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2)(2권) (4/12)

목차

Chapter 3. (2)

한편 첨탑 밖으로 나온 주치의는 멈춰 선 채 고개를 갸웃했다.

각인에 관한 고대의 서적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 같은 케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친밀도도 있고, 스킨십도 꾸준히 하는데 계속 각인이 불안해져서 한 명의 목숨이 위급해질 줄이야. 각인은 본디 이런 것이 아니거늘.’

담당하는 아나이스 공작의 일이라 몰두하는 것도 있었지만, 각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학자로서의 지적 호기심 역시 충분히 넘쳐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한 달 정도 휴가를 내고 ‘델랑 루치아’에 한 번 유랑을 다녀와야 하나…….”

델랑 루치아는 북부 공작령의 남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마을 자체는 작지만 유명세는 엄청난 곳이었다. 고대의 현자가 모든 비밀을 묻어 두었다고 불리는 장소였으니까.

현자가 만들어 낸 거대한 마법 도서관과 학문을 수련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지적인 마을, 델랑 루치아.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제한되어 있었으나 운이 좋게도 주치의는 그곳에 연고가 있었다.

델랑 루치아에는 수인들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고대 마법에 대한 정보도 숱하게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단……. 연차 사용 보고서부터 올려야겠군, 그래.”

그는 방 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아나이스 공작의 집착이 발화하는 중이라는 것 정도는 눈먼 자라도 확실히 눈치챌 만한 일이었다.

그게 과연 아스텔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다음 날 오전,

나는 치료소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공작령의 중심 상권이라 불리는 델마 마을에 나갈 계획을 짰다. 내 머릿속에는 어젯밤 밤을 새워 열심히 만든 발모제 홍보용 전단지를 수도 전역에 뿌릴 생각이 가득했다.

‘공작님이 안 계시는 사이에 계획이 착착 진행되면 제일 좋은데.’

사실 공작님이 흑막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만도 없었다.

‘어제 공작님 태도도 조금, 수상했던 것 같아.’

주치의가 뷔에트리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순간, 그가 빠르게 말을 막은 것 같은데.

‘어떤 것도 함부로 확신해서는 안 되지만, 복잡하네.’

각인 때문에, 자꾸 얼굴을 마주 보게 되어 마음이 말랑거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찌 됐건 공작님이 잘해 주는 건 뷔에트리 가문과 무관한, 각인자인 아스텔이니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델마 마을 앞에 내렸다.

나는 지난 3년간 치료사로 근무하면서 델마 마을에 자주 들를 일이 많았다.

“아스텔, 오랜만에 보네요?”

“아, 네!”

좀 돌아다니다 보니 내가 치료해 줬던 수인들도 보였다. 그들을 향해 난 열심히 전단지를 돌렸다.

“이 발모제 전단지 받아 주세요!”

“자라나라 머리머리? 특이하네. 대머리인 수인들이 좋아하겠어요?”

열심히 홍보용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단골 초콜릿 가게에서 좋아하는 달콤한 생초콜릿을 포장하고 나서는 길.

나는 델마 마을을 지나는 공작님의 행렬과 우연히 마주쳤다.

‘수도로 갈 때는 텔레포트 스크롤로 이동하는 거 아니었나?’

조금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종일 날 따르던 제니가 등 뒤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공작 각하께서 이곳으로 오시나 봐요, 아스텔 님!”

“역시 아스텔 님을 알아보신 거죠!”

샐리도 호들갑에 동참했다.

나는 붕붕거리는 두 강아지 수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대신 품 안의 초콜릿 상자와 전단지를 꼭 끌어안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진짜, 공작님의 흑마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공작성에서의 배웅을 끝마쳤으니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시녀들이 단장해 둔 덕분에 깔끔하기는 했지만 언제나처럼 단출했다.

반대로 공작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깔끔하게 칼 선이 잡힌 감청색 제복에 반짝이는 어깨의 수술, 화려하게 세공된 묵직한 검까지. 자유롭게 입은 나와 달리 정반대로 의장을 잘 갖춘 공작님의 모습이 유독 대비가 되었다.

그렇게 다가온 공작님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몸을 아래로 살짝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공작 각하.”

나는 활기차게 고개를 꾸벅 기울여 인사했다. 그러나 공작님은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품 안에 그 전단지는 뭔가요, 아스텔?”

……나는 전단지를 조심스럽게 뒤로 숨겼다.

너무 완벽한 모습의 공작님과 달리, 발모제 전단지를 돌리는 지금 내 모습은 조금 구질구질하달까…….

하지만 나는 씩씩하게 대꾸했다.

“아아, 저 돈 벌어야 하니까요!”

“돈…… 말입니까.”

돈을 벌기 위해 나와 있다는 말에 공작님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이 짧았다. 공작님도 자기 가문의 손님이 전단지나 돌리고 있는 건 싫겠지. 무려 후견 명목으로 데려온 건데.

나는 얌전하게 말했다.

“네. 시, 싫으시면 오늘만 할게요.”

그러나 공작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혹시 누군가 아스텔에게 돈을 요구합니까?”

무언가 짐작하는 게 있는 듯한 의심 가득한 낯이었다. 한층 더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우뚱 기울였다.

“아니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아요.”

한껏 발랄하게 말했는데도 공작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만약 누군가 돈을 요구한다면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아하하…….”

공작님은 말 위에, 나는 말 아래. 공작님이 몸을 더 아래로 기울였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었다.

곧 내 이마 위에 입술을 맞춘 그가 낮게 속삭였다.

“위험하니 수도로 함께 가고 싶지만, 아직은 수도까지 데려갈 때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각인 문제도 문제지만, 수도로 같이 가서는 안 됐다. 오빠가 비밀리에, 공작성으로 아이를 데리고 찾아올 테니까. 그때 내가 이 성에 없어서는 안 된다.

물론 공작님에게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지만.

나는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텔레포트 팔찌도 있고, 영상구도 있어요.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는걸요.”

공작님이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럼요.”

내가 높이 팔을 들어 올리자, 그가 내 손목을 손끝으로 훑으며 든든하다는 듯 만족스러워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걸까, 하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틈도 없이 공작님의 보좌관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들어서 그를 막아 세웠다.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떠올랐다.

“……이건 무사히 귀환하시라는 의미로 드리는 선물이에요.”

나는 공작님을 향해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내밀며 작게 웃었다. 내가 먹으려고 산 거지만, 왠지 충동적으로 공작님께 드리고 싶어졌다. 공작님은 아직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만 이건 겸사겸사, 우리 조카가 돌아왔을 때 잘 봐 달라는 뇌물이기도 했다.

“공작님도 돌아오실 때 맛있는 거 사 오세요, 꼭.”

그런데 이상했다. 포장지를 바라보는 공작님의 표정이 조금, 슬퍼 보였다.

아니, 벅찬 걸까?

골똘히 생각하며 공작님과 눈을 맞추고 있는데, 그가 내게서 초콜릿 상자를 받아 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돌아올 때…….”

“네?”

“쇼콜라티에와 초콜릿 가게를 사 오도록 하겠습니다.”

초콜릿을 더 사 와 주시다니, 엄청 감동스럽다.

