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몸살까지 나 가며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착실하게 시간은 흘러 연회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잠의 여운을 즐기는 것이 일과였는데 오늘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으면…… 아, 그가 모르게 일어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긴장되는 모양이군.”
분명 방금까지 자고 있었는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바로 깬 모양이었다. 카일러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들어 줄래요, 카일러?”
사샤는 잠에서 막 깬 그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작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싶은 그가 미간을 살짝 모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말해도 된다.”
“……정말 멋있어요. 잘생겼어요. 내 남자 하기 너무 아까워.”
뜬금없는 칭찬 폭격에 카일러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큭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정말. 요즘 왜 이렇게 예쁜 소리만 하지?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아 조금 아쉽군.”
카일러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입술을 부우 내밀며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늘 연회를 끝마치고 나면 아마 제국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것이었다.
사샤 이그노트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인지.
“나만 알 수 있었는데.”
순간 번뜩이는 그의 눈은 한창 절정에 달할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아 사샤가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이런 소유욕 같은 것에도 그녀는 설렐 뿐이었다.
“치, 나는 이미 온 제국이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카일러 멋진 거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아침부터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침대 위에서 오래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카일러도 그녀를 도와 준비해 온 연회가 열리는 날. 고용인들로는 커버하기가 어려워 외부에서 오늘만 고용한 일꾼들이 곧 도착할 때였다.
허튼 생각 하지 못하도록, 혹은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카일러가 그들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오늘 우리가 제국에서 제일 근사할 거예요. 물론…….”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서기 전 사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곤 말끝을 흐리더니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 신호에 따라 고개를 옆으로 내리자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카일러는 항상 제국에서 제일 멋지고 근사해요. 황제 폐하도 못 따라올 만큼.”
촉. 바깥에 들릴세라 속삭이고는 귀에 입맞추는 그녀를 카일러는 품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사샤, 그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연회 준비의 시작이었다.
*
“우와아…… 이게 진짜 연회장? 황실에 있는 거랑 거의 비슷하지 않아?”
백작 영애 4인방은 입구에서부터 모여 있었다. 올 때는 각자의 가족과 함께 도착했지만 각자 입구에 남아서 나머지 영애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이그노트 공작저의 연회장의 위엄에 넋을 놓았다.
“우리만이 아니야 젊은이들은 전부 넋을 놓고 있어.”
“이야~ 이그노트가의 연회장이라니 이게 몇 년 말인가 말이야.”
“오래 안 써서 내부가 엉망이었을 텐데, 이 연회 괜찮은 걸까요?”
그런 그녀들을 스치는 노부부가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적어도 저분들의 세대 때는 자주 이곳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정말 이그노트의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네요. 연회장이 이만한 게…….”
영애들은 앞다퉈 새삼스럽게 자신의 드레스를 점검했다. 너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신경 쓴 옷이 혹시나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어머, 영애들. 와 주셨네요. 네 분이 모여 있어서 바로 알아봤어요.”
연회장 안쪽에서 그들을 향해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들뜨지 않으면서도 반가움이 담뿍 담긴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쪽을 돌아보니 그녀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 고, 고, 공작 부인, 안녕하세요!”
하필 제일 먼저 입을 열어 인사한 것이 아이시였다. 그녀는 평소엔 잘 안 내던 크기의 목소리로 냅다 인사를 던졌다.
그 목소리가 속속 연회장으로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던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이시는 그 시선들을 느꼈는지 입술을 꾹 다문 채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공작 부인, 사샤는 오늘따라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분명 작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보얀 게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풍성한 금발 머리는 탐스럽게 땋아 내려 어깨에 걸쳐 앞으로 내려뜨리고 있었다.
머리 장식이 곳곳에 작게 꽂혀 있어 그녀는 마치 저 뒤에 펼쳐진 숲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숲의 요정같이 느껴졌다.
아이보리색의 드레스 또한 너무 화려하지 않지만 적당히 들어간 보석 덕에 그녀의 요정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전에 보았을 때도 물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녀의 등장으로 연회장 입구에는 정체가 생겼다. 심지어 아이시가 큰 소리로 이목을 집중시킨 덕에 이쪽을 안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아이시의 굳은 얼굴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당황한 눈을 돌려 앞을 보니 사샤가 그녀의 붉어진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놀라셨죠, 아이시 영애? 오늘은 안으로 들어가서 연회를 즐겨 주세요. 길 잃은 사람들 안내는 제 몫이니까.”
