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제가 타고 온 마물보다 훨씬 큰 개체는 지난번 우할린 숲에서 보았던 대로 기괴한 날개의 모양과 위협적인 크기였다. 턱, 턱, 하는 발소리를 내며 저 앞에 나타난 마물들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키익-!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개체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온몸 위로 소름이 내달리는 것 같았지만 마른침을 삼키며 공포를 누르고 그 자리를 지켰다.
키익, 키-!
키이이이-!
그러자 저 앞의 선두와 사샤를 이곳까지 데려와 준 어린 개체가 대화를 하듯 서로 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저 선두는 어린 마물과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사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익!
갑자기 크게 나오는 소리에 선두에 선 마물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정면으로 마주쳐 오는 날카로운 눈동자와 소리에 흠칫했던 사샤는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 마물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자, 그것은 휙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냥…… 이게 끝인 건가? 그냥 마주치고 끝?
선두에 서 있던 마물이 뒤돌아 걷기 시작해자 다른 이들도 천천히 뒤를 돌았다.
곳곳에 눈의 흔적이 남은 산 능성에서 신비한 존재와 마주친 이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신비하고 신기한 느낌이 더 강했다. 공포는 사실 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혹여나 그들이 갑작스럽게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이 분위기를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이-!
그런데 그때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어린 개체가 사샤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붕붕 움직이며 말을 하는데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고만 있자, 어린 마물은 사샤의 뒤로 와서 등을 주둥이로 툭툭 밀어주기 시작했다.
“응? 가라고? ……저 마물들을 따라가라고?”
키익!
자신의 뜻을 알아준 것이 기쁜지 어린 마물이 머리를 거세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풉 하고 작은 웃음소리를 낸 사샤는 평온하게 발을 옮겨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마물 일행의 뒤를 따랐다. 이미 산맥에까지 올라온 마당에 뭘 더 무서워할까.
산길이라 치마가 좀 거추장스러웠지만 생각보다는 걸을 만했다. 그러고 보니 저 앞에서 마물들이 걸어가며 튀어나온 가지는 부러뜨려 밟아 주고 큰 돌들은 굴려 가며 치워 주고 있었다.
“혹시 네 엄마, 아빠니?”
어린 마물에게 물어보자 마물이 끄덕거리면서 킥킥-톤 높은 소리를 내었다. 가족을 알아봐 준 게 좋은 걸까, 아니면 부모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 막 이런 거려나.
아무튼 그런 마물의 움직임에 즐겁게 정돈된 길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있었다. 말소리 같은 게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일까, 아니면 어느 산의 봉우리에서 돌이라도 굴러 떨어지는 것일까.
끝도 없이 웅장하게 울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등선임에도 넓게 퍼져 있던 길이 살짝 아래로 이어진다 싶은 그 순간, 계속해서 귀를 울리고 있던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우와……!”
수백 수천 마리의 말들이 한꺼번에 달리는 듯했던 소리는 바로 폭포였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산등성을 타고 있던 터라 폭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물이 쏟아지는 쪽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었다.
마물들은 턱턱 걷다가 겅중겅중 뛰어 가며 그 길을 오르다 중간 어느 지점에 멈추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폭포의 장관에 정신이 팔려 거의 걷지 않고 있던 사샤는 어린 마물이 날개로 팔을 툭 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남은 길을 걸었다.
「엄마! 저 다 왔어요!」
그때였다. 갑자기 어린 목소리 하나가 폭포수의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사람 목소리에, 심지어 이런 산맥에서 듣는 어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던 사샤는 주변일 훑어보다가 바로 알아차려 버렸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부모에게로 겅중겅중 뛰어가는 어린 마물에게 닿았다.
설마…….
「뛰지 말고! 여기는 발 잘못 디디면 큰일 난다.」
거기에 이어서 저 앞에서 어른의 목소리까지 나오자 사샤는 두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넋이 나가 버렸다.
와, 와아……!
