함께 황궁의의 앞으로 곧장 인도되었다.
나의 케이크를 점검하기 위해 벨로타 황후, 멜라니아 후작 부인, 황궁의, 나.
이렇게 네 명이 모여 앉았다.
“이것이 문제의 케이크군요.”
“그렇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내게 불리했다.
황후의 황궁의는 귀족 출신인 데다 나를 싫어하는 멜라니아 후작 부인과 제법 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하는 동시에 후작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 쪽을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슬쩍 몸을 돌리는 것을 보니 나를 향한 감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매수당한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내게 좋은 인상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
나는 황궁의를 향해 단정하게 미소 지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후작 부인과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방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케이크를 황궁의에게 건네준 뒤, 고민하는 척 드레스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쏙 집어넣었다.
“어떠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평민이라니…….”
이 자리에는 오직 황후와 나, 황궁의뿐이었다.
케이크의 냄새를 맡고 한입 먹어 보며 재료를 확인하는 등 약간의 시간을 거치는 사이.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채 멀쑥하게 황궁의를 응시했다.
“케이크, 괜찮지 않나요?”
드레스 안주머니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빼며, 나는 흐드러지게 웃었다.
황후는 내내 침착했고, 멜라니아 후작 부인이 씨익, 웃었을 때.
“정말 완벽한 케이크군요!”
황궁의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잠깐 걱정하긴 했으나 황후를 치료하는 황궁의가 흑막의 끄나풀일지, 아닐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아주 손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으니까.
후작 부인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황궁의를 압박했지만 황궁의는 처음 접하는 맛에 반해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황궁의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제 황후의 마음을 얻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황후를 향해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도 이제 저의 결백을 믿어 주실까요?”
“이게 무슨…….”
후작 부인은 황당하다는 낯이었다.
고상한 그녀답게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감정을 억지로 삭이는 티가 났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샘의 사기 아티팩트 덕분이지. 고맙다, 흑막.’
……황궁의가 내 케이크를 접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한 이유.
‘황궁의의 양심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내가 조금 급해서.’
황궁의가 후작 부인의 압박을 받고 나를 쳐낼 확률도 있으니, 확실히 하려면 사기 아티팩트를 사용해 줘야 했다.
다행히 흑막이 만들어 낸 아티팩트는 황궁 내에서도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하면 일단 나가 봐. 황후 폐하의 의장을 확인하고 그대와의 독대를 갖도록 돕지.”
“감사합니다, 부인.”
패배를 인정한 후작 부인이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리며 시녀에게 눈짓했다.
“응접실로 가서 기다리거라.”
문이 열리자마자 그 바깥에 오늘 임시로 황후의 기사를 맡았던 카시언이 보였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를 보는 표정을 보아하니 십년감수한 듯한 낯이었다. 동시에 반가움이 물씬 묻어났다
공작님이 안 계시는 지금이 나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 *
기사인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는 순간은 예상보다 시시했다.
그는 대륙에 널리 퍼진 카시언 그레이 경의 소문답지 않게 오히려 살짝 긴장하는 듯 보였다.
그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응접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오빠는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추는 척하면서 내 손안에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확인해 봐.’라고 입 모양으로 읊조리는 것과 ‘아나이스 공작은 미친놈이야.’라는 경고도 아끼지 않은 채로.
복귀해야 하는 오빠를 훌쩍 떠나보낸 뒤, 나는 응접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오빠가 건네준 작은 쪽지와 찢어진 용지를 열어 보았다.
[황후궁을 돌다 발견. 확인 결과 네 카페의 팸플릿에 황후의 필체. ‘라비린토스’라는 글귀에 거듭 밑줄.]
그의 말마따나 찢어진 용지는 내가 직접 만든 팸플릿이었다.
‘라비린토스’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데다, 고위 귀족 여성다운 필체로 물음표와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오빠는 라비린토스에 대해 모르지만, 내 팸플릿에 메모가 쓰여 있는 게 수상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야.’
오빠의 쪽지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까……. 황후가 직접 나를 찾아왔잖아. 단순히 귀족들에게 소문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부자연스러워. 내 예상보다도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어.’
카페가 궁금하다 한들, 굳이 빠른 시일 내에 카페로 찾아올 일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오빠가 건네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서 꽉 움켜쥐며 구겼다.
목격자를 찾기 위해 라비린토스 라는 힌트를 뿌렸다.
그리고 그 미끼를 문 사람은 바로 황후다.
어쩌면 황후가 목격자일 수도 있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전환이 찾아왔다.
‘잘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야.’
똑똑.
작은 노크 끝에 문 안으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벨로타 황후가 등장했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오는 황후를 바라보며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손을 빼고 그녀를 향해 몸을 일으켜 간단히 묵례했다.
벨로타 황후, 만약 당신이 뷔에트리 백작 부부 살인 미수 사건의 목격자라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당신은 나와 한배를 타 줘야겠어.
나는 또렷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다음 할 말을 속으로 상기했다.
“이상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황후의 등 뒤에서 함께 걸어 들어온 후작 부인이 날 선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된 사기극을 치는 중인데, 사소한 태클 따위에 쫄 리 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예요.”
가만히 있던 황후가 손을 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지.”
“예, 폐하.”
금테를 두른 고상한 민무늬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와 황후가 마주 앉았다. 황궁의와 후작 부인은 언제라도 나갈 수 있게끔 황후의 등 뒤에 섰다.
“자세한 조사 결과를 먼저 말해 보게, 황궁의.”
황후의 눈짓과 호명을 받은 황궁의가 간략히 현 상황에 대해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폐하께서 의장을 정리하시는 동안, 황후궁 내 황궁의끼리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케이크 내부에 들어간 것은 간단한 치료약 재료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후작 부인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평민이 치료한 것을 그동안 황궁의들이 치료하지 못했지? 이는 문책의 대상이 될 터인데.”
“저희 황궁의들끼리도, 두, 두통에 좋다는 치료는 전부 하였으나…….”
“디저트 따위로도 치료되는 단순 두통을 지난 시간 동안 치료하지 못한 죄과를 치를 준비를 해야겠지.”
“그러니까, 그것은…….”
문책이라는 말에 겁을 잔뜩 먹은 황궁의가 우물쭈물했다. 날이 선 분위기 속, 나는 눈치를 보다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음…….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우선 이 케이크의 치료가 통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죠? 한데…….”
나는 심각한 척 입술을 꾹 깨물며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병환이 확 낫다니, 조금 이상하네요. 보통 오랜 시간 축적된 만성 통증이라면 이렇게 쉽게 낫지는 않거든요.”
나는 아티팩트의 현란한 사기에 당한 황궁의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게다가 이리 똑똑하신 황궁의께서 잡아내시지 못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짚이는 것이 있어서…….”
“무엇이?”
나는 후작 부인과 황궁의 쪽에 가볍게 눈짓했다.
이미 내 아티팩트, 아니 정확히 샘의 사기 아티팩트의 포로가 된 황궁의가 입을 헤벌쭉 벌리며 몸을 들썩였다.
“저 평민이 황후 폐하와 단둘이 독대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자네 왜 이래? 왜 이리 협조적이야?”
“다투지들 말거라.”
황후의 낯빛이 한결 더 해쓱해 보였다.
이제 막 약 기운이 사라져 가는 중일 것이다.
나의 의견을 더 들어 볼지, 아니면 이대로 치료 약만 받은 채 미봉책으로 끝낼지 어느 정도는 갈등하고 있을 터.
나는 그녀의 결단을 돕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어 내밀한 어조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황후 폐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걸요.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황후가 자애롭고 제 측근 대부분을 따스히 굽어살필 만큼 자애로운 성정이라지만, 고통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멜라니아.”
“……예, 폐하. 하지만……. 황녀 전하라도 함께 동석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러도록 하지.”
황후의 긍정에 후작 부인은 샐쭉한 표정을 감추며 문을 닫고 떠났다.
아무래도 멜라니아 후작 부인은 보이는 것과 달리 내 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녀를 곁에 두게끔 도와줄 리가 없다.
황녀까지 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내가 만들어 낸 큰 그림이 모두 완성될 테니.
나는 사악한 표정을 감추며 해맑게 양손을 마주 잡았다.
* * *
몇 분 뒤.
나는 시녀에게 부탁해 테이블 위에 케이크에 들어간 약초 재료들이 담긴 은쟁반을 놓게끔 했다.
그 후, 황후와 황녀를 나란히 앞에 둔 채로 상당히 조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황궁의 분들만큼이나 똑똑하고 빼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약초 재료들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그분들의 치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요. 왜냐하면 케이크에 들어가는 이 약초들은 조금 특별하거든요.”
“특별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여기 있는 약초들에는 공통적으로, 저주를 막아 주는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요.”
그들의 시선에 혼란이 어리자, 나는 잽싸게 한 발 더 치고 나갔다.
“사실 케이크 이름이 라비린토스인 것도 이유가 있어요. 라비린토스라는 건, 사악한 부두술사들이 사용하는 저주 주문으로 알고 있어요.”
“뭐? 저주의 주문을 케이크 이름에 넣었단 말이야?”
황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쁜 의도로 지은 이름은 아녜요!”
황후는 떨리는 시선을 내게 고정하며 황녀를 제지했다.
“계속, 계속 말해 보거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말을 이었다.
“부두술사들의 저주는 정말 무섭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에 대항할 만한 정화의 케이크를 만들어 보자, 싶은 마음에 이름을 그리 정했던 거예요…….”
나는 소심한 파티시에가 된 것처럼, 손을 맞잡고 잔뜩 주눅이 든 연기를 했다.
다행히 이 와중에도 내 선량한 외모는 열일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 케이크를 먹고 오래 앓던 병증이 씻은 듯 나으셨다고 하시니.”
나는 황후를 바라보며 진중한 척,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음……. 폐하게서 앓으시던 병증의 원인이, 혹시 저주가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제야 황후의 눈빛에 의심이 어렸다. 나는 저 의심에 불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혹여 주변에 부두술을 다루는 자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부두술이라면, 폐하…….”
황녀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황후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로 설득된 것 같지?’
게다가 내게는 샘의 사기 아티팩트도 있다.
그들이 당황한 사이 주머니 속 아티팩트를 작동시킨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콘윌 공작, 당신이 사기 아티팩트를 사용할 때에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겠지.’
나는 또렷했던 황녀의 시선이 약간 풀어진 것을 보고 느릿느릿 암시하듯 확언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저주일지도 모르겠어요.”
사기 아티팩트 덕분에 내 말의 파장은 한결 더 커진 모양새였다.
황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책임질 수 있나?”
“황후 폐하께서 당분간 제가 제조한 약을 드셔 보시면 알 거예요.”
나는 가만히 덫을 놓은 채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저주를 풀어내는 약재인, 셀라토 뿌리와 백합을 함께 섞어 넣은 약을 드시고, 만약 건강이 나아지신다면 말이에요…….”
나는 느릿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조사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뭐든, 두드려 봐야 하니까요.”
나는 황후의 새하얘진 안색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여럿에게 건네서 확인해 보겠네. 반(反) 저주 술사도 부르도록 하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분간 약재를 제가 제조해 드릴게요. 황궁의 분들과 함께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황후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아픔이 찾아오는 듯 인상이 미미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러거라.”
황후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나는 짧게 심호흡했다.
드디어, 누명을 씌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콘윌 공작.
당신이 누명을 씌울 때는 몰랐겠지만, 누명을 쓰고 보면 알겠지?
하지도 않는 일로 모함받는 게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일인지.
* * *
아스텔이 황후궁에 드나들게 된 지 어언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황궁 내에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황궁 기사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각,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 경은 기사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내일은 기사단 전원 휴가다!”
