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마침내 수도로 향하는 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나는 꽤 많은 수인들의 방문을 받았다.
방문자가 워낙 많았던 탓에 머리가 핑 돌고, 웃느라 뺨이 얼얼한 지경이었다.
‘떠나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다음에 다시 공작성에 오실 거지요?’
은여우 가문이 나를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한 게 다 퍼진 걸까.
공작성 내부에서 봉작하는 수인들이 갑작스럽게 달라붙어서 꽤 난감했다.
다행히 마이어 경이 한 번 노려봐 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이어 경의 쓸모는 무척 특출났다. 그가 시선을 한 번 보내면 홍해가 갈라지는 수준이었으니 말 다 했지!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지.’
반쯤 열어 둔 창틈으로, 나는 새로운 편지도 한 통 받았다. 바로 오빠에게서 온 편지였다. 첼로가 들고 온 그의 편지를 읽어 보니,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지금 그는 온갖 근심 걱정을 짊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카시언은 진지하게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아스텔, 수도로 온다는 소식 들었어.
나 네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우리 언제 한번 만나자.
아마 확실히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나이스 공작 조심해.]
마지막에 ‘아나이스 공작 조심해’라는 말 다음에, 오빠는 공작님의 온갖 악행을 정리한 스크랩북을 보내 왔다.
최측근 숙청, 겨울성을 더욱 얼어붙게 만든 흑주술, 마물을 찢어 죽인 것 등…….
물론 아나이스 공작님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스크랩북을 다시 첼로의 다리에 매달아 두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오빠는 대체, 내가 수도 가는 걸 어떻게 벌써 알았지?’
아나이스 공작이 수도에서 머문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당연히 떠들썩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가 공작님과 함께 간다는 것까지 알려질 일이 있나?
‘내가 그렇게 유명인사는 아니니, 아는 사람은 드물 텐데……? 오빠의 정보상인 레이첼을 통했나?’
오빠의 정보력이 좀 빼어난 편이긴 했다.
[응, 수도로 갈 거야. 조만간 만나자.
반드시 만날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
나도 할 말이 있어서, 꼭 만났으면 해.
곧 보자!]
편지를 쓴 나는 첼로의 다리에 매달아 두었다. 첼로는 창문을 열고 힘차게 날아갔다. 날아가는 새를 볼 수 있는 건 마력을 품은 룬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아이는 내 옆에서 조잘조잘거렸다.
“수도오. 아빠아. 엄마아아.”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룬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저번부터 수도, 수도 하고 노래를 부르네?”
도대체 어디서 수도라는 말을 입에 찰싹, 붙여서 왔을지 예상 가는 바는 있었다.
아마 수인 시녀들이 말해 줬겠지?
나는 장난스럽게 룬의 말랑말랑한 찹쌀떡 같은 볼을 쭈욱, 늘리며 물었다.
“쪼그만 게. 수도가 뭔지나 알아?”
입매가 쭉 늘어난 상태인데도 룬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웅!”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내가 얼이 빠졌다.
이 세 살짜리가, 수도에 대해 안다고? 그렇게 천재란 말이야……?
“수도오, 압빠랑 가치 가는 고시야.”
턱 수건을 예쁘게 맨 룬이 손톱달만큼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압빠랑 가치이. 겨론도 하고오.”
……그냥 공작님이랑 같이 간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을 뿐, 천재는 아닌 모양이다.
“공작님은 네 아빠가 아니라니까, 룬. 결혼도 할 일이 없어.”
수도에 가게 된 이상, 룬의 입버릇을 교정할 필요가 있었다.
자꾸 공작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나를 엄마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오해할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몹시 큰일이라…….
나는 아이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압빠 마자아! 공잔님도 압빠 해 준댔어.”
“공작님이랑 따로 만나서 얘기라도 해? 맨날 공작님 얘기를 입에 달고 살고.”
……왜 저런 표정이지?
마치 뇌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룬이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 조으니까아.”
“그렇게 좋아?”
“웅!”
룬이 자그마한 새알 같은 주먹을 내 무릎 위에 콩,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둘이, 행복하면, 조케써…….”
룬은 내 품에 꼭 안겨서 헤헤, 웃었다.
나는 마음이 찌르르 아파 오는 걸 느꼈지만 이제 곧 출발이라 더 이상 지체할 틈은 없었다.
“얼른 세수하고 나갈 준비 하자.”
“웅!”
룬이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이 찬연하게 빛났다.
“바까테 곤잔님 이써!”
성큼 다가온 그가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며 낮게 속삭였다.
“데리러 왔습니다, 아스텔.”
“얼른 안아 조!”
목도리를 꼼꼼히 둘러 준 공작님이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룬이 안으라고 하는군요.”
당연히, 우리는 매일매일 스킨십을 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되고 손에 땀이 차올랐다. 조금 굳어진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다정하게 내 몸을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러더니 귓가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러니까……. 스킨십을 이렇게까지 자주 할 필요는 없는데.
“히힛, 구럼 난 이망.”
룬이 말랑말랑거리는 발로 도도도 도망쳤다.
……뭐야, 둘이 진짜 짠 거야?
얼떨결에 공작님의 품에 안긴 나는 눈만 도륵도륵 굴리며 빨개진 귀를 식히는 중이었다.
쿵, 쿵.
내가 그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수록, 심장 소리가 빨라졌다. 나는 눈을 위로 치켜올렸다. 아마 이 상황에 긴장하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이마 위로 입술을 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오늘도 보고 싶었습니다, 아스텔.”
반려의 각인이라더니.
……마치, 이 모든 것이 꼭 연인 간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각인 때문이니까.
나는 치료사다. 각인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각인으로부터 발생한 감정은 모두 사라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감정이든, 공작님의 감정이든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게 내 정신 건강에 더 이로웠다.
* * *
마침내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수도로 가는 길. 나는 행렬의 첫 번째 사륜 마차에 공작님, 그리고 룬과 함께 올라탔다. 스무 대가 넘는 마차와 짐마차가 꼬리에 따라붙었다. 기나긴 환송 행렬의 제일 앞에는 시녀장님과 각 가문의 가주들, 후계자들, 기사단장 등이 있었다.
특히 리카르도는 손수건을 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도의 옆에는, 벨이 마치 재규어 가문의 후계자인 척 서 있었다.
나는 커다란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바로 앞에 시녀장님이 서 있었다.
“저도…….”
시녀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늘 무뚝뚝한 언행만 보여 줘서 몰랐는데, 그사이 정이 많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수도로 떠나고 싶어서 지원했지만, 안 되더군요.”
“시녀장님은…….”
……공작성에 봉작해야 하니, 당연히 안 되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서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굳건하게 말했다.
“리카르도 님께서도 자원하셨지만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시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마차의 창가로 다가온 리카르도가 화색을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행 다녀오는 느낌으로 수도 한번 가기로 했다. 걱정 마라! 곧 가마!”
여기서 크게 걱정은 안 했다고 하면…… 속상해하시겠지?
“네, 걱정되니까 꼭 천천히 오세요!”
“천천히?”
어느새 깡총거리며 뛰어온 벨과 리카르도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한 달 뒤에나 볼 수 있으려나?’
마차의 창문 너머로 많은 수인이 보였지만, 특히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은여우 가문의 가주 시테르를 빼놓을 수 없었다.
“저도 조만간 수도로 올라가게 될 예정이니, 수도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는 벨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네!”
시테르는 마차의 창문 속에 있는 나를 응시하면서 여우처럼 야살스러운 눈웃음을 쳤다. 은발에 적안을 지닌 미중년이 눈웃음을 치는 것이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물론 내가 공작님과 매일같이 함께하며 눈이 높아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철벽을 두른 소나무 같았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도에서 뵙게 되면, 향후 사업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해요.”
방금 나 조금 사업가처럼 멋졌던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기대감으로 뻐근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내 시테르가 머뭇거리면서 나를 향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내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먼저였다.
“이제 슬슬 갈 때가 되었군요.”
이별의 순간을 매듭짓는 냉정한 목소리.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은여우 가문의 가주 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것이 전생의 원수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게 공작님의 원래 표정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조금 무서웠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금세 눈빛을 거둔 공작님이 나를 바라보며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갈까요, 아스텔?”
……아까 은여우 가문의 가주 같은 눈웃음이었다. 태세 전환이 너무 빨라서 순식간에 당황해 버렸다.
‘아까 그 표정이 원래 공작님이라는 걸 잊지 말자.’
한층 더 경각심을 다진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발을 굴렀다.
“네, 좋아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님은 바깥의 마부를 향해 핸드 사인을 건넸다. 세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텔레포트만큼 빠르지는 않겠지만, 마차에 마법을 걸어 둔 탓에 수도까지는 꼬박 반나절 정도면 도착한다고 했다.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안고 어젯밤, 샐리와 제니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수도에 도착하면 다양한 퍼레이드를 한다는데!’
그 말에 잔뜩 들뜬 룬과 나는 마차 창문을 열어 둔 채로 즐거운 몇 시간을 보냈다. 마차 안에서 주전부리도 까먹고, 룬을 끌어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즐거웠던 것은 마차의 중앙에 간이 테이블을 펼쳐 둔 뒤 공작님이 준비해 온 퍼즐 맞추기를 하는 일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퍼즐을 맞춘 나는 뻐근해진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거의 다 맞췄어요! 요즘 퍼즐 맞추기는 잘 안 하는데, 용케 여기 있네요!”
“아스텔은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니까요.”
확신 가득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퍼즐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뭔가 말머리를 돌리는 것 같은 어색한 태도였다.
“이제 외곽 길로 빠지게 될 테니, 한숨 자 두십시오.”
공작님의 말이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퍼즐 맞추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룬은 벌써 옆에서 제 몸만 한 커다란 담요를 덮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네, 진짜로 자기는 해야겠어요.”
나도 슬슬 잠에 빠져 볼 생각으로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공작님의 시선이 꿰뚫듯 강렬해서 잠이 들기엔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 신경 줄이 꽤 긴 편인지,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콩, 콩, 콩. 하고 마차의 벽에 부딪히던 머리도 어느덧 안정을 찾았다.
‘꼭 다시 찾아갈게.’
또다시 들리는 환청과 함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일어났다.
마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뿐인데 생각보다 더 개운했다.
‘월렛이 다이어리 아티팩트에 장치를 해 뒀다더니, 기억이 조각조각 돌아오네.’
그나저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공작님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셨을 리는 없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문뜩 어딘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뭔가 상당히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기분…….
그러고 보니까 내가 기대고 있는 게…….
나는 급하게 머리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머리 위에서 조금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깼군요, 아스텔.”
나는 머리만 약간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공작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누워 있어도 되는데.”
……왜 아쉬워 보이는 것 같지. 나는 급하게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보이며 생각했다.
“치, 침 안 흐, 흘렸죠?”
그러고 보니 왠지 공작님의 까만 제복이 젖어 있는 것도 같고!
“그럼요.”
당황한 나와 달리 공작님은 몹시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룬을 바라보며 두 배로 경악했다.
아이는 쌔근쌔근 자면서 공작님의 금장 단추를 깨물고 있었다.
불경함, 오만불손함 그 자체…….
그러나 무릎담요를 얹듯이 룬을 무릎에 앉혀 놓고, 한쪽 어깨는 내게 빌려주었던 공작님은 정작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그의 손가락 끝이 내 입가에 슬쩍 스쳤다.
오늘의 그는 나보다 체온이 조금 높았다. 그래서인지 내 입술에 닿는 손끝이 뜨거웠다.
“만져 볼까요.”
그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손과 입술의 접촉일 뿐인데 마치 입맞춤처럼 느껴졌다.
“안 흘렸습니다.”
긴장한 탓에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혀끝이 잇새로 살짝 나왔다.
그 순간, 그의 손끝이 내 혀를 살짝 스쳤다.
“말해 봐요, 아스텔.”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조심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정말요? 침 안 흘렸어요?”
호흡이 조금 가쁘고, 온몸의 솜털이 쭈뼛거리며 서는 듯한 기분.
“네.”
공작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제야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내 몸의 감각은 여전히 긴장 가득한 상태였다. 곁에 있는 그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화제 전환, 화제 전환을 하자!’
나는 공작님의 애착 인형, 혹은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공작님 몸에 찰싹 붙어 자고 있는 룬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자 아스텔.
지금 네가 공작님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아니야. 저 말랑 콩떡 같은 룬과 바위 같은 공작님 사이의 기묘한 유대감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 저 둘이 저렇게 한 몸처럼, 실과 바늘처럼 붙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저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를 내내 바라보고 있던 공작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룬이 공작님을 아빠로 오해하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씀을 해 주셨으면…….”
그의 깊고 깊은 눈빛을 마주 보니 말끝이 절로 떨렸다.
“아, 아무튼…….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공작님은 그 엄청난 소문들에 비해 각인자인 내게 다소 무른 감이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단단하게 말하면 들어줄 줄 알았다.
나는 진지하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작님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웃었다. 저것은 알겠다, 라고 흔쾌하게 말할 만한 싸인이다.
좋았어, 됐다!
“안 됩니다.”
“네, 감사…… 아니, 네?”
……안 됐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경직된 손으로 무릎 위 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기에게도 아빠가 필요하니까요. 그렇지, 룬?”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공작님의 손길을 받던 룬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몇 번 비비다 기지개를 쫙 켠 꼬마 악동 같은 녀석이 나와 공작님을 빤히 바라보더니 헤헷, 하고 웃었다.
“압빠! 자래조!”
이건 또 어떻게 되는 전개인 걸까?
나는 의심을 반 스푼 정도 섞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님이…… 너한테 잘해 주셔?”
“웅! 마니 잘해조!”
룬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정말로 공작님을 아빠로 받아들인 듯한 모양새다. 나는 룬이 공작님의 무릎 위에서 꼬물거리며 애교 부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많이…… 어색해 보이는데…….’
반면 룬을 편한 자세로 앉히는 공작님의 손길은 어딘지 모르게 뻣뻣했다. 그러나 그 어색함마저 상쇄할 만한 그의 호소력 짙은 눈빛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뭔가 설득당하는 기분에 나는 침을 한 번 크게 삼켰다.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 속, 룬이 히이, 하는 표정으로 앞니를 톡 드러내며 소리쳤다.
“아기는 압빠! 피료해! 어먀도 피료해!”
아이는 신이 나서 공작님의 가슴팍에 있는 행커치프를 꺼내 물고 빨았다. 그 도발에 공작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인 듯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공작님이 룬을 조금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몹시 헷갈렸다. 하지만 적당히 선은 그어야 했다. 나는 결과적으로 공작 가문의 외부인이다. 이곳에서 지나치게 정을 붙였다가는 나중에 떠날 때 룬이 당황하고 크게 슬퍼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각인이 끝나고, 룬이 공작님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당연히 룬에게 아빠는 필요하지만, 아이 아빠는 따로 있으니까요.”
“…….”
우리 둘 사이의 기류를 바라보던 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아이를 멀거니 응시하면서 공작님의 열렬한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봐 달라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스텔.”
간절한 듯한 음성에 나는 시선만 천천히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공작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는 당신에게 아이를 버린 쓰레기와는 달라요, 아스텔.”
그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오빠는 공작님의 머릿속에서 쓰레기 확정인 것 같다. 그것도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 정도.
물론 내 사정을 모르면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니 대충 포기하기로 했다.
나중에 저 편견을 정정할 기회가 있겠지.
오빠, 미안……!
오빠를 향해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있자, 공작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아닌 것 같은데……. 아기가 울면 되게 싫어하면서 싸늘하게 내칠 것 같은 인상인데…….
그것도 설마 내 편견인가……?
그의 진중한 눈동자를 마주 보자 슬슬 내 선입견을 정정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찰나, 공작님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저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룬에게도 아빠로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의 손끝이 내 이마에 불시에 닿았다. 손가락 끝이 슬며시 파고들어 내 머리칼을 헤집어 놓고, 정신까지도 흐트러뜨려 놓은 느낌이었다.
“안 될까요?”
시선이 마주친 사이. 룬이 조그맣게 말했다.
“압빠가…… 마딧는 것도 사 준다고 해떠……. 아기는 아빠 조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 안쪽 살이며 입술이며 바짝바짝 말랐다.
하긴, 아이에게 공작님의 어른스러운 모습이나 재력, 여유로움은 얼마나 멋있게 느껴질까.
롤모델이 될 수도 있겠지.
게다가 룬이 공작님과 친밀해진다면 만약 내가 복수를 하다 죽게 되더라도.
……공작님이 룬을 보살펴 주실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설득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공작님 품 안의 룬을 본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공작님을 한껏 의지하고 있는 룬의 모습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으니까.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눈치챈 공작님이 씩 웃으며 룬을, 여전히 조금 어색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제가 룬을 어여뻐하는 티를 내면, 이 제국에 룬을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자들도 없을 겁니다.”
그건…… 맞는데…….
“어떨까요, 아스텔.”
“……그럼, 그럼 아기의 친아빠가 오기 전까지만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그저 각인자로서 목숨만 챙겨 주면 되는 사이인데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절반의 허락이 떨어지자 공작님이 기쁘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 셋이, 아주 오래 함께할 수 있겠군요.”
……잠깐만, 아주 오래요?
미묘한 뉘앙스였다.
그러나 마차가 비포장도로로 진입하며 요란하게 덜컹거린 탓에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몇십 분 뒤, 우리가 탄 마차는 수도의 방범 초소를 지나 수도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복수를 다짐하고 북부 공작령에 가 있던 나는 몇 년 만의 귀환에 상당히 설레는 중이었다.
“곧 재미있는 퍼레이드가 열릴 겁니다.”
“퍼레이드요?”
그제야 나는 수도에 도착하면 다양한 퍼레이드가 진행될 것이라 했던 샐리와 제니의 말을 되새겼다.
뿌우우우-
공작님과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밖에서 크나큰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창밖을 확인한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저 코끼리는 뭐지?’
무슨…… 왕이라도 귀환하는 것처럼…….
아니, 물론 공작님이 북부의 왕인 것은 맞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를 왔다 갔다 했다는데, 굳이 이 정도 규모의 퍼레이드를 펼칠 이유가 있나?’
혹시나 싶어 공작님을 힐끔 바라보았더니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저런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분일 줄은 몰랐다.
나는 마음속의 ‘아나이스 공작 공략 방법’에 ‘퍼레이드’를 하나 더 추가해 두었다.
지금 이 상황을 가장 기꺼워하는 것은 단연 룬이었다.
내 곁에서 빼꼼 창문을 열고 퍼레이드를 바라보던 룬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코가 옴총 커!”
“……코끼리니까. 귀도 크지?”
나는 룬의 장단을 맞춰 주며 소곤거렸다.
우리가 속닥거리는 그때 공작님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도 어렸을 때 코끼리를 본 적 있습니다.”
“앗, 그래요? 공작성에서 보신 걸까요?”
그러고 보니 공작님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 명 있었다는 친구분 이야기 외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북부의 공작령에서 성장하지 않았거든요.”
“아…….”
의외였다. 보통 순혈 수인들은 공작성 안에서 자라거나, 적어도 북부 공작령에서 살아왔던데…….
“그럼 어디에서 머무셨어요?”
“수도에서 머물렀습니다.”
“오…… 의외네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내 표정을 샅샅이 탐색하는 게 느껴졌다.
별다른 대화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요하게 응시하는 걸까.
“얼굴이 빨개요, 아스텔.”
“퍼…… 레이드 소리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가 봐요.”
당신이 제 얼굴을 너무 뚫어져라 봐서 부끄러워서 그래요, 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으니까.
애매한 내 대답에 공작님도 웃었다.
“이런…… 퍼레이드를 다 치울까요?”
……물론, 그의 대답은 내가 상상한 범위 바깥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 * *
나의 급격한 만류 덕분에 우리 일행은 퍼레이드 현장을 무사히 지나쳤다.
코끼리가 행진하고 그 주변을 사자와 사슴이 함께 뛰노는 성대한 퍼레이드였다.
잔뜩 신이 난 나머지 마차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던 룬을 막느라 애를 써야 했지만 말이다.
마차 안에서 퍼레이드를 행복하게 즐긴 우리는 마침내 공작가의 수도 저택인 세르펜 하우스에 도착했다.
가시덤불이 담장을 메우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멋진 고저택이었다.
“아스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공작님이 나를 에스코트하려 든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곳은 폐쇄적인 북부 공작성과 달리 보는 눈이 많았고,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수도였다.
고작해야 피후견인일 뿐인 나를 공작님이 에스코트한다는 것이 조금 눈치가 보였다.
내가 그의 손에 손을 얹지 않고 가만히 있자, 공작님이 강조하듯 말했다.
“앞으로 공식 일정에서는, 당신이 제 정식 파트너가 되어 주셔야 할 텐데.”
그가 곤란한 체하며 나른한 눈매로 웃어 보였다.
“당연히 오늘부터 에스코트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래, 어차피 여기 온 이상 나와 공작님의 관계가 조금 남다르다는 건 다들 눈치채겠지.’
공작님이 내민 손을 계속 허공에 버려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공작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편안하게 에스코트해 주는 아나이스 공작님 덕분에 새로 마주한 이들 앞에서 지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룬은 말을 타고 뒤따라 온 마이어 경이 맡아 주었다.
곧 1층 복도 양옆에 가지런하게 늘어선 시종과 시녀들이 보였다.
“세르펜 하우스의 가솔들이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삼키고 눈을 굴렸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가솔들이 반인반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외형이었으나 꼬리가 달린 자그마한 햄스터 수인도 있었고, 등에 날개가 달린 독수리 수인도 있었다.
공작성에서는 시녀장님의 철저한 관리 때문인지 인간형 수인들을 더 많이 봤다.
