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1) (6/12)

Chapter 5. (1)

마침내 검술 대회 당일의 첫새벽이 밝았다.

새벽녘, 이른 잠에서 깨어난 나는 비장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타깝지만, 내게 공작님은 유력한 최종 흑막으로 의심되고 있었다.

공작님을 북부 최북단으로 상쾌하게 보내 버렸으니 이제 공작성 내부를 산책하면서 미리 준비했던 것들을 꼼꼼히 검수할 차례였다. 나는 제일 먼저, 대련장 내부의 약초 냄새를 맡아 보았다.

‘검술 대련장의 풀 하나까지도 전부 계획대로야.’

메일리 약초는 적당히 잘 사용을 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마법 계약서》의 최하단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벨이 가져온 은여우 가문의 계약서는 특별했다. 계약의 내용을 알아내려는, 그리고 계약의 내용을 강제로 알아낸 삿된 자의 진짜 이름이 적히니까.

그 이름을 덤덤한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나는 심호흡을 했다.

‘……분명히 잡을 수 있어.’

아직까지 내 계획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완벽해지려면 한 가지 보완책이 더 필요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보닛을 벗은 나는 환복을 도와주는 제니를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제니.”

“네? 뭔가요?”

“저,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요.”

나는 제니에게 어제 열심히 만든 백여 장이 넘는 전단지를 건네주면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제가 말씀드릴 때쯤, 콜로세움장 안에 꼭 붙여 주세요.”

“네? 이건 왜…….”

“그건…….”

나는 다시 고개를 기울여 제니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닥거렸다.

내 의뭉스러운 지시에 의아해하던 제니는 내 설명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짝, 쳤다.

“아스텔 님,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

“네, 좋은 일이죠?”

허점 없이 준비되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주 많이 떨렸지만 나와 제니는 서로를 마주 보고 환히 웃었다.

* * *

검술 대회는 해가 쨍쨍한 오후 두 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나는 평소 함께하던 몇몇 수인 시녀들과 치료사들끼리 모여 단란한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중간에 리카르도가 합류했으나, 다행히 다들 크게 불편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잔뜩 까치집을 지은 내 머리를 깔끔하게 단장해 주던 제니가 벌써 열 번째로 호들갑을 떨었다.

“공작 각하께서 검술 대회에 불참 의사를 표시하시다니, 기사들의 상심이 크겠어요!”

“아아…….”

“얼마나 급한 일이시기에 검술 대회를 빛내 주지 못하시는 걸까요?”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마침 오늘 치료소에 나갔다가 궁금했던 게 있었다.

“치료소장님은 어디 계세요?”

막내 치료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제부터 무단 결근이세요.”

“안 봐도 훤하다. 못된 꿍꿍이나 꾸미다가 산 채로 잡혀간 게지!”

리카르도가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을 더욱 꾸깃꾸깃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놈 그거, 그리될 줄 알았다! 뒷공작하다가 어디로 잡혀 들어갈 관상이었지.”

리카르도는 유달리 치료소장을 싫어했다. 물론 메일스 치료소장님이 나를 괴롭힌 전형적인 악인상이긴 하지만…….

그때 제니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혼잣말했다.

“오늘따라 불참하시는 분이 많네요?”

“리트로 경도 안 계시고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요즘 워낙 바쁜 시기이니 다들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거겠죠? 역시 아스텔 님은 똑똑하세요.”

샐리의 반짝거리는 바둑알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짜 치료소장님은 어디로 간 걸까? 검술 대회에서 윗선의 눈에 들려고 발악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떨떠름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하며, 로즈마리 잎을 우려낸 차를 한 잔 마셨다.

* * *

마침내 오후 두 시,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검술 대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과거, 수인들의 콜로세움장을 개조했다는 검술 대회 장소는 둥근 돔형의 지붕 아래로 검투극이 벌어지는 거대한 평지 무대, 그리고 관람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검뿐만이 아니라 마법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는 선대 공작이 직접 골몰해서 만든 장소답게, 이곳에서는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어. 미리 복용해 두었던 마법 약을 제외하고는.’

미리 먹은 마법 약의 효과까지 막을 수는 없기에,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들에 한해 도핑 테스트를 조금 더 철저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바첼 역시 이 장소에 아티팩트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터.

하지만 그는 메일리 약초를 먹었으니, 변신이 풀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고 들어설 만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앞을 응시했다.

곧 검술 대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 * *

검술 대회는 본선 1부와 2부 그리고 결승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선과 결승 사이에는 일종의 재롱 잔치와 비슷한 검무회가 있었는데, 각 가문의 후계자들이 검을 어떻게 다루는지 모든 기사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였다.

네 개의 가신 가문은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을 종종 해 왔기에, 가문을 대표하는 네 명의 후계자는 이번 검무회를 위해 스승을 두어 열심히 준비해 왔다.

그 검무회에는 나와 친밀한 아기 은여우 수인인 벨도 참여한다고 했다.

나는 검무회를 기대하면서, 검술 대회 본선 1부는 적당히 긴장을 놓고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치듯 흘려 보기에는 검술 대회가 너무 흥미진진했다.

“저건 뭐예요?”

“저 검술은 드리트니 라는 검사가 직접 만들어 낸 건데요, 검을 사용할 때 구름처럼 평온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해서 ‘구름 검법’이라고 한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을 베어 내는 검을 시선으로 좇았다. 싸우는 게 아니라 춤을 추듯 화려한 검술을 사용하는 자도 있었고 여러 개의 검을 동시에 쓰는 자도 있었다.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다채로운 검술 경기.

그러나 대단한 검사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은 있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모든 걸 파훼하고, 검술에 격투를 혼합해 독특한 검법을 창시해 낸 자.

에고 소드까지 지니고 있다는, 그러나 그 유명세에 비해 정체가 베일에 싸인 검사인…….

“확실히 마이어 경이 압도적이네요.”

“저분이 마이어 경?”

“아스텔 님은 그러고 보니, 마이어 경이 누군지 모르시죠?”

나는 눈앞에서 화려한 검무를 펼치는,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 같은 기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몰라요, 잘 알지.

“아뇨, 알아요. 유명한 분이잖아요.”

“아아, 역시!”

제니가 양손을 앞으로 그러모으며 작게 환호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제니와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걸 보면 마이어 경은 확실히 대단한 검사이자 실력자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원작에도 등장하지, 마이어 경은.’

그는 공작성의 모든 검술 대회를 포함해 제국 전역에서 펼쳐지는 대회란 대회는 전부 제패하는 사내였다.

모든 이들이 그를 제 수족으로 들이려 탐냈으나 안타깝게도 원작 속에서는 충성을 바칠 만한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 평생 외톨이 기사로 늙어 간다고 나와 있었다.

“이번에도 검술 대회의 레이디를 선발할 텐데요.”

“마이어 경이 우승하면 이번에도 레이디는 없겠지?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레이디가 뽑히지 않았잖아.”

검술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승자를 기리는 우승자의 파티에서, 우승자는 자신이 평생 섬길 레이디를 향해 기사의 맹세를 한다.

그러나 그간 여러 차례 승리를 차지했던 마이어 경은 ‘충성을 바치고 싶은 레이디가 없습니다.’라는 말로 파티장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절벽 위의 꽃일수록 더욱 탐이 나는 법.

다들 관심 없는 척, 아닌 척하면서도 마이어 경의 레이디가 되기를 꿈꿨다.

“아아……. 만약 마이어 경의 레이디가 된다면, 북부 전체에서 유명세를 타겠죠?”

샐리의 말에 제니가 핀잔을 주었다.

“북부가 뭐야? 제국 전체지.”

그들이 마이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제니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밝은 갈색 머리에 순둥한 강아지 수인 기사가 방금 막 탈락했다.

제니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중얼거렸다.

“치, 저 바보가 우승하면 화관을 씌워 준댔는데. 전 평생 검술 대회 레이디 될 일은 없겠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니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콜로세움장 전체를 비추는 햇살은 아름다웠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결투가 몇 시간째 이어지고, 어느새 본선 2부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이어 경.

놀라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과 바위처럼 거대한 근육질 몸매를 한 기사가 회장의 바깥, 관람석에 털썩 앉았다.

모두가 경외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게 이쪽 관람석에서도 보였다.

“진짜 대단한 사람, 아니 수인이긴 한가 봐.”

“그렇죠. 황야의 고독한 늑대 아니겠어요?”

시시덕거리는 잡담을 끝으로 마침내 검술 대회의 본선이 끝났다.

약간의 휴식 시간 후.

마이어 경과 그의 희생양이 될 어느 이름 모를 기사의 결승이 치러지기 직전, 검무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손에 땀을 쥐었다.

‘이제, 바첼이 올 거야.’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근처에 바첼을 포함한 검술 대련장의 기사들이 후계자 수인들을 보필하며 모여드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는 왜 몰랐을까. 저 선한 척하는 가면 뒤에 숨은 위선을.’

나는 바첼과 그 근처에 삼삼오오 모인 후계자 수인들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았을 때, 후계자들은 모두 바첼을 좋아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를 잘 따르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컨대.

“서, 선생님.”

바첼을 부를 때 조금 어깨가 축 처진다거나.

“칭찬해 주세요! 저, 저 이거 했어요!”

지나치게 칭찬을 갈구한다거나, 애정 결핍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

진중한 눈빛으로 바첼과 그를 따르는 후계자 수인들을 훑어보던 그때였다.

내 곁에서 숨도 쉬지 못한 채 검술 대회를 관전하다 휴식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호흡을 한 월렛이 불쑥 말을 걸었다.

“호오…… 아스텔 님의 은혜 덕분에 머리털도 나고, 공작성의 검술 대회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다니! 아스텔 님은 정말이지, 저를 구한 은인이십니다.”

“……그, 그 정도까지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월렛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준비한 발모제 덕분에 대머리 너구리에서 환골탈태했다.

전에 비해 머리숱이 비교적 빽빽해진 월렛은 오랜 시간 짝사랑해 온 쇼콜라티에에게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여러모로 연애 상담을 빙자해 공작성의 문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었다.

은혜를 갚고 싶다고 편지를 보낸 그에게, 나는 오늘 검술 대회에 관중으로 함께 참석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보냈었다.

그러니까 이제, 월렛을 초대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있잖아요, 월렛.”

“아, 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저기 훈장, 아티팩트 맞죠?”

“훈장이요? 아, 검술 스승 바첼의 훈장 말씀입니까?”

“네.”

나는 월렛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월렛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부산하게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 번 확인해 보죠.”

뒤뚱뒤뚱 걷던 월렛이 바첼의 근처로 다가가 안면이 있는 기사들에게 악수를 했다.

“이봐, 머리털이 꽤 자랐네?”

“하하! 그렇지!”

“고백할 건가?”

“……그, 그런 말은 말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당당해진 모습과 뿌듯해 보이는 표정을 보자 내 마음도 한결 더 훈훈해졌다.

