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아침이 밝아 옴과 동시에 카시언 그레이는 자신이 모시는 상관인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과 함께 곧바로 아나이스 공작성 바로 앞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커다랗고 웅장한 첨탑이 눈에 띄었다. 곧 커다란 개선문 같은 정문 입구 너머로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석조 건물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대 황제가 하사했다는 공작성은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잘 짜인 공간이었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두 기사는 신기해 죽겠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중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카시언 그레이였다.
“이곳이군요. 아나이스 공작성 말입니다.”
“그렇지 뭐. 소문대로 웅장하구만. 인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니 잽싸게 나오자고.”
갑작스러운 기사단장의 말에 카시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인간을 안 좋아한다고요…… 네, 그렇겠군요.”
“그래. 그러니 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법 영광스러운 일이지. 공작 각하를 뵙는 건 기사 모두의 꿈 아닌가?”
아나이스 공작은 제국의 먹이사슬 최정점에 위치한 자였다. 반면 아스텔은 그의 여동생이었지만 조금 어리숙한 면이 있는 데다 작고 가냘픈 애였다.
어딜 보나 인간을 싫어한다던 아나이스 공작이 호의를 베풀 축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아나이스 공작.
만약 그 새끼가 쓰레기라, 아스텔을 어떤 식으로든 괴롭게 만든다면…….
‘절대 당하고는 못 있지.’
준비해 온 복수극이 다 뒤틀릴지언정 가만두지 않으리라.
숨어서 살든, 뭘 해 먹고 살든 숨죽인 채로 지내다 다시 복수를 도모할 수도 있을 테니…….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카시언 역시 잘 알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 맹수의 눈에 띈 이상, 아스텔이 도망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제기랄, 어쩌다 그딴 새끼가 얽혀서는.’
그러나 오빠인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을 둘러싼 위협을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코.
인상을 찡그린 카시언이 말에서 내려 정문 입구를 향해 걷자, 기사단장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 치며 말했다.
“긴장 풀라고.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 네 친구가 의탁해 있다고?”
“아, 네. 뭐…… 그리 절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시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애를 ‘그리 절친하지 않다’라고 표현하는 자신의 꼴을 상기하자 입맛이 영 썼으니까.
그러나 카시언의 표정이나 마음을 오해한 흑곰 같은 기사단장은 그를 힐끔대더니 중얼거렸다.
“자네가 여자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듣네. 일단, 들어가 보자고.”
굳게 닫혀 있던 공작성의 성문이 괴수의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듯 열렸다.
* * *
같은 시각.
오빠가 언제 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는 그를 기다리며 한가로운 오전의 티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밀실처럼 창문을 모두 닫은 티 룸 안에는 요즘 유명한 ‘블랙 로즈’라는 이름의 달콤한 향초를 피워 둔 상태였다.
나는 향초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연기가 구름 모양으로 자욱하게 퍼지는 것 하며, 코끝에 톡 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하며…….
진짜 블랙 로즈가 맞았다.
곁에서 다과를 살뜰히 챙겨 주던 샐리가 나를 향해 조심조심 물었다.
“블랙 로즈 좋아하세요?”
“아, 네.”
“문도 일부러 다 닫아 두라고 하셔서, 엄청 좋아하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샐리와 제니는 내가 갑작스럽게 블랙 로즈를 찾은 게 다소 의아한 듯했지만, 나는 가만히 방 안에 퍼지는 향기를 맡았다.
달콤하고 나른한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찼다.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하면 티 룸에 블랙 로즈의 향기가 모두 퍼졌으니, 이제 시간을 죽여야겠다.
“좋은 이야기 있어요?”
“아, 네! 조만간 가문 간의 검술 대회가 있는 것 아세요?”
“이번에 각 가신 가문에서는 누구를 검사로 내보낼까요? 거의 검술 대회가 아니라 축제니까……. 엄청 화려할 텐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끌어 올렸다.
“검술 대회라니, 되게 기대돼요.”
샐리와 제니의 수다를 듣는 시간은 몹시 즐거워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조잘거리며 찻잔이 빌 때마다 차를 거듭 따라 주었다.
“인간들의 축제도 엄청 대단하다던데……! 아스텔 님은 보셨어요?”
“저는 축제를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이게 다 가난해서 그랬다.
축제를 즐길 만큼 마음 편히 여유로운 시간이 많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등불 축제 정도를 오빠와 함께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샐리가 양 뺨을 붉히며 해맑게 말했다.
“혹시 ‘11월의 카니발’은 가 보셨어요? 저는 인간들의 축제 중에서 11월의 카니발이 너무 궁금하던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제니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샐리를 채근했다.
“11월의 카니발이 뭐야?”
샐리를 향한 질문이었지만, 괜스레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11월의 카니발이 뭔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우리 가문이 멸문한 이후로 제국에 생긴 행사이니까.
황궁에서는 역적인 뷔에트리 가문을 처단한 11월의 하루를 경축일로 삼아 매년 카니발을 벌였다.
축제가 생겨난 과정은 이러했다.
제국 최고의 마법 명가였던 뷔에트리 백작 가문은 몇 년간 비밀스럽게 기존의 황실을 없애고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려 했다.
그들은 흑마술사와 늙은 점성술사 등을 불러내 현 황제를 저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몇몇 백작가의 가신과 하인들의 배신으로 그들이 꾸미던 역적모의가 세간에 널리 드러났다.
뷔에트리 백작가가 황제를 찢어 죽이려 든 데다 다른 귀족 가문들까지 축출하려 했다는 것, 비리로 얼룩진 가문이라는 사실까지도 낱낱이 밝혀졌다.
모든 사람들이 뷔에트리 백작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역모를 꾸민 뷔에트리 백작가를 일벌백계하고 다시는 역적모의를 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바로 역당들을 처단한 매년 11월마다 격투가를 불러 콜로세움을 열고, 투우를 벌이며 뷔에트리 가문의 인장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황제는 카니발의 시작마다 매번 제국민들 앞에 나와 뷔에트리 백작가의 역모와 그들이 얼마나 쓰레기 같고 역겨운 행동을 했는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리 가문은 더욱더 나쁘게 기억되어 갔다.
샐리가 주머니에 꾸깃꾸깃 스크랩해 둔 신문을 꺼내 들었다.
나는 제니의 어깨너머로 광고 신문을 읽었다.
“11월의 카니발이 뭐냐면……. 이걸 봐!”
《역적 ‘뷔에트리’ 가문을 처단한 11월, 위대한 자들을 위한 카니발이 열리다!》
그러나 드러난 사실과 달리 뷔에트리 백작가는 비리를 저지른 적도, 역모를 꾸민 적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찻잔을 들어 연신 홀짝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은 카페인이 가득한 홍차를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히 오빠는 복수에 성공할 거다.
그럼 가문의 누명은 곧 벗을 수 있을 테니까 괜찮다.
원작 속 악당들에 대한 묘사처럼, 나는 그들이 지을 만한 비릿한 미소를 흉내 내 보았다.
난 절대로 원작처럼 안 죽을 거니까.
쾅!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티 룸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칠게 밀고 들어온 것은 바로 샘을 비롯한 공작성의 몇몇 치료사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몰라서 묻습니까?”
아니, 왜 왔는지는 잘 알지.
하지만 나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무해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샘의 뒤로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 리카르도가 빳빳하게 걸어 들어왔다.
“이 자식을 죽여야지, 원! 이 몸을 여기까지 이끌고 와?”
“제게는 치료사로서의 사명감이 있습니다, 리카르도 님!”
“됐고, 어쨌거나 저 어린애가 내 저주를 잠재웠잖나!”
“몰탈초를 처방한 사기꾼입니다! 오히려 죽이려 드는 것이라고요! 재규어 가문의 혈족에게 미약한 은혜나마 드렸던, 이 샘을 믿지 못하십니까?”
역시 처세술과 이간질의 대가, 샘다웠다.
리카르도를 반쯤 구워삶은 그가 능구렁이같이 연기하며 말했다.
“딱 오 분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럼 바로 저 여자의 사기술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놈도, 저놈도 나보고 시간을 달라 하니, 원! 아무튼 한 놈은 죽는 거다. 알겠냐?”
리카르도가 샘의 멱살을 잡으려 하다 으르렁댔다.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네.”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연히 샘 쪽이라고 생각하면서.
* * *
“마약성 수면초인 몰탈초를 처방하다니요, 바로 발각되어 다행이지 처방이 열흘을 넘기면 리카르도 님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환상적일 정도로 평화롭고 향기로웠던 티 룸 안의 분위기는 완벽히 파훼되었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그를 향해 말했다.
“샘, 제가 몰탈초를 처방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샘이 비열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에 든 까맣고 네모난 아티팩트를 흔들어 보였다.
“왜긴요. 그대가 한 말을 다 녹음해 두었으니 알지요.”
녹음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그의 이야기를 지적했다.
“치료소에서 녹음을 하는 건 불법일 텐데요.”
“그보다 당신처럼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자가, 더, 문제죠.”
꿀릴 것 없다는 듯 답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양이 어딘가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혼미한 모양이었다.
“몰탈초를 처방했다면 비윤리적인 행위가 맞겠죠.”
나는 조금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약성 수면초 처방은 치료사로서의 윤리를 저버린 비윤리적인 일이 맞았다.
내가 당당하게 나오자 그 뒤에 서 있던 치료사 하나가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샘, 제대로 된 증거를 들이대야지.”
“정말 몰탈초를 처방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 말에 샘이 녹음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귓가에 지난번 나와 리카르도의 대화가 들려왔다.
-마약성 수면초요?’
-그래, 다들 안 주긴 하더라만은……. 어차피 난 곧 뒈질 늙은이다. 그러니까 그냥 내놔.
-음, 잠깐 입을 벌려 보세요. 그럼 드릴게요.
-너, 진짜로 처방해 주겠다고?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대화 내용에 샘의 표정이 살기등등해졌다. 그때 샘의 요청에 계속 가만히 있던 리카르도가 재차 앞으로 나섰다.
“내가 처방해 달라고 했다! 뭐라고 하지를 말아라. 오랜만에 편히 잘 수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죽는 것도 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인간들끼리 싸워 대는 드러운 꼴 안 볼 수 있으니까.”
리카르도가 내 편을 들어 준 건 상당히 의외였다. 나는 살짝 감격한 눈빛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흥, 하고 콧김을 뿜으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몰탈초 덕분에 온몸이 나른해지고 아프던 다리가 안 아파서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저 할아버지, 츤데레인가 봐……!
그러나 샘 쪽에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치료는 치료사 윤리에 어긋납니다.”
“감히 리카르도 선대 가주님께 마약성 수면초를 처방하다니요!”
샘이 데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재규어 가문의 치료사가 불쾌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며 엄하게 말했다.
“재규어 가문의 전담의로서 이 사태를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뭣이? 내가 하라고 했다니까! 저기도 녹음되어 있잖아?”
리카르도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지만 전담의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노인인 리카르도의 팔을 꽉 움켜쥐려다 멈칫하고는 짓씹듯 설명했다.
“그러니까, 리카르도 님! 저희 가문에서 치료를 받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잖아요. 마약성 수면초라니, 어째서 저런 것을 드시냐고요!”
재규어 가문의 전담의는 타고나길 충심이 깊은 재규어 가문 사람답게 리카르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급하게 리카르도가 들고 있는 수면초 주머니를 빼앗으려 했다.
“됐다! 네가 무슨 이 늙은이까지 치료하려고?”
“아무리 오늘 잘 주무셨더라도 이제부터는 안 됩니다, 선대 가주님!”
나는 그를 향해 가만히 속삭였다.
“그냥 두세요.”
리카르도의 곁에 있던 치료사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흘기며 답했다.
“하……. 공작 각하가 후견 중인 인간이라지만 리카르도 님께 몰탈초를 처방한 일은 좌시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공식 서한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리카르도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하라고 했다니까. 항의는 무슨!”
그러나 환자의 말에는 효력이 없었다. 재규어 가문의 치료사까지 가담하자, 분위기는 나를 몰아가는 쪽으로 흘러갔다.
천군만마 같은 우군을 얻은 샘의 기세도 무척이나 당당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채근했다.
“치료학을 고작 1년 수료한 당신은 모르겠지만, 곧 죽을 환자도 아닌 자에게 몰탈초를 처방한 것은 중차대한 죄입니다.”
쏟아지는 책망에도 나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샐리와 제니는 치료사들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우리 아스텔 님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같은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네, 몰탈초 처방은 비윤리적인 행위죠. 그러니까 제가 ‘진짜로’ 몰탈초를 처방했다면…….”
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과 달리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내 시선의 끝에 리카르도가 걸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우선, 정말로 죄송해요, 리카르도 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드디어 자신의 죄를 인정했군요.”
치료사들이 언제나처럼 오만한 눈빛을 띤 채 나를 훑었다. 나는 리카르도에게서 시선을 돌려 샘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아뇨, 제 속임수를 인정하는 거예요.”
