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이들의 인사로 시작된 연회는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카일러와 사샤는 인사를 마치고는 바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가며 악수와 인사를 나누었고 한 사람씩 모두 인사를 나누기 위해 천천히 꾸준히 연회장을 걸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카일러와 사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애썼고, 염원하던 그들과의 인사를 이룬 이들은 연회장을 살펴보며 감탄하기에 정신없었다.
고용인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들에게 최상급의 샴페인을 제공했고, 테이블마다 간단하게 집어 먹을 수 있는 예쁘고 맛있는 음식들로 넘쳐 나도록 만들었다.
사이드에는 아예 의자를 갖춘 둥근 테이블이 있어 그곳에 모여 앉아 주문하면 스테이크로 간단히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는 불쾌한 음식 냄새는 떠다니지 않았다.
화려하면서도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사람들은 연회를 즐기며 저마다 자신들이 본 연회장과 카일러와 사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의 웃음과 호평 속에 연회장의 찬란한 밤이 깊어 갔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저택 부지 안에 공작님께서 부인을 위해 만든 강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볼 수 없을까요?”
사샤는 그걸 알고 물어 오는 이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후작 부인은 그녀에게 호기심 넘치는 질문을 던졌다가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두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근처에 모여 있던 여성들이 전부 이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많아서 소문이 쫘악 퍼졌답니다. 혹시…… 저희도 볼 수 없을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눈빛만 보아선 간청 같았다. 사샤는 굳이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연회장에서 냇가까지 이어지는 길에 조명이 될 불을 심어 놓도록 해 놓았다.
막상 소개를 하려니 살짝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볼에 살짝 홍조가 피었다.
“연회장 정문으로 다시 나가시면 조명을 밝혀 놓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쭉 가시면 있어요.”
부인들은 낮게 꺅 하는 소리를 내더니 소곤소곤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여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어떤 이들은 자기 남편, 혹은 분위기 좋은 영식과 영애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카일러가 만들어 준 거 엄청 인기 많은데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 이상이 비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러한 로맨틱함과는 거리가 좀 있는 중년 이상의 귀족들이었다.
“전부 그 냇가를 보러 갔다는 것인가.”
“네. 거봐요. 대단한 거라니까요.”
괜히 자기가 만든 것처럼 뻐기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만든 이보다 받은 이가 훨씬 자랑스러워하는 그것은 바로 사샤가 받고 있는 애정의 정수였으니까.
“사실 보여 주기 싫어서 꽁꽁 감출까도 했어요.”
문득 사샤가 뚱한 표정을 짓기에 카일러는 불뚝 튀어나온 양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안에 들어 있던 공기가 폭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못난이로군.”
그의 행동과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사샤는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카일러가 나 보라고 만들어 준 거니까 꽁꽁 숨겨 놓고 자랑만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보여 주기로 결정한 것인가.”
자리에 남아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이 많은 귀족들은 저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미쳤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두문불출하던 카일러 공작이었다. 공작저에서 하인들이 죽어 나온다는 괴담이 들릴 정도로 폐쇄적인 상태로 몇 년을 보내기도 했다.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이그노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카일러가 점점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오랫동안 닫혔던 연회장까지 열었다.
이그노트의 연회장은 이 가문의 부흥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결혼 1주년이라는 가벼운 분위기로 알렸지만 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카일러가 연회장을 열겠다는 의미를 말이다.
“얼마나 회복되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선대와 맞먹는 정도가 아닌가.”
“섣불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군. 너무나도 안정적이야.”
중장년층들은 카일러에게서 이미 선대 이그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에 대한 걱정을 거둘 수 있었다.
카일러에게 얼굴을 붙잡혀 못나게 눌려도 피하지도 않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은 사샤는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가진 진짜는, 절대로 뺏기지 않을 진짜 자랑거리는 냇물이 아니라 카일러니까요. 냇물은 절대 뺏기지 않을 내 자랑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니까. 마음껏 보여 주고 자랑하려고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읊조리는 말이 사랑의 시 같았다. 카일러는 이곳이 아직 연회장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양 볼을 눌러 살짝 튀어나온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주변에서 헉,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깔끔하게 무시한 채 놀라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쁜 말만 하는 입술이군.”
