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5. (2)
그날, 당황한 나는 델피니움 룸으로 급하게 후퇴했다. 그리고 도대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공작님이 오빠를 그럭저럭 적당히 괜찮게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이 어디 없나……?’
딱히 묘수는 없었다. 은신 마법을 해제해서 카시언 그레이가 사실 우리 오빠라는 사실을 밝히는 수단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오해를 풀려면 빨리 흑막을 처치해야 한다는 거지.’
그날, 나는 근심을 껴안고 잠들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그 뒤로도 내 생활은 아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니, 달라지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공작님은 그 순간부터 내게 각인자로서의 소유욕을 온당하게,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려의 각인’이 되면 각인 상대자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 애정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아니 이거 좀, 너무 과한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 공작님의 태도 역시 충분히 다정하기는 했지만!
‘……그래, 확실히 과해졌어.’
검술 대회의 애프터 파티를 위해 아름다운 드레스와 장신구를 준비해 주는 것은 물론, 내가 눈을 밟고 눈사람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마법사를 불러 공작성 내에 일부러 인공 눈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눈사람을 만드는 룬과 공작님을 보면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룬은 눈사람 세 개를 야외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행복하게 웃었다.
“히히, 눈사라미!”
“……그래.”
룬이 세 개의 눈사람을 고사리손으로 가리키며 삐죽 웃었다.
“압빠 눈사람, 엄마 눈사람, 아기 눈사람!”
룬이 아빠 눈사람, 이라고 가리킨 것을 쓰다듬으며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눈에 하트가 뿅뿅 담겨 있는 것도 같았다.
‘왜인지 진짜 모르겠는데 룬이 완전히 공작님한테 반해 버렸어!’
아빠, 아빠 하며 잘 따르는 걸 보니 이제 오빠는 아주 잊은 모양이었다. 오빠가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뻤다.
술래잡기한답시고 공작님의 바짓단을 꾹 잡는 룬의 광대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으니까.
보육원에만 있던 아기가 활기차게 노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공작님이 내게 섬세하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도 조금 기뻤다.
나는 공작님과 룬의 애정 폭격에 괴로우면서도 황홀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검술 대회의 애프터 파티, ‘라 보엠’의 당일이 되었다.
오늘 애프터 파티에서는 검술 대회에서 최종 승리한 기사에게 영광의 월계관을 수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회의 우승자는 당연히 마이어 경.
모두의 예상대로 그가 우승했으니 검술 대회의 화룡점정이라 불리는 레이디를 향한 충성 서약도 없을 예정이었다.
다들 조금 맥이 빠진다고도 말했지만, 나는 그밖에도 볼거리 많은 파티에 잔뜩 들떠 있었다.
‘오늘 하루는 행복하게 즐기도록 하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웃었다. 일반적인 수도 귀족들의 연회와는 달리, 북부의 무도회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곳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방향이었다. 너구리와 올빼미 수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무대 옆 공작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상석에는 4대 가신 가문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공작가의 가신들이 각자 근처에 있는 원탁을 둘러싸고 와인 잔을 기울이며 홀짝이고 있었다.
물론 내 근처에도 수인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곰 수인과 고릴라 수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게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에 공작성에 들어왔을 때와는 판이해진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작님이 홀 안으로 들어와, 상석에 착석했다.
“내, 직접 검술 대회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드리지.”
아나이스 공작이 와인 잔을 든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나 역시도 와인 잔을 들고 공작님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수인들 틈에서 나를 단번에 찾아내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공작님 분위기가 조금 따뜻하게 바뀐 것 같아.’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생각은 나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왜 우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시지?”
“……우리도 그 바첼처럼 되는 것인가…….”
짧게 소란이 일고 있을 때, 검술 대회의 우승자 마이어 경이 등장했다. 대회 때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한 그는 공작님에게 다가섰다. 공작님 역시 의례적인 동작으로 마이어 경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그다음 역시 형식적인 절차였다. 공작님이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충성 서약은 이번에도 생략인가.”
그 말에 다들 이번에도 마이어 경의 레이디는 없겠거니, 하며 각자 손에 쥔 와인 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이어 경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라?’
나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원래 레이디, 없지 않았나?’
의외의 전개에 모두의 관심이 마이어 경에게 쏠렸다. 정확히는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레이디’가 있는 방향으로.
어쩐지 내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와 나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가만히 와인 잔을 든 채로 홀짝홀짝 마시는데, 그가 거침없이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쪽에 누가 있나?’
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때.
“레이디 아스텔, 당신을 제 레이디로 모시고 싶습니다.”
걸음을 멈춘 마이어 경이 내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 갑자기요?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급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내 귓불을 문질렀다. 그러나 어찌해야 하나 고민해 보기도 전에, 대답은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님 쪽에서 빠르고 깔끔하게 나왔다.
“불허한다.”
“…….”
그러나 제아무리 아나이스 공작이라 할지언정, 검술 대회의 전통을 아무렇게나 좌우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마이어 경 역시도 나만 우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저의 레이디의 말만을 따릅니다.”
그러자 공작님은 차갑게 얼어붙어 버린 나를 응시했다. 당연히 거절할 거지, 하는 흉흉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눈앞에 선 사내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했다.
“레이디.”
나는 당혹감에 더듬거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왜 저인가요?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건 아닐지…….”
하지만 그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제 진심을 고백해 왔다.
“제 진심에 착오는 없습니다. 검술 대회의 사건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지켜보았으니까요.”
“어…….”
“처음에는 아스텔 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스텔 님은 결국 어린아이를 보호하셨고, 지켜 내셨지요. 그 자리에 많은 기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누구 하나 속임수를 눈치채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내 옆에 선 샐리가 작게 추임새를 넣었다. 마이어 경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망하고 낯부끄러운 찬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아스텔 님은 진정한 기사였습니다.”
“예……?”
제가요? 뭐가요, 어디가요……?
“온갖 음해와 불신 속에서 강인하게 버틴 정신에 감복했습니다.”
“아니…….”
나는 손사래를 치려 했다. 그러나 마이어 경이 먼저였다.
“저는 그날, 진정한 기사도를 보았습니다.”
끝내 내 두 볼이 새빨개졌다.
괴로워질 정도로 과한 칭송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 모두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신이 우승하면 꽃을 바칠 레이디는 아스텔 님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너무 심하잖아!
목 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 그 정도는 아닌…….”
“아닙니다, 그 정도가 맞습니다. 다행히 이번 검술 대회의 승자는 저였습니다, 아스텔 님.”
구릿빛 피부의 근육이 탄탄한 사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신중한 그 눈빛에 압도당할 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눈매를 유순하게 풀었다. 그 눈빛이 울먹울먹하게 촉촉한 눈망울을 지닌 소형견 같다고 생각하다니. 나도 너무 간 거겠지?