“네!”

아니, 잠깐만.

……초콜릿 사 온다고 하셨던 거, 맞겠지?

아나이스 공작님이 흑마 위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나는 공작님의 위용에 새삼 놀라면서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가 멀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오른손으로 왼쪽 심장을 꾹 눌러 보았다.

이상해.

꼭, 귀가 너무 먹먹한 것 같은 느낌이…….

‘여전히 각인 상태가 불안정한가?’

그래도 그동안은 친밀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걸까.

하지만 공작님은 언제 봐도 의중을 알 수 없는 흑막다운 얼굴이라서 경계심을 아주 놓을 수는 없었다.

요약하자면, 전형적인 잘생긴 미남 악당상.

‘……얼굴만 보고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 * *

나는 자그마한 초콜렛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초콜릿 케이크를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텔 님! 어서 오세요. 다시 들어오셨네요?”

“아, 네. 초콜릿 케이크 고르려고요!”

“여기 카탈로그도 보시면서 편하게 고르세요.”

“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가게의 주인인 릴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통 있는 초콜릿 가게는 수도까지 가서 쇼콜라티에 자격증을 따 온 릴리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오늘도 보라.

나는 내 등 뒤로 들어오는 건장한 사내를 힐끔거리며 속으로 웃었다.

“아, 아, 아, 안녕하십니까. 초, 초, 초콜릿 하나 포장 부탁드립니다.”

“아, 네! 술 베이스 초콜릿이시죠? 또 오셨네요, 월렛 님.”

커다란 꽃다발을 숨기며 쭈뼛거리는 대머리 남자 하나. 키가 크고 얼굴도 잘생긴 데다, 금안이라 화려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완전한 쌩 대머리에 타투를 박은 과감한 스타일이었는데, 태도가 너무 뻣뻣하고 어리숙해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외양도 외양이었지만, 무엇보다 추운 북부에서 대머리를 보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 시선이 갔다.

관찰을 마친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린 채 카탈로그를 확인해 보았다.

물론, 듣고 싶지 않아도 귓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수, 술 베이스요. 네, 네, 넵. 그, 그걸로 주주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횡설수설했다.

“네, 포장해 드릴게요. 요즘 초콜릿 사러 자주 오시네요. 양치를 자주 하지 않으면 이 썩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릴리는 프로였다.

“매, 매, 매분 매초 이를 닦고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아하하하!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요.”

카탈로그를 접고 유리 진열대 속의 기성품 초콜릿 케이크들을 관찰하던 나도 속으로 웃었다.

‘뭐야, 둘이 너무 풋풋하고 귀엽잖아.’

쇼콜라티에 릴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마을에서 인기가 많았다.

저 남자 역시 릴리를 마음에 둔 듯싶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이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나는 카탈로그에 있는 ‘초콜릿 팩토리 모양 케이크’를 가리키며 릴리를 넌지시 불렀다.

“릴리, 저 여기 있는 초콜릿 케이크 주문할게요.”

“네! 아스텔 님은 초콜릿 팩토리 케이크시고, 월렛 님은 술 베이스 생초콜릿 포장이요.”

릴리는 빠르게 손질을 끝냈다.

덕분에 월렛과 나는 동시에 초콜릿 가게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힘찬 발걸음으로 나왔지만, 곁에 있는 월렛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힘이 빠진 모양새였다.

“아아…….”

저 커다란 꽃다발은 분명 릴리의 것일 텐데.

그걸 주지 못하고 나오는 것이니, 분명 좌절할 만도 하겠지.

월렛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바깥으로 나오던 그의 몸이 덜덜 떨리더니 급기야 빙판에 우당탕거리며 넘어졌다.

‘혹시 고백할 결심을 내지 못한 여파인가…….’

그가 넘어짐과 동시에 도로록, 소리와 함께 그의 옷 안에 있던 조그마한 네모 상자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기, 여기요!”

그 네모난 상자들을 주워들자, 갑자기 제각기 반짝이는 빛을 냈다.

‘잠깐만, 혹시 이거…….’

빙판에서 급히 일어선 월렛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게서 네모 상자들을 받아 들었다.

“고맙소. 제, 제기랄. 내가 머리털만 조금 더 많았어도, 용기를 내었을 텐데……!”

타투까지 했길래 자의적 대머리인 줄 알았는데, 타의적인 거였나…….

그런데 잠시만…… 타의적 대머리에 아티팩트까지 있다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눈시울을 붉히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갔다.

“저기요.”

“예?”

“그거 혹시 아티팩트인가요?”

“아아, 맞소. 다 허가받은 거요. 직업이라. 문제 될 건 없으니, 그럼 이만 가 보겠소.”

나는 그의 처량한 뒷모습을 보면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전단지를 꾹 움켜쥐었다.

‘저 사람 혹시…….’

북부령, 대머리, 허가받은 아티팩트, 직업.

아직 그 무엇도 확실한 건 하나 없지만 말이다.

방금 막 만에 하나, 라는 가정이 떠올랐다.

“저기요!”

나는 급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 머리카락 말이에요.”

“……내 머리카락이 왜요.”

그는 내가 말을 걸자마자 울컥하여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의 장점을 줄줄이 읊어 나갔다.

“……일어날 때 머리카락을 굳이 치우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오! 이보시오, 듣고 있소?”

사실 발모제라는 미끼를 물고 찾아오는 이들 중에 아티팩트 감정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 중 누가 내가 찾는 자인지 어떻게 구분해 낼까 고민했었다.

나는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눈앞의 이자가 내가 찾는 아티팩트 감정사가 맞을 수도 있으니까.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방법이 있는데.”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방법?”

“네. 공작성의 인간 치료사, 아스텔. 세간에는 머리를 심으려면 그자를 찾아가라는 말이 있죠.”

……조금 발연기였을까?

“진심이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다니까요.”

“이 몸도 풍성해질 수 있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 앞에서 아스텔의 이름을 대고, ‘자라나라 머리머리’를 찾아오십시오.”

지금 당장 그에게 발모제를 주지 않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의 신분을 확실히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외부인이 공작성에 들어오려면 까다로운 신분 검증 절차를 거쳐야 했다.

‘확실히 이 사람이, 카시언조차 찾지 못했던, 그 유명한 아티팩트 감정사인지는 모르는 거니까.’

내 눈보다는 공작성의 검증 절차를 믿는 게 나았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풍문은 들어 본 적 있소. 머리가 난다니, 그것참 영 사기일 줄 알았는데! 그 어떤 마법도 머리를 풍성하게 해 주진 못하잖소!”

월렛은 사기를 많이 당해 본 듯 입으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나는 믿음직한 눈빛을 한 채 그를 향해 말했다.

“샘플을 준다니까, 한 번 실험해 보시면 되죠. 참고로 ‘자라나라 머리머리’는 수량이 몇 개 없는 한정판이랍니다.”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했다. 월렛의 얼굴이 엄청나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고대하던 방문 소식을 들었다.

“너구리 수인이 한 명 찾아왔어요. 신분을 탐지해 보니, 일단은 아티팩트 감정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던데요……. 신분은 확실해서 승인할까 하는데 어떨까요?”

