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가 함부로 마음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논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사샤, 그녀 덕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간은 항상 외면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했던 폐하의 마음에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카일러는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이런 그를 막아 왔던 게 자신의 감정이고, 지금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눈엣가시 같은 그 여자라니…….
“그래서…… 리디안의 마음까지 제가 대신 입에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든 다른 하나의 이름…… 리디안. 카일러는 심지어 그를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아닌 친구로 이야기했다.
위치는 모두 내려놓고 오롯이 마음만을 전해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인…… 그런 것인가.
카일러는 눈앞의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모든 마음이 절절하고 진심일 리는 없지만, 반대로 그 많은 마음 중에 진짜 진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절절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면서 심장의 울림조차 평온한 마음을…… 억지로 흔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닿을지도 알면서, 그것이 제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두 눈으로 확인도 했으면서, 그저 자신의 마음이 차단되는 상황을 원망하고, 제 눈길이 닿는 그녀를 질투하기에 바빴다.
적어도 지금은 안다. 그 마음이…… 오롯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걸 말해 주고 싶었다. 제게는 진심을 전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기 때문에. 그 사람 또한 제게 같은 마음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저를 좋게 봐 주셨던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립니다만, 거기까지 하셨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평생 모실 주군의 부인으로서, 황후라는 제 2의 주군으로서 저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지켰을 것입니다.”
카일러는 거기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의 감정 속에서만 허우적댄다면 그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리디안의 감정 또한 정말 어쩔 수 없이 꺼내기는 했지만 너무 과하게 전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만을 보는 그녀의 뒤에는 항상 리디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자기감정에 빠져 그마저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로가 절절한 짝사랑에 빠져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을…… 감정에 대해 무지하던 카일러마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알려 줘 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건 자신이 느껴야지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리디안은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몫을 그녀의 것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카일러는 허리를 숙였다. 단번에 모든 것이 좋게 바뀔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카일러…….”
하지만 그것이 너무 큰 바람이었던 것일까. 지나쳐 가려는 카일러를 그녀의 넋 나간 목소리가 다시 한번 붙잡았다.
정말 이제 더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카일러는 이대로 그냥 걸어가 버리려고 했지만 뒤에서 미디에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내용은…… 그의 발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사샤……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지금 산맥으로 갔다…….”
그녀가 꺼낸 뜬금없는 말에 카일러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카일러는 이를 꽉 물고는 바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큰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공격하는 마물을 고함으로 멈추게 한 이였다. 번개같이 달려 말 위에 올라타 딜런을 찾을 새도 없이 그대로 채찍질해 질주해 버리는 카일러는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랴! 이랴아!”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 일이 있을 때에도 크게 지르지 못했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일을 믿고 마음을 삭이기엔…… 너무 위험이 컸다.
사샤…… 잠시만…… 부디 기다려 줘, 나를……!
그가 탄 말은 발이 땅에 닿을 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
키이이익!
공중에서 포효하는 마물의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데도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으아, 이러다가 손가락 부러질 것 같아!
손에 있는 힘을 다 쥐어 놓고 사샤는 소리를 질렀다.
살려 줘! 제발! 날 떨어뜨리지 말아 줘!
사샤는 혼이 빠질 듯한 속도와 높이 거기다가 소리까지 터져 나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파란 하늘을 날고 있을 터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땅으로 귀환하기를 바라며 손에 더더욱 힘을 주고 눈도 질끈 감아 버렸다.
거의 수직으로 솟아오른 마물이 하늘을 활강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았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아래의 산맥은 위쪽으로 쭈욱 뻗어 올라가는 모양새가 그 어떤 것보다도 너무나 웅장하고 멋있었다.
꼭대기가 하얀 것을 보자 그 높이가 가늠이 되었다. 생전 볼 수 없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잠깐 그 높이와 제 몸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까지도 잊을 수 있었다.
키이이이-!
분명 처음 우할린 숲에서 들었던 마물의 울음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드넓은 창공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마치 자유를 누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자연 그 자체처럼 느껴져서 멋있게 느껴졌다.
