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샤는 약간 불안한 마음을 호흡과 함께 가다듬었다. 그가 날 뿌리치면 어떡하지, 이유를 물으려 하지도 않고 날 두고 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카일러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의 가장 오래되고 깊은 상처를 준 마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상처가 됐을까 봐, 그래서…… 나도 보이지 않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조심히 그를 붙들고 있던 팔을 놓고 그의 맞은편에 똑바로 섰다.
그는 칼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똑바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것은 우선 혼돈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녀에 대한 원망이 깃들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게 저만 느끼는 것인지, 제 바람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일러, 괜찮아요?”
사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에게 설명해 줘야 할 것이 한가득이었다. 지금 이렇게 서로에 대해 속상해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샤가 그렇게 물어보자 카일러의 굳어 있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대신 그 눈에 떠오른 건 의문 가득한 눈빛이었다.
“괜찮냐 물어야 하는 것은 나다. 내가 우할린 숲에 가자고 해도 밀어내야 할 텐데, 어떻게 여기를…… 게다가 급히 찾으러 왔더니 마물과 함께 있고.”
카일러는 미디에나의 충고를 듣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바로 말을 타고 우할린 숲으로 달렸다. 누가 꼬드겼고, 어떻게 왔고 하는 정보도 하나도 없던 탓에 그와 함께 왔던 입구부터, 정자를 지나 점점 더 숲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입구에도, 정자에도 없어서 내가 얼마나…….”
“아.”
사샤가 외출을 하면 마물이 내려온다. 심지어 산맥 쪽에서 내려올 텐데 바깥쪽에 보이지 않는 그녀를 찾으러 깊이 들어오면서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게 되었다.
“이베른 후작이 마치 제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전달하라고 해서요……. 절 안내하는 것도 엘리나뿐이었으니까 따라와 봤어요. 마물을 내세워 봐야 저는 다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니까요.”
이 설명을 들으면 화내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제게 하든 이베른의 두 부녀에게 하든 화를 버럭 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또 빗나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두 눈이 푸르게 불타올랐다.
“황후가…… 사주한 모양이군.”
이베른이 자체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고, 그들이 나선 일이었다면 황후가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 질투를 이렇게 내세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샤 또한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고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말아라. 그 황후가 알려 줘서 오는 길이야. 다시는 이런…… 어이없는 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카일러의 말에 사샤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 장담한다면 그런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 그리고 이베른 후작이 게라넬의 수장이라는데, 정말이에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그도 알고 있었구나.
왜 제게 말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속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카일러의 얼굴이 또 살짝 시무룩하게 힘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샤는 성큼 그에게 다가가서 단단한 팔을 끌어안듯 붙잡았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요. 할 얘기가 엄청 많아요.”
그의 팔을 잡아끌며 사샤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 그렇게 말했다. 애교를 부리려고 한 건 아닌데, 뱉어 놓고 보니 약간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려니 그녀의 곁으로 성큼 다가온 그가 어깨를 감싸 안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신경 쓰이고 걱정했던 것들을 확 날려 주는 그의 온기와 다정함에 살짝 눈시울이 시큰해질 것 같았다.
엘리나와 함께 들어왔던 그 길을 따라 나와 우선 숲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할 이야기가 많은 사샤는 마음이 급했지만 카일러는 그녀가 빠르게 걷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할 얘기 많다니까아…….”
그 속도에 사샤가 불만을 토로하자 카일러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윽, 뭐지…… 서두르는 게 맘에 안 드는 것인가.
식은땀이 삐질 날 정도로 긴장을 하면서 그를 보려고 하자 갑자기 그가 몸을 숙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 뭐, 뭐 해요! 사람들이 봐요!”
카일러는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는데, 사샤는 꺅꺅거리고 발버둥을 치며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가 본들 뭐라 하겠나. 우리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을까.”
그에게서 나올 줄 몰랐던 말에 사샤는 몸부림치는 것은 멈추고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지는 게 느껴져서였다.
“사샤 님!”
