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새하얀 침대 시트를 장식한 시뻘건 물감 같은 피.
작달막한 침대에 눕기에는 벅차도록 커다란 남자. 그의 입가는 찢어진 데다 팔에는 자해에 의한 것인지 모를 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남자를 향해 손에 든 나이프를 휙휙 휘둘렀다. 그러기를 한참.
‘끝났다.’
침대 옆 협탁에 나이프를 내려놓은 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급하게 닦아 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차분히 살폈다. 불안한 긴장감에 동공이 떨리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주변 눈치를 살피는 수상쩍은 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납치 후 살해 과정으로 오해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나는 절대 납치범이 아니다.
그냥, 집 앞에 다친 채로 쓰러져 있던 이 남자, ‘아나이스 공작님’을 구한 선량한 치료사일 뿐.
공작님을 침대에 옮기고 치료를 끝내기까지 했으니 이제 막 ‘생명의 은인’이 되었지. 이 나이프 역시도 그저 거즈를 찢는 데에 사용되었을 뿐, 아무 의미 없다!
나는 의식을 잃은 공작님의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 주면서 상냥하게 속삭였다.
“듣지는 못하시겠지만……. 치료 끝났습니다.”
다행히 열을 내리게 했고 상처도 치료했다.
소설 속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던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다친 이유는 모호했지만, 기절한 이유는 마력 폭주 때문인 것 같으니 특제 약을 처방해 먹이기까지 했다.
이제 완벽하게 안심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확실히 ‘밤의 신’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였다. 캄캄한 밤하늘처럼 새까만 흑발은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었다. 길게 음영을 드리우는 속눈썹, 깎아 낸 듯한 콧대, 광대뼈 아래로는 살짝 그늘이 져서 더욱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 정도라니. 눈만 뜨면 모든 사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는 짙고 촘촘한 속눈썹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꼭 나으셔야 해요. 알았죠?”
마무리 처치는 해야겠다. 남자의 입술 안으로 수면용 약물을 무사히 집어넣은 나는 차오르는 뿌듯함에 몸을 떨며 생각했다.
‘제가 삼 년 넘게, 당신을 구할 오늘만을 기다려 왔으니까요!’
물론 정신이 한껏 고양되어도 육체의 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법.
낮에 종일 치료소에서 근무하면서 하도 무리를 한 탓인지, 아니면 이 크고 무거운 남자를 집 안에 끌고 들어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탓인지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딱 오 분만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가 회복 중인 침상 앞에서.
* * *
딱 오 분만 자려 했지만 단기간 몸에 축적된 피로를 정신력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깊게 잠든 채 단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내 과거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내가 오늘 아나이스 공작님을 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북부 공작성 외부 1치료소에서 대략 10m 정도 떨어진 이곳, 풀숲에 쓰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마물 사냥을 위해 홀로 공작령을 돌던 그는, 지난 마물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마나 불안정 증상으로 사냥터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숲의 작은 통나무 집 앞에서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근처에 있던 치료소장이 구하게 되는데, 아나이스 공작은 치료소장을 공작성으로 들인 뒤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이걸 내가 아는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여긴 판타지 소설 『피의 복수』속이고, 나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카시언’의 여동생 ‘아스텔’로 환생했으니까.
안타깝게도 이 소설 속에서 아스텔과 카시언의 운명은 기구했다.
우리 남매는 제국 제일의 마법 명문인 뷔에트리 백작가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은 역적 누명을 쓰고 멸족당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은 자신들의 목숨을 다해 우리 남매에게 추적이 불가능한 고대의 은신 마법을 걸었다. 덕분에 피바람 속에서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어린 시절은 아주 힘들고 슬프고 궁핍했다.
쫄쫄 굶는 게 일상이었고, 구걸이라도 했다가 재수 옴 붙은 거지라고 돌팔매질을 당할 때도 있었다.
다행히 오빠가 마구간지기로 취업한 뒤부터 하루 한 끼는 흙 묻은 당근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원래 사람의 인생에는 역경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열 살 무렵, 내가 이 소설에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장르가 복수물인 데다가 심지어 새드 엔딩이라고?’
원작 내용에 따르면, 동생과 함께 어렵사리 성장한 카시언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그는 백작가를 무너뜨린 몇몇 첩자의 정체를 밝혀내고 누명을 벗는다. 그러나 해피 엔딩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는 존재조차 몰랐던 최종 흑막에 의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아스텔’ 역시도 자기 오빠가 남기고 간 조카를 숨어서 키우다가 피습당해 죽는 처지였다. 최종 흑막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도 않은 채, 소설은 쓸쓸하게 끝맺어졌다.
그렇게 될 운명이라니.
막 환생했음을 자각했을 때, 나는 미래가 너무 무서워서 길을 걷다가도, 구걸을 하다가도 엉엉 울었다.
‘아스텔! 우리는 거지니까 깡이라도 쎄야 한다고 했잖아. 맨날 울면 안 돼.’
‘오빠, 우리가 죽기로 정해져 있으면 어떡해?’
내가 한 자조적인 질문에 카시언은 담담하게 답했다.
‘정해져 있는 결말은 없어. 바꾸면 돼.’
오빠는 내 눈 앞을 가려 주면서 가볍게 말했다.
‘만약 우리의 운명이 그렇다면 아스텔을 위해서 오빠가 바꿀게.’
그가 입꼬리를 늘이며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카시언 바보 멍청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리 가!’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도, 내가 조카랑 단둘이 비참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도 모르면서 헤벌쭉 웃기나 하다니! 그 모습이 얄미웠던 한편, 그의 말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도…… 결말이 나쁘면 바꾸면 된다는 말은 마음에 들어.’
카시언이 결국 잡지 못한 최종 흑막도, 내가 잡아서 죽이면 그만이다!
죽기 직전까지 독약 탄 당근 수프만 먹게 해 주리라. 당근 수프로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계속, 계속 말이다.
그 후 나는 절치부심하며 복수를 준비했다.
물론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려고 해.’
‘…….’
‘딱 십 년만 기다려. 누명을 벗고 좋은 집에서 예쁜 옷만 입고 살게 해 줄게, 꼭.’
오빠는 내게 복수의 정보를 많이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제국의 영웅으로 거듭난 그가 귀족 작위를 받아 고급 정보에 접촉하고, 물밑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안전한 마을에 두고 떠난 그의 앞날이 가시밭길이라는 것도.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래?’
‘응. 아주 미덥지 못해.’
오빠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그는 실패한다. 그럼 우린 다 죽는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오빠 몰래 내가 최종 흑막을 밝혀내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끝까지 흑막이 밝혀지지 않은 배려 없는 소설에 등장한 여러 힌트를 거듭 상기했다.
먼저 뷔에트리 백작가에 잠입했던 첩자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힌트가 몇 가지 주어졌었다. 뷔에트리 백작가가 역적이라는 거짓 증거를 조작했던 첩자 셋 중 하나는 ‘인간’, 둘은 ‘수인’이며, 그들이 우리 가문을 멸문시킨 뒤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들을 잡아내서 최종 흑막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그를 처리하면…….
이번에야말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다는 점.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제국의 북부, 아나이스 공작령 전체는 수인의 땅이었다. 수인들은 과거, 자신들을 노예로 부렸던 인간들을 혐오했기에 외부인들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오면 위협을 가하곤 했다.
실제 죽어 나간 인간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북부 공작령에 들어간 인간들도 있기야 했다. 우선 나부터도 험난한 여정 끝에 공작령의 치료소에 취업할 수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작과 가신 가문, 순혈 수인들이 머무는 공작성은 사정이 달랐다. 그곳은 수인이라고 해도 허가받지 못한 자는 드나들지 못하는 위험한 성이었다. 인간이 들어서면 마법 장치로 인해 그 즉시 목이 잘린다는 둥,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도는 바로 그곳, 아나이스 공작성.
인간인 내가 공작성에 리스크 없이 들어가서, 의심받지 않고 첩자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치료소에서 일하며 오랜 시간 틈을 노리던 나는 마침내 괜찮은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아나이스 공작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
물론,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과 공작성에 무사히 무혈 입성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 * *
꿈속 내용을 자각한 것도 잠시,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 눈을 떴다.
곧바로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는데, 내가 침대 위에 곱게 모셔 놓았던 공작님이 사라졌다.
혹시 모두 꿈이었던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아나이스 공작이 원작과 달리 구해 준 은인을 두고 배은망덕하게 훌쩍 떠난 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빨개진 눈가를 꾹 누르는데 등 뒤에서 나직한 저음이 들렸다.
“절 구해 주신 분이군요.”
‘절 구해 주신 분’이라는 말을 담기에는 무섭도록 딱딱한 어조였지만,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달콤한 저음에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마침내 우리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까만 머리카락, 푸르스름한 눈동자. 내가 구해 드렸던 아나이스 공작님이다.
이 북부에 있는 모든 수인의 지배자.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이라는 작위 명칭 외에는 진명도, 종족도 알 수 없어 그저 위험한 맹수로 통칭되는 북부의 미스터리한 인물.
그리고 현재 나를 공작성으로 들여보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
“깨…… 깨어나셨네요!”
그의 시선이 내게 오롯이 머물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이 전신을 감싸는 듯했다. 이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은인께 보답을 하고 싶은데.”
보은하겠다는 말을 당장 널 죽이겠다,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하다니……. 안 그래도 쫄보인 나는 몹시 쭈그러들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내 기다려 온 말이니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보답……. 아주 조, 좋아요!”
복수가 걸려 있는 문제니까 철판을 깔아야지.
원래 나는 남이 보답을 해 준다고 해도 마음 편히 받지 못하는 성미이고, 공작님은 특히나 분위기가 무서워서 엄청나게 쫄았지만……!
“그렇다면 저, 저기 제가 은인으로서! 작고 소중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공작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까딱했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저어,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혹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집이 작고 누추해서…….”
철혈의 요새, 금인(禁人) 구역인 공작성에서 하면 더 좋고요!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아직 저분이 자기가 공작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너무 쉽게 흉금을 털어놓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래도 신은 내 편인 모양이었다.
“이 근처에 제 자택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내 뜻대로 술술 풀리고 있었다.
‘그럼 계획대로 공작님을 구한 은인으로서 공작성에 입성하게 되는 건가?’
공작성에 발을 한번 들이고 나면, ‘공작성 안의 치료소에서 근무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더 쉬울 것이다.
수인들은 인간을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공작의 은인에게까지 매정하게 침을 뱉을 리는 없다.
공작성 내부 치료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첩자 놈들을 잡아내고, 배후를 탈탈 털면 미션 컴플리트!
모든 계산을 마친 나는 음흉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시선이 맞닿을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격하게 들이마시며 기합을 주듯 소리쳤다.
“네! 저택으로 가서 얘기하는 것도 좋아요.”
잠깐, 너무 다급해 보이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네.”
……공작님 쪽이 더 의욕적인 것 같았다. 맹렬한 눈빛에, 실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기이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단단히 옥죄듯이 잡은 손. 그 손길에 치밀어 오르던 호흡 곤란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뭐지……?’
상황 판단이 안 된다, 상황 판단이.
그 순간, 그의 무표정한 낯이 내 얼굴 앞으로 찬찬히 기울어지며 그와 나의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무슨 기다렸다는 말을 살인 예고하듯이 하는 거야? 그보다…….
“……제 말을 기다리셨다고요?”
생각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
혹시 이거 함정 카드인가.
나는 온갖 의심을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아, 온몸의 솜털을 다 세울 태세로 경계했다. 그러자 그가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기다렸습니다.”
나는 한층 더 공포에 질렸다.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성안에 인간을 처형하는 단두대가 있었다는 그곳에.
이렇게 쉽게 입성할 수 있다고?
완전 수상한데……?
‘진정해, 아스텔!’
아나이스 공작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한들, 왠지 이 상황이 몹시 달콤한 덫같이 느껴진다 한들 결코 당황한 티를 내선 안 됐다.
그와의 만남을 대비해 대본도 짜서 연기 연습도 했는걸.
나는 표정을 정돈하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유심히 훑었다.
“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모르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신뢰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닌가 보군요.”
“아뇨, 절대 몰라요!”
그리고 한 술도 더 떴다.
“단 하나도, 티끌만큼도 예상이 안 되네요.”
공작님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더 이상 의심 섞인 물음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나를 향해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갑니다.”
“……네?”
“그 성이 제 자택이니까요.”
내가 알던 정보 그대로, 그는 차갑고 냉정한 동시에 더없이 귀족적이었다.
저 완벽하게 나른한 눈매는 웃음으로 휘어지는 법이 없이 크게 뜨인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준비한 것과 같이, 원작『피의 복수』에서 아나이스 공작을 구했던 치료소장과 비슷한 대사로 답했다.
“성이 자택, 이시라면……. 엄청나게 귀티가 나시는 걸 보니……. 그럼 혹시, 아나이스 공작님이신가요?”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을 이었다.
“예.”
대단히 간결한 답이었다.
나는 가슴 앞에 손을 대고 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나이스 공작님을 구해 드렸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북부 공작령에 큰 위기가 올 뻔해, 했어요. 다행히 멋진 저의 뛰어난 능력으로 살려 드렸기에 망정이지!”
조금 발연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
“아까는 곧 죽을 것같이 보여서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잘생긴 외모도 몰라뵈었지 뭐예요? 하하.”
이 대사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심이 없고, 그를 구한 일은 그저 우연의 일치다. 또, 나는 아주 선량한 인간이고 금상첨화로 똑똑하기까지 하다. 이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원작 내용과 비슷하게, 그는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공작성에서 나누죠.’라고 말할 것이다.
내 반짝이는 눈빛을 받으며, 공작님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전의 말에 담긴 정보를 곱씹듯 진중한 눈빛을 띤 채 대답했다.
“제가 잘생겼군요.”
“예, 그럼 이제 공작성으로, 아니, 예……?”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한데. 이 사람, 아니 이 맹수 공작님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핀트가 나간 듯한 그의 반응을 지적하기도 전에 공작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은인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이제야 그에게 내 이름을 알릴 기회가 온 것이다. 조금 수상하고 무언가 이상한 말이 오갔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해냈다. 나는 씩씩하게 입을 열어 그에게 내 이름과 신분을 각인시켰다.
“아스텔, 아스텔이라 불러 주세요! 공작성 외부 치료소에 근무하는 평민 인간이에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신분 낮은 인간이라고 태도가 바뀔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의 나른하게 풀린 눈이 내 눈과 올곧게 마주쳤다.
“아스텔.”
그가 무심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자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으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갑자기 심장이 콕콕 찔리는 느낌이 드는 거지? 숨도 자꾸 가쁘게 쉬어지고, 마치 송곳으로 가슴 언저리를 쿡쿡 누르는 것처럼 불편한 감각이 치밀었다.
치료사인 나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흉통이었다.
‘첫눈에 반한 건 절대 아닌데, 심장이 너무 불편해.’
한껏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공작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심결에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가져다 댔다.
“공작성으로 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죠.”
약간의 사심조차 담겨 있지 않은 듯한 정중한 에스코트였다. 그러나 그와 손이 닿은 순간, 손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와 이마를 달구던 미열을 진정시켜 주었다.
……뭐지, 이거?
내 이마의 미열과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냉기. 본능적으로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공작성에 들어가는 것. 오늘 같은 기회는 또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두려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악명이 자자한 아나이스 공작성. 공작의 은인으로 들어가더라도 인간을 혐오하는 수인들로부터 살아남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모든 게 원작대로 흘러갈 테고,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 오빠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나는 이 순간 그를 따라나서야 했다.
마음 정리를 모두 마친 나는 흔쾌한 투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는 예의 무표정한 낯으로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렇게 그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눈에 보였다.
이쯤 되면 공작님도 깨어나자마자 뭔가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대체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걸까…….
“타십시오, 아스텔.”
냉랭한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에 각이 잡힌 우아하고 귀족적인 태도. 소심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그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원작에서조차 존재감 없이 숨어 살던, 작디작은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남자, 아나이스 공작. 그는 혼자만 빙결 마법을 쓴 사람처럼 대단히 차가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채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정신이 빠질 것 같았지만 마차를 타기 전에 내 집의 문을 꾹 걸어 잠그는 것은 잊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 * *
아나이스 공작성.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은 수십 개의 첨탑이 눈에 띄었다.
탑의 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 있어 겨울성이라 불리는 곳.
겨울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적인 형태를 자랑하는 천연 요새였다.
동시에 수인들이 모여 사는 북부 자치령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나이스 공작성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현 공작 때문이었다.
이 공작성에 기거하는 아나이스 공작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마물 학살자이자 마물 전쟁의 괴수, 제국을 넘어 전 대륙을 손에 쥐고 흔드는 패권자이자 황제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오만한 귀족, 그러나 정작 출신 성분은 그 누구도 모르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선대 공작 가문에 입적된 사내.
또 하나 더 있다. 맹수 수인이기는 하지만 종족도, 진짜 이름도 밝혀지지 않아 그저 공작 각하, 혹은 ‘아나이스 공작’으로만 불리는 남자. 마물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바로 죽인다는…….
……온갖 공포스러운 수식어를 달고 있는 분이라고나 할까.
‘생각했던 것보다 매너가 좋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위험한 맹수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해.’
뷔에트리 가문을 멸문시킨 자들이 이토록 위험한 공작성에 흘러 들어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 공작이 최종 흑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장은 이 공작성에 완벽히 적응하면서 그에게 최대한 잘 보이는 게 급선무였다.
창문 밖을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마차 안으로 돌려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유달리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감정 하나 깃들지 않아 시리도록 차가워 보였다.
내가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데도 무심히 허공을 응시하는 걸 보면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
“아스텔.”
……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급하게 이마를 쓸어내리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유달리 잘생기, 기셔서요. 그래서 계속 보게 되네요.”
“제 얼굴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장난으로 던진 말인가 싶어 멀뚱히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무표정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왜 쳐다보냐는 듯한 낯이었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 아니 맹수라니까…….’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은인 대접을 해 주시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외투 안에서 작은 사탕을 하나 꺼내 내밀기까지 했다.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긴장은 풀어 두십시오.”