샐리의 말에 나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구리 수인이라, 신분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네, 제 방으로 오게 해 주세요.”

십여 분 뒤, 나는 전날 간절해 보이던 모습 그대로 급하게 찾아온 아티팩트 감정사와 만날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낯으로 내 방까지 들어선 그는 나를 보고 놀란 눈치로 되물었다.

“아니, 뭐야. 당신이 아스텔이었어?”

“네, 여기 맞은편 소파에 앉으세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한 샘플 통을 건네주었다.

“우선 샘플부터 사용해 보시죠.”

“뭔가 사기당하는 기분인데. 아니, 진짜로 우윳빛 크림이군. 마법도 아니고 ……. 허, 참.”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월렛은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내가 건넨 크림을 받아 냈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통에서 약품을 덜어 제 팔 언저리에 슥슥 발라 보았다.

몇 분 뒤.

그의 팔에서 삐죽거리는 솜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짜네! 터, 터, 털이 자라고 있어! 솜털이!”

“네, 맞아요. 이상하게도, 제국의 마법사들조차 머리털이 자라는 마법은 만들지 못했죠. 하지만 전 가능합니다.”

그렇게 속삭이니 정말로 약 파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약 파는 게 맞기도 하니까.

“이것 참, 진실로 털이 자라다니……. 이런 혁명이…….”

월렛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먹을 꽉 쥐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내 돈은 섭섭지 않게 준비할 테니, 넉넉히 주시오…….”

“저는 돈 대신 다른 걸 받으려고 해요.”

“……뭣이? 이 몸 너구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심산이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목숨은 안 되오.”

목숨까지는…… 필요 없는데요?

나는 그를 향해 은여우 수인, 벨에게서 받아 두었던 《마법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만 특이할 뿐, 계약서 조항 자체는 별거 없었다.

서로 원하는 것을 물물 교환 한다.

또한, 이 계약과 아티팩트에 관해 누설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

“아니, 이런 악독한! 거의 나를 노예로 만들려는 계획이군!”

“네?”

노예까지는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한 배에 올라타자고 제안했을 뿐…….

그러나 감정사는 분노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계약서는 노예 계약서잖아!”

나는 계약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다.

그가 가리킨 부분은 계약 내용에 대해 일체의 함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계약에 대해 실수로라도 누설하면 불에 타 죽게 된다니, 그게 노예가 아니고 무어란 말이야, 오호통재라.”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해야 해요.”

왜냐하면 이 계약은 아주 은밀하고 중요하니까.

“말만 안 하면 엄청 좋은 조건일 텐데요. 향후 5년간 ‘자라나라 머리머리’ 무상 제공해 드릴 거예요.”

그는 아티팩트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대신, 반비례하게 명예욕은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저한테 재미있는 아티팩트가 많은데.”

그는 번쩍이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한번 구경이라도 해 볼 수 있겠소?”

곧이어 그는 내 집무실을 신기한 낯으로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정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찍부터 시녀장님께 특별히 부탁을 드려 있어 보이는 아티팩트를 전부 모아 왔으니까.

그러나 집무실 위에 진귀한 아티팩트 여럿을 모아 두었는데도, 그의 눈에는 영 신통찮은 모양이었다.

“별거 없구만, 뭐.”

그는 혀를 쯧, 차며 팔짱을 가슴 앞으로 꼈다.

‘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거의 다 넘어왔는데, 딱 1%만 더 넘어오면 될 것 같은데.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던 바로 그때였다.

그가 집무실 왼편에 얌전히 놓여 있던《아스텔의 행복 다이어리》를 힐끔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허어, 이건 좀 구미가 돋는데.”

“네? 이건 아티팩트가 아니에요. 제 일기장이지.”

그는 진정 너구리처럼 음흉한 눈을 번뜩였다.

“평범한 다이어리라고 우기고 싶은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런 힘이 담겨 있는데…….”

“……?”

“흐음…….”

그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계약 체결하지. 나도 어서 릴리 님 앞에 당당히 나서고 싶으니!”

……조금 다른 방향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너구리를 훌륭하게 낚은 것 같았다.

“제기랄,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냥 계약에 대해서만 말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네, 맞아요.”

“생각해 보면 자라나라 머리머리 제품을 쓴다면 이 몸 너구리는 윤기 있는 털북숭이로 다시 태어날 것이고…….”

“그게 그렇게 좋나요?”

나는 해맑게 말했다.

“허어, 그렇소이다. 그대는 알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가 벗겨지자마자 다들 나를 조롱하고는 하였지. 이빨 빠진 호랑이보다도 더 나약한, 털 빠진 너구리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그는 계약서를 다시 읽고 서명을 하면서도 주절주절 말을 걸었다.

몇 번의 티키타카 끝에 나는 그의 서명을 완벽하게 받아 냈다.

이제 이 너구리는 내가 운항하는 배에 오른 것이다.

자기가 무슨 배를 탔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내 계약서에 내 서명을 했소. 이 내게 맡기고 싶다는 것은 당최 무엇이오?”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브로치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이 브로치예요.”

“으으,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어둠의 아티팩트에 흥분한 감정사가 브로치를 조물거리며 만지작댔다.

“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검술 대회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보름 안에는 되어야 한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반 시진 안 걸리오.”

“그럼 지금 당장도 될까요?”

“그건 안 되오. 장인은 도구를 가리거든.”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리는 거 아니었나?

그러나 월렛이 너무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간단히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를 쳤다.

“일단은 마도구를 좀 가져올 심산이외다.”

“언제쯤 오실 수 있어요?”

“일주일은 안 걸릴 성싶소이다.”

너구리와 나는 양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계약을 마친 뒤, 너구리를 성 바깥까지 나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과연 검잡이가 제대로 낚여 줄까?’

그 역시 샘의 아티팩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내 계획에 훌륭하게 걸려들 확률이 높기는 했다.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면 되니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시 성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내 뒤를 따르던 제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스텔 님, 누가 자꾸 우릴 노려보는 것 같지 않아요?”

“……너도 느꼈어?”

샐리와 제니가 맞장구를 치자 그제야 내게도 위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인들은 감각이 좋으니까.

긴장한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내 시야에 모르는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무척 커다란 키에 기사복까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안절부절못하며 내 시선을 피하기까지!

‘저 남자는 누구지?’

생전 처음 보는, 사나운 인상을 한 건장한 사내였다.

흑발에 금안은 제법 위협적이고 쌀쌀한 분위기를 풍겼다.

‘검잡이를 잡아야 하는 이때, 기사 하나가 내 근처에 나타나다니.’

마음 한편에 경계심이 삐죽 솟아올랐다.

나는 그를 노려보면서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한편 다가오는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 기사 리트로 경은 제 주군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나이 올해로 서른.

열 살 때부터 선대 공작 각하를 모시며 마물 전쟁 등에 참전해 온 잔뼈 굵은 수인 기사로, 차기 기사단장 작위까지 노려볼 만한 공작성의 인재였으며 동물 형태일 때는 표범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사인 그의 별칭은 ‘범죄자의 판결 검’.

실제로 그는 공작성 내외부에 존재하는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처리하는, 경찰 같은 노릇을 했다.