사샤는 넋이 나가 있던 것도 얼른 차리고 발을 급히 옮겼다.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발밑의 돌부리에 조심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평소에 도서관도 좋지만 꾸준히 운동을 좀 해 놓을걸. 발걸음이 조금 더 급해지자 종아리가 바로 뻐근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물이 떨어지는 폭포수가 한눈에 보기 버거워질 즈음에 멈춰 서서 마물들 앞에 섰다. 그들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묵묵히 기다리다가 시선을 폭포 쪽으로 돌렸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넘어오게 되는 길목입니다. 이 폭포 아래서 이계의 마물들이 이쪽 세계로 강제로 이동이 되고 있어요.」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은 꽤 우아한 목소리를 내는 여자였다. 아마 저 어린 마물의 엄마인 듯, 작은 몸을 그녀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서 서 있었다.
“강제 이동……이요?”
이들을 없애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겠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사샤도 고개를 쬐금 돌려 폭포 아래쪽을 넘어다보았다. 차마 몸까지 기울여 보기엔 좀 많이 무서워서 힐끔 보는 게 다였지만.
「우리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알면 알아서 닫았겠지만……. 그렇게 넘어오면 이곳에 있는 인간의 집단이 우리를 통제하려 든다. 그들이 쓰는 것은 좀 오래된 마법인데, 우리에겐 고문이나 마찬가지지.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들이 인간들과 부딪치는 일을 만들고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게라넬……을 말하는 거겠구나. 다루는 방법이라고 해서 그저 말을 길들이거나 개를 기르는 정도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사샤는 마물의 설명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게라넬이겠구나…….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을 줄은 몰랐어. 못된 곳이었구나.”
「전해 듣기로, 게라넬의 지금 우두머리가 그대의 아버지라고 하더라.」
그 옆에 있던 다른 마물이 말을 덧붙였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요?
「그대가 태어나고, 모두들 그대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하여 그대가 움직일 수 있게 될 무렵부터 그 집단의 손아귀를 피해 그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으러 다녔는데, 그 수장의 집에 있는 그대를 발견했다.」
「멋도 모르고 그 저택으로 뛰어들었다가 그대를 해칠 뻔했던 마물이 있다 들었어. 그자는 우리 선에서 폭포 아래로 던져졌지만 그 뒤로 그대를 감지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아마…… 그 아빠가…… 저를 다락방에 가뒀기 때문 아닐까요.”
정확한 시기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사샤는 그 집을 탈출해서 카일러의 집에 와서야 이 몸을 차지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빠라는 사람이, 마물이 찾아온다는 이유로 딸을 다락방에 가두고 완벽하게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빠라는 존재 자체가 어색하기는 해도, 부모라는 걸 꿈꿔 본 적 없긴 해도…… 이런 식으로 무너지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베른은 사샤에게서 그런 작은 환상마저도 앗아 가 버렸다. 사샤의 마음도 그녀는 잘 모르지만…… 이보다 백배 천배는 찢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있을 때, 그 느낌을 받았어. 그게 뭐냐면, 우리를 인도해 줄 인간. 우리와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교류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부딪히면 싸워야 하고,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났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그대는 지금 이렇게 우리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아…… 와. 내가 마물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내가 마물인가, 사샤가 원래 마물이었던 것인가 고뇌하고 걱정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런 해답이 있을 줄…… 아니, 잠깐만.
“저…… 이건 여기 사람들은 모르는 건데……. 나는 지금 육체는 예전에 당신들이 만나려고 했던 그 게라넬의 딸이 맞는데요, 지금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 이 몸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카일러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그들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들이 찾는 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과 말이 통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가 맞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사샤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이 연결자에 대해서는 깊게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말했던 대로 세계를 비틀고 다른 세계로 들어온 혼이라 감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태어날 때 그대의 혼이 다른 세계로 튕겼던 것이 아닐까. 다 자란 후에 어떤 이유를 계기로 이 몸으로 돌아온 거라고.」
「그렇지. 그래서 그때, 게라넬 수장의 방해로 그대를 만나지 못했지만 아마 만났어도 대화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리기도 했으니까.」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으로 왔어야 하는 영혼이라는 것인데…….
“내가 그래서…… 부모님이 없었던 건가.”
이전 삶에서 그녀가 얼마나 외롭게 지냈는지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거기서 태어나야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곁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쓸쓸한 목소리는 폭포의 우렁찬 외침에 삼켜져 쏟아 내리는 물과 함께 저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귀가 좋은 마물들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없는 대로 살아도 좋을 것 같군.」
마물과 인간의 도덕관념이 같지 않을 수야 있지만 적어도 모성애와 부성애 같은 것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의외의 발견에 사샤가 씁쓸함을 딛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