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5/12)

Chapter 4.

공작가의 응접실 안.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오빠가 기다리는 응접실 밖에 멈춰 섰다.

‘내 친구로 지칭한 사내가 나타나다니.’

오빠는 카시언 그레이라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나타났다.

미리 내 친구가 올 것이라고 시녀들에게 주의를 시켰던 덕분에, 오빠는 별문제 없이 공작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샐리와 제니를 포함해 모든 시녀를 아예 바깥으로 물린 나는 심호흡을 한번 내쉰 후 응접실 안에 성큼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변장한 오빠, 카시언 그레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오빠를 바라보면서 더 가까이 걸어갔다.

오빠의 로브 자락 쪽에는 아주 작은, 아기 주먹만 한 앵무새가 있었다.

‘앵무새? 아기가 아니네?’

왜 앵무새가 여기 있는 걸까?

내가 머릿속으로 원작 속 타임라인을 복기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오빠가 조심스럽게 나를 호명했다.

“아스텔.”

앵무새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그제야 마주한 오빠의 얼굴을 보고 빳빳하게 굳었다.

늘 웃기만 하며 나를 울보라고 놀려 댔던 오빠의 눈시울이 붉어서였다.

그는 지금까지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시선이 자신의 눈가에 닿자, 그가 로브 후드를 좀 더 내려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 것 같아 보였다.

카시언이 데려온 것이 아이가 아닌 앵무새라는 것만이 차이일 뿐, 원작 속에서도 이 장면은 나와 있었다.

카시언이 울 것 같은 낯으로 제 아이를 건네자 원작 속 아스텔은 당황하고, 냅다 울어 버린다.

그런 상황은 카시언에게 더욱 큰 부채감을 안겨 주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평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바보야, 왜 울려고 그래?”

“……미안해서.”

항상 장난스럽던 낯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목은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인데? 저 앵무새는 뭐야?”

나는 신뢰할 만한 어른인 척 어깨를 꼿꼿하게 펴고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오빠가 조심스럽게 옆에 있던 앵무새의 날갯죽지를 매만졌다.

“이 앵무새는…….”

나는 오빠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빠의 무릎 위로 앵무새가 총총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앵무새는 아기가 되어 있었다.

조금 놀란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게 무슨…….”

원작 소설 속에서 아이가 수인이라는 기록은 따로 없었다.

다만 내 머릿속으로, 남자 주인공이 아이를 숨기기 위해 다양한 고대 마법을 동원했다는 서술이 떠올랐다.

아마 신분을 위장하기도 어려운 아이를 데리고 공작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고대 마법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아이가 앵무새로 변장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세 살배기 아이의 모습에 나는 내심 감격했으나, 겉으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척을 했다.

“그러니까……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아이는, 내 아들이야.”

……오빠의 아들이자 내 소중한 조카.

나는 아이의 금빛 머리칼과 초롱초롱한 초록색 눈동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이는 오빠의 원래 머리 색인 금발과 녹안을 유달리 빼닮았다.

오빠를 똑 닮고, 그리고 아마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새언니를 조금 닮았을 듯한 익숙한 낯.

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오빠의 품 안에 있는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녕, 아기야.”

차분한 내 반응에 카시언이 울컥한 듯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나는 다 파악했다는 듯 다른 건 하나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며 내게 아이를 내어 주지 않으려 했다.

“마력이 심장에서 날뛰고 있잖아.”

눈을 질끈 감으며 여전히 아이를 넘기지 않는 그를 향해 난 단호한 눈빛으로 일갈했다.

“이리 줘.”

“…….”

“얼른!”

소리를 치고 나서야 그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렸다.

그 순간 잽싸게 아이를 건네받은 나는 품 안에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둥기둥기 얼렀다.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한 콧잔등과 동글동글 귀여운 찹쌀떡 같은 볼, 쌕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호흡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으면서.

묵직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로브를 더욱 깊숙이 쓰며 어딘가 모르게 더욱 결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데리러 올게. 반드시.”

복수가 끝나면 데리러 온다는 뜻이었다.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그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꼭 우리 데리러 와.”

내 어른스러운 태도에도 오빠는 계속해서 걱정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무리하지 말고. 아프면 챙겨 먹고. 용돈 필요할까 봐, 돈도 조금 가져왔-.”

“됐어. 내가 애인 줄 알아? 나 돈 많아!”

“거짓말.”

그가 푸스스, 처음으로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 아니거든? 그래서, 아기 이름은 뭐로 정했어?”

원작 속에서는 거의 완결에 다다를 때까지 아이에게 이름이 없었다.

오빠는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의 이름을 바로 지어 주지 않고 복수극이 완성된 이후로 미뤘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아이의 이름을 단말마의 소리처럼, 유언처럼 내뱉었을 뿐이다.

“없어. 이름은, 나중에…….”

그건 원작과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원작을 읽은 나는 미래에 붙여질 조카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시치미를 뚝 뗐다.

“그냥 ‘아기’라고 부르면 돼?”

“……네가 이름을, 지어 줘도 되고. 원하는 대로 해, 아스텔.”

나는 로브 후드에 깊게 파묻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진 입매만 보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하나뿐인 가족을 향한 지나친 부채감과 책무감에 괴로워하는 표정일 것이다.

하지만 오빠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게 찾아오는 방법밖에는.

“나 잘 키울 수 있어.”

“…….”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울지도 않고 순하게 내 품에 착 감겨드는 모습도, 코끝을 맴도는 고소한 젖내도 사랑스러웠다.

“내가 지켜 줄게. 아기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내 옷깃을 꾹 쥔 아기의 작은 손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자그마한 아이가 내 품 안으로 꼬물거리며 파고드는 게 느껴지자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어먀?”

“……응?”

“어먀!”

눈을 뜬 아기는 나를 보며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품에 안겨 드는 조카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오빠에게 말했다.

“병 때문에 말을 잘 못하는구나. 말문을 트면 엄청 귀엽겠는데.”

아이는 또다시 까무룩 잠에 빠지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오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빠는 내가 계속 눈에 밟히는 눈치였다.

“나 걱정하지 마. 진짜로 잘 키울 거니까.”

오빠가 몸을 일으켜 응접실의 문 앞으로 향했다.

나도 그를 따라 그 곁에 나란히 섰다.

이제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할 때였다.

아이를 데려다 놓고 떠난 이후로 언제쯤 그를 다시 보게 될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계속 북부에 머물 테고, 오빠는 본격적인 복수로 바빠질 터였다.

‘오빠가 정체를 숨기고 이 안에 들어온 것만 해도 기적이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문을 먼저 열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아기를 안고 있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 지내고 있어야 돼.”

오빠는 나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후드 안쪽으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전처럼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슬퍼 보였다.

처음 보는 표정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뻔했다.

“당연하지, 난 엄청 호화롭게 지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일부러 환히, 그의 눈빛에 담긴 슬픔 따위 모르는 척 웃어 보였다.

“장하네.”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나는 아기를 잠깐 한 손으로 안은 채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때였다.

내내 감정을 자제하던 오빠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건.

“아스텔.”

“…….”

문고리가 삐걱이며, 문이 조금씩 열렸다.

“……미안해, 너랑 아이만 이렇게 두고 가서.”

그의 목소리가 죄책감에 젖어 떨렸다.

하지만 복수를 결의했을 때부터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할 각오를 했었다.

뷔에트리 가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멸문하고 난 후,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혈육이니까.

그 의지를 담아 나는 오빠를 향해 단단하게 못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하면 꼭 돌아와야 해.”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오빠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어느덧 깨서 내려 달라 몸을 움직이는 아이를 복도에 내려놓았다.

곧 오동통한 소세지 같은 다리로 곧게 선 아가의 손을 꼭 잡았다.

뒤뚱뒤뚱.

병 때문인지 말문 터지는 게 늦는 것 같지만, 세 살배기 주제에 있는 힘껏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얼른 말문도 터 주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약도 먹여 줘야지.’

진지하게 다짐하면서 복도를 지나 델피니움 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에서 나를 기다리던 시녀들이 갑작스러운 아이의 등장에 놀라 굳어졌다.

당연히 그 모든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범주 내에 있는 일이었다.

언질도 없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굳어 버린 시녀들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손을 한결 더 세게 쥐었다.

“그 아이는…… 누구인가요?”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아, 제 친구의 아들이에요!”

시녀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제가 아이를 좋아해서 당분간 맡아 주고 싶다고 했어요. 아기가 조금 아프기도 하고요!”

“아픈가요?”

순진한 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슬픈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자그마한 문제가 있어요.”

내 말에 샐리와 제니가 서로를 바라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당혹한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다.

‘갑자기 관리해야 할 아이가 생겨서,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다.’

손님이 또 군식구를 데려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인간인 데다 애초에 공작성에서 일하기에도 어려운 신분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녀들 곁에서 함께 얼어붙어 있던 시녀장 루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서는, 이 사실을 아시나요?”

항상 명철했던 시녀장이 말을 더듬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 아직 확실히는 모르세요. 돌아오시면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까 해요!”

물론 친구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씀은 드렸다.

하지만 아기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니 그도 당황할 게 뻔했다.

“아아……. 그…… 렇군요.”

그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분내 나는 아기 쪽을 향했다.

* * *

아스텔이 자고 있을 깊은 밤.

아스텔을 시중드는 공작성의 시녀들이 작금의 사태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기 위해 작은 밀실에 모였다.

대화의 화두는 당연히 ‘아스텔이 데려온 아이’였다.

“정말 친우분의 아이가 맞을까?”

제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아스텔 님과 닮았는데…….”

모두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을 꺼내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게다가 조금 당황하신 것도 같았지.”

아스텔은 연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노련한 시녀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아스텔 님의 아이라면 저택에 피바람이 불지도…….”

샐리와 제니, 시녀장 루델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시녀들은 전부 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스텔을 어떻게 대하는지 봐 왔다.

아스텔이 공작성에 온 이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다정한 척, 상냥한 척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면일 뿐이다.

그런데 아스텔이 정체 모를 아이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면, 게다가 그 아이가 만약 아스텔의 숨겨진 아이라면……?

머릿속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다.

샐리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느긋하게 지켜보자고.”

“뭘 지켜봐? 아스텔 님의 아이가 아니라 진짜 친우분의 아이일 것 같은데, 왜.”

다른 시녀가 조용히 우락부락한 팔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녀는 기사 출신으로 성격이 단순하고 무덤덤한 편이었다.

“아스텔 님께 아이가 있는데 공작 각하께서 모를 리가 있어?”

“……그건 그렇지.”

그럴싸한 이유에 안심한 시녀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우리 이제 슬슬 자러 갈…… 어, 뭐야. 여우?”

그들이 마음을 내려 두고 해산하려던 틈을 타 털이 반짝반짝 빛나는 은여우가 밀실에 난입했다.

벨이었다.

귀를 쫑긋쫑긋거리던 여우의 입에서 인간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데, 무슨 일인데?”

시녀들 중 쾌활하고 눈치 없는 어린 시녀 하나가 여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스텔 님께서 정체 모를 아기를 데려오셨어요, 벨 님.”

“아기? 인간 아기?”

“응.”

“……치, 내가 더 귀여울 텐데.”

은여우가 콧방울을 씰룩거리며 혼잣말했다.

그들은 애써 미소 지으며 서로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스텔과 그 아이의 머리 색과 눈 색깔이 같다지만, 게다가 그 아이의 이목구비가 묘하게 아스텔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금발에 녹안은 생각보다 흔했고, 친구는 닮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갑자기 친구의 아기를 키운다는 것이,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사는 데 길든 수인들에게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스텔의 선량한 성정이라면 충분히 도태 직전의 친구의 아이를 맡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아무리 아스텔이라도 친구의 아이를 저리 흔쾌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들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충성스러운 시녀들이 할 일은 앞으로 하나뿐이었다.

바로 앞으로 아스텔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

* * *

같은 날 새벽.

눈앞에 있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이 안 가는 어스름한 시간.

어렴풋한 달빛이 사내의 얼굴에 비쳤다.

그의 왼쪽 얼굴에는 번개 모양의 검상이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스텔, 그 인간 치료사가 수상합니다.”

샘을 처리한 것이 바로 아스텔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었다.

아스텔이 유능한 치료사라면 그저 자신의 담당인 재규어 가문의 가주를 구해 낸 것뿐이니까.

그러나…….

재규어 가문에 심어 놓은 눈과 귀에 따르면, 샘이 제 아티팩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눈물을 흩뿌리며 죽었단다.

“아티팩트는 여전히 실종 상태이죠.”

그 말에 지금까지 내내 말이 없던 검은색 로브로 몸 전체를 가리고, 후드로 얼굴을 덮은 사내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찾는다. 먼저. 아티팩트.”

“예, 만약에라도 누군가 아티팩트를 분해할 시 우리의 정체까지도 들킬 수 있으니……. 아티팩트가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물론 아스텔이 성실한 치료사라는 것은 이미 뒷조사를 통해 확인했다.

하지만 우연일지언정 그 여자가 아티팩트를 습득했다면 말이 좀 달라진다.

‘그 여자가 어떤 인물이건 간에, 아티팩트를 수거해야 해.’

“후계자의 목숨을 취하면서, 겸사겸사 그 여자 치료사도 처리를 할 겁니다.”

이어서 로브를 입은 자가 음산하게 예언하듯 중얼거렸다.

“위대한. 군주의. 앞길. 막는. 것은.”

그는 씨익 웃으며 발아래를 기어가는 개미를 지그시 밟았다.

“예, 이렇게 밟아 주면 그만이지요.”

터져 나가는 벌레를 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감흥 하나 없었다.

* * *

다음 날, 아나이스 공작 저택.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햇볕이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한, 딱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카에게 마법 약을 먹인 뒤, 한쪽 손을 꼭 잡고 햇살 좋은 정원에 나왔다.

시녀장 루델이 정원에 가서 산책이라도 하라고 짧게 언질을 준 덕분이었다.

물론 정원에서 한가롭게 햇볕만 쬘 작정은 아니었다.

이제 조카를 어떻게 키울지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이 아이가 나쁜 놈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니까.’

내 방에 두어야 했다.

마력 제어 물약을 먹이고 보호 장구를 잘 입혀 둔 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놓아두어야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가.”

나는 곁에 있던 리트로 경에 부탁해서 낱말 카드를 하나 달라고 한 터였다.

낱말 카드는 총 백 장으로, 앞면에는 글씨가 써 있고 뒷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평범한 타입이었다.

나는 담요를 깐 테이블 위에 아이를 앉히고 그 바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드레스 위에 카드를 몇 개 쏟아 냈다.

‘뭐부터 물어볼까. 아기는 말을 잘 못하니까…….’

<마차>라는 단어 카드를 읽기는 아직 너무 어려우려나.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몸을 가누다가 통통한 흰 빵 같은 손을 들어 내 볼에 꾹 문댔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이 내 뺨을 꾹 짓눌렀다.

나는 아기를 향해 낱말 카드를 쏙 들이밀며 말했다.

“자아, 이게 뭘까?”

아이의 푸르른 녹음을 닮은 눈동자가 마차 그림을 보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아기가 마차를 알까?

잘 키우면, 천재로는 못 만들어도 영재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이 두근두근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입을 와아, 하고 벌리며 소리쳤다.

“어먀!”

“마차?”

아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먀!”

예전부터 계속 말하던데, 저건 혹시 ‘엄마’라는 뜻인 걸까?

나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라고는 잘 말하네? 나중에 아빠, 도 해 보자.”

“압빠?”

오빠가 돌아올 날을 대비해서, 나는 미리 이 아이에게 친부모에 대한 교육을 잘 시켜 두어야 했다.

조카가 행여나 자신을 두고 간 오빠를 원망할까 걱정이 되었고, 미래에 가문을 복권할 자기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했다.

“응. 너한테도 아주 멋진 아빠가 있거든.”

“웅?”

아기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낱말 카드에서 ‘옷’이라고 써 있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운이 좋게도 반대편 그림에는 기사 제복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오빠가 자주 입는 기사단복 같은 것 말이다.

“네 아빠가 입는 옷이야, 멋지지?”

아기는 토실토실한 볼을 부풀리면서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두 뺨이 포슬포슬한 알감자처럼 땡땡하게 흔들렸다.

“웅!”

힘차게 대답한 아이는 내게서 ‘옷’ 낱말 카드를 빼앗았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쥔 채 한참 동안 그림을 지켜보았다.

“압빠.”

“으응, 아빠.”

“압빠, 옷.”

“세상에…….”

아침에 먹여 두었던 마력 폭주 제어용 물약이 설마 벌써 제 기능을 하는 것일까?

벌써 아기가 ‘옷’이라고 말하다니.

약을 먹으면 고통으로 흐려져 있던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천재가 틀림없어.”

나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내게 말을 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볼에 쪽 입을 맞추었다. 아이의 뺨에서는 분내가 났다.

“압빠, 어먀.”

아이가 혀를 쏙 내밀었다.

나는 아이가 목에 걸고 있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면서 ‘아빠’ 하고 작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으응, 아빠 보고 싶지?”

“웅!”

“곧 볼 수 있을 거야.”

“힛!”

아이가 다리를 달랑거리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도 ‘옷’이라고 써 있는 낱말 카드는 꼬물꼬물한 손으로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나중에 아빠 오면 확인해 보려고 하나?’

나는 픽 웃었다.

따뜻하고 규칙적인 호흡이 가슴 안쪽을 콕콕, 두드렸다.

‘내가 지켜 줄 아기.’

뿌듯하게 웃으며 어르는데, 주변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나는 눈동자를 슬쩍 움직여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응시했다.

다람쥐가 나무를 연신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자그마한 동물 친구들이 어딘가에 숨어 나를 빼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도토리 줄까?”

알밤을 문 듯한 통통한 갈색 털 뭉치가 푸들푸들 흔들렸다.

“……혹시 수인이야?”

왠지 모르게 호달달 떠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하지만 누가 들었다 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을 일상적이고 안온한 대화였으니까.

* * *

다람쥐의 제보는 도토리를 모으는 것만큼이나 재빨랐다.

작은 다람쥐는 신속하게 정원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뜻밖의 아이를 데려와 공작가를 뒤흔든 아스텔의 행보를 주시하던 공작성의 시녀들에게 향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시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스텔의 전담 시녀들과 토끼와 여우 시녀들을 비롯해 호위 기사 리트로 경까지 함께 있었다.

개중 다람쥐를 먼저 발견한 여우 시녀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람쥐?”

“우린 바쁘다.”

잠시 말이 끊겼던 리트로 경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침에 낱말 카드 전달하면서 슬쩍 여쭈었는데 말이죠. 아스텔 님이 절대로 자기 아들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솔직한 눈빛을 보면, 아마 아닌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람쥐는 답답하다는 듯 도토리를 잔뜩 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폴짝 뛰어올라 제 말을 들어 줄 시녀의 손등 위에 안착했다.

“저 다람쥐가 할 말이 있다는데요?”