집으로 돌아오자 현관에서 고용인들이 전부 다 우르르 몰려나왔다. 어린 하녀들은 얼굴에 운 흔적이 가득이었고 평소 흔들림 없이 본인이 맡은 일을 해내던 로제와 파반마저 사샤를 발견하자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어, 어…… 다, 다녀왔어.”
사샤는 카일러의 품에 아직도 안겨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얼떨떨하게 인사를 건넸다.
카일러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녀를 내려놓아 주자 어린 하녀들이 우르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사샤 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어머! 손이! 물집 잡혔잖아요! 아프지 않으세요?”
그녀를 둘러싼 아이들이 몸을 살피는 데에 정신없자 사샤는 그녀들을 어르고 달래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는 말을 한 28번 정도 하고 나서야 그녀들이 물러나고 로제와 눈이 마주쳤다.
“로제, 다녀왔어. 목욕물 좀 부탁할게.”
“……예, 사샤 님.”
로제의 목소리가 좀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 아닐 듯했다.
카일러와 사샤는 그렇게 눈물 젖은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은 로제가 준비해 준 뜨끈한 목욕물에 몸부터 담갔다.
처음 엘리나가 왔을 때부터, 그 집을 나서고 숲에 도착하고, 그녀를 보낸 후 마물을 만나 산맥을 타고 넘어 다녀올 때까지 오늘 하루 종일 정말 어마어마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매번 애써 태연한 척하고 괜찮은 척하며 지나쳤지만,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걱정하며 내내 기다렸을 사람들을 보니 긴장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피곤에 점령당해 버렸다.
그가 같이 씻겠다고 말을 꺼내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혼자 들어온 사샤는 욕조 안에 몸을 누인 채로 천장을 바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숲에서 마물을 떠나보내는 것을 본 카일러가 분명 뭔가 자신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저에 대한 걱정이 앞서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또 모를 일이다. 모든 걱정이 다 정리되고 난 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사샤.”
“꺅!”
목욕탕에 울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울렸다. 몽롱하던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그 목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한껏 기댔던 등을 떼었다.
“드, 드, 들어오시면 안 돼요!”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와 보았다. 욕조에서 잠들면 안 돼.”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해 주는 말이 왜…… 좀 귀엽게 느껴질까.
실제로 잠들기 직전까지 비몽사몽했던 사샤인지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고개를 끄덕, 한 카일러가 욕실을 나가고 사샤는 얼른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두 사람은 식사가 끝나자 그의 방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마치 떼어 놓고 싶지 않다는 듯이, 침대에 앉는 것을 택했다.
사샤는 자꾸 졸리려는 눈꺼풀을 문지르고 들었다. 꼭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토닥토닥. 그런데 이 남자가, 자신의 어깨와 쇄골 사이를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건 백퍼 꿈나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카일러, 잠시만요.!”
그는 토닥이는 소리를 멈추지 않고 그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도 오늘은 위험한 분위기보다는 가볍게 노려보는 느낌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꺼낸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꽤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같다는 것이었다.
안 놔줄 것처럼 꼭 끌어안고 있던 카일러는 그녀의 단호한 말에 팔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사샤는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그와 마주 않았다. 얇은 잠옷만 입은 그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지만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두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아까…… 우리 우할린 숲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 마물이랑 함께 있었어요.”
카일러는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는 듯이 잠깐이나마 고개를 끄덕이고 미간을 모았다.
“숲으로 데리고 간 건 엘리나가 맞아요. 그것도 아빠가 시켰다면서 다 털어놓고, 숲 앞에서 도망간 것까지도요. 적어도 이베른이 나와 줄 줄 알았던 거라서…… 숲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금 무서웠었어요.”
그녀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자 카일러도 그녀의 말에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이베른 후작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엘리나의 주장 자체가 확인이 안 되었어요. 그저 그들은 나를…… 산맥에 보내거나 산맥 근처에라도 내려놔서 처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에요.”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하는 그녀를 카일러는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도 아까 느꼈던 것이 있었다. 제가 짐작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어긋나 있다는 느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