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렇게 다른 세계로 와서 공작의 부인이 되어 놓고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게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연결자라니…… 게다가 저들이 어떻게 여기로 넘어오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으니 분명 카일러의 일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사샤의 그런 들뜬 마음을 알았는지 어린 마물이 엄마 품에서 나와 겅중겅중 뛰면서 사샤에게로 다가왔다.
「그럼 우리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거야? 이 인간이 해 주는 거야?」
“아…… 그건…….”
사샤는 어린 마물이 하는 말에 살짝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건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눈을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니 어른 마물들조차도 이제 답을 내놓으라는 듯한 얼굴이라 난감하게 되었다. 하하,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별다른 힘이 없어요. 마법을 쓸 수도 없고, 힘이 세거나 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이 입구를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으세요?”
앞장서 있는 마물과 그 오른쪽에서 설명을 덧붙이던 마물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용 같은 얼굴이라 표정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심각한 분위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돌아갈 방법은 모릅니다. 우린 그저…… 저 아래에 있을 구멍을 막아 달라고 하려 했어요.」
사샤는 휘둥그레진 두 눈이 어린 마물로 향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버텼다.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아이에게 자신의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돌아갈 방법…… 저 안으로 뛰어드는 것은…….”
「물론 시도한 이가 있었다만…… 많은 확률로 폭포에 휩쓸려 튕겨 나가 죽었다.」
거세게 안개를 이룰 만큼 퍼붓는 폭포수를 바라보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광활한 자연의 앞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까지, 그리고 그걸 해결해 줄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함.
어느 순간 사람을 위협하는 괴물이 생성되는 산맥이 되어 버린 이곳을 보며 인간들도 당황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만 마물들 또한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카일러에게 이야기하면, 분명히 답을 알아내 줄 것이다. 그는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채로 고군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는 와중에 제가 마물과 소통이 가능하단 걸 알고 얼마나 당황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간 겉도 속도 강철이나 얼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처럼 생겨선 어쩜 이렇게 제게만 감성적이고 멋있을까.
“걱정 말아요. 나는 못 하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라면 분명 해결해 줄 거예요.”
세상 누구보다 믿음직한 남자가 있으니까. 단순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제국을 수호하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럼 산맥을 다시 내려가야 하겠군요.」
마물의 우두머리가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했다. 이해력도 참 빨랐다. 어떻게 보면 미디에나나 엘리나보다 훨씬 지혜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잠시, 혼자서만 진지한 생각에 빠졌다. 제 발로 내려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어린 마물의 등 위에서 내려다본 산맥은 물론 황홀하게 아름다웠지만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또 태워 줄게! 내가 또 태워 줄래!」
어린 마물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는지, 아니면 사샤를 태우고 날아올랐던 게 기분 좋았던지 어린 마물은 어느새 사샤의 곁으로 다가와서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것은 내가 하겠다. 인적이 드물다곤 하나 우할린 숲은 인간이 드나드는 곳이야. 너, 아까 내려갔던 것도 혼날 줄 알아.」
허허, 아마 아까 만났던 것은 호기심에 숲으로까지 내려왔던 어린 마물을 우연히 마주쳤던 것인 모양이었다. 주눅이 들어도 아쉬움을 채 못 버리는 어린 마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까 재밌었어. 고마워.”
그녀의 말에 또 금세 화색이 되어선 좋아라 방방 뛰는 마물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자, 그럼 이제 서둘러 내려가고…… 우할린 숲까지밖에 못 가는데, 괜찮겠습니까.」
“거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가야죠.”
내려간다고 끝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어차피 날 산맥으로 보낸 이들은 내 죽음을 확신하고 있으리라. 바깥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면…… 그건 큰일이긴 한데.
폭포의 옅은 물보라를 맞으며 마물에게로 다가갔다. 우두머리의 옆에 있는 마물은 덩치가 가장 컸다. 그가 자신을 태우기 위해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며 손을 뻗었다.
아까 탔던 것보다 훨씬 거칠고 단단한 반면 등이 매우 넓어서 안정적이었다.
「잡을 데가 마땅치 않다면 비행할 때 조심하겠다.」
“음…… 급하게 방향 전환하거나 너무 빨리 나는 거 아니면 괜찮을 거 같아요.”
태워다 준다는데 너무 따지는 것도 좀 그래서 사샤는 튀어나온 단단한 날개의 뼈를 두 손으로 꽈악 잡았다.
“꼭 방법을 찾아 돌아올게요. 우할린 숲으로 되도록 내려오지 말고 기다려 줘요.”