꽉 잡고 있는 손등이 하얗게 불거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매달려 공포에 떨지 않고 날 수 있는 것이 너무 기분 좋았다.
“카일러도 같이 타면 좋을 텐데……!”
야호, 하고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은 후련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쁨이 지나가자 엄청난 불길함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불길함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마물은 아까 급상승해서 날아올랐듯이, 착륙도 거칠었다. 마치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듯이, 혹은 화살이 쏘아지듯이 쐐애액 하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아 왔었기 때문이다.
그 속도라면…… 땅에 곤두박질쳐지는 게 문제다 아니다. 아마 땅에 닿기 전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하는 마물의 등에서 홱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꺅! 마물! 어떡해? 어떻게 할 거야? 떨어질 거야? 응? 나, 나 날아가 버릴 거야……!”
마물이 살살 활강을 멈추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낌새가 보였다. 아니야, 안 돼…… 나 죽어, 안 돼……!
사샤는 빽 소리를 지르며 마물의 기다란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붙들고 있을 것은 마물의 목밖에 없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 목을 놓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땅에 처박히지 않게 해 주세요! 떨어지는 압력으로 터져 죽지 않게 해 주세요……!
슬슬 마물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사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온몸에 힘을 주어 매달렸다.
키이이이-!
간다……!
……어?
사샤는 온몸에 마비가 올 것처럼 힘을 주고 있다가 어느 순간 탁 풀려 버리는 게 느껴졌다. 주먹 쥔 손목을 꽉 쥐고 있다가 놓았을 때 짜르르 올라오는 전기처럼 온몸에서 짜르르한 느낌이 흘러 다녔다.
마물을 자신이 등에 태운 것이 하강을 버티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이마저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인지, 몸을 아래로 비스듬히 내린 각도 그대로 하강을 시작했다.
그 속도는 그저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올도 앞으로 쏠리지 않은 만큼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였다.
티브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을 봤었는데, 대략…… 이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짜릿한 기분에 사샤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그녀의 신난 소리를 알아챘는지 마물은 그 속도를 유지하며 순식간에 산맥의 능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처박히는 대신에 땅 위에서 갑자기 고개를 들어 능선을 타고 수평으로 비행하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사뿐하게 착지했다.
“우…… 우와! 너 정말 잘 난다! 우와!”
사샤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스릴을 만끽한 뒤에 내려와 마물부터 칭찬해 주었다. 정말 다시는 없을, 잊지 못할 감동적인 비행이었다.
이전 삶에서 비행기를 타 보았던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엄청난 비행을 선물해 준 덕에 출발 전까지만 해도 멀찍이 서서 대화하던 마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손길에 이 마물도 기뻐하고 있다고 느껴졌는데…… 정말일까?
왠지 함께 뭔가를 경험하고 느꼈다는 생각에 사샤는 이 마물이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키이이-!
그런데 그때였다. 두 존재가 꺅꺅거리면서 교감을 나누고 있던 그때 저 앞 봉우리 너머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이건 눈앞의 마물이 내는 어딘가 앳된 소리와는 전혀 다른 울음이었다. 마물의 목소리에도 차이가 있구나, 그런 것을 잠깐 느낀 뒤 그녀는 긴장감에 얼굴을 굳혔다.
드디어 온다, 마물이……!
지금 눈앞의 마물은 어려서 이렇게 친근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전에 제 말에 멈추었던 마물은, 자신에게 그렇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 봐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온갖 안 좋은 상상을 다 하면, 저 울음이 그녀에게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한 게 사샤는 방금 자신을 내려 준 마물의 날개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 뒤로 간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닐 텐데, 그 또한 마물인데 말이다.
하지만 마물은 진지하지 않고 그저 즐거워 보였다. 방금 그 울음소리가 자신의 엄마 아빠라도 되는 것일까. 그 마물이 약간 신난 목소리로 키이키이~ 울다가 사샤를 돌아보며 또 가볍게 키이, 하고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안심이 되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