그런데 이 하우스를 관리하는 집사는 조금 더 자유로운 규칙으로 운영하는가 싶었다.
‘수도로 왔는데, 오히려 여기가 더 공작성 축소판 같은 느낌이야.’
여러모로 수인 천국!
다채로운 종의 수인들이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흥미가 어려 있는 동시에, 어색함과 경계심도 드러났다.
“세르펜 하우스의 집사장, 켈든입니다.”
공수 자세로 모은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작님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레이디.”
켈든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이 나와 공작님을 번갈아 응시하다 급하게 멀어졌다.
생긴 건 눈치가 엄청 빠를 것 같은데…….
“레이디께는 저택의 안주인이 사용하는 전용 크리스털 룸을 안내해 드릴 테니 확인해 주십시오.”
……눈치가 없으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공작님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잘 판단했군.”
대체…… 뭘 잘 판단해요……?!
공작님이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내게 말했다.
“바로 제 옆에 있어야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나는 공작성에서도 델피니움 룸을 썼다. 아나이스 공작의 유일한 피후견인이자 각인자니까.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자, 아스텔……!’
나는 속으로 좌우명을 거듭 되뇌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조심조심 따라 들어온 샐리와 제니가 크리스털 룸의 문을 콩, 닫고는 쫑알거렸다.
“여기 저택 녀석들, 분명히 텃세가 심각할 것 같아요!”
“감히 우리 마님, 아니, 아니지. 우리 아스텔 님을 저렇게 보는 눈을 아주 뽑아 버리겠어요.”
……샐리가 진지하게 눈을 부릅떴다.
나도 제국민으로서 수인과 인간 사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들보다 물리적으로 강하고, 또 외적으로 아름답고 튼튼한 수인을 동경하는 동시에 질투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수인들이 인간을 더욱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샐리와 제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아직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 안 괴롭혔……는…….”
“……곧 괴롭힐 수도 있으니, 이 아주 몹쓸 녀석들을 제가 먼저 괴롭히겠어요!”
나는 격분하는 샐리를 보고 히익, 소리를 내며 주춤 발을 물렀다. 샐리가 헤헤, 웃으며 머리를 배배 꼬았다.
사실 자기들도 같은 수인인데 내 마음을 더 챙겨주는 모습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보다, 그보다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요.”
“뭔데요?”
“음…… 멋진 이벤트?”
나는 낮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오빠를 만나기 전에 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 있지.’
복수를 위한 자금을 버는 동시에 콘윌 상단과 맞설 자그마한 상단이라도 차리기 위해서는 멋진 마케팅과 내실 있는 물건이 필요한 법.
그들이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응시했다.
“수도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그런 걸 한 번 알아볼까 해요.”
그 말에 샐리와 제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 역시 잘해 보자며 그들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마케팅은 공작님이 지닌 자본의 힘으로 웬만해서는 잘 순항할 테니, 일단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으로.
그리고…….
나는 움켜쥔 손에 악력을 더욱 가했다.
흑막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을 한번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정체 모를 흑막과 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시녀들과 맞잡은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아아…….”
그때 샐리와 제니가 구슬픈 음성을 토해 냈다.
아차, 너무 세게 잡았나?
나는 둘을 향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아스텔 님, 손에 힘이 너무 없으셔…….”
제니가 서글픈 눈빛으로 입술을 꾹 물었다. 그 반응에 나도 괜히 울컥했다.
나,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은데……!
* * *
한편, 카시언은 아스텔이 수도의 공작 저택에 방금 막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대놓고 수도 진입 시 퍼레이드를 요청하고, 자신의 피후견인과의 관계를 공표했다.
덕분에 수도 사교계의 분위기는 잔뜩 달아올라서, 아스텔에게 모든 이목이 쏠려 버린 처지였다.
‘퍼레이드까지 벌인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나이스 공작에게는 적이 많았다.
그 적들도 아스텔을 주목할 게 뻔한데, 이렇게 요란하게 수도에 입성한다고?
지금이야 그놈이 곁에 있다지만,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작의 마음이 틀어지는 순간 아스텔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운이 나쁘면 아스텔과 함께 있는 룬까지도 위협당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카시언은 이미 공작의 의전 기사가 되어 아스텔과 접촉하려는 계략을 촘촘히 짜 두었다.
하지만 가급적 의전 기사가 되기 전, 최대한 빨리 아스텔을 만나 경고하는 게 더 안전했다.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이 황궁에 도착해, 둘의 관계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 말이다.
그 생각으로 저택 앞에 선 카시언은 지독한 환영 마법과 인간이 절대 지나갈 수 없는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저택을 보고 굳어 버렸다.
공작이 직접 마법을 건 것일까.
워낙 섬세하고도 세밀하게 작업되어 있는 탓에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거대한 만큼 찾고 찾다 보면 어딘가에 분명 허점이 존재했던 공작성과는 달랐다.
고대 마법의 부산물인 첼로가 드나들기에도 제법 위험 부담이 있을 것 같았다.
자욱한 안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의 결벽적인 결계 마법.
이 안에 있는 것을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는 듯한 주인의 편집증적인 광기가 느껴졌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스텔은 모르겠지. 이 새끼가 미쳤다는 걸…….’
안 그래도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했을 때, 바로 이 컨트리 하우스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때까지는 결코 이 꼬라지가 아니었다.
저 안에서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있기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으로 칭칭 감아 놓았을까.
게다가 카시언처럼 마검사이거나,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에야 여기에 마법이 걸려 있는지, 아닌지도 볼 수 없을 터.
고로, 과시용 마법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했는지 짚이는 바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아나이스 공작은 집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성미도 아니었으며, 저곳은 지금까지 내다 버린 수준으로 관리해 왔던 컨트리 하우스다.
지금 그의 인생에서 바뀐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아스텔 정도인데…….
“혹시…… 아스텔을 보호하려고 이 난리를 떨어 놨다고?”
낮게 혼잣말한 카시언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하나 있었다.
‘누구한테서 보호하는 건데?’
은신 마법이 건재한 것으로 봐선, 아스텔이 뷔에트리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을 아는 것 같지는 않고.
정적들 따위에 지레 겁먹고 저렇게 요란스러운 짓을 벌였을 리도 없다.
그 순간, 떠오른 하나의 생각에 카시언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어쩐지…….
‘내 피후견인에게 관심 끄십시오.’
‘…….’
‘당신이 잘하는 거나 하십시오.’
자신을 향해 아스텔에게 신경 끄라고 말했던 그놈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럼 설마…… 나한테서 보호하려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시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공작이 아스텔에게 진심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더 위험한 일이다.
‘……그보다 저 통제광 눈을 피해서, 아스텔을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 후 며칠이 흘러도 저택 주변에서는 아스텔의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적당히 죽치고 앉아 기다리긴 했는데…….
그렇게 잠복하던 중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를 독침을 맞고 죽을 뻔했다.
카시언은 제 팔목을 스치고 지나갔던 독침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 새끼인가? 독침을 쏴? 난 그냥 죽으라는 거야, 뭐야?’
카시언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스텔에게 반드시 접근해야만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초를 겪던 중, 기회가 생겼다.
드디어 아스텔이 저택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마이어 경, 저놈은 또 뭔데 아스텔한테 달라붙어 있어?’
마이어 경은 제국 내에서 카시언 그레이의 라이벌로도 유명했다.
한쪽은 섬세하고 잘생긴 수도의 꽃으로, 다른 한쪽은 우직하고 진중한 타입의 기사로.
그렇게 함께 언급되던 그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스텔을 섬기기로 했다는 말이 돌기에 의아해하기는 했다.
그런데 저런 철통 보안이라니.
마이어 경이 작정하고 붙어 있으면 카시언 역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진짜 미치고 돌아 버리겠네…….’
그렇게 카시언은 공작을 의전하기로 한 날이 되기 전까지 한 번이라도 아스텔을 만날 방법을 열심히 궁리했지만 틈을 찾아낼 수 없었다.
저택 인근을 맴돌던 그는 포기하는 척 몸을 느긋하게 돌렸다.
‘그래 봤자 언젠가는 기필코 만나게 될 거거든.’
진짜 독침에 맞아 죽지 않는 이상, 아스텔을 만날 때까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아스텔 놔줘.’
변덕스러운 새끼.
한순간의 감정에 취해서 자신의 동생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짓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으스스한 한기까지도 감도는 공작 저택을 빤히 응시하는 카시언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자신에게 철통 방어를 한다면, 다른 자를 움직이면 그만이다.
예를 들면…… 황제 정도?
물론 황제를 직접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
카시언의 눈이 승부욕으로 예리하게 빛났다.
* * *
잔잔하고 한가로운 며칠이 흘렀다.
보통 귀족들의 오전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즐기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곳 세르펜 하우스는 조금 달랐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오늘은 바로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이 황궁 견학을 떠나는 날이었다. 수도로 올라오면서 그녀가 직접 요구한 사안이었다.
‘제 사업의 투자자로서 황궁과 수도 견학을 시켜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황궁 견학은 언제쯤으로……!’
‘곧 준비시키겠습니다.’
황궁 견학에 아이처럼 들뜬 아스텔의 모습을 되새기자 아나이스 공작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게다가 황궁에 그녀를 내보일 생각을 하니 드물게 기분이 좋아졌다. 세르펜 하우스에 데려다 놓은 것부터 황궁에 함께 가는 것까지 일종의 공표였다. 그녀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아스텔이 정식으로 그의 파트너로서 사교계에 알려진다면, 그 누구도 아스텔에게 범접하려 들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이 귀찮은 혼사도 처리할 수 있겠고.’
게다가 아스텔 주변에 꼬이는 날파리들을 때려잡는 효과도 상당할 것이다.
카시언 그레이 같은 날파리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세상은 아스텔에게 지나치게 혹독하고 위험한 법. 그러니, 그는 아스텔의 각인자이자 수도 내 보호자로서 그녀를 보살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수도에 오자마자 그 누구도 아스텔의 곁에 접근할 수 없도록 금지 처분을 내려 두었다. 치우고 치워도 계속 쓰레기가 생기고 파리가 꼬이기는 했지만, 그는 아스텔의 앞길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아스텔, 함께 점심을…….’
‘어쩌죠? 저 오늘 점심 못 먹을 것 같아요!’
……아스텔은 그조차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조금 바빴다.
‘제가 수도에 온 이후로 건강이 안 좋습니다. 70대 노인과 생체 패턴이 같다고, 그래서 말인데 아스텔과 저녁…….’
‘그럴 리가 없어요! 엄청 건강하세요!’
……아니, 사실은 많이 바빴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아나이스 공작의 인내심은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아스텔은 크리스털 룸 안에서 무언가를 연구하고 골몰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다.
그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그녀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건강을 핑계 삼아 손 정도는 잡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인내심이 짧디짧은 그는 결국 크리스털 룸을 먼저 찾아가 아스텔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스텔?’
‘사업 아이템 연구 개발 중이거든요! 아, 공작님은 우리 룬을 좋아하시죠! 같이 즐겁게 대화하시는 건 어때요?’
‘압빠!’
그렇게 수도 저택에 도착하고 수일.
그는 찬밥,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 살짜리의 유모 신세를 감당해 왔다.
하지만 황궁 견학이 시작될 오늘부터는 달랐다.
“오늘이 드디어 황궁 참관일이네요!”
“네, 황궁에 오랜만에 가는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저 되게 떨리는데…….”
아스텔은 샛노란 드레스의 양옆에 천 자락을 매만지며 낮게 웃었다.
“어때요? 조금, 사업가 같아요?”
공작은 난처하게 웃었다.
얼마 전, 부티크를 따로 불러 그녀가 앞으로 사교 활동을 하며 입을 의상을 재단했다.
수도에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유명한 재단사를 여럿 붙였는데 그들은 놀라운 성과를 기록했다.
지금의 아스텔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아리 같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텔이 공작을 올려다보며 반문했다.
“병아리요?”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노란 병아리 같은 아스텔.
실제 병아리 수인보다도 그 본체에 가까웠다.
공작이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감탄하느라 정신없던 사이, 어느새 그들은 황궁 앞에 도착했다.
“네. 그럼 이제 함께 황궁을 둘러볼까요, 우리.”
황궁 견학 일정은 분 단위로 짜여 있었으나, 아나이스 공작은 느긋하게 황궁 내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황궁의 문이 열리고, 먼발치에서 웬 수상쩍고 재수 없는 낯짝이 걸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 *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다가오는 이를 보던 아스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며 반가운 듯 발로 두어 번 땅을 구르던 그녀가 그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애써 덤덤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다 겨우 굳힌 아스텔을 바라보더니, 카시언 그레이를 향해 낮게 말했다.
“예, 그대로 지나쳐 가십시오.”
카시언은 여전히 유들유들했고, 아스텔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됩니다.”
공작이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둘의 대치 상황 속, 아스텔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아, 레이디.”
카시언의 표정이 과하게 뭉클해졌다가 급하게 장난스레 바뀌었다.
아스텔은 그의 바뀌기 전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왜 저렇게 한 오백 년은 못 본 사람처럼 구는 걸까, 싶어서였다.
게다가 얼굴에 생채기가 잔뜩 남아 있는 데다 눈은 핏줄이 터진 것처럼 새빨갰다.
아스텔이 그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사이, 다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완벽하게 돌아온 카시언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제가 공작 각하를 존경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나머지, 폐하께서 의전을 담당해 달라 직접 하명하셨습니다.”
그 말에 아스텔은 카시언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의전 담당 기사라면 이미 유명무실해진 제도일 텐데……. 카시언이 그런 일을 도맡을 줄이야.
아마 황제가 아나이스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그 제도를 핑계 삼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황궁에 드나드는 동안 종종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텔의 눈망울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던 카시언도 씩 웃어 보이며, 이내 격식을 갖춰 경례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수도에서 머무르시는 동안 황궁의 의전 담당 직무를 맡게 된 기사, 카시언 그레이라 합니다.”
어쨌거나 아스텔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한껏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애써 내려 보았다.
‘오빠를 만난 건 엄청 좋지만, 괜히 기분 좋은 거 티 냈다가 공작님이 또 우리 관계를 오해하시면 어떡하지?’
파국을 예상한 아스텔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카시언을 향해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그녀는 최대한 카시언이 꺼림칙하다는 척, 그를 싫어하는 척하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아스텔.”
“네?”
“……함께 가시죠.”
겨울보다 더 싸늘하고 차가운 공작의 모습에 아스텔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사장된 전통에는 이유가 있는 법.
의전 담당 기사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것 없었다.
본래 업무를 수행하려면 공작이 아스텔을 에스코트하고, 카시언이 앞서 나가며 황궁 내부를 순회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공작이 의도적으로 블로킹하는 탓에 카시언은 현재 그들의 뒤꽁무니나 졸졸 따르는 모양새가 된 상태였다.
아스텔을 만나면 아이도 수도에 함께 온 것인지, 아이의 상태는 괜찮은지 안부를 묻고 싶었는데, 지금으로선 그녀에게 귀엣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카시언에게도 좋은 순간이 왔다.
“우와, 여기 황궁에는 호수가 있네요?”
아스텔이 신이 나서 황궁의 야외 호수를 가리켰다.
궁정 회의장으로 사용되는 멜레트넘 홀을 지나고 나면 보이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호수였다.
카시언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 바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나이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카시언은 그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 호수에 엮인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너무 궁금해요! 공작님도 궁금하시죠?”
공작은 차마 아스텔의 옆에서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라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네, 정말 기대되는군요. 무슨 설화일지.”
어떤 이야기건 카시언 그레이의 목소리로 듣고 싶지는 않았건만 말이다.
와신상담한 끝에 대화의 키를 잡게 된 카시언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내며 입을 열었다.
“본래는 이 호수가 이리 깊지가 않았습니다. 한데, 어떠한 사건 이후로 깊어지게 됐다고 합니다. 오랜 과거에 황자와 그를 수행하는 여성 기사가 하나 있었지요. 그들은 금단의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세상에, 너무 로맨틱해요.”
아스텔은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귀엽게 웃었다.
이야기에 빠져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공작의 시선이 느슨하게 풀렸다가 카시언을 향해 다시금 매서워졌다.
슬슬 네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듯이 형형한 눈빛.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카시언 그레이가 아니었다.
“아뇨, 전혀 로맨틱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약속하며 황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어느 날, 황자가 호수를 지나다 장난으로 물에 빠진 시늉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엔 몸을 일으키면 바닥에 발이 닿을 정도로 얕았으니, 정말 가벼운 장난이었죠.”
아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시언은 거칠 것이 없이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호수를 향해 던지며 물수제비를 떴다.
“그러나 기사는 물에 빠진 황자를 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의 제복이 젖을까 봐 말입니다.”
“헉…….”
“사랑이 아니었던 거예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황자의 꼴을 보고,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사랑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 뒤 상처받은 황자는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호수를 더 깊게 팠다고 합니다. 괜한 사랑에 눈이 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이지요.”
“헉, 정말요? 로맨틱하지는 않네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아스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카시언이 진지하게 설명을 거듭했다.
“……네, 사랑의 유효 기간은 2년이라고 하죠. 그보다 빠른 사람은 2초 안에도 식고요. 특히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사랑은 식기가 너무 쉽다, 이 말입니다.”
아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이 아무리 빨리 식어도 2초는 좀…….”
카시언은 당당했다.
그는 호수의 찬란한 표면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이 호수 설화는 신분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랍니다. 또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스텔은 처음으로 대면하는 오빠의 진지한 태도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곁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틀렸습니다.”
과감히 대화에 끼어든 공작이 카시언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신분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은 그저 구시대의 발상일 뿐.”
아스텔이 헉, 소리를 냈다.
공작은 제국의 규율을 뒤엎는 멘트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치는 구석이 있었다.
“제가 듣기로 이 호수에는 또 다른 설화가 있습니다.”
“다른 설화요? 그건 뭔가요?”
놀란 것도 잠시 아스텔이 재밌다는 듯 궁금해하며 눈을 반짝 빛냈다.
“옛날 옛적에.”
……고전 설화를 전달하는 목소리치고는 다소 공격적이었다.
“멍청하고 한심한 기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늘 뺀질거리며 여자들과 놀러 다니던 그는 자기 아이가 생긴 후에도 원래 버릇을 못 버리고 끊임없이 놀러 다녔습니다.”
아까 카시언이 그러했듯, 공작도 주변에 있던 돌멩이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호수 표면을 향해 던졌다.
물수제비는 아까 카시언이 던진 것보다 더 많이 퐁당퐁당 튕겼다.
“어……. 아주 나쁜 놈이네요! 그런 놈이 어떻게 기사가 되었대요?”
“그러게 말입니다.”
카시언이 얼굴을 대놓고 찌그러트렸다. 그러나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나쁜 놈은 여성의 형상을 한 물의 정령에게도 수작을 부리다 결국 이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은 아스텔은 허망하다는 눈빛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꽤 깊기는 해도 수영을 필수로 할 줄 알아야만 하는 기사 같은 사내가 빠질 깊이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시치미를 뚝 떼며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진짜입니다. 그리하여 이 호수에는 쓰레기 같은 놈의 혼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아스텔은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황궁이라서 그런지 호수에 되게 많은 사연이 있네요……. 되게 멋져요!”
“그렇습니다. 아스텔, 가시죠.”
“아, 네!”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를 뒤에 놓아두고 아스텔의 손을 잡았다.
저놈의 이야기에 심기가 급격히 불편했지만 아스텔에게 티를 낼 생각은 없었다.
하필이면 카시언 그레이가 의전 담당이 될 줄이야.
물론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수도에 온 이후, 아스텔과의 밀회를 위해 온갖 수를 쓰던 저 뻔뻔한 자가 어떻게든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했을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가시화되고 나니 기분이 두 배로 나빠졌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그 더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눈빛.’
카시언의 그 눈빛은 속이 울렁거릴 만큼 형형했다. 어떻게든 아스텔과의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찌나 지독한지.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잡초처럼 짓밟아 주지. 너와 나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도.’
그 속을 모르는 아스텔이 쫑알거렸다.
“황궁은 정말 신기해요, 그렇죠. 공작님, 기사님?”
기사님이라는 호칭에 공작의 눈빛이 일순 슬퍼졌다. 아스텔의 해사한 웃음을 보면서 속이 뒤틀리는 일은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아기를 맡기고 한가롭게 놀면서 의전 담당이나 하는 놈을 보고 기뻐하다니…….
아닌 것처럼 위장하지만 아스텔도 카시언을 보며 반가워하는 게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
속이 까맣게 탔다.
저놈이 도대체 뭐 그리 좋다고.
공작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하군요.”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수도에서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고, 그는 자신이 낫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 * *
그렇게 한참 황궁 내부의 멋진 홀도 구경하고, 회의장도 둘러보고, 산책로도 걸었다. 오래 걸은 탓에 다리가 조금 아팠는데 그걸 말하기도 전에 공작님이 재빨리 잠깐의 휴식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휴식을 틈타 카시언에게 상부에 의전 관련 보고를 하러 가라고 명한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둘만 남은 채로, 나와 공작님은 황궁 내부에 휴식을 위해 마련된 야외 벤치에 앉았다.
‘그래도 오늘의 목표는 사실상 초과 달성 아닌가?’
나는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으로서의 황궁 견학.
내적인 목적은 수도에 나, 아스텔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 내기!
나는 지금 이 목적들을 대체로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작님 그리고 오빠와 함께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이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었으니까.
황궁을 지나다니면서 목격한 사람들은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 그레이 경과 함께 다니는 자의 정체가 궁금한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쑥덕거렸다.
‘저러다 죽…… 아닌……?’
‘……대체 무슨…….’
‘도망…….’
정확히 어떤 말들을 주고받는지 수군거리는 내용이 다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들 내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휴, 둘만 안 싸우면 딱 좋을 텐데…….’
