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식사를 마친 카일러는 금방 황궁으로 떠났다. 그리고 사샤는 얼른 걸음을 옮겨 로제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로제? 나야.”
딱딱한 로제를 이렇게 살갑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샤는 문을 두드리고는 안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다.
한 3초의 정적 뒤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역시나 피곤해 보이는 로제가 나타났다.
“아, 사샤 님. 아침 식사는 잘 하셨나요?”
로제는 옆으로 비켜서서는 사샤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로제,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내가 너무 일 시킨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사샤는 손에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그제야 그 정체를 알아본 로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사샤 님.”
“제프가 간단하게 준비해 줬어. 얼른 먹…… 으아, 마실 것을 안 가져왔네?”
사샤가 챙겨 온 것은 바로 간단한 빵과 치즈, 햄, 채소를 넣은 샌드위치와 따뜻한 김이 나는 수프였다. 자신이 먹었던 아침 식사를 더 가져온 것이라 주방장이 크게 더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걸 왜 사샤 님께서……!”
“어차피 제프가 하는 일인걸, 뭐. 나는 옮겨 왔을 뿐이야. 얼른 먹어. 정리한 자료는 이거야?”
사샤는 방금까지 로제가 앉아 있었을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펄럭였다. 사샤에게서 건네받은 트레이를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로제는 얼른 그것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샤에게로 다가갔다.
“이…… 이게 정리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살펴보시면…….”
“어허!”
사샤는 정리된 자료를 휘익 옆으로 빼내며 엄한 표정으로 로제를 돌아보았다.
“빨리 식사부터 해. 안 그럼 오전 내내 잠이나 자라고 방에 가둬 버릴 줄 알아!”
짐짓 엄한 척하며 명령하는 듯했지만 사샤의 굳은 얼굴은 금방 풀렸다. 로제는 피식 웃음이 새려는 걸 애써 참으며 사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살림에 대해서 배운 것은 없어도 머리는 비상한 편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매우 신중한 타입이었기에 혼자서 결정해 나가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런 똑똑함을 넘어선 영악함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곁에서 돕고 싶어 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으니까.
하녀의 식사를 챙겨다 주는 안주인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제국 제일의 이그노트 공작가의 안주인이 말이다.
“연회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려는 거죠?”
로제는 얼른 샌드위치와 수프를 해치우고 사샤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샤는 로제의 자료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맞아. 어느 정도의 규모까지 가능할지 살펴보고 싶었어.”
제국 공식으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지 1년.
카일러와 사샤는 결혼기념으로 성대한 연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으며 공작저의 향후 반년 동안의 자금 운용에 해가 안 될 정도의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로제에게 알아봐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카일러 공작님께서는 그동안 사사로이 돈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가장 큰 지출은 저택 쪽이 아닌 기사단 쪽에서 나오는데, 그마저도 다른 곳에 비해 결코 비싼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로제는 간단하게 사샤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막 화려하게 하지는 않아도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싶어. 그래서…… 이 정도면 원하는 연회를 할 수 있을까?”
로제는 사샤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띠었다.
경제관념에 대해서는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이그노트 공작가의 앞날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난번 영애들의 사교 모임을 제안할 때는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부터 묻더니 이번에는 연회 한번 열어 보겠다고 공작저의 재정부터 확인하는 안주인이라니.
“사샤 님, 이 정도 재산이면 사샤 님께서 말씀하신 정도의 규모로 연회를 1년에 한 번씩 약 15년 동안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로제가 웃음을 참고 진지하게 대답하자 사샤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숫자를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로제를 보는 얼굴이 아직도 놀람 그 자체였다.
“그것도 아주아주 화려하게 했을 때요.”
로제가 끝내 살짝 웃음을 지어 주자 사샤는 소리 없이 ‘우와’ 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니 마음껏 하고 싶은 거 다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설픈 연회는 가문의 이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사교 모임을 경험하면서 사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재정적인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허락하는 한 제대로 갖추고 싶어서.
“내가 모든 걸 제대로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면 좋겠지만…… 그 전까진 잘 부탁할게. 이번 연회도 로제에게 많이 의지하게 될 것 같아.”