“……!”
겁 많은 햄스터처럼 귀를 쫑긋한 나는 조심조심, 사탕을 먹는 척하다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아직은 경계, 또 경계할 때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낮게 읊조렸다.
“먹어 두는 게 좋을 텐데요.”
“…….”
경계하는 걸 들켰나?
그러나 공작님의 표정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게끔 미묘했다.
“곧 놀라운 말을 듣게 될 테니까.”
“……네?”
내 반문에도 그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마저도 몹시 우아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태도였다.
그나저나 무엇에 놀라게 된다는 걸까.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혹시 공작성이 엄청나게 아름다워서?
아니면 수인들의 차별 행위 때문에?
하지만 그 정도쯤은 치료소에서 삼 년 넘게 근무하면서 이미 체감하며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원작 내용을 치밀하게 계산해 치료술을 배우고 북부에 입성했다. 삼 년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치료소에서 일했고, 틈틈이 수인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러니 공작성에 들어간다 한들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저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어요!”
자신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언정 초연하리라 장담했다. 별일 다 겪어서 마음만큼은 거의 할머니, 해탈한 노승 수준인걸?
“진심이십니까?”
“네, 그럼요!”
그가 나를 다시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기이한 열감이 어려 있었다.
“지금 몸 상태는 괜찮은지 궁금한데.”
“……네?”
“심장이 뻐근하고 열이 있을 겁니다.”
내 손에 그의 손이 스치듯 닿았다. 그뿐이었는데도 둔통이 머무르고 있던 가슴 언저리가 편안해지고 뜨끈뜨끈하게 훈김이 올라오던 몸이 서늘해졌다.
치료사로서 내 직감이 말하건대, 이건 분명 좋지 않은 징조였다.
“지금은 편안할 겁니다.”
당황한 내가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와 달리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 그는 슬쩍 벌어진 내 입에 달콤한 사탕을 넣어 주었다.
“그러니까 긴장 풀라고 했잖아요, 내가.”
……공작님이 가지고 다니는 사탕이라면 쓴맛이 날 줄 알았는데.
딸기 맛이잖아……?
입 안에서 몇 번 굴리기도 전, 얼떨결에 사탕을 삼킨 나를 만족스럽게 보던 그가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기절하듯 수마가 찾아왔다.
* * *
“그, 그게 말이 돼요?”
아까의 진지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엄청나게 놀란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공작성에 도착하자마자 보상에 관해 논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나이스 공작님은 잠에 취해 피곤해하는 나를 깨워 곧장 공작성의 주치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 결과가 이거다.
“가, 각인이라니요!”
각인은 오래전 수인들 사이에서 존재했던 ‘고대 마법’의 일종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반려의 각인’.
각인 증상은 미열부터 시작해 심장 마비까지 워낙 다양해서 자연 발생의 경우 진단이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보통 수인과 수인 사이에서만 위력이 있었으며, 인간과 수인 간에 각인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
주로 수인들끼리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둘의 동의하에 마법을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마저도 최근에는 거의 사라진 의식이지만 말이다.
물론 내가 과거 수인 치료학을 공부하기 위해 탐독했던 책 내용을 되새겨 보면, 지금 우리처럼 이유 없이 갑작스레 각인이 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기는 했다.
‘중요한 건 반려의 각인이 내게 미치는 영향이야.’
어쩌다 각인이 됐는지는 상관없이, 일단 각인이 되고 나면…….
둘은 각인 기간 동안 운명 공동체가 된다.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넘어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 하나도 죽음에 이르는 사이. 즉, 각인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이다.
“저도 놀랐습니다.”
공작님이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저렇게 하나도 안 놀랐다는 얼굴로 놀랐다고 말할 수가 있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나이스 공작성의 오래된 서재 안은 싸늘한 냉기로 얼어붙었다.
나와 아나이스 공작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공작의 개인 주치의가 죽상을 한 채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구체적인 진단명은 ‘원인 불명의 일시 각인’입니다.”
일시 각인이라니.
게다가 뭐 같이 의식을 치른 것도 아닌데 각인이 됐다니, 이게 말이 돼?
“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던 주치의의 눈이 똘망똘망하게 뜨였다.
“그러고 보니, 각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 봅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령에 들어오려고 수인 치료술을 배웠다. 좋은 스승님과 악독한 치료소장을 연달아 거치며 온갖 잡일과 실전 치료에 능숙해졌다. 그 덕분에 이제는 제법 유능한 치료사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제 직업이 수인 치료사라서요. 일단은 알고 있기는 한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구…….”
머뭇거리듯 건넨 말에, 개인 주치의는 아까까지 죽상이었던 표정을 바꾸더니 눈을 갑작스럽게 번뜩였다.
“중요하지 않다뇨. 요즘 각인에 대해 알고 있는 치료사는 드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치료사라면 전부 다 알 만한-.”
“아닙니다! 요즘 치료사들은 각인에 대해서까지 공부하지 않죠. 쓸모없는 지식으로 여겨지니까요.”
그가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내더니 악수를 하자는 듯이 손을 쓱 내밀었다.
“인간 중에 이렇게 똑똑한 치료사가 있다니, 이것 참 기쁘네요!”
‘각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어쨌거나 분위기는 맞추어야겠지!
조금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악수를 하려 손을 내미는데 공작님이 그의 손끝을 잡아 우아하게 밀어 냈다.
“그쯤 해 두지. 본론으로.”
머쓱해진 주치의가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차가움을 풀풀 풍기는 태도에 다시금 쪼그라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작님 앞에서 저렇게 솔직해질 정도라면 꽤 오래 본 사이인 것 같은데. 바로 정색하다니…….
가까운 자에게도 저토록 정색하는 공작님은 진정 냉혈한이 틀림없다.
“예. 그러면 이제 자세한 설명을 드…… 려야겠군요.”
공작님의 눈치를 보던 주치의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각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는 다 아시죠?”
“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당연하단 듯 답하자 주치의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자한 어투로 속삭였다.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안다고 하시니,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다음에 나올 이야기에 긴장한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아, 네에…….”
급변하는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생명의 은인이 돼서 공작성에 들어온 다음, 어떻게든 여기 빌붙어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내용은 원작에 없었잖아!
전개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이 상황이 갑작스러울 게 분명한 아나이스 공작님의 표정은 여전히 철벽같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하나도 안 놀랄 수가 있을까.
이래서 철혈의 공작님이라고 하는구나.
감탄도 잠시, 주치의가 말을 꺼냈다.
“각인 초기에는 각인열이라는 미열이 수시로 나는데, 이 상태를 방치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아까 혹시 기면증처럼 잠이 오지 않았나요, 아스텔 님?”
“네, 네.”
그가 탄식하듯 선언했다.
“죽음의 징조입니다. 이대로라면 사흘 안에 아스텔 님의 장례를 치르겠어요. 그렇다면 각하께서도…….”
금방이라도 장사를 치를 듯 어두운 낯빛을 한 주치의를 향해 공작님이 단언했다.
“사흘 안에는 아니야.”
“우와, 사흘 안에 안 죽는다니 정말 다행…… 이 아니라!”
아무튼 죽는다는 거잖아!
산 넘어 산이었다.
죽기 싫어서 공작성에 왔는데 죽는다니……!
“아,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나는 영문 모를 상황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치의를 응시했다.
“그게…….”
주치의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그때였다.
“저도 아스텔 님을 따라 죽고 싶지는 않군요. 대답해 보십시오.”
“그, 그러니까……. 각인열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하나인데요. 아무래도 반려의 각인이니만큼…….”
왜 이렇게 얼버무리듯이 말하고, 내 시선을 피하는 걸까?
“서로의 친밀도를 늘리기 위해서…….”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을 때였다.
“그러니까……. 육체적 접촉, 즉 스킨십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말에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건 너무, 뒤통수에 뒤통수를 치는 전개 같은데요?
각인에 대해서 겉핥기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치료 방법이 스킨십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스…… 킨십이요?”
“예. 반려의 각인으로 인한 고통이니 서로의 친밀감이 깊어지면 안정화 되는 모양입니다. 각인열은 불완전한 각인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나는 눈꼬리를 늘어뜨린 채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냉기가 풀풀 풍기는데, 나 살겠다고 함부로 손댔다가는 바로 죽는 거 아닐까.
‘게다가 내가 아는 지식으로, 공작님은 누가 자기한테 달라붙는 거 별로 안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 걱정과 달리 공작님의 태도에는 여상한 데가 있었다. 그는 내 자그마한 손등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손만 잡아도 되는 건가?”
“아, 예. 이, 일단은 손만 잡아도 될 겁니다. 초기 단계라서요.”
“그렇다는군요, 아스텔.”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공작님은 나를 안심시키듯 단단한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것뿐이었는데도 터질 듯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 일단은 다행이네요…….”
손만 잡아도 된다고 하니까.
“그럼 각인을 푸, 푸는 방법은요?”
“아, 그 방법도 있는데요. 잠시만요.”
상황이 조금 정리된 것을 보던 주치의가 벌떡 일어나서 서가 근처를 뒤졌다. 서가에서 몇 가지 책을 빼낸 그가 급히 돌아와 페이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눈앞에서 책장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팔랑팔랑 넘어갔다.
외알 안경을 쓴 주치의의 눈매가 얄팍해졌다. 고서를 해독하며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던 그가 마침내 운을 띄웠다.
“여기 고대의 연구 결과를 보세요.”
그가 고서의 한 페이지를 우리 쪽으로 돌려 보여 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원인 불명으로 각인된 경우, 각인의 효과는 대부분 1년 이내에 사라지고 만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공작님은 무미건조한 낯으로 테이블을 느긋하게 몇 번 두드렸다.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누가 눈만 부라려도 쫄아 붙는 대형 쫄보인 나와, 마찬가지로 꽤 겁 많은 성격인 듯한 주치의 선생님은 서늘하게 흐르는 정적에 입을 열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건 공작님뿐이었다. 다행히 몇 분 뒤, 공작님이 나직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그렇다면 일 년 동안 아스텔, 당신이 제 약점이 되겠군요.”
“…….”
난 그냥 생명의 은인이 되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어깨가 아주 무거워졌다.
공작님이 강조하듯 말을 이었다.
“그것도 유일무이한.”
이거…… 큰일인데.
“1년 정도는 공작성에 머물러 주셔야겠습니다.”
“그…… 공작님의 각인자로요?”
아나이스 공작의 각인자라고 알려지기라도 하면 암살당할 위험이 더 클 것 같은데.
‘단순히 공작이 아끼는 사람인 것과 공작의 약점인 각인자인 것은 확실히 다르니까.’
저 오만하고 고고한 남자는 적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 역시 내 짐작을 눈치챈 듯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아뇨. 제가 후견한다는 것으로 정리하죠. 쓰러져 있던 저를 구해 준 대가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비해 둔 것처럼 대응 방안이 매끄럽게 나왔다.
말을 마무리한 아나이스 공작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주치의는 숨이 조여 오는 듯 억, 소리를 냈다.
“유일한 목격자에게는 속박 마법을 걸었으니 말이 새어 나갈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속박 마법을 손가락 몇 번 휘둘러 걸다니. 공작님의 마법 능력은 대단하구나…….
생명에는 문제없는 마법이라지만, 언제나 소시민 마인드로 살아온 나는 순간 목 졸리는 고통을 느꼈을 주치의의 상황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어깨를 곧게 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네, 네…….”
원래는 공작성에 숨어든 세작들을 잡아 족친 다음, 흑막의 정체를 알아낸 뒤 조용히 공작성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각인 때문에 상황이 꼬였다.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어. 공작님의 약점이 됐으니까, 이 성에서는 공작님을 포함해 그 누구도 날 건드릴 수 없잖아.’
나는 기합을 잔뜩 넣은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공작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나를 빤히 바라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것처럼 진득하게 탐색하는 눈이었다. 마음 한편에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시선이었지만 애써 발랄하게 웃어 보였다.
이내 그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아까 부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나는 살짝 주치의의 눈치를 보았다. 주치의까지 자리한 상황에서 할 부탁은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다행히 아나이스 공작님은 눈치가 빨랐다. 그가 주치의를 향해 짧게 턱짓을 했다.
“나가 보십시오.”
“예, 각하.”
주치의가 군말 없이 쪼르르 나갔다. 왠지 그의 목덜미가 긴장으로 뻣뻣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겠지……. 그러나 주치의의 감정에 대해 골몰할 시간 따위 없었다.
둘만 자리하자마자 아나이스 공작님이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신기하네요.”
“……네?”
“너무 작습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그렇게 살벌한 눈빛과 사나운 어조로 말하면…….
꼭…… 부러트리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당황한 나를 두고 그는 살벌한 기색을 지운 채 매끄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닙니다. 이제 아스텔의 부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그와 맞잡은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눈을 다급히 깜빡였다.
“네, 각인자로서! 작은, 아주아주 작은 부탁이 있는…… 데요!”
‘작은’ 부탁이라고 강조하는 내 말에 공작님이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금 비장한 눈빛을 띠고 답했다.
“기꺼이.”
표정과 달리 음성에서는 다정함이 배어났다. 하지만 아나이스 공작님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그의 무표정이 그 무엇보다 살벌하고 공포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맹수 수인인 그가 하찮은 인간인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고개를 기울이듯 다가오면…… 나는 절로 쭈그러들 수밖에 없다.
‘협상의 기본은 배포인데, 망했다.’
나는 슬금슬금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려 아나이스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아나이스 공작은 여러 가지 괴소문으로 유명했다. 인간을 산 채로 찢는다거나, 거대한 괴물도 한 손으로 들어 던질 만큼 무력이 세다거나 하는 일화는 요즘 자라나는 제국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아는 얘기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각인이 끝나더라도 저, 저를 죽이지 마세요!”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예상치 못하게 우리의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공작님? 뭐라고 하셨죠?”
나는 내 말을 내뱉는 데만 집중하느라 공작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채 나를 응시했다.
저게 바로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마물을 죽일 때 나타나는 비틀린 낯인 걸까?
그는 나와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당신을 죽일 것 같습니까?”
이상하게 힘이 들어갔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침음을 냈다.
“……그, 그러시지는 않겠지만. 제게 해를 가하지 않으시리라 믿고 있지만.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 거니까요.”
떠는 내 모습과 달리 눈앞의 남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날 물끄러미 응시했다. 확실히 귀족 중에서도 귀족 같은 사내라는 묘사가 아깝지 않았다.
“죽이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로는 부족했다. 나는 지그시 공작님을 응시했고, 몇 초 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건 드물었다.
“좋습니다. 죽이지 않는다는 계약서가 필요하겠군요.”
“역시 공작님은 정말 멋지세요!”
뒤늦은 아첨을 들은 아나이스 공작이 내 손에서 자기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손을 떼어 내는 방식만큼은 부드러웠다.
“아스텔과 함께라면 이제 제가 신경 쓸 일이 많아지겠군요.”
“음…….”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저도 적극적으로, 최대한 협조할게요.”
“적극적으로?”
“네! 친밀해져야 각인이 안정된다고 했으니까……. 우리, 매일매일 만나는 시간을 정해요!”
공작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게 좋겠군요.”
매일 함께 식사해야 한다니, 음식이 탈 없이 넘어갈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고급 정보를 구할 기회가 늘어난 것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다시 들었다.
“저녁 식사 때에 서로 건강 상태를 체크하면 되겠어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뭔가 수렁에 제 발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오만 오천 개 이상의 복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왔던 나로서는 뭐든 헤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리 가문에 누명 씌운 자식들…… 이 공작성에서 발 잘 뻗고 자고 있었겠지?’
나는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복수 매뉴얼》 수첩을 떠올렸다.
이 아나이스 공작성 안에 있는 가문의 첩자 놈들……. 먼지 한 톨 안 남게 탈탈 털고 만다!
꽉 움켜쥔 주먹을 바라보던 아나이스 공작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스텔.”
“네?”
“앞으로 저도, 우리의 안정을 위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가 눈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웃음으로 추정할 만한 표정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냥 의미심장해 보였다.
“우리의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 * *
그 후, 나는 서재에서 공작님과 함께 계약서까지 야무지게 나누어 썼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갑’이었다.
공작님이 선뜻 그렇게 해 주셨는데, 그가 내 예상보다 친절하단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하나, 아스텔 (‘갑’)은 피후견인으로서 공작 (‘을’)을 치료한다.
둘, ‘갑’은 ‘을’의 거처에서 상시 대기하며, ‘을’이 아플 때 오 분 대기조가 된다.
셋, ‘을’은 ‘갑’을 후원하며 모든 편의를 봐 준다.]
같은 골자의 마법 계약서였다. 계약서상 ‘갑’의 위치에 놓인 적은 난생처음이어서 주책맞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계약서는 처음 써 봐요!”
나는 그를 향해 환히 웃었다. 내가 근무해 왔던 치료소의 악덕 치료소장을 떠올리니 더더욱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는 살쾡이 수인으로, 항상 콧김을 내뿜으며 나를 발닦개처럼 굴렸다.
‘왜 제가 만든 물약을 소장님이 만드신 것처럼 학회에 발표하셨…….’
‘억울해?’
‘다, 당연히 억울…….’
눈가가 빨개진 나를 향해 치료소장은 눈썹을 치켜뜨며 축객령을 내렸었다.
‘억울하면 나가든가. 너 같은 어린 인간 여자애 따위를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난 치료소장이 어떤 갑질을 하건 안 울고 버텼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이 악독한 놈아.’
쓸개즙 씹는 심경으로 그냥 배알도 없는 애처럼 굴었다.
그래서 치료소장과 그 아래의 치료사들은 나를 두고 멍청한 아스텔, 호구 아스텔, 순진한 아스텔이라고 불렀다. 살면서 하도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더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몽글몽글 풀리려 한다.
안 될 일이지!
나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공작님의 싸늘한 안면을 다시 응시했다.