물론 오늘도 대도둑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이보르’라는 흉악범의 전단지를 품에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경찰 노릇을 할 때가 아니었다.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인간인 아스텔을 잠시 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잠복한 것이니까.

그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보았다고 자신하나, 사실 오늘만큼 덜덜 떨리는 날이 없었다.

‘그대가 있으면 감히 아스텔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확실히 리트로의 위치는 기사단 내에서도 특출났다.

어린 나이부터 스무 해 넘도록 마물 전쟁에 뛰어든 공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겁낼, 험악한 얼굴도 제법 마음에 들고.’

그 말을 할 때 주군의 모습은 절대 정상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알던 원래의 공작도 제정신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리트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에게 건넨 공작의 마지막 경고가 떠올라서였다.

‘아스텔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흑심을 품거나, 명을 거역하거나, 가까이 다가간다면…….’

‘예, 예?’

‘나는 그대를 마물처럼 대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저건 분명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함께 전장을 나가 그가 어떻게 마물을 죽이는지 보았던 리트로에게는 그 협박이 어떤 말보다도 두려웠다.

아스텔의 안전에 대해 논하는 주군의 모습은 전장에서 전략 회의를 하던 때보다 더욱 심각해 보였기에.

‘생각해 보면 마물은, 중성화 수술도 시켰던 것 같은데……. 아, 아니겠지.’

그의 안색이 한결 더 파리해졌다.

제 주군의 공포스러운 경고를 떠올린 리트로 경은 금세 눈앞으로 다가온 아스텔을 마주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누구세요?”

경계심이 반쯤 담긴 목소리였다.

“저는 일주일간 원거리에서 아스텔 님의 호위를 맡게 된 리트로라고 합니다.”

“아아…….”

“다섯 살 때부터 공작 각하를 보필하였으며, 대략 이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내 마물 전쟁에 차출되었던 몸입니다.”

그렇게 소개하면서도 어쩐지 입맛이 썼다.

‘……이분도 나를 그리 안 좋아하실 텐데. 보통 이렇게 소개하면 나를 무서워하곤 하니까.’

그래서였을까.

호위를 부탁하던 아나이스 공작은 리트로의 불곰처럼 사나운 외모를 흡족해했다.

그가 아스텔의 마음을 결코 얻지 못할 외모라고 판단하신 게 분명했다.

하기야 190cm가 넘는 장신에 근육으로 터질 듯한 몸이 위압감을 주는, 잘생긴 호남형의 기사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타입이었으니까.

자신의 외모를 잘 아는 그는 최대한 해롭지 않아 보이게 입가에 미소를 장착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먼 거리에서만 보필할 테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무릎을 꿇는 순간 아스텔이 어색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른 영애들처럼 자신을 두려워하진 않을지.

다른 레이디들보다 더 여려 보이시는데, 날 보고 혼절이라도 하신다면 주군께 징계라도 당하는 건가…….

리트로는 눈을 질끈 감고 그녀가 내민 손 위에 기사의 입맞춤을 했다.

그러나 그의 걱정이 무색해지게끔 아스텔이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이십 년 내내 공작성에 계속 계셨다면……. 네, 좋아요. 안녕하세요, 기사님!”

몹시 반가워하는 반응에 리트로는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꿇고 있었음에도 서 있는 그녀와 눈높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만큼 아스텔이라는 여자는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같이 새알처럼 자그마했다.

지금껏 이렇게 자그마한 사람을 본 일도 없고, 자신에게 이렇게 살가운 여자도 처음이었다.

리트로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기사님보다는 리트로 경이라 편히 불러 주십시오.”

“네, 전 아스텔이에요! 당분간 잘 부탁드려요.”

맑디맑은 눈빛을 띤 채 악수를 하자는 듯 내민 그녀의 손을 그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막상 잡고 나니 맞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불경이다.

만약 이 사실을 주군께서 알면……?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이 청초하고 순진무구한 소녀 같은 여자는 그를 기어이 죽일 모양이었다.

그녀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악수한 손을 꼭 쥐고 몇 번 흔들었다.

“그거 아세요?”

“네?”

“진짜 잘생기셨어요!”

리트로는 전쟁터의 흉몽이자 악귀로 불리곤 했다.

실로 억울한 일이었다.

제 주군인 아나이스 공작이 마물이든 인간이든 감흥 없이 죽이는 잔혹한 성정인 것과 달리, 리트로는 생명 중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잔혹하고 무서워 보이는 근육질 외모 탓에, 미형의 사내인 공작보다 그의 악명만이 국경을 자주 넘곤 했다.

‘다른 놈들이 아스텔 님을 무시할까 봐 일부러 나를 붙여 주신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아스텔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잘생겼다니.

“……아, 아뇨.”

리트로는 반짝거리는 눈빛을 한 아스텔의 눈빛을 받으면서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라도 잘못된 마음을 먹을 시에는 목을 꺾겠다.’라는 아나이스 공작의 경고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전 못생겼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깎아내려야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가?

그도 자신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단번에 목이 꺾여 죽기는 싫었으니까.

그러나 리트로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아스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리트로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위보다는 차라리 마물의 머리를 베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 * *

나는 호위기사 리트로 경과 나란히 걸었다.

리트로 경이 잘생겼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아나이스 공작님이 워낙 귓가에서 천상의 하모니가 들릴 정도의 미남이어서 그렇지, 리트로 경같이 생긴 타입도 내 기준에서는 훌륭한 미남이었다.

사실 내 이상형은 소도둑처럼 듬직하고 우직하게 생긴 상에 가까웠다.

모름지기 남자는 제 가족을 삼시 세끼 안 굶기고 잘 보호하고, 아껴 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실이 아니라 그에게서 검잡이의 힌트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리트로 경은 옆에서 보니 더 미남이시네요.”

“아닙니다! 제 옆모습은 아주 못생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훌륭해 보이는 그는 딱 한 가지,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박한 듯했다.

왜 그럴까?

원래 미남들은 자존감이 좀 낮은 건가?

나는 그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어…… 티타임이라도 같이 할까요?”

“……아, 안 됩니다.”

“호위 기사는 처음 가져 보는데…… 시녀와 달리 호위 기사와는 티타임을 함께 가지면 안 되나 봐요.”

그가 내 시무룩한 목소리를 느낀 모양이다.

리트로 경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리고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마시겠습니다, 차. 티타임 좋아합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차 마시겠다는 말을 저렇게 웅장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정말 차 좋아해요?”

“그럼요!”

“그러셨군요. 귀여운 취미네요!”

나는 그를 향해 맑게 웃으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자존감이 낮은 분이니까, 칭찬을 많이 해 주면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나는 그가 내 호위를 해 주는 동안 칭찬을 마구마구 퍼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귀여운 취미라고 띄운 것도 귀엽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계산에서 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다행히 티타임 준비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에서의 한가로운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리트로 경과 함께 공작성 본채에 들어선 내가 시녀들을 향해 ‘티타임을 가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난 지 딱 10분이 지나서였다.

정원 옆에 자리 잡은 새하얀 원탁에 예쁜 의자 한 쌍이 마주 보게 놓였다.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트롤리 위에 홍차와 애프터 눈 티를 위한 다과를 올려놨다.