“그래서 저는, 그날 비로소 아스텔 님께 승자의 영예를 바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저는……. 부족해서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안 된다는군.”
그 거절 위로 공작님의 심술궂은 말도 얹혔다. 그러나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열정적으로 자기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에고 소드의 소유자이지만 격투에 최적화되어 은신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검과 격투술을 동시에 사용해 우승하기도 했으니까요.”
“……어, 그러니까.”
그 내용을 듣고 있자니 정말 감화가 될 것만 같았으나, 그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심도 함께 피어올랐다.
‘사실 마이어 경이라면……. 그 누구보다 룬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텐데.’
그 지점이 정말 아쉬웠지만 나는 진지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내게 아주 맛있는 당근을 던졌다.
“저를 의심스러워하시는 거 압니다.”
……티가 났나?
그는 흠칫한 내가 더욱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던졌다.
“그렇다면 의심하지 않으실 수 있게, 저는 영원히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아스텔 님만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예?”
“만일, 아스텔 님께서 ‘영원의 맹세’를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제게 영혼의 예속을 걸어 주십시오.”
그 파격적인 제안에 삐뚜름하게 인상을 쓴 공작님이 결국 상석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내 곁에 선 공작님은 한쪽 무릎을 꿇은 마이어 경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경, 미쳤나?”
그러나 나는 그와 달리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나 역시 원작을 읽은 데다 친오빠가 기사이기에 ‘영원의 맹세’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영원의 맹세’는 기사에게는 생명을 바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 줄을 내어 주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보통 기사의 맹세를 한 뒤 십여 년 이상, 오랜 세월을 함께한 레이디가 있을 시 바칠까, 말까 한 것이 ‘영원의 맹세’였다.
그런데 그런 영원의 맹세를 왜 내게…….
“그……, 영원의 맹세를 제게 하시겠다고요?”
“앞으로 평생 제가 모실 레이디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을 지닌 그는 충성을 바칠 레이디를 찾지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늙어 갔다. 그걸 떠올리자 애잔함이 밀려왔다.
‘영원의 맹세’ 이야기까지 나온 이상, 의심할 여지도 사라졌겠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감사히…….”
“아스텔.”
일전에 공작님 역시 내게 호위 기사가 있는 게 좋겠다며 리트로 경을 붙여 줬었다. 그러나 리트로 경은 내 원래 호위 직무가 아닌 공작성의 중요한 전력이니까 그만 놓아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다만 그에게 각인자인 내 안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1순위일 테니까 알아서 잘 챙길 의무가 있었다.
나는 공작을 향해 환히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큰 소리를 낼 것 같던 그의 낯이 무람없이 일그러졌다.
“…….”
말문을 닫은 공작님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마이어 경을 향해 더욱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월계관을 바라보았다.
“주세요, 월계관.”
무릎을 세워 일어난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 위에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나는 우승자의 관을 이마에 걸쳐 쓴 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활짝 웃었다. 무쇠같이 단단해 보이던 기사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그럼…….”
나는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이 선택을 내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 기사가 되어 주세요.”
룬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최종 흑막을 처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하나라도 더 늘리고, 내 전력을 탄탄하게 보강하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니까.
내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 그가 누구보다 환히 웃으며 한쪽 무릎을 다시 굽혀 바닥에 댔다.
서 있을 때 내 두 배는 될 것 같은 키에 곰처럼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앞으로 저는, 레이디를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홀 안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그’ 마이어 경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로맨틱해.”
“아니, 세상에…….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냐?”
나는 확, 붉어진 귓가를 숨기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기사의 맹세 절차상 마지막 단계를 밟아야만 했다.
바로, 손등 키스다.
‘나도, 공작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손등을 내밀어 본 게 처음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이어 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등을 내밀었다.
곧바로 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추려 했다. 화인처럼 뜨거운 입술이 서서히…….
“무례하군요.”
……내려앉지 못했다.
갑자기 끼어든 방해꾼 때문이었다.
곁에서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공작님은 이내 냉소적인 눈빛을 띤 채 마이어 경을 내리깔아 보았다.
“내가 후견하는 분에게 더러운 입술을 대지 마십시오.”
그가 내 손등을 잡아챘다.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귀족적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그의 말에 담긴 무례할 정도의 적의를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더러운 입술이라고?’
특히 나는 조금 더 놀랐다.
……물론 공작과 내가 각인되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각인자인 것을 제외하고 생각하자면, 수인들에게는 인간인 내가 더 더럽게 여겨지지 않나?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저의 레이디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스텔 님.”
마이어 경은 역시 쇠심줄 같은 신경의 소유자였다.
그는 무릎을 일으키더니 공작님의 면전에서 고개를 까딱하며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만 우직하게 따르는 대형견 같았다.
“아스텔.”
……공작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쩐지 이쪽도, 다른 의미로 강아지 같았다.
그가 내 손등을 들어 올리며 요요한 눈매를 접어 웃었다.
“첫 춤의 영광은 제게 주세요.”
본래 라 보엠에서의 첫 춤은 가장 친밀히 여기는 자와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묘한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질투하는 겁니다.”
……각인자라고는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오려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막상 공작님의 눈빛을 보고 나면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도회에서는 한 번도 춤을 춰 본 적은 없어 이번 기회에 춤을 추고 싶었다.
그 마음을 따라, 나는 공작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곧 홀 안의 음악이 무도곡으로 변하였고, 그렇게 나는 그날, 공작님의 발을 몇십 번이 넘도록 밟고 말았다.
그가 나를 보며 자꾸 웃는 통에 스텝이 마구 엉켰던 것이다.
실전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춤을 아주 못 추는 것도 아니었는데.
뾰로통해진 나는 공작님의 발 위에 얹힌 내 발에 꾸욱, 하고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고의라고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만.
* * *
애프터 파티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스텔은 아나이스 공작과 첫 춤을 췄고, 그다음으로는 자신의 기사가 된 마이어 경과도 욕심을 내어 춤을 추었다.
아스텔은 춤이 서툴렀다.
그러나 그녀의 어설픈 춤동작을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감히 비웃지는 못했다.
늘 그녀의 주변을 살피는 아나이스 공작의 눈길이 지나치게 무시무시했으니까.
게다가 마이어 경은 눈빛으로 사람을 뚫거나 죽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공작은 춤곡이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아스텔을 발코니로 데려갔다.
아스텔은 언제나와 같이 순진무구한 표정이었지만, 그들이 함께 붙어 있는 모습에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수인들은 몸을 떨었다.
현재 공작이 취하는 것은, 짐승들이 제 반려에 대한 소유욕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태도였다.