아까 황궁의 산책로를 걸을 때, 오빠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공작님의 과거에 대해 쉽게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마물 전쟁에서 이룩해 내신 업적을 보고, 과거 행적까지도 고스란히 따르려는 자가 많습니다.’
‘그렇군요.’
‘각하께서는 전쟁의 신이시니까요.’
분명 겉으로는 칭찬일 텐데, 오빠의 표정이 너무 서늘했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너는 전쟁밖에 모르고 과거도 미스터리한 짐승이잖아.’라고 비꼬는 것처럼 들려서 조마조마했다. 물론 공작님 역시 도발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카시언 경, 그대의 과거 행적 역시도 대단하더군요. 특히 사생활 쪽이. 그대는 지금의 사생활 그대로 사는 것이 어울립니다.’
딱 봐도 문란하게 살라는 소리에 오빠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대로라면, 경박하고 문란하게 말입니까?’
‘예.’
바로 긍정할 줄은 몰랐는데!
사이에 낀 나는 둘의 다툼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공작님은 쉬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아스텔 님이 아시다시피, 저는 꽤 가정적인 편입니다. 그대와 달리. 제 아이가 아니어도 친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작님의 입에서 나온 ‘아이’와 ‘친밀함’이라는 말에 오빠가 순간 안도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저 말 하나만으로는 룬이 잘 지내고 있다는 단서는 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룬이 공작 저택에 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렇죠. 남의 아기에게도 잘 대해 주시죠. 지금 공작 저택에 머무는 아기에게도요.’
‘저를 친아빠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오빠가 룬이 무사하단 사실을 잘 알게 되겠지? 반쯤 안도했던 것도 잠시.
‘즐거우시겠군요. 아, 이제 저도 안정적인 곳에 정착을 할까 싶습니다. 미천한 자에게 아기를 다루는 법, 한 수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각하.’
오빠의 말에 공작님이 이를 으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모로 오늘 하루 종일, 누가 봐도 둘이 기 싸움을 하는 모양새였다.
그래도 의전 담당이라면 아마 앞으로 수도 내에서도 여러 번 만날 수 있을 테고, 심지어는 무도회에서도 마주치게 될 거다.
자주 보면 정든다는 말도 있듯이 오빠의 친화력을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
조금 전의 대화를 상기하고 있었더니, 공작님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아스텔, 그자가 정착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아……. 네, 뭐. 어쩌면 그럴 수…… 도.”
“더 이상 저자를 믿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워 보았다.
“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 기사의 어떤 점이 싫으신 건가요? 어쩌면 공작님이 명령하시면, 나쁜 행보가 고쳐질 수도…….”
“모든 것이 싫습니다.”
“아…….”
카시언 그레이에 한해, 공작님의 감정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성과 같았다.
공작님은 황궁을 돌아다니면서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며 낮게 속삭였다.
“……카시언 그레이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으시군요.”
“그저 존경일 뿐이에요. 우선 수도 사람들에게도 되게 용맹한 것으로 이름이 난 분이시고요.”
나는 잠시 눈치를 보았다. 공작님의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당장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절대 사심은 없답니다!”
“……네.”
공작님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이대로 밀고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저는 절대, 절대로 관심도 없어요. 사람이 명성을 얻었으면……그, 그만큼 겸손해야죠. 네? 오히려 좋아한다기보단 공작님의 마음 쪽에 더 비슷할 거예요!”
나는 공작님의 풀어진 표정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그래요, 아스텔. 우리는 일체니까요.”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맞아요.”
……진짜 잘하고 있는 건가.
설마 오빠가 듣진 않았겠지?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마음도 모르고 공작님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귓가에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아까의 그보다 더 경직된 몸을 하고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로 그의 말을 들었다.
“사실 예상은 했습니다.”
“네?”
“카시언 그레이가 우리에게 접근하리라는 것 정도는.”
그렇다면 나만, 오빠가 의전을 담당하게 될 줄 몰랐던 건가……?
나는 그의 표정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공작님의 표정은 제법 담담했다.
오빠가 이렇게 등장한 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번 기회에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오빠와 나의 관계를 밝힐 수는 없으니 오해를 푼다기보다 공작님이 오빠에게 호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오빠와 직접적으로 친해지게 되면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꼭 친오빠라서가 아니라, 사람 한 번 참 진국이기 때문이지.
게다가 수도까지 올라온 지금, 공작님과 오빠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공작님을 설득하듯 말을 꺼내 보았다.
“……그래도 아는 사이니까 편하기는 해요, 그렇죠?”
진지하게 떠보는 목소리에 공작님이 나직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의구심이 들 만큼 신속하고 깔끔한 단답이었다.
“편해지기는 했군요.”
지나치게 협조적이라서 도리어 찜찜한 기분…….
나는 공작님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아스텔이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카시언 그레이는, 이번 기회에 편히…….”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으나, 입가에는 살벌하면서도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
의문을 품은 나의 질문에 그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닙니다, 아스텔. 황궁 견학은 즐거웠는지 궁금합니다.”
뭔가 ‘카시언 그레이는 이번 기회에 편히 보내 준다’ 같은 말이었던 것 같은데…….
복화술인지 뭔지 입술을 여닫는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환청인가 싶었다.
“아, 네! 재미있었어요.”
우선 사람들에게 공작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목표는 성공이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다들 엄청 궁금하겠지!’
당분간은 열심히 깃털을 부풀리는 공작새처럼 뻔뻔해져야 했다.
이렇게 황궁에 들어온 목표는 클리어했지만, 커다란 산이 남아 있었다.
나는 타이밍 좋게 대면 보고를 끝마치고 벤치로 돌아오는 오빠를 힐끔거렸다.
‘이왕 만나게 된 거, 오빠한테도 다이어리 아티팩트,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잠깐 시간을 낼 수가 없네.’
내 과거 기억과 관련이 있는 다이어리 아티팩트를 어디서, 어떤 경로로 구입했는지.
그리고 내가 실종됐을 때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봐야 했다.
‘오늘만 날인 건 아니지만…….’
공작님이 자기를 싫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진한 오빠는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걸음은 엄청나게 다급해 보였지만.
그리고 그가 다가올수록 공작님의 표정이 시시각각 굳어 가는 것도 보였다.
* * *
전부터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에 관한 정보를 다수 수집했고, 수도에 온 이후부터는 왜 여자들이 그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것은 이제 질…… 리지는 않았다.
일단은 스포츠로 즐길 만하다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자가 대체 어떻게 해서 아스텔의 마음을 훔쳤는지는 알아봐야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
“카시언 그레이 경 말씀이십니까?”
“그래.”
조사 자료를 보고하던 보좌관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분이야, 뭐. 철저하게 에스코트를 하는 편이죠! 모든 여성에게 매너도 좋고!”
첫 번째 단계, 우아한 매너.
다행히 그 역시도 공작위에 오른 후, 귀족적인 매너가 몸에 배게 하려고 제법 노력을 해 왔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조금 더 갈고닦을 생각은 있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선물을 기가 막히게 잘 해 준답니다, 그분이!”
두 번째, 선물 공세.
그러나 카시언 그레이 따위가 아스텔이 원하는 선물을 정확히 맞췄을 리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물을 주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수도 최고의 바람둥이니까요.”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을 흘려 넘기며 그는 턱짓을 했다.
보좌관이 빠르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침대에서의 매너도 그렇게 대단하다고……!”
세 번째, 절륜한 침대 매너.
그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매너라,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카시언 그레이도 가능한 것을 자신이 못할 리 있을까. 절륜한 침대 매너 정도는 충분히…….
아니, 잠깐만.
그는 저질스러운 멘트를 내뱉은 보좌관을 바라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더럽군. 그게 끝인가?”
보좌관은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지는 전법으로 자신의 생명과 자리를 잘 지켜 왔다.
고로, 오늘도 그는 넙죽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각하! 이 더럽고 방정맞은 입이 그만! 더러운 말을!”
“그래서, 다음은.”
공작은 다소 바쁜 눈치였다. 그래서 다행히 이번 불경함은 넘어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수도에 카시언 그레이의 카사노바 기질을 배우려는 서클이 하나 있거든요. 그곳에서 책도 하나 나왔는데…….”
아나이스 공작은 곧장 보좌관이 건네는 서클의 연애집을 받아 들었다.
“확인해 보지.”
[카시언 그레이가 말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달링이여. 영원한 나의 안식처.
오오, 내 영혼의 전부여. 그대의 눈동자는 마치 꿀과 같구려.]
“……이런 말을 한다고?”
“네, 각하. 수도에서 아주 인기리에 팔리는 것을 어렵게 구해 왔습니다.”
연애집 내부에는 차마 입 바깥으로 내뱉을 수 없는 언어도단 수준의 끔찍한 대사가 적혀 있었다.
그것을 몇 장 더 넘기며 읽던 아나이스 공작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이런 말을 맨정신으로 하다니, 역시 카시언 그레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시언에 대한 감정이 사정없이 깎여 나가는 와중이었다.
그에게서 잘려 나가고 싶지 않았던 보좌관이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레이디들이 그런 다소 느끼한 대사를 조, 좋아한답니다. 각하.”
공작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대의 연애사에 대고 맹세할 수 있나?”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한 보좌관은 서른이 넘은 솔로였다.
그러나 그는 제 모가지를 두고 진실을 밝힐 성미는 못 되었다.
“그럼요! 카시언 경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한 인기 한답니다!”
아나이스 공작이 보좌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보좌관이 몸을 움찔거리며 굳혔다. 공작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얼굴로 한 인기를 했다니, 못 미덥긴 한데…….”
보좌관의 마음이 빙결 마법이 걸린 듯 차가워졌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별다른 태도 변화 없이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그럼 이대로 실행해 봐야겠군.”
물론 보좌관도 사람이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달링이여’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의 두뇌에 ‘과연 내가 지금 잘한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잠시 일었다.
하지만 공작의 신뢰감 어린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응원합니다.”
보좌관은 애써 정신 승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나는 침대 위를 뒤척거리고 있었다.
자는 곳이 뒤바뀌어 그런지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웠는데도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사실은 기억을 되찾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더 싱숭생숭했다.
나는 그동안 월렛과 계속 영상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아티팩트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과정이 조금 갑작스러운 것 같기도 해요.’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빨리 기억을 되찾게 되는지는 모르겠소만. 혹시 주변에 기억을 자극시키는 매개체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군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번 물꼬를 트고 나자 잃어버린 기억이 급물살이라도 탄 듯 빠르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피곤해…….’
나는 매일 낮마다 콘윌 상단과 접촉할 만한 방법을 고심했고, 또 매일 밤 기억을 찾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꿈을 꿨다.
눈을 꼭 감고 빠져드는 순간, 과거 기억의 조각들이 무의식 속에서 둥둥 떠올랐다.
월렛이 다이어리를 손보아 준 덕분인지, 이번의 꿈은 과거 내가 환영을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예 어린 시절의 내 몸에서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제일 처음, 나는 얼굴 모르는 소년이 마법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구해 주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마법진을 작동시키고 말았다. 곧 시야가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와 소년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속에 갇힌 상황이었다.
‘우리 집에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모르겠어요……. 괜히, 저 때문에, 역시 저는 도태되어야 할 쓰레기…….’
너무…… 급발진인데?
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이를 달랬다.
‘아니야, 네가 갇혀 있었잖아. 도와주는 건 당연히 어른으로서의 의무야!’
나는 쉬지 않고 내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좀처럼 나와 눈을 맞추지 않으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소년을 달랜 뒤, 나는 깊고 깊은 동굴 속에 갇힌 채 부싯돌을 열심히 피워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천 번 정도 돌끼리 부딪쳐 봤는데도 불이 나지 않았다.
‘조난당한 사람들은 부싯돌로 불 피우던데…….’
‘제가 해 봤는데, 그거 잘 안 되는…….’
……사기당했다.
그럼 미리 말해 주지! 나는 움츠러든 소년의 모습에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소년의 등 뒤에서 자그마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누군가의 샛노란 눈 같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건 고양이잖아!’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어서 몰랐는데.
벽에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고양이의 윤기 나는 털과 위풍당당한 몸체를 보며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캬옹!’
‘야옹이가 왜 여기 있지? 야옹아, 이리 와. 위험해!’
샛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고양이가 발톱을 드러냈다.
‘캬아악!’
그때까지 고양이에 관해 잘 몰랐던 나는 그게 하악질인지 모르고 용감하게 다가갔다.
‘착하지, 야옹이.’
내 귓가에는 그저 야옹이가 야옹야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참을 야옹거리던 고양이는 거침없이 손을 내미는 내가 답답했는지 솜방망이로 제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그러더니 클라이밍을 하듯이 동굴 벽을 와다다다 타 넘는 묘기도 부렸다.
‘야옹이가 엄청 신기하다! 그치!’
그러나 내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던 아이는 어느새 등 뒤로 숨어 있었다. 소년의 덜덜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왜 그래?’
‘저 녀석은 그냥 고양이가 아, 아, 아니에요.’
‘……?’
그 말과 함께 야옹이가 두 발로 섰…… 다.
그러더니 위엄 넘치는 동작을 선보이며 내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럼, 고럼! 난 그냥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가 말을 한다?’
‘놀랍지! 어! 수인들도 말을 하긴 하지만, 이 몸처럼…….’
‘안녕, 말하는 고양이야!’
편견이 없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양이의 이맛살을 만져 주면서 물었다.
고양이는 눈을 꼭 감고 그르릉거렸다.
눈까지 감으니 온몸이 까만 먼지 같아 보여서 신기했다. 나는 고양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정체가……. 엄청 귀여운 고양이?’
‘으아악!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난데없이 고성을 지르며 동굴 안을 뛰어다니는 고양이를 의아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고양이가 몸을 쭉 스트레칭하더니 인간의 언어로 계속 쫑알거렸다.
‘난 그냥 고양이가 아니야! 신수! 신수라고!’
‘신수가 뭐야?’
‘무식한 것! 하여간 인간들은 무식해서 상종을 할 수가 없어!’
그때까지만 해도 꼬질꼬질한 채로 가만히 있던 아이가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반짝반짝한 벽안에 흑발.
양 뺨은 꼬질꼬질했지만, 씻겨 놓으면 잘생겼다 싶을 것 같은 외모였다.
게다가 못 먹어서 마른 거지, 자세히 보니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신수가 뭔지는 저도 모, 몰라요. 누나, 저 나쁜 고양이가 누나를 모욕했어요.’
소년의 얼굴이 내 시야에 점점 더 선명히 들어왔다.
조금 못 먹어서 비루먹긴 했지만, 나를 누나라고 부를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헙.’
빤히 바라보자, 소년의 동그란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가다가 금세 고개가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나는 소심한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저게 뭔지 정말로 몰라?’
‘……네, 저는 쓸모가 없어서, 알아도 모, 모르고…….’
말을 들어 보니…… 학대당한 아이인 모양이었다.
마음이 한결 찡해진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토닥, 달래 주었다.
고양이 신수가 만족스러운 하품을 크게 하더니 꼬리를 치켜세우고 말했다.
‘어린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연애질을 하는 거냐?’
나와 소년의 얼굴이 무척 새빨개졌다.
‘아니거든!’
‘……가, 감히 제가…….’
‘아무튼! 너희들은 여기 동굴에 갇혔어. 영원히 못 나가. 멍청한 것들, 감히 마법진을 발동시켜?’
우리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니,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지?
의아해진 나는 티끌 한 점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게 뭐야?’
‘저 어린놈 죽으라고 직조한 마법진을 네가 망가트렸으니까! 이 어리석은 인간아!’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 눈치가 없어서, 화가 나서 마구 쏘아 대는 고양이를 향해 발랄하게 화답했다.
‘그럼 넌 왜 여기 있어? 너도 갇힌 거야, 우리랑 같이?’
‘나는! 이 몸은! 나는! 캬아악! 어쩌다 보니! 여기 소환되어! 그러게, 대체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왜!’
고양이, 아니 신수가 허공을 향해 솜방망이를 날렸다.
‘아무튼 위험한 존재인 이몸을 불러내다니. 이제 너희들은 곧 죽는다. 죽지 않으면 둘 중 한 놈이 희생을…….’
그런 신수의 일갈을 끝으로 나는 급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뭐야, 난 안 죽었는데? 죽지 않으면 둘 중 한 놈이 희생한다니, 그건 무슨 의미지?’
나는 곧바로 머리맡에 놓아둔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그때도 다이어리를 챙겨 가서 다행인 건가.’
거지였던 내게, 오빠가 가판대에서 사 준 다이어리는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비싸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잘 때도, 눈을 뜰 때도 항상 품속에 꼭 소지하고 다니며 즐거운 일상을 기록했었다. 나는 백지인 다이어리의 초반 페이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글씨가 나타날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힌트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적었을 삐뚤빼뚤한 글씨가 백지 위에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어린아이를 마법진에서 빼내 주었는데, 이상한 공간에 소환됐다.
우리 오빠가 나를 걱정할 텐데…….
그보다 되게 신기해, 여기 엄청 귀여운 고양이가 있어! 신수라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일단 말을 해!
그런데, 신수라는 애가 우리 보고 자꾸 혀를 차. 잘못된 선택 때문에, 우리가 이 동굴에 영원히 갇힐 거라고 하는데…….
정말 빠져나갈 수는 없는 걸까? 왜 여기에 소환된 걸까? 아이를 감싸고 있던 마법진 때문이라는데.
여기 있는 아이는, 나보고 자기가 희생할 테니 나는 그냥 떠나라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보다, 이 아이는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분명히 우리는 귀족의 사냥터에 함께 있었는데, 왜 여기로 온 거지……?
조금 무서워지려고 해. 그렇지만 산딸기를 따 먹고 버섯 먹고 배앓이 하는 게 재밌기도 하다.
오빠가 없는 것만 빼면.]
다이어리를 덮은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 복수에 도움이 될 법한 단서가 있을 거라는 추측은 사실이었다.
신수라니!
“대체 어떻게 신수를 만난 거지?”
과거의 나는 몰랐겠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실제로 까만 털에 노란 눈을 가진 고양이 신수는 꽤 유명했다.
고양이 신수, 미미.
신이 직접 권능을 부여한, 신이 가장 특별히 사랑하는 동물이다. 물론 이 세계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으니 일반인들은 신수의 존재 자체도 잘 몰랐다.
그렇다면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신수를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히 환생 전의 지식 덕분이다.
소설 속 카시언은 우연히 얻게 된 고대의 책에서 신수의 존재와 그를 잡는 방법을 알아낸다.
오빠의 정적들은 사술을 주로 썼다. 예를 들면 흑마법, 악마의 점성술 같은 것들.
이때 신수는 사악한 사술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그러니 신수를 가지게 된다면 복수에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카시언은 신수를 찾아냈지만, 자신의 것으로 길들여서 이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신수는 쉽게 길들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고양이는 결국 카시언에게서 도망쳐서 영영 사라지고야 만다.
사실 《피의 복수》라는 소설 자체가 ‘카시언에 대한 작가의 피의 복수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기는 했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먼저 신수를 찾아내서 길들인다면 어떨까.
‘어차피 길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미미는 과거에 나와 마주쳤다고 했고, 동물인 만큼 잘만 하면 내가 어떻게든 길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빠가 신수를 어디서 찾았더라…….”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팔다리를 앞으로 쭉 폈다. 점점 더 실마리가 잡혀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또 있었다.
미미는 그렇다 치고, 나와 함께 있던 그 어린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실종됐을 때 나 혼자 돌아왔다고 했고…… 그 뒤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무척 말랐던.
마치 룬을 연상시키던…….
나는 옆에서 쌔근쌔근 잠든 룬을 매만져 보았다.
‘그 아이도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해서 그 동굴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으니 곧 알 수 있을 터, 당장은 신수를 차지하는 데에 힘을 쏟을 차례였다.
‘오빠가 고양이 신수 미미를 찾아낸 방법이 정확히 뭐였더라?’
고양이 신수, 미미에 대해 요약하자면 관심종자이자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는 설정이었다.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까마귀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했던가.
종종 인간으로 둔갑해 어둠의 경매장을 열기도 했다. 진귀한 물건을 모으는 성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밥이 될 인간을 늘 물색하고는 했지.
……인간을 제 호구로 만들어서 쏙쏙 빼먹으려고!
‘어둠의 경매장이 언제 열리지? 미미를 줍고, 내가 쓸모 있단 걸 증명해야 해. 그리고 수인처럼 길들여야 하는데.’
신수라고는 해도 동물이었다.
수인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내게는 의외로 쉬울지도 모른다.
나는 다이어리를 책꽂이에 꽂아 놓은 뒤 서랍을 뒤져 보았다.
‘소설 속에서 미미는 카시언이 수도의 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접근했어. 하지만 나는 카시언만큼의 유명세는 없어.’
미미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도, 그 어린아이가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점점 더 실마리를 찾아가는 기분이야.’
지금까지는 단순히 공작님과의 만남으로 나의 유명세를 부풀리려 했다면, 조금 더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해졌다.
미미를 구하겠다는 목적을 두고 열심히 계획을 도식화해 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내내 먹통이었던 오빠의 영상구가 반짝거리면서 작동했다. 그날 황궁에서 만난 뒤로 첼로도 보내지 않고 감감무소식이었던 오빠다.
나는 놀라서 영상구를 흔들어 보았다. 그런데 영상구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고 이상했다.
-개…… 자식이……. 끊어 놔서.
“……응?”
-부두술…… 쓰는…… 놈…… 있으니까…… 조심…….
정확히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겨우…… 틈 찾았……. 첼로…… 보낼…… 문제…….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상구가 끊겼다.
나는 영상구를 열심히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월렛과 소통하는 영상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데.