그렇게 한참 담소를 나누던 월렛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바첼 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붙으며 그의 가슴팍을 힐끗힐끗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바첼에게 오 초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역시 그럼 그렇지, 하는 낯빛을 띠었다.

한 바퀴 순회 공연하듯 주변을 돌며 아는 기사들과 대화를 나눈 월렛이 다시 내 근처로 돌아왔다.

“가슴께의 훈장은 아티팩트가 맞습니다.”

“…….”

“보호용인 걸까요? 뭐, 기사들이라면 아티팩트 정도는 가지고 다닐 수 있죠.”

“네, 그렇죠.”

월렛의 말을 들으며 나는 바첼을 가만히 관찰해 보았다.

내 계획대로라면, 그는 지금쯤 나를 잡을 꿍꿍이를 짜고 있을 것이다.

우연일까.

내가 있는 관람석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바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환히 눈을 휘며 웃었다.

마치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듯 자신감이 진하게 어린 미소였다.

* * *

중간 휴식 시간이 끝났다.

드디어, 꼬마 후계자 수인들이 고사리손으로 검을 잡으며 열심히 준비한 검무회가 열릴 시간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오셨다면 더 열심히 할 텐데요, 그쵸?”

“그래도 각 가문의 가주께서 전부 참석하셨잖아!”

공작님이 왜 자리를 비웠는지 사실을 모르는 시녀들이 즐겁게 눈매를 휘었다.

그러나 룬만큼은 주먹을 꾸욱 움켜쥐고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본선 때는 내내 잠들어 있더니 이제 활기가 도는 듯했다.

“아부! 온다!”

룬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방긋 웃었다.

“아부가 뭐야? 노래 부르는 거야?”

그러나 룬은 시선을 피하며 답해 주지 않았다.

“곤잔님 보고 시퍼.”

……룬은 참 이상하게도 공작님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공작님은 어쩐지 룬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어색하게 룬을 고쳐 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

색동옷을 예쁘게 입은 룬이 내 품에 쏙 안겨 들었다.

보호 장구를 이미 여러 겹 착용시킨 상태였지만, 이 자리는 마법 아티팩트가 무효화 된 상태라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아이만 혼자 방 안에 두고 올 수는 없었으니까.

‘아기야, 미안해.’

나는 룬을 품에 쏙 끌어안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너의 안전을 걸고 모험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모두 다 같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도 공작성으로 온 뒤부터 룬의 양 뺨이 토실토실 고와져서 다행이었다.

“건강해지자, 응?”

그렇게 룬을 안아 들고 한참 어르는데, 검무회 시작이 가까워지면서 잔뜩 신이 난 듯한 벨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스-텔-!”

나도 즐겁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해 주었다.

소심한 성격이 걱정이라더니. 지금의 벨은 몹시 용감해 보였다.

“멋진 검무 기대해!”

용기를 나게 해 주는 물약을 잔뜩 마셨는지, 벨은 굉장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다.

즐거워 보이기는 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얼굴이 새하얬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파리하게 질린 안색의 벨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 * *

후계자 수인들의 검무회는 모두의 예상만큼이나 화려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키가 작은 꼬마들이 제 키만 한 장검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연습한 군무를 선보였다.

‘너무 귀엽잖아.’

나는 검을 가지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것도, 그게 저토록 아름답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휘이익!

하늘을 가를 듯 허공에서 움직이는 검의 곡선을 시선으로 따라가자, 마치 마법에 홀리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쪼그마한 어린아이들의 검무라 그런지 조금의 위협감도 없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진짜 귀여워!’

그 순간이었다. 한창 검을 유려하게 다루고 있던 은여우 수인, 벨이 우뚝 멈춰 서더니 잠시 허청거리다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벨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몽롱했던 머릿속이 쨍하게 밝아졌다. 옅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아리송했던 몇 가지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며 그림이 명료해졌다.

바첼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면, 분명 검술 대회 날에 어떤 행동을 취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짐작하지 못했었는데…….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그는 최근 들어 나와 친밀하게 지낸 은여우 수인 후계자, 벨을 이용해서 나를 제거할 속셈인 것이다.

‘어떻게 감히 어린아이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나는 이를 악물고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쁜 새끼. 넌 내가 꼭 응징하고 만다.’

쿵, 하고 둔탁하게 쓰러진 벨의 상황에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벨!”

그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으로 인해 분위기는 더욱 소란스럽게 바뀌었다.

벨은 콜로세움장 무대 중앙에서 내려져 치료사들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검술 대회는 잠시 중단이 되는 건가?”

“……그런데 공작 각하께서 안 계시잖아. 그럼 대회 진행 결정은 리카르도 님께서 하시려나?”

그 소리에 리카르도가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에 시선을 맞추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리카르도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치료는 하고, 속히 진행하도록 하마.”

리카르도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치료를 받고 있던 벨 곁에서 머무르던 바첼이 단정하게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는 나와 리카르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나는 룬을 샐리와 제니 쪽으로 넘겼다.

룬은 잠시 칭얼거렸지만, 곧 그들을 따라 콜로세움장을 빠져나갔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제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바첼은 리카르도의 호통에도 굴하지 않고 선량한 체하며 말했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벨 님의 사고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것 같더군요.”

그 말을 하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 바첼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바첼은 별 대답이 없는 나를 힐끗 보고 한껏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을 했다.

“메일스 치료소장님께서 증언하시기를……. 오, 이런.”

주변을 둘러본 그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치료소장님이 안 계시는군요.”

하지만 바첼에게도 치료소장은 그리 도움이 되는 패가 아니었던 것 같다.

빠르게 평온을 되찾은 바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소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예, 이 자리에는 안 계시는 메일스 치료소장님께서 전날 제게 《진료 차트》를 보여 주셨습니다.”

“진료 차트를요?”

치료사들이 벨에게 모여 응급 처치를 하는 사이, 바첼은 모두의 이목을 자신에게 끌어모았다.

“예, 저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치료소장님께서 어떤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상당히 뱀 같은 혀였다.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척하면서 모든 부담과 책임을 치료소장에게 넘기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죄과가 밝혀진다면 그 역시 대가를 치르기는 하겠지만 치료소장만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바첼을 눈에 담았다.

“이 자리에 계시는 아스텔 님께서…….”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소심한 나로서는 이목이 집중되는 이 상황이 조금 떨렸다.

“네, 제가요.”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이 모습이 지금 나를 향한 이들의 눈에는 매우 의심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벨 님께 따로 ‘용기를 주는 물약’이라는 것을 처방했다는 사실을요.”

“네, 맞아요. 개인적으로 드렸죠.”

내가 당당히 수긍하자 바첼의 턱이 더욱 높이 치켜올라갔다.

‘걸려들었구나!’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벨 님의 진료 차트를 보면 아시겠지만, 용기를 주는 물약에는 카카오 열매와 환각을 유발하는 모르티나 액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어진 바첼의 설명에 관중석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않자 리카르도가 나보다도 더 역정을 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 여린 애가 그랬을 리가 있냐?”

그제야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벨 님이 진짜로 ‘그 액체’를 드셨다면 한 시간 안에는 깨어나시겠죠. 환각제니까.”

“깨어나시겠지만, 앞으로 영구적인 부작용이 남을 겁니다. 모르티나 액체는 극소량이어도 위험 물질이니까요.”

모두의 싸늘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원체 수인들이 인간을 싫어하는 탓인지, 내 예상보다도 현장에서 느껴지는 적대감이 강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바로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았다.

실제로 당장 이 자리에서 끌어내 죽이라고 소리치는 자들도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샘의 사기 아티팩트를 문질렀다.

“아시다시피 진료 차트는 충분히 조작할 수 있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했다시피 정말 모르티나 액체라면 한 시간만 기다리면 됩니다. 조금 전 대회만 해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죠? 한 시간이면 그보다 금방입니다.”

나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리에 모인 여러 수인들의 적대감이 조금씩 해소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제 죗값은 정확한 진단이 나오고, 벨 님께서 깨어나신 뒤에 치러야 하지 않을까요?”

말재주 없는 나도 사기적인 언변술사로 바꾸어 주는 멋진 아티팩트.

덕분에 나를 포승줄에라도 묶을 것처럼 흉흉하게 노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풀 꺾였다.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나를 노려보던 바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엿 먹이고 변명하기도 전에 처리할 계획이었나 본데.’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갔다.

벨은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참관하는 앞에서, 치료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바첼도 나도 손쓸 수 있는 게 없었다.

바첼은 모두가 벨에게 시선이 팔려 있는 사이, 내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 살벌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바람잡이 놈의 것, 갖고 있지. 여기서 어떻게 사용한 거냐.”

그제야 나는 움찔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그 어떤 아티팩트도 사용할 수 없다.

수인들의 시선에 졸아붙은 나머지, 샘의 아티팩트에 손이 간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내가 용기를 내서, 여론을 바꾼 것이다.

진정한 플라시보 효과였다.

* * *

다행히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것만 같은 사태는 조금 누그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과한 액션을 할 필요는 없었다.

벨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굳이 과한 행동을 해 약점 잡힐 빌미를 내보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상황을 관조하는 게 더 나았다.

그에 따라 다시 관중들이 수군거리며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치료사들 틈으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반 시간이 흐른 뒤.

벨 님을 치료하던 치료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벨 님께서 드신 것은 모르티나 액체가 확실히 맞습니다.”

그 말에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무수히 많은 수인들이 나를 불신하는 말을 마구 토해 냈지만, 나는 계속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미친 건가?”

“그래 놓고 아까는 뭐? 어찌 저리 뻔뻔하게!”

다행히 검술 대회의 총괄 격으로 참여해 주었던 리카르도가 곁에서 나를 든든하게 비호해 주었다.

“입 냄새 나는 아가리들 닥쳐라. 시끄럽구나!”

그 소리에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은여우 가문의 가주의 얼굴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수도에서라면 모를까 북부에서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한 데다 은근히 멸시당하는 종족인 인간이 감히 4대 가신 가문의 후계자를 건드렸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내 바로 앞의 관람석에 앉아 있던 애꾸눈 치료사 하나가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공작 각하의 은인만 아니었어도 즉결 처분일 텐데, 운이 좋네?”

“감옥에 가둬 두고 문초를 하는 게 어떨까요.”

확실히 나에 관한 부정적인 말들은 아주 잘 스멀스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물론, 다 예상하고 각오했던 일이라지만 나에 대한 반발을 직접 귀 따갑게 듣는 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귀마개를 준비했지!’

나는 샐리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던 귀마개를 귀에 쏙쏙 끼워 넣었다.

이제 누가 내 앞에다 대고 뭐라고 해도 난 무적이다.

나에 관한 온갖 흑색 비방이 난무하는 삼십 분이 흐르고, 검술 스승 바첼이 이마의 땀을 수십 번씩 닦고 난 뒤에야.