사샤의 살가운 인사에 아이시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라다 영애, 로즈힐 영애, 피콜라 영애까지. 빠짐없이 참여해 주어서 고마워요. 영애들은 제게 좀 특별한데…… 우리 모임 가진 지 너무 오래됐죠?”
그녀는 네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었다. 주변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호시탐탐 인사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네 명의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담긴 시선들에도 영애들 눈에는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공작부인께서 부르신다면 저희야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어요!”
“그럼요. 언제든지 초대만 해 주세요!”
영애들은 사샤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며 거의 우러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지 말고 다음엔 저를 초대해 주시는 건 어때요? 영애들의 저택에 손님으로 갈 수 있을까요?”
로즈힐은 주변을 사악 훑어보고 있다가 사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꼬아 보자면 공작 부인이 부인들이 아닌 영애들을 데리고 마치 자기 아래로 사람들을 줄지어 놓으려는 듯이 볼 수도 있을 법한 풍경에 로즈힐이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우려대로 살짝 미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런데 그 적절한 타이밍에 사샤가 초대해 달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것도 손님으로 갈 수 있느냐는 말까지 덧붙여서.
사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사샤가 그 말을 던짐으로써 그들 네 명은 그녀의 부하 같은 게 아니라 온전히 동료가 되었다.
“예, 예? 저, 저희 백작저에 어떻게 부인을…….”
“영광이에요, 공작 부인. 꼭 초대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부디 찾아와 주세요.”
한껏 긴장한 피콜라가 덜덜 떨면서 분위기를 망치려 들기에 로즈힐이 잽싸게 기어들었다. 공작 부인이 만들어 놓은 ‘친구’ 같은 분위기에 초를 칠 뻔한 걸 잘 살려 놓았다.
사샤의 시선이 피콜라를 거쳐 로즈힐에게 닿았다. 그녀는 의도를 한 건지 하지 않은 건지 그저 맑은 미소로 화답을 하고 있었다.
“아, 제가 오래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 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일하는 분 붙잡고 뭐든 얘기해 줘요.”
“바쁘신데 가 보세요. 저희끼리 즐기고 있겠습니다.”
라다 영애는 역시 씩씩하게 대꾸했다. 공작 부인은 굳은 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피콜라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한 번 보내 주고는 그대로 그녀들을 스쳐 갔다.
“보통 아니다, 부인.”
“그러게. 근데 그게 계산이 아니라서 더 무서워.”
라다와 로즈힐은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한마디씩 던졌다. 다른 부인에게로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다들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 바깥으로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하는 그녀를 신기해했고, 그렇게 마중을 나온 그녀가 누구와 만나고 어떤 내용으로 대화하는지를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러가 엄청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공작님이요? 호호, 그럴 리가…….”
“잘 아시겠지만 말로 한 건 아니고요. 그래도 엄청 티 나는 거 아시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대화하는 그녀를 보며 모두들 잠깐씩 넋을 놓았다.
“초대라니, 우리 집으로 공작 부인을 초대한다니이…….”
피콜라는 한때 그렇게 열심히 의심을 해대더니 그 이후로는 완전히 공작 부인 바라기가 되어 버렸다. 대뜸 초대하겠다 대답한 로즈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넋이 나간 피콜라를 끌고 연회장 안으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연회장 안은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화려했다.
막 비싼 것들을 들여 꾸몄다기보다 연회장이 가진 분위기 자체가 매우 화려한 곳이었다. 오히려 아이보리색의 천들로 테이블보나 천장 장식을 더해 너무 화려한 데서 오는 촌스러움을 막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역시 초대는 무리인 거야…….”
“정신 차려, 피콜라. 공작 부인 모시고 연회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침착한 라다와 로즈힐도 넋을 놓고 안을 구경하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그들을 초대해 준 연회다. 자신들이 제대로 즐겨야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사명감을 가진 네 명의 영애는 어찌어찌 자연스럽게 연회장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