“……속임수?”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던 듯 샘의 낯이 일그러졌다. 잠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눈을 연신 깜빡이는 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불쌍한가 싶었지만, 이제는 내가 반격할 차례였다.
“사실 제가 처방한 건 몰탈초가 아니거든요.”
“……뭐?”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나는 혼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리카르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카르도 님, 제가 처방한 약초 보여 주세요.”
“어, 어…… 그래? 날 속였다고?”
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내가 속임수를 썼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내 얼굴은 인간들 중에서도 엄청 순진해 보이니까.
……사실 남들보다 조금 더 순진한 것도 맞기는 하고…….
하지만 감상도 잠시, 나는 독한 마음을 먹기로 했다. 나는 뜻밖의 말에 힘이 풀린 리카르도의 품에서 약재 주머니를 낚아챘다.
“네. 저는 총 두 가지 약재를 처방했어요. 몰탈초인 척하고요.”
“……뭐?”
“맨 위에 있는 이 잎은 몰탈초를 가공한 잎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이언이라는 약초예요. 이 약초로 리카르도 님을 치료한 거예요.”
“……아이언?”
“네.”
샘이 헛소리라는 듯 나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또 사기를! 아이언은 빈혈이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약초일 뿐이죠. 그 약초가 저주에 효과가 있다고요? 말이 됩니까, 이게?”
나는 주머니를 들어 보여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 저주가 아니니까 치료할 수 있었던 거예요.”
“……뭐?”
샘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거짓입니다! 불면의 저주에 걸린 가주님은 밤을 새운 채로 돌아다니시며…….”
“돌아다닌 이유는 하나예요. 다리가 간지러우니까요. 계속 뛰어다니고 스트레칭을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실제 리카르도의 병증은 샘의 주장이나 치료사들의 생각과 달리 흑마법에 걸린 저주가 아니었다.
“가주님은 자기 전에 다리가 이상하게 간지럽다고 하셨어요. 전형적인 하지불안 증상이죠.”
하지불안 증후군은 철분 부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철분이 가득한 아이언 약초를 처방한 것이었고, 좋은 효과를 봤다.
“오오, 그래. 맞다. 그동안 다리가 영 근질근질해서 잠을 못 잤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간지럽지 않더라고!”
“게다가 잘 때 무호흡 증상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홀렌느 약초에 소금을 섞어 드렸지요.”
홀렌느 약초는 잠을 자는 동안 기도에 양압을 넣게끔 만드는 마법 약재였다.
약간만 처방해도 수면 무호흡증에 도움이 된다.
내 말에 공작성 치료사들의 얼굴이 벙쪘다.
그중에 가장 막내로 추정되는 치료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부, 분명 치료 아카데미를 1년만 수료했다고…….”
“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희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을 다 아는 것…….”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했던 막내 치료사의 눈빛에 존경심이 깃들자 불안해진 샘이 선수를 쳤다.
“그럼 왜 몰탈초를 처방했다고 한 거지?”
“그건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거예요. 그리고…….”
그 말에 재규어 수인 가문의 치료사가 다시 주머니를 급하게 가져갔다.
“진짜 몰탈초가 아니네. 몰탈초 잎이 아니니…….”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번져 나갔다. 나는 그들 곁에서 얼이 빠진 듯한 리카르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럼…….”
“……네?”
“그럼, 저주가 아니라고…….”
그가 초조한 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잠을 잘 수 있는 게냐, 나도?”
불면을 앓는 사람들은 천금을 주어서라도 잠을 자고 싶다고 말한다.
리카르도 역시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당연하단 듯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물론, 제 처방을 잘 따라 주시면요.”
“그리고…….”
자신만만한 아스텔에게 리카르도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닿아도 되는 게냐?”
나는 작게 웃었다.
“네.”
그리고 재규어가 아니라, 아기 고양이를 대하듯 따뜻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만져도 저주 안 옮아요, 진짜로! 저 봐요, 살아 있잖아요!”
리카르도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진짜로 닿았다.”
“네, 사람하고 닿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그가 조용히 내 손을 흔들어 보았다. 우리의 맞잡은 손 위로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몇 년 만에……. 제기랄.”
당황한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리카르도의 눈시울이 불그스레했다.
“이제, 어린 손주 녀석도 만질 수 있게 되면…….”
나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자 그가 호통치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젠장, 우는 거 아니다. 보지 마라, 이 멍청한 녀석아.”
“네, 할아버지.”
나와 리카르도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에게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등 뒤를 슬쩍 살폈다.
‘이렇게 공방전을 펼쳤으면,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나는 꽁꽁 닫힌 티 룸의 문과 창문을 힐끔거렸다.
마침, 바로 그때였다.
쿠, 쿵!
곁에서 씩씩거리던 샘이 혀를 빼물고 쓰러졌다. 키가 백 팔십이 훌쩍 넘는 거구의 사내가 쓰러지자 대리석 바닥이 깨질 듯한 큰 소리가 났다.
“이, 이게 무슨…….”
치료사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이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리카르도 님.”
나는 기절하듯 잠든 샘에게 가까이 갔다. 리카르도는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좇았다.
“저자는 왜 죽은, 아니, 기절한 게냐?”
나는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샘은 저주를 가장해서 리카르도 님을 죽이려 했거든요.”
리카르도의 병증이 흑마술사의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그가 어떤 돌발 행동을 보일지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쓰러트릴 수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정직한 나로서는 그의 화려한 궤변을 이겨 낼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나는 기절한 샘의 곁에 쪼그려 앉아 그의 초록빛 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샘의 손에는 롤트안느 잎의 물이 들어 있어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치료사 중 하나가 허망한 어조로 물었다.
“롤트안느 잎……?”
“네, 독초로 유명한 롤트안느 잎이요.”
나는 샘의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롤트안느 잎을 오래 빻으면 손끝에 연한 초록 물이 들고, 손톱의 반달 부분은 새까매지죠. 마치 지금의 샘처럼요.”
치료사들 역시 롤트안느 잎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았다. 나는 입을 열어 또랑또랑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리카르도 님, 전에 샘이 주었던 약초 있죠? 확인해 보세요. 수면초인 세틸 풀과 비슷하지만, 냄새가 달라요.”
내 설명에 다른 치료사들 역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치료사 하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진짜, 롤트안느 잎이잖아. 그, 그럼 샘이 리카르도 님을 죽이려 했던 거라고?”
다른 치료사 하나가 악을 썼다.
“그러고 보니, 리카르도 님이 저주받았다고 제일 먼저 판단한 것도 샘 저 녀석이야!”
“……저, 저 녀석의 말만 믿고 있었는데…….”
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저 녀석의 진료 결과만 믿었지?”
치료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며, 각자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소리가 연신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이 샘의 말을 무조건 믿었던 것은 당연하다.
샘은 기본적으로 사기와 회유의 천재였다. 게다가 화술을 통해 타인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흑마법이 걸린 아티팩트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모든 증거를 잡고도 그를 기절시켰겠는가.
게다가 전장을 누비던 리카르도의 악명도 있으니, 그를 무서워하는 평범한 수인 치료사들은 쉽게 저주라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확실해지네요. 여기서 더 나아갔다면 리카르도 님께서는 아마 곧 돌아가셨을 거예요.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죠.”
나는 샘을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성내 사람들은 리카르도 님의 죽음이 저주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을 거고요.”
리카르도가 험상궂게 말했다.
“……네가 마지막으로 날 치료했으니, 네가 날 죽였다고 의심받았을 수도 있겠구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대리석 바닥에 퍼진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샘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괘씸하다는 듯 샘을 노려보았다. 뷔에트리 백작가에 역적 누명을 씌워 망하게 한 뒤,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박쥐처럼 몸을 옮긴 샘.
‘이 자식이 왜 공작성에 들어왔는지, 그에 관한 정황은 아티팩트를 분석해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
“샘 혼자만 한 행동은 아닐 거예요…… 아마 리카르도 님을 죽이려고 한 배후가 따로 있을 거예요.”
리카르도의 표정이 흉흉해졌다. 안 그래도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가 작정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나는 많이 쫄았지만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진실이 밝혀지자마자 샘이 자살을 택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미리 블랙 로즈 향초를 강하게 피워 뒀어요. 장미와 롤트안느 잎은 상성이 안 맞으니까, 아마 직전까지 롤트안느 잎을 만지다 왔을 샘이 서서히 기절하도록. 그래서 절대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그때, 샘과 가장 친하게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치료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일단……. 그래도 더 아,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넌 닥쳐. 그건 내가 알아볼 거니까.”
리카르도가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끝이 다가왔다.
리카르도와 치료사들이 설전하는 사이, 나는 조용히 샘의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이때가 아니라면 절대로 뒤질 수 없지.’
나는 조용히 샘의 가슴팍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수상한 약초를 더 가지고 있나 찾아볼게요.”
첩자 짓이라는 게 으레 그렇다.
본인부터가 항상 남을 배신하고 괴롭힐 생각만 하고 있으니, 순수한 의도로 가까이 다가오는 자가 있을지언정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했을 샘은 언제나 최종 흑막이 선물한 아티팩트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
나는 마침내 그의 품 안에서 브로치로 위장한 자그마한 아티팩트를 몰래 빼낼 수 있었다.
원작 속에서 단순한 서술 몇 줄로 끝났던, 그러나 끝내 카시언이 찾지 못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할 아티팩트였다.
타이밍 좋게 내가 브로치를 주머니에 숨기자마자 설전을 마친 리카르도가 뚜벅뚜벅 샘과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 자식을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어.”
그는 거친 손길로 샘의 목덜미를 잡고 잇새로 주문을 외웠다. 샘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양팔과 양다리를 대(大)자로 뻗은 우스꽝스러운 자세였다.
“망할 놈! 절대 제명 다 살고 뒈지지는 못하게 주박했다. 감히 날 죽이려 들어?”
리카르도는 본디 심성이 괴팍한 데다 한때 마물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주춤했다.
이제 죽을 뻔한 할아버지도 구해 줬고, 조사하는 척하며 가장 바라마지 않던 샘이 지닌 아티팩트도 몰래 훔쳤다.
샘의 소식에 공작성 안에 있는 다른 두 첩자에게도 슬슬 반응이 오지 않을까.
오늘까지의 모든 일은 내 기준으로 100% 성공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계획이 120% 정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카르도 님.”
“왜 그러냐.”
“왠지 배후가 짐작이 가는 것도 같아서요, 제가 직접 고문 과정에 참여해도 될까요?”
샘을 직접 털어 본다면 더 많은 힌트를 잡을 수도 있겠지.
“고문은 무슨! 어린애는 그런 거 보는 것, 아니다!”
리카르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은 지옥불에 넣어 둘 테니 나중에 잠깐 꺼냈을 때 보러 오너라.”
나는 리카르도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재규어 가문의 지옥불 고문은…… 듣기로 엄청나다고 했으니까…….
‘직접 고문하는 것보다, 상황이 편하게 되겠어.’
생각해 보니 마음이 몹시 심약한 내가 고문을 직접 본다면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럼 오늘 안에 다시 보자꾸나.”
시큰둥하게 인사를 건넨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기절한 샘은 투명 밧줄에 묶인 양 리카르도의 걸음을 따라 허공에 둥둥 뜬 채 딸려 나갔다.
* * *
몇 시간 뒤, 티 파티장 안.
공작의 피후견인인 아스텔이 애프터 눈 티를 마시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많은 시녀들이 아스텔의 곁에 서 있었겠으나,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골든 리트리버 수인 시녀들은 커튼 뒤에 숨어 숨죽인 채 아스텔의 티 파티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충 확인해 보니 정말 네 말이 맞더군. 배후는 네가 캐낸다고 해서 일부러 안 물었다.”
의외의 배려에 아스텔은 씩씩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런 배려를 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은 재규어 가문의 지옥불에 가둬 뒀으니 죽을 만들든, 빵을 만들든 너 알아서 해라.”
“케, 케켁! 지, 진짜로 지옥불에…….”
숨어 있던 샐리가 급하게 콜록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재규어 가문의 지옥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샘은 그 안에서 온전히 살지도, 편하게 죽지도 못한 채로 영원히 고문 같은 고통을 받으며 타오를 예정이었다.
우리 부모님을 죽이고, 뷔에트리가를 멸문으로 밀어 넣고, 리카르도를 죽이려 든 대가였다.
“그리고 말이다.”
리카르도는 아스텔을 지나치게 애틋해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불퉁한 태도로 혀를 쯧쯧 차더니 테이블 위에 따로 챙겨 온 무언가를 하나둘씩 올려 두기 시작했다.
그가 건네 온 꾸러미는 약초 키트와 물약 키트 등 아스텔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꾸려져 있었다. 아스텔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이게 다 뭐예요?”
“할아버지가 아니…… 아니다, 그래.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생소한 호칭에 샐리는 당황한 시선으로 아스텔과 리카르도를 번갈아 보았다.