최근 들어 국지전도 적어진 데다, 마물 전쟁이 몇 달 앞으로 임박했으니 당분간 고삐를 풀고 놀라는 황제의 배려였다.
입이 찢어져라 신이 난 기사들이 누워 있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드디어 데이트 갈 수 있는 거냐고!”
왁자지껄한 가운데 카시언만은 별다른 생각 따위 없다는 듯이 평온했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어 등받이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댄 그가 생각에 잠겼다.
‘휴가 기간이니 좀 더 심도 있는 수색을 해야겠군.’
최근 들어 밤에는 콘윌 저택의 비밀 통로를 수색하랴, 낮에는 기사단에서 활약하랴 몸이 열 개라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기사단장이 그의 바로 앞까지 와서 어깨를 콱 잡은 채로 흔들거렸다.
“카시언 경! 그 카페 알아?”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린 카시언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무슨 카페 말입니까?”
“그, 요즘 장안의 화제인 그 치료사 테마 디저트 카페 말이야.”
아스텔 얘기였다.
카시언은 누구보다 그 장안의 화제에 관해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은 척 천연덕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네, 황후 폐하와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때, 신이 나 떠들어 대던 기사들이 카시언의 근처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본능적으로 귀찮음을 감지한 카시언이 삐죽거리는 말을 내뱉으려 했을 때였다.
“엄청난 곳이라던데! 만병통치래!”
“레이디 하젤이 그곳에 함께 데이트 가자던데!”
“우리 좀 데려다줘 보면 안 되나, 카시언 경?”
카시언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사내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 근육 멍청이들과 같이 가고 싶지는 않지만……. 아스텔과 만나기는 해야 해.’
황후와 콘윌 저택 관련해서 중요하게 건네야 할 말이 있었다.
기사단에 묻어간다면, 가엾은 전령새를 희생시키지 않고, 큰 의심도 받지 않고 아스텔과 마주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일 것이다.
카시언은 못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탐탁잖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카페, 다시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시커먼 기사들이 왔다고 쫓겨나지는 않겠지?”
“……글쎄, 딱히.”
“그럼 다 같이 가 보자고!”
카시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은 야유 반 환성 반을 섞어 댔다.
그러나 혈기 어린 분위기 속, 몇몇 기사들의 목소리가 유독 귓가에 꽂혔다.
“드디어 그 레이디를 만나게 되는군.”
“아주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하던걸.”
“아, 내가 눈독 들이는 중이었는데?”
카시언은 못생긴 데다 키도 작은, 그와의 대련에서는 백전백패인 기사를 노려보았다.
“누가……. 누구를 눈독 들인다는 거지?”
기사로서,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전 정당한 이유를 확보하는 일은 필수였다.
“엉? 내가, 황후 폐하를 구했다는 소문이 난, 그 치료사 아스텔이라는 여자를 말이야!”
카시언은 여전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신랄하게 웃었다.
이거 더 확인할 것도 없이 빠르게 처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 *
벨로타 황후의 치료를 맡은 이후부터 나의 성공시대가 시작됐다.
이 표현은 정말 과장이 아니다.
황후궁을 지나다닐 때마다 황궁 내 하녀들이 나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지를 않나, 요리사들은 맛있는 것을 계속 가져다주질 않나, 급기야 시녀들은 자꾸만 내 드레스 주머니에 무언가를 찔러 넣었으니까.
참다 참다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뭐예요?”
내가 묵직해진 주머니를 꾹 움켜쥐자 시녀들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해바라기씨예요. 아아, 이것도 조금 드셔 보세요.”
“이건 또 뭐…….”
“……체리예요.”
“어쩜 이리 귀여우실까요?”
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해바라기씨와 체리를 받았다.
체리는 그렇다 치고, 대체 해바라기씨를 어디다 쓰라는 거지…….
하지만 인사성이 밝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잘 쓸게요.”
등 뒤에서 꺅꺅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 조금 더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벨로타 황후의 병증을 고쳐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시녀들이 저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네 덕분에 밤에 불편하지가 않아.’
‘다행이에요, 폐하.’
‘모든 것이 그자의 저주든 아니든……. 네게는 고맙구나, 아가. 조만간 좋은 선물을 주마.’
그러나 황후의 말을 떠올려 보니, 하녀들의 태도가 약간은 납득이 갔다.
‘오랜 병환에 시달리던 황후의 병을 치료했으니 그 아랫사람들이라면 과하게 고마워할 만하지.’
그래서일까, 황후는 내게 빈틈을 꽤 많이 내보였다. 황후로서 약간의 경계심은 남아 있는 모양인지 내게 제 주변을 뒷조사한 결과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입으로 ‘그자의 저주’라는 단어를 언급한 걸 보면 콘윌 공작이 주요 의심 선상에 오른 것은 확실한 듯했다.
‘미미를 통해서 뒷골목에 콘윌 공작이 의심스럽다는 소문도 냈고.’
모든 게 술술 풀렸다. 훌륭한 선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콘윌 공작이 뷔에트리 가문을 멸문시킨 과거의 행적과 유사하게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황후궁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맞은편 복도에서 거침없이 걸어오던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와 어깨를 강하게 맞부딪쳤다.
“아.”
“으으…….”
추하게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지만, 거의 한 걸음 이상 뒤로 밀려났다. 나는 인상을 겨우 펴고 눈앞의 사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새까만 제복을 입은, 딱 봐도 고귀해 보이는 새빨간 머리에 벽안의 사내가 나를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만.”
시선을 무시한 채 떠나려 했지만 그가 내 앞길을 가로막은 채 픽 웃으며 능글거렸다.
“조심해. 예쁜 얼굴이 다치면 곤란하잖아.”
분명히 웃는 표정이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분이 상당히 스산해졌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틀며 얌전히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요즘 들어 타인의 호의에 상당히 익숙해진 내 눈엔 그가 내게 기상천외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이 시간에 황후궁에 들어설 귀한 적발에 벽안의 사내라면, 망나니 황태자일까?’
복도 바깥으로 바삐 걸음을 움직이면서, 나는 머릿속에 데이터베이스를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조사해 보니 콘윌 공작과도 은근히 친밀한 것 같던데.’
원작에서 눈에 띄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추가적으로 검토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생각해 보면, 소설《피의 복수》속에서 그는 대외적으로 추앙 받는 아름다운 황태자라는 설정이었다.
‘어느 정도 인간 우월주의가 있어 수인을 좋아하지 않고,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돌아 카시언과 쌍벽을 이룬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은 흐리멍덩한 정보를 떠올린 나는 다시 한번 황태자에 대해 알아볼 것을 진지하게 다짐했다.
* * *
황후궁을 빠져나온 뒤, 카페에 도착한 나는 완전히 진이 빠진 상태였다.
황후의 은인이 된 나를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 탓에 노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손님이 거의 다 빠졌다.
온몸이 부서져라 일한 뒤 슬슬 퇴근할까, 하며 기지개를 켜는데 문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황궁의 장미 기사단들이 직접 카페에 찾아온 거였다. 물론 그중에는 우리 오빠, 카시언 그레이 경도 있었다.
다소 탐탁잖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양 볼이 발그레해진 게 나를 봐서 기쁘다는 듯한 낯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카시언이 제 곁에 있는 기사의 옆구리를 퍽 쳤다. 그러자 기사들이 마치 자동 응답기처럼 기계적으로 크게 복창했다.
“절대로 사심 따위는 품지 않았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안심하십시오!”
그들의 복창을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치 폭력에 길든 것 같은 빳빳한 태도를 보니 이유는 몰라도 절로 안쓰러움이 일었다.
“네, 어서 앉으세요!”
나는 활짝 웃으며 그들을 향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 다섯이 케이크를 먹겠답시고 머리를 맞댄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카시언만이 나를 응시하다가, 골똘히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앞에 서서 간단한 주문을 받고 돌아서려는데, 카시언을 힐끔 보던 기사들이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때리려 들어!”
“폭력적이야…….”
“완전 괴물이야…….”
듣자 하니 폭력적인 괴물 같은 자라도 만난 모양이었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주방으로 돌아가, 갓 만들어져 나온 케이크 위로 시럽을 뿌렸다.
‘진정 효과가 있는 시럽을 솔솔 뿌려야지. 아프지 않게.’
시럽을 뿌린 뒤 식기를 준비하는데, 등 뒤에서 기사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께서 요즘 기사들을 좀 대동하고 다니신다던데, 들은 바 있나?”
“글쎄, 나도 황후 폐하의 기사로 선발되고 싶은데 원. 나를 뽑아 주시질 않을 테니 말이다.”
황후 폐하라니, 익숙한 화제에 나는 귀를 쫑긋했다.
“카시언 경, 그대는 폐하를 의전한 적이 있지 않았나?”
“뭐, 있었지.”
나는 그들의 수다를 들으며 시럽을 뿌린 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다시 돌아섰다.
“맛있게 드세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쓱 넣고 주방으로 총총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주방 바로 앞까지 따라온 누군가가 등 뒤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추가 주문을 할까 싶은데요. 허브티로요.”
“아, 네!”
나는 등을 돌려 목소리가 아주 좋은 남자, 우리 오빠인 카시언을 바라보았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가 능숙하게 내 앞치마의 주머니에 종이를 찔러 넣었다.
“주문 완료되셨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귓가에 대고 궁금해했을 정보를 짧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아기는 잘 지낸대요.”
진짜였다. 공작저에서 룬은 신수 미미와 함께 뒹굴거리며 행복하게 자라고 있으니까.
내가 전달해 준 소식에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파티시에 한 명이 남아 있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쪽지를 펼쳐 보였다.
[1. 황후, 자신의 두통이 질병 탓이 아니라 저주라고 믿고 유력한 용의자인 콘윌 감시 중.
2. 콘윌에게서 나온 미라 조각, 일단 황후궁에 가져다 놓음. 황후의 의심 강화됨.
3. 콘윌 저택 비밀 통로 확보. 콘윌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치부책 확보 가능할 듯.]
종이에는 마법이 걸려 있던 모양인지, 내가 모든 글자를 다 읽자마자 화르륵 타올랐다.
‘미라 조각이라니, 완벽하잖아.’
오빠는 내가 한 말을 듣고 난 뒤 콘윌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내 의중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슬슬 오빠와 손발이 맞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오면서, 주방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를 향해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였다.
‘잘했어.’
어쩌면 그와 협력하고 있는 자까지도 잡아야겠지만……. 일단 지금 이 순간, 콘윌 공작은 독 안에 든 쥐일 테니까.
* * *
비슷한 시각, 황후는 제 아들인 황태자와 독대했다.
아주 오랜만에 두통으로 인한 고통이 가신 평온한 낯으로 제 아들을 마주한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까 막, 아스텔이라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꽤 귀엽더군요.”
표정이 없던 그가 갑작스럽게 씩 웃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황태자.”
“그저 말 그대로일 뿐입니다.”
황태자는 대외적으로 평판이 좋았으나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잔악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의 은인이야. 질병을 고쳐 준 데다, 이것이 저주라는 사실까지 알려 주었는데.’
아스텔의 의심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은밀히 수소문해 데려온 저주술사 여럿이 아스텔이 가져온 재료가 저주를 푸는 데에 탁월하다고 증언했다.
황후의 증상 역시 저주의 일종일 수도 있다고도 입을 모았다.
“그 문제는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찾아온 용건이 무엇입니까.”
황후의 딱딱한 태도에 황태자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폐하께 여쭈어볼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콘윌 공작의 뒷조사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만두십시오.”
그의 말마따나, 황후는 현재 콘윌 공작을 뒷조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뒷조사를 했음을 시인했다. 그러자 황태자의 시리도록 푸른 눈이 음험한 빛을 띠었다.
