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1)
사흘 뒤 북부령의 최북단에 위치한 평야. 마물의 땅이라 불리는 얼음 설원과 맞닿은 공간이었다. 추운 겨울을 맞아 마물들이 모두 동면에 들어갔기에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평야에는 기이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의 갑론을박 끝에, 이 평야의 뒤에 있는 야산 근방에 전쟁을 위한 베이스캠프를 만들기로 잠정적인 결론이 났다.
공작은 야산에 임시 막사를 설치하고 잠시간의 고요함을 누렸다. 이마도 지끈거리지 않았고 귀에 이명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배웅 나와 두 뺨을 붉히던 아스텔을 상상했다. 명백히 카시언 쪽을 향하던 시선까지도, 전부 다.
‘신경 쓰이는데…….’
그는 인상을 미묘하게 찡그리며 막사 내의 야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섰다.
“그러니까 공작 각하께서 그러는 것은 처음이라니까.”
“한 순, 순간이겠지. 그런데 진짜 처음 봤어. 그런 표정…….”
먼저 공작을 발견한 기사가 제 동료의 옆구리를 퍽 쳤다.
“야, 야.”
자신과 아스텔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인 모양이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결 좋은 흑발을 넘기며 그들을 일별했다.
“놀라셨나 봅니다.”
아나이스 공작은 무심한 어조로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단언했다.
“앞으로는 더한 것도 보게 될 텐데.”
간략하게 눈짓한 그가 몸을 돌렸다. 기사들은 숨을 들이켰다.
아나이스 공작은 느긋한 산책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공기는 평온했으나 그의 감각은 예민했다.
“야, 저 새끼 잡아.”
공작은 군대의 기강을 잡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하나를 향한 집단의 린치라면 말이 달라지고, 또 린치의 대상이 카시언 그레이라면 두 번 말이 달라진다.
아나이스 공작은 발걸음을 멈춰 그들의 다툼을 관망했다.
“한 대 맞으니 꼴 좋군, 인간 놈!”
“제대로 죽여 줘.”
수인과 인간 사이의 골은 깊었다. 협업해 전쟁을 해야 한다면 저 감정의 골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작이 건조한 생각을 하는 사이, 두 건장한 수인들 사이에 껴 있다 한 대 더 맞은 듯한 카시언 그레이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시언은 제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주먹으로 닦아 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가리 닥쳐, 미친 새끼야.”
카시언은 흉흉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유려한 태도를 유지하던 카시언의 모습이 아니었다. 꼭지가 반쯤 돌아 있었다.
“……우, 우리가 무슨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
“한참 잘못됐지, 개새끼야. 그걸 모르는 건 머리가 없는 거 아닌가?”
수인 기사는 두 명, 카시언은 혼자.
수인 기사 둘이 공작성의 정예인 것을 감안하면 더욱 카시언이 수세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카시언은 두 기사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몸부림쳐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자 그제야 기사들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방관하던 다른 기사들이 웅성댔다.
“저 또라이 새끼……. 완전히 눈 돌아갔어!”
“그, 인간 기사단장 어디 갔어?”
“하여튼 저 카시언 그레이 경은, 여자 얘기만 나오면 민감하다니까.”
또 여자 문제인가.
공작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는 구태여 귀찮은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특히 카시언 그레이의 여성 편력에 관한 문제에는 더더욱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평기사들의 말다툼이야 보좌를 시켜 중재 후 군법에 따라 징계를 내리면 그만이다.
“저 기사들이 말한, 그 여자 이름이 뭐라더라?”
여자 문제가 끊이질 않는 모습에, 그의 내면에서 카시언 그레이에 대한 평가가 한결 더 박해졌다.
순진하고 자그마한 아스텔에게 돈을 뜯으려는 쓰레기는 죽어도 마땅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아나이스 공작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크게 다투느라 공작의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기사가 크게 이죽거렸다.
“그 인간 계집 말이야, 너와 같은 인간이라고 끼고도는 건가? 이름이 아스텔이랬나. 예쁘장하게 생긴 그 계집애 말야.”
몸을 돌리려던 아나이스 공작이 우뚝 멈춰 섰다. 이내 그는 몸을 돌려 저벅저벅 기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공작은 여전히 여상한 태도로 카시언과 두 기사 사이를 갈라놓았다.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해 보였다.
“왜.”
“……가, 각하. 그것이-.”
“말해 봐.”
흉흉한 기세에 카시언과 맞붙고 있던 두 기사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 중 하나가 나와 상황을 정리해서 전달했다. 저들이 먼저 아스텔에 대해 음담패설을 지껄였다고 했다. 인간 계집애가 수인보다 낫다느니 하는 저열한 성적 묘사 몇 개를 들었다.
그 말에 카시언과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카시언 그레이 경.”
카시언은 조용히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제 죗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 새끼들 역시도 처벌해 주십시오. 듣자 듣자 하니, 제 동…… 족을, 모독하는 게 귀가 더러워서 말입니다.”
공작은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한, 초연한 얼굴로 픽 웃었다.
“카시언 그레이 경, 그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수인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 안심한 기색을 하던 수인 기사 둘이 눈을 커다랗게 홉떴다.
“각하……. 이, 인간 따위…… 를…….”
공작은 조용히 입을 열어 수인 기사 둘을 향해 천명했다.
“그대들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모양입니다.”
공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들은 늘 무심하기 그지없던 아나이스 공작의 얼굴에 어린 웃음을 보고 주춤했다.
저건, 마물을 처리할 때나 나오는 삐뚜름한 미소였다.
“내 보호하에 있는 분을 모욕한 것은 감히 나를 모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그것이 아니라……!”
“더 이상 말한다면 쓸모없는 입을, 직접 잘라 드리겠습니다.”
공작이 얼마나 큰 분노를 품고 있는지, 그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던 수하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 후, 수인 기사들은 포박당한 채 동료 기사들 사이로 끌려나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징계를 당했다.
아나이스 공작은 평소처럼 담백하게 모든 일을 진행했다.
아스텔에 대해 함부로 말한 기사들은 이미 기사 목록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고작해야 몇 분 이내, 바로 그 평야에서 빠르고 알찬 응징이 끝났다.
공작성으로 돌아가기도 전, 그들은 공작성의 기사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북부령에서 추방되었다. 당장 공작성으로 복귀할 수도 없게 된 상황이니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다.
모든 처결이 끝난 이후 수인 기사들이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는 카시언과 공작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빠르고 올바른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각하.”
그를 무시하려던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싸운 것은 아스텔 님 때문입니까.”
“……아뇨, 뭐.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을 모독해서죠.”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아나이스 공작이 신사적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정중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정중하게, 라고 말하는 순간 공작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덩달아 카시언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저 새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려는 건가.
“내 피후견인에게 관심 끄십시오.”
“…….”
“당신이 잘하는 거나 하십시오.”
카시언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내가 잘하는 게 뭔데.’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하는 거라면 뭘 말씀하시는 건지요?”
“남들한테 돈 뜯는 거나, 폴리 아모리인지 뭔지 하는 것 말입니다.”
“아…….”
돈 뜯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고, 잠깐의 대면에서 대충 둘러댄 것을 기억하고 있다니, 어지간히 좋은 기억력이었다.
카시언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아스텔은 그런 것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아나이스 공작의 얼굴에 분명한 경계심이 나타났다.
카시언 역시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
그는 베이스캠프를 만들며 대화를 튼 수인 기사들에게 들었던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몇몇 소문을 떠올려 보았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께서 어린 후견인을 데리고 놀고 있긴 하다던데.’
‘그래 봐야 최측근도 매번 바뀌는 분인걸. 보좌관 이름도 기억 못 하신다던데?’
‘공작 저택 내에 도는 소문에도 관심 없고, 권모술수에도 초연하신 분이잖아. 뭐, 금방 관심 사라지시겠지.’
아나이스 공작은 모두에게 무심하고 그 무엇에 대한 욕망도 없다고 했다.
‘그 인간을 각하가 후견하는 것도 그다지 별거 아니겠지. 안 그런가?’
‘만약 공작 각하께서 그 인간을 버리신다면 어떻게 되려나?’
‘흐흐…….’
카시언은 싸움의 발화점이 된 수인 기사의 저질스러운 말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들은 아나이스 공작에 의해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싸움 한 번으로 기사 작위가 박탈되고 공작성의 군법에 따라 처리되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긴 했지만 의아하기는 했다.
애초에 기사들 사이에서 그 정도 멘트는 별것 아닌 수준으로 치부된다. 게다가 인간 혐오가 만연한 수인들 사회이니 인간에 대한 음담패설은 잘못도 아니라고 그냥저냥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공작의 행동은 과하다.
카시언은 입매를 비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좀 과하십니다.”
……만약, 공작성의 수인들이 말하고 짐작하는 것처럼 아스텔이 저자에게 단순한 유희거리가 아니라면?
아나이스 공작이 한 발자국 성큼 걸어왔다.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닿았다.
“예.”
“…….”
“나는 앞으로도 충분히 과하게 굴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답하십시오.”
위험했다.
“아스텔 님에게 연애를 목적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아스텔은 제게 연애 상대가 아닙니다.”
당연하지, 여동생이니까.
이유가 어찌 됐든 카시언의 말 한마디에 아나이스 공작의 입매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 미소에 카시언의 머릿속에는 경고등이 슬그머니 켜졌다.
“그 태도, 영원히 고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저 새끼,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아스텔 님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쉽게 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카시언은 공작의 눈에 어린 소유욕을 응시하며, 기사들이 했던 잡담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공작 각하께서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것 중에 온전했던 것은 없었지.’
‘……대부분 파괴되지 않았나?’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시지.’
파괴.
그런 놈이라면 아스텔에게 이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 불가 명령을 때리지?
갈등하는 카시언을 바라보던 아나이스 공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카시언에 대한 마음속 평가가 ‘여자에게 돈 뜯는 인간쓰레기’에서 ‘자기가 돈을 뜯는 아스텔을 향한 모욕에 대처할 줄은 아는 인간쓰레기’ 정도로 격상되었다고는 해도, 더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건 카시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물론입니다. 그럼 전 이만 곱게 꺼져 보겠습니다, 각하.”
“예, 무사하지 말고 꺼지십시오.”
정중한 듯하지만 서로를 향해 경고성 섞인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으며, 그들은 동시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 카시언은 레이첼에게서 편지를 한 통 더 받았다.
[카시언, 당장 수도로 출발해 줘.]
그러나 카시언은 당장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시일이 걸린다고 답을 하려는데 막사 침대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사단장 로파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카시언이 황급하게 편지를 숨겼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어쨌든 일시적인 근신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네.”
“……그자들이 먼저 무시했습니다.”
“어쨌거나 아나이스 공작이 과도한 액션을 취한 만큼, 이쪽에서도 눈 가리고 아웅 정도는 해 줘야 해. 그러니 일단 수도로 돌아가 있도록.”
카시언은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급히 숨긴 레이첼의 편지를 떠올렸다.