“헤헤. 정말 예쁜 입술이죠?”
그녀는 고민과 어두운 불안을 거둬 낸 뒤로 정말 예쁘게 피어났다. 장난스럽고 애교스러운가 하면 생각이 깊어 어떤 때는 제가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의 밝은 에너지는 그동안 깊이깊이 내면으로 땅속으로 파고들기만 할 줄 알았던 카일러의 깊고 깊은 구덩이를 계속해서 꾸준히 채워 주었다.
“오늘은 그럼 거기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군.”
카일러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자 문득 사샤가 그에게 손짓했다. 귀를 빌려 달라는 그 행동에 고개를 살짝 숙이자 사샤가 입술을 가까이 댔다.
“제가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고개를 돌려 사샤를 보자 사샤는 역시나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카일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샤는 허락의 의미를 용케 알아듣고는 그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아직 연회장에는 사람이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의 시간이었다.
사샤가 이끈 곳은 연회장의 지붕 위였다. 완전히 막혀 있는 줄 알았던 삿갓 모양의 지붕은 사실 2층이었고 사방이 뚫린 반 야외였다.
난간까지 다가가니 저 멀리 저택의 본관이, 뒤로는 기사들의 숙소와 연무장이 보였다.
그리고 연회장에서부터 본관 뒤로 둘러져 있는 횃불 길을 바라보는 방향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불빛들이 주변을 살짝살짝 비추는 것까지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멋있죠? 연회장 열심히 청소하다 보니까 계단이 있길래 와 봤더니…… 이런 멋진 장소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함께 올라오려고 소파까지 준비해 둔 것인가.”
웃음을 머금을 카일러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가 무거운 소파를 번쩍 들어 올린 채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이곳 풍경이 예쁘니 여기에서 앉지.”
사샤는 그가 내려놓은 소파에 얼른 앉아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카일러는 그 손을 따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카일러의 품에서 밤 풍경을 보다니 너무 낭만적이잖아요.”
사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 순간 카일러의 심장도 툭 떨어졌다.
마물이 사라진 이후 카일러를 괴롭히던 소음은 줄어들었다. 지겹도록 그를 괴롭히던 소리의 대부분은 마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란의 기미도 소음으로 듣던 차에 그들이 마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었다.
그러니 마물이 사라진 지금 아프고 신경질적이 될 만큼 괴로운 소음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샤는 항상 그의 곁에 붙어 있기 위해서 신경 쓰고 있었다. 잠잘 때나 외출할 때도 그랬다. 외출 때는 웬만하면 마차에 함께 타려 했고, 마차를 탈 수 없을 땐 그와 같은 말에 타려고 했다.
물론 서로 나누는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부분들을 신경 써 주는 사샤의 마음을 카일러가 모를 리 없었다.
“평생 이렇게 곁에 있어 줘. 내 귀에 소음 한 번 들릴 틈 없도록.”
카일러는 품 안의 사샤를 두 팔로 꼭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으음…… 그 소음 듣는 게 제국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가 강한 힘으로 끌어안아 푹 파묻혔던 고개를 꾸물꾸물 들어 올려 호흡을 확보한 사샤가 해맑은 척 질문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짐짓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대충 대답했다.
“마물 말고 내가 나설 일이 뭐가 있나. 나머진 이제 황제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음…… 그건 그렇네요.”
생각을 하느라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귀여웠다. 뭐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는 것은 콩깍지라는 게 씐 탓일까.
“그럼…… 진짜 나 평생 안 떨어질 거예요? 귀찮다고 떨궈내고 그러면 안 돼요?”
사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기대어 있던 몸을 제대로 세워 그와 눈높이를 맞춰 왔다. 카일러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은근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아까까지 귀여웠던 분위기를 덮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가볍게, 어떤 때는 유혹적으로 제 곁에 머무는 그녀를 귀찮아할 일은 단언컨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카일러 이그노트 공작님? 맹세의 입맞춤을, 우.”
금방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더니 금방 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있는 대로 입술을 내민다.
카일러가 망설일 것도 없이 그 입술을 삼키자 장난스레 모았던 입술로 씨익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진지하게 부딪치면 언제나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녀가 평생 곁에 있기를 소망하며 카일러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