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카일러를 보고 있자니 딜런의 목이 뻐근해질 것 같았다.
사샤가 마물을 먼저 만나러, 교통수단인 마물을 좀 더 데려올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떠난 지 한 30분 정도 지나는 시점이었다.
마물의 나는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산맥에 당도하는 데만도 족히 20분은 걸릴 것이니 아직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남았을 것이다.
이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과 다르게 이제껏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마, 그가 초조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도 불안하고 초조할 때가 있을 것이다. 사람인 이상 그런 걸 절대 못 느꼈을 리 없다. 어른이 되고 느낀 적이 없다 해도 어렸을 때엔 있었을 것이다. 제가 그를 몰랐던 어렸을 때엔 안 좋은 일도 있었다고 귀띔을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딜런은 그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제 곧 돌아오실 겁니다.”
“음…….”
사실 긴장이 안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싸우지 않기로 약속을 했지만 돌발 상황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발생할 수 있었으니까.
고민이 문제가 아니라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였겠지만…… 못 보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더 걱정과 기대가 섞여 가고 있었다.
사샤 님은 괜찮다 말씀하시지만 마물을 더 오래 상대해 온 것은 자신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빠르고 흉포한지 그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돕겠다 나서서 그들의 본거지로 들어가지만…… 그들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 한가운데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상상도 못 할 상황은 카일러의 얼굴에 불안을 드러나게 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키이익! 키-!
멀리서 마물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개체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가 서로 소통하듯이 우짖는 소리가 퍼져 쏟아지는 듯했다.
바닥에 거의 널브러져 있던 마법사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본 가장 의욕적인 모습으로 제 목숨 좀 챙기겠다고 후다닥 일어나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어쩔 수 없이 카일러도 딜런도 제일 먼저 검집에 손이 가 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멈춰요-!”
그리고 착륙의 소리가 가라앉자 제일 먼저 들린 것은 여린 여자의 외침이었다.
카일러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검 손잡이를 꼭 잡고 있는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 흙바람이 가라앉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는 마물 네 마리가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흙바람을 지나 그녀가 모습을 보였다.
“사샤.”
카일러는 그녀의 모습을 식별하자마자 바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이름을 불러 대도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카일러는 마중 나온 사샤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차다.”
“아? 그러게요. 옷을 조금 더 챙겨 올 걸 그랬나 봐요.”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두 손을 맞잡는 카일러의 모습에 사샤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겐 트라우마와 같은 마물과 함께 있으니 맘 편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기, 마물들은 내 말을 믿고, 카일러를 믿고 데리러 내려와 줬어요. 괜찮죠?”
사샤는 조심스럽게 카일러를 향해 물었다. 자신보다 저들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정말 괜찮은지 다시 한번 묻는 것이었다. 괜찮지 않으면, 위에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저들이 배신하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말대로 한다.”
사샤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뒤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믿기로 해서 올라가는 거예요. 딴짓할 거면 여기서 돌아가셔도 좋아요.”
사샤는 딜런과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을 어떤 힘이 있었다. 사실 딜런은 카일러의 명령에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마법사는 아직도 못 미더웠다.
하지만 사샤가 생각해 봐도 이번 일에는 마법사가 긴히 도움이 될 일이라 데려가고 싶었다.
“여기 공작께서 도와주지 않고 말썽부리면, 마법사를 반이나 없애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참 무서운 남편을 두셨군요.”
마법사는 마지막 발악인지 비아냥거리기를 제대로 시전했다. 하지만 그걸 본 사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피식 웃음 새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무섭긴요, 든든한 남편을 두었지. 만약 말썽 부리면 마물이 넘어온다는 문을 닫기는커녕, 마물들을 더 불러 모아 카일러가 없애고 남은 반을 없애 줄게요.”
“협박에 도가 튼 공작 내외인가. 쯧, 마물이 더 넘어오지 않으면 마탑에서도 물론 좋은 일입니다. 도와 드리죠. 마물이 공격하지만 않으면.”
사샤는 아주 조금 더 마법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보고 있으면 마법사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는 듯한 미묘한 눈길에 마법사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와도 좋아요! 한 사람씩 태워 주시면 돼요.”
사샤가 그제야 뒤를 돌아 마물들에게 외쳤다. 거리를 어느 정도 두고 있던 그들은 조금 느린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 딜런과 마법사, 라힐은 그대로 굳어 두 눈만 끔뻑거렸다.