아마 오빠가 줬던 영상구가 오래전 모델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오빠의 지갑 사정에 안타까움이 밀려든 것도 잠시.
저택의 창문이 아주 극히 일부 열리고, 축축하게 젖은 까만 깃털이 안으로 쏙 등장했다.
첼로가 날개를 퍼득거리며 내게 날아온 것이다.
[네 주변에 부두술 쓰는 놈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몸조심해.
부두술은 위험해. 그놈은 너를 죽이고 스스로도 죽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죽은 자들을 조심해야 해.]
‘부두술이라고……. 그럼 마지막 첩자가 혹시 부두술 쓰는 놈이었던 걸까?’
나는 아티팩트의 속성을 떠올렸다.
사기 / 변장 / 공포.
‘공포가 죽은 자들 때문에 비롯되는 거라면 확실히 맞아떨어져.’
도움이 되는 큰 정보였지만, 이 시점에서 카시언이 알게 될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사실상 흑막의 정체가 콘윌 공작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부두술, 부두술이라.’
그렇다면…….
‘최종 흑막이 부두술을 쓰는 놈이라면, 조만간 그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이 생길 거야.’
얼마 뒤, 수도 전역을 미친 듯이 흔들어 놓을, 부두술과 연계된 사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 따져 봤을 때, 그 사건의 열쇠가 되는 것은 그림 한 점이었다.
그 사건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구체적인 청사진이 떠오르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미미도 얻고, 흑막의 정체까지 알아낼 방법이지.’
나는 첼로를 급하게 바깥으로 내보내며 뿌듯하게 생각했다.
‘역시 1년 365일 복수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보람이 여기서 느껴지는구나……!’
밤낮없이 복수에 매진하며 몇백 장짜리 복수 매뉴얼을 짠 보람이 이 순간 비로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생각해 보면 ‘그 방법’은 내가 수도의 저명한 귀족일 때에나 사용이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을 구해야 하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스텔 님!”
샐리가 귀를 쫑긋거리며 들어섰다.
“……응?”
“친우 분들이 찾아오셨는데요, 글쎄!”
……난 수도에 친구가 없는데?
“친구……?”
의아한 마음과 경계심을 한 아름 안고서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노인과 소년이 동시에 나타났다. 황제에게 적법한 성을 하사받은 수인 귀족. 그들이 마치 선물처럼 내 앞에 나타나고야 말았다.
“리카르도 님, 벨 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그들이 내 계획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분명 공작성을 떠나면서 모두에게 아쉬움의 인사를 건넸는데, 아직 이별의 여운을 곱씹기도 전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아스텔, 오랜만이구나! 천 년 정도 못 본 기분이야.”
……한 사흘 못 본 것 같은데…….
벨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선언했다.
“보고 싶었어. 그렇지만 나같이 용감한 어른은, 친구를 만나러 수도까지 나오는 법이라고 들었어! 그래서 재규어 할아버지랑 같이 왔지!”
리카르도가 흡족한 표정으로 벨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게다가……. 걱정이 되어서 원! 수도 놈들은 눈을 뜨건 감건 아무 때나 코를 베어 간다던데.”
“헉! 내 코!”
여전히 겁이 조금 많은 벨이 손을 그러모아 제 콧잔등에 가져다 대며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는 어색하게 허허,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몇 번의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분위기는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들과 따스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문득문득 복수 계획과 신수에 생각이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생각해?”
“신수 생……. 아, 죄송해요.”
그들을 잘 구슬려서 자연스럽게 내 계획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만 딴생각하는 걸 들켜 버렸다.
순간 벨의 정수리에 있던 잔머리들이 여우 귀처럼 쫑긋 섰다.
동시에 빨간 눈동자가 의아함을 품고 가늘어졌다.
그 눈동자를 보던 나는 문득 벨의 종족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신수는 동물이고, 수인들도 동물이니까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것부터 물어볼까?’
게다가 내 눈앞에 있는 이 수인들은 고위 계급이기도 했다.
리카르도와 벨을 한 번씩 바라본 나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사실은 도서관에서 신기한 걸 봤어요. 그게 생각이 나서요.”
“신기한 거? 뭔데? 나보다 더 신기해?”
벨이 삐친 티를 내며 입을 삐죽였다. 나는 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의 토라진 심기를 진정시켰다.
“힝, 그래서어, 뭔데?”
“그게, 신수라고…….”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리카르도가 나직하게 말했다.
“흐음, 그래. 나는 신수를 먼 옛날 본 적이 있다. 우리 가문에도 내려오신 적이 있는데?”
나는 눈을 번뜩이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어, 어, 어떤데요?”
리카르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신수도 신의 축복을 받았다 뿐, 그냥 동물의 감각이 강하던걸.”
“그냥 동물의 감각이요?”
그러자 리카르도가 질문을 쏟아 내는 내 반응에 신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왜, 신수가 가지고 싶으냐? 그건 나도 못 해 줄 텐데. 공작 각하께-.”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수도 그냥 동물일 뿐이다, 라니.
‘생각해 보자. 동물을 다루는 건, 인간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잘할 것 같은데.’
최근 들어 수도 내 인간들은 수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나에게 착 감긴 리카르도와 벨을 바라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미미는 고양이니까, 어쩌면…….’
나는 주먹을 옴팡지게 움켜쥐었다. 당장 신수에 대해 들어야 할 이야기는 얼추 확보되었다.
그렇다면…….
“수도에서 뭔가 할 일이 없는지 궁금하군. 오랜만의 나들이라 말이다.”
리카르도의 제안을 듣자마자 나는 뿌듯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국에 살롱이라고 아세요?”
“살롱?”
“네!”
“제가 가고 싶은 살롱이 있거든요. 그런데 평민은 출입을 못 해서…….”
나는 벨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세워 둔 계획을 하나둘씩 속닥거렸다.
물론, 신수 미미에 대한 이야기나, 내가 세운 계획에 관한 말은 쏙 빼고.
“그렇게 해 보자고?”
“네!”
둘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벨은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입을 헤, 벌리며 반문했다.
“지이인짜로?”
“진짜로!”
* * *
몇 시간 후.
수도에서 가장 커다란 상업 지구, 델트 거리에 공작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 하나가 멈춰 섰다.
마차 안에서 수상쩍고도 기묘한 인물 여럿이 우르르 내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수상한 건 바로 얼굴을 가릴 수 있게끔 까만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어깨가 트인 고혹적인 홀터넥 레드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그 여자가 바로 나다.
‘내가 계획하기는 했지만 너무 떨려!’
나는 어색함을 애써 숨기며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었다. 어깨에는 장미 모양의 장식이 자잘하게 달려, 내가 걸을 때마다 싱그러운 종소리를 냈다.
“레이디, 바로 예약해 둔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마이어 경이 나를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했다. 나는 사뿐사뿐 도보를 걸어갔다.
거의 처음 신어 보는 굽 있는 구두였지만, 다행히 은여우 가문의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덕분에 발뒤꿈치가 아프지 않았다.
“그러지.”
나는 한껏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들이 안내하는 장소로 따랐다.
곁에서는 은여우 한 마리와 거대한 재규어 한 마리, 그리고 마이어 경이 충성스럽게 주변을 엄호했다.
샐리와 제니 역시 평소와 다른 무표정한 낯으로 내 드레스를 잡아 주었다.
‘귀족이 된 기분…….’
그것도 악덕 사채업자 귀족 같은 거 말이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썼다.
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아직 들키면 안 되니까.
유리창에 나의 실루엣을 비추어 보니, 그런대로 포스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지 거리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독특하게 연출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다니.
나는 급격하게 구부러지는 어깨를 겨우 펴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쫄보인 내 몸은 한껏 경직되고 말았다…….
“저 괜찮아요?”
‘목소리 변조 마도구, 엄청 어색해!’
매일 약초나 만지고, 꾸며 봤자 내 나이 또래들이 입는 귀여운 드레스만 입고는 했는데 이런 옷을 입으니 어쩐지 어색하고 신경 쓰였다.
하지만 작전 수행을 위해서라면……!
내 떨림을 눈치챈 건지 샐리가 소곤소곤 속닥거렸다.
“정말이지 고혹적이에요, 아스텔 님!”
털이 뽀얗고 눈이 샐쭉하게 긴 은여우, 벨이 나를 보더니 치맛자락에 달라붙었다.
“끼잉, 낑!”
자기를 얼른 안아 올려서 둥기둥기 해 달라는 듯한 여우짓이었다.
그 애교에도 안아 주지 않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여우 모습을 한 벨은 지금 자기가 몹시 귀여운 낯이란 걸 잘 알고 적극적으로 뽐내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손에 힘을 주고 앞을 보았다.
벨이 귀를 쫑긋거리는 게 시야에 걸렸지만 안고 쓰다듬기까지 하면 도도한 귀부인인 척하는 컨셉이 무너지고 마니까.
쉽게 단념한 벨은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총총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몇 걸음을 더 걷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마이어 경의 말대로 마침내 눈앞에 ‘살롱 드 메’가 보였다.
‘살롱 드 메’는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살롱이었다.
이곳뿐 아니라 최근 사교계에서는 복합 예술 공간인 살롱이 꽤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내부에 미술 전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열며 간단한 디저트도 판매하는 장소로 기능하는 곳들 말이다.
그러나 돈 많은 평민이나 하위 귀족이 살롱에 드나드는 데에는 일종의 초대장이 필요했다.
즉, 내가 살롱에 들어가려면 초대장이 필요했으나…….
살롱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를 향해 마이어 경이 낮게 읊조렸다.
“마이어 함부르크. 이쪽은 내가 모시는 레이디.”
“마이어 경이시군요!”
“세상에, 처,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데 레이디와 그 곁의 그 짐승들은……?”
본디 살롱에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인물은 들어서지 못 한다. 그렇지만 내 곁에 있는 수인들이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지는 법.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 리카르도 님과, 은여우 가문의 후계자 벨 님이시네. 증명이 필요한가?”
마이어 경에 리카르도에 벨까지.
“우리에게 초대장이 필요한가?”
뒤에서 듣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마이어 경이 저런 성격이었을 줄이야.’
작게 감탄하던 중, 내부에서 머리를 포마드로 멋지게 넘긴 까만 머리의 신사 하나가 허겁지겁 다가와 말했다.
“제가 이 살롱의 지배인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레이디.”
나는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턱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소란했던 살롱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위대한 기사인 그의 이름만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베일 모자를 뚫을 듯이 응시해 왔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겐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시선을 살롱 내부의 미술품 전시장 쪽에 고정했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나는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눈 앞의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져 나갔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뭔가 더 보여 줘야겠다고 작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건네준 웰컴 쿠키를 한 손으로 분쇄시키며 콧김을 뿜었다.
“……크르릉.”
털도 삐쭉삐쭉 세웠다. 아니, 리카르도 너무 과몰입 한 거 같은데…….
“아아.”
“히, 히익.”
모두 동경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정도를 넘어 급기야 딸꾹질을 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무섭다.
하지만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재규어의 귀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혀를 내어 내 손등을 핥았다.
‘너무 까끌까끌해!’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까의 두 배로 커졌다.
그도 그럴 게, 재규어 수인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으니까.
나는 목소리를 애써 저음으로 설정한 뒤 아주 느릿느릿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우리 아기가 조금 낯을 가려서.”
……물론, 리카르도와는 내 나이의 세 배 정도가 차이 났지만…….
……아기일 수도 있지, 안 그래?
어쨌거나 아기를 대하는 척, 재규어를 대하는 데에 능숙한 척해야 했다.
“크르르릉……!”
계획대로였다. 리카르도가 콧김을 힘차게 뿜자, 지배인은 급하게 몸을 뒤로 한 발 물렀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 반응에 벨과 리카르도의 눈이 거듭 반짝였다. 저 표정은 분명 신이 난 거다. 그들은 더욱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리카르도가 샛노란 눈을 번뜩이더니 혀를 날름거리며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저 본체가 리카르도와 벨인 걸 아는 나도 조금쯤은 무서워질 정도로 흉흉한 살기마저 뽐냈다.
그들에 의해 살롱 내부가 몹시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바로 내가 오늘 가져야만 하는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장소였다.
보석으로 하단을 아름답게 치장한 《해변》이라는 제목의 그림 작품.
푸른 바다를 그려 냈을 뿐인 그림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점묘법을 이용한 유화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수채화.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화려한 그림이 가득한 살롱에 미운 오리 새끼처럼 하나 툭 튀어나와 있는 데다, 평범한 화가의 것이었다.
“이 미술품을 구입하고 싶은데.”
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미술품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배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실례지만 레이디, 살롱에 전시된 그림들은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옳다, 본디 살롱의 그림은 판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턱을 더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리카르도 역시 타이밍 좋게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귀여운 벨 역시 턱을 치켜올리더니 꼬리를 두툼하게 부풀렸다.
“주인을 불러와 주시겠어요?”
“그게…….”
살롱의 지배인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살롱의 주인이신 레이디 헤젤을 모셔 오겠습니다.”
좋았어.
‘확실히 있어 보이는 척하니까 있는 것처럼 대접해 주는구나.’
가슴이 콩닥콩닥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참았다.
반 정도는 성공이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미술품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살롱의 밀실 안.
살롱의 주인, 레이디 헤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베일을 쓴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재규어가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고, 은여우는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수인들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조차 재규어 수인을 다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쉽게 길들지 않아 반드시 피를 본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인을 다루는 것에 상당히 최적화된 모양새였다.
목소리 또한 무척 허스키한 데다, 입고 있는 새빨간 드레스는 마치 피로 물들인 것 같지 않은가!
헤젤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보았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아나이스 공작의 후원을 받는다더니, 역시나 범상치 않군.’
게다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독특한 향기가 났다.
분명 미묘한 약초의 냄새 같은데……. 혹시 마약이라도 하는 것일까?
‘마약 파티……?!’
눈앞, 신원 미상의 레이디가 굵은 저음으로 속삭였다.
“레이디 헤젤.”
그 덕분에 헤젤은 상상 속에서 급격히 현실로 소환되어 왔다.
“실례지만 레이디, 그 물건은…….”
“무슨 문제라도 있나.”
헤젤은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보며 미묘하게 위압감을 느꼈다.
“그게, 판매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이상할 정도로 저음의 목소리였다.
헤젤은 그녀를 응시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재규어를 연신 쓰다듬는 모습이 지극히 오만하고 고고한 태도였다.
헤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머리로 주판을 굴렸다.
‘대체 왜 그 모작을 가지고 싶어 하는 거지, 그림 보는 눈이 없는 건가?’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넘치는 이 살롱에서 그 미술품은 일종의 치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그림이기도 했고, 심지어 위조품에 가까운 모작이기까지 한.
그러나 그림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 남기고 간 그림.
부친이 ‘이 그림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판매하라’라고 말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롱에 전시해 두고는 있었다.
하지만 계륵 같은 존재였기에 적당히 낮에만 몇 시간 정도 전시해 두고 방치하던 참이었다.
“살롱의 그림은 판매하는 법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 그림은 이 살롱에서 가장 무가치합니다, 레이디.”
“바로 그 무가치한 것이.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나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나의 재규어도 마찬가지로 갖고 싶어 하는군요. 그렇지?”
재규어가 입을 벌려 헤젤을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순간 헤젤은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헤젤은 쓸모없는 문제로 더 이상 기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도 그림을 판매하라고 하기는 했으니까…….
“하면 서약서를 써 주셔야겠습니다.”
헤젤은 밑지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림 작가는 죽었고, 모작을 한 사내 역시도 자신이 이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하지는 못 할 테니까.
“……이 그림이 설사 위조품이라 한들, 저는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관없으니 서명 후 제값을 치르죠.”
판매하겠다는 말에 검은 베일 아래로 여자가 웃는 것도 같았다.
헤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에게 가격을 제시해 보았다.
“만 골드.”
“만 골드라,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눈앞의 이름 모를 여자가 빙긋 웃었다.
살롱의 주인다운 본능으로 헤젤은 무언가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미를 찡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만 골드로도 값은 높이 부른 편이었다.
“네, 좋습니다.”
“미술품은 저택으로 바로 배달해 주세요.”
조금 의뭉스럽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시원찮은 모작도 판매하고 돈도 얻는 꽤 괜찮은 거래였다.
게다가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이 아닌가. 그녀에게 다리를 걸쳐 놓을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약서에 깔끔하게 서명을 완료했다.
계약 체결이었다.
* * *
“레이디, 요청하신 미술품은 짐 마차에 실어, 공작가의 수도 저택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살롱의 밀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고개를 까딱했다.
드디어 모작을 샀다. 사고야 말았다.
‘부두술을 쓰는 녀석들이라면, 조만간 이 그림 때문에 내게 접근할 수밖에 없을걸.’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살롱에 미련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때, 미리 입을 맞추어 둔 대로 마이어 경이 내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마이어 경?”
나는 일부러 뾰족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응시했다.
“오오, 레이디. 원하시는 그림을 얻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분도 나 못지않게 발연기구나.
그의 대사 톤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연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마이어 경을 빤히 바라보며 오만불손한 척 고개를 치켜세우고 입을 열었다.
물론 동공이 흔들리고, 입가가 실룩였지만, 다행히 까만 베일이 내 어색한 표정 연기를 감춰 주었다.
“축하의 의미로 이 꽃을 받아 주십시오.”
“별로네요.”
별로 아닌데! 엄청 예쁜데!
나는 울상이 되려는 표정을 숨긴 채 떨지 않고 침착하게 잘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입 모양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잘했어요.’
나는 눈을 부릅뜨고 살짝 턱짓했다. 그 순간, 마이어 경이 들고 있던 꽃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우리의 발언 때문인지 주변에 탄식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가 떨어뜨린 꽃을 지그시 짓밟았다. 꽃이 구두 굽에 쓸려 짓이겨졌다.
“더 귀한 것으로 가져와야죠. 내가 누군데.”
내 말에 싸늘했던 분위기가 다시 한도 끝도 없이 술렁였다.
‘……허, 헉.’
나야말로 마이어 경을 막 대하려고 하니 숨이 막히려 했다.
심지어 내 곁에선 리카르도가 신이 나 으르렁댔다. 나를 칭찬하는 것 같기는 한데, 겉보기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 무섭기만 했다.
“히익.”
“어떻게 저기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지?”
나도 재규어 무서워…….
모두가 기겁하는 가운데 나 역시도 다리가 호달달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 품이 넓은 드레스 덕에 내 떨리는 몸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너무 고대어잖아요, 경!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 마이어, 리카르도, 벨은 이미 이 연기 상태에 과몰입을 끝냈다.
“귀하신 레이디.”
마이어 경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내가 지르밟은 꽃을 향해 입 맞췄다.
너무 몸이 바닥에 바짝 붙어 있는 거 아닌가?
저기,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나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촘촘한 베일 너머로 경악한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퍼포먼스가 무척 강렬하긴 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번으로는 호기심 유발이 안 되겠지?
어쩌면 앞으로 종종 나와야 하려나? 이 연기를 몇 번 더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사실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아스텔과 일행이 미술품을 구입해 떠나간 뒤, 그녀에 관한 소문은 살롱 안에서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 나갔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기사 마이어 경과 그가 섬기는 정체불명의 신비스러운 레이디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왜 공작 각하의 후견인이라는 레이디 말인데…….”
“……아직도 그 누구도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는 그분이요. 그쵸?”
“그런데 그 가장 초라한 그림은 왜 사 간 걸까요?”
“살롱의 격에 떨어지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궁금하네요, 대체 뭐가 문제일지.”
그날, 아스텔에 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귀가 밝은 짐승 둘은 살롱을 빠져나간 척, 외벽에 기댄 채 숨죽여 내부의 소음을 들었다.
잠시 잠복하던 리카르도가 검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밥값 했군.’
그 역시 재규어 상태일 때 누군가 쓰다듬어 준 게 난생처음이었는데, 어쩐지 고양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중독될 것 같았다.
“가자꾸나.”
“네, 할아버님! 저도 쓰담쓰담 받고 싶어요!”
“쓰다듬어 달라고 해!”
둘은 손을 꼭 잡고 아스텔과 마이어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 * *
나는 곧장 공작 저택으로 귀가하지 않고 상점에 들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물품을 판매하는 마법사 거리에 들른 거였다.
살롱 바깥에 머무르던 샐리와 제니는 오늘 펼쳐진 상황이 상당히 궁금한 듯 쫑알거리려 했다.
그러나 발닦개 호위 기사 놀이에 과몰입한 마이어 경이 그들을 넉살 좋게 차단한 뒤였다.
‘이 연기 후유증 오래갈 것 같은데……?’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지만 깍듯한 마이어 경의 태도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이걸 보면 나도 도도한 귀족 놀이에 중독된 걸지도 모른다…….
“무엇을 구입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이디?”
나는 마이어 경을 향해 가볍게 화답했다.
“아아……. 선물을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선물하고 싶은 거? 그게 뭐냐?”
리카르도의 물음에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마법 실뭉치들을 보여 주었다.
“마법 실이에요. 목도리를 뜰 거예요! 실력이 늘어나면, 여러분 것도 만들어 줄게요.”
“좋다, 이 녀석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선물하고, 오빠한테도 몰래 선물해야지.’
나는 히힛,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른 모두에게 목도리 만들어 주고 싶다!
* * *
살롱에서의 사건 이후, 딱 일주일이 지났다.
아스텔은 그림을 받아 제 방 안에 걸어 두었다. 그 앞에서 종종 벨과 리카르도를 불러 식사를 하기도 했다.
뜨개질도 잊지 않고 열심히 해서 목도리를 거의 다 만들어 두었다.
마지막 연락 이후로 카시언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사이…….