리카르도는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였다. 편애와 호불호가 무척이나 심해서 현 가주도 그를 어찌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변덕쟁이 노인네라고 뒤에서 다들 수두룩하게 욕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를 대놓고 비난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가 몇십여 년 동안 마물과 싸워 얻은 공적이 엄청난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재규어 가문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다, 수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스텔에게 이리 다정하게 굴다니.
“네, 할아버지!”
게다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줄로만 알았던 아스텔이 너무나도 굳세 보였다. 낯선 아스텔의 모습에 샐리와 제니는 너무 놀라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네가 내 저주, 아니지, 병증을 아직 완벽히 고친 건 아니지만.”
“……네?”
이어지는 말에 아스텔은 계속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본디 리카르도는 자신의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마구 토해 내는 괴팍한 노인이었다. 샐리와 제니는 계속해서 언제 터질지 모를 리카르도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저 괴상한 노인이 아스텔 님을 겁박하기라도 하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너!”
마침내 불호령이 떨어졌다. 티 룸의 커튼 바로 옆에 서 있던 샐리와 제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리카르도 님이 어째 이상하다 했어!
저 괴팍한 노인이 저 정도면 많이 참았지!
아스텔 님이 지팡이로 맞으면 내가 몸을 던져 막아야겠다!
그들의 머릿속에 온갖 비장한 생각이 감돌았을 때였다. 불퉁해진 리카르도가 틱틱거리며 말했다.
“뭐…… 그래, 됐다. 일단 이것도 받거라.”
……뭐, 뭐야. 아스텔 님이 안 맞았어?
샐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스텔과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이게 뭐예요?”
샐리와 제니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스텔도 의문스러운 듯했다. 그녀는 의아한 낯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뭐, 녹음 아티팩트다.”
놀랍게도 그가 아스텔에게 건넨 것은 정말 녹음 아티팩트였다.
녹음 아티팩트는 기본적으로 비쌌다. 게다가 이것은 녹음 기능에 영상구 기능까지 있었다. 아까 샘이 당당하게 들이민 녹음 아티팩트 같은 저가형과는 차원이 다른 형태였는데 상당히 값비싸 보였다.
“하. 그 얍삽한 놈들이 뭐라고 하면, 너도 녹음 아티팩트를 써먹으라고!”
“이거 부, 불법 아닌가요?”
“내가 줬다고 해. 내가 허락하면 상관없으니까! 하여튼 몹쓸 놈들. 저 어린것한테서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괴롭히는지!”
그 말에 울컥한 샐리는 말하고 싶었다. 리카르도 님도 괴롭히셨잖아요! 라고.
하지만 입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
아스텔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아티팩트를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티 룸에 정적이 흘렀다. 두 시녀, 샐리와 제니가 손에 땀을 쥔 채 상황을 관전했다.
그 와중에도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신경 줄이 굵은 노인은 연신 툴툴거렸다. 그가 아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다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흥, 됐다. 얼른 집어넣어!”
그러나 아스텔의 호구 본능은 ‘어떻게 이렇게 비싼 걸 함부로 받을 수가 있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속내를 알아챈 리카르도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녹음 아티팩트를 들이밀며 씩씩댔다. 샘을 처치할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아스텔은 사건을 하나 해결한 후 다시 쫄보 모드로 돌아선 상태였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낯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네, 가, 감사해요!”
“이것도 좀 먹어라. 하여튼 말라 가지고는. 그러니까 나쁜 녀석들이 널 만만히 보는 거야. 살 좀 내가 찌워 놔야겠다.”
아스텔은 그가 건네주는 산더미만 한 산삼을 보고 경악한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그, 그러니까……. 전 그렇게 마른 편은 아닌…….”
“살쪄야 해. 너 좋아서 주는 거 아니다. 내 저주, 아차차, 아니지, 앞으로 내 불면증 치료에 매진하란 소리야.”
그 말에 커튼 뒤 샐리는 생각했다.
리카르도 님, 당신이 아스텔 님을 좋아해서 주는 게 아니라기에는 아마 재규어 가문의 적자인 현 가주님도 본 적 없을 함박웃음을 짓고 계시는데요……?
그러나 샐리에게는 발언권이 없었다.
그녀는 곁에 붙은 제니와 찰나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
“뭐 원하는 것은 없느냐.”
“원하는 건요…….”
“뭐든 말해 봐라.”
괴팍한 노인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처음으로 인자한 낯빛을 했다.
사실 아스텔이 공작성 내 권력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과 카시언의 복수극에 동참해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불면증 한 번 고쳐 준 대가로 부탁하기에는 너무 과한 데다가 섣불리 신분을 밝힐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선의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 부탁드려도 돼요?”
“소원권이냐?”
“네, 소원권이에요!”
“뭐, 그러든가.”
그들의 대화가 계속되는 사이, 거리를 둔 채 숨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리던 샐리가 제니를 향해 속닥거렸다.
봐도 봐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있잖아. 리카르도 님이 워, 원래 저런 성격이신가?”
“혹시 아스텔 님이 사용한 게…… 정신 조종 물약인 건가?”
샐리와 제니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샐리 쪽에서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확실했다.
리카르도 님이 그런 약을 먹지 않은 이상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들은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었다. 샐리가 경건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 그렇지만 무슨 짓을 하셨더라도 아스텔 님이 나쁜 생각으로 그러신 건 아닐 거야.”
위대한 마물 전쟁의 선봉장에 섰던 선대 가주.
무공 훈장을 몇십 개나 받은 괴팍한 노인.
그 수식어들에 둘러싸여 있어 저런 온화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네, 할아버지. 나중에 꼭 소원 들어주셔야 해요!”
리카르도가 흰 털이 드문드문 섞인 눈썹을 매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도 듣다 보니 나쁘지만은 않구나.”
……아무리 그래도 리카르도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스텔밖에 없을 것이다.
재규어 가문의 어린 후계자마저도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어렵게 대하니까.
기분이 이상한지 그는 조용히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면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
“재미있는 소식이요?”
“그래, 수도에서 인간 기사들이 왔다던데…….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구나, 너와.”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인간 기사들이 왔다니.
얼마 전 나누었던 편지를 떠올리자면 그중 분명 오빠도 섞여 있을 것이다.
오빠가 이렇게나 빨리 왔다고?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꿈일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스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정말요! 공작성에 인간이 오다니…… 기쁘네요!”
편지로만 그리움을 달랬는데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걸까.
북부의 공작성 안에서 재회하게 되다니, 마음이 한결 더 울렁거렸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오빠의 용돈을 받아 왔고, 오빠가 지켜 줬지만…….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 * *
기사단장과 함께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선 카시언은 마침내 아나이스 공작과 마주 앉았다.
그런데 뭔가가 확실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대단히 삐딱했기 때문이다. 초면인 것치고 대단한 무례였다.
어린 시절에는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고,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문을 전복시킨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날을 갈아 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타인의 적의를 쉽게 눈치챘다.
‘아나이스 공작은 확실히 나를 싫어하는군.’
하지만 왜?
그가 자신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싫어해야 하는데?
카시언이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몹시 비호감인 인간을 대할 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그는 일부러 허리를 곧게 펴고 아나이스 공작을 당당히 마주 보았다.
‘설마 내 정체를 아는 건가. 공작은 뷔에트리 백작가랑 전혀 관계없을 텐데……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 일단은 가문의 배신자들이 이 성에 숨어든 건 명백하니까.’
생각을 정리한 카시언이 눈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공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나이스 공작의 따끔한 시선 역시 내내 카시언을 향해 꽂혀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입을 열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미 기사단이라고 했나?”
“네, 황제 폐하의 든든한 오른 날개인 황궁 장미 기사단의 단장, 로파 쉘린드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장미 기사단 부단장 대리로 참여하게 된 평기사 카시언 그레이입니다.”
아나이스 공작은 고개를 까딱한 채 그들을 응시했다.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적당히, 한량 같은 태도를 고수하며 공작을 관찰하려던 카시언은 한쪽 입매를 치켜올리며 삐딱하게 생각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데, 태도까지 재수가 없네.’
이내 아나이스 공작의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카시언 그레이라. 제국의 영웅이라지.”
카시언이 몇몇 내전에서 빛나는 성과를 발휘해 황제로부터 무공 훈장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으로 영지 없이 ‘그레이’라는 성과 준귀족 작위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에게는 크게 대수롭지도 않을 일이었다. 공작은 제국의 검은 손으로 대륙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위험한 자였다. 과장된 면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 본 그는 정말 강해 보였고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위협적이었다.
여러모로 카시언, 자신과는 천지 차이인데.
아나이스 공작이 일개 평기사의 이름을 곱씹을 이유가 쥐뿔만큼도 없었다는 소리다.
“예, 맞습니다. 카시언 그레이.”
카시언이 퉁명스레 답하자 그의 곁에 있던 기사단장 로파가 중언부언했다.
“아, 예. 각하! 제 곁에 있는 이 녀석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감인 카시언 그레이입니다. 제 후임으로 밀고 있는 친구죠.”
“아.”
공작이 한쪽 눈만 치켜떴다. 단답에 누가 봐도 삐딱한 태도였다.
“평민 출신으로 작위를 받다니, 신기하군요.”
물론, 카시언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감사드립니다만, 출신을 극복한 사람이 저뿐만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아나이스 공작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입양아 출신으로 공작 작위를 거머쥐었으니까. 그 사실을 눈치챈 공작이 날카로운 눈매로 카시언을 응시했다.
그러나 카시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저의 일이 크게 신기한 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각하.”
바보가 아니라면 카시언의 말이 품은 함의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둘 사이에 낀 기사단장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팔딱거렸다. 그가 두툼한 팔로 카시언의 팔을 퍽 치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므으. 므흐는 그으? (뭐야. 뭐 하는 거야?)”
기사단장이 눈을 몹시 빠르게 여러 번 깜빡였다. 그러나 카시언도, 공작도 기사단장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나이스 공작은 기사단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 되는 말은 아닙니다.”
카시언은 공작의 서늘하되 반반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로, 그다지 타격감은 없어 보였다.
카시언이 공작을 바라보며 나붓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각하.”
카시언을 보던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이 더욱 묘해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기사단장 로파 쉘린드는 생각했다. 분명 모두 존대어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냥 출신에 대해 말한 것뿐, 서로를 크게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본인, 로파 쉘린드는 그들 사이에서 쥐포가 되어 가는 기분이지?
“큼, 큼.”
둘 사이에 낀 기사단장은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전운마저 감도는 이 상황을 타개할 묘수는 없었다. 그 대신 아나이스 공작 쪽에서 먼저 본론 아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친구분이신 아스텔 님이 공작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카시언은 별다른 표정 없이 입술을 열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들은 것도 같군요.”
지극히 무심한 어조를 꾸며 내는 것은 카시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는 듯한.
‘오빠, 오빠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당연히 아스텔이지.’
카시언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채 피식 웃었다. 언젠가 그 말을 모두 앞에서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은 감상에 젖어서.
“그 애는 어린 시절에 잠깐 인연을 맺었을 뿐이죠. 친구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친밀하지가 않습니다. 잘 기억도 안 나네요. 적발이었나?”
카시언은 아나이스 공작을 향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스텔과 관련된 화제를 그리 오래 끌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카시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단장이 끼어들어 농담을 건넸다.
“하하, 각하. 이 친구가 레이디들에게 워낙 인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친구 정도는 별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요. 워낙 인기남이니. 안 그런가?”
상황을 풀기 위해 연신 허허거리며 웃는 기사단장에게 카시언이 습관적으로 거만한 체하며 능글거렸다.
“예, 저는 다자 연애를 추구하니까요?”
입을 맞춘 듯한 둘의 대화에 아나이스 공작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다자 연애?”
공작이 관심을 보이자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기사단장이 장난스레 말했다.
“아, 예! 요즘 수도의 평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 폴리 아모리라고 해서 서로 동의하에 여러 명과 연애하는 거랍니다!”
“연인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가 무심히 물었다.
공작의 차가운 표정을 힐끔거린 기사단장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때라고 지레짐작했다.
그가 화통하고 큰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네! 연인이 한두 명이 아니죠. 하하하, 참으로 개방적인 세상이 됐지 뭡-.”
쨍그랑!
큰 소음과 함께 아나이스 공작이 쥐고 있던 찻잔이 박살이 났다.
동시에 살기 어린 눈빛을 받은 기사단장과 카시언 모두 속으로 뜨끔할 정도의 커다란 소리였다.
“아, 제 실수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나이스 공작이 온화하게 말했다. 그리고 손끝을 까딱였다.
이내 찻잔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복원되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기사단장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 러니까…. 공작 각하, 마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 하자면 말입니다. 저희 기사단은 언제든 각하의 명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정말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아나이스 공작이 속삭였다.
“기쁘군요.”
의례적인 미소라도 지어 주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카시언은 지금까지 아나이스 공작을 만나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사실 관심도 없었다.