다람쥐와 말이 통하는 토끼 시녀가 다람쥐의 입에서 도토리를 덜어 내 준 다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끼잉, 낑.”

그녀가 다람쥐가 웅얼거리는 말을 듣고 굳어졌다.

“왜, 무슨 일인데?”

“표정 왜 그래?”

“그러니까…….”

그녀가 입술을 어렵게 열어 말을 꺼냈다.

“그 아기가, 아스텔 님께 엄마…… 라고 불렀다는데?”

“그, 그냥 적당히 장난삼아 한 말일 겁니다.”

리트로 경이 제 얼굴을 앞에 들이대며 말하자 토끼 시녀가 질색을 했다.

“저기, 얼굴 들이대면서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좀 무섭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리트로 경을 외면한 토끼 시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왜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까요.”

“그러고 보니…….”

가만히 있던 샐리가 툭, 말을 내뱉었다.

“……인간들이 성혼하는 나이가, 열일곱에서 여덟 정도였던가요?”

“평민들은 조금 이르게 혼인하는 것으로 듣기는 했습니다만…….”

리트로 경이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공작에게 들었던 온갖 경고 문구들을 섬뜩한 심경으로 떠올렸다.

그가 포악한 얼굴을 반쯤 일그러뜨린 채, 곰같이 커다란 손 안에 파묻었다.

주변에 있던 토끼와 여우 시녀가 그의 주변을 맴돌며 위로했다.

리트로 경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혹시, 공작 각하께서 마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그걸 그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 없는 토끼 시녀가 또다시 조잘거렸다.

“보통 마물은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그다음에 찢어 죽이는 편이지요. 갑자기 그건 왜요? 잘 아시는 분이. 무슨 문제라도?”

공작은 아스텔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녀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다면 그를 마물처럼 다뤄 주겠다고 말했었다.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고자가 될 미래를 떠올린 리트로 경은 식은땀조차 나지 않는 공포에 표정을 굳혔다.

오히려 무섭도록 침착해졌다.

리트로 경은 차분하게 손을 내리고 중얼거렸다.

“……모두,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시녀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아니죠, 아직 확실하지는 않잖아요?”

시녀들은 오랜 시간 공작성 안에서 살며 저택을 가꾸어 왔다.

그러나 아스텔이 오기 전까지 공작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본 역사가 없었다.

아스텔이 예외를 만들었으니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예,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리트로 경이 자애롭게 미소 짓더니 마치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쨌거나, 아기님이 도착했다는 것은 변수이기는 하니까요. 제가 공작 각하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제가 아스텔 님의 호위 기사이니 보고를…….”

모든 것은 자신이 다 안고 가겠다는 성자의 마음을 품은 채, 그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요즘 들어 공작성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다들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한달까.

내게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듯했지만, 정작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의아함이 커지는 가운데, 리카르도와 벨, 둘과의 티타임이 찾아왔다.

“허어……. 그 녀석은 뭐냐?”

“리카르도 님, 얘는 제 친구의 아기예요!”

리카르도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벨은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목소리의 톤이 아주 음산하고 낮았다.

“내가 더 귀여운데……. 저 어린 녀석은…….”

“응?”

“아니야!”

벨은 은여우 기문의 후계자답게 근엄한 체하며 어깨를 치켜올렸다.

“아무튼, 어쩌다 저 아기를 맡게 된 거야?”

벨은 내 눈을 맞추고 양 주먹을 옆구리에 대며 또박또박 말을 건네 왔다.

‘세상에, 엄청 용감해졌네, 벨. 엄청 용감한 멋진 어린이 같아.’

뻔뻔하게 치켜든 턱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게 다 내 물약 덕분, 아니지, 벨이 잘 이겨 낸 덕분이겠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벨에게 화답했다.

“아, 친구가 급하게 사정이 생겨서 아기를 키울 수 없게 되었거든.”

나는 아기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리카르도가 헛기침하는 것을 본 내가 나직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마침 제가 아기를 좋아해서요.”

티는 덜 나겠지?

“아녕!”

내내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아기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렇게 활기찬 모습이라니. 이게 모두, 내가 물약을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먹여 준 덕분이 아닐까!

아기는 불과 하루 만에 조금 더 살이 오르고 토실해졌다.

‘역시 마력 제어 물약 한 우물만 판 보람이 있다니까!’

그때, 아기가 손을 들어 리카르도를 가리켰다.

“야옹이!”

“응? 야옹이?”

잠깐 리카르도의 손에 재규어 특유의 뾰족한 손톱과 무늬가 드러났던 것을 본 모양이었다.

“웅!”

“허어.”

리카르도가 다시 동물의 손처럼 변한 손을 느긋하게 흔들어 보였다.

재규어가 고양이과라서, 야옹이라고 부르는 걸까?

아기는 말릴 새도 없이 꾸물꾸물, 리카르도의 무릎 위로 기어갔다.

그러더니 척, 벨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며 소리쳤다.

“모야? 이건 모야?”

궁금증도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자그마한 얼굴과 짧은 목이 여기저기 움직였다.

벨이 황당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 고양이 따위는 알면서 감히! 우리 여우를 몰라?”

“아기가 조금 말문이 터지는 것도 늦고, 동물을 잘 몰라서 그래.”

“허어……. 그 친구란 놈은 얘한테 우리 재규어 가문을 고양이라 가르친 게냐? 아예 너한테 교육을 맡긴 게냐고!”

벨과 리카르도의 목에 핏대가 섰다.

과한 반응에 조금 어리둥절해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수긍했다.

“아, 네. 친구는 엄청 바빠서요, 제가 꼭 키워야 했어요.”

내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왜 그러지? 아, 너무 호구 같은 발언이었나?

“그, 아기가 아프니까요. 제가 원래 치료를 조금 잘하고 해서……. 임시로 맡긴 거죠.”

4대 가문 직계 혈족이 껴 있는 상황이라, 시녀로서 뒤에서만 지켜보며 침묵하던 제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구분의 자녀인데 아스텔 님하고 조, 조금 닮았네요?”

제니의 낯빛이 대놓고 흐려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랑 닮았나?”

나는 아기의 이목구비를 하나둘씩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곁에 두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어느 정도 닮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따지고 봤을 때, 이런 머리 색과 눈 색은 제국에 워낙 흔했다.

금발도 가장 흔한 색이고, 녹안도 가장 흔한 색이니까.

유독 오빠를 닮아 빛깔이 아름다웠을 뿐이다.

내가 아기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자, 아기도 나와 눈을 맞추고 입매를 끌어 올리더니 히이, 하고 웃었다.

“먀!”

“응?”

“어먀!”

수다쟁이 같은 모습에 흡족해졌지만,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엄마라니, 하여튼 아기들이 말문을 트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엄마라더니.

자꾸 그 말을 하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엄마의 정이 그리운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쭉 내밀어 리카르도의 무릎 위에 앉은 아기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네 엄마 아니라니까, 바보야.”

“……먀?”

아기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스테! 어먀 마자.”

쨍그랑!

아기의 말이 끝나고 몇 초 뒤, 샐리의 손에서 티 포트가 떨어져 내렸다.

나는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나와 아기 빼고,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전부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왜 그러세요?”

벨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입술에 피 나는데, 벨?”

“……허, 헙. 아니거든!”

뭐야, 분위기 갑자기 왜 이래?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아까에 비해 조금 더 피로해 보이는 리카르도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반면 벨은 손을 들며 내게 말했다.

“나, 나는 아스텔 방으로 놀러 갈래!”

“네, 오세요!”

그렇게 그날의 티타임은 안락하게 끝이 났다.

* * *

“이런, 이런!”

벨이 손에 들고 있던 물약 병을 테이블 위로 부자연스럽게 떨어트렸다.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액체가 곳곳에 흩뿌려졌다.

“내가 치울게, 그대로 둬.”

“……응!”

아스텔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고, 벨과 아기는 침실 안 침대 위에 나란히 앉혀졌다.

벨은 꼬물거리는 아기의 손을 보면서 눈매를 샐쭉하게 떴다.

“너.”

“우웅? 베리?”

“벨이라고 말한 건가? 내 이름을?”

“웅! 베리!”

그러자 동생이 없는 벨이 흉곽을 커다랗게 부풀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특별히 형님이라고 부르게는 해 주지.”

사실 벨은 동생이 아주 갖고 싶었다.

폐부에 가득 들어찬 야망을 숨긴 벨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해 봐라, 형님!”

“현님?”

“……쳇. 아직 아기라 혀가 짧은가. 형님이란 말이 잘 안 나오네.”

벨이 입술을 삐쭉였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며 형님, 형님 이라는 단어를 조심조심 흉내 내 보고 있었다.

그런 아기를 빤히 보던 벨이 아까 티타임 장소에서부터 하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아무튼. 너, 엄마 따로 있는 거 맞지?”

“웅?”

“너 누가 키워 줬어?”

“선새미.”

“……선생님?”

“웅!”

대화가 한결 더 겉돌았다.

아이는 벨이 신기하고 멋져 보이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처음 생긴 ‘형님’에게 열심히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형님’인 벨은 진지한 고뇌를 하는 중이었다.

‘이 아이가 아스텔의 자식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내지?’

벨은 급하게 침실 너머, 테이블 쪽을 빼꼼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직 아스텔은 이리저리 오가며 테이블을 치우는 중이었다.

“너, 엄마가 뭔지 알아?”

“나아 주고 키어 준 사라미.”

“낳아 주고 키워 준 사람이라, 좋아.”

그때 아스텔의 시선이 침실 쪽으로 향했다.

잘 놀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벨은 급하게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그럼 네 엄마는 누구지?”

아기는 목을 새끼 거북이처럼 쭈욱, 뺀 뒤 고개를 침실 바깥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검지를 내밀더니 콕, 하고 아스텔 쪽을 찍었다.

“아스테!”

“……아, 아스텔이라고? 저기 있는 아스텔? 엄청 귀엽고 착하고 똑똑한 그 아스텔 말야?”

제 본심이 다 드러났다는 것도 모른 채, 벨이 급하게 말을 꺼내 들었다.

‘형님’이 자기의 말을 들어 줬다는 게 뿌듯했는지, 아기는 고개를 엄청 커다랗게 끄덕거렸다.

“마자!”

어른 손톱만 한 귀가 달랑달랑 흔들릴 정도로 크게 끄덕이는 것을 보던 벨은 좌절했다.

절망한 벨은 철퍼덕, 침대 바깥쪽으로 떨어지며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벨의 몸이 은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끼이잉…….”

그런 벨에게, 아기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내렸다.

“우리 어먀 마자!”

그 말에 다급히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침대 위로 오른 벨이 눈을 빛내며 넌지시 속삭였다.

“그럼 너희 아빠는 누군데?”

그러자 아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통통한 손가락이 도토리만큼 조그만 무릎 위에서 꼼질거렸다.

“……업써.”

아이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얼굴이 있기는 했다.

그는 자기를 ‘카시언’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때 너무 아팠던 탓일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게다가 여기 온 이후로 그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곧 아이는 낙담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기, 버려져써…….”

벨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 아이 녀석은 아스텔의 아들이 맞고, 아비라는 놈은 야반도주를 한 것이렷다?

자신 같은 멋진 형님에게 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아기가 거짓말을 고해바칠 리도 없었다.

인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수인들은 세 살이 되면 어느 정도 다 논리력을 갖추게 되는 법.

고로 저 녀석의 말이 거짓일 확률은 낮다고, 벨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감히 버려?”

아기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끄덕였다.

일단 뱉고 보니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버려떠!”

“그악스러운, 여우 밥이 될 놈!”

벨이 으득, 이를 갈며 세상에서 제일 나쁜 말을 했다.

“아니, 이건 실수. 하여튼 어린애들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니까.”

아기에 비해서는 커도, 벨 역시 아직 짜리 몽땅한 어린아이였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벨은 몸을 부풀리며 아이 앞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제야 깨진 물약을 깨끗하게 갈무리한 아스텔이 둘의 근처에 다가와서 속삭였다.

“둘이 재밌게 놀고 있었네? 무슨 말 했어?”

“어먀!”

아기가 아스텔의 다리 근처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벨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눈물이 고일 것 같은 느낌에 벨이 팽,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바보 같은 아스텔 누나는…… 시녀들의 추측처럼 나쁜 놈한테 걸렸던 걸까?

“세상은 역시 착하게만 살면 안 되나…….”

“응? 무슨 일인데, 벨?”

아스텔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니 갑자기 삶에 대한 고뇌가 깊어지며, 아까 먹었던 우유가 얹힐 것 같았다.

벨은 시큰시큰한 콧잔등을 꾹 누르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기는 아스텔의 아들이다.’라는 추론에 확신을 더한 벨이 얕은 한숨을 폭폭 내뱉었다.

* * *

한편, 수도 내 아나이스 공작가의 컨트리 하우스 안.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인 몇몇을 수도에 심어 두었다.

수인들은 곧 그에 관한 소문을 자그마한 영상구에 담아 가져왔다.

이를 받아 든 공작은 손에 쥔 영상구를 터트릴 듯이 꽉 움켜쥔 뒤, 켜 보았다.

-카시언, 얼굴이 핼쑥해졌던데?

-거, 새 연인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영상구 속에서 얼굴에 흉이 있는 사내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하여튼 문란하기 짝이 없는 놈. 그리 아랫도리를 놀리다가는 파산할 게 뻔해.

카시언과 달리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해서일까. 척 보기에도 열등감이 짙게 어려 있는 낯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반쯤 사실인 듯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상들에서도 카시언이 문란하다는 말은 꼭 나왔으니까.

‘정결하지도 못한 주제에 누굴 넘본다고.’

자신처럼 순수하지도 못한 몸으로 아스텔을…….

그는 카시언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을 차곡차곡 적립해 나갔다.

그 와중에도 아스텔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이, 지루한 회의에 참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회의에서 마물과의 전쟁에 대해 논할 때마다, 최고 결정권자인 황제는 대놓고 마물을 두려워하고 역겨워하는 티를 냈다. 그 꼴이 하찮게 보이기는 했으나, 그 덕에 인간 평기사와 물자를 내어 주는 데에 꽤 후하게 굴었으니 그럭저럭 보아 넘길 만은 했다.

금일도 새로운 회의가 열렸는데, 다행히 오늘도 마물 전쟁의 피해 보상에 관해 긍정적인 쪽으로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그 후 남아도는 지루한 시간을 시가를 피우며 적당히 죽이고 있을 때쯤, 공작에게 전령새가 날아들었다.

깃털이 빨갛게 물든 걸 보니 리트로의 것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새의 꽁지를 잡아챈 아나이스 공작은 다리에 매달린 편지를 확인했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

아스텔 님의 친구가 도착했습니다.

혹시 친구분의 공작성 입성이, 각하께 허가된 부분인지요?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다소 의문인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돌아오셔서 확인을 하심이…….]

간단한 알림 정도였다.

일전에 아스텔은 제 친구를 공작성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고, 공작은 흔쾌히 허락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지나치게 저자세에, 두루뭉술하게 적힌 수하의 보고를 읽으니 본능적인 불쾌감이 일었다.

그는 아스텔이 전에 치료해 준답시고 매만졌던 제 팔목을 느른하게 문질렀다. 확실한 건, 지금 그들의 각인 상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돌아가야겠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이른 아침, 나는 델마 마을 동산 초입에 있었다.

리트로 경은 어젯밤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딱 봐도 졸려 보이는 데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상당히 짙었다.

“여긴 왜 오신 건가요?”

그가 하품을 억누르며 내게 물었다.

“아, ‘자라나라 머리머리’의 고객님이 계셔서요. 어제 못 주무셨어요?”

“아……. 네. 최근에 귀족 가문 강도 살인범이 있어서요. 아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놈이라 잡기가 힘들어요.”

리트로는 손에 쥔 전단을 바스락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단에 ‘대도 이보르’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얼핏 흐리멍덩한 몽타주도 보였다.

대도 이보르.

‘오이처럼 생겼네. 얼굴에 타투나 흉터가 많고……. 전형적인 범죄자상이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치료소에 있을 때도 ‘이보르’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으니까.

‘일단, 대도 이보르는 잡기 힘들 텐데.’

내가 아는 정보로도 이보르는 원작 끝까지 잡히지 않았었다.

나는 리트로를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아……. 그럼 잠깐 여기 앞에서 눈 붙이고 계세요. 나중에 저도 같이 찾아봐 드릴게요, 이보르!”

“아이고, 그럴 순 없죠, 감히 저 같은 천것이! 아무튼 어서 들어가 보세요. 보초를 서겠습니다.”

눈의 핏줄이 터진 리트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에 섰다.

“네, 고마워요.”

그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넨 나는 동산 입구로 들어가기 전 아티팩트 감정사, 월렛의 편지를 떠올렸다.

[본래 내가 가는 것이 맞소만, 안 될 듯싶소.

호위 하나만 데리고 몰래 오시오. 이 아티팩트,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소이다.]

아무리 봐도 심각한 내용의 편지.

나는 내 몸에 보호 마법을 바리바리 두르고 급하게 동산으로 텔레포트한 상황이었다.

조카는 보호 장구를 잔뜩 매달아 두고 온 데다 샐리와 제니가 어련히 잘 보살펴 주겠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한 시간 안에 빠르게 돌파해야 해!’

리트로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스텔 님은 고객 영업하시고 바로 공작 각하의 선물을 사러 가시는 거죠?”

“아, 선물, 네! 맞아요!”

……일단은 시녀들에게 공작님 선물 드린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나온 거니까.

‘고, 공작님 드릴 선물을 사는데, 사람 많이 데리고 가면 부끄러워서.’

‘로맨틱해요! 좋아요! 리트로 경만 데려가세요!’

……너무 속이기 쉬운 시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죄책감이 들었다.

리트로 경도 순진한 표정을 하고 합장하듯 양손을 모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열심히 일하는 모습 존경합니다.”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던 나는 리트로 경을 동산 앞에 세워 둔 채, 동산 속 자그마한 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나를 월렛이 초조해하는 표정으로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스텔 님.”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티팩트의 중앙을 가리켰다.

“일단 이 아티팩트부터 보시오. 분석이 완료되었으니.”

탄 것처럼 그을린 브로치 아티팩트의 중앙에는 자그마한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는 일단, 삼각형 모양이 그려져 있소.”

“아…… 네.”

그는 헛기침을 하며 검지로 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가리켰다.

“삼각형의 각각 끝에는 ‘사기’, ‘변장’, ‘공포’라는 세 가지의 특수 능력이 담겨 있소이다.”

맨 왼쪽 꼭짓점에 위치한 ‘사기’에는 검은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일단, 이 능력은 파괴되었네요.”

“그렇소. 바로 이 아티팩트가 ‘사기’를 의미하는 아티팩트인 것 같소이다.”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브로치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던 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모두가 그에게 속아 넘어갔었지.

“다른 주요 능력으로 ‘변장’과 ‘공포’가 남았네요.”

“그렇소. 다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아직 잘 모르겠소.”

