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래도 마물을 미끼로 자신을 꿰어 낼까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제 배 아픈 건 아니었어도 피가 이어진 딸일 텐데……. 그것도 자신의 딸을 보내어 자신을 부른 거라면 마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 뒤엔 안타깝지만 모두를 위해 희생해 줘, 라든지 넌 저주받은 아이야! 하고 버럭 하든지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들이 상상이 되긴 했지만, 아무튼 저도 얻고 싶은 정보가 있으니 엘리나를 따라 나왔던 것이었는데…….
“원래 딸에게 이렇게 애정 따위 없어도 되는 건가.”
애초에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 때문에 그간 해 왔단 상상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옆에 마물이 나타났든 말든 생각에 잠겨 있던 사샤는 푹, 한숨을 내쉬어 버리고 말았다. 사박, 마물의 발이 또 이쪽을 향했다.
사냥감을 앞에 둔 채 덮칠 타이밍을 노려 숨을 죽이는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얼핏 흘깃거린 그 마물은 크기가 작았으며 그녀를 경계하지도 않고 발견한 게 놀라운 듯 주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색이…… 사샤에게 느껴졌다.
그것은 희한한 느낌이었다. 처음 카일러를 대할 때와 같이 무서운 존재구나 하는 마음은 들었지만 당장에 죽을 듯한 긴장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샤는 그 느낌을 믿고 천천히 몸을 돌려 제게 다가오고 있는 마물과 마주 보았다. 이전 것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몸집이 조금 작은 것과 갈색빛이 전혀 없는 회색의 몸체를 가졌다는 것 정도였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음…… 안녕, 난 사샤라고 해.”
사샤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보았다. 마치 외국어 책 1챕터를 열어 놓은 듯한 대화체에 스스로 실소가 나올 것 같아서 사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마물을 눈앞에 두고도 죽을 듯한 긴장이나 공포는 들지 않았고, 그 앞에서 외국어 책 의 첫 문장을 읊듯 질문을 던지고도 실소가 나오다니.
심지어 그녀뿐 아니라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눈앞에 있고 이상한 말이나 건네고 있는데도 고개를 까딱여 가며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키이-!
까딱까딱 고개를 움직이며 마물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것을 짐승의 포효 같은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자는 소리인 듯이 사샤에게 조용히 건너왔다.
“난 네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어. 내 말은…… 알아듣겠어?”
그녀에게는 느낌만 전해질 뿐 정확하게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 제가 멈추라고 외친 말에 마물이 진짜 공격을 멈췄던 걸 보면 제 말을 알아듣는 것도 같았지만, 그 정도면 그냥 외치는 말의 느낌만으로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고…….
키이, 키이-!
마물을 낮게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상에…….”
사샤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도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을 도대체 왜 여기서 살지도 않던, 이런 힘이나 존재가 전혀 없던 곳에서 살던 내가 하고 있는 걸까.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키익.
마물이 소리를 내자 생각에 잠겨 있던 사샤가 눈을 들었다.
“나도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 한 채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설마 정말…… 노리는 것은 내 목숨이었을까.
마물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샤도 그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움직여 보자 가파른 절벽들이 눈앞에 솟아 있었다. 들어올 때만 해도 몰랐는데, 이곳이 숲과 산맥의 경계인 것 같았다.
“저기가…… 산맥이니?”
키익.
말하는 족족 옆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오니까 쿡 웃음이 났다.
숲으로 가자고 해 놓고 왜 일반적인 숲의 입구가 아니라 이곳에 왔나 했다. 실제로 목적은 숲이 아니라 산맥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구에서 엘리나가 먼저 돌아간 이유는 설명이 되지만 날 부른 목적이라는 게…… 결국 내 목숨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기어이 날 죽이겠다는 건가.”
지난번 카일러와 함께 우할린 숲에서 마물과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때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숲으로 가자는 엘리나의 말을 들었을 때도 반항 없이 따라 나왔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솔직히 이베른 후작이 보고자 한다는 말에 혹한 게 제일 컸지만.