내 앞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의 리트로 경이 앉았다.

‘이제부터 기사단 내부 분위기 취조, 시작한다!’

나는 딸기 향이 나는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행복하게 웃었다.

“딸기 홍차 정말 맛있지 않나요! 그, 그러고 보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하하, 십시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그의 근육질 몸을 감싼 딱딱한 등껍질 같은 갑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몸을…… 떠세요?”

그는 지금 이 순간 춤을 추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세상 무서울 게 없을 듯 강력해 보이는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유약하게 떨고 있는 걸까.

그는 내 의문에 대답하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같은 천것이 감히 마주 앉아 마셔도 될지…… 싶어서요.”

장난이지?

난 평민이고, 그쪽은 위대한 아나이스 공작가의 기사인데.

그러나 정말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훤히 보였던 것이다.

진심인 것 같긴 한데…….

‘아니, 천것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단어 선택인데.’

쇤네, 천것, 상놈, 뭐 이런 건…… 우리 할아버지 때나 쓰던 고대 평민들의 어휘 아닌가. 그걸 왜 공작성의 기사로 명망 있는 분이 스스로를 지칭하실 때 쓰는 걸까.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리트로 경은 자존감이 많이 낮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까지도 언젠가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 동정심이 일었다.

“저기, 제가 많이 불편하세요?”

“아, 아닙니다!”

그가 바로 부정하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그 말과 행동은 전혀 달랐다. 반쯤 일어나 몸을 앞으로 굽히다, 당황한 그의 투박한 곰손이 실수로 찻잔을 쳤다. 커다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찻잔이 엎질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주변에 있던 시녀들이 빠르게 다가와 깨진 찻잔의 조각을 치워 주었다.

무한 칭찬, 무한 우쭈쭈로 열심히 잘 보여서 기사단 내에 숨어 있다던 검잡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는데…….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지?

괜히 그 모습이 수상쩍어 보이기까지 했다.

* * *

리트로는 미칠 노릇이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아스텔은 그에게 ‘귀엽다’라느니 ‘미남이다’ 라느니 하며 그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척박한 겨울 같던 그의 마음은 봄바람이라도 부는 양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하나 문제가 있었다.

‘흑심이라도 품으면 나는 사망이다!’

자신이 잔디에 깨트린 찻잔이 시녀들의 손길에 치워지는 걸 보면서 리트로는 눈물을 머금었다.

왠지 지금 저 산산조각 난 모습이 제 미래가 될 것만 같아서.

애써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는데 아스텔의 곁에 있던 싸늘하기 짝이 없는 시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 역시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감히 우리 아스텔 님께?’ 혹은 ‘흑심이라도 품으면 바로 낭심을 없애 주지’라는 표정이었다.

“하…….”

이 와중에 순수한 아스텔은 그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건강이 안 좋으신가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는 것도 괜찮으니…….”

그 말에 리트로는 다음 티타임은 있어서 안 된다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그, 구,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금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기사들을 진심으로 동경하는 듯한 아스텔의 순수한 눈망울에 리트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제가 검술 대회의 전담 치료사가 되었거든요, 기사님.”

아스텔이 결코 다른 꿍꿍이가 있으리라 의심받을 일 없는 무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기사님들 중에, 갑자기 무언가가 바뀐 분이 있다거나, 이상한 조짐을 보인다거나 하면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스텔은 흉계를 숨긴 채 후후, 웃었다. 리트로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핑 테스트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죠?”

“아, 네!”

사실 도핑 테스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렇다면, 그런 자들이 있나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스텔이 눈을 반짝이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감사해요!”

“그, 그, 이, 이러시, 시면 안 됩니다.”

그가 급하게 손을 등 뒤로 물리며 말했다.

“분부하신 것은 최,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리트로가 양 뺨이 시뻘게질 정도로 크게 당황한 것과 별개로 아스텔은 뿌듯했다.

아티팩트 감정사도 얻고, 기사단 내부에 프락치도 하나 얻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 프락치가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 복병이었으나…….

아스텔은 급할 것 없이 가벼운 스몰 토크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기로 했다.

“리트로 경은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세요?”

“보통 마물을 토벌하거나, 수도 경비대의 대장과 협업해 큰 범죄자를 잡아내고는 합니다.”

“큰 범죄자라…….”

“네! 지금은 공작성 근처를 헤집고 다니는 강도단을 잡는 일을 하다가, 이쪽으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FM의 태도로 그가 말했다.

강도단을 잡을 정도라면, 이 북부 전체에 걸쳐 아주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스텔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에 아주 쏙 드는 좋은 호위 기사가 생겼다.

* * *

한편, 아나이스 공작은 수도에 올라와 있었다.

황제와의 만남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아나이스 공작가와 황가는 불편한 공생 관계였다.

황제는 평소 지금의 아나이스 공작에 대해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맹수 수인이라고만 알고 있지 정확한 종족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는 데다 그밖에도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은 자였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푸른 벽안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종종 수풀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맹수같이 느껴져서 등골이 찌릿해지고 입맛이 썼다.

마치 한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물어뜯기기 직전의 초식 동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저뿐만이 아니라 후계인 황태자까지도 공작에 대해서만큼은 날이 선 태도를 보였다.

‘폐하, 북부의 그자들은 필요악입니다.’

‘마물을 없애 줄, 우리의 방패이기도 하지.’

‘하지만……. 수인들의 세력이 황권에 위협이 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요.’

황태자가 그를 구슬리지만 않았다면, 황제는 진즉에 공작령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정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태자의 부추김을 듣고 보니 확실히 공작에게 지금보다 더 큰 권한을 주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견제할 방도 역시 확실치 않았다. 고민하는 황제에게 황태자는 제안했다.

‘우선 혼사를 통해 우리의 아래로 굴복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를 내 사위로 들이자는 말이냐?’

‘예. 아나이스 공작은 미혼이니까요.’

‘혼담은 대대로 괜찮은 거래 방식이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계책이었다.

제국의 2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데다 그만 포섭한다면 북부 자치령의 이종족들을 다시 제국의 관할로 둘 수 있을 테니.

그렇게 황제가 포부를 키우던 중, 아주 오랜만에 그와 아나이스 공작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오후, 황제궁의 거대한 정원 안.

황제와 공작은 차 한 잔조차 사이에 두지 않은 채 건조한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장미 기사단을 토벌대에 완벽하게 합류시켰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다지 감사하지 않은 표정의 아나이스 공작을 힐끔거리던 황제가 금일의 본론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내 방계에서 수양딸을 하나 들였는데.”

본래 제국의 황녀는 다섯 살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황궁 내 납치 사건으로 시체조차 찾지 못하면서, 황후와 황제는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잃은 황녀를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사는 중이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황녀를 잃은 후 황궁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황태자가 있으니, 황족을 더 늘릴 생각은 없는 듯하였는데…….

십여 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황제는 새로운 황녀를 맞이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물론 공작에게는 별로 관심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공작은 느긋하고 무심하게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경하드립니다.”

그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던 황제가 직설적으로 운을 띄웠다.

