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다음 날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사샤는 카일러의 품에서 눈을 떴고, 카일러는 사샤에게 입을 맞추며 아침을 맞았다.
“사샤 님, 앞으로 이베른 후작가의 사람들이 오면 누구든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식사를 다 마쳐 갈 때쯤 파반을 위시하여 로제까지 두 사람이 식당 입구에 나타나 머리를 숙였다. 주인이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처리를 하실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해 놓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리라.
“옳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도록.”
그 대답은 카일러가 꺼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짝 사샤에게 눈길을 보냈다. 카일러가 그들의 온전한 주인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사이에 자신 또한 그에 준하는 그들의 주인,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씨익 웃어 주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기가 섞인 미소에 파반도 로제도 약간 안심을 하는 기색을 보이며 물러났다.
“뭔가…… 되돌려 주지 않아도 되겠는가.”
카일러는 음식을 다 먹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샤는 디저트를 열심히 해치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베른은 그렇다 치고, 황후까지 그게 돼요?”
괘씸한 마음에 존칭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런 거 챙겨 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말이다.
“그대가 원하면 뭐든지 해 줄 수 있다. 이건 정도가 넘었어. 안 되는 일도 되도록 만들어 주겠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사샤는 부드럽게 웃었다. 식탁에서 일어나자 그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평소에 잘 가지 않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샤의 방에서 보이는 후원이 아니라 저택의 서쪽으로 가면 공작저의 기사단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시원하게 펼쳐진 연무장이라든지 기사들의 숙소와 마구간 등등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안 가 본 것은 아니었으나 별로 익숙하지는 않았던 그런 곳이었다.
“이곳은 왜…….”
카일러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사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일러는 마물들의 일을 얼른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내일모레 그때 카일러도 봤던 마물과 우할린 숲에서 보기로 했어요. 진행 어떻게 되는지. 대략적이나마 전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지?”
카일러는 예리하게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살짝 뜨끔한 사샤가 헤헤 웃으면서 그의 손을 문질러 댔다.
“이거 준비하고 있어요. 궁에 가서 황후를 좀 만나려고요.”
황후라는 말이 나오자 카일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자신이 알아듣게 잘 말하고 오기도 했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자신이 사샤에게 한 일을 이실직고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직 그날 이후의 미디에나가 어떤지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나가다 봐도 보내기 싫어하는 표정인지라 사샤는 즐겁게 웃으면서 손을 더 꽉꽉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설마 황궁 안에서 뭔 짓 하겠어요? 누가 봐도 아, 황후가 질투에 눈이 멀어 해치워 버렸네, 하고 생각할 텐데요?”
그녀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만약 궁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황제에게라도 이제 반기를 들 마음을 잡고 있었다.
이제껏 참아 왔던 것을 그도 알고 있고, 사실은 미디에나를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좋은 황제와 황후의 사이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 하는 리디안의 마음을 위해 이제껏 묵묵히 참아 왔었던 거니까.
리디안 또한 그가 참아 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상은 용납이 되질 않았다.
“기사를 하나 붙여 주겠다.”
“그건 좋아요.”
사샤야 아무도 없이 혼자 다녀오는 게 마음이 편했지만, 여기 사람들이 질투와 은폐를 위해 어디까지 하는지를 알고 났더니 그냥 맘 편히 있기에는 부족하겠다 싶었다.
카일러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를 대신해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딜런이었다.
“아니, 핵심 인물을 보내면 어떡해요? 빨리 들어가고 다른 기사분으로 붙여 줘요!”
“황궁에서 어느 정도 사샤 님을 보호하려면 웬만한 급으로는 안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명령을 받고 온 이를 무턱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사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
황후궁으로 발을 들이면서 사샤는 응접실로 바로 안내되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해를 해 달라 하며 깍듯이 말하는 시녀장이 나가고, 사샤는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가구나 장식에 부딪혀 반짝이는 걸 보고 있자니 잠이 솔솔 올 것 같았다.