벨이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우웅…….”

기력이 허약해진 꼬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귀마개를 뺐다. 내 귓속으로 치료사들이 한입으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벨 님이 평소 보였던 행동과, 모르티나 액체를 먹은 자의 행동도 확실히 동일합니다.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셨고, 심장이 거세게 뛰는 만큼 용감해지셨으니까요.”

바첼이 얄밉게 끼어들어 말했다.

“용기니 뭐니 빙자해 은여우 가문의 후계자를 해할 목적이었겠죠. 인간이 아닙니까.”

말을 끝낸 바첼은 몹시 더운 듯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며 셔츠를 펄럭거렸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옆에 제복이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보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네요.”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나는 관람석에서 몸을 일으켜, 회장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지만, 우리 가문을 망친 놈을 잡아낸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용기가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손목 아래의 소맷귀에 숨겨 두었던 또다른 자그마한 아티팩트를 꺼냈다.

“리카르도 님께서 제게 주셨던 녹음 아티팩트입니다. 이 아티팩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

“……바로, 영상 녹음 기능까지 되는 최신판이란 것입니다.”

나는 리카르도가 과거, 내게 선물해 주었던 녹음 영상구 아티팩트를 손에 들었다.

마법 사용이 불가능한 곳일지언정, 단순한 재생 정도는 가능했다.

이내 영상구에서 화면이 떠올랐다.

‘용기를 주는 물약은 모르티나 액체가 아니에요.’

‘그, 그럼요?’

‘냄새도 안 나죠?’

영상구 안으로 벨이 눈을 커다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플라시보 효과였어요. 지금까지 벨 님이 용기를 낸 건.’

‘……그럼 난 원래 용감한 사람인 건가?’

‘네, 벨 님은 원래 용감한 사람이에요.’

‘그럼, 용기를 내서 아버지와 친해진 것도 내가 직접 한 일이야?’

‘네!’

모두가 사랑해마지않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졌다.

내 확고한 대답에 까르르하는 웃음소리조차 영락없는 벨의 것이었다.

그러나 바첼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녹음 아티팩트쯤이야 당연히 조작을 할 수 있죠.”

“네, 그렇죠. 하지만 증거가 하나 더 있는데요.”

나는 그대로 콜로세움장의 중앙에 선 바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검술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많이 더웠던 듯 이마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딱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상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바첼 님, 많이 더우신가 봐요.”

내가 간격을 좁히자, 우리 사이는 채 1m도 남지 않았다.

나는 땀을 뻘뻘 내며 경직된 그의 모습을 마치 악당처럼 가소롭다는 듯이 응시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보았다.

그의 녹색 빛깔 머리에서 파밧, 하는 빛이 튀었다는 것을.

“제가 다시 한번 여쭈어볼게요.”

“…….”

그 말과 동시에 녹빛 머리는 뿌리부터 서서히,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방점을 찍듯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검술 스승, 바첼이라고요?”

그의 얼굴이 땀방울과 함께 녹아내리듯 무너지자 서서히 얼굴의 형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하늘빛 머리와 눈 아래에 자잘한 검흔이 엿보였다.

‘드디어 내 물약이 효과를 보고 있어.’

사실 나는 미리 검술 대련장 인근 메일리 약초 위에 변용 물약을 뿌려 두었었다.

약초의 생김새나 향기는 변화시키지 않지만, 약초 자체의 효과를 변화시키는 물약이었다.

메일리 약초의 효능은 서서히 제거하고 몸에 열이 나게끔 바꾸어 두었다.

바첼의 진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콜로세움장의 모든 사람들이 히익, 소리를 냈다.

황당하게도 바첼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런 당연한 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아스텔 님? 이런 것이 혹시 시간 끌기의 일환인가요?”

거울도 없고 자신의 모습을 비출 만한 것도 없다.

그런 그는 자신의 외형이 달라졌다는 것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답했다.

“아뇨, 시간 끌기는 아니에요.”

이제 완벽히 복수할 차례가 왔다.

나는 내 등 뒤에 있던 샐리를 향해 눈짓했다.

샐리는 내 요청에 따라, 제니가 미리 콜로세움장 내부 곳곳에 붙여 놓은 현상금 포스터를 가리키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바첼은 무슨. 당신, 대도둑으로 유명한 이보르잖아?”

사람들의 그 말에 관중들의 시선이 주변에 붙은 포스터에 쏠렸다.

굳이 포스터가 없었더라도 워낙 유명한 범죄자이다 보니,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많았다.

“진짜 저놈 대도 이보르 잖아!”

“……남의 집 터는 것만 100번 넘은 사기꾼 새끼 아냐?”

“저딴 버러지가 어떻게 공작성에 있어?”

뒤늦게 바첼이 제 얼굴을 급하게 매만져 보더니 손끝에 걸리는 검흔을 꾹 눌렀다.

그가 이를 딱딱 소리 내며 부딪혔다.

“……이런, 미친. 도대체 왜……!”

그 말만으로도 자신이 현상 수배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꼴이었다.

사실상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나체로 서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

바첼과 함께 지냈던 기사들이 배신감에 흉악한 기운을 뽐냈다.

“변신약을 쓴 건가?”

“무, 무슨…….”

“그러면서 남을 섣불리 모함해?”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주춤거렸지만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 콜로세움장은 마법이 통하는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공작 각하께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지만, 이 자리에는 기사들도 마법사들도 바글바글하지 않은가.

퇴로는 완전히 차단된 형국이었다.

바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 자신이 벌인 일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모색할 요량이겠지.

하지만 나는 퇴로를 마련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마저 이었다.

“벨 님의 생명까지도 해치려 든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저 바첼, 아니 범죄자 이보르예요.”

사람들이 연신 수군거렸다.

바첼의 얼굴이 다 가짜였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만큼, 이 자리의 승기는 내게 넘어온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여전히 떨리고, 긴장되어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질 지경이었지만 반드시 할 말은 해야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리트로 경의 이보르 수색 일지를 공개했다.

“공작성 근방의 경비를 자임한 리트로 경이 이보르 수색 일지를 보내 주셨어요.”

“이익…….”

“저 범죄자, 이보르가 가장 최근에 도둑질을 한 곳은 팡파니아 저택. 그는 그곳에 자신의 표식을 남겼죠.”

이보르는 단순한 도둑질을 넘어 북부의 경비대를 농락하듯이 여기저기 제 표식을 남겨 댔다.

그가 팡파니아 저택 여기저기를 들쑤셨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나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팡파니아 저택에서 사라진 것 중 가장 특별한 게 바로 ‘모르피나 액체’예요.”

“…….”

“팡파니아 저택에 남겨 둔 표식에는 저자의 것과 동일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질 테니, 확인해 보세요.”

퇴로까지 차단당한 이보르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형형한 눈빛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안심하지 마. 아직 한 발 남았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이건, 벨이 쓰러지자마자 막 깨달은 사실이었다.

“……뭐?”

“이상하게도 벨 님은 항상 메일리 약초의 냄새를 풍겼어요. 왜냐하면 스승인 바첼 님이 늘 대련장 근처에서 메일리 약초를 재배했으니까.”

나는 완벽하게 이보르의 모습으로 돌아온 바첼을 향해, 그를 구속하러 들어오는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갓 딴 메일리 약초는 변신 물약의 가장 중요한 재료고, 몸에 해롭지는 않으니 벨 님이 호기심에 먹었을 수도 있겠죠.”

모든 심리를 간파당한 바첼이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르피나 액체와 메일리 약초가 결합하면, 몇 개월 이내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죠. 그래서 ‘고요한 살인 물약’으로도 불려요.”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새하얀 머리털을 휘날리며 내게 걸어왔다.

그가 시뻘건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럼 내 아들이 믿고 따랐던 검술 스승이, 내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입니까?”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바첼의 눈빛이 나를 찢어 죽일 듯 살벌해졌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아까 앉아 있던 회장의 내부 관람석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제복을 슬그머니 집어 들었다.

곧장 훈장을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기사들을 향해 옷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요, 여기 범죄자의 의복도 가져가세요!”

그도 귀중한 훈장 아티팩트를 항상 곁에 두려 하겠지만, 샘만큼은 아닐 거였다.

그러니 콜로세움장이 지나치게 더워지거나, 땀을 많이 흘린다면 분명 아티팩트가 달려 있는 제복의 겉옷을 잠깐 벗어 둘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한 내 추측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제 바첼이 난동만 안 부리면 될 텐데.’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바첼을 끌고 가던 우락부락한 기사들도 모두 얼어붙듯 걸음을 멈출 만큼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건가?”

환히 웃던 나마저 얼굴을 경직시키고 고개를 빳빳하게 굳게끔 만드는 소리.

소리의 주인공은 방금 막 콜로세움장에 도착했지만 한눈에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한 듯한, 공작님이었다. 아주 건조하고 낮았지만, 이 드넓은 공간을 울릴 정도로 명확한 목소리.

“내 성에서 이딴 개 같은 짓거리가 벌어질 줄이야.”

아나이스 공작님이 도착한 것이다.

‘공작님이 어떻게 벌써 이 자리에 도착하신 거지?’

매머드 삼십 마리를 잡으러 가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만약 아나이스 공작이 최종 흑막이라면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모두 틀어지게 된다.

당장 이 손에 있는 아티팩트부터 빼앗기게 될 테니까.

온갖 복합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싸늘한 분위기의 공작님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표정이 없는 무심한 입매가 일자로 굳어져 있었다.

순간적인 공포에 나는 숨을 급하게 참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그의 뒤에서 리트로 경이 헉헉거리며 뛰쳐 들어왔다.

“괴, 괴물이야…….”

“……?”

“공작 각하께서……. 반나절 만에 매머드 서른 마리를 때려잡고 가죽을 만들어 오셨다고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써요?”

……맞다, 저건 내 부탁이 맞았다.

그리고 내 판단 착오였다.

아무리 공작님일지언정 매머드 서른 마리를 반나절 만에 잡아 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리트로 경의 말에 나를 포함해 모든 이들의 낯이 시퍼래졌다.

물론, 끌려가던 바첼의 안색은 거듭 시뻘게졌다 새하얘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모두가 경악한 와중에도 아나이스 공작은 냉정했다.

“감히…… 내 성에서, 내가 아스텔 님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그는 나를 향해 오던 걸음을 틀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곧게 세운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공작님은 저벅저벅 걸어 바첼의 바로 앞에 섰다.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개 같은 짓을 벌인 이자를 화형을 해야 할지.”

……나는 깜짝 놀랐다.

공작님의 서늘한 시선을 받은 탓일까.

바첼은 오금이 저리는 듯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면 그대로 땅에 묻어야 할지. 매머드처럼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죽일지…….”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참, 흥미진진하게 고민이 되는군요.”

