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사샤가 연회장 밖에서 직접 맞이한 사람은 몇 명 안 되었다. 딱 중요한 사람만 직접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연회장의 규모에 놀라는 젊은이들, 그리운 듯 돌아보는 시니어들이 구분되어 보였다.
예전엔 여기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는 말이 여기에서 증명되었다.
얼추 올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안으로 안내받아 들어온 이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한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 근처에 아는 얼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회장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있었다.
이제 올 사람은 단 두 사람…….
“폐하만 오시면 바로 시작하면 되겠군.”
카일러도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주변에 있다가 그의 등장을 눈치챈 이들은 얼른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넬까 하고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을 둘러보는 대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듯 정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정문을 바라보았다.
지난해 이베른의 죄에 대해 논했던 연회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그노트 공작과 황후가 만나는 것은 처음인 자리였다.
그날의 분위기로 이미 그들 사이가 좋은 방향으로 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뒤로 아무런 확인도 없이 지나온 시간이었던 것이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때 입구에서 시종장이 나타나 그들의 등장을 알렸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가운데에 길을 만들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시종장이 문에서 사라지고 곧 리디안과 미디에나가 등장했다. 그들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이들 또한 눈에 띄게 화려하게 생긴 커플이었지만 오늘은 고급스럽고 심플함을 강조한 드레스와 예복을 입고 등장했다. 연회의 주인공인 공작 내외를 배려한 착장이었다.
우아하게 등장한 두 사람은 꼭 붙어선 채 안으로 곧장 들어왔다. 양옆으로 갈라져 생긴 길 끝에서 카일러와 사샤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회를 열게 된 것을 축하하네. 아, 결혼 1주년도 축하해.”
“감사합니다.”
“초대해 주어 고마워요. 멋진 연회장이네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네 사람의 인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여유로워 근처에 있던 이들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긴장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다른 이들이었다.
황후는 카일러에게는 잠깐의 눈길로 인사를 던졌을 뿐 처음 말을 건 것도 초대에 연회장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공작 부인에게 했다.
친근하고 살갑게 대화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 사이에 적대감은 없었다. 모두들 예상했던 그림이 전혀 나오지 않아 당황하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황제의 곁에 있는 황후가 공작만을 바라보는 그 불편한 분위기를 겪어 본 이들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평화로운 것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평화로운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모두가 자리 잡고 난 뒤 단상으로 올라간 카일러는 좌중을 살폈다.
“나와 사샤가 결혼한 지 1년 되는 날을 위한 연회에 와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또한 저희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신 두 분 폐하, 감사드립니다.”
좌중에 한 번, 그리고 황제와 황후에게 한 번 허리를 숙인 카일러는 다시 올곧은 자세로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카리스마는 확실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엇이 있었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이 연회장이 다시 열리면서 이그노트의 번성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불행의 태풍이 휩쓴 이그노트였지만, 그래서 나 하나로 근근이 명맥만 이어 가던 곳이었지만 내가 그녀를 얻는 순간 이그노트는 다시 맥이 뛰기 시작했다. 결혼 1주년을 기념하겠다는 의미는 바로 이그노트가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을 누릴 출발선에 있다는 선언과도 같다.”
좌중은 오늘 몇 번이나 더 놀랄 일이 남았을지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까칠하고 말 없고, 사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시무시한 공작이라고 여겨지고 알려졌던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고 함부로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위용이 넘치는 사람이기는 했으나 유려한 말솜씨와 나직한 목소리에 모두가 빠져들고 있었다.
사샤 또한 그런 그를 흐뭇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몰래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연회를 받아들여 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고, 이번 연회를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이그노트라는 가문으로까지 끌어올려 의미를 부여해 준 그가 고마웠다.
그에게 선물을 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한 연회였는데, 오히려 그에게 받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서로가 이 연회를 단순한 파티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러의 인사가 끝나자 박수 속에 황후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톤 다운된 흑자주색 드레스가 유유히 움직여 카일러의 곁으로 섰다.
“두 사람이 결혼 1주년을 맞이하기도 했고, 뜻깊은 연회를 연다 해서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이그노트 부인.”
황후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또다시 긴장하던 이들은 그녀가 사샤를 부르는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일러에게는 귀띔을 했지만, 사샤는 전해 들은 바가 없었기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녀들의 절묘한 색 대비에 사람들은 낮게 탄성을 냈다. 두 명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들이라 모두들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황후가 제일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공작 부인의 미모가 어마어마한데요?”
“세상에…… 지난번 황궁 연회에서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마치 요정 같아요. 어쩜 저렇게 빛이 나지……?”
작게 퍼지는 감탄 속에는 사샤에 대한 칭찬이 끝도 없이 퍼지고 있었다.
사샤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 이야기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던 미디에나마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치 무엇을 주어도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단상 아래에 있던 시녀장이 위로 올라와 그녀에게 네모 납작한 상자를 건네었다.
그리고 미디에나는 그것을 받아 손수 잠금장치를 풀고 묵직한 뚜껑을 열었다.
“오……? 저, 저건……!”
“제가 보고 있는 게 진짜입니까?”
단상 가까이에 있어 상자 속 내용물을 바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서부터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로 번져 나갔다.
미디에나는 상자 속에서 화려한 목걸이를 꺼내었다. 줄 자체는 특별할 것 없이 금으로 된 것이었지만 한가운데 걸려 있는 붉은 펜던트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길 만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좌중은 물론 사샤도 그 자태에 놀라고 있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핏빛의 보석은 눈물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심한 세공 덕에 연회장 내의 조명을 받아 사방으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옛날 메딜란 공국에서 매우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곤 했던 보석, 산크리마이다. 피와 눈물이라는 뜻을 가졌지.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피도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산크리마가 모두 흡수해 버린다고 해.”
미디에나는 좌중에게 자신이 선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준 뒤 그 목걸이를 사샤에게 내밀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샤는 대번에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위해 준비한 미디에나의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전에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려 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윽박질렀던 그 만남 외에도 무언가를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샤는 황궁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 미디에나와 사적으로 부딪힐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늘 약간 긴장한 것도 있었다.
그를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녀의 존재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눈에 봐도 진귀한 물건을 선물로 내밀었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왠지 그녀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아서 사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드립니다. 두 분 폐하의 보살핌 아래 데르마도 저희 이그노트도 무한히 번성할 것 같습니다.”
깍듯한 그녀의 태도에 미디에나 또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강렬한 표정으로 기억되어 있던 미디에나는 부드러운 미소 또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리 줘요. 내가 해 줄게요.”
잠깐 사샤의 손으로 넘어갈 듯했던 목걸이를 다시 가져온 미디에나는 손수 잠금을 풀더니 사샤의 목에 목걸이를 둘러 뒤에서 채워 주었다. 머리카락까지 정리한 그녀가 좌중에게 목걸이가 잘 보이도록 섰다.
어쩐지 너무 쑥스러워서 얼굴이 발개지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잘 어울리신다…….”
“하얀 드레스에 금발 머리카락에 붉은 보석이라니, 어쩜 저렇게 아름답지?”
모두의 칭찬이 귀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황후께서 저런 귀한 보석을 선물하다니, 확실히 다 정리가 된 모양이야.”
“그러게. 사이도 좋아 보이잖아.”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좋은 분위기로 끝나다니. 정말 공작 부인의 덕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미디에나의 의도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사샤는 수줍은 미소로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미디에나는 살짝 기쁨과 미안함과 그런 복잡한 것들이 섞인 표정으로 아름다운 사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