그렇다면 각 아티팩트의 소유자들은 변장과 공포라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월렛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한데 말이오, 이 아티팩트에 대해 알려고 하는 자가 있는 것 같소.”

그가 끝이 약간 그을린 계약서를 보여 주면서 낮게 속삭였다.

“그렇군요.”

“이 계약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 아니외까?”

나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모든 것은 내 예상대로였다.

샘의 사건을 파헤치고 아티팩트를 찾고 있는 자는 나와 월렛 간의 계약이 《마법 계약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자명했다.

“네, 괜찮아요.”

“진심입니까?”

“네. 우리한테는 괜찮아요.”

여전히《마법 계약서》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인 월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들떴다.

지금 이 아티팩트를 추적하고 있는 자는 아마 공작성 내 첩자이거나 그에 밀접한 관계인 이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말이지…….

어서 알아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 계약서에는 당신이 모르는, 아주 멋진 비밀이 숨어 있으니까.

이름 모를 익명의 당신이 우리의 계약에 대해 알아내려 발악할수록, 계약서는 그의 숨통을 쥘 것이다.

“이제 교환을 해요, 우리.”

나는 그를 향해 발모제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내밀었다.

설레는 눈빛으로 발모제를 받아 든 그가 잠시 고민하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실,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오.”

“……?”

그는 아티팩트에 턱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공작성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었소.”

“……네?”

그가 브로치 아티팩트를 내밀며, 그것의 반대편을 보여 주었다.

전에 내가 봤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고대어가 적혀 있네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해독이 어려운 고대어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세계에 환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고대어를 배워 두었었다.

“일인의 아래에 있되, 모두의 위에 있다. 이것은……. ‘공작가’를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니오?”

“…….”

“이 아티팩트를 지닌 자는 공작가와 관계가 있지 않겠소? 하니, 함부로 공작성에 들어가 논할 문제가 아니었지.”

원작에서는 세 개의 아티팩트를 분석하면 최종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저 문구의 의미를 그냥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 아나이스 공작가를 가리킨다고는 할 수 없죠. 일단, 제국에 공작가는 두 개니까요.”

실제 제국의 공작가는 두 군데 존재했으며, 이 아티팩트가 가리키는 공작가가 아나이스 공작가라는 건 아직 알 수 없었다.

“허어, 하긴, 그 말도 맞구려……. 흐음.”

월렛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뷔에트리 백작가를 무너뜨린 첩자들이 왜 하필 아나이스 공작성에 숨어들었을까 했는데.’

내 예상보다 더, 첩자들과 아나이스 공작성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후계자들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아티팩트를 집어 들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힌트가 하나 더 생겼는데 왜 마음이 수런거릴까……. 공작님이 흑막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서일까.

“아, 그리고. 일단 아티팩트 내에 있는 연결 고리는 모두 파괴했네.”

그가 내게 아티팩트를 건네면서 말했다.

“이능력만 남은 상태야. 원래 폐기 의뢰를 받은 아티팩트는 내가 가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월렛은 아티팩트 욕심이 많았다. 특히 ‘사기’라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라면 더더욱 탐을 낼 것이다.

지금도 아티팩트를 건네는 몸짓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데.

내가 부탁한 적도 없는데, 이능력이 담긴 아티팩트를 선물처럼 건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뭔가 대가를 요구하실 모양이군요.”

월렛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 다이어리 아티팩트.”

뜻밖의 말에 나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월렛이 조급하게 나를 보챘다.

“꼭 나중에 한 번 보여 주시오. 아무리 봐도 내가 본 것 중 최상급의 아티팩트라.”

그는 전에 집무실에서 보았던 《아스텔의 행복 다이어리》가 여전히 궁금한지 집요하게 굴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 다이어리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분명히 평범한 가판대에서 산 걸 내가 봤는데.’

의아해하던 순간,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갑작스럽게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서였다.

“왜 그러시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즘 들어 종종 머리가 아파 왔다.

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두통약을 지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괜찮다 웃어 보였다.

* * *

한편, 리트로와 아스텔이 너구리를 만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시녀장 이하의 토끼, 여우 시녀들이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생명 지킴 위원회’로 가칭하며 밤마다 모이는 무리였다. 그 모임에는 언제나처럼 벨도 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아스텔이 외출했기에 어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짬을 내어 모일 수 있었다. 다들 착석하자마자 이 자리의 최고 정보통이 된 토끼 시녀가 말을 꺼냈다.

“아스텔 님은, 리트로랑 공작 각하 선물을 사러 가셨대.”

“하, 다행이야. 우리 목숨이 일 센티 정도 연장되는 소리가 들린다.”

“일 센티 연장되면 한 이틀 정도는 더 살 수 있는 건가?”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생명 연장 대책을 열심히 수군댔다.

가장 확실한 건 아스텔이 데려온 아이를 치우는 것이지만, 함부로 없앨 수는 없을 테니 맹수의 왕인 공작의 분노를 피할 뾰족한 수 따위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

“아스텔 님은, 공작 각하의 특별 대우를 잘 모르시는 것 같지?”

“그, 그러니까 아기님을 데려오고도 태평하신 거, 거겠지.”

토끼 시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귀가 쫑긋하더니 적안이 반짝였다.

그때 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 아스텔의 아기가 맞는 것 같다.”

벨이 전날 아기와 나눴던 대화를 공유하자, 여기저기서 꺼질듯한 한숨이 쏟아지며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 우리 성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휴, 요즘 분위기 좋았었는데…….”

그 말에 수인들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의 뇌리로 과거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허…….”

사실 아스텔이 오기 전까지 공작성은 어둡고, 침침하고, 그리고 공포스러웠다.

‘일벌백계하여, 주모자는 죽이는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각하…….’

‘……조,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닐지…….’

‘반역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작위에 오른 뒤, 지금의 아나이스 공작은 자신의 권위에 굴종하지 않는 자들을 과감히 처단했다. 그의 출신 성분에 의구심을 품는 자들은 빠르게 썰려 나갔다.

그는 인간과 수인의 힘의 한계를 아득히 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마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심히 조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른 숙청과 기반 다지기였다.

‘내 출신이 궁금하거나 진짜 이름이 궁금한…….’

‘…….’

‘다시 말해……. 내게 도전할 자가 있습니까?’

그의 방식은 간단했다.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굴종시키고, 패배한 자는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온정 한 점 없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었다.

그 덕분에 공작성과 북부는 빠르게 안정되었고, 공작의 권위를 넘보려는 자들도 확연히 줄기는 했다.

‘내 방 옆에 새로운 객실을 하나 들여놓을 생각입니다.’

‘예, 각하.’

‘가장 아름답게 배치해 주십시오. 델피니움, 이라는 꽃의 이름을 따는 게 좋겠군요.’

공작은 까다롭고 뜬금없는 요구까지도 군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자만 제 곁에 두었다.

그마저도 일시적인 인사이긴 했지만.

그래서 그에겐 역대 북부의 공작이나 다른 제국의 귀족과는 달리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자가 없었다.

시녀장인 루델이 빽빽하게 구는 것도 어찌 보면 제 주인인 아나이스 공작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했었다.

그는 내부 사정에 무심했으나, 일여 년 전부터 돌연 결벽적일 정도로 성의 건축물 관리에 철저해졌으니까.

하지만 아스텔이 공작성에 들어 온 뒤부터 공작의 태도는 상당히 유해진 구석이 있었다.

‘마물 전쟁을 치르던 도중, 배신했던 잔당을 군법에 따라 바로 죽여 성벽에 효수할까요? ’

‘죽이면 꽤 흉측할 텐데.’

아니, 그렇게 따지면 이 성은 지금까지 내내 흉측해 왔는데…….

드물게 미간을 좁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죽이는 대신 추방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공포 정치가 지속되었던 과거를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린 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면 과거보다 더 피바람이 불 수도…….”

“무서운 말 하지 마!”

그러나, 상황을 수습할 틈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스텔이 선물을 사러 나서고 가신들이 분주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던 바로 그때.

“공작 각하께서 귀환을 예고하셨습니다.”

가장 두려워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녀장 루델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정확히 언제지?”

“곧입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정말로 곧이어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아나이스 공작이 따로 언질도 없이 훨씬 빠르게 귀환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

“아기님은 어디 계시지?”

……아기를 공작의 눈에 띄지 않게 꼭꼭, 숨겨 두는 것.

“지금 방 안에…….”

이 자리를 진두지휘 중인 루델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당장 숨기고, 델피니움 룸 문 잠가.”

아스텔이 없는 지금, 아기가 혼자 몸으로 공작과 독대하는 사태는 없어야만 했다.

“넵!”

최근 들어 가장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모양새로, 시녀들이 비장하게 몸을 일으켰다.

루델은 진지하게 말했다.

“아기님은 샐리랑 제니가 보살피고 있을 거다. 가서 단단히 일러두도록.”

이제는 토실토실 살이 올라 저택 여기저기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는 아기님.

고이 델피니움 룸에 모셔 놓고 문을 꽉 잠가 두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 둘만 모르는 분주한 첩보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아나이스 공작은 공작성 내부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을 달렸다.

리트로의 보고 내용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저택은 평화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

말 탄 기사들을 연무장으로 보내고, 공작성 곳곳을 지키는 맹수들을 무심히 지나친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공작의 흑마는 곧 본채로 들어가는 문 앞에 다다랐다.

그의 시선이 성주의 귀환을 맞이해 일대 정렬한 채 서 있는 가신들의 무리에 닿았다.

말에서 내린 그는 무심히 앞을 둘러보았다.

오는 내내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으나, 성내로 들어선 이후로는 온화한 미소를 띠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작 각하, 오셨어요?’하고 발랄하게 그에게 말을 걸 아스텔이 없었다.

그녀를 곁에서 보필하라 붙여 두었던 리트로 역시 이 자리에 없었고, 늘 아스텔을 따르던 강아지 수인 시녀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기이하고 수상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공수 자세를 취한 시녀 하나를 응시했다. 날것의 시선을 그대로 받은 시녀가 입술을 덜덜 떨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각하. 이, 이, 이렇게 빠르게 귀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스텔 님은.”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성의 사용인들과 재미없고 쓸모없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인정 많은 주인은 아니었다.

“어디에 있지.”

완연한 긴장감이 묻어 있는 시녀의 시선을 보며 그는 입매를 비틀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 잠시 리트로 경과 시가지에 나서셨습니다.”

리트로 경?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무언가 급한 일이 있었는지, 다소 뒤늦게 나온 시녀장 루델이 직접 나서 입을 열었다.

“각하의 귀환 축하 선물을 사러 가신 겁니다.”

“……그런가.”

그제야 냉소적이었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 분위기를 알아챈 루델이 그를 향해 조심히 말을 이었다.

“아스텔 님의 신변에 문제는 없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도대체 리트로가 보냈던 모호한 편지는 무슨 의미였을까.

리트로가 자리를 비웠으니 추후 심리해야겠지.

그래도 자신의 선물을 사러 나갔다는 소식에, 그의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상황을 정리한 공작은 차분히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다만 공작의 표정이 한결 풀린 것과 달리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결코 평안할 수 없었다.

특히 총대를 메게 된 루델의 경우는 더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아나이스 공작의 뒷모습을 살피던 루델이 주변에서 덜덜 떨고 있는 수인 시녀들을 자애롭게 바라보았다.

그녀조차도 처음으로 지어 보이는 따뜻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하늘, 그간 자신이 공들여 관리해 온 완벽한 공작성에 찬사를 보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아, 아스텔 님 덕에 오랜만에 찾아온 꿀 같은 평화였는데 말이지…….

덧없이 짧구나.

일단은 샐리와 제니가 아기님을 잘 보필하고 있을 테니, 아직까지는 목숨이 붙어 있다고 봐야 하나…….

목이 달랑달랑한 채로 곧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 *

시녀장이 잠시 지체하는 사이 아나이스 공작은 빠르게 저택의 계단을 지나 층계참까지 넘었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다 올라 제 방 근처로 다다랐다.

아스텔이 머무는 델피니움 룸의 바로 옆이었다.

느긋하게 아스텔의 방 문 앞을 지나치려는 아나이스 공작에게, 마침내 따라붙은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각하, 그게. 조심스럽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 운을 띄우면서도 시녀장은 당장 이 자리에 없는 리트로 경을 떠올렸다.

기사로서 고자도 감수할 거라고 했었잖아……!

결국 등 터지는 건 왜 자신인 것인지.

“무슨 말이지.”

시녀장은 침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공작이 의뭉스러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시녀장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저택을 혼돈과 파괴, 멸망에 빠뜨릴 발언을 지금 당장 해야 할지, 아니면 나중에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래도 아스텔 님이 오실 때 하는 게 낫겠지?’

그녀가 애써 침착하게 이 상황을 수습하려던 바로 그때, 델피니움 룸 쪽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 * *

시녀장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온 신경이 아스텔에게 향해 있는 공작은 달랐다.

그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델피니움 룸의 문이 살짝 열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시녀장의 어깨너머로 가 닿았다.

그 순간.

“먀?”

작고 꼬물거리는 아이가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듯 금빛의 머리칼로 까치집을 한 서너 살배기 아기였다.

아이를 델피니움 룸 안에 잘 가둬 두라 말했거늘!

뒤돌아 아기를 발견한 시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기의 동그란 녹색 눈동자는 진지한 호기심을 담은 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웅?”

아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통통한 검지로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옷!”

아기의 뒤로 샐리가 급하게 쪼르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아기님, 아기님!”

아기가 제 눈을 비볐던 손가락으로 근처에 멈춰 있는 공작을 가리키며 재차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머딧는 옷!”

이윽고 델피니움 룸을 빠져나온 시녀, 샐리는 힘들어 죽겠다는 듯 아기의 밤톨 같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아, 아니.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시는…….”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고뇌하며 좌절한 것도 잠시.

샐리는 왠지 묘하게 어두컴컴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시야에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아나이스 공작이 들어왔다.

“헉.”

샐리는 헛숨을 급하게 들이키며 주춤 발을 물렀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아기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면서, 꼬불꼬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감으며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그리고 그때,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기가 도도도도, 공작을 향해 거침없이 뜀박질하는 것이다.

양말도, 신발도 신지 않은 새하얀, 그러나 생채기나 흉터가 조금 남아 있는 맨발로.

“옷!”

누구도 막지 못한 사이 빠르게 달려나간 아기가 새순만큼 조그마한 손으로 공작의 까만 제복을 조심조심 움켜쥐었다.

검은 벨벳 원단이 아기의 무자비한 손안에서 살포시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아나이스 공작은 얼어붙어 있었다.

평소와 같이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혼돈뿐이었다.

계속, ‘옷’만을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슨, 일이지?”

경악한 어른들의 속도 모르고, 아이는 해맑게 방긋 웃으며 공작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반질반질한 뺨 위에 떠오른 분홍 홍조와 반짝반짝 싱그럽게 빛나는 푸르른 숲 같은 눈빛이 눈에 띄었다.

“안농!”

아이의 발랄하고 상큼한 목소리와는 달리 시녀장의 표정은 시꺼멓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이 공작성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될 목소리를 들은 아나이스 공작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삐뚜름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서늘해져 가자, 시녀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귓가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약해 빠진 어린것을 싫어합니다.’

각 가문의 후계자들이 공작이 거주 중인 본채로 들어왔을 때, 공작이 무어라 말했던가.

‘후계자든, 누구든 관계없습니다. 본채에는 극히 최소한의 인력만 들어오게 하십시오.’

누구든 어리고 귀여운 존재에 관심을 가질 법도 한데, 공작은 싸늘한 시선으로 금방이라도 얼려 죽일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제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인물을 관찰할 뿐이었다.

“히이.”

아기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내 저택에 이상한 게 들어온 것 같군.”

“가, 가, 가, 각하…….”

“왜 저런 게 여기 있는지, 해명이 필요하겠는데.”

그의 시선을 받은 시녀장이 급하게 몸을 아래로 굽혔다.

“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각하.”

아나이스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가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다.

더없이 싸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제복을 거듭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까르르, 웃다가 공작을 향해 반쪽짜리 꽃받침을 해 보였다.

“짜잔!”

순간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일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제 키의 반의 반절도 안 되는 것 같은 아기를 내리깔아 보며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는 저 이상한 게 이곳에 있다는 건 둘째치고, 왜 아스텔의 방에서 나온 거지. 그는 일생 최초로 사태 파악이 전혀 안 되는 오리무중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도 아나이스 공작은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차분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아스텔의 호위 기사 리트로가 보냈던 기묘한 내용의 급보.

그리고 아스텔의 방에서 나온 못 보던 어린아이.

황망하다는 얼굴을 한 가문의 시종들까지…….

모든 단서는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과 관련된 일이니 함부로 속단해서 실수할 생각은 없었다.

무섭도록 침착해진 얼굴로 그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짐승은 감각이 예민했다. 그는 한 번 보는 것으로 아이의 정체를 대강 파악해 냈다.

나이는 서넛쯤 되어 보이지만 그 나이대의 인간들보다 유달리 어린 행동을 하는 걸 보면 혼자 자란 개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동시에 그는 아이에게서 분내와 함께 미약한 동물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다면 짐승의 피가 섞였거나 강제로 수인화가 되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특성이 아니었다.

만약 저 아이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났더라면 더 파고들지도 않았을, 그저 생존력 없는 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넘겼겠지.

다만 시선을 사로잡는 한 가지 특징이 존재했다.

“그자와 닮았군.”

수도에서 내내 초상화로 보아 왔던 그자.

‘카시언 그레이’와 기이할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금발이라 그런지 아스텔과도 꼭 닮아 보였다. 닮았다는 말이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인지 눈치챈 시녀장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가, 각하.”

상황 파악을 잘 못하는 아기만이 혼자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잉사, 안 해 조…….”

칭얼거리는 아이를 흘겨본 그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채 찬찬히 시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할 말이, 이거였나?”

이 자리에 없는 리트로 경에게 한 말이었지만, 시녀장이 벌벌 떨며 부복했다.

“그것이…….”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나이스 공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추측이어도 좋으니 전부 말씀하십시오.”

살벌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방 안에서 나온 제니가 샐리와 함께 멍에를 짊어지겠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로브를 쓴 사내가 찾아와 아스텔 님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분명 아이가 없었습니다만…….”

시녀장이 조용히 말을 이어받았다.

“…….”

“그자가 떠나며 아스텔 님께 이 이 아이를 넘긴 것 같고…… 들어 보니 아스텔 님께 엄마라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힛, 히힛.”

제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아기가 공작의 주변을 맴돌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고로…… 저 아이는, 아스텔 님의 아들일 확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탄식 어린 목소리로 죽음까지 각오한 진언을 건네 왔다.

그들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그 진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근거도 없고, 재미도 없는 얘기를 들은 것 같군요.”

물론 그 말과 다르게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성에 있는 수족들은 그의 하잘것없는 분노에도 스러질 수 있는 미물로, 감히 그에게 거짓을 고하는 기만은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그는 다시 한번 아이를 내려다보며 생김새를 낱낱이 확인했다.