수도 전역은 아스텔에 관한 폭풍우 같은 관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낀다는 레이디, 아스텔에 관한 이야기가 살롱에서부터 온갖 곳으로 퍼져 나가며 어딜 가든 아스텔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마이어 경의 레이디이자 아나이스 공작의 유일한 피후견인.
그러나 그 누구도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여자.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더니, 실은 수인 방계의 핏줄이 섞였다는 루머인 듯 아닌 듯한 이야기도 돌기 시작했다.
카페에 나타나 당당하게 재규어와 은여우를 쓰다듬으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는 전설의 레이디!
티 파티장마다 아스텔에 대한 가십과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가십거리를 즐기지 않으며 고아함과 우아함을 표방하는 귀족 영애들마저도 베일 모자나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아스텔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국이었다.
“황궁에서 본 사람이 있는데,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었대요!”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살롱에서 본 바로는 분명히 고혹적인 미인이었다고요!”
굳이 고혹적인 레이디인 척 꾸민 채 얼굴을 가린 아스텔의 의도는 꽤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의도적으로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 둔 덕에, 소문 중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맞는 정보가 없었다.
그 정도로 의문스럽고 미스터리한 인물은 더욱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는 법이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영애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금발에 녹빛 눈동자면……. 그러게요! 짐작조차 못 하겠어요! 평범한 평민 인간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수인일 수도 있겠지요? 혹시 여우과일까요?”
“듣기로는, 공작 각하의 연인이라는 소리도…….”
어느 한 영애의 말에 몇몇이 비틀거렸다.
뭇 사람들이 아나이스 공작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그는 로망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 역시 존재 자체로 미스터리한 데다 북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전승 기원 무도회에 공작 각하와 함께 참석하겠죠?”
“……그때 황녀 전하도 참석하실 텐데요.”
안 그래도 최근 아나이스 공작과 황녀 간에 일종의 결혼 협약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아나이스 공작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레이디라니.
혹시 삼각관계 치정극일까?
아니면, 결혼은 황녀와 하고 그 여자는 그저 정부 역할에 불과한 걸까?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이토록 떨린 적이 없었네요…….”
귀족 영애들이 모두 진지한 눈빛을 띤 채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마물 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황궁 무도회까지 딱 열흘이 남았다.
아나이스 공작은 일찍이 참여의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의문스러운 레이디는 참석할까?
그렇게 모든 이들이 아스텔의 연회 참석 여부에 주목했다.
* * *
수도의 가십지를 받아 본 나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의도했던 바와 같이 나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하루가 지나고 나면 가십지 지면에 나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사과하는 말이 주로 올라왔다. 심지어 판매량이 하찮은 가십지들은 줄줄이 폐간행 열차를 타기도 했다.
‘난 항의한 적이 없는데 왜 줄줄이 폐간되는 거지? 억울해.’
그 부분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어쨌든 내 이야기가 사교계에서 그 어떤 화제보다 핫이슈라는 사실만큼은 제대로 확인했으니 됐다.
‘역시 내 의도대로, 나를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 이럴 때 슬슬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되지.’
마법 털실로 목도리를 열심히 짜던 나는 눈앞의 미술품을 빤히 응시했다.
만약 콘윌 공작이 내가 예상하는 최종 흑막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아티팩트대로라면 그는 반드시 이 그림을 손에 넣어야만 할 테니까.
‘이 그림은 흑막에게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젠 내 거지.’
나는 가히 평범해 보이는 그림을 빤히 바라보며 관찰했다.
다시 봐도 바다가 그려져 있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꽤 무시무시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만약 콘윌 공작이 흑막이라면, 그 역시 이 그림 속에 숨겨진 비밀을 조만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그동안 열심히 상단 운영하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나는 털실로 목도리를 짜는 일을 마무리하며 즐겁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열심히 뜨개질하던 나는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까 이걸 공작님한테 주면, 조금 이상하게 보이려나? 좋아한다고 오해한다거나. 아니, 사실은 그냥, 그냥 보은의 목적이니까…….’
리카르도나 벨, 샐리나 제니에게 주는 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공작님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자꾸 멈칫하게 되는 걸까?
나는 살짝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내리눌렀다. 요즘 무리해서 열이 오르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후, 난 뜨개질을 하던 실과 바늘을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뒤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낮잠이나 자 둘까.”
꿈에 중독이라도 된 것일지, 틈만 나면 잠에 빠지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 번 잠들 때마다 계속 새로운 과거의 일을 알게 되니까.
잃어버린 기억이 복수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만큼 내게 꿈을 꾸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해졌다.
다행히도 오늘 역시 꿈속에는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꿈의 주요 무대는 여전히 동굴 안이었다.
‘너는 어디에서 온 거야?’
‘저는 북부에서 와, 왔어요. 그……. 버려졌……. 어요.’
동글동글한 푸른 눈을 굴린 소년이 조심스럽게 내 팔을 지혈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동굴에서 생채기라도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 더 대장다웠다. 팔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을 채근했다.
‘그 마법진이 너를 죽이려고 했던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죽을 뻔한 거네. 그럼 우린 생사를 나눈 친구네!’
우리는 자그마한 동굴 안에서 함께 오순도순 체리를 나눠 먹었다.
그러다 칠칠치 못하게 입가에 빨간 피처럼 흐른 것을 닦아 주면서 그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제 생명을 지켜 주셨으니까, 나중에 제가, 꼬, 꼭. 지켜 줄게요.’
나는 소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그의 뺨이 화르륵 불타듯이 붉어졌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고개를 갸웃한 나는 손에 내내 매고 있던, 오빠가 내게 준 스카프를 그의 목에 둘둘 감아 주었다.
‘얼굴이 빨간데. 추운가 봐.’
옆에서 우리의 체리를 몰래 훔쳐 먹고 있던 고양이 신수, 미미가 진지하게 핀잔을 건넸다.
‘잘들 논다. 너희는 어차피 여길 못 빠져나간다니까?’
나는 미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미가 하악질을 하듯 거칠게 쫑알거렸다.
‘둘 중 하나가 내게 목숨을 내놓든가, 아니면 그 목숨만큼 귀한 걸 내놓든가 해. 그럼 이 위대한 몸이 요술을 부려 빠져나가게 해 주지!’
‘목숨만큼 귀한 거…… 요?’
‘그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소년의 표정과 신수, 미미가 사악하게 웃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몽롱한 의식 가운데에서도 의아한 부분은 남아 있었다.
분명 목숨을 내놓거나, 목숨만큼 귀한 것을 내놓으라고 했었다.
사라진 내 기억이 목숨만큼 귀한 것은 아닐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억을 잃었을 뿐 무탈히 살아남았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다시 생각했다.
‘무슨 꿈이 이렇게 절단신공을 부리냐……. 연참이 필요하다.’
꿈을 더 꾸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조금만 더 꿈을 꿨으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일까.
‘그 아이……. 묘하게 낯이 익은 것도 같아.’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동굴 속에 함께 있던 그 아이에 관한 단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그 동굴을 빠져나온 걸 보면……. 설마 나를 위해 희생해서 죽기라도 한 걸까?
눈을 반짝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몸을 움직이면서 바스락거리는 침구 소리만 날 뿐,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룬은 샐리가 깨끗하게 때 빼고 광내 주러 갔고.’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 나는 협탁 옆의 털실을 손에 꼭 쥐고 털실 공들을 한데 모았다.
꿈을 꿀 때마다 자꾸 이상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치받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 말이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쳐내려면, 얼른 털실로 목도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단순 노동에 집중해야지.
가난하던 시절, 오빠가 일터에 나가 있을 때마다 나는 혼자 집에서 목도리 뜨개질을 열심히 했었다. 그 덕에 생각보다 수완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 뜨개질에 열을 올렸다. 점점 손이 빨라지고 눈이 가늘어졌다.
끝이 보인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게 털실 공이 하나 빈 것 같기도 한데…… 내 착각이겠지?
* * *
물론 아스텔은 털실 공 하나를 잃어버린 게 맞았다. 샤워를 싹싹 마친 룬이 아스텔의 방 안에 들어 왔다가 제 얼굴만 한 털실 공 하나를 집어 들고 도망간 것이었다.
룬이 그것을 들고 향한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왜.”
수도에 온 이후로도 룬은 아나이스 공작의 집무실을 제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었다. 공작도 딱히 아기의 출입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공작에게 저택 내의 마법 파장에 관해 보고를 올리던 집사장만이 당황한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압빠.”
“헉.”
방금 자신이 들은 게 사실이 맞는지, 노련한 집사장이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나 룬도 아나이스 공작도 집사장에게는 별달리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룬은 털실 공 하나를 품에 꼭 쥐고 오도도도, 맹렬하게 공작의 품으로 달려 나갔다. 포즈는 알밤 품은 다람쥐보다 용맹했고, 조그마한 발은 햄스터보다 더 빨랐다.
“히히.”
그러나 공작은 빠르게 달려오는 룬의 몸을 한 손으로 달랑 들며 경고할 뿐이었다.
“위험해.”
“힝. 압빠가 안 안아 조.”
“내가 너를 왜 안아야 하지? 너는 아스텔도 아닌데.”
엄밀히 말하면 죽이고 싶은 놈의 아들인데 말이야, 그가 아주 작게 속닥거렸다.
물론 표정은 말과 달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냉정한 말에도 룬은 방싯거리며 웃었다.
아이는 잘 먹고 깨끗하게 씻어서 하얗고 통통한 볼따구니를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털실 공을 내밀었다.
“어먀가 이고 해.”
“……?”
집사장은 룬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달랐다.
“아스텔이 이 털실 공으로 목도리를 만든다고?”
룬의 말을 쉽게 해석한 공작의 시선이 녹색 털실 공을 내려다보았다.
우연인지, 이 실은 아스텔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아 있었다.
“웅!”
“…….”
“아기 꺼야! 힛!”
털실 공을 끌어안은 룬이 공기놀이를 하듯 털실 공을 위로 휙 던지려 했다. 그러나 공작이 털실 뭉치를 잡아채며 농담기 없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네 목도리를 만든다고……. 아닐 거다.”
공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 거겠지.”
룬이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안니! 아기 거!”
실속 없는 대화가 오가는 사이, 중간에 낀 집사장은 ‘도대체 저걸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경직된 자세로 그들을 관망했다.
통통한 볼을 마구 부풀린 룬과 무표정한 공작이 치열하게 대치했다.
* * *
한참 목도리 뜨개질을 하는 중에 첼로가 빼꼼히 창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들어왔다.
첼로는 몹시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이 공작 저택에 지나치게 많은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 다시 첼로가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힘겨워 보이는 첼로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방 안을 휘휘 맴돌았다.
나는 첼로의 몸에 목도리를 둘둘 매달아 주었다. 그리고 짧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건 선물이야, 제일 먼저 주는 거야.]
그와 동시에 첼로가 몸을 휙 숨기고 빠르게 도망쳤다.
나는 그 후에도 목도리를 열심히 뜨개질했다.
다행히 마법에 걸린 실이라서인지 뜨개질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두 개 더 완성했다.’
룬의 목도리와 공작님의 목도리, 이렇게 총 두 개를 순식간에 더 만들었다.
자그마한 클러치 안에 목도리를 넣어 둔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룬은 그렇다 치고 공작님한테는 어떻게 전달해 주지…….’
저기, 이거 제 선물이에요, 라고 전달하려 했지만,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왜 다른 사람한테 전해 주려고 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 공작님한테 주려고 하면 얼굴이 홧홧해지냔 말이야…….’
마음 한편이 자꾸 수런거렸다. 하지만, 곧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꾸물거리며 들어오는 룬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뒤로는 아나이스 공작님도 함께였다.
“저녁 머그 시가니야!”
다행히 첼로를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응, 저녁 먹으러 갈까?”
“압빠랑 가치 머거!”
“……아니, 너희 아빠는 따로 있…….”
“아빠랑 같이 먹자.”
공작님이 전혀 다정하지 않은 말투로 다정한 말을 해서 정말 흠칫했다.
공작님은 정말 룬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서 나오세요, 아스텔.”
“아, 네……. 그럼 저도 준비하고 바로 나갈게요!”
나는 조심스럽게 옆에 놓아두었던 클러치를 집어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냥 오늘 목도리, 전해 주는 게 나을지도…….
* * *
저녁 식사 시간은 평소와 같이 평범했다.
공작님이 드문드문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 빼면 말이다.
아니, 이 엄청나게 화려한 코스 요리도 빼면 말이지!
나는 아뮤즈 부쉬로 나온 달콤한 연두부 요리도 먹고, 전채 요리도 먹었다.
입에 넣는 족족 행복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본 요리 다음에 나온 디저트 역시 카라멜을 잔뜩 얹어서인지 끝맛을 달콤하게 마무리하는 데에 제격이었다.
너무나도 행복한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네?”
대화의 서두로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닙니다’ 라니.
그 전에 무언가 말이 더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하지만 공작님과 나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나를 그윽하게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스텔.”
“나두! 나두 아무 거뚜 기대 앙해써!”
나는 조용히 입을 오물거리던 룬과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둘 다 무슨 뜻인지…….”
그가 턱을 악문 게 느껴졌다.
“와아압!”
룬이 호두를 앙, 하고 깨문 것도 느껴졌다.
룬은 그렇다 치고 공작님이 갑작스러운 헛소리를 하다니. 혹시 열병 환자의 섬망 증세를 보이고 있는 걸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나는 무릎에 올려 두었던 클러치를 매만지던 손을 앞으로 쓱 내밀었다.
바로 그의 이마를 매만졌지만 다행히도 차가웠다.
“열은 안 나는데.”
그가 내 손을 잡고 그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열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입술이 맞닿은 손등이 조금 뜨거웠다.
“……진짜예요?”
의심스러운데…….
그는 가볍게 내 손등을 넘겨주었지만, 나는 조금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진정하자, 진정.’
그렇게 식사 자리가 거의 마무리될 때까지도 나는 목도리를 선뜻 건네주지 못했다.
그렇게 식후 와인까지 다 마셔 버렸다.
식사 자리가 파하고, 자꾸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입술을 퉁 하고 내민 룬을 겨우 달래 샐리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이후 공작님과 함께 저택의 스산한 복도를 걷는 길.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선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굳은 공작님의 표정을 힐끔거리며 떨리는 마음을 열심히 가라앉히고 생각했다.
지금이 기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열심히 짠 털실 목도리를 건네줄 기회……!
하지만 머릿속이 자꾸만 혼란스러워졌다.
‘그런데, 공작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마법 실로 열심히 짠 목도리인데…….
내가 각인자로서 공작님에게 받은 수많은 물건들을 떠올리니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까 주려고 했는데 조금 긴장돼서 못 줬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꼭 줘야 해. 열심히 만들었잖아.’
선물을 받고 나면 공작님의 기분이 조금쯤 풀릴지도 모른다.
나는 내 발걸음에 맞춰 걸어 주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사실은 공작님께 선물도 드리려고 하는데…… 요.”
말하면서 여전히 나붓하게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곁을 함께 걷던 공작님이 사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보았다.
나와 발을 맞추어 걷던 그가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는 무섭도록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이 없었다.
마치 아무 말도 못 듣고 굳어 버린 조각상 같았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나는 자연스럽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하고는 달라서 약간…… 뻘쭘하기도 한데.’
기쁘다거나, 기대된다거나 하는 예의상 멘트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미 말을 꺼낸 거니까.
“여기요.”
나는 마법 실로 열심히 뜨개질한 목도리를 주섬주섬 꺼내어 그의 손 위에 덥석 올려놓아 주었다.
“선물이에요! 제가 직접 짠 털실 목도리인데.”
내가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망설여지기는 했다. 하지만 일단 선물을 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니까.
“……벼, 별로면 버리셔도 돼요.”
“아…….”
공작님은 가만히 털실 목도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손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사실 워낙 부유하시니까……. 마음을 담은 선물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무반응에 공연히 더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말을 마친 나는 급하게 방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그가 등 뒤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한 번 정도는 매 주셔야 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에 약간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기억…….”
나는 의구심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닙니다. 목도리, 항상 가지고 다니겠습니다, 아스텔.”
이상하다. 조금 울먹거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공작님이 울먹거릴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확실히 긍정의 대답을 듣고 나니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주시면 진짜 기뻐요!”
나는 환히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기회를 틈타서, 나와 인연이 닿은 모든 고마운 사람들, 수인들에게 선물을 줄 차례였다.
이 저택의 시녀들에게도 주고, 리카르도에게도, 벨에게도 줘야지!
* * *
이튿날 아침.
카시언은 수도를 떠났던 레이첼에게서 부두술을 쓰는 놈에 관해 최종적으로 추적한 결과를 받아 보았다.
그의 행방은 묘연했는데, 마지막으로 포착된 장소는 남부 지방의 어느 자그마한 상단 마을이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서 그곳으로 향한 카시언은 그 상단 마을에서 자그마한 미이라 조각을 발견한 참이었다.
그 조각이 바로 부두술의 흔적이었다. 이 부두술을 벌인 자를 추적하다 보면 결국 최종 배후가 완벽히 드러날 것이다.
어쩌면 그 배후를 잡을 방법도 나타나겠지.
미라 조각을 값비싼 마법 주머니에 보관해 둔 카시언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대련장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기사단 합숙소 앞에 서자마자 목도리에 둘둘 싸인 첼로가 뿅하고 나타났다.
예쁘게 잘 말린 목도리에는 새벽이슬이 약간 묻어 있었다.
“까악!”
“이게 뭐야?”
첼로는 목도리가 답답했던 듯 까마귀처럼 울었다. 급하게 목도리를 벗겨 준 카시언이 편지를 받아 보았다.
“……내 선물이구나?”
그가 가볍게 실소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따뜻한 목도리 선물이 왔다.
그것도 주황색과 녹색 실로 예쁘게 짠 목도리가.
‘잘 지내는 모양이지.’
선물 그 자체로도 기쁜 법이지만 동생인 아스텔이 직접 손수 만들어 선물해 줬다는 건 두 배로 기뻤다.
그 목도리를 보고 있자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카시언은 목도리를 목에 멋들어지게 맨 뒤 대련장으로 향했다. 걷는 발걸음마다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아니, 검술 대련하는데 무슨 목도리야?”
“내 마음이다.”
“역시 시원스럽게 미친 놈이구만! 하하!”
참고로 이건 엄청난 칭찬이었다.
카시언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오늘 대련 역시 꽤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오늘 마물 전쟁 전략 회의장에서 아나이스 공작을 만날 일만 빼면 상쾌한 하루가 되겠지.
카시언은 목도리를 매만지며 뿌듯하게 웃었다.
* * *
바로 그때, 공작가의 수도 저택은 내가 한 땀 한 땀 열심히 만든 목도리 덕분에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룬을 침대에 눕혀 재운 뒤 방의 응접실 소파에 앉은 나는, 목에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내 곁에 호위하듯 선 샐리와 제니를 뒤늦게 발견했다.
“저, 아스텔 님. 어때요? 예쁘죠?”
나와 눈이 마주친 샐리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어, 어어, 귀엽고 예쁘긴 한데…….”
나는 애써 다음 문장을 삼켰다.
‘좀, 덥지 않나?’
공작 저택은 난방 마법 덕분에 매우 더웠다. 아닌 게 아니라 샐리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러나 샐리는 주먹을 꼭 움켜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샐리의 등 뒤로 꼬리가 뿅 튀어나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우리 아기 같은 아스텔 님이 열심히 만들어 주신 목도리인데! 평생 이것만 맬 거예요!”
활짝 웃는 샐리의 곁에서 제니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아스텔 님, 그보다 명령하신 살인 사건 정보 조사해 왔습니다.”
뒤늦게 발견한 제니의 손에는 각종 종이 뭉치가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나는 제니가 조용히 건넨 종이 뭉치를 받아 들고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아스텔 님이 살인 사건이나 추리 소설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종이 뭉치를 쥔 손에 힘을 꼭 준 나는 속으로 반박했다.
‘관심 없어, 무서워!’
……그렇지만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관심 있는 척해야 했다.
“너, 너무 재미있어서! 추리하는 것도 흥미롭고.”
샐리와 제니, 두 강아지 수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거짓말 치는 거, 너무 어렵다. 어떻게 연습하지?’
속으로 울상을 지은 나는 손에 움켜쥔 종이 뭉치를 파헤쳤다.
요즘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도의 살인 사건을 탐독하는 중이었는데…….
‘수도 내에 있던 부두술 살인 사건이 분명히 이맘때엔 신문에 실릴 텐데.’
슬슬 신문 하단에 심장이 없는 시체와 미이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열심히 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때 제니가 나를 향해 귀띔해 주었다.
“신문에는 아직 안 실렸다는데 글쎄, 수도에 심장 없는 시체가 발견됐대요.”
나는 고개를 팍 치켜들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정보였다.
내 시선을 맞춘 제니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다 쉬쉬하긴 해도, 수도 방위대에는 이미 소문이 쫙 퍼졌나 보더라고요.”
드디어 수도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기다리던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고인을 마음속으로 애도한 나는 잠시 의문에 잠겼다.
‘미이라도 발견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아직 발견이 안 됐나?’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속으로 가볍게 수긍했다.
이미 미래를 비틀어 버린 이상, 내가 알고 있는 사건들이 전부 다 확실하게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나는 흥미진진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제니를 빤히 응시했다.
“혹시 그 시체에, 특이점은 없었어?”
제니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웬 기이한 그림 조각을 쥐고 있었다나 봐요. 조사하던 도중 유실됐다고는 하는데, 확실히 이상하죠? 그쵸?”
“응, 이상해. 왜 하필 그림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지만, 사실 나는 시체가 그림 조각을 손에 쥐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 시체와 그림은, 부두술사가 부두술을 사용하려다 실패한 흔적이야.’
