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카일러는 소리 없이 그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의 인사를 받고도 응해 주기는커녕 바라보고만 있는 미디에나를 미련 없이 지나쳐 가 버리려고 했다.
“카일러!”
하지만 다급히 그를 부르는 미디에나의 목소리에 묵직하게 이어지던 카일러의 발이 붙들렸다. 뒤를 돌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카일러의 눈에는 아주 살짝 짜증이 일렁였다.
그를 항상 똑바로 바라봐 왔던 미디에나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를 부를 때의 반응이야 언제나 싸늘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적나라한 감정을 잠깐이나마 비쳤다는 것에서 미디에나의 가슴이 싸늘해져 버렸다.
“황후 폐하. 제가 지금 얼른 돌아가 봐야 하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마 보통의 황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매우 무례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를 이렇게 불러 세워서 그녀가 꺼낸 적은 거의 없었던 데다가 초반에 말을 걸었던 것이 매우 사적이며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싸늘해져 갔던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그녀를 거부하는 반응과 말을 꺼낸 것 또한 처음이라 미디에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큼, 지금 마물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고 하던데, 내가 최근에 그대를 괴롭히고 있는 마물에 대해 관심이 많아 알아보고 있는 중이어서. 괜찮다면, 그간의 진행 상황을 내게도 전해 줄 수 있을까?”
미디에나는 준비하고 있었던 듯 떨리는 목소리로도 말을 꺼냈다. 그리고 카일러는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하고 미간을 확 찌푸려 버렸다.
차갑기로 유명하고 흠모하여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영애들에게조차 표정 한 자락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카일러였다. 심지어 리디안의 앞에서도 그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사샤의 앞에서는 쉽게 미소를 지었고, 심지어 그 미소는 그동안 그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얼음을 깨부수고 녹일 만큼 따스하게 보였다.
“그동안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황후께서 데르마의 황후 폐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귀족들이 알게 될 정도로, 직접 말로 하지 않더라도 이 마음을 있는 힘껏 보여 오던 이 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그 또한 미디에나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자신은 한 번도 직접 꺼내 보이지 못했던 마음인데, 가장 처음 그에게서 듣는 반응이라는 게 철저한 거부에 심지어 처음 보는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이…… 지금껏 버텨 오던 미디에나의 벽마저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다.
“왜, 왜 나는 사랑도 하면 안 되는 거지? 심지어 내가 그대에게 바란 적이 있었나? 내가 직접…… 말이라도 꺼낸 적이 있었어?”
카일러는 순간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슬쩍 눈동자가 뒤로 돌아갔다. 알현실 안에 리디안이 아직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이었으나, 안에 있다면 들릴지도 모를 소리였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그 행동이 미디에나의 마음에 더 불을 당기고 말았다.
“보여 줄 수 있게라도 해 줘. 단 한 번만이라도! 아니면…… 그마저도 안 되면 그냥 지금처럼만…… 아니, 조금만 욕심 부리자면…… 내게도 웃는 표정을 보여 줘…….”
한 번도 감정을 폭발시킨 적이 없던 미디에나는 카일러의 짜증이 담긴 눈빛에 완전히 제어를 잃고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카일러의 얼굴이 더 굳어 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눈물이 가득 일렁이는 눈으로 카일러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누르고 누르며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지쳐 버렸다. 심지어 아예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던 때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항상 붙어 있을, 공식적으로 인정된 여자가 하나 생겨 버렸다. 심지어 그것이 그저 공적인 관계만으로 얽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어느 한 여자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 주고, 그렇게 싫어하는 마물을 해치우는 데에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카일러라니.
“왜 나는 안 돼!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고, 결혼도 하기 전에 이미 그대를 마음에 가득 품어 버렸는데……. 어째서 나는 내 맘대로 사랑도 할 수 없는 거냐고, 왜!”
그동안 쌓아 왔던 마음이 투둑, 끊어져 버리자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그간 아무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메딜란 공작저를 떠나는 것도 그녀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해진 일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수도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어 적응하고 흡수되어 나아가야 했었는데, 자신이 가진 마음에 던지는 돌팔매에 누구와도 마음 트고 친해질 수조차 없었다.