정확한 종은 그 누구도 모르지만 가장 아름답고 희귀한 중종(重種) 맹수라는 소문과, 마물 전쟁의 악귀라는 기이한 악명만을 들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 이 남자의 태도를 보라.
모두에게 무관심하다 못해 감정 없는 수인이라던 그가 자신을 향해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꼴을.
그 순간 카시언은 제 여동생이 보냈던 편지를 다시 떠올렸다.
[아나이스 공작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아. 물론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카시언의 머리에 적색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나이스 공작은 좋은 사람 아닌 것 같아, 아스텔.
이건 확신해.
그리고 저 자식……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
* * *
리카르도 님이 돌아가고 저녁 식사 시간이 왔다. 오빠가 지금 공작성 안에 있다는 소식에 들뜨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공연히 돌아다니다 마주치면 반가운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실수라도 저지를까 봐, 난 일단 방 안에서 머무르기를 택했다.
‘그 샘이란 놈이 정신 차릴 때쯤 부르마. 오래는 안 걸릴 게다.’
‘……네, 그래요.’
혼자 남은 나는 샘의 브로치 모양의 아티팩트를 확인하는 데에 골몰했다.
‘이 아티팩트는 다른 첩자들과, 흑막이랑 연결되어 있다고 했어. 이걸 통해 최종 흑막의 정체에 도달할 수 있다던데.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거지?’
한참을 연구해 보았으나 샘을 족치지 않는 이상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주머니 안에 잘 넣어 두고.”
나는 일단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거금을 주고 산, 보호 마법이 작동하는 주머니 안에 브로치 아티팩트를 쏙 집어넣었다.
사실, 이 아티팩트를 분석하려면 보다 전문적인 사람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아티팩트 감정사 같은 직업인 말이다.
‘당장 감정사를 구하는 것보다는 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게 더 빨라.’
그전에, 수도 기사단의 거취에 대해 알아볼 겸 아나이스 공작님을 만나 뵈러 가려던 나는 문 앞을 지키고 선 시종을 보고 멈칫했다.
“오늘 저녁, 각하께서 아스텔 님과의 식사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 왜요?”
“금일은 수도에서 온 기사단 인사와 마물 전쟁 회의를 진행하실 듯합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정말로 오빠와 내가 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실감이 났다.
“네, 그러면…… 혹시 공작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면 꼭 알려 주세요.”
나는 흥분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발연기라 들뜬 마음이 표정에 다 티가 났겠지만, 다행히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인간 기사단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아나이스 공작성은 대단히 떠들썩해졌다. 혼자라도 식사하기 위해 내려가던 중, 복도를 걸을 때마다 시녀들의 목소리가 귀를 쨍하게 울릴 정도였으니까.
“평민 기사, 카시언 그레이!”
“엄청 잘생겼다던데!”
“다들 분칠하고 난리가 났어요. 특히 오랑우탄 수인인 밀레니아가 아주……!”
“수인들이 그럴 거면 그냥 키스 갈기라고 막 그러던데, 갈기는 게 뭐죠?”
‘키스를 갈긴다고? 누구한테? 설마, 설마 우리 착하고 순진한 오빠한테?’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멈춰 몇 마디를 더 주워들었다.
“그냥 키스해 버려! 그다음에는 알아서 하겠지!”
“아, 너무 재밌겠는데?”
수인 시녀들끼리 숙덕거리는 소리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가 급하게 닫았다. 아무래도 오빠에게 빨리 경고를 해 주어야겠다. 우리 오빠가 얼마나 순진한데. 싫어도 거절 못 하는 사람인데……. 공작성 안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층계를 급히 뛰어 올라갔다. 나를 따르던 시녀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함께 발을 놀렸다.
“아스텔 님, 왜 저러시지?”
“……그러게.”
하지만 수인 시녀들이 오빠를 노리고 있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델피니움 룸으로 돌아온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언제쯤 오려나…….”
오빠와 접선하려면 언제나 첼로가 필요했다.
항상 오빠가 먼저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지에 대해 편지를 써서 보내오고는 했으니까.
‘비밀리에 만나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나는 시녀들이 살짝 열어 두고 나간 창문 옆에 서서 조용히 첼로를 기다렸다.
마침내, 까만 먼지를 뭉쳐 놓은 듯한 귀여운 털뭉치가 저 멀리서 날아오고 있었다.
첼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복도에 시녀들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어깨 위의 첼로는 평소처럼 그 누구의 시야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괜히 의심 사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기로 했다.
물론 몇 가지 난관이 있었다.
복도 코너를 돌자마자 시녀들을 마주친 것이다.
“아스텔 님, 어디 가세요?”
“아아, 산책을 조금 하려고요!”
“혼자 가시게요?”
“네, 정원 같은 곳 좀 산책하면서, 약초도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내 말에 시녀들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나는 정원으로 나오라는 오빠의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이번 만남의 컨셉은 ‘정원으로 홀로 산책 갔다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마주친다’는 것!
샘을 잡아넣은 일로 가뜩이나 주목받고 있는 이때, 오늘 처음 공작성에 들어온 외부인과 대놓고 티타임을 갖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하니까.
내게 필요한 건 아주 잠깐, 딱 오 분 정도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나는 첼로가 몸을 여기저기 숨기며 날아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궤적을 따라갔다.
첼로가 날개를 파닥거리다 숨으면 나도 복도에 몸을 숨겼다.
괜히 인간을 싫어하는 수인이라도 마주쳤다가 시비 걸릴까 봐서였다.
그렇게 수인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나는 다시 걸었다.
조심조심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간 뒤 예쁘게 조성된 숲길을 지나고 나니…….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예쁜 정원이 나타났다.
첼로를 따라 도착한 자그마한 유리 정원은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끼리 짧은 담소를 나누기에 전혀 위화감이 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유리 온실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속에서 듬직하게 서 있는 남자.
바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오빠, 카시언 그레이였다.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은 카시언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왔어?”
나는 큰 소리로 ‘오빠!’라고 부르려다가 급하게 주변을 살핀 뒤 작게 미소만 지었다.
“안녕, 카시언.”
그리고 그 대신 힘껏 손을 흔들었다.
손목 안쪽, 고대 마법의 표식이 새겨진 여린 살이 시큰거렸다.
이 아픔에 이름을 붙이자면 ‘기쁨과 슬픔’이 될 것이다.
오빠를 만난 기쁨과 상한 얼굴을 보자마자 치미는 슬픔이 몸과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빠를 향해 성큼 걸어가 그를 마주 보았다.
포옹은 할 수 없었지만 내내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걸친 채였다.
“오랜만이네.”
그는 크게 반갑지 않은 듯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응!”
나도 애써 반가움을 숨겼다.
곧장 오빠는 가장 궁금해했을 말을 덥석 꺼냈다.
“너, 왜 여기 있어? 아니, 도대체 어떻게 공작을 구한 거야?”
“우연히! 우연히 구한 거야!”
복수하러 왔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예전에 복수에 동참시켜 달라고 여러 번 말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그, 오빠. 내가 꿈을 꿨는데……. 복수 말이야…….’
‘넌 절대로 복수 같은 거 할 생각도 하지 마.’
딱 잘라서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나도 도울게, 그러니까 정보가 있는데, 뭐냐면.’
‘내가 너한테 복수 얘길 괜히 한 것 같다. 넌 이것만 기억해. 넌 내가 잘못돼도 나 모른 척하고 살아야 돼, 아스텔.’
어쩔 수 없이 몰래 한번 그를 도왔더니, 노발대발하면서 그 뒤로는 복수극이 진행되는 상황을 단 하나도 공유해 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금처럼 약간이나마 정보를 공유해 주는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에게 사실 복수하러 공작성에 들어왔어, 라고 말하면 암흑길드를 동원해 나를 어디 섬나라에 가둬 놓는 마법을 부릴지도 모른다.
……우리 순진무구한 오빠는 가끔 동생 한정으로 기이한 행동을 할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대충 둘러댔다.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는지! 엄청 신기하지?”
“너…… 그뿐이야?”
“응! 게다가 공작님은 소문과 달리 친절하셔. 내가 생명을 구해 드렸더니, 내가 원하는 걸 다 지원해 주고 계시거든!”
“…….”
오빠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카시언이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래. 아직까지는 그래 보이네.”
“그럼!”
“볼살 붙었네. 햄스터 같아. 너, 마음 편하면 볼살부터 붙잖아.”
“그럼, 지금 마음 엄청 편해!”
“그래?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그 공작은…….”
오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이해가 안 가네,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그럼 그 새끼, 설마 나만 싫어하는…….”
귓가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작은 혼잣말과 동시에 그가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일단, 아니다. 넌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아스텔. 내가 알아서 알아볼 테니까.”
카시언이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무 마음 주지 마. 아주 변덕스러운 놈이라던데.”
공작님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에는 그다지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오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오빠의 팔목을 감싼 낡은 소맷귀가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말만 제복이지 실이 잔뜩 엉키고 단추는 다 터져 정갈하지 못한 상태였다.
카시언 그레이가 누구인가.
수도의 꽃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호남형의 기사였다.
그런 그가 복수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며 저런 낡아 빠진 옷을 입고 있다.
나는 그를 안쓰러운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때 카시언이 내 옷 주머니 쪽으로 자그마한 무언가를 찔러 넣었다.
과거 뒷골목에서 양아치 잡배들의 주머니를 털던 소매치기 실력 그대로였다.
‘뭐지?’
주머니에 들어가는 순간 언뜻 보니 영상구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카시언을 향해 물었다.
“……잘돼가?”
주어는 복수였다. 내 말을 눈치챈 카시언이 눈살을 찡그리듯 구기며 웃었다.
“글쎄.”
사실 알고 있다.
‘원작 타임라인에 따르면, 공작성 안에 들어와서 첩자에 관한 실마리라도 잡아 보려고 전전긍긍하는 중이겠지.’
하지만 이미 이 아스텔이 다 처리했다고.
“왜 그리 뿌듯한 표정이야, 아스텔?”
“아냐, 아무것도.”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다음 사뭇 다정한 오빠의 얼굴을 하고 내 볼을 콕 찔러 보며 물었다.
“요즘 돈은 좀 어때, 부족한가, 응?”
다른 사람들은 저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하지 못하겠지만, 분명 용돈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자기 옷은 저 망나니 꼴을 하고!
바보, 멍청이!
손끝이 저릴 정도로 속상해져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하나도 안 부족해!”
“진짜?”
그는 다정한 어조로, 평소 사교계의 영애들에게 하듯이 내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 낸 채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응, 카시언. 나만 믿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뭘 하겠다고?”
그의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더욱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다 줄게!”
그 말에 카시언이 어린아이의 재롱을 구경하듯 즐거워하며 짓궂게 받아쳤다.
“뭐, 진짜? 진짜 다 줘야 해. 이제 나 돈 안 벌어도 되겠네?”
“그럼! 평생 한량처럼 놀아도 돼!”
“아아, 너무 좋다. 내 꿈이었는데. 불로소득으로 먹고살기.”
오빠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저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무언가 주려 하면 쌈짓돈조차 받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주기적으로 첼로를 통해 자신이 모은 돈의 일부를 용돈이라며 보내오고 있었다.
복수 자금이 워낙 많이 들어 정작 자기 의식주조차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급작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듣자 하니 수도의 기사단은 그 어떤 곳보다 텃세가 심하다고 들었다.
우리 오빠는 낡아 빠진 기사단복을 입고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도의 기사들은 유복한 집안의 자제들이 많아 거만하고 몹시 사납다던데, 착한 오빠를 괴롭히는 못된 놈들만 있는 건 아니겠지…….
마음이 먹먹해진 나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오빠의 낡은 옷 소매를 부여잡았다.
“손가락 걸고 약속해. 진짜야. 꼭 부자가 되어서 섬을 하나 사 줄 테니까!”
나는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한쪽 무릎을 까딱했다. 맹세하는 시늉이었다. 그걸 본 오빠가 기특해 죽겠다는 듯 청량하게 웃으며 제 오른손을 왼 가슴에 대고 눈을 찡긋했다.
“기대할게, 아스텔. 안 사 주면 미워할 거야?”
나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돈 많이 벌어서 다 사 줄게.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여기 카시언을 노리는 여성분들이 조금 많아.”
키스 운운하던 수인 시녀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뭐? 그래?”
그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조심해.”
“뭐……. 나야 감사한데?”
그는 여전히 능글맞은 척하는 연기를 못 버리고 씨익 웃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가슴을 콩 두드렸다.
‘아, 속 터져. 저렇게 순진해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눈 뜨고 코 베이겠네!’
계속 경고하고, 몇 마디 더 주고받으니 금세 헤어질 시간이었지만 전처럼 슬프지 않았다.
샘도 잡았겠다 남은 두 놈만 잡으면, 우리 가문에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완벽하게 복수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으니까.
그 순간, 귓가에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시언 경! 어디에 있는 거야? 잠깐이면 된다며! 회의가 곧 시작될 거라고!”
