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카일러가 꺼낸 이름은 장내를 왈칵 뒤집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소란한 가운데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바로 엘리나의 목소리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그 짧은 한마디에도 떨려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도 그녀의 눈은 단상을 향해 있었다. 황좌에 자리 잡고 앉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카일러와 사샤를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사샤에게서 멈추었다.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악문 이를 보니 꽉 쥔 주먹도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그래, 이베른의 영애로군. 뭔가 할 이야기라도 있는가.”
아무도 그녀의 반문에 동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이쪽을 노려보고만 있는 영애를 향해 리디안이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왠지 다정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시선을 돌린 엘리나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리디안의 눈동자에 아빠를 감쌀 반론을 꺼내려다가 문득 다시 그를 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문득 섬뜩함을 느꼈다. 항상 즐겁게 대답하고 아름다운 황후에게 홀려서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도 무른 황제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는 그의 눈빛은 몸이 굳어 버릴 정도의 섬뜩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저희 아버지는 다들 아시다시피 다정하고 마음 고운 후작님이십니다. 귀족 회의에 참여도 안 하시고 그저 영지를 돌보는 데에 열심이신…….”
그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전면에 나서서 그 의견을 밀어주지 않았다.
이미 카일러가 전면에 대고 말하는 순간 끝난 것이었다.
몇 년 간을 묵묵히 제국의 개인 것처럼 마물을 처치하고 다니고, 반란자들을 제압해 왔었다. 황제의 황권이 이 남자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충분히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심지어는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소명인 양 그 일을 해 왔다.
카일러가 대외적 활동을 하지 않고도, 혼자서도 그 명성을 유지해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 그가 전면으로 나선다는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진실이건 아니건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그는 스스로 처리하면 처리했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짓을 고할 이가 아니었다.
“그 증거에 관한 거라면 지금 잘 모아 두었으니 제출하겠다. 언제든 누구든 그 증거가 무엇인지 볼 수 있도록 하겠다. 의심이 간다면 확인하도록.”
“나는 이미 확인했지. 어휴, 이게 아주 무섭더라고. 사샤는…… 오히려 방치되어서 그 남자의 영향을 안 받았던 게 다행이야.”
씨익 웃는 리디안이 한마디를 덧붙이자 장내가 싸늘해져 버렸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가 너무 많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보여 줄 준비가 끝났으니 판단은 황제 폐하께 맡기겠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손을 뗄 것이다. 처분을 어떻게 하든, 그것은 이제 폐하께서 관장하실 것이다.”
“나만 귀찮게 하겠다는 거지. 이 안건에 대해선 따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카일러는 할 말이 전부 끝났다는 듯이 바로 뒤돌아 사샤와 나란히 섰다.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 리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드디어 단상의 한가운데, 가장 앞으로 나왔다.
“서론이 길었군. 그런 의미로 제국에서 마물이 사라진 것과, 그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연회를 아낌없이 열었으니 모두 함께 즐기도록 하라.”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려한 궁정 악단의 음악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가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지 발랄하고 사랑스럽게 시작되는 현의 멜로디에 모두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내용마저 사랑스럽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어 종국에는 제국에 가장 큰 위험 요소를 사라지게 한 카일러와 사샤에 향한 환호를 담은 연회가 되어 버렸다.
그사이에서 엘리나는 완벽하게 잊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친하게 지내겠다고 꺄르르 웃으며 다가오던 영애들도, 잘 보이기 위해서 눈짓을 주고 다가와 말을 걸던 영식들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사샤 또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엘리나는 완벽한 외면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덩그러니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졸졸졸, 물이 바위들 사이를 넘나들며 흘러가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그노트 공작저의 후원, 카일러와 사샤는 우할린 숲에서 보았던 정자와 비슷하게 만든 공작저만의 멋진 정자에 앉아 그 아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러와 사샤는 연회장에서 입고 있던 드레스와 예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물길을 따라 놓은 등이 반짝이는 것의 전부인 어둠 속에서 사샤의 드레스에 있는 보석이 간간이 반짝, 빛을 반사했다.