“콘윌 공작은 지금 제 손발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만, 폐하.”
제 아들의 표정이 일전에 본 바 없이 굳어졌으나 황후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움켜쥔 손안에 들려 있던, 황후궁 옆에서 발견된 미라 조각을 제 아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의 병증에 그자가 엮인 듯합니다. 황후궁에서 나타난 미라 조각을 조사해 본 결과, 콘윌 공작의 흔적이 드러나 있더군요. 부두술사들은 이런 것으로 저주를 한다고 하던데.”
“…….”
황후의 손에 들린 미라 조각을 확인한 황태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쩌면……. 황태자에게도 나쁜 짓을 할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태자가 익살스러워 보일 정도로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순식간에 싸늘한 낯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감히 황궁을 음해하려 드는 자와는 구태여 친분을 다질 이유가 없겠군요.”
그의 말에 황후가 눈을 아래로 가만히 내리깔았다. 다소 안심한 듯한 기색을 보인 그녀는 다정한 어머니의 표정으로 돌아가 물었다.
“……콘윌 공작과 친분을 끊을 계획이니?”
“글쎄요, 일단은 제 주제를 파악하게 해 줄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말입니다.”
황태자가 탁한 벽안을 황후의 어깨너머로 고정하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은인인 아스텔을, 북부의 그 짐승 새끼가 그리 끼고돈다던데.”
“짐승 새끼라니.”
간단한 지적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던 낯이 평소처럼 말쑥하게 변했다. 황태자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수인들은 죄다 짐승이 아닙니까.”
물론 그 안의 내용은 결코 나긋나긋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공작이 싸고돈다는 그 여자 말입니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한 황후가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그 짐승이, 황녀와의 혼담까지도 거절할 정도로 그 여자에게 미쳐 있더군요.”
황후는 제 아들의 혼탁한 눈동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 눈동자에 어린 것은 불순한 관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매사 쉽게 싫증을 냈던 소년은, 여자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내팽개치고는 했다. 대체로 황후가 뒷수습을 해 주어 파란이 인 적은 극히 드물었으나 많은 여성 귀족들이, 시녀들이 상처를 입었다. 황태자가 건드린 여자들의 말로가 어땠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아스텔마저도 그렇게 된다면 병을 고쳐 준 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었다. 황후는 양미간을 모으며 단언했다.
“어미로서 말하는 것이니, 불순한 관심을 갖지 말거라. 나의 은인이니. 그리고 아나이스 공작은 위험해.”
“그럴 리가요. 평민 입장에서도 제 첩으로 들어오는 것이 더 좋을 텐데요.”
황태자가 황후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혼잣말했다.
“게다가 그 짐승의 여자라니, 제법 구미가 당긴단 말입니다.”
워낙 작게 말한 탓에, 황후는 아들의 말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멋대로 뒤틀려 자란 열등감만큼은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키득거리는 제 아들을 보던 황후의 시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녀는 다시 황후의 위엄을 내세우듯 허리를 단단히 곧추세우고 말했다.
“그 아이 건드리지 마세요.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콘윌 공작을 멀리하세요. 악영향을 끼칠 자이니.”
“예, 뭐. 일단은……. 그 악영향이 확실한 것인지부터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태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 * *
황후궁을 빠져나간 황태자가 찾아간 곳은 콘윌 저택이었다. 그는 콘윌 공작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반영하듯 다 썩어 빠져 무너져 내린 고택을 탐탁잖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콘윌 공작, 포커로 치자면 쓸 만한 조커인 줄 알았더니 스페이스 에이도 못 되는 형국이다. 게다가 제 어머니의 저주 사건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보고 역시 이미 들었다.
그는 콘윌 공작의 정원에서 그와 마주 보고 선 채,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음을 지었다.
“나는 무는 개는 키우지 않는 거, 그대도 잘 알 텐데.”
이제 갓 이립이 된 황태자가 오십이 넘은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불손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콘윌 공작 역시 썩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힘을 세게 주어 핏줄이 파르라니 돋은 손으로 황태자의 손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떼어 냈다.
“무는 개라니, 썩 무례하지 않으십니까?”
황태자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한 콘윌 공작을 노려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대의 소망을 이루려면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하잖아? 한데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뒤통수친 적은 없습니다.”
“저주를 걸었잖아. 네까짓 게 감히, 제국의 황후에게.”
“예?”
콘윌 공작이 반문하자 황태자가 경고하듯 싸늘하게 말했다.
“몇 안 되는 부두술 능력자들이 그대의 지배를 받는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건-”
“입 닥쳐.”
콘윌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황후에게 부두술을 쓸 이유가 없는데, 모든 상황적 증거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후의 병은 부두술을 토대로 한 저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혀지지를 않나, 자신이 부두술사라는 뜬금없는 소문이 상업 거리를 중심으로 퍼지지를 않나, 갑자기 황후궁 옆에서 자신이 과거 제 저택에서 버렸던 미라 조각이 발견되지를 않나…….
‘내가 뷔에트리 백작가에 누명을 씌웠던 상황과 상당히 비슷하게 흘러가는군.’
기분이 더러웠다.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건 족족 곧 황후를 저주했다는 누명의 증거가 되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이 상황이 아주…… 개 같았다.
“증명해 보이도록 하죠.”
콘윌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 누명을 씌운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스텔 그 여자겠지.’
그의 직감은 아스텔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황후의 곁에 붙은 멍청한 아스텔이라는 계집애.
아무리 봐도 뷔에트리 백작가와 관련이 있는 듯한, 자신이 만들어 낸 사기 아티팩트를 멋대로 남용하는 그 여자애가 이 사태를 조종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사사건건 거슬리는군.’
황태자가 그를 향해 선언했다.
“사흘의 유예를 주지. 누명이라면, 그대에게 누명 씌운 자를 알아내도록.”
“이미 알고 있습니다.”
“……누군데?”
“아스텔. 그 여자.”
음산한 눈빛에 불길한 기운이 일렁였다.
콘윌 공작을 ‘기르던 개’ 취급하며 눈 아래로 두고 업신여기던 황태자조차도 흠칫할 정도의 싸늘함이었다.
“그 계집이 뷔에트리 가문 사건에 제가 연루되어 있는 것을 알고, 저를 음해하는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눈빛에 의아함이 들어차더니, 곧 단번에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뷔에트리 가문의 생존자라고? 그게 말이 돼?”
신랄한 비웃음이 어린 목소리가 콘윌의 귓전을 때렸다.
“고작해야 스물밖에 안 된 여자를 끌어들일 만큼 사정이 급한 모양이지?”
황태자의 분노 섞인 눈빛을 마주 본 콘윌 공작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눈앞의 황태자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 목표인, 모든 종류의 마법 및 이종족 멸살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 황태자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오래전, 그의 부인과 딸은 마법사와 수인들에 의해 싸늘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씨근덕대는 황태자를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임신중독증을 다른 병증으로 오인한 마법사들의 멍청한 진단 때문에 죽어 버린 제 부인을 떠올렸다.
‘내가 없어도 당신은 꼭, 행, 복하게 살, 고…….’
‘두고 봐,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내가 반드시 죽일 테니까!’
오래전의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매번 새롭게 끔찍했다. 부인이 죽고 반쯤 미쳐 버린 콘윌 공작을 대신해, 몇몇 수인 시종들이 그의 딸을 길렀다. 멍청한 수인들은 그의 딸을 납치해서 금품을 요구하더니 결국 죽여 버렸다. 부인과 딸을 잃고 완벽하게 정신을 놓은 그는 생각했다.
‘기이한 능력을 가진 것들을 전부 죽여야 해.’
자신이 이능력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후, 마법사들이 가득한, 마법 명가로 유명한 뷔에트리 가문에 누명을 씌워 멸문시켰다.
그다음 차례는 수인들이 산다는 북부의 성이었다.
황태자 역시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는 수인들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했다.
지금까지만 해도 그들은 썩 좋은 파트너였다.
‘당장 황후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썼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지.’
일단은 부복한 채로 그의 명을 따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은 쓸개의 즙이라도 삼키는 심정으로, 아스텔 그 쓸데없는 계집애와 수인들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니까.
그가 눈을 희번덕인 채 낄낄대며 황태자의 턱을 움켜쥐었다.
“죽여 오겠습니다. 만약 그 천것이 뷔에트리 가문 출신이라면 시체조차 남지 않게 처리한 뒤, 누명을 풀죠.”
스산한 바람이 그의 뺨에 불었다.
“지금 당장.”
아스텔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뒤꽁무니에 첩자를 붙여 둔 지는 오래이니,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지금쯤 그 잡다한 카페에 있겠군.’
어딘가 찜찜해서 당장 목을 꺾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쥐새끼처럼 건드려 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죽일 결심은 모두 끝났다. 그가 피식거리며 황태자를 향해 우스꽝스럽게 경례 인사를 했다.
“어쩌면 오늘 중으로, 충심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그 여자를 죽여야겠다.
* * *
같은 시각, 공작 저택은 고요했다.
아스텔이 카페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룬의 보모 역할을 자청한 미미는 룬과 함께 방문의 복도에 앉아 있었다.
“재미이써!”
“이 어린 녀석아, 이 몸을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두어라.”
“웅!”
룬은 미미의 반질반질한 털을 매만지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룬을 내버려 둔 미미는 어젯밤 아스텔이 했던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너 조만간 나설 기회가 있을 거야.’
‘내가?’
‘응.’
‘아주 좋아, 이 몸의 활약을 보여 주지.’
멋진 무대에서 활약할 생각에 미미가 음흉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아스텔이 자신에게 사과 모양의 아티팩트를 건네주며, 이 초록색 풋사과가 빨간색으로 변하면 자신의 카페로 뛰어오라고 말했었다.
‘미미, 마지막으로 하나 연습할 게 있는데……. 정말 중요한 거야.’
털이 삐죽 선 귀를 매만져 주며 작게 속삭였던 아스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미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어휴, 그 녀석 그런 걸 연습하라고 하다니. 정말 악마 다 되었었지, 참.”
미미의 털을 쓰다듬던 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웅! 앙마! 뿔!”
미미는 발톱을 안으로 숨긴 채 룬의 어깨를 도닥였다.
“에휴. 힘내라.”
“히히.”
“……왜 나한테 이렇게 어린 녀석들이 꼬이는 거람? 내가 그렇게 매력이 넘치나.”
“웅! 매려기써!”
‘이 녀석이랑 적당히 숨숨집에서 놀다가 아스텔이 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면 되겠지.’
그렇게 한참 아스텔의 방문 앞 복도에서 한동안 룬과 숨기 놀이를 하던 미미의 노란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멀리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했더니, 복도 끝에서 아나이스 공작이 걸어오고 있었다.
미미는 씩 웃으며 상체를 아래로 쭉 내리고 엉덩이만 쏙 드는 고양이 자세를 취하며 호령했다.
“어디 가, 꼬맹이!”
재미있는 장난을 칠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거절하는 것은 신수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의 방문 앞을 호위병처럼 지키고 선 미미와 룬을 번갈아 응시하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비키십시오.”
미미는 장난스럽게 스트레칭을 하듯 공작을 바라보며 허밍했다.
“여기 아스텔 없는데? 너 걔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
“모릅니다.”
공작은 아스텔의 방문을 빤히 응시하다,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려 했다.
자신을 다정하게 돌봐 주던 고양이와, 아빠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공작의 대립을 보던 룬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동안 셋 중 그 누구도 말을 잇지 않는 긴장감 어린 상황 속, 미미가 공작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였다.