굵직한 목소리에 카시언이 인상을 썼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종종 편지로 뒷담을 했던 기사단장인 것 같았다.
나는 급하게 한 발 뒷걸음질을 쳤다.
“카시언, 얼른 가 봐. 밉보이면 안 되잖아.”
“이미 밉보였……. 아니, 아니다. 조만간 다시 보자, 아스텔. 응?”
“응.”
그가 나에게만 들리게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나중에 섬을 사면 우리 둘이 살기로 약속한 거다?”
“응!”
그때쯤이면 조카랑 셋이 같이 사는 게 좋겠지.
오빠는 아직 자기 자식의 존재를 모르고 있겠지만…….
하지만 그 말을 먼저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찡긋하기만 했다.
“저녁에 회의가 있어서, 끝나면 다시 보자?”
“응. 내일쯤 유리 정원에서, 어때?”
내 제안에 의뭉스러운 표정을 한 오빠가 픽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그러더니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것도 좋지. 근데 우리 만나는 것 자체를 너무 숨기려고 하지 마.”
나 역시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고서 중얼거렸다.
“……먼저 별로 안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자고 했잖아.”
“응, 별로 안 친한 친구여도 먼 길을 왔으니, 두어 번 정돈 만날 수 있는 거잖아.”
충분히 맞는 말이었다.
그럼 내일, 오빠를 또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를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맹세컨대 아나이스 공작이 평소에 잘 가지도 않던 유리 정원에 들른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어쩌면 짐승의 육감이 이끈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이 무색하지 않게 카시언 그레이 그자는 명확히 뺀질뺀질한 한량이었다.
그놈은 그 더러운 입으로 아스텔에게 말했다.
‘안 사 주면 미워할 거야?’
……라고.
다자 연애를 추구한다느니, 뭐니 할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감히 여자의 돈을 뜯어먹을 생각을 할 줄이야.
그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가 있나?
아스텔과 카시언,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카시언 그레이는, 아스텔을 살살 굴리며 돈을 벌어 오라고 종용했다.
순진무구하고 제 몫을 챙길 줄 모르는 아스텔은 그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진짜 돈 많이 벌어서 다 사 줄게!’
인간들에게는 돈이 목숨과도 같은 가치라고 했다.
그런데 아스텔은 저리도 쉽게 ‘다 사 주겠다’라고 말했다.
카시언 그레이가 수도 내 여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스텔조차 카시언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카시언 그레이는 그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기는커녕 제법 뻔뻔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섬을 사면 우리 둘이 살기로 약속한 거다?’
아나이스 공작은 카시언을 향해 있던 아스텔의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면 자그마한 다람쥐처럼 눈을 굴리며 경계하면서, 카시언 그레이의 눈은 잘만 들여다보았고 무척 친근하게 굴었다.
닿지 못해 안달이 나고,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는 듯이.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 표정에서 다 티가 났다.
정원에서 돌아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선 그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표정은 제법 무시무시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익숙한 편인 보좌관이 흠칫 놀랄 정도로.
“무, 무슨 일…….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고급 자단으로 만들어진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되고 낡은 물건들을 빤히 응시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 온 만년필과 탁상시계, 이런저런 기능을 지닌 작은 아티팩트들은 손때가 탔음에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공작은 이어서 생각했다.
카시언 그레이에 대해서는 알아볼 대로 알아보았다.
더 조사할 것도 없이 그는 그저 기사로서 공적이 있을 뿐 그 외에는 평범한 한량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가 알아볼 것은…….
“아스텔 님이 이 저택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 오십시오.”
그는 저택을 직접 관리하지도 않았고, 딱히 눈을 심어 둔 바도 없었다. 뒷소문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텔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는 턱을 괸 채 그녀를 떠올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내 생명을 구한, 나의 각인자.’
절로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을 감자 어딘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자신을 치료할 때 경과를 보고하는 그 진중한 말투와,
‘치료 끝났습니다.’
각인이 되었음을 알았을 때, 당황하여 머뭇거리면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어조.
‘고, 공작님은 정말 잘생기셨어요!’
그리고 지금보다도 훨씬 어린, 조금 장난기 섞인 목소리까지.
‘있잖아. 할 말이 있어, 듣고 있어? 바보야! 내 말 들려?’
자신에게도, 다른 인간에게도, 공작성 안의 수인들에게도 한결같이 친절하고, 선량하고, 다정한 아스텔.
물론, 완벽한 그녀에게도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바로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것.
카시언 그레이.
반항적인 눈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
폴리 아모리 따위의 말을 변명 삼아 자신의 저속한 놀음을 합리화하는 자.
설마 아스텔에게도 그딴 발언을 하며 꼬여 냈을까.
심지어 아스텔은 그런 자에게 물질적인 것을 갖다 바치는 게 익숙해 보였다.
마치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묘하고 수상쩍은 불쾌감이 뱃속을 파고들었다.
혹시, 이 공작성에서도 카시언 그레이 같은 자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가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보좌관이 조심스레 덜덜 떨리는 입을 열었다.
“아, 아스텔 님의 상황이요?”
“네, 아스텔 님의 후견인으로서 알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당황한 보좌관을 향해 상냥하게 덧붙였다.
“지금 당장.”
* * *
그날 저녁.
아나이스 공작성 성내 회의장에서 마물 전쟁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아나이스 공작과 4대 가신 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장미 기사단의 단장 및 카시언이었다.
그중 아나이스 공작은 드물게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 빠르게 조사를 마친 보좌관과 아스텔의 측근을 집무실 내로 들여왔었다. 먼저 보좌관은 보고서를 올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번 치료소에서 샘이라는 녀석이 아스텔 님과 대치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아스텔 님이 재규어 가문 선대 가주, 리카르도 님의 목숨을 구했고요.’
샘의 행적을 정리한 보고서를 읽어 내리던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스텔과 대립한, 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샘이란 놈 때문에 죽을 뻔한 리카르도 님이 지옥불에 넣어 문초하고 있다 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특한 자가 있었다니. 아스텔 님, 그 여린 분이 얼마나 마음이 안 좋으셨는지 얼굴이 새하얘지셨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공작이 입가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선대 가주에게 그자 내가 죽이겠다 말하십시오. 지옥불이라니 너무 쉽지요.’
그다음은 샐리라는 아스텔의 측근 시녀였다.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 제가 아스텔 님에 관해 알려 드릴 것은 없지만……!’
시녀는 처음 들어온 공작의 집무실에 눈을 좌우로 굴리며 벌벌 떨었다.
‘따로 문책하지 않을 테니 내가 알아도 되는 것만 말씀하십시오.’
어차피 저 시녀가 무언가 사실을 감춘다 할지언정 언젠가 아스텔에게서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를 숨기려 해도 절대로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성품이니까.
문책이 없다는 말에 조금 안심한 듯 평온해진 낯빛을 한 시녀가 그를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스텔 님은 자존감이 조, 조금 낮으신 것 같아요.’
‘무슨 의미입니까.’
‘수, 수인들 중에 아스텔 님을 별로 안 좋아하는 분들이 이, 있긴 한데요. 터, 텃세나 따돌림이 익숙한 사람은 없을 텐데, 그래도 아스텔 님은 항상 괜찮다고만 하세요. 그런데 그 표정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시녀의 말에 공작은 일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스텔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일에 익숙하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운이 나빠서였을 뿐, 그녀를 제대로 안다면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냥한 아스텔은 모두에게 선의만을 베풀었으니까.
‘더 말해 보십시오.’
‘아, 예! 저희한테 대가 없이 물약도 다 주시고요, 진짜 돈을 안 받으셔서…….’
시녀는 그동안 속으로만 쌓아 온 걱정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착해서 다 퍼 주시는 분이라 참 걱정이에요!’
보고받았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공작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결론이 났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수인 시녀까지 알아차렸을 정도라면, 카시언 그레이 같은 교활한 자는 진즉에 아스텔의 성격을 꿰고 있었을 것이다.
폴리 아모리니 뭐니 하면서 바람을 피워도 옹호해 주고, 조금만 불쌍한 척을 하면 돈을 주리란 것을.
지나치게 선량한 아스텔은 카시언 그레이가 그녀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하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 측은히 여겨 품는 것이겠지.
그의 손에서 깃펜이 또각, 두 동강이 났다.
그 와중에도 열띤 토론은 이어지고 있었다.
“마물 전쟁은 봄에 치르는 것이 낫겠습니다. 대략 6개월 뒤, 모든 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될 때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사안입니다.”
유일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이가 최종 결정권자인 공작이라는 사실만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진행되는 회의였다.
그러나 회의도 길어지면 지치는 법. 슬슬 밤이 깊어지고 논의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되자 기록관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그를 불렀다.
“저, 각하…….”
부러진 깃펜을 매만지던 공작의 손놀림이 단숨에 멎었다.
“네, 듣고 있었습니다. 전쟁 재개일은 내년 늦봄이 좋겠군요.”
아나이스 공작의 무뚝뚝한 답과 함께 회의는 막바지를 향해 치달았다.
공작은 회의록에 무언가 끄적이며 미소 짓고 있는 카시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뺀질뺀질한 얼굴로 능글맞게 웃고 있다니. 혹시 아스텔이 돈을 줄 거라는 생각에 들뜬 것인가.
아나이스 공작은 회의장으로 오는 동안 복도에서 들었던 몇몇 수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카시언 그레이 경이라 했지? 수도에서도 유명하던데. 저 잘생긴 얼굴을 좀 봐!’
‘참, 인간인데도 인정할 건 해야지. 잘생기긴 잘생겼다니까…….’
‘아, 맞다. 정신 차리자! 인간이야, 인간!’
저 얼굴이 잘생겼다고?
그렇지 않다. 갈색 고수머리는 감지도 않는 건지 윤이 났고, 기생오라비같이 흰 얼굴은 기사답지 못했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는 마치 구렁이의 눈처럼 재수 없을 정도로 번뜩였다. 한마디로 못생긴 데다 비호감이었다. 잘생겼다던 수인들의 말은 공신력이 떨어진다.
‘공작님은 정말 자, 잘생기셨어요! 안경도 잘 어울리고…….’
아스텔은 자신이 잘생겼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리자 어쩐지 속이 뜨끈해졌다.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숨긴 채 공작은 여느 때처럼 감정 없는 무표정으로 카시언 그레이의 녹안을 응시했다.
다시 봐도 기분이 나빠지는 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로 얼굴 위를 덮어 버리고 싶었지만, 막상 안경을 씌우는 상상을 하자 이유 모를 위기감이 극히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공작은 너덜너덜한 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짧은 동작일 뿐이었지만 그 순간, 들불처럼 번지던 열띤 의견 교환이 뚝 사그라들었다. 회의장 내에 진한 침묵이 흐르자, 공작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출정 일자는 늦봄. 식량은 공작성에서 절반, 썩지 않는 물자는 수도에서 조달하는 것으로.”
“아…….”
“인간 기사는 보병과 기병을 섞어 총 천 명이면 충분합니다. 그 외에는 마검사를 쓸 겁니다. 여기에서 따로 조율할 사항이 필요하다면 서면 혹은 마도구를 사용하여 소통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집중한 바 없었으나 공작은 타고나길 전술의 천재였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주어진 체스 말들로 모든 경우의 수를 모의 실험 거친 후였다. 따라서 그는 몇 마디 말로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했다.
기사단장과 카시언의 얼굴에 미약한 감탄이 번져 나갔다. 습관적으로 카시언의 낯을 살핀 아나이스 공작이 눈가를 옅게 찡그렸다.
왜 감탄하는 거지.
그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스텔이 공작성에 온 이후, 늘 초기 설정값을 유지하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반려의 각인 증상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카시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 *
전쟁 준비 회의가 끝났다. 그러나 회의장에서 일어설 때 공작의 곁에 앉았던 재규어 가문의 현 가주, 켈터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감히 공작의 앞을 가로막다니!
대단하다, 켈터!
용기 있다, 켈터!
모두의 마음속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가신 가문의 가주들과 인간 기사들은 모두 걸음을 어정쩡하게 멈추고 상황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의례상 공작이 나가지 않으면 그들 역시 회의장에서 나갈 수 없었다.
켈터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각하께서 지금 아스텔이라는 인간 치료사를 후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켈터는 울상인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공작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는 걸 보니 자신의 계획은 초장부터 글러 먹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제 부친, 리카르도가 얼마나 닦달을 할까!
가문의 폭군으로 불리는 제 부친은 현재 인간 치료사 ‘아스텔’을 재규어 가문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는 호달달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번에 그분께 저희 가문의 선대 가주이신 리카르도 님께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공작의 뻣뻣했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호, 혹시 모른다!
켈터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해서…… 은혜를 갚기 위해, 저희 재규어 가문에서도 그분을 후원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따로 접견을 요청해 말할 수도 있었지만 부친이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인간, 그리고 공작성 내 수인들까지 다 들을 정도로 크게 말하라고 했다.