그들은 연회가 시작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바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동안은 미디에나의 눈빛 때문에 그걸 피하느라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끔 닿는 눈빛들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정말…… 어차피 말 걸어도 눈만 마주치면 도망갈 거면서 왜 그러죠 다들. 그냥 연회나 즐기면 될걸.”
사샤는 저 앞의 물결에서 뭔가 튀어 오르는 것에 시선을 빼앗겨 내려다보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카일러는 음, 하는 작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다가왔던 이들이 주변에 아주 우글우글할 정도였다. 하지만 누군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카일러가 그쪽을 휙 돌아보면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어 버려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명만 그런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이 그러니까…… 꼭 애기를 가운데 두고 여기 봐, 여기 봐, 하는 것 같잖아.”
사샤가 문득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카일러는 예쁘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보석을 붙여 놓은 듯이 반짝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대도 나를 보고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기억하고 있어.”
사샤는 뜨끔했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아하하, 웃으면서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를 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땐 정말 너무 놀랐다고요. 세상에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대답을 해 놓고 나서야 제가 떠올린 첫 만남과 그가 말하는 첫 만남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뭐, 원래 사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먼발치에서 보는 후작과 고용인들이었을 텐데, 가까이에서 이렇게 멋진 남자를 봤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지.
카일러는 그윽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밤이라 검어진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그의 두 눈에 담긴 내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에 좋지 않았던 것들 전부…… 카일러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거 아닐까 생각해요. 카일러 하나만 있어도 행복할 텐데, 이렇게 커다란 마음을 받고 있고, 이 저택의 사람들도 전부 날 좋아해 주는 게 느껴지거든요. 가문이 열심히 유지해 온 이런 여유로운 삶도 같이 누리고 있으니까.”
이 풍경은 그냥 아름답게 보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놀라는 것이었다. 아예 물이라고는 작은 분수대 하나였던 후원에 이렇게 물길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마음을 이런 물질적인 것으로 척도를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카일러의 마음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은 확실했다.
“나도 그래서 뭐든 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숲에 가자는 것도 냉큼냉큼 따라가고, 마물이 가자는 것도 선뜻 따라가고…….”
“무모했다.”
“무모했죠.”
싱긋 웃는 그녀에게로 카일러가 얼굴을 내렸다. 가만가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연회장에서 그를 무서워하며 피하던 사람들이 불쌍해. 알고 보면 이렇게나 다정하고 달콤한 남잔데 말이야.
그녀의 입술을 따라 카일러의 입술도 미소를 그렸다.
“이제 마음껏 붙어 있어도 되죠?”
사샤의 말에 카일러가 웃고 있는 입술에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때…… 나는 나를 탓하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하기에 따라 그대를 책망하는 말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아? 절대! 저얼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절대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지 자신과 붙어 있느라 마물의 위험 신호를 캐치하지 못했다는 것에 괴로워하는 그를 보는 것이 마음 아팠을 뿐.
“나를 이렇게 강하게 보호해 줄 사람인걸요. 너무 고마워요. 당신이 내 남편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다른 세계에서 살아남겠다고 혼자 이리 눈치 저리 눈치 보고 다녔지만 결국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낼 수 있었을까.
행복하다 말하는 저를 더 깊은 감정을 담아 바라보는 그의 깊이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느꼈을 때, 가슴이 미어지도록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아직 할 일이 많다. 하고 싶다 했던 건 모두 내가 이루게 해 주겠다.”
“뭐든지?”
끄덕.
“전부?”
끄덕.
이 남자의 간결하고도 강렬한 감정은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직진해 왔다. 사샤도 환한 미소로 그 마음에 화답을 해 주었다.
“좋아요. 그럼…… 얼른 들어가요. 둘만 있을래.”
살짝 수줍은 목소리로 꺼낸 말에 바로 그 의미를 눈치챈 카일러의 두 눈이 진지해졌다.
“꺅! 뭐야. 그렇게 마음 급한 거예요?”
이제 얼른 일어나서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카일러가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샤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다. 저택 안에서는 호다닥 하녀들이 그들이 지날 길을 피해 숨었다.
만약 계약서 같은 걸 써 두었다면 찾아다가 몰래 고쳐 놓아야겠다.
계약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계약 내용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겠노라고.
<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 본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