공작님은 그간 봐 왔던 것과 비교 못 할 정도로 잔혹한 얼굴을 한 채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쟤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공작님의 반응이 지나치게 과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낮게 속삭였다.

“껍질은 너무 과하지 않……나?”

물론, 혼잣말 수준이었다.

콜로세움장 안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곁에 있는 자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그마하고 가느다란 목소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작님의 시선이 단번에 내 쪽에 닿아 왔다.

“…….”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눈빛이 조금 슬퍼 보이는 것도 같았다.

우리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가만히 멈춰 감정을 누르며 갈무리하는 듯하던 그가 바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닥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으, 윽.”

마법에라도 걸린 건지, 바첼은 더 이상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열 받으니까.”

바첼이 바닥을 구르며 입술을 실룩였지만 틈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말을 못 하게 입까지 딱, 막아 놓을 줄이야.

‘그런데 왜…… 하필 말을 못 하게 해 뒀지?’

어찌 됐든 난 오늘,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바첼을 처리하고, 벨을 구하고, 아티팩트를 손에 넣는 등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룬 내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려던 그때였다.

일어난 벨의 건강을 챙기면서 눈치를 보던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늘부로 그대는 우리 가문의 은인이시구려.”

“……네?”

당황한 내 손을 덥석 잡은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보니 그의 눈가가 조금 붉어진 듯했다.

“덕분에 우리 벨이 못된 짓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 뭐요.”

“그게…… 은인까지는 아녜요. 전혀 그렇지 않…… 아요.”

“은인까지는 아니라니, 그렇지 않소. 내 아들이, 우리 가문의 후계자가 까딱하면 죽을 뻔했소이다! 내, 나중에 사례하리다. 필히 기다리시오.”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콜로세움장 외부로 끌려 나가는 바첼을 보며 혀를 차던 몇몇 수인들은, 이제 나와 은여우 가문의 가주 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눈치였다.

내 귓가에 웅성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공작 각하도 구하고, 리카르도 님도 구하고, 이젠 은여우 가문의 후계자까지 구한 거지?”

“……안 그래 보이는데, 인정할 때가 됐어. 저 인간은 꽤 대단해.”

“그뿐이야? 천재가 아닌가 싶을 지경이야, 지금은!”

천재라는 말에 어깨가 으쓱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 어쩌면 인간 중에도 괜찮은 인간이 있었던 거야…….”

“은여우 가문도, 재규어 가문도, 하다못해 공작 각하께도 은혜를 입혔으니……. 저 정도면 우리 공작성 전체의 은인 아니야?”

노력이 보답받는 건 기뻤지만 저 정도의 찬양은 과분하게 느껴졌기에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무시무시한 눈길을 느꼈다.

“…….”

모두가 시끄럽게 웅성대던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이어 경만이 우뚝 선 산처럼 나를 우직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어떤 강렬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던 것 같기도…….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안고 그쪽을 마주 보았다.

저 사람이 나를 저런 눈빛으로 째려보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혹시 저 사람이 마지막 첩자인가? 바첼의 원수를 갚으려고?’

그는 내 의심 섞인 눈빛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길만이 한결 더 강렬해졌다.

‘……마이어 경, 조사해 봐야겠어.’

나는 손발을 조심스럽게 꼬물거리면서 퇴장할 준비를 했다.

은여우 가문의 가주가 씩 웃으며 나를 향해 낮게 말했다.

“우리 가문은 은원을 잊지 않지. 마법 아티팩트에 관심이 꽤 있어 보이는데…….”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나를 훑었다.

“조만간 긴히 뵙겠소이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한 뒤 제 아들인 벨을 안아 들고 멀어져 갔다.

눈을 비비던 벨이 제 아버지와 그 옆의 어머니에게 꼭 안겼다.

그 순간 가족이란 저런 거구나, 라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뷔에트리 백작가에서 자랐던 유년기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 나는 평민 아이들처럼 흙장난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고풍스러운 어머니의 드레스에 진흙을 묻히고는 했었다.

‘엄마아, 저 그냥 안겨도 돼요? 안 씻었는데!’

‘그럼, 어서 와.’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잊고 있던 어머니의 포근했던 품과, 따뜻한 온기.

너무 어리광을 받아 주면 못되게 큰다고 고발하는 오빠의 목소리도…….

‘어머니, 저 못난이 버릇 나빠져요!’

당황스러워했던 유모의 목소리까지…….

‘아이고, 아가씨! 얼른 나오셔요!’

하나씩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과거를 아는 사람 중에 살아남은 것은 이제 오빠뿐이었다.

나는 애써 생각을 분산시키기로 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제 오늘 얻은 아티팩트도 분석해야지.

앞으로 첩자 한 명만 더 잡으면 된다. 모든 게 잘 끝나고 나면 오빠한테 자랑해야지.

이능력자를 잡았다고 말을 하면 오빠가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바첼을 기사들 손에 들려 보내고 묵묵히 있던 공작님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공작님은 금방이라도 비속어를 쏟아 낼 것처럼 차가운 낯빛이었다.

그 차가운 얼굴에 한 번 쫄아 붙은 나는 훈장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공작님은 그런 것 따위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스텔.”

나를 호명하면서 그는 천천히 내 앞으로 허물어지듯 몸을 기울였다.

“걱정했습니다.”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혹시 각인 때문에, 내가 열이 날까 봐, 오늘은 무리한 것 같아 보여서 그러는 걸까.

나는 그가 내 품 안에 있는 아티팩트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두려워서 몸을 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제가 무리했을까 봐요? 괜찮아요. 공작님, 저…… 안 아픈데…….”

그 역시 지금쯤이면 내 상태가 아주 멀쩡하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끌어안으며 맞붙은 몸에서 열이 전달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공작님은 나를 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바짝 붙으면서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안아 주고 싶습니다.”

“…….”

“마음을 다쳤을 테니까요.”

그렇게 따뜻하게 말하면…….

마음의 경계심이 또다시 한 꺼풀 벗겨졌다.

늦게 왔음에도 내가 벨을 공격한 자라 몰렸던 상황에 대해 이미 다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이지 않기 위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숨겨 둔 아티팩트가 느껴지지 않게 조금의 거리를 벌린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속삭였다.

“……저, 마음 안 다쳤어요. 나쁜 말은 별로 신경 안 써요.”

우연히도 내가 이마를 기댄 곳은 그의 심장께였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점점 더 가속도를 높여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거짓말이었습니다.”

“…….”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내 귓전에 맴돌았다.

“제가 안고 있고 싶어서요.”

더욱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내 마음까지 알쏭달쏭하게 뒤흔들었다.

공작님은 조금 이상하다. 분명히 무심하고 냉정하고 나쁜 사람 같은데. 공작성을 넘어 제국 수도에 퍼진 소문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성격이 삐죽삐죽 모난 분 같은데……. 묘한 데에서 솔직하고, 이상한 데에서 섬세했다. 그런 솔직함과 섬세함이 자꾸 내 마음을 콕콕 찔러 왔다.

그래서 나도 자꾸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됐다. 나는 둘 데 없어 어색하게 허공에 붕 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로 내렸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아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겨 보았다. 차가운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그 순간 내 귓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환각? 망상? 헛것?”

그러고 보니 콜로세움장 중앙 무대에서 공작님과 포옹한 거잖아!

생각지도 못한 일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나, 공작님은 나를 더 세게 옥죌 뿐이었다.

* * *

뜻밖의 사건 때문에 검술 대회 이후의 일정은 모두 중단되었다.

검술 대회의 결승은 내일 오전 중에 비공개로 재개하기로 했고, 애프터 파티는 예정대로 진행되기로 했다.

나와 공작님, 그리고 룬은 델피니움 룸 안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결국 검술 대회 결승은 못 보게 되었네요.”

나는 그 사실에 조금 아쉬워했지만,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공작님이었다.

그가 이를 으득, 갈며 중얼거렸다.

“예,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겠군요.”

나는 잠시 흠칫했다.

그는 턱을 악문 채 계속 중얼거렸다.

“매머드를 전부 처리하고, 검술 대회의 마지막에 모두의 앞에서 검무를 보이려 했는데.”

나는 잠시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고민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파급력은 컸다.

“이런 식으로 일정이 취소될 줄이야.”

공작님이 진짜 검무를 춘다니, 말도 안 되잖아.

나는 처음에 공작님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가볍게 웃을 생각이었다.

……그의 진지한 눈빛과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허, 헙.”

아니, 공작님이 진심으로…… 검무를 선보일 생각이었단 말이야?

도대체 공작님이 왜?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잡고 입을 열었다.

“그럼, 검무를 추는 것을 원하시면 다시 결승전 이후에 일정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요?”

공작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바첼도 잡혔고, 그의 배후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은여우 가문에서 전적으로 맡아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공작님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아스텔은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검술 대회 결승에도, 최종 검무회에도 오면 안 됩니다. 무리할 생각은 마세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거랑, 공작님이 검무를 추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낼 새도 없이 공작님이 스산하게 미소 지었다.

“아스텔은 일단 들어가 쉬십시오.”

“공작님이야말로 매머드 삼십 마리 잡느라 힘드셨을 텐…… 데.”

아닌가?

매머드가 힘들었을 거라고 걱정해야 하는 건가?

너무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조금 헷갈렸다.

금세 스산한 미소를 거둔 공작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과한 겸손이라고 손사래를 쳤을 텐데 공작님이 저렇게 말하니까 믿어졌다.

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님은 화제를 전환했다.

“바첼의 처분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아스텔을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감히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나를 능멸하고 조롱할 계획이었다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아리송해진 나와 달리 공작님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배후를 알아낸 뒤…… 다른 곳으로 추방할 예정입니다.”

“아, 추방형을 받았구나…….”

“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하지 못하게, 유배형도 함께 내릴 겁니다.”

저승으로 추방해 버릴 것처럼 살벌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추방과 유배라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내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룬이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마자! 마따!”

“너 이 녀석, 형벌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장난스럽게 꾸짖자 내 무릎에서 내려온 룬이 아장아장 걸어 공작님의 찻잔을 왈칵 움켜잡았다.

“바부!”

나는 다른 의미로 조금 경악했다.

“아, 아기야. 공작님께 그러면 안 돼. 바, 바보라니.”

“애 안대?”

“무례니까…….”

공작님의 서늘한 시선이 룬 쪽을 훑었다.

“히힛.”

그러나 룬은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 그를 향해 귀엽고 예쁜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기야, 명을 독촉하면 안 된단 말이야. 아직까지는…….’

대화가 끝날 무렵, 나는 바첼이 놓고 간 훈장 아티팩트가 담긴 주머니를 꾹 움켜쥐었다.

공작님이 이 자리를 떠나면, 월렛을 만나 분석을 의뢰할 계획이었다.

“그럼, 이제 푹 쉬십시오.”

“……아, 네.”