성에 찰 만큼은 아니었지만 복수에 필요한 정보도 꽤 모아 뒀으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그는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리고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로파가 카시언의 얼굴을 보면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미남 기사답게 얼굴에 상처 안 나게 조심하라고.”
그 말은 카시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심각해졌다.
도대체 수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 * *
공작님이 떠난 사이 나는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안전하게 지내고 무리하지 않은 덕분에 열도 오르지 않고 멀쩡했다.
‘오빠는 잘 지낼까, 지금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텐데.’
첼로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고 싶었고, 영상구도 켜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 한 시간, 치료소 출근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평온한 시간을 보내…….
“아스텔 님, 그게 뭐예요?”
……지는 않았다.
샐리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내 손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복수 매뉴얼》을 품에 쏙 집어넣은 뒤 후후, 하고 웃었다.
“뭐게요?”
“글쎄요! 뭘까요!”
샐리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내 손에 든 이것은 바로 아티팩트 감정사를 찾아낼 수 있는 마법의 약물이었다.
아티팩트 감정사.
희귀 직종이기는 하지만, 잘만 수소문하면 실력 있는 아티팩트 감정사를 찾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빼어난 아티팩트 감정사라 한들, 내가 지금 찾으려는 자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그의 능력은 단순히 아티팩트를 감정하는 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분석하고, 파괴하고, 복원하는 일, 심지어는 만드는 일에까지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본인이 모를 리 없다. 그는 자기 재능을 마음껏 뽐내고 다니다 몇 년 전, 어둠의 아티팩트 하나를 감정 중에 파괴하게 된다.
‘아티팩트 감정을 맡긴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할까 봐 계속 숨어 다녔지, 아마.’
……결론적으로, 감정사 쪽에서 먼저 접촉해 오지 않는 이상 그에게 접근할 길은 요원해졌다는 뜻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검술 대회의 치료사가 되지 못했기에 기사단도 확인하지 못했고, 여러모로 상황은 답보 상태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법.
아티팩트 감정사라도 먼저 구해 놓는다면 앞으로의 상황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래서 공작님이 없는 사이, 나는 어딘가 숨어 있는 아티팩트 감정사를 불러내는 묘수를 여러 가지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방법, 돈을 아주 많이 모아서 정보 길드 고용해서 찾아내기.
……이 안건은 돈이 없어서 실패했다.
게다가 원작 속에서 오빠의 유능한 정보원인 레이첼도 실패한 마당에 내가 고용한 일개 정보 길드원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두 번째 방법,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고등급 아티팩트가 있다는 소문을 내기.
하지만 내게는 고등급의 아티팩트라고는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브로치 아티팩트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브로치 아티팩트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최종 흑막이 나를 심각하게 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단 하나 남은, 마지막 방법은 바로…….
……그가 원할 만한 아이템을 직접 개발하기다.
인간인 이상 숨어 사는 와중에도 간절히 갖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마련일 테니.
‘어떤 게 좋을까.’
나는 그 역대급으로 유능하다던 아티팩트 감정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원작 《피의 복수》에서 우리 오빠는 결국 그 아티팩트 감정사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오빠는 그자에 대한 특징을 몇 가지 입수했다. 그러나 그 몇 가지 힌트만으로는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나를 안쓰럽게 보던 샐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저어, 아스텔 님. 산책이라도 가실래요? 정원으로 가서 티타임을 가지면서요.”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그 위대한 감정사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 * *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활기를 되찾은 나는 공작님이 안 계시는 성안을 요리조리 쏘다니며 온갖 소문을 듣고 다녔다.
“무려 오늘 오후에 공작성 내에 외부인까지 초청한 플리 마켓이 열린다고요.”
그 결과 나는 공작성의 수인들 사이에서 열린다는 작은 플리 마켓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네, 그건 그런데…….”
“그 플리 마켓에 저도 참여해도 될까요?”
나는 그동안 아티팩트 감정사를 꼬드기기 위해 꾸며 온 흉계를 떠올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아스텔 님이 그리 선량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우리 수인들의 플리 마켓에 방문하시는 이유는 하나겠죠?”
선량한 미소 아닌데……?
나를 빤히 보던 제니가 눈가를 쓱 닦았다.
“수인들의 행복을 위해서겠죠. 물건을 팔더라도, 돈은 꼭 받으셔야 해요!”
……아닌데, 나 완전 탐욕적인 생각 중인데!
이상하다. 내 얼굴에 혹시 호구라고 써 있나?
어리둥절해진 나는 손에 쥔 약물을 흔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니에요, 이 발모제를 팔아 보려구요!”
내 말에 제니와 샐리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샐리가 먼저, 조용히 물약을 가리켰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발모제냐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발모제를요? 그보다, 모발이 나는 거예요?”
“네, 제가 얼마 전에 발명했거든요!”
“이 발모제도 수인 전용이에요?”
“인간용도 있고, 수인용도 있어요. 여러 개 만들어 두었거든요.”
“……역시 아스텔 님은 우리 수인들을 너무 신경 써 주세요!”
딱히 그렇진 않은데…….
다소 과한 언사에 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쩌다 보니 약간 오해를 받은 것도 같지만…….
“오후에 열리니까, 부스를 신청해 놓을게요! 품목은 발모제로 하면…….”
“아니요, 그거 말구요.”
고개를 저은 나는 제니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곧 제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괜찮은 작명이네요!”
“뭔데, 뭔데요?”
샐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간절히 응시했지만 나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이따가 개봉 박두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미리 만들어 놓은 발모제 열 통을 챙겨서 플리 마켓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공작성 안에 마련된 커다란 운동장.
그 안에는 이 공작성 내에서 지내고 있는, 다양한 직책을 지닌 수인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아스텔 님, 명하신 부스입니다.”
대운동장의 중앙.
금테를 둘러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대한 부스 앞, 시녀장 루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직 아스텔 님을 위해 마련했습니다.”
부스는 루델의 섬세한 손길이 닿은 덕분인지 흙먼지 하나 달라붙은 것 없이 엄청나게 깨끗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용을 자랑하는 부스에 모든 수인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작명 센스로 시선을 끌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겠는데!’
나는 황금을 올려야만 할 것 같은 거대 부스의 가판대에 발모제 통을 하나둘씩 올려놓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무엇을요. 그나저나, 품목 명칭이 특이하네요.”
그제야 시선을 올린 나는 부스의 최상단에 걸린 빨간 배경의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플래카드에는 금박으로 글씨가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자 라 나 라 머 리 머 리 !~
얼굴이 화르륵 불탄 나와 달리 루델이 여유롭게 말했다.
“뜻깊은 날이니, 24K 금으로 글씨를 새겨 보았어요.”
너무…… 근엄한 것 같은데요……?
그러나 다행히 루델이 마련해 준 부스와 내 작명 솜씨는 수인들의 호기심을 유발한 듯했다.
인간 냄새가 난다고 다들 피해 다니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자라나라 머리머리가 정확히 뭡니까?”
“발모제예요!”
“바, 발모제?”
“네, 털에 윤기가 흐르게도 해 줘요!”
수인들은 내 예상보다 호기심도 많고, 털에 관심도 많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날카롭게 쳐다보던 수인들마저 털에 윤기가 흐른다는 말에 내 부스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진짜, 진짜 털이 자라나고 있어요!”
샘플을 사용한 고릴라 수인의 팔에서 미세하게 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인간화를 풀고 원숭이 모습으로 변한 수인은 제 털에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어때요?”
나는 씩 웃으며 그들을 향해 거듭 말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 상시 판매 예정이에요. 대면 판매만 할 거니까, 친구들한테도 많이 소문내 주세요!”
내 목표를 위해서는 그들이 반드시 소문을 뭉게뭉게 퍼지도록 내주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세일즈에 열중했다.
샐리와 제니, 뜻밖에 합류해 준 시녀장 루델 덕분에 화려한 부스로 이목을 끌었더니 발모제는 제법 잘 팔려 나갔다.
‘털에 대해 걱정하는 수인들 덕분에 발모제가 제법 인기가 있어!’
그때 먼발치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내 발명품에 주목한 덕분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활발한 분위기인 걸까.
어쨌거나 공작성 내 소규모 플리 마켓치고 끊임없이 활기가 돌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전염되어서, 나 역시도 즐겁게 웃으려다 순간 멈칫했다.
익숙한 사내가 나를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느물느물한 표정과 회청색 눈동자, 그리고 구불구불하게 떡진 시뻘건 머리까지.
“오랜만이구나, 아스텔.”
과하게 어깨에 넣은 뽕, 가죽 자켓에 징을 박아 넣은 기괴한 차림새를 한 사내가 나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네, 소장님.”
……꿈에 나올까 두려운 저 남자는 바로, 내가 거주하던 치료소 소장님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당당하게 즉답했지만, 내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잘, 지낸 모양이구나, 그래?”
그가 비꼬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매번 나를 괴롭혀 오고, 나를 죽일 듯이 찍어 누르던 수인.
종족인 살쾡이 특성에 걸맞게 나를 협박할 때면 목에서 그르릉대는 무서운 소리가 나고는 했던 자.
무엇보다 지난 3년간 내가 열심히 개발한 신약들을 훔쳐다가 자신이 써먹었던 놈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 * *
아스텔이 덤덤한 얼굴로 답해 왔다.
“네, 잘 지냈어요.”
치료소장, 메일스를 올려다보는 아스텔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공작성 외부 1치료소의 소장 메일스는 공작성에 들어와 보는 것이 목표였다.
그것도 귀하고 높으신 분의 은덕에 힘입어, 공작성의 내부 치료소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꿈이자 목표였다.
그런데 그 목표를 자신의 치료소에서 근무하던 멍청하고 어린 인간 계집애가 먼저 이루어 버리고 말았다.
‘저 계집애가 감히…….’
그러나 괜찮다. 상관없었다.
‘이용하면 되지.’
플리 마켓은 외부인이 공작성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사 중 하나였다.
그래서 플리 마켓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스텔에게 접촉하려 공작성 안에 들어섰다.
그렇게 다다른 이 플리마켓에서도 역시 아스텔 찬양 일색이었다.
“아스텔 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인간이라고 무시했는데…….”
“발모제를 개발하다니! 저런 걸 누가 생각해 내겠어?”
“내 빠진 털이 바로 자라날 것 같아.”
“부작용은 없겠지?”
“아까 엘테가 테스트해 봤는데,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더라고.”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아스텔이 마련해 놓은 거대 부스를 응시했다.
일개 치료사에게 이런 대우라니.
물론 여전히 아스텔을 인간이라고 괄시하는 시선이 남아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는 수인은 없었다.
멍청한 아스텔이 이룩한 이런 성과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듣자 하니 아나이스 공작을 구한 것은 그렇다 치고, 위기에 처한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 리카르도의 생명까지 구했다고 한다.
그 일로 재규어 가문에서 아스텔을 후원하겠다고 나섰다는 일화는 이미 공작성을 넘어 공작령 내에 쫙 퍼져 있었다.
그렇게 승승장구 있는 와중에, 또 저런 신기한 발모제라니.