“……혼기가 막 찬 아이이지. 북부에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더군.”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 역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혹시 모를 혼담은 미리 거절하겠습니다.”

“잠시 생각해 볼 의사조차 없는 건가.”

황제가 심기 불편한 티를 냈다.

“우아한 수도의 황족으로 살다, 북부 야만인들과 함께한다면 괴롭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상대를 배려해 주는 척 말을 돌려 했으나, 결국 절대 혼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황제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 없는 결혼이 될 테니, 그 말은 접어 주십시오.”

덧붙여 오는 말에 눈치가 유달리 빠른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원체 무른 사내는 아니었으나 결혼 이야기에 유달리 냉정하고 차가웠다.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아직 확인을 해 본 바는 없었지만, 별다른 첩보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치고 빠질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공작을 향해 물었다.

“하면 내일 모레 있을 궁정 회의 때에 보지. 남은 시간 수도에서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그래?”

“초콜렛 가게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공작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 거친 음성에 황제는 흠칫 놀랐다.

배포가 넓은 제 자식과 달리 그는 간담이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무언가 아나이스 공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초콜릿 가게?”

느릿하게 흘러나온 물음에 공작이 눈을 내리깔고 픽 웃었다.

“예, 폐하.”

“공작이 초콜릿을 좋아했던가?

단것은 입에도 안 댈 것처럼 보여서, 라는 말은 입 안으로 숨겼다. 그럼에도 황제의 표정에 떠오른 물음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부터 좋아할 생각입니다.”

“흠…….”

자세를 고쳐 앉은 황제가 고개를 까딱였다. 독대 시간이 슬슬 끝나 가고 있었다. 다음 순서는 율리안 궁정백의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이 시간쯤 되었을 때 황녀를 불러다 둘만의 티타임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추후 궁정 회의 때에 뵙겠습니다.”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군.”

반쯤은 불쾌감을 담아 말했으나, 아나이스 공작은 상대의 감정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정갈하게 단답할 뿐이었다.

“예.”

“……다음 기회에 다시 독대하지.”

공작은 몸을 일으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독대실을 빠져나가는 공작의 우아한 뒷모습을 보던 황제가 팔짱을 꼈다. 자칫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뻔했으나 무언가 달랐다. 언제나 무심하고 느긋했던 공작에게서 미미하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황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나이스 공작의 태도를 보아하니 남이 주선하는 식의 인위적인 만남은 글렀다. 하기야 젊은이들이라면 자연스러운 만남을 더욱 선호하는 법이다.

‘황녀와 공작의 혼담은 최대한 빨리 추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지.’

‘어째서이냐?’

‘제국에 무릇 수인들을 동경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니까요. 게다가 제국법을 피하고자 자치령인 북부로 넘어가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전에 우리의 우군으로 만들어야겠구나.’

‘예. 그렇지 않으면 모두 적이 될 테니 말입니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이니만큼 일단은 우군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황녀와 공작을 어찌 자연스레 맺어 주어야 하는가.

황제의 미간이 깊은 근심을 그득 담고 찌푸려졌다.

* * *

수도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렀다.

황제의 짐작대로 아나이스 공작의 하루는 분주했다.

그는 밤낮 가리지 않고 수도의 최신 문물을 확인하느라 다소 과로한 상태였다.

‘왜 수도의 것을 가져올 생각을 못 했지.’

아스텔은 수도 출신이니 수도의 발전된 문물이 없다면 공작성에서는 심심해할 게 뻔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황제궁 복도를 지나쳤다.

황제궁을 빠져나오며 그는 꽤 많은 이들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인사를 마치고 모두 꽁지 빠져라 도망가긴 했지만.

그다지 개의치는 않았다.

분위기도 환기하고 적당히 휴식할 겸, 그는 느긋하게 황궁에 조성된 산책로를 걸었다.

고작 산책을 할 뿐인데도 양 뺨에 열이 오르는 까닭은 피로한 탓일까, 아니면 혹시 지난번처럼 각인의 문제일까.

심장이 뛸 때면 그는 각인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해, 각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아스텔에 대해 염려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스텔 또래의 여자 귀족들이 무엇을 주로 사용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황궁엔 내가 가는 곳마다 인간 하나 없군.’

황궁을 오가는 귀족들에게 제 악명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인간과 동일한데.’

아마 마물 전쟁의 악명 때문인 모양이지.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슬프게도 언제부터인가 그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모두 폐허가 되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까딱한 뒤 입매를 느슨하게 풀어 보았다.

물론,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어 봤자였다.

산책 중 운 좋게 인간의 형체라도 보고 눈을 맞추면, 모두 뒤꽁무니를 뺐으니까.

하여튼 산책은 글러 먹었다고 생각한 그는 곧장 금일의 일정을 재차 점검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수도의 문명화된 사업을 차근차근 되새겨 보았다.

생각하다 보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쇼콜라티에부터 초빙하는 게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일정.

안 그래도 오늘은 귀족 레이디들이 살롱을 대신해 모일 정도로 유행이라는 수도의 가장 유명한 디저트 카페 《무드 쇼콜라》를 인수할 예정이었다.

커다란 유리 벽 앞에 선 그는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매달아 보았다.

《무드 쇼콜라》라고 써 있는 디저트 카페의 간판 아래,「한겨울의 키스보다 달콤한 초콜릿」이라는 카피가 붙어 있었다.

겨울의 키스와 초콜릿이라니.

북부와 잘 어울리는, 꽤 로맨틱한 무드가 아닌가.

난생처음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며 그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 * *

바로 그때, 무드 쇼콜라 디저트 카페 내부.

친목을 다지기 위해 카페에 모인 어린 영애 셋은 닥쳐 올 미래를 모른 채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갓 데뷔탕트를 끝낸 영애들로, 지금 인생 최대의 이슈가 자신의 호위 기사를 정하는 일이었다.

호위 기사와 관련된 대화에서는 현재 수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기사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법.

“카시언 그레이 경은 그 누구도 호위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아쉬운 표정을 지은 영애가 포크로 케이크를 푹, 찔렀다.

“네, 그렇대요.”

“설마하니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는 걸까요?”

밀빛 머리칼을 한 영애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다른 영애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요. 카시언 경은 수도의 꽃인걸요? 공공재여요.”

“그럼요. 만나는 레이디에게마다 다정하시지 않아요?”

한 영애가 음흉하게 웃었다.

“다정뿐인가요?”

그녀는 테이블 옆에 비치된 가십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사와 레이디》이번 호 보셨어요?”

세 명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십지 쪽으로 내려앉았다.

가십지에는 ‘카시언 그레이’와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냈다는 어느 평민의 익명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그 가십지에서 마음에 쏙 드는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바로…….

“그렇게나 절륜하다잖아요!”

……‘절륜’.

아직 나이가 어린 셋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세상에…….”

그가 밤에는 어떻게 돌변하는지, 이렇고 저렇고…….

가십지 속에는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가 있었다.

“……진정해요, 우리.”

그들은 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 레이스 부채를 연신 부치며 달아오른 분위기를 식혔다.

카시언 경에 대한 이야기로 흥을 돋우었으니, 이제 슬슬 수도를 강타한 화제로 대화를 돌릴 차례였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어떤 얘기요?”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수도에 방문하셨다면서요!”