‘빌어먹을 수인 놈들이 우월주의에 빠져서는! 이럴 때일수록 인간인 아스텔의 입지를 다져 줘야 한다고! 켈터, 나는 내 손녀처럼 생각한다, 걔를.’
그 말과 동시에 리카르도의 손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설핏 드러나고 눈이 샛노랗게 희번덕거렸다.
켈터는 아버지도 바로 그 빌어먹을 수인이시잖아요,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제 부친에게 쩔쩔매는 켈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시는……?’
‘데려와야지, 우리 가문으로!’
친혈육에게도 냉담한 폭군이 왜 갑자기 인간 치료사 하나를 싸고 도는지, 물론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이해는 갔지만…….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아나이스 공작의 눈빛에 켈터의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가주로서 묵묵하게 일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이 어쩌다 두 폭군 사이에 꼈는지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했다.
그 속도 모르고 아나이스 공작은 우아하게 그를 향해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재규어 가문의 후원은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태도는 고아했지만 눈빛은 침잠한 상태였다.
공작 특유의 저음에 오금이 저렸다. 말끝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저의 피후견인이니까요.”
아나이스 공작의 입매가 단단히 비틀렸다.
“아스텔 님이 가장 먼저 구한 이는, 다름 아닌 저입니다. 그대의 아비가 아니라.”
다른 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작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켈터는 순간 미약하게나마 그의 소유욕을 엿보았다.
“예, 예?”
그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에게 소유욕이라니, 아나이스 공작을 오래 봐 온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 무엇에도 집착이 없는 깔끔한 사내였으므로.
“그럼.”
공작은 당혹해서 어버버하는 켈터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몇 초 뒤, 언제 소유욕을 드러냈냐는 듯 공작의 태도는 말끔해졌다.
공작이 사심 한 점 없는 낯으로 고개를 까딱하자 켈터가 급히 꼬리를 말았다.
“예, 알겠습니다. 각하!”
회의는 그렇게 완전히 종료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만이 둘 사이에 튀기는 약한 신경전을 느끼고 내내 땀을 뻘뻘 흘렸다.
마지막으로 카시언 그레이를 힐끗 본 아나이스 공작이 먼저 자리를 떴다.
카시언 그레이는 아스텔에게 섬에서 함께 살자고 했고, 켈터는 아스텔을 재규어 가문으로 데려오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 아스텔은 그의 성에서, 그의 바로 곁에서 머물고 있었다.
공작은 느긋하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의 성에 머물고 있는’ 아스텔과 내일 아침, 조찬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오빠와의 만남을 끝내고 유리 정원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공작님과의 석찬 약속이 없는 덕에, 혼자만의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델피니움 룸에 들어섰다.
‘내 경고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야, 바보 같은 카시언!’
더할 나위 없이 순진한 오빠가 신경이 쓰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할 일이 있으니까. 곧 시녀를 전부 물린 뒤 책상에 아티팩트 두 개를 내려놓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두 아티팩트를 노려보았다.
하나는 오빠가 주머니에 넣어 준 영상구 아티팩트!
“바보 멍청이가, 영상구를 다 주고…….”
우리 사이를 오가는 첼로도 날갯짓이 빠른 소중한 전령새였다.
하지만 영상구는 다르다. 이 마법 영상구를 켜면 언제 어디서든 오빠가 바로 보일 것이다.
하루 이틀 지체 없이 보고 싶을 때마다 바로 볼 수 있겠지…….
‘박봉이면서 아티팩트까지 사고, 그래서 제복도 못 산 건가? 진짜 속상하게…….’
한결 더 복수에 대한 야망이 활활 타올랐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음 아티팩트를 노려보았다.
지옥불에서 타들어 가는 중인 샘이 남기고 간 유품 아닌 유품, 브로치 형태의 아티팩트.
아티팩트를 향한 시선이 한결 더 진지해졌다.
뷔에트리 백작가를 멸문시키고 공작성에 숨어든 첩자들은 총 셋.
따라서, 아티팩트도 총 세 개다.
이때 하나의 아티팩트만으로는 확실한 배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호재였다.
‘각각의 아티팩트는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가 다른 아티팩트에 대한 힌트가 된다고 했어.’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브로치 모양 아티팩트의 우둘투둘한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이 아티팩트에는 검집 모양의 잔흔이 남아 있으니까…….’
나는 곰곰이 원작 속의 힌트를 이래저래 머릿속으로 추려 보기 시작했다.
샘과 달리, 다른 두 첩자에 대한 신상 정보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었지만 나름의 힌트는 있었다.
그렇게 원작의 내용을 끊임없이 복기하면서 품에 넣어 두었던《복수 매뉴얼》을 확인해 보던 나는 콩콩, 이마를 테이블에 찧었다.
진지하게 고뇌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던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급하게 테이블 아래로 아티팩트를 숨기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찾아왔다면 아마 시녀들…… 이려나?
“네, 들어오세요!”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는 열린 문틈으로 들어선 이를 보며 토끼 눈을 떴다.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시녀가 아니라 재규어 가문의 선대 가주인 리카르도였다.
“너, 샘이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했지?”
나는 그의 번뜩이는 눈빛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퍼뜩 불지옥으로 가자!”
……어감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띤 리카르도를 따라 공작성 내부에 있는 재규어 가문이 머무는 성채로 이동했다.
구중궁궐 같은 성채 입구에 도착해서도 한참.
“자, 약속한 대로 감옥 열쇠 여기 있다.”
리카르도가 공작성 끄트머리에 위치한 재규어 가문 전용 감옥 문을 열어 주었다.
“너무 고문을 해 놔서, 이대로 죽을까 봐 급히 너를 불렀다. 거의 반 시체인데 괜찮으냐. 제발 살려 달라고 하더니, 이젠 그만 죽여 달라던데.”
재규어 가문의 고문 방법은 잔인하다고 유명했기에 당연한 반응이리라.
나는 근엄하게 열쇠를 꼭 쥐었다.
“대신 부탁이 있는데요. 감시자나 영상 그리고 녹음 아티팩트들을 전부 치워 주세요.”
제국법상, 감옥에는 영상과 녹음 아티팩트, 그리고 감시자가 상주한다.
‘안 된다고 하면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리카르도가 씩 웃었다.
“뭐, 네가 원한다면 그러마. 대신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다행히 법 없이 사는 리카르도는 흔쾌히 그러마, 하고 허락했다.
몇 분 뒤, 나는 모든 것이 완벽히 내 계획대로 갖춰진 감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눈 떠, 샘.”
“……무슨.”
눈이 퉁퉁 붓고 피가 몰린 머리가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를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너도 배후에 대해 물으러 온 거냐? 네가 어떻게 날 잡아넣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샘은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부릅뜨다가, 다시 끙끙댔다.
“크으윽……. 내 배후는, 절대로 말할 수 없어. 애초에 알지도 못하고. 난 그냥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브, 브로치 아티팩트, 거기에서 명령이 나와서……. 젠장, 이 망할 브로치는 또 어디로 간 건지.”
얼마나 고문을 당한 건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과거의 오빠가 잡지 못했던 두 번째 악역, ‘검잡이’의 힌트를 떠올렸다.
아티팩트 표면에 있던 검집 모양의 잔흔을 되새기면서.
[눈가 아래에 번개 모양의 상흔이 있으며, 언제나 가슴 아래에 훈장을 달고 있었다. 그 훈장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놈이 내 다음 목표였다.
“됐고, 배후 말고 네 친구들 말이야.”
“친구?”
“눈 아래에 번개 모양의 검상이 있는 네 친구.”
“…….”
샘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간질과 간교에 능한 샘답게 시샘도 엄청났다.
“그자는 지금 네 꼴과 달리 지금 엄청 자유롭겠지.”
나를 응시하는 눈빛이 번들거렸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도 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어 주었다.
“네 배후까지는 말할 필요 없어. 그냥 그 피라미 한 명에 대해서만 말하면, 살려는 주지. 알다시피 나는 공작 각하와 재규어 가문, 두 곳의 은인이 되었으니까 그 정도쯤이야.”
목소리가 삐끗할 뻔했지만 지금은 약간 거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해야 할 때다.
나는 애써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샘이 고통에 찬 신음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물었다.
“진, 심으, 로 살려 줄 건가?”
“그래, 너도 알겠지만 법적으로 제국의 모든 감옥에는 당연히 영상구와 아티팩트가 존재해. 그게 내 말의 증인이 되어 줄 거야.”
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판단력이 흐려져서 모르겠지만, 녹음 아티팩트를 포함한 모든 영상구는 내 부탁에 따라 이미 말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게다가 재규어 가문의 리카르도 님이 어디 제국법을 지킬 위인이던가.
그러나 고문 덕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 내 신분도 세탁을 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난 진짜로 주, 죽어.”
우리 가문은 망가뜨려 놓고, 다른 사람은 독살해 죽이려 해 놓고 자기만 멀쩡하게 살아 나가려고?
나는 조용히 샘을 응시했다.
“그건 네가 가져오는 정보에 따라 다르지.”
“마, 말하겠다. 그러니까……. 눈 아래에 번개 모양의 검상 있는 놈 말하는 거냐? 검술이 뛰어난 놈인데, 여기에는 기사가 되어 위장 취업했지. 그 이상의 신상은 몰라.”
“그리고?”
“……더, 더 말해 주고 싶어도 나랑 그 검잡이 놈은 그저, 그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야!”
그자라면 분명 정체불명의 최종 흑막이겠지.
나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샘을 노려보았다.
지레 움찔한 샘이 앞니를 딱딱 부딪치며 웅얼댔다.
“그놈의 목표까지는 뭔지 몰라. 내 목표밖에 모른다. 그자가 지정해 준 내 목표는 재규어 가문의 멸살이었어. 내, 내 아티팩트로 종종 소통을 했던 거로 생각해 보았을 때는 아무튼…….”
“왜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 사람의 말을 따랐지?”
“그건……. 그자가 내 인생을 바꿔 주었으니까. 능력도 대단했다! 얼굴은 못 봤지만, 분명 그랬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내 능력을 높이 산다며 나를 발탁한 뒤 얻게 된 돈도 전부 다 줬고…….”
샘은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샘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주절거리는 내용을 빠짐없이 들었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지금 이 시점의 오빠는 결코 모를 날것의 정보였다.
“사, 살려 줄 거지?”
“…….”
“가, 간수가 들어오면 나는 요청하겠다. 네가 살려 주겠다고 맹세했다고!”
절규하는 그를 빤히 바라본 나는 조용히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별명이 호구, 바보가 맞다.
남들보다 조금 덜떨어지고, 마음이 약하기도 하다.
그래서 막상 샘을 마주하면 마음이 엄청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오빠가 저 자리에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어떻게든 단단해질 수 있었다.
“아스텔!”
감옥 바깥에는 리카르도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낯이었던 그가 급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저 못생긴 놈은 맘 약한 네가 볼만한 게 아닌데, 이것 참.”
“……할아버지, 저 부탁이 있어요.”
“왜, 저놈을 살려 달라는 부탁이면 안 받는다. 넌 너무 착한 녀석이야. 저놈은 살려 둘 수 없어!”
“아뇨, 저 나쁜 사람, 반성을 안 해요. 그러니까 깔끔하게 죽여 주세요.”
내가 제아무리 자타공인 호구라지만 우리 가문을 멸문시킨 놈한테까지 인정과 자비를 베풀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강단도 있고 말이지…….”
그가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리카르도는 이제 나를 꽤 좋아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슬그머니 내 머리칼 위를 툭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하마. 산책이나 할까?”
산책. 산책이라.
“……그럼, 검술 대련장 쪽을 돌까요?”
리카르도가 건치 미소를 반짝 빛냈다.
* * *
샘의 말에 따르면 검잡이는 지금 기사로 위장 취업한 상태라고 했다.
그렇다면 좋으나 싫으나 대련장을 자주 방문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작성 내 기사들의 숙소와 그 근처에 붙어 있는 검술 대련장을 한 번 쭉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멀어, 대련장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산책이 산책이 아니라 거의 유산소 운동, 마라톤이 아닌가 싶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공작성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재규어 가문의 감옥에서 본성 옆쪽에 위치한 기사들의 검술 대련장까지.
나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걸었다.
내 눈치를 힐끔 보던 리카르도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괜찮으냐?”
“허, 허억. 네.”
“……우리 가문에서 너를 후원하게 해 달라고 각하께 부탁을 드렸다.”
나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내가 발을 멈추자 리카르도 역시 내 옆에 딱 발을 붙이고 멈췄다.
“……네, 후원이요?”
리카르도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의 희뿌연 수염 근처에 있는 귀뿌리가 붉었다.
“그래, 후원. 한데 각하께서 거절을 하실 수도 있으니…….”
“아아…….”
각인 때문에 괜찮을까,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후원을 못 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네가 치료사라고 했지 않느냐.”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아해진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카르도가 조용히 말했다.