“난 아는데, 알 것 같은데. 말해 줄까? 아스텔 지금 완전 무시무시한 꿍꿍이를 갖고 있어.”
미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걔가 만약에 널 죽이려는 거면 어떡해?”
꼬드기는 듯한 말에 아스텔이 없는 방의 닫힌 문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나직하게 선언했다.
“죽겠습니다.”
그 대답에는 비장함까지 어려 있던 까닭에, 그냥 적당히 장난치고 골려 주려던 미미가 입을 쩍 벌렸다.
고양이의 좁쌀만 한 이빨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하여튼 너는……. 내가 졌다, 졌어!”
미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산할 정도로 차가운 낯을 한 아나이스 공작이 미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스텔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
미미는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아스텔이 말하지 말라고 했었나? 기억이 안 나네?’
“망설이는 걸 보니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아나이스 공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미미가 꼬리를 움찔거리며 부풀리고는 잘게 떨었다.
“찔리는 건 없다!”
누가 봐도 명백히 찔리는 게 많은 모습으로, 미미가 몸을 움찔거렸다. 공작은 느긋하게 미미의 다음 말을 기다리려 했다. 이 요망한 신수가 갑자기 옆에 있던 아티팩트를 심각하게 노려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어, 어어?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노가리 까는 사이에.”
신수인 미미의 천박한 언행에 내내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던 공작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을 때였다.
미미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아스텔한테 문제가 새, 생긴 거 같은데?”
짐승은 감각이 좋다.
이 말인즉, 미미가 이 상황을 단순히 회피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아닌지 정도는 안다는 소리였다. 공작의 시선이 빨간색으로 변한 아티팩트를 향했다.
지금 그의 직감에 따르면 미미의 말은 진짜였다.
그러니까…… 아스텔이 위험할 수도 있다.
미미는 솜방망이 같은 발바닥을 바닥에 쾅쾅 구르다, 빨갛게 달아오른 공을 공작 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이거 봐! 아스텔이, 자기가 위험하면 빨간색 불이 들어온다고 했거든? 그런데 빨개졌다고……!”
“출발하죠. 지금쯤 카페에 있겠군요.”
“우리 늦지 않겠지?”
공작이 신수의 몸체를 아무렇게나 들어 올리며 스산하게 속삭였다.
“안 늦습니다.”
미미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불이 지나치게 발갛게 달아올랐으니까.
놀란 미미에게 공작은 각인 마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만약 아스텔이 위험하다면 자신 역시 목숨을 부지하지는 못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자그마한 솜방망이를 휘적거리는 미미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속삭였다.
“만약 아스텔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설령 그녀가 죽는다 해도 다시 살려 올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건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남이 하면 허무맹랑하다 비웃었을 텐데, 공작이 그리 말하니 비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미미는 아나이스 공작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좋아! 우리 공주님을 구하러 빨리 가자고, 아 맞다!”
미미는 입을 꾹 다문 채 비장한 시선을 빛냈다. 아스텔이 말한 대로 하려면…….
“일단, 카페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돼.”
“……?”
“아스텔이 콘윌 공작가 바로 옆 시계탑의 종을 울리라고 했어.”
“시계탑은 너나 가십시오. 그쪽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꼬맹이 넌 어디로 갈 건데?”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믿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에도 아스텔은 자신보다 더 강했으니까.
물론 그는 아스텔의 안전을 두고 도박할 수 있는 성미는 못 되었다.
“일단은, 위험 분자부터 죽이러 갈 생각입니다.”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미미는 눈을 깜빡이며 귀를 쫑긋했다. 공작의 의견에 확실히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 * *
오늘 밤, 카페는 스산했다. 공작님이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가만히 혼자 운치를 즐기며 산책을 하겠다는 식으로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님은 마부와 마차를 대기해 주셨다. 나는 마차를 타러 가기 전에, 카페 바깥에 꾸며 놓은 자그마한 벤치에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오늘 체리가 다네.”
입 안으로 사람들이 자꾸 건네주는 해바라기씨와 체리를 꼭꼭 씹어 굴리던 나는 눈을 꼭 감으며 기지개를 켰다.
슬슬 피곤해질 시점이었지만, 마차와 마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도 안 오네.”
오늘따라 몸을 감싸고 도는 바람이 불온하게 느껴졌다. 나는 차가운 밤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다리를 쭉 뻗었다. 방심한 듯 느슨해진 낯으로,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 순간, 어깨 근처에서 미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
목구멍의 바닥을 긁어낸 것처럼 걸걸하고 흉흉한 목소리.
나는 반짝 눈을 떴다.
바로 고개를 돌리자 패색이 짙은 데다 숨결에서 위스키 냄새가 나는, 걸인 같은 사내가 보였다.
미친 광인의 표정을 한 콘윌 공작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기억하겠지.”
아마도 황후가 빠르게 내 뜻대로 움직여 준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더욱 빠른 접근에 나는 웃음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겁 없이 내 아티팩트를 사용해 사람들을 현혹시켰더군.”
“네?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에.”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약 올리듯 말꼬리를 늘여 가면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광인처럼 낄낄거렸다.
캄캄한 밤 같은 어둠 속, 그의 적의에 찬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겁 따위 먹지 않은 낯으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번지수 잘못 찾아오셨어요.”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섭도록 싸늘한 표정으로 내 멱살을 잡아 나를 일으켰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밀어내려 애썼지만, 압도적인 체격 차 탓에 그저 발을 바동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보다 키가 큰 그가 나를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내게 누명을 씌운 것도 너인 걸 알고 왔다. 지금 네 배후가 누구지? 그 짐승 새끼냐?”
적당히 참으려 했지만 공작님을 모욕한 순간 뾰족한 어조가 튀어 나갔다.
“쓸데없이 개소리할 거면, 꺼지지 그래?”
급발진한 목소리에 그가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으나, 곧 낄낄거리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광기 어린 웃음을 보니 단전에서부터 용기를 끌어모으지 않아도 저절로 차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움켜쥐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와 오빠가 겪었던 고통 섞인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뷔에트리 가문은 정말 끔찍하고 역겹죠.’
‘감히 황가를 전복하려 들다니, 인간 말종 아니에요?’
‘입에 담기도 더러운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멸족한 게 다행이죠. 다 죽었다고 했죠?’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 때문에 어떤 저질스러운 모욕을 들었는지, 당신은 단 하나도 짐작하지 못하겠지.
그런 주제에 감히…….
나와 오빠는 평생 억울함에 몸부림쳤는데 고작 황후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썼다고 득달같이 찾아와?
“욕했는데도 웃는 걸 보면 정말 돌아 버린 모양이네.”
나는 그를 신랄하게 비웃어 주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미친 것.”
그가 이를 갈더니 스산한 낯으로 나를 내팽개쳤다.
내 몸은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져 무릎이 까끌까끌한 바닥에 쓸렸다.
피가 줄줄 나는 것 같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광인 같은 사내와 단둘이 있다는 건 충분히 두려울 만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대 안 쫄아.’
지금까지 내가 당한 일을 떠올려 보면 쪼는 게 더 멍청한 짓이니까.
나는 몸을 일으켜, 서슬 퍼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똑똑히 이죽거렸다.
“미친 건 너 아니야? 광인으로 유명하던데?”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도 않은 듯, 음산하고 낮은 어조로 연신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혹시 너는……. 아, 그렇다면 뷔에트리 백작가와 관련이 있나? 그런 거겠지? 그러니 이러는 걸 거야. 으하하!”
은신 마법이 새겨진 손목이, 금방이라도 찢길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하지만 나는 아픈 티를 절대 내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 가문의 하인 출신인가? 충성을 바치던 개인 모양이지. 제 죽을 자리를 알고 찾아온 것을 보니 개새끼가 맞아.”
정답에 상당히 근접했지만, 아쉽게도 내가 뷔에트리 가문의 직계 혈족이라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만큼이라 한들 그의 확신 어린 한마디 한마디가 내 손목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그를 도발하듯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멍청한 개새끼라고 한다면, 너 아니야?”
반박하자마자 그가 내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서슬 퍼런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추측건대 그가 정신계 마법으로 내 기억을 헤집는 모양인지 머리가 계속해서 지끈거렸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고문을 좀 하면 말을 듣겠군.”
그가 킬킬거리며 다시 나를 들어 올렸다.
“너에게서, 걸리적거리는 마법 결계 따위는 내가 다 제거했거든. 아주 좋아.”
콘윌 공작가의 고문 능력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작중에 ‘고문으로 미쳐 버린 자도 있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에게 고문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은 잠깐일 뿐이다.
그는 우리 부모님을 끊임없이 괴롭히다 결국 누명을 씌워 죽인 자였다.
콘윌 공작을 똑바로 노려본 내가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마법사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마법을 써서 날 고문하려고 하는 건가?”
내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재차 낄낄대며 나의 목을 졸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눈앞이 새하얗게 질려 왔다.
정도가 지나쳐 새하얗게 표백된 순간, 발이 허공으로 부유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발을 몇 번 허공으로 뻗어 보았지만 몸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살점이 하나하나 떨어질 때마다 답하게 될 것이다.”
그 뒤부터는 눈앞이 완벽히 암전되었다.
하지만 스산한 바람 소리와 콘윌 공작의 치아가 불안정하게 딱, 딱 부딪치는 소리만큼은 잘 들렸다.
이 괴이쩍은 사내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 정도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콘윌 가문의 저택.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유일하게 그를 따르는 자들로 가득한…….
진흙탕물이 가득했고 질퍽거리는 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곳으로.
드디어 최종 흑막의 위험한 저택으로, 그의 초대 아닌 초대를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모든 게 내 예상대로야.’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은 채로 뼈가 시릴 정도로 아픈 몸의 고통을 잊기 위해 애썼다.
동결 마법이라도 건 건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귀가 싸늘하게 얼 지경이었다.
‘미미가 오기 전에 해 둘 일을 잊으면 안 돼.’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다 보니, 잘 벼린 칼날 같았던 바람이 뚝 멎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순간, 나는 나보다 내 건강에 더욱 관심이 깊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공작님은 괜찮으실까?
그리고, 만약 공작님이 내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이 걱정하실까?
* * *
카페에서 갑작스럽게 납치된 이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공작님이 나를 걱정할까, 하는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가 마침내, 나는 눈을 떴다. 얼굴에는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입고 있던 드레스는 넝마 조각이 된 지 오래였다.
창문조차 없는, 단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좁은 공간이 나를 반겼다. 악취 나는 물이 천장에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눈을 떴군.”
나는 오감을 발동시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콘윌 공작저의 심장부인 고문실이었다. 나는 고문용 의자에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눈앞의 콘윌 공작을 바라보았다.
“흐으…….”
거기에 더해 일부러 신음을 내질러 보았다. 그가 입가에 흉측한 미소를 띠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개가 낀 듯 흐린 눈을 재차 깜빡거렸다.
‘하나도 안 아픈데.’
최종 흑막인 그라면 분명 병적으로 내 몸을 수색할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퇴근하기 전에 일찍이 감각이 둔화되는 약물을 먹어 두었다. 살갗이 강철같이 변하는 약물은 덤이었다.
‘내 목숨은 아주 소중하거든.’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픈 척 골골 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파라, 나 죽겠네…….”
……연기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말을 내뱉는 순간, 콘윌이 의심하는 시선을 띠었던 것이다.
나는 잽싸게 고통에 찬 척 비명을 지르고, 인상을 찡그리며 묶인 팔을 힘없이 비틀고 발버둥 쳤다. 그제야 안심한 콘윌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고문실에 온 것을 환영해.”
나는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밧줄을 뒤틀어 몸을 빼내려는 척을 했다. 그래야 그가 내 행동에 시선이 팔려 자신의 고문실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일단은 여기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야 해.’