털갈이 시기마다 털 문제로 고민이 많은 수인들에게 팔면 엄청난 돈이 될 것이다.
메일스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비법을 알려다오. 비밀이라 해도 상사였던 나한테만 말해 줄 수는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속삭이자 아스텔의 조그마한 입술이 살짝 열렸다. 언제나처럼, 그에게 최고의 정보를 안겨 줄 입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독촉을 시작했다.
“자, 어서.”
짜릿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그래, 맞아.
넌 호구 아스텔이지. 안 그러냐?
“싫은데요.”
“그래, 그럼 보내- 뭐?”
아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싫어요.”
그게 끝이었다. 아스텔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깐깐해 보이는 거대한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뭡니까. 도둑이냐?”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치료소장은 그 위용에 어깨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치료소장이라면 품위와 체통을 지켜야지. 여리고 약한 분을 괴롭히다니.”
시녀장은 이 북부에서 상당히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다.
4대 가문 출신도 아니라던데, 공작성의 실세 중 하나로 당당히 군림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아스텔.”
“아스텔 님이라 부르십시오.”
“아스텔…… 님.”
시녀장의 겁박에 어쩔 수 없이 존대한 치료소장은 반응 없는 아스텔의 모습을 대면하고 씨근덕거리며 돌아섰다.
아스텔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로 그는 이를 갈았다.
배은망덕한 놈.
그 잠깐 사이에 버릇이 나빠졌구나.
네 녀석의 평판을 아주 제대로 망쳐 주마.
‘3년 간의 스승에게 발모제 비법 하나 안 알려 주는 은혜도 모르는 녀석’으로 말이다.
* * *
며칠이 흐르고,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가 되었다.
나는 요즘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아스텔 님, 그 망할 치료소장 놈이!”
“소문을 여기저기 냈어요! 아스텔 님이 자기를 배신했다고!”
“아아, 그래요?”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3년간 치료소장님을 보아 왔다.
치료소장님은 여기저기 아는 수인들이 많았고, 원체 입이 쌌다.
그래서 지난 플리 마켓 만남 이후로, 당연히 나를 압박하려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치료소장님이 내 험담을 하면서 간과한 게 있다.
여기 수인들은 인간인 나에 대한 혐오보다는 말이지…….
“아스텔 님, 아스텔 님!”
시녀, 제니가 활짝 웃으며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아스텔 님이 발모제를 만드셨다는 소문, 성 밖에 거주하는 제 동생도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 발모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소장님도 이렇게 써먹을 데가 있다.
악독한 치료소장님은 공작성 바깥에서 내 미끼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스피커 역할을 훌륭하게 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떠올리며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굳이 플리 마켓에서 발모제를 판 이유는 딱 하나였다.
‘좋았어, 이 정도로 소문이 퍼진다면 슬슬 아티팩트 감정사가 내게 찾아올 때가 됐어!’
정체를 숨긴 채 지낸다는 아티팩트 감정사에 관해 작품에 나온 힌트는 고작 세 개 정도가 다였다.
하나, 그가 북부 공작령에 거주한다는 것.
둘, 남성이고, 대머리라는 것.
셋, 어둠의 아티팩트에 관심이 많다는 것.
그 단순한 힌트만을 들고 머리를 싸매 봤자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제니가 내게 산책과 티타임을 제안해 준 바로 그 날, 나는 티타임 중 멋진 힌트를 하나 얻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그때로 잠시 돌아간다.
“이러다 내가 대머리 되겠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손에 움켜쥐었다.
“대머리요?”
그 순간, 티 포트를 들어 홍차를 따라 주던 남자 시종 하나가 흠칫 놀라더니 급하게 한쪽 이마를 가렸다.
“……그, 그,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나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나 시종은 이미 급하게 몸을 물린 뒤였다.
그 대신 샐리가 소곤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게, 털 빠진 족제비거든요. 대머리 될까 봐 요즘 걱정 엄청 많이 해요.”
제니가 말을 받아 떠들어 댔다.
“저 족제비, 저번에 동물화했을 때는 머리털이 한 움큼 빠졌었는데 말이에요. 보아하니, 인간일 때도 대머리 될 날이 머지않았네요.”
“참, 안 됐어…….”
그들의 재잘거리는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나는 조용히 멍을 때렸다.
지금은 샐리와 제니의 수다나 털 빠진 족제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티팩트 감정사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가 중요하지.
나는 문득 입 안으로 단어를 읊조려 보았다.
“휴, 대머리…….”
“네? 아스텔 님은 대머리 좋아하세요?”
“응? 아, 아니?”
그때 눈시울이 붉어진 족제비 수인의 모습이 떠오르며, 문득 다른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수인들은 대머리인 거 창피해…… 하나?”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담당했던 환자 중에는 대머리가 없었다.
물론 털이 많이 빠져서 걱정이라고 한 수인은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 저 족제비 수인을 보니, 이 수인 사회에서도 대머리는 제법 치부가 되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죠. 특히 윤기 나는 털에 관심 많은 종족들은 더요.”
순간, 손으로 괴고 있던 턱이 아래로 삐끗, 미끄러졌다.
잠깐만, 이거 혹시…….
“대머리들은 그럼, 털에 관심 많겠네?”
“네. 그래도 뭐, 털을 낼 수 있는 약도 없으니, 그냥 참는 거죠.”
“불치병이에요, 불치병.”
‘……그럼, 고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뜨거운 홍차를 단숨에 삼켰다.
그때부터 발모제 만들기를 위한 여정이, 대머리인 아티팩트 감정사의 귓가에 정보를 흘리기 위한 작전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하자!’
그곳에는 치료소장님이 플리 마켓에 참여할 거라는 계산 역시 당연히 깔려 있었다.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조만간 아티팩트 감정사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안 찾아오면?
그때는 또 방법이 있지.
나는 즐겁게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였다.
“아스텔 님.”
동그란 영상구가 앞으로 둥둥 떠올랐다.
“공작 각하께서 연락을 취하셨습니다.”
나는 눈을 둥글게 뜨고 영상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걸로, 연락을 하면 되는 거예요?”
“네.”
그녀가 나를 향해 열이 오른 영상구를 건네주며 낮게 웃었다.
* * *
북부 베이스캠프의 빙벽 앞.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과 연결된 영상구를 켰다.
반짝, 불빛이 들어오자마자 아스텔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어라, 연결이 안 됐나?”
아스텔은 반쯤 조바심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영상구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영상구에 나타난 아스텔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막상 그녀를 마주하고 나니, 아스텔에 관해 저열한 내용으로 지껄이던 치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는 공작성을 비롯해 북부 공작령 내부를 관리하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선대 공작으로부터 건네받은 의무는 그저 마물로부터 북부를 지키고 수호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다행히 강한 자만을 추종하고 떠받들어 주는 북부인 만큼 그의 명에 거역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약한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북부에 도는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나 불신 따위는 그저 숨 쉬는 공기 정도로 취급하고 무시해 왔다.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 아스텔이 어떤 무시를 당해 왔을지 떠올리니…….
폐부에 기이한 것들이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아스텔.”
호흡이 가빠진 탓일까,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아, 네! 공작님! 잘 지내셨어요?”
“……네.”
“다행이네요! 저는 최근에 뭘 했냐면요, 플리 마켓도 가고, 음.”
부산하게 말을 꺼내던 아스텔의 표정이 조심스럽게 굳어졌다.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응시했다.
“그, 조금…… 슬퍼 보이세요.”
그 말을 하면서 아스텔이 울상을 지었지만, 정작 그는 슬프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천천히 눈매를 휘어 웃었다.
“웃고 있습니다.”
아스텔이 조심스럽게 영상구를 톡톡, 어루만지듯 매만졌다.
위로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순진한 눈망울이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없습니다.”
어째서 이 순간에 ‘아스텔 님은 자존감이 낮다’라고 표현했던 시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 것일까.
무언가 기이한 것들로 가득 찬 것 같았던 폐부에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낯선 통증을 외면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계속 말해 주세요. 아스텔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음, 저는 발모제를 만들어서 플리 마켓에 팔았어요!”
“발모제를요?”
아스텔은 일부러 신이 난 어조로 대꾸했다.
“네! 발모제요!”
“신기하군요.”
짧은 대답에 잠깐 침묵이 일었다.
아스텔은 문득, 아나이스 공작이 자꾸 자신의 낯빛을 살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나이스 공작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쯤 오빠가 베이스캠프에 있는지 아닌지 궁금한데. 어쩌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가능성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첼로는 도착하지 않았고, 오빠가 건네주었던 영상구는 그쪽에서 일시적으로 작동을 막아 둔 것 같았다.
공작님을 마주하고 나니 갑자기 오빠가 아이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불안해졌다.
‘어떻게 떠봐야 하지.’
아스텔은 넌지시 운을 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있잖아요. 공작님…….”
“네.”
“……혹시 베이스캠프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듣고 싶어요.”
“베이스캠프에서의 일이라면.”
수인 기사들의 일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그, 그럼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가 아무래도 인간이다 보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에 아스텔이 정확히 어떤 말을 할지 감을 잡은 공작이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네.”
“베이스캠프 만들러, 인간 기사들도 몇몇 갔잖아요! 그 기사들도 적응을 잘하나요?”
“적당히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 카시언 그레이만 빼고요.”
곧 아나이스 공작은 애써 평온한 척하려는 아스텔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 카시언은 아스텔과 친밀하지 않은 척 의뭉스레 굴었다.
그러나 아스텔과 카시언, 둘 사이의 관계에는 묘하게 끈끈한 듯한 구석이 있었다.
그걸 되새기자 역시 기분이 나빴다.
아나이스 공작은 조용히 입을 열어 경고했다.
“카시언 그레이가 사고를 쳤습니다.”
조금 당황한 아스텔이 입술을 벌렸다.
“네……?”
“수인 기사들과 다투었더군요.”
“아……. 그, 그래서요?”
아스텔이 당황함이 가득 묻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막상 할 말이 빈궁해졌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 아스텔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살면서 그는 타인의 상처를 걱정해 돌려 말해 본 전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텔의 순진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나면 그는 반드시, 그녀를 상처 입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반려의 각인 때문일까. 그건 본능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오늘, 수도로 먼저 귀환하겠다고 요청한 카시언 그레이가 떠나기 직전까지 공작성의 수인 여자 기사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말았다.
경고 정도는 해야만 했다.
“……폭력적이고 거칠더군요.”
“그, 그럴 리가. 수도의 기사인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편, 그 말에 아스텔은 원작이 대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문란하고.”
“아, 그렇군요!”
그 이유라면 견제당하지 않기 위해 오빠가 직접 낸 소문이 잘 작용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에 뿌듯해져서인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은연중에 떠오른 미소에 아나이스 공작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혹시, 문란한 남자가 좋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는 공작을 보며 아스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음에도, 아스텔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카시언은 그러면…… 기사단에 계속 있나요?”
그제야 아나이스 공작은 대화의 주제가 계속 카시언 그레이 쪽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닙니다. 징계를 받아 수도로 돌아갔습니다.”