공포심과 별개로 결혼 적령기가 끝나 가도록 연인을 만들기는커녕, 염문 한 번 흘린 적 없던 아나이스 공작이 한 인간에게 대놓고 소유욕을 보인다는 것은 공작성 내 수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간 성내에서 도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아스텔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자들이 많았다.
그렇게 아스텔을 화두로 소란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도중, 가장 앞서 나가는 앵무새 수인이 입을 열었다.
“설마 우리, 인간 마님을 모시게 되는 걸까요?”
“공작 각하의 눈빛이…….”
“진짜? 인간 마님이라, 적응 안 될 것 같은데?”
비교적 소심한 성격의 코뿔소 수인이 발을 뒤로 주춤거리며 물렸다.
“뭐, 그래도 내 의견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이 자리에서 아스텔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스텔에 대해 공공연히 반감을 표했던 자들은 이미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나이스 공작과 독대를 끝낸 후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몇몇 영애들만이 앵돌아져 있었다.
“그래도 수인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몸도 연약해 보이던데.”
나비 부채를 든 숙녀들을 향해 귀부인들이 호호, 웃으며 나무랐다.
“어머나, 그런 말을 했다가 공작 각하와 독대할까 두렵네요.”
“아…….”
“은여우 가문과 재규어 가문에서도 은인으로 모시고 있잖아요.”
그 말에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뿌리 깊은 인간 혐오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약육강식의 수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강자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의 비호를 받는 아스텔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해냈다는 게,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치료술을 제법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게다가 최고의 기사까지 얻었으니…….”
지금 이 공작성에서 가장 위대한 두 기사를 꼽으라면 모두가 아나이스 공작과 검술 대회의 우승자인 마이어 경을 꼽을 것이었다.
그들이 지키는 인간이라니.
수군거리는 목소리의 톤, 높낮이, 표정은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저마다 농도가 다른 부러움과 동경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운을 띄우는 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부채를 움켜쥔 어느 한 수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북부령에서는 제법 유명한 로맨스 소설 작가로 활동 중인, 원숭이 수인이었다.
“……저 발코니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그녀가 원숭이 꼬리를 살랑거리자 드레스 치맛자락이 일순 들썩거렸다.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보다 빨갛게 변했다.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지 머릿속으로 로맨틱한 상상을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 * *
그때, 발코니 안.
파티 외곽의 평온함을 즐기면서,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오케스트라의 달콤한 선율을 들었다.
다만 자세는 조금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춤을 연달아 추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부은 것 같아 인상을 조금 찡그렸을 뿐인데, 공작님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검술 대회의 레이디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아스텔.”
……그러니까 마치, 나를 자신의 레이디로 대하는 기사처럼 말이다. 그가 느긋한 손길로 내 연분홍색 스틸레토 힐을 벗겨 내렸다.
구두 안에 담긴 새하얀 레이스 양말까지는, 다행히 벗기지 않았지만……. 감히 공작님을 무릎 꿇린 것도 모자라 그의 손 위에 발을 얹다니!
이건, 이건 좀 그렇잖아!
나는 좌불안석인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귀하신 공작님께서 이러시면 곤란…….”
나는 어색하게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진땀을 흘리는 나와 달리 공작님은 능숙하게 내 복사뼈 아래를 문질러 주었다. 고통스럽게 부어올라 통증을 호소하던 발이 삽시간에 편안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좋아!’
각인자와 살갗이 마주 닿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능수능란한 발 마사지 탓일까. 온몸이 느른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내 내 발을 바닥에 소중하게 내려 준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사가 가지고 싶었습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태껏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그의 머리를 조심조심 쓸어 주면서 대답했다.
“……네, 저를 지켜 줄 수 있는 분이 있으면 든든하니까요! 그래도, 기사가 생긴 건 전부 다 공작님 덕분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순간 떨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강렬한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탓이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경직시켰다.
아차, 내가 왜 공작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지? 이상하다. 왜 마치 자연스럽다는 듯이…….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알지 못할 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낮게 말했다.
“더 쓰다듬어 주세요.”
“…….”
그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도발하듯 올려다보았다.
“기분 좋습니다.”
“……네?”
지금의 그는 이전에 카시언에 대해 말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자가 아닌 저를 믿으세요, 아스텔.’
아니, 조금 더 유한가?
“저는 당신의 특별한 각인자니까,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부드럽게 풀어진 입매가 반달 모양으로 호선을 그렸다.
촉촉한 입술에 시선이 닿는 순간, 혀끝이 입술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게 보였다.
키스의 전조 같은 느낌.
나는 확신했다.
공작님은 정말로 맹수가 맞는 것 같다…….
내가 아무런 답이 없자 그는 다시 조용히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특별하지 않나요?”
누가 들어도 시무룩하게 느껴지는 반문.
언젠가부터 공작님의 표정은 무심하거나 차갑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차가운 표정을 지어도, 마냥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게는 처음부터 따뜻하게 잘 대해 주셨지만, 최근 들어 한결 더 다정해졌다.
아마도 룬이 도착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 트, 특별하죠! 그럼요! 앞으로 더 잘해 드릴게요.”
나는 얼렁뚱땅 저 말에만 대꾸해 버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그가 환히 웃으며.
“첫 춤을 함께 추게 된 기념입니다. 어쩌다 보니, 방해꾼이 생겨 바로 주지 못했지만.”
곧장 행커치프가 들어 있는 제복의 바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선물.”
포장되어 있지도 않은 자그맣고 하얀 물건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님이 누군가의 선물을 고른다면 당연히 값비싼 기성품 쪽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낡은 꽃 핀?’
낡고 새하얀 실핀의 맨 끝에는 조악한 꽃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관리는 무척 잘된 듯 반짝반짝 윤이 나서, 멀리서 보면 꽤 예쁜 악세사리라고 볼 수도 있을 듯했다.
지금까지 공작님의 스케일로 보자면 지극히 작고 소박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게 핀을 건네는 그의 손은 그 어떤 때보다 얕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드릴 때가 온 것 같아서.”
공작님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맹렬하게 반짝거렸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털을 삐쭉삐쭉 세우고, 꼬리를 쫑긋 올린…….
‘공잔님, 멍멍이!’
……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꼭 멍멍이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지 않고 대강의 감으로 머리칼에 꽂아 올렸다.
“의미 깊은 선물일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낮게 속삭였다.
“아름답습니다.”
“아…….”
“진심으로요.”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더 바짝 올려 미소를 짙게 띠었다. 두 귓불이 달아오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제 잠을 못 잔 탓일까. 머리가 욱신거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 짚은 채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편두통이 끝이 아니었다.
홍옥처럼 새빨간 빛이 섬광이 번쩍이듯 내 시야를 지배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삐, 하는 이명이 잠시 들리더니 귓가에 환청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있잖아, 우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모,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의 나와, 낯선 소년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뺏긴 채 공작님의 머리칼을 조심조심 몇 번 더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자꾸 말을 건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를 기억해 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내가 바라보고 있던 공작님도, 공작성의 내부 광경도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대신 거대한 환영이 내 시야를 지배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채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환영이.