누가 됐든 간에 자신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걸 굳이 숲에서 하겠다면, 기꺼이 응해 주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그다음이 어떻게 되든, 그들이 제일 위협이라고 생각할 마물이 그녀에겐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그냥 버릴 생각으로 불렀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소득이 없네…….”
키익키익킥—
그때 마물이 그녀에게로 한 발 더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야 뭔가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 이젠 말을 걸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해 버리는 것이 재밌는 부분이었다.
키익-!
자꾸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 듯한 마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고개를 분주하게 마구 움직이는 것 같아서 한참을 보고 있었더니 점점 그 움직임의 일관성이 보였다.
“설마…… 나더러 산맥으로 가자고?”
키익!
마물이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거 맞겠지?
“있지, 저기 가면 너 같은 마물들이 잔뜩 있을 텐데, 나더러 거기를 가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마물이 더욱 크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생물에게서는 부정적인 반응이라든지 섬뜩한 기운이라든지 그런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 어린 개체의 천진난만한 느낌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린 사샤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카일러가…… 걱정할 텐데.
우할린 숲으로 함께 가서도 자신을 데리고 다시 나오려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제 정체를 확인할 수 없어지자 막막해하던 그의 반응도.
담담하게 대처하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답답해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마물만 없어지면 카일러도 엄청 편안해질 테고.
“나, 집에 돌려보내 줄 거지?”
키익!
마물은 이제 저게 대답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걸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지으려니 마물이 뒤뚱뒤뚱 몸을 움직여 사샤를 등지고 섰다.
설마…….
“나 여기 타라고?”
어이가 없는 그 움직임에 실소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마물은 진지하게 또 키익, 하고 울었다. 정말이지…… 내가 정말 살다살다 마물 등에 업히기까지…….
사샤는 웃음이 새는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그 마물의 등 뒤로 다가갔다. 슬쩍 그 등 위로 올라타자 마물이 스윽 머리 쪽을 숙이더니 날개를 쭉 양옆으로 펼쳤다.
“와, 와아…….”
그리고 두 다리로 땅을 박차더니 날개를 펄럭 크게 휘둘렀다.
“꺄악!”
마물이 쏟아져 내려오듯이 착지하던 것이 생각났다. 착륙만큼 엄청난 파워의 이륙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저 가파른 절벽 위로 어떻게 올라갔던 것일까 잠깐 스쳤던 궁금증은 이 마물의 등 위에서 순식간에 해결돼 버리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볼 담력은 없었다. 사샤는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마물의 날갯죽지를 있는 힘껏 붙들었다.
키이이익!
공중에서 포효하는 마물의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데도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으아, 이러다가 손가락 부러질 것 같아!
사샤는 혼이 빠질 듯한 속도와 높이 거기다가 소리까지 터져 나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파란 하늘을 날고 있을 터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땅으로 귀환하기를 바라며 손에 더더욱 힘을 주고 눈도 질끈 감아 버렸다.
*
리디안과의 만남이 이어졌지만 소득은 없었다. 마법사는 뺀질거리는 걸 멈추지를 못해 결국 카일러가 검을 들게 만들었다.
다행히 그가 이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검집째로 들었지만 마법사를 제압하기엔 충분했다.
얻을 것이 더 없겠다는 판단에 그는 마탑으로 돌려보낸 후 리디안이 그에게 따로 사과를 했을 정도였다.
“내 눈에 띌 정도군. 그대가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
사샤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카일러는 요즘 초조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기 반, 사샤를 지키겠다는 마음 반으로 마물 토벌을 외쳤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샤의 행보가 마물 출몰에 연관이 있다는 것, 심지어 그녀가 마물과의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혹시 그런 그녀의 능력 탓에…… 자신처럼 무언가 얽매이지는 않을지…….
리디안이 자신을 쥐고 흔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귀 때문에 그의 삶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답을 가져다주지.”
리디안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초조하게 구는지도 알고 있으며…… 카일러의 마음을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일러 또한 그의 마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 가득한 리디안에게 허리를 숙였다.
“얼른 가 봐야겠습니다. 또…… 오겠습니다.”
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빨리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카일러는 리디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뒤돌아 알현실을 나갔다.
“…….”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서 있는 미디에나와 떡하니 마주쳐 버렸다.