부두술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부활시키거나, 죽은 자의 몸을 빼앗거나, 혹은 죽은 자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강력한 마력을 지닌 매개체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일명 ‘부두술의 통로’라고 불리는 고대 부두술사들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는 그림, 혹은 몇몇 특수 아티팩트를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두술사들이 사용하는 아티팩트나 그림은 불완전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 부작용이 극심했다. 미이라가 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내가 살롱에서 구입한 그림인《해변》만이 강력한 부두술을 구현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을 지닌 유일한 매개체이자 통로였다.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는 손에 잡고 있던 신문을 콰득 움켜쥐었다.
‘원래대로라면 부두술사는 《해변》을 손쉽게 손에 넣은 다음 저명한 인사들을 마음껏 살해 후 부활시켜 이용해 먹다가 붙잡히지.’
하지만 원작과 달리 《해변》은 내 손에 있다.
오빠가 건네준 힌트와 공포 아티팩트의 정체를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았을 때, 공포 아티팩트의 주인은 부두술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흑막은 부두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터.
그러니 부두술에 꼭 필요한 《해변》을 얻기 위해서라면, 흑막은 내게 접촉해 올 것이 자명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더욱 깊이 기대며 능숙하게 화제를 넘겼다.
“좋아. 그럼 나쁜 소식 말고, 좋은 소식은 없어?”
“아아, 상서로운 징조도 있어요. 비도 안 내렸는데, 하늘에 무지개도 떴대요!”
“하여튼 인간들의 세상은 참 특이하단 말이야. 재미있고!”
샐리와 제니가 콩떡 같은 눈을 맞추며 해맑게 합창하듯 말했다.
무지개라는 말에 나 역시 즐거워졌다. 무지개는 신수 미미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미미가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미미도, 흑막도 만날 날까지 그리 머지않았다는 소리야.’
어서 미미를 만나 과거사를 물어보고 싶었다.
또한 흑막의 정체가 콘윌 공작이 맞는지, 아닌지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체스 말을 두듯 비장하게 미래를 설계하는데, 제니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보다 가장 좋은 소식은 따로 있죠!”
“좋은 소식?”
“곧 공작 각하의 파트너로 황궁 무도회에 가실 텐데, 춤도 연습하셔야죠!”
제니가 제 양손을 포개 잡으며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의 파트너라니, 듣자마자 부끄러워 귀가 새빨개졌다.
공작님에 관해서라면 별거 아닌 일에도 자꾸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런 상태를 보니 문득 각인이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닐지 염려되었다.
심장이 뛰는 걸 넘어 언젠가부터 정신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었으니까.
뭉게구름이 퍼지듯 공작님의 다정한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공작님은 그만 생각해, 아스텔!’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복수 쪽으로 생각의 초점을 바꾸었다.
‘흑막이 콘윌 공작이라면, 무도회에서 입질이 올지도 모르겠는데.’
주먹을 꼭 움켜쥔 나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 황궁 무도회에는 고위 귀족들도 다 오시겠지?”
“네! 이번 무도회에는 두문불출하던 인간 귀족들도 엄청 나온대요!”
“다 아스텔 님 보러 오는 거겠지! 궁금할 테니까!”
“우리 아스텔 님이 햄스터 수인처럼 귀여운 거 다들 알아야 해.”
팔불출 시녀들의 말에 부끄러워진 나는 양손으로 두 볼을 감쌌다.
샐리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귀, 귀여워!”
……콩자반 같은 동공 가진 너희가 더 귀엽거든!
특히나 나는 귀여워서는 안 됐다.
이제는 조금 더 무서워져야 했다.
이제부터는 복수를 위해 365일 살아온 계략 가득한 아스텔 모드다.
사악한 부두술사에게 희생된 고인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복수를 위해서 더욱 강해져야 했다.
나는 눈에 독기 가득하게 힘을 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 * *
아스텔이 한참 계략을 짜고, 혼자만의 복수물을 찍고 있던 바로 그날.
수도의 황궁 내 마물 전쟁 전략 회의장 내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아나이스 공작에게 꽂혔다.
평소에도 모든 이가 그에게 주목하기는 했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공작을 향한 시선에는 같은 의문들이 담겨 있었다.
대체 왜 실내에서 목도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누가 직접 손뜨개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
조금…… 엉성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감히 간 크게 그 이상한 상태를 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되레 아나이스 공작은 활기가 감도는 개운한 표정이었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공포스러워 보였다.
한마디로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쉽게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접근할 수도 없었다.
“각하, 오늘따라 의장이 멋지십니다!”
……아니, 그 누구보다 눈치코치 없는 인물 한 명만 빼고.
비교적 상석 가까이에 앉은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
그가 가볍고 명랑하게 말하자,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생각했다.
저 눈치 없는 놈, 바로 가겠구만!
이내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은 모두 속으로 제 논리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모습이 로파 쉘린드가 보게 될 공작의 마지막 미소겠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보는 눈이 있군요.”
……아닌가?
“아주 아름답지 않습니까? 특히 이 털실 색의 조화가. 검정색과 연두색이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는 것이 말입니다.”
“하하! 네! 아주 아름답습니다!”
로파와 아나이스 공작은 이상할 정도로 쿵짝이 잘 맞았다.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귀족들이 죄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공작 각하.”
정각에 기사단 여럿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수석 기사나 전쟁 영웅 출신의 기사들로 꾸려진 정예 군단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해 둔 사안이기는 했으나 혹시 책 잡힐까 염려한 로파가 구태여 첨언했다.
“허허, 훈련을 마치고 급히 들어온 기사들입니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 역시도 그 점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려 깊은 타입이었다.
무엇보다 회의에 지각한 것도 아니었으니 관대하게 넘어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기사들을 바라보던 귀족들은 단체로 낭패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음……?”
“……뭐지?”
모두의 시선이 기사, 카시언 그레이의 목 부근에 고정되었다. 그의 목에 걸린 것은 마법 털실로 한 땀 한 땀 서투르게 짠 게 분명한 목도리였다. 카시언의 목도리는 아나이스 공작의 것과 색은 달랐으나 질감이 동일했다.
‘……뭐야, 저거 요즘 수도 유행인가?’
그런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의문 가득한 시선들이 카시언과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궁금해한다 한들, 당사자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서로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고, 카시언도 이어 착석했을 때였다.
“회의를…….”
분명 컨디션이 몹시 좋아 보였던 공작이 낮디낮은 저음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시작하지.”
마치 지금 당장 전쟁이라도 난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카시언 쪽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턱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건 분명…….
공작을 당장 죽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 낀 참석자들만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모든 자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갑자기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허허! 좋습니다!”
눈치가 다소 부족한 로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이 짧게 턱짓했다. 내무대신이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안건을 올리겠습니다, 각하.”
기묘한 목도리를 맨 아나이스 공작과 카시언 그레이 경이라니.
분명 귀족들에게 어리둥절한 상황이기는 했으나 감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의제와 안건을 처리해야 했다. 그 뒤로 한창 마물을 처치할 수 있는 마법 인력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화제는 마물 전쟁에서의 선전을 기원하기 위해 따로 마련되었다는 사교계의 무도회에 이르렀다.
그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참석자 명단을 읊던 내무대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콘윌 공작 각하께서도 참가 의사를 피력하셨습니다.”
콘윌 공작은 몇 년이 넘도록 공작 저택에 틀어박혀 있어, 콘윌 가문의 모든 일을 대리인이 처리하는 형국이었다.
“진실인가?”
“예, 분명히 무도회에 참석하시겠다고…….”
가히 오랜만에 들려오는 이름에 분위기가 술렁거리자, 아나이스 공작도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눈썹을 치켜떴다.
“콘윌 공작?”
“예, 각하.”
내내 두문불출하던 사내가 움직였다는 것은 분명 호기심이 동할 만한 요소였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의 눈빛에 떠오른 일말의 호기심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렇군.”
아나이스 공작에게 콘윌 가문의 생사 여부 따위는 하등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순간, 공작의 시선과 카시언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카시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깃펜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묘한 태도를 빤히 응시하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그 뒤로도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테이블에 자리한 귀족과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예. 각하. 다음 안건은 무도회의 드레스 코드에 관한 것인데…….”
내내 긴장감이 감돌던 회의는 무도회에 관한 몇 가지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을 향해 깊이 묵례했고, 아나이스 공작은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나 둘 중 그 누구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쓴 목도리를 벗지 않았다.
대단히 묘한 분위기였다.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의구심을 품은 채로 각자의 저택에 돌아갔다.
감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지만, 귀족들 대부분이 깊은 의문을 품은 채였다.
도대체 저 둘은 무슨 사이인가.
그동안 접점도 거의 없었을 테고, 마물 전쟁 시기가 되어서 처음 봤을 텐데 저런 눈빛을 주고받다니.
서로에게 살기를 풍기는 것을 보면 분명 원수 같기는 하거늘…….
저 함께 맞춘 것 같은 목도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저들은 친밀한 관계인가, 극악의 원수인가, 하는 의문이 새록새록 쌓였다.
그리고 그 가십은 카시언 그레이가 아나이스 공작의 의전 기사가 되기를 자원했다는 새로운 소식 덕분에 더욱 활활 타오르기에 이르렀다.
* * *
공작님이 황궁의 회의장에서 저택으로 귀환하기 전, 나는 오빠에게 급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무도회 날 오빠와 오래 대화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묘책을 낸 것이었다.
‘다이어리에 대해 물었으니, 무도회 날 잠깐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거야.’
요즘은 저택에 드나들 때마다 첼로의 양 날개가 꺾여 가는 형국이라, 이번 편지가 마지막일 수 있었다.
아무도 못 보게끔 급히 창밖으로 새를 떠나보낸 나는 걱정을 뒤로하고 속으로 기합을 주었다.
‘콘윌 공작이 무도회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돌고 있다지.’
나는 황궁의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버슬과 무도회용 드레스인 볼 가운을 골랐다.
시녀들은 분주한 몸짓으로 내게 이런저런 의상을 대어 주면서 무도회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전쟁 전에 치르는 무도회는 대체로 전야의 무도회라고 불린다는 이야기, 황제가 정략혼을 위해 입적했다는 황녀가 직접 무도회장 내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꼼꼼히 새겨들었다.
사실 샐리와 제니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저택의 다른 시녀들 역시 내 곁에 붙어 이것저것 도와주었다.
“아, 황녀 전하와 공작 각하의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열심히 쫑알대는 것이 귀엽기도 했다.
연두색 실크 원단을 매만지던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무슨 이야기요?”
“두 분이 정략혼을 한다는 소식도 있…….”
흰자위가 보이도록 눈을 크게 뜬 샐리가 시녀의 옆구리를 팍 꼬집었다.
“아, 아얏! 왜 꼬집는데!”
시녀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니가 무두질하던 방망이를 들고 음산하게 말하는 게 먼저였다.
“즈은 믈르 흘 뜨 느그르.”
“좋은 말 할 때 나가라고? 뭐야? 왜……!”
눈치 없는 수인 시녀 하나가 쫓겨날 때까지 나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한 표정을 고수했다.
공연히 주변에 있던 샐리와 제니가 내 눈치를 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만 생각했다.
‘……정략혼은 없던 일인데. 황녀도 그리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어쨌거나 그녀의 배경에 관해 조사는 해 두어야 해.’
곁다리로 있던 이야기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황녀는 결국 공작님과 결혼하지는 못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 황녀가 공작님을 좋아했던가? 결국 어떻게 되었었지?’
드레스를 고르는 동안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체스판을 짜듯 복수 계획을 세우는데,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스텔.”
나는 불쑥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이었다.
공작님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문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밝게 말했다.
“아, 오셨어요?”
내 주변에서 재잘거리며 옷을 골라 주던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안락의자에 앉으며 그를 향해 환히 웃었다.
“아직 겨울의 초입 같은데, 꼭 연말 분위기예요, 그렇죠?”
내 맞은편의 안락의자에 앉은 공작님 또한 가볍게 대꾸했다.
“네, 저택도 연말 분위기더군요.”
“아, 네! 그…… 런데, 왜 목도리를 계속 하고 계시는지…….”
실내인데……, 라는 다음 말은 알아서 생략하기로 했다.
“좋아서요.”
공작님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말은 좋다고 했는데, 낯선 감정이 섞여 있는 듯했다.
샅샅이 살펴보니 묘하게 파르스름한 질투심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착각인가? 표정이 뭔가 묘한데.’
다소 의아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특별한 목도리를…… 모든 저택 사람들이 다 하고 있더군요.”
“아, 맞아요! 그런데 그 목도리들 말이에요.”
“……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다 비슷한데, 공작님 거는 처음 만든 거라 조금 달라요.”
공작님이 긴장이라도 하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말도 아닌데 머쓱해진 나는 살짝 홧홧해진 뒷덜미를 문질렀다.
“사실 목도리 안쪽에 새긴 금실은 공작님 거에만 있어요.”
“……네?”
“그 실, 비싼 거예요. 열심히 구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을 뿐인데, 무표정했던 공작님의 얼굴에 조금씩 활력이 생기는 게 보였다.
역시 사람들은 특별함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속으로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이건……. 정말 특별한 목도리가 맞군요.”
“아, 네!”
내가 환히 눈매를 휘어 웃자 그가 마주 웃어 주었다.
다행히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나는 안락의자 옆에 있는 벽난로에 손을 가져다 대며 볕을 쬐는 척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황녀의 동향을 물었다.
“그…… 이번 무도회는 황녀 전하와 관계가 있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여러모로 미지의 인물인 황녀는 내 복수에 뜻밖의 변수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아직까지 그녀는 큰 장애물이 못 되었고, 내가 아는 정보로도 뷔에트리 백작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황녀가 콘윌 공작가 방계 가문의 막내딸이라는 풍문이 돌기도 했으므로 쉬이 안심할 수는 없었다.
황녀에 대해서, 그녀와 내 각인자인 아나이스 공작님 간의 관계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 황녀 전하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작님은 성가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왜 저런 표정이지? 아직 아무 말도 안 드렸는데.’
내 앞에서는 거의 짓지 않는 저 표정만 보아도 황녀와의 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황녀 전하는 어떤 분이에요? 듣기로는 공작님과 정략혼 이야기도 돈다고…….”
“정략혼은…….”
권태롭게 중얼거리던 속삭임이 딱 멎고, 공작님의 표정이 돌연 바뀌었다. 그가 묘한 기대감이 깃든 눈빛을 한 채 내 눈동자를 갑작스레 빤히 응시해 왔다.
‘갑자기 왜 저렇게 웃고 계시지?’
왜 그렇게 웃고 있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오싹할 정도로 환한 낯이었다.
“혹시…….”
“네?”
그가 기대감이 반쯤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녀가 신경 쓰입니까?”
당연히 신경 쓰였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네, 신경 쓰여요.”
내 즉답에 그가 찬란하게 미소 지었다.
‘왜 황녀가 신경 쓰인다는데 공작님이 저렇게 웃으시지?’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무도회에서 마주칠 텐데 어떤 분인지 궁금하니까요. 공작님이라면 잘 아실 것 같아서…….”
맞은편 안락의자에 등을 기댔던 그가 가만히 상체를 숙였다. 그러더니 내 낯을 샅샅이 살피면서 반쯤 허탈하게 웃었다.
“아스텔은…….”
성큼 앞으로 다가온 그가 한쪽 입꼬리를 재차 올렸다. 그러면서 내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위기감이 없네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의 입김이 닿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단 사실을 몇 초 뒤에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파들거릴 정도로 긴장한 것이다.
나는 무릎에 올린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며 한결 침착해진 투로 속삭였다.
“황녀 전하에 대해 궁금할 뿐, 딱히 위기감을 가질 이유가 없으…….”
……니까요, 라고 말하려다 일순 숨을 참았다.
그의 입술이 순간 내 볼까지 타고 내려온 탓이었다. 각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아마 여기에서 멈추려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공작님은 언제나 내게 순순히 밀려나고는 하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멈추고 싶지 않았다. 각인과 관계없이 심장이 자꾸만 뛰고 손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짙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음을 느낀 순간, 그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촉촉한 입술이 홍조 어린 뺨을 스치듯 와 닿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솜털이 삐죽삐죽 서는 듯한 느낌. 모든 감각이 그와 맞닿는 뺨에 극도로 치중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숨까지 참아 가며 긴장한 상태인 나와 달리, 그는 여유롭게 내 코끝에 제 입술을 다시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황녀 때문에 괜히 힘을 쓰는 건 싫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리깐 눈을 뜨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지금 정확히 무슨 말을 하냐고 물을 생각이었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급하게 각도를 잘못 맞춘 게 실수였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탓에 입술의 끝과 끝이 맞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겨우 멈춰 섰다.
그가 낮게 웃더니,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멍하게 굳어 있던 나는 그가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끓는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스텔, 도발이 지나칩니다. 그리고…….”
그를 도발한 게 아니라고 반박할 틈도 없었다. 입술 끝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채로, 그가 내 턱을 가만히 잡아채며 살짝 내리더니 재차 이마에 입 맞췄다.
평소 부드러웠던 태도와는 달리 거칠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황녀든 뭐든 당신이 궁금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야생의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태도와는 달리 마치 마법을 거는 것처럼 사람을 홀리는 다정한 어투였다. 그 말에 불현듯 안심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와 황녀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꾸 공작님의 손을 잡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
연애 경험이 없는 나라도 이게 일반적으로 어떤 증상인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반려의 각인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성으로 내리누를 새도 없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질투해 줬으면 좋겠지만. 우리 사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니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정작 나는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로맨틱한 분위기에 홀린 채로,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이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공작님이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건 황녀가 아니라 쓸모없는-”
“……?”
“-귀한 것을 귀하게 대할 줄 모르는, 기사 하나뿐입니다.”
로맨틱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깨졌다.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단번에 현실로 돌아왔다.
‘감정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야, 아스텔!’
아직은 나의 감정을 확실히 돌이켜볼 자신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에게 솔직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는 내가 뷔에트리 백작가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되니까.
그러니까 제일 먼저 할 일은…….
흑막을 잡아 가문의 누명을 풀고, 아스텔 뷔에트리로 당당하고 화려하게 귀환하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설 수 있다.
그때쯤이면 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볼 자격이 생길 것이다.
나는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려던 마음을 재차 다잡았다.
‘콘윌 공작이 흑막이라면, 그자부터 잡고 당당하게 말하자. 카시언은 우리 오빠라고!’
처음 공작성에 들어섰을 때, 흑막의 정체가 가물가물할 때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반드시 복수하고 살아남을 거란 확신이 어쩌면 나의 만용일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서서히 복수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에게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전에 미리 언질을 주긴 해야 할 텐데. 지금 공작님은 내게 호의적이니까 잘 말해 보면 괜찮지 않을까?
“저…… 할 말이 있는데요!”
나는 여전히 내 얼굴 가까이에 있는 공작님의 얼굴을 콱 부여잡았다.
‘허, 헉. 얼굴은 왜 잡았지.’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공작님 역시 내내 수줍어 보이던 내가 덜컥 제 얼굴을 잡아 올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내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공작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떤…….”
여전히 의아한 낯빛이었지만 그는 잠자코 나를 기다렸다. 그뿐이 아니라 더욱 단단히 잡으라는 건지, 그의 뺨을 움켜쥔 내 양손을 자신의 손으로 꼭 둘러 감싸기까지 했다.
“제가 어떤 걸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아스텔.”
“카시언에 대해서 나쁜 말 하지 말고.”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입을 살짝 벌려 커다랗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나와 올곧게 맞닿도록, 내 진심이 가닿도록.
“가만히 기다려요. 그러면 전부 다 말해 줄게요. 제 친…… 구인 카시언 그레이와 어떤 사소한, 일들이 있었는지를요.”
조금 떠는 듯한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는 눈매를 휘어 웃었다. 싸늘했던 얼굴에 놀랍도록 온순한 표정이 얹혔다.
“네, 아스텔 앞에서는 절대로 그에 대해 나쁜 말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쉬웠었나……?
“아스텔이 그러지 말라고 하면 안 하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기이할 정도로 순순했다. 설마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그의 뺨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을 때였다.
그가 간지러운 건지 묘하게 웃으며 나를 응시해 왔다.
그 순간.
‘제 이름, 기억해 주세요.’
‘기억할게.’
‘다시 찾아와 달라고 해 주세요. 그렇게만 말해 주면, 다시 찾아갈게요.’
익숙한 환청이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이 순간에 집중하려 애썼다. 지금은 그 아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작님의 약속을 받아 내는 편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약속한 거예요.”
“네, 가문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시원시원한 태도에 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스텔이 제게 가장 특별한 선물을 주었으니까요.”
어딘지 수상쩍기는 한 표정이지만 그를 믿어 봐야지. 지금까지 공작님은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따스했다.
* * *
같은 시각, 수도의 유명 생선 가게 안.
아스텔의 계략대로 신수, 미미는 오래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의 동물 첩보원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수도에서는 갓 상경한 시골 쥐, 집고양이, 도시 쥐 등이 미미의 수족이 되어 열심히 활동 중이었다.
어깨를 한껏 치켜올린 거만한 표정으로, 미미가 고양이 발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듣거라. 이 몸을 더욱 돋보이게 할 만한 인간을 간택하려 한다.”
“돋보이게 할 만한 인간이요?”
“그래. 이 몸은 신수이니, 이 몸과 어울릴 만한 녀석을 동반자로 꼽을 생각이로다.”
미미의 말에 그의 앞에 모인 첩보원들이 앞다투어 제가 선별한 후보자들을 천거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뒷골목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주워들어서 웬만한 사교계의 소식은 다 알고 있었다.
“콘윌 공작이라는 놈이 꽤 똑똑하더군요! 미미님!”
“카시언 그레이는요? 수도의 꽃이라는데요!”
“흠, 요즘 수도에서 가장 떠들썩한 아나이스 공작은 어떻습니까?”