내가 콘윌 공작의 시선을 끌어 두는 동안, 오빠가 저택에 숨겨져 있을 치부책이나 기록물을 가져온다는 계산이었다.
“내 정체가 궁금한 모, 양이라면…….”
그렇게 궁금하면 지금부터 천일야화만큼 말해 주마. 이 몹쓸 놈아!
“나는…… 콘윌 공작,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어.”
그는 심드렁하게 혀를 차며 의자 바로 옆, 테이블 앞에 섰다. 주둥이가 긴 플라스크 여러 개에 담긴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색깔부터가 진흙 괴물을 닮은 게, 딱 봐도 먹으면 골로 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정말이지 헛소리 들어 주기도 귀찮군.”
아마도 저 약을 먹이고 나를 죽이거나 미이라 조각으로 만들 계책인 모양이었다.
흑막은 ‘감춰진 과거’ 때문에 미쳐 버렸다는데, 그 과거가 무엇인지는 세간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눈썰미가 제법 좋은 편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그의 테이블 위에 소중하게 올려져 있는 여자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콘윌 공작에 대한 원작 속 정보를 떠올렸다. 한때는 똑똑했으나, 가족들이 차례로 의문사한 뒤 미쳐 버렸다는 짤막한 서술을.
‘죽은 가족이 트리거 포인트일 거야.’
“당신이 왜 뷔에트리 가문을 멸문시켰는지.”
“도발하는군. 죽기는 싫은 모양이지?”
“죽어 버린 당신의 가족 때문이겠지, 안 그래?”
두루뭉술한 도박 수를 던졌다.
무언가를 섞고, 끓이고 하며 약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콘윌 공작이 약병을 내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미쳤나?”
그는 내 바로 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낯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나는 내가 정답을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왜? 가족애가 넘쳐 흐르는 중인가 봐.”
……남의 가족은 죽여 놓고, 라는 말을 쓰게 삼키며 나는 당돌하게 시선을 치떴다.
“나는 당신의 가족이 누구에게,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데.”
계속 콘윌 공작을 도발해 나와 말싸움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저택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을 오빠가 마침내 치부책을 찾아내고, 미미가 나를 꺼내러 올 때까지 온전히 버텨야 했다.
나는 그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았다.
* * *
카시언은 거대한 미궁 같은 저택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보수되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저택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 자그마한 미로 같은 비밀 통로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라고 생각했던 ‘콘윌 저택 내 마법진 파괴’ 계책은, 아스텔이 건네준 마도구들 덕분에 현실화되었다.
‘치부책은 기록물 보관소에 있을 확률이 높아.’
레이첼과 머리를 맞대고 정보를 공유해 본 결과, 콘윌 공작은 기록에 병적으로 집착한다고 했다.
그의 저택에는 온갖 형태의 암호 기록물들이 가득하다는 증언도 발견했다.
비밀 통로로 들어선 카시언은 어젯밤에 파괴했던 마법진을 손쉽게 건너간 뒤 기록물 보관소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여기가, 기록물 보관소의 심부야.’
손등이 차가워지고 솜털 하나까지 삐죽 설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 어두컴컴한 공간을 유일하게 밝히는 것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미미한 횃불뿐이었다.
터벅, 터벅.
카시언은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희미한 빛을 의지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가며 서가를 하나씩 지난 카시언은 비교적 최근의 기록물이 모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멈춰 섰다.
그가 다다른 곳은 끝도 없이 높은 서가였다.
바벨탑처럼 높은 서가는 독 안개로 추정되는 은빛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궁금증을 유발했다.
간단히 마도구를 휘둘러 안개를 없앤 카시언이 눈높이 바로 앞의 책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ª———-º]
책등에는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암호가 적혀 있었다.
가문의 복수를 준비하며 온갖 암호에 통달했으나 이런 식의 기호는 처음 보는 것이었던지라 잠시 당황했다.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면 안 된다고 했어. 그러면…… 기록물이 사라진다고.’
콘윌 저택 내부의 기록물에 걸린 암호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마법과 같아서, 완전한 암호 해독 없이는 기록물을 훔쳐 내 가도 헛일이라고 했다.
카시언은 암호학에 빼어나다고 자부했던 과거의 자신을 속으로 패대기치며 짧은 고민에 잠겼다.
‘암호 마법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 법.
스릉-
그 순간, 감각이 예민한 카시언이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온 서늘한 칼날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에 칼이 겨눠진 채로 카시언이 당황한 바 없이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야.”
기록물 관리인 중에서도 하위급으로 추정되는 얼빵한 사내가 눈앞에 보였다.
‘잡았다, 암호 해독해 줄 호구.’
다년간의 전쟁 생활로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제법인 카시언이 씩 웃으며 능글맞게 물었다.
“왜, 찌르게? 아프겠네?”
관리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누가 보면 자기가 칼을 들이댄 줄 알겠다고 뻔뻔하게 생각하면서, 카시언이 덜덜 떨리는 칼끝을 한 손에 쥐었다.
“누군데 여기를 드, 들어온단 말이야! 상관께 당장 말할 것-”
“그래, 그래. 말해. 일단 조용히 하고.”
자신에게 칼을 댄 사내가 큰 소리를 지를까 염려해 음소거용 마도구도 야무지게 켠 카시언은, 주머니에서 속박 마도구를 뒤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 주인? 죽은 거 몰랐어?”
물론 아직 안 죽었다.
하지만 곧 죽일 거라는 뜻이었는데, 관리인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 그래서 이곳에 외부인이 침입 가, 가능하게 된 건가? 그럼 우리 가, 가족들은…….”
띨빵하긴.
카시언이 혀를 쯧 찼다. 이어서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속박 마도구를 달칵 눌러 켰다.
단숨에 속박 마법에 걸린 하수인의 한쪽 손가락이 잠시 꿈틀거리다 이내 멎었다.
“외부인이 마법을 썼어…….”
절망적인 어조에 카시언이 어깨를 으쓱하고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나도 너무 이유가 궁금하네. 잠깐 묶을게. 얌전히 있어?”
아기 고양이를 다루듯 조곤조곤한 어조였으나 하수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카시언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뷔에트리 가문을 무너트렸던 자들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빼앗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속박 마도구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닥에 달라붙은 사내의 손을 톡톡 두드린 뒤 수도의 꽃이라 불리는 이답게 눈웃음쳤다.
그는 다시 눈앞의 암호로 된 기록물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너, 이거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렇지?”
“그건 없…….”
“아닌 거 같은데?”
카시언이 서늘한 시선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알잖아, 방법.”
평범한 하수인이라지만, 어떻게 보면 콘윌 저택의 부역자다. 카시언의 시선이 금세 싸늘해졌다.
저택의 마법진은 어떻게든 뚫었으니, 기록물만 얻어 내서 세상에 공개한다면 누명을 풀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 앞에서는 아무리 여유로운 카시언이라고 해도 초조하고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해 봐.”
“도대체…….”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순식간에 얼어붙은 그의 태도에 하수인이 이를 딱딱 부딪쳐 가며 떨었다.
카시언은 하수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보아하니 암호학에 능통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리 봐도 어딘가에 암호 해독 도구가 있을 법한데.’
말해 주지 않으면 찾아내면 되지.
눈앞의 사내는 전혀 모르겠지만, 카시언은 어릴 적 거리를 헤매며 먹고살았던 좀도둑 출신이었다. 값나가고 귀중한 것을 알아보는 레이더망이 있다는 소리였다.
카시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의 몸을 수색한 지 몇십 초 뒤. 그는 속박된 사내의 가슴 포켓에서 자그마한 도장 같은 것을 휙 꺼내 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거 맞잖아, 왜?”
“……!”
도장을 손에 움켜쥔 카시언이 씩 웃으며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쓰는 걸까, 이건?”
카시언의 투박한 손끝이 도장의 끄트머리를 스치자, 뚜껑에서 나온 빛이 허공으로 번지듯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절망한 채 눈을 꼭 감은 기록물 관리인을 힐끔 내려다본 카시언이 씩 웃으며 불빛을 서가 쪽으로 비춰 보았다.
그러자 암호처럼 보였던 것이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글씨의 형태를 드러냈다.
[헤스 자작가]
그가 처음 잡았던 책의 제목은 지금은 없어진 어느 자작 가문에 관한 기록물인 모양이었다. 카시언이 불빛을 켰다. 곧 그의 시선이 누명을 써서 사라진 마탑의 어느 마법사에 관한 기록물을 읽어 내리다, 그 언저리를 지나…….
[뷔에트리 백작가 멸문기(記)]
……지금까지 내내 찾아오던 기록물에 닿았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책을 잡아 뺐다. 카시언이 빠르게 책장을 펼치자 스르륵, 책이 열리고 숨겨져 있던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시언은 기계적으로 빛을 비추어 가며 해독을 시도했다. 빛이 비춰지자마자 순식간에, 암호 마법이 해독되는 과정이 하나둘 끝나 갔다.
뷔에트리 가문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적의 진지에 있으니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추후 아스텔과 함께 이야기해 보아도 늦지 않을 내용이라 생각하며, 마지막 장을 덮은 그가 안주머니에 기록물을 집어넣었다. 이제 빠르게 빠져나가 아스텔을 구출할 차례였다.
그러나 그때였다. 근처에 있던 책장에서 기묘한 가죽 표지의 책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나이스 공작]
‘잠깐만, 왜 아나이스 공작 관련된 자료가……. 암호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 유일한 자료인데.’
당황한 카시언이 미간을 찡그리며 공작에 관한 책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계속 버둥거린 끝에 간신히 속박 마법을 푼 사내가 몸을 마구 움직이더니 크게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악! 여기 침입자가 있-”
그에 일순 당황해 아나이스 공작에 관한 책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박은 카시언이 발작하듯 몸을 떠는 사내를 보며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코 자자, 응?”
아스텔이 건네준 간단한 기억 조작용 마도구를 사용한 카시언이 씩 웃었다. 마도구가 잘 먹혔으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것을 잊었을 터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된다고 느낀 찰나의 순간, 카시언은 잠시 숨을 죽였다. 사내의 커다란 목소리에 잠들어 있던 누군가라도 깬 모양이었다. 타닥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기 직전,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본 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빨리 아스텔을 찾으러 가야 해.’
하지만 아스텔과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카시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채로 발걸음 소리를 죽여 서가에서 뒷걸음질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끼이익- 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기록물 보관소의 문이 닫히고, 거미줄이 낀 저택의 복도가 나타났다. 그는 신중하게 한 걸음씩 걸으며 문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순간.
“꺄아악!”
아무리 옅은 소리라 해도 아스텔의 목소리는 한 귀에 들려왔다.
카시언은 몸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가문을 멸문시킨 미친 새끼가 제 여동생까지 죽이려 든다면 지금까지 복수를 위해 쌓아 온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급히 몸을 돌렸다. 마침내 아스텔을 구하러 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는 곧장 난관에 부딪혔다. 콘윌 저택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있었고, 모든 방의 문이 죄다 똑같이 생겼다. 게다가 소리가 난 방향을 좀처럼 알기 어려웠다.
그의 작은 여동생은 도대체 이 수많은 방 중 어디에 있단 말인가?
커다란 소음이 들린 뒤부터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욱 초조해졌다. 그러나 아스텔을 구하려면 가만히 머리나 굴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수색하는 수밖에 없다.
카시언은 이를 악물고 문 하나하나 기척을 살피며 복도를 내달렸다.
* * *
“꺄아악!”
나는 쉰 목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내 부인에 관해 어떻게 알았는지 고문을 좀 해 봐야겠는데.”