……좋아. 저 날카로운 인상을 보니까 다시 경계심이 마구 밀려드는군.
계약서를 반 접어 내게 건네준 공작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일련의 동작마저 절도가 있어 입이 헤- 벌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그런데 앞으로 공작성에 거주하려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긴장되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근무하던 치료소에 사직서도 내야 하고, 짐도 꾸려야 하는데요.”
공작님은 고개를 기울이며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
“치료소에는 기사들을 시켜 대신 사직 의사를 전달하겠습니다. 짐 역시 기사들을 시켜 가져오게 하지요.”
나 역시 치료소장과 대면하기가 껄끄러웠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혹시 모를 수색을 대비해 문제가 될 것은 전부 소각해 놔서 안심할 수 있었다.
“네, 그래요!”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님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머물 델피니움 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손이 내 이마를 가볍게 덮었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접촉에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공작님이 나른한 눈매를 아래로 내리깔며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열 검사입니다.”
“아, 네!”
나도 곧장 까치발을 들어 공작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였다.
그도 나도, 문제없이 건강한 상태인 것 같다, 아직까지는.
“저도 검사 끝이에요!”
내가 밝게 웃으며 손을 떼자 아무렇지 않게 접촉해 올 줄 몰랐다는 듯 그의 목울대가 짧게 일렁였다.
무심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어쩐지 눈을 자주 깜빡이는 것도 같았다.
* * *
나는 공작님의 안내를 받아 델피니움 룸 안으로 들어섰다.
외부 풍경을 조망하며 목욕할 수 있는 샤워 룸과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모닝 룸, 간단한 집무를 볼 수 있는 개인용 집무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공작님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굴리면서 방을 둘러보았다.
일단 내게 제일 중요한 건 창문이었다. 전령새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통로는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방 안에는 창문이 있었다.
‘창이 꽉 닫혀 있는데 여기, 첼로가 들어올 수 있나?’
까망새, ‘첼로’는 오빠와 나 사이를 이어 주는 전령새였다.
부모님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걸어 주신 고대 은신 마법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첼로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찾아올 수 있었고, 마력이 드래곤급으로 강한 자를 제외하면 맨눈으로는 형태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첼로는 주기적으로 오빠와 내 사이를 오가며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고 내 방의 창문을 두드리고는 했다.
이제 슬슬 첼로가 올 때가 되었으니 어디에서 머물건 창문을 열어 두어야 했다. 그럼 아무도 몰래 나를 찾아 들어올 게 분명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방의 널찍한 창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창문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본 공작님이 내 이름을 불러 제지했다.
“창문은 열지 마십시오.”
“아, 조금 답답해서요.”
“성의 모든 창에는, 위험한 고대의 마법진이 걸려 있습니다.”
“……네?”
이렇게 갑자기 역경과 고난이 생기다니!
악명 높은 공작성이니 곳곳에 마법진이 깔려 있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모든 창에 걸려 있을 줄이야.
나는 급하게 발을 뒤로 물렸다. 고대 마법진은 절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됐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테니까.
“수인이 아닌 자가 창을 열면, 무시무시한 마법에 걸리게 되지요.”
공작님이 동화를 읽어 주듯 다정하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되도록 창을 열지 마십시오.”
그는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며 심각할 정도로 철벽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당신이 위험해질 일은 허락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도 엄청난 철벽 수비. 하기야 내 목숨과 공작님의 목숨에는 긴밀한 연결 고리가 생긴 상태다.
‘당연히 내 신변 걱정을 할 만하지.’
나는 어떤 핑계를 대고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할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입술에는 침을 발랐다.
“그럼요. 전 절대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위험한 짓 안 하겠다고 했지, 창문을 안 열어 두겠다곤 안 했다.
나는 창문을 열어 둬도 위험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연신 궁리하며 델피니움 룸 내부 집무실로 발을 들였다.
“저, 그럼 집무실도 확인해 볼게요!”
“네. 그럼 충분히 둘러보시고, 편히 휴식하십시오.”
나는 공작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집처럼 생각하고 편안히 머무시기를.”
믿을 수 없게 다정한 배려였다. 그 인사와 함께 그가 떠나고 달칵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긴장감이 조금 풀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제일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 테이블 위에는 조간신문이 올라와 있었다.
《평민 기사 카시언, ‘그레이’라는 성을 하사받다!
평민 기사 카시언이 아사한드 섬 반란군 수장의 수급을 베어 온 대가로 황제 폐하께 ‘그레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비록 봉토는 없지만 당대의 평민 중 가장 영예로운 명예를 거머쥔 것만큼은 확실하다.
‘카시언 그레이’ 경의 두각을 나타내는 행보에 많은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신문 여기저기에 오빠의 초상화가 나온 걸 보니까 심장 한편이 뻐근해질 정도로 뿌듯했다.
동네 사람들! 이 카시언 그레이가 바로 우리 오빠예요, 하고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꼭!
나는 흡족한 표정을 한 채 신문의 까칠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감회에 잠겨 있다 정신을 차리고 집무실 외의 샤워 룸, 모닝 룸과 침실까지 모두 확인하고 나니 십여 분이 흘러 있었다.
나는 털썩, 침대 위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공작성 입성은 제대로 성공했다.
그런데 말이지…….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당장 이 성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도, 친한 사람을 만들 수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난 천대 받는 인간이니까. 다들 나를 백안시하겠지.
심지어 창문 하나도 내 손으로 못 여는 환경이었다. 창문을 못 열면 첼로를 볼 수 없으니, 오빠와 연락도 못 할 것이고…….
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손발이 되어 줄 명석하면서도 권력 있는 수인이 필요해.’
공작님 말고. 창문 열어 주세요, 하면 제대로 열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 * *
다음 날 아침.
공작성에서도 가장 평온하고 무심한 이로 널리 알려진 시녀장, 루델은 공작의 명을 받아 델피니움 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자신의 피후견인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였다.
공작성은 다년간 이어지는 전쟁과 공작의 냉랭한 성품으로 인해 유달리 폐쇄적이었다.
성에 드나들 수 있는 이는 가신 일부의 추천장을 받은 ‘순혈 수인 시녀’ 및 검증을 거쳐 선발된 북부에서 나고 자란 ‘수인 시종과 하인들’, 충성스럽고 용맹한 ‘기사’들과 ‘4대 가신 가문의 직계 혈족’, 그리고 특수 목적으로 허락을 받은 ‘일부의 인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피후견인을 데려오다니.
델피니움 룸으로 향하면서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봐, 루델!”
“무슨 일이십니까?”
루델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사내는 공작의 전담 치료사였다.
“아니, 아니!”
루델을 대면한 주치의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나이스 공작을 꽤 오래 보아 왔다. 어린 시절 출처 모를 피로 칠갑을 한 채 처음 공작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혈연 세습이 아닌 약육강식의 공작 가문에서 야차같이 살아남아 결국 공작 작위를 쟁취한 과정까지 전부 보았단 뜻이다. 마물 전쟁도 함께 출전하여 공작의 전담의로서 내내 활약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나이스 공작이 여자를 데려왔다. 반려의 각인이라는 고대 마법에 걸린 채로. 게다가 그 미묘하게 유한 느낌이라니.
‘당장 사라지십시오.’
‘아무래도 그대와는 말을 섞을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오만하고 냉혈한처럼 굴었던 공작이었다.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도 저만큼 일관적으로 냉소적이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그 인간 앞에서는 무언가 달라졌다.
다른 수인들과 달리 독특하게도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적은 주치의였다. 처음부터 아스텔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확실히 그만큼 똑똑한 두뇌를 가진 인간을 난생처음 보기는 했다.
‘여러모로 신기한 인간이란 말이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주치의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흠, 흠. 아니, 내 할 말이 있네, 루델.”
시녀장은 순혈 수인으로, 아직 안주인이 없는 공작성의 내부를 총괄하는 실세 중 실세였다. 공작이 전쟁 문제로 성을 비울 때면 그녀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졌다.
한편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팔린 듯한 주치의의 모습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 각하께서 데려오신 피후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겠지?”
“아, 네.”
주치의가 이마에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공작 각하께 은혜를 입힌 ‘인간’일세.”
‘인간’이라니. 시녀장의 눈동자 위로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 역시 자신이 모시는 공작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자를 후견하겠다고 데려올 인물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역시나.
시녀장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직접 보셨다면 여쭙겠습니다. 어떤 인간입니까?”
“그게…….”
주치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겉보기에는 알밤 문 다람쥐처럼 순하게 생겨서는! 분명 특별한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똑똑한 것도 똑똑한 거지만 아무렴, 공작님의 그 태도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배척하는 이 공작성에서 차마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꽤 멋있는 것 같아.”
물론 각인에 대한 정보는 발설할 수 없었다.
시녀장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주치의가 아쉬운 기색으로 손을 몇 번 비비고 있었다.
‘주치의를 보아 하니 그 인간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군.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루델의 눈매가 한결 더 가늘어졌다.
공작의 후원을 받는 데다 주치의의 호감까지 산 것을 보니 예사롭지 않은 인간인 건 확실했다.
차차 알아봐야지.
그러나 루델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뿐 아니라 애초에 아나이스 공작성은 제국 전쟁터의 최전방이자 보수적인 수인 사회다. 폐쇄적인 만큼 외부 유입에 민감하고, 종이 다른 인간은 더더욱 싫어하는.
이 수인 우월주의로 가득 찬 차가운 얼음의 요새에서 인간이 단독 개체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마물 전쟁터에 오래 머무르시더니, 허접한 인간 따위에게도 평가가 제법 유해지신 모양입니다?”
“아니, 진짜 신기한 인간이기는 한…….”
“아, 네.”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루델은 얼빠진 주치의를 가볍게 지나쳐 그 ‘인간’이 있다는 델피니움 룸으로 향했다.
* * *
아나이스 공작님을 구하고, 공작님과 각인이 이루어진 게 불과 어제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에 오빠에게 편지를 쓰려 했지만 넘어설 수 없는 창문의 벽을 느끼고 좌절했다.
폭신폭신한 침대에 누운 나는 어떻게 하면 첼로를 만날 수 있을지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아스텔 님.”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시녀장 루델입니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드디어, 시녀장 루델을 만나게 됐어.’
루델로 치자면, 그녀는 공작성의 제1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시간, 나는 공작령의 민간 치료소에서 3년을 일했다. 우리 치료소를 포함해 공작령 내에는 폐쇄적인 공작성에 관한 소문이 산들바람처럼 은근하게 퍼져 있었다.
그때 만난 수인 환자들의 말에 따르면 공작 휘하의 실세는 총 세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무력으로 치면 따를 사람이 없다는 기사단장, 내성을 총괄하는 시녀장, 공작가 4대 가신 가문 세력까지.
‘특히 시녀장은 내성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의 정보를 알고 있다지.’
지난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세운 첫 번째 목표는 공작성의 실세들과 친해지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첫 번째 공략 상대는 시녀장 루델이었다.
아직 공작의 피후견인에 불과한 내가 지금 당장 기사단장이나 가신 가문 세력과 만날 수는 없을 것이고, 의도적으로 접촉을 시도했다가는 섣부른 의심을 살 게 분명하다.
고로 내 공략 상대 일 순위는 바로 시녀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시녀장은 이 공작성의 모든 마법진에 빠삭할 거란 말이지!’
사실 시녀장과는 비교적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나는 시녀장의 우람한 모습을 보며 파래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녀장이 이렇게 무섭게 생겼다고는 아무도 말 안 해 줬잖아!’
무려 180cm는 될 듯한 장신에 한 올 삐져나온 머리칼 없이 올빽으로 정돈된 올림머리. 깐깐한 사감 선생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외모. 뾰족해 보이는 안경까지 낀 그녀는 좋게 말하면 상당히 프로페셔널해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범접 불가의 포스를 풍겼다.
‘이 공작성 사람들은 다 이렇게 엄청나게 큰가……?’
공작성 외부 치료소의 공식 만만이, 나 아스텔이 상대하기에는 하나같이 무서운 상대뿐이었다. 첩첩산중이지만 용기를 내야 한다. 죽기 싫으면!
나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어…….”
시녀장이 걸음을 딱 멈춘 뒤 나를 향해 말했다.
“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쪽도 철벽이다. 그녀의 딱딱하기 짝이 없는 벽돌 같은 태도에 나는 또 쫄았다. 하지만 이 첫 번째 벽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그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는 법.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를 힐끗 본 시녀장은 내 손등에 대뜸 마도구를 가져다 댔다.
“모든 외부인의 신원을 감정하고, 위험한 마법에 걸리지 않았는지 검사하는 마도구입니다.”
그녀의 무심한 안내에 나는 숨을 흐읍, 들이켰다. 나는 수상하고 위험한 고대 은신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니까, 지레 찔린 것이다.
‘확실히 예상했던 부분이야. 공작성에서 오래 지내야 하는데 당연히 신원 검사를 하겠지.’
나는 마도구에 손등을 더욱 바짝 붙였다.
“네, 검사해 주세요.”
시녀장이 냉철하게 말했다.
“신원이 확실치 않으면 손목이 부서질 겁니다.”
역시 북부다. 약육강식의 세계라 그런지 검증 방식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침을 크게 삼키고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손 근처에서 움직이는 마도구를 보며 쿵쿵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절대 문제 될 일 없으니 진정해, 아스텔!’
마도구가 별 이상 없이 내 손등과 손목을 쓸었다. 내게 걸린 은신 마법은 대마법사였던 부모님이 생명력을 짜내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흑막의 눈을 피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
‘부모님의 마법이 이런 마도구 따위에 간파될 리 없어.’
보통 제국 내 귀족 가문 아이들은 모두 기어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 즉시 황궁에서 신분 등록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황궁 안에 설치된 고대 마법석 위를 아장아장 기어가기만 하면 됐는데, 그 마법석 위에 놓이면 손목에 작은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 과정을 거쳐 황궁에 귀족 가문의 자녀라는 신상 명세가 등록되는 것이다.
‘제국 건국에 일조한 늙은 드래곤이 고안해 낸 방법이라지.’
이 마법진에 의해, 자치령으로 인정받은 북부의 수인 가문들을 제외한 모든 제국의 귀족은 황궁의 보호 및 감시하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와 오빠 역시 뷔에트리 백작 가문의 자녀로서 그 의식을 치렀었다.
그러나 내 손목에 있는 것은 그때 새겨진 것과 다른 마법진이었다. 부모님이 드래곤의 마법을 어렵게 깨고, 뷔에트리 가문의 자식임을 나타내는 마법진 위로 가짜 신분이 담긴 마법진을 덧씌운 것이다.
이 마법진은 나와 오빠의 눈에만 보일 뿐,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이름 역시도 어린 시절 가족끼리만 사용했던 아명(兒名)으로 감쪽같이 바뀌었을뿐더러, 오빠의 머리 색이 금발에서 진한 갈색으로, 나의 눈 색이 연두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한 것도 마법의 일환이었다.
이 은신 마법이 깨지면 숨겨 둔 진실, 뷔에트리 가문의 남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황궁에서 알게 된다.
그 생각에 나는 긴장했고 손에 땀을 쥐었다. 마도구가 내 손등 위에 닿아 삐빅, 소리를 냈다.
“…….”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마법진 낙인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직 그 누구도 우리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시녀장 루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별다른 마법에 걸린 적은 없으시군요. 확인 끝났습니다.”
검사하는 내내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그녀는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공작 각하께 따로 설명을 들으셨겠습니다만, 자세한 방의 상태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모닝 룸은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것인지, 샤워 룸은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짐은 어떻게 정리하면 되는지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덧붙여, 창틀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만…….”
입을 쩍 벌린 채 잠자코 루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찰나의 침묵에 멈칫했다.
“……?”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이 보이는군요.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창틀에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먼지 같은 게 한 톨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쪽방을 전전하며 얹혀살았던 처지에 갑작스러운 호사가 어리둥절할 정도인데, 루델은 이 엄청난 룸 컨디션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게다가 그로 인한 불쾌함이 잘 조절이 안 되는 듯했다. 수인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날 경우 종종 인간화가 풀리기도 하는데,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인간 형태였던 손이 순간 달라졌다. 분명 뭉툭한 손에 구부러진 갈고리 모양의 딱딱한 발톱이 나와 있었다.
‘어? 저 발은?’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수인들의 종족 특성을 아주 잘 알았다. 몇 년간 수인 치료소에서 여러 종류의 수인들을 치료해 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인간화 상태의 모습만 보아도 어떤 수인인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녀장인 루델의 발은 상당히 의외였다.
‘잘못 본 건가?’
나는 루델의 종족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재규어 수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왜냐하면 재규어 수인의 특징 중에 꼼꼼함과 섬세함, 까다로움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보통 귀족 가문에서는 가신 가문의 방계 혈족 여성에게 시녀장을 맡기는 게 원칙이니까.’
재규어 가문은 늑대, 상어, 은여우 일족과 함께 공작가 4대 가신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러니 나름 신빙성 있는 추측이라고 여겼는데…….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저 발은 분명 ‘그 수인’이 맞는데, 루델은 ‘그 수인’ 같지가 않았다.
“시녀가 필요하시면 침대가에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내 시선을 느낀 듯한 루델이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어느덧 그녀의 손끝에서 보였던 단단한 짐승의 발톱은 쏙 하고 사라진 뒤였다.
“네! 제 짐은 제가 정리할게요.”
루델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으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깍듯하게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각하와의 석찬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루델은 깔끔하게 퇴장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공작님과 다른 의미로 냉기가 풀풀 풍겼다. 어차피 처음부터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동안에도 처음부터 나를 좋아한 사람이나 수인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나는 방 안을 한 번 쭉 훑어본 뒤 손을 탁탁 털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게 잘 정돈되어 있는 듯했다.
‘공작성의 실세인 시녀장, 루델이 무엇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어.’
나는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았다.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막연했지만,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중요한 건, 원작 속 수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종족적 특성이 강했다는 거야.’