귀 따가운 목소리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미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일갈했다.
“다른 건 다 됐는데……. 아나이스 공작? 그 할배 말이냐? 그 할배는 또 뭐야?”
“아뇨, 할아버지 아니지 않나요? 몇여 년 전쯤에 바뀐 거로 아는데. 시일은 가물가물하지만……. 꽤 미남이랍니다. 이걸 보세요!”
검은 고양이가 찢어진 가십지를 들고 와서 속닥거렸다.
가십지를 바라보던 미미가 눈을 부릅떴다.
“여기 초상화도 있어요!”
“허어.”
미미의 눈이 커다래졌다. 검은 고양이에게서 건네받은 가십지가 고양이 발치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나이스 공작에게 후견인이 있다, 라. 이름은 아스텔이고…….”
미미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샛노란 동공 속 검은 자위가 커다래졌다.
“왜 그리 유령이라도 보신 표정이셔요?”
“뭐야? 그 둘이 어떻게 같이 있지?”
미미는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벽에 스크래치를 냈다.
그러자 공포에 질린 쥐가 놀라 찍 소리를 내며 급히 조그마한 발을 물렀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신수님!”
“흥! 저리 가, 멍청한 쥐 새끼 녀석!”
쥐를 향해 한번 하악질한 미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찾아가 봐야겠다.
이 아스텔 녀석, 자신에 대해선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분명 놀려 주기 딱일 터다. 제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도 신수인 자신 앞에서는 말 앞의 당근일 뿐이니.
‘냉큼 찾아가서 놀라게 해 줘야겠어. 아주 일이 재밌어지겠군, 그래!’
크흐흐, 하고 웃은 미미가 생선을 한 점 뜯어 먹었다. 역시 생선 가게는 천국과 다름없었다. 바싹 구운 임연수 구이는 오늘도 몹시 맛이 좋았다.
언제쯤 인간들을 괴롭히러 가면 좋으려나, 생각하던 미미의 앞에 검은 고양이가 발을 턱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런데 저 아스텔이라는 인간은 엄청 특이해요!”
“뭐가 특이한데. 하긴, 특이하지. 이 몸을-”
말을 더 잇기도 전에 고양이가 미미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무려 부두술사들이 쓰는 그림을 사 갔다고요!”
그 소리에 길목 중앙에 찌그러져 있던 햄스터가 조그만 머리를 번뜩 치켜들더니 말을 얹었다.
“우린 다 알죠! 그 그림이 부두술 통로인 거!”
“이익…….”
설마 그 순진해 빠진 게 부두술에 관심이 있는 건가?
미미가 인상을 대놓고 찡그렸다. 조금 더 유유자적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
게다가…….
“미미 님도 부두술을 궁금해하시지 않았나요?”
“허어…….”
안 그래도 부두술이라는 사악하고 삿된 사술이 대단히 궁금하던 참이었다. 전에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아스텔은 여러모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자애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미미, 자신을 유인하려는 계책은 아니렷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여자애는 그렇게 똑똑한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지막 이별 때도 그리 울고불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때 아스텔 녀석, 눈물 콧물이 범벅이라 아주 더러워 가지고 말이야.’
미미는 늠름하게 몸을 세우며 작게 혼잣말했다.
“얼마나 컸으려나, 그 어린것들이.”
미미는 고양이 발로 가십지를 사뿐사뿐 지분거리며 흡족하게 생각했다.
‘내일쯤 몰래 등장해 놀라게 해 줘 볼까?’
두 녀석은 과거, 자신들이 신수를 마주쳤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평범한 고양이인 척할 심산이었다.
미미의 자그마한 심장이 터질듯이 부풀었다.
“좋아. 일이 참으로 재밌게 되었다.”
계획을 전부 세워 둔 미미는 씩 웃으며 제 앞에 부복한 햄스터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콕 눌렀다.
이것은 이 뒷골목의 폭군, 신수 미미의 기분이 좋다는 신호였다.
“아, 조만간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는데요!”
“뭐? 무도회?”
미미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네! 그곳에 가면 신수님의 반려 인간이 될 후보들을 고르실 수 있지 않을까요?”
“호오…….”
간신배답게 고개를 숙인 쥐가 속살거렸다.
“아주 화려하답니다, 글쎄!”
오랜만에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연달아 생기고 있었다.
아스텔의 등장에 이어 황궁 무도회가 화려하게 열린다니!
호기심 많은 신수 미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궁 무도회라면 온갖 인간들이 참여하게 되겠지.
이 가십지를 보아하니 그곳에 아스텔도 있을 거고 그 어린것도 있을 터.
그 어린것이 아나이스 공작이 되었다니.
반드시 그곳에 잠입해서 인간들을 잔뜩 가지고 놀아 주리라.
미미의 음흉한 꼬리가 생선가게의 벽돌을 쓱 문질렀다.
그것은 아주 자그마한 꼬리 짓이었으나 제국 전체에 파란을 예고하는 움직임이었다.
* * *
며칠이 빠르게 흘렀다.
나와 약속한 이후 공작님은 정말로 오빠에 대한 폭언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룬을 불러 셋이 함께 즐거운 식사도 하고, 저택 내에서 퍼즐을 맞추기도 하는 등 평온한 일상을 영위했다.
특히 공작님은 내 말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샐리가 가져온 가십지의 내용을 보고도 으르렁대지 않았다.
[카시언 그레이와 아나이스 공작, 일촉즉발 위험한 사이? 그들은 도대체 무슨 관계?]
……심지어 그 가십지는 우리 오빠와 공작님을 엮는, 충격적일 정도로 어이없고 황당한 내용이었는데도 말이다.
당사자도 아닌 내가 이 오해에 양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는데!
그러나 이걸 보고도 공작님은 얌전하게 읽어 내릴 뿐 화내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가십지를 구기고 놀랐는지 조금 음산하게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보십시오, 아스텔. 절대 찢지 않았습니다.’
가십지를 꽉 쥔 공작님의 주먹이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태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 이 저질스러운 건 당장 찢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스텔이 원하니까.’
내 허락에 잡지는 순식간에 경쾌하게 파쇄되었고, 나는 다음날 그 기묘한 일간지가 폐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떤 뒤 시간을 체크했다.
‘아직 황궁으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어.’
오늘이 바로 무도회 당일이었고, 내 모든 계획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시녀들이 손수 나를 둘러싸고 준비해 둔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한 뒤, 습관적으로 드레스 안쪽의 주머니를 뒤졌다.
드레스의 속주머니에는 아티팩트 감정사인 월렛을 따로 은밀히 불러서 받아 낸 아티팩트와 영약 등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 수도로 올라온 월렛은 이 저택에 드나들 때 제법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단지 내 친구라는 이유로 받는 대접에 월렛은 상당히 고무된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났다.
‘레이디, 약속한 밀실 소환용 아티팩트입니다. 정말 이거 만드느라고 딱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네, 감사해요. 잘 쓸게요!’
……그래서인지 레이디라는 말도 곧잘 했다.
나는 화끈해진 뺨을 애써 외면하며 그에게서 자그마한 큐브를 받아 들었다.
‘조금 위험한 물건인데…… 흐음, 괜찮겠지요?’
‘저 믿으세요! 불법적인 일은 절대 안 해요!’
골똘히 궁리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보며, 나는 순진한 눈빛을 띤 채 웃어 보였다.
그 역시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내가 무슨 짓을 벌이건 자기는 죽을 일이 없다며 자기 몸에 새겨 둔 드래곤 하트를 한참 자랑했다.
그렇게 한참 떠들던 그가 떠나간 뒤, 나는 곧장 수인 시녀들을 만났다.
‘요청 주신 영약, 네파타 카타리아입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이건 왜…….’
‘아, 물약을 만드는 데에 필요해서요.’
영약으로 취급되는 ‘네파타 카타리아’는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독극물이나 위험 물질은 아니었다.
그들은 의심 없이 내게 네파타 카타리아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해서, 대략적으로 반격할 준비는 끝났어.’
나는 드레스를 양손에 꼭 쥐고 방 안에 놓인 거울 앞으로 향했다.
오늘 시녀들이 아름답게 꾸며 준 덕분에 나는 동화 속의 신데렐라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화사한 금발이 윤이 나게끔 장미 오일을 덧바르고, 더욱 풍성해 보이도록 종려나무의 섬유질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마무리로 정수리부터 뺨까지 닿는 진주 레이스를 씌워 주었다.
게다가 진주로 만든 분에 더해 생화를 곱게 빻아 만든 입술연지, 목에 건 진주 목걸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우아한 스퀘어넥 스타일의 엠파이어 드레스까지.
파스텔 톤이라 더욱 화사해 보였다.
나 같지 않은 나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결국 낮게 탄성이 일…….
“아스텔.”
……내 목소리가 아닌데, 싶어 거울을 응시하니 어느 틈에 온 건지 등 뒤로 공작님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오늘은…….”
그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린 내 앞에서, 공작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미색 반장갑을 낀 내 손을 잡은 채 손등에 입술을 맞대었다.
장갑을 사이에 둔 절제된 스킨십이었지만, 평소보다도 그의 체온이 조금 더 뜨겁게 느껴졌다.
정말 레이디를 대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잠시 백작 영애로서의 작위가 복권된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가지 말까요?”
“네?”
“아무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별로예요?”
그가 몸을 일으키며 내 머리칼에 한 번 더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그럴 리가요.”
“아…… 네! 그럼 다행이네요.”
그냥 웃고 만 나는 공작님이 입 맞춘 손을 들어 정말 레이디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갈까요, 아나이스 공작 각하?”
그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네, 레이디 아스텔.”
그때까지만 해도 꽤 재미있는 귀족 놀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귀족들을 만나러 황궁으로 들어서는 일은 상당한 절차와 시간을 요했다.
제일 먼저, 공작가의 인장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사륜마차를 타고 마이어 경까지 동행해야만 했다.
아나이스 공작 가문의 수도 저택에서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의 심처까지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만, 여러 마법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탓에 심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은신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한들 나는 들키는 그 즉시 죽게 될 역적의 딸인 신세였으니까.
하지만 곁에 있는 공작님이 내 긴장을 풀어 주려 배려 섞인 말들을 건네준 덕분에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의 중앙 홀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홀의 복도로 들어서자 여러 귀족들이 복도에 서서 부채 혹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보였다.
시끄러운 말들이 간간이 들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파티답지 않게 숙연한 분위기이기도 해서 어리둥절했다.
“분위기가 왜 이럴까요?”
“저도 궁금하군요.”
공작님은 부드럽게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러자 정적이었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지고 말았다.
“어, 음…….”
마침내 나는 이 분위기의 원인을 깨달았다.
내게 다정하신 탓에 잊고 있었으나, 이분은 마물과 인간의 머리를 벤다는 악명 높은 아나이스 공작님이시다.
그러니 그를 본 적이 얼마 없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당황하고 공포에 질릴 수 있겠지.
“전부 다 마이어 경의 학살 기록 때문일 겁니다.”
“……네?”
뜬금없이 소환된 마이어 경 이야기에 등 뒤에서 침음을 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이어 경의 억울함 섞인 신음을 묵살한 공작님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이어 경의 악명은 수도에서도 이름이 높거든요.”
……마이어 경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음…….”
“오해하지 마세요, 아스텔. 저 때문은 아닙니다. 수도의 귀족들은 제가 다정하고 상냥하다고, 모두 좋아합니다.”
그건…… 더 아닌 거 같은데…….
“그, 그렇군요. 역시 공작님이에요.”
하지만 내 밥줄이자 반려의 각인까지 된, 게다가 내 우호군이 될 수 있는 공작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고로 멋져요.”
다급히 말을 끝낸 나는 마이어 경을 포함해 복도에 선 귀족들의 낯을 급히 확인해 보았다. 나와 대화하면서 공작님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는데도 그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러다 최소한 사람 하나는 잡을 것 같은데…….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는 공작님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발랄한 척 말했다.
“이제 얼른 들어가요, 우리!”
“아, 네. 어서 가지요. 다른 이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마이어 경은 저리 좀 떼 놓고.”
“네, 네!”
일단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복도에 못 박힌 채로 선 귀족들을 지나, 나와 공작님은 마침내 무도회가 열리는 홀의 문 앞에 다다랐다. 공작님의 표현대로 ‘무서운’ 마이어 경은 우리에게서 열 걸음 이상 멀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작님조차 예상치 못한 시련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각하.”
바로 아나이스 공작의 의전 기사, 카시언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 둘을 보던 공작님이 무심한 어조로 오빠를 향해 말을 건넸다.
“회의 때 보고는 처음이군요.”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각하.”
가볍게 고갯짓한 공작님이 다시 나를 흘낏 보더니 카시언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악수.”
그리고 손을 먼저 건넸다.
“네? 제 팔 한쪽을 달라고요?”
오빠의 오판에 공작님의 관자놀이에 파르스름한 힘줄이 생겼다.
“사내답게 정정당당히 악수하자는 의미입니다.”
“갑자기 무슨…….”
공작님은 덥석 카시언의 손을 잡고 뻔뻔하게 위아래로 여러 번 흔들었다.
그러면서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아스텔, 보십시오. 이제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너무 보여 주기식인 것 같은데……?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공작님과 오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여기 나보다 더 당혹스러워 보이는 이가 있으니 바로 우리 오빠, 카시언 그레이 경이었다.
얼떨결에 악수 당한 오빠는 상당히 어리둥절하고 억울해 보였으나 침착하게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이어서 그가 신랄하게 답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상당히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각하.”
그 말에 공작님은 말없이 그를 눈만 내리깔아 보았다.
이러다가는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튈 것만 같았다.
그들의 중간에 낀 내가 손을 흔들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어, 어, 어쩌면! 두 분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 르겠네요.”
“그럼요, 아스텔.”
“허…….”
내 말에 오빠는 양손을 치켜들며 어리둥절하다는 낯을 보였다.
공작님은 한쪽 입꼬리를 스산하게 올려 미소 지은 채로 악수한 손을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 카시언에게 슬쩍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내가 자세히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아스텔이 친구가 되라고 했으니 따를 뿐입니다.”
“외람되오나 소신을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신 듯한데, 각하. 진심이십니까?”
공작님은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을 꺼내 카시언과 맞닿았던 손을 닦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속삭였다.
“그럴 리가요.”
훈훈한 분위기가 달라질까 염려되었던 나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셋이 같이 들어가요! 친하게!”
오빠는 심기 불편한 표정이었으나 다행히 공작님이라도 내 말을 잘 따라 주었다.
‘방긋방긋 웃는다’라는 수식어가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지만 오늘만큼은 내 손을 잡은 채로 방긋 웃었다.
등 뒤에서 마이어 경과 오빠의 어이없다는 듯한 탄성이 동시에 들려왔지만, 공작님은 주변 소리 따위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기사를 일별했다.
“문을 열지.”
“네, 각하!”
최강의 기사 둘에 아나이스 공작까지 모여 있던 탓일까.
존경과 경외로 다리를 덜덜 떨고 있던 문지기 기사들이 급히 공작님과 나의 입장을 천명했다.
“북부 아나이스 공작령의 아나이스 공작 각하와 공작 각하의 파트너이자 피후견인이 입장하십니다.”
그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나와 공작님이 홀의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그 뒤를 의전 기사인 카시언이 따랐다.
이내 화사한 샹들리에와 거대한 유리 동상들, 몇십억을 호가할 미술품들이 걸려 있는 홀의 중앙에 다다랐다.
입장하며 바짝 긴장한 내 앞에는 공작님과 정략혼 제안이 오가고 있다는 아름다운 황녀님이 있었다.
아름답게 웨이브 진 플라티나 은발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선하면서도 고혹적인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닌 그녀는 아름다움만으로 장내를 압도할 정도였다.
나는 턱을 치켜들어 최대한 자신만만한 척했다.
황녀는 나를 이상할 정도로 똑바로 바라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아나이스 공.”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비쳤다.
그 미소도 아름다워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런 황녀를 돌을 보듯이 보던 공작님이 무심한 낯으로 가볍게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본래대로라면 나 역시 황녀 전하께 먼저 예의를 갖춰야 하지만, 황궁 법상 평민인 나는 황녀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없는 처지였다. 곁에서 가만히 선 채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데, 황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옆쪽이 후견하고 있다는 아가씨인가요?”
공작님이 나를 보호하듯 성큼 앞으로 나서며 낮게 말했다.
“네.”
그저 단답일 뿐이었는데 왜 경고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공작님의 비틀린 미소를 보고서도 생각보다 의연하게 웃어 보였다.
저 미소에 벌벌 떨었던 나와는 다른 태연한 대처였다.
“좋아요. 다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습니다. 연회의 시작 전, 황제 폐하께서 공작과 잠시 밀담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싫습니다.”
단호한 불복종에 황녀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러나 공작님은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추후 다시 입궁해 이야기를 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례할 정도로 명백한 거부에 안절부절못하는 황녀의 낯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공작님과 잡은 손을 꼭 쥐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각하.”
예법을 차치하고 불쑥 말을 꺼낸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내 어깨로 흘러내린 진주 레이스 장식을 꼼꼼히 매만지며 대답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그는 단호했지만, 내게도 공작님이 꼭 내 곁을 비워 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공작님이 좋아할 만한 말을 고심해서 생각해 보았다.
“황제 폐하와 알현하는 대단한 공작님의 모습이 저, 정말 멋진 것 같아서……. 안 될까요?”
“그래도-”
나는 공작님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여 보았다.
“너무 멋질 텐데. 세상에나.”
나를 보던 공작님은 인상을 걱정스레 찡그리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황제 폐하를 알현한 뒤 오 분 만에 바로 오겠습니다, 아스텔.”
오 분 만에 어떻게 알현하고 온다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오빠랑 대화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그는 지금까지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던 오빠 쪽을 지그시 응시하며 호명했다.
“카시언 그레이 경.”
“……예, 각하.”
“함께 가지. 그대는 문간에 서서 나를 지켜.”
“……제가 각하를요?”
“그래.”
오빠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으나 그에게는 불복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황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입양된 입장에서 공작에게 무어라 말을 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황녀와 공작님, 오빠까지 셋이 고스란히 연회장을 떠났다.
굳이 오빠를 데려가는 것도, 황제의 부름을 오 분 만에 처리하겠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제일 이상한 건 이곳의 분위기였다.
다들 오빠와 공작님을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싸움이라도 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고, 기이한 열망을 담은 눈빛을 반짝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녀 전하와 공작 각하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일세, 그려.”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요즘 수도의 이슈는-”
“어허!”
수많은 가십거리에 노출된 채였지만, 나는 꿋꿋하게 마이어 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홀 안의 테이블에 마련된 블렌딩 와인과 더불어 간단한 치즈 살라미와 핑거 푸드 등이 보였지만 입맛이 없었다.
‘이제 슬슬 내가 하는 일과, 내 능력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야지.’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부풀었다. 이 자리의 귀족들이 모두 아닌 척하면서도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분명한 기회였다.
나는 미리 만들어 놓은 둥글고 하얀 알약을 들어 와인 잔 안에 퐁당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이어 경, 이게 뭔 줄 알아요?”
“네?”
“숙취 해소를 위한 알약이랍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숙취 해소요?”
“네. 술의 맛을 바꾸어 주지는 않지만, 와인에 타서 먹으면 다음 날 머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반쯤은 어색한, 설명하는 듯 뻣뻣한 말투였지만 다행히 나를 주목하고 있던 귀족들에게는 흥미로운 일인 모양이었다. 와인을 꿀꺽 마시는 내 귓가에, 그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을 다루는 이였나?”
“저거 혹시! 불법 마약은 아닐까요? 뭘 해소한다고 했죠?”
“방금 죽음에서 해방된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아니거든요!
나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볼 뻔 했다. 나는 침착을 가장하며 와인을 재차 한 모금씩 마셨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와인을 마시며 마이어 경을 바라보고 있자, 귀족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공작 각하께서 저 능력을 보고 후견하신 걸까요?”
“그렇다면…… 혹시 마약 제조의 천재인가?”
내 후견인인 공작님의 이미지 탓인지 조금 이상한 쪽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 계획에 따르면 일단 이 자리에서는 내가 ‘약을 다룬다’라는 사실 정도만 알려지면 충분했다.
‘그보다 슬슬 콘윌 공작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오 분 만에 공작님이 돌아온다고 하셨으니, 최대한 빨리 콘윌 공작과 마주쳐 그의 꿍꿍이를 알아내고 싶었다. 다행히 콘윌 공작은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이내 눈앞에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얼마나 오래 씻지 않은 건지 머리는 잔뜩 떡 져 있었고 대충 꿰어 입은 듯 보이는 십 년 전 유행하던 스타일의 낡은 제복에는 비듬이 올라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이쪽으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주최한 연회에 저런 몰골로 나타날 수 있는 귀족이 얼마나 될까. 마이어 경이 난감한 표정으로 내게 낮게 속삭였다.
“……콘윌 가문의 공작 각하이십니다. 십여 년 전부터 저리 되어…….”
“네, 그분이시군요.”
마침내 이 자리의 대어인 콘윌 공작이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눈치가 부족한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와인 냄새가 푹푹 풍기는 모습을 하고 그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이름이.”
희게 센 머리와 인간의 것이 아닌 인형 눈알을 박아 넣은 듯한 새까만 눈동자를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흐흐, 흐흐흐…….”
그는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이는, 광기 어린 표정을 하고 잇새로 중얼거렸다. 모든 귀족들이 숨을 멈출 만큼 소름끼치는 쇳소리에도 나는 그를 침착하게 응시했다.
저건 가짜 광기처럼 보이고, 나 당신 별로 안 무서워.
진짜 무서운 건, 우리 가족들이 전부 다 목이 잘려 죽고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상황이거든.