아스텔은 영상구를 든 반대쪽 손을 꽉 쥐며 속으로 환호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수도로 돌아갔다면 반은 성공이었다.
오빠와 아이가 조우하게 되는 무대가 바로 수도니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낮게 깔린 경고성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카시언 그레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당신에게……. 돈도 뜯지 않았습니까.”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라는 생각에 아스텔은 공작의 낯빛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해 보였다.
“……카시언이, 제 돈을요?”
아스텔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공작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정원에서 둘의 밀담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네?”
아스텔의 머릿속에 공작성에서 처음 오빠와 재회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때 자신이 했던 말들이 차례차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돈 벌어서 뭐든 다 해 줄게!’라고 했었던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아스텔을 향해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한량에게 함부로 돈을 주면 안 됩니다.”
오빠를 한량이라 매도한 것은 둘째치고, 둘의 관계를 들켰을까 걱정한 아스텔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와 겉으로 지나치게 친밀해 보여서는 안 됐다.
그런데 그 대화들을 다 들키게 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굴려라, 아스텔!
번뜩 운이 좋게도 변명이 떠올랐다. 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건, 제가 돈을 뜯기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친구비 주고받는, 일종의 놀이예요.”
“……친구비?”
공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순조롭게 속아 넘어가고 있는 걸까, 싶어진 아스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해 보니 아나이스 공작은 북부 영지에만 주로 있어, 인간들의 사회에 대해선 잘 모르는 편일 게 분명했다.
“네. 친구비요! 서민들의 생활 방식이죠. 그, 원래 저랑 카시언처럼 친하지 않은 관계면,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친구비를 내야 조금 더 절친해지거든요.”
“수도의 인간들은, 친구비를 내야 비로소 친구가 되는 거군요.”
“네, 아니, 저 같은 서민들은 원래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스텔은 조마조마한 눈빛을 영상구 안에 쏘아 보냈다.
그녀는 그가 지금 이 말을 믿을까 하는 우려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천금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아나이스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인간들의 문화에 무지했던 것 같군요. 친구비 같은 게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 그럼요. 당연히 맹수이시니까, 인간의 문화는 모를 수 있죠!”
그러자 그가 조용히 입을 열어 단언했다.
“그럼 이제 카시언에게 친구비, 주지 마십시오.”
“…….”
“친하게 지낼 만한 자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문란하고, 저급하니까요.”
오빠에 대한 악담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일단 자신의 변명이 그에게 먹혀들었다는 기쁨에 아스텔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대 안 줄게요!”
한결 천연덕스러워진 아스텔이 약속하겠다는 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역시 공작님이 저를 생각해 주시는 거죠? 정말 최, 최고의 공작님!”
아스텔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혹시 너무 아첨했나?
그가 잠시 말이 없었다.
영상구가 멈춘 건가, 싶어 아스텔은 빙벽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공작님을 관찰했다.
추운 건지 귀가 빨갰다.
“네.”
짧게 대답한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 입매가 느슨하게 풀려 가고 있는 것도 같고…….
그렇다면 바로 이때라는 생각에, 아스텔은 야심차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최고의 남자이신 공작님의 각인자인 저는…….”
“네.”
“검술 대회 치료사 일을, 꼭 하고 싶은데요. 아직도 고민이 되시나요?”
아나이스 공작은 말이 없었다.
아스텔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좋아하실 만한 그런 이야기가…….
“카, 카시언 그레이 이 나쁜 녀석, 처럼, 수도로 도망가는 인간 기사들이 많잖아요?”
“그렇죠.”
정확히 징계이지 도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스텔은 최대한 나쁜 말을 쓰기로 했다.
영상구 너머, 공작님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도 같았다.
‘공작님은 오빠를 엄청 싫어하는구나…….’
아스텔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지만, 당장은 그의 허락이 간절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공작님을 안심시키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아스텔은 재차 카시언에 대한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아주 문란하고!”
미안해, 오빠……!
“못돼서는! 아주, 아주 나쁜…….”
사용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한 아스텔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공작이 빙벽에 등을 기대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카시언 그레이를 비난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 공작님이 싫어하시니까요. 우린, 평범한 지지 관계를 넘어선 일체 관계니까! 저도 시, 싫어하려고요, 앞으로.”
공작님이 오빠를 싫어하는 이상, 그와 함께 묶여서 의심받지 않으려면 비난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스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공작의 표정을 관찰했다.
“일체 관계.”
딱딱하게 굳은 표정, 부드럽지 않은 입매.
너무 건방진 발언이었던 걸까?
아스텔은 한껏 긴장해 영상구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준 채로 공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영겁같이 느껴진 몇 초 뒤, 천만 다행히 아나이스 공작은 눈을 사르르 접어 가며 웃어 보였다. 안심한 그녀는 그의 느슨해진 표정을 힐끗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카시언 그레이 같은, 사고만 잔뜩 치고 수도로 도망가는, 기사들이 있으니까요. 내년에 출전할 수인 기사분들이라도 다친 데 없이 건강해야 전력 보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제가 검술 대회 치료사 일, 해도 될까요?”
아스텔 자신이 생각해도 다소 논리가 부족한 횡설수설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네.”
해냈다는 생각도 잠시, 아스텔은 앞으로도 쭉 오빠를 싫어하는 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니까, 그리고 오빠는 이 대화, 어차피 못 들으니까 괜찮…… 겠지?
“그렇게 원한다면…….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체 관계니까요.”
“……아, 네.”
아나이스 공작은 배부른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느긋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 제가 당신과 관련된 일에 마음이 쓰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일체니까.”
“네……?”
“앞으로는 더…….”
그가 낮게 속삭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영상구가 반짝거리며 꺼졌다.
마지막 아나이스 공작의 말도 상당히 의미심장했지만 그보다…….
어쩌지, 우리 오빠 이미지……?
아스텔은 공작이 왜 오빠를 싫어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리라, 굳게 다짐했다.
* * *
영상구를 끈 나는 침대 위에 누웠다.
그래도 많은 성과가 있었다.
오빠가 무사히 수도로 돌아갔다는 것도 알았고, 검술 대회의 치료사 일도 맡게 되었다.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진창을 구르던 가난한 거지 출신에게는 몹쓸 버릇이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에 자진해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고 불행해지고야 만다.
불안한 일상이 너무 익숙해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적응이 안 되는 거다.
‘공작님이…… 정말 최종 흑막이면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원작의 결말이 떠올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공작님을 경계하고 마음을 내어 주지 않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야.
그렇지만 확실한 근거도 아직은 없으니, 공작님을 상대로 질 나쁜 상상도 하지 말자, 객관적으로 생각하자, 이렇게 다짐하면서.
과거 책 속에 환생했다는 사실도 모르던 어린 시절,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양아치에게 맞아서 코가 깨졌을 때.
오빠는 나를 때린 양아치를 찾아가 두 배로 패 주고 와서는 멋진 잔디밭에 나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아스텔, 저 하늘의 별이 너무 멋지잖아. 행복하지 않아?’
‘그럼 모해. 난 거징데! 나뿐 넘드리 때리기나 하구.’
뺨이 퉁퉁 부어 어눌한 말을 내뱉는 나를 애틋한 눈빛으로 보던 오빠가 말했다.
‘내가 두 배로 때려 줬잖아. 응?’
‘그래두. 화나. 나 거지 하기 시러.’
오빠는 툴툴대는 나를 향해 작은 다이어리를 하나 건넸다.
‘……아스텔, 오빠가 다이어리를 준비했거든.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면, 여기에다가 행복한 날들을 기록하자, 그러면 어때?’
‘행보기?’
‘응, 행복한 일이 일어나면 적는 거야. 나중에 힘들 때 다시 확인해 볼 수 있게.’
돌이켜 보면 오빠도 열다섯 살밖에 안 됐던 주제에 일찍부터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떠오르는 추억에 나는 몸을 일으켜서 아직 완벽하게 풀지 않은 짐을 뒤적여 자그마한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우리 오빠, 카시언이 이름을 붙여 주었던 《아스텔의 행복 다이어리》다.
지난 십여 년간 써 왔던 다이어리.
나는 환생했음을 자각하기 전부터 나와 한 몸 수준이었던 이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요즘은 꽤 행복하다.
사람들이 내 발모제를 좋아한다.
게다가 공작님은 멀리에 있어도 내 건강에 신경을 써 주신다. 정말 다정하신 분인 것 같다.
아무래도 행복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더 행복해지고 싶다.]
누군가 내 다이어리를 훔쳐볼까 걱정되어서 일부러 구체적인 단어는 적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다이어리의 앞장을 닫고 낮게 웃었다.
복수가 끝난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내일이 기대되는 것은 퍽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 * *
이튿날 오후, 공작성 외부 치료소는 발칵 뒤집혔다.
“그 망할 계집애가 검술 대회의 치료사로 참가하게 되었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치료소장, 메일스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불운한 소식은 끝나지 않았다
“게, 게다가…….”
치료사는 치료소 내부로 온 수십여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다른 분들이 발모제를 어떻게 사면 되느냐고…….”
메일스는 콧방귀를 뀌며 편지 봉투를 거칠게 뜯어 발겼다.
[아주 몹쓸 인간 치료사구만!
그런데 거, 그런 기이한 발모제를 판매한다고? 어디서 사면 된다는 건가?]
……죄다 이 따위의 편지를 보내다니!
하필이면 그, 아스텔이 만들었다는 발모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뉘앙스로 말이다.
“제기랄! 발모제 따위가 뭐라고!”
그가 다른 이들의 편지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스텔의 평판을 깎으려 그녀가 스승을 배반했단 소문을 퍼뜨렸는데, 의도치 않게 홍보해 준 꼴만 되고 말았다.
“대단하긴 하죠.”
눈치 없는 치료사가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메일스는 제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저 공작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메일스의 시름이 깊어졌다.
그때 그의 곁에 서 있던 치료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메일스 님.”
“말해 보거라.”
까칠해진 메일스를 바라보던 치료사가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공작성으로부터 치료사 인력 차출 공문이 하나 내려왔는데요.”
메일스가 시뻘게진 눈으로 치료사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 공문을 읽어 내렸다.
공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 달 뒤 검술 대회를 위해 사전에 참가하는 기사단원들의 도핑 테스트를 진행해야 한단다.
그를 위해 치료 자문을 구하려 하니, 인력 차출을 소망한다는 내용이 간략히 적혀 있었다.
반가운 소식에 한결 흡족해진 메일스가 공문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허어, 그러고 보니 이 좋은 기회를 잊고 있었군, 그래.”
“예, 메일스 소장님?”
메일스의 입매가 음흉하게 늘어졌다.
“내가 가서 활약해, 공작 각하의 눈에 들면 그만이다. 그럼 아스텔, 그 계집애의 자리는 내 것이 되겠지.”
잘하면 그 어린 계집애의 자리를 자신이 꿰찰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다.
메일스는 지금이라도 당장 공작성으로 출발할 듯한 모양새였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뭐?”
“이번 검술 대회의 총책임자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던데요…….”