그 뜯어보는 시선에도 아이는 무섭지 않은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잉사! 안넝!”

동그란 구체 같은 얼굴에 동그란 눈.

어찌 보면 귀엽다, 라고 볼 수 있는 인상이기는 했다.

“이게…… 아스텔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라.”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히힛 웃었다.

“아스테? 어먀?”

그 순간 그의 눈빛에 살기가 실렸다.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카시언 그레이와 닮은 얼굴이었다.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

아스텔은 그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좋은 후견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대할 때보다 카시언 그레이를 볼 때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긴 했다.

그래도 오래 공들이고 있는 만큼, 그녀의 마음이 제게 열리고 있다 생각했건만…….

‘멍청하고 섣불리 구는 건 안 돼.’

완벽하고 섬세하게 구축해 낸 관계를 멍청한 질투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살벌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스텔 님과 리트로 경은, 어디로 갔습니까.”

“데, 델마 마을에 간 것으로 압니다, 각하.”

아나이스 공작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싸늘한 눈빛을 띤 채 저택을 빠져나갔다.

복도에 남은 이들만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칫 잘못됐으면 조상신 앞에 다이렉트로 방문할 뻔했다.

“아이고오, 아기님. 왜 나오셨어요.”

제니가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아기를 보듬었다.

그러나 아기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꼬옥 움켜쥔 채로 제니의 어깨를 토닥토닥 도닥였다.

“차자써.”

“네? 뭘 찾으셨어요?”

“옷. 주잉!”

“옷 주인이요?”

아기가 입고 있는 옷은 아스텔이 시녀들에게 부탁해서 가져온 유아동복이었다.

턱받이 아래에 숨겨진 주머니에는 아스텔 몰래 넣어 놓은 낱말 카드 한 장이 담겨 있었다.

‘너한테도 아주 멋진 아빠가 있거든.’

‘웅?’

‘네 아빠가 입는 옷이야, 멋지지?’

아기는 아스텔이 하는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정도는 알았다.

‘나도 아빠 있어! 아빠는 멋있는 옷 주인이야!’

보육원 선생님들은 자신에게 엄마와 아빠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있었다!

그것도 엄청 엄청 힘이 쎄서, 무서운 원장 선생님한테서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아빠가!

아기는 과거 자신을 괴롭히던 보육원 원장 선생님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이내 앞니를 톡 내밀고 웃으면서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눈을 가로로 데굴데굴 굴리며 공작이 빠져나간 길목을 바라본 건 덤이었다.

한편 다리에서 힘이 풀린 나머지 주저앉아 있던 시녀들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 주먹을 꼭 쥔 채 미소 짓는 아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그래도 공작님이 흩뿌리는 살기로부터 살아남았어.

이 자리에 모인 생명 지킴 위원회 위원들은 짧게 안도하며 상황도 모른 채 해사하게 아이를 보고 침음을 삼켰다.

* * *

그때, 나는 리트로와 함께 델마 마을을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고, 공작 각하께 드릴 선물을 사셔야 한다고요.”

“아, 네. 그러려구요.”

리트로 경은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나를 토닥여 주려 했다.

‘……어쨌든, 꽃다발이라도 선물해 드리려고 계획했으니까.’

공작님이 한결 더 의심스러워졌다고는 해도, 내 태도를 변화시켜서는 안 됐다.

나는 느긋하게 꽃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무엇을 살지 살펴보았다.

“모르피나 꽃이네요.”

“아, 네.”

세심하게 꽃을 고르던 나는 리트로 경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저기, 혹시 꽃에 대해 잘 아세요?”

“아, 아뇨. 대도 이보르 기억하시죠? 얼마 전에 팡파니아 저택에서, 저 꽃을 가공한 모르피나 액체를 이보르란 놈이 훔쳐 갔거든요. 그래서 연구를 좀 해 봤죠.”

아까 나왔던 대도 이보르 얘기다.

모르피나 꽃은 다른 이의 것을 훔칠 정도로 귀한 종은 아니었지만, 가공해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려웠다.

다루기 어려운 마약류이기도 했다.

도둑질에 마약에, 한 번 사는 인생 더럽게 끝장나게 사는 놈이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이보르’라는 화제를 적당히 흘려 넘겼다.

그 대신, 리트로 경을 올려다보며 밝게 웃었다.

“다른 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나요? 생긴 것만 보면 엄청 잘생기셔서 꽃다발 꽤 받으셨을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라는 말을 입 안으로 감춘 나는 나머지 꽃들을 확인해 보았다.

리트로 경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혼자 열심히 고민 중인 내 곁에 나이가 지긋한 꽃집의 주인장이 슬며시 다가왔다.

“신혼부부인가 봅니다.”

“아아, 신혼부부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유쾌하게 받아치려 했다.

그러나 너스레를 떨려던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리트로 경이 너무 빨랐던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닙니다!”

뭐야, 이거.

괴성이잖아.

나는 깜짝 놀라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고백도 안 하고 차인 기분인데……?

“어억……. 아,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나보다 더 놀란 주인이 매우 멋쩍어하며 유리병 안에 든 싱싱한 꽃가지를 가리켰다.

“소중한 분을 위한 특별한 꽃이 있기는 있죠. 마법을 걸어 시들지 않고 영원히 피어 있는 프리저브드 플라워입니다.”

깨끗한 갈색 나뭇가지 위에 새하얀 꽃이 붙어 있었다.

“단, 지금 남아 있는 건 저 종류뿐이에요. 인기가 좋거든요.”

“저 하얀 꽃 이름이 뭔가요?”

주인장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목련입니다. 꽃말은 ‘축하와 감사’예요. 소중한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기엔 딱이죠.”

새하얗고 아름다운 꽃이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백목련을 선물하는 것, 괜찮은데?’

보통은 전쟁의 승자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전통이 있으니 공작님은 장미를 많이 받았겠지. 그러면 내가 무슨 꽃을 줘 봤자 그리 대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테고.

하지만 새하얀 목련이 붉은 장미 사이에 있으면 단번에 눈에 띌 것이다.

……그렇다면 꽤 괜찮지 않을까?

“그럼 이걸로 주세요.”

꽃을 고르고 나니 포장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선물 고르는 일에 한 시간은 족히 잡았는데 금세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리트로 경을 바라보며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가문에 파티가 열리겠죠?”

“……그, 럴까요……? 하지만 전 그 파티에 참여 못 할 겁니다…….”

그는 곧 죽을 사람처럼 낙심해서 중얼거렸다.

‘왜 저러지? 낙심할 사람은 내 쪽인데.’

아직까지 아티팩트에 새겨져 있던 고대어 문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내 쪽 말이다.

리트로에게 다시 말을 걸려던 그때 꽃집 주인이 내 주의를 훌륭하게 잡아챘다.

“선물 포장까지 끝났습니다.”

나는 결국 말없이 리트로 경의 상태에 고개만 갸웃하고 포장된 꽃을 받아 들었다.

어쨌거나 공작님 선물까지 다 샀다.

* * *

꽃집 주인은 신혼부부로 추정했던 아름답고 가냘픈 여자와 기사를 배웅하곤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꽃이 그에 어울리는 손님들한테 갈 때마다 참 뿌듯하단 말이지.’

그가 열심히 만든 프리저브드 플라워 유리병을 매만졌다.

제가 만든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니 직업 정신이 울끈불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간만에 새로운 꽃을 만들어 볼까.”

새로운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만들어 보기 위해 그는 다시 책상 위에 앉았다.

이내 분진과 먼지가 묻은 테이블을 깔끔히 청소한 그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불현듯 잘못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백목련의 꽃말이 감사, 였던 것 확실하지. 다른 뜻이 따로 있지는 않았겠지?”

갑작스럽게 백목련의 두 번째 꽃말이 궁금해진 그였다.

꽃집 주인은 몸을 일으켜 뽀얗게 먼지가 쌓인 서가에서 꽃말 사전 꺼내 뒤적거렸다.

“백목련의 꽃말…….”

책을 느릿하게 넘기며 읽어 내리던 그가 곧 탄식했다.

“두 번째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당신은 내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노인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 외알 안경을 올려 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보통 꽃말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정하고 조사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첫 번째 꽃말인 ‘감사’만 알아도 다행일 것이다.

괜찮겠지, 그리 넘기며 그는 새로운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만드는 데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만약 꽃말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면 그 아가씨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그저 그렇게 짐작했다.

* * *

예쁜 꽃 선물만 사고 들어가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꽃다발을 품에 한 아름 안은 채로 마차까지 걸으려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아스텔.”

그 누군가는 바로, 기사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공작님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돌아오셨네요?”

동시에 반가움이 치솟았지만 아티팩트와 관련된 문제를 떠올린 나는 애써 표정을 바로 잡았다.

일단은 공작님을 의심하되 티를 내서는 안 됐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의 공작님은 이전과 달리 마치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야차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꾸 좋지 않은 상상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나는 품 안에 숨긴 아티팩트를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숨을 참았던 순간,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섬뜩할 정도로 무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발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런데 방금 막 깨달았습니다.”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또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지 영문 모를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인내심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그의 손이 내 턱 끝에 부드럽게 닿아 왔다.

우리 둘의 코끝과 코끝이 맞닿았다.

“아스텔.”

턱을 쥔 손의 악력이 느슨해졌다.

순간 얼떨떨해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빳빳이 굳혔다.

갑자기 웬 인내심……?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공작님과의 기이한 대치 상황에서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눈빛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기…….”

나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아래로 내려놓았다.

공작님의 손은 의외로 순순히 떨구어졌다. 곧 나는 얼굴도 뒤로 빼며 공작님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공작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작님 특유의 나직한 저음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조금 전의 묘한 분위기를 거둬들인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공작님이 자연스럽게 내 손에 손을 대고 에스코트를 하려 했다.

정말로 자연스러운, 평소대로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일인의 아래에 있되, 모두의 위에 있다. 이것은…… 공작가의 이야기가 아니오?’

또다시 아티팩트 감정사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이 아티팩트를 지닌 자는 공작가와 관계가 있지 않겠소? 허니, 함부로 공작성에 들어가 논할 문제가 아니었지.’

공작님이 최종 흑막일 수도 있다는 그 이야기.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그를 그리 경계하고 있지 않았었다.

어쩌면 각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계심이 말랑말랑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흑막에 대해 알고 있는 다소 두루뭉술한 힌트를 떠올렸다.

‘흑막은 아주 강하고, 흑마법을 잘 다룰 줄 안다고 했어. 공작님은 마검사이기는 하지만……. 아마 흑마법도 사용할 줄 아는 눈치였지.’

의심이 자리 잡히자, 퍼즐이 맞춰지듯 모든 것이 하나로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문을 진창에 뒹굴게 만든 그런 사람이, 바로 공작님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타악.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내민 손을 쳐냈다.

“아스텔.”

그러자 공작님이 드물게 충격과 상처로 얼룩진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니, 충격받은 표정이라고 내가 착각을 한 걸까.

눈을 감았다 뜨니 평소 때의 무감각한 표정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는 했다.

“시…… 실수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어색하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러나 공작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내 손을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

다시 자세히 보니 무감각한 게 아니라, 그저 해일처럼 밀려드는 충격에 살짝 얼이 나간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나는 어색하게 말꼬리를 높여 말했다.

“지, 진짜 실수인데요?”

……아무래도 역효과인 것 같다.

공작님의 표정이 한결 더 무시무시하게 굳어지고 말았으니까.

그는 가만히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조차 어딘가 이상했다.

만사에 무심한 공작님이 그럴 리가 없지만, 어쩐지 시무룩하게 들린달까.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 * *

이상한 것은 공작님뿐만이 아니었다.

돌아온 공작성의 분위기가 정말로 평소와 달라졌다.

우선, 조명부터.

공작성 내부는 곡소리라도 날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실제로 시녀들은 본래 입던 깅엄 체크 무늬의 메이드 드레스가 아닌 까만 상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함께 돌아온 리트로 경은 마치 고구마를 잔뜩 먹은 사람처럼 가슴을 연신 두드렸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참 이상하다. 고작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오늘 공작성 분위기가 너무 음산해서 꼭 유령 나올 것 같아요!”

“…….”

공작님도 의아한 듯 눈썹을 치떴다. 아니, 의아한 표정이 아니라 조금 당황한 표정인 걸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공작성의 모든 가신들이 몸을 움찔, 움찔 떨었다.

“혹시…….”

나는 익살스럽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성 프리코의 데이 같은 거?”

성 프리코의 데이는 유령을 맞이하는 기념일로, 트릭 올 트릿 같은 이벤트를 자주 했다. 발랄하게 재잘대는 나를 보던 공작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지, 진짜로요?”

그냥 분위기 환기시키려고 아무 말이나 한 건데.

“아스텔이 잠깐 자리를 비웠던 사이, 방금 막 공작성 내에 ‘성 프리코의 데이’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데, 이제 아셨군요.”

……진짜였다고?

나뿐만 아니라 시녀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시녀장 루델이 평소와 달리 부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와 말을 보탰다.

“마, 맞습니다.”

나는 잠깐 나타난 그녀의 나무늘보 형상의 손을 보고 움찔했다.

루델의 상태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갸우뚱하자 공작님이 가신들을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고는 내게 말했다.

“네, 그 외에도 아스텔을 위해 준비한 게 많습니다.”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먀!”

그나마 다행히, 내가 떠나기 한 시간 전과 똑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 어둑어둑한 공작성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존재.

샐리와 제니 사이에 있던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 뽈뽈거리면서 걸어왔다.

“아스테!”

저 녀석이, 사람들 앞에서 계속 고모 이름을 막 부르고!

‘나중에 꼭 고모라는 호칭을 알려 줘야지.’

나는 분주하게 나를 향해 쫄래쫄래 뛰어오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아가!”

그러나 이상했다.

나와 아기가 손을 맞잡은 순간 성내 분위기가 한결 더 빙하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

특히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매사 굳건하던 시녀장님의 다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석…… 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작 각하, 아스텔 님.”

공작님은 미소를 거둔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했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네.”

“그…….”

시녀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녁에, 아기님의 식사도 준비할까요?”

저걸 왜 그렇게 결연한 얼굴로 묻는 걸까.

다소 의아해진 나는 그제야 아직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공작님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공작님, 이 아이 아세요? 제 친구의 아이예요. 지난번에, 친구 데려와도 된다고 하셔서요!”

“아, 네. 친구의 아이…….”

“네.”

나는 공작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가만히 아이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님이, 아이와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 없는데, 무언가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눈을 느릿하게 내리감는 게, 마치 결의에 찬 듯 경건해 보이기도 했다. 요컨대 그의 얼굴에 그간 한번도 본 적 없던 해독 불가한 감정들이 스쳤다는 소리다.

“저, 공작님?”

나는 조심스럽게 호명했다. 그러자 찬찬히 눈을 뜬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저녁 식사를 할까요, 우리 셋이.”

역시나 공작님은 무언가 결연해 보이는 낯이었다.

식사를 하자는 목소리만큼은 평소처럼 다정했지만.

‘공작님이 최종 흑막이라면 아이를 데리고 빠르게 떠나야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이건 다음 이능력자를 잡으면 확실해질 것이다. 그전까지는 눈에 띄게 변한 티를 내면 안 됐다.

“네, 우리 셋이 식사해요!”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공작성의 홀 안.

석찬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아나이스 공작이 테이블 왼편에, 아스텔과 아기가 테이블 오른편에 앉았다. 에피타이저가 나오기 전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식은 언제나처럼 달콤하고 맛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칭얼거리는 자그마한 아기였다.

탁.

동시에 포크가 은식기에 탁, 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귀족 예법이 어색한 아스텔이 아이 쪽에 정신이 가 있다가 식기를 잘못 사용한 것이었다.

“모야!”

아기는 쫑알쫑알 말을 이어 나갔다.

“요건 모야?”

테이블 위에 펼쳐진 은식기와 그 위의 음식들을 가리키며 아기가 방싯방싯 웃었다.

“그건 그냥 그릇인데……!”

“그럼 저건 모야?”

아이의 질문이 계속됐다.

그때마다 대답해 주다 보니 식사가 길어졌으나 다행히 곧 아이는 자문자답의 영역으로 충실하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이내 아이가 어딘가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서께 생긴 아자씨지!”

음식을 삼키다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아스텔이 입을 헤 벌렸다.

“머딧는 옷 입어써!”

아이가 이윽고 고개를 치켜들고 공작님을 향해 삿대질을 시작했다.

“삐쭉삐쭉한 멍멍이가!”

“……누, 누가 멍멍이…….”

아스텔은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바나나 같은 아이의 손가락 끝은 명확히 공작님을 향하고 있었다.

“멍멍이!”

설마, 공작님이 개 같다는 건가?

……아스텔은 히익, 소리를 내며 아이의 입을 탁 막았다.

안 그래도 공작님이 최종 흑막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높아진 차였다.

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자극해 두면 큰일이 날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 아스텔은 아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무, 무섭게 생긴 아저씨라니. 그렇지 않아! 저, 저렇게 보여도 속은 착하…… 셔. 그리고, 멍멍이라니!”

공작의 속을 모르는 그녀로서도 확신이 없어 가만히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이 어색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치!”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뒤 영민한 시선으로 아나이스 공작을 응시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식사하던 공작이 뾰로통해진 아이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아스텔의 말이 옳습니다.”

“모가? 모가?”

“……예?”

아나이스 공작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힘이 실린 타격에 테이블 위 핏빛 와인이 흔들거렸다.

“저는 착하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인물입니다.”

“어어…….”

흑막일지도 모르는 인물이, 매우 저기압인 것 같은 상태로 그렇게 말하니 신빙성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아스텔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포크를 잡았다. 할 말이 없을 때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녀가 식기로 손을 뻗은 순간, 아스텔만 모르는 두 남자의 치열한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 그레이의 이목구비를 얼추 닮은, 금발에 녹색 눈을 한 아이를 빤히 응시해 보았다.

“저 아이는, 몇 살입니까?”

“아…….”

아스텔은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올해 막 두 살인가, 세 살인가 그렇대요.”

“뿌뿌!”

자기 의자에서 넘어와 아스텔의 무릎 위에 오른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미묘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가, 얌전히 있어야지.”

“피이.”

아기는 꼬물거리며 아스텔의 품 안으로 조심조심 파고들었다. 아스텔은 은식기를 치우면서 작게 웃었다.

“귀여워라.”

그리고 그때 순간적인 환청이었을까. 아스텔의 귓가에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금 놀란 그녀는 시선을 바로 들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

조심스럽게 묻자,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표정을 한 공작이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아이를 훑더니 온몸의 솜털이 삐쭉 설 정도로 낮은 저음으로 읊조렸다.

“귀엽습니다.”

아스텔은 그때 진기명기 같은 현상을 보았다. 공작이 손에 쥐고 있는 은색 나이프가 서서히 휘는 것이었다. 놀란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따지고 들 뻔했다.