이야기는 잘 되고 있을까, 방법은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졸졸졸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카일러가 만들어 준 뒷마당 시냇물도 이제 완성됐을 텐데 가 보지 못했다. 나중에 좀 편하게, 카일러와 함께 즐길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라 다행이군.”
그때 사샤의 생각을 확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눈앞에 싱글싱글 웃고 있는 황제, 리디안이 있었다.
사샤는 오히려 그를 보고 얼굴의 미소가 싹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를 만나러 온 사샤를, 황후보다 먼저 찾아온 황제.
그가 무엇을 바라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났을지 듣지 않아도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제가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라, 황후 폐하께 죄를 묻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절로 말이 삐딱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카일러에게 황제가 각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 아주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황제는 대번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섭기 그지없다는 황제, 카일러마저도 일단 한수 접고 들어가는 황제였기 때문에 사샤에게 그 미소가 한 번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쏘아 대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오신 이유, 무엇입니까?”
사샤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차분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서 있는 채로 그렇게 묻자 황제는 상석에 자리를 잡더니 자리를 권했다. 사샤가 느리게 소파에 다시 앉자 그가 지체 없이 말을 꺼냈다.
“그대가 황후의 탓으로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전해 들었다.”
“예, 그랬죠.”
리디안이 말을 머뭇거리는 틈도 주지 않고 툭 대꾸가 나가 버렸다. 평온하게 말을 꺼내려 하던 리디안도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샤는 다음 말은 삼키고 리디안이 꺼낼 말부터 기다렸다.
“그 말을…… 황후가 직접 내게 했다.”
사샤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눈빛이 된 것도 모르고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리디안은 슬쩍 마른침을 삼켰다.
“그…… 황후가 반성을 하는 의미로 내게 말을 꺼냈던 것이다. 그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내게 맹세했다.”
사샤는 그 부분에서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세상 똑똑하고 그만큼 무서운 황제 폐하라 하더니 다 뻥이었네.”
“뻐…… 뭐라고?”
처음 듣는 단어에 반응하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니!
“황후께서 사과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걸 뭐, 누구한테 했다고요? 그리고, 그걸 얘기하려고 지금 제가 카일러도 저택에 놓고 혼자 왔는데, 그 사이에 왜 폐하께서 끼어드시는 거예요?”
호칭만 제대로 썼다 뿐이지 훈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말에 리디안은 어리둥절해졌다.
한껏 노려보는 그녀를 마주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던 황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그대에게 사과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건 얘기가 다 끝나면 하세요. 우리 둘이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제가 도저히 안 되겠어요! 하면서 황후 폐하를 용서할 수 없다 하고 나올 때 그때 멋있게 나타나셔야 하지 않나요?”
리디안은 확실히 그녀가 자신을 훈계하고 있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일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만큼 마음이 급해졌던 것이다. 이 일이 제대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면 황후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사샤가 직접, 그것도 카일러 없이 혼자 찾아왔다는 소식에 큰일이 났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황후궁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대 말이 옳다.”
“하…… 그런데도 그렇게…… 황후 폐하가 좋으세요?”
그리고 그녀의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걸 그대가…… 어떻게…….”
이 마음은 제대로 말로 표현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아마 오래 곁에서 지켜봐 온 카일러나 알 수 있을까 말까 했던 그걸 몇 번 마주해 보지도 못한 이 여인이 어떻게 안 것일까…….
당황하는 리디안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자신도 카일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의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그런 남의 감정 따위 눈치도 못 챘을 터였다.
카일러를 끔찍이도 생각한다는 리디안이 왜 저렇게까지 황후를 챙기는 걸까, 하고 궁금증을 가진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가 하고 있는 거니까 남도 잘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마음까지는 나무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하는 걸 지지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제야 사샤의 얼굴이 풀어졌다. 의심도 악감정도 전부 풀고 그를 바라보자 리디안도 긴장하고 있던 걸 풀고 머쓱함을 비운 채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