고문 기술자인 콘윌 공작의 고문은 생각보다 더…….
“아,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팠다. 그래서 더 연기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조율하며 우는 척 눈물을 뚝 흘려 보았다.
“고문이 필요하겠지.”
“이제 그만 두, 두세요.”
정말 하나도 안 아프다. 내가 강철 인간이라서는 아니고, 감각을 둔화시키고 살갗을 강철처럼 만들어 주는 물약을 한계치까지 흡입했기 때문이었다.
호흡기 쪽을 공격하거나, 정신 쪽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삼키며 아픈 척, 골골대는 척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더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으면 네 배후를 말해.”
하지만 곧 정신계 흑마법까지 사용할 일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콘윌 공작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주워섬긴 말들은 대략 이십 여분을 못 가고 똑 떨어졌다.
고문실의 문은 좀처럼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콘윌 공작은 슬슬 이성을 찾고 있었다.
그가 나를 쏘아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할 말이 그게 끝이라면…… 머릿속을 진탕 내서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나는 그 뒤로도 한참 그의 가족에 관한 비밀을 아는 척,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치부책을 훔쳐 비밀 통로를 통해 고문실로 찾아내겠다던 오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단은 할 만큼 했어. 여기서 죽더라도…….’
성공을 자신했으나 스스로를 미끼로 던진 만큼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룬과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차분하고 초연한 마음이 들었다. 매번 복수에 매진해 왔는데도 막상 죽을 위기가 닥치자 생각나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살면서 만났던 타인 중 가장 다정했던 분, 아나이스 공작님.
진짜 이름도 어떤 종족인지도 아직까지 모르지만…….
“내 머릿속을 진탕 내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언제나 진실한 감정을 보여 줬던 남자.
“뭐?”
나는 그를 믿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무사할 것 같아?”
복수를 위해서 남들의 무시를 순순히 견디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던 나는 조금쯤은 달라졌다.
나는 내 인생 최초로, 타인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날 구하러 올 사람들이 있어.”
“재미있는 수작이군, 그래. 하지만 백치가 된 뒤엔 무슨 소용일까? 응?”
그의 손끝이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목을 졸리고 팔을 찢겼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 왔다.
뇌의 끄트머리까지 욱신거리는 느낌에 나는 길게 심호흡하며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내 이마를 온전히 덮었다.
나는 손발을 묶인 그대로 몸을 뒤틀지도 않은 채 눈을 치떴다.
“넌 더 이상 내 몸에 털끝만큼도 손 못 대.”
기세 좋게 내놓은 말과 달리 몸은 덜덜 떨리고, 정신계 마법에 당한 머리가 쨍하게 아파 왔다.
음산하게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세차게 메아리쳤다.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시계탑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뎅- 뎅- 뎅-
콘윌 공작은 당황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저택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시계가 울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
“……왜, 왜!”
그가 신경질적으로 사방을 훑었다.
뎅- 뎅-
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는 나를 고문하려던 것도 잊은 채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한 채 몸을 들썩거렸다.
‘시계탑 소리를 들으면 혼란스럽겠지.’
콘윌 공작저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통 귀족 가문의 저택에선 매일 밤낮으로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콘윌 공작저에서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콘윌 공작이 시계탑 소리에 유달리 예민한 편인 듯했다.
그를 증명하듯 그가 황궁을 방문하는 날이면 종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니, 종소리야말로 그의 심리를 헤집을 수 있는 가장 명쾌한 소음일 것이라고 판단했고…….
“부, 부인……. 다, 당신이 죽었던 그, 그날의 소리가……. 왜…….”
……그 예상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털썩 무릎을 꿇고 제 머리를 감싸쥔 채 덜덜 손을 떠는 사내를 본 나는 한쪽 입꼬리를 미미하게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바닥의 질척거리는 물기를 딛고 허청거리며 일어선 그가 쎄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멍한 시선에는 분노도 증오도 없고, 대신 기이함만이 담겨 있었다.
“네가 감히…….”
“내가?”
“내 부인을 죽인 것도 너였나?”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미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상태의 콘윌이 멍한 눈으로 내 머리를 감싸기 위해 양손을 뻗은 순간,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콰과광!
귀를 울리는 거대한 소음과 함께, 두꺼운 문 전체가 나무 합판 부서지듯 잘게 부서져 내렸다. 콘윌 공작은 내 이맛살을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다.
“부인의 복수를…….”
흑마법사의 언어로 추정되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음산하고 흉흉했다. 그의 손에 의해 머리가 아파 오는 데다 숨이 막혀 눈이 절로 까뒤집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던, 아주 찰나의 순간.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콘윌 공작의 뒤에 까만 인영이 자리하는 게 보였다.
마침내, 그가 바닥으로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콘윌 공작의 손에 목이 졸린 탓에 정신이 혼미했다. 눈앞이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콘윌 공작이 어느새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등에 칼이 꽂혀 피가 분수처럼 흩어지는 것을 본 나는 ‘살았다’라는 생각에 숨을 가쁘게 내쉬다가,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응시했다.
“감히.”
오빠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공작님이었다. 눈앞의 공작님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표정이라니. 세간에 도는 ‘마물 전쟁의 신’이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으아악!”
그는 마물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 잔악하게 칼을 휘둘렀다.
“끄으윽…….”
콘윌 공작의 전투력이 없어진 게 확실한 상태인데도, 그를 살려 두지 않겠다는 흉흉한 기세가 보였다. 그로 인해 방 안 곳곳이 붉게 물들었지만 내 몸에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주, 죽여야 해……. 저 천한 것부터…….”
“입 닥치십시오.”
그러나 숨넘어갈 듯 헐떡거리면서도 콘윌 공작은 어떻게든 내 의자 곁에 다가오려 무릎을 꿇고 기었다. 하지만 공작님의 등 뒤에서 내가 미리 안배해 두었던 미미가 나타났다. 숨어 있기 연습을 한 보람이 있는지, 훌륭하게 저택에 숨어든 미미는 콘윌 공작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미는 일전에 함께 의논한 대로 그의 근처에 자그마한 마법진을 그린 뒤 그를 속박했다.
‘이제 끝났어.’
마법진이 그려진 것도 모른 채 한참 눈알을 굴리던 콘윌 공작이 잇새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예상대로 콘윌 공작은 죽기 직전, 부두술을 써서 도망쳤고.’
그가 죽기 직전 흑마법이나 부두술을 사용해서 육체를 두고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이 끝이 아니야. 일부러 미미를 시켜 여러 마법을 걸어 뒀으니.’
힘이 든 와중에도 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일차 맞대결이 내 승리로 끝났다.
저택에 들어선 목표를 무사히 달성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흐려지는 눈을 잠시 감으려 한 그때였다.
콘윌 공작의 시체 아닌 시체를 거칠게 발로 찬 공작님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아스텔.”
그가 내 팔을 감은 밧줄을 풀어 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습니까, 몸은…….”
그가 흉흉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납치 다, 당했는데.”
모든 게 내 의도대로 돌아가긴 했지만 고의인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내 말에 그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나는 겨우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매단 채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님은 괘, 괜찮으시죠……. 각인 마법 때문에 걱정돼서.”
그냥 사실 통보 정도였는데, 얼핏 공작님의 벽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 걸 본 것도 같았다.
나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내 정신은 콘윌 공작이 잔뜩 헤집어 놓은 탓에 더 이상 버텨 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가 흘린 게 눈물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까무룩 기절 같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가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온몸을 감싸 안는 포근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 * *
아나이스 공작은 떨리는 손으로 제 품에 안긴 아스텔의 호흡을 살폈다. 목을 졸리는 아스텔을 발견한 순간 눈앞이 하얗게 표백될 정도로 화가 났다. 귀족을 죽이면 안 된다는 제국의 법률 같은 것 따위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콘윌 공작의 등에 가 박혔을 때조차, 계속 아스텔만 눈에 밟혔다.
아스텔의 고통이 그에게 약하게 전이됐을 때는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저저저! 나쁜 놈, 응분의 죗값을 치렀군!”
설레발을 치는 미미를 보던 공작이 힘주어 말했다.
“아직입니다. 부두술을 써 도망쳤을 뿐,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시신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혼탁한 구름 같은 것이 그를 증명했다.
미미가 솜털이 송송 난 고양이 귀를 아래로 쭈욱 늘어뜨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힘은 약해졌겠지? 응?”
아스텔의 몸을 가뿐히 들어 올려 품에 안은 공작이 미미에게 짧게 답했다.
“네. 당신은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미미가 꼬리를 살랑대다가 몸을 멈칫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확실히 말해야 할 겁니다.”
그는 경고를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은 아스텔을 무사히 옮긴 뒤, 맹수 수인들을 붙여 고문실로 추정되는 장소를 샅샅이 수색할 예정이었다.
콘윌 공작의 죗값은 날조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으로 치르게 하리라.
그는 이를 으득 간 뒤, 품에 안은 아스텔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빨간 손바닥 자국이 그의 살의를 더욱 자극했다.
콘윌 공작이 계속 부두술로 몸을 벗어나더라도 끝까지 쫓아 죽일 것이라 다짐하면서. 그는 뜯어진 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부서진 문 앞으로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씨발, 이게 무슨…….”
카시언 그레이가 고문실 문을 거칠게 헤집으며 나타났다.
“이 새끼…… 너 뭐 하는 새끼야?”
공작은 거친 발걸음을 움직여 다가온 카시언 그레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카시언 그레이 경. 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카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공작의 품에 안긴 아스텔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텔.”
대화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아나이스 공작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사사건건 거슬리는 카시언 그레이가 왜 이 자리에 갑작스레 나타났는지는 추후 알아보아도 될 일이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모든 여자들을 죄다 홀리고 다니는 수도의 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순정적인 표정으로 그가 아스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공작에 의해 냉정하게 내쳐졌지만.
이성을 겨우 다잡은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았다.
“무사한 거야?”
“물론.”
깔끔한 단답이었다. 얼마나 짓씹었는지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을 한, 카시언이 물었다.
“……죽였어?”
“뭐?”
“콘윌 공작, 그 새끼는 죽였냐고.”
“아직.”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손길로 아스텔의 목을 매만지려던 카시언이, 그 손으로 제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눈가의 엷은 살갗을 슥 닦은 그가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았다.
“후…….”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듯한 태도에, 미미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혼잣말했다.
“호오, 치정극?”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미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카시언이 불타는 시선으로 삐딱하게 아나이스 공작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마물 전쟁의 신이라더니, 고작 부두술사 따위 하나 못 죽이셨습니까, 아나이스 공작 각하.”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를 바라보며 신랄하게 답했다.
“산산조각을 내야 할 것 같아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일단 꺼지십시오.”
“못 꺼진다면.”
그는 아스텔 쪽으로 눈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이 순간 대화를 나누기에 당신은 몹시 무가치하고.”
“뭐?”
“아스텔은 최대한 빠르게 쉬어야 합니다.”
카시언이 시선을 다시 공작의 품에 안긴 아스텔 쪽으로 미끄러트렸다.
힘든 일을 겪고 기절한 듯 보이는 아스텔을 애틋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 발 비켰다.
“진짜 좆같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럼, 잘 꺼지십시오. 영원히.”
카시언에게서 가차 없이 시선을 돌린 그는 아스텔을 들어 안고 폐허가 된 방을 빠져나갔다.
카시언이 등 뒤에서 무어라 지껄이는 소리를 사뿐히 무시한 그가 아스텔을 내려다보며 복도를 걸었다.
저택 내부는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콘윌 공작이 살았든 죽었든 간에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오직, 지금은 아스텔이 깨어나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의 시야 안에 담긴 아스텔은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아스텔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스텔.”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쌕쌕거리는, 미약한 숨만이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분명히 죽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불안감이 심장을 조여 왔다.