“총 책임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
“……공문 하단을 보십시오.”
[총 책임자 :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이자 전 기사단장, 리카르도 바시오.]
리카르도 바시오라면 잘 알고 있다. 아스텔이 목숨을 구해 준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 아닌가.
치료소장이 혀를 쯧 찼다.
그러나 그 역시 스스로를, 아스텔 못지않게 뛰어난 치료사라 자부했다.
아직 완치까지는 아니라고 들었으니 남은 불면증을 더 잘 치료해 드리면 나에게 넘어오실 것이다.
“암만 싸고 든다 한들, 리카르도 님도 그저 수인일 뿐이시다. 같은 수인인 나를 더 좋아하시겠지.”
“하긴, 그건 그렇죠.”
“준비나 해야겠다. 언제까지 인력이 필요하다고?”
치료사복의 옷깃을 추켜 올리며 메일스는 킬킬대며 웃었다.
제 눈앞에 멋진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 * *
며칠을 기다렸지만, 아티팩트 감정사는 아직 미끼를 잡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들은 있었다. 주로 공작님에 관해 연달아 들려오는 이야기들이었다.
“유리 빙벽을 정복하셨대요!”
“정말 대단하시지 않아요?”
“동면을 하던 마물 놈들이 쪽도 못 쓰고 도망갔대요!”
원작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나는 귀를 쫑긋 기울여 들었다.
“확실히 갑작스럽긴 해요. 원래 베이스캠프만 잡고 빙벽을 정복할 생각은 없다고 했거든요.”
“게다가 그 얼음 절벽을 세공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하셨다니까요, 신기하지 않나요? 공작 각하께서…….”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공작님이 그날 보았던 그 유리 빙벽에 관심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돌아오시면, 그 빙벽이 실제로는 얼마나 멋진지 물어봐야지.’
좋은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검술 대회에서 기사들을 도울 치료사로 발탁되자마자, 내가 생명을 구해 준 재규어 할아버지, 리카르도가 검술 대회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검술의 재규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만큼 재규어 가문의 직계 혈족 모두 검술 대회를 참관할 거라고는 짐작했었지만, 설마 총책임자가 리카르도가 될 줄이야.
나는 그 사실을 축하하고자 리카르도를 찾았다. 그도 마침 치료소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리카르도는 격려하듯 주름진 손으로 내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얘야, 아쉽게도 공작 각하께서 너를 후원하는 일은 못 하게 하셨다만.”
할아버지가 툴툴거리며 인상을 썼다.
“그래도 뭐, 계속 이리 볼 수 있으니 만족스럽구나.”
“이번에 검술 대회에서도 같이 잘 해 봐요.”
나는 리카르도의 손을 꼭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그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뒷방 늙은이긴 해도 저주, 아니, 불면에서 풀려나니 아주 쌩쌩해졌다고.”
나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아, 그리고 걱정 마라.”
“예? 뭘요?”
“이번 검술 대회를 계기로……. 널 무시하는 놈들을 아주 싹 발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는 급기야 주먹을 꽉 쥐고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내 너를 무시하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는 싸그리 다 들어 왔으니까. 거, 플리 마켓 때도 말이지……. 메일스 놈이라 했나?”
신이 나다 못해, 눈빛에서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리카르도 님, 지금 괜찮으신 거겠지?’
그나저나 한 번 생명을 구해 주었을 뿐인데, 리카르도는 나보다도 더 내 평판에 신경 쓰는 눈치였다.
나는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치료소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오늘부터 치료 준비를 시작하나요?”
“그래. 치료소 계획을 보니, 한 이주쯤 뒤부터 건강 검진을 할 거라니까 말이다. 그전에 할 일들이 산적했겠지. 들어가 보거라.”
나는 곧장 치료소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샘과의 사건 이후로 걱정이 조금 되었는데, 다행히 여태껏 다른 수인 치료사들과 부딪친 일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스텔 님.”
여전히 샐쭉한 표정인 수인도 있었고, 은근히 경외감을 느끼는 듯한 수인도 있…….
헤벌쭉 입을 벌린 막내 치료사가 나를 향해 인사를 꾸벅 건넸다.
“아, 아스텔 님! 바첼이 곧 올 거예요. 기다리시면 돼요!”
……바첼이 누구더라?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저 뒤에 왔네요.”
나는 등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아스텔 님. 기사들의 자가 문진표를 가져왔습니다.”
검술 대련장에서 마주쳤던 사내였다. 저 사내의 이름이 바첼이었지, 참!
나는 검술 대회의 도핑 테스트에 필요한 자가 문진표를 받아 들고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행정 업무까지 하시는군요.”
“믿고 맡겨 주시는 분이 계셔서요.”
바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차트 안에 이름과 사진, 문진표가 있으니까요. 확인 부탁드리고, 문제가 있다면 대련장 근처의 제 숙소로 와 주십시오.”
“아, 네. 그럴게요.”
나는 손안에 들어온 문진표를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기사의 정보를 입수하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눈 아래에 검상이 있다면 분명 사진에 보이고, 차트에 기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 명이 넘는 기사들의 기록을 다 제시간 내에 확인해 볼 수 있다면 말이지…….
나는 도핑 테스트 전 건강 검진을 준비한다는 명목하에 의료 정보를 한참을 뒤적여 보았다.
물론 절반의 절반도 다 보지 못했고, 딱히 큰 소득도 없었다.
하루 종일 종이에 파묻혀 있던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내일 다시 해야지.
오늘 밤은 정해진 일과가 있었다.
나와 아나이스 공작님은 매일 밤마다, 서로의 건강을 확인할 겸 영상구로 짧게 통화를 하고는 하니까.
* * *
밤마다, 영상구를 켜면 한동안 서로의 건강을 탐색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공작님은 어쩐지 요즘 계속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다.
예를 들면…….
“오늘도 제 생각을 하면 심장이 쿵쿵, 뛰셨어요?”
“네.”
나는 심각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빨개요. 혹시 열이 나는 건 아니겠지요?”
열이라도 나면 큰일인데.
전전긍긍하는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상냥하게 덧붙였다.
“추측건대 제 각인자인 아스텔을 오래 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러니까, 어서 만나야 할 것 같군요.”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진 나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몸의 거리도,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 것 같고.”
그가 인상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마음의 거리?
내가 공작님을 경계해서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나?’
각인에 대해서는 별로 밝혀진 게 없다 보니,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럴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신실한 공작의 충신인 척 은밀하게 속삭였다.
“만나면, 제일 먼저 손잡아 드릴게요. 우리 사이가 안정되게.”
공작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보답으로…….”
“보답으로?”
그가 낮게 웃었다.
“……준비한 게 몇 개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는 살짝 불길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보답이라는데, 나쁜 건 아니겠지, 싶어서.
그렇게 각인으로 인한 몸 상태만 체크하고 영상구를 끊어 버리기가 뭐해서, 그다음부터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오늘 출근해서 종일 진료 차트를 본 이야기를 하고, 공작님은 베이스캠프 인근을 미리 정리하는 데 열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마물이 들끓는 유리 빙벽을 정복했습니다.”
“신기해요! 실제로 얼마나 멋진지 궁금한데…….”
“네, 바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냥 영상구 너머로 보여 달라는 뜻이었는데, 공작님은 간단하게만 대답한 뒤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어 그가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상시에도 특유의 시크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와 다르게 아주 중요한 안건을 말하는 듯한 눈치였다.
“네?”
“내 성에서 누군가 당신을 괴롭힌다면, 제게 말하십시오.”
전부터 생각한 건데 공작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제를 살인 예고하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음……. 다들 잘해 주셔서 좋아요! 괜찮아요.”
그러나 공작님은 무언가 알고 있는 듯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은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만 하는군요.”
“……?”
그거야 진짜 괜찮으니까…….
그러나 공작님은 내게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음에 인간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좋은 인간들로요. 그때 말했던 고아원 친구들이나 치료학 스승을 초대하는 것도 좋겠군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공작님을 향해 고개를 까딱, 했다.
“그럼 혹시 카시언 그…….”
……아, 맞다. 공작님은 카시언 싫어하지.
“……레이가 개과천선하면, 데려와도 될까 생각했는데, 하하, 그 나쁜 녀석이 개과천선할 일이 없을 테니!”
“카시언 그레이와 관련된 인간만 아니라면 누구든, 관계없습니다.”
그 답에 갑자기 걱정이 치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조만간 오빠의 아이를 이 성으로 데려와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조카가 도착한다면, 일단은 오빠의 아이란 걸 숨겨야 하나?
고민이 한결 깊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름이 다소 깊어졌지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를 위해 지금은 잠시 물러나야만 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내가 감사 인사를 할 때마다 공작님은 특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빙벽같이 무심한 듯 차가운 얼굴이 녹아내리는 양, 눈매가 살짝 아래로 처지고, 뻣뻣했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며, 새하얀 뺨 위에 미세하게나마 홍조가 어렸다. 모든 것은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변화였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작님이 나를 다른 누구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각인 덕분이겠지.
나는 영상구 너머의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건강 체크는 할 만큼 했다 보니, 이제 다른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막상 이렇게 보니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컸다. 눈길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중 무언가가 눈에 포착됐다.
“공작님은 입술 아래에 작은 점이 있어요.”
영상구를 통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변화였다.
“몰랐습니다.”
그가 반쯤 감았던 눈을 나른하게 뜨며 속삭였다.
“그거 아십니까? 아스텔은 콧잔등에 작은 주근깨가 있습니다.”
“……정말요?”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뜨며 괜히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나조차 몰랐던 사소한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소소한 발견에 관해 몇 마디씩을 더 나누었다.
영상구가 꺼질락 말락 할 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기분이 조금 이상해요. 눈앞도 약간은 어지럽고요.”
“…….”
“각인 문제인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공작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네?”
“어서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구가 톡 하고 꺼졌다.
그러자 어두워진 영상구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 * *
한편, 아스텔과 아나이스 공작이 매일 밤마다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시녀장 루델과 아스텔의 전속 시녀 격인 샐리, 제니였다.
물론 입이 무거운 시녀장과 아스텔에게 충성스러운 샐리와 제니는 이 사실을 철저히 함구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셋만이 통하는 화제가 생겨 버렸다.
그들은 아스텔이 방 안에서 영상구로 통화를 할 때마다 음험한 어둠 속에 모여들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제일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여는 쪽은 언제나 샐리였다.
“사실, 빙벽을 정복한 것도 아스텔 님 때문이 아닐까?”
“……어디 공작님이 그럴 분이야?”
“하지만 일개 피후견인을 챙긴다기엔 더 마음을 쓰시는 눈치인걸.”
“그래도…….”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는 시녀장, 루델 쪽을 바라보았다.
깐깐하고 까다로운 데다 윗전에 대해 말을 얹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제야 샐리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 너무 오바했다고 혼쭐이 나는 것은 아닐까?
“흐음…….”
아니나 다를까, 루델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스텔이 건네준 편두통 치료 약물로 추정되는 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진중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잘하면 우리 가문에 마님이 들어오실 수도 있겠군.”