키이-!
“아, 이쪽이 제 남편이에요. 마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일을 해요. 하하…….”
그중 제일 앞서 다가온 마물에게 카일러를 소개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개하는 마물을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키익-!
“아이, 아니에요. 저와 굳건하게 약속해 줬어요. 먼저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 준 것도 이 사람이에요.”
마물이 소리를 내자, 마치 무슨 말을 들은 듯이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는데, 묘하게 그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마물에게 부모를 잃었다.”
카일러가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이 사샤처럼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연스레 대화하는 것을 보자 왠지 알아들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키-!
“내가 전해 줄게요. ‘나는 마물에게 부모를…… 잃었다.’”
역시 카일러의 말은 뜻이 전달이 되지 않았는지 사샤가 똑같은 말을 읊조려 주었다. 그 말에 마물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 마물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정신 차리고 검을 배워 지금까지 처리해 온 수많은 마물 중에 섞였을지도 모르지.”
사샤는 살짝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똑같이 그 말을 전했다. 저 뒤쪽의 마물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앞에 있던 마물이 불편한 듯 발을 구르자 뒤쪽에서도 화기를 가라앉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너는, 너희들은 아니지. 그리고 본래 그렇다고도 하지만, 사람을 공격하도록 유도한 것 또한 사람의 책임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화를 낼 듯하던 마물마저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악연의 굴레를 끊고 싶은 것이다. 이곳으로 넘어오는 그 구멍만 막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마물들도 살던 곳을 넘어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되고, 게라넬이 통제한답시고 가한 고통들도 없이, 그 때문에 인간을 미워하고…… 인간을 공격하고…… 그러나 내 손에 죽고. 그걸 반복하지 않도록.”
마물은 눈은 카일러에게로 고정한 채, 귀는 사샤에게로 연 채 집중하고 있었다. 간혹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왠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여 정말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움을 조금 주면, 그 구멍을 막는 데에 힘써 보도록 하겠다.”
키이이-!
사샤가 그의 마지막 말을 전해 주자마자 마물이 높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뒤에서 긴장하고 있던 마법사가 꺅꺅 소리를 지르는 사이, 앞으로 나와 있던 마물이 뒤를 돌아보며 몇 번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들이 움직여 각자 맡은 이의 앞으로 겅중겅중 다가갔다.
“마법사…… 괜찮겠냐는데요. 비행 중에 문제 일으키면 같이 죽는 거라고요.”
아직도 마물을 눈에 띄게 경계하고 있는 마법사를 보면서 사샤가 말을 전했다. 뚱한 표정을 지은 마법사는 겨우겨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마물을 바라보다 스윽 가까이 다가갔다.
“전 제 목숨이 제일 중요한 인간입니다. 까딱하면 저부터 죽을 판이니 문제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분명 실력 있는 마법사이고, 자신의 힘을 빌려 달라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자신을 압도하는 기분이었다.
“좋아요. 모두들 마물을 꽉 잡아요. 순식간에 급상승하고 착륙도 좀 어려울 테니까 잘 붙잡고 있어야 해요.”
사샤는 방금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우두머리 마물의 등에 올라탔다.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타는 모습이 매우 조심스러워 보여서 남은 남자들도 천천히 그 말에 올라탔다.
마물은 자신의 몸을 꽉 붙잡는 인간의 힘을 느끼는 것인지, 날개를 제대로 잡은 것을 느끼자 턱턱 발을 구르다가 확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당연하게도 마법사의 비명소리가 창공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숲에서 솟구쳐 오늘 네 마리의 마물과 그에 올라탄 인간들은 우할린 숲을 발아래에 두고는 허공에 떠올랐다.
“이런 느낌이군.”
카일러가 근처에서 중얼거리는 것을, 바람 소리가 온몸을 강타하는 가운데서도 고요히 들려왔다.
그 소리가 왠지 기분 좋은 듯한 느낌을 전해 주어서 사샤는 크게 안도했다. 무섭게 뛰던 심장이 오히려 차분해지자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이런 느낌이에요! 이따 산맥 가면 더 멋있을 거예요!”
사샤가 그게 소리를 지르자 카일러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아란 하늘과 쨍한 햇빛, 그 비현실적인 배경 앞에서 카일러가 정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그녀에게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