실상 대부분의 수도 귀족들이 아나이스 공작을 두려워하며 대면하기를 피하는 것과 별개로 그로 인해 수도는 연일 떠들썩했다.

단순히 아나이스 공작이 수도를 찾은 것에 대한 이슈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에 대한 소식도 함께였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방계 출신 일반 귀족에서 황제의 양딸이 된, 새로운 황녀였다.

“황녀 전하와의 결혼을 위해, 공작께서 수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여요.”

사실 황제가 공작에게 결혼 제의를 하기도 전에, 황태자는 이미 사교계에 소문을 은근히 흘려 둔 상태였다.

혼담을 위한 간략한 물밑 작전이었다.

“세상에나, 진짜인가요?”

“네,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사와요.”

제국 최고의 신데렐라.

외가 쪽에 황족의 피가 있기야 하지만, 그래 봤자 자작 가문에서 나고 자란 영애가 하루아침에 황녀가 되었다니!

처음에는 모두가 촌뜨기 자작 영애라며 은연중에 멸시했으나, 데뷔탕트 무대에서 그녀를 본 이들은 더 이상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새 황녀는 지나간 자리마다 꽃이 깔리는 듯하고, 모든 움직임마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황녀라면 출신 관계 없이 강하고 우아한 아나이스 공작과도 분명 잘 어울릴 것이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럼 모든 것을 가진 분이 되시겠네요!”

어린 영애들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제국 최고의 미인과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맹수라는, 공작의 만남이라니.

공작과 황녀, 둘 다 워낙 미스터리한 인물들인지라 그들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세간에 도는 두 사람의 소문을 주제로 한결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유리창에 가장 가까이 앉았던 은발의 영애가 갑자기 앞니를 딱, 딱 부딪혔다.

“……제가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예?”

그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통유리로 된 문이 열리면서, 직전까지 대화의 주인공이었던 ‘아나이스 공작’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갈한 구두 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아름답다, 생각하기도 전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하고 로맨틱한 귀족 영애들의 모임 장소.

그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악신의 사자가 강림한 모양새였다.

꿀꺽.

본능적으로 긴장한 셋은 동시에 침을 크게 한 번 삼켰다.

한편, 디저트 카페에 들어선 아나이스 공작은 자신이 분위기를 꽁꽁 얼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내부가 춥고 조용하다 여겼다.

그는 카페의 카운터에 있는 젊은 주인이자,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쇼콜라티에에게 간단하게 묵례했다.

“인수 계약을 맺으러 왔습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쇼콜라티에가 공작의 얼굴을 알아보고 굳었다.

“미스터 에반, 이라고 드, 들었는데요.”

아나이스 공작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그에 대해 아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보좌관 이름이 에반이었던가. 공작이 삭막한 태도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 공작가의 우등 보좌관 이름으로 계약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아, 예. 예…….”

누가 알았겠는가. 고작 디저트 카페 매매를 위해 공작이 직접 도착할 줄이야.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곧이어 주인이 덜덜 떠는 손으로 건넨 계약서를 받아 든 그는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주인이 작게 샘플링된 초콜릿 조각 하나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 살짝 잇새로 넣고 깨물었다. 쌉싸름한 첫맛이 지나자 이내 깊고도 달콤한 향이 미각을 지배했다. 그는 혀끝이 달다 못해 아릿해질 정도의 단맛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이런 걸 좋아하는군.’

그는 그렇게 아스텔의 취향을 차곡차곡, 하나씩 알아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미몽에 잠긴 그는 거침없는 손길로 계약서에 서명을 마무리했다.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약서는 한 장씩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하지요.”

“아, 예.”

“내가 북부로 갈 때, 그대도 함께 가는 겁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이미 사전 약속이 되어 있는 계약이었기에, 짧게 마무리되었다.

그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뒤돌자마자 그의 시야 안에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보였다.

나이는 열여덟에서 스물 정도.

데뷔탕트를 갓 치른 듯한 행색이니 다들 아마 아스텔의 또래일 터다. 수도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머리에 새하얀 꽃을 묶은 형태인 코르사주를 꽂고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진즉에 무심히 지나쳤을 모습이었으나, 그는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자리에 모인 세 영애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털썩.

영애 하나가 가십지 《기사와 레이디》를 바닥에 떨구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펼쳐 두었던 페이지는 카시언 그레이가 ‘절륜하게’ 등장하는 구간이었다.

그 소란에 곁을 지나치던 아나이스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원래도 차가운 인상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인간보다 시력이 좋았다.

‘수도의 꽃, 카시언 그레이 경의 절륜한 정력?’

‘단독 인터뷰 – 그이와의 황홀한 밤’

그가 살기 가득한 무표정을 한 채 다가와 가십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카시언 그레이의 절륜한 정력이라.”

가십지를 떨어트린 영애 하나가 히끅거렸다. 딸꾹질 소리에 그는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마물 전쟁만 해 온 데다 북부의 성에만 박혀 있어서인지, 이만큼 어린 인간 여자는 아스텔을 제외하고는 몹시 오랜만에 보았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어린 영애를 응시했다.

“진정하십시오.”

안타깝게도 역효과였다.

아나이스 공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영애의 머릿속에 공포가 엄습했다.

안 그래도 카시언 그레이 탓에, 그의 눈빛에는 전혀 부드럽지 않은 살의가 일렁이고 있었다.

“히, 히끅.”

그래서인지 평소와 같은 벽안이 아닌 동공이 가늘어진 짐승의 눈처럼 보였다.

아까보다 더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공작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 쉬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수도의 꽃…….”

“예, 예.”

그의 시선이 다시 가십지에 내리꽂혔다.

“지나치게 절륜하다는 말이 수도 신문에 오를 정도라.”

덤덤하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기사 앙케이트 - 낮에는 다정하고 밤에는 절륜한 카시언 그레이 경이 이상형 1위!’

낮에는 다정하고 밤에는 절륜하다?

그는 이를 으득 갈며 가십지를 주워 들었다.

“이 가십지.”

“……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영애들은 시선을 교환한 뒤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짐승이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마 환청일 것이라, 다급하게 현실을 외면하면서.

* * *

이튿날, 아나이스 공작은 예정되어 있던 궁정 회의에 참여했다.

금일의 회의는 과한 격식을 차리기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공작이 이끌 마물 전쟁에 관한 안건은 빠르게 끝났다.

그 후, 제국 서쪽에 위치한 마탑 마법사들에게 돌아가는 예산을 삭감하자는 안건이 등장했다.

“예산을 삭감해야 합니다.”

“옳소. 마법사의 힘이 너무 강해서는 아니 되오.”

“뷔에트리 백작가 같은 경우가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 되지요.”

“역적 전원의 목을 효수하고 죽였으니 본보기는 되었을 겁니다. 전례가 있는데 감히 마법사들이 나설 리가요.”

지난날, 반역을 시도했던 제국 최대의 마법 가문 뷔에트리 백작가 수괴들은 성벽에 목이 걸렸다.

시체조차 멀쩡히 남은 자가 없었다.