‘꼭…… 데리러 갈게요.’
아이가 비틀거리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어린 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날 데리러 오면, 너 죽을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뭐?’
‘주, 죽는다고 해도. 꼭, 구하러 갈 거니까, 그러니까, 기다려 주세요.’
뭘 구한다는 거지? 누가 죽는다는 거고?
나는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환영의 정체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려 할 땐, 이미 눈앞의 환각도 환청도 모두 순식간에 사라진 뒤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색이 나쁘니, 이만 돌아가자고.
그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입술이 스친 내 귓바퀴가 뜨끈해지며 열이 올랐다.
요즘 들어 어쩐지 그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는데…….
그저 그와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내 마음이 마냥 수상했다.
* * *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안고 홀의 발코니에서 델피니움 룸으로 돌아왔다.
닫힌 문에 등을 댄 채로 심호흡하기를 몇 번.
‘이상해.’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이상한 환청이 들려오고 환영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쓰러졌을 때는 감기 몸살 때문에 섬망 현상이 일어난 줄 알았었는데.
오늘은 그저 공작님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그런 이상한 환영이라니…….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는데, 파박, 하는 소리와 함께 꺄하하!거리는 아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서자 아기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즘 잘 먹어서 그런지 토실토실 살찐 볼따구니가 슬쩍 보였다.
“룬!”
“어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가 나를 발견한 룬은 반가운지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아이의 손에는 내 다이어리가 담겨 있었다.
아이가 글씨를 읽을 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이어리를 타인에게 들키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었다.
“빤짝빤짝!”
“그런 거 함부로 잡으면 안 돼, 룬.”
“벼리가 반짝해!”
무슨 의미지?
나는 급히 경보로 걸어가 곧장 다이어리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곧 룬이 말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다이어리 안쪽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깊은 동굴 안이다. 바보 멍청이에게 산딸기를 따 주었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오빠가 걱정할 텐데.]
깊은 동굴 안, 멍청이, 산딸기?
정확히 알 수 없는 내용투성이였다.
그마저도 새하얀 빛이 감돌더니 다시 사라져 갔다.
나는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며, 급하게 내용을 복기해 옆에 적어 두었다.
‘확실히 이 다이어리는 월렛 말대로 아티팩트가 맞는 것 같아.’
일기라는 특성에 맞추자면 기억과 관련된 아티팩트겠지.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다이어리를 소득 없이 뒤적거렸다.
아장아장, 어느덧 내 옆에 바짝 붙은 룬이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 가타.”
나는 으차, 하고 룬을 꼭 끌어안은 뒤 꼬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 아냐.”
“곤주님 마자! 곤자님이 아스테보고 곤주님이라구 해써.”
공작님이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원래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억을 왜곡시키고는 하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아스테, 곤자님 조아해.”
“……조, 좋아하지. 존경하고.”
“공잔님도 아스테 조아해.”
“너……. 그런 말 어디 가서 하면 안 돼!”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차가운 손으로 식히며 룬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룬의 방해 때문에 진짜 할 일을 잊을 뻔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월렛을 만나야만 했다.
지난번에 맡긴 훈장 아티팩트의 분석 결과를 전해 주기로 한 데다, 지금까지 평범한 다이어리를 가장해 온 이 상당히 수상쩍은 아티팩트를 조사하기 위해서.
* * *
한편, 델랑 루치아 마을 내부.
아나이스 공작의 주치의, 호손은 마을의 장로들과 원탁에 둘러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이 장로들은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각 분야에서 빼어난 석학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말이 포커를 치는 것이지…….
“떼잉!”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돈 내기 중이기도 했다.
장로 하나가 패를 바닥으로 탁, 짓누르며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이 늙은 인간들이, 밥 먹고 포커만 쳤나!”
“이 마을에서는 할 일이 포커밖에 없거든.”
모여 앉은 세 사내들이 히죽 웃었다.
주치의가 아나이스 공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 명의이듯, 그들 역시 외부에서는 존경받는 학자로 유명했다.
“괜찮은 세간살이 장만할 수 있겠군요.”
능구렁이 같은 장로들이 낄낄댔다.
그들 사이에 껴서 패배감을 곱씹던 호손이 요즘 덜 깎아서 까슬거리는 콧수염을 문질렀다.
‘슬슬 분위기가 풀렸으니 지식을 털어 보실까.’
이 모기 같이 치사한 장로들에게 돈을 뜯긴 건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목적은 사라진 고대 마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정신을 재정비한 그가, 돈을 따면서 어린애처럼 신난 장로들을 눈에 담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다들 각인이라는 고대 마법, 아십니까?”
“아아, 각인.”
“로맨틱한 고대 마법이지.”
아무리 포커 돈 내기에 흠뻑 빠져 있다지만, 자리에 모여 앉은 장로들 또한 지식의 향유자였다. 게다가 지금은 기분도 좋아 보이니, 조금만 잘 찌르면 자신들이 아는 지식을 공유해 줄 것만 같았다.
“도서관을 좀 뒤져 보니 각인 마법에 대해 알려진 바가 좀 드물더군요?”
“원래 사장된 옛 마법이 그렇지.”
“한데 말입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주치의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척 한껏 흉곽을 부풀렸다.
“원인을 모른 채로 각인이 되는 경우도 있죠?”
“……그거야 당연히 있지. 뭐, 우연히 만났다거나, 운명적 사랑이라거나. 신이 점지했다거나, 그런 로맨스.”
장로 셋이 까르륵 소년처럼 웃었다.
분위기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호손은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친밀도가 상승해도 계속 상태가 안 좋아지고, 연결 상태가 요동치고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게 되는 각인도 있죠? 그건 어떻게 처리-.”
호손의 질문에 이곳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장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각인은 없어.”
“……예?”
장로는 어리둥절해하는 주치의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그 말고 고대 마법을 전공했다던 장로 하나가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그 역시 호기심이 동한 표정이었다.
“각인 마법은 살갗이 오래 닿을수록 좋아. 게다가 친밀도에서 기반하지. 그러니 친밀도가 상승하는데 어째서 각인이 요동치겠나?”
그러한 정리에 주치의가 황망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원인 불명인 점만 빼면 평범한 각인 마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들의 각인에는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호손은 심각한 눈빛으로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러게요.”
“게다가 각인 마법은 처음에야 생명을 위협하지, 나중에는 다 잔잔해진다고. 마치, 연인들의 사랑과 같거든.”
“……오호.”
그렇다면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의 각인은 뭐지?