“큼, 네 재능이 조금 괜찮은 것 같아 말이다. 뭐, 내 너를 꼭 우리 가문으로 데려오마. 사실 거처를 옮기는 일은 공작 각하뿐만 아니라, 부모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일이니. 너희 부모님께도 알려야겠지만서도…….”
조심스러운 그의 제안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입을 열어 답했다.
“저는 부모님 안 계세요.”
“……어?”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곧 나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표정도 잠시뿐이었다.
이상하다.
원래 내가 부모님 없다고 말하면 은연중에 무시하거나 과도하게 동정하고 위로를 가장한 참견을 쏟아 내던데 리카르도는 그렇지 않았다.
제 말에 내가 상처받았을까 지레 놀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고양잇과 동물답게 조금 귀여웠다.
“그래도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이 미소만큼은 진심이었다.
내가 생명을 구해 낸 환자가 내게 감사 표시를 하는 건 치료사로서 언제나 뿌듯한 일이었으니까.
조금 말수가 적어진 리카르도와 함께, 나는 산책을 계속 이어 나갔다.
우리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대련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대련장으로 갈수록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약간 습한 것 같아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똑,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러냐?”
“네. 원래 대련장이 이렇게 습한가요?”
북부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서 땀이 날 정도로 묵직한 공기에 조금 의아해졌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운 것도 더운 건데…….
각종 정원수는 그렇다 치고, 대련장 근처의 공터에는 메일리 약초가 유달리 많았다.
‘메일리 약초는 보통 잘 안 심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곧 대련실 안으로 들어설 차례였다.
그런데 열심히 수련하는 기사들 사이로 잘생기고 유들유들하게 생긴 한 사내가 90도 인사를 하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이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시죠?”
“꺼져라, 이놈아. 네 알 바 없다.”
리카르도는 틱틱거렸지만 그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녹색 머리에 금안을 가진 남자는 척 보기에도 서글서글하고 선량한 외양이었다.
누구나 경계심을 쉽게 풀 만한 자였다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대련장에 함께 있던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다녔다.
모두 검술을 배우는 수인 아이들인 듯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여러 아이들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어처럼 송곳니가 날카로운 아이, 여우처럼 눈매가 살짝 째진 아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각 가신 가문의 후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달막한 아이들이 종종거리며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선새미!”
눈앞의 서글서글한 사내 쪽으로 바짝 다가와 다리를 끌어안기까지 하는 것을 보니 마치 그를 애착 인형처럼 여기는 듯도 싶었다.
‘만약 가신 가문 후계자들이라면 타고난 경계심이 높을 텐데, 신기하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향해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간 치료사 아스텔이라고 해요.”
공작성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북부 공작령에 들어온 건 3년 차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대가 과연 무슨 수인일까, 고민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떤 수인인지 가늠이 가지를 않았다.
그러나 상대를 재고 따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큰 무례일 테니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아아……. 공작 각하에 이어 가주님까지 구하신 분이시군요! 저는 후계자님들의 검술 선생인 바첼이라 합니다.”
그가 내게 악수를 하자는 듯이 손을 내밀자 리카르도가 혀를 차며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어딜 감히 레이디의 몸에 손을 대려고.”
폭군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거친 태도에도 불구하고, 바첼은 당황한 낯빛 한번 띠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일 뿐이었다.
“아아, 이런.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를 보며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아!”
그 모습만 봐도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내부를 견학 좀 시켜 드릴까요?”
그의 제안에 리카르도가 귀찮다는 듯 툴툴거렸다.
“뭐, 그러든가.”
이내 우리는 검술 대련장을 비롯해 공작성 내 훈련 시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아이들이 투구를 쓰고 직접 실전처럼 연습할 수 있는 대련장,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야외 훈련장, 갖가지 모양의 검들이 요란하게 세워져 있는 장소까지…….
모두 한눈에 확인한 나는 즐겁게 웃었다.
“대략적인 도움이 되셨을까요?”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환한 미소를 띤 채 그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인간 캣닢 같은 사람이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그런데 사람이 많네요?”
“아, 네. 대략 한 달쯤 뒤에 북부 공작령에서 검술 대회가 열리거든요. 기사들에게는 최대의 행사라, 아무래도 바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대한 행사가 되리라.
아나이스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검술명가이기도 하니까.
“그럼, 공작성의 모든 기사들이 전부 모이겠네요?”
“예, 다들 참여하기는 할 겁니다. 죄다 우승하려고 난리겠지요. 하하. 재밌을 것 같습니다, 무척이나.”
한 달 뒤, 검술 대회라.
“검술 대회가 열리면, 전용 치료사도 많이 필요하겠어요?”
“아아……. 그렇죠. 공작성 거주 기사들 건강 검진과 도핑 테스트도 미리미리 싹 다 해야 하니까요!”
리카르도가 대화 중간을 비집고 들어와 말했다.
“허어, 왜 그러느냐. 아스텔? 또 네 실력을 발휘하려고?”
나는 살짝 부끄러운 체하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럴 기회가 되면요!”
그렇다면 그 전에, 제일 먼저 내 실력을 발휘해 볼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 * *
……공작님이었다.
야심차게 그의 집무실에 들어선 나는 어떻게 검술 대회의 일을 돕고 싶다고 말할지 타이밍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나 공작님의 태도가 평소에 비해 조금 이상했다.
그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내내 바라보았다.
왜지?
나 지금 컨디션 최상인데…….
나는 괜히 말랑한 볼을 꾹꾹 눌러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공작님이 먼저였다.
“기분은, 어때요?”
“아, 좋아요!”
공작님의 표정이 잠시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뭐지? 안 믿는 눈치인 건가?
……왜?
나는 의문에 잠겼지만 해소할 틈이 없었다. 공작님이 또다시 내게 질문을 던져 왔다.
“오늘은 그대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러 갈까요?”
“공작성에도 바다가 있어요?”
이상하다, 공작님이 자꾸 내 기분 전환을 시켜 주려는 것 같은데.
그는 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성은 아니지만, 공작령에는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공작령에는 겨울이 오면 어는 바다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몹시 궁금해져서 눈을 반짝이며, 보러 가고 싶다고 하려다 곧 다른 지점에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 보니 오늘 오빠를 보기로 했다.
확실하게 시간을 정해 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 안 될 것 같아요. 카시언 경과 만나기로 해서요.”
오빠가 우리의 만남 자체를 숨길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성에 왔으니 한 번 정도는 볼까 해서요.”
공작님이 차디찬 얼굴로 이를 악문 게 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살짝 겁을 먹었다.
아마 이갈이를 하는 중인가 봐. 아무래도 맹수니까!
“카시언 그레이는 아마 볼 수 없을 겁니다, 아스텔.”
“……네?”
“업무가 바쁠 테니까요.”
하지만 오빠는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공작님이 내 감정을 환기하듯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대신 제가, 아스텔이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고 싶은데.”
분위기가 풀린 것도 같고 딱딱한 것도 같은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오빠를 못 보게 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때 돌진해야지!’
나는 팔걸이에 손을 올려 두며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척,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말이죠. 네! 제가 공작님을 치료해 드리고 싶은데요. 어디 아픈 데 없으세요?”
“저를 치료해 주시겠다고요.”
“네!”
“무슨 생각이에요, 아스텔?”
공작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냥 활짝 웃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팽팽 돌아가는 중이었다.
눈 아래에 번개 모양의 상흔이 있는 놈도 검술 대회에 참여하겠지.
적어도 공작성 내 기사들이라면 다 모인다는 검술 대회에서 치료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천운의 기회였다.
그 과정에 치료사 자격으로 참여한다면 더 많은 기사들을 더욱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지금의 치료소 일로도 내가 무리할까 걱정하는 공작님에게 제안이 먹혀들려면 조금 더 친밀해지는 일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공작님의 팔을 잡고 준비해 온 것들로 치료를 해 나갔다.
“……팔에 생채기를 치료해 봤는데, 어때요? 저도 열이 안 나고, 공작님도 괜찮죠?”
나는 그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좋습니다. 각인에는 문제가 없군요.”
“공작님은, 그냥 다 좋다고만 하시고…….”
“…….”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다도 보러 가자고 해 주시고, 정말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섣불리 그렇게 결론 내리기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나이스 공작이 뷔에트리 백작가를 멸문시킨 최종 흑막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나이스 공작의 ‘각인자’인 아스텔에게 그는 ‘좋은 분’임이 틀림없었다.
공작님이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입가에는 커다란 손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양을 보고 있자 찬 겨울에 눈꽃이라도 피어나는 것 같은,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각인이 꼭 나쁜 것은 아니군요.”
나는 멍하게 그를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어, 웃으셨네요.”
“……아.”
그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혹시…… 무섭습니까?”
물론 가끔 무서운 느낌으로 미소 지으실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되게…….”
나는 조용히 마음속의 소리를 한 자 한 자 꺼내 놓았다.
“보기…… 좋아요, 따뜻하고.”
각인 때문일까. 이상하게 공작님 앞에만 있으면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눈을 접으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네.”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뒤 공작님을 향해 말했다.
“상처는 치료했으니 이제, 제가 개발한 방식대로 한 번 신체검사를 해 볼게요! 팔 쪽만요!”
나는 공작님의 손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타이밍을 노렸다.
“그으,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하셨죠. 그래서 말인데, 아주 작은 부탁이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나는 힐끔 공작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눈매가 살짝 휘어져 있는 상태였다.
……분위기 좋고.
“저, 오늘부터 한 달 뒤에 검술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그 검술 대회에 참여하는 기사님들을 치료하는, 치료사가 되고 싶어요. 건강 검진도 해 드리고, 다치면 치료도 해 드리는 역할로요. 그…… 괜찮을까요?”
그리고 그때, 아나이스 공작님에게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환청인가?
“그대가……. 기사들의 영웅담을,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래서 카시언 그레이도 좋아한다고.”
내가…… 그랬던가?
근데 갑자기 오빠 얘기는 또 왜 나오지?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제국을 지켜 주시는 기, 기사분들을 아주 존경해서요.”
“저도 기사입니다.”
“……그, 그래서 공작님을 제일 존경하죠.”
급하게 둘러댄 아첨이 통한 건지, 공작님의 입매가 아주 약간, 미약하게나마 느슨하게 풀렸다.
“……검술 대회에서 너무 많은 기사를 치료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공작님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 곁에 있을 텐데도 위험할까요?”
그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난 건가 싶었지만, 입가가 움찔하는 게 웃을지 말지 고민하는 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영원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그가 감정을 애써 추스른 흉흉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고민, 해 보겠습니다.”
나와 각인으로 연결된 상태이니 아무래도 나를 위험한 환경에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겠지.
“네, 저, 잘 대해 주시는 공작님께 너무 감사해서요.”
분위기가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 따뜻한 분위기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각인이 끝나고 떠나기 전까지 이 공작성에 열심히 봉사하고 싶어요!”
이 정도면 진심이 적당히 섞인 훌륭한 아첨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이어서 공작님의 손을 조물거리며 열심히 맥도 짚고, 생채기도 확인했다.
그런데 착각인 걸까.
공작님의 손이 계속 경직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낯선 증상에 조심히 공작님 쪽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진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각인이 끝나면, 떠날 겁니까?”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신속하고 크게,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빠릿빠릿하고 성실한 대답은 필수니까.
내 대답과 동시에 맞닿은 손으로 그가 손을 쥐었다 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는 그의 손과 손톱 끝을 부지런히 매만지며 그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나가려 했다.
“아스텔, 어디로요? 기사단으로 갈 겁니까?”
되묻는 목소리가 집요했다.
나는 눈치 보는 다람쥐 같은 눈을 하고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동그란 동공에 공작님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기사단이요? 저는 기사가 될 생각이 없는데요.”
내가 기사가 될 것처럼 보이나?
나는 근육 하나 없이 물렁물렁한 팔을 떠올리며 단정하게 대꾸했다.
“일단 수도? 정확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요!”
“수도, 라고요.”
“네.”
“……혹시, 이 북부가, 아니 이 공작성이 별로입니까?”
“아뇨, 그렇지만 이 성이 제집은 아니니까요.”
“집…….”
그가 천천히 말을 받았다.
무언가를 느긋하게 곱씹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심성의껏 검사를 해 줘야 하는 입장이니 그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몇 분 뒤, 나는 그의 손을 내려놓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오늘도 역시 공작님은 아주 건강하세요!”
“아닙니다.”
“……?”
잠깐만, 왜요?
“방금 막 건강이 악화됐습니다.”
“아, 악화됐다고요? 갑자기요?”
나는 공작님의 얼굴을 낱낱이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다소 새하얘진 것도 같고…….
“네. 당장 주치의를 불러야겠습니다.”
그 순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공작님의 얼굴을 비췄다.
아까처럼 미소 짓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찬연해 보였다.
* * *
곧바로 방문한 주치의는 다행히 나와 공작님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대신 각인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으니까 자주 만나 서로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라고만 했지.’