“저도 쉬러 가 보겠습니다.”

공작님이 몸을 우아하게 일으켰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 앞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러나 공작님은 복도 옆쪽으로 가는 대신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산책을 하시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첼은 아직 살아 있었다.

피떡이 된 얼굴을 한 그는 진지하게 골몰했다.

도대체 그 여자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안 거지?

보통의 치료사가 아닌 것 같은데, 정체가 뭐지?

혹시, 자신이 벌인 모든 짓을 눈치챈 것인가? 아니면 내부 고발자가 있었나?

자신이 잠시 벗어 놓은 제복을 다른 녀석이 수습했을까?

진지한 생각에 잠겨 있던 바첼은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마법 구속구 탓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없었다.

선대 공작이 직접 설계했다는 이 감옥은 그의 역량으로는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제기랄…….

그냥 평범한 좀도둑으로 적당히 살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던 바첼은 저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 더 서늘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옥의 문이 비스듬히 열린 것이다.

간수인가? 아니면…….

그 순간, 선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뒤덮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

아나이스 공작이었다. 감옥 안에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 살려 주시면 배, 배후를 밝히겠…….”

순간 바첼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아나이스 공작은 그의 주인보다 강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으로,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공작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그딴 건 필요 없습니다.”

눈앞의 사내가 픽 웃었다.

“나는 지금 화풀이를 할 상대가 필요하거든요.”

끼이익.

불길한 소음과 함께 감옥의 문이 닫혔다.

* * *

이틀이 흘렀다. 지난 이틀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일 먼저…….

“바첼이 글쎄, 죽었대요!”

……바첼이 저승으로 추방당했다.

“자진했다네요. 멍청한 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려온 그 끔찍한 소식에 몸이 떨리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바첼이 죽지 않으면 나나 우리 오빠, 그리고 룬이 죽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차갑고 딱딱해졌다.

“검술 대회 우승자는 역시 마이어 경이래요.”

“오…….”

“이번에도 마이어 경의 레이디는 없겠죠. 아아, 궁금한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티 푸드를 하나 먹었다. 솔직히 마이어 경의 레이디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오직 첩자뿐!

‘남은 자는 하나. 첩자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리스트를 뽑고, 훈장 아티팩트도 분석해야 해.’

나는 티푸드를 부술 듯이 손에 쥐었다. 손에서 파삭, 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바첼, 아니 이보르가 남기고 간 아티팩트를 분석하려면 월렛을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난관에 부딪쳤다. 검술 대회 이후로 나에 대한 공작님의 과보호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전속 시녀들을 제외하고선 수인들이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월렛을 만나야만 했고, 그를 조심스럽게 초청하려 했다.

‘왜 그자를 만나려는 겁니까?’

‘아, 그게…….’

공작님은 만남의 목적을 궁금해했으나, 나는 솔직할 수 없었다. 경계심이 물러진 것과 별개로 아티팩트에 관한 것을 공작님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공작님은 나를 믿고 월렛을 불러 주었다.

그 결과, 드디어 나는 방 안의 테이블에 월렛과 마주 앉았다.

“잘 지냈어요?”

“어이쿠, 그렇소만. 머리도 많이 자랐고!”

싱글벙글 웃은 월렛이 삐죽삐죽 털이 솟은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나는 본론을 꺼내 놓기로 했다.

“자, 이 아티팩트를 조사해 주세요.”

월렛과 함께 훈장 아티팩트를 조사할 생각이었다.

“이것, 자세히 좀 봐야겠는데.”

상념을 끊어 낸 나는 월렛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거 참…….”

월렛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이 녀석도 자세히 연구를 해 봐야겠습니다. 일단은 이 아티팩트와 다른 곳으로 연결된 사악한 고리는 망가뜨려 뒀어요. 확인해 보십시오.”

나는 그가 건넨 아티팩트를 받아 들고, 훈장 안에 작게 새겨진 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확인해 보았다.

샘의 브로치 아티팩트처럼, 훈장의 안쪽에도 삼각형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기, 변신, 공포. 라는 고대어가 쓰여 있었다.

사기와 변신은 사실상 파괴되었고, 공포는 아직 건재했다.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그를 향해 물었다.

“저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아아……. 검술 대회가 끝나면 애프터 파티인 ‘라 보엠’을 하지요?”

라 보엠은 통상적으로 검술 대회의 애프터 파티에 붙는 명칭이었다.

“아,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월렛이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밝게 웃었다.

“그럼 그날로 할까요?”

“좋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렸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점점 심화되고 있어. 아티팩트를 분석하다가 혹시 월렛한테 문제가 생기면 큰일인데…….’

샘의 아티팩트를 빼앗았을 때는 내 정체조차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렇다 치고, 지금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발모제로 내게 말려든 월렛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그랬다.

오빠가 복수를 진행하는 동안, 오빠의 주변 지인들은 많이들 목숨을 잃고는 했다.

“저기, 월렛.”

“예?”

“혹시 주변에 수상쩍은 사람이나 수인이 나타나면 제게 제일 먼저 말해 주세요.”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그에게 건네려 했다.

“허어, 이거 보안용 아티팩트죠?”

“아, 네. 맞아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척 내밀어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절 뭐로 보시는 겁니까?”

“……예?”

“전 아티팩트 감정 및 분해 업무를 하면서, 목숨의 위협, 수백 수천 번은 겪어 봤습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맞는 말이었다.

피가 난무하는 원작 속에서, 온갖 사람에게 의뢰를 받으면서도 그는 죽지 않았다.

카시언뿐만 아니라, 잔챙이에서부터 굵직한 악역까지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았다.

이용하거나 죽이기 위해서.

그러나 그는 그 어떤 함정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그는 주인공이 죽은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캐릭터 중 하나였다.

원작을 읽으면서도 비결이 뭘까 신기했는데…….

내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월렛이 허허 웃으며 물었다.

“믿기 어려우신가요? 저 능력 있는 대머…… 아, 이제 아니지. 저 능력 있는 놈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순식간에 제 상의와 그 안의 속옷까지 거칠게 풀어헤쳤다.

겉에 입고 있던 블레이저의 단추가 뚝, 뚝 다 풀리고 이어서 안쪽 셔츠, 내의까지.

“자, 어서 보십시오!”

내가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참사였다.

나는 눈을 급하게 가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옷을 벗다니!

“아, 아아. 오해하시겠군요.”

캄캄하게 암전된 시야 속, 그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제 살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한 여자의 남자로서, 릴리 님께만 속살을 보이기로 했거든요.”

나는 입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닫았다.

“그, 그럼 대체 왜 옷을 벗으신 거, 건데요…….”

“어…….”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그러자 살짝 벌어진 틈새로 그의 온몸을 바리바리 감싼 아티팩트가 보였다.

그의 몸에 달려 있는 아티팩트들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일 게 분명한, 거의 살상용 무기급이었다.

게다가 가슴께에 장착된 드래곤 하트까지.

“헉.”

나는 들었던 손을 바닥으로 급하게 떨구었다.

“예, 전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몸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저한테 제 목숨 하나만큼은 아주 소중하거든요.”

그가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사흘 뒤, 라 보엠에서 뵙겠습니다.”

“아, 네…….”

저 정도면…… 확실하게 안심할 수는 있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원작 속에서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 *

치료소 일을 중단하고, 라 보엠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사흘간, 나는 월렛의 방문만을 기다리는 한적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첼로를 통해, 오빠에게서 편지도 한 통 왔고…….

[그 새끼가 널 협박하고 있다면, 제발 도망쳐.]

‘……이건 뭐지?’

오빠가 갑자기 왜 공작님에게 날을 세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공작님에 대해 뭔가 알아냈을까?’

하지만 원작 속에 그런 묘사는 없었는데.

나는 해진 편지 끄트머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오빠가 편지 마지막에 자그마한 글씨로 추신을 달아 놓은 게 보였다.

[오늘은 용돈을 못 부쳐서 미안. 돈 많이 벌면, 호강시켜 줄게.]

“……필요 없다니까.”

이렇게 보면 정말 오빠의 지갑 사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오빠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였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을 때도 나 먹일 음식은 넉넉히 구해 오던 오빠가 내게 용돈을 한 푼 부치지 못한다는 것.

자금 사정이 나빠졌다는 의미였다.

그도 그럴 게, 카시언 그레이는 분명 제국 영웅이 되었지만, 평민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리 큰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특히 금전적 보상은 거의 받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복수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지난번에 입었던 로브도 다 닳아 빠져서는…….’

여기서 호의호식하는 나와 달리, 오빠는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겨 가며 복수극을 준비하고 있을 텐데.

나는 과거 모아 두었던 쌈짓돈을 탈탈 털어 보았다.

‘……아직 나한테 이 돈이 그렇게까지는 필요가 없어.’

하지만 보내면 분명 돌려보낼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오빠를 도울 수 있을까. 그 고민만으로도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공작님 역시도 아침마다 나와 식사를 해 주셨다.

물론 식사하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저는 검무를 아주 잘 춥니다.”

“아…….”

식사 시간에 공작님은 주로 자기 자랑을 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힐끔 응시하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진지하게 손을 앞으로 모아서 감탄하며 그를 칭찬해 주었다.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칭찬을 하면, 공작님이 살짝 웃는 것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공작님은 알까.

자기 때문에 내 일상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검술 대회 이후, 내 주변에 수인 접근 금지령이 내려졌었으나 일상에 방해가 된다는 요청해 곧 풀었다.

문제는 그 이후 나를 찾는 수인이 부담스러우리만큼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아스텔 님! 한 번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대체로 시녀인 제니와 샐리의 선에서 처리되었지만.

“저런 쓸모없는 나쁜 녀석들은 다 쳐내야 해요!”

그럼에도 오늘처럼 이렇게 방문 앞에서 시위하듯 서 있는 수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엄청난 선물이 가득해 보였다.

“아스텔 님! 귀하디귀한 십 년 근 산삼입니다!”

“나가라.”

다행히 그런 자들은 시녀장 루델의 선에서 감당이 되었다.

물론,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항상 정중하게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오는 데다, 시녀장 선에서 막을 수도 없이 직급이 높은 케이스.

바로 은여우 가문의 가주 같은 경우였다.

“우리 가문의 은혜를 갚으러 왔소.”

“아.”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응시했다.

그때, 시녀장이 무례를 무릅쓰고 말을 꺼냈다.

“송구합니다만, 가주님. 아스텔 님은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돌아가라는 말에 커다란 제 아빠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기 은여우, 벨이 뿅, 하고 나타났다.

“진짜? 왜? 나 만나 주면 안 돼?”

별을 박은 듯한 동글동글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벨이 힛, 웃었다. 사랑스러운 눈매가 애교 넘치게 휘어졌다. 벨이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면 나 역시 부담스러워서 그의 방문을 거절했을지 모른다.

“안 돼, 아스텔?”