……그녀는 골든 리트리버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도리어 제니가 한 발 주춤 물러섰다.
“네? 마님까지요……?”
루델은 몸을 돌리더니 눈을 번뜩이며 진지하게 경고했다.
“나의 기분 좋은 상상을 방해하지 마라.”
그 경고에 서로 시선을 마주친 샐리와 제니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 * *
바로 그 시각, 제국의 수도.
겨우 수도로 돌아와 급하게 레이첼을 찾은 카시언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예전에 네가 사귀던 안나.”
“……그래, 기억나.”
안나, 첫 연인이자 그를 버리고 훌쩍 떠난 여자.
서로 만났을 때도, 헤어짐을 고했을 때도 그들은 너무 어리고 서툴렀다.
“너와 헤어졌을 때, 안나는 아이를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아이를 보육원에 버렸어.”
“…….”
“그 선택이 나쁘다고 하는 건 아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었겠지.”
“…….”
“어쨌거나 안나는 얼마 전에 죽었고, 이 아이의 피붙이는 너밖에 없어.”
카시언은 레이첼이 안고 있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잠시라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안나가 낳았다는 아이는 어디로 보나 카시언을 지나치게 닮아 있었으니까.
울컥하는 감정을 누른 카시언은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우면 되겠네. 육아 책 같은 것도 좀 보면서.”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속삭였다.
“문제가 있어. 유능한 치료사가 필요해. 저 아이는 조금 특수 상황이거든.”
“특수 상황?”
“마력 폭주 증후군이야.”
마력 폭주 증후군.
체내에 마나가 과도하게 쌓여 끊임없이 충돌과 폭발을 거듭하면서 생명력을 갉아먹는다는 희귀병.
“마력 폭주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제어 물약뿐이야.”
“……그래, 그랬었지.”
“이 병에 대해 잘 아는 눈치네? 그럼 너도 잘 알겠다시피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는 거의 없어. 있다고 해도 사실상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서 고용이 불가능해.”
“…….”
“게다가 우리 상황에서 믿고 맡길 만한 치료사를 구하는 건 더 어렵지.”
레이첼의 품 안에 있던 아이는 괴로운 듯 쌕쌕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카시언은 이를 악물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지만, 치료사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죽을 확률이 높아.”
카시언은 말이 없었다.
그는 마력 폭주 제어가 가능한 유능한 치료사 한 명을 알고 있었다.
‘아스텔, 뭐 해?’
‘마력 폭주 제어용 물약 만든다, 왜!’
‘살면서, 네가 그 희귀병 환자를 만날 일이 있을까?’
‘다 이유가 있어. 무조건 배워야 해! 저리 가, 나 바빠!’
마력 폭주 제어 물약을 만드느라 눈 아래 다크서클이 내려올 때까지 밤잠을 설치며 연구하던 여동생, 아스텔.
카시언은 사랑하는 여동생을 떠올리는 동시에 양 뺨이 새빨간 두 살배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쉬는 게 어려운 듯 아이의 가슴팍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이어 아이가 입술 바깥으로 짧은 숨을 연신 흘렸다.
그 순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스텔이 제게 세뇌시키듯 수십, 수백 번 반복해 왔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뜬금없는 소리라고만 생각했던.
‘오빠, 만약에 조카가 생기면 꼭 내가 키워 줄게.’
‘그, 너 아직 12살인데?’
‘아무튼! 내가 키울 거라고!’
‘아스텔, 네 오빠는 아직 여자 친구도 없어…….’
카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그 애는 자기 몫을 해내기도 힘든…….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애야.
“잠시 진단을 받아 봤는데, 마력이 폭주하기까지 열흘 정도랬나.”
레이첼이 냉엄하게 선고했다.
“이 아이의 수명은 열흘가량 남았으니까……. 잘해 줘.”
카시언이 귓가에 울리는 아스텔의 목소리를 지우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진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
제일 먼저, 다른 치료사를 백방으로 찾아봐야만 했다.
* * *
공작님과의 영상 통화가 끝났다.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깜빡였다.
‘잘 자요.’
……각인이 불안정하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 보니까.
나는 폭신폭신한 침구 위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아아아,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협탁에 올려놓았던 오빠가 준 영상구에서 빛이 반짝이며 들어왔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표정이 비장하게 굳어졌다. 이 시점에서 오빠의 영상구가 울릴 만한 이유로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바로 협탁 옆으로 가 영상구를 켜고 들여다보았다.
“아스텔.”
오빠는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내가 잘 아는 표정이었다. 너무 큰 불행이 찾아왔을 때 오빠는 꼭 저런 표정을 했다.
지금 오빠는 보육원에 맡겨져 있던 죽기 일보 직전인 조카를 만난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도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고 마음 한편이 찌르르 아파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오빠, 혹시 수도로 올라갔어?”
“응.”
나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짧은 대답이 전부였다. 먼저 연락을 해 놓고도 오빠는 가만히 있었고, 나만 계속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한참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으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조카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먼저 조급해진 쪽은 나였다.
“오빠, 할 말이 있어.”
“……뭔데?”
“나 진짜, 진짜 잘해.”
“그래, 우리 아스텔 잘하지. 응, 최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옳다, 좋다 하는 우리 순진한 오빠.
“아니, 그거 말고.”
아마 조카는 곁에 유능한 치료사가 365일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일 것이었다.
“오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인 거, 알지?”
오빠는 한숨을 내뱉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응, 아스텔. 네가…… 내 전부잖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복수를 결심하고 준비하는 동안 ‘카시언 그레이’의 세상에는 오로지 아끼는 동생뿐이었다.
잠깐씩 만난 연인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협의하의 짧은 만남이었고, 마음을 전부 주면서 의지하고 사랑하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에 나타난 아이는 동생의 존재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준다.
시한부라는 게 너무 큰 아픔이 되지만…….
워낙 희귀병인 탓에 원작에서는 아스텔의 능력으로도 완치시키지 못했지만, 지금 내게는 가능하다.
만에 하나, 내가 흑막을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죽게 되더라도, 아이를 건강하게 만든 뒤 몰래 뒤로 빼돌려 놓는다면 오빠는 아이와 함께 힘겨움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조카를 맡아서 잘 키워 줘야만 했다.
“오늘 나는 셀리라는 아이를 치료했어. 운 좋게 내 ‘전문’인 마력 폭주 증후군에 걸린 아이더라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조카를 꼭 나에게 맡기라는 의미로, 나는 세뇌시키듯 오빠를 향해 말했다.
“오빠도 내가 필요하면 꼭,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
카시언은 기특하다는 눈길로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영상구가 조용히 꺼졌다.
장시간 통화의 여파로 영상구는 뜨끈뜨끈했다.
이 뒤로도 오빠는 아주 많이 갈등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에 대한 부채감이 무척이나 컸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빠가 내게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다.
열심히 아티팩트를 분석하고, 검잡이도 잡고,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어린 친구 한 명을 공작성에서 키워도 되냐고, 아니, 초대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이다.
* * *
이틀 뒤, 공작성의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나는 쭉 기지개를 켰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좀 어지럽지.’
입맛도 없고, 축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이러네, 희한해.’
설마 이것도 각인 증상일까 싶어 공작성의 도서관에서 각인에 관한 책을 몇 개 읽고 나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각인의 증상에는 분명히 내가 겪는 부작용 따위는 없었다.
그냥 다들 깔끔하게 친해지고, 손 조금 잡고, 뽀뽀도 조금 하고!
……그러다 깔끔하게 끝, 이런 식이었는데.
‘이상한데……. 피곤한 건 그냥 내 병의 일종인 건가?’
나는 찌뿌둥한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다시 길게 하품을 했다.
열 시간 넘게 자도 자도 졸리다니.
도서관 근처의 산책로를 지나 공작성 내부 치료소 안으로 들어선 나는 졸음을 떨치려는 듯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요즘 치료소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검술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박차를 가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총책임자인 리카르도는 도핑 테스트 확인차 나와 함께 치료소에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검술 대회는 공작령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외부 인력도 많이 고용되었다.
대표적으로 고용된 인물이 바로 메일스 치료소장님인데…….
“죽어라, 이놈아!”
“아, 아니 주, 죽으라니 무슨 그런 폭언을…….”
깡!
검술 대회의 기사들에게 자기 치료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야심차게 들어온 것이 분명한 메일스 치료소장님은 계속 머리를 맞고 있었다.
내 곁에 있던 막내 치료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맞으면 깡통 소리가 나는구나…….”
“그러게요.”
‘그러니까 왜 나를 괴롭혀.’
메일스가 다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침 일찍, 치료소에 출근한 메일스는 내 자리에 있던 《공작성 내 기사들의 의료 정보 일람》을 마구 헤집어 댔다.
그러다가 리카르도 님께 딱 걸려서 머리를 맞게 된 것이다.
그는 모두의 앞에서 머리를 맞아 몹시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힘의 논리에서 밀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관조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나저나 눈 밑에 번개 모양의 검상이 있는 기사가 한 명도 없을 줄은 몰랐어.’
검잡이의 정체로 오리무중인 데다 아티팩트 분석도 답보 상태였다.
아티팩트 감정사가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발모제는 약했나?’
다행인 건, 근래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마다 똑똑, 하고 치료소의 문을 두드리는 꼬맹이 하나 덕분이었다.
“어서 와, 벨.”
은여우 수인 후계자, 벨.
은빛 고수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섯 살배기 소년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안녕, 아스텔!”
“오늘도 온 거냐, 콩알만 한 녀석아!”
“네!”
“아스텔 너무 괴롭히지 말아라.”
“아, 안 괴롭혀요!”
꼬맹이치고 날카로운 눈매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순진한 벨이 쪼르르 내 근처로 다가왔다.
은여우 가문은 확실히 마법 명가였다.
이 너른 북부에서 은여우 가문만큼 마도구를 잘 만드는 곳은 없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벨이 내게 필요로 하는 게 있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약속한 물건, 가져왔어! 이제 내 것을 넘겨줘 봐!”
리카르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암것도 아닙니다, 선대 가주님!”
나와 벨은 시치미를 뚝 뗐다.
사실 은여우 수인, 벨이 내민 것은 일회성《마법 계약서》였다.
‘아티팩트 감정사에게 써먹을 계약서지.’
나는 그가 외부에 비밀을 누설할 수 없게끔, 계약서를 쓸 생각이었다.
평범한 마법 계약서로는 최종 흑막의 눈을 피하기 어려울 터.
은여우 가문에서 개발한 《마법 계약서》는 계약 내용을 발설할 수 없다는 강제성을 가지고 있었다.
계약자 모두 계약 내용에 관해 발설하지 못할뿐더러, 만일 외부인이 계약의 내용을 강제로 파헤치려 한다면 마법을 튕겨 내게 되어 있었다.
나는 벨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나는 《마법 계약서》를 주머니 속에 넣으며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
소심한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물약을 달라던 꼬마는 어디로 가고, 벨이 뿌듯하게 어깨를 쫙 폈다.
