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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112화 (112/128)

112화

“아무튼 얼른 돌아가세요. 혹시나 황후 폐하가 정말 제게 사과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려오는 길이라면 폐하를 보고 실망하실지도 몰라요.”

“그, 그렇군. ……알겠다.”

뭔가 말을 덧붙이려 하던 걸 멈추고 리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하게 입을 다물고 일어난 리디안은 할 말을 꿀꺽 삼키고 사샤의 눈을 잠깐 들여다본 뒤 그대로 방을 나섰다.

“제국 남자들은 다 저런가. 황제님도 츤츤하네.”

카일러는 본래 성격이 감정을 드러낼 줄은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감정 안 숨기고 바로바로 드러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리디안의 색다른 면모를 본 것 같았다.

그렇게 황제가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노크 소리와 시녀장의 목소리가 먼저 울린 다음에야 문이 열리고 황후가 들어왔다.

미디에나는 굉장히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 가려 보겠다고 화장을 좀 한 것 같은데 가려지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있었다.

사샤는 그런 부분을 눈앞에서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다. 표정은 최대한 지운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내가 먼저 그대를 불렀어야 했는데.”

목소리도 꽤 가라앉아 있었다. 위험했던 사람이 누구인데 세상 다 죽어 가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반성을 했든 안 했든 이런 몰골로 자신을 맞이하는 그녀가 미워 보였다. 그게 그녀의 눈빛에 드러났는지 미디에나가 사샤를 슬쩍 바라봤다가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내게 할 말은…… 무엇인가.”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사샤를 깔보며 깎아내리려 애쓰던 사람과는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사샤가 먼저 찾아오기는 했지만, 지금 힘 빠진 목소리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않을까.

“제가 먼저 왔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아서요.”

사샤는 황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돌하게 말했다. 계급을 떠나 그녀는 지금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

하지만 미디에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애써 화장한 입술을 자꾸 이로 짓이기는 바람에 얼룩이 지고 벌겋게 부어올라 버렸다.

“카일러에게도 했고, 황제 폐하께도 했다면서요. 정작 가장 먼저 받았어야 할 사람은 누구죠?”

“그…… 카일러와 폐하께는, 그동안의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카일러에겐 그대의 행방을 알려 주는 것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폐하께도…… 그 마음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과를…….”

“아, 사람 목숨을 마물에게 넘겨 버리라고 아버지에게 의뢰를 하는 것은 사과할 일이 아니신 거군요.”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사샤는 좋은 마음으로 온 참이었다. 그가 자신이 산맥에 갔다는 것을 알려 줬다고 했으니 어제는 애국심도 확 생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디에나는 강하게 나오는 사샤의 워딩에 계속해서 놀라기만 할 뿐 정작 중요한 말을 꺼내질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사샤는 그녀가 말할 시간을 벌어 주고 있는 것인데, 찾아온 사람이 말이 없으니 말 안 해도 되겠거니, 하고 이렇게 살고 있었던가.

“……할 말이 없으십니까.”

뭉그적대며 사샤가 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미디에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말이 정말 질문의 다가 아니라 할 말 없다 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간계를 꾸미신 거에 대한…… 아무런 할 말이 없으시다는 거죠?”

“아니, 그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혼나는 느낌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혼내는 공작부인의 앞에서 황후는 부은 얼굴을 감싸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미안했다. 내 감정만 앞세우고 얻지 못할 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걸 내게 카일러가, 아니 이그노트 공작이 알려 주었다.”

그때 미디에나의 입이 겨우겨우 열렸다. 귀를 기울여야 할 만큼 작은 목소리에 띄엄띄엄 말하긴 했지만, 사샤는 그녀가 꺼내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귀에 담았다.

“이베른 후작저와는 완전히 연을 끊을 생각입니다. 사교계에 열심히 참여할 생각은 아니니, 알아서 잘 정리해 주시면 그걸로 됩니다.”

이베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움찔했던 미디에나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베른 후작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것은 워낙 말이 많았다. 뭣 모르는 사람 대부분은 그녀가 아팠다는 후작의 말을 믿고 있었지만 일부는 그 말의 틈을 의심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해명해 달라는 거 아닙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저…… 엘리나가 절 다신 귀찮게 안 하도록, 사람들이 저나 카일러를 두고 나쁜 말 만들지 않게, 그렇게만 해 주세요.”