그건, 귀여워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다행히도 공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는 아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가 휜 나이프를 내려놓자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줌의 진심도 없어 보이는, 지극히 무시무시한 낯이었다.

‘그, 그래도 노력을 해 준다는 뜻이겠…… 지?’

아스텔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친구의 아이가 공작성에 몸을 의탁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나이스 공작이 고개를 까딱했다.

“감사의 의미로…… 아나이스 공작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숨겨 두었는데, 이쯤 되면 줄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공작은 턱을 비스듬히 괸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어떤 선물일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텔은 테이블 아래에 숨겨 두었던, 잘 말린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꺼내 공작에게 건넸다. 막상 꽃다발을 건네려니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자꾸만 퐁퐁 솟아났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냥 뇌물 정도인 거야. 절대 마음을 담은 게 아니니까……. 떨거나 걱정할 필요 없어.’

“이 꽃다발, 받아 주세요.”

아나이스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골똘히 꽃다발을 관찰할 뿐이었다.

“이게…… 제 겁니까?”

“당연하죠! 조금 누추하지만…… 귀환 축하드려요.”

그라면 수도에서부터 온갖 선물을 진상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선물을 주면서도 다소 누추하지 않나, 별론가, 같은 온갖 걱정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공작의 반응은 아스텔의 짐작과는 조금 달랐다. 꽃다발을 건네받는 손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네?”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 기쁩니다.”

아스텔은 눈을 깜빡였다. 공작의 눈자위가 조금 붉어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발그스름해진 듯했던 눈시울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아스텔은 꽃집 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꽃말이 무척 좋다고 했었는데, 뭐였더라?

축하와 감사였나.

“꽃송이는 백목련이에요! 꽃말도, 제가 공작님께 드리고 싶은 말을 담았어요.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아나이스 공작이 각인자인 자신에게 해 준 배려는 감사를 거듭해도 모자랄 만큼 차고 넘쳤다. 다만 막상 말하려니 조금 부끄러워 직접 찾아보라고 넘겼다.

“꽃말, 알아보겠습니다.”

백목련 꽃다발을 받아 든 그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예전, 제 친구가 말했습니다.”

“예?”

친구라니. 아마 과거에 말했던 그 친구 이야기인 모양이다. 나는 그날의 식사로 나온 스테이크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을 떠올리며 살짝 소스라쳤다.

그때와 달리 지금 공작님은 꽃다발 향기를 맡고 계시지만…….

“모름지기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같이 오는 것이라고. 그래서 삶은 달콤 쌉싸름한 거라고.”

“아…….”

그 말을 듣자 괜히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스텔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오늘을 보니 딱 그런 느낌이군요.”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혼자 놀고 있는 아이 쪽을 향했다가 사라졌다.

두세 살치고도 작아서 공작님의 체구에 비하면 완두콩만 해 보이는 아이는, 식기를 톡톡 두드리며 놀고 있었다.

아스텔은 손수건을 들어 소스로 범벅된 아이의 입가를 꾹꾹 문질러 주면서 생각했다.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함께 온다, 라…….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공작님같이 강한 분께도 불행이 있을까요?”

솔직한 질문에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저를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습니다. 물론 행복도 함께 오지만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센터피스 옆의 차임벨을 눌렀다.

“행복이 온다면야 같이 오는 변수들이야 감수해야겠지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왜 ‘그거’라는 지칭을 사용하면서 아이 쪽을 노려본 것일까.

그러나 의아해할 틈도 없었다.

조금 전 벨을 눌러 부른 것들인지.

문을 열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끌고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살펴보니 모두 형형색색의 초콜릿들이었다.

“저, 저게 다 뭐예요?”

기겁한 아스텔을 바라보며, 아나이스 공작이 오늘 처음으로 찬란하게 웃었다.

“대체…….”

“수도의 초콜릿 가게를 전부 인수해 왔고, 쇼콜라티에들도 데려왔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수도의 초콜릿 가게를 전부 사셨다고요?”

“네.”

그럼 수도는 지금 어떻게 된 거지?

초콜릿을 파는 디저트 가게가 전부 사라진 건가?

깊은 혼란에 빠진 아스텔을 보며 아나이스 공작이 낮게 물었다.

“잘했다고 해 주세요.”

“분명 감사하지만, 저, 저는 그렇게까지 많은 초콜릿 가게가 필요한 거, 것도 아니고요. 그만큼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

“왜 없습니까?”

그가 나른한 눈빛을 보내며 답했다.

“칭찬해 주세요.”

요망한 눈웃음은 덤이었다.

아스텔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자, 잘 하셨, 아니, 감사합니다……?”

그는 고분고분하게, 잘 길든 맹수처럼 온순하게 답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곧 테이블 위에 놓이는 온갖 초콜릿들과 가게 인수 문서 등을 바라보며 아스텔은 뇌가 새하얗게 표백되는 감각을 느꼈다.

“제가 방금 막 만든, ‘성 프리코의 데이’에는 원래 각인자가 놀랄 만큼의 선물을 하는 규칙이 있거든요.”

능청스러운 변명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공작님의 태도가 친절하다 못해 조금 과하지 않나 걱정이 됐다.

덩달아 놀란 아이가 옆에서 조그마한 입을 떡 벌리고 수수깡 꽁다리 같은 짧은 혀를 쏙, 내밀며 소리쳤다.

“옴총 마나!”

“그래, 많지.”

아이의 감탄사에 아나이스 공작이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내며 낮게 웃었다.

반면 혼미해진 아스텔의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너무 많은 사건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직 하나도 맛보지 않았건만 단맛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 * *

초콜릿뿐만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온갖 선물 공세 끝에, 마침내 델피니움 룸으로 돌아와 아이와 단둘이 남게 됐다.

아니, 단둘은 아니다.

아까 받은 것 외에도 엄청난 양의 선물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나는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앉아 브로치 아티팩트를 꺼내 올려놓고 작은 양피지와 깃펜을 쥐었다.

제일 먼저, 아티팩트 문제부터.

만약 공작님이 최종 흑막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최종 흑막이라면 언젠가 부딪칠 것이다.

최종 흑막은 뷔에트리 백작가의 혈족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눈치채는 즉시 무조건 죽이려 들 테니까.

그러니 그가 흑막이라면 나는 그를 죽여야만 한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늘 내게 선물 공세를 펼친 공작님은 그저 타인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을 뿐, 다른 가문에 누명을 씌워 전멸시키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구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켰다.

그렇다면 다른 쪽 가능성을 확인해 보아야 하는 걸까.

제국의 공작가는 두 곳뿐이었다.

하나는 내가 있는 아나이스 공작가, 다른 하나는 수도의 콘윌 공작가다.

‘우선 다음 첩자를 잡은 다음, 콘윌 공작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콘윌 공작가에 대해 알아보려면, 수도로 가야 해.’

나는 깃펜으로 톡톡,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아무리 봐도 배후자가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내가 아티팩트 내에 있는 연결 고리는 모두 파괴했네. 이능력만 남은 상태야.’

월렛이 준 힌트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아티팩트를 다시 주머니에 쏙 집어넣은 뒤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를 깔끔하게 청소했다.

그 순간, 자그마한 서가에 눈길이 갔다.

서가에는 《복수론》 같은 복수 원론서를 포함해 오빠가 선물해 준 《아스텔의 행복 다이어리》가 놓여 있었다.

내 시선은 《아스텔의 행복 다이어리》에 멈춰 섰다.

유능한 아티팩트 감정사, 월렛은 이 다이어리에 제법 관심이 깊어 보였다.

‘이게 뭐라고.’

나는 다이어리의 앞장부터 천천히 펼쳐 보았다.

열 살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다이어리 앞표지는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안쪽에는 오빠가 처음 다이어리를 사 줬을 시기의 내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일상적인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초반에만 뺵빽했지 몇 장을 넘기면 백지만 이어질 뿐이었다.

“별거 없는…….”

그 순간 쩡, 하고 머리가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면서 아파 왔다. 나는 가쁘게 호흡하면서 다이어리를 닫고 서가에 다시 넣어 두었다.

“아…….”

긴 한숨이 입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입김이 어쩐지 뜨끈뜨끈했다. 계속되는 지끈거림에 미간을 누르고 있자, 침대에 있던 아기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아이는 볼을 통통 부풀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갱차나?”

“응, 그럼.”

통각이 느껴지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누르니 왠지 나아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일단, 얘 약부터 먹이자.’

항상 같은 시간에 약을 만들어 먹여야 했다. 나는 침대 위를 자유롭게 뒹굴뒹굴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우리 아기, 약 먹을까?”

“웅! 나아, 오늘 싱기한 아조씨 바써.”

물약을 먹이면 먹일수록 고통이 사라지는 동시에 지능도 점점 더 높아지는 게 확실해 보였다. 아기는 처음과 달리 말도 곧잘 하고 있으니까.

“이짜나. 공잔님, 싱기해!”

나는 아기의 부풀어 오른 두 뺨을 매만져 주며 웃었다.

“응, 공작님이 신기해?”

“웅! 아스테 옴총 조아하는 거 가태.”

“……아니야, 바보야.”

“아기, 바보 아니야!”

아기는 빵빵한 볼을 더 크게 부풀렸다.

“삐쳤어?”

“화난 고야!”

발로 침대를 마구 콩콩거리며 구르던 아기는 침구를 들치더니 쏙 들어갔다.

자기 몸을 묵직하게 누르는 커다란 이불 속으로 들어간 아이는 눈만 슬금슬금 내놓고 조잘거렸다.

“훔……. 뽀뽀해 주면.”

뽀뽀해 주면 화가 풀린다는 뜻일까.

확실히 어느덧 또래 아이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제법 말을 잘 구사하는 것을 보니 마음 한편이 뿌듯해졌다.

나는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싼 아이를 보면서 즐겁게 웃었다.

“아가, 이리 와.”

“……웅?”

“뽀뽀하게.”

“힝, 안니. 잘몬한 사라미 와.”

테이블에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가로 향했다.

그리고, 몸을 숙여 아기의 양 뺨에 쪽, 입맞춤을 했다.

“군데…….”

그런데 아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스테, 열나!”

괜찮아졌나 싶었더니, 다시 열이 나나 보다.

각인열인가?

그러나 각인열 특유의 증상은 아니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편두통만 약하게 일어났을 뿐이었다.

기이하다.

“감기인가? 약 먹어야겠네.”

“웅!”

나는 테이블 쪽으로 다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테이블 서랍에 넣어 두었던 상비약을 찾던 나는 탁상 중앙을 보고 굳어졌다.

‘왜 다이어리가 펼쳐져 있지?’

분명히 갈무리해서 책장에 넣어 놨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다이어리 앞장에 아까까지 없던 자그마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우와, 사람을 구했어, 내가! 엄청 신기해.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삐뚤빼뚤한, 열 살배기가 썼을 것 같은 글씨는 확실히 내 어린 시절의 서체였다.

찜찜해진 나는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자 다시 글씨는 사라지고, 백지만 남아 있었다.

‘열이 올라서 착각한 건가?’

지나치게 선명했는데.

다이어리를 들고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지만, 아까 봤던 상태 그대로였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에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며 혼미한 정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갈무리해 서가에 올려놓은 뒤, 약을 먹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아스테!”

아이가 팡팡, 침대 위를 두들겼다.

“으응…….”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로 어깨를 들썩였다.

호흡이 가쁘지는 않은데, 열이 빠르게 들뜨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는 빠르게 암전되었고, 그나마 붙들고 있던 정신마저도 빠르게 붕괴되었다.

* * *

아이는 아직 어렸다.

자그마한 체구만 보면 세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나이였다.

글자를 쓸 줄도 모르고, 말문도 아직 제대로 틔우지 못했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특유의 병증인 마력 충돌 증후군 탓에 일반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또래보다 뒤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아이에겐 또래보다 조금 더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아스텔이 특수 제작해 주는 물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이제는 보통의 아이들만큼 자랐고, 튼튼해졌다.

그러나 아팠던 때가 있어서일까, 아이는 타인의 아픔을 비교적 빠르게 알아차리는 편이었다.

“이짜나. 갠차나?”

아스텔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한 아기는 아스텔의 곁에 누워서 조곤조곤,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스텔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병 걸린 애를 대체 누가 데려갈까요?’

‘어미도 버렸다는데 말이죠.’

‘어차피 곧 죽을 텐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잘해 줘.’

보육원 사람들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무슨 말을 나누었던가.

약효 덕분인지 흐릿했던 것들이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너희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다.’

‘부…… 모?’

‘엄마와 아빠. 너희를 낳아 주고 키워 줄, 든든한 울타리 같은 것 말이다.’

든든한 울타리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그 당시 아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강하고 따뜻한 어른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따뜻하고 뽀송뽀송한 아스텔처럼 사랑스러운 엄마와 조금 무섭지만 까만 멍멍이 같은 그 아저씨처럼 강한 아빠가 필요했다.

얼마 전 커다란 강아지 누나들이 그랬다.

공작님이 이 성의 지배자라고. 그리고 아스텔에게 관심이 있다고 수군거렸던 것도 들었다.

공작님이라던 아저씨를 떠올리자, 아스텔이 보여 준 낱말 카드 그림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아이는 아스텔이 주었던 ‘옷’ 낱말 카드를 항상 턱받침 아래의 주머니에 꼭 넣어 두고 다녔다.

아스텔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아빠라고 했는데…….

얼마 전 멍멍이 아저씨도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기는 고사리손을 들어서 입에 막은 채 속삭였다.

“어먀, 압빠. 생겨써.”

아기의 마음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짜잔, 하고 정해진 그 순간.

곁에 있는 아스텔은 몽롱한 꿈을 꾸며 잇새로 쌕쌕거리는 뜨거운 숨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한 번 더 갸웃한 아이는 제 손을 옮겨 아스텔의 뜨거운 이마에 꼭, 얹어 보았다.

자그마한 손가락이 이마의 뼈에 눌려 조금 찌부러졌다.

“뜨거.”

보육원에서 늘 외롭게 지내온 그에게 아스텔은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아스텔이 이상했다.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더니 머리에서 열이 막 났다.

“뜨거!”

아이는 아주 잘 알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열이 나는 건, 엄청 아프다는 표시라는 걸.

“아파……?”

자기도 그랬다.

아플 때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배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것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곧 배 속에서 퐁퐁, 하며 비눗방울이 터지면 큰 고통이 밀려왔다.

아기는 이마에서 손을 뗀 뒤 침대에서 오도도 뛰어 바닥으로 콩, 착지했다.

빨리 데려와야 했다. 아스텔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아이는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보육원에서 자라는 동안 갈고닦은 감각이었다.

“압빠 옷 입은 멍멍이, 차자야 해…….”

아기는 문 앞까지 숨이 차오르게 달렸다. 그리고 얄팍한 어깨로 문을 열심히, 꾸우욱, 하고 밀었다.

문이 열리면서 끼이익, 소리가 났다.

“아기님!”

아이는 문 바깥에 있던 시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멍멍이 바야 해요.”

“……예?”

멍멍이라는 말에 제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무서운 멍멍이 아저씨보고 뭐라고 불렀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가 손뼉을 짝, 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공잔님!”

“예?”

“공잔님 바야 해요!”

아기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아스텔이 아프다.

그러니까 제일 강한 사람을 찾아가서 고쳐 달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게 됐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듣기에, 샐리는 완고했고 눈치가 없었다.

“안 돼요, 아기님.”

“……히잉.”

“우리의 목숨은 소중하답니다. 어서 들어가서 주무셔요.”

아이는 다시 안으로 떠밀리듯이 들어갔다.

“코 재워 드릴까요?”

도리도리 젓는 모습을 본 제니가 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아, 피곤하시구나. 어서 문 닫아 드리자.”

아이의 눈앞에서 문이 허망하게 콩, 하고 닫혔다.

“어떠케, 어떠케…….”

발을 동동 구르던 중, 운명처럼 아이의 눈에 열려 있는 창문이 들어왔다.

마침 바깥에 새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새야.”

아이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했다. 실상 아스텔을 만나, 그녀가 준 물약을 먹기 전까지 모든 일은 흐리멍덩했다. 하지만 늘어지는 로브를 입은 커다란 어른이 제 손목을 톡톡, 두드렸던 것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러자 자신의 몸이 지금보다 더 자그맣고 말랑말랑한 빨간색 새가 되었던 것도.

자신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곧바로 아이가 손목을 톡, 눌렀다.

“나라 가!”

곧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손에 날개가 토도독, 하고 돋아났다. 팡! 하는 자그마한 소음을 끝으로, 아이는 조그마한 앵무새가 되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히이…….”

나풀나풀, 처음 날아 보는 것이었지만 괜찮았다. 창가로 토도독 뛰어오른 앵무새가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뚝, 하고 바닥으로 하염없이 추락했다.

* * *

아나이스 공작은 침실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자기 전, 그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을 기꺼워했으니까.

그런데 창 바깥에서 기이한 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스텔이 데려온 아이에게서 묻어나던 그 냄새였다. 맹수는 후각이 발달해 있다. 이질적인 냄새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창가로 향했다.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는 날지 못해 바닥으로 빠르게 추락하는 새를 볼 수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고 깃털에 윤기가 흐르는 새.

수영하듯 어푸어푸 날개를 파닥거리지만,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떠밀리듯 아래로 하강하는, 새.

휘이이잉!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던 새는 툭 하고 아름드리나무의 가지에 부리를 박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낙엽같이 붉은 깃털이 풍성한 날개로 나뭇가지를 힘겹게 감쌌으나, 조금만 힘을 더 주면 나뭇가지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공작은 그 앵무새를 감정 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리고 약한 것은 싫다. 하지만 그 아이가 죽으면 아스텔이 슬퍼하겠지.

아나이스 공작은 저도 모르게 창틀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나무에 있던 새가 나풀나풀 날아서 그의 창가로 끌려왔다. 뾰족뾰족한 발을 창틀에 대고 위풍당당하게 선 새가 보드라운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창틀 위에 놓여 있는 공작의 손을 쓰윽, 문질렀다.

“뭐지.”

“날아써!”

새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새가 하는 모양을 보던 그는 제 손등 위로 총총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너.”

가는 다리로 그의 손 위에서 뒤뚱거리는 것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창틀에서 손을 뗀 그는 소파에 가 앉았다.

그리고 여태껏 손등에 붙은 채 당당하게 날개를 펼치고 선 새를 톡, 두드렸다.

팡팡, 하는 소리와 함께 원래 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해하기 짝이 없이 자그마한 손을 내밀면서.

아이의 눈에는 대롱대롱 눈물이 고여 있었다.

“멍멍이! 공잔님! 차자써!”

요란을 떠는 모습에도 공작은 무표정한 낯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안 그래도 아까 식사 시간, 아스텔이 이 아이를 애지중지하며 돌보는 것이 계속 떠올라 잠이 오지 않던 참이었다.

“새 수인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아기는 눈매를 쭉, 끌어 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멈미가 나 미오해……?”