외롭고 외로이 가슴 깊이 묻었던 감정은 도려내지지도 못 했고, 외로운 미디에나가 황궁 생활을 지탱해 나가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다들 나를 한심한 년 취급하는 거 잘 알았어. 그래서 나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가 없었어. 그대가…… 그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날 이제까지 버티게 해 주었어.”
간절하고 간절한 그녀의 두 손이 주먹을 꼭 쥔 채로 떨리고 있었다. 가득 차올랐던 눈물은 이미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았다.
간절한 만큼 복잡했고, 스스로가 안타까운 만큼 울분 또한 같이 쌓여 갔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여쁘게 차려입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꺼내어 건네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입술을 깨무는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가슴이 북받쳐 올라 버린 미디에나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와중에도 카일러를 잡고 있는 눈동자를 떨어뜨리지 못했다.
제 간절함이 전해지기를…… 결국 그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지 그것조차 모르면서도 끝까지 그를 바라봐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간절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감정에 심취한 나머지 카일러의 상태를 살펴볼 겨를도 없던 미디에나는 울먹이며 쏟아 낸 자신의 마음에도 꾹 다물린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 줘. 고맙다고 말해 줘.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순 없어도…… 이 마음을 인정만이라도 해 줘…….
하지만 그의 입술은 여느 때와 같이 굳게 다물려 있기만 했다. 자신이 터뜨렸던 폭탄이 가라앉고 기어이 고요해질 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두 눈의 깜빡임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언제 소리가 들렸었는지, 언제 눈물이 흘렀었는지……. 그저 걷는 걸음에 잠시 올라왔던 카펫의 먼지가 가라앉는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열심히 터놓았던 제 마음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다 털어놓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위로 먼지조차 일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까 잠깐 보였던 짜증조차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그는 그녀가 내내 보아 왔던 얼음 같은 카일러로 돌아가 있었다.
심장에서 쩡 하는 소리가 났다. 얼어붙은 덩어리에 금이 가 버리듯이.
“마음이라고 하셨던 것에서…… 저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에 대한 마음이 없었다니……. 내 심장이 뛰는 것은 오로지 그대였고, 항상 먼발치에서나마 보려고 그대의 입궁 소식에 열 일을 다 제치고 본궁으로 달려가기도 수차례였다. 이런…… 이런 마음을 심지어 부정까지 하려는 것이냐.”
억울함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울컥함이 섞여 나왔다. 하지만 이를 내려다보는 카일러는 계속해서 굳은 얼굴이었다.
“그럼 그 순간순간에서 저를 위해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뭐?”
카일러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힌 입술이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핑계를 대겠지. 자기는 황후라는 족쇄에 묶여 있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노라고.
“사샤는…… 저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었습니다. 얼음장 같던 제 옆에서 든든하게 자리를 채워 주었습니다. 저를 위해 웃어 주었고, 그리고…… 마물의 습성을 파악하겠다며 함께 데려간 숲에서…… 긴장과 공포를 숨기고 웃으며 저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그에게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묵묵히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차곡차곡 잘 키워 그에게 마음을 전달하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까지 전부 이해해 주었다.
“그건…… 내게도 기회가 있었다면 그대로 했을 것이다. 그 여자가 했던 일을 내가 왜 못 해! 나도 그대의 곁을 굳건하게 지켰을 것이고, 마물은…… 그래, 마물이 뭐가 대수겠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그대로 사샤에게 대입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해 주고 싶었던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 리디안은 돌아보지 않는 여인의 뒤를 꾸준히 지키면서, 다가올 줄 모르는 그 마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황후께 점심시간을 오롯이 할애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고, 힘든 마음을 품은 여인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오랜 친우에게 강제 결혼을 감행하게 했습니다.”
결국 카일러는 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미디에나는 그가 리디안의 이름을 꺼낼 때만 해도 살짝 뜨끔했을 뿐 무슨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얼굴은 굳어 가고 있었다.
리디안이 그토록 마음을 쏟아 온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황제……께서…….”
“모른다고 하면 정말로 폐하가 싫어질 것 같으니, 그런 말은 함부로 꺼내지 마십시오.”
카일러는 얼음을 깨는 망치를 든 채로 미디에나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은 심장을 깨 없애 버리려는 움직임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얼려 버렸던 가슴을 부숴 주려는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