지금 사샤가 이렇게 당당하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이유를 누구보다 미디에나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깔끔하게 인정하고 대답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사샤는 끝까지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왔을 여인에게서 볼 수 없는 여유라 미디에나는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치 이제 다시 보지 않을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러 온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사샤를 보고 미디에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녀의 손을 덥석 덮었다.

그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던지라 화들짝 놀라 버렸다.

“뭐…… 왜 그러세요?”

이제까지 미디에나에게 보여 줬던 단호하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 대신 발랄한 여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도 힘이 풀어진 모습이라 미디에나는 아, 하고 또 잠깐 넋을 놓았다.

“아…… 사교계에 아주 발 끊는 것인가? 아, 아까 이야기한 것은 내가 반드시 지키겠네.”

황후가 문득 자신을 붙드는 것처럼 보여서 사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질투를 걷어 낸 지금 모습이 미디에나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일까.

어쨌든 지금 친한 영애나 부인들을 다 잃은 것도 아니고 굳이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를 찾지 못한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와야 하겠죠. 남편이 이그노트 공작님이시니.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사샤는 그저 약간의 가능성을 두는 것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지금 당장 저 황후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가 한 말마따나 남편이 이그노트 공작이고, 이 제국을 등지지 않는 이상 그녀에게도 사교계 활동이 필요할 테니 그 여지를 남겨 둔 것이었다.

모두 제멋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뿌린 나쁜 소문은 물론, 카일러를 난감하게 할 일을 차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친한 사이로서 자발적으로 해 주는 관계였다면 마음도 편했을 텐데.

그래도 다행히 황제와의 관계마저 어그러지지 않고 잘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황후전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딜런은 사샤가 나오자마자 바로 그녀를 살폈다. 어디 상한 데 없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에 쿡 웃음소리를 냈다.

“별일 없었으니 걱정 말아요. 그러게 이런 고급 인력이 안 와도 된다니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사샤가 마차에 오르고 딜런이 함께 따랐다. 사샤는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

저택으로 돌아온 그녀를 반기는 것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진 카일러였다. 그는 자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샤는 심각한 그에게로 살금살금 다가가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의 볼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냥 헛, 하고 놀랄 것이라 생각한 사샤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에게 입술을 삐죽이려던 찰나 몸이 낚아채여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꺗!”

카일러는 그녀의 몸을 끌어다 가신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놀랐지만 그가 당기는 대로 둔 사샤의 몸이 가볍게 그의 위로 올라탔다.

“뭐 하는 거예요, 놀랐잖아요!”

“사샤도 날 놀라게 하려 한 거 아니었나.”

물론 그렇긴 했습니다만.

바로 꼬리 내린 사샤가 그의 목을 감싸 끌어안았다. 단단하고도 따뜻한 몸의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황제 폐하가 먼저 와 가지고는…… 사과했다는 둥 반성했다는 둥 했어요.”

사샤는 별다른 얘기도 없이 황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일러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다가 슬쩍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폐하가 왜 말하러 오시냐고 쫓아내고, 황후가 들어왔어요. 제가 찾아왔다고 제가 말하길 기다리는 건지 물으니까 그제야 또 폐하와 카일러한테 사과한 얘길 꺼내더라고요. 우씨, 저 목숨 위험했던 일이었는데, 제 목숨이 자기감정 정리한 것보다 아무렇지 않은 일인가요?”

조곤조곤 보고를 하는 듯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투정처럼 변해 갔다. 하지만 그게 떼를 쓰거나 귀찮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공작부인으로서 요구할 것도, 봐 달라 할 것도 많았을 텐데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오롯한 공작부인이 되기 위해 혼자 따로 공부를 하고 있던 기특한 모습을 봤는데,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을 귀찮아해선 절대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누구보다 그대의 목숨이 중요하다.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야. 너무 큰일이었기 때문에…… 더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응. 알겠어요. 카일러는 믿으니까.”

꼭 끌어안는 대로 딸려오는 그의 몸이 너무 좋았다.

자,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이 났고, 이제 그의 고민을 들어야 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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