고양이 수인에게는 고양이의 법칙대로, 여우 수인에게는 여우의 법칙대로. 다행히 치료소에 있던 기간 동안 수인의 습성에 관해 많이 배웠으니까 잘 다룰 자신은 있었다.
나는 소문을 통해 접한 루델의 특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재규어 수인이 아니라는 것은 예상외였지만, 그 이상으로 루델에 대해 열심히 조사했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방법도 강구해 왔지.
나는 주머니를 뒤져 항상 들고 다니는 상비약을 손에 쥐었다.
공작님과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이 공작성에 내 눈과 귀를 심어 보도록 하자.
‘어서 오빠와 연락해야 해!’
좋았어, 빠르게 스며들어 보는 거야!
* * *
바로 그때, 공작성의 메이드 룸은 아스텔과 관련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공작 각하의 은인이라는 인간이 들어왔다는데?”
폐쇄적인 공작성이었지만 그만큼 내부에서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화제는 공작성에 제 발로 찾아온 인간, 아스텔이었다.
“뭐? 인간! 우우! 인간!”
소파에 앉은 고릴라 수인 시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까칠한 표정을 지은 채 뺨을 아래로 긁어내렸다. 곁에 앉은 다른 시녀가 입을 쩍 벌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으으, 인간 딱 질색이야!”
“그래도 공작 각하의 은인이라잖아. 적당히 해 둬.”
“공작 각하의 은인이라니, 분명히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인간일 거야…….”
“그, 그래도 인간이잖아. 넌 인간들의 노예였던 시절을 잊은 거야? 우리 수인들은 은혜도 잊지 않지만, 원수는 더더욱 잊지 않는 거 몰라?”
오래전 과거, 수인 중 다수는 인간들의 노예였다. 인간들은 인간화가 서툰 수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다가 노리개로 삼더니 유희로 죽이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백여 년쯤 전, 수인들은 수도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제국의 북부에 터를 잡은 뒤 마물들을 해치우며 전력을 다지고 인간 사회를 위협했다. 수많은 수인이 하나둘씩 북부로 집결했고, 그중에서도 마물 전쟁에 공헌한 순혈 수인들이 각기 가신의 작위를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제국의 황제는 당시 변경백이었던 수인에게 북부의 자치권과 함께 ‘아나이스’라는 성과 공작위를 주었고, 그렇게 북부는 지금과 같이 ‘아나이스 공작가’를 중심으로 한 4대 가신 가문 형태를 갖추었다.
아마 지금의 공작님이 3대 아나이스 공작일 것이다.
수인들의 피로 얻어 낸 이곳은 하나부터 열까지 인간 사회와는 달랐다. 순혈 수인이 우대받기는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힘의 우위가 존재했다. 전쟁을 통해 자신의 강력함을 증명한 수인이 공작 작위를 얻게 되며, 약한 종자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였다.
그런 그들에게 공작이 후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치 따뜻한 눈 같은 느낌이었다.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소리다.
“아니, 그래도 공작 각하께서 데려오셨으니까……!”
“……그래도 인간이야, 인간이라고!”
아스텔을 주제로 한 진지한 토론이 한참 이어졌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설전은 공작성 내부 최고의 실세로 불리는 시녀장, 루델이 들어오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여기서 무엇들 하고 있는 거지?”
루델이 소파에 앉아 있는 시녀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은인의 방이 제대로 청소되지도 않았던데 모여 앉아 떠들고 있나?”
다른 귀족 가문과 달리 폐쇄적인 공작성의 일부 시녀들은 청소 하녀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비교적 계급제로부터 자유로운 공작가의 특징이었다.
“은인이라면, 그 인간 말씀이십니까? 엄청나게 깔끔히 청소했는데요!”
고고하고 냉철한 그녀는 성내에 풍파가 이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인 아스텔에게 적당히 은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굳이 아스텔을 비호할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먼지가 남아 있더군. 인간이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 같으니 너희들이 참아.”
제아무리 강심장인 인간일지언정 수인들의 적대적이고 흉흉한 시선에 공작성 생활을 오래 견디지는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 모든 수인이 존경하고 흠앙하는 가장 위대한 맹수 수인, 아나이스 공작. 마물 전쟁에서 탄생한 군신이자 황제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내. 금방이라도 목이 꺾일 것처럼 가냘픈 인간이 아나이스 공작과 오래 겸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떻게 공작 각하를 인간이 구했다는 건지. 분명 사기일 거예요!”
루델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시끄러워. 그대들은 윗전에 관해 잡담을 나눌 정도로 한가로운가?”
잡다하게 떠들던 수인 시녀들은 루델의 권위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루델은 장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까딱 고갯짓을 했다.
“미엘, 네가 관리하는 정원수의 묘목 말이야. 새싹이 1cm 정도 비뚤어진 것 같더군.”
“아, 넵.”
“델사, 네 펜던트에는 먼지가 붙었고.”
“아니, 매 수인도 아니면서 매의 눈이시네…….”
투덜거리는 말에 루델의 표정이 유달리 경직되었다. 루델은 그녀의 출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말보다 싫어한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끄러워. 당장 청소해. 깨끗한 환경을 위해서는 청소가 가장 중요하다.”
냉랭하게 경고한 루델이 싸늘한 시선으로 시녀들을 훑고 떠나갔다.
자리에 남은 자들도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루델 시녀장님 입맛을 맞출 수 있는 청소 노동자는 단 하나도 없을 거야.”
“진심으로 동의하는 바다.”
시녀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도 고된 노동이 계속되리라 예감하면서.
한편, 복도로 나온 루델은 성내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돌아가는 상황을 관리 감독했다. 그러기를 한참, 델피니움 룸 근처를 지나다 멈춰 선 그녀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적당히 일을 처리하다 보니, 다시 그 방에 가 봐야 할 시간이 됐군.’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텔을 확인하러 가 볼 시간이 온 것이었다.
그사이 시녀들이 다시 방을 제대로 치웠을까? 아니, 기대도 되지 않았다. 분명 수인들의 털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아스텔이 머무는 델피니움 룸 문 앞에 다다른 그녀는 천천히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발랄하고 경쾌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피곤함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루델의 표정은 여전히 냉엄했다.
그래 봤자, 아스텔은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갈 인간에 불과했다. 루델은 한순간 스쳐 지나갈 인연에 마음을 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 일전에 일정을 공유해 드렸던 대로, 공작 각하와의 석찬을 위해 꾸밈을 도와 드릴 예정입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곧 루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저 간단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떠날 요량이었다. 귀빈을 모실 때면 응당 준비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업무.
그런데 오늘은 무엇인가 달랐다.
“오셨어요?”
“이게…… 무슨…….”
루델은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얼빠진 표정을 한 채 눈을 홉떴다.
그녀의 이름은 루델. 직책은 아나이스 공작성의 시녀장, 수인, 현재 나이 45세.
결벽증과 강박증이 특징인 그녀는…….
아스텔의 방 안에서 그야말로 신세계를 보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한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영업 비밀이에요.”
비밀이라 속삭이면서도 아스텔의 손에는 무색의 약물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이 방 안에 윤을 내게 한 약인 듯싶었다.
루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방 안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빨래에서만 나는 향기까지 달큼하게 났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시녀장으로 오래 일한 루델은 알았다. 이 향기는, 완벽히 청소가 되어 있는 공간에서만 나는 아스라한 공기였다.
게다가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린 시녀장은 탁상 옆의 신문 거치대와 깔끔하게 정리된 작은 서가를 바라보며 절로 입을 벌렸다. 탁상 위에는 아스텔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약병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단 1mm의 오차도 없이, 색깔별로 깔끔하게 분류된 모습이었다. 약병은 전부 빨간색 계열이었는데, 좌측이 가장 진한 빨강이었고 우측으로 갈수록 연한 색을 띠었다.
일반인이라면 감탄하거나 놀라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리벽과 강박증이 있는 루델에게는 심장이 멎을 만큼 완벽하고 황홀한 정리 방식이었다.
“깔끔하군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정리법. 그러나 정작 이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 낸 아스텔은 무덤덤하게 눈을 찡긋했다.
“색깔별로 정리하는 게 더 예쁘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담담할 수가 있지?
‘진짜 신기하다고!’
루델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주치의의 말을 떠올리며 슬며시 벌어진 입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뭐, 신기하긴 했다.
* * *
저 표정을 보니 성공인 것 같다!
사실 원작 속에는 수인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수인 치료소에서 일하면서 몸소 수인들에 대한 정보를 체득했다. 물론 루델을 재규어일 것이라 예상한 건 명백한 착오였다.
하지만 수인 중에서 드물게 종족 특성을 거스르려는 수인들이 있단 것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대응이 가능했다.
설마 시녀장 루델이 그런 케이스일 줄은 정말 몰랐지만 말이다.
‘분명 그 발은 나무늘보였어.’
나무늘보 수인 출신임에도 종족 특성처럼 게으르기보다 까다롭고 꼼꼼한 시녀장.
‘종족 고유의 특성을 극복한 수인들은 오히려 종족 특성과 반대되는 성향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지.’
그러니 루델은 나무늘보와 정반대로 꼼꼼하다 못해 강박적일 정도로 깔끔하고 부지런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내 예측은 훌륭히 맞아떨어졌다.
“외람된 말이지만 특기가 정리 및 청소이십니까?”
“네!”
“구…….”
분명 늘 정돈된 표정을 보였던 그녀가 정신없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굳이 아스텔 님께서 공작성 내부를 청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하의 피후견인이시니.”
“아아, 네!”
나는 발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델의 입가에, 딱 1초.
온화한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는 쾌활하고 즐거운 목소리 톤을 유지하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다 하셨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공작 각하와의 저녁 정찬을 위해 단장 준비를 도와 드리려 합니다.”
“아, 네!”
“파우더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루델은 본래의 냉철한 태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까 느슨하게 풀린 표정을 본 입장에서는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것만 봐도 청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니까.
나는 파우더 룸으로 들어서는 루델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장담하는데 당신, 지금은 얼음송곳 같지만 곧 따뜻하게 녹아내릴 때가 올 거예요.
‘이 공작성에 들어오기 위해 많은 정보를 모아서, 몇 년간 철저하게 준비했으니까.’
당신은 곧 내 손과 발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전에…….
“아까 부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네.”
“시녀장님은 창문을 열 수 있으시죠?”
“……창문,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얼굴에 약한 균열이 일었다.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더욱 깔끔한 청소를 위해, 계속 약품을 사용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창을 열고 환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창문을 조금 열어 주실 수 있을까요?”
“청소를 위해서…….”
루델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원래 환기가 중요한 법이거든요.”
그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루델을 열심히 응원했다.
‘창문 여는 건 나한테나 힘든 일이지, 루델한텐 힘든 일 아니잖아요.’
내 반짝반짝한 눈빛 공격을 받은 루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조용히 창가로 향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청소에 관해 고견을 나누어 보고 싶군요.”
드르륵, 소리와 함께 창문이 조금 열렸다. 루델은 창문 근처에 선 채 주머니에서 가져온 휴대용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이 마도구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계십시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도구를 건네받았다.
“공작 각하께서 성에 머무시니 별문제 없겠지만 만에 하나 창 근처에 괴이쩍은 생명체가 나타나면, 이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그럼요!”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앞으로도 청소한 날에만 창을 열어 주시면 돼요. 저도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네, 그렇죠.”
까다로운 표정을 한 루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숨보다 소중한 게 청소일 뿐이죠.”
나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학습된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럼요.”
그러자 루델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역시 세상은 인맥이라는 절대 명제를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열린 창문으로 조금 찬 바람이 들어왔다.
‘저 정도면 첼로가 들어오기에 충분하지!’
만족스럽게 창문을 확인한 나는 연두색 풀꽃 같은 예쁜 드레스로 갈아입고 다시 공작님을 만나러 갔다.
아나이스 공작 저택의 만찬장은 무척 아름다웠다. 고상한 홀 안, 아일랜드 대리석으로 만든 만찬 식탁 중심에는 화려한 꽃 장식이, 각 자리에는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며 공작님과 나는 과거의 이야기를 했다.
공작님은 말을 아꼈고 나는 내가 수도의 치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치료사 자격증을 땄으며, 북부령의 수인 치료소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하나씩 짚어 주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마침내 나의 교우 관계에 다다랐다.
“아스텔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합니다. 누구랑 친한지도.”
공작님이 스테이크를 썰며 물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스테이크를 거침없이 써는 공작님을 향해 나는 진지하게 꾸며 낸 이야기를 읊었다.
“제네트 고아원에 살았어요. 친구들도 거의 고아원에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공작님은, 치, 친구가 있으세요?”
“예전에는 있었습니다, 한 명. 아주 친했지만…….”
“…….”
원작 속에서도, 북부에 사는 동안 소문으로도 접하지 못한 이야기에 나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그가 음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아…….”
“그래서, 지금이라도 되찾을 생각입니다.”
만찬장이 워낙 넓은 탓에 공작님의 말끝이 웅웅거리며 울려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고기의 피가 묻은 나이프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친구를 죽여서라도 되찾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흉흉한 낯빛이었다.
“꼬,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불쌍하니 마음속으로라도 짧게 명복을 빌어 줘야지…….
“그럴 겁니다. 그럼 이제……. 다시 아스텔의 친구들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보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나에 대한 뒷조사는 전부 끝났을 거야. 외부인에게 엄격한 공작성이니까.’
다행히 은신 마법 덕분에 나의 인간관계는 철저하게 날조되어 있었다. 거리에서 출생해서, 십 년간 떠돌이 거지 생활을 한 것으로 조작되어 있을 테다.
일곱 살 무렵부터 제네트 고아원에서 지낸 ‘진짜’ 행적들도 조사 내용에 잘 나와 있겠지?
“제네트 고아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앤이나 길버트, 치료학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신 로젠 스승님이 계세요. 셋 다 이제는 연락이 끊겨 더는 친구가 아니지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뽀글뽀글 갈색 머리에 녹안을 한, 나의 영웅. 우리 친오빠, ‘카시언 그레이’에 대해 얘기할 차례였다.
진정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의, 딱 평범한 친구로 보일 테니.
“아, 그리고 평민 기사 출신으로 최근에 작위를 받은 카시언 그레이를 아시나요?”
유독 힘을 주어 말하는 이름에 그가 골똘히 관찰하듯 그녀의 입술을 응시하며 턱을 괴었다.
“처음 듣습니다.”
……전혀 처음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기사, 카시언 그레이도 제 친구예요.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닌데…….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거든요. 가끔 만나 대화를 나누는 정도예요.”
“그 친구가 끝입니까?”
“아, 네에…….”
공작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식탁 위를 장식한 화려한 촛대의 불이 슬며시 일렁거렸다. 그 때문인지 잘생긴 얼굴에 짙게 그늘이 졌다가 다시 화사해졌다.
“그, 사실은……. 국민적인 영웅과 같은 사이라는 게 멋있으니까 그냥 말해 봤어요.”
“기사들의 영웅담을 좋아하시는군요.”
“아, 네! 맞아요! 제국민이라면 안 좋아할 수가 없죠.”
마물 전쟁이나 동대륙과의 국지성 소요 사태 등이 빈번한 탓에, 제국에서는 능력 있는 기사들이 우대받고는 했으니까. 나는 내가 말을 해 놓고도 자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제대로 식사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때 공작님이 희미하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카시언 그레이라…….”
진지하게 곱씹는 듯한 말투였다.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지레 찔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로 콕, 하고 그릇을 내리찍었다.
“……네?”
“제 각인자인 아스텔의 친구라고 하니까……. 만나 보고 싶군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공작님의 스테이크 접시를 얼핏 보게 된 나는 흠칫 놀랐다. 접시에 한가득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붉디붉은 핏물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그가 부드럽게 강조했다. 나는 포크를 은식기에 내려놓고 손목을 더듬어 은신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했다. 불안이 일 때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다행히 은신 마법은 깨지지 않고 온전했다.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그럴 거예요!”
그가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나는 태연한 척 식사에 마저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공작성의 음식들은 훌륭히 입에 맞았다. 잘 구운 연어와 새끼 돼지고기를 먹을 때에는 귓가에 상투스가 울려 퍼지는 줄 알았다.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후식으로 나온 소르베를 먹었을 때 발생했다. 심장이 갑자기 조여 오더니, 숨이 조금씩 차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상 증세를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각인이 안정화가 덜 된 모양입니다.”
……아, 각인이구나.
순간 복수도 못 하고 바로 독살당하는 건 줄 알았다.
나는 급하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아, 네…… 여기, 손이요!”
맹세코, 그냥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벌어진 일은 내 예상 밖이었다.
공작님이 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등에 느긋하게 입을 맞췄다. 차디찬 입술이 손등에 닿는 순간 나는 눈을 화등잔처럼 떴다. 덕분에 뻐근하게 부푼 가슴이 가라앉기는 했다.
“무리하셨군요.”
그가 손등에 입술을 맞춘 채로 말하자 발끝에서부터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이 타고 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내 새하얀 손등에 입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호흡이 곤란할 때는 손등 키스를 하라고 쓰여 있던데.”
각인 관련 책이라도 읽으신 걸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낮은 음성에 내 귀뿌리가 뜨끈해지며 빠르게 시뻘게졌다. 분명히 호흡 곤란은 치유가 된 것 같은데 심장이 오십 미터 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쿵쿵거렸다.
나는 급하게 그가 잡은 손을 빼내어 뒤로 숨기며 중얼거렸다.
“저, 저기……. 제대로 치료된 게 맞을까요? 지금 부정맥 온 것 같, 같은데…….”
정말 아무 말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진심이었다. 심장이 엄청나게 뛰었다. 등 뒤로 손을 숨기고 있는 내 모습에 시선을 보낸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
“부정맥이 온 기분입니다.”
공작님과 부정맥.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조합이라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의 손등에 입 맞춰 보는 건 처음이라.”
전혀 처음 같지 않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나이스 공작님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처음이라니.
공작님도, 나도.
