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말한 것들을 실제로 실행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마물들의 등에 사람들이 하나씩 올라타고, 모든 마물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물이 어디까지 흘러내릴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폭포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대비하고 있었다.
“시작해!”
“아으! 나 쓰러지면 알아서 하세요! 떨어지게 두면 안 됩니다!”
마법사는 쓰기도 전에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그리고 설명한 대로 그 위에서 마법사는 폭포가 흘러내리는 그 부분에서부터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삼각뿔의 모양으로 얼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벽으로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사샤의 말에 카일러가 의견을 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내리도록 해서 쌓아 올린 삼각뿔의 빙하 같은 얼음 탑이 세워지자 폭포 쪽으로는 뿔의 면적만큼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 오와…….”
키이이-!
사샤는 우두머리 마물의 등 위에서 함께 감탄사를 흘리고 있었다.
단단한 얼음이 생겨 올라오는 것도 신기했고, 콸콸 흐르던 물줄기가 양쪽으로 나뉘어 두 줄기로 흘러내리는 것도 신기했고, 무엇보다 기세를 잃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그 물줄기 사이로 드러난 새까만 구멍이 제일 신기했다.
“저거……구나.”
크기는 대충 마법사를 태우고 있는 마물이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에도 여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만했다.
모두들 주변을 배회하며 폭포의 변화와 여실히 드러난 구멍을 살펴보았다.
결이 바뀐 물줄기가 더 넘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물들이 안전한 곳에 인간들을 내려 주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더 구멍까지 막지는 못했고,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막막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었다는 것이 약간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마물과 오랜 시간 동안 부딪쳐서 상처 받고 상처 주며 살아온 카일러와 딜런은 살짝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그러한 감상과는 살짝 먼 사샤가 마물들을 돌아보았다.
그녀 또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세계로 날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럿이 함께 온다고 해서 그 공포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죠?”
사샤가 씩씩한 목소리로 우두머리 마물을 향해 말했다. 그녀 또한 넋을 놓은 듯 미동도 없이 서서 저 아래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가면 된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겅중겅중 열심히도 뛰어오는 어린 마물이 보였다. 모르고 봤을 때는 저 모습이 얼마나 무서워 보였을까. 소통이 되고 알면 알수록 이렇게 새로운 눈이 생기는 것 같아서 이것도 신기했다.
「인간! 같이 가자! 저쪽도 되게 좋아!」
구멍이 보이는 순간부터 흥분해서 곡예비행까지 보이던 어린 마물은 사샤의 근처에서 겅중거리다 그녀의 팔에 머리를 부비면서 애교까지 부렸다.
「그건 안 돼. 그녀는 여기가 살 곳이야.」
본래 내가 살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나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지? 이곳이 훨씬 좋은데,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샤가 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웃는 얼굴로 어린 마물을 보았다.
“나는 여기가 내 세상이야. 저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 떠나면 나는 못 살아.”
어린 마물은 제가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든지 못 산다든지 하는 걸 문자 그대로만 이해를 하겠지만 나중에 되면 알……게 되지 않을까?
저들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린 마물은 조금 풀이 죽은 듯 보였지만 더 조르지 않았다. 본래 살던 곳,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걸 자신에게 대입해서 생각해 본 모양이었다.
“조심히 가. 다시 여기 오지 않는 게 행복하게 사는 일이겠다.”
마물들이 우두머리 마물이 있는 곳으로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몸집만큼 성량도 큰 마물이 큰 목소리로 길게 길게 울어 댔다. 그러자 아까 모여 있던 마물들 외에도 산맥의 곳곳에서 마물들이 솟아올라와 순식간에 수십의 마물이 모여들었다.
「고맙다.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서.」
우두머리 마물과 함께 사샤를 먼저 만났던 이들은 목을 길게 빼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울렸다. 아마 그게 그들의 인사법인 것 같았다.
카일러와 사샤는 나란히 몸을 붙이고 서서 그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간들을 태워다 올려 준 네 마리의 마물만 남고 나머지는 열을 지어 날아올라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줄기가 길을 열어 드러난 구멍 속으로 쑥, 훅, 하고 사라져 갔다.