벨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벨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결국 만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나와 응접실에 마주 앉은 은여우 가문의 가주는 제일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은여우 가문의 가주이며, 진명은 시테르라 합니다. 편히 불러 주십시오.”

“아, 네. 시테르 님.”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스텔 님, 아시다시피 우리 가문은 은혜는 열 배로 갚습니다.”

“아…….”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그것의 열 배는 어느 정도일까요.”

짧은 악수 후 손을 놓은 그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분명히 딱딱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는데, 그가 여우답게 눈웃음을 치며 말하자 주변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은여우 가문은 그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싶답니다.”

“아…….”

“듣자 하니 얼마 전 플리 마켓에서 발모제를 판매했다고 했지요. 게다가 독과 약에 재능이 있다고.”

시테르의 환한 미소에 얼떨떨해진 것도 잠시.

“혹시 사업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사업이요?”

“예. 만약 사업을 한다면, 우리 가문이 마법을 만드는 가문인 만큼,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을 텐데.”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제안에 나는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아, 저는 사업 같은 것에는 별로 생각이 없는데…….”

“그렇군요.”

예상보다 그는 조금 더 담백하게 물러났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멈칫했다.

얼마 전 오빠에게 왔던 편지가 떠올라서였다.

용돈을 못 줘서 미안하다고 했던 오빠의 편지.

그리고 지난날 만났을 때, 잔뜩 해지고 낡아 있던 제복까지.

‘복수할 때 오빠는 거지였어.’

그에게는 정보를 제공해 줄 사람도 있었고, 완력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어느 정도 자금줄은 있었지만, 복수에는 돈이 많이 드니까.’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오빠는 힘들고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아갔다.

‘그러니까, 지원해 줄 비자금이 필요하기는 하겠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가만히 눈앞의 은여우 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물론 아직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만한 일은 없었고, 엄청난 사업 아이템을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한번 꼭 고민해 볼게요!”

이어서 감사를 전하는 내 모습에 그들의 표정이 따뜻해졌다.

“벨, 이 녀석아. 너도 인사해야지.”

“고마워!”

짧게 인사한 후 내 자리로 종종거리며 걸어온 벨이 귓가에 소곤거렸다.

“물약을 안 먹고 있는데도 계속 아버지가 나를 좋아해 주셔! 아스텔, 혹시 네가 마법을 부린 거야?”

분명히 지난번에 얘기를 해 주었다.

그렇지만 확신이 없는 소년은 내 입으로 또다시 정답을 듣고 싶은지 눈치를 보듯 눈알을 굴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아니, 원래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어떤 계기로 드러난 것뿐이에요.”

벨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쾌활하게 답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굽혔던 허리를 편 나는 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모두 ‘라 보엠’에서 뵈어요.”

“그 전에!”

벨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쪽지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

“……?”

나는 벨이 내민 쪽지를 받아 들고 펼쳐 보았다.

[소원권.

아스텔은 벨에게 소원을 하나 빌 수 있음!

벨은 아스테에게 뽀뽀도 해 주기로 약속.]

나는 쪽지를 읽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다음 쪽지는 더욱 가관이었다.

[신부권

아스테리 벨의 ‘신부’가 대면 조케씀.

프로포즈는 나중에 어른이가 되고 나서 할 고야!

기다려야 해.]

미소를 머금은 나는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꼭 성년이 돼서 프러포즈하러 와야 해요?”

“응! 결혼하지 말고 기다려!”

“벨, 무례하구나.”

시테르가 눈치를 줬지만 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도요!”

“응, 정말 기다릴게요.”

어차피 결혼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벨의 눈을 맞추고 밝게 웃어 보였다.

* * *

공작성 내부는 평화롭게 소란스러웠다.

물론 중간에 음험한 음모를 꾸몄던 바첼이 있기는 했지만 무사히 잡혔고, 피해자였던 벨 역시 건강을 되찾았다.

검술 대회 역시 마이어의 승리로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는 검술 대회의 애프터 파티를 준비할 시기였다.

공작성의 시녀들과 시종들은 모두 파티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파티 준비로 화려한 내부와 달리, 죄인의 목이 걸려 있는 성벽은 싸늘하고 초라했다.

그리고 그때, 그 성벽을 지키는 기사들의 공포심을 일깨워 무너뜨리고, 감옥 속으로 유령처럼 스며든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죽은 동료의 시체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심장께를 만져 보았다.

검술 선생, 바첼.

아니, 바첼이라는 이름은 거짓이었다.

한때 그의 벗이었던 이보르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

그리고 그가 늘 품고 다니던 훈장 아티팩트도 압수당했다.

사내가 침음을 삼켰다.

둘이 죽고 마지막 하나만 남아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그분’께 연락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사내의 고요한 표정에 싸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어쩌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 것이다.

“…….”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운 사내가 무뚝뚝한 낯으로 바깥의 문을 응시했다.

‘이 공작성을 와해시키라 명하셨거늘.’

아나이스 공작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겠으나, 공작성 내부의 분열은 충분히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리카르도와 벨을 죽이려는 음모 역시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살아남았다.

재규어 가문과 은여우 가문은 와해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금자탑을 쌓듯 신중하게 세운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계획은 잘못 세워진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다 마침내, 수도로 향할 때가 왔다.

수도에서 많은 실험을 하고 계시는 그의 경애하는 주인에게 잠시 몸을 맡겨야 했다.

그는 주머니 안의 송곳을 떠올리며 곰팡이가 핀 성벽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너 뭐냐?”

껄렁껄렁한 태도에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갈색 머리의 사내.

“야, 거기 쥐새끼.”

“…….”

능글거리는 어조였지만 딱딱한 표정은 매서웠다.

날카로운 진검을 빼 들고, 그의 목에 가져다 댄 사내.

“거기 딱 멈춰 봐.”

카시언 그레이였다.

* * *

맹세컨대 카시언 그레이가 공작성을 빠져나가는 수상쩍은 쥐새끼를 잡은 것은 기묘한 우연에서 기인했다.

자신의 아들을 맡은 아스텔이 걱정되었던 그는 장기 휴가를 냈다.

그러나 공작성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검술 대회 때는 제국의 기사들이 공작성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시언 그레이’는 입장이 불가하다나.

‘뭔 그딴 공문을 내려? 특히 나를 콕 집어서? 이거 완전히 돌아 버린 새끼 아냐……?’

[기사로서 공작성의 검술 대회 참관을 하고 싶습니다.]

제아무리 인간이라 할지언정, 기사로서의 교육 혹은 체험 목적이라면 공작성에서 반나절 정도, 초단기 체류 정도는 허가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카시언 그레이 - 불허]

‘왜 안 돼? 이유도 없어?’

카시언은 영문 모를 상황에 찜찜하다 못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지나치게 촘촘해진 공작성의 경비를 뚫지는 못했다.

‘갑자기 경비가 왜 이렇게 살벌해진 건데?’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냥 성벽을 돌아다니며 틈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수상쩍은 놈이 보이면 목을 하나둘씩 치고 다닐 뿐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드문드문하게나마 소식을 전달해 주는 몇몇 정보상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 근처를 돌아다니는 카시언에게 아스텔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검술 대회 때 도둑이 잡혔다, 검거 과정에서 아스텔이 멋진 활약을 보였다 뭐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런 생각들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성벽에서 수상하다 못해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자를 목격했다.

누가 봐도 ‘나 수상하다’ 딱지를 붙인 낯에, 손에서는 오래된 피 냄새를 풍기는 사내를.

“야, 쥐새끼.”

“…….”

카시언은 계속 아스텔을 걱정하고 있었고, 잠깐이라도 아스텔이 나오지 않을까 망원경으로 성곽 근처를 주시하고 있었다.

‘공작, 이 지랄 맞은 새끼.’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이 자신을 해치려 하고 있음을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그 쭉 째진 눈매나 재수 없게 튀는 낯짝, 아스텔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눈동자와 변덕스러운 성질머리까지.

그래서 그는 이자도 분명히 자신이 성곽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아나이스 공작이 내보낸 놈이라고 여겼다.

문제가 있다면…….

공작의 스파이로 추정되는 이 쥐새끼가 상당히 수상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시언 눈앞에 있는 쥐새끼는 딱 봐도 몰래 성을 빠져나가고 있던 폼이었다.

“그 송곳 뭐냐?”

쥐새끼의 손에는 송곳 모양의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조차도 의심스럽기 그지없어 카시언은 그대로 도주하려던 놈의 목뒤를 콱 잡아챘다.

그러나 그때였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혀를 깨물었다. 곧이어 입에서 뚝, 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카시언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그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린 뒤, 몸을 휙 돌렸다.

쥐새끼의 눈은 돌아간 상태였고 혀를 빼물고 있었다. 손에 닿았던 인간의 온기가 선뜩한 시체의 것으로 바뀌었다. 사내가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선택해 버렸다. 제 팔에서 늘어지는 사내를 삐딱하게 응시한 카시언이 혀를 찼다.

“뭔데?”

카시언이 헛웃음을 쳤다.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죽어? 이거 완전 수상한 놈인가 보네?”

그는 죽어 가는 쥐새끼를 내팽개친 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송곳을 확인했다. 송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게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로 공포, 라고 새겨진 고대어가 끔뻑거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눈으로 훑던 그는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뷔에트리 백작가 출신의 하녀 앤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자들은 기이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무언가 힘이 깃든 아티팩트 같던데……. 가장 수상쩍은 놈은 부두술을 썼어요. 죽어도 죽지 않고 다른 몸으로 거듭해서 살아나는 거죠.’

카시언은 혀를 빼문 채 죽은 수상한 놈의 목을 잡아 쥐었다.

“참, 깔끔하게도 뒈졌네.”

그는 곧바로 죽은 사내의 품에 있는 밀서를 꺼냈다. 암호로 쓰여 있었으나 규칙이 익숙해 해석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이능력자, 2인 사망. 아나이스 공작 소행. 수도의 조력 필요.]

누군가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밀서였다.

정확한 수신인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수도 쪽으로 보내는 밀서라는 것.

그리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나이스 공작이 이자의 동지들을 죽였다는 것.

‘이 밀서와 송곳에 뭔가 있어.’

그는 밀서와 송곳을 제 품 안에 밀어 넣으며 가죽만 남은 시체를 꼼꼼히 확인했다. 부두술이라니 능력 자체만으로도 저열하고 조잡스러웠지만, 당장 조사하기는 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새삼 의문이 들었다.

아나이스 공작, 그럼 그 새끼는 대체 뭔데?

정황상 이놈들과 한 패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얘네를 왜 죽인 건데?

그리고 나한테 왜 그렇게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건데?

카시언은 인상을 찡그리며 침착하게 눈앞의 쥐새끼를 짓밟았다.

아나이스 공작을 생각하니 발끝에 한층 더 힘이 실렸다.

