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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119화 (119/128)

119화

제국을 지키는 검이던 이그노트 공작의 곁에 있던 여자 하나는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둥둥 떠 있기만 해 보였다. 심지어 그 뒤로는 제대로 본 적도 별로 없었더랬다.

존재감 없는 그 여자는 이베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아프다는 이유로 알려지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일러의 옆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팠다던 사람 맞아?”

“그러니까, 이름도 못 알릴 정도로 아팠던 게 저렇게 낫겠냐고.”

“심지어 아팠던 딸이 저렇게 자랑스러운 일을 했는데 후작 부부 둘 다 불참했잖아.”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은 자연스럽게 후작에 대한 의심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사샤는 그들의 이야기를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이제 이베른 후작은 더더욱 그녀의 안중에 없는 자였다. 그나마 이 몸의 부모님이고, 제게도 솔직히 그리운 존재였기 때문에 처음엔 그래도 좀 이어 가고 싶은 존재였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독립도 아무렇게나 시킨 이베른은 몸마저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 길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아마 저를 집 안에 가둬야 했던 그 이유를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게라넬이 범죄 집단으로 수배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오래전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거의 반란자의 앞잡이 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수장이라는 이름은 그가 쌓아 온 바른 이미지의 ‘이베른’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물이 수백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산맥에서 출몰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지금 그 이유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지만 마물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앞으로 산맥을 넘어 마물이 출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결론을 짓는 그녀의 말이 당당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을 마친 사샤는 살짝 뒤로 물러나 카일러의 뒤로 가서 섰다. 제 할 일을 할 때엔 제대로 목소리를 내다가 제 몫을 마치고 나자마자 카일러의 뒤로 가서 서는 모습까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제국을 위해 항상 힘써 주는 이그노트 공작이 몇 년에 걸쳐 마물로부터 제국을 지켜 주느라 고생했는데, 공작부인의 기지로 이렇게 마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앞으로 황실의 입장에서도 이그노트 공작에게 상을 내려 마땅하니, 그동안 세운 공에 준하는 것은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의는 없을 것으로 안다.”

그리고 다음에 나선 것은 놀랍게도 황후 미디에나였다.

카일러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공식 석상이든 어디든 그에게 신경을 쓰느라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못하던 황후였기에 굳이 말로 하거나 나서지 않았음에도 귀족들은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알고 있었고, 불안해하거나 속으로 경멸했다.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드러내는 황후의 어린 면에 대해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딴지를 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갔으면 황실의 품위를 이유로 점점 황제를 압박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모두들 거기에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회의가 없었던 한 달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건 마치 기지를 발휘해 카일러가 마물에게 시달리는 것을 구해 주었다는 공작부인이 나서서 그를 흠모하느라 황실의 권위를 갉아먹고 있던 황후까지 정신 차리게 해 준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황실의 은혜가 고루 살피어 주시니 저희가 이의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간 저희도 감사했던 마음을 담아 이그노트 공작저에 무한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귀족 회의에서 가장 원로 격인 헤리디 백작이 좌중을 대신에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단상 위의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먼저 나서자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우선,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껏 묵직하게 기둥처럼 서서 있던 카일러가 황제에게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카일러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장내에는 말소리는커녕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맥에만 머물 수 있었던 마물을 바깥으로 몰고, 더욱 흉포하게 만든, 게라넬의 수장을…… 제국의 법으로 다스려 주십시오.”

스스로 벌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것 역시 사샤의 영향이 가장 컸다.

*

“예? 이베른 후작이요?”

마물의 일을 마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카일러는 뭐든지 해 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꺼낸 말이었다.

혹시나 그녀가 바라는 것이 그들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황궁에 그의 정체를 밝히거나, 그걸로 처형이 되지 않는다면 제가 밤을 틈타 후작저에 숨어들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비장함은 한순간에 흐물흐물 녹여 버리는 것은 그녀의 덤덤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라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밉지 않은가.”

짧은 물음에 참 많은 감정이 담기는 것 같았다.

카일러는 그들이 미웠다. 자신은 자식을 사랑해 마지않아 마물 앞에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 준 부모님에 대한 사랑으로 트라우마도 겪고, 많은 것을 잃고 또 얻었다.