누가 봐도 반려의 각인 징후였는데. 만약 각인이 아니라면 그들이 겪고 있는 증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시다시피 제가 배움이 아직 일천하여 몰랐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럼 제가 말한 증상이랑 유사한 것은…….”
계속되는 질문에 장로가 손사래를 쳤다.
“이봐, 호손. 어려운 얘기는 이제 그만 하고, 일단 포커부터 친 다음에 슬슬 머리를 맞대 보자고.”
저 도박 중독자들……!
델랑 루치아 마을에 ‘각인 연구’를 목적으로 눌어붙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
돈 내기 포커를 치는 호손의 눈에 핏발이 잔뜩 섰다.
포커를 쥐고 있던 장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단단히 비틀렸군.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텐데…….”
“예?”
“……어찌 될런지.”
의미심장한 말에 호손이 패를 든 손에 힘을 약하게 주었다.
“이봐, 호손. 자네의 포커 패 말일세.”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되게 중요한 말인 것 같은데…….
그러나 장로는 포커 카드를 바닥으로 내리누르며 씩 웃었다.
이번에도 그의 승리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호손의 마음에 해일처럼 덮쳐 왔다.
* * *
다이어리 아티팩트에 대해 분석하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월렛이 총알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드디어, 이 아티팩트를 분석할 수 있게 되었군요……!”
“네, 드디어!”
……내가 따로 잘 봐 달라는 부탁의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내민 다이어리를 보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오…….”
“확인해 주세요!”
내가 내민 다이어리를 받아 본 그가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그 내부를 꼼꼼히 확인해 보던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오늘은 어묵 꼬지를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야!]
‘어묵 꼬지’는 서민들의 음식 중에서도 하찮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흙 묻은 당근이 아닌 걸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엄청 신났었는데……!
그가 다이어리를 한 장 한 장 넘기면 넘길수록,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하지만 그는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양 다이어리를 빠른 손길로 넘겼다.
월렛의 얼굴이 계속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거, 정확히 어디에서 사신 겁니까?”
구입처를 묻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답했다.
“오래전에 그냥 평범한 가판대에서 산 건데요.”
“하지만…….”
그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 아티팩트는 ‘진짜’입니다.”
“…….”
“마치 발모제를 발라 털이 강렬히 솟아오른 내 머리카락처럼.”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그의 말에 감동받고 말았다.
내 힘으로 만들어 낸 발모제를 잘 사용해 주는 걸 보니 너무 기쁘고…….
“정말이지 멋진 비유예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런지 월렛이 깊은 눈빛을 띤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역시 그의 손을 꼭 맞잡고 흔들며 신나게 말했다.
“그런데…… 진짜라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이 다이어리 안에는 인간의 진실된 사념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사념이라면……?”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기억을 써 둔 게 아닙니다. 인간들이 겪은 기억이 ‘봉인’되어 있는 것이죠.”
다이어리를 한 장씩 넘겨 보던 월렛의 표정이 감격했다는 듯 황홀경에 잠겼다.
“단순한 기억을 담은 것도 아닙니다. 현실에 영향을 미칠 만한 강력한 기억이지요.”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저도 아직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을 담고,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아티팩트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이건 돈으로도 환산이 불가능할 거예요.”
나는 정말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마도구 장인은 흉내 낼 수조차 없지요. 이 정도면 신에 가까이 닿은 자가 만들지 않았을까요! 지금 이 다이어리의 주인이신 아스텔 님의 기억도 이 안에 봉인되어 있을 겁니다.”
나는 그가 도로 건네준 다이어리를 매만져 보았다.
‘기억이 이 안에 봉인되어 있다고? 그럼 그때 봤던 환영이 전부 다…….’
왜 봉인이 된 걸까?
도대체 그 기억의 끝에 있는 게 뭐길래?
나는 조심스럽게 다이어리의 앞 장을 넘겨 보았다.
그가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들어 보십시오. 몹시 중요하고 위험한 기억이 이 안에 봉인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잃어버린 기억이 있으십니까?”
있다.
《피의 복수》에 환생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실종되었던 그 날 이후.
나는 한 달여 간의 기억을 전부 잃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수상해.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는데 왜 그때 기억만 쏙 사라진 걸까?’
곧이어 지난 환영에서 보았던 소년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 기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아티팩트의 봉인을 풀면 됩니다.”
간단한데?
나는 기대를 품고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월렛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아마 이 아티팩트를 만든 이를 찾아가야만 할 겁니다.”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는데…… 그냥 가판대에서 구입해 준 거예요.”
“그럼 그걸 사 준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어느 상점에서 누구한테 샀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어리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다이어리를 나에게 사 준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바로 우리 오빠, 카시언 그레이였다.
당시 내가 실종됐던 사실에 충격받은 오빠는, 그 무렵 이야기를 입 바깥으로 내는 것을 꺼려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궁금해진 게 생긴 이상 그날에 관해 대화를 나누어 봐야만 했다.
‘오빠를 공작성으로 따로 소환할 수도 없으니까, 수도로 가서 몰래 만나야 하나?’
그러나 나 혼자 이동하기에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나이스 공작님이 수도로 갈 때 따라가면 어떨까.
그는 마물 전쟁 회의와 관련된 문제로 황제가 있는 수도에 자주 다니고는 할 테니까.
하지만, 수도에 간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 게…….
‘공작님은 오빠를 혐오하는데, 어떻게 몰래 만나지?’
공작님이라면, 오빠가 또 내 등골 브레이커가 되려는 줄 알고 괜히 오빠의 등골에 상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러면 복수고 뭐고 물 건너가게 될 테지.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어.’
내게 다이어리를 사 준 사람인 오빠를 찾아가야만 한다는 것.
수도에 자리 잡은 흑막 후보 1, 콘윌 공작가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는 것.
복수 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업도 해야 한다는 것.
목표는 총 세 개.
그리고 세 가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곳은 하나다.
바로, 수도.
이제 나는 이 공작성을 벗어나 수도로 저변을 넓혀야만 했다.
……어쩌다 보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내 각인자인 아나이스 공작과 함께.
* * *
하루 뒤.
나는 아침부터 열심히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공작성 내의 소문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공작 각하께서 곧 수도로 가시게 된다네요!’
‘헉, 진짜요?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소문을 듣고 나니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전쟁을 앞두고 공작님이 수도에 볼일이 많은 만큼,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예감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오늘 공작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때는 매일같이 석찬을 함께했는데 룬이 온 이후로는 단둘이 식사한 적이 손에 꼽혔다.
다행히 오늘은 공작님이 먼저 ‘단둘’이 식사를 하자고 말해 주셨다. 조금 얼떨떨했지만, 바라마지않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석찬을 함께하는 동안, 나는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 순간을 노렸다가 말을 꺼냈다.