곱씹다 보니 약간 불길하면서도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입 바깥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횡설수설 내뱉었다.
“그…… 그,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그러니까. 손등 키스 정도면 충분하겠죠?”
말을 내뱉고 보니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큰 눈을 깜박거리며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 정도로도 열이 싹 내리는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내 시선을 묘하게 빗겨 나갔다.
“무리하지 마세요, 아스텔.”
가볍게 대답해 왔지만, 그 말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만약…… 제가, 아니면 공작님이, 무리하면요?”
내 말에 그는 입매를 묘하게 비틀며 속삭였다.
“손등에 입 맞추는 거로 끝나지는 않겠죠.”
미,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 바깥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식사 자리는 전처럼 평온해졌으나, 내 머릿속에서는 화재 경보 비슷한 게 울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살면서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나로서는 손등 키스 다음 단계로 가게 되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물론 심장은 그렇게 쉽게 터지지 않지만……, 혹시 모르잖아!
* * *
다행히 저녁 식사는 짧은 두근거림과 함께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델피니움 룸으로 돌아온 나는 공연히 베개를 꼭 감싸 안으며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 얘기를 못 들었어. 진짜 이름도 궁금하고, 정확히 어떤 맹수 수인인지도 궁금한데.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자타공인 수인 전문가인 나조차 모르다니…….’
소설 속에서조차 그의 정보는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알려진 것은 제국에서 가장 위험하고 미스터리한 인물이라는 것 정도.
그래서 최종 흑막의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서서히 알게 될 거야.’
만약 공작님이 최종 흑막이라면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테고, 아니라면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생각을 간단히 정리한 나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불과 그저께까지만 해도 난 쓸쓸하고 작은 집 안에서 혼자 누워 있었는데.
삼 년 전, 복수를 위해 기사단에 입단한 오빠와 헤어진 뒤, 북부 공작령에 나 혼자 올라왔다.
어렵게 취업한 북부 공작령의 치료소에서 온갖 구박을 들으며 오지 않는 오빠의 편지만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지금은 뽀송뽀송하게 씻은 뒤 커다란 침상 위에 누워서 잠이 오면 오는 대로 스르륵 눈을 감고 있었다.
하도 오랜 세월 고생을 해서 그런가?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 같은 폭신한 침대가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포근했다. 나는 이불 안에서 꼬물꼬물 발을 움직였다.
나중에 복수가 끝나면 복슬복슬한 양털이 가득 든 양모 이불을 오백 개 사야지. 그리고 그 안에 폭 파묻혀서 살아야지.
오늘 처음으로 먹어 본 소르베도, 라즈베리의 풍미가 달콤한 크라나칸 디저트도 천 개 넘게 주문해서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거다.
꼭, 진짜로…….
‘그나저나 첼로가 올 때쯤이 되었는데. 오빠한테 편지를 써야만 해.’
그대로 눈을 꼭 감고 오빠,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조카와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스르륵 잠이 들려던 때, 내 귓가에 톡톡 하는 이슬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톡. 톡. 토토톡.
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급하게 떴다. 이건 분명 새가 부리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곧바로 창문 쪽을 바라보니, 살짝 열려 있는 틈새로 까망새 한 마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의 전령새 첼로리드 드 무어, 약칭 첼로였다! 드디어 오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 아나이스 공작님을 구하게 됐어.]라고 시작해서 중간에는 [아나이스 공작님, 좋은 분이신 것 같아.]의 내용을 거쳐 [잘 지내.]라고 마무리하게 될 편지를.
‘공작님과의 각인 얘기나, 살기 위해선 그의 손을 꼭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철저히 빼고.’
어린 시절 거지꼴로 다니다가 한 번 실종된 이후부터 오빠는 나를 유달리 과보호했다. 교우 관계나 이성 교제에도 꼼꼼하게 신경을 쓰곤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으니까, 간단하게만 쓰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작성한 편지를 잡아챈 첼로는 곧바로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답장이 언제쯤 오려나.’
그렇게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답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역시 동생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오빠는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까만 밤을 지나 동이 트는 시각이 왔다. 희붐한 새벽, 나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성에가 낀 창문 너머로 다시 첼로의 샛노란 눈과 부리, 그리고 까맣고 윤기 나는 보드라운 털이 보였다. 나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첼로의 샛노랗고 둥그런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활짝 웃었다.
“첼로야, 빨리 왔네!”
첼로는 새벽이슬로 어깨가 잔뜩 젖어 있었다. 첼로는 별 대답 없이 날개를 파닥이며 침대까지 날아 들어왔다.
나는 내 품에 쏙 안겨드는 까만 새의 깃털을 쓰다듬었다. 첼로는 내 손에 제 머리를 연신 비비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그런 첼로가 귀여워서 히힛, 웃었다. 이어서 첼로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첼로야, 이렇게나 빨리 편지 가지고 온 거야?”
첼로가 그렇다는 듯이 새 부리로 콕콕 내 손등을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첼로의 날개에 자그마한 바구니가 생겨났다. 볼 때마다 신기한 은신술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첼로가 부리로 물어 건넨 오빠의 편지를 확인해 보았다.
[아스텔.
네가 아나이스 공작을 구했다고? 무슨 일일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네.
다행히 직접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조만간 북부로 갈 예정이거든. 얼른 얼굴을 보고 싶다.
정말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거야.
P.S. 아나이스 공작 너무 믿지 마. 좋은 자 아니니까.]
나는 곧장 새 편지지와 펜을 꺼내 펜촉을 둥글리며 서걱서걱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응, 알겠어……. 기다릴게!]
사실 오빠가 북부 공작령으로 올 거라는 사실은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었다.
원작 속에서 오빠는 정보 길드의 친구 덕분에 뷔에트리 가문을 무너뜨린 자들이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눈치챈다. 따지자면 나도 원작을 통해 그 정보를 미리 습득했기에 여기 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오빠에게 원작 정보를 공유해 주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빠한테 원작 내용 얘기할 때마다, 내 말도 아예 안 믿고!’
……그는 복수극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려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아나이스 공작성으로 들어서기 위해 북부 마물 전쟁에 자원한다.
그게 아마 이맘때였지.
나는 간략히 적어 낸 편지를 첼로의 바구니에 도로 톡, 넣어 주었다.
“첼로야…… 얼른 오빠 다시 만나고 싶다, 그치.”
첼로는 나와 떨어지는 게 싫은 듯 내 주변만 붕붕거리며 날아다녔다. 나는 폭, 한숨을 내쉬면서 첼로의 사랑스러운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 정을 붙인 미물이다. 더 오래 있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첼로의 부리를 톡톡 두드리자 바구니와 편지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창틈으로 조심스럽게 첼로를 날려 보냈다.
얼른 보고 싶다, 우리 오빠.
* * *
세간에는 아나이스 공작은 짐승과 같은 육감을 지니고 있어 그 어떤 거짓으로도 속일 수 없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 말은 옳았다.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그는 본능적으로 창을 열었고 창밖 허공에서 웬만큼 마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보지 못할 새까만 환영을 보았다.
샛노란 부리만 제외하면 모든 털이 새까만 새가 델피니움 룸의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누구도 쉬이 드나들지 못하는 요새에 새가 들어오다니 수상쩍은 일이다.
그것도 아스텔이 머무는 방으로 기어들다니.
북부령에 오는 인간이 몇 없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북부 치료소에서 몇 년간 버틴 아스텔은 몹시 기묘한 인물이었다. 아나이스 공작도 그녀가 꽤 수상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는 다시 창밖으로 나와 날아가는 자그마한 새의 연약한 날개를 꺾지 않았다. 그 대신 날아가는 방향과 날갯짓을 표정 없이 관조했다. 그의 관용 아래 새는 까만 점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멀리 날아갔다.
아나이스 공작의 시선은 다시 집무실 중앙에 놓인 자단나무 책상에 달라붙었다. 그의 매끈한 손가락이 탁자를 몇 번 두드렸다.
저 새는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아스텔의 방에서 나와, 무언가를 가지고 수도의 어딘가에 도달할 것이다.
‘수도…….’
그는 제국의 수도에 그리 좋은 추억이 없었기에,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몇 분이 흐른 뒤.
집무실 안에는 다시 깃펜이 서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집무실 내의 공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가워졌다.
* * *
“왜 이렇게 한기가 돌지, 감기라도 걸렸나?”
사흘 뒤 늦은 밤, 수도의 기사단 합숙소 안. 근래 제국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유명인사이자 수도의 꽃이라 불리는 기사, 카시언 그레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기사단 합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건강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기사단장이 삼을 뿌리째 삼켜 먹으며 중얼거렸다.
“왜겠냐.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지.”
“왜죠?”
“너, 곧 마물 전쟁터로 가니까 그렇지!”
“아아.”
카시언이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미친 거야? 너 이렇게 한창 잘나갈 때 마물 전쟁에 자원하다니! 그러다 지옥으로 가는 거 아냐?”
기사단장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지옥, 좋죠.”
카시언이 눈을 찡긋했다.
합숙소 내 기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물 전쟁이라니!
아나이스 공작이 이끌 마물 전쟁의 토벌대에 차출된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마물은 몹시 흉포했고 인간을 실제로 찢었다. 수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전쟁의 총사령관이 될 아나이스 공작은 수인이든, 인간이든 제 수하들에게 그리 자비로운 편이 아니었다.
물론 많은 제국의 기사들이, 인간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마물과의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경외심을 품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경한다고 목숨까지 바칠 수는 없는 노릇.
생명은 소중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평범한 기사들에게 북부의 마물 전쟁터는 모두가 기피하는 험지였다.
그러나 카시언 그레이는 달랐다.
무모하게도 그는 바로 그 마물 전쟁에 직접 자원했다. 마물을 죄다 때려잡아 보겠다는 포부에 모든 기사들이 경악했다.
그와 동시에 예감했다.
“왜, 재미는 좀 있을 것 같은데.”
카시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품 안을 뒤적거렸다.
얄쌍하게 잘생긴 얼굴과는 달리 개차반 같은 성격을 지닌, 저 미친놈은 분명히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거라고……!
술렁이는 기사들을 쓱 훑어본 카시언은 본심을 감추며 씩 웃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청년 기사가 핀잔을 주었다.
“너 같은 가난한 기사는 마물 전쟁에 자원해서라도 공을 쌓는 게 좋겠지. 어휴, 대단하다. 대단해.”
카시언은 온화하게 웃다가 입매를 비틀며 상대의 턱을 잡아챘다.
“아아……. 그럼 우리, 대련 한 번 어때?”
수도의 꽃으로 불리는 기사, 카시언 그레이는 사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성질과 입이 몹시 더러운 다혈질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이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팔다리를 분질러야 그 입을 다물려나.”
카시언은 어린 시절부터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기사답게 진담 섞인 협박을 하며 코웃음을 쳤다. 우물쭈물하던 기사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아, 미안하다고!”
시비를 걸던 그는 본전도 못 찾고 웃통을 벗은 채 도망쳤다. 살벌한 분위기에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어느덧 합숙소의 탈의 공간에는 카시언과 기사단장, 둘만이 남았다. 단장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성질 좀 죽여. 레이디들이 네 그런 꼴을 보면 뒤로 넘어갈 텐데.”
그 말에 카시언이 발랄하고 경쾌한 태도로 웃었다.
“글쎄요. 야성적이라고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능글맞은 표정과 온미남처럼 다정한 낯빛 아래에 칼날을 숨긴 그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수도의 꽃답다니까. 악의 꽃이라 문제지만.”
그 말도 카시언은 픽 웃으며 넘겼다.
그는 수도에 ‘카시언 그레이는 바람둥이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걸 제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와 자주 만나는 레이디들은 실제 복수를 위한 상호 협력 관계일 뿐이지만, 하나하나 해명해 봤자 무엇이 이롭겠는가?
오히려 여자만 밝히는 바람둥이에 생각 짧고 오만 군데에서 급발진하는 또라이로 소문이 나면 정치 세력들로부터 견제당하지 않아서 더 좋은 법이다.
“그래서 북부로는 언제 갑니까?”
“글쎄. 통행증을 발급받으면 곧장 출발하게 될 거다. 이미 통행 허가 요청을 북부 아나이스 공작성에 보냈다.”
“얼마 안 남았겠네요.”
“그래, 그전에 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봐. 왜 갑자기 이틀 전에 난데없이 전쟁에 자원한 거야?”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니까요?”
단장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영락없이 미친놈…….”
물론 카시언이 갑작스럽게 마물 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나는 마물이 침략한 북부로 뷔에트리 가문의 하인이었던 몇몇이 은밀히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어서. 다른 하나는 여동생 아스텔이 공작성에 몸을 의탁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탓이다.
‘도대체 왜 그 마음 여린 애가 공작성에 가 있는 건지 알아봐야겠는데.’
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얼마 전에 받은 아스텔의 편지를 떠올렸다. 아나이스 공작님은 좋은 분인 것 같아, 라고 해맑게 웃으며 썼을 그 편지를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아나이스 공작님이 좋은 분인 것 같다’고?
아스텔은 본디 세상 모든 것을 꽃처럼 아름답다 여기는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하지만 아나이스 공작처럼 모든 게 의뭉스러운 인간의 흉계를 못 알아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 애는 타인의 적의에 민감하니까. 그렇다 보니 슬슬, 혹시 그 애가 세뇌술에라도 당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되었다.
애초에 말이 돼? 아나이스 공작이 ‘좋은 사람’인 게?
카시언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련복으로 갈아입고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걸음을 놀리면서도 머릿속은 아스텔에 대한 걱정으로 복잡했다.
일단 전쟁을 핑계 삼아 북부로 가서 아스텔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어 봐야겠다, 는 결론을 낼 즈음이었다. 따라오던 기사단장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나이스 공작 각하는 대체 어떤 분일지 궁금하지 않나?”
카시언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그 역시 지금 가장 궁금한 주제였으니까.
“지독한 전장귀 라고 하던데요.”
“그래, 맞아. 사람을 손으로 찢는다는 말도 있지……. 우리도 찢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엄청 강하시다잖아!”
“설마 아군을 찢겠습니까?”
“네가 못 봐서 그래.”
기사단장이 질색했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실제 아군을 공격한 적이 있는가 보다. 카시언 그레이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 완전히 미친놈인가 보네요?”
그런 놈과 아스텔이 같이 있다니. 한결 더 짜증이 나고 화병이 나려 했다.
애써 분노를 삼킨 카시언은 갈색 고수머리를 북북 긁으며 기사단장을 노려보았다. 심약한 기사 단장이 머리를 짚으며 뇌까렸다.
“너 그리 말하는 거 불경이라고……. 여기 아무도 없으니 망정이지, 북부로 가서도 그러면 참수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시언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공작성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를 여리디여린 여동생을 떠올렸다.
아스텔 역시 늘 그를 걱정했다.
‘오빠는 왜 이렇게 착하고 순진해? 진짜…….’
‘그러게. 나도 내가 너무 착해서 손해나 보고 살 것 같아 걱정이야.’
물론 카시언은 살아오면서 한 푼도 손해 본 역사가 없었다. 진정 순진하다 못해 손해만 보고 산 건 당연히 아스텔 쪽이었지. 예전부터 아스텔을 괴롭힌 머저리들의 등 뒤에 칼을 꽂은 것도 언제나 그였다.
하지만 온 세상을 꽃밭이라고 생각할 여동생을 위해 카시언은 서툰 연기를 해 왔고 아스텔은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갔다.
‘응, 그러니까 내가 오빠 지켜 줄게.’
무려 저런 말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넌 오빠 말 들어.’
‘…….’
‘넌 나랑 관계없는 거야. 내가 죽어도 넌 끝까지 살아야 돼. 알겠어?’
아스텔을 떠나기 전, 행여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시 그녀가 죽을 만큼 힘들어하거나 가족의 복수를 이어 가려고 할까 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무표정으로 겁박도 했었다.
귓등으로도 듣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스텔. 아나이스 공작은 어쩌다 구한 거고, 북부에는 왜 간 거고. 그 해맑은 편지는 또 뭐고…….’
속으로 한숨을 내쉰 카시언은 얼굴 근육을 있는 대로 일그러트리며 대련장으로 들어섰다.
앞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미 기사단의 기사들이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저 미친개가 제대로 돌았나 봐.”
카시언은 흉흉한 낯으로 어깨를 당기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자, 공작령으로 들어서기 전에 제대로 스트레스를 풀어 보실까. 그전에 정보통을 토대로 아나이스 공작에 대해 제대로 좀 알아봐야겠다.
‘북부령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가만히는 못 기다리지.’
그의 사뭇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스텔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의 정보원이자 암흑길드에 몸담은, 그와 동시에 백작가의 막내 영애이기도 한 레이첼을 통해 알아봐야겠다.
그리 결의하며 그가 눈이 마주친 한 기사를 향해 덤비라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런 훌륭한 오해와 함께 세 명의 하루가 차근차근 저물어 갔다.
* * *
다음 날 아침, 공작성 내부 델피니움 룸 안.
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오빠의 미래를 걱정하며 밤새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우선, 공작성 사람들부터 내 편으로 만들자.’
지난 며칠간, 나는 공작성 사람들을 하나하나 꼬시기 위한 전략을 세우다 제시간에 잠들지 못했다.
물론 밤을 새우지는 않았다.
애초에 난 쉽게 밤을 새우지 못했다. 타고나길 잠이 엄청 많은 잠만보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침구가 아주 폭신폭신했던 덕분에 밤잠만 아주 약간 설치고 새벽부터는 엄청난 꿀잠을 잤다. 반짝거리는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 말이다. 포슬포슬한 시트에 작은 몸을 묻은 채 기나긴 잠에 폭 빠져 있던 나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치료소 가야 하는데! 지각했나? 소장님이 날 죽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아, 아니지. 나 공작성 들어와서 인생 역전했지…….’
안심하며 다시 침대에 누워 스르륵 눈을 감고 아침잠을 즐기려는데 옆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어, 인간님. 일어나셨어요?”