분명 근래 들어 계속 스킨십을 하고 꽤 붙어 지냈는데도, 이상하게 각인이 조금 더 불안정해졌다고 했다.
괜한 불안감에 나는 검사 결과를 듣는 내내 공작님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더 진도가 나가면 안 되니까…….’
손에 남은 공작님의 온기에 나는 공연히 손바닥을 몇 번 비비며 머쓱하게 웃었다.
‘공작님이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있다고, 텔레포트 팔찌도 채워 줬어.’
팔찌를 채워 주며 손목 안쪽을 자꾸 덧그리던 그의 손길이 떠올라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공작님은 아무 사심도 없으셨을 텐데, 그냥 각인 때문일 텐데…….
연애 경험이 없는 나만 이토록 유난이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나쁜 상상을 털어 냈다.
그래도 불안정해진 각인만 빼면 확실히 돌아가는 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빠만 한 번 더 보면 좋겠지만, 정원을 기웃거려 봐도 공작님 말씀처럼 정말 바쁜지, 안 나타나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산책이나 조금 해야겠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밝은 것도 같고?”
나는 즐겁게 통통 튀어 다니듯이 산책하면서 걸었다.
치료소를 지나고 검술 대련장까지 쭉 한번에 걷다가 다시 돌아오는 산책 코스였다.
그렇게 여유를 즐긴 후 본성 건물로 들어온 바로 그때였다.
복도를 걷다 코너를 돌려던 내 앞을 은빛 털뭉치가 가로막았다.
“끼잉!”
당황한 나는 조심조심 여우를 비켜 가려 왼쪽으로 움직였다.
사사삭.
그러자 여우도 나를 따라 왼쪽으로 움직였다.
의아해진 나는 오른쪽으로 한 발을 떼 보았다.
샤샤샤샥.
여우가 오른쪽으로 쓱 움직였다.
“……응, 뭐야? 나한테 할 말 있어?”
아주 자그마한 은색 털을 가진 여우, 은여우였다.
‘저건 혹시 새끼 여우인가?’
……은색 털을 보니 묘한 기시감이 드는 듯도 싶었다.
“안녕, 여우야?”
“끼, 끼잉.”
분명 초면인 것 같은데…….
작은 여우를 꼼꼼히 관찰하다 보니 꾹 다문 주둥이 안에 들어 있는 편지 봉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낑낑거리던 여우는 내 시선이 봉투에 닿자 주둥이를 톡 벌렸다. 그러자 편지가 떨어져 내렸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끼이잉.”
여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픽 웃으면서 여우가 건넨 봉투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바로 읽을게?”
여우가 복슬복슬한 꼬리를 내 몸에 문지르며 해사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여우의 부드러운 꼬리를 느끼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녕하새요. 저는 이재 막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은여우 가문에 머싯는 후개자, 벨이라구 함니다.
아조 쟈근 여우지만 검은 옴총 잘 써요.
잇자나요.
아까 검술 대련장에서두 아스테 님을 바써요. 우리 인사도 헷어요.
구런데요.
저 부탁이 하나 이써요.
시녀들이 그러는대 그러는데, 아스테 님은 멋진 약을 갖고 있데요 있대요. 그래서 시녀장님도 아스테 님을 조아하고, 리카르도 가주님도 아스테 님을 조아하고, 공잔님도 아스테 님을 조아한데요.
그럼요, 혹시, 용기를 낼 수 있는 약도 인나요? 소심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잇는 약은요? 그리고…… 부모닌이 차캐지는 약이랑, 부모님이랑 또 친해질 수 인는 약은…… 아니애오. 이거는 취소!
아뭍든, 감사한니 감사합니다.
난중에 약이 생기면 은여우 가문으루 오새요. 꼭.
돈줄깨요.
나 돈 만아요.]
나는 편지를 확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무슨 신개념 재력 어필이람, 너무 귀엽잖아…….
“귀여운 아기 여우님.”
“낑!”
여우는 꼬리를 길게 치켜올리고 까만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여우짓에 슬그머니 홀릴 뻔했던 나는 작게 웃으며 은빛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기 여우의 의뢰를 받았으니, 수행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들고 찾아갈게요.”
검술 대회 전까지는 잘 만들어 봐야겠다.
이 자그마한 꼬마, ‘벨’에게서는 미약한 향기가 느껴졌다. 달달하면서도 코끝을 아릿하게 잠식해 오는 익숙한 내음. 수인들 특유의 향기는 아니다.
‘이 향기는 출처가 뭐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 나는 벨을 놓아 주며 손을 흔들었다.
‘……이런 냄새가 보통 아기 여우의 몸에 밸 수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내 손등을 핥아 주는 아기 여우의 혀를 느끼고 급히 정신을 차렸다.
“끼이잉.”
자그마한 새끼 여우를 온전히 마주 보니, 자연스레 두 뺨이 오동통할 사랑스러운 조카가 떠올랐다.
‘오빠가 북부령에 왔으니까, 이맘때쯤 주요 에피소드가 본격 시작되겠지?’
나는 원작 속 타임라인을 복기해 보았다.
첫 번째 주요 에피소드는 바로 베이스캠프 만들기 에피소드다. 오빠는 공작성에 머물면서 정보를 빼내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만큼 이 아나이스 공작성은 인간에게 가혹했다.
그러다 검술 대회 전, 아나이스 공작성의 정예 수인 기사들과 인간 기사 일행은 평야로 떠난다.
내년에 진행될 마물 전쟁에서 베이스캠프가 될 장소를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그사이에 오빠는 몇몇 기사들과 친밀해지고, 복수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힌트도 얻게 된다.
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베이스 캠프 에피소드에서 공작이 기사들을 제명했다는 내용이 나와서 좀 걱정되기는 하는데 …….’
하지만 원작에서도 그렇고, 오빠와 공작님의 하늘과 땅 같은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둘이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다음 에피소드는…….
내가 가장 고대하는, 오빠가 자기 자식을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원작 내용에 따르면, 카시언 그레이에게는 그 자신조차 몰랐던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 풋사랑의 아픔을 겪고 헤어졌던 여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였다. 그는 그 사실을 레이첼에게 전해 듣게 된다.
‘내가 어떻게든 그 아이를 먼저 찾아내려고 했지만, 오빠가 연애 생활을 너무 철저하게 숨겨서 어쩔 수 없었어…….’
베이스캠프를 만들던 도중, 레이첼의 전보를 받은 오빠는 급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수도로 향한다.
그 후, 카시언은 아이를 내게 맡기게 되지.
그 미래를 대비해 난 계속 마음의 각오를 하며 조카를 맞이할 준비를 해 왔다. 나는 깡충깡충 뛰어서 떠나가는 벨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오빠의 아이는 저 반만 하겠지.
꼭, 내가 멋지게 잘 키워 줘야지.
그리 생각하며 복도를 걷던 바로 그때였다.
“아스텔 님, 산책은 잘 하셨어요?”
샐리의 목소리였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산책 끝났어요.”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요?”
“이틀 뒤에, 공작님이 출병 준비를 위해 저택을 떠나신대요.”
아마 베이스캠프를 만들러 가는 거겠지.
나는 이유를 더 묻지 않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처음으로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공작님과 떨어져 있게 될 예정이었다.
* * *
“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안 그런가?”
이틀 뒤, 공작성의 정문 앞.
공작성의 정예 수인 기사들과 인간 기사인 카시언, 기사단장 로파.
그 둘은 정렬한 상태였다.
안색이 누렇게 뜬 로파가 카시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불길한 예감이요?”
“그래, 저 성안에 뭔가 전운이 감돈단 말이야……. 우리가 떠나면 엄청난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입니다.”
카시언이 딱 잘라 말하자 로파는 화제를 돌려 다시 툴툴거렸다.
“그 엄청나다는 그 검술 대회 준비도 못 보고, 바깥에서 뺑이나 치다 수도로 돌아가겠구만 그래!”
그가 아쉬움에 입맛을 쩍 다셨다.
그러나 카시언은 그의 태도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얼마 전, 그는 황제의 부름보다 더욱 찜찜한 사건을 맞닥뜨렸다.
어젯밤, 그에게 급하게 전령구가 하나 날아왔다.
발신인은 레이첼.
내용은…….
[카시언, 급하게 문제가 생겼어. 정말 큰 문제야.]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의 정보통인 레이첼은 원체 가벼운 성미다. 여태껏 그녀가 ‘큰 문제’라고 표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그 문제라는 게 무엇일까. 기나긴 고민 때문에 간밤에 선잠을 잔 카시언은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베이스캠프를 확인하고 나면, 다시 수도로 가야만 했다. 그때 이 성에 아스텔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린다.
분명 그는 아스텔에게 자신이 지닌 영상구를 건네주었다. 그 영상구 안에 보호 마법을 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아이가 이 공작성에 혼자 남아 수인들 사이에서 지낼 걸 생각하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뭐 그렇게 죽상이야? 큰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어디로 튈 줄 모르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또라이 같은 자신을 유일하게 잡아 주고 바른길로 이끌어 준 게 바로 동생인 아스텔이었다.
“북부 마물에게 제 얼굴이 통하나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미남계나 써 볼까 봐요.”
아무 말이다. 그는 심란한 속을 달래며, 대충 기사단장이 원하는 멘트를 냉소적으로 쳐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파는 기뻐서 껄껄 웃었다.
“으하하! 역시 얼굴값 하는구만! 왜, 뭐야. 이번에 만날 마물 레이디는 누군데? 오크인가?”
“아, 예. 모르겠네요. 오크도 좋죠.”
“크하하하하!”
대충대충 대답했을 뿐인데 모든 떡밥을 다 물어 버린다. 카시언의 표정이 한결 썩어 갔다.
저 기사단장님은 정말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떠나려던 순간,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아스텔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간지러워요!”
상큼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말에서 내린 공작이 아스텔과 나란히 서 있었다.
카시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둘을 응시했다.
아스텔은 평소와 비슷해 보였지만 아나이스 공작은 달랐다.
그는 더럽고 질척거리는 눈빛으로 아스텔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손등 키스라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이 이상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 * *
딱 맞춰서 잘 도착했다!
사실은 오빠를 보러 온 거지만, 명목상의 이유는 피후견인으로서 공작님을 배웅한다는 것이었다.
오십이 넘는 기사들이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공작님이 타고 갈 흑마 역시 기사들이 서 있는 바로 옆에 있었다.
그 말 위에 올라타 있던 공작님과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그냥 다른 시녀들과 시종들처럼 뒤에서 공작님을 배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스텔, 추운데 왜 나와 있는 겁니까.”
흑마에서 훌쩍 뛰어내린 공작님이 내 쪽으로 먼저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내 쪽으로 쏠렸다.
이건 내가 의도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쩌저적.
공작님의 바로 옆에 있던, 최측근 기사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었다.
“내,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히익.”
“……주, 죽을 때가 됐나?”
그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공작님은 나를 잠깐이라도 마주칠 때마다 과하게 반겨 주시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손등 위에 짧게 입 맞췄다.
“건강히 계십시오.”
스킨십은 몇 번 했지만, 여전히 움찔거리게 됐다.
“가, 간지러워요.”
그가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내 귓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지금 내게 입 맞춰 줘요, 아스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작님이 장난기 없이 차분하게,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우리의 각인을 위해서.”
“아, 그렇죠!”
작게 웃은 나는 공작님의 손등을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짧게 입 맞췄다.
“공작님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어쩐지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물러난 공작님이 내 손목에 있는 자그마한 텔레포트용 팔찌를 가리켰다.
“아프면 언제든지.”
나는 그의 다음 말을 받았다.
“……네, 찾아갈게요!”
공작님이 내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신호만 보내십시오.”
그는 조용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무리해도 됩니다.”
그가 눈을 휘어 가며 낮게 웃었다.
“꼭.”
“……무, 무리 안 할 거예요.”
“그렇군요.”
그의 대답을 듣고 눈을 여러 번 깜빡인 나는 멀리 있는 오빠를 잠시 눈으로 좇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그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었다.
어쩐지 충격이 어린 듯한 표정이었는데, 벌써 그 소식을 들은 것일까.
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를 일별했다.
아이의 등장에 잠깐은 당황스럽고 힘들겠지만, 그 아이는 앞으로 오빠의 삶에 햇살이 되어 줄 것이다.
복수 때문에 몸이 힘들고 마음이 피폐해질 때마다, 사랑스러운 조카는 오빠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식처가 될 예정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마음을 닫은 조카도 내가 따뜻하게 돌봐 주다 보면 점차 마음을 열게 되겠지.
“아스텔.”
“……네, 네?”
“저를 봐 주십시오.”
그가 내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저만, 말입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말에 고개가 절로 갸웃했다.
갑자기 그의 표정과 어조가 몹시 살벌해졌다. 이유를 묻기도 전, 공작님의 흑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갔다.
나는 손을 들어 멀리 떠나는 공작님의 말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오빠도, 공작님도 함께 떠났다.
별로 큰 문제 없겠지……?
일단은 원작 속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