“자, 그럼 이제 준비한 물건을 주시지!”
벨이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마치 마약이라도 밀거래를 하는 듯한 모양새.
치료소장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벨의 보드라운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은밀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나는 벨을 향해 새하얀 물약 통을 건넸다.
“약속했던, 용기를 내는 물약이야.”
“좋았어!”
벨은 통을 받아 들자마자 열더니 물약을 한입에 급하게 삼켰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꼬리까지 뿅, 하고 튀어나온 게 보였다.
나는 벨의 의료 차트에 처방 약물을 기입하며 가볍게 킬킬댔다.
“와아압.”
용기를 내서 멋지게 약을 먹은 벨이 손등으로 입술을 슥슥 문질렀다.
새하얀 밀빵 같은 뺨이 오물거렸다.
“너무 써!”
“자, 이제 심장에 손을 대 봐.”
“두근두근해! 용기가 마구마구 샘솟고 있어!”
나는 픽 웃으며 벨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효과 넘친다는 여섯 살짜리의 말에 내 용기도 마구 샘솟는 기분이었다.
“저기, 누나. 그런데 이 몸한테 진짜로 무슨 냄새가 나?”
벨이 조심스럽게 내 소맷귀를 잡으며 물었다.
“아버지 가주님께서도 나한테 묘한 향기가 난다고 해, 해서. 혹시 나쁜 냄새일까 봐…….”
나는 벨의 자그마한 체구를 꼭 안아 주었다. 일전에 맡았던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좋은 냄새가 나네.”
나는 벨에게서 나는 향기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러 약초나 향초가 섞인 듯한 향인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폈다.
왜 하필 이 아기 후계자님한테서 이 냄새가 나는 것일까.
‘메일리 약초 냄새가 느껴지는데, 다른 건 정확히 뭐지?’
의아한 낯으로 벨의 뺨을 가만히 매만지던 그때, 누군가가 치료소의 문을 두드렸다.
치료소 안으로 들어선, 멀끔하게 생긴 기사는 모두를 향해 통보하듯 선언했다.
“두 시간 뒤, 공작 각하께서 저택으로 귀환하십니다.”
“아니, 벌써 오신다고?”
리카르도가 인상을 찡그리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공작 각하께서 귀환하시면 내가 우리 아스텔을 후견하는 척도 못 하지 않느냐.”
“…….”
팔불출 같은 리카르도의 면모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상관을 위해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한 기사만이 우리를 독촉했다.
“어서 바깥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환영회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 아무튼, 됐다. 함께 나가 보자꾸나.”
전시 상황에서 공작성의 주인이 귀환한다면 가문에 거주하는 모든 식솔들은 성문 앞에서 환영을 하는 것이 북부의 예법이었다. 지금 역시 일종의 전시 상황이니 공작을 반겨야만 하는 것이다. 필수 인력을 제외한 대부분이 가장 깔끔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공작성 정문에 모여 공작을 기다렸다.
나는 아나이스 공작의 피후견인이기는 해도 정식 위치가 다소 애매한 처지였다. 그래서 환영 행렬의 중간쯤에 껴서 자그마한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 공작님을 기다렸다.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대하며 자기 위치로 가지 않고 곁에 붙어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마침내 공작 각하께서 오시는구만.”
“아, 네…….”
먼발치에서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빠른 속도였다. 다그닥 다그닥 거리며 말발굽이 땅을 차는 소리가 점점 더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공작님의 말이 성문 앞에 다다랐다. 찬란한 흑발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연신 이어졌다. 각 가문의 수장들이 조용히 공작님의 흑마 앞에 부복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각 가문의 수장의 인사를 무심히 받아넘긴 공작님이 무언가를 찾는 눈치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나랑 시선이 마주쳤나?’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것만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곧이어 수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돌아오셔서 바쁠 테니 언제쯤 다시 공작님을 뵐 수 있을까, 하면서 고민하는데 내 바로 앞의 무리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아스텔.”
수인 가신들의 틈을 가르고 들어온 아나이스 공작님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자리에 있는 무수히 많은 공작성의 가신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몇몇은 너무 놀라 인간화가 풀리기까지 했다.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그, 그러니까…….
이 정도로 모두에게 각인 사실을 들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후견 관계로 정리된 거 아니었나?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공작님이 이러시면 너무…… 이목을 끄는 것 같은데?
나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어서 양 뺨을 붉혔다. 공작님이 나를 보며 단정한 낯으로 눈을 휘어 웃었다.
* * *
모든 수인이 손에 땀을 쥐고 이 사태를 관전하기에 이르렀다. 아스텔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사실 아나이스 공작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스텔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저 발랄하게 웃으며 공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빨리 돌아오셔서 기뻐요.”
아나이스 공작을 보통의 필부처럼 대하는 태도에 가신들의 몸이 뻣뻣이 굳어졌다.
그들의 시선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공작은 아스텔의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런 공작의 모습에 곁에 있던 리카르도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저 정도면 표식이다. 작정하고 일부러 드러내는 게 분명했다. 감히 아스텔에 관해 논하지도, 그녀를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스텔을 건드린다면 아나이스 공작,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기도 했다.
후원조차 못 하게 하더라니. 한때 함께 전장에서 싸우던 공작의 낯선 모습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오늘 저녁, 일정을 비워 두셨습니까?”
그렇게 단 한 사람, 아스텔을 제외한 모든 이가 깨달았다.
저 살벌한 멘트가 무려 데이트 신청과 유사하다는 것을.
“네!”
아스텔의 친밀한 대답에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결연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공작성의 권력 구도는 아스텔 위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 * *
공작성 내, 거대한 첨탑 위.
창밖은 고드름이 얼 정도로 추웠지만,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와 태피스트리 덕에 첨탑의 작은 다락방 안은 숲속의 작은 통나무집처럼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마치 어릴 때 내가 거주하던 사냥터의 통나무집 같은 느낌?
‘공작성에도 이런 방이 있네. 신기하다.’
나는 주변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자그마한 러그 위 의자에 공작님과 마주 앉았다.
“……어떻습니까, 아스텔?”
묘하게 고양되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칭찬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공작님의 저 표정.
나는 그의 뿌듯해하는 미소를 보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칭찬을 건넸다.
“훈훈하고 좋아요! 그런데…….”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다가 나는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다른 수인들이 오해할까 봐 걱정돼요. 제가 공작님의 ‘각인자’인 걸 들킬까 봐요.”
영상구를 통해 대화하면서 느꼈던 건데, 공작님은 정말 생각보다 사람들의 이목에 관해 관심이 없는 분인 듯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나를 바라보던 공작님이 다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스텔의 뒤에서 험담하는 자들이 있을까 염려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울 때, 아스텔의 위치가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요.”
혹시 나 모르는 사이 뭔가 사건이라도 있었나?
그 배려에 조금 놀랐다.
공작님이 내게 계속 신경을 써 주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공작성에서 지내는 동안의 위치까지도 섬세하게 고려해 주실 줄이야.
지금까지 이렇게 세심하게 날 대해 준 사람은 오빠 외에는 없어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그건 정말 감사해요.”
“우리는 일체 관계이지 않습니까.”
대충 둘러댄 말에 고무되신 걸까.
“제가 아스텔에게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 그런가?
공작님을 설득하려 한 건데 내 쪽에서 묘하게 설득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공작님의 권세에 기대어 호가호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나는 공작님을 힐끔 바라보았다.
“조만간 수도로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황제의 부름이 있어서요.”
“아…….”
“그러니, 그전에 이 성내에서 아스텔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어 놓을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오자마자 또다시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에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고 보니 원작 속 황제는 북부의 젊은 공작을 호시탐탐 노려, 그를 자주 수도로 불러냈다.
자치권을 지닌 북부를 포섭하고자 혼맥으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나이스 공작은 혼기를 다 채웠으나 아직 약혼녀조차 없으니 황제가 과욕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감히 북부의 공작에게 ‘당장 후사를 보라’고 말할 간 큰 인간이 있을 리는 없다.
어차피 후계자야 가신 가문에서 간택하는 것이라 공작의 혼인과 북부령의 흥망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 공작님의 정인이 있다고 나온 것 같기도 한데……. 혹시 우리의 오해일 수도 있겠네.’
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공작님을 짝사랑하는 귀족 영애들도 제법 된다고 했었다.
수도의 귀족 영애들은 강인한 북부 수인들의 자유로움과 야성을 동경하기도 했으니까.
북부 대공을 상대로 쓴 음지의 로맨스 소설이 그 인식을 자리 잡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곧 다녀오겠습니다, 아스텔.”
나의 긴 상념을 깬 건 공작님의 말이었다.
“그보다 빙벽 위에 작은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옅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시녀들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공작 각하께서 얼음 절벽을 정복하신 뒤, 마법 세공사를 부르셨다나 봐요!’
‘눈이 오면 엄청 아름다울 텐데, 관광지로 개발하실 생각인가?’
‘공작성의 사유지로 만드실 예정이라던데……. 가 보고 싶어요.’
나는 공작님을 향해 호기심을 풀어냈다.
“그럼 그곳은 관광지가 되나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아스텔?”
공작님은 내 의사를 왜 묻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한 것도 잠시.
“아스텔의 것이니, 원하는 대로 해도 됩니다.”
“……예? 제 것, 아, 아닌데요.”
천연 빙벽 자체도 드물뿐더러, 그곳에 마법 세공사의 힘까지 들어갔으니 보통의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전적 가치가 있었다.
“아스텔의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 말을 하며 공작님의 표정이 다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 걸까.
나는 눈을 몇 번 비비고 그를 다시 보았다.
다행히 무심하고 멀끔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니 이제는 받는 일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
내가 의아해하자 그의 표정이 어둡게 침잠했다.
“그 누구에게든……. 주는 것은 그만하십시오.”
내가…… 주는 데에 익숙했었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입을 열어 반박하려는 순간 공작님의 손끝이 내 이마 위에 와 닿았다.
마치 아기 고양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제가 드리겠습니다, 뭐든.”
눈빛이 뜨거웠다.
아니, 손도…….
나는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공작님의 손을 잡았다.
꼭 불에 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떨어져 있을 때, 영상구 속에서 공작님은 종종 건강 이상 증세를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고백하거나,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정신이 팔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소, 손이 이렇게 뜨거운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내가 공작님의 손을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열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공작님의 잇새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낫습니다.”
“대화 따위가 뭐라고……!”
나는 급한 대로 공작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열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로 해결이 안 된다면, 얼른 주치의 선생님을 불러야 해요!”
나는 급하게 탁상 위의 차임벨을 누르려 했다. 그러나 공작님의 손길이 먼저였다.
“그 전에, 아스텔.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시, 실험이요?
“손으로는 안 되니까, 더한 걸 하면.”
“무리하셨으니까…….”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작님의 얼굴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우리 한 번, 실험해 보는 게 어떨까요.”
왜 실험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건 치료다.
내가 명색이 치료사인데 그저 아,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거잖아.
게다가 공작님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걸.