인간님……?
누우려던 나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침상 옆을 보니 언제부터 있던 건지 낯선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누구지?’
곧 그들이 입고 있는 깅엄 체크 무늬의 메이드복을 보며 깨달았다. 저들은 시녀들이었다. 아마 내 몸단장을 도와주러 온 듯했는데, 정확한 종족은 알 수 없었지만 순해 보였다. 황갈색 머리칼에 까만 두 눈이 꼭 쌍둥이 같았다.
“아아, 시녀분들이시죠?”
“네, 맞아요! 저희가 인간 아가씨를 모시기로 되어 있는 시녀예요!”
“저는 제니, 얘는 샐리예요!”
공작이 특별히 손을 써 준 건지, 아니면 루델이 배려를 해 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척 보기에도 나이가 어리고 순수한 듯한 시녀들의 모습에 마음이 절로 편해졌다.
그들이 나를 둘러싼 채 쾌활하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에요. 근무하시는 치료소에 기사님들이 가셔서 사직서를 내셨구요, 댁에 들러 짐도 가져왔어요!”
내가 늘어지게 아침잠을 자는 동안 꽤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활짝 웃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화려한 방 안에 내 낡아 빠진 물건들이 이질적으로 놓여 있었다. 애초에 짐이 별로 없었으니 전부 다 가져온 모양이었다.
“세숫물을 준비하고 단장을 도와 드릴까요? 오늘 일정은 따로 없으신데, 잠을 더 주무시겠어요?”
델피니움 룸의 내부를 둘러보는 와중에도 그들의 재잘거림이 꾸준히 이어졌다.
“네, 잠을 더 자고 브런치를 먹고 싶어요.”
시녀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히 문을 닫고 떠나갔다.
침대에 누운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앞으로 저 사람들이 이 공작성 안에서 내 눈과 발이 되어 줄 시녀들이라 이거지.
나는 잘 때도 품 안에 넣어 두는 비밀 수첩을 꺼내 계획 ‘제 200조, 공작성에 잠입한 이후 시녀가 생겼을 때.’ 항목을 확인했다. 히힛, 하고 잇새로 음흉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렇게 계획을 꼼꼼하게 살핀 다음 몇 가지 준비를 한 뒤, 이제야 잠에서 깬 척하며 문을 연 나는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을 불렀다.
“저, 저기!”
물론 바깥으로 나온 목소리는 다소 소심했지만.
“아, 네? 일어나셨군요!”
“더 주무신다더니, 아직 피곤하지 않으세요?”
열셋이나 열넷쯤 되었을까, 작고 귀여운 시녀들의 순진한 두 눈동자에 낯선 손님에 대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조차도 선뜻 경계를 풀 만큼 상냥하고 온순한 모습이었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슬쩍 눈을 찡긋했다.
그 순간 시녀들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귀가 쫑긋하더니 뿅, 하고 복슬복슬한 황갈색 꼬리가 생겨났다.
‘이렇게 바로 인간화가 풀릴 줄은 예상 못 했는데!’
북부령에 들어와 수인 치료소에서 삼 년간 밤낮없이 근무해 온 나는 척하면 척이었다.
첫눈에 알아보았다.
저 황갈색 털은 분명……!
“강아지한테 딱 좋은 건데.”
강아지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살짝 찡긋했다.
그러자 내 의도대로 시녀들의 까만 콩자반 같은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희 가, 강아지인데!”
알고 있다. 누가 봐도 ‘나 강아지예요!’ 하는 얼굴이니까.
“정말요? 우와, 마침 주고 싶은 게 강아지한테 딱 좋은 건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넌지시 병 하나를 흔들어 보이자 제니와 샐리가 입을 헤벌쭉 벌렸다.
커다랗게 떠진 눈.
살짝 벌어진 채 가쁜 숨을 내뱉는 입술.
앞으로 잔뜩 기울인 상체.
좋았어.
완벽하게 넘어왔다.
*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가 끝났다.
아스텔의 방 앞을 지키던 제니와 샐리는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 둘은 이 험한 공작성 내에서 드물게 순진한 타입의 어린 시녀였다. 모두가 싫어하는 인간을 맡기를 자원했을 정도로 호기심이 넘치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아스텔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그녀는 자신들이 강아지 수인이라고 말하자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강아지 중에서는 ‘골든 리트리버’라고 말하니, 잘 됐다고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거려 주기까지! 진지하게 교감해 주는 모습에 무려 처음 보는 인간 앞에서 꼬리가 삐져나와 살랑거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는데!
‘골든 리트리버 수인을 위한 특제 피로 회복제’를 만들어 줄 줄이야!
그녀가 준 피로 회복제를 먹고 나니 몸이 절로 튼튼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귀가 튀어나와서 펄럭거리고 꼬리가 바람개비처럼 핑글핑글 돌아갈 지경이었다.
“피로 회복제라는 건 처음 들어 봐!”
엄지손가락만 한 약병을 바라보는 제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진짜 신기해! 그 약을 마시자마자 피로가 확 풀렸어.”
“게다가 강아지를 좋아해!”
“특히 골든 리트리버를 좋아해!”
둘은 합창하듯 소리 질렀다. 피에로가 묘기를 부리듯 병을 위로 휙 던졌다가 다시 받은 제니가 신나게 말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각성하지 못한 햄스터 수인일지도! 볼이 토실토실하던데.”
“그렇지만 분명 인간이라고 했어. 냄새도 인간 냄새던 걸.”
“인간은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되게 귀여웠거든. 엄청 엄청 하얘. 몇 살일까?”
“하긴 되게 예쁘고 좋은 냄새도 났어.”
잔뜩 신이 난 시녀들은 소곤거리며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대단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저택의 복도를 꼼꼼히 점검하던 루델이 들을 정도로는 컸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갑작스레 마주친 냉랭한 루델의 태도에 아직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시녀들이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이거 보세요, 시녀장님!”
“공작 각하의 피, 피후견 인간이 준 거예요!”
깐깐하고 까칠한 시녀장 루델이 엄혹한 눈빛을 띤 채 둘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민 약병이 꽤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섣불리 인간이 준 것을 먹었단 말이냐. 너희는 아직 어리다. 아무거나 쉽게 먹으면 곤란하지. 특히 약은 말이야.”
“아…….”
“수인들은 인간의 것을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녀들의 낯이 새하얘졌다. 루델이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오른 데다 농땡이 피운 것까지 걸렸다.
게다가 배탈이 날 수도 있다니!
시녀들이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본 루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델피니움 룸 문에 다가가 짧게 노크했다.
똑똑.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스텔의 손끝이 경이로울 정도로 야무지다지만, 저 방 안에 그녀가 난생처음 알게 된 현란한 정리 기술이 가득하다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지.
공작성의 물정을 모르는 인간에게 할 말은 해야 했다.
* * *
“나쁜 거 아녜요!”
확실히 골든 리트리버 수인 시녀들을 공략하는 것은 빠르고 정확한 효과가 있었다.
꼬리가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붕붕거리며 약을 신나게 마시던 수인 소녀들이 곧바로 루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예상대로였다.
물론, 문을 열고 들어선 루델의 낯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탁상 위 정갈하게 정리된,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대로 오색찬란하게 정돈된 약병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슬쩍 벌렸지만 그뿐이었다.
“저 아이들은 아직 어립니다, 아스텔 님. 인간들의 약을 주는 것은 삼가 주시기를 조심스레 부탁드립니다.”
이런 반응을 예측 못 한 것도 아니니 나에게도 히든 카드는 있었다.
“저는 수인 치료소에서 삼 년을 일했는걸요. 수인 맞춤형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마치…… 청소용 물약을 만든 것처럼요.”
청소라는 말에 루델의 얼굴 근육이 씰룩였다.
착해 보이는, 한없이 순수해 보이는 이 얼굴은 유달리 도움이 된다.
나는 최대한 선량한 인간처럼 배시시 웃었다.
“시녀장님은 혹시 어딘가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루델처럼 종족 특성을 거스른 수인에게는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 있었다.
바로 편두통이다.
“…….”
“긴장 완화용 물약, 좋은 게 있는데.”
곧바로 약병 하나를 건네자 루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 * *
시녀장, 루델은 생각했다.
감히 모시는 공작의 은인에게 느낄 만한 소회는 아니지만 지금의 아스텔은 마치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어린 딸같이 느껴져 무작정 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냉정하고 냉철하다 평가받는 자였다.
안주인이 없는 공작성을 언제나 깔끔한 상태로, 문제없이 관리하려면 필수적인 자질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쇠약은 오직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 것을 알아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는데…….
꼿꼿하게 틀어 올린 머리가 오늘따라 묵직하게 느껴지던 것을 어찌 눈치챈 것일까.
“그러니까, 받아만 주세요!”
반짝거리는 인간의 눈망울.
그리고 저 야무진 손끝으로 정리한 천국 같은 델피니움 룸의 내부.
저 콩알만 한 어린 인간 여자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은 알겠다.
그 노력이 통한 걸까.
놀랍게도 모든 일 처리가 꼼꼼하고 나무랄 데 없는 데다, 아직 교육이 덜 된 어린 시녀들에게도 상냥한 구석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서릿발 치던 눈빛에 약간이나마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녀가 아무리 냉혈한 수인이라지만 인간의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자기에게 햇살처럼 따스히 부딪혀 오는 사람을 밀어낼 정도로 야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다시 한번 꾹 누르며 아스텔을 응시하다, 그녀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만약에 마셔 보고 좋으면 꼭 말해 주셔야 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스텔 님.”
특히나 저 귀여운 눈망울로 자꾸 졸졸 따라다니면 버텨 봤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인간에게 함락당하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녀는 적당히 선을 그었다.
“다만, 공작성 내의 수인들이 먹는 물약의 경우 내부 치료소의 치료사에게 부탁드려 성분을 확인해 보는 것이 원칙이니 당장 먹을 수는 없습니다.”
대놓고 너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인데도 아스텔은 배시시 웃었다.
단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따스하게.
“네. 그래도 돼요! 좋은 것만 넣었어요. 진짜예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의심을 받고 거부당하는 와중에도 저렇게 따뜻하게 웃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분명 안온하고 사랑스럽게만 자라 온 여자겠지.
“……네, 그러십시오.”
루델은 짧게 눈짓한 뒤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면역력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더 파고들게 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더 말을 걸지는 않은 채로 무뚝뚝하게 돌아섰다.
* * *
나는 꼿꼿한 자세로 퇴장하는 루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사실 용기 내서 던진 마음을 거절당하는 건 익숙했기에 안 되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다가섰다.
거부당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공작성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루델 시녀장님과 친해지는 건 필수야.’
어떻게 입성은 했다만, 아직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고 누명을 씌운 첩자들에겐 접근조차 못했다.
‘공작성에 관해 내가 아는 정보를 잘 생각해 보자.’
아나이스 공작성은 일반적인 귀족 가문과 달랐다.
공작성 안에는 총 네 개의 주요 가신 가문이 함께 있었다.
검술의 재규어, 마법의 은여우, 점술의 상어, 정보의 늑대.
각 가문을 이을 네 명의 후계자들은 차기 공작 후보이기도 했다.
이때, 후계는 꼭 혈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당대 아나이스 공작만 봐도, 늑대 가문의 가주였던 선대 공작에게 입양되어 두각을 드러냈다.
심지어 지금의 공작은 늑대임이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힘으로 늑대 가문의 가주 자리와 동시에 공작 작위까지 거머쥔 기묘한 케이스였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각 가신 가문의 후계자들은 공작성의 별채에서 지내며 따로 제왕학을 포함한 후계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원작 속에서 나온 첩자의 힌트를 상기했다.
‘첩자들은 분명히 후계자들 근처에 있을 거야.’
첩자들은 총 세 명이며 성별은 모두 남자고 가신 가문의 직계 혈족, 특히 지금의 후계자들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후계자들을 죽이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죽이려 한다는 사실만큼은 원작 속에 명백하게 나와 있었다.
이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첩자들 자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아티팩트를 손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그들이 지닌 아티팩트를 조합하면 그자들의 배후, 즉 최종 흑막이 드러난다는 설정이 존재했으니.
고로 난 첩자들이 가신 가문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공작성을 빠져나가기 전, 그들을 잡아내 족치고 아티팩트를 빼앗아 배후를 알아내야 했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원작 속에서 정체가 드러나 있던 첩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공작성 내의 유일한 인간 치료사, 샘이었다.
‘샘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보를 알아봐야 해.’
그때부터 나는 매일 매일 루델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그녀가 출몰할 곳에 찾아가 골든 리트리버 시녀들처럼 굴기 시작했다.
“제가 드린 물약 드셨어요?”
“아직입니다. 아스텔 님.”
“그럼…… 키 라임 파이 좋아해요?”
“별로 안 좋아합니다.”
단호한 거절에도 나는 주머니에서 쓱, 예쁘게 포장한 파이를 꺼내 들었다.
“그럴 줄 알고 산사나무의 잎으로 만든 파이를 준비했죠! 이건 두통에 좋아요. 기분이 느슨해지거든요.”
맹공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루델의 표정이 하루하루 풀리는 게 보였으니까.
“라임을 살짝 섞은 장미수예요. 조금 예민한 친구들에게 뿌리면 좋아요!”
“제 얼굴에 한 번 뿌려 봐야겠네요.”
루델이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띠며 농담조로 말했을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내 말에 웃고 농담까지 하다니.
정말이지 엄청난 발전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스텔 님.”
그녀는 가랑비에 옷 젖듯 나와 가까워졌다.
물론 쐐기를 박을 만한 크리티컬 히트는 아직이었지만.
아마도 이 공작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수인이 나와 루델이 자주 함께 다니는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수인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나와 루델이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지.
하지만 몇몇 수인들은 공작성의 실세인 루델이 은근히 내게 곁을 내어 주는 것을 눈치채고 노선을 갈아탈 게 분명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시나브로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녀장, 루델과 시녀들은 차근차근 내 정보통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슬슬 미끼를 던질 때가 왔다는 의미였다.
나는 주머니 안에 있는 《복수 매뉴얼》 책자를 떠올리며 정보 낚시를 시작했다.
“여기 치료소는 분위기가 좀 어때요?”
치료소라는 말에 샐리가 먼저 미끼를 물었다.
“아아, 네! 아스텔 님은 치료사라고 하셨죠?”
“네!”
“아무래도 인간을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 아니지만……!”
거의 다 넘어왔다.
나는 콩알 같은 샐리의 눈빛을 바라보며 눈 한쪽을 찡긋했다. 내 윙크에 고무된 샐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성 내부에도 인간인 치료사가 하나 있어요, 샘이라고.”
나는 기쁜 소식을 들은 양 눈을 반짝였다.
“저도 그분처럼 치료소에서 근무해 보고 싶어요!”
“말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은인님이시니까, 각하께서는 은인님의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공작님을 오래 봐 왔을 수인 시녀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실로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찬란한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 * *
“안 됩니다.”
아나이스 공작성의 공작 집무실 안.
나와 마주 앉아 있던 공작님의 섬세한 입매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아스텔의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까요.”
……아쉽게도, 내 첫 번째 시도는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두꺼운 힘줄이 불거진 손등을 보아하니 그 누구도 모른다는 아나이스 공작의 종족이 새삼스럽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전혀 무리하지 않은 오늘도, 아스텔.”
그의 손이 내 손을 맞잡았을 때, 나는 잘게 호흡을 내뱉었다.
“몸에 미열이 있잖아요.”
“걱정 마세요.”
다행히 아직 준비한 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집무 테이블 위로 「절대 무리하지 않기 서약서」와 「게으르게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챙기기」, 그리고 「수인 치료법」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절대 무리하지 않을 완벽한 계획을 세워 보았어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향해 서류를 꼭 움켜쥔 손을 내밀었다.
‘샘’이라는 이 아주 못되고 나쁜 자식을 잡으려면 호랑이 굴, 아니 공작성 내부 치료소에 들어가야 했다.
며칠 치료를 안 하니까 환자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확인해 주세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해 왔던 기획서를 그의 손에 꼭 쥐여 주면서 확신했다. 내가 준비한 이 완벽한 서류를 보면 공작님도 결코 무시하지는 못할 거다. 왜냐하면 이 북부에 제대로 된 수인 치료술을 펼치는 치료사는 드물 테니까.
공작님이 공작 위에 오르기 전, 대략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인들의 땅은 지금보다도 더 극심한 적자생존의 사회였다.
아프면 그저 도태되었기에 약하고 상처 입은 수인을 치료할 만한 치료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야 수인 관련 치료학이 조금씩 발전하는 실정이었다.
공작성 외부 치료소의 숫자도 다섯을 넘지 않는다. 당장 이 공작성만 해도 치료를 필요로 하는 기사는 천 단위지만 치료사의 수는 오십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처럼 일찍부터 치료학을 배우고 몇 년간 임상을 거친 치료사의 존재는 귀하디귀할 터였다.
마침내 공작님이 내가 내민 계획서를 받아 들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나는 전에 먹혀들었던 아첨도 건넸다.
“그, 그리고요! 공작님은 오늘도 엄청 미남이세요!”
실없는 아부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다. 안경을 쓴 아나이스 공작은 정말로 엄청나게 멋있었으니까!
막상 아첨을 해 놓고 나니 그의 입 바깥으로 나올 말이 조금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 탓에 겁먹은 토끼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공작님이 안경 쓰신 건 처, 처음 보는데 너무 잘생기셔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
“…….”
“그러니까 항상 아첨, 아니, 아니지! 절대 아첨 아니에요! 솔직한 말만 하는 제 말도 꼭 재고해 주세요!”
차분히 「수인 치료법」을 넘기던 공작님의 귀가 미세하게나마 쫑긋 움직이는 것을 본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제아무리 아나이스 공작님일지언정 이렇게 상세한 ‘치료 계획표’는 본 적 없을 거다.