십여 년 전, 그때도 그녀는 이런 상태였다.
그 이후로 그는 아주 오래…… 아스텔을 기다렸다.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면서.
* * *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깊은 잠이었다.
꿈결 속에서, 귓가에 누군가가 나를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저음을 지닌 사내는 나를 ‘아스텔’이라고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 위로 메아리처럼 자그마한 소년의 미성이 겹쳐서 들렸다.
‘아스텔.’
그리고 마침내 내 머릿속을 소년의 메아리가 가득 채웠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려 했으나, 되레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어떻게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데?’
‘……네 정신을 강력하게 공격할 무언가가 있어야 돼. 난 여기까지밖에 말 못 해.’
미미의 말이 스쳐 지나간 순간 관자놀이가 대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나는 다시금 아주 오래전, 과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콘윌 공작이 내 정신을 건드려 준 덕분에, 마침내 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게 될 거라는 사실을.
곧이어 내 기억은 어떤 소년과, 작은 고양이 신수 미미와 함께 한가로웠던 순간들에 다다랐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실종된 나를 찾고 있을 오빠가 걱정되는 것만 빼면 사실 힐링 전원생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법진 속이라는 미미의 말이 맞기는 한 건지, 신기하게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별로 안 고팠다.
‘구걸도 안 해도 돼!’
눈을 감고 잘 때 미미가 꾹꾹이를 해 주는 것도 느껴졌고, 처음으로 거지가 아닌 친구도 생겼다. 나는 함께 마법진 속 세상에 갇힌 흑발의 소년과 열심히 소꿉장난을 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너는 신랑이고 나는 신부인 거야. 알겠지?’
‘어…….’
‘……싫어?’
‘조, 좋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귀밑머리 아래부터 쭉 빨개지는 소년이 너무 귀여웠다. 내가 그를 향해 픽 웃자 당황한 건지 동물 모양의 귀가 뾰족하게 나타났다. 나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 위로 드러난 소년의 귀를 매만져 보았다.
‘너어, 귀가 생겼어!’
내 말에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며 주춤거렸다.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소년 대신 미미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늑대니까.’
‘우와아, 늑대야?’
잔뜩 들뜬 내 목소리를 듣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늑대는 아니고요…….’
나는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반짝이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하던 소꿉장난 따위는 기억에서 휘발된 지 오래였다. 내가 궁금해할수록 소년은 더욱더 주눅 든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는데, 그 모습에 한껏 의아해졌다.
우리를 보던 미미가 곁에서 핀잔을 주었다.
‘쯧. 그냥 늑대는 아니지.’
‘그냥 늑대가 아니면 뭔데?’
나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 질문에 소년의 볼품없이 마른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늑대가 아니면 뭐냐는 내 질문에 더욱 의기소침해진 소년 대신, 미미가 뻐기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녀석은 늑대 종족이 불법 실험으로 개량했던 늑대개야. 힘이 약해서 버려졌어. 실험에 실패했으니, 실패한 어린 개체는 마법진을 설치해서 죽이려 든 거고.’
‘…….’
‘네가 구하긴 했으니 결과적으론 아직 안 죽었다만. 뭐, 이 동굴이 무너지면 둘 다 죽는 건 시간 문제!’
사악하게 웃는 미미와 달리 침울해 보이는 태도로 소년이 나를 바라보았다. 울멍진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을 때쯤, 나는 소년이 내게서도 버려질까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제가…… 힘이 약, 약해서, 시, 싫으시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소심해진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아닌데? 난 늑대도 좋고 개도 좋은데 넌 늑대도 되고 개도 되니까 엄청 멋진 거 아냐? 그리고, 아주 나쁜 놈들한테서 살아남은 거잖아?’
‘네……?’
‘엄청 멋진데!’
제 존재를 긍정하는 말도, 멋지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는 듯, 소년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
모두가 죽이려 드는 가운데 꿋꿋하게 살아남았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거리의 가난한 거지였던 나도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당해 왔다. 그때마다 안 맞고 요리조리 잘 도망치는 법을 터득했는데 그게 참 뿌듯했었다.
그러니까 이 자그마한 소년도 엄청 대단한 일을 한 거지!
한참 그를 골똘히 바라보던 나는 손뼉을 짝 치고 그를 향해 소리쳤다.
‘좋아, 결정했어! 네 이름은…….’
소년의 이름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 왔으나, 지금까지는 후보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사까지 전부 알고 나니 정해 줄 이름이 생겼다. 나는 그의 머리털을 쓰다듬으면서 진지하게 속삭였다.
‘녹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되물었다.
‘녹스……?’
‘응, 밤이라는 뜻이야! 내 친구니까, 내 이름이랑 비슷한 거로 하자!’
‘친구…….’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더니 활짝 웃었다. 잘 웃지도 않는 데다, 늘 그늘이 져 있던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보는 건 뿌듯한 일이었다.
나는 마음이 벅차올라서 열심히 필요 없는 정보를 남발했다.
‘원래 룬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까 했는데, 너는 빛보다는 밤이 더 어울려.’
‘룬이 아니라, 녹스…….’
‘아이를 가지면 그때 이름은 룬으로 할래.’
‘……왜?’
‘왜냐면 내 이름의 뜻이 고대어로 별이라는 뜻이거든.’
‘그, 그러면…… 녹스는요?’
‘녹스가 더 특별해. 밤은 빛까지도 전부 다 아우르는 아주 멋지고 강한 개념이거든! 나한테 고마워해야 된다, 녹스!’
공연히 잘난 척 뻐기는 나를 보며, 소년이 입을 조그맣게 벌리더니 고개를 엄청나게 크게 끄덕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녹스, 라는 제 이름을 가지게 된 그가 곧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달래 주느라 한층 더 애를 먹었다.
오빠가 아주 많이 보고 싶은 것만 빼면, 그래도 즐거운 시절이었다. 마법진 안에 갇혀 지내면서도 나는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오늘은 녹스랑 소꿉놀이를 했다, 녹스의 이름을 백 번 정도 불러 주었다, 녹스의 꼬리를 만져 보았다 같은 사소한 추억이 하나둘 쌓여 갔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함께 하고 싶은 일들 목록도 적어 두었다. 지금은 비록 거지지만 나중엔 아주 부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 내게, 녹스는 멋진 상점을 엄청 많이 사 주겠다고 공언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사실 믿기지 않는데도 믿는 척해 주었다.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이상하게도 행복한 시간들은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끝나 버렸다. 어느 순간, 우리가 몸담고 있던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그 소식을 처음 전해 준 건 미미였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던 고양이 신수는 동굴 안쪽을 한참 수색하더니 비보를 전해 왔다.
‘큰일 났어. 동굴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투둑, 툭.
나는 동굴의 천장에서 돌멩이가 떨어져 내리는 걸 바라보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되는데?’
나의 해맑은 질문에 미미는 쯧쯧 혀를 차며 어리석은 미물을 대하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죽는 거지, 뭐!’
‘거짓말!’
‘진짜다! 안 죽으려면 빨리 신에게 대가를 지불해서 이 마법진을 빠져나가야 된다고!’
죽기 싫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미미의 몸을 꽉 잡았다. 미미가 재차 강조하듯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죽기 싫으면 너희 둘 중 하나가 가장 귀중한 것을 이 마법진에게 대가로 내놓아야 해.’
‘그런데 왜 마법진한테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거야? 미미 너도 강하잖아. 그냥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게 요술을 부려 주면 안 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질문에 미미가 대번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안 돼. 이 마법진은 신의 힘을 빌린 거니까 난 간섭할 수 없어.
미미는 늑대 일족의 누군가가 녹스에게 사악한 개량 실험을 하다 높은 신분의 수인에게 들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신의 힘을 빌려 확실히 녹스를 없애려 한 것 같다는 말을 주절거렸다.
나는 모든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미미가 일컫는 늑대들이 아주 나쁜 놈들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나쁜 놈들이네! 모조리 거지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아무튼, 그래서 이 마법진을 빠져나가려면 대가가 필요한 거다. 어쩌면 가장 귀중한 것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겠어.’
늑대 일족이라는 놈들을 한참 속으로 욕한 뒤, 나는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곁에 있던 소년이 용감하게 먼저 나섰다.
‘제가 대가를 내놓을게요! 저는 귀한 게 없거든요……. 아마 내놓더라도 벼, 별거 아닐 거예요.’
‘귀한 게 없다고?’
‘네. 저한테는 이 옷이 가장 소중한 건데…… 옷을 잃어도 살 수 있으니까요!’
미미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쳇, 둘 다 거지꼴이니 그래 보이긴 하네. 일단 빨리 제단을 차려야 해. 의식을 치르는 데에 필요한 산수유 가지는 내가 준비하마.’
나와 녹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미미의 부산스러운 준비 덕분에 제법 그럴싸한 제단이 완성되었다.
미미는 신에게 절을 올리듯 제단 위에 발을 턱, 내밀더니 산수유 가지를 부러트렸다. 그리고는 여러 개가 된 가지를 하늘로 휙 올려 들었다.
‘신이시여, 부덕한 피조물에게 하늘의 뜻을 내리소서!’
서문을 크게 복창한 뒤, 한참 입 속으로 기도문을 읊조리던 미미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제단 위의 점괘를 흐트러트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미미?’
당황한 내가 미미 배의 털을 꼬집자 미미가 하악질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여기서 너희 둘이 함께 빠져나가려면, 한 녀석의 남은 수명 중 절반을 내놓으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남은 수명의 절반이라니…….
나는 부자가 돼서, 솜사탕도 먹고 오빠와 오래오래 함께 사는 게 꿈인데…….
그렇다고 해서 녹스의 수명이 사라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두 눈에 눈물을 매단 채로 나는 미미의 귀를 꼭 잡아당겼다.
‘바보 고양이! 다른 방법은 없어?’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이 콩알만 한 녀석아! 그리고 난 바보가 아니다! 천재란 말이야!’
미미와 내가 한참 티격태격하는 사이, 녹스가 결심한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괜찮아요. 제가 수명 내놓을게요.’
내 팔을 할퀸 미미도, 미미의 머리를 쥐어박던 나도 동작을 멈췄다. 우리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녹스가 결연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수인은 수명이 인간보다 길어요.’
‘……그렇다 한들, 목숨의 반을 내놓으면, 보통 인간의 수명밖에 못 살 텐데?’
‘당연히 괜찮아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는데…….’
‘안 돼, 바보야!’
‘동굴이 무너지고 있어요. 빨리 정해야 해요.’
나의 만류에도 소년은 단호했다. 내가 만류하더라도 반드시 결행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동굴 벽이 요동치더니 자잘한 돌멩이가 우리 주변으로 자꾸만 떨어졌다.
그러니까 요컨대, 녹스의 말은 옳았다.
동굴이 바스러지고 있었고 우리는 빨리 운명을 선택해야만 했다. 다 함께 죽을 것인지, 녹스의 수명 절반을 바칠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볼 때는 저 녀석이 생명을 내놓는 게 맞긴 하지. 넌 재수 없게 말려든 것뿐이잖냐. 게다가 수인은 수명도 길어. 그런데 문제는…….’
우르르 쾅!
동굴 바깥의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나와 소년은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이 와중에도 맞닿은 손을 타고 따스함이 전해져서 마음이 울컥해졌다.
‘생명을 내놓는 거 말고는 다른 선택지는 정말 없는 거야?’
‘……흠, 아니. 이상하네. 점사가 다시 바뀌었다. 기다려 봐.’