열심히 속으로 합리화를 한 나는 들이받듯이 공작님의 손을 꼭 쥐고 손등에 입술을 꾹 문질러 보았다.
“어때요?”
공작님의 손등은 여전히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뜨끈뜨끈했다.
공작님의 낮은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안 되나 봐요.”
나는 시무룩하게 손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비장하게 심호흡을 했다.
내 비장한 눈빛에 공작님이 눈을 느릿하게 내리감았다.
촘촘하게 내리깐 속눈썹, 새빨간 입술…….
미소 짓느라 살짝 입술이 벌어진 탓에 혀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저, 정신 차려, 아스텔.’
나는 좀 더 용기를 내 공작님의 이마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곧 콩, 하고 내 입술에 그의 이마가 부딪혔다.
한동안 입술을 붙인 채 가만히 있자, 뜨끈했던 이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며 조금씩 열이 가라앉았다.
그가 나직하게 물어 왔다.
“이제 눈 떠도 되나요?”
나는 서서히 공작님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 멀어졌다.
“네…….”
“크게 효과는 없군요.”
나는 주치의를 부르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내 가냘픈 팔목을 손에 쥔 공작님이 약간 거칠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겹쳐졌다.
“키스.”
그 말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나는 급하게 상체를 뒤로 물려 보았지만 공작님이 더 빨랐다.
내가 물러나는 만큼 그가 조금씩 더 붙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나는 귓가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급히 선수를 쳤다.
“이, 이, 이마에 하는 거죠?”
낮게 잠긴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공작님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입술에 할까요?”
아니, 보, 보통 키스한다고 하면 입술 키스를 상상하잖아요……!
나는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꾹 깨물며 반대의 말을 입에 올렸다.
“아, 안 돼요. 꼭 이마에 해 주세요!”
반쯤 안심하고 눈을 꼭 감자 촉, 소리가 날 정도로 짧은 이마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손끝이 내 이마에서 콧잔등, 그리고 입술을 타고 느긋하게 내려왔다.
손끝으로 뜨거운 입술 위를 가볍게 누른 공작님이 다시 운을 뗐다.
“이제 열이 내린 것 같습니다, 아스텔.”
일련의 행위 덕분에 공작님의 열은 조금 내려간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내가 잘못된 것 같았다.
심장도 두근두근 쿵쿵거리면서 뛰고, 귀도 멍하게 이명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고…….
“제가 건강해졌으니, 우린 이제 다른 걸 실험해 보죠.”
“다른 거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던 그가 씩 웃었다.
“네.”
꽤 장난스러워 보이고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우리, 뭘 하게 되는 거죠?
공작님은 나를 에스코트하듯 손을 잡았다. 그대로 우리는 공작성의 거대한 첨탑을 내려와 야외로 나왔다. 그리고 한참 삼십여 분을 함께 걷다,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실험이 이런 건가요?”
나의 말에 공작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첨탑 너머로 톡, 톡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공작님이 말한 ‘실험’이 손잡고 걷기, 이마를 맞대 보기, 어깨를 맞대고 내리는 눈 보기 같은, 지극히 낭만적인 것일 줄은 몰랐다.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건전해서, 괜히 긴장했던 내가 변태가 된 기분…….
내 복잡다단한 표정을 빤히 보던 공작님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떨어져 있을 때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다행히 화제가 돌아갔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계속 꾸벅꾸벅 졸았어요!”
“저는 심장이 뛰어 잠을 설쳤습니다. 밤새도록.”
나는 우리 사이에서 발생한 이상 증상을 머릿속으로 기록하고 메모했다.
‘공작님의 증상만 보면 꼭, 사랑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연애 경험이 없는 내가 사랑을 운운하기도 뭐하지만.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깜빡였다. 속눈썹이 무겁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전, 지금도 사실 조금 졸려요.”
“그럼, 이렇게 깍지를 끼면.”
그의 마디 굵은 손이 내 손을 느릿느릿 감쌌다. 피부가 틈 없이 맞닿았다. 카페인이 과다한 커피를 마신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이 말똥해졌다.
“이제…… 떼면.”
그의 손을 떼고 난, 또다시 십여 분 뒤.
“……병든 닭이 된 기분이에요.”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커피의 약빨이 다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분명 처음에는 일시 각인이라고 했는데.”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 각인 증상에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 이렇게 초연하다니, 슬며시 드는 불안감에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주치의 선생님에게 다시 진단을 받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주치의도 아는 게 없을 겁니다.”
묘하게 확신 어린 어조였다. 나는 두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요. 상의할 머리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원한다면.”
그쯤이야 어렵지 않다는 듯 눈매를 휘며 웃은 공작님이 얌전히 설렁줄을 당겼다.
* * *
주치의는 첨탑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급하게 뛰어 올라온 듯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제 본분은 잊지 않고 바로 진찰을 시작했다.
“허, 헉. 확실히, 헉, 헉. 각인이 이전보다 더 불완전해졌습니다. 흐으…….”
아스텔은 주치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 떨어져서 그런 걸까요? 그동안 약간 어지럽기도 했었거든요.”
“숨도 차고, 심장도 뛰고.”
“졸리기도 하고요.”
공작과 아스텔의 말을 가만히 듣던 주치의가 첨탑 너머의 진눈깨비를 아련하게 응시했다.
“잠시 떨어져 있으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말입니다…….”
“네?”
“서로 떨어져 있어도 고통이나 피로, 감각 등을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한마디로 각인의 부작용인 ‘과잉 연결’ 증상인데요.”
과잉 연결?
도서관의 책에서도, 임상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과하게 연결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아스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텔 님이 오래 자도 졸린 이유는 각하께서 과로하셨기 때문이고.”
“…….”
“각하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아스텔 님의 심장이 뛰어서…… 일 수도 있어요. 보통 각인이 되었다고 그렇게까지 모든 감각을 공유하고 연결되지는 않기에, 부작용으로 분류합니다.”
“부작용이라니…….”
아스텔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확실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부작용이라면.”
주치의의 표정이 아주 깊게 침잠했다.
아스텔은 손에 땀을 쥐고 그를 응시했다.
“그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친밀도를 높이는 것뿐입니다.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는 애써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답은 뻔했다.
“그러니까……. 손을 잡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뜻인가요?”
아스텔의 양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
“……예.”
아나이스 공작과 아스텔, 둘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주치의의 안색은 흙빛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인지, 그가 무언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대마법사가 있으면 확인을 요청할 텐데.”
그는 학자적인 고뇌를 하는 듯 보였다.
“주치의님, 왜 그런 표정이세요? 혹시 더 심각한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이런 경우는 대마법사가 잘 알 텐데 근래엔 그만한 마법사가 없었네요. 한 군데 있다 들었는데 멸문했다지요. 아직까지 있었다면 협조를 구했을 테지만 거참. 망해 버렸으니.”
그 말을 듣자마자 아스텔의 표정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대마법사 가문이라면.”
“뷔에트리 백작가였던가, 인간들이었죠.”
아나이스 공작은 아스텔의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힐끔거리며 주치의를 향해 인상을 썼다.
“필요 없는 가정법은 딱히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아스텔과 주치의가 멈칫하며 몸을 떨었다.
물론 주치의가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스텔의 옆에 앉아 있던 공작이 그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으니까.
‘나가’라고.
“그…….”
아니, 그래도 뭔가 진단도 확실하게 내리고 처방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치료사로서의 사명을 떠올린 주치의가 두 주먹을 옴팡지게 움켜쥐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열을 재-.”
“아스텔, 주치의가 바쁘다고 하는군요.”
공작이 아스텔을 향해 다정하게 눈웃음을 쳤다.
그 웃음을 보고 나니 주치의의 다짐은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여기 더 남아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보겠다는 진지한 생각이 들었다.
주치의는 단물만 쪽쪽 빨린 듯한 기분으로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예. 맞습니다. 바, 바쁩니다.”
그러자 싸하게 굳어 있던 아스텔이 표정을 어렵게 풀고 중얼거렸다.
“정말요…….”
“다행히 우리 둘이, 알아서 치료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치의는 허망한 낯으로 떠나고 다시 둘이 남았다.
아스텔은 최대한 친밀하게 지내라는 주치의의 마지막 조언을 상기하며 공작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아스텔의 손을 거듭 고쳐 잡았다.
아스텔은 그의 손힘이 조금 과하지 않나, 했지만 손안의 온기가 따스하게 느껴져서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이내 아스텔이 토끼 같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도 한참 입술만을 달싹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치를 보는 게 지금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무척 불안해 보였다.
“저어, 공작님. 작은 부탁이 있어요.”
“네.”
“그, 그러니까요. 저번에 공작님이 제안해 주셨던 것처럼……. 치, 친구를 공작성에 데려오고 싶은데요.”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콧잔등 위에 짧게 키스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네, 얼마든지.”
아스텔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반대편 손을 쭉 내밀었다.
열심히 연기하려고 하지만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아나이스 공작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약속하는 거예요?”
“네, 약속.”
그는 고분고분하게 아스텔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소지와 소지가 얽히고, 엄지 손끝이 만나 약속 도장을 찍었다.
쿵, 쿵.
아스텔의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리면서 뛰었다.
그녀는 달리기를 오래 한 사람처럼 심호흡하면서 말했다.
“조금 까다로운 친구라서, 공작님 마음이 바뀌면 안 되니까 먼저 계약 도장도 찍…….”
그는 다시 아스텔의 손등 위에 짧게 입맞춤했다.
그녀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네, 도장도 찍었습니다.”
그는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이런 도장이 아닌데요!”
얼굴은 새빨갰지만, 전보다 어색함이 줄어든 듯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마음이 나날이 열려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도 따라 낮게 웃었다. 어쩌면 아스텔에게 숨겨 왔던 비밀을 말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키스해 주세요.”
“네, 네? 네?”
“이마에요, 아스텔.”
“혹시 또 열이 나세요? 열나는 건 저 같은데…….”
그의 이마 위로 아스텔의 촉촉한 입술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행복’을 느껴 본 적도,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한 적도 없었지만, 이 순간이 꽤 행복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조만간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고취되고 있던 그때, 아스텔이 그의 귓가에 대고 진지하게 선언했다.
“여, 여기까지예요. 그래도 입술 키스는 안 돼요.”
“…….”
“저, 저의 첫 키스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녀의 속삭임에 공작이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사랑하는 사람과 말입니까.”
“네! 그, 그리고 공작님도 첫 키스는 사랑하는 분과 하는 거예요. 다른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첫 키스는 아무렇게나 하면 안 돼요.”
아스텔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엄하게 도끼눈을 떴다.
아나이스 공작은 나른한 낯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약속했잖아요, 예전에.”
“……네?”
공작이 낮게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한 아스텔이 되물었다.
“별말 아니었습니다.”
아스텔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지만 공작은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일주일 뒤에 돌아오면,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이 터질 듯 빨개진 볼을 감싸며 낮게 속삭였다.
“눈이요…….”
“네, 이 성의 겨울은 아름다우니까.”
기대된다 웃으면서 창밖을 보는 아스텔을 응시하며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인내심이 꽤 긴 편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