“저, 수도에 잠시 들러 보고 싶은데요.”
대뜸 던지는 말에 우아한 테이블 매너를 선보이던 공작님이 돌연 굳었다.
“……왜 갑자기 수도를 가려고 하십니까?”
물론 아티팩트를 분석하기 위해서 오빠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숨긴 채 가장 무난한 핑계를 댔다.
“북부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조금 심심해져서요.”
그러자 공작님의 눈빛이 어쩐지 시무룩해졌다. 그와 달리, 나오는 말은 결연했다.
“수도에 가도 아스텔이 할 만한 건 없으실 겁니다.”
……따지자면 포악한 맹수인 공작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는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이처럼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한마디 더 보탰다.
“사실 사업을 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자그마한 발모제를 꺼내 들었다.
“이걸 보세요!”
그의 앞에 대고 슬쩍 흔들어 보였다.
“멋지지 않…… 나요? 수도에서 인간들에게 팔아도 잘 팔릴 것 같은데.”
막상 꺼내 놓고 자랑하려니 머쓱해지는 기분에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멋지군요. 투자하겠습니다.”
아직 발모제 효과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투자자가 생기면 안 되는데?
원래 내 계획은 발모제를 들이밀며 사업을 하고 싶다고 밝힌 다음, 투자자를 구하기 위해 수도로 가서 영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투자자를 구해 버린 나는 신속히 방향을 전환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가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나는 심호흡을 해 보았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공작 역시 수도와 성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황궁과 끊임없이 상황을 조율해야 할 테니까.
나는 한쪽 손을 올려 힘차게 파이팅, 하는 포즈를 해 보였다.
“좋아요, 그럼 공작님이 제 투자자가 되어서 수도로 같이 가 주세요. 저, 황궁이나 수도 구경도 시켜 주세요!”
그러자 그가 나를 빤히 응시해 왔다.
내 의중이 무엇인지 간파해 내려는 듯한 예리한 시선에 긴장할 뻔했으나, 곧 그의 입매가 느릿느릿 기울어졌다.
“아스텔도 여느 인간처럼 수도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제가 노력했습니다만…… 하긴, 수도의 모든 것을 공작성에 가져올 수는 없겠지요. 당연히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제가.”
“어…….”
마치 내가 원하면 수도의 모든 것을 공작성에 들여오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 렇죠?”
내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자 그가 다정하게 화답했다.
“수도에서도 저와 함께해 주신다면, 모든 것을 전부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렇게나 쉽게 함께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인생이나 복수나 술술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단, 공작님이 흑막이 아니라는 가정하에서.
내 속내를 모르는 공작님은 갑자기 꿈에 겨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수도에도 가문의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살아도 됩니다, 우리 함께.”
‘수도에서 계속’이라니…….
공작님은 마치 우리의 각인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각인이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요동쳤으니까.
어쩌면 요즘 그가 감정적으로 솔직해진 것도 그 영향일지 모른다.
내가 치료사가 아니었다면, 각인 마법에 대해 틈틈이 도서관에서 확인해 본 게 아니었다면, 지금 그의 모습에 괜한 기대를 걸었을지도.
‘그냥, 고대 각인 마법이 감정을 지배하는 것뿐이니까. 각인이 끝나기만 하면 이 감정도 눈 녹듯 사라지겠지.’
나는 그의 촉촉한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수인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어떤 흉악하고 무서운 맹수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사실 무서워서 알고 싶지 않기도…….
‘이 감정도 이용해야 해.’
어쩌면 그를 내 복수극의 말로 이용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술렁이는 내 마음을 진지하게 다잡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우리 같이 그곳에서 지내요!”
그렇게 해서, 나의 수도행이 원활하게 결정되었다.
* * *
아나이스 공작과 나, 아스텔의 수도행이 결정된 후 며칠이 흘렀다.
아스텔은 짐을 싸느라 분주했고, 시녀들은 아스텔의 곁에서 필수적인 짐을 선별하느라 바빴다.
시녀장 루델은 수도의 컨트리 하우스에 함께 갈 수인을 선발하는 중이었다.
아스텔에 관해 호기심을 품은 수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수도행에 합류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 덕에 루델이 몹시 바빠졌다.
그리고 아나이스 공작은…….
……하나도 분주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즐겼다.
물론 정확히는 아스텔을 자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한 계략을 짜고 있었다.
공작성 외부의 자그마한 디저트 카페.
룬과 공작이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
“히히, 압빠.”
……으려 했지만, 사실 룬이 공작의 품에 안기려고 아등바등하는 중이었다.
“압빠?”
룬은 비엔나 소세지처럼 짧고 오동통한 발로 공작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러나 룬의 ‘아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안아 조?”
“별로 안고 싶지 않으니까.”
공작의 냉정한 말을 들은 룬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도 헤, 벌렸다.
“허업.”
그러더니 고사리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다.
그 와중에도 공작의 무릎에 엉덩이를 착실하게 붙인 채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새처럼 공작을 꼬옥 의지하는 모양새였다.
공작은 아이를 제대로 안고 있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밀어내지도 않았다.
대신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콤한 아기용 연두부 디저트를 하나 시켜 주었다.
“자, 먹어.”
일종의 뇌물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룬은 단순하지 않았다.
“안니. 이론 건 아기드리나 먼는 거야.”
“네가 아기잖아.”
“…….”
룬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기? 나를 따루라!”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인가 싶더니 영락없는 아기의 모습에 공작이 헛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할 말이 있다. 수도로 갈 거다.”
“수도? 수도?”
룬은 수도가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듯했다.
그 모습에 공작은 갓 나온 디저트를 먹기 시작한 룬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그래. 수도로 간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거다.”
“웅!”
명령에 곧잘 따르는 것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공작은 수도에서 할 일을 완벽하게 정리해 두었다.
지난날 공작성 주변을 맴돌던 카시언 그레이가 어딘가로 떠났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
그는 보좌관을 시켜 수도에서 카시언 그레이의 근황 및 일정을 조사하게 했다.
결코 카시언 그레이와 아스텔의 동선이 겹칠 일이 없도록.
물론 그는 황궁의 기사였기에 기사단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의 일정까지는 캐내기에 일부 제약이 있었다.
그럼에도 제 보좌관은 제법 유능한 편에 속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룬의 턱에 매달린 손수건으로 침이 흐른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나한테 제대로 협력하도록.”
룬이 눈을 반짝거렸다.
“웅!”
“내 얘기도 많이 해.”
“마자! 마니 해! 압빠니까!”
첫인상은 몹시 좋지 않았었으나 이렇게까지 협력해 주니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아스텔은 이 녀석을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 하니까.
그녀가 귀엽다, 예쁘다 했던 부분들이 제 눈에도 그래 보이기 시작했다.
“현님 얘기도 해!”