“아스텔입니다, 각하.”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답했다.
“무슨 일이시지요?”
그가 나를 위협하듯 그르렁댔다. 그러나 그의 위협은 내게 닿지 못했다. 마이어 경이 눈매를 부릅뜬 채로 콘윌 공작의 앞을 막아선 덕분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레이디 아스텔은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직접 데려오신 레이디이십니다. 레이디와의 대면에 있어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 미리 허가는 구하셨는지요.”
“헛소리!”
콘윌 공작이 손을 뻗어 마이어 경을 밀쳤다. 워낙 단단히 서 있어 조금도 밀리지 않았기에 헛수고였지만 말이다.
“그냥 두세요.”
공작은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순진해 보이는 낯을 빤히 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 내놔.”
나는 몸을 움츠린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는 내가 잔뜩 겁먹은 줄 알고 비틀거리는 손으로 마이어 경의 팔을 움켜잡았다.
“내 그림.”
그날 살롱에서의 사건 이후로 세간에서는 나를 향해 고상하고 공포스러운 레이디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소문과 달리 나는 딱 봐도 부두술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데다 평범하게 어리고 순하게 생긴 외모였다. 그러니 콘윌 공작의 입장에서는 쉽게 겁박할 수 있을 터.
그의 형형한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심히 겁을 주면 내가 소심하게 움츠러들고 가진 걸 내줄 줄 아는 듯한 눈치였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기죽지 않은 나를 보며 그는 온화한 척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살롱에서 훔친 그 그림, 본디 나의 것이니 내놓으라고 했다.”
그 그림은《해변》을 의미하겠지. 《해변》을 다급히 찾는 자가 부두술에 깊게 관련된 최종 흑막일 가능성이 높다는 내 가설에 따르면, 현재 콘윌 공작의 태도는 상당히 수상한 감이 있었다.
‘이렇게나 대놓고 말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야.’
하긴, 뒤늦게 그 그림이 부두술의 매개가 될 것을 알고 분개했겠지.
공작 저택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에 두었으니 콘윌 공작이 감히 접근할 수 있었을 리 없다. 당장 부두술을 쓰고 싶은 입장에서는 애가 닳았을 수도 있을 터.
나는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콘윌 공작으로 수사망을 좁힌 이상, 맛있는 미끼로 그를 적당히 도발할 필요가 있었다. 하도 연기를 해서인지 연기력이 한결 늘어난 나는 순진한 척, 자연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그림을 훔치지 않았어요. 제값을 지불해서 샀습니다만…….”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른 뒤 그를 향해 발랄하게 말했다.
“아쉽게도 잃어버렸어요. 도둑이 들어 훔쳐 갔더라고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아나이스 공작 저택에 숨어들 간 큰 도둑도 없을뿐더러, 《해변》은 저택 깊숙이 고이 잠들어 계시니까.
그는 내가 잔뜩 겁먹은 표정을 한 것을 보고 비웃듯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감히 잃어버렸다고? 그 귀한 것을?”
나를 겁주기 위해 직접 이 자리까지 찾아온 그가 이내 광인 같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아나이스 공작과는 전혀 다른 태도인 콘윌을 보며 사람들은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간이 크구나. 두고 보자꾸나, 아가.”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수긍하듯 말했다.
“네.”
나를 빤히 노려보던 콘윌 공작은 여전히 시취가 나는 걸인 같은 모습으로 비척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의 귀족답지 않은 모습에 자리한 귀족들은 전부 인상을 찌푸렸으나 황제도 없는 무도회에서 별말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콘윌 공작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내 태도에 마이어 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레이디 아스텔, 괜찮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보다 잠깐 파우더 룸에 들르고 싶은데요.”
비로소 콘윌 공작을 만났고, 그가 의심스럽다는 확신을 얻었으니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 * *
마이어 경의 엄호하에 황궁 내 일인용 파우더 룸에 들어선 나는 월렛이 건네주었던 밀실 소환용 큐브 아티팩트를 움켜쥐었다.
그가 건네준 아티팩트를 통해 작은 밀실을 만들면, 딱 한 번 내가 원하는 대로 카시언을 소환할 수 있었다.
몇 초가 흐른 뒤, 갑작스럽게 사면이 새하얘지더니 밀실로 변했다. 동시에 소환된 카시언이 나를 보면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분명 나는 다른 데에 있었…….”
“몇 가지 조건이 있었어. 오래 못 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암만 월렛이 천재라지만 황궁의 이중 마법 보안을 오래 뚫을 수는 없었다. 랩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내가 카시언을 찾은 이유를 말할 차례였다.
내가 굳이 카시언을 만났어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피의 복수》는 카시언을 희망 고문하는 소설이었으며, 그는 몇몇을 처단하며 복수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갔다.
‘독자들끼리 최종 배후가 숨겨 둔 치부책과,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증거가 있을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는 했었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누명을 풀 열쇠가 숨겨져 있을 가장 유력한 장소는 흑막의 저택이지 않을까.
‘콘윌 공작은 제 저택에 애착이 강하고,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으니까.’
최종 흑막의 치부책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의 저택을 수색하는 것뿐.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 콘윌 저택을 수색할 수 있는 건 유일하게 믿을 만한 존재인 카시언뿐이었다.
“콘윌 공작가가 수상해. 그러니까 내가 말한 적합한 때에 그곳에 잠입해.”
카시언은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콘윌 공작이 수상하다는 사실 정도는 감지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공작가에 잠입하려는 시도는 해 봤지만, 콘윌 공작 저택은 콘윌 공작과 생사를 함께 하고 있어서 불가능해.”
수도의 콘윌 저택은 평범한 다른 저택들과는 달랐다. 콘윌 공작은 제 저택에 온갖 장치를 해 두었는데, 세간의 말로는 괴짜인 콘윌 공작이 저택에 상당한 애착을 지니고 있어 그 저택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게끔 개조했다고 들었다.
나는 밀실 안을 다시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월렛이 만들어 낸 마법의 효과가 조금씩 떨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세히 말할 시간 없고, 콘윌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내가 할게. 첼로를 통해서 적합한 시간을 알려 줄 테니 그때 저택을 수색해.”
와, 나 방금 진짜 카리스마 있었다. 속으로 자화자찬한 나는 오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그게 무슨…….”
카시언은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무언가 더 하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빤히 보면서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나 믿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오빠는 내가 어리다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그 어떤 복수극의 방법도 공유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둘이 서로 머리를 맞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세상천지 믿을 만한 사람은 가족인 둘뿐이니까.
“전부 내 의도대로 되고 있는 상황이야. 내가 이 판을 만든 거고.”
겉보기에는 약해 보이고, 어린 시절의 별명은 울보 같은 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나는 언제나 복수에,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에 진심이었다.
“이 햄스터 같은 조그만 게…….”
그런 나를 보며 오빠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쩌저적, 하며 밀실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은신용 미니 아티팩트는 고대 마법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황궁에서 그리 오랜 시간 동안 기능하지 못했다.
“내 말 명심해.”
그 말을 끝으로 아티팩트의 마법은 완전히 깨졌고, 카시언은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나 역시 다시 황궁 내의 일인용 파우더 룸에 혼자 서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파우더 룸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미야옹.”
……바닥에서, 신수의 상징인 달 문양이 등에 그려진 고양이를 마주치고 말았다.
까만 털과 샛노란 눈까지 확인해 보니, 확신컨대 눈앞의 고양이는 신수 미미였다.
‘뭐야, 미미가 왜 황궁에 있지. 그것도 이 파우더 룸에?’
마치 나를 찾아 여기까지 오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근미래에 미미를 마주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황궁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먕.”
미미는 내 드레스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평범한 고양이인 척하는 걸 보면, 나를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걸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미미와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미를 바라보았다.
“안녕?”
아주 운이 좋게도, 지금의 미미는 어떻게든 내게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반가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코로 킁킁거렸다. 내 주변에서 떠나지를 못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절로 흡족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고양이의 머리 쪽으로 쭉 뻗어 내렸다. 그러자 미미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냥?”
머리를 떼려던 미미는 급하게 다시 내 손에 머리를 붙였다.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고양이가 내게 달라붙어 왔다.
“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어서 와.”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미미의 잘 그루밍된 등짝을 매만져 주었다.
“냥?”
미미는 취한 눈을 깜빡거리며 내 품에 동그란 얼굴을 슬그머니 묻었다. 이 순진한 신수는 아직까지 나의 흉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카시언이라면 분명 미미를 완벽히 사로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겠지만 나는 좀 달랐다.
“나, 향기 좋지?”
“끼이잉!”
수인 시녀들이 준비해 주었던 ‘네피타 카타리아’의 또 다른 이름은 캣닢.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이야기지만, 이 캣닢은 고양이를 유혹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캣닢 향에 고양이가 좋아하는 올리브를 더해, 무해한 특제 향을 제작했다. 수인들의 특성을 잘 알고 물약을 만들 줄 알았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말을 미주알고주알 전달할 필요는 없는 법이지.
“내가 특별히 만들어 낸 거거든.”
나는 파우더 룸의 의자에 앉은 채로 소매 안 쪽에 넣어 두었던 올리브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향기에 취해 분홍색 혀를 쏙 내밀고 눈이 풀려 있던 미미가 조그마한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 뭔 짓을 한 거냐!”
아니, 정신을 완전히 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미미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도대체 뭔데 이 몸을 사로잡은 거란…….”
“너어, 말할 줄 아는 고양이네. 이름은 미미.”
미미가 솜방망이 같은 손을 들고 제 입을 턱 막았다.
“어, 어떻게 그런……. 혹시 날 뒷조사? 아니면, 날 기억……?”
“후후.”
“아니 이 녀석, 혹시 날 유인한 건가……? 너 예전이랑 다르게 아주 교활해졌구나!”
미미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내 무릎 위로 올라타 제 얼굴을 쏙 묻고 말을 멈췄다.
‘다른 건,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 파우더 룸은 위험해.’
“나랑 계속 같이 있으면 이 냄새 맨날 맡을 수 있다?”
“크, 킁!”
나는 씩 웃으며 내 무릎에 찰싹 붙은 미미의 등허리를 매만졌다. 적당히 꼬셔진 것 같으니, 이제 보안이 유지되는 공작 저택으로 데려가야만 한다. 계획을 설명하면서 완벽히 꼬드긴 다음, 내 복수극에 빼도 박도 못 하게 참여시킬 차례다.
“자아, 할 말이 있는데. 들어 봐?”
“뭔데!”
월렛이 준 동그란 볼 아티팩트 속에 미미를 잠시 봉인해 두고 저택으로 데려갈 계획을 떠올린 나는 흐뭇하게 속살거렸다.
“너어, 나랑 같이 돈까스 먹으러 갈…….”
그러나 미처 볼 아티팩트를 꺼내기도 전에, 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
“……아스텔?”
혹시 콘윌 놈인가 싶어 놀란 눈을 홉떴는데, 노크도 없이 문을 연 사람은 뜻밖에도 아나이스 공작님이었다. 그가 내게 가까이 오자, 차가운 겨울 바람 냄새가 코 끝에 훅 와 닿았다.
“약속대로 오 분 만에 돌아왔는데 아스텔이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공작님이 내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한데 마이어 경도, 카시언 그레이도 없고, 당신도 사라졌다기에.”
“……?”
“하마터면 이 무도회장이, 사라질 뻔했습니다.”
과장이겠지, 싶었지만 표정이 워낙 스산했다. 내 무릎에 폴싹 앉은 미미가 몸을 움찔거리며 떨 정도였다. 걱정 가득한 그의 표정에 비해 너무나도 멀쩡한 내 모습에 멋쩍어져서 미미만 몇 번 쓰다듬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진짜로 약속 지키셨네요.”
그가 부드럽게 표정을 풀며 나를 보다가 멈칫했다.
“저건…….”
그제서야 내 무릎에 올라 있는 미미를 본 모양이었다. 나는 꼬물거리는 미미를 품에 그러안으며 말했다.
“저어, 고양이를 주웠어요.”
내 품에 꼭 안긴 미미를 무서운 시선으로 내려다본 공작님이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흉악한 신…….”
“……?”
“……신기, 한 고양이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 돌아다니다 온 건지 모르니 당장 내쳐야 합니다.”
미미의 정체를 모른다면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라 따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주특기를 발휘해 줄 때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최대한 무해한 얼굴을 하곤 눈을 반짝였다.
“너무 불쌍한 고양이예요. 혼자 산책로를 돌아다니더라고요. 저택에 데려가고 싶은데, 안 될까요?”
내 반짝이는 눈빛을 받은 공작님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나는 쐐기를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데려가고 싶어요. 심심하기도 하고.”
“우선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가 미미의 목을 한 번 매만지며 시전어를 속삭였다. 지금까지 내내 캣닢향에 취해 반쯤 헤롱거리던 미미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크으으…… 어라? 너?”
마침내 공작님을 완전히 인식한 미미의 유연한 몸이 경직되었다. 그때 공작님이 미미를 응시하며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 저었다.
“에엥?”
그가 벙찐 미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경고했다.
“조용히.”
“끼잉……!”
공작님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낑낑대는 미미를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그의 턱에 힘줄이 서 있었다.
“상당히 위험한 맹수로 확인됩니다.”
공작님의 눈매가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내가 미미를 위한 반론을 할 새도 없이, 그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미미를 감쌌던 내 손등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리고 정확히 미미를 쓰다듬었던 위치에 입을 맞췄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득한 눈빛을 한 그가 나를 도발적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텔, 저는 제 영역을 지키는 데에 예민합니다.”
나는 내 손목께에 닿은 그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각인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계속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생각보다 공작님의 태도가 강경했기에 다른 방책을 내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것도 잠시 그가 먼저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니 저 고양이를 저택으로 데려온다면 중성화를 시켜야겠습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지 않으며 영역과 중성화가 무슨 관계인지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상냥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놈은 수컷이거든요.”
눈을 끔뻑거리던 미미가 이내 심장을 부여잡고 테이블 위로 널브러졌다. 그러나 공작님은 미미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 *
신수 미미는 매우 시무룩해 보였지만 일단은 잘 포획했고, 콘윌 공작의 이상 상태도 파악했으며, 오빠와도 만났다.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룬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꼬박 보냈다.
‘미미의 중성화 수술 계획이 한 달 뒤로 잡혔으니 그 전에 빨리 복수를 해야겠다.’
무사히 공작 저택에 들어선 미미는 턱을 치켜세우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단, 공작님이 내 곁에 없을 때만.
“너, 왜 식사 시간엔 사라졌었어? 공작님이랑 같이 식사-”
“절대 저 공작 녀석에게 땅콩 수확 당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공작님이 무섭구나…….”
화가 난 미미가 급하게 뒷발질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흥!”
콘윌 공작에게 승부수를 띄웠으니 미미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게다가 미미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과거 기억에 관해 슬그머니 운도 띄워야 하니 한시가 바빴다.
“할 말이 있어, 미미야.”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인간아! 날 아는 것 같은데, 왜 속 시원하게 말을 못 하는 거냐?”
나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응, 나는 널 알아.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쳇……. 단순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미미를 응시했다. 미미는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더니 발의 젤리를 그루밍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미미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눈치 빠른 미미가 피, 소리를 냈다.
“보아하니 새까만 마음을 가진 괴물에게 제대로 낚였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르면 네가 직접 알아내야지. 에휴……. 저 괴물 공작도 좀 불쌍하네…….”
정황상 ‘새까만 마음을 가진 괴물’은 공작님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도통 미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공작님을 알고 있어?”
사실 공작님의 악명은 유명하기 때문에 미미가 공작님에 관해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미 말을 들어 보면, 공작님과 친밀한 관계였던 것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의아한 낯으로 미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몰라, 난 말 못 해! 그러면 신수 자격 박탈이라고!”
“공작님과의 관계를 물었을 뿐인데 신수 자격 박탈이라니?”
나를 빤히 보던 미미가 황급히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너는 네 기억의 공백이 궁금한 거지? 그런데 말이야, 모든 건 네가 알아서 알아내야 된다.”
“너는 그럼, 아무것도 말 못 해 줘?”
확실히 김이 샜다.
마치 금제라도 걸린 것처럼 호다닥 입을 다물어 버린 미미 때문에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아스텔이 아니지.
나는 뚝심 있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어떻게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데?”
“……네 정신을 강력하게 공격할 무언가가 있어야 돼. 난 여기까지밖에 말 못 해.”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문 미미를 보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 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하기로 했다.
“……그래, 고마워. 조만간 또 얘기하자. 그보다 오늘 널 부른 건 말이야, 미미.”
“응?”
“오직 너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어서야.”
미미가 놀란 고양이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미미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목을 코앞에 대고 슬쩍 흔들어 달콤한 캣닢 향을 맡게 해 주는 건 덤이었다.
“……흐음, 이 위대한 몸이 대단하기는 한데?”
내 의도대로 캣닢 향에 홀린 미미가 분홍색 혀를 쏙 내밀었다.
“응, 대단하니까 몰래 숨어 있기, 잘하지? 지금부터 그거 연습할까? 이번에 연습만 잘하면 이 향수 너한테 다 줄게.”
올리브와 캣닢에 푹 빠진 듯한 미미의 커다란 두 눈이 사정없이 반짝거렸다.
“그, 그러지! 절대로 네가 좋아서 도와주는 건 아니니까!”
좋았어, 아주 홀라당 넘어왔다.
미미를 마주 보고 활짝 웃는 순간, 손목이 시큰거렸다. 나는 따끔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세모 모양이, 은신술의 마법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콘윌 공작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는 것 같네.’
내가 의도한 대로 콘윌 공작이 나에 관해 알아보고, 조금씩 내 정체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은신 마법이 풀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세운 ‘콘윌 공작, 산 채로 잡아라’ 계획을 조금 더 빠르게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너 표정이 아주 음흉하다.”
“삼중 트랩을 칠 건데, 이 정도로는 계획적이고 음흉해야지.”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침묵하던 미미가 이내 신수답지 않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어린 시절의 기억에 따르면, 저건 아주 마음에 든다는 표시였다.
나는 콘월 공작을 사로잡기 위한 세 가지 함정을 떠올리며, 미미와 함께 키들거렸다.
첫 번째 함정, 내 사업에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해 온 은여우 가문의 가주, 시테르와 은밀히 접촉하기!
일찍이 초대장을 보낸 덕분에, 나는 공작가 수도 저택의 응접실에 은여우 가문의 가주를 초대할 수 있었다.
룬을 시녀들에게 잠시 맡기고 미미를 방 안의 자그마한 바구니에 넣어 둔 나는, 가주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단둘이 접촉했다가 혹시 모를 의심을 사지 않도록, 수도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벨과 함께 들어오라고 말씀드렸더니…….
“아스텔! 나도 같이 불렀다면서!”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시테르와 벨이 나란히 손을 잡고 응접실 안으로 총총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정다운 부자의 모습에 입가에 절로 함박웃음이 맺혔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정중하게 소파를 가리켰다.
“어서 와요, 벨 님, 시테르 님. 앉으세요.”
위풍당당하게 소파에 앉은 벨이 제일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나랑 아빠는 왜 불렀어?”
벨은 통통한 양 볼을 꼬옥 움켜잡고는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둘의 관계가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개선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시테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다시피 사업을 함께 진행했으면 해서요.”
시테르는 은여우 가문의 가주답게 노련했고, 그 덕분에 사업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졌으니 나와 손을 잡는 데에 제격이었다. 내 말에 시테르의 눈빛이 돌연 진지해졌다.
“어떤 사업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우선 몇 가지로 추려 보았는데, 먼저 가주님의 사업에 관한 고견부터 듣고 싶어요.”
“사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몇 가지 중요한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인맥, 물리적 위치, 독점적 지위.”
확실히 사업에는 인맥이 필요할 것이고, 장사를 하려면 목 좋은 장소를 선별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독점적 지위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가볍게 묻자 그가 눈웃음을 사르르 치며 답했다.
“오직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 저희 가문의 경우에는 마도구 사업이 되겠군요.”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내가 약학에도 재능이 있기는 하지만, 나처럼 약물을 잘 다루는 사람은 생각보다 꽤 많았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으니 생각이 완벽하게 정리되네요.”
“네?”
“제가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시장을 하나 알아요.”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사업 계획서와 고용인 목록을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시테르가 사업 계획서를 하나둘 넘겨 보았다. 양피지가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 긴장이 되어서, 나는 벨과 눈 맞추고 씩 웃음을 지었다. 아기 같은 벨의 해맑은 표정과 도톰한 볼만 봐도 긴장감이 옅어질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며 귀를 붉히고 손을 꼼지락거리던 벨이 헤헤, 웃음 지을 때쯤 시테르가 사업 계획서에서 눈을 떼고 탄성을 질렀다.
“이건……. 언제부터 생각하신 겁니까?”
“어때요?”
지나치게 파격적이지는 않나 싶어 조심스레 물은 찰나, 시테르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며 답했다.
“제게도 완벽한 투자가 될 것 같군요.”
“그럼, 지원해 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이었는데, 시테르는 뜻밖에 부드럽게 내 말을 거절했다.
“악수 대신 눈 맞춤으로 하죠.”
굳이,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순순히 시테르와 눈을 맞추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유혹적으로 눈웃음을 쳤다.
“사실은 제가 아스텔 님을 뵙기 위해, 오늘 목을 반쯤 내놓고 온 거라.”
“……네?”
“손까지 잡으면 큰일 날 것 같네요.”
제 아버지의 옷소매를 꼬옥 쥔 벨이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랑 하자, 악수!”
통통한 벨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벨의 통통한 손을 맞잡아 악수한 나는 의문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제 행복한 생각만 하기로 했다. 시테르와의 협상은 전격 체결되었고 이제 확실한 실행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