그래도 의문점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이 뷔에트리 백작가가 멸문하도록 일조한 핵심 세력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스텔을 인질 삼고,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제아무리 북부 공작일지언정 그들 남매가 뷔에트리 가문 혈족이라는 것을 알 방도는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도대체 그 새끼는 왜 음흉하게 아스텔 옆에서 얼쩡거리는 건데?

설마 아스텔을 좋아하기라도…….

카시언은 오싹한 상상에 인상을 찡그렸다. 절대 그럴 일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햇살 같은 여동생 아스텔은 따뜻한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야 했다. 공작 같은 냉혈한 따위와는 함께하면 안 됐다. 그리 짓씹으며 그는 영혼 없이 가죽만 남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네 정체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살아 돌아오도록 해, 꼭.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말을 다 내뱉고 떠나려던 순간, 카시언의 발에 까끌까끌한 옷자락이 걸렸다.

“이거, 혹시…….”

카시언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내는 리넨과 유사한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다. 보통 추운 북부에서는 찾지 않는 소재였다. 카시언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원단을 뒤집어 보았다.

“헤브람 원단이군.”

헤브람은 남부에서 자주 쓰이는 옷감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그자의 시체를 내려놓은 뒤 옷감을 잘라 냈다.

‘이게 함정일지, 아니면 진짜일지 확인해 봐야겠지.’

아스텔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당분간 확실하게 알아볼 일이 생겼다. 그는 누군가의 목이 걸려 있는 성벽 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거침없이 몸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 아스텔.

복수를 끝내면 널 제일 먼저 데리러 올게.

* * *

다음 날 아침.

몹시 고무된 아티팩트 감정사, 월렛은 곧장 델피니움 룸 안으로 들어섰다.

위풍당당하게 아스텔을 접견한 그는 진지한 낯으로 훈장 아티팩트를 건넸다.

“상당히 이상합니다.”

“왜요?”

“어젯밤에, 아티팩트에 빛이 갑자기 훅, 들어오더니 확 꺼졌거든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연결된 아티팩트까지도 파괴되었거나, 관련된 사람이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세 개의 아티팩트.

사기, 변신, 공포. 이 세 가지 모든 아티팩트가 파괴되었다고?

“아티팩트의 소유자가 아나이스 공작성을 빠져나간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곤란하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 훈장에도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요.”

나는 조용히 훈장을 받아 들었다.

‘이 엠블럼은…….’

수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뱀의 그림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뱀이 붉은 혀끝을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

‘……로윅 상단이었던가?’

뱀의 문양을 대표로 내세우는 상단, 로윅.

모든 특수 물품을 취급하는 그 상단은, 공식적으로 콘윌 공작가의 소유였다.

여기에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힌트까지 더해진다면…….

‘뒤에 있던 건 콘윌 공작가인가?’

나도 모르게 콘윌 공작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버렸지만, 애써 속을 달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이게 함정일 수도 있어.’

어쨌거나 수도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렇다면…….

‘그들과 직접 자유롭게 접촉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개인적인 힘이 필요해. 젊고 능력 있는 상단주로 위장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나는 얼마 전 내게 손을 내밀었던 은여우 가문의 가주를 떠올렸다.

그날 방을 나가기 전, 그는 내게 은혜를 갚는다고도 했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질 때가 오겠지.’

나는 마음을 진지하게 다잡으며 조용히 훈장을 매만져 보았다.

그런 내 앞에서 월렛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아티팩트와 아나이스 공작 각하는 관련이 없는가 싶어요.”

“……네?”

그가 훈장 아티팩트 안쪽에 끼어 있던 종이를 꺼내 그에 적힌 바첼의 글씨를 보여 주며 말했다.

“완전히 미친놈이죠.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그러니 그렇게 자진했지!”

훈장에서 딸려 나온 쪽지에는 수인의 종족에 따른 살해법과 최종적인 목표가 나와 있었다.

셋의 최종 목표는 네 가문의 핵심 인물 살해.

은밀한 테러 행위를 통해 각 가문의 유대를 끊고 공작성을 점거하는 것.

“이게 정확히 이놈의 목표인진 모르겠지만, 뭐.”

나는 쪽지에 ‘은여우 가문 후계자인 벨을 죽여야 한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굳어졌다.

‘후계자를 죽이는 건, 저들의 목표가 맞아.’

책에서도 나와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도대체 후계자를 살해하고 공작성을 점거해서 그들이 얻는 이익이 무엇일까?

가신 가문의 후계자들이 다 죽으면 아나이스 공작성은 차기 주인을 잃는다.

아나이스 공작위는 4대 가신 가문의 후계자들끼리 경합하여 가장 강한 자가 물려받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으니까.

당연히 후대 공작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마는 것이다.

‘최종 흑막은, 공작성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건가……?’

만약 공작님이 최종 흑막이라면 자신이 거느리는 공작성의 세력을 약화하려 들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반사 이익을 얻는 자를 의심해 보아야 했다.

‘……아나이스 공작가의 반대파인가?’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님의 반대 세력은 무척 많았다.

나는 턱을 괴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 * *

한편, 아나이스 공작 역시 심도 있게 고찰을 하는 중이었다.

“카시언 그레이가 왜 자꾸 이 공작성 근처를 맴돌까.”

몇 번이고 방문을 불허했으나 그는 끈질기게 요청해 왔다.

거머리처럼.

“혹시 거머리 수인인가.”

그 순간에도 공작은 수도에서 흘러들어 온 가십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새로 발간된 수도의 가십지에는 카시언 그레이의 최신 악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여심 폭격!’이라는 천박한 헤드라인을 보던 공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가십지 따위에서 제공되는 소문은 비교적 별것 아니었다.

최근 공작가의 정보 길드에서는 한층 더 분노를 유발하는 뉴스를 가져왔다.

‘알아보니 룬이라는 아이는 카시언 그레이의 아들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다만, 룬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더 알아봐야 할 듯합니다.’

아스텔이 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니.

뜻밖의 가능성에 카시언에 대한 살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아직 이성을 견지하는 이유는, 아스텔이 여전히 카시언 그레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아스텔이 카시언 그레이의 아이를 맡은 이유.

결국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스텔이 룬의 어머니이거나.

아니면 카시언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그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까지 맡아 주고 싶어 하거나.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가 카시언을 죽일 수 있겠는가?

불가능했다.

“미친 새끼…….”

욕설이 절로 짓씹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카시언 그레이는 음침하기까지 했다.

‘여기저기 귀족에게 엉겨 붙어 나에 관한 정보를 캐내고 있다고 했나.’

아스텔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한 질투일까 싶었으나, 카시언 그레이는 자신을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선을 그으며 철저하게 거절했으니까.

그는 턱을 괸 채 테이블 위에 꽂아 놓은 백목련을,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텔이 그에게 건넨 거절의 상징물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아스텔은 카시언 그레이의 아이를 살신성인으로 키우고 있다. 거듭 되새겨 봤자 달라지지 않는 사실에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왜 내가 아니라 그 새끼와 더 친밀한 거지.”

“……,”

“내가 그 문란한 것보다 못한 게 있나?”

공작은 지금까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본 적은 없었다.

아주 오래전이라면 모를까. 필사적으로 가꾸어 온 덕에 지금은 신분도, 외모도, 힘도 부족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웅?”

그가 그렇게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 색동 꼬까옷을 입은 룬이 책상 위로 올라와 백목련 옆에 앉더니 얼굴을 짜잔하고 들이댔다.

아나이스 공작과 룬, 그들은 요즘 꽤 친해져서, 아스텔이 자거나 치료소에 나가 있을 때 종종 회동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은 룬 혼자만의 일방적인 친밀감이었지만, 아나이스 공작 역시도 딱히 제 공간으로 불쑥 쳐들어오는 룬을 막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늘도 수상쩍은 회동이 집무실 안에서 열린 것이다.

이윽고 공작이 먼저 눈앞의 아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카시언 그레이 말이야.”

룬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카시어 그래?”

“그래, 네 생물학적 아비, 같은 놈.”

그리 물으며 공작은 진중한 눈빛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룬은 고개를 계속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게 몬지 모라요.”

“처음 듣나?”

“웅.”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한 기사.”

구체적인 설명에도 룬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성에 들어온 이후, 매일같이 물약을 먹으며 룬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만큼 기억력도 좋아졌지만 새로 업데이트하기에도 바빠서 과거의 기억까지 끌어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이라고 하면…….

“기사 아조씨?”

아기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보육원을 나오면서 열에 들떠 있을 때. 자신이 제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커다란 아저씨 하나가 있었던 게 이제 막 떠올랐다.

“그치망…….”

“…….”

룬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자신을 이상한 동물로 변신시키더니, 아스텔에게 건네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 버려써여.”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어 주던 기억도 연달아 떠올랐다.

웃는 것보다 울먹거린 적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가물가물한 걸 보니 좀만 더 지나면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구래서!”

룬은 테이블 위에 발을 탕, 굴렀다.

“나느 아빠가 업써여.”

양팔을 굽혀 옆구리에 댄 포즈는 몹시 당돌했지만 눈꼬리는 시무룩하게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의 머릿속에 어떤 환영 같은 순간이 떠올랐다.

‘너는 가족이 없어?’

‘네, 어, 없어요.’

‘그럼 내가 가족이 되어 줄까?’

발랄한 소녀의 물음에 토끼 눈을 한 소년이 물었다.

‘……네?’

‘왜? 좋잖아, 이 정도면 우리 가족이 될 정도로 친해진 거 아니야?’

그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 자그마한 소년의 모습이 어쩐지 지금의 룬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너 털이 되게 따뜻하다! 돌돌 목도리로 감고 다니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고, 엉망으로 엉킨 털을 빗질해 주며 미소 짓던 소녀…….

‘지금은 작지만 되게 늠름하게 자랄 것 같아, 그치?’

‘다들, 제가 바보라고……. 도태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울먹거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한 ‘아스텔’이 격하게 부정하며 힘껏 고개를 저었다.

‘바보라니! 정말 멋지고 늠름한, ……이 될 것 같아.’

그 소년, 아니 그때의 그는 아주 부끄러움이 많았고 수인화를 잘 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스텔의 말을 듣자마자 벅차오르는 마음에 펑! 하고 완전한 동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 제 앞에 있던, 비루먹은 듯한 소년보다도 훨씬 더 작고 여려 보이는 동물의 형상에 아스텔이 까르르 웃으며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완전히 동물로 변한 거야? 되게 신기하다…….’

그때 소녀의 손길을 떠올리며 공작은 룬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괜히 어색해지는 느낌에 성의 없이 머리칼을 쓸어 주면서 그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럼 저번처럼 나를 네가 원하는 대로 불러.”

아스텔은 이 아이를 사랑하니까.

그 역시 아이 하나 정도를 건사하는 문제는 별로 상관없었다.

적당히 잘 키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아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압빠?”