아이의 완두콩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는 손을 들어 아이를 책상 위로 옮겨 주었다.

“그 눈동자로 울지 마라.”

“나 아, 안 우러!”

아주 자그마한 손으로 눈가를 쓱쓱 닦은 아이가 입술을 삐쭉였다.

그러나 공작은 이 아이와 별다른 설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용건, 아니, 일로 찾아왔지.”

차가운 응답에 아기가 덥석 그의 책상에 달라붙었다.

코끝에 달콤한 분내가 났다.

“아스테, 어먀, 아파. 구해 조야 해!”

“……뭐?”

“아스테 아파!”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책상 옆에 붙어 열심히 버둥거리던 아이가 폴짝 튕겨 내려와서 재빨리 그의 다리 옆에 따라붙었다.

“가치 가!”

그는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문 정도는 열어 주었다.

“빨리 나와.”

아이의 낯에서 카시언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지만…….

눈동자가 지나치게 아스텔을 닮아 있었기에.

아이와 함께 복도로 나선 그는 놀란 시녀들을 지나쳐 아스텔의 방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침대 위에는 아스텔이 누워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나 있었고, 붉은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

“아스텔.”

뒤늦게 폴짝거리며 뛰어온 아이가 입을 떡 벌리고 말했다.

“눈 감아써!”

아이가 한 걸음 더 걸어오며 공포스럽게 중얼거렸다.

“주거!”

공작은 묘하게 발끈한 어조로 아이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안 죽어.”

“힝…….”

울상을 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가 공작의 말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주거!”

“…….”

각인의 문제인가 싶어 그는 말없이 아스텔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열에 들뜬 그녀의 얼굴을 보니 불현듯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눈, 떠.’

‘죽지 마…….’

과거의 잔상을 떠올리던 그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는 손을 잡은 그대로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나 미동조차 없었다.

그 대신, 그녀는 열 때문에 들뜬 표정을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빠.”

아빠, 라고 한 건가.

아스텔은 일찍이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

그는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소리에 집중했다.

“보고 싶어…….”

“…….”

“……시언.”

지금은 분명히 들었다.

아스텔이 누구를 호명하는지를.

“나는…….”

그는 아스텔의 찌푸린 미간 위로 손을 올렸다. 열에 들뜬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했지만,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카시언 그레이가 아닙니다.”

“…….”

그는 느릿한 손길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 냈다.

“그러니, 기억해 주십시오.”

다행히 미열이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다.

미열로도 죽는 사람이 있다던데.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린 그는 곧 자신이 델피니움 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몰려든 시녀장과 아스텔의 전속 시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령했다.

“성안의 모든 치료사가 필요합니다.”

“……모등 치료사가 피료함니다!”

아기가 흥얼대는 앵무새처럼 그의 목소리를 따라 불렀다. 그들의 말에 시녀장이 눈을 부릅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스텔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상태를 가늠할 순 없었다. 그러나 공작의 표정이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 어떤 극악한 것일지라도 지금 아나이스 공작 앞에 갖다 댄다면 물러갈 법한, 공포스러운 낯이었다.

게다가 모든 치료사가 필요하다는 걸 보면, 어쩌면 지금 아스텔 님의 상태가 보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시녀장이 허리를 숙인 뒤 말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각하.”

깊은 밤, 공작성 내 가신들이 모두 일사불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귓가에 누군가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슨 병이지?”

“감기 몸살입니다. 하, 하루 쉬면 나으실 것 같…….”

“헛소리인 것 같군.”

“그, 그렇지 않…….”

“열에 들뜨고, 기이한 놈의 이름을 부르는데.”

기이한 놈이라는 말에 묘한 악센트가 섞였다.

“그, 그것은 몸살 환자의 평범한 섬망 혀, 현상으로……. 약을 드렸으니 조금 쉬면 낫…….”

“하루만 쉬면 낫는다고.”

“예. 씻은 듯이 나을 겁니다! 모, 모, 목숨을 걸겠습니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소리가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시끄럽나 보군. 그럼 이만 약을 여기 두고 나가 보십시오.”

“몸살이기는 하나, 환자를 혼자 두는 것보다는 곁에서 지켜볼 시녀 정도는 필요할 듯합니다, 각하…….”

아나이스 공작이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그 침묵을 뚫고, 무의식에 잠겨 있던 무언가가 계속해서 떠오르려고 했다.

나는 눈을 찡그리듯 감았다.

깨끗한 풀의 냄새가 코끝에 닿아 왔다.

아마도 안정을 주는 허브인 모양이었다.

신선한 풀 내음을 맡자마자 또 무언가가 의식을 비집고 올라오려 했다.

이를 달래듯 누군가의 손이 내 이마를 매만졌다.

“으음…….”

나는 가만히 신음을 입 바깥으로 흘려보내며 고통을 견뎠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델랑 루치아 마을에 막 짐을 풀었을 주치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손을 대도 열이 있다면……. 증상이 비슷하긴 해도 각인열이 아닐 듯합니다, 각하.

영상구의 소리인가, 약간 지직거리는 느낌도 들리는 듯하고.

“그렇군.”

다시 묵직한 손이 이마 위로 올라와서 토닥거렸다.

“아프지 마십시오.”

‘아프지 마.’

나는 흐려진 눈앞을 비비기 위해 손을 들었다.

곁에 공작님이 있는 것 같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웬 환청이 들렸던 것도 같은데…….

‘괜찮아?’

그건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라고 의심한 것도 잠시였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두워진 시야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눈을 재차 꼭 감았다.

그리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분명 귀족들이 이용하는 전용 사냥터의 풀숲 근처였다.

‘여긴 내가 살던 곳이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꿈인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과거의 잔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가장 먼저 어린 시절의 나와, 잔디밭 위에 앉아 있는 아주 자그마한 소년이 보였다. 아무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란 듯 어린 시절의 나와 맞먹을 정도로 작은 남자아이는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많은 꼬마였던 어린 나는 쪼그마한 소년 근처로 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대귀족의 사유지야. 사냥터에 허가 안 받고 들어오면 큰일 나!’

아마도 내가 사냥터에 살던 열 살 무렵의 기억인 걸까?

나는 내가 실종되었을 열 살 당시를 기점으로 1년 정도의 기억이 완전히 없었다.

그때는 환생자임을 자각해서 놀란 데다, 실종 당했던 충격이 더해져 기억을 잃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아무리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한편에 묻어 두었었다.

나는 눈앞의 환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린 내가 다가가자, 소년은 작고 여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 아니에요.’

‘왜? 진짜로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얼른 나가자!’

안절부절못하던 어린 나.

상대의 얼굴은 흐릿해서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묘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 꼬마는 자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아하니, 새하얀 빛의 줄 같은 것이 꼬마의 몸을 칭칭 둘러싸고 있었다.

‘저기, 이 로프 같은 건 뭐야? 널 감싸고 있는데…….’

‘마, 마, 마법진이에요. 귀하신 분께 폐를 끼칠 수도 있으니 가, 가세요.’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미성숙하면서 풋내나는 얼굴이었는데, 묘하게 무언가를 닮은 것도 같았다.

어른인 내가 멀리서 둘을 관찰하던 그때.

어느덧 마법진이 진동하면서 소년을 촘촘히 둘러쌌다.

나는 놀랐고, 나보다 더 당황한 어린 나는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소년의 몸을 칭칭 둘러싼 것과 같은 빛깔의 거대한 마법진이 소년 주변으로 펼쳐져 있었다.

‘저, 저리 가, 가세요.’

저 말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여러 고충을 겪으며 겁이 많아진 지금보다도 더 의협심이 강했으니까.

‘어떻게 그냥 가?’

‘……네?’

‘너처럼 어린애가 여기 갇혀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구.’

‘자, 자기도 어리면서……요.’

어린 나는 덜덜 떠는 소년의 자그마한 몸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기야, 내가 도와줄게!’

어른 시점에서 볼 때는 둘 다 아기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는 제법 필사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맨손으로 마법진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기도 하고, 근처 땅을 파 보기도 하며 난동을 피웠으니까.

어떻게든 마법진을 해제해 보려고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어째서 이 기억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환영은 어린 시절의 내가 잃어버렸다던 기억의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열은 내렸지만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이 별처럼 총총 박혀 나를 괴롭혔다.

귀족 전용 사냥터의 거대한 마법진에 갇혀 있던 꼬마는 누구이며, 왜 그곳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그때의 나는 마법진을 결국 해제했을까, 실패했을까.

‘그 애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

게다가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가 찡하게 아파 왔다.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낮게 혼잣말했다.

“진짜로 이상한 꿈을 꿨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무슨 꿈입니까?”

귀의 솜털이 삐쭉 설 정도로 낮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너무 놀란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 오를 뻔했다.

“누, 누구…… 아, 공작님.”

그는 수척한 나와는 달리 단정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 침실엔 무슨 일로.”

설마 밤새 간호했다거나 곁에 계속 붙어 있던 건 아닐 것이다.

각인자니까 걱정돼서 잠시 와 본 거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손으로 닦으려 했다.

그러나 공작님이 먼저 행커치프로 내 이마를 꾹 눌러 주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였다.

“전염성은 없다고 하는군요.”

“아…….”

독감이나 열감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아프면 안 돼요, 아스텔.”

그때였다. 우리의 평온한 순간을 무언가가 깨고 들어왔다.

오빠의 아이가 뽈뽈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아푸명 앙대여, 아수테!”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한 아이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의 집중은 순식간에 아이 쪽으로 향했다.

“아기야, 뭐야아.”

“웅!”

아이는 별말 없이 배시시하고 웃더니 내 가슴을 베고 코, 잠들었다.

‘엄마가 그리운가…….’

나는 열에 달뜬 채로 멍하게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본 공작님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다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내 이마를 가만히 만져 주었다.

“열도 내렸고, 기침도 이제 안 하는군요. 밤새 기침을 조금 하던데.”

“아…… 시녀가 그러던가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시녀는 없었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뭔가…….

“그, 그럼 누가…….”

“제가 있었습니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각인자끼리는 당연한 건가, 싶게 여상한 표정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하지만 공작님이 직접 병자의 수발을 드는 게 결코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잔뜩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내게 그는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

“드십시오.”

나는 당혹스러워서 입을 벌린 채로, 쓴 약도 꿀꺽 삼키고 물도 한 모금 마셨다.

‘엄청나게 써!’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저, 환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그가 낮게 쿡쿡, 웃었다.

입 근처에 묻은 물을 손으로 거침없이 닦아 주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우리의 대화가 제법 이어지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괜히 꼬물거렸다.

“앗, 미안해. 가만히 있을게.”

내가 사과하자 공작님이 가슴팍 위의 아이를 들어 침대 위 내 옆으로 내려놓았다.

“일어나라.”

섬세한 손길도 아니었지만 아이가 다칠 정도도 아니었다.

아이는 자리가 바뀌어 잠깐 칭얼거리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잠들었다.

그가 침대 위에서 잠에 취해 꼬물꼬물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아스텔. 저것, 아니…….”

방금 저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환청이었나?

“저 아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는 원작을 통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공작님에게 원작 속에서 오빠가 지었던 아이의 이름을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친구의 아기인데 이름이 없다고 하면 이상할 텐데.’

게다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연히 이름이 필요한 법이니까.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기로.

“이 아이의 이름은…….”

나중을 위해 아껴 놓으려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것치고 아이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룬.”

괜히 다른 이름을 지어내지 않았다.

‘룬’은 원작 속 아이의 진짜 이름이었다.

최종 흑막에게 죽임당한 오빠는 죽어 가는 순간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나, 아스텔은 오빠의 별이고,

저 자그마한 아이는 오빠의 ‘빛’이라는 의미에서, ‘룬’ 이라고 불러 달라고…….

소설 속에서, 그 말은 오빠의 유언과 다름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룬이 아니면 안 돼.’

나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룬이에요.”

나는 다시 배시시 웃으며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냥 이름을 알려 주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지금 공작님의 표정은 과장을 좀 섞자면 죽어 가는 인간의 낯빛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했다.

* * *

“그 이름은.”

아나이스 공작은 무언가 말하려다 말허리를 거칠게 끊고 입을 닫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이를 가지면 이름은 룬으로 할래.’

‘……왜?’

‘왜냐면 내 이름의 뜻이 고대어로 별이라는 뜻이거든.’

‘그, 그러면…….’

볼썽사납고 미성숙한 소년이 자그마한 아스텔의 소맷귀를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나도 이, 이름 없는데…….’

‘진짜?’

‘웅…….’

‘그럼 내가 지어 줄게! 네 이름은, 음. 뭐로 할까!’

그 당시 아스텔은 그 이름의 의미와 걸맞게 움직임마다 반짝반짝거렸다. 검댕이 묻은 낯과 대비되는 생기로운 목소리로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이름은?’

아스텔이 활짝 웃으며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결정했어! 네 이름은…….’

“저어, 공작님?”

아스텔의 부름에 아나이스 공작은 가까스로 회상에서 깨어났다.

“룬, 이라고요.”

아나이스 공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네, 되게 멋지죠?”

“아주…… 소중한 이름이군요.”

아스텔이 지었을 이름이 분명했다. 공작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서 느릿느릿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데…… 제 이름이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아스텔?”

“공작님의 진명이요?”

“예.”

아스텔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호기심이 생긴 듯한 얼굴이었다.

실상 아스텔이 궁금증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보통 친밀한 관계에서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는 하니까.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은 아스텔이고, 이 아이의 이름은 룬인데……. 공작님의 성함만 모르기는 하네요.”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아스텔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사실 공작에게는 진명(眞名)을 드러내는 게 조금 특수한 문제였다.

제국의 황제조차도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하니까.

그는 모두에게 그저 ‘아나이스 공작’으로 불렸다. 그건 그저 계승되는 성과 작위명에 불과함에도.

아스텔 역시 그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실언했어요! 안 알려 주셔도 돼요.”

그는 아스텔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 낮게 속삭였다.

“제 이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확신 어린 말에 아스텔의 낯빛이 흐려졌다.

아마도 기억을 더듬어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생각해 내지 못하겠다는 양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아스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알려 주신 적 없는데…….”

그는 드물게 단호한 어조로 아스텔의 말을 잘라 냈다.

“알려 준 적, 있습니다.”

아스텔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그러니까 기억해 주세요.”

“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그는 낮게 웃으며 아스텔의 귓가에 짧게 입 맞췄다.

미열 때문인지 조금 발그스레해진 아스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검술 대회 준비를 위해 외부 인력으로 선발되어 공작성에 머물던 치료소장 메일스는 아스텔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병까지는 아니나 뜻밖의 열병으로 고전 중이라고 했다.

공작이 후견인인 만큼 성안의 모든 치료사를 불러들였다지.

고작 감기 열병일 뿐인데 그만한 인력이 투입되다니.

그 탓에 아나이스 공작의 무한한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까지 퍼져 나갔다.

그 이후로 인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수인 치료사들까지 아스텔에 대해서 감히 말을 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탓에 ‘아스텔의 자리를 꿰차고, 공작의 인정을 받는 최고의 치료사가 되겠다’라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공작성으로 들어선 그만이 꼴이 우습게 되었다.

메일스는 인상을 찡그린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시 공작성 바깥으로 나가, 자신이 지시했던 업무가 잘 이행되었는지를 확인해 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뜻밖에 귀한 실마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

공작성 외부 1치료소에서 제 밑으로 근무 중인 치료사 하나가 그에게 아스텔이 전에 살던 집에서 나왔다는 찢어진 편지 한 장을 건네준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계집애가 짐을 흘리고 간 게 있습니다요.”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들었다.

“남자관계가 제법 문란한 것 같던데요. 게다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이 공작령 내에서 전운이 감돈다는 둥 분위기까지 전달한 모양이더군요!”

잘게 찢어진 종잇조각을 합쳐 보니 정말 ‘좋아한다’라는 내용이 써져 있었다.

그런 내용이 한두 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편지 안에는 공작령의 분위기는 별로 안 좋고, 전운이 감돌고 있는 듯하다는 말도 함께였다.

팔짱을 낀 메일스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아스텔이 문란한 인간이라는 것과 공작령의 내부 기밀을 유출하려던 죄가 있다는 것. 그것을 엮어 은밀히 보내 드리면 되겠군.”

“그게, 기밀까진 아닌 것도 같…….”

인상을 찡그린 메일스가 치료사의 말을 잘라 냈다.

“공작성 수인들은 본래 인간을 경멸하지.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도 더하면 더하시지 못하진 않으실 것이다!”

“하긴, 말이야 맞는 말씀이죠. 지금에야 후견도 해 주시고 아끼시지만, 어쨌든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까? 잘못을 조금만 저질러도 곧장 팽 당하겠죠.”

그만큼 수인들의 인간 혐오는 뿌리가 깊은 편이었다.

수인들의 수장인 공작이라면 인간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깊을까.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조금만 잘못하면 팽 당할 게 뻔해.’

지금이야 착한 척, 성실한 척 연기를 하고 있어 다들 속아 넘어가지만 괘씸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쫓겨날 운명일 터였다.

‘지금, 공작 각하께서는 그 문란한 계집애에게 눈이 가려져 속고 계신 것이다.’

메일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머릿속 한편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사람에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법.

메일스는 아스텔의 집에서 훔쳐 온 편지를 당당히 들고 다시 내성의 치료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제 옆자리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막내 치료사에게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거, 말이오. 공작 각하께 밀서를 전달하려면 어찌해야 하오?”

깡!

그 순간, 어디서 듣고 있던 건지 리카르도가 튀어나와 힘줄이 바짝 선 단단한 주먹으로 머리를 찍었다.

“예끼, 이놈아, 넌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고!”

“아, 아, 아닙니다요.”

“딱 봐도 모함과 음모에 최적화된 관상이거늘.”

“그, 그럴 리가요! 저 인덕이 빼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한 놈입니다!”

메일스가 급하게 꼬리를 말았다.

다른 자들을 통해 공작에게 고발하는 건 어려울 성싶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속 편하게 익명으로 투서해야겠다고 방법을 바꾸었다,

‘아스텔, 너 이 녀석. 두고 보자!’

그가 입을 한 손으로 가리고 음흉하게 킬킬거렸다.

그런 메일스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리카르도가 한쪽 입꼬리를 흉악하게 말아 올렸다.

* * *

그때, 공작의 집무실 안.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이 건네준 백목련을 테이블의 중앙에 올려놓았다.

자단나무 테이블 위에는 별다른 장식 하나 없이 백목련만 있어 더욱 눈에 튀었다.

공작은 뿌듯해진 가슴 한편을 내리누르며 백목련을 관찰했다.

아스텔이 처음 준 선물이다.

“꽃송이는 백목련이에요! 꽃말도, 제가 공작님께 드리고 싶은 말을 담았어요.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몹시 궁금하고 기대도 됐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 열렸다.

“공작 각하.”

“들어오십시오.”

보좌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땀을 흘리는 것 하며, 왼쪽 손을 유난스럽게 떠는 것이 수상쩍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그, 그것이…….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각하.”

