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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110화 (110/128)

110화

“아마…… 제가 마물에게 공격당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됐던 거 아닐까 싶어요.”

누구에게도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다락방에 방치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가문과 상관없이 살겠다고 나온 그녀를 왜 굳이 이렇게까지…….

“아무리 황후의 사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그의 부모님은 자신을 지키려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무리 감정을 묻어 두고 사는 카일러라고 해도 그 부분에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화만 나는 상황이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 그의 미간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사샤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그의 짙은 눈썹을 슥슥 문질러 주었다.

결을 따라 구겨진 미간도 펴 주며 사샤가 슬슬 미소를 지었다.

정작 그녀는 그들에 대한 배신감이 큰 건 아니었다. 내 아빠도, 내 동생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샤에 대한 연민은 조금 들었지만 배신감이 큰 건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나를 따라 나설 수 있었지 않을까. 진짜 사샤였으면 그 어설픔에 화를 내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엘리나를 이 집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정보를 얻을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베른 후작이 내게 알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해 준다고 했으니까요.”

“그냥 순순히 알려 주고 끝날 것 같았으면 직접 왔을 것이다.”

“음, 그래서 대화는 하고 마물을 만나게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물에 대해선 큰 걱정 없었고.”

그녀가 만지는 대로 미간에 주었던 힘을 푼 카일러는 대신 그녀의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커다란 손이 작은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서 사샤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서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간 숲에서 진짜 마물을 만났다는 거예요. 엘리나는 겁이 났는지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순간 카일러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사샤는 보란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화를 내려던 카일러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심호흡을 하면서 입 다물고 사샤를 바라봐 주었다.

“마물과 독대했을 때에도…… 그들이 덤비지 않았는가.”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마물은 일단 사람을 마주치면 공격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그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우선 공격을 날릴 준비부터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하죠? 마물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던 거. 이번에도 그랬어요. 좀 작은 마물이었는데, 제 말을 알아듣더라고요. 심지어…… 산맥을 가리키더니 저를 등에 태우고…… 날아올랐어요.”

카일러의 입장에선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포악한 생물이자 통제가 안 되어 죽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일 뿐이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그들도 언어를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계속…… 얘기해도 돼요?”

카일러의 얼굴 근육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사샤는 계속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미묘한 눈빛의 변화를 알 수가 있었다.

“괜찮다. 그대가 나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 믿는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보니 오는 충격일 뿐…….”

카일러는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처음엔 딱딱하고 냉랭하기만 했던 목소리가 이젠 온기를 머금고 있다는 것이 사샤에겐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식해 왔던 마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새롭게 알아 가는 것이니까.

“산맥 위를 날아서 산등성이 위로 착지를 했는데, 거기서 우두머리쯤 되는 마물을 만났어요. 딱 봐도 성체인 것 같았고.”

“그럼…… 거기서는 마물들과 말이 통했나?”

카일러는 이제 백지 상태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까지도 말이 통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저를 또 이끌고 어딘가로 가더라고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너무너무 크고 멋있는 폭포가 나온 거예요.”

“폭포……? 아그랑 폭포……인 모양이군.”

“아, 여기서도 알고 있네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너무 멋있었어요.”

“산맥에서 제일 큰 폭포다. 접근하기가 어려워서 아름다운 줄 알아도 웬만해선 보러 가지 못하는 곳이지.”

“아아, 카일러랑 꼭 보러 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렵겠네요.”

사샤는 눈썹을 휘며 웃어 보였다. 그제야 카일러도 미미하게 입술을 휘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거기 가니까 말이 통하는 거예요.”

사샤는 그렇게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쭉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던 카일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책상이나 테이블도 아니고, 침대 위에 마주 앉아 이런 심각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지만 사샤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 달라고 한 것인가.”

카일러가 그렇게 말할 때 사샤는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신나 하던 어린 마물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성체들 쪽은 분위기가 그렇게 밝지는 않았던 게 생각이 난 것이다. 우두머리 마물이 아들에게 매우 살갑게 대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아들의 기쁨에 동조를 해 줄 법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있죠, 카일러. 입구를 막아 달라고 한 거 같아요. 그냥, 막아 달라고 했어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보니까 먹먹한 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그냥…… 자기네들 보내 달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입구를 막아 달라는 것은…… 여기서 그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악순환을 끊어 달라는 것이었어.

카일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자신이 알아챈 것을 알아준 것 같았다.

그리고 카일러는 거기에서 약간 갈등을 하고 있던 마음의 갈피를 딱 잡은 것처럼 보였다.

부모를 잃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오랫동안 그렇게 귀를 괴롭히고 사투를 벌여 온 마물이라면 이런 설명 듣기도 싫었을 텐데,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심지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까지 하는 그가 정말 멋있게 보였다.

“마물 토벌을 바랐는데,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알아낸 사람이 없어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는 부탁인 셈이지.”

카일러는 덤덤하게 인간의 입장에서 일을 정리했다. 그가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기사단을 움직이고, 황제의 허락까지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모두 그처럼 이해를 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일이 될 것이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일이 복잡해질 뿐이다. 정보 공유는 필요한 만큼만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순히 닫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군.”

“카일러…….”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해져서 사샤는 감동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사실 보고 온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전달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생각해 주는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거기 폭포수가 쏟아지는 물 아래쪽에 그 입구가 있나 봐요. 그래서 거기로 뛰어드는 마물도 있었다던데, 성공한 마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물에 삼켜져 실패했다고 했어요.”

대충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양새였다. 카일러는 눈을 감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그랑 폭포와 그녀의 설명을 떠올렸다.

자신이 보러 갔을 때에도 분명 그 입구가 존재하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니 인간들이 수백 년 동안 발견하지도 못하고 마물들 또한 제대로 들어가지 못해 인간들의 세계에 갇혀 죽어 갔을 것이다.

“방법…… 있을까요?”

그가 이미 고민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진지한 회의를 하듯이 침대 위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생각나는 것은 있지만 잘 될지 모르겠군. 아무튼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많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야.”

“오, 마법사의 힘을 빌리나요? 마법사도 있나요?”

사샤는 흥분해 말을 꺼냈다가 아차 했다. 너무 이세계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나는 말이었다. 슬쩍 눈치를 봤지만 카일러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꼬집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통제도 어려워. 그들이 마물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군. 아무 일도 안 할 수도 있지만.”

마법사라는 존재가 굉장히 음흉하다는 것을 그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마물을 싫어하나요?”

“그렇다기보다는…… 귀찮아하는 일이 많아서 우선 동원이 되어 줄지 알 수가 없고, 황제의 명으로 억지로 가게 했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겠다고 무슨 꿍꿍이를 가져올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말은 매우 적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오만 가지 경우의 수가 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질문을 툭 누르면 대답이 마치 미리 조사해 뒀던 것처럼 대답이 나왔다.

“내가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분명.”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당부했다. 위험하다고 놓고 갈까 봐. 내가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와 함께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들이 정말 제대로 돌아갈 수 있기를, 다른 마물들 또한 다신 이런 걸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걱정하지 마라. 그대를 내가 지키면 되니까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해도 좋아.”

카일러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위험하다며 막아서는 것보다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훨씬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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