“그래. 앞으로 그렇게 부르든가.”

아이가 공작의 옷소매를 꾹 잡았다.

“아스테랑, 아빠랑, 우리 세시 가치 살아요!”

“셋이 같이 살자고?”

“녜! 히히!”

언제 시무룩해졌었냐는 듯 히히거리며 행복해하는 룬을 보며 아나이스 공작은 아이를 가볍게 들었다.

마치 초콜릿 쿠키 한 봉지 덜렁 들고 있는 것 같은 수준의 무게였다.

“신나!”

반면 룬에게 공작의 팔은 꽤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아이는 헤실헤실 웃으며 공작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자.”

“오디 가? 우리 오디 가?”

룬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그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성큼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복도나 층계참에서 마주치는 시녀들과 시종들이 경악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지만, 둘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조아!”

“시끄럽다.”

“조아, 조아!”

공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를 건사하겠다고 결심한 것과 별개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움직일 때마다 들썩이는 걸 즐거워하기에, 일부러 공중에 살짝 띄웠다가 받으며 비위를 맞춰 주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작은 목적지인 유리 정원 앞에 섰다.

정원 안에는 아스텔을 위해 따뜻한 티타임을 준비하는 시녀들로 가득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햇살 아래에 룬을 내려놓은 다음 빤히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건, 꽤 마음에 드는군.”

“우웅?”

“위에 딸린 놈 말고, 딱 너만 말이야.”

카시언 그레이.

아스텔에게 아이를 떠맡기고, 저만 즐겁게 한량처럼 사는 중인 쓰레기 기사.

오늘부로 그는 카시언을 아스텔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부터 끊어야겠지.

“네 아비로는 카시언 그레이보다 내가 낫지.”

“웅!”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든 것에는 절차가 있는 법.

일단 아스텔의 마음을 얻고 난 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그 무뢰한을 처리하면 된다.

심해를 닮은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 * *

“아스텔 님, 큰일 났어요!”

월렛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갑자기 언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큰일?”

급하게 들어온 제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 아기님이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티, 티타임장에 계세요! 공작 각하께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제니를 대신해 뒤따라온 샐리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기를 업어 메치신 뒤 야외로 떠나셨어요!”

“정원 티타임장으로요?”

“네! 네! 언젠가 사달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발을 동동 구르는 제니의 모습에 나는 급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빨리 가요, 우리!”

방금 막 공작님이 흑막이 아닐 확률이 높아졌는데.

이렇게나 갑자기 내 조카를 죽이려 든다고?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서 유리 정원에 있는 티타임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치마 끝자락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과 룬이 함께하는 모습은 나의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공작님은 느른한 자세로 티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무릎 위에는 룬이 앉아 귀여운 짓, 예쁜 짓을 하고 있었다.

“안아 조!”

“했잖아.”

“더 해야 대!”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나는 눈을 비볐다.

공작님이 무표정한 낯으로 룬을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우고 있었다.

급하게 내 뒤를 따라온 수인 시녀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공작 각하께서 아기님을 죽이려는 거 아니야?”

제니는 내면의 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멍하니 선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수인 시녀들의 짐작과는 달리 먼발치에서 보기에는, 꼭 룬이 공작님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까꿍!”

“여기서…… 뭘 더 해 달라는 거지?”

“까르르르!”

공작님의 인상이 한층 험악해졌다.

그것도 모르는 룬은 쉴 새 없이 웃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공작님을 약 올렸다가 주먹을 잼잼하며 장난을 쳤다.

수인 시녀들은 이제 숨넘어갈 듯 격하게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슬슬 불안해졌다.

‘둘이 왜 저러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흙 묻은 치맛자락을 추스른 나는 천천히 둘의 앞까지 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룬! 뭐 하는 거야, 거기서.”

“힝. 아스테!”

공작님의 품에 안겨 있던 룬이 나를 반기며 손을 흔들었다. 아나이스 공작님 역시 나를 바라보면서 눈매를 부드럽게 접어 웃었다. 그 미소가 지극히 피로해 보였다.

“공작님, 아, 안녕하세요…….”

“네, 여기 앉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일단 공작님과 마주 보고 앉기는 했다. 그가 우리 가문을 도탄에 빠뜨린 흑막일지도 모른다고 경계했을 때, 나는 마음의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최종 흑막의 타깃일 수도 있다면…….

마음의 둑이 허물어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스텔.”

“네.”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그의 말을 들었다.

“우선 공작성에서 인간을 무시하는 것들은 전부 처리해 두었습니다.”

“처, 처리요?”

“아.”

공작님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말을 정리했다.

“수인들에게, 인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친절한 설명이 대체 뭐였을까. 알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공작님은 그 외에도 앞으로 성에서 지내는 동안 내 편의를 더욱 신경 써 주고 싶다며 다정한 물음을 건네주었다.

“앞으로 아스텔에 대해 언급조차 못 하게 할까요?”

“그…….”

그건 아무리 봐도 너무 과한 것 같은데…….

“저, 저기…….”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정말이지, 무언가 달라지신 것 같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기신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그…….”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공작님은 또 다른 방향으로 오해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례한 자들 때문에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충격은 공작님의 과도한 보호 때문에 받은 건데…….

그런 것도 모르고 공작님은 손안에 쥐고 있던 마도구를 뚝 소리와 함께 두 동강 냈다.

기품 있는 외양과 달리 그의 눈은 마치 짐승의 것과 같았다.

나는 조금 공포스러워졌다.

그러나 공작님은 여기서 한술 더 떴다.

“불안해서 안 되겠습니다.”

“예?”

“웬 쓰레기 같은 놈한테 당하고 있는 것도 걱정됩니다.”

쓰레기 같은 놈이라면 바첼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놈은 이미 처리해 주셨는데…….

나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공작님이 먼저였다.

그는 뻔뻔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답을 하나 꺼내 놓았다.

“제가 계속 아스텔의 곁에 있어야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공작님 특유의 묵직한 저음으로 들으니, 마치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엄격한 법률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한 차례 판결을 내린, 그가 무릎 위에 앉아 테이블 위 식기를 가지고 놀고 있던 룬을 옆자리에 내려 두었다.

“저, 저기. 공작님도 바쁘시지 않으세요?”

내 말에 공작님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 굴곡이 제법 심해지신 듯했다.

“……아스텔, 당신은 제게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만.”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제가 거절을요……?”

내가 무슨 거절을 했지?

“예.”

그가 곧바로 수긍하며 슬픈 눈빛으로 테이블 위의 꽃을 한번 흘겨보았다.

“……어…….”

……그랬었나?

“저는 당신이 당하는 걸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한테 당하고 있다는 거지?

샘이나 바첼 같은 놈과 엮였던 사건을 말하는 것 같은데, 모두 무탈히 해결이 되었건만 꽤 신경을 쓰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히 말을 꺼냈다.

“……아, 네. 가, 감사해요.”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무언가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 룬도.”

“……어, 네?”

“제가 아주 잘 대해 줄 생각입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공작님의 눈빛이 돌연 매서워졌다.

저 표정으로…… 어떻게 잘 대해 주시겠다는 거지?

아이들이 다 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룬은 헤실헤실 웃으며 공작님의 팔에 제 머리를 비비적대며 애교를 부렸다.

“압빠!”

……역시 오빠의 아들이라 그런지, 룬의 친화력은 엄청났다.

그보다, 방금 아빠라고 한 건가?

그간 룬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거나, 호칭 실수가 잦아도 관대하게 넘겼으나 이번에는 괜히 공작님께 실례가 되는 일일 수도 있어 황급히 만류했다.

“네 아빠는 따로 있잖아!”

처음으로 혼쭐을 내자, 룬은 퉁퉁 부르튼 발간 입술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대답은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아닙니다.”

공작님이 기세등등한 낯으로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제가 저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예? 갑자기요?

“룬에게는 진짜 아빠가 있는데…… 요.”

조심스럽게 꺼낸 내 말에 공작님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해 왔다.

“카시언 그레이 말입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밀려 나오는 딸꾹질을 있는 힘껏 참았다.

“상관없습니다.”

무엇이 상관없다는 건지, 내가 되묻기도 전 그는 그 어떤 때보다 명료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그대가 룬의 친모이건, 아니건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공작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입을 벙긋거렸으나, 공작님은 오랫동안 꾹꾹 눌러 온 결심들을 토해 내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네?”

“그러니…… 우리 아이로 합시다.”

“그게 무슨……?”

공작님의 표정을 본 나는 직감했다. 아무래도 조금, 아니, 크나큰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그게 무엇인지 정리하기도 전에 공작님이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카시언 그레이는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잠깐만요, 우리 오빠가 사라진다고요?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보다 더한 폭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대는 그의 신부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혹시 헛것을 들었나 해서 급하게 반문했다.

“예……? 제가 누구의, 신부요?”

제가 카시언 그레이의 신부가 되면 근친인데요?

나는 딸꾹질을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좋…… 아하는.”

순간 이를 으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카시언 그레이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가 오해가 극심하게 있으신 것 같으신데…….

제가 우리 오빠를 좋아하긴 하지만 절대, 죽어도, 그런 의미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도대체 룬이 오빠의 자식이란 것을 어떻게 안 건지 온갖 의문이 샘솟았지만, 일단은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부터 고민해야 할 처지였다.

오해를 풀겠답시고 카시언 그레이가 우리 오빠라고 밝히는 순간 우리 남매를 보호해 주고 있는 은신 마법이 해제되고 마니까.

“빠빠!”

아이의 칭얼거림을 배경으로 깔아 둔 채, 나와 공작님 사이에 서늘하기 짝이 없는 정적이 흘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급하게 주먹을 말아쥐고 연사처럼 소리쳤다.

“저, 저는 카시언 그레이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그를 좋아한다면 정말 끔찍한…… 언어도단…….”

내 진심이 닿기를 바라면서.

“네.”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공작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관계가 없어야만 할 겁니다.”

이를 악물어 단단해진 턱선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당신에게서 돈을 뜯고.”

……뜯은 적 없다. 오빠가 내게 용돈을 좀, 왕창 뜯겼을 뿐.

“아이를 두고 도주한.”

……도주한 적 없다. 내가 애를 맡기라고 강요했지.

“카시언 그레이는 이제 잊으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나는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얼어붙은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가여워 보이기라도 했는지, 그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을 한 채 속삭여 왔다.

“앞으로는 제가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이제는 그자가 아닌 저를 믿으세요, 아스텔.”

……전적으로 믿기에는 너무나도 흑막스러운 말투와 속삭임이었다.

“미더요!”

룬이 나 대신 힘차게 소리쳤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아닌 원흉인 아이가 나와 공작님을 번갈아 바라보며 발랄하게 까르르 웃었다.

이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이지?

공작님의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에, 나는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 폭탄선언 이후로, 그는 정말 폭주하기 시작했다.

―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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