‘응! 어쩌면 목숨을 안 바쳐도 되, 될지도 몰라!’
나와 녹스는 긴장한 상태로 서로의 손을 다시 꼬옥 맞잡았다. 제단 위의 점사를 다시 치던 미미가 이내 발을 쾅 구르더니 몸을 마구 굴렸다. 솜털이 삐죽삐죽 솟으며 분노로 뾰족해졌다.
‘이거 완전히 신이 아니라 악신(惡神)이구만. 다 뺏어가라 다 뺏어가!’
미미가 발을 쾅쾅 굴렀는데도 신은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동굴 벽에 몸을 붙인 채로 덜덜 떨었다. 싸늘한 바람이 더욱 거세졌으니까.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무슨 일인데?’
‘제기랄…… 쟤한테 가장 소중한 건 생명이 아니래. 가장 소중한 건…….’
‘저 옷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미가 포르르 한숨을 내쉬곤 작은 머리를 떨구었다.
‘……너랑 쌓은 추억이란다. 생명에다가 둘이 나눈 추억도 달라니. 악독한 신 같으니라고!’
미미가 하악질을 하며 꼬리를 통통하게 부풀렸다. 그러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동굴에서 돌멩이가 톡톡 떨어져 내렸다. 나와 녹스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더욱 붙였다. 동굴이 흔들거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고, 바깥은 번개가 미친 듯이 치고 있었다.
‘그럼,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 다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
‘얘는 살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전혀 없는 애인가 봐. 행복한 기억은 너와의 것뿐인데 그걸 훔쳐 가려 하다니…….’
나는 녹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무척이나 파르스름했다. 생명을 깎겠다고 대답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흐려진 눈빛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요! 다, 다른 건, 차라리 수명을 더…….’
떨리는 녹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문득 좋은 묘수가 났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추억을 가져가면 안 돼? 나는 괜찮은데!’
‘흠…… 그래, 정확히 누구의 기억을 특정해서 빼앗아 가겠다는 말은 없으니, 네 기억이 사라지면 이 꼬맹이한테는 추억이 남겠지.’
‘그럼 내가 잊을래!’
‘그렇지만, 아스텔…….’
‘걱정 마, 녹스. 우리가 진짜 인연이면 다시 만나서 서로를 기억하게 될 거야!’
나는 녹스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기억보다는, 네 목숨이 너무 걱정돼.’
속상해하는 내 표정을 본 녹스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작게 혼잣말했다.
‘목숨은 사,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진짜 인연이면…….’
‘어차피 마법진에서 빠져나가면, 우리 같은 곳에서 만날 테니까!’
‘흥! 그럴 리가. 아마 서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미미의 말에 우리 둘은 동시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나는 곧 묘안을 생각해 냈다.
‘아니면, 녹스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가, 잊지 않고 찾아오면 돼! 나는 거지고 길거리에 살아! 약도 보여 줄게?’
나는 글씨는 쓸 수 있었지만 지독한 방향치였기 때문에, 내가 정확히 어디 사는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로 동굴의 흙바닥에 조악한 약도 비슷한 것을 그렸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괴발개발로 그려진 지도를 응시했다.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결연한 시선으로 약도를 보던 그가 내 손을 더욱 거세게 부여잡고 말했다.
‘네. 혹시나 헤어지더라도, 잊지 않고 찾아갈게요.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반드시 지켜 줄 수 있도록…….’
‘응, 그럼 그때 다시 친하게 지내자!’
‘……그러면, 그때 지어 주셨던 제 이름.’
간절한 시선이 돌연 나를 응시해 왔다. 녹스와 함께하면서, 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결연한 표정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만나서…… 제 이름, 꼭 불러 주세요.’
‘알겠어.’
‘그거면 충분해요.’
모든 합의는 끝났다. 나와 녹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동굴 벽이 한참 웅웅거리며 울릴 때쯤, 못 견디고 물었다.
‘녹스! 할 말, 더 있어?’
‘네, 그러니까…….’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차갑고 딱딱한 동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디선가 본 것을 흉내 내는, 조악한 예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게 분명한 에스코트였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과 입술에선 내게 최고의 예우를 갖추고 싶어 하는 진심이 묻어났다. 나는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녹스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꼭 기다려 주세요, 레이디.’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정말로 귀족가의 레이디가 된 것 같아서 상황에 맞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따스했던 상황은 금세 반전되었다. 바로 그 순간, 미미가 우리의 근처로 뽀르르 다가와 물었으니까.
‘작별 인사는 이제 다 끝났나?’
‘응.’
‘슬슬 의식을 시작하지, 그럼.’
미미는 우리에게 제단의 의식을 치르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제단 앞에 나란히 서 있으면, 우리 주변으로 새로운 마법진이 그려질 거라고 했다. 주머니 속에 이곳에 끌려 올 때 가져왔던 다이어리를 야무지게 넣은 채로, 나는 녹스와 제단 앞에 나란히 섰다.
우리 둘은 눈을 꼭 감았다. 마침내, 우리 주변을 거대한 구름 같은 것이 감싸 안았다.
‘안쓰러우니…… 둘에게 작은 가호를 내려 주마.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겉보기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한 구름 속에서, 누군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 것도 같았다.
그 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구름은 더욱 짙어졌고, 나는 거세지는 관자놀이의 통증에 눈을 깜빡였다.
곧이어 시공간이 위험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형벌 같은 마법진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년은 자신의 기나긴 생명 중 반절을 뚝 잘라 내놓았고, 나는 그 소년과의 기억을 봉인당했다.
십여 분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사냥터 안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나 왜 여기 있지?”
‘옷은 왜 다 낡았고!’
나는 아릿하게 아파 오는 머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기억의 공백이 생겼던 것도 같은데, 내 기억 속 빈 공간에는 희미한 누군가와의 추억 대신 전생의 기억이 자리 잡았다.
눈물 콧물을 다 짜며 엉엉 우는 오빠가 나를 찾아내서 등짝을 때릴 때쯤에서야, 나는 이곳이 소설『피의 복수』속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복수극을 준비했고, 내 기억 속에 잠시 존재했던 소년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을 보니 공작 저택 내부의 내 방인 것 같았다.
캄캄한 어둠 속 협탁에 무드등의 불빛만이 가만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기 위해 가만히 호흡했다.
‘기억이 전부 다, 돌아왔어.’
긴 호흡이 몇 번 이어진 뒤에, 내 옆자리에 사람이 존재함을 자각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스텔.”
협탁 옆 의자에 앉은 공작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수건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내 이마의 땀을 닦아 주려 한 모양이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감정이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서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벅찬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공작님이 나직하게 물어 왔다.
“무서운 겁니까? 땀이…….”
물수건을 협탁 위에 올려 둔 그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닦았다.
한참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콘윌 공작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콘윌 공작은 부두술로 자살을 한 척, 도주했습니다. 맹수들을 불러 추적 중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힘은 잃었고, 어떻게든 잡아 없앨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공작님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쯤이야 꿰고 있었다.
지금 내 전력으로 그를 바로 처리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목적했던 건 콘윌 공작의 힘을 약화시키고, 미미를 통해 그에게 마법을 거는 것.
그리고 오빠가 콘윌 저택에 잠입해 치부책을 발견하게끔 하는 일이었다.
‘콘윌 공작이 힘을 잃고 부두술로 도망쳤다니까, 오빠는 무사할 테고, 어쩌면 치부책을 손에 넣었을지도 몰라.’
예상보다 더 좋은 성과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콘윌 공작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중요했지만…….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이 남자였다.
“……안색이 안 좋은데, 조금 더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를 걱정하듯 속삭이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표정을 몰랐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절절한 푸른 눈빛을 보고도 그를 흑막일지도 모른다 의심해 왔던 걸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아나이스 공작’을 처음 만난 날.
아니,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그 날, 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함정인지 아닌지 경계했었다.
나를 너무 익숙하게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제 말을 기다리셨다고요?’
‘네, 기다렸습니다.’
과거의 나는 무표정의 사내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줄 알고 무서워했던 그 표정은…….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더 읽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어떤 감정이었을지 생각하니, 울음이 울컥 치받아 올랐다.
꼭 기다려 달라 했던 그는 정말로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내가 공작령에 들어와 그를 꾀어내려 할 때, 그가 먼저 다가와 준 거였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
“……네.”
그는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낯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소년, 녹스에 관해 떠올렸다.
‘녹스!’
‘네.’
얼핏 차가워 보이는 공작님의 무표정 위로, 어린 시절의 녹스가 나를 바라보던 따스했던 표정이 서서히 겹쳐졌다.
그래서일까.
과거의 나는 두려워했던, 그리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무섭게 느낄 수도 있을 그 표정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절절했고 올곧았으니까.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나니 보였다. 그가 얼마나 나를 걱정하고 있는지…….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그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내 품에 안긴 그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름을 꼭 기억해 달라고 말했던 어린 소년에게, 내게 자신의 수명을 깎아 건네주었던 자그마한 아이에게.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답해 줘야 했다.
꽉 껴안은 채로,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번져 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서 몸을 떼어 내고, 시선을 맞추었다.
“안 잊고…… 잘 찾아왔네.”
아주 오랜 세월을 지나,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불러 줄 차례였다.
“녹스.”
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났어, 전부 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나이스 공작님은, 아니, 녹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내 얼굴에 떨리는 시선을 고정했다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기억을…….”
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기억났어요.”
내 말에 심해 같은 눈동자가 한차례 일렁거리더니 예상치 못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네.”
“기억을, 못해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 속에서 나는 그의 기나긴 외로움을 읽어 냈다.
“늦게 기억해서 미안해.”
나는 작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꾹꾹 닦아 주었다. 우는 남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비로소 마주한 녹스의 모습에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우러나왔다. 게다가 지금 그가 흘리는 눈물은 예상보다 더 따뜻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는 더 이상의 말을 잇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간절하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나는 가만히 몸을 굳혔다.
아무리 내가 순진하다 한들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 그와 나는 첫 키스를 하게 될 것이다.
‘저, 저의 첫 키스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말입니까.’
‘네! 공작님도 첫 키스는 사랑하는 분과 하는 거예요.’
나는 과거처럼 그를 밀어내는 대신 본능에 따라 눈을 감았다. 마침내 우리 둘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아 호흡을 앗아 간 순간부터 더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얕게 열린 입술 틈새로 서로의 호흡이 얽혔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아찔한…….
충동적인 우리의 첫 번째 키스는 눈물 때문에 조금 짠맛이 났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나는 그를 조심히 밀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첫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기로 했는데.”
그가 경직된 자세와 무표정한 낯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원래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기민해진 나는 그의 속눈썹이 불안감으로 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날 어리숙했던 소년이 떠올라 가만히 그를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가 지닌 불안감마저도, 완벽하지 않은 모습조차도 좋아지는 내 모습이 조금 신기해서.
내가 가만히 그를 관찰하자, 약간의 불안감을 담은 그의 벽안이 돌연 나를 응시했다. 그는 단어를 처음 배우는 서투른 어린아이처럼, 낯설게 발음했다.
“아스텔이 사랑하는 사람이…….”
차마 다음 말을 내뱉기가 버겁다는 듯이, 잠시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귀한 것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을 고르듯이, 한마디 한마디 낱말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으니까.”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내인 아나이스 공작의 고백이 아니라, 서투른 소년의 투박하지만 달콤한 연가처럼 들렸다.
그 절절한 감정에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낮게 웃었다.
지금 당장 내 모든 감정의 총체를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겁이 나고 부끄럽지만…….
“……응.”
나는 그의 품에 새빨개진 얼굴을 묻었다. 그것만으로 그에게는 완벽한 해답이 된 모양이었다.
―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