마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사샤가 다짐했다. 스스로에게도 꼭 이 약속을 지키자 다짐하면서.
마물을 또다시 순식간에 솟구쳐 올랐다. 한 번 더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속도였다. 몸이 짓눌리는 느낌에 비명조차 안 나오는 압박이었다.
산맥의 광활한 아름다움이 또 한 번 펼쳐졌다. 그리고 바로 아래로는 웅장한 폭포의 전경이 보였다.
카일러와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장 카일러가 보고 싶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여기서 모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빌었다. 저택을 떠난 걸 알고 잔뜩 걱정할 수 있으니까 이왕이면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갈 수 있도록…… 그와 함께할 수 있도록. 빌고 싶었다.
*
「……명확한 날짜를 기약할 수는 없겠지.」
“오오! 여기서도 말이 통하네요?
처음 어린 마물을 보았던 산맥과 숲의 경계 그 어두운 숲속에서 사샤는 자신을 태워다 준 어른 마물과 마주 보고 있었다. 바람에 휘말려 버린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마저 정리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아…… 그렇군. 한번 트이고 나면 계속 가능한 모양이군.」
“잘됐네요. 준비가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겠어요.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 거예요.”
사샤는 바쁜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흘 뒤에 이곳에 내려와 있겠다. 되든 안 되든 진행 상황을 알려 주러 와 줄 수 있겠는가.」
젠틀한 부탁의 말에 사샤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고 있는 외형이 아니라면 리디안의 외모에 아주 말쑥한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떠오를 것 같은 목소리와 말투였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집까지 바래다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렇게 진득한 세월 동안 싸워 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친절하게 대하는 그들을 보며 사샤는 더더욱 이들에게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목숨 걸라고 하는 일인걸요. 우리 집은 그 카일러의 집이니까.”
「그래, 그래서 난 이만 가 보……!」
쿠콰콰쾅!
그때였다.
젠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던 마물의 눈동자에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스치고 그가 폭발적인 다리 힘으로 땅을 박차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로 엄청난 힘이 날아와 땅을 가르고 지나갔다.
“꺅! 뭐야!”
사샤를 피해 정확히 마물을 노린 움직임이었지만 사샤 또한 그 바람으로 인해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마물 씨, 괜찮아요?!”
펄럭!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저 위에서 마물의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온 기척이 사샤를 뒤에서부터 덮쳤다.
“거기 서라, 마물!”
위를 향해 소리 지르며 사샤의 배를 감싸 보호하는 이는 바로 카일러였다. 엄청나게 들썩이는 가슴이 전하는 다급한 호흡과 분노가 이는 목소리에 사샤는 그에게 안긴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것 같았다.
그가 손에 든 검을 휘두르려는 게 보였다. 마물은 그녀가 걱정이 되었는지 어쩐 것인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돼! 멈춰요!”
하지만 카일러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팔에 단단히 갇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렇게 살기가 넘실대는 기운으로 검을 휘두르진 않았을 것이다.
공중에서 날아가 버리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급했던 도약 때문인지 제대로 날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마물 때문에 사샤는 더 마음이 급해져 버리고 말았다.
“카일러!”
“죽어라!”
사샤는 자신을 감싼 팔을 내려치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손에서 힘이 빠지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뿌리쳤다. 그리고 땅을 쓸어 위쪽을 향해 휘둘러지려는 검을 쥔 그의 팔에 매달렸다.
미끄러지면 나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내 몸무게마저 이길 힘으로 휘두른다면 매달린 이유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샤는 최선을 다해 이 공격을 막아야 했다.
이 남자는 뭐 이렇게 강해 가지고……!
“카일러어!”
그도 이미 쓰고 있던 힘이었기에 전부 순식간에 거둬들이진 못했지만 그녀가 막는 바람에 그 힘은 마물에게 닿지 못한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숲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갔다.
엄청난 힘이 남긴 자국을 보여 사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대로 맞았다면 저 마물이 성체고 단단하다 하더라도 온전히 못했으리라.
막는 사샤도, 공격을 막힌 카일러도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마물은 땅을 다시 한번 박차고 날아올랐다. 제대로 돋움한 마물은 사샤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빠르게 날아 산맥 쪽으로 사라졌다.
땅 위에는 카일러의 팔을 붙든 채 쓰러질 듯 숨을 몰아쉬는 사샤와,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 카일러만이 남았다.
소란스러웠던 숲은 순식간에 음습하고 고요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