“현님?”
형님, 이라는 뜻인가.
아스텔의 주변에 그런 애칭을 가진 이는 없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이의 턱 수건을 느릿하게 잡아 내리며 물었다.
“그게 누구지?”
“웅! 아스테 조아해! 베리!”
“베리?”
“여우인데! 옴총 현님이야! 나이가 마나!”
은여우 수인. 베리, 라면 벨인가.
그러고 보니 공작성에 그런 이름을 가진 여우가 한 마리 있었던 것도 같았다.
“은여우 수인, 벨을 말하는 거겠지.”
한 손으로 룬을 가볍게 지탱한 공작이 찻집의 차임벨을 눌렀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로 보좌관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차임벨에 댔던 손을 들어 룬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가볍게 속삭였다.
“맞댈 머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벨도 데려오지.”
“마때 머리!”
……룬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보좌관을 통해 벨을 부르고 몇 십여 분이 흘렀다.
카페의 문이 열리면서 갑작스러운 공작의 부름을 받아 당혹한 벨이 들어왔다.
벨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나이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4대 가신 가문의 후계로서 아나이스 공작은 동경의 대상이니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벨이 들뜬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인사했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룬이 소리쳤다.
“아스테란 곤잔님 겨론해!”
아스텔과 공작님의 연애에 협력하라는 의미였다.
“무슨?”
곧 공작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은 벨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스텔이 좋아하는 게 뭔지 말해 보십시오.”
“아아……! 그게 궁금해서 저를 부르신 거군요, 각하!”
명석한 벨은 눈을 반짝거렸다. 그리고 확신에 찬 태도로 입을 열어 말했다.
“아스텔은 저를 좋아합니다!”
“…….”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룬이 떨떠름하게 벨의 무릎을 톡톡, 쳤다.
“밥오.”
“……형님이라고 해야지!”
벨이 해맑게 웃으며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게다가 아스텔은 저랑 결혼하기로 약속도 했습니다!”
해맑은 벨의 말에 공작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거, 어쩐지 경쟁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맘고생 없이 뭐든 잘 먹어서 땡글땡글한 볼, 반짝반짝거리는 빨간 눈망울, 은여우답게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머리털까지.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아스텔을 떠올리니 유치한 경계심이 들었다.
“안 됩니다.”
“네?”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룬에게서 손을 떼고 벨의 머리 위에 얹었다.
“공작성에 금혼령을 내릴 테니까.”
“……네에?”
벨이 눈을 땡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금혼령이 뭐예요?”
“그몬렴! 현님, 모라?”
“…….”
벨이 입술을 삐죽였다. 모르기는 몰라도 곧 죽어도 모른다고 말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두 아이의 실랑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공작은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벨 말고, 아스텔이 좋아하는 것. 말해 보십시오.”
“아아…… 음, 귀여운 거?”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뒤로도 한참 이어지는 아이들의 말을 들었다. 점점 더 유치해져 가는 느낌이었으나,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큰일이었다.
* * *
아나이스 공작이 최초의 경쟁자로 삼은 ‘쓰레기’.
카시언 그레이 역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남부 실링 마을의 옷감이고, 이 실링 마을은 콘윌 공작가의 방계 혈족 소유더군.’
부두술을 써서 죽은 쥐새끼의 연결 고리를 잡아냈다. 제법 지난했던 과정이었지만, 어쨌거나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 그는 레이첼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부두술을 썼던 그놈이 남부에서 올라온 세작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래……. 팔목에 새겨진 팔찌에 신상 정보가 있었어. 대조해 보니 뷔에트리 백작가에 있었던 것도 맞아.’
뷔에트리 가문에서 첩자 노릇을 했던 자를 쫓으려 했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들의 배후가 콘윌 공작가인 것일까.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복수를 처음 결심했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저 희뿌연 안개 속을 천천히 헤쳐 나가는 느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표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이상한 게, 그놈 아나이스 공작을 처리하는 게 최종 목적이었던 것 같기도 해.’
‘네 말인즉……. 저 부두술을 쓴 놈이, 아나이스 공작을 죽이려 했다는 뜻인가?’
‘그래. 이 사실을 잘만 이용하면 공작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사심을 배제하고 본다면 꽤 좋은 상황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아나이스 공작을 우리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니.
그러나 카시언은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그래도 아나이스 공작을 의심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흠, 아나이스 공작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아주 깨끗해.’
그래. 삿된 감정을 전부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러했다.
하지만…….
‘사적인 감정이 배제가 안 되는, 매우 대단히 의심스러운 놈인데…….’
카시언이 이를 으드득 가는 소리를 냈다.
아나이스 공작에게는 최측근조차 없다. 모든 것이 쓰다 버리는 패일 테니까.
그딴 성정이라면 착하고 순수한 아스텔에게 상처만 가득 안겨 줄 것이다.
밤잠 한숨 못 잔 채로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은 푸석해졌다.
‘아, 수도의 꽃이고 지랄이고 스트레스 받네…….’
이를 빠드득 간 그는 장미 기사단 단장실 문을 빠갤 듯 팍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로파 쉘린드 단장님!”
“아이고, 애 떨어진다.”
“떨어질 애가 있으십니까?”
나직한 팩트 폭격에 기사단장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진짜 카시언 그레이 경만 오면 아주 심장이 벌렁벌렁해.”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또다시 수도로 올라온다고 들었습니다.”
“……?”
로파는 그걸 왜 자신에게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카시언은 꿋꿋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또 오는 거랍니까.”
“아아, 뭐. 명목상으로는 전쟁 대비를 위한 거지. 그때는 회의차 짧게 방문한 거였다면 이번에는 수도 전역에 공문이 내려왔어.”
“하…….”
카시언이 마른세수를 했다. 로파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왜 한숨이야? 아무튼, 이번에는 전처럼 가볍게 올라오시는 게 아니야. 수인들도 엄청 올라오는 데다, 공작 각하께서 대대적으로 퍼레이드 준비를 하라고 했대. 원래 그런 허례허식 싫어하시는 분인데…….”
“……가지가지.”
로파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콧노래를 불렀다.
“뭐? 못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축제 분위기인 거지, 수도가! 오랜만에!”
“하…….”
카시언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래도 제 상사인 기사단장에게는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신기한 일이 뭔지 아나?”
카시언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다음에 그가 가장 관심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걸.
“어! 무려 인간을 같이 데려온다네? 그래서 지금 화제야, 화제! ‘그’ 공작 각하의 피후견인이 수인도 아니고 무려 인간이라니!”
본디 귀족들에게는 피후견인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공작쯤 되는 작위라면 후원금도 많을 테고, 인재에 대한 욕심까지 그득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후원하는 사람은 수도를 줄 세울 정도로 아주 드글드글하게 많았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후원하지 않았고, 돈을 지원해 줄지언정 누군가의 후견인을 자처한 전례가 없었다.
