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118화 (118/128)

118화

웅성웅성 황궁의 연회장은 어느 때보다 훨씬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연회 통보가 온 이번 연회는 그 기념하는 일이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라넬이 자꾸 자신들의 돈을 벌기 위해 마물들을 이동시키는 바람에 간혹 민가에도 피해를 줘 왔었기 때문에 물론 제국의 평민들이나 귀족들도 마물에 대한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카일러가 백방으로 다니며 마물도 처리하고 반란군도 처리하고 있다. 그런 정도의 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마물이 그래서, 없어진 거라고?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못 한 일인데?”

“에이, 뭔가 잘못 전달된 것이겠죠. 마물이 어떻게 없어져.”

“그래. 뭔가 지금 산맥에 있는 마물만 다 없앤 거겠죠.”

“그건 이미 해 왔던 일인데?”

“이그노트 공작님께 뭔가 크게 치하해야 할 일이라도……?”

알 수 없는 유언비어들이 쏟아져 나올 듯이 시동을 거는 대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사상초유의 연회 이유에 가득 모인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납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불화에 대한 이야기는 가십으로 오랫동안 귀족들 사이에서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였는데, 이번만큼은 등장부터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리디안은 미디에나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해 주고 있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연회장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그가 황후를 애지중지 예뻐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황후를 민망하게 하거나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리디안이 황후의 손을 잡고 나오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문제는 바로 그 황후, 미디에나에게 있었다.

리디안이 손을 감싸 잡으면 잡는 대로, 살짝 힘주어 당기며 이끌면 이끄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부분은 말하며 눈빛을 빛내는 황후는 이제껏 그들이 보아 왔던 사람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카락에 햇살이 투명하게 빛나던 다갈색 눈동자, 다지인도 심플하고 풍성하지도 않고 장신구마저 없는 드레스를 단정하게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뻤다.

“세상에, 지금…… 저기 서 있는 게 제가 아는 황후 폐하가 맞는 거예요?”

“쉿-목소리를 좀 낮춰요!”

“앗, 미안해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놀랄 만도 하지. 봐요. 연회만 오면 옆에 황제 폐하가 계셔도 그분이 언제 오실까 하면서 입구만 바라보던 분이었는데.”

“세상에…… 꿀이 떨어지네요.”

연회를 준비하는 한 달 만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것은 연회장 끄트머리에 서서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왜인지 연회에 오기 싫어하셨고, 아빠는 며칠째 보이질 않았다.

엄마 말로는 산맥으로 갔다고 하는데, 왜인지는 알려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카일러 일편단심일 거 같더니, 이게 뭐야.”

빨리 수도에 와서 황후와 손잡고 사샤를 내쫓을 생각으로 지루한 후작저의 시간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엘리나였다. 하지만 어쩜 이렇게 날씨까지 따라 주지 않는지, 마물에게 당해 비명횡사하는 것보다 후작저의 1층이 침수되는 게 더 빠를 것처럼 폭우가 내려 그 먼 길이 며칠 동안 막혀 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후작저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황후 폐하만 만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단상 위의 황제와 황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서로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나는……? 자기는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 놓고 나는 이렇게 버려두면 다인가?

엘리나가 구석에서 입술을 깨물고 다른 귀족들이 확 바뀌어 버린 황제와 황후의 모습에 웅성거림이 더더욱 커졌다.

타이밍이 어쩜 이렇게 맞아떨어지는지, 엘리나가 단상에서 시선을 빼앗겨 버린 사이 연회장 입구로는 이 연회의 주인공들이 도착해 버렸다.

“이그노트 공작 내외분 도착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연회장 입구에서부터 술렁이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엘리나는 사람들에 가려져 보지는 못 했지만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옮겨 가는 것을 들으면 그들이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탄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얼른 통로로 나가자 마침 이그노트의 공작 내외가 바로 지척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인 외모에 엘리나는 잠시 넋을 놓아 버렸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강하고 남자다운 얼굴선과 조각한 듯한 코와 입술, 유려하고 매끈한 눈매 안에는 시리도록 깊고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표정 없는 그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시린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위압감이 그녀의 시선을 묶어 놔 버렸다.