이런 사랑하는 부모의 기억을 가지고도 힘든 일을 겪고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샤에게 기본이 돼야 할 사랑, 배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빼앗아 버린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표현이 되지 않으면서도 속에서 이토록 감정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앞의 여자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정작 자신의 일인데, 사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밉지 않은 건 아닌데, 그냥……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버렸으면 그냥 버려졌다 치죠, 뭐. 내 쪽에서도 전혀 아쉬울 거 없으니까.”

너무나도 깔끔하게 잘라 내 버리는 그녀가 정말 신기할 정도여서, 카일러는 잠시 그녀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한가요?”

그의 표정을 읽은 사샤는 살짝 민망한 듯 웃으며 그렇게 질문했다. 카일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물이 사라지면 앞으로도 카일러에게 좋으니까 함께 고민도 하고 마물 등에 올라 산맥의 찬 바람 맞으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근데 뭐…… 그들에게 뭔가 하겠다고 고민하고 맘 상하고 할 시간 자체가…… 싫어요. 아까워요.”

마물의 일이 끝나자 도서관에 처박혀 온갖 장서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한이라도 맺혔던 듯이. 그날도 그랬다. 오른쪽에 커다란 마법서를 두 권 쌓아 두고 테이블 위에도 고대 마법서 하나를 펼쳐 놓고 들여다보던 차였다.

카일러도 책을 읽는 걸 즐기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녀를 신기해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다. 그 생각은 나도 같아. 뭐든지 사샤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겠다.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 거지?”

그녀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하는 카일러의 목소리가 좋았다. 흘깃 책상 위로 향했던 시선을 돌리고 옆에 서 있던 카일러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가 상체를 숙여 오자 그의 입술에 촉, 따뜻한 입맞춤을 해 준 뒤 배싯 미소를 지었다.

“나 지금 공작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배우고 있고 마물들이 오가는 그 구멍 막는 방법도 찾고 싶어요. 여기 도서관에 있는 책들도 많이 읽고 싶고…… 카일러랑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어요.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그들에게 관련된 일을 하느라 내 시간 쓰고 싶지 않아요.”

*

그리고 카일러는 그녀가 건넨 분명한 전제 조건을 실행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게라넬의 수장? 아, 그래. 황실에서도 누누이 그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귀족 회의에서도 마물이나 반란의 움직임이 심해지면 종종 올라오곤 했던 안건이었다. 하지만…….”

리디안은 앉은 채로 카일러의 말에 슬쩍 동조를 하다가 눈길을 장내로 돌렸다. 연회를 즐기러 왔던 여인들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남자들은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게라넬이라고 하면, 폐하의 말씀대로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결성의 의의를 잃은 지 오래였고, 심지어 마물을 다루는 걸 이용해 반란자들을 선동해 왔습니다. 거기다가 단지 마물을 움직이는 걸로 모자라 그런 짓까지 해 왔다면 벌하는 것에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헤리디 백작이 한 번 더 나서 그의 입장을 정리하여 말을 전했다. 그의 입장은 거의 귀족 회의 전체의 의견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게라넬의 수장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가장 궁금해하는 그것을 사람들의 무리 어디쯤에서 터져 나왔다.

리디안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꺼내는 카일러의 말 덕분에 게라넬의 수장을 수세로 몰아넣는 발언들을 귀족들 입에서 직접 나오게 만들었다.

그게 누구인지부터 밝혔다면, 그 사람이 실제 수장이 아닐 것이다, 게라넬이 그렇게 나쁜 집단은 아니다, 혹은 감형을 해야 한다는 둥 감싸는 목소리들이 가장 먼저 나왔을 것이었다.

카일러가 의도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저 안에 사샤 이그노트를 향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본 리디안이었기 때문에 제가 모르는 어떤 것이 저 속에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기에.

“누군지를 알아야 벌을 내릴 텐데…… 어떻게 그 수장의 자리가 이어지는지조차 모르는 비밀에 싸인 곳이 아닙니까.”

걱정을 담은 목소리가 조심히 나오는 곳으로 카일러가 문득 시선을 던졌다.

“게라넬의 현재 수장은, 마이어 이베른 후작. 그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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