「산맥을 인간의 걸음으로 내려가기엔 오래 걸리고 힘들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그대들을 바래다준 뒤에 가겠다.」
배려해 주는 그들의 모습에 사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 이럴 땐 거절하고 나가곤 했는데, 저 호의를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한동안 마물들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카일러와 사샤, 딜런, 그리고 리할은 다시 한번 마물의 등에 타고 우할린 숲으로 귀환했다.
*
고요했다.
마물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없고, 땅을 울리는 엄청난 폭포수 소리도 없었다. 허공을 가를 때 귀청을 찢을 듯하던 바람 소리도…….
맞대지도 않은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요 속에서 사샤와 카일러는 나란히 앉아 꼭 붙어 있었다.
“오늘 귀가 고생하긴 했네요.”
살풋 웃으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샤였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들은 저녁을 먹고 뜨끈한 물에 한참 몸을 담그고 난 다음에 카일러의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산맥의 추위, 높은 곳을 가로지르며 느꼈던 날카로운 바람들을 녹이느라 아직도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음, 한 일이 별로 없는데,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온 느낌이 드는군.”
대충 해결했을 때를 생각하자면 그냥 의견을 내고 지켜봤던 것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허무하다 느껴지는 것은.
“이미 막 마물들한테 매달렸던 거 자체로도 힘들었을 거예요. 저도 살짝 몸살기도 있었어요. 처음 다녀오고 나서.”
사샤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이 팔을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품 안으로 끌어당기는 카일러의 온기를 느꼈다.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항상 붙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끌어안고, 손을 잡고, 붙어 있고 당기고…….
사샤는 제 몸이 한껏 기울어질 정도로 당겨 안으려는 그의 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내가 떠날 거 같아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 뭔가를 무서워하고 있다. 아니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뭔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대도 거기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디로 날아가는 것인지. 어떻게 갈지…… 그런 것들은 모르면서.”
그에게 한 번도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말을 꺼내자 가슴이 철렁해지고 마는 것이다.
“제가…… 가긴 어딜 가요. 나는 이게 여기 아니면 살 곳이 없어요.”
사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이곳이 전부였다.
“마물들이야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그렇게 저를 찾으러 내려왔겠죠. 그곳에서는 마음 편하게 비행할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들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고……. 눈치 봐야 할 카일러 같은 사람이나 자신들을 상처 입혀 통제하려는 사람도 없잖아요.”
분위기를 조금 풀어 볼까 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을 꺼내자 카일러가 입꼬리를 슬쩍만 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정말…… 이곳이, 내 곁이 가장 좋은 것인가.”
“말해 뭐 해요. 나한테 카일러밖에 없어요.”
사샤는 진심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말했다.
그곳으로 돌아간들 그녀를 지켜 줄 사람 하나 없었다. 돌아가면…… 그저 죽을 때까지 혼자일 삶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카일러는 그녀를 가볍게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려 앉히더니 소리도 없이 진득하게 그녀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게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임을 알아챈 사샤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밀어붙이던 그가 제 움직임에 움찔 떠는 것이 귀여웠다. 이제 앞으로는 함께하기만 하면 될까요, 이렇게……?
그의 손이 등을 훑고 허리로 내려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 손길을 따라 이 몸이 실재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만 너무 집중되어 있던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자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마음이 그녀를 덮쳤다.
그래서 사샤는 이미 오래전부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제는 사샤가 나고 이곳이 그녀의 공간이었다. 이 집이, 이 수도가 그녀의 삶이 되었다.
입술만 집요하게 물고 핥아 주던 카일러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에 더 참지 못하고 팔로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끝도 없이 밀착되기를 바라고 떨어지는 신체가 없기를 바라는 정도로 입술을 붙였다 가슴을 문지르고, 다리를 쓸어 가며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느끼려고 했다.
“하아, 항상…… 내 곁에 있어라. 이젠…… 내가 어디에도 보내지 못해.”
뜨겁고 나직한 숨이 사샤의 귓가에 흩뿌려졌다. 고막을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는 차라리 전율이었다.
“어디에도 안 가요. 어디에도 보내지 말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일러의 곁으로 올 거예요.”
처음으로 욕심을 내어 보는 이 사람에게서 사샤는 많은 것을 받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면 그는 또 제게 줄 것이다. 그렇게 반복하며 살아가려 했다. 그러한 다짐은 미룰 것도 없이 오늘부터 당장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