그리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후에도 지난 십여 년간, 그들을 모욕하는 돌림 노래가 제국 곳곳에 가득 넘쳐 흘렀다.

보통의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지녔던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던 자들을 향한 공포 심리 때문일까.

대마법사의 가문은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혹시 모르니 예산은 삭감하는 것으로 합시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변경백 하나가 발끈해 나섰다.

“마탑에서 반발할 게 뻔합니다. 평범한 마법사들이에요. 뷔에트리 같은 흉악한 역심을 품었을 리가요!”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탓에, 분위기는 과열되었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이도 하나 있었다.

바로 아나이스 공작이었다.

지금 그의 귓가에는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소리 따위 닿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카시언 그레이의 문란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맴돌았으니까.

어젯밤, 그는 카시언 그레이에 관한 가십지를 천천히 정독했다.

[잘생긴 얼굴로 평민부터 귀족까지 모든 여심을 녹인 수도의 꽃, 카시언 경 집중 탐구!]

카시언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이 저급한 가십지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얄밉게 씩 웃는, 카시언의 못생긴 초상화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었다.

‘돈 꼭 줘야 해!’

귀족들의 열띤 토론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아스텔에게 돈을 요구하던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어찼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맹수의 살기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만 하는 궁정 회의 참석자들이었다.

회의장을 채우는 살기에 지친 그들이 결국 논의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이 울상이건 아니건, 공작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짐승의 모습이야 제대로 갈무리할 수 있다지만, 본능적인 기운까지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무표정한 낯을 고수하며 회의장을 싸늘하게 얼린 아나이스 공작은 궁정 회의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바깥으로 나섰다.

회의장에서 빠져나온 그는 바로 근처에서 장미 기사단의 단장, 로파를 맞닥뜨렸다.

“장미 기사단의 단장, 이 로파 쉘린드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예, 예!”

“그럼 이만.”

로파는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는 아나이스 공작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폐하께서 공작 각하께 기사단의 전력을 최종적으로 검수 및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제야 아나이스 공작은 로파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이마에 땀이 샘솟은 것이 보였다.

제아무리 수도의 이단아이자 오만불손한 수인 세력이라 하지만,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제국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시늉 정도는 해야 했다.

‘마물 전쟁의 전력 보강을 위해서라면 미리 기사단의 전력도 확인은 해 두어야겠지.’

공작의 머릿속에 간단한 계산식이 섰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파가 기쁘다는 듯 그를 이끌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각하.”

“들어가 보죠.”

무엇보다 기사단의 전력에는 ‘그자’도 있을 게 분명했다.

카시언 그레이.

“카시언 그레이 경도 안에 있습니까.”

그러나 상대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게……. 카시언 그레이 경은 잠시 질병 휴가를 갔습니다.”

로파가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이스 공작이 짧게 반문했다.

“질병 휴가?”

“네, 네! 아주 건강한 인간인데 말입니다, 참. 시들시들 시금치처럼 바닥으로 축 늘어져서는, 그 녀석이 다시 북부로 갈 수 있을지 모를 정도더군요, 하하. 녀석도 참. 징계를 받아 속상해서 그런가?”

“…….”

건강해지든, 병에 걸리든 카시언 그레이는 이제 두 번 다시 북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 조소하며 아나이스 공작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하하, 또 뭐가 있더라…….”

더 할 말이 없음에도 로파는 연신 부자연스럽게 이마를 손으로 훔쳤다. 아나이스 공작은 장미 기사단의 대련실로 항하려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살랑이는 바람이 로파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말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름 우직하다고 판단했던 이 기사단장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기로 했다.

“로파 쉘린드 경.”

그는 연기를 매우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상당히 수상쩍은 냄새가 날 정도로. 아니면 단순히 거짓말을 잘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그가 자꾸 공작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사, 사생활에 대한 문제라서 말씀드릴 수가 없…….”

“카시언 그레이 경은 마물 전쟁에 차출되어 북부로 올라오게 될 기사입니다.”

그는 어차피 카시언 그레이의 북부행을 막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이 수상쩍은 자가 감추고 있는 것을 들춰 보는 데엔 특효였다.

“그, 그렇죠.”

“내 휘하의 기사가 될 자에 대한 정보는 곧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미리 제게 공유해야만 합니다.”

“그래도 그것은 카시언 경의 사생활이라 조금 곤란…….”

사생활이라는 말에 아나이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알아봐야겠군요.”

그러자 기사단장 로파의 눈망울이 격하게 흔들렸다. 카시언에 대한 소문은 온갖 곳에 다 퍼져 있었다. 그게 다 진실된 정보라면 모를까, 잘생기고 잘나가는 기사를 질투하는 자들이 악의를 섞어 부풀린 게 더 많았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직접 말하는 편이 나았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그게, 사실 명목상으로만 질병 휴가이고 근래 카시언의 개인사가 조금 곤란한 것 같습니다. 가정사, 라고 해야 할까요?”

“가정사?”

그는 카시언의 가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카시언은 고아였으며 제네트 고아원에서 자라 왔다. 거기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고 해 봤자였다. 그러나 로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예. 아무래도 그 녀석이 여자관계가 조금 있는데, 물론 지금까지는 모든 여성분들과 합의하에 깔끔하게 연애를 해 왔지만, 아무래도 좀…….”

공작은 로파의 생략된 말에 담긴 뉘앙스를 가볍게 짚어 냈다.

“요컨대 카시언 그레이가 지금 치정극을 벌이고 있다, 이겁니까?”

“예. 어쩌면 아이도 있는 것 같다는……. 아, 이건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일이죠.”

그는 로파 쉘린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파 쉘린드는 단순히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고로 저자의 입방정이 사실일 확률이 컸다.

왜냐하면 카시언 그레이는 문란하기로는 손꼽히는 탕아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에서 버는 돈도 다 연애에 탕진하는 모양이니, 거참……. 이 녀석, 진심으로 요즘 걱정이 됩니다.”

한마디 한마디 더해질 때마다 공작의 마음속에서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이미지가 다시 깎여 나갔다.

어느 여자에게는 돈을 탕진하면서 아스텔에게는 돈을 요구하다니.

여러모로 수준 이하인 인간이다.

“그래도 각하, 제 휘하의 기사라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 녀석이 꽤 진국이기는 합니다. 게다가 무술 실력도 빼어나지요.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어떤 사고도 친 적 없으니, 이번에도 분명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기대되는군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공작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살기까지 풍기는 낯에 로파 쉘린드가 주춤했다.

그를 뒤로한 채 공작은 종일 짜증을 돋우는 카시언 그레이 대신,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아스텔이 북부에 있는 한, 당분간 카시언과는 만날 일은 아예 없을 테니까 섣불리 걱정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이틀 뒤면 그는 제 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스텔에게 줄 온갖 선물을 가지고.

아스텔에게 카시언 그레이에 대해 단단히 경고도 해 두었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을 향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스텔을 처음 공작성으로 데려오면서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적당히 내리쬐는 오후 햇살 같은, 따사로운 생각들이 그의 뇌리를 덮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때, 카시언 그레이는 병가를 낸 상태로 북부 공작령에 있었다.

제 아이의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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