* * *
아스텔이 자부심 넘치게 건넨 문서 더미를 살피던 아나이스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종이에는 지금까지 아스텔이 치료소에서 개발해 왔던 약물과 치료법, 그리고 성과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수인에게 어떤 요법이 효과적인지 경험을 통해 얻은 비법에다가, 또 수인의 종류에 따라 사용해도 되는 약초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될 약초에 대한 정보까지.
마물의 독은 어떻게 치료하며, 기사단의 PTSD와 트라우마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도…….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지식이 공작성의 수인들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아니,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다.
평소에 표정이 없는 그의 낯에 미약한 놀라움이 번졌다. 스스로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텔은 천재인 게 확실했다. 공작성에서 가장 빼어난 치료사를 데려다 놓는다 한들 이 정도로 섬세하게 수인에 관해 연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스텔은 자신이 가져다 놓은 기획서가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낯으로 헤실헤실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업 비밀은 다 안 적었어요!”
집무실에 들어선 이후 내내 눈치를 보던 아스텔이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여겼는지 슬쩍 말을 얹었다.
“성을 돌아다니다 보니, 수인들을 위한 치료사가 조금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 공작님을 도와 드린 것처럼요!”
실상 아스텔의 말이 옳았다.
수인 의학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애초에 타고나길 수인들은 아픔을 거의 못 느끼는 체질이었으니까. 약한 자는 도태되고 고통을 버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였다.
대략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아픈 자들은 들에 버리는 것이 당연했던 짐승 같은 사회였으니 말 다 했지. 사실 아나이스 공작 역시 그게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연약한 것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요, 공작님.”
쭈뼛거리던 아스텔은 조용히 한마디 더 보탰다.
“공작님께서도 다른 수인들을 걱정하시죠?”
아스텔의 예상과 달리 그는 정말로 자신이 다스리는 것들이 아프거나 말거나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아스텔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럴 거라 믿어요!”
문서를 옆으로 밀어 둔 그는 열심히 언변을 펼치는 순진한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심한 줄 알았으나 대범하고, 대범하다 못해 무모하다 싶을 때쯤 다시 쪼그라드는 기이한 인간 여자.
긴장한 아스텔의 새하얀 볼이 호흡할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것이 신경 쓰였다.
“하루에 딱 한 시간, 딱 한 명의 환자만 치료하는 정도라면…….”
“……네! 아, 그리고…….”
아스텔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공작성 안에 인간 치료사가 있다고 했어요! 이름이 샘, 이라던데요.”
말꼬리를 늘이는 게 어쩐지 의뭉스러웠다.
“샐리가 말해 줘, 줬는데……. 신기해서요. 그분께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 말에 묘한 어조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관심 말입니까?”
“네! 저는 주로 공작님과만 함께 있으니까, 인간인 그분이 수인 환자들을 어떻게 담당하는지도 궁금하고요.”
공작은 샘이라는 치료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재규어 가문의 은인이라는 것을 명목으로 어떤 인간 하나가 치료소에 들어왔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그녀의 표정을 학습하듯 관찰했다.
샘에 관해 조잘거리는 동안, 아스텔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
아나이스 공작의 스산했던 표정이 심술궂게 변했다.
“이 치료 계획서를 보니 할 말이 생각났습니다.”
무구한 눈동자에 깃든 호기심을 보니 공연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저도 치료해 주세요.”
아스텔의 시선이 공작의 얼굴과 손을 꼼꼼히 살폈다.
“저기, 공작님은 각인 말고 별다른 문제는 없으신 것 같은데, 제가 아까 확인해 봤을 때는…….”
그는 순진하고 동그란 눈동자에 의심이 어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아픕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로 거짓을 말한 것은 단순한 심술이었다.
살며 처음으로 쳐 보는 짓궂은 장난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의 말에 아스텔의 두 뺨이 하얗게 질렸다.
* * *
아스텔은 그의 손을 꼭 쥐고 몇 번 흔들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떠났다.
‘손을 잡으니 괘, 괜찮아지신 것 같아요! 그쵸?’
‘……네.’
‘소, 손등 키스까지 해야 할까요?’
불긋한 그녀의 얼굴을 보던 그는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 그렇죠!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후다닥 떠나는 자그마한 뒷모습, 토마토같이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 그는 제 입가에 드러난 미소를 인지하지 못한 채 가만히 턱을 괴었다. 언제나 정적이었던 삶이 묘하게 흐트러지고 있었으나 기분은 무척 유쾌했다.
‘원인 불명의 각인이라…….’
그는 아스텔에 대해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면 잘게 떨리는 조그만 손과 해바라기 씨를 넣은 햄스터의 것처럼 빵빵한 양 볼, 언제나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는 하얀 목덜미까지.
그는 손에 쥔 만년필을 느긋하게 굴렸다.
아스텔과 달리, 그는 각인이 된 원인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말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지금은 이 공작성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그의 시선이 십여 년 전부터 사용해 온 오래된 만년필 쪽에 머물렀다. 낡고 하찮은 기성품이지만 그의 시그니처가 각인된…….
늘 지루할 정도로 느릿느릿 박동하던 심장이 한결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차분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마물 전쟁 건으로 잠시 수도에 출장 보냈던 그의 보좌관이 복귀하자마자 집무실 문을 두드린 탓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마물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의 붉은 장미 기사단을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각하.”
공작은 빤히 보좌관을 응시했다.
“네.”
사무적으로 보고를 올리던 보좌관이 공작의 시선을 마주하고 급하게 숨을 삼켰다.
“히, 히익.”
“……?”
“가, 각하. 왜, 왜 웃고 계시는지. 무슨 무, 문제라도 있다면…… 시정! 시정하겠습니다!”
오금이 저린지 달달 떠는 모습이었다.
아나이스 공작은 그제야 자신의 입꼬리가 느슨히 올라가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표정을 다시 딱딱하게 굳히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제는…….”
“네, 넵.”
“……없습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내가 웃는 일에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는 보좌관의 얼굴을 관찰하듯 응시했다.
그러니까 저런 반응은…….
“좀, 무섭다는 표정인데.”
아스텔은 잘생겼다고 했는데.
공작의 솔직한 말에 보좌관의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예, 예? 그, 그런 당연한 말씀을, 헙,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작이 선뜩한 시선으로 테이블을 톡톡, 나직한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보고 계속하십시오.”
겨우 팔딱거리는 심장을 진정한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네, 넵. 다만, 장미 기사단의 단장이 직접 공작 각하를 뵙고 전투에 관해 논의하고 싶다고 합니다.”
“…….”
“해서, 장미 기사단 측에서 통행 허가증을 요청하였습니다. 여담이지만 그쪽 기사단장이, 이 성을 방문할 수 있다는 일에 몹시 감격했습니다, 각하.”
아나이스 공작가는 사실상 말만 공작 가문이었지 제국 곁의 공국과 같았다. 황제와 선대 공작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덕분이었다. 따라서 북부 공작성에는 공작이나 공작에 준하는 권위를 지닌 4대 가신 가문의 허가가 없으면 들어설 수 없었다.
이번 마물 전쟁에 합류하기로 한 수도 출신의 기사단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보좌관은 공작의 무심한 낯을 힐끔거리며 수도에서 보았던 기사단장의 행복한 표정을 떠올렸다. 물론 그가 단순히 공작성에 방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밑바탕에는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다. 마물을 죽여 없애는 수인 공작에 대해 공포심을 품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인간 외적인 무력과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마검사 아나이스 공작을 향한 동경심도 엄청났으니까.
“계속 말하십시오.”
“아, 네, 넵!
“공작성에 들어올 기사단원들의 신상명세서를 준비해 왔사오니 결재 부탁드립니다.”
곧바로 기사들의 정보가 간단히 나열된 신상명세서를 받아 들어 확인하던 공작의 시선이 문서 중간에서 멈췄다.
익숙한 이름이 눈에 보였던 탓이다.
“카시언 그레이.”
그는 카시언 그레이라는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괜히 입 안이 텁텁해진 기분이었다.
아스텔의 고아원 친구라던 바로 그 ‘카시언 그레이.’
그에 대한 정보는 아스텔이 말한 것과 유사했다. 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기사였다.
공작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카시언 그레이에 대해 설명하는 여러 가지 특징 중 눈에 꽂히는 것은 단연 하나였다.
[성별 : 남성]
그는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며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입맛이 썼다.
“남성, 기사군요.”
“……예, 누구를 말씀하시는…… 아, 카시언 그레이 경이요? 예, 그렇습니다……?”
수인 사회에서는 본디 성별에 대한 고정 관념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남성형 이름과 여성형 이름은 존재하는 법. ‘카시언’이라는 이름은 대체로 남성의 이름에 쓰였다. 아니, 한 95% 정도는.
보좌관은 아나이스 공작이 카시언의 성별을 곱씹는 것이 새삼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요, 각하……?”
공작이 표정 없는 얼굴로 카시언의 초상화 위에 손을 대며 낮게 속삭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보좌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상 증명용으로 대충 그려 실물보다 유달리 뺀질뺀질하게 나온 초상화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보통 평민들의 외모보다는 더, 아니 월등하게 잘생긴 것 같은데.
워낙 감정 기복이 없고 타인에게 호불호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공작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하다니. 보좌관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 외모가 좀, 기사답지는 않죠? 능글맞아 보여요. 그래도 실물은 더 잘생겼을 겁니다.”
“…….”
“수도 내 여자들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았다더군요! 장미 기사단 소속에, 잘생겨서 그런가? 무려 수도의 꽃이라고 불린답니다, 요새!”
“아.”
아나이스 공작은 눈치 없이 연신 떠들어 대는 보좌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아나이스 공작의 심해 같은 벽안에 검푸른 기운이 짧게 어렸다가 사라졌다.
보좌관은 그제야 그의 심기가 다소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집무실 안에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한 발 뒷걸음질을 치며 중얼거렸다.
“아, 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통행을 금하셔도-.”
“아닙니다. 실물이 더 잘생겼다고 하니.”
아나이스 공작은 우아한 태도로 그의 시그니처가 각인된 낡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졌습니다.”
곧 카시언 그레이의 통행 허가증 위에 공작의 깔끔한 승인 서명이 적혔다.
* * *
한편 ‘세상에서 제일 착한 오빠’ 카시언 그레이는 현재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저와 단장님, 단둘만 통행 허가를 받았다고요?”
“그렇다니까.”
“부단장님도 통행 불가고?”
카시언은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었다.
장미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도 아니고 단장과 일개 기사단원인 자신만이 북부의 마물 전쟁 전략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러나 기사단장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실실거리며 웃었다.
“또 뭐가 문제야, 우리 장미 기사단 최고의 카사노바 카시언 그레이 경? 마물 전쟁에 차출되고 싶어 했잖아!”
어떤 일이건 늘 유들유들했던 카시언의 표정이 딱딱해진 채 좀처럼 펴지지 않자 단장은 아차 싶었는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말해 봐. 왜 그러는데?”
카시언은 침음했다.
여동생을 둔 오빠로서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무언가 상당히 수상하다고 말이다.
“그래도 한 달쯤 유예가 있을 줄 알았는데요.”
카시언이 수상히 여기거나 말거나 단장은 몹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전부터 아나이스 공작을 몹시 존경했고 그를 보게 될 날만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래. 하지만 유예 기간이 없지. 우린 내일쯤 가야 해. 왜 그래? 그대도 빨리 가기를 원했잖아?”
단둘에게만 통행 허가증을 일사천리로 발급해 준 것도 모자라 촌각을 다투는 일도 아닌데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도착하라 독촉할 줄이야.
물론 마물 전쟁이 한시라도 빨리 재개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지난번에는 아나이스 공작이 갑작스레 전쟁을 끝낸 터라 새끼 마물을 전부 처리하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급하게 오라고 명령할 일은 아니지 않나?
기사단장을 바라보던 카시언이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자, 영 수상하니 조심해야겠군요.”
“뭐? 그자라니. 공작 각하께 말을 조심해. 제국의 모든 기사들이 그대를 응징할지 몰라.”
기사단장을 슬쩍 떠본 것이었으나 그는 다른 기사들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나이스 공작의 추종자일 뿐이었다.
명백히 도움이 되지 않겠다고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기사단의 합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중으로는 짐을 챙겨야 했다.
아나이스 공작의 말마따나 공작성으로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곧장 간단히 짐을 챙긴 후 기사단 합숙소 안, 5인실의 야전 침대에 누워 한참 뒤척이던 그는 얼마 전 레이첼과 아나이스 공작에 관해 나누었던 대화를 자세히 떠올렸다.
‘지난번에 북부로 뷔에트리 가문에서 일했던 몇 놈이 도망쳤다고 했었지? 아나이스 공작성에 주요 배신자가 한 놈 숨어들었어. 어떻게든 공작성에 스파이를 심으려 했는데 쉽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수인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다 보니…….’
카시언은 얼마 전 가문의 배신자를 하나 잡아 족치면서 고급 정보를 하나 건졌다.
‘그래도 공작성 안에 바람잡이가 숨어들었단 첩보가 확실하다면, 그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해.’
세간에 뷔에트리 백작가가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퍼트린 바람잡이, 백작가를 위해 나서서 결백을 증명하려던 사람을 죽이고 증거를 인멸한 검잡이, 부모님께 세뇌술을 건 것으로 추정되는 흑마법사.
이들 셋이 가문을 무너뜨린 주요 인물이었다.
그중 바람잡이 놈이 공작성에 잠입해 있다니. 아니, 한 놈뿐일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공작성에 들어가야 하는데, 마물 전쟁에 차출되는 것보다 괜찮은 방법이 하나 있어.’
‘뭔데?’
‘최근 아나이스 공작이 인간 하나를 후견하기 시작했다네.’
그 소식에 카시언은 이를 악물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나. 그 공작이, 수도의 부티크를 북부로 초빙하고 신경도 안 쓰던 방까지 리모델링할 정도로 잘 대해 준다네? 어때, 꽤 고급 정보지?’
‘……어, 그래. 아주 고급이네.’
‘뭐, 그렇다고 그 인간이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아나이스 공작이 워낙 싸늘해야 말이지. 변덕 조금 부리면 그 인간도 곧 죽겠지.’
카시언도 알고 있었다. 수도를 떠도는 아나이스 공작의 악명을…….
‘너 같은 기사들이야 강하다고 좋아하겠지만, 일반인 입장에선 아무래도 무섭지. 보좌관도 일 년을 못 간다는 풍문이 파다하고, 감정 자체가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도는 맹수잖아. 한낱 인간이 더 총애를 유지할 수 있겠어?’
레이첼이 낮게 속삭였다.
‘그래도 그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접촉해서, 적당히 이용한 다음 성으로 초대받는 건-.’
‘사람을 이용하라니. 인성이 이상하네?’
카시언이 정색하며 말하자, 레이첼은 허구한 날 허허 웃기만 하던 놈이 정색하니 무섭다며 제 팔뚝을 쓸었다.
그 대화 내용을 상기하자 카시언의 생각은 한결 복잡다단해졌다.
‘아직 복수를 하려면 멀었는데, 아스텔이 갑작스럽게 변수가 될 줄은.’
카시언이 기사단 입단을 위해 제네트 고아원을 떠난 게 칠 년 전, 아스텔이 정식 치료사가 되겠다며 북부 치료소로 훌쩍 떠난 게 삼 년 전. 그 기간 동안 카시언은 계속 복수에 매진해 왔다.
이때 암흑 길드장인 레이첼과 접촉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과거 뷔에트리 백작가에 은혜를 입었다던 그녀는 그에게 괜찮은 정보원이 되어 주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의 복수극이 서서히 실마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첩자도 공작성에 있고, 아스텔도 공작성에 있다.’
카시언은 손목에 찍힌 고대 마법의 낙인을 습관적으로 더듬었다. 천만다행히 그와 아스텔의 신분을 바꾸어 준 은신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일까.
카시언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됐다. 닥치고 잠이나 자자. 공작성에 도착하게 되면 알게 될 일이지.’
한층 피로해진 카시언은 눈 주변을 꾹 눌렀다.
어서 아스텔이 보고 싶었다.
문득, 그는 귀족 가문 사냥터지기의 종자 노릇을 하며 먹고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스텔이 귀족들의 사냥터에서 갑작스레 실종되었을 그때를.
어느 날 아스텔은 갑작스레 사라졌고 한 달 뒤 제 얼굴에 흙먼지를 잔뜩 묻힌 채로 엉엉 울면서 나타났다.
‘오빠, 오빠…….’
‘누가 널 납치했던 거야? 그 새끼 죽여 버릴 테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 괜찮아! 진짜야.’
열 살짜리 아스텔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카시언은 말라 빠져서 뼈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몸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아스텔은 기억이 반쯤 사라진 애처럼 굴기 시작했다.
‘오빠, 우리가 죽기로 정해져 있으면 어떡해?’
카시언은 그날도 아스텔을 꼭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눈물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오래오래 생각했다.
우리 가문이 나쁜 놈들 때문에 멸문해서, 오빠인 내가 힘이 없어서, 그래서 내 동생도 실종될 뻔하고, 겨우 무사히 돌아와서도 죽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만들었구나…….
‘정해져 있는 결말은 없어. 바꾸면 돼.’
그래서 카시언은 반드시 살아남기로 했다.
그들의 가문에 억울한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복수하고, 아스텔과 함께 살아갈 멋지고 소담한 집을 구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막 그 행복한 미래에 방해물이 하나 생긴 것 같은데.
카시언은 뜻밖의 방해물이 된 아나이스 공작에 대한 정보를 하나둘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공작성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공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방해물이 될 것인지.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멋진 소식을 두 개나 들었다.
먼저, 하나는 오빠의 편지였다.
[곧 공작성에 도착해.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야 해.]
짧은 편지 내용이 내 마음을 한결 들뜨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시종이 전해 준 공작님의 전언이었다.
“오늘부터 공작성 내의 치료소에 출근하신다,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작성 내 치료소에 근무 중인 치료사, 샘을 잡으러 가는 거지!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눈을 반짝였다.
“제가 치료사 일을 하루라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쳐서요!”