그가 갑자기 방문한 것과는 관계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이스 공작은 보좌관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그 전에.”

“예?”

“백목련의 꽃말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아리송한 공작의 말에 보좌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알아 오겠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의외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예. 얼마나 좋은 말일지 기대가 되는군요. 그런데…….”

그가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로?”

“아, 예. 다름이 아니라, 아스텔 님에 관한 밀서입니다. 아스텔 님이 근무하시던 치료소의 치료소장이 건네준 편지인데요.”

보좌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 검술 대회의 인력 보강을 위해 성에 들어온 치료소장, 메일스.

그가 자신을 향해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반드시 공작 각하께 보여 주셔야 합니다, 예?!’

공작의 측근인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자주 바뀌는 편이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워낙 의중을 알 수 없는 상관인 데다, 쉽게 공작의 마음을 얻지 못해 나가떨어지고는 했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보좌관 역시 치료소장의 말을 들어 공연히 일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스텔의 신변과 관련된 것은 지체 없이 보고하라고 한 공작의 명령이 떠올랐다.

“이리 주십시오.”

그의 시선이 보좌관의 손에 들린 편지로 향했다.

봉투 위에 꽃무늬를 열심히 그린 것으로 보아 아스텔이 쓴 것이 확실했다.

절로 입가가 느슨해지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공작은 느긋하게 밀서라 칭한 것을 받아 바로 열어 보았다. 그러나 잠시간의 평화는 편지의 내용을 읽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아나이스 공작은 무시무시한 눈빛을 띤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보고 싶어. 언제……와?]

[카시언.]

[잘 지내지?]

[좋아해.]

편지는 조각조각 분쇄해 둔 걸 용케 잘 붙인 형태였다.

[여긴 환자들이 많아.]

[전운이 감도는 눈치야.]

그 아래에는 치료소장의 쪽지도 덧붙어 있었다.

[어찌나 문란한지, 시집도 안 간 과년한 여자가 사랑 편지를 엄청나게 많이 썼더군요! 게다가 이 편지의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공작령의 기밀까지도 이것저것 알려 준 눈칩니다. 역시 인간답게, 공작 각하의 은혜를 배신한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더 파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하!]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쪽지를 구겼다.

“덕분에.”

공작은 살기 어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얻게 되었군요.”

예컨대 아스텔이 카시언 그레이에게 ‘좋아해’, ‘보고 싶어’라고 말한 것이라거나…….

아나이스 공작이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아스텔 님의 편지를 훔쳐서 내게 전달한 저의가 뭘지 궁금한데.”

지금의 그에게는 적절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그, 그것이, 치, 치료소장이 반드시, 반드시 전달하라고 하여…….”

보좌관이 땀을 뻘뻘 흘렸다.

자신이건 치료소장이건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치료소장 그자의 행보에 대해 알아보십시오.”

그 한마디로 방금 막, 치료소장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가, 각하 혹시 불쾌하셨다면……. 산 채로 잡아 올까요?”

“예.”

그리 명령하고 나서 공작인 깊은 상념에 빠졌다.

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아스텔이 카시언 그레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 사살당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 아이도…….

안 그래도 그는 장미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만난 이후, 그는 카시언 그레이의 행보에 대해 샅샅이 뒤져 볼 생각이었다.

그간 미뤄 두었으나, 직접 카시언 그레이의 소문에 대해 알아볼 때가 온 것이다.

그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곧장 공작성을 나가 북부 지역 중에서도 제국 내 소문이 가장 빠르게 모인다는 술집을 찾아갔다.

그렇게 아나이스 공작이 추적한 카시언 그레이의 과거와 현재 행보는 끔찍할 정도로 쓰레기 같았다.

수도에서 보았던 가십지 내용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으나, 그사이 좀 더 추가된 소문이 있었다.

‘아, 수도의 꽃 카시언이요?’

‘다자 연애 주의자라는 소문이 파다한 그 녀석?’

‘그래도 특별하게 여기는 여자는 있지 않았나?’

‘그 여자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소문도 있지.’

술집의 주정뱅이들은 알아서 하나둘씩 말을 꺼내고 있었다.

‘요즘에는 무슨 백작가의 막내 영애랑 만난다던데.’

‘자기 애랑 아이 엄마를 두고? 하기야 카시언이면 그럴 만하지. 워낙 소문이 많은 자 아닌가! 하하!’

‘들리기로는 아이가 한두 명도 아니라더라.’

‘그런데 그 애들은 어딨어? 영, 뜬 소문 아냐?’

그 애 한 명 여기 있다, 이 공작성에.

아나이스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수도에서 카시언 그레이가 세 살 정도 되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걸 본 자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지.

반면 카시언 그레이는 그 뒤로도 자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무수히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한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주먹에 힘줄이 설 정도로 차가운 분노가 일었다.

그 새끼는, 얼마나 아스텔을 무시하면 제 아이를 맡기고 저는 자유롭게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닌단 말인가.

한 치의 과장 없이 산 채로 찢어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스텔의 반짝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냥, 카시언 그레이가 제국 영웅이라는 게 멋있어서 제 친구라고 말해 봤어요!’

동시에 아스텔이 썼던 다정함이 듬뿍 묻어나는 편지가 떠올랐다.

[보고 싶어, 카시언. 좋아해!]

어째서 아스텔은…….

그딴 문란하기 짝이 없고, 거지 같은 새끼를 좋아하는 걸까.

카시언 그레이 같은 폐기물과 달리,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당신이 나를 좋아해 준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텐데.

로브에 감춰져 있던 그의 눈빛이 살기 어리게 빛났다.

공작성으로 돌아오는 길, 그의 머릿속에 술집 안에서의 상황이 다시금 떠올랐다.

척 보기에도 보통내기가 아닌 그를 묘한 시선으로 관찰하듯 응시하는 자가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그 시선 하나하나를 신경 쓰기엔 귀찮았으니까.

애초에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건 상관없었다.

그저 아스텔의 시선만이 중요할 뿐.

그렇게 공작성으로 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모았던 모든 정보를 하나씩 곱씹었다.

그는 카시언 그레이와 아스텔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카시언에 대해 말할 때면 체한 것처럼 얼굴이 발개지고 큰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던 아스텔.

반면 아스텔에 대해 대수롭잖다는 듯 웃어넘기던 카시언 그레이.

돈을 뜯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아이까지 맡기고 간 파렴치한 카시언 그레이.

그럼에도 그에게 좋아한다 편지를 쓰고, 보고 싶다 호소하는 아스텔.

둘의 관계에 관한 상상이 비참해질 정도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도중이었다.

보좌관이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공작 각하.”

“……예.”

“일전에 물어보셨던, 백목련의 꽃말 말입니다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보좌관이 아리송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고대어라 맞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예.”

“당신은 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뜻이라는데요.”

그 보고에 아나이스 공작이 이를 거세게 악물었다.

* * *

그때, 카시언은 자신의 명줄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레이첼과 함께 있던 그는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복수에 성공하고 최대한 빨리 공작성에서 아스텔과 제 아이를 데려와야만 했으니까.

“카시언, 너 공작한테 뭐 밉보인 거 있냐?”

“응.”

“……뭐야, 진짜? 아나이스 공작이 너에 대해 알아보고 있던데.”

암흑 길드의 레이첼은 아나이스 공작에게도 정보상을 붙여 두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대부분 실패했으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공작이 제 뒤꽁무니에 누군가 붙어도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곧바로 정보상이 그에게 따라붙었고 공작이 직접 술집을 전전하며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

“너도 알다시피, 공작이 뷔에트리가의 멸문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게다가 너를 추적하고 있으니…….”

카시언은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레이첼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나이스 공작은 확실히 수상했다.

“공작이 내가 더럽게 문란한 쓰레기라는 거나 좀 알아줘야 할 텐데.”

“그런 이미지, 괜찮아?”

“견제당할 일 없는 쓰레기가 되면 좋지, 뭐.”

“솔직히 넌 별로 그런 스타일 아니잖아.”

실제로 가까운 레이첼이 보기에 카시언은 오히려 금욕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카시언은 싱겁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고, 난 이만 가 볼게. 또 일이 있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해야 돼, 무리.”

카시언은 검집을 쥐었다.

다음은 통나무집의 앤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뷔에트리 백작가의 하녀로 일했었다던 그녀는 제법 독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문 안에 위험한 놈이 하나 있었어요. 부두술을 쓸 줄 안다고 떠벌리곤 했는데…….’

남은 자들의 정보를 이어받다 보면, 가문을 무너뜨린 이능력자 중 한 명에 관한 단서를 잡아낼 수도 있으니까.

이제 속도를 내야만 했다.

* * *

한편, 씻은 듯이 말끔하게 건강해진 나는 열심히 공작성 내부의 범죄자 색출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조카까지 공작성에 데려왔으니, 이제 한시바삐 잡아야만 했다.

물론 섣부른 행동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지만, 우유부단하게 움직여 봤자 내 손해였다.

하지만 샘에게서 얻은 아티팩트를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활용하는 건 절대로 섣부른 행동이 아니지.

“월렛 님, 들어 봐요.”

나는 샘의 아티팩트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톡, 하고 아티팩트의 전면부를 눌렀다.

“……잉?”

플래시가 번쩍이는 것처럼 새하얀 빛이 깜빡이는 동안, 나는 근엄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제가 가진 돈을 전부 도둑맞아서 그런데, 전 재산을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전 재산?”

“네!”

평소라면 듣자마자 단칼에 거절했을 그는 골똘히 고민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 이렇게 월렛의 전 재산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건가……?!

나를 빤히 바라보던 월렛이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헙, 안 돼. 이거 완전히 사람 현혹시키는구만!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다니!”

나는 씩 웃었다.

‘이게 바로 아티팩트의 기능이구나.’

이거 약간, 진짜 사기꾼이 된 기분이라 짜릿한데……? 샘 이 자식이 우리 가문과 공작성 내 수인들을 농락하면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인상을 찌푸린 나는 진지하게 아티팩트 중앙에 새겨진 삼각형의 꼭짓점 중에서 ‘변신’에 해당하는 부분을 매만져 보았다.

“각 아티팩트는 연결되어 있다고 했죠?”

“그렇소. 하지만 내가 분석할 때 끊어 놓았지!”

“연결, 다시 해 주세요.”

“다시?”

“네. 아티팩트가 사용되면 상대방에게 불빛이 가게끔.”

“허어……?”

월렛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용주의 말이니 따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어렵지는 않지.”

능숙하게 아티팩트의 표면을 몇 번 누른 월렛이 씩 웃었다.

“다 되었소.”

벌써 다 되다니, 진짜 천재인가 봐!

신기한 표정을 지은 나는 아티팩트를 다시 눌러 작동시켰다.

자, 이제 내가 실험할 말은…….

“월렛 님, 지금까지 모은 아티팩트 전부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그의 눈이 몽롱하게 흐려졌다가 다시 제빛을 겨우겨우 찾았다.

“아니, 또 내게 사기를!”

나는 미안한 낯으로 눈썹을 살짝 내렸다.

“죄송해요. 이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다른 아티팩트를 가진 자에게 신호를 보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지금 막 아티팩트가 남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을 눈치챘겠구려?”

나는 불안해하는 월렛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쯤 조바심 좀 나겠네. 과연 이 아티팩트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지 궁금해하면서.’

하나가 죽었으니 나머지 둘 역시 목의 올가미가 조이는 기분을 받고 있을 것이다.

원작 속에서 우리 오빠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괴롭혔던, 그리고 결국 죽음까지 몰고 갔던 당신들도 어디 한 번 당해 봐.

나는 환생했음을 눈치챈 뒤부터 차분히 작성해 왔던 계획표들을 떠올렸다.

‘아티팩트의 행방을 궁금해해야 할 텐데.’

내 계획은 완벽했다.

이제 준비할 일만 남았다.

나는 월렛을 돌려보낸 뒤, 공작님이 건네주었던 영상구를 켰다.

‘혹시 건강에 이상이 있을 때면, 델랑 루치아 마을에 간 주치의와 연락하라고 했어.’

영상구에서 빛이 들어오더니 화면 앞에 주치의가 나타났다.

“주치의 선생님, 잘 지내세요?”

“아이고, 아스텔 님! 뭐 하고 지내셨습니까?”

“그냥 잘 지냈어요. 델랑 루치아 마을은 어때요?”

“하하! 이곳, 델랑 루치아는 아주 평온하답니다. 각인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하러 왔는데, 제가 그냥 힐링만 하고 있는 느낌이네요!”

주치의가 허허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그를 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저…… 실은,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선생님.”

“아이고, 말씀하십시오!”

지나치게 저자세로 나오는 주치의에 의아해진 것도 잠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에게 반드시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되게 귀여운 고양이를 한 마리 주웠는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델랑 루치아에 있는 주치의가 내 거짓말을 알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이 고양이를…… 귀여운 강아지로 한 번 변신시켜 보고 싶어서요.”

“허허, 이것 참. 참으로 귀여우신 발언이십니다!”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변신술은 그리 쉽게 쓸 수 있지가 않아요. 변신 마법은 말이죠,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고대 드래곤의 마법,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마법과 변신 물약 사용의 혼종이죠.”

“아…….”

여기까지는 나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점점 더 갈피가 잡히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네, 그래서요.”

“드래곤만큼이나 강력한 존재가 아닌 이상 변신 물약을 계속 먹어야 해요.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죠.”

드래곤의 고대 마법은 내게 걸려 있는 것이니만큼, 나는 드래곤의 마법에는 굳이 아티팩트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첩자는 변신 아티팩트와 마법 약을 동시에 사용해 진짜 모습을 은닉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남았다.

“변신 마법 약의 재료는 뭐가 있었죠?”

“아……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즘 가장 효과가 좋은 건 메일리 약초였던 것 같군요!”

뜻밖의 정보에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메일리 약초요?”

“네!”

메일리 약초는 북부에서는 잘 자생하지 못한다.

게다가 뿌리까지 캐낼 시, 고작 한 시간만 지나도 시들시들해지는 터라 관리하기도 까다로운 약초였다.

그런 메일리 약초가 변신 마법 약의 재료라면…….

범인은 분명 메일리 약초를 구하기 위해 공작성 어딘가에 심어 두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 나도 어딘가에서 메일리 약초를 본 적이 있는데…….’

“메일리 약초, 공작성에도 있었죠?”

“있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워낙 부지가 넓어서.”

잠시 침묵한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 있었어요.”

방금 막, 성내 검술 대련장 근처를 지날 때, 메일리 약초들이 유달리 많이 핀 것을 보고 의아해했던 게 기억이 났다.

게다가 벨에게서 나던 냄새의 근원이기도 했지.

‘범인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어.’

나는 지금까지 번개 모양의 검흔에만 집착한 나머지 상처를 지닌 자만을 추적해 왔다.

하지만 왜 그 검흔을 숨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아스텔 님? 아이고, 이놈의 영상구가 끊기는 건가?”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 뒤 애써 발랄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연결 끊을게요.”

“아이고, 예!”

주치의의 화통한 웃음을 끝으로 통화가 마무리 되었다.

기사인 동시에 메일리 약초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이.

그건 바로…….

* * *

모두에게 친절한 검술 스승, 바첼.

그는 녹색 머리칼을 헝클이며 캄캄한 응달 같은 암실 안에 들어섰다.

본디 셋이던 공작성의 이능력자는 결국 둘만 남았다.

바람잡이 샘 놈은 끝내 재규어 가문을 처리하지 못했다.

게다가 재규어 감옥의 악귀 같은 감옥 속에서 그놈을 구출해 낼 수는 없었다.

암실 속 작은 원탁 앞.

양손으로 얼굴을 괸 바첼의 입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샘의 아티팩트가 방금 막 작동했다.”

바첼은 눈을 제외한 얼굴을 꽁꽁 싸맨 눈앞의 사내에게 제 아티팩트를 보여 주었다.

사기라는 고대어가 적혀 있는 삼각형의 한 모서리에 희미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저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는 소리다.”

바첼의 조급한 말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사내가 은밀한 목소리로 답했다.

“……흥미, 롭군.”

눈썹을 찡그린 바첼이 조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끝인가? 그자가 아티팩트로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니까!”

바첼은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도움 안 되는 놈. 넌 계속 닥치고나 있으라고. 내가 ‘그분’을 위해 공을 세우기 전까지 말이다.”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린 바첼이 암실을 빠져나가자, 자리에 홀로 남은 수상쩍은 사내는 그의 뒷모습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티팩트 안, 삼각형의 꼭짓점에서 유달리 반짝거리며 빛나는 ‘공포’라는 표식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를 뒤로한 채 바첼은 급하게 몸을 돌려 검술 대련장으로 향했다.

몇 시간 뒤.

“저어, 검술을 더 해야 해요, 선생님?”

은여우 수인, 벨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꼬마는 무척 힘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바첼은 평소와 달리 퉁명스럽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예.”

벨은 평소 하던 것처럼 검을 내려놓고 바첼의 옷소매를 잡으며 연신 투정을 부렸다.

“선생님, 선생님.”

“네.”

겨우 다시 친절한 가면을 쓴 바첼이 입을 열어 답했다.

그러자 신이 난 벨이 재잘거리며 떠들었다.

“아스텔은 엄청 예뻐요! 그리고, 되게 똑똑해요. 치료소에 가서 보면 말도 엄청 잘해서, 아스텔이 뭔가를 만들어 팔면 모두가 홀딱 넘어가요!”

“아스텔 님 말인가요? 원래 그리 달변에 수완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니요, 갑자기 잘해졌어요.”

바첼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잘해졌다, 라.

순진한 소년이 거짓을 입에 담을 리는 없을 터.

하필 샘의 사건 때 중심에 있던 자라, 순식간에 의심이 증폭됐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

그는 해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텔. 그 여자가 그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그녀가 공작의 은인이 되어 성에 도착한 뒤 아나이스 공작성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꽤 의심스럽군.’

만약 그녀가 큰 그림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샘의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도 만약 그 여자라면?’

상당히 조급해졌다.

이를 워낙 세게 악물었던 탓에, 그는 제 손등을 덮었던 변신 마법이 잠깐 해제되었던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아나이스 공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질 않나.’

뜻밖의 장애물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바첼의 인상이 흐려졌다. 그 옆에서 한참 머뭇거리던 벨이 한 가지 고백을 해 왔다.

“저어, 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도 했어요!”

“……넘어갈 뻔하신 건가요?”

“네!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바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아마 피가 맺혔을 것이다.

“제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벨은 내가 잘 길들여 놓았는데. 어찌 거짓을 말하겠나.’

벨은 가부장적인 은여우 가문에서 자라난 후계자였다.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무심한 아버지 탓에 애정 결핍이 극심한 아이였다.

‘저어, 선생님. 저 잘하죠?’

‘네. 하지만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폼이 어설퍼서.’

‘감사합니다!’

‘은여우 가문에서도 딱히 벨 님에 대해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훈련 평가를 할 때마다 벨은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벨 님에 대해 잘 알고, 위하는 자는 저뿐이니까요.’