아무리 도움을 받는 게 일반적이라고는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로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샤에게 간혹 감탄하곤 했다.
그녀에게는 하녀, 하인이라는 개념보다는 내 집 일을 같이 도와주는 사람 정도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편하게 하고는 있지만 연장자로서의 대우도 어느 정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정도였으니까.
“좋아요. 그럼 우선,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부터 추려 볼까요?”
규모부터 정한 다음에 디테일한 부분을 결정해야 한다. 로제는 평소의 차분한 눈빛을 찾고는 본격적인 연회 준비에 들어갔다.
*
황궁에 도착한 카일러는 거침없이 집무실로 향했다. 자신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알현실로 움직일 그가 아니었다.
이제는 뭐 알아서 자신의 공간으로 아무 때나 오라는 식으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저를 이렇게 막 돌아다니게 둬도 괜찮으신 겁니까?”
집무실에는 심지어 그를 막는 사람도 없었다.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냥 눈으로 봐서는.
어딘가 그의 호위가 숨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일러 네가 어디 손님인가. 그냥 아무 때나 들락날락하거라. 어차피 호위도 기사들도 너를 막으려면 떼로 나서야 할 테니까.”
뭔가 바쁜지 서류 같은 것들 들여다보고 있던 리디안은 심지어 눈도 들지 않고 있었다.
카일러는 그런 그를 보다가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전에는 제가 고집해서 지키던 예의였는데 그마저도 마다한 리디안은 진짜 격의 없는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최근에 안 보이더니 오늘은 무슨 일인가.”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보니 그제야 리디안이 말을 던졌다. 서류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시녀들이 들어와 그가 앉은 소파 앞 테이블에 간단한 티를 차리고 돌아갔다.
말은 그래도 좀 갖춰진 상태에서 하려던 카일러는 그저 피식 웃었다. 그의 자유로움에 카일러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연회를 열까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연회?”
연회라는 단어에 리디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카일러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 연회.”
두 남자의 사이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사각거리는 펜의 소리도, 팔락이는 종이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리디안은 뭔가 숨기는 거라도 알아보려는지 카일러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이 혹시 그대의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사람인가 했네. 연회를 열겠다고? 나야 말릴 이유가 없는데…… 무슨 연회?”
결국 리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파 상석에 앉아서 아직도 카일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샤와 결혼식을 올린 지, 다음 달이면 1년이 됩니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연회를 열고자 합니다. 제가 공작이 되고서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대접을 한 적이 없으니 그걸 겸해서…… 한다고 합니다.”
“사샤의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리디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참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누가 이그노트 공작저에서 다시 연회가 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새로운 공작 부인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전에 살았던 삶에 대한 소문이 은연중에 퍼져 있었던지라 기대가 없었다.
사실 그래서 걱정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다. 부인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물정도 모르고 어울리기도 어려운 여자라고 생각할까 싶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미디에나가 먼저 좀 챙겨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을 것 같아 말리던 참이었다.”
리디안이 편안하게 황후의 이름을 불렀다. 카일러의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매우 편안해 보였다.
이전에는 잘 꺼내지 않던 이름이었을 뿐 아니라 말을 꺼낼 때도 뭔가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던 것이다.
셋의 뒤틀린 관계를 의식하고 있기는 했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남자는 그 부분을 꽤 조심스럽게 대하곤 했었다.
“연회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연회 준비한다고 제일 처음 한 것이, 하녀장을 시켜 공작가의 재정을 확인하는 것이더군요.”
연회 준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남자들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한 번 만에 재정을 털어먹을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 리디안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향후 이그노트 공작저가 돈 때문에 망할 일은 전혀 없겠군.”
“이전에 영애 넷 정도를 초대하는 모임을 준비할 땐 하녀들과 주방장을 모아 놓고 허락을 받았다 하더군요. 일이 많아질 텐데 무리가 되지 않느냐고.”
카일러는 수다쟁이는 아니었지만 단 하나 예외가 바로 사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였다. 올 때마다 어쩜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조곤조곤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로 사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리디안은 아직까지도 그의 이런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