무심한 듯, 나른한 듯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또륵 굴러가더니 얼굴들을 훑어보는 듯하던 시선을 아래로 더 내렸다.

정확하게 제게 꽂힌 눈빛이 그녀의 행색을 살피고 있는 게 느껴지자 긴장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침 삼키는 걸로 긴장한 걸 들킬까 봐 조심했는데, 순간 날카로워지는 눈빛을 알아채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시 거두어진 시선은 제 곁의 사샤에게로 향했다.

살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인 걸까.

카일러가 훤칠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그리 놀라게 하고 그러는지, 하고 생각했던 엘리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카일러가 함뿍 미소를 담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지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 미소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에게 지었던 미소가…… 경멸의 것이었다는걸.

“세상에, 아름다워라…….”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카일러는 사샤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결혼식에서 버진 로드를 걸어 들어갈 때가 생각이 났다.

사샤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카일러를 바라보았고, 카일러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세상에 서로밖에 남지 않은 듯이 바라보는 모습은 다른 귀족들에게도 온전히 전달되어서 웅성이는 소리, 감탄하는 소리 등이 번지기 시작했다.

“오, 이그노트 공작. 잘 왔네.”

황제가 그들을 매우 환대하였고 자리를 인도하기를, 황제와 황후가 앉아 있는 단상 위, 약간 뒤쪽으로 마련해 놓은 의자였다.

그들은 황제와 황후 앞에서 깍듯이 인사했다. 그리고 카일러도 사샤도 미디에나와 함께 눈을 맞추었다.

미디에나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듯하면서도 은은하게 미소를 지을 수는 있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한 달 정도 걸렸으니 이제 곧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카일러와 사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는 그저 공식 석상에서 웃으며 이야기 나눌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제가 하기에 따라 그들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자, 모일 사람이 다 온 것 같으니.”

리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좌중이 이를 눈치채고 억지로 입을 닫았다. 웅성웅성하는 소리들로 가득 차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리디안은 매우 흡족한 얼굴이었지만.

“금일 연회는 미리 알렸듯이 마물을 온전히 막은, 돌려보낸 것에 대한 기쁨을 다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현재 산맥에는…… 마물이 없다.”

그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장내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던 이들은 물러나는 황제를 보며 아쉬워했는데, 바로 뒤이어 일어난 이가 그 뒤를 이어 단상의 앞으로 나왔다.

리디안이 한 발짝 물러나자 앞으로 세 발짝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사샤였다.

“마물은 본래 산맥 한가운데 생긴 어떤 현상으로 자꾸만 이쪽 세계로 넘어 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는 말이 나왔었던 것이죠.”

마물이 많고 지형마저 험한 그곳에서 연구를 진득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을 것이다.

사샤는 자신이 산맥에서 보았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갔다. 강단 있는 목소리에 이미 사람들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도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에겐 그곳에 집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돌아가는 입구가 폭포 때문에 막혀 있던 상황이었어요. 거기다가 게라넬은 자꾸 그들을 통제하겠다며 고문을 하고 있었어요.”

사샤의 목소리가 살짝 경직되어 가는 것 같았다. 말로 옮기기에 이곳은 옳지 않았다. 경각심을 위해 말을 꺼내기엔 힘든 것이었다. 이 연회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말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나 감정이 움직일 일이라고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흔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다잡아 보았다.

마음을 추스른 사샤는 다시 입을 뗐다.

“카일러…… 아니 이그노트 공작은 제국을 수호해야 하기 때문에 게라넬 때문에 산맥을 벗어나는 이들을 처치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쪽으로 넘어와서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길 바라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끝내…… 죽어 갔습니다.”

사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앞에서부터 쭉쭉 이어지는 목소리가 강단이 있어 연회장 저 안쪽의 엘리나에게도 잘 들렸다.

마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사샤의 말이 단번에 와닿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들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있었다.

“더 이렇게 두면 안 되겠어요. 그들도 어쨌든 생명체인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 일을 계획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다들 그녀가 한 일에 대해서 술렁술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