날 선 비난으로 계속 채찍을 내리치다, 나가떨어지기 직전 칭찬으로 당근을 주면서 제 입맛에 맞게 잘 길들여 왔다. 그렇게 제게 잘 보이려 애쓰게 된 벨이 자신에게 거짓을 고할 리 없다.

정리해 보자.

정황상 그 여자, 아스텔이 아티팩트를 훔쳐 간 건 확실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 아티팩트를 마구 사용하며 공작성을 헤집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아나이스 공작이 없는 때를 노려 그 여자를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계획까지 망칠 수도 있다는 점. 바첼의 두뇌가 빠르게 퍼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몇 초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배어났다.

“그럼, 이만.”

다른 건 몰라도, 그는 타인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에는 탁월한 재간이 있었으니까.

한편 제 말에 무언가 고뇌하던 검술 선생님이 황급히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스텔은 왜 선생님한테 자기 자랑을 하라고 한 거지?’

궁금한 게 쏟아졌지만 벨은 짐짓 어른스러운 척하며 팔짱을 꼈다.

이제 벨은 칭찬 한마디 잘 안 해 주고, 만날 때마다 먹으면 배가 아파지는 이상한 걸 주는 선생님보다는 아스텔이 더 좋았다.

‘아스텔이 하라는 대로 해! 나는 용기 있는 벨이니까!’

이 모든 것은 아스텔이 준 ‘용기를 내게 만드는’ 물약 덕분이었다.

그 약효를 다시금 떠올린 벨은 씩씩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히힛, 하고 웃은 벨이 눈을 비비며 다시 손아귀에 검을 꼭 쥐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검을 쥐는 것을 회피하고 싶지도 않았고, 검을 훈련하는 일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 * *

검잡이는 바로 바첼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아스텔은 곧장 복수 준비에 나섰다.

그녀는 몇 시간 만에 바첼을 잡을 계략을 촘촘히 짜 두었다.

꼬꼬마 벨을 통해 자그마한 덫도 던져두었다.

‘내일이 검술 대회야.’

멋진 미래를 위해서는 잠을 잘 자야 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내일 있을 일에 대해 미리 시뮬레이션하려고 했다.

“아스테, 자?”

……하지만, 아이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스텔은 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낮게 속삭였다.

“응, 얼른 자자. 동화책 읽어 줄까?”

“웅!”

아스텔은 방의 집무실 서가에 있던 동화 전집 중 하나를 빼 왔다.

무슨 동화책을 읽어 줄지는 몹시 꼼꼼하게, 까다로운 기준으로 선별했다.

일단 기사가 나쁘게 나오는 동화는 전부 탈락.

치료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오는 동화도 탈락.

고로 남은 것은 기사를 멋있고 훌륭한 직업으로 포장한,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여기 보여? 멋진 기사님이 평민들을 구출하는 이야기야.”

“머딧는 기사!”

룬이 두 뺨을 양손으로 받쳐 올리면서 까르르 웃었다.

카시언과 룬, 부자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스텔은 조금 더 과장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는 동화책을 읽는 척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멋진 기사님이 살았습니다. 기사님은 아주 정의롭고 멋졌어요. 그 기사님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어린 아들을 아주 사랑했어요.”

룬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사라해!”

좁은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까르르 웃다가 콕콕, 눌러 보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

“웅!”

“기사 압빠, 아기 사라해!”

아스텔은 씩 웃었다.

룬은 기사를 좋아하니, 카시언이 돌아오면 분명 무척 좋아할 것이다.

‘복수만 끝나면 아주 그냥 깨가 쏟아지겠네. 두 부자가.’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해피 엔딩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었다.

“그럼, 아빠는 아기 사랑하지.”

나는 그 뒤로도 한참 과장을 섞어 가며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룬은 졸린 기색 없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잘까?”

각인의 불안정함 탓인지, 아니면 그냥 만성 피로인 건지.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솔솔 오는 아스텔이 룬을 꼭 끌어안고 눈을 내리감았다.

아이를 코 재우고 내일을 기약한 아스텔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육아 초보, 아스텔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아이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저를 껴안은 아스텔의 팔 바깥으로 삐져 나왔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동화책 생각뿐이었다.

기사 아빠와 아기가 함께 지내는 내용의 귀여운 동화책.

그 동화책 속에서, 자신과 같이 금발이라는 아기는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아이가 놀란 건 그 동화책 속에 있는 기사님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그 기사님, 꼭 그 아저씨처럼 생겼어…….’

사실 기사가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저 멋있어 보였다.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이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아스텔이 그 아저씨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에겐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아스텔을 만나기 전까지 아이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단어도 생각이 잘 안 나서 말을 못 했으며, 조금 전의 기억도 흐릿흐릿해서 자꾸만 깜빡했다.

마치 누군가 마법을 걸어 둔 것처럼, 기억이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저택에서 아스텔을 본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꼭 마법이 풀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이는 막 알에서 깬 새처럼 처음 본 아스텔을 엄마로 믿고 따랐다.

아스텔의 시선이 향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 눈에 담으며 세상을 배워 나갔다.

그중에서 제일 신기한 건…….

흉흉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잘생긴 아저씨.

그 아저씨랑 있을 때면 아스텔,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니까…….

엄마도 행복하고, 아기도 행복하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어!’

양육자의 감정을 기민하게 눈치챈 아이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아스텔이 잠든 것을 살폈다.

‘그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아빠가 되면 돼.’

그러니까 둘이 함께 붙여 두면 분명 엄마가 좋아할 것이다.

그런 간단한 생각에서 아이는 몸을 일으켰고, 델피니움 룸 문 바깥으로 나왔다.

아나이스 공작 저택의 복도.

문을 열고 시녀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밤톨 머리의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복도 중앙 방 앞에 멈춰 섰다.

근처에는 불편하고 귀찮은 걸 싫어하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시녀나 기사 한 명 없이 한적했다.

그래서 아이는 아무 제지 없이 공작의 방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안쪽은 공작성에서 가장 귀한 것들만을 모아 둔 것처럼 화려했다.

그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그대로 침실을 향해 도도도 뛰어갔다.

“아조씨.”

똑똑.

통통한 주먹으로 침실 문을 두드린 아이가 해사하게 웃었다.

맞게 두드린 것인지 문틈 사이로 냉정한 남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그마한 꼬마를 보며 말했다.

“너는…….”

한낱 아이가 느끼기에도, 그의 목소리는 깊은 절망에 침잠해 있었다.

고통뿐인 얼굴.

약간의 술 냄새도 났다.

아이는 눈을 마구 비비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처음 보는 낯선 행태를 목이 빠지라 올려다보았다.

이 아저씨, 기사 안 같기도 하고!

“……카시언 그레이의 아이군. 무슨 볼일이지?”

이를 갈듯 말하는 그를 보며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아저씨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또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리송했다.

‘카시언 그레이가 내 이름인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나이스 공작을 향해 말했다.

“나 이름 업써. 나 카시어 그래 아니야.”

공작은 무심한 낯으로 몸을 숙이더니 이내 손가락을 까닥여 아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 아이는 카시언 그레이가 뭔지도 잘 모르는 듯했다.

“말은 곧잘 하는군. 원래는 잘 못 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배웠지?”

아이는 요즘 잘 먹어서 볼록 튀어나온 배를 조막만 한 손으로 통통 치며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언래 말 자래!”

“그래?”

“웅!”

다시 몸을 꼿꼿하게 세운 공작은 아이를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문득문득 기분이 나빠지다가도, 아이의 얼굴에 스치듯이 보이는 아스텔의 느낌을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복잡한 감상은 집어치울 시간이다. 이제 아스텔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 아이를 두고 도망가기까지 한…….

건방진, 카시언 그레이를 단죄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날 벼린 눈빛을 한 그는 문을 닫으려 아이를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할 말이 없으면 나가.”

그러나 아이는 떠나지 않았다.

“시러.”

누구 자식인지 훤히 보일 만큼 몹시 당돌했다.

“우리, 칭구!”

어지간한 성인 시종보다 강한 담력을 지닌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난 네 친구가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거절에 굴하지 않는다는 듯 금발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써!”

그리고 그의 몸 근처에 통통한 다리를 착 붙이더니, 위를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구럼, 압빠해!”

고작 세 살짜리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 공작이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네 아빠는 따로 있다.”

그가 싸늘한 시선으로 아이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차갑기 그지없는 무심한 대꾸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 어먀는 아스테니까, 아조씨는 압빠!”

“……뭐?”

별것 아닌 말일 뿐이었다.

공작은 여전히 무심함을 견지했다.

하지만 금세 알아차리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입매가 묘하게 느슨해지고, 치켜뜨고 있는 눈 역시 유순하게 풀려 버렸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 저 꼬마의 제안에…….

약간 혹한 것이다.

* * *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나이스 공작과 아이가 마주 앉았다.

그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카시언 그레이의 신상 정보와 행적 보고서들을 보며 입 안쪽 살을 콰득 깨물었다.

아스텔은 카시언 그레이를 좋아하고, 저 아이를 사랑한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던 얼굴 표정을 간신히 무심하게 바꾸어 내는 데에 성공한 아나이스 공작이 조용히 아이에게 턱짓을 했다.

“왜 나를 찾아왔지?”

물음을 가볍게 넘긴 아이는 발랄하게 테이블 위에 있는 신상명세서를 꼬깃꼬깃 접었다.

‘제 아비에 대한 조사서인 것도 모르고 즐거워 보이는군.’

무심하게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룬이라고 했나.”

“그게 누군지 모라요, 모라.”

아이는 순진한 눈망울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침착함을 가장하며 아름답게 웃었다.

아이에게까지 분풀이를 하는 건 참된 어른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심호흡을 한 다음 표정을 갈무리하며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 말이 뭔지 말하고 돌아가라.”

그가 턱을 괴며 단호한 어조로 묻자,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공작을 가리켰다.

“어먀 좋아해!”

좋아해, 라는 말에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래서?”

“내가 도아주께!”

“네가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전보다 흥미가 오른 듯한 시선이 룬 쪽을 향했다.

“우리 어먀는 나 옴총 조아하고든.”

룬이 제 배를 앞으로 내밀며 위엄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구 어먀는 아조씨도 디게 조아해.”

동그란 눈이 사심을 가득 담아 반짝거렸다.

공작은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해 내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구러니까 두리 겨론하면 대. 내가 도아줄게.”

……결혼?

“네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움…….”

룬이 동화책에서 찢어 낸 장면을 내밀었다.

“여기이, 기사님!”

자그마한 종이에는 기사가 그려진 장면이 나와 있었다.

“기산님이 세상 구해요.”

쫑알거리는 룬의 목소리를 흘려듣던 공작이 문득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라미들 다 조아해.”

아스텔이 ‘기사’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 위로 룬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구러니까, 머찐 모습을 보여 주는 고예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단순한 진리이거늘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생각에 빠져 미처 시도조차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이 검술 대회라는 것은 꽤 고무적이었다.

아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공작을 마주 보았다.

“히히, 오때요?”

아스텔에게만 통하는 필살기, 꽃받침도 했다. 처음 봤을 때도 꽃받침을 하더니 아이 나름의 생존 수단인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다.”

그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칭찬을 한마디 더 보탰다.

“너도 꽤 도움이 되는군.”

카시언 그레이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는 옴총 머싯으니까요!”

아이가 좁디좁은 가슴팍을 활짝 펴고 자화자찬하며 양어깨를 으쓱거렸다.

밤톨처럼 잘 깎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내 졸음이 쏟아지는지,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제 방으로 급하게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고 나가는데 힘이 달리는지 한참 끙끙거렸다.

들어올 때의 기세와는 사뭇 달랐다.

뒤에서 지켜보던 공작은 아이의 통통한 볼이 푸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에 공작이 잠자코 문을 열어 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홱 들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공작을 응시했다.

“압빠는 힘 쎄!”

그는 문을 연 채로, 과장하자면 제 손바닥만큼 작은 아이가 신이 나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나아가는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홀로 드넓은 복도에서 총총거리며 걷는 폼이 신경 쓰였다.

그저, 아주 조금.

* * *

룬을 내보낸 뒤, 아나이스 공작은 자신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점검하고 있었다.

아스텔이 용맹한 기사를 좋아한다 했으니, 자신도 직접 검술 대회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모두 쓸어 주지, 같은 생각으로 집무실에 둔 검을 몇 개 잡아 보고 있었는데…….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룬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문을 지키는 자를 따로 두지 않았지만, 감각이 발달한 공작은 누가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공작님!”

아스텔은 백목련을 보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다소 긴장한 상태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 아스텔.”

“룬이 잠을 안 자기에 재우다 보니 도리어 제가 잠이 깨 버렸어요.”

곧이어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차를 마시겠냐고 묻는 공작에게 아스텔은 손을 부자연스럽게 내저으며 말했다.

“저, 고, 공작님. 작은 부탁이 있는데요.”

“네.”

“혹시 검술 대회 날, 뭐 하세요?”

아스텔의 방으로 돌아갔던 룬이 미리 검술 대회 날의 이벤트에 관해 말한 것일까.

공작이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별일이 없는 한 검술 대회를 참관할 것 같습니다.”

……아스텔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혹시…… 평야에서, 매머드 삼십 마리의 껍질을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조마조마해하며 물어 오는 목소리에 공작은 이유도 묻지 않고 화답했다.

“네.”

매머드 삼십 마리를 잡는 것쯤이야.

상당히 갑작스러운 화제였지만 전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는 수하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스텔이 새하얀 눈 토끼 같은 선량한 눈을 깜빡이며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서 직접 잡아다 주실 수는 없겠죠? 그게 더 뜻깊을 것 같아서요.”

그는 뻣뻣하게 굳은 주먹을 몇 번 움켜쥐었다 펴고, 마음도 애써 내리눌렀다.

무려 아스텔의 첫 부탁이었다.

매머드 따위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삼십 마리가 대수일까.

전멸을 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된다면, 검술 대회는 참여하지 못하시겠죠?”

아쉬워 보이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그는 속으로 진지하게 다짐했다.

매머드 따위는 빠르게 격파한 뒤, 그 껍질을 가지고 반드시 검술 대회에 참여하겠노라고.

삼십 마리 정도라면 반나절 안에 잡아 올 자신이 있었다.

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낸 그는 아스텔의 손을 들어 그 손등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말했다.

“무사히, 그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다녀오겠습니다.”

“네, 검술 대회에 못 오시는 게 아쉽긴 하지만! 꼭 매머드 삼십 마리로 부탁드릴게요!”

아스텔이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 * *

그렇게 해서 검술 대회 당일,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고도 먼 깊은 밤 북부의 평야.

아스텔의 갑작스러운 부탁 때문에 가장 곤란해진 자, 치료소장 메일스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 이이익!”

메일스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마물의 소굴, 북부의 최북단 황야에 목줄을 한 채로 끌려왔다.

메일스의 곁에는 아나이스 공작과 리트로 경이 함께 있었다.

“음모를 꾸몄으면 죗값도 치러야지.”

메일스는 아나이스 공작에게 그가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알려 준 대가로 마물 사냥까지 끌려온 터였다.

‘도, 도대체 왜 검술 대회 날에 마물 사냥을 하러 온 거야!’

경악한 메일스를 바라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곧 즐겁게 웃었다.

“그대는 나와 마물 전쟁을 함께하게 될 겁니다.”

“마, 마, 마물 저, 전쟁은 분명 내년 봄에……. 여긴 기, 기, 기사도 없는데…… 요…….”

“그대가 기사가 되면 되죠.”

숨이 넘어갈 것처럼 놀란 그를 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스텔이 매머드 삼십 마리의 껍질을 원한다고 했거든.”

즐거워 보이는 그 표정처럼 아나이스 공작은 뿌듯한 마음을 안고 이 자리에 왔다. 물론, 보좌관이 산 채로 치료소장을 잡아온 것도 기쁨에 한몫했다.

‘아스텔이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사실상 처음 아닌가.’

고무된 공작의 곁에 있던 리트로 경이 연신 장단을 맞췄다.

“역시 아스텔 님은 뭘 좀 아시는 분이로군요. 마물 매머드의 껍질은 모피를 대신해서 방한용으로 입기에 참으로 좋죠.”

어울리지 않게 아첨하는 리트로 경을 보던 공작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렇지.”

반면 그들의 대화에 메일스는 소리 없이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는 중이었다.

‘미친, 아스텔까지도 제정신이 아니군!’

그는 심히 쭈그러든 어깨를 더욱 구부정하게 만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에 제정신인 건 적당히 속물에 남의 것 뺏으면서 사는 혹부리 영감 같은 나뿐이로다.’

“각하,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리 자신하는 리트로 경을 보던 메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일반적인 기사라면 매머드 ‘한 마리’를 잡는 데에 무려 사나흘이 걸린다. 완력이 좋은 기사라면 하루, 마법까지 쓰는 마검사라면 반나절 정도다.

“안 됩니다.”

치료소장 역시 속으로 수긍했다. 공작이 암만 괴물 같다지만 매머드 삼십 마리를 하루 이틀 만에 어떻게 잡겠는가.

그러나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치료소장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딱 여섯 시간으로 하죠. 빨리 보고 싶으니까…….”

그 말을 시작으로, 곧 황야에는 매머드 무리에 섞여 이리저리 치이는 메일스의 참담한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정확히 여섯 시간 뒤, 매머드 삼십 마리의 시체가 평야 전체에 깔렸다.

아나이스 공작은 가죽용 나이프를 든 채로 즐겁게 웃고 있었고, 리트로 경은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까지도 용케 살아 있던 메일스는 이 모든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경악에 빠져 있었다.

“껍질 바로 수거하겠습니다, 각하.”

자신과 달리, 리트로 경은 이 상황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그의 충성스러운 말에 아나이스 공작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물의 껍질, 상처 안 남게 잘 뜯으세요.”

그가 지옥에서 돌아온 악귀처럼 웃었다.

“최대한 빨리.”

그렇게 한참 매머드의 가죽을 손질하던 공작은 미리 챙겨 온 거울을 보며 얼굴에 튀긴 피를 닦아 내고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메일스는 물론이고 리트로 경까지 흠칫 놀란 앞뒤 다른 모습이었다.

‘하……. 이런 짐승 눈에 들겠다고 모함한 내가 미친놈이지…….’

벌써 오만 번이 넘도록 지독한 후회를 하는 중인 메일스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하도 이를 악물었더니 이에 금이 간 듯했다. 그는 북부 치료소로 멀쩡히 살아서 돌아가면 반드시 임플란트를 하고, 얌전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살아 있었습니까?”

평야가 다시 고요해지고 나서야 아나이스 공작이 무심한 낯을 하고 치료소장에게 다가왔다.

“잘됐군요. 그대에게 물어봐야 할 게 남았는데.”

물어본다, 라고 쓰고 고문한다, 라고 읽는 게 아닐까?

……야망 가득했던 치료소장 메일스는 이제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물론, 그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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