최측근마저도 입맛대로 바꾸는 변덕스러운 인물이라는데, 갑자기 후원에 후견인이라니.
그것도 상대가 수인이 아니라, 무려 인간이라니.
“게다가 몰락 귀족도 아니고, 진짜 평범한 평민 여자라잖아!”
“하…….”
카시언은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으며 침음을 흘렸다.
로파가 멈칫했다.
“또 왜 그래? 광증이 도진 거야?”
아무리 카시언이라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미친 새끼,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그래, 공작 네가 아스텔에게 일시적으로 가진 변덕스러운 그 감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아나이스 공작……. 내가 찰거머리처럼 철썩 붙어서 제대로 포기하게 만들어 주지.’
안 그래도 부두술을 쓴 자의 실마리를 따라 복수의 갈피를 잡아 나가던 중이었다.
그 이상한 자와 아나이스 공작 사이에 그다지 유의미한 연관성이 없을 거란 것 정도는 이제 확신했다.
하지만 그게 뭐?
아나이스 공작은 타고나길 위험한 미친놈이다.
그가 아스텔의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찰 주시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지금의 카시언에게는 아스텔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동생이니까. 그 아이가 선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복수를 하려는 거니까.
“그래서.”
카시언은 이를 까드득 깨문 뒤 시선을 위로 척, 올렸다.
“어?”
“제가 공작 각하를 지나치게 흠앙하는 탓에.”
“미친 새끼라며?”
“……뭐, 그런 탓에 반드시 배알을 청하옵고 싶은데요.”
뒤에서 수군거렸다.
“갑자기 웬 극존칭?”
“드디어 미친개 핀트가 제대로 나가나?”
“거, 조용히들 하고.”
한참 뒤에서 수런거리던 기사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시끄러운 분위기를 진정시킨 로파가 손을 휘휘 저으며 카시언을 향해 말했다.
“뭐야, 그 말은? 비꼬는 거 아냐, 카시언 경?”
“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공작 각하께 닿고 싶은 해바라기 같은 마음의 소유자이옵니다.”
정말 구역질이 일 것 같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카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오오, 공작 각하. 위대하신 우리의 빛이시여.”
다행히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는 카시언의 발연기에도 넘어갈 만큼 순진한 사내였다.
“감동적이네, 카시언 그레이 경. 왜 마음을 바꾼 거야! 엄청 싫어했잖아?”
카시언이 어떻게 변명할지 궁리하는데, 로파가 손뼉을 짝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역시…….”
“……?”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파는 상당한 확신에 차 있었다.
카시언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베이스 캠프에서 공작 각하께서 네 편을 들어 주셔서, 그 이후로 마음이 바뀐 거지?”
맞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냥 수상쩍은 놈에서 몹시 수상쩍은 놈으로 바뀌었다.
‘그날 일을 떠올려 보니, 아스텔에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해 보이는데.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텔 역시 공작을 제법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다. 카시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갈라놔야겠는데.”
“뭘 갈라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공작 각하께서 수도에 오시면 기사단에도 내방하실 테고, 전략 회의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겠군요.”
“그렇지! 우리 장미 기사단만 북부 공작령과 협업하고 있으니까. 하하하! 날개 기사단이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로파가 싱글벙글하게 웃으며 날개 기사단의 단장 흉을 보았다.
날개 기사단은 우리 기사단보다 인력도 적어서 밀려난 거다, 우리 기사단이 역시 최고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기사는 역시 카시언 그레이 자네인 모양이다…….
그런 일련의 말이 대충 스쳐 지나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시언의 낯이 심술궂게 일그러졌다.
“네. 그러면 우리 기사단 측에서 공작 각하의 의전을 담당하는 기사도 하나 보내겠네요. 아닌가요?”
통상적으로 수도의 귀족이 황궁과 함께 무언가 일을 진행할 때, 황궁 기사단은 귀족 측에 기사 하나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일종의 감시이자,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지. 뭐, 근데 그건 솔직히 말해서 다 사장된 전통이라.”
단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통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엥? 그런가?”
카시언은 세상 건실해 보이는 얼굴을 꾸며 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의전 기사로 선택받아야 했다.
의전 기사는 공작이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영역이니까.
외부 영지에서 올라온 귀족의 의전을 담당하는 기사는 전적으로 황궁에서 결정했다.
여기에는 귀족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미친 아나이스 공작이라면 어떻게든 손을 쓰려 할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의전 기사로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카시언이 진지하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럼 제가 직접 의전을 담당하겠습니다.”
“……자네가 의전을?”
로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시다시피 여기 있는 기사들 중에서 저의 의전 실력이 가장 뛰어난데요. 게다가 상징성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평민 기사, 카시언 그레이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비록 카시언이 안에서 새는 바가지일지언정, 밖에서는 전혀 새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의전 실력이 빼어나다는 것도 다 알기는 아는데…….
“자네 지금 사람 하나 죽일 표정인데…….”
‘변덕을 부리다 잠깐 아스텔에게 꽂힌 모양인데, 내가 눈 뜨고 지켜보는 이상 너 같은 잔인한 놈은 절대 안 돼.’
……라고 생각하던 카시언은 급하게 입매를 누그러뜨리며 활짝 웃었다.
“아아, 얼른 뵙고 싶네요, 너무나도 존경하옵고 친애하는 공작 각하를.”
카시언의 표정을 샅샅이 살핀 로파가 이내 감동한 표정으로 양손을 앞으로 기도하듯 모았다.
“하긴, 자네가 어디 맘에도 없는 말 할 군번이야?”
예, 그럴 군번입니다.
그러나 카시언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하는 성자처럼 성스러운 미소를 꾸며 냈다.
“그럼요, 잘 아시잖아요, 저.”
“오오, 신이시여…… 이 아름다운 충성심을 보소서.”
“아, 예. 신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면, 내 의전 기사로 그대를 추천하지, 카시언 경!”
계획대로였다.
“공작 각하의 컨트리 하우스 옆에 있는 집을 하나 내어 달라고 폐하께 요청 드리겠네. 그곳에서 직접 의전을 하는 게 좋겠어.”
바로 감시가 가능한 옆집이라.
계획보다 더 잘 되어 가고 있다.
씩 웃은 카시언이 조용히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중이었다.
언젠가 아나이스 공작과 제일 먼저 대결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미친 공작이 감히 아스텔에게 어떤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니까.
‘콘윌부터 조사하고, 그다음은 아나이스 쪽.’
얼마 전, 사술을 파헤친다는 신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나이스 공작의 행동을 지켜본 뒤, 그 신수의 목줄을 잡아채러 갈 생각이었다.
카시언의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