“여, 역시 아스텔 님!”
샐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시종이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하루 한 시간을 딱 지키셔야 한다고. 무리할 필요는 전혀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 습니다, 예. 공작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시종과 나는 눈을 마주치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보나 공작님이 할 것 같은 말은 아니니까.
시종도 말을 전하면서 자기가 들은 게 정확했는지 의심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공작님이 각인된 걸 모르는 입장에서는 나를 엄청 보호하고 신경 쓰는 것처럼 느낄 만도 해.’
나는 그를 향해 눈짓했다.
“그다음은요?”
“시, 심지어 공작 각하께서 직접 치료사복과 진단 키트 몇 개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는 공연히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종에게 말했다.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공작님이 옆에 있을 때는 심장이 콩콩거리며 뛰는 게 맞았다.
그게 각인이라는 거니까.
반려의 각인은 내 감정을 건드리고 헤집어 놓는 마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공작님이 옆에 안 계시는데 왜 이러지?
“아, 네. 치료소에서도 오늘 치료할 환자들의 목록을 보여 주셨습니다. 확인하고 환자를 한 명 선택, 진단 후 치료를 진행하시면 될 겁니다.”
시종이 사무적으로 말한 뒤 치료 일지를 건넸다.
마음을 추스른 나는 치료 일지를 느긋하게 넘겨 보았다.
담당 치료사들의 이름별로 그들이 맡고 있는 환자명이 쭉 정렬되어 있었다.
나는 ‘샘’이라고 적혀 있는 바인더를 넘겼다.
[환자명 : 리카르도 안리체 바시오
본체 : 재규어
작위 : 바시오 가문의 선대 가주, 전 기사단장
증상 : 밤마다 핏발 선 눈으로 칼을 들고 가문의 정원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정원수에 다리를 쾅쾅 부딪치다 피를 내는 기행까지 벌였습니다. 그로 인해 큰 사고가 있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원인 : 마물 전쟁에 참여해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흑마술사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저주에 걸린 인간과는 절대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10회 이상 접촉 시 사망 우려 있음.
처방 : 수면초. 재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 수면초에도 내성이 존재합니다.
특이 사항 : 고집이 센 편이고 폭언이 심한 타입입니다.]
내 곁에 바짝 붙은 채 흥미진진하단 얼굴로 치료 일지를 함께 살피던 샐리가 쨍하게 굳고 말았다.
“아, 아스텔 님…… 저, 저분은 절대 선택하시면 안 돼요.”
샐리는 금세라도 눈물을 뚝 떨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 리카르도 님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별명이 ‘마물보다 더 마물 같은 할배’라고…….”
“심지어 병이 아니라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도는데도 꼬박꼬박 치료소에 다녀서 곤란하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 속에도 얼핏 나왔던 것 같았다.
공작성에 거주 중인 리카르도 가주가 흑마술사의 저주에 걸렸노라고.
“엄청 무서워요.”
마음속에 옐로카드가 백 개쯤 있어 경고를 했으면 했지, 누구도 곁에서 밀어내지 않는다는 골든 리트리버 수인들이 접근도 말라고 말할 정도면 엄청 지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치료 일지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내용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최종 담당 치료사 : 치료사, 샘]
샘은 내가 알고 있는, 원작 속에서 유일하게 정체가 밝혀진 첩자의 이름이었다.
‘샘은 가신 가문 직계 혈족 중 하나에게 미약한 치료술로 도움을 준 덕에 공작성에 들어왔다고 써 있었어.’
물론 나처럼 공작님을 구한 수준은 아니기에, 공작성에 들어온 직후 철저히 방치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달리 샘은 처세가 좋은 인간이었다.
우리 가문에서도 그랬다.
샘은 처세술로 뷔에트리 가문 사람들을 꼬여 냈다.
그는 평범한 시종인 척 섞여 든 뒤 가문 내에서 불온한 소문을 냈다.
우리 부모님이 수상하다고, 가문에 위험한 흑마술사들이 들어오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소문은 저택을 돌고 돌아, 마침내 황궁까지 가 닿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는 치료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가문의 하인 중에는 아픈 어머니나 딸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샘은 그들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무기 삼아, 하인들이 ‘뷔에트리 가문에서 역적모의가 있었다.’라는 거짓 증언을 입에 올리게끔 협박하기도 했다.
나는 치료 일지를 접었다.
“저기, 리카르도 님을 치료하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그 결정에 시종도, 시녀들도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샘이 리카르도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리카르도가 걸렸다는 저주가 흑마술과 관련이 있다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샘이 우리 가문을 음해할 때 딱, 흑마술사를 언급했었으니까.
‘어쩌면……. 리카르도라는 할아버지가 샘의 새로운 피해자일 수도 있어.’
이렇게 된 이상 가장 먼저 샘을 처단하고 아티팩트를 뺏어 그 배후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원작 속에서 오빠는 아티팩트를 찾는 데에 실패해 끝내 흑막을 못 밝혔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진지하게 결심한 나는 시종을 먼저 보내 내가 리카르도를 담당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몇십 분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서 공작성의 본성 바로 옆에 별도로 마련된 치료소에 다다랐다.
마침내 치료소의 문이 열렸다.
전쟁 중이 아니라 비교적 치료소는 한가로웠고, 치료사들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중이었다.
“……누구시죠?”
적대감과 호기심이 어린 열 쌍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치료사 아스텔입니다.”
치료사들은 내 발랄한 인사를 받고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치료사들 사이에서 젠틀한 표정을 한 사내 하나가 가장 먼저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샘이라고 합니다.”
쥐가 파먹은 듯 삐뚤빼뚤한 회색 머리칼과 옥색 눈.
내가 치료소에 들어온 이유인 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샘을 처리하고, 쟤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를 차지하러 온 거지.’
아티팩트.
최종 흑막이 백작가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끼리 계속 소통하고, 흑막과 직접 연결할 수 있게끔 고안된 마법 도구의 총칭이다.
물론 단순한 연락 수단만은 아니었다. 원작에는 ‘아티팩트에는 첩자들끼리 정체를 확인하고, 최종 흑막을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말해 첩자들과 최종 흑막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자, 반드시 쟁취해 내야만 할 물건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샘을 아래위로 훑었다. 다행히 원작 속에는 샘이 지닌 아티팩트의 위치가 명확히 나와 있었다.
‘샘은 브로치 형태의 아티팩트를 가슴 한편에 넣어 두고 생활한다는 내용이 있었어.’
과연 새하얀 치료소복에 가려진 가슴팍이 살짝 불룩했다. 아마 앞쪽에 브로치 아티팩트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 듯했다.
‘저 브로치 아티팩트를 어떻게 의심받지 않고 빼내 오지?’
나는 흉계를 숨기며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반가워요!”
“아스텔 님은 저와 같은 인간이시군요!”
인간이라는 말에 수인들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인간? 젠장,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를 구한 인간이 성에 머무르고 있단 얘기를 들었지.”
“아, 진짜로…… 인간 냄새가 나.”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어찌 못 하겠다는 듯 발을 뒤로 급하게 물리는 자도 있었다. 내가 아나이스 공작의 은인임을 잘 알 텐데도 대놓고 적대적인 분위기라니. 아나이스 공작성 안의 수인들이 인간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다시 실감되었다.
‘여기 있는 치료사들은 루델 님이나 시녀들보다 공략 난이도가 더 높을 거야.’
루델을 필두로 한 시녀들도 나를 불편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나이스 공작이 내게 잘 대해 준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봐서인지 앞에서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다.
게다가 현재 내 곁에 있는 시녀들은 조금만 살갑게 대해 주면 무장 해제 모드인 종족, 골든 리트리버이기도 했으니, 공략 난이도가 무척 낮았지…….
‘샘, 인간이면서 여기서 용케 잘 버텼네.’
심지어 적응까지 잘한 것 같다.
나는 샘을 바라보며 그의 친화력을 인정했다.
“네, 맞아요. 저도 인간이에요.”
“아스텔 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시지만 공작 각하를 구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샘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타인의 악의에는 민감한 나였다.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샘은 시샘이 많고 이간질에 능하다는 설정이야.’
그가 날 싫어하건 말건 나는 어깨를 당당히 폈다.
우리 가문을 멸문시킨 데에 크게 일조한 녀석한테 기 싸움에서부터 밀릴 생각은 없었다.
“제 영웅담이 도나 봐요!”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예상보다 뻔뻔하게 나오는 나를 본 그가 헛기침을 하며 풀물이 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와 맞잡은 손이 어쩐지 까끌거렸다.
“리카르도 선대 가주님을 모시겠다고, 선언했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킨 1인 병상을 힐끔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문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쨍그랑! 하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공작성 최고의 치료사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네 목줄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군지 잘 알아 둬야 할 게야! 꺼져!”
소리만 들어도 협박에 능통한 듯한 노인이었다. 그의 걸걸한 호통이 문 바깥에까지 퍼져 나왔다. 고함을 내지르는 목소리에 예사롭지 않은 힘이 느껴졌다.
나는 문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치료사 중 하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 치료사복에는 ‘젠티’라고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물 전쟁에서 괴수의 수급을 열 개는 넘게 따 오신 분이죠.”
“저희는 손 놨어요. 벌써 다른 치료사 하나는 중상을 입어 휴가 중이죠.”
샘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잘하시겠죠, 아스텔 님께서는. 인간이면서도 공작 각하를 구하셨으니.”
“힘드시면 말하셔도 됩니다.”
나는 이런 화법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괜히 겸양을 떨지 않고 힘껏 소리쳤다.
“네, 저 잘해요!”
돌려 까기에는 눈치 없이 대응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게 나는 치료사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뒤로한 채 위풍당당한 태도로 1인 병상 쪽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인간 나이로는 예순쯤 되었을 듯한 할아버지가 고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네놈은 뭐냐?”
“이번에 리카르도 님을 새롭게 담당하게 되었어요. 이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분명 환자일 텐데도 환자복이 아닌 기사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훈장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명예욕이 높은 노인인 듯했다.
“뭐야?”
그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킁킁댔다.
“인간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맞아요, 저는 인간 치료사 아스텔이라고 해요.”
내 말에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지더니, 표정이 조금 전보다 두 배로 험악해졌다.
“말세로구나!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수인을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고? 전에 한 놈을 받아들였더니 이젠 이런 어린 여자애라니.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상처받았겠지만, 온갖 폭언에 단련된 나에겐 타격감이 없었다.
나는 전부터 힘들 때마다 오빠의 편지를 생각하곤 했다.
그럼 마음 한구석이 절로 편안해졌으니까.
게다가 곧 오빠가 올 거고, 오늘 저녁에는 공작님과 맛있는 것도 먹을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뭐라 해도, 모두가 날 싫어해도 상관없었다.
나약하게 울지 않을 거다.
나는 베드에 누운 그에게 다가가면서 위생 장갑을 착착 손에 끼웠다.
오랜만에 치료 일을 하려니 마음이 두근거리며 떨렸다.
비록 복수를 위해서 치료학을 처음 접했고, 여태껏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일을 진정 좋아하고 늘 최선을 다해 임하니까.
“무시 아니에요. 환자님 성함이 리카르도라고 들었어요.”
“난 너 따위에게는 치료 못 받는다! 썩 꺼지지 못해?”
짙게 쌍꺼풀 진 까만 눈에는 피로감이 선뜩하게 어려 있었다.
흐트러진 백발 하며, 덥수룩하게 난 새하얀 수염 역시도 자기관리가 여실히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내가 여기서 잘라 낸 치료사만 해도 몇 명인 줄 아느냐?”
그가 짐승처럼 그르렁댔다.
경고성 짙은 소리에 잔뜩 쫄 뻔했다.
아니, 쫄았다.
누구든 저 기세등등한 할아버지 앞에서는 한 수 접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가 재규어 수인인 이상 더더욱!
“너같이 어린 인간 따위는 당장 없앨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치료사를 데려와.”
순간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듯, 재규어 특유의 삐쭉 선 갈색 털과 얼룩무늬가 환영처럼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인간화를 마친 손이 아닌 진짜 뾰족하고도 새까만 짐승의 손톱이 눈에 띄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폭언 자체에 익숙해졌다지만, 계속 이어지는 비난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봐준다고 그의 분노가 가라앉을 것 같지도 않으니…….
‘난 반드시 이 리카르도의 상태를 봐야겠어.’
공작성에 들어오기 전, 재규어 가문에 대해서도 온갖 이야기를 다 접수했다.
몹시 호전적인 성격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자기보다 더 강한 자, 자기에게 유용한 자에게는 한 수 꼬리를 말 때도 있다나.
그러니까 그를 치료하려면 절대, 절대로 먼저 기선제압당해서는 안 됐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강하게 끌어모아 큰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절대로 안 꺼질 거예요!”
나는 먹잇감을 향한 맹수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효과가 있는 것일지,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얼떨떨해하며 바짝 굳었다.
“……뭐?”
척 보기에도 순진한 토끼같이 생긴 내가 감히 자기한테 대들 줄 몰랐다는 듯이.
“뭐라고 하, 하든 영원히 안 꺼질 거고!”
절대 못 밀려나!
반드시, 이 괴팍한 할아버지의 몸 상태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지금부, 부터…… 치료 시작할 거예요! 못 고치면 죽이시든가!”
“뭐?”
“내가 할아버지 치료 못 하면 죽여도 된다고요!”
나는 할아버지의 가슴팍을 콱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치료 시작할 테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혹시 내 기선 제압이 통했을까?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하, 할아버지, 내가……?”
잘 들리지 않는 짧은 혼잣말 끝에 그의 어깨가 조금 축 처진 것같이 보인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군데군데 회색빛이 감도는 백발을 쓸어 올리며 그가 잇새로 툴툴거렸다. 어느덧 얼룩무늬나 발톱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내가 널 믿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그의 눈에 일말의 기대감이 일렁였다가 꺼졌다.
“치료 못 하면, 정말 죽일 거다.”
“네. 치료 진행하겠습니다.”
한결 얌전해진 그의 말을 무시한 나는 베드에 누운 그의 몸을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눈에 잔뜩 터진 실핏줄 하며 움찔거리는 다리까지 전부 다 체크했다.
‘조금 이상한데.’
종아리 부근을 간단히 촉진하는 나를 보던 그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 못 들었냐? 난 흑마술사의 저주를 받은 몸인데.”
“네, 네. 들었어요.”
“내 몸을 만지면 바로 죽을 수도 있어.”
그래,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원작에도 그런 풍문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음……. 붉은 고기나 계란, 우유 같은 것 좀 드세요?”
“먹지 않는다. 그딴 하찮은 걸 물어보려고 여기 들어온 건 아닐 테지.”
내가 침묵을 유지하자 그는 다시 불퉁한 낯으로 발을 마구 휘둘렀다.
이번에도 재규어의 뭉뚝한 발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생각에 빠진 치료사에게 환자의 발길질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법.
“너같이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날 고칠 수 없다는 거 알아.”
“…….”
“한 입 거리인 주제에.”
“그럼 인간이 두 입 거리게요? 아, 헉.”
생각에 깊게 잠겨 있던 바람에 너무 당당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말해 버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보던 리카르도가 헛웃음을 쳤다.
“소심한 척 따박따박 할 말 다 하는구나, 너!”
그가 흉흉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가늘어진 동공의 재규어가 겹쳐 보여서 두려웠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뭐, 됐다. 어차피 뭘 처방할지는 사실 다 알아.”
리카르도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이 묻어나 있었다.
“수면초를 처방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저주를 잠재울 수 있는 법은 숙주인 나를 잠재우는 것뿐이지. 그밖에 처방할 게 더 있겠나.”
내가 골똘히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호통을 쳤다.
“바보 토끼 같은 그 표정은 뭐냐? 옛날 수면초는 이제 내성이 생겨서 안 듣는다. 그러니까 마약성 수면초나 처방해다오.”
“마약성 수면초요?”
“그래. 다들 안 주긴 하더라만은……. 어차피 난 곧 뒈질 늙은이야. 그니까 그냥 내놔.”
보통 치료사라면 당연히 마약성 수면초를 처방하지 않을 테지.
마약성 수면초는 처방이 금기시되어 있는 약초로, 곧 죽을 사람에게나 위로차 주는 약물이었다. 내성도 내성이지만 근본적으로 독초라서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음……. 잠깐 입을 벌려 보세요. 그럼 처방해 드릴게요.”
“……너, 진짜로 처방해 주겠다고?”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만 벌리시면 원하시는 대로 마약성 수면초 중에 제일 강력한 몰탈초를 드릴게요.”
“다른 놈들은 안 된다던데.”
의아해하는 그에게 나는 장난스럽게 헤헤 웃으며 답했다.
“왜요? 우리끼리 비밀로 하면 되죠. 그러니까 정확히 증상이…….”
그가 느릿느릿 입을 벌렸다.
“……가렵기도 하고.”
나는 그의 목구멍과 코 부근을 간단히 체크한 뒤 귓가에다 조심히 속삭였다.
“또, 가장 중요한 마물 전쟁에서 적의 수급을 베고, 절친한 전우의 시체를 보고 나서부터 고기를 못 먹게 되셨다죠. 그때부터 이렇게 저주 증상이 나타나셨다고요.”
그가 툴툴거렸다.
“그래, 그거다. 그때부터 계속 내달렸지. 이게 다 ‘달리는 저주’에 걸린 것 아니냐, 다들 그러더군. 너도 뭐, 치료할 자에 대한 정보는 깨나 알아 온 모양이지?”
나는 은밀하게 말했다.
“좋아요. 이 몰탈초면 분명히 숙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속삭이는 사이, 병동 내부에 비밀스럽게 설치된 무언가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하루가 흘렀다.
리카르도는 정말로 그 몰탈초 덕분인지 오랜만에 편안하게 숙면할 수 있었다. 아스텔에게도, 리카르도에게도 몹시 평화롭고 완벽한 하루였다.
물론 숙면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 있었다.
해가 뜨자마자 공작성으로 향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카시언 그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